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퍼 간단 정리
김재근 12-11-14 01:35

 

킹 제임스 성경을 믿는 신자들은 사람의 지혜를 가지고 유혹하는 말들에 주의를 해야 한다. 이사야 14장 12절에서 루시퍼가 옳기에 계명성이나 새벽별은 틀린 것이다. 누군가 둘 다 옳다고 가르친다면 다른 사람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유혹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① 계명성(새벽별)에서 '별' kowkab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이사야서 14장 12절 원문에는 없다. 12절에 ‘별’이란 단어가 들어간다면 잘못된 성경이다. 대부분의 현대 성경들은 마귀 이름을 빼고서 예수님 이름을 넣기 위해서 없는 단어를 조작해서 번역했다.

 

② 킹 제임스 성경 첫 페이지에는 이렇게 써 있다.

“구약과 신약을 포함하는 본 성경전서는 제임스 폐하의 특별 명령에 따라 원어에서 번역하였으며 또한 이전 역본들을 부지런히 비교하고 수정하여 번역하였음”

 

킹 제임스 성경 번역자들은 두 가지 작업을 했다. 원어에서 번역했고, 이전 역본들을 부지런히 비교했다. 신학교를 다니신 분들이 생각하듯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본문을 달랑 하나 놓고서 영어로 번역한 것이 아니다. 이전 역본들을 부지런히 비교했다는 사실도 꼭 기억해야 한다.

 

- 요한일서 2장 23절 : 킹 제임스 성경은 절반이 이탤릭체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성경이 번역되던 당시에는 23절에서 이탤릭체로 된 부분을 입증하는 그리스어 필사본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 어떤 성경도 킹 제임스 성경에서 이탤릭체로 된 부분을 삭제한 채 나온 것은 없다. 왜냐하면 1611년 이후에 23절의 후반부를 입증하는 그리스어 필사본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킹 제임스 성경은 당시에 어떻게 이 부분이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할 수 있었을까?

 

이전 역본들을 부지런히 비교”하였기 때문이다. 23절 후반부는 틴데일 성경(1525년)에는 없었으나 비숍 성경(1568년), 그 이전 위클리프 성경(1380년)에는 있었다. 틴데일 성경은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 본문에서 번역했기에 없지만 훨씬 이전 라틴어에서 번역한 위클리프 성경에는 들어 있었다. 때로는 내 손에 없다고 해서 정말 없는 것이 아니다.

 

③ 우리도 이전 역본들을 부지런히 비교함으로 루시퍼도 옳고 계명성(새벽별)도 옳다는 것이 허튼소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 루시퍼를 없애고 예수님의 호칭인 계명성, 새벽별, morning star, day star로 바꾼 성경들

1895년RV

1901년ASV

1917년JPS

1952년RSV

1960년NASV

1966년Jerusalem Bible

1970년New English Bible

1970년 NIV

1976년Good News Bible

1985년New Jerusalem Bible

1989년NRSV

 

※ 루시퍼로 번역된 성경들

425년 라틴 벌게이트 Latin Vulgate

1395년 Wycliffe

1535년 Coverdale

1540년 the Great Bible

1549년 Matthew

1557년 the Geneva Bible

1568년 Bishop Bible

1569년 스페인어 성경

1592년 Clementine Vulgate - 반동종교개혁인 트렌트 공회부터 1979년까지 로마카톨릭의 표준 성경

1609년 Douay–Rheims Bible - 로마 카톨릭의 최초 영어 성경

1611년 King James Bible

1833년 Webster's Bible

1890년 Darby

1954년 칠십인역 LXX 영역(英譯) - Lucifer ἑωσφόρος

1976년 the Living Bible

1979년 Nova Vulgata - 로마 카톨릭 표준 라틴어 성경

2009년 Catholic Public Domain Version

 

 

④ 사람들은 오랜 세월동안 루시퍼를 루시퍼로 알고 있었다. 이는 매우 보편적인 사실이었고 진실이었다. 1500년의 역사동안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이성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사야 14장 12절에는 루시퍼란 마귀 이름이 있어야 함을 알았다. 그러다가 19세기 말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시대 이후로 부패한 영어 성경들로 인해서 새벽별도 맞다는 주장이 급속히 확산되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부정확한 극소수의 출처에 의한 것이다. 카톨릭의 라틴어 성경도, 심지어 칠십인역도 루시퍼가 옳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이사야 14장 12절의 히브리어 단어 ‘헬렐’에 대한 정확하고 유일한 번역은 ‘루시퍼’이다. 이사야가 '헬렐'이라고 하면서 지적했던 그 자를 우리는 '루시퍼'하면서 바로 동일한 그 자를 지적하게 된다. 그는 마귀다.

 

출처: Keep Bible.com 

삶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졸졸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시냇물은 썩지 않듯이
날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언제나 활기에 넘치고, 열정으로 얼굴에 빛이 납니다.



고여있지 마시길.
멈춰있지 마시길.

삶은 지루한 것이 아닙니다.
삶은 권태로운 것이 아닙니다.
삶은 신선해야 합니다.
삶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삶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열중하고 몰두할 때
행복은 자연히 따라옵니다.
결코 아는 자가 되지 말고 언제까지나 배우는 자가 되십시오.



고민은 어떤 일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생기기보다는
일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데에서 더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망설이기보다는 불완전한 채로 시작하는 것이
한 걸음 앞서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새로움으로 다시 시작해 보세요.

그리고 어떠한 경우라도
마음의 문을 닫지 말고 항상 열어두도록 하세요.



마음의 밀물과 썰물이 느껴지지 않나요?
밀물의 때가 있으면, 썰물의 시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삶이란, 어쩌면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행운과 고난의 연속 드라마인 것을.



하루치의 발전된 삶이
아름다운 당신에게도 있었기를 소망합니다.


-아름다운 편지 중에서-

 

출처: 사모님사모님/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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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성경을 읽으며 단어를 찾거나 공부를 하다보면 스트롱 코드( Strong Code)라는 말이 많이 나오고 단어마다 매겨진 번호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스트롱 코드라 불리는 단어 번호표입니다.
 
다음은 공인본문 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 1절입니다.
여기서 각 원어 단어에 붙은 번호가 바로 스트롱 코드입니다.  
 
 
 
19세기 말 미국의 신학자이던 제임스 스트롱(James Strong 1822 – 1894)은 성경 연구의 편의를 위해서 구약과 신약의 원어 어근 단어마다 번호를 붙여놓고 어느 성경에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100여 명의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뽑아서 색인 사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총 히브리어 어근 단어(root word) 8674개와 그리스어 어근 단어 5523개를
KJV 성경을 기초로 해서 사용된 예를 찾아보기로 편찬해 놓은 책이
Strong's Concordance(스트롱의 콩코던스)입니다.    
 
 
보시면 알지만 1920쪽이나 되는 이 책 안에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거의 모든 단어들이 번호로 목록화되어 들어 있습니다.
 
20년 전에는 이렇게 두꺼운 책을 가지고 성경을 성경으로 푸는 연구를 하였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소프트웨어에 스트롱 코드가 들어 있어서 이런 책이 필요치 않습니다.
 
자세한 것은 위키피디아를 보기 바랍니다.
 
 
제임스 스트롱 (James Strong 1822 – 1894)은 미국 감리교 목사요, 성경학자였지만 킹제임스 성경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만든 원어 연구 도구를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현대 역본 역자들의 전철을 밟기 쉽습니다.

 

 

출처: Keep 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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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처럼 사는것이 현명한 삶 노자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최상의 방법은 물처럼 사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흐르는 물 그 물의 진리를 배우라는 것이다 첫째: 물은 유연하다 물은 네모진 곳에 담으면 네모진 모양이 되고 세모진 그릇에 담으면 세모진 모양이 된다 이처럼 물은 어느 상황에서나 본질을 변치 않으면서 순응한다 둘째: 물은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 물은 평상시에는 골이진 곳을 따라 흐르며 벼 이삭을 키우고 목마른 사슴의 갈증을 풀어준다 그러나 한번 용트림하면 바위를 부수고 또한 산을 무너뜨린다 셋째: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낮은 곳으로 흐르다가 물이 마침내 도달하는 곳은 드넓은 바다이다 사람도 이 물과 같이 모나지 않고 유연하게 다양한 사람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정의 앞에 주저하지 말고 용기 있게 대처하며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겸손하게 자기자신을 낮추는 현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 - 좋은글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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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우기와 채우기

        1. 게으른 사람에게 돈이 따르지 않고, 변명하는 사람에겐 발전이 따르지 않고,
        거짓말하는 사람에겐 희망이 따르지 않고,
        간사한 사람에겐 친구가 따르지 않는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에겐 사랑이 따르지 않고, 비교하는 사람에겐 만족이 따르지 않는다.

        2. 딱하다
        먹을 것이 없어 굶는 사람도 딱하지만,
        먹을 것을 앞에 두고도 이가 없어 못 먹는 사람은 더 딱하다.

        짝 없이 혼자 사는 사람도 딱하지만,
        짝을 두고도 정 없이 사는 사람은 더 딱하다.

        3. 땅과 정성
        땅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채송화씨를 뿌리면 채송화를 피우고,
        나팔꽃 씨를 뿌리면 나팔꽃을 피운다.

        정성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쁜 일에 정성을 들이면 나쁜 결과가 나타나고,
        좋은 일에 정성을 들이면, 좋은 결과가 나타난다

        4. 때문
        잘 자라지 않은 나무는 뿌리가 약하기 때문이고
        잘 날지 못하는 새는 날개가 약하기 때문이다

        행동이 거친 사람은 마음이 비뚤어졌기 때문이고
        불평이 많은 사람은 마음이 좁기 때문이다.

        5. 더하기와 빼기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알지만,
        좋은 생각에 좋은 생각을 더하면 복이 된다는 건 몇 사람이나 알까?
        * 욕심이 더하기를 할수록 행복은 자꾸 빼기를 한다.

        똑똑한 사람은 더하기만 잘 하는 것이 아니고
        빼기도 잘하는 사람이다.

        훌륭한 사람은
        벌기만 잘 하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 주기도 잘 하는 사람이다.

        행동하는 사람이 참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더하기 빼기를 잘하는 오늘이
        되세요

         
        출처: 사모님사모님/민들레홀씨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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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진 우주적인 교회

         

        교회 안에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으로 누구나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바울의 선언은 그들이 더 이상 죄로 말마암아 죽었던 존재이거나 하나님의 특권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었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업이며 하나님의 권속임을 증거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엡 2:19). 여기에서 성도들을 하나되게 하는 터전으로서의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모퉁이 되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서 있는 하나의 공동 운명체이다.

         

        이러한 개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교회 안에서 신자로서 함께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경험들과 관련된다.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개념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엡 1:23; 4:16).

         

        이런 점에서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0-22)고 밝히고 있다.

         

        고대 건축술에서 ‘주춧돌’은 전체 건물에 기초를 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단 하나의 터 위에 세워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 터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전파된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그 교회에 거처하시기를 원하신다. 특별히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는 성전의 지성소를 상징한다(F. F. Bruce).

         

        교회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성도들로 구성된 영적 몸이다(고전 3:16). 이런 점에서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성전이라고 부른다. 이 성전은 성령 안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는 유기적 생명체이다. 이것은 사도들이 전파한 복음의 터 위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범세계적으로 확장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William Handriksen).

        ‘육체를 따라 이스라엘’인 유대인들은 지방의 회당들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특정 지역에 있는 회당은 ‘온 이스라엘의 회중’이 지역적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현상을 새 이스라엘, 즉 교회에 적용시키고 있다.

         

        바울은 성도들의 하나됨, 곧 교회의 하나됨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울은 이 교회에 자신이 전파한 복음으로 신자들이 된 이방인들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 그리고 유대인 선교를 포함시켰다. 바울이 바쁜 선교 일정 중에서도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방인 교회들로부터 연보를 모금한 일에 최선을 다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울에 의하면 모든 성도들은 세례를 받음으로써 지역의 모임에 합해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옷입은 성도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하나의 영적인 실체의 일부를 구성했다. 성도들은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합해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 되었다.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고린도, 로마, 에베소, 예루살렘 등 어디에 있든지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그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본받아 그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함으로써 하나의 기독교적 교제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F. F. Bruce).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보편적인 교회관의 근거이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몸 그리고 성령의 전으로 표시된다. 그리고 이 교회는 하나이며 거룩하며 보편적이며 사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엡 2:14-18).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화목에 의한 구원론(엡 2:19-22) 위에 세워져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옛 이스라엘과 성전을 대신하고 유대인들과 이방인으로 분리시킨 옛 질서의 세계를 바꾸어 놓은 새로운 창조물이다. 교회는 새 사람들로 형성되는데 이는 인류의 대표이신 그리스도 안에 포함된 새 인류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몸을 구성한다.

         

        교회는 적대감이 극복된 영역이며 화목이 이루어진 영역이다. 또한 화평이 그 열매를 맺는 영역이며 세상을 위한 통일성의 가시적인 표지를 구성하는 영역이다.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진 자리이며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가 이루어진 곳이며 하늘과 땅 사이의 조화가 회복되고 무엇보다 아버지께 나아가는 특권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임재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 교회관은 더 이상 문자적인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유기적 공동체이다. 교회는 이미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동시에 아직 완전히 장성하지 않은 생명체이다. 이 교회에서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누리는 관계 그리고 성도들 사이의 관계를 통하여 더욱더 하나님을 위한 성소로 지어져 간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성장과 거룩에 의해 특징지어져야 한다(Andrew T. Lincoln).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얻은 새로운 특권적 지위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빚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셨으며 새로운 성전의 으뜸 돌이 되시며 그 안에서 모든 성도들이 서로 맞추어지고 성장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스도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이 교회를 세우셨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들의 의미에 대한 선포와 해석을 통해 평안의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참여한다.

         

        성도들이 사도와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개념은 그들이 누리고 있는 모든 특권이 사도와 선지자들의 복음 선포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도적 복음 선포에 의해 세워진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효과적으로 세상에 널리 펼쳐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이 땅의 교회는 ①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터, 즉 사도와 선지자들이 전한 복음 선포 위에 서 있다는 사실과 ② 그 터 위에 있는 자신들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효과적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개혁주의 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나를 위하여 
                        최송연

         
        나의 머리에 넘치도록

        겹겹이 쌓여만 가는
        추악한 생각들이
        기어이,
        정결한 당신 머리에

        가시관을 덮씌우고 말았습니다

        당신의 두 손에
        대못을 박은 것도
        나의 두 손으로
        움켜쥔 탐욕이 부른
        참혹하고도 모진 대가였습니다

        갈 곳 가지 말아야 할 곳
        돌아다닌 나의 허영심은
        당신의 두 발에
        대못을 박았고

        가슴에 품어서는 안 될
        정욕들이
        당신의 그 순결한 가슴에
        깊은
        창 자국을 내고야 말았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나를 위하여...
        갈기갈기 찢기시며
        마지막 피 한 방울 마저
        모두 쏟으셔야만 했습니다

        고난의 주님 그리스도여,

        나 이제 당신을 찬양합니다.
        나를 위한 당신의 그 죽음 때문에...
        내가 살아났음을....

        사랑의 아버지여,

        나 이제 엎드려 고백합니다
        영원토록, 나 또한,

        당신만을 사랑하겠노라고....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으로 입었도다."
        (이사야53: 5절 말씀)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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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심지어 독립 교회들 안에서조차 목사가 원어를 들먹이며 순진한 성도들을 주눅이 들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목사의 사명인 설교는 제대로 안 하고 설교시간에 성경 구절을 읽고는 그 안의 단어들이 원어로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자기만족의 우물에 빠진 목사들이 더러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성도들은 킹제임스 성경마저 교정해 버리는 목사의 원어 실력에 놀라서 감탄하지만 그들의 실제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영리한 목사들이 설교준비에 있어서 어려움에 봉착할 때 대개 들고 나오는 것이 원어입니다.
        모든 원어에는 여러 개의 뜻이 있으므로 목사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성경 단어를 바꾸어가면서 열변을 토하고 많은 경우 성경을 영해하기까지 합니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 절대적인 권위를 세우려는 악한 행위입니다.
         
        20세기 설교의 대가 중 한 분인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설교자에게 있어서 원어란 정확성을 살펴보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없다고 단언하면서 성경 원어에 과도한 가치와 필요성을 부여하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목사들의 목사라 불리는 워렌 위어스비 목사님도 설교 시간에 원어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 주어진 킹제임스 성경만으로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원어를 알아야만 성경을 알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큰 실수를 하신 것입니다. 원어를 능통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성경 원어 실력을 자랑하기 위해 나는 원어를 공부하는 MDiv. 석사 과정을 하느라 3~4년을 다녔고 다른 목사들은 원어를 다루지 않는 2년짜리 MA 석사 과정을 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실은 공부를 못해서 학점이 안 나왔거나 돈이 없어서 학교에서 일하면서 공부해서 학교를 더 다닌 것인지 누가 압니까? 어쨌든 신학교 오래 다닌 것을 마치 원어를 공부하기 위한 것으로 포장하는 자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책에서 글을 쓰면서 꼭 원어를 몇 자 적는 유명한 목사들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 자랑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지은 책의 제목이 자기 자랑입니다.
         
        이런 목사들에게 가서 “배가 아파서 오늘 교회에 못 갑니다.”를 히브리말이나 그리스말로 해 보라고 요청하면 백이면 백 모두 못 할 것입니다. 그들이 신학교에서 몇 년간 배운 원어 실력은 이미 성경 소프트웨어 등에 다 나와 있어서 누구라도 
        1시간만 공부하면 다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런 어리석은 자들의 꼼수를 간단하게 물리치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이전에 소개한 성경 소프트웨어 딜럭스 바이블을 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됩니다.
         
         
        거기에는 신구약 원어 성경이 모두 분해되어 있습니다.
         
        원어 분해로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위에서부터 히브리말, 품사 등 분석, 스트롱 번호, 우리말 성경(개역),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모든 단어에 대해 분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창조하다’라는 단어를 누르면 그 단어에 대해 거의 완벽하게 모든 설명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창1:1과 관련된 관주도 10개 이상 나와 있습니다.
         
         
                
        신약성경도 동일합니다.
         
         
         
         
         
        또한, 여기에는 방대한 성경 사전도 들어 있습니다. ‘가데스바네아’를 공부하고 싶으면 그 안에  A4 1장 분량의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여기서는 화면에 보여주기 위해 커트했음).
         
         
        또한, 여러 종류의 주석도 있어서 각 구절의 의미도 볼 수 있습니다.
         
        30만 원짜리 소프트웨어 하나면 이 모든 것이 한 번에 다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누가 원어를 통한 알량한 지식으로 여러분을 누르려 하거든 이 글을 보라고 하기 바랍니다.
         
        물론 성경 원어는 중요하고 알면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의 교회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로 자신의 말씀들(단어들)을 완벽히 보존해 두셨습니다. 또한, 한국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한글로 정확하게 번역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있습니다.
         
         
         
         
        자신이 졸업한 신학교 자랑, 신학교 다닌 햇수 자랑, 알량한 원어 자랑하는 목사는 하나님과 성도들을 기쁘게 하기 대단히 어렵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진리의 말씀을 먹여야 합니다. 설교시간을 원어 뜻풀이 시간으로 만들어서는 성도나 목사나 교회가 바르게 성장하지 못합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주님께서 자신의 수확 밭에 신실한 일꾼들을 속히 많이 보내주시길 기도합니다.
         
        샬롬
         
        출처: Keep Bible.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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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 킹제임스 성경의 사도행전 12장 4절에 나오는 ‘이스터’ 즉 ‘부활절’은 ‘파스카’라는 단어를 오역한 것이므로 다른 역본들과 같이 ‘유월절’로 번역해야 옳지 않을까요? <킹제임스 성경 답변서 질문 2>

         

        대답: 그렇지 않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이 사도행전 12장 4절의 ‘파스카’를 ‘부활절’로 번역한 것은 정확한 것입니다. 다음의 글이 그것을 잘 설명해 줄 것입니다.

        사도행전 12장 4절에서 ‘이스터’(Easter) 즉 ‘부활절’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파스카’(Pascha)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29번 나옵니다. 그중 28번은 주 하나님께서 이집트(애굽)를 지나시며 이집트의 처음 난 모든 것들을 죽이시고(출 12:12) 이스라엘 민족을 400년 간의 종살이로부터 자유하게 하신 날 밤과 연관되어 ‘유월절’(Passover)로 번역되었습니다.

         

        “완전한 성경이 있다.”라는 생각에 반대하는 많은 이들도 ‘Pascha’를 이렇게 번역해 왔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께서 권위를 부여하신 「흠정역 성경」에서 ‘이스터’라 번역된 단어를 발견하고는 「흠정역 성경」도 완전하지 않다는 증거를 포착했노라고 상상하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이들을 위해 참으로 좋은 소식이 있는데 그것은 이 문제에서도 그들이 또 틀렸다는 사실입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스터’는 고대 이교도들의 ‘아스타르테’(Astarte) 축제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쉬타르’(Ishtar)로도 알려져 있고 ‘이스터’(Easter)로도 발음됩니다. 이 축제는 항상 4월 하순경에 개최되었는데 사실 초기의 ‘이스터’ 축제는 겨울철이 지난 뒤 땅이 다시 부활하는 것을 기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축제에는 다산과 번식을 기념하는 의식도 수반되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음란 잡지인 「플레이보이」의 상징인 토끼와 달걀 등이 ‘이스터’ 축제일의 상징물로 쓰였는데 그것은 이것들이 번식력 즉 다산으로 매우 유명하기 때문입니다.

        ‘이스터’ 축제의 주인공은 여신 ‘아스타르테’였습니다. 이 여신은 성경에서 ‘하늘의 여왕’(Queen of heaven, 렘 7:18; 44:17-25)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담무스(Tammuz, 겔 8:14)의 어미이자 또한 그의 아내였습니다! 이 가증한 축제 의식은 ‘이스터’ 아침에 동틀 녘에 행해지곤 했습니다(겔 8:13-16). 예레미야서와 에스겔서의 기록에서 우리는 이교도들의 ‘이스터’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도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문제 제기

        유대인들의 유월절은 4월 중순(14일)에 개최되었고 이교도들의 축제였던 ‘이스터’는 같은 달에 좀 더 늦게 개최되었는데 그렇다면 사도행전 12장 4절에서 헤롯이 유대인들의 ‘유월절’이 아닌 이교도들의 ‘이스터’를 언급하고 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만일 헤롯이 구체적으로 유월절을 언급했다면 ‘Pascha’를 ‘이스터’ 즉 ‘이교도들의 부활절’로 번역한 「킹제임스 성경」은 틀렸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정말로 이교도들의 축제 절기인 ‘이스터’를 언급했다면 1611년 판 「킹제임스 성경」은 오늘날 인쇄되고 있는 성경 중에서 이 부분을 가장 정확히 번역한 유일한 성경이기에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4절에 있는 ‘이스터’(Easter)에 관한 혼란의 실타래를 풀기 위해 우리는 모든 문제에서 우리의 최종 권위가 되는 성경으로부터 조언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이 수수께끼의 자물쇠를 풀 수 있는 열쇠는 4절에서 발견되지 않고 3절에서 발견됩니다.

        또 그가 유대인들이 그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더 나아가 베드로도 잡으려 하였는데 (그때는 무교절 기간이더라.)

        우리가 찾고자 하는 답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무교절과 유월절의 관계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베드로가 ‘무교절 기간’(days of unleavened bread)에 붙잡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행 12:3).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첫째 유월절로부터 조사를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절기는 주님께서 이집트의 처음 난 모든 것을 치셨던 밤에 시작되었습니다. 그 날 밤 이스라엘 민족은 양을 죽여서 좌우 문기둥과 인방에 그 피를 바르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출 12:4-5). 자, 이제 성경이 첫 유월절과 무교절 즉 ‘누룩 없는 빵을 먹는 기간의 날들’에 대해 무어라 말하는지 살펴봅시다(출 12:13-18).

        13  그 피가 너희가 거하는 집 위에 있어 너희를 위해 표가 되게 할지니라.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내가 이집트 땅을 칠 때에 그 재앙이 너희 위에 임하여 너희를 멸하지 아니하리라.

        14  이 날은 너희에게 기념일이 될지니 너희가 이 날을 너희 대대로 주를 위한 명절로 지키고 규례에 따라 그것을 영원토록 명절로 지킬지니라.

        15  너희는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첫째 날에 너희 집에서 누룩을 제거할지니 누구든지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누룩 있는 빵을 먹는 혼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리라.

        16  첫째 날에 거룩한 집회가 있으며 일곱째 날에도 너희에게 거룩한 집회가 있으리니 이 두 날에는 각 사람이 먹는 일 외에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너희 중에서 오직 그 일만 할지니라.

        17  너희는 무교절을 지킬지니 이는 바로 이 날에 내가 너희 군대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왔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대대로 이 날을 지키되 규례에 따라 영원토록 지킬지니라.

        18  첫째 달 곧 그 달 십사일 저녁부터 그 달 이십일일 저녁까지 너희는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요,

        출애굽기 12장 13절에서 우리는 유월절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유래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양의 피가 문에 표시되어 있는 모든 집을 ‘넘어가시리라’(pass over)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여기에 나오는 ‘Passover’는 ‘넘어감’을 의미하며 따라서 ‘유월절’은 ‘넘어간 날’입니다. 우리는 유월절 이후에(출 12:13-14) 유대인들이 7일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어야 함을 보게 됩니다. 이 기간은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들’이며 그래서 무교절이라 부릅니다! 18절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무교절을 준수해야 하는 기간이 4월 14일부터 21일까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1)

        이 종교적인 절기들은 민수기 28장 16-18절에 더욱더 명백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첫째 달 십사일은 주의 유월절이며 또 이 달 십오일은 명절이니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을 것이며 첫째 날에는 거룩한 집회로 모일 것이요, 너희는 그 날에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16절에서 우리는 유월절이 그 달의 14일만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즉 15일부터는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들’ 즉 무교절이 시작됩니다(신 16:1-8).

        1  아빕 월을 준수하여 주 네 하나님께 유월절을 지키라. 아빕 월에 주 네 하나님께서 밤에 너를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오셨느니라.

        2  그러므로 너는 양과 염소 떼나 소 떼에서 취하여 주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에서 주 네 하나님께 유월절 희생물을 드리되

        3  그것과 아울러 누룩 있는 빵을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누룩 없는 빵 곧 고난의 빵을 그것과 아울러 먹을지니라. 이는 네가 이집트 땅에서 급히 나왔기 때문이니 이로써 네 평생 동안 네가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4  이레 동안에는 네 모든 지경 내에서 누룩 있는 빵이 보이지 않게 할 것이요, 또 첫째 날 저녁때에 네가 희생물로 드린 고기 중 조금이라도 온 밤이 지나도록 남겨 두어 아침까지 이르게 하지 말며

        5  또 유월절 희생물을 주 네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모든 성문 안에서 드리지 말고

        6  오직 주 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곳에서 네가 이집트에서 나오던 때 곧 저녁에 해 질 때에 거기서 드리며

        7  주 네 하나님께서 택하실 곳에서 그것을 구워 먹고 아침에 돌이켜서 네 장막으로 갈 것이니라.

        8  너는 엿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고 일곱째 날에는 주 네 하나님께 엄숙한 집회로 모이며 그 날에 아무 일도 하지 말지니라.

        1절의 아빕 월은 지금의 태양력으로 4월인데 원래는 히브리 민간력으로 7월이었지만 이집트 탈출을 기념하기 위해 종교력의 1월로 삼은 달입니다(출 12:2). 위의 신명기 구절에서 우리는 유월절 양이 그 첫날밤에 희생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신 16:1). 동틀 녘(겔 8:13-16)이 아니고 해질 때(신 16:6)에 유월절을 기념했다는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는 사실입니다. 역대기하 8장 13절에서 우리는 무교절이 연중 유대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3대 절기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명령에 따라 날마다 정한 비율로 안식일과 월삭과 한 해에 세 번 지키는 엄숙한 명절들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장막절에 드렸더라.

        유월절은 항상 무교절 전에 있었습니다. 역대기하 30장에서 보면 정월에 유월절을 지킬 수 없었던 유대인들은 이월에 지키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날짜는 항상 같았습니다.

        그때에 둘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 어린양을 잡으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부끄러워하며 자신을 거룩히 구별하고 번제 헌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이르러 … 예루살렘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이 크게 즐거워하며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고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은 날마다 주를 찬양하며 큰 소리 나는 악기로 주께 노래하였고 (대하 30:15, 21)
         
        포로로 사로잡혀 갔던 자들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켰으니 … 이레 동안 기쁘게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주께서 그들을 기쁘게 하시고 또 아시리아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리사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집의 공사를 할 때에 그들의 손을 강하게 하셨기 때문이더라. (스 6:19, 22)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조사한 결과 사건의 순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4월 14일에 양을 잡습니다. 이것이 유월절입니다. 14일 이후에 행하는 그 어떤 사건도 유월절이라 불리지 않습니다.

        둘째, 4월 15일 아침부터 무교절로 알려진 기간 즉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들’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유월절이 언급될 때마다 이 명절이 4월 14일 저녁에 ― 결코 한 주간 내내가 아님 ― 먹어야 하는 음식 즉 유월절 어린양과 관련된 명절임에 주의해야 합니다.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들’ 즉 무교절 ‘기간’(days)이 유월절(day)로 언급된 적은 결코 없습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주님의 천사가 하룻밤 동안에 이집트를 넘어갔지 결코 잇따라서 7일 밤 동안 넘어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자! 이제 사도행전 12장 3-4절을 봅시다.

        또 그가 유대인들이 그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았으므로 더 나아가 베드로도 잡으려 하였는데 (그때는 무교절 기간이더라.) 그가 베드로를 붙잡아 감옥에 가두고 군사가 넷씩인 네 소대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으니 이것은 이스터가 지난 뒤에 그를 백성에게로 끌어내려 함이더라.

        3절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무교절 기간(4월 15-21일 사이)에 체포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때는 무교절 기간이더라.”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때는 이미 유월절(4월 14일)이 지난 뒤였습니다. 헤롯이 이 구절에서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을 언급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번 유월절은 일 년 후에야 오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1년 동안 베드로를 감옥에 넣어 두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며칠 있으면 이교도들의 축제 성일인 ‘이스터’가 오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헤롯은 ‘하늘의 여왕’을 숭배하던 이교도 로마인이었습니다. 그는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킬 까닭이 없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가 유대인들을 화나게 할까 봐 유월절이 끝나길 기다렸을 것이라고 이야기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두 가지 큰 오류가 있습니다.

        첫째, 베드로는 더 이상 유대인으로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대교와 절교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헤롯의 행동에 화를 낼 까닭이 없었습니다.

        둘째, 헤롯이 유대인들이 종교적 축제일에 사람을 죽이는 것을 원치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므로 유월절이 지나기를 기다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미 유월절 기간 중에 예수님을 죽인 바 있습니다(마 26:17-19, 47). 그들은 또한 헤롯이 야고보를 죽인 것을 보고 흥분했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대중들은 종교적 축제 기간 중에 ― 축제 이후에가 아니라 ― 얼마든지 난폭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로마인으로서 헤롯의 위치를 생각해 보아야만 하며 또한 헤롯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어떤 날을 기념하는 일로 매우 유명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마 14:6-11). 사실 마태복음 14장에서 우리는 헤롯이 자기의 생일 축하 기간 중에 하나님의 사람을 기꺼이 죽이려 했음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이 유월절이 이미 지난 뒤인 무교절 기간에 베드로를 체포했음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날들’ 즉 무교절 기간은 4월 21일에 끝났을 것이고 그 즉시 이교도 헤롯이 지키던 이교도들의 축제 즉 ‘이스터’가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헤롯은 ‘이스터’까지 기다리기 원했기 때문에 베드로를 무교절 기간 중에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유대인(마 26:17-47)이나 로마인(마 14:6-11)이나 다 종교적 축제 기간 중에 사람을 죽이려고 했으므로, 헤롯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축제 기간 중에 ‘베드로를 죽이는 즐거움’을 갖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대신에 그는 자기 자신이 지키던 이교도의 축제일인 ‘이스터’까지 기다려서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 베드로가 죽는 것을 보려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성령 충만한 우리의 성경 즉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파스카’를 ‘이스터’ 즉 ‘이교도들의 부활절’로 바르게 번역한 것이 하나님의 큰 섭리였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확실하게 유대인들의 유월절에 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킹제임스 성경」을 제외한 다른 모든 성경에서 사도행전 12장의 ‘이스터’를 ‘유월절’로 바꾼 것은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일이며 동시에 그 당시 상황의 진실을 흐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김재근 | 14-12-09 20:16
        영어 이스터를 현대 그리스어에서  여전히 파스카라고 합니다.
        출처: Keep Bib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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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기억 속의 그대
            최송연

                     

                    내 기억 속에 늘 아름다운 그대,

                    따뜻한 배려가 있는 마음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감사한 그대,

                     힘들 때 따스하게 손잡아 준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불쌍한 그대,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모습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부러운 그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용기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영원히 간직하고픈 그대,

                    한없이 쏟아부어준 그 사랑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지우고 싶은 그대,

                    내게 아픔을 준 모진 말들 때문입니다.


                        내 기억 속에 늘 안타까운 그대,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매일 매 순간, 그대 하는 말이, 그대 행동이
                       너와 나,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임을...

                    사랑으로 수놓으며 예쁘게 살아요,우리.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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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이들이 왜 성경 신자들은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이 바른 성경이라고 주장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이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성경 보존과 관련된 여러 가지 복잡한 주제들에 관해 논해야 하므로 우리는 여기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최대한 명쾌하고 단순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네 조상들이 세워 놓은 옛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잠22:28).
                 
                이 말씀에서 지계표(landmark)란 측량사가 사용하는 용어로서 보통은 땅의 경계를 표시하는 어떤 물건을 뜻한다. 지계표 즉 랜드마크는 멀리서 보고 위치 파악에 도움이 될 만한 대형 건물 같은 것을 말하기도 하고 어떤 지역을 대표하거나 구별하게 하는 표시를 뜻하기도 하며 항해자를 위해 사용되는 육상 경계를 가리키기도 한다. 측량에서 랜드마크는 대단히 중요하므로 마음대로 랜드마크를 치우거나 변경하는 것은 여러 지역에서 불법이다.

                기독교는 그 자체에 권위를 부여하고 믿음과 실행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한 가지 문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전서(The Holy Bible)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행하는 모든 것의 절대적이고도 최종적인 기초가 성경이므로 우리는 반드시 성경이라는 이 랜드마크가 확실한지 혹은 변경되지는 않았는지 늘 신경 써야 한다.

                지난 2,000여 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복음이 선포되며 성경을 믿는 모든 교회들이 거의 모든 지역에서 항상 공통적으로 수용해 온 그리스어 본문과 히브리어 본문, 그리고 이것들에서 번역된 역본들만을 사용해 왔다. 이런 본문은 과거의 거의 모든 교회가 받아들였기에 보통 수용 본문(Received Text)이라 불리기도 하며 또 공통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의 공인(共認) 본문이라 불리기도 한다. 지난 20세기 동안 성경 신자들은 자기들 시대에 존재하던 그리스어/히브리어 사본들을 모았는데 이것들의 99%는 거의 모든 면에서 서로 일치한다. 이처럼 절대다수를 이루는 다수 사본들이 바로 이 공인 본문의 기초가 되었다.

                1604년에 영국의 제임스 왕(제임스 1세)은 햄튼 코트 회의에서 제네바 성경, 비숍 성경 등 기존 성경들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보통 사람들의 손에 공통 성경을 들려주어야 한다는 여러 사람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새로운 성경을 번역해서 출간할 것을 허락하였고, 그 결과로 1611년 5월 2일에 태어난 것이 바로 왕의 권위를 부여받은 킹제임스 성경이다. 제임스 왕은 영국 교회에서 50여 명의 당대 최고의 그리스어/히브리어 학자들을 선정하여 번역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사도 시대부터 그 당시까지 성경대로 믿는 모든 성도들이 거의 모든 곳에서 공통적으로 수용하여 사용해 온 그리스어/히브리어 사본들과 거기에서 이미 번역된 여러 역본들을 부지런히 비교하고 검토하여 새로운 성경을 번역하였다.

                이들이 만들어 낸 킹제임스 성경은 1611년에 반포된 이후로 지난 400년 동안 영어를 사용하는 모든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인쇄되고 가장 많이 읽히며 가장 널리 보급된 보편적 성경이 되었다. 물론 킹제임스 성경의 출간 이전에도 공인 본문에 근거하여 번역된 여러 종류의 영어 성경이 존재하였고 또 성경 출간 빈도도 높았지만 킹제임스 성경의 출간 이후로는 그밖에 다른 영어 성경의 번역 자체가 모두 자연스레 중단되었다. 킹제임스 성경을 읽은 독자들 사이에서 “이 성경은 왕의 권위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성경이다.”라는 확신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광고나 홍보도 없이 하나님께서 승인해 주신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권위역 성경>(Authorized Version)으로 온 세상에 자유로운 행로를 가지며 뻗어 나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켰고 오대양 육대주를 복음화시켰으며 그 이후에 나온 여러 나라의 수많은 성경 번역의 기초가 되었고 대부분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리들의 근간이 되었다.

                성경의 내용 번역은 물론 신학 용어 번역에 있어 만인이 수긍할 수 있는 기본 역본이 없다면 상당한 혼돈과 분파를 초래할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 킹제임스 역본이라는 걸출한 역본이 있어서 1611년 이래 수백 년 동안 성경 역본과 신학의 기본 용어를 제공하는, 만인이 수긍하고 공인하는 기본 자료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여 왔는바 이 점에 있어서 킹제임스 역본의 공헌은 잊히지 아니할 것이다. 상술하면 킹제임스 역본은 영어는 물론 세계 각 나라 언어로 성경이 번역될 때 참고가 되는 제1의 통일자료로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영어의 세계적 발흥과 아울러 킹제임스 역본의 내적 우수성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이다(톰슨대역 한영성경, 기독지혜사, 부록 1, pp.4, 1989).

                사실 현시대에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성경 전쟁의 실체는 다수 본문만을 수용해 온 기독교와 소수 본문만을 고집해 온 천주교의 대립이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의 대적자 마귀가 있다면 마귀는 당연히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키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서고 쓰러짐은 성경책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 보존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훼손시키려는 마귀의 집요한 공격이 세상의 창건 이후로 늘 존재해 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예수님의 지상 사역 이후로 신약성경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선포되면서 그에 비례해 말씀을 변개시키려는 마귀의 시도 또한 점점 더 강하게 나타났다. 이러한 마귀의 공략은 주로 역사 속에서 천주교회로 알려진 바빌론 음녀 교회를 통해 실현되어 왔다.

                사도 시대 이후로 마귀는 오리겐, 유세비우스, 제롬 등의 부패한 서기관들을 이용하여 행위 구원과 마리아 숭배를 가르치는 천주교 교리에 적합하도록 부단히 성경 본문을 변개시켜 왔다. 주후 500년경부터 약 천 년 동안 왕권마저 능가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는 1517년에 마르틴 루터라는 수도승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그가 공인 본문을 근거로 번역한 독일어 성경에 힘입어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에 막강한 영향을 미치면서 교황의 천주교를 초토화시켰다. 1534년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수장령을 통해 천주교를 몰아내고 영국 국교회를 국가의 종교로 세움에 따라 천주교는 힘을 잃게 되었다. 또한 1588년에는 당시 세상을 지배하던 천주교 국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 의해 대패하였고, 엘리자베스 여왕 이후로 영국은 온 세상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세상을 통치하게 되었다.

                보통 사람들의 손에 성경이 주어지면 천주교의 무지와 미신과 맹신이 다 드러나므로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은 중세 암흑시대에 성경을 금서(禁書)로 만들어 보통 사람들이 볼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라스무스, 틴데일, 루터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보통 사람들의 손에 성경이라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영적 무기를 들려주셨다.

                특별히 성경은 1450년경에 발명된 구텐베르크의 인쇄기를 통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전 유럽에 보급되었다. 이처럼 보통 사람들의 손에 성경을 들려주려는 하나님의 섭리와 이에 순응하며 목숨을 내걸고 일을 수행한 신실한 성도들 노력의 금자탑이요 결정체가 바로 1611년에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공통어인 영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킹제임스 성경이다.
                종교개혁에 이어 루터의 독일어 성경, 디오다티의 이탈리아어 성경, 올리베땅의 프랑스어 성경, 레이나/발레라의 스페인어 성경, 그리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 등이 유럽 대부분 국가의 보통 사람들의 손에 들어가면서 천주교 안에 팽배한 미신의 정체가 드러나자 로마 카톨릭 교회는 거의 회복되지 못할 정도의 치명타를 입게 되었다.

                이에 천주교회는 잃어버린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1540년에 로욜라를 중심으로 하는 예수회(Jesuit)를 형성하여 반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지난 500년 동안 예수회는 유럽에서 ‘예수 없는 예수회’라 불릴 정도로 악한 일을 많이 하여 심지어 세속 역사가들에게까지 손가락질받기도 했다. 또한 천주교회는 성경 본문에 관하여는 본문 비평(Textual criticism)이라는 도구를 개발하고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포장하여 프로테스탄트 신학교에 집어넣기 시작하였다.

                잘 알다시피 인쇄술의 발명 이전에는 사람들이 일일이 성경을 손으로 써서 사본들을 만들어야 했으므로 사람들의 손으로 필사된 사본들을 만드는 작업에는 필사자들의 피로 누적 등으로 인해 실수가 나올 수 있었다. 본문을 확정하는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현존하는 사본들을 살펴보고 그런 사본들 사이의 차이를 발견한 뒤 잘못 표기된 단어나 첨가 혹은 삭제된 단어가 있으면 서로 의견을 모아 정확한 독본이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에라스무스나 베자 혹은 스테파누스와 엘지버 형제들 같은 이들은 선한 의도로 다수 사본에 대한 확신을 가진 채 이런 작업을 수행하여 천주교를 제외한 모든 교회가 1,500년 동안 공통적으로 수용한 공인 본문을 만들어 냈다. 그러므로 사본들을 비교하여 정확한 본문을 만드는 기초 작업은 선한 일이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본문 확정 작업이 직업주의에 오염된 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본문 비평이라는 학문이 될 때에는 큰 문제가 생긴다. 이런 본문 비평가들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 속에서 소실된 성경 본문을 자기들의 힘으로 복원할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이다. 본문 비평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본문을 섭리로써 보존해 주심을 믿지 않으며, 본인들의 노력으로 인간들의 창작물에 불과한 다른 고대 문학 작품을 비평하듯이 성경 본문을 비평하려 한다. 다음은 한국의 유명 본문 비평 학자의 말이다.

                새로운 사본들의 지속적인 발견과 본문 비평이라는 학문의 발전으로 점점 더 고대의 훌륭한 본문을 회복하는 길이 열리고 있다. 성서의 본문이 변한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성서의 본문이 변하기에 우리는 성서를 우상화하지 않는다. 성서를 하나님으로 삼지 않고, 우리 믿음의 선배들을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성서 자체가 하나님이 아니라 성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모습이 계시된다는 것이다. 또한 성서의 본문이 변하기에 성서가 살아 움직여 우리에게 늘 새로운 말씀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죽은 텍스트가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텍스트이다. 성서는 가지고 다니면서 받들어 모셔야 할 책이 아니라, 읽고, 명상하고, 고민하고, 연구해야 할 책이다(<신약성서, 우리에게 오기까지>(대한기독교서회, 민경식 지음, 176쪽)).

                성경 신자들의 눈에 이런 글을 쓴 사람은 불신자와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보이지만 세상 사람들이나 세상과 타협하는 대부분의 교회는 이런 사람을 위대한 신학자로 추앙한다. 현재 많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본문 비평은 실은 천주교회가 종교개혁을 무력화하려는 목적으로 도입한 도구로서 학문의 상아탑이라는 미명하에 기독교 안에서 대단히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천주교회의 본문 비평에는 내재된 원칙이 있다. 그것은 곧 후대 사본들에는 필사자들의 실수가 축적될 가능성이 크므로 오래된 사본일수록 성경의 원문에 가깝다는 믿음이다. 그러므로 본문 비평가들은 후대의 사본들이 아무리 많아도 상대적으로 수가 훨씬 적은 오래된 사본에 더 많은 신뢰와 권위를 준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그들이 가장 신뢰하는 사본은 바티칸 도서관에 보존된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산 동방 정교회 수도원에 보존된 ‘시내 사본’이다. 이것들은 주후 4세기경에 필사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초기 교회들이 천주교회의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 사본 같은 소수 사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거의 모든 곳에서 공인 본문 사본만을 사용하였고 그 사본이 닳아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면 조심스레 그것을 필사하고 불태워버렸다. 이런 이유로 초기 교회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오래된 사본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워낙 많은 교회들이 이런 사본들만을 사용하였으므로 이런 계통의 사본들은 현존하는 사본들의 99%를 차지할 정도이며 유럽과 아프리카, 팔레스타인 등의 기독교가 전파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반면에 대음모자 콘스탄틴 황제의 꼭두각시였던 유세비우스가 황제의 명령을 받아 필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티칸 사본이나 시내 사본 등은 아무도 사용하지 않은 채 바티칸 도서관과 시내 수도원에 고이 간직되어 왔다. 또한 초기 교회 성도들은 재정이 넉넉하지 않아 값싼 파피루스에 대부분의 사본들을 필사하였기에 이것들을 오래 보존하기 어려웠으나 바티칸 사본 등은 벨럼이라는 가죽에 필사되어 장기간 보존될 수 있었다. 개역성경이나 현대 역본들의 각주에는 종종 “더 좋은 사본 혹은 더 신뢰할 만한 사본 혹은 더 오래된 사본에는 이 구절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언급되는 ‘더 좋은 사본’, ‘더 신뢰할 만한 사본’, ‘더 오래된 사본’은 한결같이 천주교회의 소수 사본을 가리킨다.

                학문이라는 가면을 쓰고 신학교로 들어온 본문 비평은 19세기 후반에 절정을 이루었고, 영국에서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웨스트코트(B. F. Westcott)와 호르트(F. A. Hort) 박사에 의해 널리 파급되었다. 이들은 천주교 사상과 이교주의, 그리고 독일의 이성주의에 물든 자들로서 다윈의 진화론을 찬양하고 마리아 숭배를 옹호하며 유령 길드 같은 심령술 단체를 만들어 자유주의 이교도 신학을 전파하였다. 이들은 쎄이어(J. H. Thayer)와 스미스(V. Smith) 같은 유니테리언 이단들과 함께 영국 성경 개정 위원회를 조직한 뒤 킹제임스 성경의 근간이 된 공인 본문을 교묘하게 비평하면서 자기들만의 독특한 이론으로 수정 본문을 만들고 여기에 근거하여 1881년에 <영국개역성경>(English Revised Version, ESV)을 출간하였다. 이들이 바티칸 사본과 시내 사본을 근거로  공인 본문을 개정하여 만든 부패한 본문은 보통 ‘비평 본문’ 혹은 ‘수정 본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귀의 사주를 받은 이 케임브리지 학자들의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개역성경>은 빛을 보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갔고, 그것의 미국 판인 <미국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 ASV) 역시 1901년에 출간되었으나 성도들에게서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한국의 개역성경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이론이 신학문으로 추앙받던 시기에 부패한 ASV를 주요 원천으로 해서 번역되었기에 이런 불신 학자들의 잘못된 사상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즉 최근에 킹제임스 성경이 번역/출간되기 전까지 한국에서는 복음이 전파된 이래로 공인 본문에서 번역된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바로 이것이 한국 성경들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비록 ESV, ASV 등이 실패하였지만 천주교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이 뿌려놓은 성경 의심 사상은 그 이후로 신학문이라는 미명하에 줄기차게 프로테스탄트 신학교들로 파고들어가 지금은 전 세계의 거의 모든 신학교가 천주교회가 만든 ‘비평 본문’을 성경 원어 강좌의 본문으로 채택하여 가르치고 있다. 또한 이에 반대하는 학자들은 학교나 학계에서 설 곳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거의 모든 원어 학자들이 한목소리로 천주교의 소수 본문을 옹호하고 있다.

                한편 1611년에 출간된 킹제임스 성경은 마귀의 이러한 거센 공격에도 전혀 굴하지 않고 영국과 미국이 지배하는 영어 세상에서 ‘유일한 성경전서’(The Holy Bible)로 자리를 굳혀 왔다. 이에 마귀는 본문 비평과 학자들의 힘만으로는 성경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는 이 세상 미디어를 지배하는 언론 재벌 머독(R. Murdoch)이 소유한 존더밴(Zondervan)이라는 출판사를 이용하여 1970년경부터 <신국제역>(New International Version, NIV)이라는 사역(私譯) 성경을 만들어 냈다. 머독은 하퍼 콜린스라는 세속 출판사를 운영하며 <사탄경>(Satanic Bible)을 출간하고 있고 최근에는 토마스 넬슨 출판사를 매수하여 뉴킹제임스 역본(NKJV)을 출간하고 있다(이름에는 킹제임스가 들어가지만 이것 역시 부패된 성경임). 그는 상업적 이윤 추구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경제인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경 사업으로 이득을 취하기 위해 수많은 광고와 함께 대규모 신학교의 교수들을 집필진으로 활용해 NIV를 홍보하면서 성경 시장을 서서히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 결과 40년이 지난 지금은 현대 역본들이 미국 성경 시장의 50% 정도를 잠식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세상 교회는 배도의 길을 걸을 것이고 마귀가 장악한 천주교회는 계속 득세하여 사람들을 유혹할 것이므로 부패된 현대 역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지한 자들을 계속해서 낚아챌 것이다. 그러므로 말세의 배도하는 때에 천주교와 또 천주교를 배경으로 하는 현대 역본들의 세력을 꺾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시해 놓으신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이므로 거의 일어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말세에는 천주교가 주도하는 이런 대규모 배도가 당연히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마귀가 날뛰고 성경을 변개시켜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원한 구원을 흐릿하게 하며 재림과 휴거와 천국의 소망을 불투명하게 만들어도 성경 신자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확고하게 믿음을 지킬 수 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공중에서 강림하셔서 우리를 하늘로 끌어올리실 때까지 하나님께서 만국의 공통어인 영어로 완전하게 보존해 주신 성경이 지금 우리 손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 전쟁에서 한국은 미국/영국과 조금 상황이 다르다. 미국/영국은 약 400년 동안 완전한 성경이 독주하다가 19세기 말부터 마귀의 현대 역본들이 출간되면서 야금야금 그 세력을 갉아먹는 상황에 놓여 있다. 반면에 한국은 처음부터 천주교 사본에 근거한 개역성경이 독보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겨우 몇 년 전부터 킹제임스 성경이 번역/출간되어 이제 막 성경 전쟁이 시작되고 있다. 또한 한국에는 성경만을 믿음과 실행의 절대적 근거로 삼으려는 성도들이 상당히 많다. 이런 성도들이 성경 전쟁의 본질을 이해하고 전쟁에 뛰어들게 되면 개역성경이 가져다준 ‘한국적 기독교’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킹제임스 성경에 의한 ‘성경적 기독교’가 세워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이런 진리를 먼저 깨달은 성도들이 최선을 다해 바른 성경을 한국의 성도들에게 알려 이 땅에 바른 교회가 세워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았으므로 이제는 왜 우리가 킹제임스 성경만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이라고 믿는지 몇 가지 이유를 기술하고자 한다.
                 
                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모든 단어들을 보존해 주시겠다고 친히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아들이 아니시니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분께서 말씀하셨은즉 그것을 행하지 아니하시리요? 그분께서 이르셨은즉 그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시리요?(민23:19)

                하나님은 우리 같은 연약한 창조물이 아니시다. 그분은 친히 말씀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시며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분이시다. 이 하나님이 성경 말씀에 대해 무어라고 하셨는가?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단어들]이니 흙 도가니에서 정제하여 일곱 번 순수하게 만든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그것들을 지키시며 주께서 그것들을 이 세대로부터 영원히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들[단어들]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단어]이 있어야 살 수 있다고 하셨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4).

                지금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의 모든 단어가 이 땅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들을 확실히 보존해 주시기 위하여 성경을 마무리하시면서 성경 변개자들을 엄중히 심판하시겠다고 경고까지 주셨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계22:18-19).

                이처럼 성경 변개자들에 대한 엄중한 심판이 적용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오늘날 완전하게 보존된 성경이 만국 공통어로 보존되어 있어야 한다. 또한 계시록 22장의 말씀처럼 현대 역본들을 지지하며 하나님의 말씀의 변개를 옹호하는 목사들과 학자들은 엄중한 심판의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말씀 보존의 약속에 따라 이 땅에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담은 완전한 성경이 적어도 한 권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자, 이제 여러분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개역성경과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들고 비교해 보기 바란다. 또한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 NIV, NASB, NKJV, 리빙 바이블, 메시지 등을 비교해 보기 바란다. 일단 개역성경(개역개정)을 포함한 현대 역본들은 신약성경에서만 적어도 13구절을 완전히 삭제하고 이를 ‘없음’으로 표기해 놓았다(이 책자의 뒤표지 참조). 정직한 독자라면 ‘없음’이 없는 성경과 ‘없음’이 있는 성경들을 비교한 뒤 그것들이 다 같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는 “몇 구절이 빠지거나 단어가 삭제되거나 첨가되어도 기독교의 근본 교리에는 변함이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과 목사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글 다음에 나오는 성경 분석을 읽어보면 누구라도 그들의 이런 주장이 거짓임을 금세 알 수 있다.

                또한 지금 우리는 교리의 변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모든 단어들을 지금 이 시간까지 보존할 수 있는 분이신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분에게 이런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그분께서 무에서 유로 온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을 6일 동안 창조하실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죽어 땅속에 묻혀 썩어서 몸의 모든 원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공중에서 강림하실 때에 수없이 많은 성도들 몸의 원소들을 다 모아서 그들을 일으켜 세우실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는 부활이나 창조보다는 말씀 보존이 훨씬 더 쉬운 일이 아닌가?

                성도로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인지 아닌지 반드시 검증해 보아야 한다. 자신의 내면에 쌓인 편견을 버리고 양심적으로 검증하면 할수록 오직 킹제임스 성경만이 하나님의 모든 단어를 담고 있고 그 외의 다른 역본들은 부실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있으면 어린아이라도 그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이 문제는 단순하고 명쾌하다. 이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며 평생을 연구해야 하는 일도 아니다.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단 몇 시간만 투자하면 누구라도 성경의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킹제임스 성경은 왕의 명령에 따라 왕의 권위로 만들어진 유일한 성경이다.

                이런 사실이 완전한 성경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의아해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현대 역본들은 여러 교파의 다양한 신학적 배경과 이권을 가진 자들을 편집위원으로 두고 있다. 그러므로 위원들은 당연히 어떤 식으로든 자신들의 신학과 배경에 맞게, 또한 출판업자의 의도에 맞게 본문을 번역하려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의도하신 원래 뜻이 아니라 집필자들의 의견이 반영된 번역이 최종 산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킹제임스 성경에는 ‘음행’(fornication)이라는 단어가 여러 차례 나오며 성도들이 음행을 피해야 한다고 경고한다(갈5:19; 엡5:3 등). 그런데 NASB 등의 현대 역본들은 이것을 ‘부도덕’(immorality)으로 바꾸어 버렸다. 부도덕과 음행은 완전히 다른 말이다.

                킹제임스 성경은 동성애 하는 자들을 ‘sodomites’ 즉 소돔 성에서 동성애 하던 자들이라고 분명히 부르지만 NKJV 등의 현대 역본들은 이것을 ‘비뚤어진 자들’(perverted persons)로 애매모호하게 바꾸어 버렸다(왕상14:24 등).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번역하면 동성애나 음행이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이 시대에서는 활발한 성경 판매를 기대할 수 없으므로 저들은 의도적으로 이렇게 단어들을 바꾸어 버렸다. NIV의 편집자 중 하나인 몰렌코트 박사는 자신이 여성 동성애자임을 온 세상에 스스럼없이 밝히고 있으며 하나님은 여성들끼리 혹은 남성들끼리 순수하게 사랑하는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은 왕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번역자들이 사사로운 감정이나 신학을 번역 과정에서 집어넣을 수 없었다. 더욱이 번역하는 내용을 번역자들끼리 서로 돌아가며 수십 번 일일이 검토하였으므로 사적인 번역이 생길 가능성도 없었다. 또한 제임스 왕 자신이 그리스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하였으므로 종종 번역을 검토하였다. 그러므로 사사로운 감정으로 본인들의 특정 신학이나 사상을 본문에 집어넣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단지 연약한 도구로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있는 그대로 번역하여 보통 사람들에게 전달하려 하였을 뿐이다.

                킹제임스 성경이 출간되기 전인 1560년에 스위스의 제네바에서는 칼빈의 추종자들이 제네바 성경이라는 프로테스탄트 성경을 만들었다. 제네바 성경 역시 공인 본문에서 번역되었지만 칼빈의 신정정치 개념을 여기 저기 집어넣어 결국 사적인 성경이 되고 말았다.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해 1590년경부터 미국에 넘어간 청교도들이 가져간 성경이 바로 제네바 성경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칼빈주의라는 비성경적인 사적 해석이 들어간 제네바 성경에 복을 주시지 않았고 오히려 미국에서는 그 이후에 들어온 킹제임스 성경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모든 미국 사람들의 헌법과 정신세계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런 면에서 왕의 명령에 의해 교리적 편견 없이 번역된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로 보존된 성경임을 역사가 보여 준다.

                제임스 왕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합병하여 초대 영국의 왕이 된 사람이다. 그에게는 여러 가지 치적이 많지만 그는 역사 속에서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인물로 남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름을 딴 성경을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남겨 주셨고, 그 결과 그는 세상의 어떤 왕보다도 사람들에 의해 많이 이름이 불리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제임스는 야고보라는 유대인들의 이름을 영어로 표현한 것이다. 야고보는 야곱을 나타내는데 이 야곱은 곧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킹제임스 성경은 곧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성경’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이보다 더 좋은 이름이 어디에 있을까?

                3. 킹제임스 성경은 지난 400년 동안 단 한 번도 개정된 적이 없는 성경이다.

                이것은 실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요즘과 같은 컴퓨터 시대에 워드프로세서로 작성되는 현대 역본들 안에는 많은 실수들이 있어서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판이 바뀌곤 한다. NIV, NASB, NKJV, 리빙 바이블 등 현대 역본들이 모두 다 이런 같은 과정을 겪었고 개역성경도 수십 차례의 변화를 겼었으며 심지어 최근에 나온 개역개정판도 나오자마자 수차례 판이 바뀌고 있다. 킹제임스 성경은 철자법 변화를 반영한 것을 제외하고는 지난 400년 동안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고 거친 세파를 이겨내며 지금까지 완전한 본문을 전달하고 있다. 이런 성경이 역사 속에서 단 하나라도 있었단 말인가?

                4. 모든 현대 역본들은 하나같이 다 킹제임스 성경만을 반대한다.

                영어권에서는 NIV, NASB, NKJV, 리빙 바이블, 메시지 등 수백 종류의 역본들이 있다. 이런 역본들은 늘 “본 성경은 킹제임스 성경보다 좋다.”는 광고와 함께 출간된다. 어떤 현대 역본도 킹제임스 성경 이외의 다른 성경을 비교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킹제임스 성경을 공략하는 것이 그런 역본들의 가장 큰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성경 표지의 이름은 달라도 그 역본들이 다 천주교 사본에서 나온 사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황은 가만히 보좌에 앉아 성경 전쟁을 관람하면서 조금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는 NASB를, 킹제임스 성경의 냄새가 나는 성경을 원하는 자들에게는 NKJV를, 젊은이들에게는 NIV를, 아이들에게는 리빙 바이블을, 성경을 소설처럼 읽기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바이블을,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의역성경인 앰플리파이드 바이블(Amplified Bible)을 던져 주고 있다. 이들이 무슨 성경을 보든지, 그것이 킹제임스 성경이 아닌 현대 역본이기만 하면, 마귀나 교황이나 천주교에게는 모두가 남는 장사이다. 번역의 형식과 표현, 겉표지가 다를 뿐 내용은 다 같기 때문이다.

                5. 킹제임스 성경은 형식적 일치를 이룬 정직한 성경이다.

                많은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사상들을 전달해 주신다고 믿으며 또 그렇게 가르친다. 우리는 이것을 사상 영감이라고 말하며 이런 것을 믿는 분들은 성경 보존이란 사실 사상의 보존이며 따라서 번역은 사상만 전달되도록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사용하는 번역 기법은 니다(Eugene Nida)에 의해 파급된 의역이다. 이들은 대충 뜻만 알아듣게 전달하면 임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성경의 대표적인 예가 리빙 바이블과 메시지이다. 또한 NIV도 절반은 의역이다.

                마가복음 14장 5절에 보면 한 여인이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그분께 부었다. 그 향유의 가치를 그리스어 원문은 ‘300 데나리온’이라고 했는데 NIV는 ‘1년 치 봉급’이라고 했다. 이들은 NIV의 이런 의역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1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면 1년에서 안식일과 절기를 빼면 300 데나리온 정도 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NIV의 번역이 현대인들에게 의미가 훨씬 더 분명하게 전달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에서는 ‘1년 치 봉급’이 아니라 ‘300 데나리온’이라는 단어들이 나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하거나 빼거나 수정하지 않고 정확하게 ‘300 데나리온’이라고 번역한 뒤 그 뜻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성경은 무작정 쉽게 술술 읽을 수 있는 소설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단어들을 담은 책이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성경이 아니다.

                킹제임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상들이 아닌 단어들에 숨을 불어넣어 주셨다는 축자 영감에 기초하여 번역되었고, 수용 언어인 영어가 허락하는 한 원어의 단어와 영어의 단어가 서로 일치되며 문장의 형태까지도 일치되도록 번역되어 원문의 형식까지 그대로 보존된 성경이다.

                원어에서 수용 언어로 성경이 번역될 때는 부가적인 단어들이 불가피하게 첨가되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외국 문서를 번역해 보면 누구라도 이것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번역을 위해 자기들이 첨가한 단어들에 대해서는 이탤릭체로 표시하였다. 그러므로 성경 독자들은 어떤 것이 원어 성경에 있던 단어이며 어떤 것이 번역자들이 첨가한 것인지 쉽게 구별할 수 있다. 이처럼 킹제임스 성경은 형식적 일치 기법에 따라 번역되었으므로 독자는 원어 성경이 없어도 원어와 똑같은 형식을 유지하며 축자적으로 번역된 이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단어들을 그대로 읽고, 그것들을 원어와 동일한 효력을 갖는 하나님의 말씀들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현대 역본들은 첨가된 단어들을 이탤릭체로 구분하지 않았고 많은 경우 의역되었으므로 독자들은 이런 역본의 단어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인지 확인할 수 없다.

                개역성경이나 개역개정은 이 점에서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단지 어감이나 읽힘성을 향상시키려고 많은 구절을 짧게 축약하고 의역했기 때문에 이런 성경을 읽는 독자들은 하나님 말씀의 본래 뜻을 알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한국 성도들에게는 바른 신학이 없다. 그러나 우리말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축자 번역의 원칙에 따라 우리말이 허용하는 최대한도 내에서 성실하게 직역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단어들을 있는 그대로 담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기존 성경들과 비교해 보면 하나님께서 실제로 무어라고 말씀하셨는지 정확히 알 수 있다.

                6. 킹제임스 성경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성경은 없다.

                마귀는 예수님의 출현을 막기 위해 온갖 꾀를 썼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가 충만히 찼을 때에 구약성경에 예언된 여자의 씨로서 유대 땅에 탄생하셨다. 그분의 출생 이후에 마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그분을 죽이려 하였으나 다 실패하였고,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장사되었다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시자 계략을 바꾸어 신약성경에서 그분의 신성을 축소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마귀가 가장 크게 변개시킨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며 그 결과 현대 역본들은 킹제임스 성경에 비해 예수님의 신성을 심각하게 약화시키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성경 중에서 킹제임스 성경만큼 예수님을 존중히 여기는 성경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는 이 성경에 큰 복을 주셨다. 다음 표가 보여 주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구절들을 몇 개만 비교해 보면 어린아이라도 쉽게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들에 근거하여 우리는 완전히 보존된 하나님의 성경이 지금 우리 손에 있음을 확신하며 그 성경이 바로 킹제임스 성경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누가 완전한 성경을 보여 달라고 말하면 거리낌 없이 자신 있게 이 성경을 보여 줄 수 있다. 이런 확신 없이 믿음 생활하는 것은 드넓은 우주에서 갈 곳을 모른 채 홀로 떠도는 별똥별과 같고 망망대해를 나침반과 지도 없이 떠도는 배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로그스던 박사의 회개의 고백

                이 글을 마치면서 우리는 NASB를 만든 로그스던 박사(Dr. Frank Logsdon)의 회개의 고백을 소개하려 한다. 로그스던 박사는 시카고 무디 교회에서 2년간 목회를 한 훌륭한 목사요, 성경학자였다. 그는 자기 친구인 사업가 록크맨의 권유에 따라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생각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1901년 판 ASV를 살려 NASB로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여러 학자들을 찾아다니며 번역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였고 번역이 완성된 뒤 직접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자기기 만든 작품인 NASB가 실제로 마귀가 교회를 파괴하는 무기임을 늦게나마 깨닫고 NASB와 관련된 자기의 행적을 회개하는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하였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이제 나는 신미국표준역(NASB)과 관련된 모든 것으로부터 손을 떼려 한다. 사실 나는 하나님께 큰 죄를 지었다. 우리는 NASB라는 잘못된 성경의 기초를 놓았다. 사실 나는 이 역본의 형식을 결정했고, 번역자들 중 몇몇과 이야기도 나누었으며, 그들과 함께 앉아 일했고 서문을 썼다. 참으로 나는 하나님께 큰 죄를 지었다. 지금 나는 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없다. 하지만 NASB는 잘못된 것이며, 잘못되어도 매우 많이 잘못된 것이다. 아, 이제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 역본이 발간된 뒤에 여러 가지 질문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나는 참으로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처럼 그런 질문들을 하는 이들을 비웃곤 했다. 그런데 언젠가 그런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하려고 노력하던 중에 나는 NASB가 매우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이 같은 질문과 비평들을 무시할 수 없으며 반박할 수도 없다. NASB 안에서 삭제된 내용은 참으로 나를 두렵게 했다…… 그런데 그런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라 너무나 많았다. 과연 우리는 성경을 이같이 변개시킨 일에 사탄의 속임수와 개입이 있었음을 의심해 봐야만 하지 않겠는가?

                이에 대한 조사를 시작한 뒤에 나는 곧바로 NASB를 출간한 록크맨 재단의 설립자이자 내 절친한 친구인 록크맨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지금 NASB와 관련된 모든 것과의 관계를 끊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내 손으로 직접 만든 NASB는 참으로 내게 큰 슬픔을 가져다주었고, 큰 혼란에 빠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더욱더 복잡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제 나는 NASB와 관련된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는다.

                처음에 내가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부패된 그리스어 본문에 속아 넘어가는 듯했으나 지금은 다시 원상 복귀해서 참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있듯이, 지금 이 시간에도 많은 훌륭한 지도자들이 이 같은 마귀의 속임수에 걸려 넘어지지 않은 채 굳게 말씀을 지키고 있다. 사실 심히 변개된 그 본문에 눈을 돌리는 것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마귀의 속임수에 걸려 결국에는 넘어지고 만다. 이제 나는 무디 성경 학교의 학장인 조지 스위팅 박사에게도 진실을 이야기하려 한다.

                이제 독자께서는 권위역본 킹제임스 성경이야말로 절대적으로 옳은 성경이라고 말해도 된다. 과연 얼마나 옳을까? 100% 옳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영께서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을 인도하셨음을 확신한다. 세상의 다른 모든 이가 당신과 의견을 달리한다 해도 이제 당신은 스스로 서야만 한다.

                NKJV를 포함한 모든 현대 역본들은 영지주의 이단인 오리겐이 편집한 ‘부패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본문’에 근거하고 있다. 그는 계22:18-19의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수천 개의 단어를 변개하였다. 계시록은 말세 교회의 예표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여 주는데 이 교회는 자유주의 교회이고 음탕한 교회이다(계3:14-22). 궁극적으로 이 배도한 교회는 유혹을 받아 속아 넘어가서 계시록 17장에 나오는 저 음녀, 즉 자주색 옷을 입고 성도들의 피에 취한 채 짐승 위에 타고 있는 로마 카톨릭 체제와 하나로 엮이게 된다. 이런 혼합 체제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순수한 말씀을 천주교회의 부패한 말씀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은 지금 우리 눈앞에서 현저하게 일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진실을 보여 주면 오히려 화를 내는 수많은 이들을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역사를 살펴보면 천주교회의 일원인 히틀러가 천주교회를 심히 사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제국과 천주교회를 연합시키려 하였고 이 일을 쉽게 이루려고 멀러 주교(Bishop Ludwig Muller)를 시켜 죄나 은혜 같은 단어들을 제거한 독일어 성경을 만들게 하였다. 이 성경의 그리스도는 사람의 영혼과 영원한 생명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이 땅에서 히틀러와 함께 최상의 삶을 누리는 것만 가르쳐 주었다. 성경 변개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처음부터 마귀는 “그래, 하나님이 정말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라고 이브에게 물으면서(창3:1) 의심의 씨앗을 사람의 마음에 뿌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부패시키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살짝 의심을 불어넣은 뒤 그는 새로운 계시를 담아, 먹기에 좋게 보이는 말들을 도입하여 사람을 멸망으로 집어넣었다. 그 이후로 이런 유형의 마귀의 계략은 변하지 않았고 지금도 마귀는 새로 발견된 사본들을 근거로 번역했다는 새로운 역본들을 수백 개나 만들어 여전히 사람들을 멸망 속으로 집어넣고 있다. 단언하건대 새로운 계시는 없다. 하나님은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지난 400년간 자신의 모든 말씀들(words)을 보존하셨다.

                - NASB 편집위원 로그스던 박사(Dr. Frank Logsdon) 

                이런 이유들로 인해 우리는 옛날부터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천주교회의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도 굳게 세워 놓은 킹제임스 성경이라는 저 랜드마크를 그대로 붙들고 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자손들에게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이 랜드마크를 물려줄 것이다.

                네 조상들이 세워 놓은 옛 지계표를 옮기지 말라(잠22:28).

                관리자 | 14-03-11 17:35
                이 글은 곧 "왜 킹제임스 성경인가?"라는 제목의 소책자로 나올 것입니다.
                60쪽의 이 소책자는 이 글과 "킹제임스 성경의 4중 우수성", "킹제임스 성경 개정 신화"를 포함할 것이며 무료로 배포될 것입니다.

                샬롬

                출처: Keep Bible.com

                쉼을 얻게 하소서 최송연 밤이 늦도록 당신 곁에서 당신의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힘들고 지친 내 영혼 찾아갈 곳 없어 당신 발 앞에 엎드립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 당신께서 모두 짊어지셨음을... 이 멍에를 내려놓지 못해 오늘도 고통하며 고뇌하며.... 이제 모든 것 내려놓고 싶습니다. 삶의 한숨을, 사랑을... 아픔을... 주여, 내 모든 고통일랑... 거두어 가시고 당신 안에서 쉼을 얻게 하소서

                 

                 

                 

                 

                쉼을 얻게 하소서/최송연


                밤이 늦도록 당신 곁에서
                당신의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힘들고 지친 내 영혼
                찾아갈 곳 없어
                당신 발 앞에 엎드립니다.

                세상의 무거운 짐,
                당신께서 모두 짊어지셨음을...

                이 멍에를 내려놓지 못해
                오늘도
                고통하며 고뇌하며...
                .
                이제 모든 것 내려놓고 싶습니다.
                삶의 한숨을,
                사랑을...
                아픔을...
                주여,
                내 모든 고통일랑...
                거두어 가시고 당신 안에서 쉼을 얻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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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의 완전성
                 
                요즘 KeepBible 사이트에서 성경의 완전성(Perfectness) 혹은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논란이 있어 정리를 하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요즘 일어난 특별한 문제가 아니고 킹제임스 성경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이 처음에 흔히 겪는 일입니다. 이때에 어떤 사상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경관이 평생 고정되므로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슈가 사이트에 올라오면서 ‘완전성’이라는 말로 인해 혼동 속에 빠진 성도들이 있어 이에 대한 정의도 내리면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 우리말 흠정역 성경 그리고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오기 전에는 완전한 성경이 어디 있었는가?” 등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KeepBible 사이트의 존재 목적
                 
                먼저 글을 전개하기 전에 KeepBible 사이트의 정체성에 대해 밝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KeepBible 사이트는 1611년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최종적인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리는 곳입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최종 목표 혹은 궁극적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의 최종 목표는 그 성경을 우리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안착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역/교정에 참여한 분들은 “나는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전서의 본문을 확정하며 이 성경을 지키고 보급하고 확산시키며 정착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고 서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확고히 보존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리거나 보존하는 일 자체가 우리의 최종 과업은 아닙니다. 성경 출간도 마찬가집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보급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영어를 쓰는 사람들이 다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민족에게 보급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와 KeepBible 사이트 그리고 번역/교정에 참여한 분들의 최종 목표입니다.
                 
                완전성이란?
                 
                우리는 다 성경을 최종 권위로 여기므로 ‘완전하다’(perfect)는 말 역시 성경에서 용례를 찾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완전하다’(perfect)는 말은 성경에서 여러 용례로 쓰입니다. 신구약 통틀어 ‘perfect’는 총 99회 나오고 ‘perfection’은 총 11회 나옵니다. 누군가가 지적했듯이 성경에는 ‘첫 번째 언급의 법칙’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단어가 성경에서 처음 나올 때 그 문맥에서 그 단어의 뜻이 곧 그 단어의 정확한 뜻임을 말합니다.
                 
                ‘perfect’는 성경에서 창세기 6장 9절에 가장 먼저 언급됩니다.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라. 그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더라.”
                 
                여기에 보면 노아가 완전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하나님처럼 무오한 사람이었을까요?
                 
                욥기 1장 1절 또한 욥을 가리켜 “그 사람은 완전하고 곧바르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악을 멀리하는 자더라.”라고 말합니다. 신약으로 넘어와서 마태복음 5장 48절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구절들이 과연 우리 사람이 하나님처럼 무오함을 보여 줍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히브리서 5장 8-9절은 “그분께서 순종하기를 배우사 완전하게 되셨으므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전에 죄나 허물이 있는 분이었을까요? 그분은 무오한 분이신데 왜 성경은 그분이 완전하게 되셨다고 기록할까요?
                 
                성경에서 ‘완전하다’는 말은 ‘모든 것을 구비하여 제 기능을 발휘한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말씀은 예수님도 구원자가 되기 위해 고난까지 당하심으로 구원자로서의 임무를 다 수행하셨다는 뜻입니다. 즉 고난이 없었으면 구원자가 되실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성경 내에서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을 완전하다고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은 문맥입니다. 그 문맥이 그 사람이 말한 완전성에 대한 정의를 보여 줍니다.
                 
                성경의 완전성
                 
                이제 성경과 관련된 완전성을 보여 주는 구절을 살펴봅시다. 성경이 최종 권위요, 내장 사전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성경의 완전성’에 대해 성경이 무어라 말하는지 분명히 확신을 가지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굳이 영어로 기록하지 않아도 뜻을 알 수 있으므로 영어는 생략했습니다.
                 
                제가 더 이상 설명하기 전에 먼저 이 두 구절이 성경의 완전성에 대해 무어라고 말하는지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자필원본이나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이 완전할까요? 성경의 완전성이 모든 민족의 모든 말로 주어질 가능성은 없을까요?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는 절대적인 완전성 즉 무오성을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자필원본에만 적용되는 말입니다. 영감이 원어의 단어들에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은 자필원본에만 적용될까요? 아닙니다! 그 이후의 말씀은 원어와 영어 및 모든 민족들의 언어로 번역된 ‘바른 성경’에 적용될 수 있는 실제적인 완전성을 말합니다. 즉 그 이후의 구절이 말하는 완전성은 성경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게 하는 완전성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말로도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수 있을까요?
                 
                전자의 의미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후자의 의미에서는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불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하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성경과 관련된 완전성은 최소한 이 두 가지로 나누어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과거의 성도들 - 물론 다 다른 말을 쓰는 사람들입니다 - 은 번역된 모든 성경 - 물론 다 바른 성경을 뜻합니다 - 에 대해서 ‘infallible’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inerrant’(무오)라는 말은 자필 원본의 단어들에만 적용된다고 믿었습니다. 원어에서 다른 말로 번역이 되면 어떤 번역본이든 그 번역본에 대해 ‘inerrant’라는 말을 붙이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확실하여 무너뜨릴 수 없다’ 혹은 ‘어떤 것에 의해서도 넘어질 수 없다’는 뜻을 가진 ‘infallible’이라는 말은 성경과 관련해서 무엇을 뜻합니까? 딤후3:16-17의 앞부분은 ‘inerrant’의 완전성이고 뒷부분은 ‘infallible’의 완전성입니다. 즉 역본에 적용되는 완전성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모든 민족에게 그들의 언어로 완전한 말씀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어느 분이 “성경이 완전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그분이 그런 말을 하는지 문맥으로 잘 판단해야 합니다. ‘infallible’ 차원의 완전성인가, ‘inerrant’ 차원의 완전성인가가 구분이 안 되면 서로 평행선을 달리며 극한 논쟁으로 치닫게 됩니다. 또한 극단적인 주장을 펴게 되면 자기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회복할 수 없는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수 있는가?
                 
                이제 근본적인 이 문제에 대해 답하려고 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경의 완전성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자필원본의 완전성
                 
                이것은 ‘절대적인 완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내신 ‘말씀들’(words) - 이후로 이것은 항상 단어들을 뜻함 - 은 절대적으로 완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최종권위라고 부릅니다. 우리 진영에서 이것을 안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리라 믿습니다. 굳이 이것을 영어로 표현하자면 ‘Inerrancy’가 될 것입니다. 즉 이것은 무오성입니다.
                 
                (2) 번역본의 완전성
                 
                원어의 말씀들을 번역해서 서로 다른 말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말씀들을 이해하고 그 말씀들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사람 편에서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구라도 알 수 있듯이 원어와 번역에 사용되는 수용 언어는 형식/구조의 차이가 있어서 원어를 100% 완벽하게 수용하여 ‘일 대 일’로 모든 단어가 일치하게 번역해 낼 수 있는 언어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습니다(그리할 수 있는 언어 중 하나가 영어임). 그러므로 바르게 보존된 마소라 히브리어 본문(소수의 아람어 포함)과 그리스어 공인 본문을 수용 언어의 한계 안에서 정확하게 번역하면 이론상으로 그 번역 성경 역시 완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시 이것을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Infallibility’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성경의 역할에 대한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불가능한 것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완전하게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갖추어지게 하려 함이라.”(딤후3:16-17)
                 
                과연 이것은 자필원본이나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만 국한되는 말씀일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원어나 영어만 사용하기를 원할까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고 완전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바른 본문에서 바르게 번역된 성경은 한 민족의 언어의 틀 안에서 자필원본의 완전성이 ‘전달된’(transmitted) 완전한 성경입니다(이후로는 이것을 번역본의 완전성이라고 할 것임). 여기에는 추호의 이론(異論)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것은 결코 번역본에 대해 ‘무오성’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본문에서 바른 사상을 가지고 바르게 번역된 성경이 있으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구원을 받고 그 뜻대로 행하는 데 있어서 완전한 도구를 갖게 됩니다. 완전한 성경이 없는데 어떻게 사람이 완전하게 될 수 있습니까?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완전하게 하는 성경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 밖에 없다.”고 주장하면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번역본의 완전성을 잘못 이해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번역본의 완전성은 무엇을 뜻할까요?
                 
                ‘번역본의 완전성’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원어들이 주는 ‘절대적인 완전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른 본문을 바르게 번역할 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충분성(Sufficiency)이요, 온전성(Wholeness)이요, 성실성(Integrity)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이 성경 서문에 기록한 ‘독자들에게 주는 글’에서 우리는 아주 좋은 예를 발견하게 됩니다.
                 
                “We never thought from the beginning, that we should need to make a new Translation, nor yet to make of a bad one a good one, … but to make a good one better, or out of many good ones, one principal good one, … ; that hath been our endeavor, that our mark.”
                 
                “처음부터 우리는 새로운 번역을 만들어야 한다거나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만들려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는 좋은 것을 더 좋게 혹은 여러 개의 좋은 것들 중에서 최고로(혹은 으뜸가는) 좋은 것을 만들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노력한 것이었고 우리의 목표였습니다.”
                 
                잘 알다시피 영국에서는 1524-1534년에 틴데일의 성경이 나온 이후로 커버데일 성경, 매튜 성경, 크랜머 성경, 제네바 성경 등의 여러 성경이 나왔고 비슷한 시기에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등에서는 루터 성경, 디오다티 성경, 발레라 성경, 올리베땅 성경 등이 나왔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번역자들은 성경 서두에서 “이 성경전서는 원어에서 번역하였으며 또한 이전 역본들을 부지런히 비교하고 수정하여 번역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번역 성경에 관하여 우리는 이들의 자세와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영어 성경의 경우 틴데일 이전에는 부패된 라틴어 성경을 번역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위클리프 성경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당시에는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에 그리스어(원어)에 대한 연구나 문헌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어 성경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그리스어 신약성경 본문이 만들어진 것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터키에 의해 함락된 이후부터였습니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그리스어에 대한 눈이 열리기 시작하여 드디어 에라스무스, 베자, 스테파누스 등이 그리스어 신약성경 본문을 만들었고 위에 언급한 모든 성경들은 이런 바른 본문 - 공인 본문 - 에서 바르게 번역된 성경들이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이런 성경들을 ‘나쁜 것’(bad one)이라고 하지 않고 다 ‘좋은 것’(good one)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만든 킹제임스 성경은 ‘이런 좋은 것들’을 ‘더 좋게 만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혹은 가장 으뜸가는 ‘좋은 성경’을 만드는 것이 자기들의 목표라고 했습니다. 실로 그것이 이루어져서 킹제임스 성경의 출간 이전에는 많은 종류의 영어 역본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지만 출간 이후에는 번역하는 일이 삽시간에 중단되었습니다. 영어권에서는 그 이후로 더 이상 주목할 만한 성경 번역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번역본의 완전성 - 무오성이 아님 - 을 볼 수 있습니다.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틴데일 성경을 비롯해서 루터 성경 등 이전에 나온 바른 역본들을 다 ‘좋은 성경’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부지런히 살펴보고 교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말하는 번역본의 충분성과 온전성과 성실성을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즉 바른 사본에서 바르게 번역된 이 모든 성경들은 한 민족의 언어의 틀 안에서 딤후3:16-17의 말씀을 이루기에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성경’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 각 나라의 대부분 성도들은 그 성경을 붙잡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완전한 성경’으로 믿으며 그 빛 가운데 살다가 갔습니다.
                 
                (3)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성
                 
                영어 킹제임스 성경도 번역본이므로 이런 면에서 볼 때 일차적으로 이 성경의 완전성 역시 번역본으로서의 충분성과 온전성과 성실성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예외가 있습니다. 이제 르네상스 시대가 열리고 인쇄술의 도래로 인해 온 인류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에게 적용될 수 있는 공통의 보편적 잣대를 주시기 원했고 바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1611년에 ‘가장 으뜸가는 좋은 성경’으로 온 인류에게 킹제임스 성경을 주셨습니다.
                 
                잘 알다시피 원어를 안다고 해서 성경을 바로 번역하고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원어와 ‘일 대 일 대응’을 할 수 있는 보편적 언어인 영어로 원어의 모든 단어를 완벽하게, 명확하게 알려주는 역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은 번역본임에도 불구하고 자필원본이 갖는 절대적 완전성을 확보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없었다면 지금의 믿음의 교리 및 신학 체계를 세우는 것과 모든 현대 역본들을 번역하는 것이 실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역본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완전성 즉 무오성을 지니고 있다고 믿습니다. 즉 그것이 자필원본과 동일한 최종권위라고 분명하게 믿습니다.
                 
                그러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절대적인 완전성은 어떻게 입증이 될까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지 않았습니다. 역자들이 이 성경을 만들고는 “이것은 절대적인 성경입니다.”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권력자도 “이것만 옳으니 모든 교회에서 이것을 사용하라”고 압력을 넣지도 않았습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처럼 나무는 그것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1611년 발간 이후로 한 번도 수정되지 않은 킹제임스 성경, 바로 이 성경이 배출한 열매들을 보면서 우리는 자신의 말씀들을 순수하게 보존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짐을 보아왔습니다.
                 
                (4) 우리말 번역본의 완전성
                 
                자, 그러면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은 어떨까요?
                바른 본문에서 바르게 번역된 성경들은 모두 ‘좋은 성경’이라고 할 수 있지만 불행히 과거에 우리나라에는 그런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년 동안 우리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 흠정역 성경을 번역하였고 이것이 우리 민족에게 주어진 바른 성경이라고 확신합니다. 이런 확신이 없으면 딤후3:16-17은 공허한 말씀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한 번도 이 성경이 오류가 없이 완벽하다고 무오성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정신 나간 사람들이나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다만 바른 번역자들이 최선을 다해 바른 본문을 바르게 번역하였으므로 이 흠정역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위해 보존해 주신 성경으로서 ‘번역본의 완전성’을 확보했다고 믿을 뿐입니다. 즉 흠정역 성경이 딤후3:16-17을 이룰 수 있는 차원의 완전성, 충분성, 온전성 혹은 성실성을 확보했다고 믿습니다. 이런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이 성경을 가지고 바른 구원, 바른 교리, 바른 교회를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이것은 최종적으로 그 성경의 열매들에 의해 판단이 날 것입니다. 우리가 주장한다고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렇다고 믿고 그것에서 선포하고 가르치고 전할 뿐입니다.
                 
                우리말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경우 2000년도에 초판이 나온 이후로 네 번 교정되었고 2011년 9월경에는 5판으로 ‘400주년 기념판’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지난번의 네 판은 나쁜 성경일까요? 그것들은 번역본이라는 측면에서 완전성을 확보하지 못한 성경일까요? 아닙니다. 번역본의 측면에서 지난 네 판들은 모두 좋은 성경이며 새로운 판이 나올 때까지는 번역본의 완전성을 확보한 채 여러 성도들에게 빛을 주었던 성경들입니다. 이것은 영어 성경의 변천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판은 틴데일 성경, 2판은 그것을 보완한 커버데일 성경, 3판은 그것을 더 보완한 제네바 성경 등으로 비교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6-17세기에 올바른 역본들이 쏟아져 나오자 천주교회는 프로테스탄트들이 성경을 자주 교정한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성경의 역자들은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에서 천주교회의 이런 비난을 잠재우면서 성경 교정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즉 원본을 주신 하나님 편에서는 완전성의 문제가 영원히 고정되었지만 역본을 사용해야 하는 사람 편에서는 ‘바르고 좋은 성경’을 ‘계속해서 더 좋게’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킹제임스 성경이었습니다. 물론 킹제임스 성경 역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성경을 최종권위로 만들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이 세상을 위해 할 일을 하고 묵묵히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견지하는 태도입니다. 번역자들은 묵묵히 최선을 다해 자기 세대를 섬기고 가야 합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지금 이 시간 우리나라에서도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킹제임스 성경을 번역하면 한 번에 완벽하게 우리말 역본을 낼 수 있다는 담대한 주장을 펴서 순진한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참으로 멋있고 맞는 말 같지만 번역 성경의 역사는 이런 주장을 추풍낙엽처럼 세차게 날려버립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습니다. 한 나라 말로 바른 성경이 주어진 상태에서 궁극적으로 ‘가장 으뜸가는 역본’이 나오는 일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 역본이 나올 때까지 각 단계에서의 성경은 번역본의 완전성을 확보한 성경들입니다. 번역자들과 교정자들은 겸손한 자세로 어떻게 하든지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좀 더 좋은 역본을 내야 합니다. 성도들 역시 이러한 과정을 기억하고 이해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 모든 과정의 끝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때에 정하십니다.
                 
                (5) 먼저 믿고 확신을 갖게 된 사람들의 태도
                 
                그러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과 우리말 흠정역 성경의 관계를 이해한 성도들은 이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 할까요? 우리말로 번역된 바른 성경을 가지고 어떻게 강단에서 외쳐야 할까요?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이 최종 권위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보는 성경은 절대적인 완전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은 참조만 하고 가능하면 늘 영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완전합니다.”
                 
                비록 이렇게 말은 안 하지만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실제로는 이렇게 행하는 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일은 틈만 나면 우리말 성경을 뜯어고치는 데서 발견됩니다.
                 
                특히 공적인 위치에 있는 분들은 “이 번역은 사실 옳지 않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누가 이분의 주장을 입증해 줄까요?
                 
                스스럼없이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과 사귀는 사람들의 다수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게 되면 스스로 ‘성경 교정자’가 됩니다. 먼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완전성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가 영어 성경을 다 아는 것처럼 하면서 우리말 성경을 교정하기 시작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주변의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과연 그에게 영어 성경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있을까요? 그를 따른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바른 신앙의 성장이 일어나며, 그런 자세가 성경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자라게 할까요?
                 
                이들은 대개 강단에서 원어를 들먹이며 “원어에서는 뜻이 이런데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서는 이렇게 번역되어 참으로 아쉽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가장 미워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자기들이 이 시간 이 나라에서 영어를 가지고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우리말 성경이 필요합니다. 사실 상 한국 사람들 중에서 영어에 능통한 소수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킹제임스 성경을 영어판이 아닌 한글 번역본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한글로 번역된 바로 그 성경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교리를 배우고 바르게 자라갑니다. 심지어 영어 성경을 자랑하는 그 소수 역시 영어 성경만을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할 수 없음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본문에서 바르게 번역된 우리말 성경을 들고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담대히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외칠 때 비로소 우리는 바른 본문에서 나온 번역본의 완전성, 충분성, 온전성, 성실성을 믿는 것입니다.
                 
                틴데일은 죽기 전에 자기 친구 프리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타나게 될 그 날에 하나님께서 증언해 주시기를 바라노니 나는 결코 내 양심을 거슬러 하나님의 말씀의 단 한 음절도 바꾸지 않았으며, 땅 위에 있는 모든 것 즉 명예와 쾌락과 재산을 내게 준다 해도 결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틴데일이 자기가 번역한 성경을 들고는 “이것은 불완전합니다. 앞으로 완전한 것이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기다립시다.”라고 외쳤을까요? 마르틴 루터는 어땠을까요? 그는 자기가 번역한 성경이 번역본으로서의 완전성을 갖추었다고 믿었고 그래서 그 성경을 들고 “이 성경이 사람을 구원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 결과 그의 믿음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그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 - 영어 성경이 아니라 - 을 통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흠정역 성경을 번역/교정하는 일을 주관한 저도 비록 미천한 사람이지만 번역의 정신만큼은 틴데일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한 단어라도 사적인 욕구를 위해 왜곡되게 번역하면 그것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을 칠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를 비롯해서 이 일에 동참한 이들은 자신의 믿음과 생각을 내려놓고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정확하게 옮기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을 잃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번역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완전성만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더러 극단적인 이들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 원어를 교정할 수 있다.”는 망언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것이 바로 마귀의 교활한 전략임을 모릅니다. 겉으로 표현은 안 해도 속으로는 이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이들의 극단적인 ‘영어 킹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발언을 통해 우리말 성경에 대한 믿음이 파괴되고 있지 않습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좋아하실까요?
                 
                마귀는 좋은 것으로 좋은 것을 가로막습니다. 우리나라의 예를 봅시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킹제임스 성경이 킹제임스 성경을 가로막는 통탄할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엉터리 번역, 비이성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무리들이 자신들의 성경만이 최종권위요, 자신들이 세운 교회만이 한국에서 최초의 신약교회라고 외쳐대니 이성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킹제임스 성경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이단으로 보입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 최종 권위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절대적인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비이성적으로 과도하게 이야기하게 되면 말하는 사람도 모르는 사이에 결국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에 대한 확신을 파괴시키는 일이 슬며시 발생합니다. 그것이 자꾸 쌓이면 결국 우리말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 붕괴됩니다.
                 
                또한 이들은 무조건 원어를 멸시합니다. 이것은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원어에서 영어 성경이 나왔습니다. 역순이 아닙니다. 영어 이상으로 원어를 공부해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스스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가 못한다고 하려고 하는 사람까지 멸시하면 안 됩니다. 물론 원어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의 많은 이들이 성경을 뜯어 고치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원어의 잘못이 아니고 그 사람이나 그를 교육하는 사람의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새롭게 젊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가능하면 원어도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그래야 반대편에 속한 자들도 실력으로 바르게 인도할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사람은 원어 지식을 성경을 교정하는 데 쓰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쓸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왜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가 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을 일일이 설명해 줘도 귀를 꽉 막고는 들으려 하지 않거나 전혀 못 알아듣고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만 최종 권위이다. 오류가 없다. 나머지는 다 불완전하다.”고 외치면 그것은 성도들에게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며 아직 흠정역을 사용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흠정역을 선택하는 일에 방해를 줍니다. 그 결과 이 중대한 시점에서 성경 번역 및 보급 사역에 막대한 지장을 가져오니 부디 이런 주장을 합리적으로 균형 있게 하기 바랍니다.
                 
                결 론
                 
                어떤 사람이 성경의 완전성을 이야기할 때 그분의 말이나 글의 앞뒤를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것은 단지 성경의 완전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바르게 읽고 해석하려면 문맥에서 바르게 읽고 보아야 합니다. 이 훈련이 되어야 하나님의 좋은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믿는다면 그것을 우리말로 바르게/신실하게 번역한 성경을 들고 “이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영어 성경을 들고 다니며 영어 구절을 읽고 그것으로 설교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일 것입니다.
                 
                이것은 영감에도 적용이 됩니다. 영감은 분명히 원어들에만 주어졌습니다(딤후3:16). 그러면 영어 킹제임스 성경을 들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영감으로 주신 그 말씀입니다.”라고 외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킹제임스 성경에는 원본에서 ‘전달된 영감’이 100% 들어 있습니다. 영감이 들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죽은 성경입니다. 그러면 우리말 흠정역 성경은 어떨까요? 우리 역시 이것을 들고 “이것은 하나님의 영감이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 역시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기초하여 그것으로부터 바르게 번역되어 번역본으로서의 완전성을 확보했기에 원본에 주어진 하나님의 영감이 전달되어 살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딤후3:16-17은 허구가 되고 맙니다. 물론 이것이 최종권위로서의 ‘완전성’(Inerrancy)을 뜻하는 것이 아님은 다시 강조하지 않아도 오해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성경의 완전성이나 무오성 혹은 영감 등을 이야기할 때 문맥을 잘 살펴보고 판단하기 바랍니다. 진실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는 번역본의 완전성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영어 킹제임스 성경이 나오기 전에 나온 바른 성경들 즉 크리스천 믿음의 선조들이 사용했던 바른 역본들 역시 모두 번역본의 완전성을 확보한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바른 본문을 들고 바른 믿음과 올바른 방법으로 바르게 번역하면 그 성경은 그 민족에게 그들의 언어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즉 번역의 차원에서 충분성과 온전성과 성실성과 확실성을 모두 겸비한 완전한 성경입니다. 어떻게 불완전하다고 믿는 성경을 들고 목회를 하고 영혼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을 믿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우리는 어떤 번역본을 통해 유익을 얻은 사람들의 인격의 열매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습니다. 영어를 잘 알지 못하는 이 땅의 많은 형제/자매님들이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을 접한 후에 믿음에서 어떤 영적 진보와 유익을 얻었는지는 KeepBible 사이트나 그 외의 다른 유익한 사이트의 간증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부디 이 글의 취지를 잘 이해하여 형제들 간에 불필요한 오해를 하거나 사이버 공간에서의 공격은 하지 말기 바랍니다. 이 글은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존해 주신 영어킹제임스 성경의 가치와 권위를 훼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한글로 번역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이 절대적인 완전성(Inerrancy) 즉 무오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들이 영어 킹제임스 성경에 완전하고 순수하게 보존되어 있고, 우리말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은 그 영어 킹제임스 성경으로부터 충실하게 번역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 글의 취지를 바로 이해했으면 2010년 5월에 흠정역 성경과 관련해서 여러 형제들이 동의한 ‘우리의 결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나는 영어 킹제임스 성경(KJB 1611, 이하 킹제임스 성경)이 믿음과 실행의 최종 권위임을 믿는다.
                2. 나는 킹제임스 성경이 시제, 단복수, 능동태, 수동태, 주어, 목적어, 전치사, 관사, 대소문자 표기, 문장 어순, 이탤릭체 심지어 콤마와 물음표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3. 나는 킹제임스 성경만이 한글 성경 번역 시 유일한 기준이며 최종 잣대임을 믿는다.
                4. 나는 하나님의 말씀들(words)이 킹제임스 성경을 통해 완벽하게 보존되었음을 믿는다.
                5. 나는 킹제임스 성경의 모든 단어들(words)이 히브리어나 그리스어 단어에 대한 유일하고도 올바르며 최종적인 정의임을 믿는다.
                6. 나는 우리말과 번역자들의 한계로 인해 우리말로 완벽한 성경을 낸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전서가 우리말로 보존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7. 나는 하나님께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전서를 통해 지난 10년간 한국어를 사용하는 개인과 교회에 큰 은혜를 베푸셨고 앞으로도 그리하실 줄로 믿는다.
                 
                부디 자필원본 혹은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절대적 완전성과 수용 언어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 번역 성경의 완전성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우리말 성경에 대한 확신을 갖기 바랍니다. 이 글을 통해 성경의 완전성에 대한 의문점들이 해소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믿음의 지체들 간에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이 널리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부 언
                 
                글을 맺고 나서 여전히 우려 사항이 있어 추가하려고 합니다.
                 
                (1) 이 글을 읽고 “출판사 그리스도 예수안에 사람들도 결국 타락해서 무슨 학회 사람들처럼 스스로 최종권위를 주장하는가보다.”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까 우려됩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그런 사람들과 함께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처럼 과격하게 극단적인 주장을 편 적도 없습니다. 이 사이트에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글에서도 우리는 자필원본 및 영어 킹제임스 성경의 절대적 완전성과 번역본의 완전성을 이야기했을 뿐입니다.
                 
                (2) 영어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내가 공개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우리말 성경에 대한 확신을 깨뜨리는가, 세우는가?” 이것을 늘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우리말 성경에 대한 확신’을 깨뜨리는 발언을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KeepBible 사이트에서도 성경 번역에 의견이나 이견이 있으면 가능한 한 사이트에 올리지 말고 webmaster@KeepBible.com으로 문의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혹시라도 우리말 성경에 대한 확신을 깨뜨리는 논쟁으로 번지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남을 세우는 사람이 주님의 사람입니다. 특히 믿음이 약한 지체를 세우는 사람이 하나님의 큰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우리말 성경의 확신과 관련된 논쟁의 소지가 있는 글은 회원들의 오해를 줄이고 본 사이트 운영 목적을 바로 세우기 위해 임의로 삭제합니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서 글을 써 주기 바라며 우리의 취지를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이 글은 출판사를 운영하는 정동수 형제의 개인적인 글로서 번역의 철학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성경의 완전성.pdf (248.5K), Down : 432, 2011-07-08 16:24:34
                관리자 | 11-07-08 15:45

                이렇게 설명했는데도 사이트의 취지에 반하는 본글이나 덧글로 논쟁을 유발하여 성도들을 혼란으로 이끄는 경우 임의로 삭제합니다.
                의문이 있으면  webmaster@KeepBible.com으로 글을 보내기 바랍니다.

                정동수

                출처: Keep Bible.com

                 

                숫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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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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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들이 아침마다 반복하는 고민이 있다. 그만 일어나서 밥을 먹을까, 아니면 아침식사를 포기하고 10분 더 잘까 하는 고민이다.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말할 순 없지만 과학자들은 가급적 아침을 먹을 것을 권장한다.

                아침을 거르면 에너지원이 부족해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기 어렵다. 점심식사를 해도 충당이 안 되기 때문에 결국 늦은 저녁 야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밤늦게 먹은 음식으로 속이 더부룩해지면 숙면이 어려워 또 다시 개운하게 일어나지 못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우리 몸은 나이, 건강상태, 식습관 등에 따른 차이는 있지만 비교적 음식에 정직하게 반응한다. 식사를 거를 때 생리학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반응은 건강에 유익하기도 하고, 해가 되기도 한다. 특히 아침을 거를 때는 더욱 많은 주의가 필요하다.

                체중, 일단은 줄지만, 결국...=칼로리 섭취량을 줄이면 체중도 준다. 이는 칼로리 섭취와 소비의 기본 원리다. 그런데 아침을 거르는 방식으로 칼로리 섭취량을 줄이면 후차적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가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아침 식사를 안 하면 당분간은 살이 빠지는 추세를 보인다. 하지만 결국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원래 체중으로 돌아간다. 문제는 되돌아간 체중이 복부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복부비만을 일으키기 때문에 이전과 동일한 체중이라 해도 건강상 더 해롭다.

                체내 염증이 가라앉는다=관절염, 암, 심장병 등의 질환은 만성적인 염증으로 세포가 손상을 입으면서 일어난다.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실린 논문에 따르면 단식을 하면 세포에서 손상된 부분이 회복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 논문을 발표한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 연구팀에 따르면 끼니를 거르는 횟수가 누적되면 염증 수치가 점점 떨어지게 된다. 간헐적 단식이 건강을 향상시킨다는 주장은 이러한 원리에서 비롯된다.

                영양소 결핍이 일어난다=식사를 거를 때는 무작정하지 말고 계획적으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양 결핍으로 이어져 정신건강의 균형이 깨진다거나 신체 건강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규칙적으로 아침을 거르는 간헐적 다이어트를 하고자 한다면 공인된 영양 전문가와 상담을 하는 편이 좋다. 아니면 스스로 자신이 먹고 있는 식사와 간식을 점검해 단백질, 비타민, 미네랄, 필수 지방산 등을 골고루 섭취하고 있는지 체크해봐야 한다.

                몇몇 질환의 위험률이 증가한다=하버드대학교 보건대학원 연구팀에 따르면 반복적으로 아침을 거르게 되면 몇 가지 질병 위험률이 높아진다. 여성의 경우 아침을 자주 거르면 2형 당뇨병이 생길 위험률이 20% 증가한다. 정상적인 혈압 수치, 호르몬 수치, 콜레스테롤 수치 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규칙적인 식사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 연구팀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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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빈이 이해하는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형상은 일차적으로 인간의 영혼에서 발견된다. 67
                (2) “지성의 빛 속에서, 마음의 정직함 속에서, 그리고 모든 부분의 건전함 속에서” 보였다. 68
                (3) 골 3:10, 엡 4:24: 하나님의 형상은 원래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을 포함했다. ...
                (4) 하나님의 형상은 타락으로 인해 완전히 멸절된 것이 아니라 몹시 일그러졌다. 69
                (5) 하나님의 형상이 새로워지는 일은 믿음을 통해 성취된다. 73.
                (6) 이 형상은 갑자기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 점진적으로 회복된다.
                (7) 하나님의 형상의 갱신은 거듭남의 목표다. 74
                (8)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이 새로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인 동시에 인간의 책임이다.
                (9) 하나님의 형상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 하나는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의 행위, 다른 하나는 그 행위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10)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인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76.
                (11)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점진적이고 역동적이며 내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앤서니 후크마. 개혁주의 인간론. 이용중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5


                양우광목사 정리

                 

                개혁주의 마을/grace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신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1. 야고보서 3:9: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36. 야고보는 여기서 똑같은 혀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인간을 저주하는 자에 대해 일인칭을 사용하고 있는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창조된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37.
                2. 지음을 받은: 이간은 과거의 어느 때에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지음 받았으며 지금도 그 형상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같은 혀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인간을 저주하는 것은 모순이다. 우리가 저주하는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며,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을 저주할 때 진노하신다. 37.
                3. 야고보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우리에게 방해가 될 만한 사람을 저주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구든 우리가 그를 저주할 때 하나님은 불쾌해하신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기 때문이다.38.
                4. 타락이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어떤 해를 끼쳤든 그 형상을 완전히 없애 버리지는 못했다.
                5.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이 점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모두에 분명히 나타난다.
                6. 고린도후서 4:4 그리스도가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이시다(고후 4:4). 그리고 우리가 그를 닮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 탁월한 모범이라 하신다. 38.
                7. 하나님의 영광이 그리스도의 얼굴 속에서 드러난다. 39
                7.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눈에 보이게 되며 그리스도를 보는 자는 실제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8. 요 14:8~9: 네가 나를 유심히 본다면 너는 아버지를 보게 될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완벽한 형상이기 때문이다.
                9. 히 1:3: 성부에게서 발견되는 모든 특징, 모든 특성, 모든 성품이 성부의 정확한 재현인 성자에게서도 발견된다. 40.
                10. 요 1:14: 삼위 하나님의 두 번째 위격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실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났기에 가능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닮은 점이 전혀 없는 본성을 취하실 수는 없기 때문이다. 40.
                11. 그리스도는 전적으로 죄가 없으셨으므로(히 4:15)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완벽한 하나님의 형상을 본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보고 듣는 것은 곧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도하신 것이다.
                12.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완벽하게 반영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은 사랑임이 분명하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인간을 향한 사라이다. 그리스도처럼 사랑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13. 인간의 도덕적, 영적 갱신을 인간이 점점 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과정이다. 41
                14. 롬 8:29: 그 형상은 인간이 죄에 빠짐으로써 명백히 크게 부패했거나 망가졌으므로 인간은 다시 한 번 그 형상을 본받아야 할 필요가 있다.
                15. 그 아들의 형상-즉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은 이 땅에서의 택하신 백성을 미리 정하신 목적내지 목표이다. 이 땅에서 시작하지만 내세에서 완성된다. 42.
                16. 고후 3:18: 오늘날 우리는 가리지 않은 얼굴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반사할 수 있다.
                17. 우리는 지속적으로 주의 영광을 반사하면서 지속적으로 그 영광이 반사되고 있는 주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다. 이 변화는 영이신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43.
                18. 롬 8:29, 고후 3:18: 타락의 희생자인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거나 그 형상으로 변화될 필요가 있다고 분명히 단언한다. 43
                19. 골 3:9~10: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일에 있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라.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 옛 본성과 새 본성, 옛 자아와 새 자아. 44
                옛 사람: 육신과 죄의 지배를 받는 통일된 인격체
                새 사람: 새 자아: 성령이 다스리시는 통일된 인격체
                20.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은 아직 완전히 새롭지는 않지만 진정으로 새로운 사람을 간주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사람인 것이다. 45.
                21. 신자는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고 있는데 이는 완전한 지식, 정신뿐만 아니라 마음도 포함하는 지식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자라 갈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신뢰하고 더 잘 섬기데 될 것이다. 구속의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이 삶의 다른 측면뿐만 아니라 지식에 있어서도 총체적으로 흠 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가 되는 것이다. 45
                22. 엡 4:22~24: 그리스도인이란 결정적으로 돌이킬 수 없도록 옛 자아를 벗어 버리고 새 자아를 입었으며 그 마음의 정신이나 태도에 있어서 지속적이며 점진적으로 새롭게 되어야 할 사람이라고 말한다.
                23. 롬 8:29; 고후 3:18; 골 3:9~10: 엡 4:22~24: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속의 목표는 하나님을 점점 더 닮아 가는 것, 또는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아 가는 것이다. 47.
                24. 우리가 점점 더 하나님을 닮도록 새롭게 되어 가는 일은 성령이 구속의 과정 가운데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약 성경에서 우리 자신의 노력을 포함하는 일로도 묘사된다. 48.
                25. 새로워짐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점점 더 닮도록 새로워지는 일이 인간의 책임이기도 하다. 48.
                26. 엡 5:1 본받는 자가 된다는 것은 계속 하나님을 닮아 간다는 뜻이다. 하나님처럼 완벽하지는 않더라고 최소한 원리적으로는 하나님을 닮을 수 있다.
                27. 고전 11:1 바울을 점점 더 닮아 갈수록 하나님도 점점 더 닮게 될 것이다. 49.
                28. 빌 2:5~11: 우리는 기꺼이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으려 해야 한다.
                29. 요 13:14~15: 낮은 자세로 섬기는 자신의 본을 따를 것을 지시했다.
                30. 엡 5:1; 고전 11:1; 빌 2:5~11; 요 13:14~15: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완벽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31. 하나님의 형상은 종말론적 관점에서 기술된다. 우리의 성화의 최종 목표는 우리가 총체적으로 하나님을 닮고 완벽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32. 고전 15:49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땅의 사람, 흙에 속한 자인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다가올 세상에서는 우리가 하늘의 사람인 그리스도의 형상을 온전히 지니게 될 것이다.
                33. 요일 3:2: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을 것이고 따라서 그리스도를 본모습 그대로 볼 것이다. 51.
                34.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닮는 것은 우리의 성화의 궁극적 목표다. 52
                35. 하나님이 형상은 인간의 상실될 수 없는 인간의 본질과 존재의 일부이다. 인간이 인간이기를 중단하지 않고는 상실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36.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죄에 빠졌을 때 뒤틀려 버렸고 성화의 과정에서 회복되고 새롭게 되어 가는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도 이해되어야 한다.
                앤서니 후크마. 개혁주의 인간론. 이용중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5


                양우광목사정리

                 

                개혁주의 마을/Grace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 
                하지만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어렵고 힘든 일을 여러 번 만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됐다고 해서
                무조건 불행해질 필요는 없다
                행복이라는 것은
                어떠한 생각을 갖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남들이 겉으로 보기에
                무척 행복해 보인다거나
                또는 몹시 불행해 보인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는 별로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겉에서 보기에 불행해 보이더라도
                사실은 행복한 사람일 수 있고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더라도 사실은
                남모르는 불행을 갖고 살아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라도 사는 동안
                내내 행복하거나 불행해질 수는 없다
                행복이라는 상태는 생각하기에 따라
                누리게 될 수도 그 반대로
                불행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어렵고 힘든 문제가
                당신 앞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항상 믿음의 생각을 가지고 
                자신은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라
                어차피 당신 앞의 문제는
                당신이 어떻게 마음을 먹든
                상관없이 그렇게 놓여있다

                당신이 그 문제를  어떠한 감정
                상태로 처리하느냐에 따라 
                당신은 그 어려움을 빨리 극복하고
                행복한 상태를 회복할 수 있기도 하고 
                그 문제에 발목이 잡혀 
                불행하게 허우적거릴 수도 있는 것이다

                <리처드 칼슨의
                '우리는 사소한것에 목숨을건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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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철들게 한 시사만평  (0) 2015.08.15

                구약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인가?

                창 1:26~28, 5:1~3; 9:6; 시편 8편


                1. 각 동물은 그 “종류대로”(창 1:21, 24, 25) 창조하셨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26~27). 26
                2. 헤르만 바빙크: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가장 높고 풍성한 계시이며 따라서 온 창조 세계의 머리이자 면류관이다. 26...
                3.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우리는' 하나님이 “복수적 존재이시다”는 것과 “다른 존재”와 교제하시는 존재로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27
                4. 하나님의 논의와 숙고가 인간의 창조에 선행했다.
                5. 아담은 남자와 여자 모두로서의 인간(창 5:1)이라는 의미와 인류(창 6:5)의 의미이다.
                6. 형상(첼렘) 모양(테무트)인데 이 둘 사이에 아무런 본질적 차이가 없다(창 1:26(형상과 모양), 27(형상), 5:1(모양), 3(모양과 형상); 9:6(형상)). 28
                7. 형상(첼렘): 자르다, 조각하다, 자르다. 어떤 동물이나 사람의 조각된 모양을 표현할 때 사용. 인간이 하나님을 반영하고 있음을 즉 하나님의 표상임을 뜻한다.
                모양(테무트): ‘~와 같다’. 형상이 또한 하나의 모양, “우리와 닮은 형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8. 인간이 특정한 측면에서 하나님을. 닮은 하나님의 표상이다. 29
                9. 짐승들과 땅 전체에 대한 지배권: 창 1:26절에서 하나님이 온 땅에 대한 최고의 지배권을 갖고 계시는 것처럼 인간인 짐승들과 땅 전체에 대한 지배권은 하나님의 형상이 지닌 한 측면이다.
                10. 교제하는 존재: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교제하는 모습을 반영한다. 인간은 남자가 여자를 보완해주고, 여자는 남자를 보완해 준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인간은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교제하는 존재이다.
                11. 책임있는 인격체이다: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복을 내리시고 명령(창 1:28)하시는 것을 근거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존재이며 자신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신 하나님께 책임이 있는, 인격체이자 책임있는 존재란 면에서 하나님을 닮았다.
                12.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다스릴 수 있는 인격체: 하나님은 결정을 내리실 수 있고 다스리실 수 있는 한 인격으로 계시되는 것처럼 인간도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다스릴 수 있는 한 인격이다.
                13. 하나님은 인간의 통치권에 대한 말씀에 선행하여 26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을 하신다. 이는 결혼 제도를 함축하며 결혼 제도의 성립은 창 2:18~24절에서 서술된다. 30
                14. 문화명령: 하나님을 대신하여 땅을 다스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문화를 발전시키라는 명령.
                15. 인간은 창조주의 손에서 출현했을 때 타락하거나 부패하거나 죄에 물들지 않았다(창 1:31).
                16.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이 죄에 빠짐으로 인해서 더럽혀졌다고 생각할 수는 있겠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다. 31
                17. 아담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라면 우리는 아담의 아들인 셋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진 존재라고 추론할 수 있다.
                18. 창 9:6 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건드리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건드리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이다. 살인이 금지된 이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33. 우리가 살인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인하려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34.
                19. 구약의 본문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지금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35
                20. 시편 8편에 보면 천사들이 결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36
                21. 하나님이 인간에게 창조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들에 대한 통치권을 주시고 만물을 인간의 발 아래 두셨다고 단언한다.
                22.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가장 높은 피조물이자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고 모든 천지만물을 그 발 아래 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죄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이다. 이처럼 구약에 따르면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앤서니 후크마. 개혁주의 인간론. 이용중 옮김. 서울: 부흥과개혁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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