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폭한 가해자이면서''불쌍한 희생양으로' 위장하는 지방교회

이단경계 2015. 9. 9. 20:34

당대 최고의 변증학자인 노먼 가이슬러는 지방교회에 가장 비판적인 복음주의 지도자이다. 그는 ‘난폭한 가해자’로서의 지방교회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지방교회는 다시 말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고소하는 일과 고소하겠다고 협박하는 일을 중단할 것을 거부했다… 그리스도인 단체들에 대한 가혹한 말들, 예를 들어 ‘영적 음행’이니 혹은 ‘사탄적’이니 하는 말들을 한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다(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15)”
 
지방교회는 정당한 비판을 받아도 ‘나쁜 이단 사냥’을 당하고 있다고 읍소하며 정당한 비판자를 ‘나쁜 이단 사냥꾼’으로 몰아간다. 지방교회는 자신들이 ‘난폭한 가해자’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마치 ‘불쌍한 피해자’가 된 것처럼 위장한다. 지방교회에 보낸 ‘공개 항의서’에서7개국의 복음주의자 70여 명이 시정을 요구하는 위트니스 리(이후 WL)의 교리들 가운데 하나는 다음과 같다.
 
“삼위일체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대단히 부적절하며 거의 삼신론과 같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쳐졌을 때(joined with us), 하나님은 뒤에 남겨지신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도 보좌에 남아 계시지 않았다. 이것이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가 한 위이시며 다른 위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셨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이신 성령을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시고 성령이 신자들 속에 오신 것이다. 신자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 앞에 고개 숙여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separate persons)로 가르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An Open Letter to the Leadership of Living Stream Ministry and the "Local Churches에 인용됨).”
 
WL이 위에서 말하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자들’은 사실상 일반적인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면,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사실상의 ‘삼신론자들’로 비난하는 위와 같은 주장이 정통개신교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WL은 알고 있는가? 물론이다! WL의 다음과 같은 말을 보라.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할 때, 나는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Life-Study of Revelation, p. 82-3).”
 
WL의 도발적인 주장들은 철저하게 계산된 정통교리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에 대한 그의 난폭한 공격은 자신의 종교적 확신에 기초한 지극히 의도적인 것이다. WL과 그의 제자들은 그래서 자신들의 교리적 관점에 의해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신론 이단자들’로 매도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WL은 “전통적인 생각”은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로 가르치는 것”인데, 이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예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들은 아버지가 한 위이시며 다른 위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셨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이신 성령을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시고 성령이 신자들 속에 오신 것이다.” WL은 여기서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자들, 즉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위와 같은 설명은 “거의 삼신론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삼위일체론에 관한 논쟁을 보면, “거의 삼신론과 같다”는 주장이 ‘삼신론이다’ 혹은 ‘다신론이다’라는 주장으로 확정된다. 예를 들어 ‘이인규님의 지방교회 양태론 비판의 실상’이라는 글에서 지방교회는 이인규 권사를 “분리된 세 위격들을 말하는 다신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정죄한다. 그러므로WL이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로 가르치는 것”은 “거의 삼신론과 같다”고 비판했을 때, 실제로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자들,’ 즉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이 ‘삼신론(혹은 다신론) 이단자들’이라 비판을 한 셈이 된다! 지방교회는 따라서 전통(혹은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위일체 이단자들’로 정죄하며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지방교회의 주장처럼 과연 지방교회는 ‘나쁜 이단 사냥의 희생양들’인가? 천만에, 이는 사실과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WL과 지방교회가 먼저 정통교회를 공격한 ‘난폭한 가해자’이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자신들의 공격에 대하여 정당한 비판을 받을 때면, 마치 ‘나쁜 이단 사냥의 희생양들’이 된 것처럼 둔갑술을 발휘하곤 한다.
 
지방교회가 ‘난폭한 가해자’임을 증언해 주는 지방교회의 또 다른 발언은 이것이다. “모든 교파, 모든 이름은 분열(division)이다(A Defense of the Gospel, p. 102에 인용됨).” “주님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취해서 교회를 교파화하는 것은 영적 음행이다(Ibid., p. 98에 인용됨).” 달리 말해서 ‘분열은 영적 음행’이라는 것이다. 이런 ‘난폭한 언어 테러’는 김바울의 지난 글(#3-지방교회, 그리고 ‘나쁜 이단 사냥’의 희생양들)에 잘 나타나 있다. 김바울은 제리 팔웰 목사의 사역의 “열매 자체는 영적 음행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팔웰과 그의 교회”혹은 “침례 교단”과 같은 표현은 주님께 “득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득죄”라는 말은 ‘영적 음행’이라는 말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팔웰과 그의 교회’가 ‘영적 음행’이라면 ‘우리 교회’라고 말해도 ‘영적 음행’이 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미국의 시카고에 위치한 역사적인 ‘무디 교회(The Moody Church)’는 ‘영적 음행’을 한 대표적인 표본이 아닌가!
 
김바울은 또한 ““팔웰과 그(팔웰)의 교회”, 혹은 “침례 교회”(그것이 좋은 의도라고 해도)라고 부를 수 있는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필자의 반론은 이것이다! ‘교파나 교회 명칭’ 혹은 ‘우리 교회’ 등으로 호칭할 수 없는 근거가 성경에 있는가? 있다면 어디에 있는가? 성경에 “내 교회(마16:18)”,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고전1:2)”, 혹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오신 하나님의 교회(행20:28)”라고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교회를 항상 그렇게 표현하라고 성경이 명하고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성경의 표현은 지시하는(prescriptive) 표현이 아니라 서술하는(descriptive) 표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교회를 항상 지명이나 “내 교회” 혹은 “하나님의 교회”로 표현하라고 명령한 적이 결코 없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런 개념을 잘 설명해 준다. “내가 다른 목사들에게 우리의 MTR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은 항상 다음과 같이 질문을 한다. ‘왜 집사가 한 명도 없는가?’ 초대교회는 집사들을 임명했다. 집사가 한 명도 없는 조직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는가? 나의 대답은 이렇다. 집사의 직분은 서술적인(descriptive) 것이지 지시적인 것(prescriptive)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업무량을 줄여 주기 위해서 집사들을 임명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을 읽어보면 집사를 임명하는 것이 초대교회에서 흔한 일이었다고 안전하게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집사를 임명하는 것은 [성경] 어디에도 명령되어 있거나 요구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교회의 모든 일꾼들을 ‘집사’라는 용어로 호칭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들이 ‘집사’의 책임을 수행하고 있다고 믿는다(Andy Stanley and Ed Young, Can We Do That?, pp. 115-16).”
 
앞서 언급한 ‘무디 교회’는 19세기 말의 세계적인 전도자 드와이트 무디가 개척하여 세운 교회로, 개척자 무디를 기념하여 교회 이름을 그렇게 정한 것이다. ‘무디 교회’는 알 에이 토레이와 워렌 위어스비와 같은 훌륭한 영적 지도자들이 목회했고, ‘무디 신학교(Moody Bible Institute)’ 같은 훌륭한 기독교 교육 기관의 모체가 되어 세계선교에 크게 기여해 온 위대한 교회이다. ‘무디 교회’라는 명칭은 ‘무디’라는 개척자의 위대한 신앙과 사역을 기리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무디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 ‘영적 음행’과 같은 무서운 죄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이들을 그처럼 크게 사용하셔서 영광을 받으셨겠는가! 정통교회들은 무슨 명칭을 사용하든지 그리스도를 교회의 주인으로 인정한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명칭에 관해서 관심이 일절 없으시다. 성경을 보라, 주님이 교회의 명칭을 거론하신 적이 어디 있는가! 그리스도는 그러나 교회가 그분의 주재권에 순종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보이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요 8:31). 교회의 정통성은 교회 명칭의 존재 여부나 교파의 명칭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전적인 순종,’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교회나 교파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영적 음행’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비성경적이요 난센스이자 ‘난폭한 언어 테러’인 것이다!
 
필자가 앞선 글(#3-‘성령의 역사를 영적 음행으로 모독하는 지방교회’)에서 언급한 팔웰 목사와 그를 따르던 성도들의 ‘분리’는 이전 교회의 담임목사의 지도력에 대한 불신과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불신과 불만에 때문에 이전 교회에서 ‘분리’하여 나와서 새 교회를 개척한 일은 ‘영적 음행,’ 즉 죄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모든 과정에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들을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이 사실을 입증한다. 그들의 ‘분리’는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팔웰과 그를 따르던 성도들이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분리’하여 교회를 개척한 일을 ‘영적 음행’이라고 모독하는 지방교회는 도대체 누구에게 속한 자들인가? 성경에도 이와 동일한 예가 있다. 바울은 마가를 불신하여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고, 그 결과 바나바와 ‘분리해서’ 새로운 선교 팀을 조직하여 제2차선교여행을 떠났다(행 15:38-40). 그러면 바울도 ‘분리’를 했기 때문에 ‘영적 음행’을 한 것인가? 이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가! 교회사의 모든 분열을 흑백논리로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모순된 일이지 정말 모르겠는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2).” 내 짧은 잣대로 함부로 판단하여 주님 앞에 범죄하지 말고 판단은 주님께 맡기라!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고 주의 판단은 옳으니이다(시 119:137).” 지방교회는 비성경적인 관점과 몰상식함을 가지고 정통교회에 가혹한 언어 테러를 하는 집단이다. 자기들만의 비뚤어진 교리적 관점을 가지고 정통교회에 무자비한 언어 테러를 자행하는 것은 기독교 이단 집단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지방교회여, 왜 이단의 무리의 특징을 공유하려 하는가!

(필자: 김홍기 목사, Ph.D., D.Min., 교회부흥성장연구원 원장. 필자의 ‘신천지 교리 반박 동영상 설교57편’을 www.21church.com에서 시청할 수 있음)

 

출처: 크리스챤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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