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언약교리에 나타난 조직(신학)과 경건의 조화 :

윌리암 퍼킨스(1558-1602)와 죤 프레스톤(1587-1628)"

 

송 영 재 (조직신학, 개혁신학연구원)

 

I. 전체 요약 (Summary)

 

        스탠리 그렌즈(Stanley J. Grenz)와 로져 올슨(Roger E. Olson)은 현대신학의 역사를 하나님의 초월(transcendence)과 내재(immanence)의 긴장이라는 관점에서 해석 하였다.  20세기 신학은 계몽주의 철학의 도래와 함께 깨어졌던 "초월과 내재의 신학적 균형"을 찾아 가고있는 과정중에 있다고 저들은 결론적으로 말하였다.  신학에서 초월과 내재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중요하다.   필자는 영국 개혁주의 언약신학(covenant theology)의 이분법적 해석에 대한 문제를 본 논문에서 새롭게 조명하여 보려고 했다.  

 

        초기 개혁주의 언약신학 안에 스콜라적인 전통과, 성경적인 전통이 있었다는 이른바 이분설(two traditions theory)은 역사적 칼빈주의 신학에 우호적이지 않은 학자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통하는 학설이다.  이 학설에 따르면 전자는 조직신학의 특성인 주제별(loci) 혹은 논리적(logical) 접근을 강조하는 예정론 중심의 대륙신학과 영국 개혁신학에서, 후자는 성경신학의 특성인 구속사적 (heilsgeschichtlich) 혹은 역사적(historical) 접근을 중요시 하는 독일(화란) 개혁신학에서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제네바(Geneva) 신학의 "유언(testament)"에 의거한 은혜일변도의 초월신학이며, 다른 하나는 쥬릭(Zurich)신학의 "언약(covenant)"에 의거한 역사와 인간의 자율성을 무시하지 않는 내재신학 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개혁신학의 언약교리에 대한 "유언적" 접근과 "언약적" 접근의 대립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언약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대립시키는 부당한 신학적 전제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이 낳은 "본체계(phenomena)/ 현상계(noumena)"라는 초월과 내재의 분리가 (이른바 "the post-Newtonian mind") 이와같이 언약신학에 있어서도 유언/언약의 분리해석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역사(구속사)/구조(예정론) 이라는 신학의 총체적인 이분화 현상을 유도 하고 있다는 것이 필자의 관점이다.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초월적인 구원계획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하는 것은 아직도 학자들이 과거의 "역사비평(historical criticism)"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약교리가 주로 주경신학(exegetical theology)의 연구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과거의 추세도 여기에 적지않은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래도 주경신학의 특성상 구원의 역사적이고 내재적인 관점을 초월적인 것보다 더 강하게 하이라이트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언약교리에 대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 "스타일"의 조직신학 (systematic theology)적 방법론이 어디에서부터 체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는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에 대한 답을 영국 개혁신학의 최초의 조직신학자로 평가 받고있는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의 언약신학에서 찾게 되었다.  퍼킨스의 언약신학은 칼빈의 신학에 근거한 것이지만 후자보다 좀더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언약의 적용을 한 것이 다른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언약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해석하고 "구원의 서정"적인 구조안에서 언약과 Decree, Casuistry, Conscience, Sacraments, Faith, Assurance, Law, Preparation 등의 관계성을 풀어 나갔다.  

        이와같은 사실을 배경으로 본 논문이 논증하려고 하는 것을 크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초기 개혁신학의 언약에대한 "조직신학적" 방법론을 밝혀 내려고 하였다.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실제적인 창시자로 알려진 요한 칵세이어스(Johannes Cocceius, 1603-1669)의 "구속사적" 연구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칼빈의 신학을 이어받은 영국의 개혁신학자들이 조직신학적으로 언약을 연구 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언약의 조직신학적 방법론은 네가지로 요약되는데 (1) 언약이 "구원의 서정"적 구조속에서 다루어 졌다는 사실이다.  (2) 언약은 영원한 작정을 역사속에서 집행해 나가는 "작정집행의 방편(the means of the execution of the decree)"으로 정의 되었다는 사실이다.  (3) 언약을 은혜(Grace)와 율법(Law)등 신학적 구원론적 초월과 내재의 연결고리로 사용한 사실이다.   (4) Ramist 의 양단법(dichotomous method)을 사용하여 신학을 faith and duty 로 나누어 정리한 사실이다 (예: 웨스트 민스터 문답서).

 

        이와 함께 조직신학의 특성인 "주제별(loci)"접근과 주경신학의 특성인 "구속사적(heilsgeschichtlich)" 접근은 각각 구원의 구조(redemptive logic)와 구원의 역사(redemptive history)를 구별하는 방법론적(methodological) 구분일뿐 언약의 초월성(영원성과 은혜성)과 내재성(역사성과 조건성)을 분리시키는 신학적(dogmatic) 또는 내용적(substantial) 구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려고 했다.

        구원의 구조(구원론)와 구원의 역사(구속사)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이 전통적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약신학의 "조직성"과 "역사성"의 구분을 "유언"과 "언약"의 구분과 동일시 하여 대립적으로 보는것은 신학과 신학의 방법론을 혼동하는데서 비롯된 발상이다.  

        둘째, 퍼킨스는 "경건주의의 아버지(the father of pietism)"라고 불리울 정도로 그의 신학은 경건에 초점을 맞추었다.  칼빈주의적 예정론자인 경건주의의 창시자로까지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의 경건신학은 곧 언약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음을 필자는 발견 하였다.  그의 경건신학 곧 성화신학 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Casuistry, Sacraments, Assurance of Faith, Law, and Preparation for Regeneration 등에서 강렬하게 표현 된다.  이러한 주제들을 초기 개혁자들보다 더 자세하게 연구하여 구원의 "내재"를 조명하고 경건의 dynamic 을 강조한 그가 "조직신학적" 방법론을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성경적 긴장관계 속에서 유지하려고 했음을 필자는 밝히려고 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혜만이 인간의 책임있는 삶과 역동적인 경건의 dynamic 을 가능케 한다는 것의 퍼킨스 언약신학의 요약이라고 할 수있다.  초월과 내재, 영원성과 역사성, 은혜와 책임이라는 파라독스적인 신학구조는 칼빈이든 불링거이든 개혁주의 언약교리의 기본 전제인데 Federalist 학자들은 칼빈주의자들의 예정론만을 강조하여 그 신학에는 언약적 경건이 없는 것 처럼 결론을 내리었다는 사실에 반론을 제기 하였다.

        셋째, 구원의 구조와 구원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곧 개혁신학 그 자체를 신학적으로 분리시키는 것과 다름없다.  실제로 Calvinist/Federalist 이론은 이러한 분리를 주장하고 있으며, 언약적 구조를 기초로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과 17세기 영국 개혁신학(i.e. 그중에 가장 대표적인 예로 John Preston)이 신학적으로 Calivinist 가 아닌, Federalist 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언약에 대한 접근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언약개념 그 자체가 예정론과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신학적 대립관계에 있음을 의미한다.  이 학설의 모순점은 퍼킨스와 같은 예정론자들이 언약을 중심으로 구원의 구조문제를 다루었다는 것과, 거꾸로 17세기 쌍무적 언약신학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진 죤 프레스톤과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등은 영원한 작정을 전제로하여 언약을 다루었다는 사실이다.  Calvinist/ Federalist 이론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설득력있는 답변을 제시하지 못 하였다.  필자는 저들이 Federalist 로 간주하여 그 전통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고 있는 죤 프레스톤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전무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의 언약신학에 대한 좀더 심도있는 해석을 퍼킨스와의 통일성이라는 관점에서 시도 하였다.

 

 

II. 초월과 내재의 신학적 분리(A Dogmatic Division of Transcendence and Immanence)

 

        1. 언약의 초월과 내재에 대한 두 학설

 

        죤 본로(John von Rohr)는 17세기 영국개혁주의 언약신학에대한 연구결과들을 크게 두갈래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나는 페리 밀러(Perry Miller)의 학설인데 그는 칼빈의 예정신학과 차세대 칼빈주의자들의 언약신학이 질적으로 대립되는 두 개의 다른 신학임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언약신학은 예정신학의 지나친 초월성에 대한 역반응으로 생겨났으며, 후자에서 결핍된 내재성(immanence)을 보완하는 신학이었다는 것이다.  

        그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레오나드 트린테루드(Leonard Trinterud), 윌리암 클레브쉬(William Clebsch), 리차드 그리브스(Richard Greaves), 웨인 베이커(Wayne Baker), 알티 켄들(R.T. Kendall) 등의 학자들이 밀러의 학설을 토대로 영국 개혁주의 언약신학에 대한 비중 있는 연구 논문들을 발표 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칼빈의 "유언(testament)" 신학은 은혜일변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신학 이었던 반면에, 불링거(Bullinger)의 "계약(covenant)" 신학은 쌍무적 책임을 강조한 균형있는 신학으로 평가하였다.  종교개혁 이후 제 2세대 개혁신학은 두 개혁자들을 분깃점으로 칼빈파와 과 불링거파로 나뉘어 결과적으로 "유언신학(Calvinist)"과 "계약신학(Federalist)"이라는 두 개의 융합될 수 없는 독특한 신학으로 발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필자는 이와는 반대되는 입장에서 젠스 몰러(Jens Moller)가 제시한 작정신학과 언약신학의 일체성과 연속성에 대한 학설을 따르고 있다.  그는 개혁주의 언약교리의 본질을 이해함에 있어서 그것이 예정론을 "무디게(blunting)"하거나 "누그러뜨린다 (mitigating)"는 대립논적 관점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약을 영원한 작정(eternal decree)의 역사적 "집행도구(means of execution)"로 이해함으로써 작정과 언약의 신학적 동질성(dogmatic unity)을 강조하였다.  특히 그는 칼빈의 신학은 예정론적 이면서도 경건적 이었다고 지적 하였고, 후기 칼빈주의자들의 언약신학이 칼빈의 신학에 내포된 언약교리의 초월성과 내재성의 균형을 잃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그후 다른이들이 역시 몰러의 학설에 동조하면서 후속 연구논문들을 발표 하였는데 그중 마이클 멕기퍼트(Michael McGiffert), 윌리암 스토버(William Stoever), 죤 본로(John von Rohr)등이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언약신학의 논쟁에 있어서 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것은 두가지였다.  첫째, 그들은 언약을 이해함에 있어서 "공로와 은혜는 본질적으로 또한 절대적으로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언약신학이 철저하게 은혜신학 임을 재천명 한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로, 그들은 언약에서 "인간의 공로를 배제한다는 것은 언약에 참여하는 인간의 자발적 기능(conditionality)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기술하였다.  그들은 언약이 초월성을 전제하면서도 내재적인 관점에서 역사의 유기성과 인간의 자발성(이것은 타락전 행위언약을 가능케 했던 근거가 되기도 하였기 때문에)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는 사실을 개혁주의 인간론(the doctrine of man)의 관점에서 시사 하였다.  

 

        2. 은혜와 공로의 속죄론적 구분

 

        필자는 후자에 속한 학자들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Calvinist/Federalist 학설의 문제는 은혜(grace)와 공로(merit)의 속죄론적 구분과, 은혜(grace)와 조건(condition)의 언약적 구분을 혼동하거나 부정 하는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개혁신학은 속죄론적으로 보면 하나님 주권과 은혜를 절대적으로 주장하는 "유언"신학이다.  그러나 "회심"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거듭난 이성과 의지의 관점에서 보면 개혁신학은 지극히 "언약"적인  것이다.  Calvinist/Federalist 이론은 이 구분을 수용하지 못하는데서 비롯 되었음이 확실하다.  

        이 두가지 구분을 명백하게 하기 위해서 개혁주의 신학은 "창조언약(the covenant of creation)" 또는 "순종의 언약(the covenant of obedience)"이라고도 불리우는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s)"을 구원론의 대전제로 간주한다.  언약신학에서 많은 논란이 되고있는 행위언약(covenant of works)은 실로 개혁주의 속죄론의 "뇌관"에 해당되는 교리이다.  이것은 속죄론에서 공로와 은혜의 질적구분을 명백히 하여줌으로써 "이신칭의"의 신학적 당위성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발성을 전제로 하는 심판의 근거가 되는 교리이다.  

        Calvinist/Federalist 파의 학자들이 "유언신학"을 스콜라 신학으로 치부하고 "유언신학"의 속죄론적 전제인 "행위언약"을 일종의 신학적 금지사항(taboo)으로 규정해 버린것도 이때문이다.  행위언약을 인정함은 곧 "유언신학"의 당위성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속죄론의 관점에서 "유언"을 인정하지 않음은 곧 Sola Gratia 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성향을 놓고 볼 때 필자는 Calvinist/Federalist 의 신학적 의도 그 자체가 심히 의심 스럽기까지 하다.  

        행위언약의 부정은 곧 개혁신학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통찰하고 신정통주의에 사상에 근거한 "Law in the Gospel" 교리에 대항하여 앞장서고 있는 마크 칼버그(Mark Karlberg)는 이른바 Calvin/Calvinist 학설의 신학적인 문제점이 행위언약의 속죄론적 의미를 간과 하는데서 비롯되었다고 지적 하였다.  그는 개혁신학을 "유언신학"과 "언약신학"으로, 또는 "예정론적" 신학과 "성경적" 신학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개혁신학의 핵심 전제가 되는 '행위와 은혜의 구분' 을 충분히 감지하지 못한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못 밖았다.  

        결국 저들은 행위언약에 내포된 은혜와 행위의 속죄론적 대립을 은혜와 책임, 예정과 역사의 대립으로 비약 하였다.  저들이 의미하는 "유언신학(칼빈신학)"에는 언약 당사자들의 쌍무적 책임이 전혀 배제되었다.   개혁주의 안에 칼빈주의 전통은 역사와 인간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무시하는 잔인한(inhumane) 신학으로만 남게 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행위언약"은 속죄론에 있어서 행위와 은혜의 절대적 대립을 의미하는 것 뿐이지 칼빈주의 신학 전체를 "유언신학"으로 규정짖는 비약적인 근거가 되어서는 안된다.  행위언약 교리는 다른 무엇보다 성경적 구원론적 진리이지, 저들이 주장하듯 이중 예정론을 변호하기 위한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공론에서 비롯된 교리가 아니다.  어쨌든 개혁신학의 속죄론과 칭의론(the doctrine of justification)에 있어서 은혜와 행위의 구분은 명백해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인간의 역할이 명백하게 구분 되어져야 한다.  만일 언약적 또는 쌍무적 "협력"이 속죄론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역할의 혼합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개혁신학의 붕괴를 의미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특정신학을 "유언이냐 언약이냐?"으로 규정짖는 것은 그 신학의 속죄론을 규정 짖는 것과 다름 없다.  저들은 칼빈주의 신학을 무자비하고 몰인정한 신학으로 보기 때문에 "유언"이라고 했지만, 거꾸로 칼빈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유언"이 빠진 언약신학은 알미니안 신학으로 전락하게 된다(실제로 그런 성향이 많이 있음을 필자는 본 논문에서 다루었다).  저들은 유언신학에는 인간의 책임이 배제 되었다고 주장 하지만, 그렇다면 거꾸로 유언이 빠진 언약에는 행위가 구원을 결정하게 된다는 사실을 저들이 직시 해야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개혁신학을 유언과 언약으로 나누는 것은 마치 개혁 신학을 칼빈주의와 알미니안 주의로 나누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면 개혁신학은 속죄론의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 은혜에 근거한 "유언신학"이지만, 율법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근거한 "언약신학" 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유언이냐 언약이냐?"는 윌리암 스토버(William Stoever)의 말대로 "post-Newtonian mind"에서 나온 "위조된 이분설(false dichotomy)"이다.

        그러나 필자는 실제로 저들이 유언신학이라고 규정한 칼빈신학과 그의 영국 후예들은 인간의 자발성과 책임을 전제로한 강렬한 경건신학을 산출해 내었다는 사실을 저들의 모델(construct) 속에서 설명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논증 하였다.  이것은 또한 저들이 언약신학이라고 규정한 츄리히 파의 불링거 신학에도 칼빈신학과 버금가는 하나님의 작정과 은혜가 지배적 이라는 다른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놓고 볼 때 Calvinist/Federalist 이론이 얼마나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3. 대안: 방법론적 구분

 

        결국 Calvinist/Federalist 의 충돌은 개혁신학을 이분화 시키는 신학적 충돌을 피할수 없다.  필자는 이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구조/역사"라는 방법론적 구분을 제시 하였다.  Bullinger-Cocceius 전통은 구속사적 렌즈를 통해서 언약의 점진적 발전과정에 초점을 맞춘 방법론이며, Calvin-Perkins 전통은 구원의 구조적인 렌즈를 통해서 언약의 체계에 초점을 맞춘 방법이다.  구원의 구조를 설명하는 것과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은 분명이 다른 시각이다.  

        예를 들면 로마서와 히브리서는 같은 언약교리를 접근함에 있어서 "구조/역사"라는 방법론적 차이점을 갖으며 여기에서 생겨나는 긴장관계는 성경계시의 원래적 의도임을 알 수 있다.  이 책들이 두 개의 서로 매우다른 독특한 관점에서 언약을 설명하고 있음은 신학적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쉽게 파악할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모든 구속행위들(redemptive acts)을 논리적 구조(logical structure)안에서 설명하고 있는 반면 히브리서는 그것들을 역사적 구조(historical structure)안에서 설명하고 있다.  

        똑같은 신학적 주제를 놓고 한책은 논리적 통일성을 전제로하여 조직적인 접근을 하고 있고, 다른책은 역사적 점진성을 전제로하여 구속사적 접근을 하고 있다.  성경의 저자들은 이 두가지 방법론의 대립적 관계를 표명한적이 없다.  이 두방법론의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 유추된 언약적 이해가 하나의 획일적인 관점에서 나온 것 보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의 교리를 더욱 풍성하게 그리고 다각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필립 휴즈(Philip Hughes)는 히브리서에 나타난 "구속사"가 "성경의 조직성(logic of Scripture)"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바로 지적 하였다.  이것은 성경의 조직성과 역사성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말이며, 바꾸어 말하면 성경의 신학적 구조 역시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만 바로 이해 되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칼빈과 불링거, 그리고 퍼킨스와 칵세이어스 사이에 신학적 충돌을 피하면서 그들의 언약신학속에 나타나 있는 분명한 접근방식의 차이점을 인정하려고 하였다.  두가지 방법론은 상호보완적이지 상충대립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하였다.  

 

        두 방법론을 신학적으로 상충대립 시킨 사례는 물론 오늘날의 Calvinist/ Federalist 학설외에도 역사적으로  빈번 하였다.  Gabriel Biel 에서 시작된 로마 천주교의 언약 신학("If you do what is in you, God will not deny grace.")과 Calvin 과 Bullinger 에서 시작된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속죄론에서 "주입된 은혜"와 "전가된 은혜"를 구분하지 않으면 실제적으로 구별하기가 불가능하다.  둘다 언약의 관점에서 인간의 책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천주교 신학의 배경을 갖은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구분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약교리에 대하여 처음부터 부정적이었다.  그가 언약교리가 Sola Fide 를 위협한다고 생각 한것도 이때문이다.

 

        스콜라적 초 칼빈주의(Hyper-Calivinism)는 칼빈의 예정론을 인간의지에 대립 시켰으며, 거꾸로 알미니우스-에미로우(Amyraut) 전통은 불링거의 언약을 하나님의 예정에 대립 시켰다.  오늘날에 거론되고 있는 세대주의 신학, 신정통 신학,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 Nomism) 등은 형태와 유형은 다르지만 사실상 전통적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볼때 두 언약적 방법론을 신학적으로 상충대립 시켰을 때 생기는 자연 스러운 결과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신학의 심장부는 역시 구원론인데 구원론중에서도 속죄론(칭의론)과 성화론의 바른 관계 정립은 개혁주의 신학에 있어서 양보나 타협될 수 없는 중차대한 문제이다.  세대주의, 신정통, 언약적 신율주의 신학은 모두 속죄론과 성화론에 있어서, 또는 은혜와 율법에 있어서 전통적 개혁신학과 길을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로 Calvinist/Federalist 의 문제가 실제적으로 오늘날 심각하게 재현 되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역사적 개혁신학의 구원론은 하나님의 작정(decree)과 인간의 결정(decision)을 동시적으로 강조 하면서도, 인간의 결정을 절대로 "공로"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았다.  쌍무적 언약의 책임을 인정 하면서도 속죄론적 "공로"는 철저히 배제 시켰다.  따라서 필자는 "유언과 계약"이라는 신학적 대립을 "조직과 역사"라는 방법론적 대립과 차별화 하지 않고 그대로 연결하여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양극화 시키는 학설의 비약과 무모함을 본 논문에서 밝히려고 했다.  

 

        제네바와 영국 개혁신학의 systematic(예정론적) 언약신학이라고 해서 구원의 역사성이나 인간의 자발성 및 윤리와 경건을 배제하고 있다거나, 반대로 독일과 화란에서 형성된 redemptive historical(구속사적) 언약신학이라고 해서 구원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외에 다른 어떤것에 근거 하고 있다고 보는 시각은 신학의 문제와 방법론의 문제를 혼동 한 것으로 보인다.  언약 학자들이 주장하는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다양성(diversity)은 속죄론적인 유언과 언약의 개념으로 분리하기 보다는 (soteriological distinction), 방법론적인 구원의 구조와 역사의 개념으로 구분함이 (methodological distinction) 옳다고 생각한다.

        이분설은 거부하되 분명한 방법론적 다양성과 차이점이 있음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유익하다.  한가지 방법론(구원론 아니면 구속사)의 획일적이고 일원론적인 해석이나 적용은 유기적인 계시를 기계화 시키거나, 거꾸로 지나치게 역사화(historicize) 시키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언약의 내용적 동질성(unity)은 지키되, 역사적 획일성(uniformity)을 고집해서는 안될 것이며, 언약의 다양성(diversity)은 인정하되 그것의 불통일(disunity)은 거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관계의 구조는 불변하지만 그 관계의 역사적 과정은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III. 요한 칵세이어스와 구속사적 방법론

 

        Calvinist/Federalist 학설에 의하면 칵세이어스는 불링거 계열의 언약신학, 즉, Federalist 신학을 완성한 인물이다.  저들 서클에서는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절정(zenith)" 이라고도 불리우는 화란 신학자 요한 칵세이어스(Johannes Cocceius, 1603-1669)는 개혁전통 안에서 언약에 대한 방대한 연구를 시도하였던 최초의 학자로써(그 전에 시도 되었던 모든 언약에 관한 내용들을 종합적으로 집필 했다는 의미에서) 개혁주의 언약신학 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성경의 언약을 연대기적으로(chronologically) 연구하여 후대 학자들에게 언약에 대한 성경신학적 모델을 제시 하였다.

        개혁신학 전통 안에서 칵세이어스와 그의 성경신학적 혹은 구속사적 언약신학이 차지하는 위치는 기념비적인 것이 사실이다.  그의 구속사적 방법론은 언약의 내재성(immanence)을 강조한 것으로써, 구속사를 통해 인간과 동행하며 인간을 구원하시는 "역사적" 하나님을 묘사한 것이 특징 이었다.  구속사는 곧 언약사라고 할정도로 언약은 그의 신학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하는데 그 이유는 언약이 역사안에서 초월적인 하나님과 내재적인 인간을 연결해 주는 구원론적 매체가 되기 때문이다.  

        언약의 역사성에 대한 칵세이어스의 집착은 대단한 것 으로써 그는 헤겔의 역사철학과 19세기 "역사주의(historicism)"의 아버지로 불리우기도 한다.  (헤겔의 역사철학이 "내재철학"의 절정이라고 불리운 것 역시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그가 시도한 구속사적 접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사를 점진적 이면서도 시대적 구분에 의거한 "세대적(dispensational)" 관점에서 해석한 것 이었다.

        언약교리의 구원론적 방법론이 역사성과 내재성을 중요시 하는 칵세이어스 스타일의 구속사적 언약신학에서 배울수 있다는 사실에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방법론은 언약관계에서 인간의 자발성이나 결정권을 확대 시킴으로 영성신학이나 경건신학을 발전시킬수 있는 가능성을 그렇지 않은 신학보다 더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으로 제시할수 있다.  스콜라적 칼빈신학의 "조직적" 방법론이 구원의 초역사적 뉘앙스들을 지나치게 확대 시키어 언약의 현실성을 약화 시키었음은 모든 개혁신학자들이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바 이기도 하다.

        언약적 신조로 알려져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The Westminster Confession)의 언약교리 조차도 인간의 자발성을 보다는 하나님의 초월성에 근거하여 구원의 기계적 성격을 강조한 이른바 "대륙 주의설(continental voluntarism)"의 영향을 받았다고 지적 받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칼빈주의 언약신학이 구속사의 시대적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역시 획일적으로 구원론적이었다.  이러한면에서 좀더 두드러지고 과감한 해석을 보여준 것은 이른바 비정통파들의 신학과 이론이었다."  요한 칵세이어스(Cocceius)와 스콜라적 칼빈주의 신학자 기스베루트스 보시어스(Gisbertus Voetius, 1589-1676)의 논쟁은 바로 이 두신학적 방법론의 차이점을 나타내 주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 논쟁은 곧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대립이었다고 말할수 있는데, 후에 조직신학적 방법론에 반기를 든 칵세이어스파의 과격론자 들은 극단적인 "세대적" 방법론을 주장하며 구속사의 세대적인 차이를 간과한 기독론적 "이신칭의" 교리의 획일적인 적용을 부정 하였다.  앞서 지적한 대로 칵세이어스의 구속사적 방법론이 과격한 세대적인 해석으로 빠지면서 신학적으로 개혁주의 "이신칭의" 교리와 입장을 달리한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칵세이어스는 구약에서는 죄의 간과 (παρεσιs, overlooking) 만이 있었을 뿐이며, 죄를 말끔히 제거하는 완전한 속죄는 아니었다고 가르쳤고, 신약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과 유언이 완성된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해 이 완전한 속죄(αφεσιs, forgiveness of sin)가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구약의 "죄의 간과"와 신약의 "죄의 속죄"가 구약적 칭의(Old Testament justification)와 신약적 칭의(New Testament justification)라는 개념들로 비약 되었다는 데 있다.  이것은 명백히 정통 개혁신학의 속죄론에서 벗어 난것이며 결국 신구약을 분리시키는 해석학적 문제와, 신구약의 구원의 통일성을 붕괴하는 구원론적 문제와, Sola Fide 를 위협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물론 헤르만 윗치어스(Herman Witsius) 와 같은 학자는 기본적으로 칵세이어스의 방법론을 선호 하면서도 두 신학의 차이점이 관점의 차이일뿐 질적 혹은 내용적인 차이가 아님을 지적 하였다.  언약의 구속사적인 방법론이 개혁신학에 기여한바는 점진적 계시의 시대적인 다양성에 촛점을 맞추어 언약의 유기성을 확대 시키고 역사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속행위를 실감나게 할뿐아니라 인간역사에 깊이 파고드는 하나님을 묘사함으로써 실천적인 신앙과 경건의 "내재성"을 가능케한 것 이라고 할수있다.  개혁신학이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초역사적인, 이른바 "초 칼빈주의(Hyper-Calvinism)"의 오류를 피할수 있었던 것은 칵세이서가 시도한 것과 같은 구속사적 방법론이 초월과 내재의 균형을 맞추어 주었기 때문 이라고도 말할수 있다.

        이와같은 사실을 근거로 하여 칵세이어스의 Federalist 신학이야 말로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대변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Calvinist 신학이 형이상학적인 교리들과 "명제적 정통주의(propositional orthodoxy)"에 집착하여 언약의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요소들을 효과적으로 배제 했다는 이론을 펼친다.  

        그들은 "칼빈주의"의 이른바 추론적 예정론(deductive predestinarianism)에대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면서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은 하나님의 구원행위의 역사성과 인격성, 그리고 인간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비성경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교리라고 비난한다.  "신학을 예정이라는 영원한 작정으로부터 추리함으로써 스콜라적 개혁신학은 하나님의 섭리를 엄격하고 기계적인 것으로 전락시키었고, 그로인해 역사나 구원 그리고 인간의 책임같은 것 들은 거의 무의미해져 버리고 말았다."  이들중 어떤이들은 아예 칼빈주의 언약신학을 중세 유명론(Scotist Nominalism)과 동일시 하여 언약신학 그 자체를 스콜라신학 으로 몰아치는 경우도 있다.  칼빈주의 에서 언약을 다루고 있지만 그것 마저도 중세 유명론의 "조약(pactum)"교리에서 파생된 것 으로써 스콜라적 형이상학에 근거 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칼빈주의 신학에서 형이상학이 성경보다, 예정론이 구속사보다 앞선다는 비난에 대하여 리챠드 뮬러(Richard Muller)는 이렇게 설명한다: "정통 개혁주의의 태동은 대략 네가지로 설명 될 수있다 (신학적 변증, 교육적 필요, 체계적 설명, 논리적 깊이와 일관성).  여기에서 한가지 확실하게 배제된 것은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핵심교리(central dogma)에 대한 집착이다."  여기서 "핵심교리"는 물론 예정론을 의미한다.  

        그는 2세대 칼빈주의 신학자들이 더욱 조직적인 방법으로 초기 개혁자들의 신학을 체계화 시켜나간 것은 사실이나, 이러한 과정속에서 저들이 중세 스콜라신학의 방법론을 빌려 사용 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문제시 되어서는 안될것이라고 말하였다.  다시말해서 칼빈주의 신학이 스콜라적 방법론을 빌려 사용했기 때문에 두신학이 동일하다는 결론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비약은 유감스럽게도 매우 일반화 되어있다: "스콜라적 방법론은 성경적 진리들을 객관적인 사색의 대상으로 다루지만, 성경적 언약신학은 신학적 사고를 믿음의 범주안에 둠으로써 매우 실천적이고 인격적인 성향을 갖는다."  

        한 마디로 "칼빈주의"의 구조적 방법론은 경건에 대하여 무지한 사변적 신학이요, 구속사적 언약신학 이야말로 개혁주의 경건신학(theology of piety)을 대표하는 실천적 신학 이라는 이론이다.  구속사적 언약신학의 대부로 알려진 화란의 요한 칵세이어스가 개혁신학과 독일 루터신학을 포함하여 저들 사이에서 "경건주의 신학의 아버지"로  불리우는것도 이러한 반칼빈주의 정서에서 나온것이라고 볼 수 있다.  챨스 멕코이(Charles McCoy)는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신학의 대표적 학자인 릿츨(Ritschl)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칵세이어스의 신학과 당시 스콜라적 방법론을 택하였던 칼빈주의 신학을 풍자적으로 비교하고 있다: "칼빈주의자이면서 또한 성경신학자이었던 그의 최대 관심사는 바로 기독교가 교리만이 아닌 삶 그 자체라는 것 이었다."

        여기서 멕코이가 칼빈주의적 언약신학과 칵세이어스적 언약신학을 "교리와 삶"으로 대조한 것은 지금까지 지적한바 대로 저와같은 학자들이 전제하고 있는 비교의 출발점이 얼마나 그 뿌리에서 부터 부정적이며 분리적 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된다.  제네바와 영국 개혁신학의 조직적(loci) 방법론은 교리일변도의 신학이며 독일과 화란 개혁신학의 구속사적(heilsgeschichtlich) 방법론은 "교리와 삶"의 균형을 이룬 성경적 신학 이라는 주장은 무리한 논리의 비약이며 다시 우리로 하여금 신학의 초월과 내재의 문제로 돌아가게 한다.  

 

 

IV. 윌리암 퍼킨스

 

        1. 서론적 고찰

 

        앞서서 지적 했듯이 윌리암 퍼킨스의 언약신학에 나타난 구조적(systematic) 방법론은 언약이 "구원의 과정(ordo salutis)"을 실제화 시키는 구원론적 도구(soteriological instrument)라는 것이다.   죤 머리(John Murray)는 언약을 "구원의 적용(application of redemption)"이라고 설명 했는데 역시 같은 의미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개혁신학 에서는 구원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설명한다.  성부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시고(arranged), 성자께서 그의 적극적인 그리고 희생적인 순종을 통해 이루신(accomplished) 구원을, 성령께서 택함받은자에게 실제로 적용하여(applied) 구원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이중에서 마지막 단계인 성령의 사역을 총체적으로 묶어서 "구원의 과정" 혹은 "구원의 적용"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곧 그리스도 와의 연합의 결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퍼킨스 신학에서는 바로 그리스도 와의 연합을 언약의 본질(essence)이요 내용(substance) 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효과적 부르심, 중생, 회심, 칭의, 화해, 양자, 성화 등의 모든 구원의 선물들은 그리스도 와의 연합을 통해서 성도에게 주어지며, 그리스도 와의 연합은 언약이라는 관계의 채널을 통해서 이루어 지고,  언약은 믿음을 통해서 체약 된다고 이해한 것이다 .  

        더 나아가서 퍼킨스의 신학에서 언약은 인간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그 특유의 내재적 또는 인격적 성향 때문에 경건신학과 실천신학을 유도하는 매우 "현실적"인 교리 이기도 하다.  초월과 내재를 연결하는 그 특유성 때문에 언약신학은 철저하게 은혜신학 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반응으로써의 역동적인 경건신학 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퍼킨스의 신학에 나타난 칼빈주의적 언약신학은 "ordo salutis의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분석과 적용이었으며...동시에 조직신학과 윤리적 결의론(moral casuistry)을 이어주는 다리의 역할을 하였다"고 리챠드 뮬러는 말하였다.  

        뮬러는 퍼킨스의 언약신학이 초월적인 작정과 내재적인 신앙을 일관성 있게 체계적 (systematic)으로 연결시키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려고 했던 방법론적 특징을 갖고 있다고 지적 하였다.  필자는 뮬러의 지적을 더욱 발전 시켜 퍼킨스의 언약 신학에서 영원한 작정과 역사적 신앙을 상충대립 구도 속에서 해석하는 역사주의(historicism)적 전제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결정 사이의 신학적 접촉점(theological point of contact)으로서의 언약 개념을 찾으려고 하였다.

 

        2. 퍼킨스의 언약신학

 

        영국 개혁신학의 선구자였던 윌리암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의 언약신학은 지나치게 조직신학적 이고 스콜라적 이었다고 학자들에 의해 비난을 받고있지만 하인릭 헵(Heinrich Heppe)같은 대 학자도 퍼킨스의 언약신학을 대표하는 황금의 고리줄(A Golden Chaine)을 인용하며 퍼킨스는 엄격한 스콜라주의자가 아니라 "경건주의의 아버지(der Vater des Pietismus)" 였다고 그의 경건신학을 높이 평가했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언약신학이 조직신학과 실천신학을 이어주는 신학적 접촉점 으로써의 당위성과 역할이다.       

        하나님의 은혜(초월)와 인간의 자발성(내재)의 조화라는 역설적인 원리를 동시적으로 강조하는 개혁신학에 있어서 언약이 바로 그 둘을 이어주는 신학적 "고리줄(chain)"이라는 것은 타당한 이론이다.  이 "고리줄"은 성령에의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개인에게 적용되는 이른바 "구원의 과정(ordo salutis)"이라고 앞서 지적했다.  

        칼빈주의 언약신학에서는 특히 이 언약의 "고리줄"에 의해서 연결되는 두가지의 역설적 관계를 강조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작정(God's decree)과 인간의 결정(man's decision)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은혜와 율법이다.  이 것들은 신학의 "신경중추(nerve center)"로써 교회사를 통해 나타난 수많은 신학적 논쟁들은 사실 이 두가지의 긴장관계를 해석하는데서 파생된 것들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퍼킨스는 바로 이처럼 극도로 민감한 신학적 초월과 내재의 균형을 언약안에서 발견하였는데 그것은 은혜와 자발적 순종의 합체라는 언약의 본래적 속성때문에 그런 것이다.  필자는 여기에서 퍼킨스 언약신학의 조직적 특성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살펴보았다.

        첫째, 앞서 언급 하였듯이 퍼킨스는 언약을 "예정의 집행도구"(the means of the execution of the decree)로 정의 하였다.  그는 예정론을 성경에 충실한 진리로 확신하여 사변적인 공론이 아닌 구원론적인 관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호하는 교리로 부끄럼없이 천명하였다.  그의 예정과 언약의 관계성에 대한 이해는 17세기 초반 영국의 알미니안 신학을 상대로 했던 죤 프레스튼과는 달리 로마 천주교의 구원론을 상대로 한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사실 내용상으로는 매우 흡사한 배경 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 천주교는 개신교적 구원론이 인간의 책임을 약화시킨다는 점을 공격했고, 루터와 칼빈이후 이른바 제 2세대 개혁자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혜를 보호 하면서도 Sola Fide 교리가 초래할 수 있는 도덕적 해이에 대한 답변으로 언약교리를 발전 시킨 것이다.  

        어쨋든 퍼킨스는 예정론이 인간의 자발성과 대립된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것이 성경에 명백히 계시된 것 이며 은혜신학의 타협할 수 없는 대전제임을 그의 신학체계 속에서 일종의 prolegomena 로 삼았다.  물론 이러한 면이 그의 신학을 스콜라주의로 공격한 그의 적들에게 원인제공을 한 것은 사실이다.  

        동시에 그는 복음선포를 통한 신앙결단의 필요성과 경건의 자발성 역시 성경에 근거한 정당한 가르침임을 인정하였고 경건성 계발을 위한 수많은 글과 운동을 실천에 옮기었다.  예정론이 은혜신학의 절대적인 전제라면, 인간의 자발성과 그에따른 책임성은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격적으로 창조되었다는 개혁신학의 인간론적 원칙 이었던 것이다.  

        성경의 이 두가지 진리사이에 생겨나는 긴장과 파라독스 앞에서 퍼킨스는 언약을 선택했다.  그가 언약을 "영원한 작정을 집행하는 도구(the means of the execution of the decree)"로 정의하여 그것을 예정과 자발적 의지의 고리줄로써 이해한 것은 개혁신학의 본질을 꿰?는 심오한 신학적 통찰력 이었다고 평가되며, Calvinist/Federalist 이론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필자는 논증 하였다.

        둘째로, 언약을 통한 초월과 내재의 결합은 그의 구원의 서정에 대한 이해해서 상세하게 다루어 진다.  퍼킨스의 구원의 서정은 사실상 중생과 성화로 요약된다. 왜냐하면 중생은 구원의 초월성에 해당되며 성화는 구원의 내재성에 해당 되기 때문이다.  중생은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 지지만 성화는 인간의 의지를 통해서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퍼킨스는 이와 같은 은혜의 객관성과 주관성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찾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곧 구원의 서정을 성도에게 가져다 주며 그것이 곧 구원론적 언약의 이해이다.  

        셋째, 퍼킨스가 "경건주의의 아버지"로 불리운 것은 그의 언약신학이 율법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예정론자인 그가 율법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른바 "율법적 경건(the piety of law)"이란 말도 그에게서 비롯 되었다.  퍼킨스는 믿음과 행위가 구원의 방법으로써(as a means of life-inheritance)는 대립적 이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적 관계적인 차원에서 볼때 율법에 대한 순종을 하나님과 인간관계의 창조론적 그리고 더 나아가서 종말론적 요구라고 이해 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대리적 순종에는 율법에대한 적극적인 순종(active obedience)과 십자가의 희생적인 순종(passive obedience)이라는 두가지 "행위"가 포함되어 그것들이 믿는자에게 은혜로 전가된다는 것이 그의 속죄론이다.  이것이 그의 언약신? 속에 담겨있는 은혜의 객관성이다.  

        성화는 은혜의 주관적 적용이라고 보았다.  이것 역시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가능하다.  연합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 하면서 율법을 심비에 적어 자발적인 순종을 하도록 도와 주실 때 성화가 이루어 진다.  성화 역시 믿음으로 시작되고 지속되지만 인간의 의지와 협력 통해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간다.  결국 은혜는 창조론적 하나님과 인간의 순종의 언약 관계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로서의 은혜이다.  그래서 은혜는 절대로 순종을 배제하지 않으며 배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것은 칭의(justification)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행위"를 마치 내것처럼 전가받았다는 것이지 선한 행위 자체를 면제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따라서 율법은 거룩의 기준이요 하나님이 본래 언약적으로 인간에게 요구하신 불변하는 성경적 진리이기 때문에 은혜는 진정한 율법(순종)으로의 회복을 의미 하는 것이다.  은혜를 전제로한 이 "행위"라는 인간의 자발적인 선택과 활동이야 말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거룩한 예배와 산제사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죄로 인하여 율법은 은혜를 필요케 하고, 은혜는 또다시 율법을 그 본래적 역할로 회복시키는 것은 퍼킨스 신학에서 언약적 경건의 "순환논리(circular reasoning)"라고 말할수 있다.  따라서 퍼킨스 신학에서 은혜언약(the covenant of grace)은 행위언약(the covenant of works)을 완성하는 언약으로 이해 되는 것이다.                

        그의 언약적 경건이 이러한 근거에서 나오게 되었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커베난트(co-venant)"라는 단어의 원의미는 "함께오다"이다.  이말은 언약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발적 책임이 "함께올수" 있도록 묶어주는 "고리줄"임을 시사하는 것 이기도하다.  특히 언약의 쌍무적 성격(bilateral character)이 그것을 대변해주는데 이러한 언약적 특성에 근거한 퍼킨스의 율법론, 성례론, 윤리적 결의론(moral casuistry), 구원의 확신(assurance), 구원준비(preparation for salvation) 등은 개혁주의 언약신학을 경건주의(pietism) 신학의 모체가 되도록 하였다.  Calvinist/Federalist 학설은 퍼킨스 신학에서 이러한 경건의 이론적 근거와 힘(dynamic)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하지 못한다.

        넷째, 퍼킨스의 조직적 언약신학은 또한 프랑스의 개혁주의 철학자인 피터 레이머스(Peter Ramus)의 "주제별 방법론(loci method)"과 "양단법적 방법론(dichotomous method)"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제2세대 개혁신학의 조직적 방법론은 사실 레이머스의 양단법을 많이 사용 하였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문답서는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레이머스의 주제별 방법론은 성경의 내용들을 신학적 주제별로(논리적으로) 구분하여 나열하는 방법이며, 그의 양단법적 방법론은 신학을 "이론과 실천"으로 구분하는 방법으로써 이론은 곧 실천이며, 실천은 이론에 근거하여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 문답서가 "믿음과 실천(faith and duty)"으로 구분된 것도 이러한 라미스트(Ramist)의 양단법적 방법론에 근거한 것이다.  저 신앙고백이 당대 최고의 언약신학자들에 의하여 쓰여졌으며, 그 것의 신학적 하부구조가 언약적이며, 나아가서 언약의 본질인 "믿음과 실천"으로써 요리문답을 정리한 것은 개혁주의 언약신학이 Calvinist/Federalist 로 나뉠 수 없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V. 죤 프레스톤(John Preston, 1587-1628)

 

        Calvinist/Federalist 학자들은 죤 프레스톤을 17세기 영국 개혁신학에서 Calvinist 계열을 벗어나서 Federalist 신학을 대표하는 언약신학자로 뽑는다.  또한 그와 함께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역시 내용적으로 Calvinist 가 아닌 Federalist 로 평가한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 죤 프레스톤의 언약사상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한 번도 비중있게 다루어 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를 Calvinist/Federalist 라는 모델에 끼워 맞추는 것에 반론을 제기 하였다.

        필자는 일반적으로 17세기 영국 개혁신학을 평가하는 두가지 접근을 논하고 그것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첫째로, 초기 개혁자들과 17세기 영국 개혁신학자들을 직접 비교하는 식의 접근이 많이 시도되고 있다.  "칼빈과 프레스톤," "칼빈과 퍼킨스"식의 연구 논문들이 많은데 이런 접근의 문제는 두 부류의 신학자들 사이에 신학적 방법론의 차이점들이 무모하게 질적(substantial) 차이로 해석 된다는 데 있다.      언약교리에 하나만을 놓고 보아도 쉽게 설명이 된다.  칼빈이나 불링거는 제 2세대 개혁자들에 비해 언약에 대한 집착이나 경건적 적용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들은 구원론적인 문제에 많은 에너지를 할애 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필자는 퍼킨스와 같은 언약신학자를 고려하지 않은 칼빈과 프레스톤의 직접비교는 정확한 비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 하였다.  신학과 방법론의 차별화, 이론과 실천, 구원과 성화의 강조점들이 시대가 변천함에 따라 변화된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채 직접 비교하여 일방적으로 차이점을 극대화 시킨 문제가 따르는 것이다.

        둘째로, 퍼킨스에 대한 해석 자체에 문제가 있다.   이것은 일종의 "딜레마 이론"이라고 볼 수있다.  일반적으로 그의 신학에는 예정과 언약이라는 이중적인 원리가 공존 하는데 퍼킨스 자신도 서로 상충되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이중성을 그대로 인정하는 범주안에서 예정과 언약을 다루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역시 필자의 견해로는 퍼킨스의 신학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퍼킨스"를 만들어 놓고 그의 제자들과 17세기 영국 개혁신학은 예정과 언약이라는 딜레마속에서 언약을 선택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Calvinist/Federalist 모델에 퍼킨스와 영국 개혁신학을 끼워 맞추기 식으로 해석 한 것이다.  앞서 본것같이 실제로 퍼킨스는 예정과 언약을 신학의 이중원리로 보지 않았다.  "이중원리"는 해석자의 사고속에서 온것이지 그의 신학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필자는 말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현대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이 종교개혁과 개혁주의 신학을 논함에 있어서 "post-Newtonian mindset"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분리시켜놓은 전제에 끼워 맞추기 식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여기서 퍼킨스와 프레스톤의 언약신학은 강조점과 적용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을뿐이지 신학적 내용과 언약의 구조적 방법론에 있어서는 통일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 하였다.  프레스톤은 영국교회안에 퍼지기 시작한 알미니안 신학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런데 그는 알미니안 신학과 논쟁 하면서 구원론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고(그것은 이미 초기 개혁자들과 퍼킨스와 같은 학자들이 충분히 해 놓았음을 감안할 때 이해가 된다) 알미니안 신학자들이 칼빈주의 신학에 윤리와 성화가 없다고 비난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그의 언약신학은 자연히 신학적 논문형식이 아니고(퍼킨스 처럼) 설교형식으로 다루어 졌다.  그의 언약적 관심이 구원론적 이슈가 아니라 칼빈주의 성화와 윤리에 있었고, 딱딱한 신학적 글을 통해서보다 자연히 설교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이것을 전달할 수 있었기 때문에 프레스톤의 글과 설교들을 분석해 보면 퍼킨스와 같이 예정론과 구원의 구조 등에 많이 집착하고 있지 않음을 볼 수있다.

        그런데 Calvinist/Federalist 학자들은 바로 이점만을 보고 피상적으로 그를 읽었다.  그에 대하여 신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한 번도 진지한 연구를 하지 않고 그의 신학이 칼빈주의에서 벗어났으며, 그는 예정론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그의 신학은 쌍무적 언약신학으로서 실제로 이중예정설을 부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저들이 선택적으로 취급한 (이것은 놀랍게도 사실이다) 프레스톤의 글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해본 결과 프레스톤의 언약신학은 설교적 유형이라는 사실과 언약교리를 사용하여 칼빈주의적 성화와 경건을 강조하려고 했다는 사실외에는 퍼킨스의 언약신학과 신학적 내용에서나 조직적 방법론에서 전혀 다르지 않음을 논증 하였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퍼킨스나 프레스톤등 제 2-3세대 개혁주의 신학은 앞서 말한 라미스트(Ramist)의 양단법을 사용하여 신학을 "faith and duty"로 나누어 이론과 실천을 논하였다.  따라서 때로는 실천에 있어서 이론과 상충되는 듯한 인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특히 preparation for salvation 에서 강한 conditionality 의 개념이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있다.          

        이 preparation 교리는 학자들에 의하여 한편으로 청교도와 영국 개혁신학이 17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알미니안화 되어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확정적인 증거로서 거의 무차별적으로 사용되고 있기도 하고, Federalist 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거꾸로 이 교리야 말로 인간의 자발성을 강조했던 오리지날 언약신학(불링거)을 다시 회복한 것으로 평가한다.  특히 preparation 은 Calvinist 의 예정과 유기 교리의 엄격성을 극복하는 매우 긍정적인 교리로 저들은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필자는 새로운 해석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속죄론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할 측면이 있고, 인간론(언약)적 관점에서 볼것이 있다.  퍼킨스나 프레스톤이 인간론(언약)적 관점에서 인간의 자발적 의지나 preparation 의 conditionality 를 말한 것은 저들이 속죄론에서 하나님의 은혜나 그것을 보호하는 예정론을 강조한 것과 전혀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저들의 신학적 체계 속에서는)을 이해해야 된다.  대립과 상충은 앞서 지적한 것 처럼 해석자의 상상(imagination)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있다.

 

        저들은 구원이 하나님의 작정과 은혜에 절대적으로 근거한 것이지만 인간은 인격적 존재로써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갖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실제적으로 구원의 문제에서 인간의 자발적 의지가 한계점에 이르도록 제한적인 "자유성"을 허용 하였다.  성경은 "공로(merit)"의 차원에서가 아닌 인격적 존재로서의 자발성을 인간에게 언약의 "조건(condition)"으로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윌리암 스토버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This seems to be a more difficult problem for post-Newtonians, who tend to conceive of causality exclusively in terms of efficiency.  In the scholastic  conception, human will and grace...may consist as the formal and efficient   causes...of the act of faith...and as the instrumental and efficient causes of the individual's justification.

 

        필자는 스콜라적 방법론에 익숙한 퍼킨스나 프레스톤이 라미스트의 양단법을 동원하여 "faith and duty"로 신학을 체계와 한 것이나, 아리스토틸리안 적인 causality 이론을 구원론에 사용하여 efficient cause 와 instrumental cause 로 이해한 것은 언약의 본질을 바로 이해 한데서 비롯 된것이라고 생각한다.  Calvinist/Federalist 학자들이 속죄론과 언약을 구분하지 않음으로 유언/언약이라는 이분설을 주장한 것과, preparation 교리를 두고 예정교리를 "누그러 뜨리는" 인간의 의지 개념으로 생각한 것은(예정/의지) 다를바 없다.

 

         "효율적 원인"과 "도구적 원인"의 구분은 곧 merit 와 condition 을 구분함과 같다.  모든 merit 은 하나님에게 그러나 인간에게는 condition 을 요구 하는 것이 언약이다.  결국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을 폭군으로 그리고 인간을 꼭두각시로 보는 신학이나, 반대로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를 돕는 존재로 그리고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자율적인 존재로 보는 신학이나 개혁주의 언약교리를 잘못해석함에 있어서는 다를바 없는 것이다.

 

 

IV. 결론

 

        구원은 예정론적(decretal)이면서도 역사적(historical)이고,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것은 구원의 주체이신 하나님께서 바로 그와같은 속성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면 개혁주의 언약신학은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무엇으로 연결 시키는가?  바로 언약이라는 성경적 진리속에서 이 두가지 속성들이 상호관계를 갖으며 서로 맞물려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필자는 개혁주의 언약 교리안에 이처럼 초월성과 내재성, 영원성과 역사성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구속사적" 방법론과 "구조적" 방법론이 갖는 차이점의 당위성을 제시하였다.  언약의 이분설은 개혁주의 언약교리의 구조적 방법론을 언약신학 그 자체에서 효과적으로 제외 시켜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것은 현대신학의 "형이상학에 대한 차별(prejudice against metaphysics)"과 무관하지 않으며 신학에서 초월적인 내용을 배제하려는 부당한 출발점 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난 다른 무엇보다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속죄론적 은혜의 개념과 언약적 책임의 개념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부정하는데서 시작 되었다고 지적 하였다.

 

        언약신학의 방법론적인 다양성을 인정하고 확대할때 성경에 계시된 언약의 풍성한 은총들을 더욱 값지게 누릴수 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이 두가지 방법론은 각각 그들의 독특한 특성과 기능에 따라서 차이점을 갖게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한가지 방법만을 통해서는 얻기 어려운 언약의 다양한 뉘앙스들을 유도해 낼 수 있는 장점들이 있다.  물론 장점들이 있듯이 단점들도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러한 단점들 때문에 두 방법론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들이 지금까지 계속되어온 것이기도 하다.

 

        이 둘중 어느 한 방법을 극단적으로 고집할 경우 생기는 신학적 오류는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칵세이어스 시대에 그의 구속사적 방법론을 동원하여 스콜라적 칼빈주의 신학자들과 논쟁을 벌였던 알미니우스파의 학자들(the Remonstrants)과 에미로우(Amyraut)파의 학자들은 언약을 지나치게 세대적으로 분석하여 옛언약을 "행위언약"과 동일시하고, 결과적으로 신구약의 기독론적 구원론의 통일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Old Testament justification 이 여기에서 유추되었다.

        반면에 스콜라적 칼빈주의 신학자들 가운데는 구조적 방법론을 지나치게 고집하다가 "초 칼빈주의 (Hyper-Calvinism)" 라는 오명을 남기기도 하였다.  오늘날 신정통신학의 "Law in the Gospel" 개념이 여기에 근접한 이론이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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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둥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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