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구원론에 관한 소고(小考)

- 총신원보 주최 제1회 논문공모대회 최우수상 수상작

Ⅰ. 연구의 필요성

오늘날 한국 교회의 현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많은 문제들의 궁극적 원인은 결국 강단의 문제로 귀결되고, 이는 곧 설교의 문제요, 한국 교회 내에 팽배해 있는 교리상의 문제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의 이신칭의 교리의 재발견으로 개혁 교회는 구원론에 있어서 이신칭의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스코필드 주석의 영향과 샌디먼파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신앙지상주의(Easy Believism)가 만연되게 되었고, 한국 교회도 C.C.C. 선교 단체의 사영리 교리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구원론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고, 그러한 결과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라는 구원론의 개념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잘 알려진 것처럼 종교개혁자 존 칼빈(J. Calvin)은 구원에 있어서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던 존 머레이(J. Murray)교수는 '확정적 성화' 교리를 통하여 성화가 구원론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역설하였다. 교회사를 통하여 보더라도 청교도들이나 설교의 황태자 찰스 스펄전(C. H. Spurgeon)이나 지난 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등의 설교자들의 설교에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바로 회심의 문제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 소논문을 통하여 한국 교회에서 재고의 작업 없이 일반화되고 있는 구원론의 문제를 역사적 개혁주의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의 구원의 교리에 대한 평가 작업을 시도하려고 한다. 성경에서 명백히 증거하고 있는 가시적인 유형 교회 내의 알곡과 가라지 문제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가 본 논문을 통하여 작은 문제 제기라고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Ⅱ. 역사적 개혁주의 구원론

'그리스도인'을 두 개의 그룹이나 또는 등급으로 구분 짓는 것이 비성경적임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로서는 찰스 핫지(C. Hodge), 제임스 보이스(J. M. Boice), 로버트 답니(R. Dabney), 존 번연(J. Bunyan),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689년의 침례교도 신앙고백, 남침례교 신앙 선언문등에서 나타나 있다.


조지 휫필드(G. Whitefield)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찰스 스펄전에게 극찬을 받았던 경건한 주석가 매튜 헨리(M. Henry)는 그의 마태복음 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들어있는 모든 은혜는 우리 주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덕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의 구주로서 그분으로부터 받을 혜택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찰스 스펄전은 그의 학생들에게 이런 경고를 했다. '만일 공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안다고 공언하면서 그 뜻을 전혀 따를 의사가 없다면 그의 주제넘은 말을 그냥 받아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을 확지시키는 것은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사람이 우상들에게 붙잡혀 있고 아직도 마음이 죄를 사랑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를 단순히 구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 순간에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은 복음을 확장시키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만약 그렇게 복음을 전한다면 나는 거짓말쟁이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자며,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의 색욕거리로 만드는 것입니다.'


구프린스턴(The Old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의 탁월한 조직 신학자였던 A.A.핫지(Hodge)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만약 그리스도를 성화를 위한 분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칭의를 위한 분으로도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죄인이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거룩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죄로부터 구원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나의 죄들 속에서 머물면서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나의 죄들 속에서 머물면서 구원되기를 원합니다." "저를 지금 성화시키지 마십시오. 그러나 지금 저를 의롭게 해주십시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받아 주시겠습니까? 당신이 혈액 순환과 공기의 흡입을 분리시킬 수 없듯이 칭의를 성화와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호흡과 혈액의 순환은 서로 다른 것이지만 어느 한쪽이 빠지면 안 됩니다. 이 두 가지 활동은 동시적이며 하나의 생명체를 이끌어 갑니다. 마찬가지로 당신도 칭의와 성화를 다 같이 가져야 합니다. 이 둘은 함께 공전하면서 하나의 삶을 이룹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성화가 없는 칭의만을 위해 영접하려고 시도한다면 실패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성화되지 않은 것처럼 의롭게 되지도 않습니다.'


스펄전(C. H. Spurgeon)은 그의 설교에서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의 의미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그것은 사실상 구원의 결과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이 아니라, 우리의 나쁜 습관, 악한 심성, 더러운 마음, 습관적인 죄악으로부터 구출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조나단 에드워즈나 청교도들도 이러한 믿기만 하면 구원얻는다는 식의 신앙지상주의(Easy Believism)를 배격했다. 한국 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를 오해한 나머지, 로이드 존스의 설교에서 나타나는 죄의 심각성, 율법의 필요성, 심판의 엄중성을 간과한채, 죄에 뒤따르는 건전한 죄의식을 영적 우울 증상으로 매도하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강조하는 사람을 행위론자(신자의 행위로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는 사람)와 알미니안(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교리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통탈할 노릇이다. 아더 핑크(A.W. Pink)는 회개 없는 복음은 복음을 모독하는 행위라고 경고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의 에베소서 설교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길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를 떼어내는 것처럼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 같이 성경을 완전하게 오해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구원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수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구원은 언제나 거룩이라는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뒤에 거룩하여지기로 결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두 문제를 비논리적으로 구분하고 떼어놓는 것처럼 비성경적이고 위험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거룩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룩에서 시작이 되고 거룩에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거룩은 구원의 시작이자 끝인 것입니다. 구원의 전체 과정은 우리들을 그리로 인도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데로 우리들을 인도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언제나 거룩으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을 설교하는 것이 복음전도의 진수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복음전도에 관하여 아주 다른 개념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반대의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전도에 있어서 전도자는 거룩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려는"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음에야 그들로 하여금 거룩하게 인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룩입니다. 복음전도의 전체적인 목적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에게 죄가 그들에게 어떤 일을 하였으며, 어째서 그들이 현재 이러한 상태에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어째서인가 하는 것을 말하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행복하다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빛이시오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신"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룩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요점, 곧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과 거룩하게 되는 성화를 분리하여 놓는 것은 제가 볼 때는 성경의 진수와 같은 교훈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룩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일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택을 받고 구원을 받는 것은 바로 그러한 목적을 향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거룩을 우리들이 가입하려고 들어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일은 전적으로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거룩하지 아니하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와 성화와 구속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선택하기로 결심할 수 없고, 그리스도의 기업이 될 것을 정하는 우선권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곧 그리스도 전체 안에 있든지, 아니면 "그리스도 밖에" 있든지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거룩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들이 거룩함을 위하여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게 되어야 하며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놀라운 진술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의 이러한 진술에 비추어서 볼 때에 필연적으로 진리입니다. 바울에 의하여 우리들이 생각하여야 할 것은 우리들이 거룩의 가능성을 가지고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선택함을 받은 것은 거룩을 실현케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거룩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만들기 위하여 창세 전에 우리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는 우리들을 선택하여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가지신 계획이 바로 그것입니다.

 

거룩의 가능성이 아니라, 거룩의 실현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러한 엄숙한 선언을 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들의 삶에서 어떤 거룩의 표증을 보여주는 사람들은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선택"을 받고 "거룩하게 된다"는 것은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많은 교리를 말하고, 그가 선택을 받았고 예정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고 만족하는 것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에게서 거룩의 요소가 없다면, 그는 선택을 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지적으로는 정통적이면서 사실은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선택을 받은 사람, 그는 선택함을 받아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의 삶에 있어서 거룩한 것이 하나도 나타나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그가 선택함을 받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엄숙한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이 성경의 진술에 비추어서 볼 때에 이러한 것들은 필연적인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존 머레이(John Murray) 교수도 그의 조직신학 선집에서 확정적 성화의 교리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유비에 따라서, 죄 안에 또는 죄에 대하여 산 사람은 죄의 영역 안에서 살며 활동한다-그것은 그의 삶과 활동의 장이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은 더 이상 그 영역에서 살지 않는다. 그것과의 연계는 끊어졌으며, 그는 다른 영역으로 옮겨졌다. 여전히 죄의 영역에 사는 사람들은 가장 심각한 어조로 '나는 그를 찾았으니 그를 발견할 수 없었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결정적인 간격이다. 그것은 신자의 삶에 대한 전 관념이 근거하는 토대이고, 일상적인 죽음의 경험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영역에서도 진정으로, 결정적으로, 참인 간격이요 옮김이다. 죄가 죽음 안에서 또는 죽음으로 지배하는 영역과의 단번에 확정된 바꿀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사도 바울이 이 구절에서 제시하는 대비는 이 변화가 가져오는 결정적인 간격을 부각시키는 데 기여한다. 죽음은 죄 가운데서 죄의 종으로서 봉사하는 것을 뜻한다(롬 6:6, 16, 17, 20절).

 

죄는 우리의 죽을 몸에서 우리를 지배한다(12절). 순종은 죄의 사욕에 드려진다(12절). 우리는 우리의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며 종으로서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다(13, 19절). 우리는 의에 대해서 자유롭다(20절). 죄는 우리를 주관하고 우리는 법 아래 있다(14절). 죄에 대하여 죽음은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의 몸이 멸하여 우리가 다시는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6절). 우리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다(7절).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이다(10, 11절). 죄는 더 이상 우리의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며 우리를 주관하지 못한다(12, 14절).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 의의 종이 되고 거룩함에 이른다(13, 19절). 우리는 은혜 안에 있다(14절). 우리는 기독교적 가르침의 모범을 마음으로 순종한다(17절). 그 열매는 거룩함에 이른 것이요 그 마지막은 영생이다(22절). 이러한 대비는 결정적인 변화를 증거한다. 대비를 약화시킬 가능성은 없다. 그것은 삶과 행위의 모든 측면에서 나타난다. 도덕적이고 영적인 삶을 평가하는 모든 척도에 절대적인 차별이 존재한다. 이것은 은혜의 규정들의 지배하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죄의 능력과 죄에의 종사와의 결정적이고 확정적인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Ⅲ. 결론

필자가 짧은 이 소논문을 통하여 말하고자 했던 것이 완전주의(Perpectionism)는 물론 아니다.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와 같이 필자도 완전주의를 거부한다. 지상에 있는 성도중 그 누구도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성화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그러한 문제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거룩하지 않은 사람을, 다시 말하여 회심하지 않은 자연인을 예배당에 출석하고 믿음을 표시하는 것만으로 아무런 검증도 거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인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통하여 한국 교회는 심각한 구원론에 있어서의 혼동을 겪고 있다. 이에 이러한 구원론에 대한 재발견과 새로운 조명이 이루어져서, 조나단 에드워즈(J. Edwards)가 구원에 있어서 성도의 열매를 매우 강조하면서 실제로 자신의 노샘프(Northampton) 목회지에서 그러한 원리를 적용시켰던 것처럼 한국 교회도 이러한 실천적 개혁주의 구원론에 대한 적용이 목회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본 소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참고문헌
어네스트 롸이씽거, 거짓 신자, 이중수 역, 양무리서원, 1993.
존 머레이, 조직신학 선집 Ⅱ, 박문재 역,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1.
마틴 로이드 존스, 에베소서 강해 1권, 서문 강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84.
조엘 비키, 청교도 전도, 김홍만 역, 청교도신앙사, 2002.
마틴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7권, 서문 강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1977.
제프리 윌슨, 뒤틀린 복음, 이중수 역, 양무리서원,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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