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위 사릉 (Sareung)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조선 제6대왕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다.


39위 삼부연폭포 (Sambuyeon Falls)

위치 :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리
높이 20m의 폭포로 폭포수가 높은 절벽에서 세 번 꺾여 떨어지고
세 군데의 가마솥 같이 생긴 못이 있다고 하여 삼부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38위 남한산성 (Namhansanseong Fortress)

위치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 2년)에 축성하였다.




37위 선정릉 (Seonjeongneung)

위치 :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서울에 있는 조선 왕릉으로 삼릉공원이라고도 불린다.
선정릉에는 성종 왕릉과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의 능,
그리고 중종 왕릉인 정릉이 모여 있다.


36위 창녕교동고분군 (Gobungun, Changyeong)

위치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리
가야시대 고분군으로 교동고분군은 목마산 북서쪽 기슭에 있으며
인접한 송현동고분군과 함께 창녕읍 교리 일대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35위 안압지 (Anapji Pond)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신라시대 때의 연못으로 연못 기슭과 섬에 실시된 호안공사는
정교하고 도수로와 배수로의 시설도 또한 교묘하다




34위 경복궁 근정전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 1-1
경복궁의 중심이되는 정전이며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33위 창경궁 (Changgyeonggung)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32위 인왕산 (Inwangsan)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무악동 산 3-1
서울 종로구와 서대문구 홍제동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 338.2m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울의 진산 중 하나


31위 종묘 (Jongmyo Shrine)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
조선시대 역대의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왕가의 사당이다



30위 고창고인돌 (Gochang Dolmen site)

위치 :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인돌 무리 전북 고창은
인근 화순, 인천 강화와 더불어 이름난 고인돌 분포지역이다


29위 왕궁리 (Wanggungri)

위치 :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에는 사적 제408호로 지정된 익산 왕궁리 유적이 남아 있다.
왕궁리성지 라고도 부르며 마한의 도읍지설, 백제 무왕의 천도설이나
별도설, 안승의 보덕국설, 후백제 견훤의 도읍설이 전해지는 유적이다.




28위 서울성곽 (Seoul Seonggwak Fortress Wall)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화동
서울성곽은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전쟁을 대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거나
도적을 방지하기 위해 쌓은 시설




27위 강릉안반데기 (Gangneung Anbandeok)

위치 :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강원도 고랭지의 감자밭과 배추밭을 감상할 수 있는 안반데기 마을은
평창군 대관령면과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사이에 놓인
피동령이라는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봄이면 감자밭, 가을이면 배추밭으로 뒤덮인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다.



 
26위 광안리 (Gwanggalli)
위치 : 부산광역시 수영구 광안2동
부산을 상징하는 장소로 모든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최고의 바닷가이다


25위 소양호 (Soyang Lake)

위치 :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1973년 소양강을 막아 만든 소양댐으로 생겨난
국내 최대의 호수로
내륙의 바다’라 일컬어진다.




24위 우포늪 (Upo Wetlands)

위치 : 경상남도 창녕군 유어면 우포늪길 220
‘생태계의 고문서’, ‘살아 있는 자연사 박물관’이라 불리는 우포늪은
우리나라 최대의 자연 늪지다.



23위 합천다랑논 (Hapcheon daraknon)

위치 : 경상남도 합천군 합천읍
합천은 아름다운 산과 사찰로 유명한 곳이지만
층층으로 되어 있는 다랑논도 멋진 풍경이다.




22위 부석사 (Buseoksa)

위치 :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다.




21위 금산보리암 (Geumsan Boriam)

위치 : 경상남도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남해 금산 정상에 위치한 보리암은 신라시대 638년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국내 3대 관음성지이다.



 

20위 돌산대교 (Dolsan Bridge)
위치 : 전라남도 여수시 돌산읍
전라남도 여수시 남산동과 여천군 돌산읍 우두리를 연결하는 다리로
1980년 12월에 착공하여 1984년 12월에 완공되었다.



19위 안동하회마을 (Andong Hahoe Village)

위치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종가길 40
한국의 대표적인 민속마을로
2010년 8월 유네스코 세계문화 산으로 등재되었다.



 

18위 오작교 (Ojakgyo)
위치 : 전라북도 남원시 천거동
전라북도 남원 광한루에 있는 석재로 된 다리이다.



 

17위 비양도 (Biyangdo)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제주도 서쪽, 협재해수욕장에서 바로 앞으로 보이는 작고 아름다운 섬이다.



 

16위 삼화사 (Samhwasa)
위치 : 강원도 동해시 무릉로 584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의 말사이다.



 

15위 함덕 (Hamdeok)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리로 중산간지역에 자리한 마을이다.
물이 부족하여 논농사보다는 밭농사가 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14위 협재해변 (Hyeupjae Beach)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협재리
한림읍 서해안 지대에 위치하며 조개껍질이 많이 섞인
은모래가 펼쳐진다.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하다.


 

13위 마라도 (Marado)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마라리
우리나라 최남단의 섬으로 대정읍 모슬포항에서
남쪽으로 11㎞, 가파도에서 5.5㎞ 해상에 있다.
 
 

12위 용화해변 (Yonghwa Beach)
위치 :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용화해변길
자그마한 해변이 반달처럼 휘어져 아담하며,
해변 뒤에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양쪽 끝은 기암절벽으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11위 세화해변 (Sehwa Beach)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코발트 빛깔의 맑은 바다가 아름다운 곳으로
인파로 붐비지 않아 아직 자연 그대로의
깨끗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10위 송악산 (Songaksan)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81미터 높이의 산으로 저벼리 또는 저별악이라고 한다.
해안에 접한 사면이 벼랑이고, 위는 평평하다.



 

9위 우도 (Udo)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우도면
제주가 품고 있는 섬 속의 섬이다.
종달리 해안가에서 바라보면
마치 소 한 마리가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8위 용두암 (Yongduam)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1동
용연 부근의 바닷가에 용머리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이 바위의높이는 약 10m에 이르며,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명승지이다.



7위 천지연폭포 (Cheonjiyeon Falls)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천지동
제주도에는 폭포가 많은데 그 중 규모나 경관면에서
단연 으뜸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가장 많이 머무는 곳이다.



 

6위 토끼섬 (Tokkiseom)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하도리 해안에서 5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간조시에는 걸어갈 수 있는 섬이다.
현재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지만
토끼섬의 비경을 감상하기 위해 제한적으로 탐방객들이 찾기도 한다.



 

5위 영암 (Yeongam)
위치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쪽은 장흥군, 남쪽은 해남군강진군, 북쪽은 나주시와 접한다.
남동쪽 군계를 중심으로 월출산이 천황봉을 최고봉으로
구정봉, 사자봉 등 많은 봉우리를 일으키면서 기암절벽을 이룬다.



 

4위 만어사 주변 (Miryang Maneosa)
위치 : 경상남도 밀양시 만어산
전설에 의하면, 만어사는 46년(수로왕 5)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대웅전, 미륵전, 삼성각, 요사채, 객사가 있으며
보물 제466호로 지정된 3층석탑이 있다.
미륵전 밑에는 고기들이 변하여 돌이 되었다는 만어석이
첩첩이 깔려 있는데 두드릴 때마다
맑은 소리가 나기 때문에 종석이라고도 한다.



 

3위 성산일출봉 (Seongsan Sunrise Peak)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거대한 성과 같은 봉우리로 제주도 동쪽 바닷가에 솟아 있는
해발 182m의 수중 화산체이다.
10만년 전 제주에서 생겨난 수많은 분화구 중
유일하게 바다 속에서 폭발해 만들어졌다.



 

2위 창덕궁 (Changdeokgung)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1405년(태종 5)에 지어진 조선시대의 궁궐로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한국에서 가장 중요한 고궁들 중 하나이다.



 

1위 한라산 (Halla Mountain)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해안동
제주특별자치도 중앙부에 솟아 있는 산이다.
높이 1,950m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http://cafe.daum.net/dusktrain/9h3k/2011 (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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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기도 최송연 주님을 만났노라, 외치는 사람 심히 많으나… 외로운 영혼 찾아 만나주는 사람 너무 적네요. 주님의 사랑을 받았노라, 말하는 사람 심히 많으나… 이웃에게 작은 사랑 나누어 주는 사람 너무 적네요. 주님의 용서를 받았노라, 큰소리치는 사람 심히 많으나… 내게 잘 못한 형제를 용서해 주려는 사람 너무 적네요. 아버지여, 나로 하여금 주님을 만났노라, 외치는 사람 되기보다는 외로워 우는 자를 찾아가는 발걸음 이게 하시고 주님의 크신 사랑을 입으로 논하는 자 되기보다는 병들어 우는 이웃을 찾아가는 작은 손길 이게 하시며 주님의 용서 하심을 받았노라 외치는 사람 되기보다는 내게 악을 행한 이웃마저 따뜻이 품어 줄 수 있는 당신 닮은 그런, 넉넉한 가슴 이게 하소서.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2: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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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노력하는 방황, 기다림 우리의 삶은 기다림입니다. 한량없는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요? 그건 투명(透明)하거나 확실(確實)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나 우리의 나날이 계속되는 한 기다림은 우리 앞에 놓이게 마련입니다. 그 망연(茫然)함과 불투명(不透明)함이 인생(人生)이라고 하는 철학적(哲學的) 명제(命題)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다림에는 초조(焦燥)나 불평(不平)대신 자제(自制)와 수긍(首肯)이 따르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강(江)을 건너려고 기다리는 사람이 배가 좀 늦게 온다고 강물로 뛰어드는 어리석음을 범(犯) 하지는 않습니다. 오지 않는 배를 인내(忍耐)로 기다리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초조(焦燥)해 하지 않고 배가 오기를 기다리는 인내심(忍耐心)이야 말로 우리를 성숙(成熟)시키는 밑거름입니다. 기다림을 향(向)하여 그저 막연(漠然)하게 시간을 보낸다면 세월(歲月)을 허송(虛送)하는 것이 되겠지만 힘을 기르면서 기다린다면, 자기(自己)가 원하는 기다림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삶을 엮어가면서 남보다 앞에 서자고 초조(焦燥)해 하거나 불안(不安)해할 필요(必要)는 없습니다. 앞에 서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앞에 서게 되면 자칫 교만(驕慢)해지기 쉽고 자만(自慢)에 빠지기 쉽습니다. 교만(驕慢)은 자기 스스로를 파괴(破壞)하고 자만(自慢)은 자기의 능력(能力)을 정지(停止)시킵니다. 그 두가지는 우리 삶에서 가장 경계(警戒)해야 할 위험(危險)이고 함정(陷穽)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모습을 가장 사람다워 보이지 않게 하는 가면(假面)입니다. 그 가면(假面)은 삶을 향(向)한 기다림의 자세(姿勢)일수 없으며, 결국 그 사람을 제일 뒤로 밀쳐 내고 말 것입니다. 언제나 남보다 뒤에 선다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은 뒤지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겸손(謙遜)이고 여유(餘裕)입니다. 그 겸손(謙遜)과 여유(餘裕)속에서 진정(眞情)한 기다림의 자세(姿勢)가 나오고 삶에 대한 진지(眞摯)한 노력(努力)이 생성(生成)됩니다. 우리 인생(人生)은 끝없이 노력하는 방황(彷徨)이라고 했습니다. 남보다 한걸음 뒤에 선 위치(位置)에서 노력(努力)하는 방황(彷徨)을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 바른 인생(人生)의 자세(姿勢)이며 길이 아닐까 합니다. 지치지 않고 노력(努力)하는 방황(彷徨)은 바로 내일(來日)의 삶에 대한 기다림의 실천(實踐)이면서 자신(自身)도 모르게 남보다 앞에 서게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삶은 노력(努力)하는 방황(彷徨)이면서 노력(努力)하는 기다림이다. 인생(人生)은 밭을 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노력(努力)하는 농부(農夫)에게 땅은 거짓이 없듯, 노력(努力)하는 인생(人生)에게 실패(失敗)는 없음을 믿습니다. 그 확신(確信)이 단 한번뿐인 우리의 삶을 의미(意味)있게 하며, 한 번 살아 볼만한 보람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 보람을 찾아 우리는 오늘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아닐 런지요?... <김초혜 시인님 作> Morning Has Broken - Dana Winner
     
     
     
    사모님사모님, 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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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사명위에 확고히 서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아야 할 사명을 확실하게 잡은 사람은 희망이 없을 수 없습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큰 것을 보는 것입니다.
        큰 목적을 위하여 작은 것은 버릴 수 있는 용기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넘어진 것이 큰 잘못이 아니라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실패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진실의 승리를 믿는 것입니다.
        거짓의 일시적인 성공을 보고도 허무해지지 않는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보다 높은 신조를 갖는 것입니다.
        욕심의 철학이 아니라 꿈의 철학을 갖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날씨에 영향을 안 받는 것입니다.
        폭풍은 폭풍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청계천은 지금의 한강처럼 조선시대 서울의 도심부를 관통하는 중요한 도시하천이었다.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이전부터 흐르고 있었다.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지기 전 청계천은 자연 상태의 하천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서울의 지리적 특성상 상대적으로 지대가 낮은 도성 한가운데로 물길이 모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왕조가 도성 안에 있는 수로를 정비하기 전에 이미 자연스럽게 물길이 형성되어 있었다.

    서울의 기후는 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봄·가을에는 건조하고 여름에는 고온다습 하였다. 따라서 청계천은 비가 적은 봄, 가을은 대부분 말라있는 건천 (乾川)이었던 반면,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 우기에는 조금만 비가와도 물이 넘쳐 홍수가 날 정도로 건기, 우기에 따라 유량의 변화가 심하였다.
    더구나 청계천은 도심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으며, 주변에는 시전행랑과 민가가 밀집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넘치면 가옥이 침수되거나 다리가 유실되고 익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 도성건설사업과 함께 배수를 위한 물길을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큰 사업이었다. 개천에 대한 정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태종 때부터였다. 태종은 즉위 초인 1406년부터 1407년까지 자연 상태에 있었던 하천의 바닥을 쳐내서 넓히고, 양안에 둑을 쌓는 등 몇 차례에 걸친 정비로 하천의 모습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큰비가 올 때마다 피해는 계속되었다.

    마침내 1411년(태종11) 12월 하천을 정비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개천도감(開渠都監)를 설치하고, 다음 해인 1412년(태종12) 1월 15일부터 2월 15일까지 모두 52,800명의 인부를 투입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실시하였다. 주요 하천의 양안을 돌로 쌓고, 광통교, 혜정교 등 다리를 돌다리로 만들었다. 개천(開川)이라는 말은 내를 파내다라는 의미로 자연상태의 하천을 정비하는 토목공사의 이름이었는데, 이 때의 개천 공사를 계기로 지금의 청계천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태종때 개천공사가 주로 개천 본류에 대한 정비였다면, 세종은 지천(支川)과 작은 세천(細川)의 정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종로 남북 쪽으로 늘어선 시전행랑(市廛行廊) 뒤편에 도랑을 파서 물길을 하천 하류에 바로 연결시켰다. 이것은 지천의 물이 한꺼번에 개천 상류로 몰려들어 넘쳐나는 것을 방지함으로써 도심의 홍수를 예방할 수 있었다

    1441년(세종 23)에는 마전교(馬前橋) 서쪽 수중(水中)에 표석을 세웠다.

    이 표석에 척(尺)·촌(寸)·분(分) 등 눈금을 기둥 위에 새겨, 수위를 측정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수표(水標)이다. 수표는 개천의 수위를 계수화 하여 측정함으로써 사전에 홍수를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세종때 주목할 만한 사항은 청계천의 성격을 도심의 생활하천으로 규정하였다는 것이다. 서울을 조선의 수도로 정할 때 풍수학상으로 서울 둘러싸고 있는 외수(外水)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는 것에 대응하여 도성 한가운데를 흐르는 내수(內水) 청계천이 한강과는 반대로 서에서 동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고려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성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었고, 오늘날과 같은 하수도 시설이 없었던 당시로서 청계천에는 온갖 쓰레기와 오물들이 흘러들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청계천의 성격을 두고 풍수학상의 명당수로서 늘 깨끗하게 유지해야한다는 명분론적 주장과 도성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어 더러운 것이 많이 생기므로 이것을 배출할 하천이 있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이 맞서고 있었다. 이 논쟁에서 세종이 후자의 주장을 받아들임으로써 청계천은 생활하천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청계천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도로서 기능을 함으로써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근대화시기 도시로 유입된 빈민들은 이곳에 판자집을 짓고 살기시작하였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피난민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청계천에서 중랑천 일대는 대규모 판자집단지가 조성(?)되면서 수많은 생활하수들이 쏟아져나왔고 이러한 판자촌들은 청계천 복개후 70년대까지 철거가 되었다. 여기서 쫒겨나게된 사람들이 성남등으로 이사를 가서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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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곶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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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대 청계 판자촌 재현. 용두동 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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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냄새나는 천변 앞에 창을 두고 살았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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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고가도로 교각. 복원을 하며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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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의 역사, 복원, 생태등을 전시해놓은 청계천문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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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연간 오간수문앞 준천공사. 왕이 직접 공사감독을 하였다니 일하는 사람 불편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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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연간 오간수문앞 준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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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도 남아있는 광통교.
    태종은 정릉에 있던 병풍석을 거꾸로 다리 교각으로 쓰고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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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표교(1930). 현재는 장충단공원에 있음. 빗물의 높이를 측정하는 수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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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년대 청계천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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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천 염색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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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대문인근 복개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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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년대 후반 판자촌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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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오간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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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 동대문운동장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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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4년 청계천 빨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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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복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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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장통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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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 동십자각 옆으로 옮긴 광화문앞. 현재 삼청동쪽의 지천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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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 마장동 화재. 철거민을 쫒기 위해 누군가 불을 놓았던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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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 청계고가도로와 판자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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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개된 지하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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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계고가도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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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운상가 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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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졸속적인 복원모습.. 공사기간 단축을 위해 둑을 깊이 파고 콘크리트를 넢은뒤 흙을 위에 덮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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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태일 열사 흉상.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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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조 능행반차도





    ♥ 들어가며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지칭을 두고, <삼위>를 <세 분 하나님>으로 지칭하느냐?, <일체>를 <한 분 하나님>으로 지칭하느냐? 에 대하여 각종 선행 연구물과 자료가 분석되어 갑론을박을 하고 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도출될지는 아직 미지수이지만 토론과정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풍성하여 지리라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접근 자료를 드러내어 이해를 돕고자 합니다.

     

     

    1. 성경에 기록된 삼위 하나님

    1) 삼위가 존재하심을 같은 자리에 나타낸 곳(창1:26;마3:16,17,28:19;요14:16,17;고후13:13;벧전1:2)

    2) 삼위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곳 - 성부(시89:26;요8:41;고전8:6;엡1:17), 예수(롬9:5;딛2;3), 성령(행5;4)

    3) 삼위가 영원하심을 나타내는 곳 - 성부(사9:6), 예수(히6;20), 성령(히9;14)

    4) 삼위가 상호 내재하심을 나타내는 곳(롬8:9-12;요14:10,17,17:21)

    <의견> 구약시대에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분이 없이 나타나시고 일하셨다. 그러다가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구분되어 기록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상호 내재하심을 알 수가 있다.

     

     

    2. 성경에 표현된 하나님의 지칭(指稱)

    1)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① (신6:4) : 하나인 여호와(개역한글), 유일한 여호와(개역개정) 한 분 여호와(표준새번역, 공동번역)

    ② (말2:10) : 한 하나님(개역, 개정, 표준), 하나님 한 분(공동)

    2) 성부 하나님에 대해서

    ① (막2;7) : 한 분 하나님(개역, 개정, 표준)

    ② (막10:18;눅18:19;요8;41) : 한 분 하나님(모든 번역본 동일)

    ③ (롬3:30;고전8:4;딤전2:5;약2:19) : 한 분 하나님(모든 번역본 동일)

    ④ (고전8:6) : 한 하나님(개역, 개정), 하나님 한 분(표준, 공동)

    ⑤ (갈3:20) : 한 하나님(개역) 한 분 하나님(개정, 표준, 공동)

    3) 성자 하나님에 대해서

    ① (딤전1:17;유1;4,25) : 하나이신 하나님(개역, 개정), 한 분이신 하나님(표준, 공동)

    ② (딤전2:5) : 중보도 한 분(모든 번역본 동일)

    4)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① (고전12:9,11) : 한 성령(개역, 개정), 한 분이신 같은 성령(표준, 공동)

    ② (고전12:11) : 한 성령(개역, 개정), 한 분이신 같은 성령(표준, 공동)

    ③ (엡4;4) : 성령이 하나(개역, 표준, 공동), 성령도 한 분(개정)

    <의견> 1) 구약성경에, 삼위 하나님을 구별하지 않던 유일신 개념의 여호와 하나님의 칭호 표현에 번역본에 따라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동의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영어번역본(KJV,NIV,NRSV,RSV)에서는 모두 <one god>로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2) 신약성경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을 칭호할 때,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번역본에 따라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을 동의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3) 결론적으로 <한 하나님>과 <한 분 하나님>에 대한 구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 삼위일체란 어의(語義)

    1) 삼위(三位)의 어의

    ① 희랍어 - 트레이스 휘포스타시스(tres hypostasis)

    ② 라틴어 - 트레스 페르소나에(tres personae) - 배우가 사용하는 가면, 조건, 신분 기능의 의미 - <외적>

    ③ 영어 - 트리 퍼슨스(three persons) - 사람, 개인, 인간 -> 의식하는 주체

    < 어의(語義)> : 여기에서 삼위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가리키며, 셋이 따로 따로 독립된 존재로 있다는 뜻이다.

    2) 일체(一體)의 어의

    ① 희랍어 - 우시아(ousia)

    ② 라틴어 - 숩스탄티아(substantia) - 형이상학적 존재, 만물의 근원의 의미 - <내적>

    ③ 영어 - 원 서브스탄스(one substance) - 본성, 본질 -> 본체

    < 어의(語義)> : 본체가 동일하다든가, 동질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이다.

    <의견>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 결정된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의 기본 도식(圖式)은 <세 실체(實體)>와 <하나의 본체(本體)>였다. 이 도식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하나의 본질(本質)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즉 성부, 성자, 성령께서 상호침투(相互浸透)와 공재(共在)를 통해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3. 삼위 하나님의 관계(關係)

    영원부터 성부가 성자를 낳으심은 성부에게 고유(固有)하며, 성자가 성부 하나님에게서 낳으신바 되심은 성자에게 고유하고, 성령이 성부와 성자에게 나아오심은 성령에게 고유한 것이다(히1;5-8;요1:14,18,15:26;갈4;6).

    1) 존재론적 순서(順序)

    성부는 다른 위에서 발생하지 않으셨으며, 성자는 성부로부터 영원히 발생하셨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방출한다.

    2) 경륜적 순서(順序)

    삼위 하나님을 외적인 사역의 순서로 말하면, 만물이 성부에게서 나오고, 성자로 말미암고 , 성령 안에 있다(요1:3,14).

    3) 사역적 순서(順序)

    3위 하나님을 인간의 구속 사역에 대한 순서로 말하면, 성부는 구속을 계획하시고(요17:6), 성자는 죽으심으로 구속을 성취하시며(롬5:8), 성령은 구원의 효과를 각 개인에게 적용하신다(고후3:18).

     

     

    4. 삼위일체 교리(敎理)의 문제점

    <삼위일체>라는 기독교 핵심 교리를 성경에서 찾아내었지만, 현재까지 그 삼위일체를 세상 언어로 완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삼위(三位)를 주장하다 보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 <세 분>인 것으로 오해될 염려가 있다.

    교회사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단정지어 설명하려다가 이단적인 길로 나아가게 되었거나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일들이 있었다. 또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느라고 성부 하나님 외에 성자 하나님이나 성령 하나님의 독립적 신성이나 인격성을 부정하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

     

    또한 <삼위일체>에서 <위격>과 <본질> 어디에 중심을 둘 것인지가 혼란이 온다. 구약에서는 <본질>이 중심이었는데, 신약에서는 <위격>에 그 무게 중심이 이동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하나님>이라는 기독교 유일신이,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등장으로 이해는 되는데 막상 정의를 내리려면 헷갈리게 된 것이다.

     

     

    5. 신학(神學)에 표현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칭(指稱)

    1) 터툴리안(삼위일체론의 기초형성) : 하나님은 한 분 - 한 본질(本質) 세 위격(位格)

    2) 요한(동방교회) : 한 실체(實體)인 동시에 상호침투(相互浸透)의 관계인 세 객체(客體)

    3) 어거스틴(서방교회) : 한 분 하나님 안에는 상호의존(相互依存)의 세 존재 양식(樣式)

    4)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2장1,3) : 한 분 하나님으로 본체(本體)는 삼위(三位)가 계신다

    5)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문8,9) : 한 분 하나님으로 삼위(三位)가 계신다.

    6)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문5,6) : 한 분 하나님이시며, 삼위(三位)는 한 하나님이시다.

    7)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문25) : 한 분 하나님으로 삼위(三位)가 계신다.

    8) 토마스빈센트 소요리문답(문5,6) : 하나님 한 분이시며, 삼위(三位)는 한 하나님이시다

    9)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신앙요리문답(문11) : 한 하나님의 세 위(位)

    10) 벨직 신앙고백(8조) : 삼위(三位)는 단 한 분의 하나님이시다.

    11) 니케아신경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믿는다.

    12) 아타나시우스 신경 : 삼위(三位)로 계시는 한 분 하나님

     

     

    6. 삼위일체 하나님의 지칭(指稱)에 대한 문제점

    1) 삼위(三位)의 위(位)가 인격체를 의미하니 우리말 <분>으로 대입하여 <세 분 한 하나님>으로 표현하자는 제안이 있다. 참으로 간결한 표현이다. 이 표현이 삼신론이란 저항에 대응할 수 있어 신학적인 문제가 종결되었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소망이다. 그런데도 <분>이란 용어가 <상호침투(相互浸透)와 공재(共在)>라는 의미를 완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세 분>을 설명하기 위하여 다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돌아가야 한다.

    오히려 신학적인 논의 과정 하나가 추가된다는 결과가 된다.

    2) 삼위(三位)의 <세 분>은 삼신론적 표현이니 삼위(三位)를 그대로 표현하여 <삼위이신 한 분 하나님>으로 표현하자는 제안이 있다. 삼신론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는 있으나 양태론이란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삼위>를 그대로 사용함으로서 쉬운 우리말 표현이란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게 할 바에야 그대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본질을 살린 표현이 된다.

     

     

    ♥ 나가며

    삼위 하나님은 한 분인가 세 분인가? '한 분'이란 말도 가능하고 '세 분'이란 말도 가능합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하여 어느 측면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 가능한 말입니다. 칼빈도 '한 분'이란 말도 하고 '세 분'이란 말도 하였습니다(기독교강요, 13장 2. 16. 17.). 즉 인격(위격)으로 하면 '세 분'이라고 할 수 있고, 본질을 나타내는 말로는 '한 분'이란 말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뭉치로 표현하려면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드러내지 않는 것에 대하여 지나치게 알려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을 때, 하나님께서는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 일을 못하게 하셨습니다(창11:4-8).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란 참으로 심오하고도 절묘한 표현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하셨으면서도 1700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그 이상의 접근은 차단하셨습니다. 인간의 지혜가 부족했다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의 접근을 차단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따라서 성경에 기록된 가르침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이 바른 믿음의 생활이며,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방법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메가처치 구원론은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을 대량 생산 시스템에 어울리도록 산뜻한 매뉴얼로 패키지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메가처치 구원론의 문제점을 살펴보려면 기존의 개신교 구원隙�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첫째는 구원론 자체가 워낙 민감한 문제라서 함부로 건드릴 수도 없다는 것이요, 둘째는 좀 복잡한 문제인데 기존의 개신교 구원론 자체가 일종의 덫에 걸려들어 있다는 것이다.

     

    논리적 덫이라니 무슨 뜻인가? 이것은 구원론이라는 조직신학적 주제가 일종의 논리적 함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사실 이러한 덫은 성서 안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이 덫은 성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지난 2000년 간 신학이 발전해오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덫은 신학적 덫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필자는 이 덫을 ‘우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우물은 이중성이 있다. 한 편으로 우물은 생수를 제공하는 생명의 원천이지만, 자칫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무덤이 되고 만다.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논리적 함정도 꼭 이 우물과 이와 같다. 잘 쓰면 약이지만 잘못 쓰면 독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개신교 구원론은 그만 이 우물에 빠지고 말았다.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버린 우물은 세 개가 있는데, 이 세 개의 우물은 각각 주인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루터가 우물의 주인이다. 개신교 구원론 논의를 위해서 이 세 개의 우물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자.

     

    1.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첫 번째 우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이라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우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실 신학의 역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오랫동안 잘 알려지지도 않았으며, 알려졌다고 해도 오해되어왔다. 그런데도 필자가 아리스토텔레서의 우물이라고 부른 이유는 워낙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리스 철학자를 충분히 대표할 만큼 유명해서이기도 하고, 또 한 가지는 그의 논리학과 철학 방법론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아리스토텔레스, 그러니까 그리스 철학이라는 우물에 빠진 시기는 대단히 이르다. 어쩌면 사도 바울도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철학을 받아들인 시기는 대략 2세기경으로 보인다. 이 무렵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기독교를 논리적으로 방어하고 해명하기 위해서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기독교 변증가들은 한결같이 그리스 철학에 깊은 조예가 깊었는데, 이들은 성서와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계시의 내용을 의식적이고도 적극적으로 그리스 철학의 틀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그래서 순교자 저스틴은 하나님의 계시가 그리스도 이 전에 이미 소크라테스와 같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계시되었다고 주장했다. 또 알렉산더의 클레멘트는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에게는 율법을 주셨고, 헬라인에게는 철학을 주셨다고 주장했다. 오리겐의 신학을 살펴보면 이것이 신학인지 플라톤 철학인지 도무지 헷갈릴 지경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은 '참 철학'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장 탁월한 철학이라고 논증하는 것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겼다. 분명 많은 유익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덕분에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엘룰이 ‘계시의 철학화’라고 불렀던 현상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이후 2000년 동안이나 기독교는 그리스 철학의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기독교 계시가 첫째 우물에 빠지면서 나타난 현상들 세 가지만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로 추상화 현상이 나타난다.

    그리스 사유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는 사고의 특징이 고도로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자들은 이들의 이러한 추상적 사유가 그들의 언어 구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영어도 마찬가지지만 그리스어에서 ‘정관사 +형용사’ 하면 ‘명사’가 된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형용사가 명사로 바뀐 다음 이 명사가 계속 추상화 과정을 겪게 된다.

       
     
      ▲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철학 방법론이 기독교 신학에 미친 영향력이 지대하다.  
     
    예를 들어, ‘희다’라는 형용사에 ‘정관사’(to)를 붙이면 ‘흼’이 된다. 그리고 이 ‘흼’이라는 명사는 고도로 추상적으로 활용될 때 ‘흼 자체’가 된다. 이런 식으로 ‘아름답다’는 ‘아름다움’ 혹은 ‘미’로, 더 나아가 ‘미 자체’ 혹은 ‘미의 본질’로 추상화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모든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언어들은 고도로 추상적이고 철학적 개념으로 대상화된다.

     

    물론 이러한 개념은 명료하며, 철학하기 좋은 개념이 될 수는 있지만 기독교 계시의 역동성은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역사 속에서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 속에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야훼 하나님은 점차 철학적 일자(the One)로 고정되거나, ‘부동의 동자’(unmoved mover)로 얼어붙게 된다.

     

    이와 함께 모든 구체적인 사건들은 추상적 개념으로 고정되고, 모든 형용사는 명사로 객관화, 대상화되고 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실재하지 않는 것들이 마치 실재하는 양 가상적 존재가 되어 나타난다. 점차 기독교 신학은 이 가상적인 개념적 존재들을 엄격하게 조작하고 다루는 작업이 되어 간다.

     

    가령 니케아 공의회 이후 기독론이 예수라는 인물 속에 ‘신성’(divinity)과 ‘인성’(huminity)이 어떤 식으로 결합하고 배치되는지를 놓고 다툴 때, 또 칼빈주의자들과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이 전적 타락한 인간이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있다면 그것이 인간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놓고 다툴 때 결국 이러한 신학적 논쟁은 그리스 철학의 우물에 빠져 있다는 증거가 된다.

     

    둘째, 소위 신학 방법론으로 논리학의 기본 법칙을 수용한 것이다.

    논리학의 중요한 기본 법칙으로는 동일률, 모순율, 배중률 등이 있다. 이런 법칙들은 옛날부터 있어왔던 것들인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집대성된다. 그렇다면 이 법칙은 무슨 뜻인가? 쉽게 설명하면 ‘그런 건 그런 것이고, 아닌 건 아니다’라는 법칙이다. 무슨 말이냐? 정류장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만일 그가 오바마라면 그는 부시가 아니다. 여기서 ‘그는 오바마다’가 동일률이고, ‘부시는 아니다’가 모순율이다. 그러니까 동일률과 모순율을 합치면 그는 오바마이면서 동시에 부시일 수는 없다는 뜻이다. 그럼 배중률은 무엇인가? 가운데가 없다는 뜻인데, 예를 들어, 신은 50%만 존재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신은 존재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거나 한다, 뭐 그런 법칙이다.

     

    이러한 논리학의 법칙은 모든 것들을 ‘도 아니면 모’(all or nothing)로 만든다. 이렇게 되면 말하는 내용이 대단히 명료해진다. 데카르트가 ‘명석함'과 '판명함'의 사고를 추구하고자 했을 때 그는 스스로 그리스인의 후예이고자 했던 것이다. 어쨌든 이런 법칙들은 머릿속의 뿌옇고 희미하던 관념들을 마치 유리알처럼 투명하고 깔끔하게 이해되게 한다. 이러한 방법론으로 성서를 읽으면 엄청나게 많은 유익을 얻지만, 동시에 또 엄청나게 많은 것을 잃게 된다.

     

    셋째는 ‘삼단논법’이다.
     삼단논법은 타당한 방식을 통해서 결론에 이르는 일종의 추론 방식을 말한다. 삼단논법을 쉽게 이야기하면 일종의 자동화(automation) 기계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완벽하게 자동화된 공장 기계에 원재료를 넣기만 하면 재료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닌 후 완제품이 되어 ‘짠~’하고 나오는 것과 똑같다. 정교한 삼단논법의 과정들을 엄격하게 지키기만 하면 결론은 자동적으로 완벽하게 추론될 수 있다고 약속하는 것이 삼단논법이다.

     

    이상의 방법들이 이리저리 결합되어서 신학적 작업에 끼친 영향은 대단하다. 이러한 영향으로 초기 300~400년간의 신학이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한 번 추적해보자. 맨 처음에는 신학이 아니라 ‘예배’가 존재했다. 이 예배는 나사렛 출신의 한 젊은 남성을 기리는 예배였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배’가 문제를 촉발시켰다. 과연 예수를 예배하는 것은 정당한가? 구약성서에 의하면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천사든, 인간이든, 어떤 피조물이든 예배 받을 수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예배한다. 이것은 정당한가?

     

    최초의 신학은 이렇게 생겨났다. 신학자들은 예수를 예배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보여야 했다. 논리적으로 볼 때 예수는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거나, 합당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이나 초대 교회의 실천은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면 ‘예수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니 말이다.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서 아리우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는 하나님 비스무래(homoiousios)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이에 반해 아타나시우스는 ‘예수는 하나님과 완전한 동일본질(homoousios)이기에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그리고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정통(orthodox)으로 인정된다. 이렇게 된 데 무슨 음모론이 있었기보다는 논리적으로 아타나시우스가 더 타당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만일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이제 새로운 문제가 터진다. 하나님이 하나냐, 둘이냐가 문제가 된다. 하나님이 둘이라고 하면 다신론(多神論)이 되고, 하나님이 하나라고 한다면 예수는 하나님이고, 하나님은 예수라는 말이 된다. 후자가 맞다면 십자가에 달린 분은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되면 성부수난설(Patripassionism)이 된다. 그러나 이 둘 다 성서와 일치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와 하나님은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그럼 대체 뭐냐?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여기에 성령이 더해져서 삼위일체론(Trinity)이 만들어지게 된다.

     

    하지만 논리라고 하는 것은 어느 한 지점에 그치지 않는다. 자, 만일 예수가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본질이라면, 마리아가 낳은 아기는 인간이냐, 하나님이냐.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므로 마리아가 낳은 자는 하나님이라야 한다. 그리고 만일 이것이 옳다면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자(theotokos)다. 그리고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자라면 그는 ‘하나님의 어머니’시다. 그래서 마리아도 경배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어느덧 논리는 엉뚱한 곳으로까지 이르게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이와 유사한 과정을 칼빈주의 구원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이다. 전적으로 타락했다면 인간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이나 능력은 있는가? 있다고 한다면 전적 타락이 부정된다. 따라서 전혀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인간에게 전혀 가능성이 없다면 자연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리게 된다. 만일 구원이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달리게 된다면 믿음은 누구의 것인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인가? 그렇다면 다시 전적 타락이 부인된다.

     

    따라서 신앙은 하나님이 주셔서 가지게 된 하나님의 선물이라야 한다. 또 만일 신앙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선물주실 지를 미리 아셨는가? 모른다고 하면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셔야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신앙의 선물을 주지 않으실 자도 아시는가? 모른다고 하면 역시 하나님의 전지성이 부정된다. 따라서 아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주실 자와 주지 않으실 자를 미리 정하셨는가? 정하지 않으셨다고 하면, 하나님이 아시고도 정하지 않으셨다는 말이 된다. 이는 하나님을 이중인격자로 만든다. 따라서 정하셔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 선택은 아담의 타락 전인가, 후인가? 이 문제를 두고 칼빈주의 진영에서는 타락 전 선택설(supralapsarianism)과 타락 후 선택설(infralapsarianism)이 논쟁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이 타락하기도 전에 미리 택자와 비택자를 정하셨다면 이것은 타락과 구원받지 못하는 모든 책임이 하나님께 넘어가는 혐의가 발생하게 된다. 그렇다고 타락 후에 선택하셨다면 역시 또 많은 논리적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뭐 대충 이런 식이다.

     

    이상의 일련의 논리적 추론 과정은 성서의 계시 자체로부터 왔다기보다는 그리스 철학의 방법론으로부터 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신학자들은 신학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썼다. 실제로 정통신학이라고 하는 것들은 대체로 고도의 균형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작업들이 준 유익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로부터 수입한 논리적 자동 기계는 성서의 계시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들을 만들어내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신교 구원론은, 아니 기독교 신학 전체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우물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2. 어거스틴의 우물

    어거스틴의 우물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어거스틴이 펠라기우스와 논쟁하면서 판 우물이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이 그리스도와 동일한 행위를 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아담처럼 죄 없이 무죄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 무죄의 상태를 유지하고, 죄 없이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죄 없는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도덕적 교사라고 했다.

     

    이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인간은 은총의 빛을 받기 전에는 선행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며, 또 설사 안다고 하더라도 의지 자체가 심각하게 마비되어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다 주장했다. 그래서 의지는 의지로되 기능이 상실된 ‘노예 의지’만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후에 종교개혁자들이 발견한 ‘전적 타락설’의 시조였다. 때문에 어거스틴의 도식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 어거스틴 이후로 '둘 다!'라는 관점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은총 vs. 행위는 ‘도 아니며 모’라는 식의 양자택일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  
     

    이 두 사람의 논쟁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논쟁이 지속되는 동안 양측은 점점 더 상대방의 논리를 공격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처음보다 훨씬 더 극단적으로 상대방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주관적인 평가가 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펠라기우스보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이 보다 현실적이고, 또한 성서적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논쟁을 통해서 엉뚱한 결과가 초래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 vs 인간의 행위,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vs 인간의 자유가 서로 대립하게 되고 만 것이다.

     

    김기현의 <가룟 유다의 딜레마>에서도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문제는 결코 만만치 않은 신학적 딜레마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토록이나 심각한 딜레마가 성서에서는 전혀 딜레마처럼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성서의 독자들을 의아스럽게 한다.

     

    가령 가룟 유다는 스스로 예수를 팔았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예수를 팔게 하셨는가? 또 바로는 스스로 마음을 강퍅케 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는가? 이러한 논쟁은 신학생들의 시간 죽이기 말싸움 게임의 소재로도 훌륭하고, 소그룹 성경 공부 리더를 골치 아프게 만들게 하기에도 훌륭한 소재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성서는 이런 종류의 딜레마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냥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둘 다야!’

     

    그러나 어거스틴 이후로 "둘 다!"라는 관점은 배제되었다. 그리고 은총 vs. 행위는 ‘도 아니며 모’라는 식의 양자택일의 성격이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선택안이 남게 된다. 첫째는 100% 은총과 0% 행위라는 어거스틴주의, 둘째는 은총 0%와 행위 100%라는 펠라기우스주의, 셋째는 은총 50%와 행위 50%라는 세미(semi)-펠라기우스주의 혹은 신인협력설(synergism).

     

    중세 가톨릭교회는 처음에는 어거스틴주의를 붙드는 것 같다가 점차 세미 펠라기우스주의로, 그리고 나중에는 펠라기우스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경향에 종교개혁자들은 “어게인 어거스틴!”을 외치며 다시금 “오직 은총”(Sola Gratia)의 교리를 다시 붙들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행위를 완전히 배제한(0% 행위) 순어거스틴주의(100% 은총)를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만일 조금이라도 인간의 행위가 들어간다면 신인협력설(synergism), 내지는 세미 펠라기우스라는 주홍색 낙인이 찍히고 만다. 따라서 은총론은 철저하게 인간의 행위를 배제해야만 했다.

     

    그러나 인간의 행위가 철저하게 배제된 결과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하나는 율법 폐기론의 위험이다. 실제로 이러한 위험은 독일 루터교회에서 금세 확인되었다. 막스 베버가 지적하듯 개혁주의 궁정에서 보였던 금욕과 절제에 비해 루터주의 궁정에서는 폭음과 난잡함이 현저했던 것이다. 신속하게 죄악으로 빠져 들어가는 성도들에게 도덕적 행위를 요구할 논리적 근거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문제를 ‘불가지론’이라는 상당히 흥미로운 방식으로 빠져 나간다. 그것은 택자와 비택자가 영원 전부터 예정되어 있으나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고 인간은 ‘완전히 알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예정과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인간은 이를 알 수 없고 다만 내면의 변화와 외적인 도덕적 행위를 통해서 이 사실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이것이 신도들을 끊임없는 경건과 도덕적 삶으로 이끄는 동인이 되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신앙의 성격 및 주체에 관한 문제다. 에베소서 2장에 따르면 “그 은혜을 인하여(by grace) 믿음으로 말미암아(through faith)”(엡2:8)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 은혜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겠지만, 믿음은 우리가 가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만일 믿음을 죄인이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순간 전적 타락설은 부정되고 만다. 타락한 죄인이라도 최소한 구원 얻을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있는 셈이니 말이다. 따라서 믿음은 인간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야 한다.

     

    하지만 믿음도 하나님께서 주신다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없다. 순전히 하나님 맘이다. 그러나 구약에서 얼마나 많은 본문이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했으며, 또 예수는 얼마나 자주 “믿으라”고 하셨는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뭐하려 인간에게 "믿으라"고 하셨느냐 그 말이다. 또 만일 믿음마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격적 존재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은 구원에 관한 한 식물인간이 아닌가? 이러한 식의 물음이 생겨난다.

     

    이 문제를 두고 격돌한 것이 바로 칼빈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간의 논쟁이다. 칼빈주의는 신앙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고 말하고, 알미니우스주의는 신앙을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사랑에 인간이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알미니우스의 주장을 신인협동설(synergism), 혹은 세미 펠라기우스라고 정죄했다. 이에 반해 알미니우스주의는 칼빈주의가 하나님을 아담의 타락과 인간의 죄, 죄인들의 불신앙을 조장한 악신으로 만든다며 비판했다. 어느 것이 맞는가?

     

    참으로 골치 아픈 논쟁이다. 필자는 이 논쟁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사실 이 논쟁은 일종의 논리적 함정이다. 그래서 하나를 선택하면 이 문제가 걸리고, 다른 것을 선택하면 저 문제가 걸린다. 대세는 칼빈주의였다. 그리하여 개신교회는 조금이라도 행위나 윤리를 강조하면 ‘행위구원론’이니, ‘율법주의’니, ‘펠라기우스주의’라고 정죄하기를 서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열매를 강조하지 않는 것이 마치 복음적인 양 그렇게 가르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바로 개신교 구원론이 어거스틴의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성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구원은 100%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동시에 100% 선한 열매라고. 교부 키프리안은 도나투스라는 친구에게 이렇게 구원 간증을 이렇게 하고 있다. “내가 천상 성령의 물을 흠뻑 받고 난 다음 제2의 탄생이 나를 바꾸어 놓았으니, 모든 의심들이 묘하게도 밝혀지고, 닫혔던 것들이 열리고, 어둡던 것들이 빛나고, 전에는 어렵게 보이던 것들이 쉬워지고, 불가능한 것처럼 생각되던 것들이 행할 수 있게 된 거야. 이것은 자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은총일세. 이것은 인간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해야 하네.”(Ad Donatum 4.)

     

    3. 루터의 우물

    개신교 구원론이 빠져 있는 세 번째 우물은 루터가 판 것이다. 루터가 판 우물은 무엇인가? 소위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우물이다. 그는 신학적으로 볼 때 행위 은총론이 판을 치고 있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를 향해서 우렁차게 위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성례전의 신학에 따르면 반복되는 성사를 통해 죄라는 영혼의 질병을 조금씩 고쳐나갈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을 위해서 영세, 성체, 견진, 고해, 병자, 신품, 혼배 등 일곱 가지 성사를 정성스럽게 받아야 했으며, 또 때에 맞게 다양한 기도문을 암송해야 했다. 이 뿐 아니라 마리아와 성인 숭배, 성화상 공경, 자학적 참회, 갖가지 금식과 기도일, 십자군 전쟁 참가 등 갖가지 교회가 만들어 낸 기이한 신앙의 관습들과 유전들을 지키도록 독려했다. 거기에 선행까지. 그 중 가장 루터를 분노케 한 것이 면죄부였다.

     

    이제는 돈으로 구원을 사다니! 이 모든 관습들을 향해서 그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선언했다.

       
     
      ▲ 루터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회는 진실한 체험의 순간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에서 개신교회의 하나님나라 모델이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나라의 모델과 닮았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유대파 그리스도인을 향해 누차 반복적으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고 선언한 것과 대단히 흡사하다. 그러나 문제는 도대체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오직 믿음'이라는 주장은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 있다.

     

    믿음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신약성서에서조차 미묘한 의견의 차이가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즉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듣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에게 있어서는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야고보와 바울의 주장은 따지고 보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서 2장 24절의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은 분명 야고보의 믿음관이 바울의 믿음관과 상당한 강조점의 차이가 있음을 무시하기 어렵다.

     

    루터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했을 때 우리는 동일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도대체 루터가 말하는 그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루터에게 있어서 이 믿음은 ‘모종의 체험’과 관계되어 있었다. 루터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의(義)’에 대해서 고민해왔다.

     

    하나님의 완전한 의 앞에서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심판받고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인식 때문에 그는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따라서 로마서 1장 17절의 말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는 말씀이 도대체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가 이 문제와 함께 끙끙거리며 씨름하고 있던 중에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준엄한 의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일 뿐인 인간을 향해 주권적으로 ‘무죄!’라고 선언해 주시는 의라고 ‘깨달아진 것’이다. 하나님의 의는 높고, 크고,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죄인에게 전가되는 복된 의라는 사실을 그는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루터는 이 깨달음의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이 사실로 즉시 나는 다시 태어난 듯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 듯 느끼게 되었다.”

     

    루터에게 일어난 이 깨달음의 체험은 그의 불안한 영혼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의 영혼은 평안해졌으며, 확신에 차고, 담대해졌다. 수도원을 유령처럼 서성이던 루터는 보름스 회의장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는 위대한 신앙의 투사로 바뀌었다. 이 체험은 마치 밤이 낮으로 바뀌고, 검은 것이 흰 것으로, 흑백이 칼라로 바뀐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이 결정적인 변화의 순간에 루터에게는 믿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참으로 값진 백 만 불짜리 체험이다. 그리고 500년간 개신교 구원론은 바로 이 루터의 백만 불짜리 체험에 대한 각주(脚註)가 되었다.

     

    그의 체험은 개신교회 내에서 여러 사람들을 통해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에 나오는 아비가일 허친슨이나 피비 바틀릿, 올더스게이트 거리의 요한 웨슬리, 찰스 피니, 찰스 스펄전 등. 그리고 오늘날 강단에서 자신의 구원 체험을 간증하는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은 모두 루터의 백 만 불짜리 체험을 함께 공유한 자들이다. 루터의 실제적인 신앙 체험에 대한 강조는 형식적이고 관습적 신앙에 젖어 있던 많은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와 함께 개신교 구원론은 거의 1500년 간 구원을 침례·세례와 연결시켜 왔던 교회의 전통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유아 세례로 변질되어 버리기 훨씬 전, 그러니까 초대교회 300년 동안 침례․세례는 구원의 가장 강력한 표지였다. 따라서 초대교회는 침례․세례를 아무에게나 베풀지 않았으며, 결코 쉽게 행하지도 않았다. 3세기 경 초대교회가 침례를 베풀던 관습에 대해서 상당히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에 따르면 예비 입교자는 침례 받기 전 자그마치 3년간이나 예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신앙 고백이 진실한지 뿐만 아니라 삶의 변화의 뚜렷한 징후가 있는지, 그리고 순교의 잔까지 마실 진지한 결심이 있는지가 확인되었을 때만 침례를 베풀었다. 이 때문에 초대교회는 어떤 사람의 순간적인 신앙 체험을 구원과 연결시킬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런데 루터 이후 특별한 은총의 순간이 있다고 가정되게 되었다. 바로 이때가 회개의 순간이요, 믿음의 순간이며, 그리하여 구원의 순간이라는 관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지만 이 믿음의 순간에 대한 이해는 통일되지 않았다. 가령 정통주의자들의 경우 믿음을 정확하고 순수한 정통 교리의 지식과 연결시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교리 문답서를 잘 배우고, 익히고, 외울 필요가 있었다. 그런가 하면 경건주의자들과 같이 신적인 임재의 체험과 연결시키는 이들도 있었다.

     

    전통적으로 청교도 신학에서는 이 은총 체험의 순간을 죄에 대한 격렬한 깨달음과 성령께서 갑작스럽게 부어주시는 죄 사함의 확신과 연결시킨다. 앞서 들었던 조나단 에드워즈의 <놀라운 회심 이야기>의 아비가일 허친슨이나 피비 바틀릿 등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죄에 대한 강렬한 자각과 통회, 그리고 밀려드는 죄 사함의 확신을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 때문에 청교도 신학에 기초한 복음 전도자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신랄하게 죄인들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며, 지옥불의 가공할 만한 두려움을 선포하며, 십자가의 길을 소개한다. 하지만 죄인들에게 믿겠느냐며 초청하는 일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왜냐? 그것은 성령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이다.

     

    한편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이 은총 체험의 순간을 예수 그리스도의 자비로운 초청에 인격적으로 '결단'하는 것과 연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사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이제 누구라도 그분이 자신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실을 마음으로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때문에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복음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기 원하시는 분들은 자리에서 일어서십시오”와 같은 구원 초청(altar calling)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이들 모두는 방식은 다르지만 구원을 모종의 신앙 체험과 연결시키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이것은 개신교 구원론이 루터의 우물에서 빠져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종교개혁 시절부터 루터의 우물에 빠지기를 거부하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급진 종교개혁가들이나 혹은 재침례파들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믿음을 교회가 베푸는 의식과 연결시키거나 혹은 모종의 내면적인 신앙 체험과 연결시키는 것 모두를 거부한다. 이들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삶의 변화’다. 그리고 이것은 최초의 300년 동안 초대 교회가 유지했던 관점과도 유사하다.

     

    어쨌든 루터의 우물에 빠진 개신교회는 진실한 체험의 순간을 끊임없이 찾아 헤맸다. 하워드 스나이더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에서 개신교회의 하나님 나라 모델이 신비주의자들의 하나님 나라의 모델과 닮았다고 했는데 이는 참으로 정확한 지적이다. 루터 이후 개신교회는 외적인 형식보다는 항상 마음에 집중하는 경향이 생겼다. 하지만 모태교인과 같이 강렬한 체험이 부족한 사람은 어쩌랴. 교회는 이들을 위해서 ‘말씀에 기초한 신앙’을 가르치면서 위로하기는 하지만 하여간 이들은 자신의 미지근함 때문에 늘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다.

     

    개신교 구원론이 체험과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신교인들이 한 번의 체험만으로 뭔가 2%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분명히 회심 체험은 있었지만 이것만으로 ‘삶의 변화’가 충분히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한 번의 체험으로 안 되고 또 한 번의 ‘진짜’ 강렬한 체험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게 된다. 소위 ‘제2의 축복’(second blessing)이라고 부르는 체험이다. 혹자는 이를 성령 세례라고도 부르는데 결국 이것이 20세기 오순절 운동을 일으키는 씨앗이 된다.

     

    오로지 '예수의 몸, 삶, 말'

    이상에서 보듯이 개신교 구원론은 세 가지 큼직큼직한 우물에 빠져 있다. 다시 말하거니와 우물은 양면성이 있다. 한편으로 우물은 생수의 원천이지만 자칫 잘못해서 우물에 빠지면 우물은 무덤이 된다. 따라서 우물은 무조건 거부할 수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거기에 빠지면 더 위험한 일이 생긴다.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이 우물을 팔 수 밖에 없었던 이유와 그들의 선한 의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시대의 신학적 언어와 개념에 붙잡힐 필요는 없다.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오로지 예수뿐이다. 예수의 몸, 삶, 말이야 말로 끊임없이 교회와 신학을 갱신시키는 원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몸, 삶, 말로 다시 한 번 우리의 구원에 대한 가르침을 반성하고 개혁시켜야 할 필요가 있지 않는가 하고 제안하는 바다.

    신광은 / 열음터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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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속의 타일랜드, 베트남, 미얀마의 수상가옥
    들을 구경하시지요....

    1. Ko Panyi, Thai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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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 Panyi is a fishing village in Phang Nga Province, Thailand notable for being built on stilts
    by Indonesian fishermen. The population

    consists of roughly 200 families or

    between
    1,500 and 2,000 people descended from

    2 seafaring Muslim families from Ja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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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Halong Bay Floating Village,

    Viet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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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village of about 600 inhabitants built on the

    water can be found in Halong 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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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Giethoorn, Nether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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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iethoorn is a village in the Dutch province of

    Overijssel. This village is called the

    Venice of the Netherla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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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Uros Floating Village, Pe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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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Uros are a pre-Incan people who live on

    forty-two self-fashioned floating islands

    in Lake Titicaca, Peru. These islands are

    hand-m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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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Wuzhen,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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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913_Wuzhen_5129.jpg

    Wuzhen displays its two-thousand-year history

    in its ancient stone bridges floating on

    mild water,

    6. Kampong Ayer, Brun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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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mpong Ayer is an area of Brunei's capital city

    Bandar Seri Begawan that is situated after

    the Brunei 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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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ltan Omar Ali Saifuddin Mosque at night

    (the mosque is built in an artificial lagoon on the
    banks of the Brunei River at Kampong Ayer)

    photo source

    7. Zhouzhuang,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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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houzhuang, one of the most famous water

    townships in China.

    2.1277628236.zhouzhuang-water-town.jpg

    Zhouzhuang has been called the

    "Venice of the East".

    8. Ganvie, Ben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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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anvie, also known as the Venice of Africa,

    is a lake village in Benin, lying in Lake Nokou,

    near Cotonou. With a population of around

    20,000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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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Kay Lar Ywa, Myanm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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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ay Lar Ywa is water village located on Inle lake.

    Residents of this village are Intha people,

    farms on floating gard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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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Tongli, 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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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ongli, alternately Tong-Li, is a town in Wujiang

    county, on the outskirts of Suz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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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숙한 사람, 성숙한 사람

    미숙한 사람은 자기가 좋아
    하는 일을 찾지만,
    성숙한 사람은 꼭 해야만 하는
    일들로부터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산다

    미숙한 사람은 세상이 개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가득 차 있다고 불평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먼저
    변화시키는 데서 세상의
    변혁을 꿈꾼다.

    미숙한 사람은 모든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만,
    성숙한 사람은 웃음으로
    세상을 맞이한다.

    성숙한 사람은 결코 늙지 않는다.

    그의 성장도 늙는 법이 없다.

    그는 안다.
    만일 절망을 두려워 하면
    절망을 받아들이게 되고
    실패를 두려워 하면 실패를
    불러들이게 된다는 것을.

    그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자기만족에 머무르는 일이다.
    그는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행하여 스스로 존엄성을 지니며,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투자함
    으로 스스로 현명한 사람이 된다.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헌신을
    한 번의 선택이 아니라
    매일의 도전으로 본다.

     

    옮긴 글

    사모님사모님/민들레홀씨되어

     

    '세대주의 신학’, 한국교회 타락과 이단 양산의 주범

     

     

    "20세기 한국의 개신교는 세대주의 신학의 지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세대주의 영향으로 한국 교회는 이스라엘과 교회, 그리고 율법과 복음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으로 회개없는 잘못된 구원과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며 나타난 구원파와 같은 이단들이 대거 등장하게 만들었다."


    전 침신대 교수이며 현재 사이비종교피해대책연맹 총재인 정동섭 박사는 최근 본지에 보내온 '세대주의와 이단'이라는 제목의 연구자료에서 세대주의의 근본적인 문제점과 세대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발생한 이단들이 주장하는 잘못된 성경해석과 교리들에 대해 지적했다.


    세대주의 신학은 영국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제교회 지도자 달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 시작됐다. 달비는 19세기 중반에 영국 성공회가 부패했다면서 교파를 떠나 형제운동을 시작하며 세대주의를 체계화했다.


    정 박사는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시스템에 따라 신학은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루터와 칼빈이 가르친 개신교 '언약신학'에 기초한 '개혁주의 신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대주의 신학'이다. 여기서 세대는 세계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세대 속에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전개되는 것을 가리킨다"고 설명했다.


    정 박사에 따르면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 복음을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세대주의의 경우 성경 역사를 무죄 시대, 양심 시대, 인간통치 시대, 약속 시대, 율법 시대, 은혜 시대, 천년왕국 시대 등 일곱 세대로 나눠 설명하면서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 다른 구속적 계획을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결국 세대주의 신학에 의하면 각 시대마다 구원 얻는 방법이 다르다. 예를 든다면 양심 시대에는 양심을 따라 살면 구원 받고, 율법 시대에는 율법에 따라 구원받고, 은혜 시대에는 은혜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는 식이다. 따라서 현재 은혜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십계명은 신앙과 생활에 유일한 법칙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이러한 세대주의 종말론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없다는 율법폐기론으로 이어졌고, 기독교의 윤리성은 무너지게 됐다.


    정 박사는 "무너진 기독교 윤리성의 대표적인 사례가 오대양 사건과 세월호 사건을 일으킨 유병언의 구원파다. 회개무용론을 가르치고 있는 또 다른 구원파의 교주 박옥수도 세대주의 신학을 따르고 있다"며 "이러한 세대주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많은 정통 교회도 은혜를 누린다면서 율법을 무시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와 같은 세대주의 율법관과 종말론이 한국기독교를 망치고 있고, 많은 이단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초부터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으로 회개없는 잘못된 구원과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며 나타난 이단은 다미선교회나 구원파만이 아니다. 지방교회의 사상적 뿌리도 세대주의다.


    세대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언약신학)의 다른점에 대해 설명한 정 박사는 "세대주의 신학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으로 이해했으며, 말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율법주의의 오류에 빠지게 만들었다"며 "약 130년에 이른 한국교회사 속에서 대부분의 교역자들과 부흥사들이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해 종말론을 가르치면서 세대주의 사상이 한국 교회 성도들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잡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율법이 무엇이며, 율법의 용도에 대해 설명한 정 박사는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행복을 위해 율법을 주셨다고 강조하면서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해 율법과 은혜를 나누는 것의 위험성과 이를 근거로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이단들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정 박사는 "율법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그들의 사랑을 표현하고,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서로의 관계를 관장하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고 언약적 관계 안에서 질서 있는 삶과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필수사항이다)"라고 피력했다.


    하지만 "이단 구원파는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친다"며 "일단 구원을 받으면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한국의 모든 정통 교단은 구원파를 율법폐기론자(도덕률폐기론자)로 규정한 것이다. 우리는 율법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이지, 그 교훈과 도덕률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여전히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정 박사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과 관계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은 은혜만이 우리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율법폐기론'이다.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은혜만 강조하고,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율법폐기론에 빠져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은혜는 공짜'라고 말하는 것이 한 예다. 은헤는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호의다. 따라서 우리는 흔히 은혜를 가리켜 공짜로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 정 박사는 "성경에 조건 없는 은혜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호의는 철저한 청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베풀어진 은혜에 대한 합당한 반응과 철저한 청산을 강조한다"고 역설했다.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도 이후 지속적으로 죄와 싸우며 선한 삶을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의 특징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를 싫어하고 되고, 죄에 대해 저항하게 되는 새로운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에게서는 죄와 투쟁하는 거룩한 삶의 새 질서가 시작된다.


    정 박사는 세대주의 종말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세대주의 종말론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미래의 어떤 시점(예수의 재림)에만 집착하도록 만듦으로써 현실의 삶을 등한시하게 만들었다"며 "1992년 10월 28일 휴거설을 주장했던 다미선교회나 현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은혜로교회는 소속 교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현실을 무시한 채, 강제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회개하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20세기 한국의 많은 부흥사들이 전했던 세대주의 전천년설은 성경을 벗어난 매우 불건전한 해석이다. 종말론과 관련된 이단들은 대부분 이 세대주의 전천년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공통적으로 7년 대환난, 휴거, 천년왕국, 144000, 666이라는 단어를 주요 사용한다"며 "예언적 교훈이나 종말에 대해 강박적 관심을 갖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피력했다.


    정 박사는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날과 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며 "지금 우리가 말세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말세의 징조인 미혹, 난리, 재난, 이단 등의 영향을 주의하면서 매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기고]세대주의와 이단

    http://www.theosnlogos.com/news/articleView.html?idxno=984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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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롭고 힘들 때 드리는 기도

                                        최송연

     

    주님,

    우리가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나쁜 사람이라

    오해 받았을 때

    우리는 무척 외롭고 힘이듭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며

    진실한 친구라 믿었던 그 사람이 

    우리를 배신하고

    떠났을 때

    우리는 무척 외롭고 힘이듭니다.

     

    우리가 낳았기에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우리의 자식들이

    우리를 떠나

    ~곳으로 가야만 할 때

    우리는 무척 외롭고 힘이듭니다.

     

    우리를 낳아주시고 사랑으로

    길러주신 부모님을

    죽음이 갈라 놓았을 때에

    우리는 무척 외롭고 힘이듭니다.

     

    주님,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로

    외롭고 힘이들 때에는

    낙심하지 않고

    다시 한 번 힘차게

    일어설 수 있는

    그런 용기를 주옵시고

     

    우리를 배신하며 떠난 야속한

    이들로 인해서

    외롭고 힘이들 때엔

    우리가 당신을 배신했을

    때에도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손 내밀어 주시던

    당신의 그 따뜻하신 사랑이

    기억나게 하옵시며

     

    이유없이 우리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외롭고 힘이들 때엔

    우리가 당신을 이유없이 아프게

    하였을 때에도

    나무라지 않으시고

    늘~감싸주시며 품어주시던

    그 넓고 따뜻하신 가슴이

    기억나게 하시사...

     

    우리도 우리에게 아픔을 준

    모든 사람들을 다시 한 번

    감싸며 품어줄 수 있는

    그런

    넓고 따뜻한 가슴을

    우리에게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출처: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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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약에서 율법의 성막에서 가장 거룩한 지성소 (Holy of Holy)로 들어가려면 상당히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1 번제단에서 제사를  지내고  2 물두덩을 지나서

    3 성소로 들어가면  4 금촛대와 전설병상이 있고

    분향단에서 제사를 지나고  6 휘장막을 지나야

    7 비로로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8 거기에는 언약궤가 있습니다.

    9 그 위가 하나님이 계시는 속죄소이고    10 거기에 다시 피를 뿌려야 합니다


    절차가 다소 복잡하기는 하지만 나름대로 법칙이 있고 제물만 준비가 되어있으면 보통 제사장은 성소까지 갈수도 있고 대제사장은 지성소까지도 갈수 있습니다.

     

    사실 하루 4-5시간 목이터지 도록 울고불고 찬양을 하고 감사를 해야  하나님의 거룩한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법칙만 따르면 됩니다.

     

    성막의 구조는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번제물이 되신예수님과 말씀으로 물같이 우리를 씻어주시는 예수님,

    빵과 와인은 성만찬식의 예수님이고 금촛대의 한가운데는 예수님입니다.

    금촛대에 비유되는 성령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휘장막은 예수님이 찢어주셨고언약궤에 위에 피는 예수님일 뿌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궤 (언약궤)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왜냐고요시편 119:11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마음에 두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율법을 마음속에 간직할수 있으신 분은 오직 예수님 한분입니다. 마치 언약궤안에 십계명이 있는것과 마친가지 입니다.

     

    그렇데 보면 우리가 한일이 하나도 없습니다이 성막을 통해서 예수님을 묵상하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 있습니다세째 하늘에 올라갈수 있습니다자꾸 묵상하면 어느새 나는 지성소에 들어와있고, 예수님의 피를 부리면 벌써 하나님의 우편에 예수님을 덧입어서 같이 있게 됩니다.

     

    다위의 장막

     

    그런데 이런 묵상을 계속하다 보면 한가지 특이한점을 발견하게 되는것입니다

    바로 다윗의 장막입니다.   아래 다윗을 장막을 보시면 모든 백성이 직접 언약궤를 보고 기뻐 경배할수 있었읍니다대제사장이 아니라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복잡한 성막의 구조물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직접봤다고 해서 죽은백성은 없었습니다어떻게 율법의 언약시대에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이 앞으로 은혜의 새언약의 시대가 오면 우리가 이렇게 아무거리낌 없이 하나님앞에 나갈수 있다는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

     

    은혜의 새언약시대에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

     

     

    은혜의 새언약의 시대에서는 하나님 앞에 나가는것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용서받기위해서 하나님 보좌앞에 나가는거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담대히 나갑니다.

    히브리서 4:16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Let us therefore come boldly unto the throne of grace, that we may obtain mercy, and find grace to help in time of need.

     

    하나님 아버지께 상을 받기위해 나갑니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But without faith it is impossible to please him: for he that cometh to God must believe that he is, and that he is a rewarder of them that diligently seek him.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안에서 우리를 오른편에 앉히십니다

    에베소서 1: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Which he wrought in Christ, when he raised him from the dead, and set him at his own right hand in the heavenly places,

     

    에베소서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And God raised us up with Christ and seated us with him in the heavenly realms in Christ Jesus,

      

    가장 좋은방법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수님을 덧입어 나가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이 원하시는것 즉 제물의 피를 가지고 하나님앞에 나갔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언약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것을 믿고 담대히 나가는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약속을 했듯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새언약을 믿고 아버지께 당당히 나가는 것입니다우리의 육신은 이땅을 밟으면서 살고 있지만 영은 거듭나서 예수님안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

    이것을 묵상하세요이것이 바로 세째하늘로 가는 가장 빠른길입니다.

     

    세째 하늘에 올라가셨다면 돌아온 탕자를 생각해 보세요 (누가복음 15:11-32)

    탕자가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가 정말 환영하고 살진소를 잡아서 잔치까지 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께 똑같은 것을 당당히 구하세요

    아버지 저도 안아주시고 입 맞추주세요, 좋은 옷도 입혀주시고 손에 반지도 끼워주시고  새신발을 신겨주시고 찬치도 벌여주세요. 아버지 저를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좋은것으로 제소원을 만족해 주셔서 감사해요(시편 103:5)”

    ………사랑해요! 




    출처: http://blog.daum.net/choo1567/51/Don Choo


    정동섭 교수

     

     

    [편집자 알림: 아래의 글의 저작권자는 '? 바른믿음'이다. 페이스북에서 옮겨 싣는다. 저작권자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글쓴이 정동섭은 신학자 권호덕, 스탠리 그렌츠, 피영민 등의 책을 참고하여 근래에 주목을 받고 있는 이 주제를 간명하게 간추려 소개한다.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하는 최근의 일부 종말론과 관련하여 참고할만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글의 내용은 <리포르만다>의 신학 견해와 다를 수도 있다.]

     

     

    이단들이 좋아하는 세대주의적 성경해석

    이스라엘과 교회, 율법과 은혜 분리하는 것이 큰 문제

     

    정동섭 목사 / 가족관계연구소 소장 (전 침신대 교수, Ph.D.)

     

    1. 세대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세대주의 신학은 영국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제교회(Separatist Plymouth Brethren) 지도자 달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영국 성공회가 부패했다면서, 교파를 떠나 형제운동을 시작하며 세대주의를 체계화한 사람이다. Darby의 지도하에 형제교회는 급성장했는데, 세대주의는 영국과 미국의 근본주의에 유입되면서 가시적인 기성교회의 제도와 충돌하였다.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편협한 노선을 주창하면서, 뉴톤(B.W. Newton)과 심한 논쟁 끝에 달비는 배타적 형제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영미에는 개방적인 형제교회Open Brethren도 있는데,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제교회다).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시스템에 따라서 신학이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루터와 칼빈이 가르친 개신교 ‘언약신학’에 기초한 ‘개혁주의 신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대주의 신학’이다. 세대(dispensation)는 세계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세대 속에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전개되는 것을 가리킨다.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 복음을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형제교회 창시자 달비와 성경주석자 스코필드는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구속적 계획을 마련하였다고 보았다. 세대주의에서는 성경 역사를 무죄(innocence)시대, 양심(conscience)시대, 인간통치(human government)시대, 약속(promise: Patriarchal Rule)시대, 율법(Law)시대, 은혜(grace)시대, 천년왕국(Kingdom: Millennium)시대 등 일곱 가지 시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셨다고 주장하였다. 세대주의 신학에 의하면, 각 시대마다 구원 얻는 방법이 다르다. 양심시대는 양심에 따라 살면 구원을 받고, 율법시대에는 율법을 따라 구원받는다는 식이다.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길을 주셨다는 교리였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킬 것을 언약하였지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주장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지금 성도들은 은혜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십계명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유일한 법칙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세대주의 종말론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는 율법폐기론(antinominianism)으로 이어졌고, 기독교의 윤리성은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오대양사건과 세월호사건을 일으킨 유병언의 구원파라 할 수 있다. 회개무용론을 가르치고 있는 또 다른 구원파의 교주 박옥수도 세대주의 신학을 따르는 돌파리 목사 중 하나다. 이 신학에 영향을 받은 많은 정통교회도 은혜를 누린다면서 율법을 무시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기독교의 큰 문제 중에 하나는 바로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한 것이다. 세대주의적 사고에 따라,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었고, 우리는 율법과 관계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만이 우리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율법폐기론이다. 세대주의 율법관과 종말론이 한국기독교를 망치고 있고, 많은 이단을 양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리교 사회학자 이원규 교수는 “한국교회는 교파분열이 심하고, 사이비 이단종파가 많으며, 품위 없는 성직자가 많다”고 지적하였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다. 물질주의로 나타나는 탐심과 성적 타락은 그 배후에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세대주의 신학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달비는 유럽과 뉴질랜드,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세대주의를 보급하였고 많은 사람을 형제교회(Brethrenism)로 회심시키려 시도하였다. 그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1883-1897에 연례적으로 열렸던 Niagara Bible Conference를 통해 전파되었다. 많은 침례교인과 감리교인, 그리고 장로교인들이 그의 신학적 전제를 수용하였지만 기존교단에 대한 비판으로 교단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정통교단을 떠나지는 않았다.

     

    1920년대 당시 자유주의가 성경적 가르침을 거부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세대주의자들과 프린스톤 칼빈주의자와 같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달비의 세대주의 신학을 수용하면서 그의 종말론은 미국 근본주의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C.I. Scofield Reference Bible은 50년 동안 3백만 부가 팔렸는데, 그 영향으로 Biola, Moody, Dallas, Grace와 같은 신학교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 종말론을 가르쳤다.

     

    달비는 개신교 교리의 핵심이 되는 두 가지를 부인하였다. ⑴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의인이 된다는 ‘전가설’, 즉 이신칭의의 교리를 부인하였다.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놀라운 교환’(wonderful exchange)이 일어나는데, 우리가 가진 죄를 예수님께 드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를 주신다는 교리이다. 신학자들은 이 교환을 전가(imputation)라고 부른다. ⑵성도의 성화과정에 필요한 십계명의 규범적 기능을 부인하였다. 칼빈이 말한 ‘율법의 제3용도’를 부인하였다. 결국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세대주의 종말론과 근본주의신학을 바탕으로 사역하였다. 결국 십계명을 무시하는 도덕률폐기론, 즉 율법폐기론이 만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신학의 극단적 열매가 구원파의 회개무용론, 도덕률폐기론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한국의 개신교는 세대주의 신학의 지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세대주의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이스라엘과 교회, 그리고 율법과 복음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였다. 점진적 계시와 관련하여, 한 세대는 하나님의 경륜 안의 한 단계다. 1960년대 초부터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으로 회개없는 잘못된 구원과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며 나타난 이단은 다미선교회나 구원파만이 아니다. 지방교회의 사상적 뿌리도 세대주의다. 기존교회 안에서도 특히 극단적 세대주의 신학(ultradispensationalism)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 이스라엘이 독립하던 해 1948년으로부터 한 세대되는 1988년 전후에 예수가 재림하고 신자들은 휴거된다고 가르치던 대형교회 목사들이 있었다.
     

    2. 세대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언약신학)은 어떻게 다른가?

     

    세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어떤 특별한 계시에 순종하는 것과 관련해 인간이 시험받는 기간”이다. 세대주의는 구약은 율법시대, 신약은 은혜시대로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세대의 수: 바울은 적어도 세 개의 세대를 언급한다. 현재 이전의 세대(골 1:25-26), 현 세대(엡 3:2), 그리고 장래 세대(엡 1:10). 이 세 세대는 네 번째 세대를 요구하는데, 율법 이전 세대다. 그리고 율법 이전 세대는 다시 두 개로 분류되는데, 타락 이전과 타락 이후로 구분된다. 성경의 전천년설적 이해의 관점에서는 적어도 다섯 세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7세대는 노아홍수 이후의 한 세대와 아브라함의 부름을 계기로 한 또 한 세대를 상정하고 있다.

     

    세대주의신학은 문자적 해석원리를 따른다. 이 해석원리를 적용하다보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구분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약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오순절 날 시작된 것으로 본다.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등도 구원받은 사람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여 가르쳤다. 그러나 성도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해방된 것이지 율법의 도덕적 교훈에서 자유하게 되었다, 즉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세대주의 신학의 맹점이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외면하고 은혜만을 강조하다 보니, 유병언과 구원파 교인들의 삶에서 보듯이, 양심의 가책이 없이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속여서 빼앗고 탐내고 살인을 저지르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새대주의의 우산 아래서 수 많은 이단이 독버섯처럼 생겨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세대주의를 이단이라 할 수는 없지만 유사기독교의 나쁜 신학이 틀림없다.

     

    언약신학: 하나님은 행위언약에 실패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을 준비해 주셨다. 은혜언약의 핵심내용은 누구든지 자기의 노력이나, 자기의 선이나, 자기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 영생을 소유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은혜언약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영생과 부활의 축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고 노아와 언약을 맺고 최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을 맺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이삭, 야곱과 모세, 다윗과 언약을 맺고 점진적으로 그 뜻을 계시하셨는데, 모든 언약에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의 후손’, ‘야곱의 후손’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단수 ‘자손’(seed)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수로 적혀 있는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결국 이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영생의 복을 얻게 되리라는 은혜언약에 대한 점진적 계시이다.

     

    구약시대에는 그림자와 예표를 통해 구원을 받았지만, 신약시대에는 실체를 보고 믿고 구원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약시대에는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그림자였고 예표였지만, 시 언약은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주신다는 그림자를 폐한 언약이다(피영민, 2015).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은 다른 법이 아니다. 신약과 구약에는 연속성이 있다. 각 법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그리고 두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종용하는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법을 더 심화시켰을 뿐이다.

     

    개혁신학(Reformed Tradition)은 멜랑히톤, 루터, 칼빈과 쭈빙글리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모세의 법에는 도덕적이고, 의식적이며, 시민적 측면이 있는데, 도덕법에는 ①시민적, ②영적, ③규범적 3가지 용도가 있는 것으로 본다. 언약신학은 타락 이후 하나님은 하나의 은혜 언약 아래 역사하신 것으로 본다. 통일된 특징은 은혜의 언약이며 그 언약 아래 있는 구원적 계획이 있다. 구약에서는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것으로 구약의 언약은 기대적 성격이 있고, 신약에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성취된 구원으로 그 언약의 성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세대주의 신학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으로 이해했다. 율법의 세 가지 용도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면서 이단집단과의 논쟁을 하면서 정리된 것이다. 교회역사를 보면, ‘율법’(말씀)과 ‘성령’, 그리고 ‘나’ 사이에 세 가지 역학적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⑴말씀을 무시하고 성령의 역사만 강조하는 경우; ⑵말씀은 강조하는데 성령의 역사를 무시되는 경우; 그리고 ⑶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는 경우이다. 첫째는 율법을 배격하고 성령의 직통계시만을 강조하는 율법폐기론자의 경우로 율법을 폐하고 마음대로 살려던 이원론에 빠진 영지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 한국에는 성령 사역의 이름으로 다락방 운동(가계저주론, 조상 죄), 신사도운동(제3의 물결과 같은 현상적인 집회), 알파코스와 은사남용, G-12와 견고한 진, 쓴 뿌리, Soul Tie), 귀신론에 기초한 내적치유 운동이 행해지고 있으나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이단들 가운데 김기동 베뢰아 운동, 변승우의 큰믿음교회 등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둘째는 말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로서 율법주의 오류에 빠진 이들이다. 율법주의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이런 율법주의자의 문제점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한 다음 자기 의(義) 사상에 빠지는 데 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율법을 지키려는 왜곡된 보수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말씀을 따라 생활하려는 노력이 강조되는 것에 비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는 배제되는 성향이 있다. 세 번째는 받은 바 이신득의의 은혜에 감사해서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에 따라 생활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있다.

     

    약 130년에 이른 한국교회사 속에서 대부분의 교역자들과 부흥사들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종말론을 가르쳤는데, 매우 극적인 내용들 때문에 듣는 자들은 쉽게 거기에 빠져들어갔다. 예수의 재림을 왜곡되게 가르치는 이단집단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에 뼈대를 둔 것은 그 매혹적인 극적인 정황 설명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세대주의 사상은 한국교인들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권호덕). 세대주의 사상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무천년 왕국설이 본격적으로 우라나라에 소개되면서부터이다.
     

    3. 율법이란 무엇인가?

     

    존 파인버그(John Feinberg)에 의하면,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신 “삶의 규칙(rule of life),” 순종하고 지켜야 하는 계명들(commandments)이다. 율법은 넒은 의미로 성경전체, 중간적 의미로 모세 오경, 좁은 의미로 십계명을 가리킨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인 십계명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은 두 돌비에 새겨졌다. 첫 번째 돌비에는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 나와 있고, 두 번째 돌비에는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 나와 있다. 전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대신(對神)관계가 기록돼 있고, 두 번째 돌비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대인(對人)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율법의 기원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억압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참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지침서, 즉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백성에게 영속적 관계를 위해서 항상 율법을 주신다. 율법에는 제사법적(ceremonial) 차원과 시민법적(civil) 차원, 그리고 도덕법적(moral) 차원이 있다. 세 차원은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레위기는 주로 제사법(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을 다루고, 신명기는 도덕법을 기록하고 있다. 의식적인 제사법은 금식과 침례(세례), 할례, 유월절, 정결법, 십일조 등과 관계되는 것이고, 시민법은 소송문제, 안식일, 결혼, 노동과 같은 신자들의 국가에 대한 책임을 다룬다. 도덕법은 안식일을 제외한 십계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것으로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운 것이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나 언제든지 타당하게 적용되는 영구불변의 항존법(standing law)이다. 제사의식법은 신약시대에 적용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영원한 희생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신약시대라 해서 십계명이 폐해진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세대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신약에 와서 도덕법은 더욱 굳게 세워지고 있다(마 5:19; 롬 3:31). 신약에서 율법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한 데 묶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순종하고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구원파는 성경과는 너누 거리가 먼, 매우 위험한 율법이해를 하고 있다. 율법을 너무나 좁게 이해하고 있다. 율법을 설명할 때, 성령과 인간 사이의 역학적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성화를 위해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율법은 어떤 기능을 하며, 어떤 가치가 있는가? 율법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까다로운 조건이 아니다. 율법은 우리를 살리고, 교육시키며, 마음을 정화시키고,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며,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피영민, 2008).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따르면, 비신자는 율법을 순종하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인해 저주 아래 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은혜에 의한 구원에 감사드릴 길을 마련해주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보여줄 기본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성령은 또한 율법을 통해 죄를 책망하시며 회개케 하신다. 모세의 율법의 규범적이고 일차적인 용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다. 거룩한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법의 근간이 된다.

     

    출애굽기에서는 십계명을 계속 ‘증거판’(Testimony)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대한 계시다. 따라서 이 뜻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거역하면 진노하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드러난 것이다. 다음의 ‘율법의 3가지 용도’는 멜랑히톤,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가들의 이신칭의(이신득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율법의 3가지 용도: 하나님은 어떤 목적으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는가? 첫째로 율법의 용도 가운데는 악을 제어하는 시민적 용도(civil function)가 있는데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율법은 자기를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10가지 계명 중 8가지가 “하지 말라”는 부정적 명령의 형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십계명은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재갈과 같다”고 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것과 인간이 선하지 않다는 것, 인간은 저주와 정죄를 받기에 마땅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하는 데 율법의 목적이 있다. 우리는 율법에서 저주와 정죄 소리만 듣는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여Td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인간은 구원파에서는 율법의 죄를 인식하고 깨닫게 하는 기능만을 주로 강조하고 있다.

     

    둘째는 신학적, 영적 용도(spiritual function)로서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용도로서, 율법은 죄를 책망하고 예수를 찾도록 하는 몽학(蒙學)선생의 기능을 한다. 율법은 절망에 빠진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도록 만들기 위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엄격한 교사(몽학선생)인 것이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셋째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세 번째 규범적 용도(normative function)가 있는데, 누구든지 중생하면 율법을 지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을 수 있도록 기능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중생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죄인은 회개한 후에도 여전히 죄인이고 또 죄인으로 남는다. 율법은 칭의함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토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율법의 제3용도는 중생자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이다. 중생한 후에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이 성령은 성화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특별히 십계명을 판단의 잣대로 이용한다.

     

    성경은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하다(롬 7:12, 14)고 말하고, 율법을 ”하나님의 법“(롬 7:22, 25)이라고 부르고 있다.
     

    4. 성도의 행복을 위해 주신 율법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언하고 있다: “내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율법은 원래 구원받은 선민을 괴롭히고 억압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명령과 규례를 지키면 우리는 행복해진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참으로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율법폐기론이나 불순종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은혜와 사랑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삶이 따르게 되어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서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히브리서 저자는 구원받은 성도는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히 12:1-3).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죄와 악이다. 이 세상에 있는 악의 세력의 근원은 마귀이고 내 안에 있는 악은 바로 죄성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세력, 즉 밖에서 성도를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세력과 안에서 거룩과 경건을 방해하고 성령의 소욕을 방해하는 죄성, 이 두 가지 세력과 싸우는 가운데 성화를 이뤄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그들의 사랑을 표현하고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서로의 관계를 관장하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고 언약적 관계 안에서 질서 있는 삶과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런데 이단 구원파는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기존교회에서 하는 것은 종교요, 자기들이 전하는 것은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구원을 받으면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정통교단은 구원파를 율법폐기론자(도덕률폐기론자들)로 규정한 것이다. 우리는 율법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이지, 그 교훈과 도덕률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다. 바울은 사랑으로 율법의 구체적 계명을 준수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엡 6:2).

     

    권신찬은 로마서 7장의 남편과 아내로 비유된 율법과 성도의 관계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으니”의 내용을 들어,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주일성수, 십일조, 금식, 새벽기도, 기도생활까지도 율법이라고 하여 이러한 규범에 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과거에 장로교 목사로서 이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으려 노력했던 것이 소용이 없었음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는 이제 자기를 괴롭혔던 무서운 폭군인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게 되었다면서 은혜를 누리면서 자유롭게 살자는 무서운 자기복음을 만들었다(종교에서의 해방, p.43).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하니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는 무엇으로 죄인지 알 수 있겠는가? 알 필요도 없는가. 아니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고 할 것인가? 도둑질, 간음, 부모거역, 탐심, 살인 등의 죄를 무엇으로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구태여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성경에서 율법이 폐해졌다고 말씀할 때는 그 율법이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해당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모든 율법과 법도 즉 모세의 율법은 십자가로 폐한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할례나 제사제도나 절기 등의 제사법이나 시민법에 관련된 율법이 폐해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규례를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신자는 율법에서 자유하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서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바울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임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선언하고 있다(갈 3:11-13).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신자는 율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신자는 자신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데 깊은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 시내산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고 소개하신 후에, 즉 죄의 굴레에서 속량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자 이제 너에게 보여준 자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시편 1편은 복있는 사람은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하고, 시편 19편에서는 율법의 완전함을 노래하며, 119편에 와서는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35절)고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형벌과 저주에서 구원한 것이지 율법의 교훈과 윤리적 규범에서마저 해방시킨 것이 아니다. 모세 율법의 일부분인 도덕적인 윤리규범은 신약에 와서 다시 강조된다. 도덕적 율법은 폐한 것이 아니라 새 계명으로 주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구원받은 성도가 율법(계명)을 지킬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고 말씀하신 후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절)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사단은 인생의 목적이 죄를 안 지으려 피 흘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인생의 목적이 죄를 안 지으려 피 흘려 노력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지 않고 율법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경험해서 죄를 안 짓게 되길 원하신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원치 않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게 정상이다. 친밀하게 사랑하는 관계가 이루어지면, 율법과 죄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다(윤동일, 2008).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노력이 율법의 반역을 초래하였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할 뿐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율법에 순종하여 의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경은 율법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선언한다(롬 7:12).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이 선한 것인 줄 안다고 말했다(딤전 1:8).
     

    5. 율법과 은혜의 관계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이다. 십계명을 주신 시기는 출애굽 후, 즉 구원받은 후이다. 율법은 구원받은 백성의 삶의 지침서이다. 은혜가 감사해서 주를 위해 율법을 지키며 생활하는 것이다. 최고의 경건은 계명 준수를 즐기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순종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불순종으로부터의 자유다.” 율법을 무시하고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유도하는 종교는 하등종교, 사이비종교가 분명하다.

     

    율법과 은혜. “한국기독교의 큰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었고, 우리는 율법과 관계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만이 우리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율법폐기론’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이 한국기독교를 망쳐놓은 원인 중 하나다...하나님의 십계명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고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한국의 기독교는 은혜만 강조했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율법폐기론에 빠졌기 때문이다. 모세 언약의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은혜 언약으로 가는 예표요, 단계다”(피영민, 2007).

     

    성경에는 아브라함 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 등 많은 언약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다. 그것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언약이 여러 가지 언약들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는 “약속의 언약들”(Covenants of the Promise)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약속은 단수로 되어 있고 언약은 복수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한 가지를 이루는 여러 가지 언약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가르침(언약)이나 나의 가르침은 동일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준 언약과 모세언약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으로 볼 수 없다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

     

    율법은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하신 백성들에게 삶의 원리가 된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따라가야 할 삶의 원리이며 규칙이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모세언약은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삶의 원리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마음에 두고 십계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항상 거룩하고 완전한 계명을 늘 기준으로 삼아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고,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자복함으로써 죄씻음을 받고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은혜가 공짜라고?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호의이다. 우리는 흔히 은혜는 공짜로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조건 없는 은혜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호의는 철저한 청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씨뿌림은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목적으로 하는 투자다(마 13:1-7). 베풀어진 은혜에 대한 합당하 반응과 철저한 청산이 강조된다. 은혜는 자격이라곤 전혀 없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적인 투자다.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는 우리 속담은 성경의 은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관계중심적인 체면사회에서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는, 거저 주어지는 공짜 선물이란 개념의 은혜는 없다. 선물은 자발적인 순환을 요구한다. 선물(은혜)을 받은 사람은 자발적인 고마움과 부채의식을 갖게 된다. 은혜의 조건은 먼저 우리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고(엡 2:9), 다음 조건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10절). 신약성경은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니까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충성스런 삶을 요구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투자이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자는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이민규, 2014).

     

    갈라디아서는 신실함과 순종의 삶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갈 5:16).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갈 5:21).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도 이후 지속적으로 죄와 싸우며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받은 신자의 특징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를 싫어하게 되고, 죄에 대해서 저항하게 되는 새로운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에게서는 죄와 투쟁하는 거룩한 삶의 새 질서가 시작된다. 존 웨슬리가 가르친 것처럼 ‘완전성화’란 신자의 삶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그 어떤 위대한 그리스도인도 완전하게 자신의 죄를 정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전처럼 죄를 즐거워하거나, 무방비 상태로 죄에 끌려가거나,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즐기고 사랑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시면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요 16:8).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알려져 있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처럼 크게 오해되고 있는 말씀도 드물다.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과 상관이 없다거나 율법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읽을 필요도,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과 그 도덕적 요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도덕률폐기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율법에 작별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더 이상 구원의 수단으로 율법 아래 있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존귀히 여겨야 할 것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를 행해야 한다“(로마서 7장 강해, p.27). 회개와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신자는 그 결과로 삶 가운데 선한 행위를 보이게 되어 있다. 우리의 선행은 우리를 의롭게 해주지 못한다. 우리의 선행은 어디까지나 이미 우리를 새롭게 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행위다. 선한 일에는 거창한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중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가 ‘내 것!’이라고 선포하시지 않은 영역은 단 하나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세속적인 일’과 ‘신성한 일’(거룩한 일)이 따로 있지 않다. 마틴 루터도, 교회에서 하는 일만이 아니라 설거지와 빨래하기, 낙엽치우기, 기저귀 갈기도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5.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들: 예수님의 재림과 세대주의 종말론

     

    사도 요한이 본 천년왕국 비전에 대한 정확한 해석문제는(계 20:1-10) 2세기 이래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은 흥분과 논란을 일으켜왔다. 그 과정에서 세 가지 기본적 입장이 확고해졌다. 그 세 가지 입장은 각각 재림이후에 천년왕국이 온다는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천년왕국 후에 재림이 있다는 ‘후천년설,’(postmillennianism) 그리고 재림 이전이나 이후나 천년왕국이 없다는 ‘무천년설’(amillennialism)이다.

     

    각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에 대하여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전천년설이 대세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만, 현재는 천년왕국의 천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보는 무천년설을 추종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천 년을 지금 천국에서 이뤄지는 죽은 성도들의 통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전쟁과 기근, 지진과 같은 징조가 있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며, 배도와 함께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고 7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대환란과 천년왕국을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 장으로서 본다. 교회시대의 정점은 휴거이며,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실한 제자들은 ‘공중에서’ 만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여실 것이다. 이렇게 참된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지면, 적그리스도가 7년 동안 악마적 통치를 시작하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땅위에 쏟아진다. 이러한 대환란 기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이 와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의 군대와 함께 재림하셔서 주님의 원수를 모두 처부순다. 그 때 이스라엘은 비로소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것이며,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기독인들로 하여금 미래의 어떤 시점(예수의 재림시점)에만 집착하도록 만듦으로서 현실의 삶을 등한시하도록 만들었다. 1992년 10. 28. 휴거설을 주창했던 다미선교회나 현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은혜로교회는 소속교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현실을 무시한 채, 강제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회개하게 만들었다.

     

    연대기적 해석을 하게 된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시키고,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 개념으로 분리시켰다. 율법은 모세와 행위와 연관된 반면, 은혜는 그리스도와 믿음에 연관되어 이해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은 결코 구원이나 칭의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스코필드(Scofield)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을 칭의하지도 않고 신자를 성화시키지도 않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세대주의 성향은 영적인 것과 실제적인 삶을 분리시킨다. 이런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등한시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환상적인 이상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미래의 어떤 유토피아나 지상천국을 약속한 이단종파에 미혹되어 현실의 삶을 망친 경우를 많이 목격하고 있다.

     

    무천년설에서는 천 년을 문자 그대로 볼 수 없고 완전수인 10을 세 번 곱한 충만 수로 봐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천년왕국의 천 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본다. 천 년이란 교회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승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칼빈과 어거스틴도 이 입장을 취했다. 천년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모두 구원하시는 충만한 기간을 천 년으로 보는 것이다. 천 년은 단지 택한 백성을 전부 구원할만한 충분한 기간이다.

     

    20세기 한국의 많은 부흥사들이 전했던 세대주의전천년설은 성경을 벗어난 매우 불건전한 해석이다(피영민). 종말론과 관련된 이단들은 대부분 이 세대주의전천년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공통적으로 7년 대환난, 휴거, 천년왕국, 144000, 666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종말에 대해 강박적 관심을 갖고 있는 구원파와 같은 집단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관심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현재의 세계정세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차츰 이 주제에 마음을 빼앗겨 정복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예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설교도 하지 않는다. 이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몰두 이상으로 영혼의 건강에 위험한 것은 없다. 러시아, 이집트, 이스라엘 및 그 밖의 나라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에스겔서 37,38장이나 다니엘서 7-12장 그밖의 예언적 관점에서 여러 시기나 경우를 계산하는 데 모든 시간을 소비하며 전생애를 투입하게 되기가 쉽다. 한편 영적 의미에서는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점점 무관심하고 등한히 될 수 있다. 물론 예언적 교훈은 성경의 중요한 일부이고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래 세계에서 일어날 사건들에 너무 관심을 가지는 나머지 우리가 지금 살아야 하는 생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들의 일차적인 위험은 균형이나 조화의 감각을 상실하는 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나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14:36).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 13). “때와 기한은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 7). 우리는 복된 소망을 갖고 현실에 더욱 더 충실하고 주어진 사명을 더 충실히 감당하며 충성하고 봉사할 때 약속된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날과 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이다(마 24:36; 벧후 3:11,12).

     

    우리는 특별한 ‘종말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마지막 때로서,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기 직전의 시기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선견자 요한처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우리가 지금 요한계시록에서 경고하는 말세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말세에는 네 가지 징조가 있다: ①사람의 징조 “미혹”이다(마 24:4); ②환란의 징조 “난리”이다(마 24:6); ③자연의 징조 “재난”이다(마 24: 7-8); ④종교적 징조 “이단”이다(마 24: 11, 23-24). 우리 모두는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을 준비를 갖춰야 한다.

     

    우리는 재림이 가까워진다는 핑계로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살전 4:11). 성도들은 재림하시는 주를 맞아 영접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불신자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 시간과 시기에 대해 성도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매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참고서적

     

    권호덕.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그 사회적 적용]. 그리심, 2003.
    김민규. [신앙, 그 오해와 진실]. 새물결플러스, 2014.
    스탠리 그렌츠. [누구나 쉽게 배우는 신학]. CUP, 2000.
    이인규. [평신도들이 혼동하기 쉬운 성경 50]. 카리스, 2014.
    피영민. [신약개론]. 검과흙손, 2015.
    Walter Elwell.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Baker Book House, 1984.

    정동섭 cantoncrc@gmail.com

     

    출처: 최덕성 교수님의 리포르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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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양과 노래로 풀어보는 우리
    부부 인생사

    1 결혼전 사귈때 남편 왈
    영숙씨 저는 결혼해도 신학 할께예요
    그래도 반대하지말고 결혼해요
    o k♥♥ 그때 부른 찬양곡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2 결혼후 남편 신학한다 그러나 난
    결사 반대 농성 침묵하며 부른 노래
    울고 싶어라 울고 싶어라 이 마음
    사랑도 가고 ~~ 믿음도 가고 없구나

    3 성격 차이로 심한 고민 끝에 부른 노래
    우리 부부는 빙글빙글 돌고 저 세월속에
    ~~멀어져간 우리 두사람 ( 나미 노래 )

    4 신학의 길 보내 드릴께요 결혼전
    약속 저버리고 광야길 걸으며 사방이
    암흑의 잿빛 변하여 부른 찬양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 서지 않겠네~~~

    5 마흔 넘어 두손들고 들어간 신학대학교
    등록금 없다 막막하다 찬양곡
    어디가 길이요 어디가 진리요

    6 신학대학 2 학년때 자퇴 하겠다
    5번 전화 등록금 태산같은 걱정
    나의 단호한 찬양곡
    이 믿음 더욱 굳세라 주가 지켜주신다
    그리고

    남자가 칼을 빼었으면 무우라도
    잘라야죠
    결의문 낭독 전함

    7 대학교 2학년 부터 대학원 2년 동안
    5년간 등록금도 보내주시고 생활비도
    보내주셨다
    찬양곡

    세상 사람 날 부려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사람 부럽지 않아

    8 대학원 졸업후 첫 사역지
    강화마리산 기도원
    전국에서 기 젤 센곳
    전국 무당과 잡신과 영적 전쟁
    찬송가

    우리들의 싸울것은 혈기 아니요
    우리들의 싸울것은 육체 아니요
    마귀권세 싸워 이겨~

    9 기도원 훈련 5년
    현제 강화 북쪽 사역지
    수문을 열어 주겠다 음성듣고 옮긴후
    부른 찬양곡

    할렐 루야 할렐루야~~
    좋은일이 있으리라 많이 있으리라~~

    10 현제 3년 후
    고백의 찬양
    아~~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수 없도다

    이상 우리 부부의 파란 만장 인생길
    입니다
    전도서가 말씀이 생각 나네요
    모든것은 때와 기한이 있다는

    여러분 사모님들의
    인생 드라마는 어떠신지요
    참 구비구비 돌고 돌아서
    여기까지 왔네요 ㅋ ㅋ

     

     

    출처: 사모님사모님/구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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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받는 사모 수칙 10훈(訓)

    부제: 내가 눈물로 터득한 노하우/ 최송연 

     

             

    1. 기도를 게을리 마라.
    기도를 많이 하는 사모가 섬기는 교회는 언제나 부흥한다.
    그것은 어떤 역경이 와도 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담대한 힘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을 받기 때문이다.

     

    2. 말씀을 많이 읽어라.
    성도들은 목사님뿐만 아니라 사모도 성경 박사이기를 원한다.
    평소에 꾸준히 읽어두면 갑작스러운 질문에도 당황하지 않고
    차분히 설명해 줄 수가 있다.

     

    3. 좋은 어머니가 되라.
    문제 부모가 문제아를 낳는다는 말은 목회자 가정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님을 알라.
    비뚤어진 자녀가 있는 목회자 가정은 모두는 아니지만
    대개 그 부모의 신앙인격이 이중성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지 않고 부모, 특히, 집에서 어머니가 올바른 신앙관점으로
    자녀를 훈계로 양육하면 절대로 빗나가지 않는다.
    설사 잠시 빗나간다 해도 다시 되돌아 온다.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이다.

     

    4. 목사님을 잘 내조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임을 명심하라.

     목사직은 영적인 일로서 우리의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책이다.
     따라서 사모가 그의 건강 관리도 잘 해주어야 하지만 때로는 그의 애인도 되어주고
     (사탄이 틈타지 못하게) 때로는 친구도 되어 주어야 하며 때로는 야당이 되어
     비뚤어진 길을 가지 못하게 따끔한 충고도 서슴지 않고 해 줄 수가 있어야 한다.

     

    5. 교회 일에 간섭하지 마라.
    헌신이란 이유로, 개척교회란 이유로 사모가 교회 안에서 동분서주하는데
    그것은 성도들을 길러내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재능이 많은가? (피아노 혹은 꽃꽂이) 내가 직접 하려 하지 말고
    조금 부족해도 성도들 중에서 그 일을 하게 하라. 그것도 안 되면
    가능성이 있는 성도를 택해서 무료 개인지도를 시켜서라도 그들이 하게 하라.
    일꾼이 없는가? 그래도 사모는 앉아 있으라 그러면 주께서
    적재적소에 적당한 일꾼을 보내심을 깨닫고 놀랄 것이다.

     

    6. 돈을 사랑하지 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고
    그 어떤 명분으로도 투기성 투자는 사모가 할 일이 아니다.

    7. 매력적인 사람이 되라.
    굳이 사모가 아니더라도 너무나 화장이 짙거나 사치스러우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하물며 사모이랴. 또 너무나 남루하게 하고 다녀도 궁상맞아 역시 보기에 좋지가 않다.
    외모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단정히 하고 무엇보다 속 사람( Inner person)을 강건히 하라.
    지식과 교양 그리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눔으로 잘 다듬어지면
    반드시 ‘고운 우리 사모님’이란 칭호와 함께 여자 성도들의 사랑과 신망을 받게 된다.

     

    8. 지식과 정보에도 뒤떨어지지 않도록 노력하라.
    많은 교양서적 들을 읽고 가능하다면 적어도 한 가지 외국어 정도는 능통하도록 노력하라.
    특히 이민목회자의 가족이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면 성도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되면 존경보다는 멸시가 뒤따르게 된다.

     

    9. 구제에 힘쓰라.
    구제를 많이 하되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그리하면 주께서 후히 갚아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10. 사람의 영혼을 사랑하라.
    여자 성도들의 매서운 입씨름에 말려들지 않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는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면 원수까지라도 용서해 줄 수가 있다.

     

     사모가 가장 참기 어려운 때가 바로 누명을 쓰거나
    억울한 말을 (대개 상처가 많은 사람이 사모에게 상처를 주려고 만들어 내는 말들로서
     신빙성이 없는 소리들이다.)들었을 때 자기의 결백함을 하소연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때가 바로 사탄에게 칼을 넘겨 주게 되는 때임을 깨닫고 결코 분노하거나
    또는 말질하는 사람들에게 하소연이란 명분으로라도 말을 쏟아 놓아서는 안 된다.


    잠잠히 주님만 바라고 참고 있노라면 반드시 주께서 일어나 도와주신다.
    그렇게 되면 시험의 물결은 곧 잠재워지게 되고 오히려 그런 사모가 신뢰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지 못하면 억울하고 분한 소리를 액면 그대로 받게 되고
    그때 자신이나 목사님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교회가 크나큰 상처를 입게 된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계2장10절 하반절 말씀)

                                                                                                                                                           
    글: 최송연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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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에서 나무하는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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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ys in uniform, Pai Chai High School, Seoul ( 배재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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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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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Street and Hous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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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매하기위해진열해놓은땔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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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굽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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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y's Middle School, Kongju or Kon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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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ast Gate Church,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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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ank and Trolley Car, Se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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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Street of H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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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ridges and Trains,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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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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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Funeral장례행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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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omen Washing at St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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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irls of Ewa Haktang Girls' High School 이화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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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ew of Pyeng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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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oung Trees, K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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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 Moore and Pas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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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strict Bible 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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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s in a 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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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Sunday School Cla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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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ering A Vill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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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Village Thatched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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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led City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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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ill at Pai Chai School,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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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emical Laboratory, 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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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all Memorial Hospital, Pyeng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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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Undergoing Medical Exam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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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racters" Facing Japanese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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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urch and Congregation, Won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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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v. Wilber C. Swearer and Itinerating Outf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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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ailroad Train i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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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eparing Rice Fiel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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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ak San Mountain and Val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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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aded Bull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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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laying Ch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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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ine-Man Sho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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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ater Carr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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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Laund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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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orean Mour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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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untry Wayside Sh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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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vil Pos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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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뚝처럼 솟아 오른바위 위에 대형 성조기를 꽂아 놓은 산이 있다.

                바로 노스캐롤라이나의 ‘침니 락 파크’다.

                빌트모어성에서는 40분거리, 노스캐롤라이나 ‘애쉬빌’에서는 동남쪽 25마일 지점에 위치해 있다.

                 

                침니 락은 바위속에 있는 엘레베이터를 타고26층 높이의 꼭대기 까지 올라가야 한다.

                바위를 뚫고 바위속에 엘리베이터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면 기념품가게와 함께 ‘스카이 라운지 카페’가 나온다.

                밖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어 식사를 하며 자연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많다.

                카페를 지나 나무다리를 건너면 침니 락으로 올라가는 나무계단이 오른쪽에 나온다.

                침니 락 정상에서 바라보는 산아래의 풍경은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사진촬영도 하고 자연을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침니 락 전체를 카메라에 담으려면 침니 락 뒤에 있는 전망대까지 올라 가야 한다.

                나무와 철재로 만들어진 전망대는 침리 락을 내려와, 뒤에 있는 계단을 따라 위로 올라가면 된다.

                 

                전망대에서는 침니 락은 물론 산아래의 모든 풍경을 한눈에 조명한다.

                침니 락을 선전하는(펄럭이는 성조기의 침니 락)사진이 모두 이곳에서 촬영한 것이다.

                니들스 아이(Needle Eye), 오페라 박스( Opera Box), 데블스 헤드(Devil’s Head)도 모두 이곳을 통해 있다.

                 

                오페라 박스는 오페라를 감상하는 박스와 비슷하게 생겼다 해서 생긴 이름이다.

                실제로 의자에 앉아 보면 오페라 박스에 앉은 듯한 기분을 느낀다.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못생긴 바위가 하나 보인다. 악마의 얼굴처럼 생긴 ‘데블스 헤드’다.

                 

                침니 락 파크에는 6개의 아름다운 트레일이 있다.

                특히Cliff Trail이나Hickory Nut Falls Trail은 자연경관이 뛰어나 시간이 허락한다면 방문하는 것이 좋다.

                 

                *Hickory Nut Falls Trail: 3/4마일을 가면 시원한 ‘힉코리 넛 폭포’(Hickory Nut Falls)가 등장한다.

                 

                *Skyline Cliff Trail Loop: 침니 락 뒤에서 부터 시작하는데 산위에서 부터 점점 내려가 결국 Cliff Trail 과 만나게 된다.

                 

                *Cliff Trail: 무성한 숲과 절벽을 타고 올라 가는데 자연경관이 뛰어나다.

                  1992년 영화 ‘모히칸족의 최후’(The Last of the Mohicans)의 유명한 마지막 장면을 이곳에서 촬영했다.

                  Outcroppings Trail 로 들어가면 Cliff Trail 로 연결된다.

                 

                *Four seasons Trail: 야생 들꽃이 많고 사슴과 야생 칠면조도 볼 수 있다. 입구 오른쪽으로 들어간다. 0.6마일.

                 

                *Outcroppings Trail: 애완동물을 데리고 갈 수 있는 트레일로 경관이 아름답다.

                 

                *Great Woodland Adventure: 나무로 깍은 동물들이 많아 어린아이들에게 좋은 트레일이다.

                  입구에 있는 Picnic Area에서 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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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니 ‘Chimney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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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니 락이 앞에 보이고 뒤에 철재로 만들어진 전망대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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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차장에서 바라본 침니 . 바위속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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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조기가 펄럭이는 침니 정상 위로 두마리가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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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니 락으로 오르는 계단. ‘Stairway to Chimney 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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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에서는 기념사진도 찍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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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니 락에 펄럭이는 성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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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니 정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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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니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아래의 풍경은 한폭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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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위 중간에 오페라박스(사람들이 서있는 )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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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페라박스에서 바라본 침니 락과 산아래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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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페라박스에서 바라본 침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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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블스 헤드(Devil’s Head).



                 물두덩  (Laver)

                 



                 

                 

                구리()로 만든 큰 물통입니다

                회막안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깨끗이 씻습니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갈때는 계속해서 성경말씀을 읽습니다

                (이해를 하던 못하던 그 말씀으로 세상에 먼지를 씻습니다)

                 

                에베소서 5: 26

                이는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요한복음 13:8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닦아 주셨습니다

                5: 이에 대야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 없느니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나아만 장군은 물로 씻어서 나았습니다

                요단강에 7번 씻어 나았습니다

                처음 2-3번 물에 씻을때는 괭장히 의심이 나고 기분도 나빴을 것입니다

                하지만 4번이 넘어가면서 이미 몸이 다 젖어서 그는 아마도 모두 포기하고

                그냥 몸을 푹 담궜을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때 약속의 말씀을 붙잡을때

                완전히 우리몸에 젖어서 푹 담구게 됩니다.

                 

                이해도 못하는 말씀을 계속 읽어서 뭐해요?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묻었더 먼지를 깨끗이 합니다

                계속읽다 보면 깨끗해 집니다

                 

                 

                번제단  (Altar of Burnt Offerings)



                 

                 

                희생제물을 번제로 드렸던 단입니다

                 

                희생제물이 오면 그 머리에 사람의 죄를 안수합니다

                ·        사람의 죄는 모두 희생제물에게 로 가고

                ·        희생제물의 깨끗함은 우리에게로 옵니다

                 

                제사장이 하는일 

                 

                • 제사장은 희생제물이 깨끗한지 검사합니다
                • 제사장은 사람 의 죄를 조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 우리의 죄를 조사하지 말고
                • 우리의 희생양이 되신 예수님의 깨끗함을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합니다

                 

                 

                다윗의 장막

                 

                하나님의 장막은 복잡했지만

                다윗이 잃어 버렸더 성궤를 되찾았을때는

                모든 백성이 성궤를 보고 기뻐 춤주고 찬양할수 있도록 공개했습니다

                 







                출처:http://blog.daum.net/choo156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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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살아 가면서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별 소식이 없는 듯
                이리 살아도 마음 한편엔 보고픈
                그리움 두어 보고 싶을 때면
                살며시 꺼내보는 사진첩의 얼굴처럼
                반가운 사람.

                그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한참동안 뜨음하여 그립다 싶으면
                잘 지내느냐고 이메일이라도 띄워
                안부라도 물어보고 싶어지는
                풋풋한 기억 속에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습니다.

                      

                -  담아온 글 -

                 


                 

                출처: 사모님사모님/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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