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접(迎接)

대장쟁이 ㆍ 2016-04-09 (토) 11:09 IP: 100.xxx.137    

(창세기 18장 1-4절)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가로되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옵시고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 당신들의 발을 씻으시고 나무 아래서 쉬소서.



  앞에서 살펴본 바 창세기 17장에서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금 확인하고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아브라함과 사라, 열국의 아비, 열국의 어미로 고쳐 주신 다음 올라가셨고 아브라함은 자신을 비롯하여 이스마엘과 집안의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18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오정, 낮 열두시 한낮에 장막문에 앉았다가 맞은편에 선 세 사람을 보고 달려가 영접합니다.

  아브라함은 왜 한낮에 장막문에 앉아 있었으며, 왜 세 사람을 보자 달려가서 영접하였을까요? 히브리서 13장 2절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 땅 남부지역, 나그네로 뜨거운 한낮에 여행을 한다는 것은 위험하고 곤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도 나그네의 삶을 살았었기 때문에 그 고통과 어려움을 아는 아브라함은 그래서 그들을 보자 달려 나가서 영접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부지중에 대접한 나그네가 알고 보니 하나님과 천사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편 99세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다시금 후손을 약속하시고 이름을 고쳐 주시고 할례를 받게 하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그 약속의 표징인 할례를 한 다음 하나님이 다시 오셔서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맞은편에 나타난 세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이거나 혹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라나타” 주님이 오시기를 슬기로운 처녀들과 같이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장막문에 앉지도 않았을 것이고 앉아서 바라보았어도 알아보지 못 하고 지나쳐 보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세 사람은 누구일까요? 이 세 사람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입니다. 우선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뵙기 원한 모세에게도 하나님은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이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소돔을 멸하기 위하여 가는 천사인 것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남은 한 분 여호와(YHWH, 야훼) 앞에 아브라함은 “의인 오십만 있으면 사해 주시겠습니까?” 하고 간구합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세 사람 중 둘은 천사이고 한 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삼위일체의 제2위이신 성자 하나님, 곧 예수님이셨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시며 우리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삼위일체의 비밀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아브라함은 기다렸을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고 나서 간절히 하나님을 기다렸기에 아브라함은 장막문에 앉았다가 한 눈에 알아보고 이들 앞에 달려 나가 땅에 몸을 굽혀(엎드려) 경배하며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컨대 종을 떠나가지 마옵소서.” 하고 간청하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세 사람을 극진히 영접합니다. 사라에게는 떡을 굽게 하고 자신은 짐승 떼에 달려가서 살찐 송아지를 잡아 하인에게 요리하게 하고 집에 있는 가장 좋은 것으로 상을 차리고 그들을 나무 아래 모셔서 수종 듭니다. “전심을 다 한 극진한 대접” 이것이 바로 영접입니다. 우리는 이 대목을 보면서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요1;12)”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정성을 다 하여 극진히 영접하였는데 우리는 그저 “그 이름을 믿는 것”으로 영접을 대신하니 너무나도 홀대하는 것 같다 싶습니다. 주님을 영접하는 그 영접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지를 생각하면,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굉장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접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장막문에서 그 말씀을 들은 사라는 속으로 웃습니다.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나이 89세 늙은 사라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아무 희망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불신의 웃음을 웃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돌아볼 때 하나님의 약속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라가 웃눈구나. 여호와께 능치 못 할 일이 있겠느냐. 내년에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가 두려워 승인치 않고 안 웃었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그들에게 오신 여호와 하나님을 극진히 영접하였을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진정 극진히 영접하였습니까? 그 이름을 믿는다 하면서 아직 문밖에 세워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혹시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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