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본인이 지난 2월 23일에 호주에서 모인 4차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세이연) 총회 시 이단연구가들 앞에서 한 강의다. 한국교계에는 이단 연구가들을 공격하여 먹고 사는 소위 ‘하이에나’들이 적지 않다. 그들이 이 글을 이용하여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이단연구가들을 공격할 빌미를 찾아낼 것이라는 염려가 적지 않다. 그래도 공개적으로 글을 밝히는 것은 이 강의는 나를 반성하는 의미의 강의이며, 이단 연구가들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한 강의이며, 한국교회를 염려하는 의미에서 한 강의이기 때문이다. 이 글에 대하여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보면 교계의 하이에나와 한국교회와 이단연구가들 몸에 붙은 기생충이 누구인지 밝혀질 것으로 보이며, 3회로 나누어서 게재하는 바이다.
이단연구 이렇게 하자(이런 이단연구 하지 말자)(3)
최삼경 목사
바람직하지 못한 이단연구는 무엇인가.
1. 정직하지 않은 이단 연구가가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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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삼경 목사 |
주관적인 참을 ‘진실’이라고 하고, 객관적인 참을 ‘진리’라고 한다. 우리는 진리를 향하여 가는 자들로 진실할 뿐이지 진리는 아니다. 그러나 진실하지 않은 자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두 개의 잣대를 쓰거나, 두 개의 저울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고무줄 자를 써서는 안 된다. 고무줄 자로 하면, 로마의 한 신처럼, 누구나 짧다고 빼죽이고 길다고 잘라죽일 수 있게 된다.
2. 부도덕한 이단 연구가도 사라져야 한다.
성도로서도 여자 문제, 돈 문제에 깨끗해야 한다. 하물며 목회자로, 더욱이 남을 비판하는 이단연구가로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에게 비난 받을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혹 헌금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고 하자.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공산주의자와 기독교가 독립운동을 함께 한 것처럼 모르고 헌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헌금한 자에게서 이단성이 발견되거나, 또 순수한 헌금이 아니었다는 점이 밝혀지면 그를 공적으로 밝히고, 가차 없이 돈을 돌려줘야 한다.
이단 연구가로서 심지어 한 사람이 검사의 기능과 변호사의 기능을 동시에 하여, 검사로 구형을 높이고 변호사로 수임료를 높이는 식의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이다. 빌어먹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도적질해서 먹는 것은 죄다. 성공하지 못할 두려움보다 성공한 후에 찾아올 교만과 타락을 더 두려워해야 하고, 밖에 있는 천만인의 원수보다 내 속에 있는 적은 한 가지 죄의 가능성을 더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
3. 극단적 이단 연구도 아주 위험하다.
토마스 칼라일이 “마틴 루터는 어머니 마음을 가진 개혁자였다.”고 했다는 점을 듣고, 본인은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진정한 개혁자의 자세라고 보기 때문이다. 뮨쳐와 같은 과격한 개혁자는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 오늘 한국교회에는 이단과 손을 잡고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와 같은 자들이 많다고 안다. 또한 반대로 들이 댈 곳과 들이 대지 말아야 할 곳을 구별하지 못하고 칼을 들이대는 포악한 이단 연구가도 있다. 사울의 목을 치지 않는 다윗의 그 사랑과 인내는 이단 연구가에게 더 필요한 덕목이다.
눈물로 기도하는 연구가가 되어야 한다. 늘 자신의 죄와 부족을 찾아야 하고, 교회와 민족을 사랑하는 눈물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 없는 이단 비판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단자만 죄인이 아니라 이단 연구가도 죄인이다.
날카로운 송곳이나 칼 하나를 준비하고 여기저기 찌르는 재미에 취한 아이처럼 이단연구를 해서는 안 된다. 본인은 어렸을 때, 어쩌다 가진 면도칼 하나를 가지고 이것도 베어보고 저것도 베어보고 재미가 나서, 그 칼로 집 옆에 큰 나무 껍질을 돌아가며 다 벗겨 버린 일이 있다. 결국 그 나무는 죽었고, 나도 부모님들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사악한 이단을 대처한다는 미명 하에, 자기 아집, 자기 고집, 자기 편견, 자기 욕심, 자기 교만 등을 숨겨 합리화하려고 하려는 자가 있다. 이런 분들은 부정적 도구로 사용되는 분들로서 긍정적으로 보면 쓸모없는 무용한 사람들이다. 이단을 공격한다는 미명하에 자신의 그 많은 약점들을 그곳에 숨기는 그 악은 이단자의 악보다 더 적다고 할 수 없다.
한 평신도 이단연구가는 전천년설도 이단이고, 무천년설도 이단이라고 하고, 어떤 분처럼 방언 자체를 다 마귀의 사역으로 공격하고, 반대로 방언을 못하면 구원도 받지 못한 것처럼 하는 것은 다 극단론이다. 이는 모든 신비적 현상 자체를 모두 사탄 마귀로 공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단연구가는 누구보다 부드러워야 한다. 속단하고 쉽게 정죄하는 이단 연구는 위험하다. 이단이나 사이비에게 ‘회개하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회개하지 않을 것이다’, ‘한다고 해도 가짜로 할 것이다’라는 전제를 가지는 것은 내 말이 맞는 것이 증명되기 위하여 회개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마약 환자는 갈수록 강하게 약을 먹어야 하듯, 갈수록 더 강하고 더 동정심 없는 이단 정죄에 익숙해져가는 이단 연구를 삼가야 한다. 포르테보다 피아니시모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진리로 신의를 저버리지 않아야 하며, 신의로 진리를 그르치지도 않아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진리란 이름으로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기 쉽고, 자유자들은 신의를 앞세워 진리를 그르치기 쉽다. 물론 이 둘 중에 진리가 앞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믿음도 신의이다. 이단 연구는 보수주의자들이 한다는 점에서 이단연구가들이 이단연구가들에 대한 신의를 저버리지 않기 바란다.
개는 주인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어떤 논리라도 쉽게 배신한다. 이단연구가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다. 아무나 쉽게 비판하고 아무나 쉽게 정죄하기 익숙해져 있는 이단 연구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4. 소영웅주의적인 이단 연구가도 사라져야 한다.
우리 인간은 다 온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오차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 누구나 다 영웅심이 있다. 욕심과 사명이, 애국과 정권욕이 함께 꼬여 가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오차 범위를 벗어난 사람들이 있다. 강단에서 망나니 칼춤 추듯 행동을 하는 자도 있고, 이단연구란 이름으로 할 소리 못할 소리 다 하는 사람도 있다. 본인은 이들을 ‘막가파 이단연구가’라고 부르겠다.
누구보다 더 고상하고, 누구보다 더 인격적이고, 누구보다 품위 있는 사람이 이단연구가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인격과 학문성과 영성을 요구하는 행위가 이단연구라고 본다. 왜냐하면 이단 연구는 일반 목회자의 수준과 신학적 수준을 넘어서는 최상위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할 일이 없어서 이단연구나 하고, 인격적 결함과 정서적 결함을 가진 자가 이단을 연구하는 것은 유치원생이 대법관을 하는 것과 같다.
결론 : 이단 연구자들의 하늘 상급이 클 것을 믿는다.
목회의 고통은 목회자만 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 목회다. 그러나 이단 연구의 어려움은 그보다 더 하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서 많은 상급을 받을 것을 믿는다. 단 정직한 이단 연구에 한하여 그렇다. 십자가를 아는 자가 적고, 십자가를 지는 자는 그보다 더 적고, 십자가를 지고 기뻐하는 자는 그보다 더 적다. 이단 연구의 길은 십자가 중에 십자가이다. 그 고통과 어려움을 이단이나 정통교회에 화풀이를 하듯 하지 말고, 그 고난과 고통을 기뻐하는 이단 연구가가 되기 바란다.
본인은 이단 문제를 거울로 삼아서 볼 때 한국교회가 가장 잘 보인다고 자부한다. 그런 점에서 내 죄가 교회의 죄가 되었고, 교회의 죄가 민족의 죄가 된 것 같아 눈물로 회개한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아파서 견딜 수 없다. 이제 눈물도 말라간다.
솔로몬 앞에 두 여자가 있었다. 하나는 가짜 어머니요, 하나는 진짜 어머니다. 진짜 어머니는 내 아들인데 아니라며 가짜 어머니에게 주라고 하였고, 가짜 어머니는 찢어서 갖자고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앞에 진짜 어머니가 누구인가? 아들을 살리려고 자기 아들을 포기하는 진짜 어머니가 누구일까? 한국교회와 이 민족 앞에 진짜 어머니를 찾기 어려운 것이 교회와 민족의 위기요 비극이다. 이단연구가들은 교회를 위하여 내 이익은 물론 내 사상, 내 교파, 내 자존심까지라도 포기할 수 있는 진짜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 인정받고 사람에게도 존귀한 이단 연구가가 되기를 눈물로 호소하며 강의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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