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제한하는 예배?


성령을 제한하지 말라: 요즘 몇몇의 한국 교회 안에 “성령을 제한하지 말라”는 표현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물론 맞는 표현이다.  우리가 감히 뭔데 성령을 제한한단 말이요?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표현의 의미를 남용하여 성경을 통해 전혀 검증될 수 없는 신비체험이나 전통 등을 예배에 도용하기 위하여 사용한다는 사실에 쓴 웃음이 지어진다. 나는 이러한 작금의 현실에 아파하는 한 예배자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한 비유를 통하여 조직신학적으로 나누고자 한다. 이 글을 통하여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방법이 나눠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1.연주회의 구성요소: 연주회를 연상해 보자. 연주회에는 반드시 필요한 요소 네 개가 있다: (1) 지휘자, (2) 악보, (3) 연주자, (4) 관객이다. 이 네 개의 요소는 연주회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각각의 위치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

(1) 지휘자: 지휘자의 역할이 무엇일까? 지휘자는 음악회를 총괄적으로 바라보며 연주를 이끌어 간다. 독수리와 같은 눈으로 모든 구석 구석을 살피기도 하고, 음악의 강도와 빠르기등을 조절하면서 말이다.

(2) 악보: 악보의 역할은 무엇을 연주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이다. 악보는 연주의 시종을 담고 있는 종이일 뿐 아니라 음악회의 이름을 결정하는 뼈대이기도 하다.

(3) 연주자: 연주자의 역할은 말 그대로 연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자가 아니다. 그들은 반드시 지휘자의 지휘에 맞춰 악보대로만 연주해야 한다. 만약 연주자가 지휘를 무시하고 악보를 벗어나 연주한다면 연주회는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연주자는 반드시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악보대로만 연주해야 한다.

(4) 관객: 관객의 역할은 연주회를 즐김과 동시에 평가를 하는 것이다. 모든 음악회가 관객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기 때문이다.

 

2.예배의 구성요소: 이런 연주회의 구성요소가 예배에도 있다는 것을 아는가? 그 구성요소들은 다음과 같다.

(1) 예배의 지휘자: 예배의 지휘자가 누구일까? 담임 목사일까? 아니다.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령님께서는 예배를 전체적으로 총괄하시며 지휘하신다. 뜨거움이 필요할 때에는 뜨겁게 지휘하시고, 차가움이 필요할 때에는 차갑게 지휘하시며 예배의 시종을 인도하신다.

(2) 예배의 악보: 악보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이다. 성경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기록해 놓은 악보로써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의 시금석이 된다. 당신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연주하기 원한다면 이 악보가 반드시 필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이 악보대로 연주되는 예배만을 받으시기 때문이다. 얼마 전 어떤 목사가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계시적이어야 한다”고 쓴 책을 읽었다. 나는 이 표현이 영지주의적 독법을 가능케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만약 그가 “설교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계시적이어야 한다” 고 말했다면 동의할 수 있었겠다. 그러나 “성경적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계시적이어야 한다”는 표현은 많은 오해의 소지를 불러 일으키는 표현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성경을 계시로부터 분리시키는 작업은 성경이 곧 계시의 극치인 특별 계시라는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부인하는 것으로 까지 나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의아해 하며 계속 읽어봤다.  아니나 다를까 성경적인 것과 계시적인 것을 분리한 그는 성경에 의해서 검증될 수 없는 여러 가지 현상을 “초 성경적”인 것으로 분류하여 예배에 도용함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작곡자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쓰신 악보에 남이 멋대로 쓴 저급한 악보를 덧붙이려 한 것이다. 명심하자.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경 66권 대로만 연주되는 예배만을 받으신다.

(3) 예배의 연주자: 연주자는 누구일까? 모든 성도이다. 설교자나, 성가대나, 찬양 인도자들만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모든 성도가 연주자이다. 중요한 것은  예배자는 아무렇게나 연주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성령님의 지휘를 따라 말씀대로만 예배해야 한다. 성령님께서 회개의 영을 부어 주실 때에 그 영을 거부하고 기쁨의 찬양을 대신 부를 수 없다. 또한 말씀에 나와있지도 않은 현상이나 전통 등을 내 기분에 맞는다는 이유로 연주해서도 안 된다. 예배자는 반드시 성령의 지휘를 받아 기록된 말씀대로만 연주해야 한다. 예배자가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연주하는 순간 이단적인 예배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절대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성령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친히 쓰신 성경에 모순되게 예배를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성령 하나님을 빙자하여 성경과 모순되는 것들을 예배에 도용한다면 하나님의 속성(屬性)인 불변성(不變性)과 정직성(眞實性)을 부인하는 악랄한 자가 되어 마귀적 예배자가 된다. 이러한 예배는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신다.

(4) 예배의 관객: 그렇다면 관객은 누구일까? 성도일까? 아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성도들은 예배를 구경하거나 관람(觀覽)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예배의 유일하신 관객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하여 연주하는 자들이다. 설교자는 설교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청중들은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린다. 설교자가 설교를 한다고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 아니요, 청중들이 설교를 듣는다고 예배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같은 예배자로써 예배의 유일한 관객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위하여 연주한다. 그러므로 “예배 보러 간다”는 한국 교인들의 발언을 “예배 드리러 간다”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은 언어학적으로 또한 신학적으로 옳은 게다.

또 하나 알아야 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받으시는 것뿐 아니라 평가까지 하신다는 것이다. 몇몇의 성도들은 예배당을 빠져나가며 “오늘 예배가 좋았어” 혹은 “오늘 예배는 별로 였어” 말하며 스스로가 예배의 관객이 된 것처럼 착각한다. 목사의 설교에 강약이 없었다고 예배가 별로였다고 생각하는가? 찬양단의 찬양에 당신이 좋아하는 곡이 없었기에 예배가 별로였다고 생각하는가? 오! 교만한 자들이여, 언제부터 당신들이 예배의 관객이 되었단 말인가? 설교자의 설교에 강약이 있던 없던, 찬양단의 찬양에 당신이 좋아하는 곡이 있던 없던 그 설교와 찬양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경에 쓰인 내용대로 선포되고 연주된 것이라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현상 진단: 요즘 “거룩한 웃음,” “금 이빨,” “성령주,” “장풍”등의 신비한 현상들이 단지 일어난다는 이유로 교회 안에 무분별하게 들어오고 있다. 더 가슴 아픈 사실은 이러한 현상을 우려하여 반대하는 목사들이 “성령을 제한하는 목사”라는 딱지를 받는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내가 체험한다.  고로 내가 하는 체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라는 사고가 옳은 것인가? 이러한 생각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잘못된 유추의 오류, 흑백의 오류, 잘못된 인과 관계의 오류, 잘못된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바로를 왜 기억하지 못하는가? 그는 모세가 애굽에 내린 신비한 현상을 본 후 마음을 얼추 돌이켰다가 애굽의 술객들이 부린 신비한 현상을 보고 마음을 다시 강퍅하게 했다. 일어나는 모든 신비한 현상이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성경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영을 분별하라고 말하는 게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깨어나라. “내가 체험한다.  고로 내가 하는 체험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라는 어수룩한 논법을 버리고, “내가 체험한다.  고로 내 체험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검증되어야만 한다”는 논법을 붙잡으라. 그렇게 함으로 “성령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빙자하여 삼위일체 하나님께 올려져야만 하는 예배를 갈취하고 있는 마귀로부터 예배를 되 찾아야만 한다.

 

맺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성령사역은 비판 받아야 하고, 말씀을 떠난 체험은 판단 받아 마땅하며, 말씀에 검증되지 못하는 경험은 버려져야만 한다. 이러한 사실을 기억함으로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예배가 한국 교회에 봇물 터지듯이 흘러나기를 전심으로 기도한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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