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 / 박신 목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러할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3:16-18)



많은 신자들의 믿음이 좀 더 성숙하지 못하고 항상 연약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하나 있습니다. 기도나 예배나 성경공부 모임 등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 생각에 비해 얼마나 높고 다른지 잘 모르거나 알아도 자꾸 잊기 때문입니다.

흔히 기도할 때에 우리의 계획과 뜻을 내려놓으라고 말합니다. 신자의 소원과 계획을 두고 기도하지 말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무엇이든 바라는 것과 해결 받고 싶은 일을 간구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응답이 되는 때와 방법에 관해 갖고 있는 우리의 기대 내지 고집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기도한 그대로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만의 방식과 시기에 응답되는 일이 훨씬 더 많음을 겸허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 결과도 신자에게 더 유익이 되며 최선의 길임을 믿어야 함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 응답되므로 신자가 기도한 것이 전혀 응답이 안 될 때도 있다는 것까지 인정해야 합니다. 아니 인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무응답이 더 신자를 바로 세우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나아가 어떤 형태로 응답이 되던 아예 응답이 안 되든 하나님 당신의 영광은 반드시 드러나고 모든 사람으로 그 앞에 무릎 꿇게 만든다는 것을 확신하여 신자가 먼저 그 영광에 기꺼이 동참해야 합니다.

응답이 안 되더라도 그분에 대한 온전한 신뢰가 줄기보다 오히려 더 늘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진정한 믿음이란 하나님이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커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당신의 완전한 뜻을 드러낸다는 것을 확신하므로 세상의 어떤 일로도 그분과의 관계가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성숙된 믿음의 표본이 바로 다니엘의 세 친구의 금 신상 사건입니다. 그들은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금 신상에 절하지 않아 극렬한 풀무 불에 타 죽게 되었어도 우상에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구원해주시겠지만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신상에 절하지 않을 것이며 또 하나님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해 “그리 아니하실찌라도”라는 인식이 분명히 서 있어야만 믿음이 한 단계 더 성숙되어집니다. 그러나 그 반작용으로 단순히 하나님이 더 크시고 다르다는 것에만 초점을 두면 자칫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바마저 등한히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차피 내 생각과 계획과는 다른 결과가 나타날 텐데 뭐 가만있어도 되겠지” 식의 숙명론적 사고로 흐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주 잘못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리 아니하실찌라도”라고 담대하게 선포하게 된 온전한 믿음의 실체는 따로 있습니다. 본문 기사를 읽을 때에 그들이 왕에게 “하나님은 신자를 어떤 위험에서도 능히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이지만.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우상에게 절대 절하지 않겠다.”라고 대답한 내용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쉽게 간과해 버리는 더 중요한 대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무슨 뜻입니까? 우상 숭배는 우리로선 아예 논할 필요가 없는 문제일 뿐 아니라 그럴 마음도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우리에게 강요하려고 꿈도 꾸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왕의 입만 아플 것입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요청을 한마디로 잘라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요청인지라 묵살할 수는 없고 굳이 대답하자면 이러저러 합니다.”라고 말한 셈입니다.

그들은 삶과 인생을 주관하시는 근거와 능력으로 하나님 외에는 생각도 아니 꿈도 못 꾸는 자들이었습니다. 단순하고도 온전하게 하나님 없이는 한 시도 살 수 없음을 믿고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느니 차라리 하나님 있고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우상이란 실체가 없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게 반하는 것이라 절대 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라는 고백에서 드러나듯이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어떤 일에서도 구원해주시고 심지어 기적도 나타난다고 믿는 믿음으로 그치지 아니했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하나님의 생각과 길이 인간보다 높고 다르다는 것만 인정하는 모습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 무슨 일에서든 무조건 옳고 바르며 완전하다는 것까지 철저하게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나아가 믿은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온전하신 하나님에게 자기의 전부를, 심지어 생명마저 내어던진 믿음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에스더가 자기 동족의 구원이라는 일생일대의 일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죽으면 죽으리라”고 나아간 모습을 그들은 매일 삶에서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단순히 자신들의 비장한 각오나 헌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이시더라도 그 가운데 분명히 당신의 영광이 드러날 것이므로 언제 어디서든 기꺼이 죽겠다는 믿음입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죽을 줄 알고서도 전에 행하던 대로 예루살렘을 향해 문을 열어 놓은 채로 하루 세 번씩, 그냥 기도한 것이 아니라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6:10) 그도 왕 외에 어느 신에게도 절하지 말라는 금령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뜻이었습니다. 그 문제로 고민하고 염려하거나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으려고 단단히 각오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그분께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던지는 삶을 살고 있었고 또 그렇게 죽게 될 것이라 진정으로 감사한 것입니다.

금령을 내린 다리오 왕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왕의 조서를 어긴 그를 어쩔 수 없이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하면서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고 말했습니다. 평소에도 여호와 하나님 없는 다니엘의 삶이란 그 조차 상상이 안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그와 여호와 하나님의 관계를, 세상 최고 권력자인 자기의 명령과 자기들 신의 힘으로도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입니다.

신자가 지향해야 할 진정한 믿음의 실체는 “나의 항상 섬기는 나의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평소 하나님과의 교제와 동행이 성실하고도 견고한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꼭 필요하다 싶으면 기적도 일어나게 하실 것임을 믿고 그렇게 소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그분과의 관계는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하나님이 삶에서 제거되면 기꺼이 죽겠다고 했으므로 그들과 하나님 사이에 그 죽음으로 어떤 불만과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었습니다. 뜨겁게 기도하여 새로 조정해야 할 문제도 따로 없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아도 하나님이 죽이기에 그들은 담담히 죽을 것이며 또 당신의 영광 또한 한 치라도 손상될 리 없었습니다. 언제 어디 무슨 일에서나 절대로 선하고 옳으신 나의 하나님만으로 모시는 모습을 하나님과 불신자가 인정해주지 않는다면 온전하고도 진정한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8/1/2007

 

 

출처: 박신의 말씀을 나누며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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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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