[칭의와 성화? 제발! 한국교회 vs 헤르만 바빙크]

칭의와 성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을 때 한국교회는 믿음과 행위를 대립시키고 서로 싸움질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벌어지는 양상은 좀 다릅니다. 예전에는 무율법주의와 율법주의가 판을 벌였다면, 오늘날은 무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가 판을 벌리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위를 모호하게 섞어버리는 것입니다. 칭의에 성화를 뒤섞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전에 그릇되게 칭의만을 강조하는 쪽에서는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으로, 그저 천국가는 티켓 하나 확보하는 것 정도의 싸디 싼 복음으로 만들었는데, 최근 이것에 대해 맞짱뜨기 위해 등장한 신율법주의는 인간의 행위와 책임있는 삶을 강조한 나머지 믿음에다 행위를 섞는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래저래 우리 구원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는 이쪽 저쪽에서 별 거 아닌 것으로 여김을 받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무율법주의와 신율법주의에 대하여 바빙크는 노, 노우!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칭의뿐 아니라 성화에도 결정적인, 아니 전부라고 말합니다. 칭의도 성화도, 모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 그분의 은덕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칭의와 성화에 대해 바빙크가 뭐라고 말하는지, 한 번 들어보시죠. ^^

헤르만 바빙크는 칭의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칭의에서는 우리가, 우리 바깥에 있고 에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근거로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 해방되었음이 선언되며,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 의가 우리의 것으로 간주되며 또한 우리 편에서 믿음으로 그것을 받는다. 그러나 성화에서는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이 지극히 분명하게 성령을 통하여 우리 속에 부어지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우리 속에 부어지는 은혜를 거론할 때에, 우리는 그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다만, 이 은혜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선포되는 근거가 되는 그 의의 일부로 본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칭의와 성화가, 죄책으로부터의 해방과 죄의 오염의 제거가, 서로 혼동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그 의의 완전함이 제거될 것이고, 따라서 신자의 영혼은 위로와 확신을 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무조건 예수믿으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한국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반대합니다. 일종의 복음 세일즈죠. 정작은 성공과 번영을 강조하고 예수 믿는 것은 '저 천국'가는 기차티켓으로 확보하려는 한국교회. 예수믿는 것은 이 땅에서의 공의와 형평, 그리고 인애를 행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사랑으로 역사하는 참된 믿음>에 대해 잘 말하지 않고 있어요. 칭의론 자체가 왜곡되어 있다 이겁니다. 진정한 의미의 복음을 바르게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 왜곡된 칭의론을 두고 또 다른 신율주의적 언약론으로 칭의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에요. 허수아비 논쟁인 거죠. 만약 진정한 의미에서 칭의를 이해한다면, 정말 개혁자들이 말한 복음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들의 구원론을 바르게 이해한다면 믿음과 행위가 따로 놀고 칭의와 성화가 싸움하게 할까요?

그런 차제에 등장한 그릇된 신율법주의적 칭의론도 저희는 경계합니다. 율법적 행위를 강조한다고 해서, 삶을 강조한다고 해서 다는 아닌 거죠. 중요한 것은 우리의 율법적 순종을 언약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아 최종적 칭의의 근거로 삼고, 그 결과 그리스도의 의를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심각한 오류니까요. 우리의 유일한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전가를 배제하는 것은 정말이지 두려운 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하나의 실체, 곧 황금사슬임을 못보니까 그래요. 칭의와 성화 등, 구원의 서정을 논리적으로 구분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사건'인 거 거든요. 거듭난 자에게는 참된 믿음의 고백 뿐만 아니라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귀결되니까요. 이것은 모두가 삼위 하나님의 창세 전 택하심에 기초되었고 그리스도의 십가가의 공로의 효력으로 나타나며 오늘도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의 결과이기 때문인 거죠. 삼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라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 가운데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성화에 대해 바빙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위하여 성취하신 이 성화는 우리의 바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정으로 누리는 것이다. ... 우리에게 부어지는 바 은혜라는 것이 실제로 있으며, 우리를 위하시는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우리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도 있으며, 의의 상태로 옮겨지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새롭게 되는 것도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신분만이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인 상태의 변화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칭의와 성화의 모든 은덕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아야겠습니다. 칭의도 성화도 하나님의 큰 일인 거죠. 결국 우리가 자랑할 바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베푸심과 구원의 유일한 공로이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오늘도 고백할 뿐이에요. ^^::

출처: 개혁주의 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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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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