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암 질병, 그리고 병원신세
아래 내용도 필히 읽어보시고 참고해두시기 바랍니다

의사가 병을 만들고 환자를 만든다

의사에게 살해 당하지 않기 위한 47가지 비책이란 무엇일까?
(콘도 마코토 의학박사는 40년간 의사로서의 체험담을 솔직히 고백한다)

☞ 먼저 '곤도 마코토'가 신뢰할만한 사람인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주요 저서에 대해 살펴보자.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비책!

01.
환자는 병원의 "돈줄"이 아닌데  돈줄로 생각한다.
의료도 비즈니스이며, 그것이 의사의 생계 수단임을 알아야 합니다.

02.
병원에 자주 가는 사람일수록 빨리 죽는다.
미국 의료보험 가입자 5만명을 대상으로 장시간에 걸쳐 조사한 결과, 병원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가지고
만족도가 가장 높은 그룹이 병원을 불신하며 별로 좋아하지 않는 즉, 병원에 대한 만족도가 가장 낮은 그룹에 비해 사망률이 26% 높게 나온 결과가 있습니다.  초기에 암은 수술이나 항암제로도 치료 된다고 굳게 믿었던 곤도 마코토 박사는 40여년간의 의사로서 수많은 환자를 지켜 보면서 장기를 절제해도 암은 낫지 않고 항암제는 고통을 줄 뿐이라 말하고 있으며, 의료 행위에 대해서 만큼은 "믿지  말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 매주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03.
노화 현상을 질병으로 봐서는 안된다.
나이가 들면 혈관은 탄력이 떨어지고 딱딱해지기 때문에 혈압이 조금 높아야 혈액이 우리 몸 구석구석까지 잘 흘러갑니다. (물론 너무 높으면 안 되지만... 정상 수치보다 높아지는 게 당연한 거죠) 콜레스테롤은 세포를 튼튼하게 해주기 때문에 굳이 줄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물론 콜레스테롤도 너무 높으면 안 됩니다)

04.
혈압 130 은 위험 수치가 아니다.
1998년 일본 후생성에서 조사한 혈압 기준치는 160 이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에는 이유도 없이 기준치가 140 으로 떨어졌습니다. 급기야 2008년에는 기준치를 130 으로 낮추었습니다. 우리 몸은 나이를 먹을수록 혈압을 높이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뇌나 손과 발 구석구석 혈액을 잘 전달하기 위해서 몸 스스로 그렇게 변화하는 것입니다. 핀란드의 한 연구 결과에서는 최고 혈압이 180 이상 나온 80세 이상 노인분들의 생존률이 가장 높았고, 
140 이하인 사람들의 생존율이 낮았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의학계가 기준치를 낮추면 제약 업계가 돈을 긁어 모은 꼴입니다. 혈압 강하제 제약사만 배가 불린 꼴이죠.

05.
혈당치를 약으로 낮추면 부작용만 커진다.
약으로 혈당치를 낮출 경우 약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혈당치를 떨어뜨리기 위해서는 걷기, 자전거, 수영, 스트레칭 등의 유산소 운동이 효과적입니다. 
일단 부지런히 걷기부터 시작해 보세요.

06.
콜레스테롤 약으로는 병을 예방할 수 없다.
콜레스테롤 기준치를 되도록 낮춰서 약의 판매량을 늘리려는 제약 업계의 술수임을 생각하셔야 됩니다. 저도 약간은 의아한 말을 곤도 마코토 박사가 하는데... 고혈압, 고콜레스테롤 혈증, 당뇨병 같은 병은 대부분 치료할 필요가 없거나,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말합니다.

07.
암 오진이 사람 잡는다.
암 초기 진단 오진율이 12% 라고 합니다. 또한 암에는 전이가 되지 않는 "유사 암"도 많다고 하네요.

8. 암 조기 발견은 행운이 아니다. 전체적인 통계를 보면 실제 암 사망률이 전혀 줄고 있지 않습니다. (검진을 해도, 검진을 하지 않아도 사망률은 같습니다.) 암 검진을 받으면 불필요한 치료를 받고 수술 후유증이나 항암제 부작용, 정신적인 스트레스 등으로 빨리 죽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합니다.

09.
암 수술하면 사망률이 높아진다.
1980년대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가면 대부분 맹장 수술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현재 중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감기에 걸려서 병원에 가면 이런저런 주사 바늘이 꽂히게 됩니다. 
다짜고짜 메스부터 들이대는 백의의 신사들.....
나을 가망이 없는데도 하는 수술, 다른 치료법이 명백히 효과적인데도 하는수술, 
수술 자체로 인해 환자의 고통으로 수명이 단축되고 마는 사례가 빈번하게 발생되고 있습니다. 암 수술의 문제점 중 다른 하나는 암은 절제하더라도 수술 후의 장애로 사망할 위험이 매우 높다는 것입니다. 유방암의 "할스테드 수술(유방을 포함해 주변 가슴 근육과 림프절까지 절제하는 수술)"의 경우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서양에서는 30년도 전에 폐기되었는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많이 시술된 수술이었습니다.

10.
한 번의 CT 촬영으로도 발암 위험이 있다.
뢴트겐 검사나 CT 검사 등에 의한 "의료 피폭"으로 인해 세포 속의 DNA는 무조건 손상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행해지는 CT 촬영의 80~90%는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국내도 마찬가지겠죠.... 일단 고가의 장비다 보니 열심히 찍어대어 투자비를 뽑아내자는 개수작(?)이죠)

11.
의사를 믿을수록 심장병에 걸릴 확률이 높다.
증상이 없는 데도 고혈압이나 고콜레스테롤 등을 약으로 낮추면.... 수치는 개선되어도 심장에는 좋지 않습니다.
병을 고치려고 싸우지마라.

12.
3종류 이상의 약을 한꺼번에 먹지 마라
인위적으로 만든 모든 약에는 부작용의 위험이 없을 수 없습니다.

13.
감기에 걸렸을 때 항생제를 먹지 마라.
가장 빨리 낫는 방법은 몸을 따뜻하게 하고, 느긋하게 쉬는 것입니다. 독감인 경우에도 유럽에서는 약을 처방하지 않고 "일주일 동안 집에서 안정하라."고 하는 의사가 많다고 하네요. 항생제는 바이러스에 효과가 없다 합니다.

14.
항암 치료가 시한부 인생을 만든다.
폐암 4기에 이미 온 몸에 암이 전이된 상태의 경우, 항암제 치료를 받으면 6개월 이내에 50%가 죽게되며 3년 동안 생존할 경우가 10% 입니다. 전이가 되었어도 암에 의한 자각 증상이 없으면 당장 죽지 않습니다. 바로 죽는 경우는 항암제 치료나 수술을 받았을 때 뿐입니다. (무섭네요... 예전 드라마에서 암에 대한 치료는 항암제 치료가 대부분으로 비춰졌었는데...) 암의 성장 속도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의사들이 말한 시한이 틀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15.
암은 건드리지 말고 방치하는 편이 낫다.
항암제는 맹독과 같습니다. 일시적으로 암덩어리 크기를 줄여주는 것일 뿐, 결국 암덩어리는 반드시 다시 커지게 됩니다. 
즉, 암을 치료하거나 좀 더 살게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항암제는 고통스러운 부작용과 수명을 단축시키는 효과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위암, 식도암, 간암, 자궁암 같은 암은 방치하면 통증 같은 증상으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설령 통증이 있어도 모르핀으로 조절시켜 줄 수 있습니다.

16.
습관적으로 의사에게 약을 처방받지 마라.
세균이 내성화하면 더 이상 약이 들지 않고 증상이 악화되기 때문입니다.

17.
암 환자의 통증을 다스리는 법.
번거롭지만 경제적으로 모르핀 주사를 맞는 방법이 있고, 골 전이로 인한 통증 치료에는 방사선 치료만큼 효과적인 방법도 없습니다.

18.
암 방치 요법은 환자의 삶의 질을 높여준다.
암은 치료하지 않으면 통증을 조절 및 통제할 수 있고, 그 결과 죽기 직전까지 치매에 걸리거나 의식 불명 상태가 되는 일 없이 비교적 맑은 정신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19.
편안하게 죽는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죽는 것이다.
암 검진과 수술 함부로 받지 마라.

20.
암 검진은 안 받는 편이 낫다.
일본은 상피 내에 그냥 머물러 있어도 암의 성격을 가진 세포가 증식하고 있으면 암이라고 진단하는 반면, 서양에서는 침윤이 일어나지 않으면 암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 결과 서양에서 암으로 간주되지 않는 80~90%가 일본에서는 암 진단이내려집니다.
(국내는 어떨까요?) 일단 암 진단이 내려지면 무조건 치료 대상이 되기 때문에 의미 없는 수술로 인한 후유증이나 평생 먹어야하는 홀몬제로(갑상선암) 인한 합병증, 항암제 부작용으로 더 악화시킵니다.

21.
유방암 / 자궁경부암은 절제 수술하지 마라.
방사선 치료로 합병증이나 기타 후유증에 의한 병세를 악화시키지 마세요.

22.
위 절제 수술보다 후유증이 더 무섭다.

23.
1Cm 미만의 동맥류는 파열 가능성이 낮다.
미파열 동맥류 수술은 러시안 룰렛처럼 그 자체로 위험하니 1Cm 미만일 경우 그대로 놔두는게 좋습니다.

24.
채소 주스, 면역 요법 등 수상한 암 치료법에 주의하라.
전이 암이 사라졌다거나 말기 암의 증상이 나타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온 사람은
곤도 마코토 박사의 진료 경력 40년 동안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25.
면역력으로 암을 이길 수 없다.
서양 의학계에서는 면역력을 강화해도 암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합니다. 
오히려 면역이라는 단어가 붙은 요법으로 환자를 끌어 모으는 의사는 사기꾼 취급을 받는다고 합니다. 면역 세포는 외부에서 들어온 이물질을 적으로 인식해 처리하는데, 암은 자신의 세포가 변이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면역 시스템이 암세포를 적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에 암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암세포란 약 23,000개의 유전자를 가진 세포가 복수의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해 암이 된 것을 말하는데, 직경 1mm 크기로 자란 암 병소에는 약 100만개의 암세포가 있습니다. 진짜 암이라면 이 정도 크기로 자라기도 전에 혈액을 타고 여기저기로 전이가 됩니다. 0.1mm만 되어도 전이할 능력이 있을 정도로 암세포는 강력합니다.  즉, 암이 커지고 나서 전이한다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현대 의학이 아무리 조기에 암을 발견한다고 해도 직경 1cm 전후부터이고 이때는 이미 암세포가 최소한 10억개 정도로 전이도 벌써 끝나 있는 상태입니다. 흔히 말하는 "조기 암"은 암의 일생으로 보면 이미 원숙기로 접어든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26.
수술로 인한 의료 사고가 너무 잦다.
잘못된 건강 상식에 속지 마라.

27.
체중과 콜레스테롤을 함부로 줄이지 마라.
갑자기 체중을 줄이면 혈중 지방인 콜레스테롤도 감소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콜레스테롤은 세포막을 만들고 각종 호르몬의 재료가 되므로 생명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성분입니다. 즉, 콜레스테롤이 감소하면 암 뿐만 아니라 
뇌출혈, 감염증, 우울증 등으로 사망할 수도 있습니다. 체중을 줄이는 것보다 조금 살집이 있는 편이 오래 삽니다.

28.
영양제보다 매일 달걀과 우유를 먹어라.
달걀과 우유는 20종류 이상의 아미노산을 전부 갖고 있는 영양이 풍부한 완전 식품입니다. 우리 몸의 20%는 단백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은 20종류입니다. 최근 아미노산 보충제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2
0종류의 아미노산을 하나씩 인공적으로 만들어 배합한 것을 돈까지 들여 섭취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일본의 장수 지역의 노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기름진 음식을 잘 먹는 사람이 오래 살 수 있었습니다.
지방이 콜레스테롤과 호르몬을 만들어 우리 몸을 건강하게 유지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조상님들께서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고 하신 것을 보면 정말 현명한 분들의 후손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29.
술, 알고 마시면 약이 된다.
과음은 금물이지만, 아주 약간의 술은 혈관을 확장시켜 일시적으로 혈압을 낮추며 긴장 완화 및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줍니다.

30.
다시마나 미역을 과도하게 섭취하지 마라.
해조류에 함유된 요오드는 생명 유지에 반드시 필요한 미네랄이지만, 지나치게 섭취하면 갑상선암의
발생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별도로 인공적으로 합성된 비타민을 보조 식품의 형태로 섭취하는 것은 위험하며, 채소나 과일로 섭취하는 천연 비타민도 많이 먹는다고 해서 몸에 좋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단...적당히는 먹어 주어야겠죠!

31.
콜라겐으로 피부는 탱탱해지지 않는다.
입으로 섭취한 콜라겐이 피부를 직접 탱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며,
클루코사민이 무릎까지 닿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먹은 것은 일단 장 속에서 분해되거나 혈액으로 들어가 아미노산이나 당의 형태로 이용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보조식품으로 콜라겐이나 글루코사민을 섭취한다는 것은 단백질이나 당을 조금 섭취한 것과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보조식품으로 먹든 마시든 어차피 배 속에서 분해되기 때문에 목표 부위인 얼굴 피부나 무릎 연골에 도달하지도 못하는 .... 한마디로 돈 낭비하는 것입니다.

32.
염분이 고혈압에 나쁘다는 것은 거짓이다.
이 내용도 좀 쇼킹했습니다. 비타민C의 결핍은 특정 질환을 일으킬 뿐이지만  염분의 결핍은 생명을 위협 한다고 합니다. 일본인의 고혈압증은 98% 이상이 소금과는 무관하며, 신장이나 호르몬, 혈관이나 혈액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오히려 소금의 나트륨 성분은 뇌가 보내는 명령을 신경 세포에 전달하는 등 생명 유지와 깊은 관련이 있는 귀한 식자재입니다.

33.
커피는 암, 당뇨병, 뇌졸중 예방에 좋다.
내 몸 살리려면 이것만은 알아두자.

34.
건강해지려면 아침형 인간이 되라.
세포의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성장호르몬 등의 각종 호르몬은 수면 중 특히 자정 0시 전후에 가장 활발하게 분비됩니다. 매일 이 시간대에 숙면을 하면 뼈와 근육이 튼튼해지고, 피부가 재생되며, 병이나 상처가 순조롭게 회복됩니다.

35.
지나친 청결은 도리어 몸에 해롭다.
우리 몸의 면역 상태는 자연계의 불결한 것, 기생충, 세균 등에 접촉하면서 성숙해가므로 지나치게 청결한 환경에서는 몸이 약해집니다. 너무 청결해서 아토피 질환이 많이 발생되는 것이라고 하네요.. 예를 들면 노숙자는 아토피 질환이 없습니다. 표피를 덮고 있는 피지가 두껍고 수분량도 아주 많아 세균 같은 항원이 차단되기 때문이라네요.

36.
큰 병원에서 환자는 피험자일 뿐이다.
큰 병원일수록 모든 진료 과정이 기계적으로 진행되고, 실험적인 부분에 주력하도록 되어 되어 있습니다.
뭐....임상 실험이나 신약 실험 등을 하는 거죠.

37.
스킨십은 통증과 스트레스를 줄여준다.
애정이 담긴 손길은 가장 단순한 방법이지만, 의학이 아무리 진보해도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치료의 근본이 스킨십입니다. 인간은 평생 타인의 온기를 갈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스킨십은 스트레스와 불안을 해소하는 데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합니다.

38.
입을 움직일수록 건강해진다.
껌을 씹으면 뇌 전체의 혈류량이 늘어나 뇌를 활성화시키는데 도움이 됩니다.  입으로 소리를 내면 스트레스가 해소가 됩니다. (산에 올라가 소리를 질러 보세요) 웃음은 부작용이 없는 명약입니다. 웃으면 심박수나 호흡수가 늘어나 혈액 순환이 좋아지고 횡경막이 상하로 크게 움직여 배 근육과 등 근육이 운동됩니다. 위장을 자극해서 배변도 원활해지고, 심호흡 효과 등으로 자율신경과 호르몬의 균형이 바로 잡혀 혈당치나 혈압이 안정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39.
걷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우리가 걸을 때는 발바닥이나 하반신의 여러 근육을 통한 신경 자극이 대뇌 신피질의 감각 영역에 전달되며 그 과정에서 뇌간을 자극하게 됩니다. 또한 보행 중에는 뇌 전체의 혈행도 좋아집니다. 통증이 있다고 그 부분을 보호할 것이 아니라 충분히 움직여주는 편이 빨리 회복됩니다. 재활 훈련이 그런 뜻으로 이뤄지는 것이죠.

40.
독감 예방 접종은 하지 않아도 된다.
독감 예방 효과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고령자분들 중에서 백신을 맞아 돌연사 하신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심근 경색 때문이라고 하지만... 백신의 부작용인거죠. 세계보건기구 WHO와 리본 후생노동성도 홈페이지에 "독감 백신의 감염 억제 작용은 보장되어 있지 않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2009년도에 국내에서도 타미플루 항바이러스제를 받을려고 난리났던 적을 기억합니다. 효과도 인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부작용(호흡 정지 및 의식을 잃어 돌연사 발생)으로 시끄러웠죠.
항바이러스제와 해열제를 같이 복용할 경우 열이 단숨이 안정되기는 해도 바이러스는 소멸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죠. 바이러스는 목이나 코의 점막에 달라붙어 순식간에 세포 속으로 들어가므로, 물로 씻어내는 것은 무리입니다. 바이러스 입자는 아주 작아서 마스크의 섬유 틈새로 통과하기 때문에 서양에서는 독감 예방에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냥, 독감에 걸려서 면역력이 생기게 하세요.

41.
'내버려 두면 낫는다.'고 생각하라.
의사들이 파업을 하면 사망률이 낮아집니다.
1976년 남미 콜롬비아에서 의사들이 52일 동안 파업을 했고 그로인해 평소보다 사망률이 35% 감소했다는 조사 결과가 있습니다. 고령의 환자는 입원을 하면 대부분 침대에 누워만 있기 때문에 근력이 떨어져서 머리가 금방 둔해지고 이는 치매로 연결됩니다.

42.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네 가지 습관.
①응급 상황이 아니라면 병원에 가지 않는다. ②사전 의료 의향서를 작성한다. (의식을 잃었을 때, 연명 치료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미리 기록/아래 참초) ③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한다. ④치매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43.
희로애락이 강한 사람일수록 치매에 안 걸린다.

44.
100세까지 일할 수 있는 인생을 설계하라.

45.
당신도 암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46.
자연사를 선택하면 평온한 죽음을 맞을 수 있다.

47.
죽음을 대비해 사전 의료 의향서를 써 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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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마코토 박사의 사전 의료 의향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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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명 치료는 절대 하지 말아 주십시요.
나는 오늘까지 자유롭게 살아 왔습니다.
64세까지 좋아하는 일에 열중하며 행복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나답게 생을 마감하고 싶습니다.

지금 나는 의식을 잃어가고 있거나
불러도 아주 약하게 반응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자력으로는 호흡도 거의 불가능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대로 눈을 감아도 전혀 여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구급차는 절대 부르지 말아 주십시요.
이미 병원에 실려 왔다면 인공 호흡기를 연결하지 마십시요.
연결했다면 떼 주십시요.
자력으로 먹거나 마실 수 없다면, 억지로 음식을 입에 넣지 말아 주세요.
수액, 튜브 영양, 승압제, 수혈, 인공 투석 등을 포함해 연명을 위한 치료는
그 어떤 것도 하지 말아 주십시요.
이미 하고 있다면 전부 중단해 주시기 바랍니다.
만약 내가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면, 모르핀처럼 통증을 완화시키는
처지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지금 내 생명을 연장하고자 전력을 다하고 계시는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죄송하지만 나의 바램을 들어주십시요.
나는 이 문장을 냉정하게 생각한 후에 작성했으며
가족의 동의도 받았습니다.

연명 치료는 일절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을 여기에 맹세합니다.

☞ 의사에게 살해당하지 않는 47가지 방법 (곤도 마코토 지음)

남침례교단 동성애 옹호 교회 퇴출



 
▲ A screen shot from the Union Baptist Church website

지난 주 남침례교회(Southern Baptists Association)가 미시시피주 헤티스버그에 있는 미시시피 연합침례교회를 동성애적 라이프스타일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교단에서 탈퇴시켰다.

에 따르면 ‘파인벨트 침례교단(Pine Belt Baptist Association)’은 동성애를 옹호하는 교회들의 목록을 볼 수 있는 웹사이트 gaychurch.org에 연합침례교회(Union Baptist Church)가 올라온 것을 보았다며 이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을 전했다.

파인벨트 침례교단은 gaychurch.org에 나와 있는 “교회는 동성애 자체를 죄로 봐서는 안 된다”는 동성애 동조의 정의에 주목하고 연합침례교회에게 교단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gaychurch.org에서 탈퇴할 것인지에 대해 20일까지 양자택일할 것을 지난 10월8일 편지로 통보했었다.

파인벨트 침례교단 집행위원회가 대학침례교회에 보낸 서신에는 “침례교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웹사이트의 메시지는 교단과의 교류에서 해제될 위험이 있다. 동성애자 결혼은 너무 위험하다. 하나님은 국가가 직면해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해 말씀한다”며,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 2000’의 15조에 나와 있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크리스천들은 인종차별, 탐욕, 이기심, 그리고 간통, 동성애, 포르노를 포함한 성적 부도덕의 모든 형태를 반대한다”는 조항을 언급했다.

이에 대해 연합침례교회는 27일 성명을 통해 1970년대 초반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같은 멤버로 환영한 것을 언급하며 지금도 그 정책은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성명서는 “최근 몇 개월간 우리는 자매 침례교회들로부터 감시를 받아 왔다. 우리는 주 예수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을 환영하고 있다”고 밝혔다.

파인벨트 침례교단은 “우리는 이 문제의 처리가 분할 또는 불화를 가져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모든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려는 파인벨트 교단은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동성애의 삶을 긍정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지 아닌지가 미시시피 침례교단의 사명과 목적에 우호 협력하는 표시가 된다”고 전했다.

현재 연합침례교회는 더 이상 미시시피 침례교단의 교회로 간주되지 않는다.

송금관 기자 ⓒ 크리스찬투데이
USA 아멘넷

물처럼 사는 것이 현명한 삶


노자는 인생을 살아가는데  최상의 방법은
물처럼 사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겸손하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흐르는 물
그 물의 진리를 배우라는 것이다

첫째: 물은 유연하다
물은 네모진 곳에 담으면 네모진 모양이 되고
세모진 그릇에 담으면 세모진 모양이 된다

이처럼 물은 어느 상황에서나
본질을 변치 않으면서 순응한다

둘째: 물은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
물은 평상시에는 골이진 곳을 따라 흐르며
벼 이삭을 키우고
목마른 사슴의 갈증을 풀어준다

그러나 한번 용트림하면
바위를 부수고 또한 산을 무너뜨린다

셋째: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
낮은 곳으로 흐르다가 물이 마침내
도달하는 곳은 드넓은 바다이다

사람도 이 물과 같이 모나지 않고
유연하게 다양한 사람을
너그럽게 포용하고 정의 앞에
주저하지 말고 용기 있게 대처하며
벼가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겸손하게 자기자신을 낮추는
현명한 삶을 살아야 한다

- 좋은글 中에서 -

 

한 시대를 풍미한 주먹왕 시라소니 이성순의 극적 회심 이야기!


[김두한과 함께 전설적인 조선 주먹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시라소니’. 그가 영락교회 집사였다는 사실 은 그렇게 널리 알려진 얘기는 아니다. 그래서 ‘집사 이성순’에 대한 얘기도 일반엔 거의 알려지지 않 았다. 그러나 그는 분명 하나님의 자녀였으며, 그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 이의현은 목사가 됐다. 그가 쓴 아버지 이성순의 말년 비화를 소개한다.] 
 
아버지의 생을 크게 양분하자면 그 분기점은 이정재에 의한 집단린치 사건이 될 것이다. 아버지가 집단린치를 당한 집적적인 계기는 이북사람들에 대한 의리 때문이었다. 당시 이북사람들은 월남한지 얼마 안돼 자리를 못 잡아 모두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다. 마침 퇴계로에서 미군 물건 장사를 하던 이북 사람들이 그곳이 철거되며 생계가 막막해지자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버지는 동대문 시장의 상권을 쥐고 있던 이정재에게 이들을 위해 자리를 내줄 것을 부탁했다.

53년 11월 어느 날. 아버지는 이정재의 방문 요청을 받고 동대문 시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단도를 휴대하라는 후배들의 권유를 “설마 정재가 나를 어떻게 하겠어?”라고 뿌리치며 이정재가 자신의 생각을 들어줄 것이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나선 것이다. 그러나 동대문 시장 사무실은 도끼, 절굿공이, 갈퀴로 무장한 이정재의 부하 수십 명이 잠복해 있었다. 수십 명과의 대결은 이미 만주에서도 여러 번 경험했었지만 좁은 사무실 공간에서는 아버지도 어쩔 수 없었다.

‘집단린치 사건’ 이후 복수만 별러 

한 시간 동안의 린치. 아버지는 반송장이 되어 버려졌다. 아버지는 이 사건 이후 권총을 휴대하고 다녔다. 이정재에 대한 복수심은 하늘에 사무치고도 남았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58년 콩팥과 간에 이상이 생기고 장질부사까지 겹치는 합병증으로 사경을 헤맸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이장수 목사의 간절한 기도로 완쾌됐다. 아버지 자신도 벽에 걸린 십자가의 빛이 몸에 닿으면서 병이 치유되는 특별한 체험을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기독교에 귀의하라는 어머니와 이 목사의 간절한 청을 끝내 거절했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복수의 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떻든, 4.19와 5.16이라는 한국정치사의 격랑을 따라 아버지의 인생유전 또한 극적 전환점을 맞는다. 자나 깨나 복수만을 꿈꾸던 이정재를 격동기의 감옥에서 만나 용서하고 만 사실은 세간에 알려진 그대로다. 자신 앞에 무릎 꿇은 자에게는 절대로 주먹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 그때까지 지켜온 아버지의 신조였다.

복수의 칼을 내려놓은 아버지는 이장수 목사를 찾았다. 그동안 가족도 모르게 지니고 다니던 권총을 꺼내 이 목사에게 내밀었다. “교회에 나가겠습니다. 정재를 전도하지 못한 것이 끝내 한이 됩니다.” 복수를 위해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에 쌓아가던 죄의 보따리를 주님 앞에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한때 한국 주먹계의 황제로 불리던 아버지 시라소니는 이렇게 파란만장한 주먹생활을 주님 앞에 묻었다. 아버지는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선 해인 1960년에 막내인 나를 낳았고 영락교회 집사로서 또 하나의 삶을 살았다.

‘주먹’의 아들

아버지 시라소니의 생에 영향을 받아 목사가 된 아들(이의현 목사, 성현교회 담임)은 아버지 가 ‘위대한 주먹’ 이었으며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한 생’ 이었다고 말한다.

식물인간 아버지, 기도 받고 일어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소개할까 한다. 1980년도 무렵, 내가 체육대학을 다닐 때였다. 교회를 나가시긴 했지만 아버진 아직도 회개를 모르셨다. 어느 날 친목모임에 다녀오신 후부터 계속 두통을 호소하셨다. 이북 말로 머리 아프다는 것을 “골 쏴, 골 쏴” 하는 데 아버지의 이 호소는 점점 커져갔다. 결국 교회 옆 백병원에 입원하시게 됐다. 6인 병실이었는데 머리가 아프다고 하도 소리를 질러 대셔서 병실 사람들이 잠도 못자고 피해가 많았다. 그러나 병명은 나오지 않았고 아버지는 퇴원을 고집하셨다. 할 수 없이 고덕동 아파트로 모셨다.

아버지는 점점 건강이 나빠지셨다. 이 병원 저 병원을 다녔고 유명한 목사님을 모셔다가 예배도 드렸지만 아무 차도가 없었다. 급기야 아버지는 식물인간이 되셨다. ‘이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구나…’ 하고 포기했는데 어머니만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삼각산에 가서 기도도 많이 하셨고 기도하는 사람도 많이 만났다. 그러다 신설동 쪽 어느 교회 목사님이 모 기도원 원장이고 능력이 많아서 병자가 일어나고 귀신도 쫓아내니 그리로 한번 가보라는 권유를 듣고 주일날 그 교회를 찾아가셨다.

예배 후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목사님께 다가선 어머니는 “제 남편이 시라소니라는 사람인데 저희 집에 가셔서 기도 좀 해주세요.” 부탁을 드렸다. 원래 말투가 투박했던 목사님은 “이 여자가 주일날 어디를 간단 말이야?” 하시더니 어머니의 양손을 덥석 잡고 “살아계신 하나님, 이 여인에게 능력을 주셔서 기도할 때 남편이 일어나게 도와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주시고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셨다. 그런데 교인 중 한 분이 “3시에 우리교회에서 은사집회를 하는 데 인도하시는 강도사님이 은혜가 많으시니까 참석해 보세요.” 라고 권했다. 어머니는 3시 은사집회에 참석하셨다.

집회에서 박수 치는 장면, 소리 높여 기도하는 장면을 처음 본 어머니는 왠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별안간 두려움과 공포가 몰려왔다. 그런데 집회를 인도하시는 강도사님이 “이 자리에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세요.” 라고 하셨다. 두 손을 높이 들고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하다 보니 어느 새 두려움이 사라졌다. 집회 후 강도사님께 아버지의 상태를 얘기하자 “남편은 귀신이 역사하고 있으니까 댁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기도 잘 하고 은혜 있는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세요. 그러면 정체가 드러날 겁니다. 못 당할 것 같으면 저한테 연락하세요.” 라고 말씀해주셨다.

어머니는 식물인간이 된 아버지를 내 방으로 모시고 가깝게 지냈던 순복음교회 전도사님 내외와 영락교회 청년 한 분에게 도움을 청하셨다. 밤 10시 무렵 아버지를 가운데 두고 찬양으로 예배가 시작됐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느뇨…”

나는 장로교회 신자였다. 박수 치는 것, 눈물 흘리는 것, 소리 질러 기도하는 것은 구경도 못해본 ‘거룩한’ 신자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 이단이라고 하던 때였다. 전도사님은 어정쩡한 내 모습을 보고 적극적으로 찬양할 것을 권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마음속에 의구심이 솟아났지만 아버지를 위한 일이이므로 나도 분위기에 맞춰야 할 것 같았다. 이내 부흥성회 같은 찬송과 기도가 시작됐다. 그런데 아무리 길어야 30분 정도 예상했던 찬송은 한 시간이 넘도록 계속됐다.

갑자기 “누구야, 누구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떠보니 전도사님과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손을 얹고 “나가! 나가!” 그러는 것이었다. 귀신을 쫓는 순간이었다. 처음 보는 축사장면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어머니도 잘못되고 전도사도 잘못된 것 아닌가?…’ 그러면서도 도와주러 온 사람들인데 ‘에라 모르겠다. 알아서 하겠지’ 하면서 찬송을 하는 데 갑자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이거 뭐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고개를 들어 보니 귀신 쫓던 전도사님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어이쿠…” 신음소리 쪽을 보니 식물인간이 됐던 아버지가 “개새끼!” 하면서 휘두른 주먹에 나가떨어진 전도사님의 입에서 선혈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이게 뭐지? 아버지는 식물인간인데 말도 하고 주먹도 쓰시네?’ 갑자기 나의 머리카락이 일자로 쭈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야, 하나님의 말씀은 참말이구나!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하시고 귀신이 정말 있구나! 하나님 말씀은 틀림없는 사실이구나!“ 내키지 않았던 찬송이 저절로 달라졌다. 기도도 바뀌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한 귀신은 당장 물러가라!” 신이 나서 막 기도하는데 어느 정도 지나자 아버지는 “나간다! 나간다!” 하고 벌떡 일어나 흔들흔들 마루로 나가시더니 ‘꽝!’ 하고 넘어지셨다. 그렇게 나간 줄 알았던 귀신은 아직 남아있었다. 그날부터 매일 밤 찬송과 기도와 축사가 되풀이 됐다. “이 더러운 귀신아 물러가라!…” 계속 싸우다가 어머니는 “우리 힘으로 도저히 안 되니까 신설동 강도사님한테 모시고 가자”고 하셨다. 새벽예배시간에 맞추어 버티는 아버지를 끌다시피 택시에 태워 교회로 모시고 갔다.

예배가 끝나고 5분쯤 지났을까? 목사님이 나가시자마자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하는 아버지가 별안간 벌떡 일어나셨다. 귀신의 역사임을 알아챈 나는 순간 몸을 날려서 아버지를 꽉 잡았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아버지가 몸을 휘두르는데 아버지에게 매달린 내가 팔랑개비처럼 휘둘려지는 게 아닌가? 아직 남아있던 교회 청년들이 함께 달려들었다. 사투 끝에 겨우 아버지를 제압하자 강도사님이 들어오셨다.


귀신과의 능력대결


강도사님은 아버지를 쳐다보고, 밑에서 우리들에게 제압당한 채 아버지는 그 강도사님을 무섭게 노려보셨다. 불꽃 튀는 눈싸움이 시작됐다. 어머니는 그 강도사님도 한 때 주먹을 좀 쓰시던 분이었는데 ‘시라소니’란 말을 하자 자기 할아버지뻘 된다고 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눈싸움하던 아버지는 “이 새끼, 할아버지한테 까불어?” 라고 일갈하셨다.

강도사님은 층계에 내려와서 아버지 앞에 서더니 “이 분은 할아버지뻘 되지만 귀신 너는 아니야!” 하시면서 성경책으로 머리를 톡 쳤는데 쓰러진 아버지의 머리가 마루바닥에 붙어서 떨어지질 않았다. 강도사님은 “여기 방언하는 사람들은 빨리 모이세요. 신설동 일대에 군대마귀가 몰려왔습니다.”라고 하셨다. 한동안 뜨거운 방언기도가 이어졌다.

 
기도가 끝나고 강도사님이 아버지에게 안수기도를 해주셨다. 아버지는 쓰러져 잠이 드셨는데 무려 8시간을 주무셨다. 그런데 밤 열두시가 되자 아버지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그리고는 “나간다, 나간다, 나간다…” 그러면서 현관 쪽으로 걸어가셨다. 아버지를 잡고 다시 철야가 시작됐다. 지루하고 끈질긴 기도가 이어졌다. 50일만에 드디어 하나님이 역사하셨다. 성경 다니엘서 10장의 기록처럼 바사국 군이 천사를 막아 늦어졌지만 다니엘의 금식기도가 계속되자 천사장 미가엘의 도움으로 기도가 응답됐다는 얘기가 실감났다.

49일 지났을 때였다. 비가 오는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잠깐 졸다가 ‘우- 우-’ 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늑대 울음 같은 그 소리는 어느새 여자 울음소리로 바뀌었다. 집 식구들을 깨워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렸다. 다음날 아침 일찍 현관에서 초인종소리가 울렸다. 앞집 아주머니였다. “아버님 돌아 가셨지요?” 아주머니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니요, 안돌아가셨는데요”, “으응? 안돌아가셨다고요? 그래요? 허참 이상하다…”

아주머니는 간밤에 잠이 안와 새벽 두 시까지 잠을 안자고 있는데 우리 집 쪽에서 여자들이 울면서 “나는 어떻게 할까, 흑흑… 우-” 그런 울음소리를 내면서 현관문을 열고 나와서 층계로 내려가는데 한 여섯 명 정도가 내려가는 것을 봤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옆집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딸들이 슬퍼 저렇게 우나 보다…’ 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 밤 피곤해서 또 깜빡 조는데 “쾅, 콰광!” 하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깼다. 머리 위로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가슴 속을 뒤흔들었다. 무서운 생각이 들어 기도하고 찬송을 했는데 어머님이 꿈 이야기를 하셨다.

3층짜리 건물 안이었는데 주변엔 온통 귀신들뿐이었다. 알고 보니 그 집은 귀신들이 사는 집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떻게 하나 생각 중이었는데 목사 가운을 입은 목사님이 ‘어떻게 오셨는지 모르지만 이곳은 오늘 멸망 받을 곳인데 여기 있으면 안 됩니다. 빨리 나가세요.’ 라고 말해주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가려 하자 귀신들이 잡으려고 쫓아왔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귀신들을 막아주셨는데 그 등이 집채 같아서 귀신들은 손도 내밀지 못했다. 그 틈에 급히 집밖으로 나와 그 집을 돌아보는 순간, 벼락이 떨어져 3층집은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요란한 그 천둥 번개 소리에 아버지의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아버지는 맑은 정신으로 “번개가 왜 이렇게 치나?” 그러시면서 “이 번개 때문에 이 근방에 벼락 맞은 곳이 있고 큰일이 일어났을 것 같다” 는 말을 하셨다.

이렇게 하나님의 크신 일을 경험한 아버지는 이후 신앙생활 잘 하시다가 83년 소천 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부르실 때에 얼굴이 천사와 같이 황금빛 광채가 나는 것 같고 미소를 지으면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 하관예배를 드리고 올 때 아버지가 흰옷을 입고 양쪽에 하얀 옷을 입은 천사가 손을 끼고 모셔 가는 환상을 보셨다고 했다. 나는 보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은 기억이 난다.

“이기고 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진실하다.”



▼(야인시대 장면중) 시라소니 복수전(1)

http://youtu.be/gPX5XopzY_M

 



▼(야인시대 장면중) 시라소니 복수전(2) - 이정재와의 대결

http://youtu.be/8pGTgkcP-RU



출처: http://cafe.daum.net/m153/Uk8B/4 (새소망쉼터교회)




 

 

사진: 큰뒷부리도요새

얀 반데 캄 (생태사진전문가, 네덜란드)

 
누가 심었을까? 방조제를 가로지르는 길가에 가녀린 소녀의 자태처럼 청초하기 그지없는 코스모스가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다소곳이 줄지어 선 채 살랑살랑 춤을 추며 피곤함에 지친 여행객을 반갑게 맞아준다. 방축으로 된 도로의 양면이 모두 시퍼렇게 출렁이는 바다이다.
 

새만금, 그 어마어마하고 웅장한 모습에 놀라 "아!" 하는 탄성과 함께 벌어졌던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게 쭉 곧은 교각 위 단정한 도로를 따라 얼마쯤 들어가니 전망대가 나오고 전망대 입구에 서있는 거대한 천사의 석고상이 아직은 때 묻지않아 새하얗게 눈부시다. 우리나라 지도를 바꾸고 있다고 하는, 이 새만금 방조제는 네덜란드의 주디찌 방조제(32.5km)보다 더 긴 33km이며 세계에서 가장 긴 방조제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새만금 그 위용은 정말 대단했다.

전망대를 벗어나 한참을 더 달려가니, 눈앞에 보이는 둑길 제방 저 너머로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가 평화로워 보인다. 그곳 들판에는 소란한 세상 소리, 자동차 소리를 아는 듯 모르는 듯, 벼알은 가을 땡볕 아래서 황금빛으로 무르익어 고개를 숙인 채 바람결을 따라 부드럽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조금 더 가자니, 넓디넓은 갯벌, 이미 메말라버린 거전갯벌에는 바다식물 나무 제가 듬성듬성 흩어진 채 숨을 헐떡이며 죽어가고 있는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들고 거기에 경제와 산업, 관광을 아우르면서 동북아 경제중심지로 비상할 녹색 성장과 청정생태환경의 “글로벌 명품 새만금’을 꿈꾼다고 하는 곳, 이명박 대통령은 "새만금 방조제는 단순한 방조제가 아니라 동북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 가는 대한민국의 미래 경제고속도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으며, "새만금이 세계로 뻗어 나가려면 생각도 지역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서야 한다. 지역 한계를 벗어나 마음의 문을 활짝 열 때 새만금의 미래도 활짝 열릴 것이라고 믿는다"라며 역설했다고 한다.
 

또 "새만금은 4대강 사업과 더불어 대한민국 저탄소 녹색 성장을 위한 우리의 또 다른 노력, 4대강 사업이 죽어가는 강을 살리는 것이라면 새만금 사업은 대한민국 최초로 종합적이고 계획적인 녹색도시를 건설하는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새만금은 나라의 자존심이라고 불리울 수 있도록 웅장한 간척사업장이요, 대통령의 꿈, 한 사업가의 원대한 비전이 현실화되어 우리 눈앞에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반면, 그곳 어민들과 생태보존학자들은 새만금을 괴물이라고 부르며 울상을 짓는다고도 한다. 거전갯벌은 수천 수만 년이란 긴 세월을 지나면서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고, 갯벌은 거기에 의존하는 수많은 생명을 감싸 안는 어머니의 품이었다. 갯벌에서 태어나고 갯벌에서 자라고 갯벌과 함께 늙어가다가 갯벌의 품속에 안기는 사람들, 갯벌이 주는 풍요를 누리며 갯벌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던 어민들,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그들 삶의 터전이 무참히 짓밟히고 한순간에 파괴된 것이다!

새만금, 이 거대한 힘 앞에서 수많은 도요새, 백합과 조개 그리고 게들, 갯벌에서 생명을 이어가던 뭇 생명은 죽어가고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동안 새만금지역의 거전갯벌에는 큰뒷부리도요새 긴다리도요새, 붉은부리도요새 등등, 그 외에도 이름 모를 철새들이 때가 되면 날아와 많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유도 모른 채 많은 철새가 죽어가고 있으며 얼마 전에는, 수천 킬로미터의 비행을 하면서 이곳을 찾아온 도요새 몇 마리가 메마른 갯벌에서 먹이를 찾지 못하고 끝내 주검으로 남은 것을 사진으로 찍어 들고 다니면서 갯벌을 보호애야 한다 호소하는 조류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친구 목사님이 섬기는 교회에서 내어준 봉고차에 우리를 태우고 안내를 하시던 그곳 교회 나이 많은 장로님은 "밀물 때와 썰물 때를 맞추어 바구니와 망태기를 든 아이들과 여인네, 지게를 지고 백합을 주우려고 나가는 할아버지들, 또 갯벌에서 개구리를 잡는 민첩한 도요새의 정겨운 모습을 이제 더는 볼 수 없을 것 같다."라고 말씀하시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리 쉬었다.

한편으로 세간에서는 이 웅장한 새만금을 가리켜 바다의 만리장성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만리장성, BC 221년 중국을 통일한 진의 시황제(始皇帝)가 연과 조가 축성한 북변의 장성을 연결하여 서쪽으로 더 연장시켰는데 이는 북방 유목민족의 침입을 대비하고 백성을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준다는 명분을 꿈으로 포장하여 앞에 내세운 강자의 욕심일 뿐이었다. 결국 그 강자는 백성을 위한다는 자신의 거짓 꿈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수많은 약자의 생명을 희생시켰던 것이다.

진정한 꿈은 너도나도 모두 살리는 프로젝트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과거에도 현대에도 강자의 무리한 욕심은 꿈이란 이름으로 포장시켜 약자를 희생시키고서야 얻어내는 것, 정작 약자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헛된 것이요, 재앙일 뿐이다. 자연과 생태계를 파괴하고 갯벌의 무수한 작은 생명을 죽여서 일구어낸 새만금, 수많은 젊은 생명을 희생시켜서 일구어낸 진시황제의 만리장성, 결국 약자인 너를 울게 해야만 이룩해 내는 것이 나의 꿈이라면, 이 모두가 꿈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지나친 욕심의 발로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이것 또한 너무 지나친 말일까?

나는 생태보존학자도 아니고 갯벌을 사랑하는 어민의 한 사람도 아니다. 그럼에도, 거대한 새만금 방조제 위를 달리는 내내 마음이 많이 울적했다. 왜일까? 그것은 새만금이나 만리장성을 보면서 내게는 그들의 업적보다는 그들의 무리한 욕심과 지금 우리가 당면한 기독교계의 현실이 오버랩되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향해 높이, 더 높이를 외쳐대며 바벨탑을 쌓아올리던 고대 사람들처럼 무엇이든지 크고 높고 강한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목회자들, 그들을 큰 종이라 따르며 숭배하는 어리석은 성도들, 이 세상에서 잘먹고 잘사는 것을 추구하는 기복신앙가들이 주님의 교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모두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일부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은 그들의 무리한 욕심을 꿈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그 포장된 꿈을 이루기 위해 무수히 작은 교회를 쓸어트리고 성도들의 헌금을 갈취한다.

교회당 건물은 주님께 예배 드리기 위한 목적보다는 부와 권력과 능력의 상징이라도 되듯 하늘 높은지 모르고 더 크게 더 높게 올라만 간다. 어디 건물뿐이랴, 이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교회와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영혼을, 사업,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지 않는 것 같다. 성도들을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단다. 사업가적 마인드가 뛰어난 몇몇 삯군 목자들은 목회보다는 성도관리 차원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진행시켜 사고팔기도 한다. 이런저런 정말 기막힌 아이디어 상품들로 성도들의 영혼을 유치(그렇다 유치가 아니고 무엇이랴)하기 급급하다.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기신자들을 각종 프로그램과 상품으로 미혹해서 더 많이 수용하고 보자는 심산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작은 교회도 엄연히 주님의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교회이건만, 약한 교회를 집어삼키기라도 하려는 듯, 교회 내에서도 심각한 빈익빈 부익부 기현상을 빚어내고 있다. 문어발처럼 자신의 교세 넓히기 경쟁이라도 하듯, 세계로 뻗어 나가기 위해 많은 돈과 인재들을 투자해서 지교회를 세운다. 이런 비본질을 본질보다 더 크게 부각시키는 교회나 목회자들이 회개하지 않는 한, 반기련도, 극단적 신비주의 자들도,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각종 이단 사설을 양산(produce)해 내는 그 어떤 단체도 막아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자기 자신만이 성공하겠다고 생각하며 남을 짓밟는 사람은 이제 세상에서도 받아주지 않는다. 하물며 하나님의 교회이랴? 우리는 이제 서로 연합해야 산다. 연합하여 일한다는 것은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힘을 합쳐서 일을 할 때, 그 결과는 엄청난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서로 도우는 교회가, 서로 도우는 성도가 되어야 그날에 주님께로부터 잘했다 칭찬과 함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2,000여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가슴에 각인시키고 결코 잊지말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죽음을 택하셨다. 너를 살리기 위해 내가 죽는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삼 일 만에 너도 살고 나도 사는 부활의 영광을 쟁취하신 것이다.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인간 구속을 위해서 성부 성자 성령으로 나뉘어 사역하시는 아픔을 참으셨으며, 협력하여 일하셨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셨다!!

성도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이 십자가 원리를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큰 교회는 내 몸집만 키울 것이 아니라 작은 교회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믿음에 강한 성도는 약한 성도를 도와야 한다. 남을 죽이려고 하면 나도 죽는다. 성도는 내가 살기 위해서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너를 살리기 위해서 내가 죽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 상생(相生)의 원리를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말씀이 인정하지 않는 비전은 불법이요, 불법을 행하는 자는 아무리 그 업적이 훌륭하다고 해도 주님께서 결코 인정치 않을 것이다.


세상 모든 것이 같은 이치일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이웃과 이웃, 목회자와 성도, 교회와 교회, 국가와 국가, 나의 꿈이 너를 울게 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꿈이 아니라 터무니 없는 한 개인의 욕심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소박하나마 서로가 서로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꿈, 너와 나 우리,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복된 꿈을 꾸며, 가꾸며, 서로 도와주고, 살려주는 아름다운 세상, 아름다운 가정, 아름다운 교회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리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 23),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2-3)"

글: 별똥별/최송연의 칼럼글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지금 갈라디아서 5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시편을 잠시 찾아가 보겠습니다. 시편기자는 ‘여호와의 종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말합니다(시 113, 134, 135편). 시편기자가 말하는 ‘여호와의 종’은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과 레위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종이 무슨 뜻입니까? 종은 주인에게 속해 있는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원래 인간은 하나님을 위한 존재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가 좋든 싫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은 자신이 자신의 주인인 줄 알고 살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하여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종의 속성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주인이 될 능력이 없습니다. 자기 딴에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을 위하여 열심히 산 것 같은데, 결과를 보면 돈과 재산이나 명예나 권력, 쾌락이나 집착 같은, 자신을 종으로 삼은 그 무엇인가를 위하여 일평생 허덕이며 살아온 꼴이 됩니다. 피조물이며 종 체질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육신의 종이 되고 마귀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귀는 이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인간을 교묘히 조종하여 마귀의 종이 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또 하나의 기능은 바로 그것입니다. 울타리와 줄처럼 가두고 묶어서 율법의 종이 되게 함으로써 죄악과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구원이 이루어지기까지 율법의 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만 온전히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사 우리를 죄와 사망의 사슬에서 풀어내어 자유하게 하신 것입니다. 결코 인간 스스로 헤어날 수 없는 속박에서 우리를 풀어내신 것입니다. 그 자유는 물론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자신의 주인행세를 하려고 하고, 자신도 모르게 누구에겐가, 무엇에겐가 종이 되려고 하는 종의 속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놔놓으면 어찌 되겠습니까? 모두가 육체의 종이 되어 육체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함으로 서로의 종이 되라.”

신명기 15장에는 ’만일 동족 히브리 남자나 여자가 너에게 팔려 종이 되어 육년을 섬겼다면 제칠년에는 놓아 자유케 하라, 그를 빈손으로 가게 말고 풍성히 주어 보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서 ’만일 종이 너와 네 집을 사랑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을 말씀하는 것입니까? 진정한 종은 막강한 권력이나 강제적인 힘에 굴복하여 되는 종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원하여 되는 종입니다. 그 송곳이 무엇이며, 문은 무엇이며, 귀는 무엇이며, 뚫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만유의 주이신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섬기려고, 목숨까지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마치 문에다 대고 송곳으로 똟은 것처럼 십자가에 손과 발, 그리고 가슴까지 뚫림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사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풀어 자유케 하신 주님께 이제는 우리가 종이 되어야 합니다. 결코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육체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으로 주님을 섬기고 순종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그 사랑, 그 순종으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십니다. 이것이 새 율법, 새 계명이라 하십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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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학문적인 검증이나 개혁신앙적 뒷받침을 받는 책은 아닌거 같은데요,

중요한 내용들이 있어서 올려봅니다.

특히 칼빈신학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어거스틴에 대한 평가에 관해 어떻게 생각들 하시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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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의 신화 - 프란시스(프란치스코) & 어거스틴

 


* 이 글은 「천주교는 기독교와 다릅니다」(도서출판 두루마리, 02-2277-8087)에 들어 있는 글이다. 이 글의 프란시스 부분은 "Mission to Catholics International"(P.O. Box 19280, San Diego, CA 92159, USA)에서 발간한 「St. Francis: The Man and The Myth」를 역자가 번역한 것이고, 어거스틴 부분은 구영재 선교사가 지은 「에큐메니즘의 이상과 우상」(도서 출판 안티오크 출간)에서 발췌한 것이다.



성자가 아닌 성도


사탄이 로마 종교를 이용하여 성취한 가장 악독한 일중 하나는 기독교의 성도 말살이다. 먼저 '성자' 혹은 '성인'(Saint)이란 단어로 회칠 당한 '성도'(Saint)란 단어를 생각해 보자. 종교는 금욕주의, 고행 등을 통해 도를 닦음으로써 자기 구속을 시도한다. 로마 종교의 성자들의 전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의 성자 개념이란 결국 모두가 엘리트 의식으로 가득한 인간중심주의와 남이 엄두도 못 낼 일들을 해낸 인간 자랑인 것이다. 사탄은 로마종교를 통해 수많은 인간 성자(?)들을 양산해 놓고 예수님께로 가는 길을 흐리게 해왔다. 그들은 구원의 초점을 하나님의 아들에게서부터 인간들에게 두려고 온갖 술수를 꾸며왔다.


살아있는 죄인인 교황이 성자 추대식이라는 기이한 의식을 통해 죽은 죄인들을 성자로 대량 생산하는 것을 보고도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기이히 여기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마지막 나팔불 때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감히 죄인인 한 인간이 버젓이 행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당연히 생각한다. 로마 교황청은 지금까지 2천명이 넘는 성자들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베트남 성자를 추대해 주지 않는다고 로마 교황청에 항의하고 있다. 최근에는 너무 많은 성자를 만들지 않았나 하고 자책하는 로마 교황청의 기사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었다.



날조된 성자들


한때 로마 카톨릭 교회의 중(승려)이었다가 진리를 찾아 로마 종교를 떠난 후,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다시 살아난 중」(The Monk Who Lived Again)이란 책을 펴낸 몬타노 박사는 카톨릭의 도미니칸파 소속의 유능한 작가였다. 그는 어느 날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포레스(Porres, 1579-1639)의 전기를 쓰라는 명령을 시달받았다. 그는 남미 페루의 도미니칸파 소속의 포레스를 성자로 추대하기 위한 로마 교황청의 결정에 따라 전기를 써야만 했으나, 한번도 그를 만나 본적이 없었다. 결국 얼마 되지도 않는 자료를 갖고 또 성자 추대에 필수적인 기적에 관한 자료도 보완해야만 했던 몬타노 박사는 자신의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포레스의 전기를 꾸며 로마 교황청에 전달하였다. 그리하여 포레스는 1962년에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성자로 추대되었다. 순전히 몬타노 박사에 의해 조작된 이 성자는 오늘날 페루의 사회 정의 구현의 수호 성인이 되어있고, 이 날조된 성자는 대영백과사전 안에 버젓이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Porres, San Martin de,란 참조바람).


사탄은 모조품 로마 종교의 당위성을 주장해 왔고, 인류를 속이기 위해 벨기에의 제수이트들(예수회 사제들)인 볼란디스트(Bollandists)파들을 동원하여 17-20세기에 이르는 3백년이란 세월 동안에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자들의 이야기를 집대성한 「악타 쌍토룸」(Acta Sanctourum)을 편찬하였다. 전 유럽에서 일어난 제수이트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업은 벨기에의 앤트워프, 브뤼셀 등지에서 계속되었고, 오늘날 이 책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순교사로 여겨지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 목사들이 강대상에서 인용하는 로마종교의 성자들의 전기란 거의 모두가 이 책에서 유래된 것이다.


볼란디스트파의 우두머리였던 델레하예(1859-1941)는 그의 저서 「성자들의 전설」(The Legends of the Saints)에서 성자들에 관한 전설과 참된 전기 사이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시인하였다. 또 다른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학자인 도널드 아트워트는 「성자 사전」(The Avenel Dictionary of Saints)에서 "초기 순교자들에 대해 기록된 많은 것 중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적은 부분에 불과하다...많은 부분이 순전히 가공적(꾸며낸) 이야기이며, 나머지는 전설과 전기의 배합물이다" 라고 시인하였다.



프란시스와 신화


이탈리아의 종교사에서 아씨시의 프란시스만큼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겉으로 볼 때 그의 삶은 매우 겸손했고 단순했으므로 카톨릭 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들 모두 그에게 매혹되었다. 확실히 그는 그 당시에 보기 드문 수도승이었다. 빛나는 갑옷을 자랑하는 기사들의 전성기에, 또 카톨릭 교회가 세속화의 절정기에 다다랐던 시기에, 이 보잘 것 없는 수도승은 가난과 단순한 삶과 어떤 신비적인 것을 가르치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격동의 시기에 프란시스는 가난을 외치며 단순한 삶을 주장했고 그로 인해 매우 유명해졌다. 이런 말을 하면 그의 명예가 훼손될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이 모든 것이,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간에, 프란시스 자신이 계획한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왜냐햐면 큰 욕망과 야망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그런 욕망을 달성하려 하기 때문이다.


프란시스는 참으로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다. 젊어서부터 그는 유명한 기사가 되려 했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상인이었고, 따라서 자기 아들에게 이탈리아 사람의 품위에 걸맞는 매우 섬세한 옷과 멋있는 갑옷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래서 나이 든 사람들은 비록 그가 젊어서는 난폭했지만 후일에 유명한 사람이 될 것으로 예견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언젠가 이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볼 것이오."


성 보나벤튜어(St. Bonaventure)에 따르면, 아씨시에는 아주 단순한 삶을 살아가는 마치 예언자 같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사람은 프란시스를 만날 때마다 자기 망토를 벗어 프란시스의 발 밑에 펼쳐 놓고 프란시스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렇게 경의를 표함으로써 나는 후대에 그가 전세계적으로 존경을 받을 것임을 확신한다."


사실 이와 같은 일들은 쉽게 사람들의 머리 속으로 들어가 영구히 자리를 잡곤한다. 실제로 프란시스의 전기작가 중 하나는 그가 언제나 모든 것에서 앞서기를 원했다고 기록한다. 프란시스의 전기작가인 엥글레베르트(Omer Englebert)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프란시스의 야망이 자기 아버지의 집에서 옷을 재거나 자기 돈으로 먹여 살린 무리들과 함께 성대한 잔치를 여는 것으로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프란시스의 아버지는 그의 어머니가 프란시스로부터 기대했던 것보다는 덜 영적인 것을 기대했다. 그는 프란시스가 귀족의 대열에 낄 것을 소망했다. 사실 영광스럽게 이러한 것을 성취하는 길은 기사가 되는 것이었다. 1201년에 페루지아는 아씨시에게 전쟁을 선포했고, 이 전쟁은 거의 10년이나 지속되었다. 1201년 11월에 프란시스는 폰테 산 지오바니 전쟁에서 용맹스럽게 싸웠으나 포로로 잡혀 페루지아에서 다른 기사들과 더불어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매우 즐겁게 생활을 했고, 그래서 그의 동료 중 하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니 도대체 당신 미쳤소? 우리가 이렇게 감옥살이를 하는데 농담이나 하고, 어찌된 일입니까?" 그런데 프란시스의 대답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내 앞에 펼쳐질 미래를 생각해 보고, 언젠가 온 세상이 나를 숭배할 것을 생각해 볼 때 어찌 내가 슬퍼할 수 있겠소?"


그가 감옥에서 풀려난 뒤, 교황청과 아플리아 지방이 전쟁을 하게 되었다. 프란시스는 이때야말로 자신이 기사가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자기 아버지의 돈으로 산 멋있는 갑옷을 입고, 그와 그의 종자는 교황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로마로 갈 준비를 했다. 떠나기 바로 전날 밤에 그는 매우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고, 그때부터 이 꿈은 프란시스가 야망을 이루는 것을 도와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바로 그날 밤에 프란시스가 회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셀라노의 토마스는 최소한 그때부터 "그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말한다.


첫 번째 꿈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의 옷감 파는 가게가 멋있는 무기, 안장 등으로 가득 찬 궁전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고, 또 방에 앉아서 신랑을 기다리고 있는 매우 아름다운 신부를 보게 되었다. 프란시스가 영문을 몰라 놀라자, 어떤 목소리가 들리면서 그 아름다운 여인과 군인들이 모두 다 그를 위해 예비된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에 프란시스는 아마도 이 꿈이 전쟁에서 자신이 승리할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떤 어두움 같은 것이 그를 덮으면서 그가 내린 해석이 틀렸음을 확신시켜 주었다.

그 다음날 그가 스폴레토에서 꿈을 꾸었는데, 그 음성이 다시 그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프란시스, 도대체 이 모습을 하고 어디에 가고 있느냐?" "나는 지금 아플리아에 가서 전쟁에 나가려고 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그러나 그 음성은 계속해서 말했다. "주인과 종 중 누구에게서 네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프란시스가 대답했다. "물론 주인에게서 입니다." "그렇다면 네가 의지하는 주인을 따르지 않고 왜 종을 따르느냐?" "주여,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프란시스는 물어 보았다. "네 나라로 돌아가라. 그곳에 가면 네가 할 일을 계시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이 꿈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프란시스는 전쟁터에 가지 않고 되돌아간 것을 전혀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예전보다 더 즐거워 보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 여러분은 언젠가 내가 바로 내가 원하던 그 위대한 왕자가 된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뒤, 그가 자기 친구들에게 마지막 향연을 베풀고 아씨시의 거리를 통과하여 음악 행진을 하다가 그들로부터 좀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는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는 강물같이 넘쳐나는 사랑 속에 빠져들게 되어 황홀감에 젖게 되었고 꼼짝하지 않고 아무 것도 보거나 듣지 못한 채 그곳에 서 있었다고 토마스 사제는 기록한다.


그때부터 사랑이 그의 무기가 되었으며, 급기야 프란시스파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랑을 능가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진리를 사랑하셨기에 예수님께서는 성경기록관들(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지만, 프란시스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화를 내시며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 주던 자들의 의자를 뒤엎으셨으나, 프란시스는 모든 종류의 노여움이 죄라고 생각했고 어떤 폭력이든지 다 증오했다. 심지어 그를 흠모하는 엥글레베르트조차도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용감했던 프란시스는 가난과 고난 속에서 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모방하려 했고, 어떤 새로운 업적을 고안해내며, 사랑과 인자함에서 예수님을 능가해 보려 했으며, 순교자가 되려 했고 끝내는 수난의 표적과 함께 죽고자 했다."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 가운데 사랑과 인자함에서 예수님을 능가해 보려는 것 자체가 극도의 교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프란시스는 디도서 3:5와는 대조적으로 선한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되려 했으며, 또한 갈보리에서의 예수님의 승리를 포함한 예수 그리스도만이 받으실 수 있는 영광을 스스로 추구했다. 그는 또한 자신의 글이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갖고 있는 것처럼 주장했다. 그는 모든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끝에서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내가 청하노니, 이 편지를 받는 모든 이들은 은총으로 더불어 이 편지를 받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온 귀한 말씀으로 이 편지를 받으라."


크게 되고자 한 프란시스의 야망은 그의 회심 이후에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단지 크게 되기 위한 방법과 수단만이 달라졌던 것이다. 프란시스는 스스로 기사도에 대한 정의를 바꾸면서까지도 자신이 꿈꾸어온 유명한 기사가 되려 했다. 회심 후 몇 년간, 그는 자신을 수장으로 두고 조심스럽게 새로운 기사 군대를 조직했다. 그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깃발을 드는 자"요, "위대한 왕의 전령"이라고 선포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원탁의 기사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기사들은 각각 부인이 있어야 했으며, 그의 부인은 '가난'이었다. 그는 바로 그것이 자기가 꿈에 본 것을 이루는 것이라고 믿었다. 밖에서는 그가 포베렐로(가난한 소자) 였지만, 안에서는 자기의 상상 속에서 위대한 기사였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프란시스의 작품 중 몇 가지를 조심스럽게 선택해서 널리 배포시켰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저 유명한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 이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그러나 사실 이것은 다섯 개의 절 중 하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나머지 네 절은 음악에 맞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따라서 카톨릭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네 절을 아는 곳은 없다. 이 구절만이 유명하게 된 것은 아마도 카톨릭 교회가 그의 매력적인 이미지를 보존하기 위해 프란시스의 작품을 교묘하게 편집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프란시스의 작품을 정밀하게 조사해 보면 그의 신학이 전적으로 로마 카톨릭 신학임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프란시스에 따르면, 구원은 선한 행위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례전을 통해 오게 된다. 그 예로 평화의 기도의 마지막 부분을 유의해 보기 바란다. "......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어느 누구도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선한 행위를 통해 구원받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서신에서 구원이란 종교적 행위나 도덕적 행위와 무관하게 오직 믿음을 통해 은혜에 의해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는 로마서 4장 4,5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으며, 이 구절은 한 마디로 그의 교리를 요약해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보상이 은혜로 간주되지 않고, 빚으로 간주되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게 하시는 그분을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이 의로 여겨지느니라."(롬4:4-5)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주신 영감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를 의롭게 하시되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 그리하신다. 그런데 프란시스는 저주받을 다른 복음을 전했으니, 이는 그가 믿음에 대해 많이 이야기했지만 사람이 구원받게 되는 것이 오직 그 믿음만을 통한 것은 아니었다고 믿었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프란시스는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선한 행위를 하고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고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톨릭 교도여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제 우리는 모두 카톨릭 신앙에 매달리자. 교회에 부지런히 참석하고 신부들을 공경하되 죄인일지도 모를 그 사람들(신부들)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는 성직 때문에 그들을 공경하자. 이 신부들만이 제단 위에서 우리 주님의 가장 거룩한 몸과 피를 거룩하게 만들며 그것을 받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 이 구절의 문맥상 우리는 프란시스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앙, 즉 미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란시스를 극구 칭찬하는 프로테스탄트 작가들은 아마도 그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다음의 글에는 미사와 신부직에 대한 프란시스의 견해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모든 죄를 신부에게 고해야만 한다. 그리고 신부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야만 하니 이는 그의 몸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는 자는 결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음이니라." 프란시스에 따르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공력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사를 드릴 때에 그분에게 연합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공력에 의해 우리 스스로를 구원시킬 것을 원하고 있으며, 우리는 순수한 마음과 정결한 몸으로 그분의 몸과 그분의 피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연합된다."


심지어 프란시스는 성체 즉 빵조각을 담고 있는 그릇들이 귀하고 거룩하므로 경의를 표해야만 한다고 가르쳤다. "미사를 기념하기 위해 사용되는 거룩한 그릇들과 기타 다른 모든 것은 귀한 것으로 존중히 여겨야 한다."


프란시스가 행위에 의한 구원을 가르친 것은 다음 구절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이제 우리는 사랑과 겸손을 실천하며 가난한 자들을 돕는 일에 관대해야만 하나니, 이는 구제하는 것이 죄로부터 사람의 혼을 깨끗케 만들기 때문이다. 금식에 관해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것을 준수하며 과다하게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을 늘 피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그러나 참된 금식은 삼가 죄와 나쁜 습관을 멀리하는 것이다."


우리가 삼가 죄와 나쁜 습관을 멀리하며 사랑과 긍휼을 보여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크리스천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프란시스는 신부에게 죄를 고하는 것과 미사에 참석하는 것과 더불어 이런 행위들이 구원에 필요하다고 믿었다. 프란시스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선한 행위란 우리의 죄로 인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끝내 놓으신 일을 감사하는 구원받은 자들의 삶에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선한 행위도 우리 자신의 구원을 위한 속죄 값으로 하나님께 드려질 때에는 더러운 누더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2장 8-10절에서 먼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받는 것을 적고, 그 뒤에 선한 행위의 삶을 적었던 것이다. "너희가 은혜에 의해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이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는 그분의 작품이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피조되었으니, 이 일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라."(엡2:8-10)


우리가 행하는 선한 행위는 은혜를 통해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작품이 되었을 때 에야만 비로소 거룩한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프란시스는 이 점을 깨닫지 못했고 선한 행위와 로마 카톨릭 교회의 권위와 예식에 복종하는 것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아마도 프란시스는 자신이 청빈생활을 주장했으므로 그 당시 카톨릭 교회들의 물질 만능주의에 놀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카톨릭 교회의 교리 및 권위에는 절대적으로 충성했다. 물론 이 "가난한 소자"는 예언된 대로 전세계의 추앙을 받게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아씨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상태는 매우 비참하며, 이 사실은 프란시스가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그분을 버리면서까지 유명하게 되었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연옥의 창시자 어거스틴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지 않고 교회가 머리가 되는 소위 "교회교"를 창설한 오리겐을 위시하여 초대 교부들은 교회사에서 엄청난 망언의 씨를 뿌렸다. 이 열매들은 첫 정치 신학자 유세비우스에 의해, 암브로스와 어거스틴 등을 통해 로마 교회 안에 자리잡았다. 그런데 우리네 기독교회사는 성경에도 없는 '바울-어거스틴-루터'라는 족보까지 만들어 놓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어거스틴의 사상에서 출발했다고 말하고 있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찌꺼기를 청산하지 못한 개혁 교회는 이제 '메시지' 대신에 '미사' 곡까지 교회 안에서 연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 철학과 성경을 통합시키려는 욕망에 불탔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이 신의 영감을 받았음으로 그 기원이 신성하며 신의 말씀과 동일하다는 그릇된 가정하에서 자신들의 해석체계를 정립했다. 유다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Christ-Killer)이란 죄명을 씌운 로마 교회는 오리겐이 주장한 "유다인들의 개종, 추방, 멸종"의 3단계 이론을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의로 삼아 오늘날에까지도 이것을 시행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오리겐의 비유적 성경 해석을 취하며 참 이스라엘, 즉 아브라함의 육체에서 난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송두리째 제거시켰고, 교회가 이스라엘이라는 논증을 들고 나섰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 생긴 "그리스도의 교회"는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교회"이며,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인 것이다.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국가-교회"(State-Church)를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반면에 교황들은 세상 군주들을 교황권 아래 두고 다스리는 "교회-국가"를 이상적인 모델로 보았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위해 지상의 평화가 유지되어야만 하며 국가가 교회에 의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였으며, 오직 "교회-국가"만이 이를 실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유럽교회의 성서로 불려진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원제목은「이교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도성」임)이라는 역사사회 철학서는 예수님의 복음에다 키케로, 마니, 플라톤 등의 이교사상을 혼합시킨 것으로, 카톨릭 교회가 지상에 교회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필요한 정치적 이론을 발전시키는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로 대치시킨 이 사람들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문자 그대로의 왕국 대신에 교회가 세상 권력을 지배하는 가시적인 교회왕국을 건설하려했다. 이것이 바로 카톨릭 주의가 처음부터 주장해온 무천년주의의 핵심 내용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부로 남아 있어야 할 로마 교회가 국가와 함께 잠 자리를 같이하였을 때, 사탄은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극적인 회심을 했으며 사도 바울의 논리성에 견줄만한 논리성을 갖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이라는 종교적 천재를 기독교회사에 출현시켰다. 사실 어거스틴은 어거스틴 연구가들에 의해 실제보다 매우 다르게 미화되어 있다. 그는 국가 교회로 전락한 로마 교회 안에서 방황하다가, 결국은 교권에 밀착하고 말았다. 제롬, 베드(Bede, 673-735) 등이 "옛 바빌론의 딸"로 간주한 신약의 "로마의 멸망"을 변호하기 위해 결국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쓰게 되었고, 이 책은 4세기경에 "국가-종교"의 모든 신학적 문제에 대한 조직적인 해답까지 제공하였다.


A.D. 410년, '영원한 도성(?)'으로 간주되어온 로마가 흔들리자 카톨릭 교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충격을 받게 되었다. 사실 「하나님의 도성」이란 표현은 오리겐과 유세비우스의 글에도 빈번하게 나타난다. 유세비우스는 시편 87:3을 주로 공격하면서,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의 도성이 될 수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성경의 예루살렘이 아예 존재치 않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은 이같은 유세비우스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옛 바빌론의 "도시-국가"(City-state)에 뿌리를 둔 그리스의 폴리스는 단순히 사람들이 모여 같이 사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지역, 종교, 법, 문화 도덕 등 모든 것이 같아야함을 의미했고, 어거스틴의 도시 개념 또한 정치와 종교가, 즉 카이사르와 그리스도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도시-국가"(City-state)였다. 어거스틴은 여러 곳에서 누누이 「하나님의 도성」이 곧 카톨릭 교회임을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도성은 거룩한 교회이다.."(8권 24), "...그의 교회인 하나님의 도성..."(15권 26), "...하나님의 도성인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16권 2), "...하나님의 도성에 대하여, 즉 교회에 대하여..."(시편주해 71:18), "...하나님의 도성이 거룩한 교회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시편주해 98:4). 독자께서는 부디 그가 말하는 교회란 다름 아닌 카톨릭 교회라는 것을 명심하기 바란다.


어거스틴의 스승인 암브로스(Ambrose, 339-397)는 성골, 유물, 마리아 숭배사상 등을 로마 교회 안에 들여놓은 첫 교부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귀족주의적인 권위주의자였다. 그는 카톨릭 교회를 위해 세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로, 그는 로마 교회에 대한 국가의 간섭을 일체 배제하였고, 믿음에 관한 영역에 있어서 주교는 기독황제를 판단할 수가 있으나 황제는 주교를 판단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둘째로, 그는 국가는 어떠한 환경에서든지 기독교의 도덕 규범을 존중해야 하며, 데살로니카에서의 반란 진압시 특별히 잔인성을 보인 데오도시우스 대제에게 교회에서 참해(고해성사)할 것을 강요하였다. 세째로, 암브로스는 교회와 국가간의 긴밀한 결속관계를 추구하였고 이 일이 교회에 크게 유익하리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자신의 주장에 대한 절대적인 고집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 로마 카톨릭 교회의 왕자였다. 로마 제국과 앞으로의 모든 황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의 권위와 권세를 지속시키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그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도나티스트(Donatists)파는 그들의 신학자였던 티코니우스(Tyconius)의 지도 아래 흠없고 순수한 교회를 동경하였다. 어거스틴도 그를 흠모하였으나, 도나티스트들을 향하여는 "교회와 국가는 독립된 권력이 아니라 하나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카톨릭 공회는 콘스탄틴 대제에게 도나티스트들을 제재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317년에 교회는 군대를 동원하여 도나티스트들을 살해하고 그들의 재산을 파괴하고 몰수하였다. 그리고 404년에는 "화합 칙령"(Editct of Unity) 아래서 그들을 박해하였다.


파라(F.W.Farrar, 1831-1903)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어거스틴은 처음으로 성경을 짜맞추어 '이스라엘이 교회'라는 해석을 이끌어낸 사람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의 성경해석 체계에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결점이 있다. 그는 교회, 즉 카톨릭 교회의 정설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야만 하며, 어떠한 성구도 다른 어느 것에 따라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을 정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원칙이란 교권이 성경의 권위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의 권위가 나로 하여금 복음을 향하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복음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카톨릭 교회의 권위가 지지해주고 있는 성경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통해 지시되어 있는 구원의 길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다. 교회는 오류가 없으며, 구원은 오직 교회에만 맡겨져 있고, 따라서 교회에 속해 있는 것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오류 투성이였던 교회로 대치시켜버림으로써, 어거스틴은 철저하게 "사탄의 교회교"를 세웠고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의 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에게는 교회 자체가 진리의 표준이었고, 따라서 교회가 복종해야만 하는 어떤 권위나 교회를 판단하는 교회 이상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이 교회의 책, 즉 교회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책이 아니란 사실이다. 오히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계시록 2:7이 말씀해주듯이, 교회는 성경 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을 받는 피조물이다. 이런 것을 깨닫지 못한채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교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여 뜯어 고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 이후로 로마 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변개시켜왔던 것이다.


어거스틴이 제공한 하나님의 도성의 비전을 가지고, 로마 교회는 세속적인 권세를 차곡 차곡 쌓아나갔다. 그들은 콘스탄틴의 기증서 등의 위조문서를 만들어 자신들을 합법화하려 했으나, 이것들이 위조된 것임을 밝혀 낸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로마 교회 내의 니콜라스(Nicholas of Cusa, 1401-1464)였고, 7년 후에는 발라(Lorenzo Valla, 1406-1457)가 더 정확히 그 문서의 허위성을 증명하였다. 「하나님의 도성」은 신성로마제국의 첫 황제인 샬르마뉴(Charlemagne, 742-814) 대제의 정치 교과서가 되었다. 또한 이 책은 "로마의 통치자는 천국의 안수를 받은 자"라고 선언하며 십자군 원정을 선동하여 수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해한 성 베르나(Bernard de Clairvaux, 1090-1153)를 부추겼다.


카톨릭 교회의 부패로 인해 중세 때에 이미 프란시스칸파는 여우로, 도미니칸파는 늑대로 불렸고, 위클리프(John Wycliffe, 1330-1384)는 계속해서 칼멜파 및 어거스틴파의 만행을 폭로했다. 12세기의 오토(Otto of Freising, 1114/15-1158, 독일의 주교, 사가, 신학자)는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이 로마 제국의 연장인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서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이론을 펼쳐나감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발전을 부채질하였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어거스틴의 비전 위에 아리스토텔레스적 요소들을 첨가해서 신성로마제국을 옹호했으며, 그 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합스부르크(Hapsburg/Habichtsburg/Hawk's Castle)가를 역사 안에 등장시켰다. 또한 로마 교회는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belli, 1469-1527)의 굳건한 독재주의 이론을 첨가시켜 로마 카톨릭 군주들을 늘 로마의 중심으로 모이게 하였다.


루터의 개혁(Reformation)이 로마 교황청과 합스부르크가를 흔들기는 하였으나,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495-1556)의 반개혁과 이어서 일어난 카톨릭의 르네상스를 통해 로마 카톨릭 교회는 더욱 더 조직화되었다. 그 결과 교황의 문장(Papal Coat of Arms)이 모든 도시 및 촌락의 중요한 자리에 나붙게 되었고, 로마 교황청은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화가를 비롯한 모든 예술분야의 재능가들을 로마 교회로 끌어들였다.


루터의 개혁은 하나님 앞에서 성도 모두가 동등한 만인 성직자(제사장, 벧전 2:9,10)임을 확신시켜주었다. 반면에 옛 그리스 및 로마의 혼합된 사상에 뿌리를 둔 반개혁사상은 루터가 크게 훼손시킨 성직자 계급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데 총력을 기울였고,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을 철저하게 구분지었다. 이들은 특별한 의장, 타이틀, 행동 규범을 고안하여 성직자를 구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그 결과 중세 암흑시대를 능가하는 성직자 무리가 생산되고 말았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란 뜻의 '평신도'라는 말은 다른 예수(고후 11:4)로 둔갑하여 죄를 사하는 권세를 휘둘렀던 사제들에게 종속된 백성을 의미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통해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편협하고 미신적이며 거의 무당에 가까운 사람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그녀가 자기 아들의 사회적 신분 유지 및 세상적 출세를 위해서 아들까지 낳고 동거중인 그의 내연의 아내를 지옥으로 보낼 정도의 인격을 가진 여자이며, 인간양심의 도덕법마저 무시한 종교적 잔인성을 소유한 사림이라는 것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로마 교회의 거듭남의 개념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들은 위로부터 임하여 인간의 질을 재창조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어거스틴의 「고백록」이 들려주듯이, 로마 카톨릭 교회에 귀의하여 그 시스템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인간의 제도적 의식이 마치 거듭남인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사악한 카톨릭 주의의 제도에다 고해성사라는 또 다른 굴레를 하나 더 씌워주었다. 어거스틴의 수도원 규칙을 보면 아비 종교를 더욱 강조하여 아비 계급에 절대복종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사제를 '신부'(神父), 즉 하나님 아버지라 부른 것이다. 물론 영어권에서도 카톨릭 교회의 '사제'는 'Father'로 불린다. 그들은 베드로를 유일한 카톨릭 교회(One Chruch, the 'catholica')의 통일성으로 삼고 (제롬과 더불어 어거스틴이 만든 교황 리스트는 베드로를 첫 교황으로 인정하고 있다.), 교회의 특성을 머리 되신 그리스도에 두기보다는 '통일성, 보편성, 거룩성, 전통'에다 두고 있다. 3세기경에 오리겐의 "마리아 숭배사상"이 암브로스에게 왔을 때, 그는 "마리아 숭배사상"에다 "성물 숭배사상'을 더했고, 어거스틴은 이 모두에다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인정하는 연옥설을 보태어 "연옥설의 원조"가 되고 말았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고 말하였던 사도 바울의 서신은 그의 고백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영생에 이르는 구체적인 길, 즉 예수의 피를 통한 구원,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온 영혼으로 체험하였으며, 이 체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가지라고 권고했다. 그래서 그의 짧은 서신서들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라는 말이 무려 164회나 기록되었다. 그런데 영생의 심판자 노릇을 해온 카톨릭 교회 안에 안주한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온통 "카톨릭 교회"'로 차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이 사실은 그가 복음을 모방한 거짓 종교에 빠진 채, 침울하고도 우울한 종교적 위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인간의 종교성 테두리 안에서 끝없이 방황하였음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는 악의 비참함을 철저히 되씹음으로써 얻게 되는 종교적 위안을 통해 회한의 자리에 머물었다. 그는 회개를 통하여 예수님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자들이 누리는 기쁨을 찾지 못했고, 따라서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빌 3:13,14)는 환희를 찾지 못했다.


이에 대해 하르낙(Adolf Harnack, 1851-1930)교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카이사르적이고 동시에 어거스틴적인 로마 카톨릭 교회안에서 어거스틴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경험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부족하기 때문에, 혹은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울이 그토록 자상하게 설명한 은혜에 이르는 길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밖에서 어거스틴의 은총론 같은 인본주의 은총론을 들먹이고 있는 것인가? 어거스틴의 은총론이라는 것은 로마 교회의 공회 중 가장 사탄적인 공회로 알려진 트렌트 공회(154301563)가 결정하고 발표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의인론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바로 어거스틴파에 속하였던 루터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와 수도원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현대판 모니카와 어거스틴들을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들은 아직도 인간의 종교적 은총론에 갇혀 방황하고 있다. 이들은 부분적으로 성구도 인용하며 하나님의 은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들이 머물고 있는 반석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성모 교회, 즉 거룩한 어머니 교회 안에 안주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그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기에,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다."(딤후 3:5) 비록 그들이 베드로의 무덤을 뒤적이면서 살아나신 생명의 주를 찾고 있으나, 그들의 길은 결코 영생에 이르지 못하는 큰 길인 것이다.

출처: 개혁주의마을/좁은길을 걸으며

프랜시스 프랜지팬

[교회를 어지럽히는 험담의 악령을 추방하라 중에서 발췌]

 



사단은 항상 교회에 다른 사람을 흠잡는 귀신들을 내려 보낸다.
사단의 목적은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으려 함이다.


악한자가 이러한 공격을 하는 목적은

예수님의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하기 위함이다.


험담이 난무하면 교회는 완전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고

불완전한 인간들만 보게 된다.
이는 인간의 잘못과 실수에만 집중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감소시키려는 책동이다.

흠잡는 영의 임무는 인간관계를 파괴시키는 일이다.


이 사악한 영은 가족, 교회, 교회의 협력단체를 공략하면서

하나 됨을 파괴하고, 인간관계의 틈새를 벌려놓는다.

 

악한 영은 선한 것을 분별하는 척 하지만,

결국 교인을 판단하고 비판하게 만들어 놓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른 성도에 관한 태도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비판하는 사람들은 별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기도로 섬기기 싫은
마음을 비판으로 돌려대며 연막탄을 피우는 것이다.


남들이 비방하는 말만 듣고서 덩달아 비방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장본인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사정이 다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장본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비방선전에 가담하는 자들은

모두 형제/자매를 무고히 헐뜯는 자들이다.

흠잡는 영은 자신의 악마적인 본색을 가리기 위해

종교적인 복장으로 치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늘 귀'만한 잘못을 고쳐보겠다고

'약대 크기'의 사랑 없는 징계를 가하기도 한다.


송사하는 자의 배후에 있는 사악한 영은 반드시 분별되어져야 한다.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권징의 사역은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지 험담하는 자의 지시를 따라서는 안된다.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을 바로 잡으실 때,

예수님은 꾸짖는 말들을 칭찬과 약속의 말 중간에 껴 넣으셨다.


교회를 책망하는 주님의 입에서는

교회를 칭찬하고 격려해 주는 말도 함께 나왔다.


예수님은 항상 교회를 잘하라고 격려해 주시면서 고쳐주신다.

꾸짖는 말이나 징계의 말에 회복을 위한 은혜가 동반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 목자상의 음성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구의 음성인가?

진짜 양들은 가짜 목자의 음성을 들으면 도망가 버린다.


그러나 가짜 양들은 가짜 목자 주위로 몰려든다.
귀신의 역사가 강해지면 마음은 계속 조종당한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마 24:28)


야비한 성품을 가진 험담하는 자가 악 소문을 퍼트려면,

그것을 먹겠다고 독수리들이 모여든다.


악소문의 냄새가 일단 퍼지면,

죽은 짐승의 등을 파먹는 독수리 같은 자들이 금새 달려들어,
교인들에 대한 뒷소문을 마구 뜯어 먹는다.

 

생명보다 죽음을 더 좋아하는 자들은(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선호하는 자들은) 그리고 끌려 들어갈 것이다.

서로 상대방을 먹이로 삼는(prey)대신,

서로 상대방을 위해 기도해야(pray)한다.


 그러면 교우를 헐뜯는 영이 사라질 것이다.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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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도 떨어질 땐 아프다

                       최송연

                   
서걱서걱
갈대의 부딪는 소리
섶을 이루며 쌓여가고

스산한 갈바람
가야 할 길 재촉하니
한세상 미련 없다 했건만

모든 진액
아낌없이 쏟아붓다
이제 열매에 자리 내어준 채
떠나야 하는 것이 힘든 걸까

못다 한 사랑
뒤로해야 하기에
저토록 흔들리고 있는 걸까

그래,
낙엽도 떨어질 땐 아프다
너무 흔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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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일 한국을 방문한 '에이미 멀린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

출처 : http://www.bobaedream.co.kr/view?code=strange&No=820441








































▼에이미 멀린스: 역경의 기회





10월이 되면

과일들의 운명이 엇갈립니다.


마켓에서

여름을 한껏 누리며 풍미했던

수박과 포도는 내년을 기약하며 사라져갑니다.


겨울과 봄철에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소비자를 기쁘게 했던 오렌지는

가을이 되면서 가격이 급등하여 소비자의 외면을 받습니다.


그런가 하면

대추와 밤과 사과는

서서히 출하량을 늘려가며

소비자의 시선을 사로 잡습니다.


그러나 가을에는

뭐니뭐니 해도 머니가 아닌

감(persimmon)의 계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며칠 전,

2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리버싸이드의 감과수원 주인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올해에 감이 잘 익어서

딸 때가 되었으니 어서 와서

사진도 찍고 감도 따라고 알려 주시더군요.


다른 사람에게 알리기 전에

저에게 먼저 연락하셨다고 하시며

좋은 감을 많이 따가라고 하시길래 한걸음에 달려 갔습니다.



2015년엔,

날씨가 좋아서

감도 주렁주렁 매우 많이 열렸고,


또 평년보다

일조량이 많아서

예년보다 빨리 익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작년에는 감이 거의 열리지 않았습니다.


이유인즉,

2년 전에 감이 너무 많이 달려서

가지 치기(trim)를 좀 많이 하게 되었는데


그것 때문에

감이 열리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하시더군요,


또한 농사란 것이

한 해에 수확이 많으면

그 다음 해에 수확이 준다고들 합니다.



어쨌든,

저는 2년 전까지만 해도

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감을 많이 먹게 되면

다음날 아침 화장실에서

힘든 밀어내기 한판 승부를 벌여야만 했고,


또 홍시란 것은

먹기에는 맛이 있어도

먹고 나면, 손이나 입이 지저분해 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은

저절로 멀어지게 되더군요.



그런데 운명의 2년 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갈 무렵,

리버싸이드의 어느 감나무 과수원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사진도 찍고,

감도 따 먹으면서

일석이조의 기쁨을 누렸는데,


아!

그날 거기서 먹었던 감은

지금까지 감에 대한 저의 모든 선입관을 확 바꾸어 놓았습니다.


내 생애,

그렇게 맛있는 감을

따 먹어보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날 아침,

저는 화장실에서 힘든

밀어내기 한판 승부를 예상하며

마음을 굳게 먹고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10분 가지고는 안되겠지?

한 20분이면 승부가 날까?


머리 속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처럼 비장한 각오로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아랫배에 힘을 주는 순간,

힘든 밀어내기가 시작될 줄로만 알았는데


오 마이 굿 뉴스,

거시기가 가래떡 나오듯이

술술 잘도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약 10초간 끊임없이

술술 나오더니만 그걸로 상황 끝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습니다.


감을 많이 먹으면

변비가 생길 것이라는 생각은

실로 저의 완전한 오판이었습니다.



그날로부터 나는

감 매니아가 되었습니다.


2년 전에

그 과수원에 네 번 가서

사 가지고 온 감의 개수만 해도

500개가 족히 넘었는데 그것을 한 달 반만에...


이곳 과수원을 방문해서

그 감을 먹어본 사람은 알 것입니다.

리버싸이드 과수원의 감맛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작년에도 그 감을 먹고 싶었지만

감이 열리지 않았다는 말에 허탈 했는데


올해는 이처럼 감이 많이 열렸다니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리버싸이드 감 과수원 주인은

2년 전엔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휴식 시간도 빼앗기고 정말 귀찮았는데


올해는

이렇게 많은 과일을

그냥 썩히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서 감맛 보기를 원하시더군요.



감나무 과수원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와 노력과 비용, 그리고 물이 필요합니다.



아시는대로

작년과 올해는

100년 만의 대가뭄이라

물비용이 대대적으로 올랐습니다.


덩달아 모든 과일과

농수산물 값이 오르고 있는 중이죠.


하지만 이곳에서는

저렴한 비용으로 맛이 뛰어난,

완전 유기농 감을 맛보실 수 있습니다.



이 과수원의 감은

아무리 많이 먹어도

변비가 생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있던 변비도 해결해 줄 정도로 거시기가 술술...



너무나 맛있게 잘 익어서

보기만 해도 군침이 넘어가는 감도 많습니다.



위와 같이 잘 익은 감을

따지 않고 그냥 두게 되면 아래와 같이 됩니다.



벌이나 새가 와서

파먹을 뿐만 아니라...



땅에 떨어진 채

그대로 거름이 되어 버리죠.



물론 땅에 떨어진 감이

유기농 퇴비가 되어 주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땅에 떨어진 감이 무척 아깝겠지요?



지금 리버싸이드의

감과수원으로 달려 가시면

당신 생에 최고의 유기농 감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의는

951-352-2670 로 하시면 됩니다.

사진과 글 : 주안(powe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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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ward Avenue, Detroit, Michigan, in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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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lantic City,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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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in street of Memphis, north of Avenue Gayoso,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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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ion “Louisville-Nashville”, Florida, in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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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syth Street, Jacksonville, Florida,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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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each in Atlantic City,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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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t Avenue after an earthquake in San Francisco in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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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rts for transporting dairy Thompson, Washington,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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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hington, DC,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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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dillac Square, Detroit, Michigan,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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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nth Street, Washington DC,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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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St, Richmond.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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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ner of Fifth Avenue and 42nd Street, New York,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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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ad Street north of Spruce Street, Philadelphia,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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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of Manhattan Bridge from Brooklyn in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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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e at 55th Street, New York,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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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th Avenue, New York,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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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bash Avenue, Chicago,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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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York Public Library, New York,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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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l Street, New York,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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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th Avenue, New York,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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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hattan, NewYork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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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orthern part of Fifth Avenue, New York,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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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Hall ? City Hall in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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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xter Avenue and the Capitol, Montgomery, Alabama, in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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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nut Street, Cincinnati, Ohio,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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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shington, DC,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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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adway and the building of “The Times”, New York,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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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ze of Government in Cincinnati, Ohio, in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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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ton, MA,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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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erson Market court House New York,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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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 Central Station and Hotel, Manhattan, New York,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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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asury Building, Washington, DC,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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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 Office, Brooklyn, New York, 1906.

할례가 무엇인가?

뜨거운 한 여름 낮, 한 할머니가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신작로를 걷고 계셨습니다. 지나가던 트럭기사가 그 할머니가 측은하여 짐칸에 태워드렸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기사가 뒤를 돌아보니 그 할머니 트럭 짐칸에서 여전히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계신 겁니다. 흔들리는 트럭 짐칸에서 무거운 짐을 이고 계시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할머니, 그 짐 내려놓으세요.” 그 할머니가 대답하셨습니다. “아이구, 제가 탄 것만도 미안한데 짐까지 어떻게......”

우습습니까? 무지해서 저지르는 실수가 실수로 끝난다면 이해가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무지해서였다 해서 용서되지는 않습니다. 만일 그 때문에 사고라도 난다면 그 사고가 모르고 그런 것이라고 할머니를 봐 줄 것 같습니까? 사고는 인정사정 없습니다. 하와가 속아서 따먹었다 해서 그 범죄가 돌이켜질 수가 있습니까? 죄는 인정사정 없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것도 죄요, 속는 것도 죄입니다. 그래서 악한 자들이 우리를 속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모르는 것이 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속아서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렇게 무지하냐고 꾸짖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가 율법으로 되돌아가 할례를 받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을 파멸시키는 무지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희가 할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 줄 아느냐?’고 힐문합니다. 할례를 받는 자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진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요, 복음을 버리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버리고 도로 멍에를 메고 율법의 종이 되겠다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버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려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는 것입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원래 할례는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약속의 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밤하늘의 별을 가리키며 후손을 약속하신 다음 아브람이 ‘제가 무엇으로 알리이까?’ 하고 증표(證票)를 달라고 하자 아브람으로 하여금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여 그것들을 쪼개도록 하셨습니다. 쪼개는 것은 히브리어로 "브릿트"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브릿트 한 고기를 지키느라 솔개를 쫓았습니다. 그리고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풀무와 타는 횃불로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쪼개는 것, 곧 ‘브릿트’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브릿트'는 똑같은 발음으로 '쪼개다, 가르다, 자르다.'라는 뜻과 '약속하다'라는 뜻을 가지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내가 쪼갠다, 아니, 약속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아브라함에게는 지켜야 할 게 없고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고기를 쪼개는 "브릿트"를 하고 하나님은 약속하는 "브릿트"를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밤하늘 별과 같은 무수히 많은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그렇게 하나남과 "브릿트"를 해 놓고도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 하고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브릿트 한 소와 염소와 새를 솔개는 쫓았지만 까마귀가 오서 다 쪼아먹어 버린 모양입니다. 그 때가 아브라함이 86세 되던 해였습니다. 다시 세월이 흘러 아브람이 99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열국의 아비’ 아브라함과 ‘열국의 어미’ 사라로 고치시고 모든 남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치 "허어, 이거 나만 '브릿트'하고 나만 약속한 꼴이 됐구나, 너 '브릿트' 다시 해야겠다.. 이번엔 어디다 브릿트 할까? 그래, 아들의 약속이니까 거기에다 브릿트 하자."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후손을 기다리는 하나님과 약속한 백성이라는 표시의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때 그저 후손이 별처럼 많아질 것이라는 약속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16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의미하신 후손은 '단수'의 아들, 곧 온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의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후손, 곧 그리스도를 기다리겠다는 '브릿트' 약속인 할례는 율법과 함께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의 상징이 되고 말았고, 이제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버리고 떠나 도로 율법으로 돌아가도록 만드는 올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약속인 할례가 그리스도를 떠나 율법으로 되돌아가고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으로 악용되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일찍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신 것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하신 주님의 경계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할례와 율법을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를 베어버리기(브릿트)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 거짓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한 저주입니다.

"브릿트".......,
그렇습니다. 우리도 모두 브릿트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빼앗아가려는 모든 잘못된 가르침과 미혹과 이단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브릿트"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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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성장은 비(rain),

특히 강우량과 절대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나무가 잘 자라는 지역을

우림(rainforest) 지역이라고 말합니다.


우림이라는 말 앞에는

흔히 따라붙는 접두어가 있습니다.

바로 열대(The tropics)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림이라고 하면

모두들 열대 우림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우림에는

열대 우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대 우림외에도

온대 우림(Temperate rainforest)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열대 우림은

적도를 중심으로 하여

남북으로 위도 28도 사이의 우림지역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열대 우림은

지역을 중심으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온대 우림은

위도상으로 열대 우림 지역에 속해 있지 않습니다.


온대 우림 지역은

열대 우림 지역과 한참 멀어져 있지만

풍부한 강우량 때문에 나무가 잘 자라는 지역을 말하죠.


그래서 온대 우림은

위도와는 상관없이 연평균 강우량 1,400mm(55in) 이상,

그리고 연평균 기온이 39-54℉(4-12도)인 지역의 우림을 의미합니다.


미국의 서부 지역에도

온대 우림 지역이 있는데

그곳은 캘리포니아 북부에서부터

오리건과 워싱턴 주 일대의 해안지대입니다.


이 지역들이 모두

태평양 연안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Pacific Coastal Temperate Rainforest 라고 합니다.


이 지역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온대 우림 지역이

호 레인 포리스트(Hoh Rainforest)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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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레인 포리스트는

워싱턴 주의 올림픽 국립공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올림픽 국립공원은

미서부에서 강과 울창한 숲과

산과 바다를 동시에 품고있는 유일한 국립공원입니다.


노쓰 케스케이드나 Mt. 레이니어

요세미티나 킹스캐년, 그 어느 국립공원도

산과 숲과 바다를 동시에 품고 있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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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국립공원 전체가

온대 우림 지역이긴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솔 덕과

호 레인이 가장 유명한 온대 우림 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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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레인 포리스트는

그 이름이 의미하는대로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이끼 숲으로도 매우 유명한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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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뒤덮은 이끼 숲을 보면

매우 으스스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특히 비오는 날이나

안개낀 날은 더욱 그러한 느낌을 받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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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곳은

미국 젊은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New Moon 같은

뱀파이어 영화의 촬영지로 각광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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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지역에

왜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편서풍(westerlies)의 영향 때문입니다.


편서풍이란

북위 30-65도 지역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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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국립공원의

서쪽에서 불어오는 편서풍은

육지에 도달하기 전에 태평양의 풍부한 습기를 머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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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습기를 머금은 편서풍이

육지(워싱턴 주 북부)에 도달하게 되면


태평양 연안을 따라 형성된

거대 산맥인 캐스캐이드 레인지(Cascade Range)에 막혀

시애틀을 위시한 올림픽 국립공원 주변에 많은 비를 뿌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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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이 편서풍은

캐스캐이드에 도달하기 전에


올림픽 국립공원의

올림퍼스(Mt. Olympus, 7.980ft/ 2,430m) 산에 막혀서


산 아래쪽에 먼저 비를 뿌리는데

호 레인 포리스트가 그 비가 내리는 첫 번째 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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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레인포리스트의

연간 강수량은 3,550-4,320mm(약 140-170in)입니다.


늦가을부터 늦봄까지는

1주일 내내 비가 올 때도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루 동안에도 몇 번씩 비가 내리기도 하죠.


비오다가 개이고,

개였다가 다시 비가 오고

그러다가 개이고, 개였다가 또 다시 비가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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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번은

하루에 아홉 번 개였다가

열 번째 비가 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미국에서

변화무쌍한 날씨를 보여주는 곳이

씨애틀과 이곳 올림픽 국립공원 일대인데


그 중에서도

호 레인포리스트의 날씨가 가장 변화무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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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레인 포리스트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아도

하늘을 보기란 좀처럼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호 레인포리스트의 70% 이상이

하늘을 가린 숲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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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레인포리스트에는

여러 개의 트레일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가장 유명한 트레일은

Hall of Mosses 트레일입니다.


0.8 마일의 이 길은

천천히 한 바퀴 도는데

약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립니다.


물론, 사진을 찍거나

서서 구경을 하다보면

1시간 이상 걸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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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ll of Mosses 길을 비롯한

이곳 호 레인포리스트는 두터운 이끼들로 덮여있는데


이곳에 이처럼

이끼가 두텁게 덮이는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비와 울창한 숲덕택입니다.


그래서

한낮에 해가

아무리 내리쬐어도

울창한 숲으로 인하여

그 빛이 바닥까지 도달하지 못합니다.


바닥이

늘 습하고 축축하다보니

바닥과 나부 주변이 온통 이끼로 뒤덮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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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는

바위에나 끼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호 레인포리스트의 이끼들은

나무를 온통 뒤덮고 있을 뿐만 아니라

때로는 나무에 치렁치렁 걸려있을 정도로 많습니다.


호 레인 포리스트에 가신다면

당신은 미국 서부에서 가장 신비하고 기이한 숲을 보게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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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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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마을/grace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기대한 만큼 채워지지 않는다고 초초해하지 마십시오
믿음과 희망을 갖고 최선을 다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더 사랑하지 못한다고 애 태우지 마십시오.
마음을 다해 사랑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지금 슬픔에 젖어 있다면
더 많은 눈물을 흘리지 못한다고 자신을 탓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흘린 눈물,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누군가를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다고 부끄러워 마십시오.
아파하면서 용서를 생각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모든 욕심을 버리지 못한다고 괴로워 마십시오
날마다 마음을 비우면서 괴로워한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빨리 달리지 못한다고 내 발걸음을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내 모습 그대로 최선을 다해 걷는 거기까지가 우리의 한계이고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움입니다.

세상의 모든 꽃과 잎은 더 아름답게
피지 못한다고 안달하지 않습니다.
자기 이름으로 피어난 거기까지가 꽃과 잎의 한계이고
그것이 최상의 아름다움입니다. 
                        

-담아온 글 -



강의노트(원종천교수님)-루터의 신학
글쓴이: 유니짱   06.06.22   http://cafe.daum.net/assistantpastor/1vjF/4

 

 

루터의 신학

원종천 교수


3/6

루터 당시의 신학과 현 시대의 신학과의 차이와 그 이유를 찾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루터 글 자체를 읽어야 한다.

1차 자료가 중요하다...

기본 교재 : 루터 저작선

강의 방법 : 강의, 발표, 평가

지정 도서 : 루터 전(영문)선집(국문), 저작선, 2차 자료

성적 평가 : 루터 저작선의 한 부분을 가지고 연구, 씨름, 발표

           중간고사, 기말고사(오픈 북)

강의 : 3-4주 강의, 발표, 평가

과제물 : 매주 읽은 분량(발표 분량)을 읽어와야 한다.(for 토론)

        추가 과제물: 한 주제에 대해 한 페이지 내용으로 적어와야 한다.

주제: 사도신경, 주기도문 - 요리문답에 관한 설교들 1528(루터저작선 265-302)


*역사신학은 사상(신학)이 가장 중요하다.

*사상이 흐름을 주도하고, 사람의 마음과 심령을 주관한다.

*부흥운동도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부흥에도 사상의 틀과 내용이 있다.

*회심의 성경이 조금이 다르다.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유럽에는 조직신학이라는 말이 없고 역사신학에 포함되어 있다.

*루터가 무슨 생각을 했고, 왜 했는가는 찾아내야 한다.

*사상에는 분명한 배경이 있다. 상황에서의 필요성과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 당시의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요구와 질문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내용이라도 그 시각이 다르다.

*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16세기의 역사적 상황을 알아야 한다.

- 2차 자료를 볼 때, 루터의 신학의 사상에 대한 논문들을 보지 말고,

  루터가 살던 당시의 1)역사적 상황들을 보도록 해라.

약간의 상상이 필요하다.

2)역사적 배경 - 그 당시 전시대 상황을 봐야 한다. 그 시대의 사상을 봐야 한다.



3/13


1. 역사적 배경 - 사상적 배경(중세말, 14-15세기)

약간의 상상(추론)이 있어야 한다.


1)인문주의 배경(Humanism) -르네상스에서 나온 학문의 방법. 중세말

기독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성경해석학이다. 문헌연구가 발달(고전연구가 발달)

고전을 원문 그대로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 - 성경학자들이 성경에 도입(성경해석학)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는 사상방법론의 근원을 형성

- 문법, 역사적 해석방법(grammatical-historical)

: 고대문헌의 문법을 (그 의미대로)그대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문자적 해석), 영해하지 말라

영해에 대한 반발(알레고리컬 - 4가지 의미가 있다): 교회가 하고 싶은 말을 성경을 이용해서 했다고 봄,

거기에 대한 반발 루터는 문법적, 역사적 해석을 의도적으로 지키려고 함 -   한계를 느낌

 (대표적: 아가서-루터는 노력을 했지만, 칼빈은 침묵으로 일관)

루터는 영해에 대한 부담을 느낌 -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해할 수 있음을 인정

역사적 방법 - 본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연구.

역사적인 의미를 충실히 연구해야 한다.

루터는 성경구절을 많이 인용


- 논리학이 경시되는 경향이 나타남 - 중시시대에 성경을 연구하는데 많이 사용되는 방법론이었다(스콜라주의, 철학),

     그러나 더 이상은 안된다.

논리학 대신에 수사학(어떻게 내 의견을 잘 전달할 수 있는가?, 저자의 전달 방식을 연구, 설교학과 비슷),

문헌학(문법, 역사적 방법이 총망라, 누가 누구에게 무슨 이유로 어떠한 글로 전달하고 있는가?

문헌연구)이 발달 적용이 중요시 되었다.(설교가 될 수 있다) -종교개혁시대의 학문(신학)이 경건과 분리될 수 없었다.


2)교회의 타락(부패)

- 윤리적 타락(종교개혁자 대다수가 동의), 성직자들의 타락, 수도원의 타락(포괄적 타락)

- 종교 개혁의 힘의 원동력이 된다.(교회타락에 대한 분노) : 철저하게 폭로


* 루터 한 사람이 위대해서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적 배경이 있었기에 종교개혁이 가능했다.

  (인문주의라는 도구, 교회의 타락이 있었기에 가능)


루터에 있어서 윤리, 도덕의 강조가 있었다.

‘이신칭의’에 가려져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보는 사람이 있다.

개신교의 정치세력이 약화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 바로 정치세력의 윤리문제였다.

(윤리문제가 중요)

- 교회가 분열

- 교회가 (세속)정치화

- 영적인 무능력


3)공의회 주의(Coneiliarism) - 교회정치와 관련

- 종교개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구원론(이신칭의)’였다. 그러므로 교회정치는 좀 밀려 있었다.

- 마틴루터가 카톨릭과 논쟁할 때 교회정치에 대한 얘기가 1519년에 벌써 나오기 시작한다.(라이프니츠논쟁)

- 카톨릭에 있어서 가장 관심은 교회정치에 있었다.

  (권력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 교황과 종교회의의 관계(권위) :

종교회의를 교황의 권위 위에 두려는 시도(종교개혁전(위클리프의 공헌)의 종교개혁)

1814-1818년까지 종교회의를 위에 두었지만, 얼마가지 않았음. - 큰 의미가 있다.

교황의 성경적 권위가 없음을 밝힘.

- 종교회의도 무오하지 않다고 봄(공의회보다 한 단계 더 나간 의견)

루터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진술(1519년)이 됨(후스가 할 말의 반복이다),

 루터는 ‘성경만이 무오하다’고 말함.(궁극적 권위를 ‘성경’에 둠)


4)스콜라주의(Scholasticism)

- 방법론

: 지극히 철학적(헬라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

                  논리적(모순이 있어서는 안 된다, 상충되는 내용이 있어서는 안 된다,

                         믿음(윗영역-삼위일체)부분도 인정,

                              그러나 대부분이 이성으로 이해) 

         

:실제론(realism)이란 개념이 들어가 있다

   - 보편(universal,전칭,원형-완벽한 실재(선,악의 완벽한 것이 있다,

     이성(Logos, 신의 이성, 인간에게도 있다)이 그것을 꿰뚫어 알 수 있다)가 존재)

     신학도 이성으로 할 수 있다.

   - 개별(특징)

-내용

: ①성경의 범위 초월(논리적 추구로 교리가 성경의 범위를 넘어갈 수 있고, 있다고 봄)

 ②신앙적으로 불필요할 내용이 과다(신앙과 교회에 도움이 안되는 것이 많음)

   - 지적 호기심의 충족이 그 이유이다(근거가 불분명(비판))

 - 구원론

  ①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주입) 한다.(성령께서 역사하신다) : 전적 하나님의 은혜

      -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전제

  ②하나님의 은혜를 근거로 해서 윤리적인 협동(선행)이 일어난다. : 공로가 된다

        (신인협동협동설, 공로설)

  ③그 대가로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신다.

*루터는 헬라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철학(선한 사람의 개념 -  ①하나님께서 선의 기질(능력)을 주셔야(주입) 한다.

  ②열심히 선행을 노력해야 한다.   ③1번과 2번이 합하여 선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됨)의 영향으로 이러한 교리가 나왔다고 봄.


변형 ; 한 단계가 더 추가(유명론자들의 구원론)


①자연인의 선행노력(하나님께서 은혜주입을 주시는 기준이 됨) - 공로

②하나님의 은혜 주입

③윤리적 협동 - 공로

④영생

* 루터가 철저히 비판

(1510년 전 어느 쯤에 유명론자(스콜라주의자들의 붕괴에 공헌, 보편이나 원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 개별적인 것만 존재,

 보편은 이름에만 존재한다. 하나의 약속일 뿐이다.   대표자 : 오캄(Occam, 공의회주의자), 교황청에 대한 반박으로 나옴,

 교회개혁차원에서 나옴) 들의 잘못을 앎,  시편 강해 시 이러한 구원론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함)


5) 신비주의(수도원중심) - 하나님의 은혜 + 공로사상

루터 자신이 이 안에 들어가 있었다(수도사)


- 금욕주의

신학적 요소 중 하나가 공로사상이다.


- 수도원영성

새순교주의(안락한 생활로 인해 나태해진 그 전 순교에서 나타난 영성에 대한 갈망)

: 나를 쳐서 죽이는 영성(순교의 영성을 재현시키고자 하는 노력)

물질적 가난(소유욕의 차단)의 내면화(영적화)

: 새순교와 연결, 중세말에 물질적 가난이 영적, 내면화 되면서 영적, 내면적 가난을 주장

: 내면을 비우고, 동시에 기도를 통해서, 말씀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진리로 채우는 것.


* 루터가 1519년까지 긍정적으로 생각 (스콜라주의에 반해서 긍정, 공로사상을 발견하므로 부정적으로 봄)


2. 역사적 상황

루터가 태어난 당시 1500년 정도


1) 정치

 - 군주 : 내부평정과 외세축출(근본적 대상: 로마교회, 교황청)의 역할을 함(군주의 세력이 강화),

          민족주의(국수주의)가 강화

          독일 - 선제후의 힘이 강화(교황과 교황청에 대한 반감) :루터가 도움을 받음.


2) 사회적 상황

- 중상층(자본가)들의 형성 : 정치, 사회적으로 변화를 요구. 루터의 종교개혁에 동참.

- 인쇄술이 발달 : 루터의 사상이 전파되는데 문화적 도움을 줌.


3)종교적 상황

- 성직자들의 부패와 연결 : 영적 갈급함, 신앙이 미신화 되는 현상이 나타남.

           성례제도(7성례)

            - 고해성사(참회, 고백, 면죄, 보속)가 가장 영향을 미침.

             *13세기(1215년)에 공식화, 명문화

             *14세기(1343년)에 교회가 신학적 근거제시(‘공로의 보고’사상)   

             *공로의 보고 사상 - 잉여공로(예수그리스도, 마리아, 성인 등)가 교회에 축척되어 있다.

                 교황이 분배(면죄부 매매)가능.

             *15세기(1476년)에 이미 죽은 자를 위해 공로를 사 줄 수 있다는 신학 제시

             (보속의 문제와 연결, 합당한 형벌을 주는 것(정통-원래 죄사함과 상관없다. 왜곡이 됨: 루터가 비판))

- 연옥의 공포에서 살았다. 족쇄로 채우는 형태를 가졌다. (루터는 여기에서의 자유를 부르짖었다.)

  * 루터의 글을 보면, 울분과 분노, 애국심의 뉘앙스를 느낄 수 있다. (교회의 부패에 대한 분노)


**** 이러한 배경과 상황 속에서 루터는 종교개혁을 성공할 수 있었다. ****

* 루터는 새로운 것을 제공한다. 루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운동화 되어 버림.


3. 루터에 대한 이해

*신앙적 관점

-성경을 이해하려고 했던 신앙적, 신학적 통찰

-시대상황과 맞물려 엄청난 운동이 됨

-중세시대가 개혁운동이 될 만한 요건들을 갖추고 있었음.


1) 루터의 생애(1483-1546)

- 루터의 고뇌(수도사가 되기 전후 시기)

(1) 자신의 죄의식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없는 것.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거룩함으로 설 수 있는가?”

          * 교회의 대답 : 하나님의 은혜(성례, 객관적인 영적 실체가 주입된다고 봄.) + 자신의 선행(공로사상)

                루터의 질문 : “어디까지 선행해야 하는가?”

                            아무리 통회, 자백 해봐도 거룩하게 되지 않음을 자각.

                            스타우비츠(Staupitz)의 조언이 있음.


- 1512년에 신학 박사학위(성경학)를 받음.

- 1513년에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시편 강의 - 복음적 내용을 습득)

- 1513에서 1519년 사이에 회심체험(기도탑 체험) : ‘하나님의 의’ 개념과 연결

  하나님의 공의 심판 개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개념으로

  연결해야 함을 깨달음. 하나님의 의가 거래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응징적 의’가 아니라 ‘구속적 의’로 이해.

내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로를 만들어내셨기에, 그 공로를 믿음으로 


James Kittelson, Luther the Reformer를 참고...



2) 95개 조항(면죄부와 관련된 신학적, 교회 관련된 문제)

-1517년 10월 31일, 보속 문제(면죄부)와 관련해서..

- 요한 테쩨의 설교로 인해 자극을 받음

- 보속(형벌개념) 개념 그 자체의 문제

  치리, 훈련(치유, 상담)개념(긍정적의미)▶ 형벌개념(댓가를 치룸, 교회가 제정)

  ▶면죄부(교황의 죄사함(하나님과의 관계)의 개념까지 감)

   :루터가 비판한 부분...

   (교회가 제정한 형벌의 차원에서만 면죄가 가능, 죄사함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 배포된 내용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함.

   신학적 관심보다는 교회와 교황청(교황의 권위)에 대한 반감이 작용.

   교황의 권위가 궁극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듯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인식.

   교황이 심각한 것으로 인식

 - 1518년, 루터가 아우그스투스 총회에 참석해서 해명하는 기회를 가짐.

   하이델베르그 논제(스타우비츠가 조언, 죄, 자유의지, 은혜에 대한 문제 포함)

  : [십자가 신학]이 나옴 - 반대 [영광의 신학]

   (‘어떻게 하나님을 인식할 것인가’ - 고난과 낮아짐(십자가)속에서 인식가능)

   자연신학을 비판

- 1519년 라이프니찌 논쟁(교회 권위에 대항)


* 루터의 신학

1. 구원론(칭의론)

- 중세)하나님의 은혜를 강조, 그러나 인간의 공로가 들어가 있다.

- 이신칭의 - 공로가 없다

- 오직 믿음(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됨, 결혼으로 표현 - 칼빈에게 영향을 줌)▷연합 ▷죄, 의의 교환

   ▷칭의(외래적(alient) ‘의’(자기의 의가 없다), 수동적(passive) ‘의’, 전가된(impute) ‘의’)

-신비주의 : 독일신비주의에 대해 긍정(이유-스콜라주의가 너무 사색적이 되었기 때문에)

            1)내면적, 체험적, 훈련적, 수동적▷ 긍정적 요소가 많았다.(1518년까지)

           루터가 생각한 문제점 : ①내면적 겸손이 공로적 개념, 역할을 한다.

                                 ②신적 불꽃(영혼의 불꽃, synd(th)eresis,)  ▷인간에게 신적 요소가 있다.

                                    인간의 영혼이 신적인 것으로 상승(버나드는 예외), 공로적 사상이 들어가면 교만해 진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대체

 “믿음이 오직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결혼의 agent이다”


2)유사원칙

“동질의 것이 하나 될 수 있다”

상승해서 올라가서 하나님의 위치가 되어서 하나될 수 있다는 개념(루터가 반대)

루터: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는 존재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무능을 인식할 때 하나될 수 있다.(겸손과 회개) - 비유사성


3)사랑(‘선’의 개념과 연결)

루터 - 믿음으로만 가능


2.루터의 성화사상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의’ ; 외래적 의(칭의)와 더불어 우리 자신의 고유한 의(성화적 의)

                          자신을 미워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추호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것,

                          육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 자신에 대해 근신하며, 이웃에게


-믿음이 칭의의 도구라면, ‘사랑’을 성화의 도구로 봄(칭의를 근거로 해서 사랑을 주장)

-믿음이 하나님과의 관계, 사랑은 사람들과 관계를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


-“무엇을 가지고 있다면, 내 것인양 하지말고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들어와서 그들을 위해서 사용하라”(사랑의 원칙-이웃사랑)

-첫 번째 의가 신랑의 음성(“너는 나의 것”), 두 번째 의가 신부의 음성(“예,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 첫 번째 의가 근거가 되어서 두 번째 의가 이루어졌을 때, 결혼이 완성됨.(칭의+성화)

-칭의 후 성화 ▷ 선행: 경계시키고 있음(이것을 근거로 의로워지려고 하면 안된다(칭의X))

 

 선행의 이유

①육신의 제어 -수도원에서 말하는 것을 다시 말하고 있음

②다른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주어야 한다.

③이웃에 대해 사상으로 자유 가운데 스스로를 복종시켜야 한다.(그리스도인의 자유)



3.루터의 성경관

-루터 신학의 출발은 항상 ‘이신칭의’이다

① 이신칭의 ▷  ②근거: 성경(중세: 성경+전통(루터는 전통을 깨뜨리려고 함))   

 (오직믿음)     (오직성경, 성경의 충분성)

▷ ③성경해석의 원칙

성경은 스스로 해석한다.(성경이 성경을 해석)

성령께서 역사하신다.(성령의 역사)

성경은 얼마든지 개인적 해석이 가능하다.


▷ ④ 성경은 ‘그리스도’중심으로 해석해야 한다.(그리스도 중심적 해석방법)

복음 중심적 해석방법

이신칭의(야고보서에 대해 공격(오해)) 


- 성경을 Unity로 봄(복음)

 율법 - 복음 : 둘 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이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신학적 비평을 사용(성경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작업을 함)

야고보서 -지푸라기

*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용(약점 - 칼빈이 보완)


4. 루터의 인론(죄론)

-에라스무스와의 논쟁: free choice  신학적으로 로마 카톨릭 신학이다.

-루터 : free will, necessity - 이신칭의 측면에서 하나님의 절대주권

  내 밑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자유의지(짐승과 같다...

  누가(하나님, 사탄) 타느냐(선택불가)에 따라 달라진다.)가 있을 수 있으나,

  위에 것(구원)에 대해 자유의지, 자유선택이 없다.... necessity밖에 없다.

절대적 신학적 신앙

- 타락의 심각성 - 루터는 완전 타락, 카톨릭은 부분타락

- 카톨릭은 죄의 개념을 개별적 행동으로 본다

  루터는 인간의 죄는 죄성이 너무도 강렬하게 역사하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뒤틀려져 있다.   

  인간은 매순간 죄 짓고 살고 있다. 안 지을 수 없는 상태에 있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불신앙(1계명과 연결: 자기를 섬기고 삶)인이다.(모든 죄의 근원이다)

 - ‘의’ ▷루터에게 있어서는 ‘시민적 의’(civil righteousness)

        :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의가 될 수 없다(ex)바리새인

- 자유의지의 노예화


5. 루터의 기독론

- 신성과 인성의 존재양식으로 논쟁해 왔음(정통적 기독론).

- 그리스도의 신성쪽으로 많이 넘어옴.

- 중세이후 그리스도의 인성쪽으로 관심을 가짐

  ▷ 버나드(주님의 사랑), 성프랜시스(십자가에서의 고난) : 영성의 근거자료가 됨.

- 루터 :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성부 하나님을 보게 만듬(요한복음과 관련).

         그리스도 인성과 신성의 결합에 대해 강조.

         (공존설 - 떡과 포도주 강조 “인성이 있는 곳에 신성이 있다.”)

- 루터의 기독론은 사실상 구원론이다.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를 알 수 있다. 체험적이 될 수밖에 없다.


6. 루터의 십자가 신학

- 계시의 신학 : 추론의 신학이 아니다(이성, 논리추구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중세 스콜라주의 신학방법론을 비판

               스스로를 계시해 준 하나님을 안다.

- 간접적, 숨겨져 있다. : 숨겨진 계시

-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알 수 있다.

- 십자가의 비하와 수치 속의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본다.

- 십자가 안에서 숨겨진 하나님의 계시의 믿음의 문제이다.

- 하나님께서 인간을

-성례적 신비주의적 연합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은혜로 사는 인생

 

은혜는 돌에 새기고
원수는 물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게 나누면 딱 두 부류라고 하겠습니다.
 
한 부류는
작은 은혜를 받고서도 그 은혜를 늘 기억하며
비록 갚지는 못해도 가슴 깊이 감사를 느끼는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큰 은혜를 입고도
자기에게 불리할 때는
그 은혜를 헌신짝처럼 던져버리는 사람입니다.
 
어릴 적 읽었던 이솝 이야기 중
개미와 포수의 이야기가 기억나는군요.
비둘기에게 은혜를 입은 개미가
포수의 손에서 비둘기를 구한다는...
 
한낱 미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으려 한다는 것을 예로,
우리에게 바른 삶,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려 한
어른들의 지혜로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조금 못나고 부족한 것은 용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이라 자랑하여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은 한낱 미물보다 못한 사람입니다...
 
내가 받은 사랑, 부모 친척, 스승 그리고 내 이웃의 호의를
은혜로, 가슴 속에 늘 간직하는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은혜로 사는 인생이니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그리스도의 사랑을 은혜의 선물로 받은 성도들입니다.
오늘을 사는 삶이 비록 버겁고 어려워도
주님의 크신 은혜만은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명심하는 자가 복된 자일 것입니다.
 
주님의 크신 은혜를 심비(心碑)에 새기고,
날마다 십자가의 험한 길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고 멸망의 길로 간
가롯 유다의 어그러진 길을 걷지 않기를...
 
 


글/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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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은혜와평강의커피브레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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