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ctor.jpg 가난한 자와 함께한 장기려선생님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외과 학회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외과 전문의였지만, 그의 인생은 너무나도 서민적이고 초라했다.

1995년 12월, 86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부산 복음 병원 원장으로 40년, 복음 간호 대학 학장으로 20년을 근무했지만, 그에게는 서민 아파트 한 채, 죽은 후에 묻힐 공동 묘지 10평조차 없었다. 장기려 박사는 언제나 매우 어려운 처지에서 사셨다. 물론, 병원 원장이나 대학 학장으로서의 수당은 있었겠지만, 그에게는 월급이나 수당보다는 가불이 많았다.

여기에서 그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장 박사에 대해 떠도는 미신에 가까운 풍문 때문에 전국의 가난한 수술 환자들과 다른 병원에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말기 암 수술 환자들이 부산 복음 병원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겨우 입원을 하고 수술을 받아 병이 나으면 그 다음에는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그들 대부분은 입원비와 약값이 없었다. 이 때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 원장실이었다.

원래, 잇속이 밝지않아 셈을 잘 할줄 모르고, 바보 같을 정도로 마음이 착한 장 박사에게 "시골 우리 집은 논도 밭도 없고 소 한 마리도 없는 소작농이어서 입원비나 치료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습니다."라고 환자들이 하소연하면, 장 박사는 그들의 딱한 사정을 생각하고는 눈물겨워하였다.

병원비 대신에 병원에서 잡일을 하는 것으로 대신할 수는 없겠느냐는 환자들의 제안에 장 박사는 환자의 치료비 전액을 자신의 월급으로 대신 처리하고는 하였다.

병원 행정을 이렇게 하다 보니 장 박사의 월급은 항상 적자였고, 이것이 누적되면서 병원 운영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결국, 병원 회의에서 결정이 내려졌다. 앞으로 무료 환자에 관한 모든 것은 원장님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부장 회의를 거쳐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가난한 환자들이 장 박사를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결정권을 박탈당한 이후부터 장 박사는 어려운 환자들이 생기면 야밤에 탈출하라고 알려주고는 하였다. "내가 밤에 살그머니 나가서 병원 뒷문을 열어 놓을테니 탈출하라."는 것이었다.

장 박사의 이러한 '바보 이야기'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북녘에 두고온 아내와 가족에대한 그리움을 가슴에묻고 지낸 장기려 박사는 평생에 걸쳐 묵묵히 사랑을 실천한, 진실로 아름다운 예수의 사람이었다.

이산의 아픔 삭이며 희생과 봉사의 삶 살다간 참의사

무료병원 운영과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통해 仁術을 펼친 명의 장기려, 그는 북녘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묻고 지낸 민족분단의 희생자이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지 4개월만인 1950년 10월 19일 유엔군과 국군은 평양을 탈환했다 당시 김일성의과대학 외과의사였던 장기려는 대학병원과 야전병원에서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그해 12월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국군은 평양을 철수하게 되고 이 때 장기려를 남으로 데려가기 위해 그를 야전병원 환자수송용 버스에 태웠다. 그것이 가족과의 45년에 걸친 긴 이별의 시작이 될 줄 몰랐다.

그는 언젠가 가족들을 만날거라는 희망 하나로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시작했다.그러나 곧 다시 가족을 만날거라 했던 그의 바람은 길고 긴 분단의 세월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장기려의 인생은 헤어진 가족을 향한 그리움으로 바쳐진 사랑과 기도였다.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위해 평생을 바치겠다"

의사 장기려의 가족에 대한 사랑은 황무지나 다름없던 우리 의료계에 '가난한 사람도 치료혜택을 받아야 한다'는 박애정신의 꽃을 피워냈다. 그는 의사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의 차원을 넘어 하나님이 허락한 소명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부터 의사 한번 못 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고 하나님 앞에 맹세했다. 장기려는 경정의전에 들어가면서 한 이 하나님앞에 약속을 생이 다할 때 까지 지켜나갔다.

평생을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인술을 펼친 의학박사 장기려. 그는 춘원 이광수의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실제 모델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성자'로 불렸다.

작가 이광수는 장기려를 가리켜 '당신은 聖者아니면 바보요'라고 말했다. 장기려는 자신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면 북에 있는 가족도 누군가 도와줄 것이라고 믿음을 갖고 하루 200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 -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조합 설립

병원 규모가 커지면서 무료진료가 불가능하게 되자 장기려박사는 1968년 '건강할 때 이웃돕고, 병났을 때 도움 받자'라는 표어 아래, 북유럽의 의료보험제도를 본 딴 '청십자의료협동조합'을 탄생시켜 한국 의료보험 제도의 모태가 되었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그때, 주변의 몰이해와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 하고, '병의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는 것으로도 슬픈데 가난한 사람에게 과중한 치료비를 부담시킬 수 없다'는 신념 하나로 장기려는 한국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장기려박사는 서울의대 전신인 경성의전을 수석 졸업하고 59년 국내 최초로 간대량(肝大量) 절제수술에 성공하는 등 학문적으로도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 중 한 사람이었다. 장기려는 한국 간외과학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나는 가진 것이 너무 많다

장기려는 수술비가 없는 환자를 위해서 자기 돈으로 수술을 해주었다. 자기 월급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환자를 야밤에 탈출시키기도 했다. 평양 시절 그의 부인은 장기려가 생활비를 가져다 주지 않아 의사 가운과 환자복 삭바느질로 생계를 꾸려갔다. 그는 평생 자기 집 한 칸 갖지 않고 병원 옥상의 24평 사택에서 살았다.

'다른 사람이 모두 만날 수 있을 때, 나도 가족을 만날 것이다'

평생 나누고 봉사하는 삶을 산 장기려 박사. 그 자신은 분단 조국에 의한 피해자였다. 1.4후퇴 때 환자를 돌보는 와중에 부모 부인 5남매를 평양에 남겨두고 둘째아들만 데리고 피난길에 올라 이산가족이 된 장박사는 평생 재혼하지 않고 고향의 가족을 다시 만날 날만 기다리며 살았다.

그런 그가 85년 정부의 방북권유를 거절하였다. 혼자만 특혜를 누릴 수 없다는 이유였다. 장박사는 끝내 그리운 가족과 상봉하지 못한 채 95년 성탄절 새벽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그는 임종을 앞둔 1995년 10월 측근들에게 통일과 민족의 만남에 대해 " 이 땅에서 지금 만나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게 짧게 만나느니 차라리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만나야지 " 라고 말하며 유명을 달리하였다.

그는 부산시민상, 막사이사이상, 국제적십자상, 국민훈장, 호암상 등을 수상했다. 특히 그는 지난 95년부터는 당뇨병과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상오 청십자병원에서 영세민 10여명씩 진료해 주다가 그해 성탄절 새벽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고 경기도 마석 모란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장기려 박사의 비문에는 그분의 유언대로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 적혀 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웃들의 벗'임을 자처하며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철저한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살아 간, '이 땅의 작은 예수'로 칭송받은 분이다. 그에게 붙은 '한국의 슈바이처', '살아있는 푸른 십자가' 라는 찬사에 한 점도 부끄럼 없이 평생 이웃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

예수처럼 살고 싶었던 사람 절대빈곤시절의‘천막 무료진료’부터 미래를 내다본 의료복지 정책인 '청십자 의료조합’까지, 그것은 그의‘사랑'이 이뤄낸 기적이었다.

그는 예수처럼 살고 싶어했고, 그렇게 살았다. 분단의 아픔을 환자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한 의사 장기려의 삶은 우리 모두가 본 받아야 할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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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곳곳에서 교회를 지탄하는 소리 드높아만 가고, 세상의 빛으로 밝게 빛나야 할 등불로서의 교회가 점점 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성도들을 주님 앞으로 이끌기 위해 누구보다 먼저 청결하고 정직한 삶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할 영적 지도자들 중, 모두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많은 사람이, 기준도, 잣대도, text도 주어지지 않았던 암흑기, AD 시대, 예수님 오시기 전 약 400여 년 전 그때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혼돈하고 공허한 길, 넓은 길, 어그러진 길로 달려가고 있음을 보면서 안타깝다.(나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기에 더욱 안타까운 마음임을 고백한다.)

무엇 때문일까? 지금은 그때 그 시대와 분명 다르지 않은가? 무엇보다 신구약 66권으로 잘 엮어진 정경, 하나님의 말씀이 손에 들려져 있는 축복의 시대에서 사는 우리다. 그럼에도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성도라고 자처하는 사람 중, 많은 사람이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에 눈이 먼 탓이며, 주님 다시 오심을 보는 그날이 가까워 올수록 주님의 말씀을 지켜나가려는 사람들보다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에 마음을 빼앗기는 목회자들, 성도들이 더 많아질 것이니 너희는 그 길에서 속히 돌이켜 떠나야 한다.”라는 성령님의 음성이 이 아침에 큰 울림으로 내 영혼을 때리며 들려온다.. 그렇다면,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1. 시날(r[;n]vi )의 역사적 배경:

시날(r[;n]vi ), (신아르), 시날(shinar)은 강 두 사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시날을 둘러 있는 두 강은 티그리스 강과 유브라데 강으로 고대 문명의 발상지의 유명한 지역을 의미한다. 이 지역은 수메르인들에 의하여 수메르와 아카드로 알려졌으며 후에는 바벨로니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창10:10에서 위대한 전제 군주이자 제국 창설자인 니므롯이 시날 땅의 바벨, 에렉(수메르 어로는 우룩), 악갓(아가데), 갈레에 그의 왕국을 건설했다고 한다. 니므롯은 여기서부터 북쪽으로 앗수르까지 밀고 나아갔으며(창10:10), 패역한 인간이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반항하여 그 유명한 바벨탑을 세운 곳이 바로 이곳 시날이었다(창11:2).

주후 1세기에 이르러서도 요한은 이 종교 제도를 언급하여 바벨론을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칭하였다(계17:5). 탐사자들은 바벨론의 위치는 힐라옵 동북방 9.6km 지점과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 남쪽 80km 지점이며,지금도 그곳에는 예루살렘의 왕을 잡아다가 유폐시켰던 현장을 비롯하여 53개의 신전(神殿)과1,300개의 제단이 더러는 부서진 채 남아 있다고 한다. 아간이 훔친 외투는 시날의제품이었으며(수7:21), 정확히 설명할 수 없으나 전부 금실로 짠 매우 값진 수놓은 옷인 것 같다.(참조: H. J. Austel; Wycliffe BE). 잠시 살펴본 대로, 시날은 음란의 도시, 교만의 도시, 맘몬(Mammon, 재물의 신)이 장악한 곳,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악의 도시를 상징함을 알 수 있다.

여호와께 바쳐진 물건, 하나님께 드려진 그 구별된 물건에 욕심을 부렸던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과 그 가족이 망하고, 아무 죄없던 그 이웃마저 큰 고난을 당한 이유가 바로 그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은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참패했고, 결국 아간은 그 범죄로 인해 자신이 사랑하던 아들들, 딸들, 소들, 나귀들, 양들과 장막 그리고 그가 흠모하여 훔친 시날의 아름다운 외투, 금과 은과 함께 돌무더기에 깔리고 불살라져서 아골 골짜기에 묻혀버렸다.

여호수아서의 기자는 그때 여호와께서 극렬히 분노하셨다고 표현했다(수 6:21~26). 이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구별된 물건에 대한 욕심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미워하시는 일인가 하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이렇게 나 한 사람이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에 미혹되어 눈이 멀게 되면, 나도 망하고 내가 속한 공동체 전부가 망하거나 아니면 큰 해를 당하게 된다.

2.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은 무엇인가?

앞에서 잠시 살펴본 대로, 시날산의 외투는 아름답기 그지없고 엄청나게 값진, 금실로 짠 옷으로서, 그 외투를 한 번 보게 되면 누구나 탐낼만한 매력적인 물건인 것과 동시에, 내 것이 아닌, 하나님께 드려진 것으로써 인간이 가로채서는 안될 그 무엇,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과의 언약 파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그것은 ‘금지된 실과,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에도 비유될 수 있다. 영적으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이지만 따먹어서는 안 될 선악과, 취해서는 안 될 그 모든 것을 총칭한다고 보아도 결코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런 것을 전제로,

a) 성도는 금지된 물욕(物慾)을 제어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날산의 외투는 영적으로 물질이다. 현대는 맘몬(mammon), 재물의 신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는 말세지말이다. 성도는 내게 허락되지 않은 물질을 탐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이 물욕, 곧 금지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를 탐내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해서 직장에서 신임을 잃고 해고를 당하기도 하고 더 심하면 그 물질 때문에 자살까지도 하게 된다. 목회자들이라하여 이에서 제외된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목회자들, 특히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헌금을 자신의 임의대로 유용하는 것이나, 정한 사례비 외에 판공비를 받아 개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이와 같다고 본다. 물론 목회자가 정해진 사례비 외에 목회 활동비가 있어야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하고 주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목회 활동비를 100% 그 용도 그대로 정직하게 사용하지 않는 데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 1:15)는 말씀은 가롯 유다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물질을 탐하던 가롯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기에 이르렀다. 예수님은 그를 가리켜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다.” (마 26:24)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는 결국 예수님을 팔고 받은 돈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가룟 유다의 사건은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가 물질을 탐하다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하게 된 좋은 예가 된다. 오늘날 주의 종으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예임에 틀림없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 그 어떤 직위를 받았다고 하여 그 직위 자체가 구원을 줄 것이란 생각을 버려야 한다. 가롯 유다도 사도로 택함을 입었지만, 그 직위가 그를 구원시키지 못했다.

b) 성도는 금지된 정욕(情慾)을 제어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선물이 性인 동시에 잘못 사용하면 최대의 죄악도 바로 性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성스러운 곳이다. 침소를 더럽히지(히 13:4절 참조) 말아야 한다. 성경에 별처럼 빛나던 인물들이 이 부분에서 실패했다. 모세도 이방인이었던 구스여인을 취하여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므로 그의 권위가 많이 실추되었다.(민 12:1). 다윗이 위대한 왕이었지만 남의 아내 밧세바, 금지된 성(性)을 취하고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하여 그녀의 남편이자 자신의 충성스런 부하 장수, 우리아를 전쟁터로 내보내 죽이는 비행을 저지른다. 삼손은 나실인이었으나, 이방 여인이요, 기생이었던 ‘들리라’를 탐했다가 두 눈 모두 빼이고 결국 목숨마저 잃게 되었다.

c) 성도는 금지된 명예욕을 제어해야 한다.

명예욕은 정말 무섭다. 이 명예욕은 사단의 속성이다. 그는 하나님처럼 높아지려 하다 쫓겨난 천사라는 기록이 있다. (겔 28장 참조) 명예욕이 무서운 것은 그 속성 때문이다. 올라가려고 하는 자는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게 되며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은 자신의 뼈를 썩게 한다.(잠 14:30절 참조) 동생을 시기한 가인은 최초의 살인자란 오명을 영원히 남길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요셉의 열한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그를 애굽의 종으로 팔았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시기해서 십자가에 넘겼다.(마 27:18, 막 15:10 참조) 무엇을 더 말할 수 있겠는가.

성경에 이런 일들을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거울로 주신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전 10:6, 11절 참조)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라. 문제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이런 경고의 말씀에는 아예 귀를 막아 버린다는데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는 선한 말씀을 오용 내지, 악용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리고 한 번 구원은 영원 구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업신여기는 행위를 믿음의 행위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중략-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17, 26절 말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情과 慾心)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절 말씀).”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절 말씀).

별똥별/ 최송연의 칼럼 글

놀라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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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드시 구원 확신을 가져야 하는가?

 

 

박일민 교수(칼빈대학교 신학대학원장·조직신학)

 

“구원 받으셨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조금도 주저 없이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본다. 때로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운 생각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이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할 수 없어, 매우 난감해 하는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이 질문에 주저하는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헛 믿은 사람이라고 심하게 몰아붙이는 사람들을 보기도 한다.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이제 성도들이 가져야 할 구원에 대한 확신 여부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1. 구원의 근거와 성격

구원은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 해방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항상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취급한다. 따라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아무렇지 않는 일이나 생각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심각한 죄로 여겨질 때가 많다(시 51:4). 그러므로 죄와 죄의 결과들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때에만 가능해진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을 주시는 과정에서 아무런 조건도 요구하지 않으신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대가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이 선물은 믿음을 통해서 주어진다. 그러나 그 믿음마저도 하나님의 선물이요, 우리가 구원을 위해 제시해야 할 우리 편의 조건이 되지 않는다(엡 2:8).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구원의 효과는 사람이 살아 있을 때나, 이 세상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의 효과는 사람이 죽은 이후에도, 그리고 이 세상이 없어진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래서 구원은 영생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롬 5:21).

구원의 효과는 우리가 그것을 분명하게 의식하는가 또는 하지 못하는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역사는 사람의 그 무엇으로도 무효화시킬 수 없다. 따라서 한번 주어진 구원 은혜는 결코 취소되는 일이 없다(요일 5:18).

 

2. 확신의 두 유형
성도가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가지는 확신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1) 객관적 확신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되어진다고 믿는 것을 객관적 확신이라고 한다.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모두 객관적 확신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 그 분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내가 그 분을 믿으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 하는 것 등,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내용과 약속은 분명한 사실이요 또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자”고 말씀하셨다(히 10:22,23). 그리고 야고보 사도께서는 확신을 갖지 못한 성도를 향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주의를 주셨다(약 1:6,8). 객관적 확신은 참된 믿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객관적 의미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다 가지고 있다.

 

성도는 자신의 형편이나 주변의 상황과 관계없이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구원은 과거에 세례나 특별한 영적 은사를 받았는가, 지금 감사와 은혜에 충만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장차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 떠나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하는 것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서 나타나는 이와 같은 여러 현상들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일 뿐이다.

 

2) 주관적 확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자신은 이제 죄 용서를 받고 영혼의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자기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것을 주관적 확신이라고 한다. 성도는 객관적 확신뿐만 아니라, 주관적으로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객관적 확신과 주관적 확신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역과 말씀에서 나오는 객관적 확신은 개인차가 있을 수 없지만, 성도 각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주관적 확신에는 많은 개인차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객관적 사실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이 가지는 성격이나 받은 교육의 결과에 따라서 지나치게 잘못된 확신을 가질 수도 있고, 남달리 전혀 확신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기에 기독교 밖에서도 잘못된 진리에 대한 대단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 안에서도 참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도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주관적 확신의 여부만 가지고 그 사람의 구원을 단정하기란 쉽지 않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8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셨던 세리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세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말씀하셨다(눅 18:13,14). 이 비유에 등장한 세리는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 즉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세리가 구원에 대한 주관적 확신까지 가졌을 것이라고 단정할만한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옥합을 깨뜨리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던 여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눅 7:50).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 여자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든지 그 여자의 구원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그 여자가 주관적인 확신까지 가지고 돌아갔다고 단정할 증거는 찾을 수가 없다.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는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제자가 되었다는 말씀을 본다(행 2:38-41). 그 날에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삼천 명 모두가 자신의 구원에 대한 주관적 확신을 동일한 수준으로 가졌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3. 구원과 확신
객관적 확신은 구원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객관적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말 할 수 없다. 자신의 연약한 형편만을 생각하고 구원에서 멀어질까 염려하는 사람은 참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탕자처럼 멀어진 사람이라도, 한번 구원하신 사람은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시고 다시 불러내서 아들(구원)의 자리에 이르게 하신다. 구원에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함이 없다(롬 11:29). 성도는 어떠한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주관적 확신은 구원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주관적 확신은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열매이다. 열매는 맺히고 익어가는 정도에서 한 나무 가지 중에서도 서로 개인차가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주관적인 확신이 부족하다고 하여 구원받지 못했다고 쉽게 단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믿음은 사람마다, 그리고 시기마다 그 정도가 다양하여서 약하기도 하고 강하기도 하다(히 5:13,14, 롬 4:1920). 믿음은 종종 여러 가지 공격을 받아 약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참 믿음은 마침내 승리를 얻는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 믿음은 여러 면에서 성장을 하여(히 6:11, 10:22), 우리 믿음의 시작과 마침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충만한 확신에 이르고야 말기 때문이다(히 12:2).

 

주관적 확신이 구원의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는 말을, 주관적인 확신은 없어도 좋다는 의미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라도 새가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라는 것처럼, 믿음도 성장을 해야 한다. 그래서 그 깊이와 넓이를 더하여 부족하던 확신을 몰아내고, 어떠한 형편 속에서도 마음속에 자신의 구원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수준에까지 자라야 한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에게 주시는 선물이다. 구원은 사람의 조건에 따라 주어지거나, 취소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구원에 관한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각 사람의 주관적인 느낌에는 개인차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관적 확신만으로 구원 여부를 단정하려 해서는 안 된다. 만일 주관적인 확신이 부족한 사람이 있다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 하시는 하나님께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고 익혀서, 주관적 확신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수준에 이르도록 자라기를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행복충전소 대명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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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金鐘日牧師|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시대의 징조들

일루미나티도 영생을 꿈꾼다.

덧글28
예레미야 이웃추가 | 2015.08.18.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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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기업 구글이 생명과학 분야까지 도전장을 내밀었다. 생명과학 투자를 통해 인류의 염원 중 하나인 수명 연장을 현실화시키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드러냈다.

 

구글의 벤처캐피탈 자회사인 구글 벤처스의 빌 마리스 대표는 블룸버그마켓 4월호 인터뷰에서 "인간이 500살까지 사는 것이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내 대답은 '그렇다(yes)'"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구글은 이 같은 생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생명과학 분야에 수백만달러를 투자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리스 대표는 수십명의 생명과학 분야 과학자들을 영입해 암치료를 가능케하는 스타트업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향후 20년내에 항암 화학요법을 원시적인 치료법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는 "유전체학이 없었던 20년전만 하더라도 독으로 암을 치료할 수밖에 없었다"며 "이는 줄기세포 역조작으로 암을 치료하는 것과 정말 다르다"고 말했다.

 

현재 구글 벤처스는 70명의 관련 직원을 두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2013년 생명과학 분야 투자규모는 전체 자산 대비 6%에 불과했으나 현재는 36%로 높아진 상태다.


마리스 대표는 사람들이 더 오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라고 표현했다. 그는 "실리콘밸리에는 수많은 억만장자들이 있지만 결국 모두 같은 곳을 향한다"며 "많을 돈을 버는 것과 사람들의 생명을 더 늘리는 방법을 찾는 것 중 무엇을 택하겠는가?"고 덧붙였다. ("인간 수명, 500살 가능하다"…구글의 새로운 도전, 머니투데이뉴스)


 

* 일루미나티의 어젠더 가운데 ‘트랜스휴머니즘’이라는 것이 있다. 최첨단의 의료기술과 컴퓨터, 로봇 기술과 같은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의 생명과 능력을 신의 영역으로까지 확장시켜보겠다는 야심찬 계획이 바로 ‘트랜스휴머니즘’이다.



 

검색엔진 기업인 구글이 엉뚱한 생명과학 분야에 막대한 투자금을 쏟아 붓는 이유가 바로 일루미나티의 주요 어젠더인 트랜스휴머니즘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한 손에 쥔 일루미나티들이지만 저들에게도 ‘죽음’의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인 것이다.

이 숙명에서 벗어나고자 첨단의 의료기술과 과학기술을 동원해 영원히 죽지 않는 신인류 - ‘트랜스 휴머니즘’을 실현해보겠다고 몸부림치고 있지만, 그 어떤 시도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히브리서 9장 27절)이라는 성경의 선언을 거스를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인류의 탄생과 타락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창세기는 본래 인간은 영생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였지만, ‘죄’로 인해 죽음이라는 심판이 찾아왔다고 선언하고 있다. 영생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죽음’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고, 죄로 인해 찾아온 죽음이기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결코 죽음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트랜스휴머니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영생의 길로 인도하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한복음 3장 16절)


- 예레미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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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만난 후

               최송연

 

주님,

당신을 만난 후,

내 마음속에 흐르는

감격의 노래 하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나는

보잘 것 없는 실수투성이

 

그러나

당신의 눈에 비친 나는

최고의 걸작품이죠,

주께서 정성 다해 빚으셨으니까요.

 

주님,

당신을 만난 후,

내 마음속에 흐르는

사랑의 노래 하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나는

슬픈 자아상을 가진 외로운 영혼

 

그러나

당신이 보시는 나는 사랑받는 자녀죠,

주님의 보혈로 자녀 삼아 주셨으니까요.

 

주님,

당신을 만난 후,

내 마음속에 흐르는

소망의 노래 하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던 나는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아집 덩어리

 

그러나

당신이 보시는 나는 들에 핀 백합화죠,

주님의 그 크신 은혜가 향기 되어

내 온 몸과 영혼을 적셔주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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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자 찍다 헤어진 아버지 만난 사진작가

I

인사이트 08/13/2015 05:14PM

Via NBC News

 

하와이의 거리를 떠도는 노숙자들을 전문으로 촬영하던 사진작가가 수십 년 전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지난 12일(현지 시간) 영국 일간 메트로 등 여러 외신은 지난 10년간 하와이 거리의 노숙자를 촬영하다가 어린 시절 헤어진 아버지와 재회한 사진작가 다이아나 킴(Diana Kim, 30)의 사연을 소개했다.

 

다이아나는 그녀가 10살이 되기 전 부모님이 이혼해 한국인 아버지와 연락이 끊기​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힘든 유년을 시절을 보낸 다이아나는 2003년 고등학교에서 주최한 사진 프로젝트에 참여해 하와이 호놀룰루와 마우이 섬에 있는 노숙자들의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촬영은 10년이 지난 2012년까지 이어졌고, 그러던 어느 날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Via NBC News

 

수십 년 전 연락이 끊긴 아버지를 호놀룰루의 노숙자들 사이에서 발견한 것이다. 다이아나는 "그냥 본능적으로 알았다. 틀림없이 아버지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온 몸에 상처가 있던 아버지는 딸을 알아보지 못했고, 심각한 정신분열 증세까지 보였다.

 

이에 다이아나는 아버지를 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설득을 했지만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딸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렇게 다이아나는 거리를 방황하는 아버지의 곁을 2년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 2014년 10월 몸에 이상이 많이 생긴 다이아나의 아버지는 결국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반강제로 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치료를 통해 몰라보게 건강해졌다. 딸과의 관계도 회복했다.

 

다이아나는 "정신분열 증세도 없어졌고, 건강도 매우 좋아졌다"며 "조만간 아버지랑 영화를 보러 갈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몇몇 사람들은 아버지가 나를 버렸는데 어떻게 용서하냐고 질문을 한다"며 "하지만 어린 시절 나의 아버지는 매우 자상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포기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지금도 거리의 노숙자들을 촬영하며 전문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다이아나는 아버지와 함께 그의 고향인 한국을 방문할 예정으로 전해졌다.

 

 

Via NBC News

 

김지현 기자 john@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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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갈래길..여러분의 선택은!!




 


" 가지 않은 길 "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 갈라져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나그네라. 오래 동안 서서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꺽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 걸은 자취가 적었습니다.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 적어

아무에게도 더렵혀지지 않은 채 묻혀  있었습니다.

아, 나는 뒷날을 위해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것으로 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프루스트의 시 )



      

                                                             

 

출처: 맑은 누리/물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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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腦과학 전공 카이스트 교수

학생같은 옷차림의 김대식 카이스트대 교수가 21일 서울 중구 새문안로 문화일보 사옥 뒤편 정원에서 뇌과학이 알려주는 인간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설명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학생같은 옷차림의 김대식 카이스트대 교수가 21일 서울 중구 새문안로 문화일보 사옥 뒤편 정원에서 뇌과학이 알려주는 인간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설명하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 심만수 기자 panfocus@munhwa.com

김대식(47) 카이스트대 교수의 학력과 경력은 눈부시다. 독일에서 초·중·고와 대학을 졸업한 그는 노벨상 수상자만 32명을 배출, 노벨상사관학교로 불리는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어 미국 최고의 대학 중 하나로 꼽히는 MIT대학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은 뒤 일본의 노벨상 수상의 산실로 꼽히는 이화학(RIKEN)연구소에 재직했다. 이후 미국 미네소타대, 보스턴대 등에서 15년간 교수생활을 한 그는 지난 2009년부터 카이스트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런 그가 지난 21일 분홍색 운동화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헤어무스로 머리를 잔뜩 세운 채 문화일보에 나타났을 때, 그리고 “공부를 잘 못해서 오래 하게 됐지만 그래서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게 됐다”고 말할 때 ‘잘난 척’한다는 생각보다는 신선함이 느껴졌다. 실제로 그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솔직하게 말했고 뇌과학과 인공지능의 미래를 열정적으로 설명했고 우리 과학계의 문제를 냉정하게 비판했다. 그의 생각과 말에는 여기저기 눈치를 보는 듯한 머뭇거림이 없었다. 그래서 인터뷰를 마무리할 때쯤에는 독일, 미국, 일본 등 선진국을 오가며 첨단의 학문을 해온 과학자의 자유분방함과 진취성이 바로 창의의 핵심이라는 생각에 자연스러워졌다.

―뇌과학은 어떤 공부를 하나.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신경생물학, 전자생물학 등을 공부했고 동물들 뇌수술을 하기도 했다. 뇌수술을 했을 때 정말 신기했던 것은 뇌에는 신기한 것이 없다는 점이었다. 뇌는 그냥 1.5㎏짜리 고깃덩어리였다. 뇌를 아무리 해부해봐도 그 속에 영상도 없고, 소리도 없고, 자아도 없고 기억력도 없다. 그런데 그 고깃덩어리로 우주를 이해하고 몇 천 년 동안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해답을 구한 거다. 어떻게 물질적인 기계가 지능과 감정과 영혼과 자아를 만드는지, 그게 제가 보기에는 뇌과학의 가장 재미있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뇌과학을 실험철학이라고 부른다. 철학자들과 같은 질문을 하지만 실험으로 문제를 풀려고 한다는 점에서 기존철학과 다르다.”

―오랫동안 실험철학을 해오면서 철학적으로 깨달은 것도 많겠다.

“과학적으로 뇌를 분석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뇌를 연구하면 알츠하이머 치료법을 발견한다든지 기계에 지능을 부여해 부가가치를 높인다든지 하는 긍정적인 효과에 기대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메시지는 이미 많이 알려져있다.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다분히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첫째는 현대 뇌과학이 알려주는 인간의 모습이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의 정치적 선호나 종교적 믿음 등과 같은 것은 다 착각이다. 뇌가 얘기하는 거짓말이다. 뇌과학은 이런 현실을 구체적으로 증명하려 한다. 둘째 인간처럼 생각하는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는 미래가 엄청난 편리함을 가져다주겠지만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착각’이나 ‘착시’가 진화생물학자가 주장하는 ‘자유의지는 없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인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자유의지란 내가 뭔가를 원했을 때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선택의 꼬리물기다. 인간은 팔을 올리는 아주 단순한 결정에서부터 결혼을 하는 대단히 복잡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결정을 한다. 그런데 이게 말로는 쉽지만 사실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팔을 든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소모되는 등 엄청난 물질적인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반면 내가 뭘 원한다는 것은 비물질적인 것이다. 사실 비물질적인 의도가 물질적인 세상에 변화를 준다는 것은 물리학에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한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 벤저민 리벳 박사가 자유의지와 관련된 실험을 했다. 그런데 내가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 몇백 밀리 세컨드 정도의 극히 짧은 시간 전에 뇌에서는 이미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자유의지라고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인데 사실은 나라는 자아가 무언가를 원하기 전에 뇌는 뭔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생각할 때는 내가 무언가를 원해서 선택을 한다. 즉 선호가 있어 선택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현대 뇌과학에서 선택을 먼저 하고 선호를 만드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인간의 선택은 하나의 당구공이 다른 당구공을 치면 그 당구공이 움직이는 것처럼 단일한 인과관계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인과관계가 합쳐져 이뤄진다. 그래서 현대과학에서 ‘선택의 풍경’이란 말을 쓴다. 산꼭대기에서 하나의 공을 굴리면 산의 풍경에 따라 공이 굴러내려 온다. 프레임은 선택돼 있지만 어떤 결정이 날지는 모른다. 이처럼 인간은 예측할 수 없는 기계다.”

―인간은 왜 그런 착각을 하도록 만들어졌나.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착각이 없다면 ‘나’와 ‘자아’가 연결될 수가 없다. 매 순간마다 수백 가지 다른 이유들로 선택을 하게 되는데 ‘나’라는 ‘자아’가 있고 그 ‘자아’가 이런저런 이유로 선택을 했다는 스토리를 만들면 그 스토리를 통해 연관이 없는 점들을 연결시킬 수 있다. 이렇게 점들을 연결시켜주는 선이 결국 ‘나’라는 자아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 자체도 사실은 착각이다. 진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의지가 없다면 ‘책임’이라는 개념도 설 자리가 없는 것 아닌가.

“책임이라는 개념은 계몽주의의 산물이다. 인간은 자유롭고 선택에 대한 자유가 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유의지란 것이 알고 보니 뇌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면 누가 책임을 지겠는가. 미국에 있을 때 한 달에 한 번 보스턴에서 뇌과학자들과 법조계들 모임이 있었다. 판사 한 분이 뉴욕에 있을 때 은행 임원이 부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멀쩡하던 사람이 부인을 살해했다. 이유를 알아보니 그 임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두엽에 암이 있었다. 전두엽은 사람의 성격과 선택을 좌우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결국 그 임원이 자유의지로 부인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뇌가 병에 걸려 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판사는 그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법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규정돼 있지 인간의 신경세포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규정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다른 교수님은 자유의지가 없더라도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믿는 사회가 없다고 검증된 사회보다 낫다는 말을 했다. 독일에 있는 제 지도교수님은 과학적으로 자유의지(프리 윌)는 없는 것 같지만 적어도 프리 언윌(free unwill)은 있을 것 같다고 하셨다. 내 머리 안에서는 내가 컨트롤 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져 나를 선택하게 만들지만(그런 프로세스 자체는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적어도 ‘선택을 자제할 수 있는 능력’(free unwill)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자제를 얼마나 했느냐를 가지고 책임을 따질 수 있다고 했다. 지도교수님은 현재 교황의 자문 역할을 맡고 계시다. 이처럼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을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과학의 핵심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든다고 숨겨서는 안 된다. 뇌과학에 있어서는 불편하고 숨기고 싶은 사실들이 많다.”

―또 어떤 것들을 숨기고 싶어 하나.

“숨기고 싶은 또 다른 진실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보이는 대로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뇌가 계산해 낸 아웃풋(결과물)이다. 고양이는 컬러를 못 보니 흑백으로 세상을 본다. 박쥐는 세상을 초음파로 본다. 초음파로 보는 세상은 어떨까 인간은 상상할 수 없다. 세상이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 있는 게 아니고 뇌가 만들어낸 것이라면, 인간들 간의 소통이 가능할까? 인간 각자가 뇌도 다르고 유전자도 다르고 경험도 다를 텐데.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우리는 사과를 보고 ‘빨갛다’고 말을 하지만 빨간색에도 복잡한 패턴과 색깔이 있다. 문제는 언어의 해상도가 생각의 해상도보다 더 낮다. 그래서 언어로는 빨갛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결국 ‘빨간사과’라는 말로 표현하고 서로 이해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요즘 소통을 강조하는데 인간의 소통이라는 게 굉장히 한정된 것일 수밖에 없군요.

“개인적으로 소통은 언어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동일한 경험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 그나마 나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외계인의 경우 경험한 것이 다르고 개념이 다른 만큼 소통이 불가능하다. 사실 소통을 말로 하면 착각만 커질 뿐이다. 비슷한 경험을 했을 때 소통이 된다. 인공지능 연구에서도 이 문제가 가장 큰 이슈다. 50년에서 100년 후에 인공지능이 발달해서 생각하는 기계가 나왔는데 그 기계가 생각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 그래서 엘렌 튜링이라는 과학자가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는 튜링테스트를 만들었다. 생각해보면 인간끼리도 정신이나 자아를 증명할 방법이 없다. 이 세상에서 정신이 있다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모른다. 상대방의 머릿속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지금은 인간을 존엄한 존재로 간주하고 인간끼리는 믿어주고 있다. 그러나 인간처럼 생각하거나 인간보다 뛰어난 기계가 나오면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지 못할 수 있다. 이처럼 뇌과학에서는 철학적인 질문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란 있는가, 우리가 보는 현실이 정말 현실인가, 소통은 가능한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실험을 통해 검증하고 있다.”

―뇌과학이 소통에 대해 제기하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는 사회과학적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인간은 같은 공동체에 소속돼 있으니 그나마 소통이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일본사람은 서로 뇌가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도 다를 수밖에 없다. 뇌를 연구해보면 뇌 안에 있는 10의 11승 되는 엄청난 신경세포들이 있고 이 세포들이 다른 신경세포들과 연결돼 있다. 그런데 태어날 때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큰 고속도로 정도의 기본적인 연결만 이뤄진 상태다. 부산에서 다시 시내로 이어지는 길은 만들어져 있지 않다. 태어나서 여러 가지 경험을 통해 연결이 만들어진다. 모든 동물들에게는 ‘결정적 시기’라는 게 있다. 오리는 태어나서 몇 시간, 원숭이는 태어나서 1년, 사람은 태어나서 10∼12년 정도가 결정적 시기다. 이 기간에는 뇌의 연결이 형성된다. 자주 사용되는 회로망은 살아남고 사용 안 하면 리사이클 해버린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가는 환경에 적합한 인간형이 만들어진다. 나는 태어나서 11년간 한국에 살다가 독일로 갔다. 결정적 시기에 한국에서 산 셈이다. 그래서 외국에 있다 한국에 오면 뭔가 모르게 편하다. 그래서 고향이라는 게 제일 편한 것이다. 고향의 환경이 바로 나의 뇌를 만든 환경이다. 크게 고민하거나 생각할 필요가 없는 최적화된 환경인 것이다. 따라서 국제적으로 대화를 나눌 때는 서로 싸울 필요가 있는 이슈와 싸울 필요가 없는 이슈가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 한국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만 일본사람은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이슈는 싸울 필요가 없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토론이 안된다.”

―12세까지면 초등학교 교육을 마칠 때까진데 그때면 뇌가 거의 형성되나.

“그래서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대학교 교수들보다 월급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본다. 어린이들의 뇌를 만들어주는 게 초등학교 교사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커리큘럼을 바꿔야 한다. 어렸을 때 교육은 평생 바꾸기 어렵다. 특정 이념이나 특정 종교, 정치적 성향 같은 것은 집어넣으면 바꿀 수 없다. 그래서 뇌가 유연성이 높은 시기에는 수학, 물리와 같은 변하지 않는 진리를 먼저 가르치고 역사, 사회, 윤리 등의 개념은 나중에 가르쳐야 한다. 어렸을 때 이런 것을 가르쳐 놓으면 사고가 자유롭지 못하다.”

―결정적 시기가 지나고 나면 뇌가 거의 변하지 않나.

“동물에게는 결정적 시기가 한 번밖에 없는데 사람에게는 결정적 시기가 여러 번 있을 것으로 본다. 태어나서 10∼12년에는 언어적으로 결정적인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뇌는 계속 변한다. 언어 관련 뇌의 연결이 완성됐어도 뇌 앞쪽은 여전히 미완성이다. 뇌 앞쪽인 전두엽은 성격과 독립성 등을 좌우하는데 17∼19년쯤 되면 전두엽이 완성된다고 본다. 이때 사회성도 결정된다. 성인의 나이를 18∼21세로 정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가는 것 같다고들 한다. 그런데 그게 단순히 그런 느낌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하던데.

“인간이 가진 많은 착시 중의 하나가 시간의 흐름에 대한 착시다. 다들 같은 세상을 사는데 나이가 먹으면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은 이유는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뇌의 정보 전달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정보를 빨리 전달하면 세상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즉 같은 시간에 어린 사람들은 10∼20번 세상을 보는데 반해 나이가 든 사람들은 1∼2번만 볼 뿐이다. 그러니 같은 시간이라도 나이가 들면 휙휙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세상을 슬로모션으로 보는 셈이고 늙은 사람은 기억에 저장되는 영화필름의 프레임이 나이가 들수록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신경세포의 정보전달 속도를 높여주는 약을 개발 중이다. 약이 개발되면 나이가 들어도 시간이 가는 속도가 느려질 수 있다. 물론 약이 없는 상황에서도 정보전달 속도를 빨리해 시간의 흐름을 늦출 수 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 커피를 먹는 것이다. 그런데 커피 효과는 3분에 불과하다. 집중하면 정보전달 속도가 빨라진다. 그러나 역시 한계가 있다.”

―좀 더 장기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세상에 불만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세상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태어난 순간 게임의 법칙이 이미 정해져 있었고 나는 내가 정하지도 않는 게임의 룰에 최적화되기 위해 노력을 한다. 결국 세상이 갑이고 우리는 세상에 맞춰 살아야 하는 을이다. 뇌과학에서 인생의 갑이 되는 방법은 지금 이 순간 ‘지금의 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10∼20년 후의 미래의 나’로서 ‘지금의 나’를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고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게 돼 정보전달 속도를 높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집중과 선택을 통해 나중에 내가 기억할 인생에서 괴로운 것과 즐거운 것의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

―갑을 관계의 세상 속에서 어떻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나. 아니 뇌과학의 입장에서 행복이라는 것은 뭔가.

“매시 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식욕, 안전, 사랑, 자긍심, 인정받는 것, 자아실현으로 구분했다. 사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자아실현의 욕구 쪽으로 가야 한다. 내가 누구고 내가 원하는 게 뭔가를 남에게 피해주지 않으면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행복이다. 갑을 관계에서 을이 돼서 갑이 원하는 대로 잘 사는 것은 ‘만족감’을 줄 수 있지만 ‘행복’은 아니다. 행복은 나 자신이 나에게 내준 숙제를 잘했을 때 오는 것이다. 자신이 인생의 갑이자 주인공이 돼야 한다. 내 인생에서 내가 조연이 될 필요는 없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정해진 게임의 법칙을 만나고 뇌도 거기에 최적화되지만 동시에 함께 살고 서로 소통하면 주어진 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것이 자아실현에 도움이 된다. 독서를 하는 것은 남의 삶을 경험하고 소통하는 것으로 역시 자아실현에 도움이 된다.”

―뇌과학의 발달로 인공지능이 개발된 미래가 결코 밝지만 않다고 했는데 어떤 위험이 있나.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50∼100년 안에 강한 수준의 인공지능이 개발될 것으로 본다. 약한 수준의 인공지능은 빠르면 20년 후에도 가능할 것이다. 약한 인공지능은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으로 이 세대를 ‘2차 기계혁명’이라고 한다. 1차 기계혁명의 핵심은 사람의 육체적 노동력을 대체한 것이었다. 그런데 2차 기계혁명에서는 인공지능이 우리의 인지능력을 대신한다. 인간이 훨씬 자유로워지고 부자가 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기계는 지치지 않고 기억력도 무한대다. 결국 2차 기계혁명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이길 수 있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개발되면 전사회적으로 50%가 일자리를 잃게 될 수 있다. 그런데 이것도 약한 인공지능이 개발됐을 때 이야기다. 만약 지능과 자율성을 가진 강한 인공지능이 개발되면 기계가 인간을 뛰어넘게 된다. 지금까지는 지구에서 인간이 가장 똑똑해서 갑이었다. 그런데 기계가 지구의 갑이 되면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해석하기 시작할 것이다. 지금까지 지구에서 인간의 존엄은 절대적인 것으로 설정돼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설정한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존엄은 기계에게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기계가 봤을 때 인간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결국 기계가 인간을 없애버려야 할 존재로 볼 수 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기계가 인간을 전염병이라고 부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노벨상의 산실이라는 연구소와 대학에 재직했는데 연구환경에 어떤 차이가 있나.

“우리나라도 하드웨어 측면에서는 결코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다. 교수들도 학생들도 모두 똑똑하고 연구시설도 좋아졌다. 모든 것을 갖춰 놨는데 맛있는 음식이 안 나오는 환경이다. 그 이유는 연구를 못 하게 한다는 것이다. 연구할 시간에 연구하는 보고서를 쓰고 그래서 연구가 잘 안 되면 또 연구를 왜 못하는지에 대한 보고서를 쓰게 한다. 만약 연구비를 지원하고 10년만 가만히 내버려두면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마치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아 있는데 5분마다 들어와서 왜 1등 못하냐고 채근하는 식이다. 기업은 더 심하다. 매일 보고서를 써야 한다. 그러다 보니 보고서에 쓸 내용이 없다는 보고서를 써야 할 판이다. 또 많은 연구자들과 학생들이 용기가 없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사실 실패를 안 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를 안 풀고 있다는 것이다. 과학자로서 평생 실패를 안 했다는 것은 아무것도 새로운 것을 안 했다는 의미다.”

―창조경제가 화두인데 어떤 정책적 대안이 필요한가.

“우리나라의 문화에 최적화된 뇌를 가진 애들이 대학에 들어오면 손 볼 여지가 거의 없다. 질문하면 안 되고 남의 말 듣는 게 미덕이고 실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애들 데려다 놓고 창조경제하라고 해봐야 안 된다. 가장 창조적인 5%는 어떤 교육을 받든 창조적으로 행동한다. 이들은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좋다. 모차르트와 스티브 잡스는 그냥 천재고 돌연변이로 모방할 수 없다. 모방해봐야 못 따라가기 때문에 ‘잡스만들기 프로젝트’ 같은 것은 그야말로 난센스다. 반대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5%도 있다. 문제는 노력하면 되는 90%는 어떻게 할 것인가다. 비창조적인 것으로 세팅된 애들의 뇌를 리셋시키는 방법이 필요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공교육과 사교육에 수십조 원을 투자할 텐데 그중 일부를 잘라서 고등학교 졸업한 모든 애들에게 1년 동안 세계여행을 시켜주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시야가 넓어지면서 뇌가 창조적으로 리셋될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인터뷰 = 박민 사회부장 minp@munhwa.com

분홍색 운동화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나타난 김대식 교수는 인터뷰 내내 복장만큼이나 자유분망한 생각을 풀어놓았다. 심만수 기자 panfocus@munhwa.com

 

 


                                         

 누군가에게 기대어 쉬고 싶도록

힘든 날이면...

난 당신을 찾겠어요.

당신은 언제나

꽃향기 한가득 가슴에 품고...

아름다운 미소로

나를 맞아 주실 테니까요.

                                       

   

넓고 넓은 들판을

헤매다 넘어져

상처를 입었을 때에도

 난 당신을 찾겠어요.

당신은 빗물처럼 흐르는 눈물로

내 아픈 상처를 씻어주실 테니까요

 

 

 

                              

피곤하고 지친 내 영혼...

한없이 외로울 때에도

난 당신을 찾겠어요.

당신은 언제나 거기 계셔

피곤한 내 영혼을 품어 주실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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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 전쟁설’로 화제가 되었던 홍혜선씨가 오는 8월15일에 한국 집회를 재개한다고 해 논란이 일고있다. 홍씨는 작년 한국집회에서 ‘땅굴설’을 중심으로 ‘12월 전쟁’을 예언했으며, 이 예언을 기초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동남아와 미주 지역으로 ‘노아의 방주’를 타고 떠나는 부작용으로 많은 비판에 직면했었다.

본지는 작년 홍혜선씨가 다니는 풀러신학교 인근에서 행한 인터뷰를 통해 그녀의 정신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었으며, 샌프란시스코에 모여든 피난민들의 ‘노아의 방주’와, 그녀와 가족들의 연극세계를 검토한 후 ‘연극은 끝났으며, 더이상의 논란은 불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기자는 홍 씨가 한국집회를 예고하며 본격적인 활동을 선언한 이후 접촉을 시도했으며,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7월 29일) 전화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다.

홍 씨는 "지난 5월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셨으며, 최근 결혼해 남편과 함께 그리스에 다녀왔다"는 근황을 전했다. 그녀는 “남편은 미군 군목(채플린)으로 그녀의 열렬한 지지자이다”라며, “신혼여행으로 그리스에 다녀왔으며, 경제위기에 처한 그리스와 세계의 영적 회복을 위해 ‘땅밟기’를 하고 왔다”고 전했다.

“남편이 군목이니 이제 사모라고 불러야겠다”는 기자의 말에 “하나님이 저를 사모로 놔두시지 않아, 풀러신학교 목회학석사(M.div) 과정에 입학했다”며 추후 목회자로서 사역을 계속할 것임도 암시했다.

지난 ‘12월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한국 땅에 자비를 베푸시는 기간이다”며 “기회를 주셨지만, 계속되진 않을 것이다. 이번 한국 방문의 목적 중 하나가 이 부분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에게 탄원을 하려는 것도 있다”고 밝혔다.

금년초 ‘노아의 방주’를 탄 사람들의 문제를 다룬 시사프로그램으로 많은 공격을 받았다는 질문에 “그 분들(피난민들)은 저보다 더 확실한 신앙이 있으신 분들로, 저의 영향으로만 건너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며 “피신한 분들 중 상당수는 선교 목적으로 떠난 분으로 지금도 현지에 남아 좋은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연락이 지속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홍씨는 계속해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는 ‘땅굴설’에 대해 설명했으며, 최근 알게된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음모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열리는 8.15 집회에서 '이너힐링'(내적치유)를 위해 10만원이라는 구체적 금액을 언급하며 ‘치유’의 사역도 계속할 것임도 내비쳤다.

“데이비드 오워와 홍혜선의 오버랩”

홍혜선 씨 논란을 돌아보면 겹쳐지는 과거의 일이 떠올랐다. 지난 2010년 인도네시아의 쓰나미, 미국의 허리케인, 케냐의 기근 등을 정확히 예언해 화제가 된 케냐의 데이비드 오워 박사의 ‘한반도 전쟁예언 사건’이다.

그는 홍 씨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음란과 동성애를 강하게 지적했으며, ‘붉은 악마’와 한국교회의 맘몬화, 성장을 위해 바른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 목사들의 문제점 등을 거론하며,한국교회가 회개하지 않으면 몇 달 내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오워 박사가 이스라엘과 독일 등에서 공부한 유전학 박사라는 사실과 그의 경고에도 회개하지 않아 지진으로 삼십만명이 희생당했다는 ‘아이티 괴담’ 등은 널리 회자되었다. 또한, 그가 치유능력이 있어 세계각지에서 소경, 귀머거리, 앉은뱅이가 치유되는 동영상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으며, 한국교계 일부에서도 ‘오워 신드롬’이라 부르며 종말론적 예언자로 추켜세우는 ‘혹세무민’이 난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린 오워의 한반도 전쟁설이 단기간에 한국교회에 센세이션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예언’이 ‘남북경색’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과거 1992년 ‘10월 휴거설’이 미국의 부시를 중심으로 영국, 프랑스 등의 다국적군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한판 전쟁을 벌이고 있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홍혜선의 작년 12월 전쟁설도 박근혜 정부 이후 한국사회에 불어닥친 복고적 반공 분위기와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인터뷰 도중 수십번 반복되는 ‘종북’이란 단어나, 광주민주화운동, 8.15 광복 등은 종말의 당위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짜집기 시대론’이었다.

한국교회의 음란성과 목회자의타락, WCC와 같이 종교다원주의로 나아가는 좌편향적 신앙관 등은 그들에게 예언의 당위성을 위한 중요한 장치이다. 우리는 그들의 메시지를 통해 한국사회와 교회가 가져야할 당위성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당위성에 대한 고민이 예언에 대한 맹신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 데이비드 오워와 홍혜선

“당위성과 예언을 혼동하지 말라!”

홍씨는 흔히 예언을 한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예언자 신드롬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자신은 싫음에도 하나님이 부르기에 따라야 한다는 ‘이사야 신드롬’이나, 가고 싶지 않지만 한국에 가서 땅굴설을 전파하고,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야 한다는 ‘요나 증후군’ 등이 심각하게 융합되어 있었다. 최근엔 광주민주화 운동과 815 광복을 언급하며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바벨론 포로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며 강하게 항변하는 ‘예레미야 증후군’까지 보여주고 있었다.

흔히들 홍혜선 씨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무당’이라는 용어나,  ‘제정신이 아니다'라는 표현 등이다.

실제로 몇차례 인터뷰를 진행한 기자도 ‘정상의 세계와 망상의 세계’를 넘나들는 그녀의 정신세계를 목격하기도 했다. 한국사회와 교회, 목회자의 문제를 지적할 때 보여준 ‘정상세계’의 눈빛과, 천국경험으로부터 시작해 땅굴, 전쟁으로 이어질 때 보이는 ‘망상세계’ 속 눈빛은 그녀의 정신세계가 일관되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

홍혜선과 오워의 공통점은 둘다 근본주의에 기초한 일천한 ‘세대주의 종말론’에 신학적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성경은 상당부분 문자 그대로 읽어져도 되는 부분도 있지만, 절대 다수는 성서신학의 깊은 지식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도 많다.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다니엘, 요한계시록과 같은 묵시서들을 문자 그대로, 심지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함으로 사회적 문제로 확산된 경우가 적지 않다.

작년 홍혜선의 예언이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다 하더라도, 선교라는 미명하에 비지니스 경쟁으로 확대되어 낭패를 본 사례나, 전쟁이 나면 난민신청을 통해 미국 영주권을 획득할 수 있다는 헛된 기대를 부추김으로 심각한 가정문제를 일으키는 등 다양한 부작용을 양산한 책임에 자유로울 수 없다.

오워가 한 여성 언론인과의 대담에서 수염을 기르는 이유에 대한 질문에 대해 “여인이여, 주님과는 농담을 하는게 아닙니다”라고 대답한 유명한 일화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우리의 헛된 열망과 환호가 또 하나의 재림예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만큼 두려운 부작용이 있을까? ‘선지자적 예언’과 ‘선무당의 칼부림’을 분별할 수 있는 뱀같은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양재영 기자 / <뉴스 M / 미주 뉴스앤조이>

신실하게 살면 우리의 삶이 잘 풀릴까?

 

 

욥기는 모든 재물과 자녀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극심하게 고통스러운 질병에 시달리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에 죄 없는 사람, 흠 없는 사람은 없다(욥 4:17-19; 15:14-16; 25:4-6. 롬 3:9-18, 23 참조). 그렇다고 인간은 고난받아도 마땅한 것일까? 죄의 분량이 고난의 이유만은 아니다. 엄청난 죄악을 행해도 대대손손 건강에 호사를 누리는 이도 있고 사소한 죄밖에 없는데 엄청난 재앙을 겪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죄가 고난의 원인이라 하기엔 분명히 죄와 징벌 사이에 지나친 불균형이 있다(욥 13:23-26 참조).

...

 

만일 개인이 당하는 고난이 죄의 크기와 어느 정도 비례한다면 욥은 우주 전체에서 가장 몹쓸 악인이어야만 한다. 욥은 그럼 도대체 왜 그리 처참한 재앙을 겪은 걸까? 욥기에서 설명하는 그가 당한 고난의 유일한 이유는 그의 경건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두고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내기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단지 그깟 내기 때문이라고? 사실 표면적으로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그냥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셨으면 안 되나? 이 내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도대체 하나님은 사탄과의 이런 내기를 통해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일까?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계명대로 신실하게 사는 것은 오로지 그 대가가 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까?” (욥 1:9). 맙소사! 사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우린 주로 생각한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절대로 원망하지 않고 인간의 죄인 됨을 인식하고 늘 그분께 순종하며 찬양해야 한다고. 사실 욥도 처음엔 그랬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로다!” 자신의 한계가 오기까지는! 그때부터 그는 악에 받쳤다. 달라졌다. 이젠 전투 모두로 바뀐다. 더는 하나님의 섭리에 무조건 굴복할 수가 없었다. 그분의 처사가 틀림없이 너무 지나치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이건 정말 아니다. 욥은 하나님께 자신이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자신의 결백과 의로움을 주장한다. 자신을 괴롭히시는 하나님께 따지고 비난하며 모질게 대든다(욥 9:19-22). 이런 욥이 정말 하나님이 생각하던 "천하에 이만한 자가 없느니라"고 장담한 진짜 하나님의 사람 맞을까?

결국 하나님이 옳았다. 사탄의 주장과 달리 욥은 모든 것을 다 빼앗긴 가장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을 믿은 것은 결코 하나님이 권선징악의 원칙대로 세상을 잘 다스리시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삶에 아무 대가가 없이 오로지 재앙과 치욕만 있을지라도 원망을 할지언정 하나님을 떠날 그가 아니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끝까지 읽어야 한다. 욥기에서도 하나님을 섬기는 이가 복을 받는다는 원칙은 완전히 무시되지 않았다. 시험의 때는 기한이 있다. 이 기간이 다한 후 욥은 모든 면에서 훨씬 큰 복을 받는다. 그는 이전보다 행복한 가정과 번영을 누리며 백사십 세까지 산다(욥 42:10-17). 전에 죽은 자녀를 생각하면 안타깝지만, 시험을 이겨낸 그는 말년까지 그 당시 최상의 복을 받으며 살았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은 욥의 고통은 공감하지 못하면서 오로지 하나님 편에 서서 신학적으로 교과서적인 내용으로 하나님을 변호하며 욥을 가르친 친구들을 꾸짖고 벌하시는데 오히려 그들의 교훈을 격렬하게 거부하며 하나님께 무례하게 원망한 욥의 말이 정당하다고 그의 편을 들어 주셨다(욥 42:8). 물론 하나님은 욥에게도 인간이 주제넘게 하나님께 무례하게 말하고 행하는 것들을 자제하라고 명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이 막상 그의 소원대로 나타나 말씀하셨을 때 욥은 곧바로 겸손하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인정하고(욥 42:1-6), 자신의 성급함과 무지함을 뉘우친다. 사실 그의 투정들은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한 말일 뿐 진심은 아니었다. 진작 나타나실 것이지!

 

욥기는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고난받는 이유를 사실 설명하지 않는다. 욥의 질문들에 대한 답은 욥기에는 없다. 의인이 고난받는 이유는 유한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일 뿐 인간에겐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는다. 어떤 인간의 지혜도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런 원칙대로 행하셔야 한다는 주장은 다 인간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이 욥을 통해 보여주시는 신앙의 자세는 참으로 인간적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고통 가운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비난하고 무례하게 구는 것도 용납하신다. 그것이 문제는 아니다. 인간이 감정적이고 이해에 한계가 있음을 창조주께서는 잘 아신다. 우리는 욥처럼 끝까지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길 고집해야 한다. 제발 만나 달라고 떼를 써야 한다. 하나님이 이런 요구에 쉽게 응하시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절대 포기해선 안 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신앙, 물러서지 않는 믿음으로 버티다 보면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만나주신다. 그때는 알게 될 것이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하나님은 정말 인생에 가장 의미 있는 분이시라는 것을,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하나님을 가까이 만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왜냐고? 만나 보면 그 이상의 복이 없음을 뼈저리게 알게 될 것이다.

 

욥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유일하게 행복하고 성공으로 향하는 통로라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우리에게 어떤 대가를 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아니라고 가르친다.

 

욥기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져도 하나님 한 분이면 충분하다는 신앙, 그분이 우리의 복이라는 가르침을 알려준다. 전혀 다른 복을 받지 못하고 고생만 하다 죽을 것이란 말이 아니다. 욥의 결말을 보라. 다만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먼저인지를 알라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때가 되면 다 충분히 주어질 것이다. 버텨라. 끝이 있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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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때부터 성령 인도함 받는다  

박도� 교수 / 고신대학교

남포교회(박영선 목사) 설립 20주년 기념 학술 축제가 ‘구원 그 이후: 성화의 은혜’라는 주제로 지난 3월 7일 남포교회에서 열렸다. 박영선 목사의 ‘나의 목회에서 구원과 성화’를 비롯해서 Bryan Chapell 카버넌트신학교 총장, 김영재 교수, 김정우 교수, 변종길 교수, 박영실 교수, 이수영 목사, 오덕교 교수, 김병훈 교수, 박영돈 교수 등이 발제자로 참석했다. 이중 박영돈 교수의 ‘오늘의 구원과 성화’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성화의 성령론적 다이내믹

1) ‘제 2의 축복’ 성화론
개신교 안에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함을 얻는 것을 성령충만과 함께 회심 이후의 획기적인 체험으로 강조하는 가르침이 널리 퍼져있다. 이러한 획기적 성화에 대한 견해는 웨슬리의 가르침으로부터 그 일차적인 영감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는 칭의와 회심 후에 성화를 획기적으로 체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를 즉각적, 또는 온전한 성화라고 칭했다.

웨슬리의 뒤를 이어 일어난 성결운동과 ‘더 풍성한 삶 운동’에서도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여 성화를 이차적이고 획기적인 경험으로 보았다. 그들은 대개 죄책과 형벌에서의 구원과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구원을 구분했다. 신자는 칭의를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고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지만, 그 후에 획기적인 성화의 은혜를 체험해야만 실제적인 죄의 세력과 오염에서 자유하게 되어 거룩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체험하는 것 사이에는 사람에 따라 길거나 아니면 짧은 시간적인 간격이 존재한다. 모든 신자는 믿을 때 칭의의 은혜에 참여하나, 성화의 은혜는 대개 나중에 가서야 이차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 성화의 은혜를 받는 순간부터 신자의 삶과 사역은 그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다. 마치 물이 포도주로 변하듯이, 신자의 삶이 실패와 좌절과 신음으로 점철된 곤고한 삶에서 능력과 기쁨과 평강이 충만한 승리의 삶으로 급전환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르침의 맥을 이어온 케직 사경회(Keswick movement)에서는 이 획기적인 성화의 은혜 체험을 자주 제 2의 축복이라고 불렀다. 케직 사경회를 인도했던 마이어, 앤드류 머레이, 알 에이 토레이 같은 이들의 사역과 그들이 남긴 대중적인 경건서적을 통하여 이러한 성화론은 지금까지 많은 교인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또한 디엘 무디 같은 부흥사, 에이 비 심슨, 이에 제이 고든, 모울 같은 이들도 케직 사경회의 성화론을 전파한 이들이라고 볼 수 있다.

2) 성경적 대안
신학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가르침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인 측면은 거룩한 삶과 능력 있는 사역은 오직 성령으로 충만할 때만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오순절 성령충만의 축복이 성화의 원동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한다. 그리하여 성화와 오순절에 임한 성령충만 사이에 중요한 관련성이 있다는 점에 대한 신학적인 반성을 간접적으로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정통신학은 성화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건뿐 아니라, 성령충만이 주어진 오순절 사건과도 연결시킴으로써, 성화는 기독론적인 바탕뿐만 아니라 성령론적인 토대 위에 세워져 있으며, 예수의 은혜뿐만 아니라 성령의 다이내믹한 능력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명료하게 밝혀주어야 한다.

리차드 개핀(Richard B. Gaffin, Jr)도 정통교회에서는 중생에 있어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하나 그 후 신자의 삶속에 일하시는 성령의 사역은 실제적으로 무시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신자의 삶의 출발점에서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중생케 하시는 사역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지만, 그 이후 성령은 거의 그리스도인의 체험으로부터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런 극단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가장 자주 나타났던 병폐로서 체험의 진공상태를 야기했고, 이는 결국 또 다른 극단, 즉 ‘두 번째 축복’을 주장하는 오류를 불러오게 한 것이다”(Richard B. Gaffin, Jr. “The Holy Spirit”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43:1(fall 1980): 76)

이러한 양극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사역은 신앙생활의 전 과정에 걸쳐 역동적으로 계속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성령으로 계속 인도함을 받는 이’, 즉 ‘성령충만한 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롬8:9, 갈5:16, 엡5:18). 에베소서 5:18에서 성령이라는 단어는 성령의 강력한 영향력과 지배 아래 산다는 비유적인 의미로 쓰였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성령의 지배와 인도함을 받는 삶을 다양하게 표현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 5:16),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갈 5:17), “성령으로 산다”(갈 5:25)는 표현들은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말과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든 피가 지적했듯이, 성령충만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말들이 의미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더욱 강렬하고 부요한 은유적 표현이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그 충만한 은혜와 능력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한 일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처음 믿을 때부터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다시 말해서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이러한 성화의 기독론적-성화론적인 바탕에 대한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죄와 분리된 성결한 삶, 성령으로 충만한 삶은 회심 후 제 2의 축복을 체험할 때까지 유보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밝혀줌으로써 웨슬리-오순절 운동의 가르침에 대한 적절한 성경적 대안을 제시할 수 있게 된다.

동시에 신자의 삶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전 과정에 걸쳐 계속적으로 성령충만을 누리는 삶으로 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주어졌다는 것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로 인해 새로운 은혜체험에 대한 추구를 위축시키는 전통적인 성화론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다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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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웹상으로 무섭고 빠른 속도로 확산하고 있는 이상한 교리가 있어 성도들의 주의가 요망된다. 그 일로 인해 우리 아멘넷 게시판에서도 한참 열띤 논쟁이 벌어졌었고 그 후유증이 만만치 않은 것 같다. 그들의 주장인즉, 기독교가 유대교 교리보다 떨어지고 천주교 교리보다도 떨어진다고 하며 그 주된 이유로는 구약에서 메시야가 대제사장이란 것을 뒷받침해 줄 성구가 없고, 구약에서 예표된 성구가 한 구절도 없기 때문에 유대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야로도 대제사장으로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신약, 그것도 히브리서만 예수 그리스도가 대제사장이란 성구가 있고, 또 예수님이 레위 지파에서 태어나지 않고 유다 지파에서 탄생하셨기에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으로도 메시야로도 자격을 갖추지 못한 이 예수를 하나님이 세우신 대제사장은 물론, 구속 주로 받아드리거나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논지였다.
 
 과연 그러한가? 성경을 근거로 함께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어 말씀을 정리해 보았다. 이 말세지말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흐리게 하는 무서운 이단사설, 가만히 들어와 우리의 영혼을 멸망으로 이끌어 넣는 미혹의 영들을 경계할 수 있도록 성령 하나님께서 밝히 조명해 주시고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나눔의 시간이 되도록 기도해 본다.

1. 대제사장의 사역과 선지자의 사역 구분

먼저 제사장과 선지자의 사역부터 구분해 보아야 한다. 구약에서 제사장의 사역과 선지자의 사역은 얼핏 보면 비슷한 것 같으나 아주 대조적이다. 대제사장이나 선지자는 모두 하나님께서 택하여 세우시고 기름부으신 자란 뜻에서는 동일하다. 그럼에도 사역에 있어서는 엄연히 구분되는 것이다. 필자가 지난번 칼럼 글에서도 잠시 언급한 대로 제사장은 인간 편에서 인간의 죄를 하나님께 고하고 대신 기도해 주는 것이라면, 선지자는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에게 전해 주는 파수꾼 역활이다. “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숫군으로 세웠노니 너는 내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내 백성을 깨우치라( 겔 3: 17절).” 하셨다. 고로 선지자는 말씀을 전하기 전에 반드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을 알 수 있다.

2. 대제사장을 세우신 목적:

대제사장의 사역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기 위함이다.

구약의 제사장 사역을 보면, 몇 가지 흥미로운 것을 관찰할 수 있는데, 그것은 대제사장직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택하여 기름 부음을 받아야 제사장으로 인정했다.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해도 외국인이 그들의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인데, 이 뜻은 단순히 민족적으로 같은 종족이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들이 선민이기에 자신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자들이지만 대제사장은 선민 중에서도 특별히 하나님께로부터 부름받고 선택된 레위지파, 아론과 그 자손들만 대제사장으로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민족적으로서보다 하나님과 백성과의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을 만큼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하기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친히 부르시고 기름부어 세워야한다는 의미로서가 더 강조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제사장은 여러가지 형태로 제사를 드릴 것을 명령받았으나,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제사는 1. 속죄(건)제, 2 번제, 3. 화목제(위임제)이다. 위에 열거한 제사 중, 1번과 2번은 '인간의 죄를 속하는 제사임'으로 그 제물은 반드시 짐승의 피와 기름이 사용되어져야 했다. 그러나 화목제는 구운 떡이나 처음 열매로도 가능했다. 화목제란 속죄받은 후, 그 속죄의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과 기쁨으로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 다음은 4. 소제= 고운 가루로 드리는 것(레2: 1-3), 5. 구운 떡으로 소제를 드리는 것 (레 23: 17), 6. 처음 익은 곡식으로 소제를 드림( 레 23: 17), 소제란 히브리어 (민카)이며, ‘선물’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백성에게 제사를 드리기 전에 제사장 자신도 같은 예식으로 자신을 정결케 한 후에 다른 이를 위해 제사를 드려 줄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란 (롬 3: 10절)말씀이 성립된다.

3. 구약에서 메시야로 예언된 대제사장.

a.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위해 한 마리의 짐승을 죽여 그 피로 제물 삼으시고 아담과 하와의 육신이 당장 죽는 것을 면하도록 하는 예식을 하나님께서 친히 거행하심으로, 이때, 하나님의 어린양 되시고 그 몸으로 단번에 제사를 지내실 대제사장 메시야는 이미 예표되셨다(창 3: 21절).

b.샬렘왕이시요, 평강의 왕 ‘멜기세댁’은 오실 대제사장 메시야의 예표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 4절 말씀).” 구약의 멜기세댁(창14: 18-20)은 신약에 나오는 멜기세댁과 동일함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히 6: 19-20절 말씀, 7: 1- 28절 참조).”

4. 메시야로서의 대제사장은 반드시 유다 지파에서 탄생해야만 한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창 49: 10절 말씀).”, “유다는 나의 홀이며(시108: 8).” 여기에서 홀이란 영어로 lawgiver이며 다스리는 자이시다. 그 예언대로 예수는 유다 지파에서 태어나셨다.(마 1: 1, 히 7: 11-14)

**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만 유효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오신 후에 율법으로 인한 구약 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완성되어 졌다. 따라서 구약법 제사장 제도 역시 변혁되었기에, 레위지파는 오실 이의 표상일 뿐, 실제적인 대제사장이 오신 후 제사 직분이 변혁되어야 율법도 변혁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
 
“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제사 직분이 변역(For the priesthood being changed)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이것은 우리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히 7: 12-13절).” 이 말을 다른 말로 말하면, 메시야이시며 대제사장은 레위지파에서 탄생하시면 오히려 나실인이 아니란 것이다.

5. 신약에서 예수님은 친히 그 몸으로 제사를 드리시므로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본문 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하였다. 대제사장은 하나님 앞에 반드시 죄에 상응하는 그 무엇을 제물로 드려야 한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짐승의 피를 드리지 아니하시고 친히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렸다. 침례(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고 하였던 것이다(요 1:29). 인간 대제사장들은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그때마다 죄없는 짐승을 잡아야 했고 자기 자신도 먼저 그 피로 정결케 하고서야 하나님께 나아 갈 수 있었으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몸을 제물로 드려 그 피로 단번에 우리 죄를 사하여 주셨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니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 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10: 10-14절 말씀).”

그런고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세 초부터 세 말까지,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의 어린양이시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신 메시야시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단 한 분, 우리들의 죄를 위해 그 몸으로 영원한 속죄를 드려주시고 죽고 멸망할 죄 가운데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자격을 온전히 갖추신 유일무이(唯一無二)하신 대제사장이 되심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하며, 그 피를 힘입을 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염소와 송아지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 9: 12-14절 말씀).”

글/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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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세상에 주는 메시지는? / 박신 목사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고후3:2,3)


마하트마 간디는 크리스천은 아니었지만 이타적(利他的)인 삶을 산 표본으로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어떤 기자가 그에게 당신이 평생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더니 “내 삶이 나의 메시지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영국으로부터 조국 인도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비폭력저항 운동을 주도하되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아픔에 동참하여 검소한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는 어떤 어려움과 핍박에 닥쳐도 일생을 바쳐 이루어야 할 목표를 향해 한걸음씩 전진했습니다. 말하자면 어느 누가 그의 삶을 보더라도 왜 그런 삶을 사는지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럼 신자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예배와 성경공부나 기도 등 교회의 각종 모임에 성실하게 참석해야 합니까? 이는 신자의 기본적 의무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남들이 볼 때에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자라는 범주 이상으로는 평가하지 않습니다. 교회 활동 외에 평소 착하게 살면서 남들을 도와주어야 할까요? 이 또한 신자라면 응당해야 할 일일 뿐 아니라 불신자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간디가 대표적 예이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신자라서 그런지 더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밖에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내용이든 메시지를 전해 들으려면 반드시 그 인생에 분명한 목표가 있어서 그곳을 향해 진전해 나가는 모습과 그 열매를 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간디가 왜 그렇게 사는지 누구나 알 수 있었지 않습니까? 마이크로 소프트 회장 빌게이츠의 삶을 보고도 그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목표를 알아채지 못하는 바보는 없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 신자의 삶을 보면서 “저 사람은 기독교인이구나.”라고 여길 정도로는 많이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요컨대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미 기독교인이 되었지 않습니까? 신자로서 평생을 두고 추구해야 할 목표가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예수를 좇아 살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강력하게 도래시키고 또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신자 혼자 거룩하게 바뀌는 것은 필요조건은 될 수 있어도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로 인해 다른 사람이 거룩해져야 합니다. 또 거룩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라 그 다른 사람도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 아래 들어감으로써만, 그렇지 않고 거룩해질 방도도 사실 없음, 거룩해져야만 합니다.

다른 자를 하나님의 통치 안으로 인도하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뿐입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다른 사람들의 심비에 십자가 은혜와 권능을 새겨주어야 합니다. 단순히 전도에 열심을 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참 전도는 또 다른 종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또 그 일은 진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신자가 속한 모든 공동체, 또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건 속에서 그 관계와 일을 주도하는 힘이 오직 예수님의 긍휼과 권세여야만 합니다. 신자의 가정에서부터 직장과 사회 모두를 견고하게 지탱하는 능력이 자기를 죽이며 남을 살리는 십자가뿐이어야 합니다. 신자가 가는 곳마다 행하는 일마다 예수님의 거룩한 빛이 비춰져야 합니다. 요컨대 기독교인끼리만 모여서 기독교적 업적을 쌓는 종교 왕국 대신에 예수를 좇는 제자들이 모여서 오직 십자가 사랑으로 섬기는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여야 합니다. 지금 다른 사람이 당신의 인생을 볼 때에 과연 어떤 메시지를 보고 듣고 읽을 수 있을까요?

10/19/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지금으로 부터 꼭 15년 전
내 나이 만 52세 되던 2000년에 이 한 컷의 시사만평이 나를 철들게 했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말이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의 일환으로 남쪽에 사는 80이 넘은 노모가 북에서 온 60이 넘은 아들과 거의 50년 만에 판문점에서 만났다.

북측의 삼엄한 감시 하에 겨우 하룻 밤 같이 자며 쌓였던 회포도 채 풀지 못한 채 서로 얼굴만 보고 다시 헤어져야 하는 그 시간
북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탄 늙은 아들에게 당부하시는 팔십이 넘은 노모의 말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자기 전에 꼭 양치하고...
 편식하면 안되고...
 항상 차조심 하거라..." 

어머니의 이 말에 60이 넘은 이 아들, 눈물로 하는 대답...

"알갔시요... 오마니... "

이 한 컷의 만평이 그 동안 내가 옳다고 생각하며 어머니에게 해 왔던 그 모든 행위와 말들과 생각을 일순간에 다 무너뜨려 버렸다.

이 모든 것들이 나의 그 잘난 이성과 지식에 의한 판단이었을 뿐, 진정으로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심정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었는가 하는 자책감이 나를 짓 눌러왔다
그와 동시에 진정으로 회개하는 심령이 내게 임하고 한없는 회개의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그 어떤 성인 군자의 말이 아들을 향한 엄마의 진정한 사랑을 이 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거실의자에 앉아 계시던 어머니에게 바로 달려갔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시며 그냥 쳐다만 보시던 어머니에게 "어머니, 내가 다 잘못했어요, 어머니가 다 옳았었네요

어머니는 여전히 내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시며 그냥 미소만 지으셨다
그때 어머니 연세 88.
막내인 나를 서른 여섯에 낳으셨으니 키우시는데 힘도 많이 드셨겠지만 그때까진 영육간에 아주 정정하셨다. 그리고 3년 후 2003년 어머니는 낯선 피츠버그 땅에서 향년 91세를 일기로 소천하셨다.

어머니의 육신을 피츠버그에 안장한 지 12, 이제 27년의 이민생활을 마감하고 우리 부부 한국으로 돌아가려는 지금 이 시간, 자식들은 다 저희들 가정을 잘 꾸려나가며 남 부럽잖게 잘 살고 있는데 왜 이렇게 어머니 생각은 새록 새록 나는지...

어머니 생각과 함께 wife에게도 진심으로 감사한다. 시집와서부터 시어머니 돌아가시기까지 27년간 아무런 불평 없이 조금은 별난 시부모를 모시고 네 아이를 키우며 살아온 그 인고의 세월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입으로만 잘 해 준다고 하는 남편, 시집은 말 할 것도 없고...

50여년 전에 아버지께서 내게 하셨던 말씀을 이제서야 쬐에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미국 간 네 형 연락 자주 안 한다고 뭐라 하지 말아라. 너나 네 형이나 이 다음에 결혼해서 자식 낳아 키워 보고 또 그 자식들을 다 시집 장가 보내 봐야 그때서야 비로소 부모심정을 쬐에꼼 알 수 있는게야, 지금은 모르는 법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시간,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이 불효한 아들에게 회개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신 나의 하나님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조동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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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게시물은 2015년 3월에 작성된 원글을 재업한 것입니다.)



동성 결혼 합법화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배도의 길을 가도록 결정한 미국장로교 총회 참석자들의 모습



- 총회 결의 이어 노회 투표서 과반… 오는 6월 21일부터 발효


 

미국에서 가장 큰 장로교단인 미국장로교(PCUSA)가, 교회 내에서 게이와 레즈비언 등 동성애자들의 결혼을 인정하는 법안을 승인했다고 워싱턴포스트가 17일(이하 현지시각) 보도했다.

 

PCUSA는 지난해 6월 총회에서 전통적인 교단법 중 결혼에 대한 정의를 “한 남성과 한 여성 간의 결합”에서 “두 사람의 결합”으로 수정하기로 결의하고, 이를 노회 투표에 부치기로 했었다.

 

노회 투표가 진행되는 내내 찬성표가 반대표를 압도하는 등 일찌감치 개정안 통과가 예상된 가운데, 17일 PCUSA는 마침내 172개 노회들 중 찬성표가 많은 곳이 86곳을 넘어 과반수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이번 개정안은 교회의 규례법 중 일부로 포함되며, 오는 6월 21일부터 발효된다.

 

이에 따라 목회자들은 동성결혼이 합법화된 주에서 동성결혼식 주례를 맡을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는 의무가 아닌 선택 사항이다. 현재 미국 내 컬럼비아 특별구와 36개 주에서는 이미 동성결혼을 인정하고 있다.


 

기사원문>> PCUSA, ‘동성결혼 수용’ 개정안마저 결국 통과

 

* 종말론 학자들 가운데 무천년설과 후천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교회 시대가 곧 ‘천년왕국’

이라고 해석한다. 2,000년 전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이 강림하여 교회가 세워진 이후,

이 땅에서 교회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결국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천년왕국과 같은 

이상적인 세상이 펼쳐진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진화론적 사상에 영향을 받은 지극히 비성경적인 종말론이다. 성경은 교회가 

진화가 아니라 오히려 마지막 때가 되면 퇴행적인 모습으로 변질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종말의 때를 설명하는 본문으로 잘 알려진 데살로니가후서 2장 3절에서는 주의 날(환난과 

심판의 날)이 임하기 전에 먼저 ‘배도(apostasy)’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배도(apostasy)란 ‘진리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마지막 때가 되면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진리인 말씀에서 벗어나 다른(세상) 교훈들을 쫓을 것이라는 경고인 것이다. 

동성애는 죄(레위기 20:13)라 명시한 성경의 선언을 정면으로 뒤집고, 교회들이 

앞장서서 동성애를 지지하고 있는 이 시대가 바로 ‘배도’의 시대인 것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음란하게 세상과 벗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버리고 배도의 길을 가고 있다. 이 배도의 시대를 심판하시기 위해 

  주님이 곧 오실 것이다.



 

- 예레미야 -




글퍼온곳 : 네이버블로그-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아

우끼는 이야기....!  


얼마전, 어머니께서

 

백화점에서 칼을 세트로 사 오셨어요


며칠 뒤 재활용 하는 날에

전에 쓰던 칼도 버리게 되었어요

제가 일반쓰레기 봉투에 넣어서 버리려고 하자 아버지께서


" 이 자슥아..!!

거따 버리면 나중에

분리수거 해 가시는 분들 다친단 말이야..!!

이렇게 호통을 치시면서

" 칼은 일단 들고 내려갔다가 이따 밑에서

종이 한장 주워서 그거에 말아서 버리자 " 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저는

일반쓰레기 봉투를 들고

아버지는 한 손엔 칼을

한손엔 의류 수거함에 버릴 헌 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습니다


1층으로 내려가던 도중 5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섰어요

그리고 5층에 사는 훈남 오빠가 탔습니다

훈남 오빠가 슬그머니 제 옆에 바짝 서더군요


내 가슴은 웬지 두근두근....

 그런데 훈남 오빠가 3층 버튼을 누르더라구요

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죠


"띵동 3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3층에 섰어요


그런데, 문이 열리는 그 순간..!!!

훈남 오빠가 제 손목을 잡고 엘리베이터 밖으로

미친듯이 내달렸어요




"어머..!! 어머..!! 왜이러세요..?"

저는 놀라서 소리쳤죠


"잔말말고 뛰어..!!




방금 니뒤에

어떤 미친놈이 칼 들고 서 있었어..!!!!!!"

저는 그 상황이 너무 웃겨서

해명도 못하고

훈남 오빠와 손을 잡고 달리기만 했어요 @아빠 미안해요....



한참을 달리다가 오빠가 뒤를 한 번 스윽 돌아보더니

"으악..!!!!!!!!!!!!! 으아아아아아악..!!!!!!!!!!!!!!!!!!!"


엄청난 비명소리를 지르며

이번엔 아예 제 손을 놓고 빛의 속도로 도망가버리는게 아니겠어요..?

 

 

       



저도 뒤를 쳐다봤죠

아버지께서는 한 손에 칼을 들고 몇 오라기 안되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미칠듯한 스피드로 쫓아오고 계셨습니다


"이쉑기야!!!!!! 내 딸 내놔라!! 이 개XX야..!!!!!"

졸지에 엘리베이터에서 어문놈에게 딸을 빼앗긴 아버지는



극도의 흥분상태셨어요

 

 

   

 


결국 동네에 경찰차가 오고 나서야 사건은 마무리 되었어요

달아난 훈남오빠가 경찰에 신고했더라고요 ㅋㅋㅋㅋㅋ


전 그 사건을 계기로 그 오빠와 친해졌습니다만

우리 아버지께서는 아직 그 오빠를 싫어하시는 것 같아요

조용한 동네에 경찰차까지 오게 된 사건으로


아버지는 아파트 주민분들에게 제대로 눈도장 찍으셨고


며칠전에 동대표가 되셨습니다.

 

푸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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