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


[히브리서 6: 7-8]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더러 교회들이 지키는 절기들이 참 많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신년예배부터 시작하여 설날(구정), 부활절이 다가오면 사순절이라 하여 40일 금식기도, 종려주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 부활절이 끝나면 오순절, 어린이날, 어머니날, 아버지날, 초막절, 맥추절, 여름성경학교, 야외예배, 전교인 수련회, 부흥회, 사경회, 바자회까지, 가을에는 추석에다 추수감사절, 그리고 성탄절이 다가오면 대림절인지 대강절, 그리고 성탄절, 그리고 송구영신예배.... 이렇게 참 절기와 행사가 많습니다. 언젠가 일년 내내 이러한 절기와 행사를 이어가면서 목회자의 목회 프로그램과 설교원고를 아예 붕어빵 식으로 만들어서 나누어주는 목회자 모임이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기 우리가 빌려 쓰는 이 미국교회도 행사들이 일 년 내내 줄줄이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추수감사절은 지금으로부터 400 여 년 전, 1622년 11월 11일 영국에서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라는 배를 타고 신대륙으로 온 102 명의 청교도들, 그 해 겨울을 넘기면서 절반이나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죽고 살아남은 그들이 2년 후엔가 자기들을 도와준 인디언들을 초청하고 하나님 앞에 추수감사예배를 드린 것이 나중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추수감사절로 제정함으로써 정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130 여 년 전 들어온 미국인 선교사들이 이 추수감사절을 한국에 보급하였고, 이것이 추석을 지키는 농경사회이던 한국인들의 정서에 맞아 한국교회에도 뿌리내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도시화, 산업화로 인하여 더 이상 농경사회도 아닌 한국에서 무슨 추수감사냐, 추수감사절이 축복 좋아하는 교인들로부터 헌금을 우려내는 방편으로 악용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도 있고 폐지하자는 이야기도 있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성경은 추수감사에 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을까요? 추수감사절이라는 명칭은 없지만 성경은 명백히 하나님 앞에서 추수 절기를 지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 출애굽기 23: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한 해의 마지막)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신명기 16: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이 말씀들을 보면 추수절기를 하나님 앞에서 즐겁게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구약시대의 계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약의 절기를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말씀과 또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잇대어 재해석하고 이를 기쁨으로 지키고 누리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 위에 파종을 하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햇빛과 이른 비, 늦은 비로 열매 맺게 하시어 우리로 거두게 하신 은혜를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당연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추수는 땅에서 나는 곡식이나 열매,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거두고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추수는 이 땅에서 마지막 때에 거두실 영원한 영혼의 추수일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만나고 기뻐 뛰며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간 다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양식은 따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하시며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는 추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알곡을 천국창고에 모아들이고 가라지는 불에 태울 것이라 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옥토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원수가 덧뿌린 가라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는 농부라’ 하시고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이한(예리한) 낫을 휘두르는 추수군 천사도 등장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히브리서 6장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밭 가는 자들에게 합당한 작물을 내는 복 된 밭을 말씀하며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타락한 밭이 버림당하며 불사름 당할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밭 가는 자들이 누구이겠습니까? 밭 가는 자들에게 합당한 작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추수감사절 풍성한 가을걷이를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지만 밭 가는 자 되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거두시고 기뻐하시는 것은 알곡과 같은 성도,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열매와 같은 성령의 열매들, 궁창에서 영원히 빛날 천국의 영혼들로 인하여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뿌리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들의 피, 독생자의 생명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찢어 뿌리신 처절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밭 가는 자 되신 하나님이 거두시고 기뻐하시는 채소와 알곡이 되는 방법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요 1:12). 그리스도의 살과 피, 그 처절한 고통의 사랑을 우리 가슴에 심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고 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 비, 늦은 비와 같이 내려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초보에 머무르지 않고 단단한 식물을 소화하며,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것" 같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쉬임없이 흡수하여, 무럭무럭 자라는 밭의 작물과 같이, 배움의 정진(精進: 힘을 다 하여 그리스도의 나아감)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으르도록 나아다는 것입니다. 뜨거운 햇살과 폭풍우를 이겨내는 것 같이 고난과 연단을 이겨내는 인내요 믿음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이 마지막 때에 '받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작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알곡 되기 원합니다.

알미니안주의의 ‘조건적 선택’에는 세 가지 문제점이 있다 / 조엘 비키

 

 

첫째로, 조건적 선택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근본적인 선택을 인식하지 못한다. 성경의 선택 교리는 땅의 기초가 세워지기 아주 오래전에 설계된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일부를 자유롭게 선택하신다는 교리이다(계7:9-17).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 얻을 방편을 마련해 놓으셨다(엡1:4,5). 하나님은 그들을 구속하고 믿음과 회개로 이끌어 의롭다 하시고, 거룩하게 하고 보존하시며, 그 택한 자들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또 그를 통하여 영화롭게 하신다(롬8:28-39,살후2:13,14,딤후1:9,10). 그리고 불신앙을 고집하는 자들을 죄 가운데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신다(롬9장).

 

선택은 무조건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 안에 있는 어떤 내재적인 선함 때문에(고전1:27-31), 혹은 그들이 언젠가는 믿을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조건적인 선택은 우리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의 범위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영광을 가로채고 만다. 반면에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의 전적 타락 교리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은혜 교리에서 비롯되는 필연적인 결과이다. 만일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는 바와 같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라면, 우리의 구원은 결코 우리 자신에게서 시작될 수 없다. 우리는 본질상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택자를 위하여 자신의 독생자를 고난과 죽음에 내주셨던, 주권적으로 선택하시며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 왜 그런가? 우리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택’이 없다면 구원도 없다.

 

스펼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나는 인간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죄와 저주를 받아야 하며, 구원은 그 시작에서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발견한다. 하나님께서는 멸망받을 자를 멸망받도록 선택하신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이다.”

 

셋째로, 조건적 선택은 실제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조건적 선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타락한 인간 존재에 구원의 기초를 두기 때문에 결국 인간을 파멸로 이끌게 되는 것이다. 반면 무조건적인 선택은 인간을 파멸로 이끌지 않고, 천국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사람들을 천국에서 물리치시고 to천국에 가지 못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천국문을 열어 놓으시는 하나님의 복이다. 그러므로 경이로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어떤 죄인들을 의롭게 거절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단 한사람의 죄인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어거스터스 스트롱, “우리는 하나님께서 너무나 적은 수의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불의하시다고 건방지게 비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더 찬미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덕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불의와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선택하신다는 이 신비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존 라일, “자기 자신의 마음을 진정으로 아는 신자는 선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영원토록 찬미하게 될 것이다.”

 

- 조엘 비키, 『칼빈주의』, pp 121-123

 

 

출처: 청교도의 길  http://blog.daum.net/kds2012/732/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개주인과 개
▲ 샤비와 니나 바라노브스카야 [데일리메일 홈페이지 캡처]


은인을 찾아 200마일(약 300킬로미터)을 달려온 개 샤비(Shavi)가 화제다.

데일리메일에 따르면 샤비라는 이름의 검은 개는 지난 1월 러시아 로스토프-온-돈에서 차에 치여 두 다리가 부러져 죽어가고 있었다. 이를 지나던 행인 2명이 발견해 인근 동물병원에 맡겼고, 인터넷으로 샤비를 돌봐줄 사람을 찾던 중 니나 바라노브스카야(26)라는 여성이 선뜻 나서 샤비를 돌보게 된 것이다.

그녀는 샤비의 부러진 두 다리에 철심을 넣는 수술을 받게 해줬고, 수술이 끝난 후에는 ‘로스토프-온-돈’의 집으로 데려가 정성껏 보살폈다.

샤비가 건강을 완전히 되찾기까지 6개월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큰 사고를 당했던 경험 때문에 샤비는 낯선 사람에 불안해하고 차를 보면 겁에 질려 했지만 니나 바라노브스카야의 보살핌 속에서 차츰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바라노브스카야는 샤비가 자신의 딸과 잘 어울렸고, 그녀가 원래 키우던 고양이 3마리와 다른 개 2마리와도 친하게 지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많지 않은 월급으로 어머니와 딸과 함께 살아야 했고, 애완동물마저 5마리나 됐기 때문에 샤비가 부담스러웠던 그녀는 샤비를 결국 ‘로스토프-온-돈’에서 약 200마일(300km) 떨어진 보로네즈에 있는 친구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샤비를 보로네즈 친구 집에 두고 온 지 며칠 뒤 친구로부터 샤비가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니나 바라노브스카야
▲ 샤비와 니나 바라노브스카야[데일리메일 홈페이지 캡처]


그리고 그로부터 약 2주일 뒤 바라노브스카야는 거리에서 그녀를 찾아온 샤비를 발견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샤비가 무척 지쳐 있었고 말라 있었지만, 자신과 다시 만나 매우 기뻐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결국 샤비를 다시 집으로 데려갔고, 이제 다시는 샤비와 헤어지지 않을 생각이다.

지도
▲ 샤비 이동경로 지도[데일리메일 홈페이지 캡처]


샤비가 자신을 돌봐준 바라노브스카야를 찾아 300km를 헤맨 끝에 다시 만난 사연이 알려지면서 샤비를 위해 무엇이든 필요한 것을 지원하겠다는 러시아 동물 애호가들의 온정이 답지하고 있다.

// 20세기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아버지 존 스토트 목사와의 대담 /신동식


지난 3월 4일 오후 네 시 경 존 스토트 박사가 옥스퍼드시의 성 안드레 교회에서 열린 복음주의신학대회에서의 강연을 마치고 위클리프 홀로 들어섰다. 대담을 맡은 정성욱 교수는 지고 교수인 옥스퍼드대학의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의 안내로 존 스토트 목사를 소개받고 대담에 들어갔다


신앙 배경과 이력
안녕하십니까? 스토트 목사님!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 또한 반갑습니다. 정 목사님!

피곤하시지는 않으신지요? (78세의 노령을 의식한 물음이었다. 노령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정정해 보였다)
괜찮습니다. 많이 피곤하지는 않군요.

자 이제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가족을 소개해 주시죠. 결혼을 안하셨으니까 부모님과 형제들 중심으로 소개해 주십시오.
저는 1921년 4월 27일에 태어났으며 저의 아버지는 의사였던 아놀드 스토트경입니다. 아버지는 런던 서쪽 끝의 해리가(Harley Street)에서 일하셨습니다. 저는 BBC 방송국과 옥스포드가의 상점들 가까이의 랑함 플레이스, 올 소울즈 교구에서 성장했습니다. 전쟁중에 몇 년 동안 그곳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과학적인 무신론자였습니다만 저의 어머니는 경건한 루터교인이셨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기독교적인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신앙 배경이 궁금합니다. 성공회 배경에서 자라셨나요?

언제 예수님을 영접하셨는지 그리고 학교 이력에 대해서도 궁금합니다.
저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와 리들리 홀에서 신학 교육을 받았으며 1945년에 목사로서 랑함 플레이스, 올 소울즈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1938년 제가 17세 되던 해 어느 주일 밤이었습니다. 저는 주님께 제 자신이 저의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음을 고백하고 저의 죄를 자백하였습니다. 저는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저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저는 다음날 일기에 이렇게 썼지요. “그리스도는 나의 안으로 들어오셨으며, 이제 내 안에서 통치하신다”라고요.

현재 세계복음주의협회(World Evangelical Fellowship)와 국제기독학생회(Inter Varsity Fellow ship), 그리고 현대 기독교 연구운동 등에 연관되어 활동하시는 것으로 아는 데 좀 더 설명을 해주십시오.
저는 정 목사님과 독자 여러분들이 세계복음주의협회가 구성되기 전에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이 먼저 존재했음을 알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실 세계복음주의연맹은 영국복음주의연맹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이 단체는 1846년에 조직되었습니다.
저는 1945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그 후 영국복음주의연맹에 가담하였습니다. 그러나 1951년 네덜란드에서 복음주의대회가 열렸고 그 기간 중 세계복음주의협회가 구성되었습니다. 그후 영국복음주의연맹은 자체 조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저는 1951년부터 세계복음주의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해왔으며, 1951년에 그 단체의 교리적, 신앙적 기반을 닦는데 큰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저는 또한 50여 년 전 국제복음주의학생회(Inter -national Fellowship of Evange -lical Student)의 발족 초기부터 참여해왔습니다. 저는 이 단체의 후원을 받아 전세계를 여행하고 여러 나라들을 방문한 바 있습니다.
정 목사님께서 현대 기독교 운동연구라고 부르신 것은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를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 연구소는 18년전인 1982년에 설립되었고, 저는 주요 설립자 중 한 사람입니다. 그 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일하였고, 그러던 중 65세가 되어 퇴직하면서 명예총재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어디에서 주로 활동해 오셨습니까? 영국입니까?

나머지 시간은 주로 어느 대륙 어느 나라에서 보내셨는지요? 과거와 현재를 포함해서 말씀해 주시죠.
저는 1945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후 약 5년간은 교구의 부목사(curate)로 사역하였습니다. 섬겼던 교회는 런던의 중심부의 랑함플레이스에 있는 올 소울즈 교회(All Souls Church)였습니다.
1950년 담임 목사님께서 돌아가셔서 제가 후임으로 담임목사(rector)가 되었습니다. 올 소울즈 교회에서 1950년부터 1975년까지 25년간 담임목사로 사역하였습니다. 그후 저는 명예담임목사가 되었고, 지금까지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결국 55년간 사역을 해온 셈입니다.
올 소울즈의 담임목사가 된 지 2년 후인 1952년 저는 처음으로 대학복음화대회를 인도해달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대회가 처음 열린 곳은 저의 모교인 케임브리지대학이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52년 부터 1977년까지 저는 전세계에 걸쳐서 50회의 대학복음화대회를 인도하였습니다. 1956년에는 미국과 캐나다에서, 그리고 나서 아프리카, 아시아, 호주, 뉴질랜드 등 전세계에서 대학 복음화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지금은 나이가 너무 많기 때문에 대학복음화대회 인도 초청은 거절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나이 탓으로 젊은 대학생들과 의사소통이 쉽지 않군요. 그러나 여전히 세계 곳곳을 방문하며 사역하고 있습니다. 두주 전에는 3주간의 동아프리카 사역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특히 우간다와 케냐 지역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주 목요일부터는 미국 지역을 3주 동안 순회하며 사역할 계획입니다. 저는 요즈음 1년중 6개월은 올 소울즈 교회의 목회에 협력하는 일에 보내며, 3개월은 세계순회사역에 그리고 3개월은 연구와 저술에 보내고 있습니다.

스토트 목사의 경건의 시간 그리고 독신 생활
요즈음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큐티(경건의 시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날마다 성경을 어떻게 읽고 묵상하고 계신지요?
저는 약 30년 전에 저에게 어떤 매일 성경읽기표를 소개해 주신 로이드 존스 목사님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성경읽기표는 1842년에 로버트 머리 맥체인 목사가 고안해낸 것입니다. 맥체인 목사님은 그의 회중들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성경읽기표를 만들어 회중들이 1년에 구약성경을 한 번, 신약성경을 두 번 통독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 성경읽기표에 따라 성경을 읽게 되면 매일 네 장 정도의 성경을 읽게 됩니다. 예를 들어 매해의 첫날인 1월 1일에는 창세기 1장, 에스라 1장, 마태복음 1장, 사도행전 1장을 읽게 되죠. 이러한 방식은 창세기를 계속 읽어 내려갈 때 생길 수 있는 지루함을 방지해 주는 좋은 방식입니다.
특히 새해 첫날 읽게 되는 네 장은 성경에 나타난 네 개의 큰 시작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우주와 역사의 시작을, 에스라 1장은 바벨론 포로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을,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의 시작을, 사도행전 1장은 교회의 시작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죠.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게 되면 전체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사건과 주제들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
저는 맥체인식 성경읽기표를 특히 모든 목회자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왜냐하면 목회자들은 성경 전체를 잘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업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이나 일반 성도들에게는 좀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목회자들에게는 아주 좋은 성경읽기 모델이 될 것입니다.

조금 더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박사님께서는 사도 바울처럼 독신 생활을 통해 전적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오셨습니다. 독신 생활이 주님과의 교제를 더욱 깊게 해 주었는지요? 가톨릭과 같이 주님께의 헌신을 위한 독신 헌신 제도를 복음주의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독신 생활이 가져다 주는 제일 큰 유익은 ‘자유로움’일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한 것처럼 독신으로 살게 되면 아내와 가족의 일보다는 주님의 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역자로 하여금 자신의 사역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줍니다.
또한 저는 고린도전서 7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7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따라서 결혼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이며, 독신으로 사는 것도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양쪽 다 하나님의 은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직자 독신 제도를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그 제도는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독신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9장 11절에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독신은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한두 해 전에 IVF 출판부에서 이 문제에 관한 상당히 좋은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독신의 문제」(The Single Issue)이며, 중국계인 알버트 슈(Albert Hsu)가 저술했습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에 부록이 있는데, 그 부분은 제가 썼습니다. 저는 그 부록에서 알버트 슈가 제기한 독신에 대한 여러 문제들에 대한 답변을 제시했습니다. 그 책을 참조하시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서 독신을 하나의 은사로 규정하고 있으므로, 저는 가톨릭의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독신 제도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또 한 가지 좋은 증거는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에 나오는 장로와 감독의 자격 요건 중에, 그들이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때부터 목회자들의 결혼 생활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목회자들의 독신은 예외적인 것이지, 의무적인 규범이 될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저서들
너무 명쾌한 설명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목사님의 현재까지의 사역에 대한 좀더 상세한 질문들을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집필을 하셨는데 인생의 어느 시기에 어떤 책을 어떤 동기로 집필하셨는지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또 앞으로의 집필 계획에 대해서도 들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몇 권의 책을 집필했는지 세어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쓴 저서의 숫자를 생각하는 것은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게 범죄한 것과 같은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개인 비서에 따르면 지금까지 40에서 45권의 책을 저술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권은 영어로는 출판되지 않고, 한국어로만 출판되었습니다. 그 책은 제가 한국의 의과대학생 수련회에 가서 강의한 내용인데, 한국의 IVP에서 출판했고, 영국에서는 출판되지 않았습니다.
제가 쓴 책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가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어느 책보다도 그 책에 저의 영혼과 마음을 쏟아 부었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신앙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종종 “내가 만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인도되지 않았다면 나는 하나님을 결코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방식으로 우리와 같은 죄인을 의롭다고 인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가장 중요한 신학적 저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윤리에 관한 저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 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Issues Facing Christians Today)입니다. 그 책은 현재 제3판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목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책은 「현대 교회와 설교」(I Believe in Preaching)입니다. 또한 성경 강해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Bible Speaks Today시리즈를 통해 출간된 「로마서 강해」, 「산상수훈 강해」, 「사도행전 강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사님의 BST시리즈 「로마서 강해」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별히 로마서 7장에 대한 목사님의 강해는 탁월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7장을 강해하시면서 7장에는 성령님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데 반하여, 8장에는 반복적으로 성령님이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신 것이죠. 그것이 제게는 많은 유익이 되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쁩니다. 저는 아직도 로마서 7장이 강해하기 어려운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언급할 만한 책이 있다면, 그것은 최근 출간된 「복음주의의 진리」입니다. 아마도 이 책은 저의 마지막 저술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을 제가 복음주의 교회에 남겨주고 싶은 저의 마지막 유산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의 내용은 제가 60년 이상 동안의 신앙생활을 통해 가장 깊이 깨닫게된 복음의 정수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목사님의 「복음주의의 진리」라는 책을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님께서는 그 책에서 우리가 믿는 복음의 삼위일체적 성격과 차원을 강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 계획,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그리고 성령님의 지속적인 구원 적용 사역을 포함한 총체적인 은혜의 소식이라는 목사님의 주장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쁩니다. 물론 제가 저술한 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Basic Christianity)입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50여 나라의 언어로 번역이 되었고, 200만 권 이상 보급된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이 다시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판이 1958년에 나왔기 때문에 좀 오래되었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비하심으로 이 책을 여전히 사용하시고 계십니다. 한 권 더 언급하고 싶은 책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The Contemporary Christian)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은 기독교 윤리에 관한 책인 반면,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기독교 교리와 제자도에 관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의 저술 계획은 어떠신지요?
정 목사님, 혹시 최근에 제가 쓴 새(Birds)에 대한 책을 아십니까? 저는 상당히 열정적인 조류 관찰자이며 동시에 조류 사진작가입니다. 한국의 조류 관찰자 중에 윤무부 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름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맞는 것 같습니다. 윤 교수님께서는 친절하게도 한국의 조류 관찰을 위해 저를 두 번이나 안내해 주셨습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담은 책이 한국의 IVP에서 한국어로 출판 되었습니다.
이 책은 칼라 판이며, 제가 찍은 150여 장의 사진들을 담고 있습니다. 각 장마다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을 담고 있지요.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새: 우리의 선생님」(Birds: Our Teachers)입니다. 이것이 일반은총 영역에 관련된 저의 저술중 대표적인 것입니다.
목사님께서 저의 미래 저술 계획에 대하여 물으셨는데, 목사님께서는 ‘현대기독교에 대한 런던강좌’(London Lectures in Con temporary Christianity)에 대하여 알고 계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런던 강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런던 강좌는 매년 한 번씩 열립니다. 강좌의 내용 또한 출판됩니다. 올해는 새로운 천년의 시작이기 때문에,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에서 제게 강좌를 부탁했습니다.
강좌의 주제는 새 천년을 맞이하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통해 ‘비교할 자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The Incompar able Christ)라는 제목의 강연을 네 차례에 걸쳐서 할 예정입니다. 이 강좌는 내년에 출판될 것입니다.

멘토에 대하여
확고한 복음주의자로 사역해오셨는데, 목사님의 복음주의 신앙에 영향을 준 멘토들이 있다면 누구를 들 수 있을까요?
제가 먼저 언급해야 할 분은 저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 분입니다. 그 분은 내쉬 (E. J. H. Nash) 목사님이십니다. 내쉬 목사님은 특별한 비전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어린 중고등학생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제가 다니는 학교에 방문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입술로부터 처음으로 그리스도와 구원에 대한 복음을 들었습니다. 바로 그날 저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갔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내쉬 목사님은 제가 회심한 후 저에게 매주 한 번씩 5년 동안 양육의 편지를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헌신적인 신앙 양육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편지들의 내용은 때로는 격려를, 때로는 가르침을, 때로는 책망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상당히 제멋대로 하는 어린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내쉬 목사님은 저를 위해 매일 기도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제가 그 분께 진 빚이 얼마나 되는가는 제가 하늘에 올라가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 내쉬 목사님이 저의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시절에 주된 멘토였습니다.

내쉬 목사님 외에 다른 멘토들이나 영향을 받은 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예를 들어 칼빈 같은 좀더 클래식한 신학자들도 좋습니다.
물론 저는 존 칼빈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더불어 언급하고 싶은 분은 17세기 영국의 청교도인 리차드 백스터(Richard Baxter)입니다. 그는 1665년에 「개혁 교회의 목사」(The Reformed Pastor)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저는 제가 목사 안수를 받기 직전 주간 동안 이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저에게 큰 영감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영국 성공회 감독이었던 라일(J. C. Ryle)이 있습니다. 라일은 복음주의자였습니다. 라일은 1880년부터 1900년까지 리버풀 지역의 감독이었습니다. 저는 그 분이 저술한 모든 책을 읽었습니다. 특히 거룩함(holiness)에 대한 그의 책 「거룩에 대한 개혁파 교리」(The Reformed Doctrine of Holiness)를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미국의 벤자민 워필드도 있습니다. 저는 그가 쓴 「계시와 영감」(Revelation and Inspiration)을 읽고 성경관을 확립하였으며, 성경 중심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이 외에 다른 여러 사람들을 언급할 수 있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의 사역에서 가장 획기적인 사건들은 어떤 일이었는지요? 1974년 로잔언약문 작성에 참여한 일이었을까요?
(웃음).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제가 먼저 언급해야 할 사건은 1950년 제가 29세의 젊은 나이에 올 소울즈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것입니다.
저는 그때 매우 젊었고, 또 목사 안수를 받은지 4년밖에 되지 않은 신출내기였습니다. 그런 제가 런던 중심에 있는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된 것은 의심할 바 없이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저는 미숙한 29세의 나이에 교회의 지도부로 끌어 올려졌고, 그 일을 잘 감당해야 했습니다.
2년 후인 1952년 저는 처음으로 케임브리지대학에서 대학복음화대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매일 밤 그 집회에 참석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 이후 저는 대학복음화대회의 주강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런던대학과 옥스포드대학을 포함한 전세계의 대학들로부터 초청을 받아 대학복음화대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그 일 역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열리는 어바나학생선교대회(The Urbana Student Missionary Convention)를 들 수 있습니다. 3년마다 IVF의 주관 아래 미국 일리노이주 어바나에서 학생선교대회가 열립니다. 요즈음에는 만명이상의 학생이 모이는 거대한 대회가 되었습니다. 저는 1964년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이 대회에 매일 아침 성경강해 강사로 초청되어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강해하였습니다. 각 대회 때마다 4-5회씩 강해를 하게 됩니다. 저는 1964년, 67년, 70년, 73년, 76년대회에 계속 초청되었습니다. 이 대회에서 매일 아침마다 만여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을 강해하는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 언급할 것은 1967년 킬리(Keele)에서 열린 전국 성공회 복음주의자 대회(National Evangelical Angl ican Cong ress)입니다. 제1차 킬리대회에서는 1천여 명이 모였고, 10년 후인 1977년 노팅햄대회에서는 2천여 명이 모였습니다. 이 두 대회는 참으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대회가 있기 전 영국 성공회 교회 내에서 복음주의운동은 그 위치를 견고히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두 대회 기간 중에 이러한 점들을 회개하였고, 복음주의자들이 영국 성공회 내에서 좀 더 가시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며 복음을 충실히 전할 것을 결단하였습니다. 동시에 교회를 넘어 사회에서도 복음주의자들의 위치를 확고히 할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국가와 세계에 대하여 우리가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1967년에 이루어졌고, 7년 후인 1974년 스위스 로잔에서는 전세계의 복음주의자들이 함께 모여서 복음주의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헌신을 다짐하게 된 것입니다. 저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복음주의자의 새로운 인식이야말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믿습니다.
복음주의자의 사회적 헌신은 20세기 초반에 미국의 월터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h)가 제창했던 ‘사회복음’(Social Go spel)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라우쉔부쉬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사회주의 사회를 동일시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성경적인 복음이 사회에 던져줄 수 있는 의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이지, 사회주의적 복음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를 어떤 목적으로 만드셨는지요? 이 연구소의 사역과 성격을 듣고 싶습니다.
이 연구소의 주된 프로그램은 10주간의 코스로서 ‘현대세계에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 프로그램은 매년 9월에서 12월까지 열리며, 전세계에서 약 50여 명이 참가합니다.
저는 성경의 권위와 해석에 대한 강의를 비롯하여, 현대 세계의 성격, 현대 세계에서의 제자도와 선교 등에 관한 강의를 해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과 현대 세계 사이의 다리 놓기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역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20대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4주 코스도 있습니다. 이 코스는 하나님과 세계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진 세계 도처의 젊은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매달 50여 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참가하고 있으며,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생각하시기에 런던 연구소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가 일으켰던 라브리 운동과 유사점이 있는지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프란시스 쉐퍼 박사를 개인적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저보다 10세 가량 나이가 많았습니다. 저는 쉐퍼 박사를 만나기 위해 스위스의 라브리 공동체 본부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라브리 운동과 런던 연구소의 긴밀한 관계는 기구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차원에서 형성되었습니다. 라브리 교수 출신인 제람 바즈는 미국 미주리의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카베넌트칼리지(Covenant College)에서 프란시스 쉐퍼연구소를 이끌고 있습니다. 제람 바즈는 원래 영국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으로 가기 전 영국 라브리에서 사역할 때 런던연구소의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습니다. 그래서 수년 동안 런던 연구소에서 여러차례 정규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역시 영국 라브리 교수 출신인 리차드 윈터 박사도 우리 연구소에서 강의한 바 있습니다. 현재 그는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사역하고 있습니다. 영국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사회학자 오스 기니스(Os Guiness) 역시 런던 연구소의 자문위원이었고 또 강의를 한 바 있습니다.

결국 강의자들 사이에 상호관계가 있었고 또 강의가 중첩되는 부분이 있었군요.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복음주의적 에큐메니칼 정신을 실현한 것같이 보이는군요.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주말마다 세미나를 열 때, 영국 라브리 운동에 속한 몇 분을 함께 모셔서 강의를 듣습니다. 이것은 정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복음주의적이면서도 에큐메니칼한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런던연구소와 같은 취지의 연구소들이 현재 전세계 20여 곳에 이미 설립되었거나 설립중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간다에 이미 비슷한 연구소가 있습니다. 지난 3주간 저는 이 연구소를 방문하고 왔습니다. 이 연구소의 이름은 기독교적영향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Impact)입니다. 이 곳 외에 잠비아와 짐바브웨 등지에도 비슷한 연구소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연구소들이 함께 동역할 수 있는 협의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세계 IVF의 부회장으로 섬기고 계신데 IVF를 통해 본 세계 학생 복음주의 운동의 현황과 전망은 어떤지요? 어떤 나라에서 학생 복음주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습니까?
사실은 국제 복음주의 학생회(International Fellowship of Evangelical Student)가 국제적인 명칭입니다. 저는 다년간 이 단체의 부회장으로 섬겨왔습니다. 또한 영국의 IVF 그룹인 대학간 그리스도인 연합(University-College Christian Fellowship)의 회장직을 세 차례나 수행하였습니다.
국제 복음주의 학생회에 관해서 말한다면, 저는 최근의 긍정적인 발전에 깊은 인상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50년 전에 저희들에게 하나의 비전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세계 각국에서 자율적인 복음주의 학생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비전이었습니다.
여기서 ‘자율적’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각국의 복음주의 운동이 자율적일 때만 미국이나 영국 등과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본부로부터 통제를 받는 비능률성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본적인 교리나 풍토 등은 함께 공유해야 되겠지요. 하지만 각국의 복음주의 운동은 각각의 집행부에 의해서 관리되며, 철저한 자율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50년 전에 가졌던 우리의 비전이 지금 실현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저는 감동을 받습니다. 많은 제3세계의 복음주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비전을 가지고 국제 복음주의 학생회를 통해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 학생 복음주의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나라는 나이지리아입니다. 수천 명의 학생들이 매년 열리는 연례 수련회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30여 개의 이슬람 국가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복음주의 학생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말은 175개 국가에서 학생 복음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놀라운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50년 만에 이렇게 크게 성장한 것은 정말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성경 해석에 대하여

이제 목사님의 성경 해석에 대하여 질문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 기초 교리 입문서와 아울러 많은 성경 주해를 집필해오셨습니다만, 목사님께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성경이나 특정 구절이 있는지요? 그리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저는 성경 66권 중에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성경이 없습니다. 저는 66권 전부를 좋아합니다. 만일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말해 보라고 강요하신다면, 저는 갈라디아서 6장 14절을 꼽고 싶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구절은 저의 책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주요 본문 구절이었고, 또 저는 십자가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특별히 애착이 갑니다.

목사님의 대답은 의외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 3장 16절이나 마태복음 11장 28절 등을 꼽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일동 웃음). 비록 우리는 목사님의 성경해석학에 익숙하지만, 한 번 더 묻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목사님의 접근 방법은 무엇인지요? 그리고 어떤 참고 자료들을 이용하시며, 통찰이나 적용점은 어떻게 찾아내시는지요?
제가 「성경연구 입문」(Underst anding the Bible)에서 논의한 것처럼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세 가지 기본 원리가 있습니다.
첫 번째의 원리는 단순성(simplicity)의 원리입니다. 그것은 성경 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화적 해석을 거부하며, 공상적인 해석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단순하며, 분명하며, 자연스러운 의미를 추구합니다. 물론 이 자연스러운 의미가 비유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가장 자연스러운 의미를 찾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단순성의 원리입니다.
두 번째의 원리는 역사성(historicity)의 원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말씀도 하나님께서는 문화적 진공 상태에서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모든 말씀은 어떤 문화적 컨텍스트에서 전달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과거의 역사와 문화로 되돌아가 이를 신중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조화(harmony)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당신과 모순되는 것을 말씀하시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 본문을 마음대로 조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이 성경 스스로를 해석할 수 있게 함으로 성경 내용의 조화로운 해석을 추구합니다.
성경 해석의 참고 자료를 예로 들면 무엇보다 헬라어 신약성경이 포함될 것입니다. 또한 성경어구 사전(concordance)을 참조합니다. 저는 고전적인 성경 주석류를 참고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참조하기 전에 스스로 본문에 대한 묵상을 먼저 하고나서 다른 참고 자료들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헬라어 사전 역시 자주 참조합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시간을 많이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통찰과 적용점을 얻는 길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본문을 묵상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반복해서 읽고 또 읽고 또 읽다보면 본문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배적인 해석이 떠오를 때까지 우리는 읽고 또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목사님께서는 누구의 성경주석에서 가장 큰 도움을 받으셨습니까?
저는 특정한 어떤 개인의 주석으로부터만 도움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죠. 갈라디아서의 경우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스위트 교수의 「마가복음 주석」, 웨스커턴의 「요한복음 주석」, 리차드 롱거네커의 「사도행전 주석」 등 다양한 주석가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성경을 해석하고, 설교하며, 강해함에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큰 어려움은 의심할 바 없이 문화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세 가지 문화가 한꺼번에 연관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먼저 특정한 앵글로색슨 문화의 배경을 가지고 성장한 ‘내’가 있습니다. 둘째로, 성경은 고대 근동과 헬라-로마문화권에서 기록되었습니다. 셋째로, 그리고 ‘나’는 제3의 문화권에서 성장한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의 내용을 전달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세 가지 문화가 한꺼번에 충돌하고 있습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우리는 이 사실을 좀 더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문화적 전이’ (cultural tran- sposition)라는 개념을 도입하였습니다. 그래서 런던 연구소에서는 학생들에게 ‘문화적 전이’를 가르칩니다.
여기서 ‘문화적 전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한 단락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이 단락의 내용이 당시의 특정한 문화 상황의 컨텍스트에서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이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내야 합니다. 이것이 일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정당한 일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는 이 본문을 다른 문화의 상황에 재맥락화 (re- contextualise) 하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내용을 예로 들어 봅시다. 당시 유대 문화권에서 발을 씻기는 행위는 집을 방문한 친구나 손님들에 대한 하나의 사회적으로 통상화된 예의였습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집을 방문하게 되면 그 집의 노예나 하인들이 손님의 발을 씻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현대 문화권에서 우리는 맨발로 걸어다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집에 노예급에 해당하는 하인이 없으며, 길거리 역시 훨씬 깨끗할 뿐 아니라 자동차나 여타 교통 기관을 이용해서 여행을 합니다. 따라서 발을 씻기는 행위가 필요없으며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친구의 집을 방문하면 집주인은 우리가 발을 씻을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단지 ‘손을 씻으시겠습니까?’라고 물어 옵니다. 결국 문화적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요한복음 13장을 성경에서 제거해야 할까요? 이 본문이 완전히 다른 문화적 상황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나에게 주는 교훈은 없으며 따라서 필요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또 다른 극단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상상력을 사용하지 않는 딱딱한 문자주의’ (wooden and unimaginative literalism)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방문한 손님들에게 ‘신발을 벗으십시오 그러면 발을 씻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해야겠죠.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께서 무슨 교훈을 주시려고 하는가에 초점을 예수님께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5)고 하신 말씀의 본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서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며, 사랑하는 자는 그것이 아무리 천하고, 불결하고, 힘든 일일지라도 섬김의 일을 감당해야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약하면 오늘날 제가 친구의 발을 씻지 않는다 하더라도 친구의 신발을 기쁘게 씻어줄 수는 있으며, 친구의 집에 있는 화장실을 즐거운 마음으로 청소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행해야 할 바른 섬김은 더럽고 추한 일도 마다하지 않는 자세에서 비롯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말씀드린 ‘문화적 전이’의 실례입니다. 이것은 성경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의미(meaning)는 그대로 보존하되 이 교훈을 실천하는 문화적 형식(cultural form)을 현대 문화에 맞추어 변형시키는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오늘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현대적인 이슈를 성경적인 관점에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많은 저술들을 내셨습니다. 목회자나 평신도들에게 이러한 일에 대한 조언을 주신다면?
이 문제는 사회윤리적 이슈에 해당하는 것이군요. 저는 여기서 원리들(principles) 과 정책들 (policies)을 구분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영국 성공회 대주교였던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이 제안한 것입니다. 저는 템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특히 원리와 정책에 대한 그의 구분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목회자들은 원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반면에 목회자들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법률의 개혁을 위해 여러 가지 정책을 개발하는 일을 정치가들에게 맡겨야 합니다.
실업이라는 문제를 예로 들어 봅시다. 실업 문제는 거의 모든 나라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실업 문제에 대하여 설교해야 합니까?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대답은 ‘예’ 이기도 하며 ‘아니오’ 이기도 합니다.
노동에 대한 성경적인 철학을 개발하는 것은 우리 목회자들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이 하나님께서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신 이래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의 일부라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지키고 관리함에 있어서 아담의 협력을 요구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목회자들의 임무는 실업이 매우 심각한 사회적 악 (social evil)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회중들 가운데 정치인들이 있다면 그들이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한다는 강력한 권고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을 일으켜 주시고, 그들이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정치와 경제의 문제들을 적절한 정책을 통하여 해결하는 일은 목회자들의 일이 아니라 기독교적 신앙과 철학을 가진 정치인과 경제인의 일인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기독인 정치인들과 경제인들이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일하도록 격려하며 권면해야 합니다.
노동은 하나님의 뜻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실업의 상태에 빠져있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촉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실의 문제에 굴복해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들과 싸워야 합니다. 실제적으로 좋은 정책을 고안하면서, 현실의 악과 싸우는 일은 기독인 평신도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이 싸움을 독려하고 영적, 사상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원리와 정책을 구분하는 것의 실례가 됩니다. 저는 목회자들이 이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결국 목회자들은 성경적 원리를 밝히고 전함에 있어서 자신감을 가져야 하며, 평신도들이 이것을 그들의 상황에 잘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한다는 말씀이군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이러한 주제들을 다루기 위해서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목회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사회적 이슈들을 접근하는 원리들을 얻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자연보호, 환경, 인종, 성 문제 등에 관한 성경적 원리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리고 「현대의 그리스도인」과 「현대 교회와 설교」를 저술하여 원리와 정책에 대한 구분을 논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현존하는 설교자 중에 추천할 만한 분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바른 성경 이해를 위해 참고할 만한 책을 추천해 주십시오.
우선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비록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약 15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 분의 책은 지금도 읽을 수 있습니다.
미국인 목사님 중에 강해 설교에 뛰어나신 분은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James Boice)목사님이십니다. 그는 필라델피아의 제10장로교회의 담임목사님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고든콘웰신학교의 총장으로 계시는 월터 카이저(Walter Kaiser) 박사를 들고 싶군요. 이 분은 구약 신학자이시면서 성경 강해에 있어서 탁월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돈 로빈슨 (Haddon Robinson) 박사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는 고든 콘웰 신학교의 오켕가 설교연구소 (Ockenga Institute of Preaching) 의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로빈슨 박사는 설교에 관한 훌륭한 책을 저술하였고, 강해설교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영국에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후임으로 웨스트민스터채플에서 설교하고 있는 켄달(R. T. Ken dall) 목사를 들 수 있겠군요. 스코틀랜드에도 몇 분이 있습니다. 최근 은퇴하신 글래스고우의 에릭 알렉산더 (Eric Alexdander) 목사님 역시 강해 설교에 뛰어나십니다. 동아시아의 싱가포르에서 사역하는 바비 승(Bobby Sng ) 박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의사입니다. 그는 한 때 싱가포르 IVF의 총무로 사역하였고, 탁월한 강해 설교를 해왔습니다.

복음주의 지성운동
목사님은 특히 복음주의 지성 운동에 관심이 많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 안에 반지성주의적 경향이 있다는 지적을 하신 것으로 아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흐름을 말씀하시는 것인지요? 쉐퍼박사가 주장한 것처럼 전천년주의에 치우침으로 초래된 위험과 연관된 것입니까?
저는 쉐퍼 박사의 지적이 옳다고 믿습니다. 전천년주의 (Premill ennialism)는 반지성주의를 가져온 하나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전천년주의자들은 거리낌없이 사회적 이슈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사회는 점점 더 악해져 갈 것이고, 또 그렇게 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니까요. 왜냐하면 사회가 더 나빠질수록 주님의 재림이 가깝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만일 우리가 사회를 향상시키면 주님이 오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지성주의를 초래한 또하나의 요인은 은사주의 운동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은사주의자들 중 일부는 지성의 중요성을 무시해 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러한 은사주의자들에게 고린도전서 14장 20절의 말씀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린아이와 같이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성과 지혜를 개발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구절은 마태복음 11장 28-30절의 말씀으로 주님께서는 주님의 멍에를 메고 주님께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선생과 스승이 되시는 주님께 굴복하고 그 분의 가르치심을 경청해야 합니다.

목사님은 기독교 지성과 영성이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씀과 영성이 조화를 이룬 청교도 영성 운동과 복음주의 지성 운동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개인적으로 ‘영성’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영성’이라는 말이 로마 가톨릭적인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신교가 사용할 수 있는 적합한 용어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제자도’입니다. 제자도는 신약성경적인 용어이며, 제자도는 성경 읽기, 묵상, 예배, 기도, 봉사, 전도등 모든 것을 포용해낼 수 있는 용어입니다.
둘째는,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할 경우 잘못하면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 위험한 분리 현상을 영속화시키게 됩니다. 즉 어떤 것은 영적이며, 어떤 것은 세속적이라는 이원론적인 사고와 행동을 낳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이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하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영적인 영역임을 인정하고 고백해야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저는 ‘영성’이란 단어를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목사님께서는 제임스 휴스턴과 유진 피터슨 등의 영성 작가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임스 휴스턴은 저와 개인적으로 절친한 친구입니다. 유진 피터슨과는 잘 아는 사이는 아니지만 저는 그분을 몇 번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그 두 분들이 하고 계시는 사역을 아주 좋아하며 지지합니다. 다만 저는 ‘영성’이라는 단어를 주의깊게 사용해야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영성’이라는 단어보다는 ‘제자도’ 또는 ‘제자성’이라는 단어가 더 성경적이며 또한 ‘영성’이라는 단어보다도 더 포괄적인 것을 담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목사님 혹시 헨리 나우웬을 알고 계시며, 그 분의 책을 읽으신 적이 있으신지요?
예, 물론입니다. 그는 최근에 돌아가셨죠. 저도 그분의 책을 세 권 읽었습니다. 저는 헨리 나우웬이 로마 카톨릭의 신부이면서도 어떤 부분에 있어서 상당히 개신교적인 신학 사상을 견지하고 있음에 놀랐습니다. 물론 여전히 그의 신학 사상에는 카톨릭적인 요소가 남아 있습니다. 저는 그 점에 있어서 불편을 느꼈습니다.

그럼 그 분의 칭의론에 대하여 검토할 기회가 있으셨는지요?
유감스럽게도, 그럴 기회를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나우웬의 영성에 관한 저술인 「상처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와 다른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나우웬이 ‘무력한 어린아이 또는 십자가에 무력하게 달린 처절한 희생자’와 같은 카톨릭적인 예수상(像)을 비판하는 것을 읽고 기뻤습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를 방문하였을 때 영광스러운 승리자로서의 부활하신 예수상이 가톨릭 교회 안에 거의 없음을 한탄스러워 했습니다. 카톨릭적인 영성에서 중요한 예수의 이미지는 나약한 어린 아이와 십자가에 못박힌 희생자의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나우웬이 이 점을 지적한 것을 읽고 매우 기뻤습니다.

따라서 목사님은 기독교 지성과 영성을 구분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군요?
저는 기독교의 제자도가 기독교의 지성을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독교적 지성만을 개발할 것이 아니라 기독교적 정신과 기독교적 양심과 기독교적 정서, 그리고 기독교적 의지 등 우리 인간 존재의 모든 영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놓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기독교적 제자도 또는 제자로서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결국 모든 것을 통합하는 개념이 제자도라는 말씀이시군요?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있는 제자의 삶 바로 그것입니다.

청교도 영성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해 주시죠.
청교도 영성에 있어서 제가 가장 경탄하는 부분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인간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들은 진실로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뿐 아니라 인간의 부패성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영적, 도덕적, 목회적 사역은 심오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죄악성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주의 지성운동의 뒤를 이을 만한 차세대 리더들을 추천하신다면 어떤 분들이 계시는지요?

또한 복음주의 지성 운동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책들이나 단체들을 소개해 주십시오.
저는 먼저 오스 기니스(Os Gui- ness) 박사를 언급하고 싶군요. 또한 옥스퍼드 대학의 알리스터 맥그래스 박사 그리고 고든 콘웰 신학교의 데이빗 웰즈 (David Wells) 박사를 들 수 있겠습니다. 정 목사님도 웰즈 박사의 책을 아시죠.
이외에도 데이빗 쿡 (David Cook) 박사, 그리고 마이클 쉴루터 (Michael Schluter) 박사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케임브리지에 희년센터를 설립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존 와이아트(John Wyatt) 박사를 들 수 있는 데요, 그는 의과대학 교수로서, 2년 전에 런던 인스티튜트에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강의를 한 바 있습니다. 그는 의료 윤리에 속하는 낙태와 안락사 문제 등의 전문가로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아직까지 40대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5세기 이후 사막 교부들의 영성운동에 대해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시는지요? 이들로부터 복음주의자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글쎄요. 사막 교부들에 대하여 제가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사막으로 은둔한 행위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말씀하신 내용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점에서 사막 교부들과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주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 예수님은 높은 산 같은 한적한 곳으로 홀로 가셔서 기도하시고는, 다시 사역을 위하여 사람들 가운데 돌아오시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주님은 사역에의 참여와 혼자만의 묵상을 위한 은둔 사이를 균형 있게 유지하셨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주님의 삶에 있어서 혼자만 묵상을 위한 은둔은 사실상 사람들과 세상 가운데서 더 능력 있는 사역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사막 교부들은 이점을 잘못 이해한 것 같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관점에 있어서 칼빈주의의 장점과 약점은 무엇입니까? 또 칼빈주의와 웨슬리주의를 비교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먼저 칼빈의 종교개혁과 메노 시몬스 등이 중심이 된 급진적 종교개혁 운동을 비교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해한 바로는 급진적 종교개혁자들은 세상과 사회를 떠나서 믿는 이들만의 공동체를 이루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또한 세상이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죄악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사회 개혁을 위한 노력은 헛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그들은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13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국가내에서 존재하며, 국가의 권세를 인정하고, 국가가 국가로서 바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러나 급진주의자들은 국가가 죄악에 완전히 물들어서 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국가를 떠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급진주의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칼빈은 성경적인 입장을 견지하였습니다. 칼빈에 따르면 국가는 하나님의 다스림 가운데 생겨났으며, 국가는 정의를 실행하고 선행을 장려하며 악행을 심판하는 책임과 의무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와 정치의 영역에 참여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 제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국가가 국가로서 하나님께 부여받은 의무를 잘 감당하도록 도와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바로 이 점이 칼빈과 급진주의자들 간의 중대한 차이점이었습니다. 따라서 칼빈주의가 성경적인 원리대로 꽃 핀 나라들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적 참여로 인한 정치, 사회적 변혁이 많이 이루어진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웨슬리의 입장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웨슬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는 윌리암 윌버포스의 친구로서 윌버포스가 노예제 폐지 운동에 헌신하도록 격려한 바 있습니다. 사실 웨슬리가 쓴 많은 편지들 중 마지막 것은 웨슬리가 윌버포스에게 노예제 폐지 운동에 진력하도록 독려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회 참여로 사회를 완전케할 수는 없지만 사회의 상태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확고히 믿었습니다. 우리 복음주의자들은 이 세상이 유토피아로 변화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가 어느 정도는 개선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칼빈의 하나님 주권에 대한 강조와 웨슬리의 인간의 자유와 책임에 대한 강조를 어떻게 조화시키십니까?
사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칼빈주의자였던 조지 휫필드와 웨슬리는 결국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달리하였고 끝내는 나누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칼빈주의자와 웨슬리주의자가 한 자리에 앉아서 서로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나눈다면 둘 사이의 차이점 보다는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찰스 시므온을 좋아합니다. 그는 진리는 어떤 하나의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고, 또 두 극단의 혼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양 극단의 주장을 조화나 화해시킬 수 없다 하더라도, 이 양극단의 두 입장에 동시에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인간의 지성은 이 두 가지 사실이 함께 진리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모두 진리라고 믿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동시에 인간은 책임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를 함께 가르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함께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지성으로는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없더라도 말입니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대응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급변하는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특히 세계는 인터넷과 정보화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그리스도인이 잘 대처하는 태도는 무엇인가요? 새로운 트렌드에 민감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좋을까요 아니면 신중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을까요?
저는 이 분야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하지만 저는 인터넷과 정보화에 대한 기독교적 평가를 반드시 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정보화에는 여러 가지 위험과 동시에 좋은 기회들이 함께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보화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거부나 무조건적인 승인이라는 무책임한 자세를 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 정보화라는 추세 속에는 동시에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잘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같은 변화의 시대에 도시 한복판의 선교 전략 그리고 제3세계와 아프리카지역 등에 대한 선교전략에 대해 말씀해주시죠.
저는 여러 도시에서 선교한 바 있는 사도 바울의 선교 전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에베소와 고린도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데 이는 이 두 도시가 상당히 큰 대도시였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두 곳의 선교를 위해 사도 바울은 좋은 전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두 도시의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도시 내의 비종교적 채널들을 이용하였습니다. 고린도에서 그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디도 유스도라하는 사람의 집에서 복음을 증거하였고, 에베소에서는 두란노라고 하는 강의장을 이용하여 선교하였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본을 따라야 하며, 따라서 비종교적인 채널들을 개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시청이나 관공서에서의 강의, 대학에서의 강의 등 여러 가지 토론의 장들을 활용하여 선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선교가 교회 내부에서만 일어나도록 제한 시켜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아덴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시장거리나 도시의 광장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 전도 사역과 더불어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복음을 변호하는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와 에베소에서 변증 작업을 시도한 바 있습니다. 저는 Bible Speaks Today시리즈의 사도행전 강해에서 이것을 다룬 바 있습니다. 비종교적인 채널을 통한 복음전도의 세 가지 방식에 대해서 소개하였습니다.

올해에는 미국과 러시아의 대통령 선거를 비롯하여 국제 정세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이같은 국제 정세의 변화에 대하여 복음주의 교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합니까?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십시오.
이 질문은 너무 큰 질문이어서 한 권의 책을 써야 답변이 될 것같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만일 우리 복음주의자들이 여러 정치 제도들 중 하나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세례주려고 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실수라는 것입니다.
물론 저는 민주주의적인 정치 절차가 성경적으로 변호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인간의 타락을 심각하게 고려합니다, 그래서 정치 권력을 소수에게 집중시키지 않습니다. 권력을 가진 소수가 타락하면 대단히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민주주의는 창조의 원리를 진지하게 고려합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타인의 의견 수렴 없이 정책 결정을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정책 결정에 있어서 가능하면 많은 수의 사람을 관련시키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민주주의적인 정치절차가 가장 성경적인 정치제도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변호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성경의 창조와 타락 원리를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는 모두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창조적인 주도권을 중시하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들을 활용하도록 격려합니다. 또한 에덴 동산의 아담처럼 이땅에 있는 여러 자원들을 잘 개발하도록 격려합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이러한 점은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여러 단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탐욕과 부패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자본주의의 이러한 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주의를 더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정의의 실현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거대한 정부가 개인의 주도권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폴란드의 어떤 정치가의 다음과 같은 말을 좋아합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를 당신들은 알고 있습니까? 자본주의는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제도이며 사회주의는 그말을 거꾸로 하면 됩니다. 즉 사회주의 역시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제도입니다.” 저는 이 말을 매우 좋아합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모두 사람을 착취하는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둘 중 어느 하나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례받을 수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요.

정말 통찰력있는 지적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제자도를 독려하고 증진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십니다”라는 말은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주권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침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정치든, 경제든, 윤리이든, 사회이든, 교육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은 모든 영역의 주님이십니다. 저는 이점에서 아브라함 카이퍼의 말을 좋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적인 통치를 벗어나는 영역은 단 한 평도 없다.” 이것은 우리 기독교의 위대한 고백입니다.

한국 교회를 몇 번 방문하셨는데, 한국교회에 어떤 조언을 주고 싶으신지요?
저는 영국의 한 방문객이 한국의 문화와 교회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말한다는 것이 좀 건방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한국 교회가 교회의 크기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 같습니다. 교회 성도수의 크기에 따라 교회를 평가하는 경향은 문제가 있습니다. 물론 교인수의 크기도 하나의 기준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여러 다른 요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 교회가 성경적인지, 또 교회에서 성경을 평신도들에게 잘 가르침으로 평신도들이 신앙 생활을 잘 영위하고 있는지, 그리고 기도가 살아 있는지 등의 기준도 중요합니다.
둘째는, 유교적인 스타일의 리더십 문제입니다. 담임목사는 지나친 존경을 받거나 때로는 숭배되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위험합니다. 기독교의 리더십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어야지 공자를 따르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정신을 본받아야한다는 것이며, 주님의 종으로서의 리더십, 즉 섬기는 자로서의 리더십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교적인 권위주의적 리더십의 폐해는 한국뿐 아니라, 일본, 중국, 대만의 교회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 나라에서는 예수님보다도 공자를 더 따르는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 잡지는 미국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쳐니티 투데이와 같은 성격으로 발행되고 있습니다. 문서를 통한 복음 운동을 잘 해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교회의 삶에 있어서 「크리스채니티 투데이」나 「소금과빛」 같은 잡지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저는 이러한 잡지들이 진지한 서평란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서평을 통해서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목회자나 평신도가 안내를 받을 수 있다면 유익할 것입니다. 어떤 책의 내용이 무엇이며, 무슨 이유로 이 책을 읽어야하며, 또 읽지 않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서평란은 교회의 삶에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잡지들은 교회 내에서 현재 유행하고 있는 흐름들을 포착해서 그것들에 대한 성경적인 평가를 내려줌으로써 목회자와 평신도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이러한 잡지들을 읽습니다. 또한 고정적인 신학적, 신앙적 상담란을 만들어 궁금한 점들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해 줌으로써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과 로이드존스목사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오해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매우 존경하신 것으로 아는데 이에 대하여 좀 설명해 주십시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저보다도 15-20세 정도 연상으로 제 아버지와 비슷한 세대이셨기 때문에 저는 그 분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존경하였습니다. 저는 그를 참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경하며 사랑하였습니다.
저는 여러 차례 개인적으로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한 바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 분의 조언을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저술한 책을 거의 모두 읽었습니다. 예를 들어 전 아홉 권의 로마서 강해를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읽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팬이며, 팬 클럽의 회원들 중 한 사람입니다.
물론 제가 로이드존스 목사님과 모든 면에서 의견을 같이 한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는 서로 다른 교회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복음주의자들이 교리적으로 혼합된 교단들인 성공회나 감리교나 장로교 안의 회원으로 남아서는 안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1966년에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성공회 교단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매우 설득력 있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주의자들이 독립교회를 이루어야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사실 그때 그 모임의 의장은 저였습니다. 제가 청중석에 앉아 있는 젊은 목사들을 보니 그들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목사 사직서를 쓰려고 고민스러운 얼굴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그들이 좀더 시간을 가지고 이 문제를 생각할 것과 좀더 신중할 것을 부탁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간에 끼어 들어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입장을 반박하였습니다. 특히 그분의 ‘남은 자’ 사상을 반박하면서 ‘남은 자’는 교회 안에 있어야 하지, 교회를 떠나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은 저 같은 젊은 사람이 로이드존스 목사님 같은 분에게 공적인 자리에서 반대 의사를 표명한 것에 놀랐습니다.


그 회의가 있은 후 저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을 찾아가서 제가 의장의 권한을 오용한 것을 사과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제가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의견에 반대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드렸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당시에 그렇게 한 것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한 일이라고 믿습니다. 이 점은 정 목사님께서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남은 여생에 꼭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나 목표가 있으시다면 어떤 것일까요?


저는 제게 남아있는 여생이 몇 시간일지, 며칠일지, 몇 달일지, 아니면 몇 년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매일 아침 저 자신의 생명의 한계를 기억하고 주님께 기도합니다. 만일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을 준비를 하기 원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과거에 청교도들이 기도한 것처럼 잘 사는 것뿐 아니라 잘 죽기를 원한다고 기도합니다. 따라서 저는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고백을 죽음의 순간에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주님 앞에서 신실함을 지키는 것이 저의 남은 여생 동안 이루고 싶은 주된 소원입니다.

 

아시아의 종교들을 공부하신 적이 있는지요? 이런 종교들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저는 요한이 말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빛이시며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으로서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믿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창조의 일을 하셨고 지금도 계속적으로 창조주로서의 사역을 감당하신다고 믿습니다. 저는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로부터 또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 계시의 진리입니다.
주님은 세상의 빛으로서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성의 빛과 양심의 빛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한 구속 그리고 부활 이 세 가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유일한 것으로, 이 점에서 그는 어떤 경쟁자도 동등자도 후계자도 허락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는 유일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유일성과 궁극성을 변증해야 합니다.

장시간의 대담에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제가 감사를 드립니다.


대담을 마치고

지난 1월, 「소금과빛」 편집부가 존 스토트 목사님과의 대담 가능성을 타진해 왔다. 사실 스토트 목사님과 개인적인 친분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 지 잘 몰랐다.

그러던 중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인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에게 소개를 부탁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교수님께 말씀을 드렸다. 감사하게도 3월 4일 옥스포드 지역 목회자들을 위해 위클리프홀이 주관하는 복음주의신학대회에 스토트 목사님이 주요 강사중 한 분으로 초청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스토트 박사 외에 마이클 그린 박사와 맥그래스 교수가 주강사로 초청되어 있었다).

 

맥그래스 교수가 직접 스토트 박사께 「소금과빛」의 대담 의사를 담은 편지를 보내 주시겠다고 하셔서 교수님께 모든 일을 맡겼다. 얼마 후 스토트 목사님께로부터 긍정적인 회신이 왔고, 결국 대담 날짜와 시간은 3월 4일 오후 네 시 그리고 장소는 위클리프 홀의 맥그래스 교수 연구실로 정해졌다.

거의 80세가 다 된 노인 스토트 목사! 그는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건강하였다. 뿐만 아니라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정열은 어느 젊은이보다 더 뜨겁고 강렬하였다.


무엇보다 때묻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그의 얼굴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검소한 옷차림은 그가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인지 아닌지 쉽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주 예수님과 복음만을 위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평생을 꿋꿋이 살아온 자태가 몸에 베어 있었다.


자신을 ‘스토트 아저씨’라고 부르라는 그분의 말씀은 매우 친근하게 다가왔다. 마음을 열고 질문에 답해 주셨기에 두 시간에 걸친 대담은 사뭇 진지하고, 활기가 넘치며, 간혹 웃음을 자아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시간이었다. 빡빡한 일정 가운데 겨우 얻은 두 시간이어서 한 가지 한 가지의 질문에 대해 좀더 깊이 들어가기 어려운 점이 매우 아쉬웠다.

 

대담 도중 스토트 목사님이 ‘영성’이라는 용어를 싫어하며, ‘영성’보다는 ‘제자도’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강조한 것은 예리한 지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한국 교회가 너무 무비판적으로 가톨릭적인 용어와 의미로서의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질문을 내심 가지게 되었다. 스토트 목사님은 시종일관 같은 입장을 견지했고 ‘제자도’와 ‘제자로서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실 ‘영성’이란 말은 좀더 인간의 주권과 능력을 높이는 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영성’이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하고자 한다면 ‘제자의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영성의 실체와 내용을 분명히 하는 노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 한 가지 한국 교회가 교회를 건물의 크기와 성도 수로 평가하는 경향성이 있음을 지적했을 때 공감이 되었다. 큰 교회가 좋은 교회라는 의식이 팽배하다 보니 비록 숫자는 적지만 주님 앞에서 신실하게 목회하는 ‘작은 교회’ 목사님들과 그러한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잘못된 풍조가 어느새 우리 한국교회에 자리잡게 되었음을 반성하고 돌이켜야 함을 느꼈다.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의 숫자에 있지 않다는 말씀을 재삼 되새기게 된다.

대담과 정리/ 정성욱 목사 사진/ 정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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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하나님이 말씀하셨을까?

최근에 들어와 한국교회에 자칭 예언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다.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는 예언훈련학교에서 선무당같이 어설픈 예언자들을 무더기로 배출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통된 특징은 하나님 또는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엄청난 혼란이 야기된다. 자기 안에서 떠오른 생각에서 나온 말이 주님의 말씀으로 둔갑하는가하면 마귀적 음성까지 주님의 말씀으로 위장되기 일쑤이다.
순진한 교인들은 그들이 직통으로 계시된 말씀을 전파하는 것 같아 그들의 예언을 성경말씀보다 더 솔깃하게 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성경의 진리에 의해 전혀 입증될 수 없는 온갖 허튼 소리들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명분으로 범람하여 교회를 혼란케 한다는 점이다.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신약의 사도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우리는 그 계시가 기록된 성경말씀을 전할 때에 한해서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말씀과 다른 말을 하면서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선언하는 것은 성경 외에 다른 계시를 주장하는 것과 진배없다.
자칭 예언자들은 그들의 예언이 성경말씀과 같은 권위를 가진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교인들이 성경말씀보다 그들의 예언을 더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니 성경보다 그들의 예언이 훨씬 더 실질적인 권위가 있는 셈이다. 

성경말씀을 듣기는 원치 않아도 예언자들의 말을 들으려고 모여드는 이들은 많다.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에는 은혜를 못 받아도 직통으로 주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 같은 예언자의 말에는 엄청 은혜를 받는다. 평소에 늘 설교를 통해 들어도 별 감흥이 없던 말도 예언자의 입을 통해 들으면 큰 감동으로 와 닿는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하나님이 귀히 보신다는 말을 설교를 통해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똑같은 말씀을 예언자가 “네가 지금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있구나 착한 종아 내가 너를 귀히 여기노라 내가 앞으로 너에게 더 큰일을 맡기리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설교를 통해 누리지 못한 큰 위로를 받는다. 왜 그럴까?

그들이 만약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대신 내 마음에 이런 감동이 왔다는 식으로 솔직하게 말한다면 교인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을까?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단언함으로써 마치 주님이 예언자의 입을 통해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다고 믿도록 교인들의 심리를 교묘히 조종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일부러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그렇게 주장한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들 중에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권면하기 위한 선한 의도를 가지고 그런 예언사역을 하는 이들도 있으리라고 본다. 필자가 염려하는 것은 그들의 주장이 야기하는 혼란이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는 특별한 성령의 감동이나 메시지가 마음에 떠오를 때가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확신과 마음의 감동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섣불리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 마음에는 성령님뿐 아니라 육신적인 욕망과 마귀적인 세력에 의해 자극된 온갖 잡다한 생각과 메시지가 복잡하게 교차되기에 어떤 생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 

요즘 예언하는 이들에게 이런 지혜와 신중함이 결여되어 있다. 자기 마음에 일어난 감동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함부로 확언하는 것은 아주 경솔할 뿐 아니라 진실하지 못한 태도이다. 병고침의 집회에서 자주 “주님께서 지금 눈에 문제가 있는 사람을 만지시고 계십니다. 방금 무릎 관절이 치유 받은 이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신장에 이상이 있는 이를 고치시고 계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몇 천 명이 운집해 있는 모임에 으레 그런 병자들이 있으리란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 사실을 자신에게 알려주셨기에 그렇게 말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알려 주신 것일까?
소리를 들은 것인가 아니면 마음속에 어떤 인상을 받은 것인가? 그 계시가 확실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참으로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라면 왜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좀 더 확실하게 계시해 주지 않으셨는가? 정확히 누가 어떤 병에서 나았다고 알려주시지는 못하는가? 

과거 미국의 한 교회에서 열렸던 집회에서 강사가 회중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과 그의 사정을 정확하게 말하면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치유하기를 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그 복음사역자는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특별한 방식으로 일하실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다. 대부분의 예언은 마음속에 즉흥적으로 일어난 감동이나 느낌, 또는 예측을 발설하는 것이다.
그것이 과연 백 퍼센트 주님의 말씀인지 사실 자신도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라고 과감히 믿고 그렇게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담대한 믿음이 아니라 경솔한 믿음이다. 분명한 진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류의 위험성을 간과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확실치 않은 것을 직통계시를 받은 것 같이 말하는 것은 진실하지 못한 행위이며 청중을 교묘히 조정하고 기만하는 것이다. 비록 자신이 의도하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그를 굉장한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이런 행위는 미국의 신유집회에서 허풍쟁이 사역자들이 즐겨하던 짓인데 한국의 사역자들이 그것을 아무런 성경적인 검증도 없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예언집회나 예언훈련학교에서 예언 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일일이 예언을 해준다. 수많은 예언집회를 쫓아다니며 예언을 받았던 한 교인은 이렇게 증언한다.

“대부분 가서 받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형제님의 삶 속에 함께 하시는 데요. 지금 앞에 일곱 가지 빛이 보이고 있습니다.’ 혹은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축복하고 축복하노라. 네 사업이 번창할 것이다.’
혹은 ‘네 눈물과 기도를 들었노라’ 혹은 ‘지금 예수님의 모습이 보이고 있는데요, 우리 형제님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님께서 지금 답답한 문제 가운데 있는데요,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 형제님의 삶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계속 꾸준하게 인내하며 기도를 쉬지 말라고 말씀하시는데요. 우리 형제님이 인내하면 그 열매들이 열릴 것입니다. 지금 수많은 포도나무가 보이고 있는데요. 우리 형제님이 지금 물질의 축복을 간구하는 모습이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 형제님이 물질을 심으시고 우리 형제님뿐만 아니라 형제님의 가족도 물질의 궁핍함이 없을 것입니다.’ 라는 등 이런 저런 예언을 많이 받았는데, 그 말들은 순간적인 감동은 되었지만 실제로 현실에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건강한 몸이 병만 들었습니다.” 

이 교인의 증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대부분의 예언이 이런 식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예언 받으러 나온 사람을 보고 마음에 떠오르는 대로 즉흥적으로 지껄여대며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하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성경에서 예언하는 이는 성령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여 자신에게 메시지를 주실 때만 예언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자칭 예언자들은 자신이 원하면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예언을 해준다. 이는 성령님을 자기들이 필요할 때 호출하여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하수인처럼 취급하는 행위이다.

이런 식으로 사이비 예언이 범람하게 되면 한국의 기독교는 머지않아 무당종교로 변할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을 금해야한다. 자기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나 마음속에 일어난 감동을 말하면서 그것을 주님의 말씀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은 그 누구도 구약의 선지자들 같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주장할 수 없다. 그들과 같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무오 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바울사도는 예언을 사모하라고 했다(고전14:1). 자칭 예언자들은 주로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언의 은사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던 예언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했던 예언과는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류가 있는 인간의 말이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한 사람의 말만 듣지 말고 두 세 사람이 예언하게 하고 다른 이들은 그 말을 분별하라고 했다(고전14:29). 이 말은 예언의 진정성을 달아보고(weight) 잘 분별하여 참과 오류를 가려내라는 말이다. 그들의 예언은 사도들의 가르침과 성경말씀에 의해 항상 점검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보다 열등한 권위를 가진 것이었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기 위해(고전14:3), 또는 숨은 죄를 드러내기 위해(고전14:25), 성령이 마음에 순간적으로 떠오르게 한 것을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성령이 떠오르게 한 인상과 메시지가 인간에 의해 잘못 이해되고 해석되어 잘못 전달될 수 있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철저한 검증과 분별을 명한 것이다. 이런 유의 예언이 지금도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고 아직도 연구되어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다. 확실한 결론이 내려질 때까지 이와 유사한 예언을 하는 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주님이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것을 자제해 달라는 것이다. 자신의 예언적인 의견과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명명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예언적인 통찰을 꼭 말해야 한다면 차라리 주님께서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나 인상이 떠오르게 하시는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훨씬 솔직하고 진실한 태도이며 많은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

성경말씀을 전하면서는 담대하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외쳐야 하지만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말을 하면서 그렇게 선언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이 번창할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반드시 금지되어야한다. 이런 사이비 예언이 난무할 때 교회에 극심한 혼란을 불러오며 기독교 신앙을 허무는 미혹의 영이 가장 무섭게 역사한다. 아무리 신통한 예언의 능이 있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며 예언할 때 교인들은 성경말씀보다 예언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이며 그 말을 실질적으로 더 의존한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의존하는 것에 의해 주관된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예언자의 말에 의해 주관되면, 예언자의 오류와 부패성을 통해 역사하는 거짓의 영이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예언은 교회를 허무는 미혹의 영이 가장 교묘하면서도 무섭게 역사하는 영역이며, 교회를 최악의 혼돈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예언에 관한한 아무리 주의를 기우려도 부족하다. 어떤 예언적인 의견이나 통찰은 반드시 성경에 의해 점검되어야한다. 그것을 함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언해서는 안 된다. 교인들을 예언자들의 말보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의존하는 삶을 살도록 지도해야한다. 고린도교회에 예언이 성행했던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신약성경 전체가 아직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 말씀의 공백을 잠정적으로 메우는 역할을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본다. 

지금 우리는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완전한 성경말씀을 가지고 있다. 이 말씀으로만 부족하여 예언자들의 엑스트라 말씀을 쫓아다니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의 역할을 지금은 성경말씀을 전파하는 설교가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예언은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기 위함인데 이 일을 하기에 성경말씀보다 더 적합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성경은 성도를 세우고 위로하고 주의 계명으로 권면할 은혜로운 말씀으로 가득한 진리의 보고이다. 
또한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예언은 죄를 드러내는 것이었는데 성경말씀은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처럼 우리의 완악한 마음을 찔러 쪼개어 숨은 죄악을 드러낸다. 성령님의 대표적인 사역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죄를 깨달게 하는 것이다. 또한 말씀은 가장 중대한 장래 일을 예언한다. 죽음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과 주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언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율법의 말씀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멸망과 회복을 예언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언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만약 교인들이 성령님을 따라 살면 새 언약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것이나 성령님을 거스르고 육신을 따라 살면 과거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하나님의 혹독한 징계를 받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설교를 하고나면 교인들이 목사님은 어쩌면 그렇게 자신들의 사정과 고민을 잘 아는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한다. 내 일을 훤히 다 아는 것처럼, 내 마음을 꿰뚫어보는 것처럼 말씀하신다는 말도 심심치 않게 듣는다.
또 자신이 처한 상황과 직면한 문제에 꼭 적중한 말씀을 해 주셨다고 고마워하는 교우들도 자주 접한다. 바울사도가 말했듯이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둔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함이라”(딤후3:16-17). 성령님은 이 성경말씀을 통해 역사하심으로 교인들 각 사람에게 꼭 필요한 메시지와 은혜를 공급하신다. 
그러므로 진정한 영적인 부흥은 말씀의 부흥이다. 예언자의 말이 판을 치고 성경말씀은 뒷전으로 밀려난 최근의 성령운동은 부흥이 아니라 심각한 영적인 탈선이며 쇠퇴이다.

선지동산 55 게재 / 성령의얼굴(5) / 박영돈 교수

  

 

많은 독립언론들이 대략 28,000명에서 100,000명의 목사들이 FEMA와 DHS(국토안보부) 요원으로 모집되어 훈련을 받고 있다는 보고를 하고 있다. 이렇게 모집된 목사들은 the Clergy Response Team(성직자 대응 팀)에 합류하여 그들의 양떼들이 DHS가 요구하는 일에 순응하도록 설득하는 일을 하게 된다. 국토안보부는 저들 나름대로 해석한 로마서 13장의 말씀들을 가지고 목사들이 성도들을 설득하도록 훈련하고 있다. 로마서 13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로마서 13:1)

 

이런 훈련은 지금까지도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버지니아주의 시장인 Roanoke는 FEMA 캠프를 무슬림 이주자들을 위해 사용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을 얼마 동안이나 수용할 것인가? 무슬림 이주자들에 대한 수용 기간이 지나면 과연 이곳에 또 누구를 수용할 것인가?

 

Mansfield 목사의 증언

 

국토안보부(DHS)에서 운영하는 ‘성직자 대응 팀’으로 모집된 바 있었던 Mansfield 목사의 증언은 우리를 놀랍고 우려스럽게 만들고 있다.

 

Mansfield 목사는 ‘성직자 대응 팀’에 참석하여 몇 번의 브리핑을 받았는데, 여기서 그는 그의 귀가 의심될 만한 말을 들었다. 그는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하여 사람들을 강제로 수용소에 보낼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Mansfield 목사는 계엄령이 선포되기만 하면 모든 일들이 즉각적으로 진행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계엄령이 선포되면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 분리되어 (FEMA 캠프에) 수용될 것인데, 이 때 성직자들은 이렇게 분리된 가족 구성원들을 안심시키는 방법을 훈련받고 있다는 것이다.

 

 

Mansfield 목사는 FEMA와 국토안보부의 훈련이 생물학 테러를 가정하고 진행되고 있다고 증언하고 있다. 목사들이 정부가 요구하는 소개령(疎開令)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이 자발적으로 수용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설득하는 일을 훈련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일은 SWAT 팀을 보낼 때 함께 진행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이에 나는 Mansfield 목사에게 만일 FEMA 캠프가 실재하느냐고 묻자 그는 FEMA 수용소는 실재하고 있으며 많은 성직자들이 이 강제 수용소를 위해 일하도록 훈련받고 있다는 대답을 하였다.

 

기사원문>> Pastors Being Trained to Calm Americans Who Will Be Sent to FEMA Camps

 

 

* 많은 목사들이 정부의 사주를 받고 ‘성직자 대응 팀’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급변사태가 발생시 성도들을 FEMA 캠프에 자발적으로 수용되도록 설득하는 일에 동원될 것이라 한다. 신앙적 양심과 분별력을 잃어버린 목사들이 NWO 수립의 앞잡이가 되도록 훈련받고 있다는 충격적인 증언이다.

 

2013년 WCC 부산 총회 이후 이 땅에 많은 목사들도 NWO 수립을 위한 로마 카톨릭의 종교 통합 작업에 나팔수가 되고 있다. 일부 교단에서는 아무런 신학적 토론도 없이 적그리스도의 세력(일루미나티)들이 사람들을 감시 통제하기 위해 개발한 베리칩이 짐승의 표와는 상관없다는 발표를 함으로 저들의 정책에 협조하고 있다.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베리칩 이식을 강행하는 시기가 오면, 아마도 이런 교단들과 목사들이 솔선수범하여 베리칩을 받고 성도들에게도 베리칩을 받도록 설득하게 될 것이다.

목사들이 욕심에 눈이 어두워 분별력을 잃을 때,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멸망의 길을 갈 수 있는 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마태복음 15:14).

 

- 예레미야 -

개혁주의 구원론이 전파되지 않는 개혁교회  

박영돈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그리스도와의 연합 

따라서 구원의 전 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바탕 위에서 진행된다. 전통적으로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 서정의 모든 단계보다 앞서 배치된다. 그것은 구원의 모든 은혜가 이 연합에서부터 출발할 뿐 아니라, 이 연합 안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존 머레이(John Murray)가 말했듯이, 이 연합은 단순히 구원이 적용되는 과정의 한 국면이 아니라 모든 국면의 기초이다.3)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개혁주의 구원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에밀 부룬너(Emil Brunner)는 이 교리가 ‘모든 칼빈주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하였다.4) 특별히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근간으로 하여 구원론을 발전시키는데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 강요』 3권에서 구원론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함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는다면 속죄 사역의 혜택에 전혀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였다. 오직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만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새 언약의 모든 은혜가 흘러나온다고 하였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와 연합의 진리를 다양한 표현과 비유를 통해 증거하고 있다. 특별히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의 서신에만 이 용어(유사한 표현까지 합쳐)가 164번이나 등장한다. 어떤 신학자가 말했듯이, ‘그리스도 안에’라는 문구는 바울 서신에서 가장 특징적인 문체이다. 공관복음서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묘사할 때는 주로 예수님과 ‘함께’(with)라는 표현을  사용했다면, 바울은 항상 그리스도 ‘안에’(in)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이는 바울이 도입한 독창적인 표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신학자들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며 열쇠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와 연합의 사상은 요한의 기록에도 풍부하게 나타난다. 요한복음 14장에서 주님은 보혜사 성령이 임할 때 주님과 우리가 상호내주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곧 이어 요한복음 15장에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하여 이 연합의 신비를 알기 쉽게 풀어주셨다. 거기서 ‘내 안에 거하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셨다. 바울의 연합 사상도 이 주님의 말씀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논함에 있어서 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문은 어떻게 거룩하고 완전한 하나님이 부패하고 유한한 인간과 하나가 될 수 있는가이다.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불같은 연단과 고난을 통해 정화되는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 신자가 성결해져야만 신인합일에 이르게 된다고 가르친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생활의 목표이며 영성의 골(goal)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기독교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출발점이며, 영성의 근원이다. 신비주의적 전통에 대응하여 개혁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구원과 성화의 전 과정의 바탕으로 본 것은 신앙의 특성과 영성의 색깔을 뒤바꾸어 놓은 영적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끊임없는 노력과 수양을 통해 신인합일의 경지에 이르기를 힘쓰는 고역스럽고 율법주의적인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하나 됨에서 흘러나오는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풍성한 삶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는 근거와 자격을 우리 안에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우리가 평생 성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불같은 고난을 통하여 정화될지라도 그런 자격을 조금이라도 갖출 수 없다. 오직 예수님이 흘리신 피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결합할 수 있는 정결한 신부의 자격을 갖추게 한다. 그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의롭다함을 얻게 하여 그리스도의 순결한 신부가 되게 한다. 이 연합의 근거는 예수님이 구속사역을 통하여 이루신 율법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법적으로 전가된 것이다. 그래서 개혁신학에서는 이 연합을 우선적으로 ‘법적 연합’(judicial union)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개혁교회에서 칭의를 법정적인 개념으로 이해했기에 이런 연합의 교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칭의론의 개혁은 연합에 대한 기존의 가르침에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왔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경건의 부단한 노력과 신비체험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영적인 높은 경지가 아니라, 오직 예수의 대속 사역에 근거하여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복음의 진수를 회복한 것이다. 


남녀가 혼인하여 법적으로 하나가 되면 그 소유를 공유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과 법적으로 연합하면 주님의 의로움과 거룩함, 그리고 영광에 참여하게 되며 주님과 함께 하나님의 후사가 된다. 예수님과 같이 아들의 특권을 누리며 아들의 영을 받아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아버지 집의 풍성한 것들을 누린다.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므로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가 되며 추한 자가 아름다운 자가 되고, 빈곤한 자가 부요한 자가 된다. 


이 연합은 법적인 연합일 뿐 아니라 실질적인 연합, 즉 생명적이며 유기적인 연합이다. 성경은 이러한 연합의 성격을 머리와 몸, 그리고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실감나게 묘사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의 생명에 접붙임을 받아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끊임없이 부활의 생명력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의 형상과 성품에 참여하며 그의 마음을 본받는 자가 되었다. 


연합에 관한 논의에서 제기되는 또 다른 의문은 어떻게 시공간의 무한 간극으로 분리된 두 존재가 실질적으로 연합할 수 있는가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연합의 영이다. 성령은 하늘에 있는 주님과 땅에 있는 신자, 무한자와 유한자, 의로운 이와 불의한 자의 무한 간극을 극복하고 완전히 이질적인 두 존재를 인격적으로 결합시킨다. 그러나 성령은 둘을 긴밀히 연합하는 동시에 구별되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에 그 어떤 “잡스러운 혼합”도 허용하지 않는다.5) 성령은 이 연합의 매개체와 방편인 동시에 이 연합의 모든 혜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통로이다. 


성령은 연합의 매개체와 채널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우리가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 교제하는 만남의 장으로 제공하신다. 이것이 성령의 인격이 가지고 있는 환경적인 특성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성령의 사역을 묘사할 때 주로 성령 ‘안에’(in) 라는 전치사를 사용하였다. 우리 육체가 공기 속에 존재하며 물고기가 물속에서 존재하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성령 안에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은 우리가 존재하는 영역, 즉 영적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하늘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되었다고 말했다(엡 2:6). 거기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늘의 영역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누리게 되었다(엡 1:3).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곧 하늘 시민이다(빌 3:20).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것은 지극히 사적인 사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우주적 사건과 계획 속에 참여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우주의 새로운 상황과 질서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스도 안’과 ‘아담 안’은 서로 대비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권세가 지배하지 못하며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의 새 시대가 도래하였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에서 자유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진 새사람의 반열에 서게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다(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 진행되는 새 창조에 참여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이 포괄하는 반경을 우주적 차원까지 확장하였다. 죄로 오염되고 와해된 우주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고 통합되는 종말론적인 비전이 실현되는 것을 궁극적인 구속의 목표로 보았다. 그러므로 먼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아직도 그리스도 안에 편입되지 않은 세상의 영역들을 그 반경 안으로 복속시키는 중대한 책무를 띤 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물과피와성령(water and blood and the Holy Spirit)
|
글쓴이 : 박요셉| 원글보기
캘리포니아에서는 드물게 일년내내 마르지않고 여러갈래의 물줄기가 끝없이 흘러내리는 폭포입니다.

Burney Creek에서 시작되는 큰 두줄기와 땅속에서 바위틈사이로 갈라져나오는 여러갈래의 물줄기가 합쳐져 새의 깃털처럼 떨어지는 아주 특이하고 아름다운 폭포이며 공원안에는 Burney Creek주위와 호수(Lake Britton)까지 가는 Trail 과 넓은 캠핑장까지 있어 조용히 즐기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입니다.

폭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약 280마일(4시간30분 정도) 거리이며 가는길에는 Redding에 들려 Sundial Bridge를 구경하고 오는길에는 래딩 주변의 Whiskeytown Lake, Shasta Lake댐을 돌아보고 오는것도 좋은 방법일것 입니다.

(또한 Lassen Volcanic Park과 Mt.Shasta의 중간에 위치해있어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함께 돌아볼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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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께서 십자가의 흘리신 피로 죄 씻음 받고 하나님의 자녀된 백성은 몸은 땅에서 살지만 영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자들입니다.

 

하나님 자녀는 이땅에서 하늘의 법과 질서를 따라 사는 천국시민인데 그렇다면 구원의 대열에 합류한 천국 백성이 마지막 때 들려오는 이 세상 전쟁과 난리의 소문 그리고 앞으로 있을 그보다 더한 환난이 두려워 썩어질 이땅에 도피처를 건설하고 그곳에 피할 궁리를 하고 대비하며 산다면 과연 이 사람의 소속이 땅입니까? 하늘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마야달력의 지구종말이 두려워 짐을 싸들고 도피처로 피할 궁리를 하거나 한국전쟁이 두려워서 미리 해외로 피신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로 자기의 소속을 스스로 이미 증명하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자는 땅으로 피할 것이요, 하늘에 속한 자는 하나님께 피합니다. 강대상에서 목청높여 설교하는 목회자든 그렇지 않은 일반 평신도든 제 아무리 큰 소리로 본인이 천국백성임을 자처하고 주장하더라도 그가 믿고 행하는 바가 그 사람의 현재의 소속을 증명합니다.

 

교인들의 헌금을 낚아채어 더 많은 이땅의 물질을 추구하는 삯군 목자... 언제든 양들을 버리고 도피처 만들어 도망갈 궁리나 하는 목자... 교인들에게 가진 재산을 정리하여 도피처에 땅을 구입해서 이주할 것을 권유하는 목자들...

 

이 모두가 다 아직도 본인들의 소속이 하늘이 아닌 이 땅입니다. 이들의 유창한 언변과 설교솜씨와 눈물연기... 성도들을 향한 아첨과 칭찬의 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결코 이 땅위에 도피처를 만들지 않습니다. 도피처가 그토록 필수라면 예수께서 진작 성경에 도피처를 만들라고 여러번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설령 언젠가 도망갈 위험한 때가 온다 해도 롯의 가족을 잡아 이끈 천사들을 보내신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시고 그분의 자녀들을 반드시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더더구나 순교를 각오한다면 도피처는 말도 안 됩니다. 장차 순교할 자가 도피처가 왜 필요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보다 행위구원을 자꾸 강조함에 집중하고 은근히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그런 목회자도 거짓이니 속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선하고 착한 일을 많이 한다 해서 이런 것들로 천국에 가는게 아닙니다. 천국백성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도리이며 의무지만 이것만 계속 강조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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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등에 있는 짐 때문에

늘 조심 하면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이제보니 내등에 짐은

나를 바르게 살도록 한

귀한 선물이였습니다...

- 담아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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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이다.
      아버지가 먼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
      마을에는 백인이었던 펄 벅의 어머니가
      신을 분노하게 만들어 가뭄이 계속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분노로 변했고,
      어느 날 밤 사람들은 몽둥이, 곡괭이,
      도끼, 쇠스랑 등 무기가 될 만한 농기구를 가지고
      펄 벅의 집으로 몰려왔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따르게 하고
      케이크와 과일을 접시에 담게 했다.

      그리고 대문과 집안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두고는 마치 오늘을 준비한 것처럼
      어린 펄 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하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들었다.



      잠시 뒤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단숨에 거실로 몰려왔다.
      굳게 잠겨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문이 열려 있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때 펄 벅의 어머니는
      "정말 잘 오셨어요. 어서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드세요." 하며 정중히 차를 권했다.



      그들은 멈칫거리다가 못 이기는 척
      방으로 들어와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의 두려움을 들려주며
      만약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다면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고 말했는데,
      그것은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이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시작"이란 말이 생각난다.

      인간이 절망하는 것은 살아계신 주님을 믿지 못하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절망적 상황을 만났을 때, 당장 그곳에서 건져주시는 체험,

      이적과 기사, 기적만 추구하는 신앙은 병든신앙이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에서 건져주실 주님을

      바랐지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고백으로 승리했다.

       

      바른 신앙이란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어려움 속에서

      당장 건져주시라고 떼쓰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를 고백하는 믿음일 것이다.

       

      내가 당한 나의 어려움 때문에 좌절하여 주저앉기보다

      나의 당한 모든 일에 주님의 섭리하심이 있음을 믿고

      잠잠히 순응하며 풀무불 속까지 뛰어들어갈 그때,

      결과는 주님께서 영광받으신다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예수님께서 절망의 십자가를 피한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 뒤에 있을 영광을 바라고 잠잠히 참으심을 기억하고
      주님의 참된 용기를 본받는 자...
      그가 바로 절망에서 용기를 얻는 참 믿음의 사람일 것이다!

       

      바른 신앙생활이란 기쁜 일을 만나거나 어렵고 슬픈 일을 만나거나
      그 속에서 매일 매 순간을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는
      믿음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런 믿음의 사람은 절망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담대함을
      주님께로 공급받게 되는 것임을 믿는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고백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너와 나, 우리 모두의 고백이기를..... 


       


       

      - 글: 최송연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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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급환자 구할때 119
정말 더 급한 환자 이동은 헬리콥터

올해 봄부터 시작된
사역중 아픔 상처
차 타고 가면서 말합니다

남편 : 여보 기도 좀 해줘
하나님이 어떻게 한데
난 마음과 몸이 너무 아프고 상처가
나서 도저히 용서가 안돼
그러니 하나님이 어떻게 해달라고 기도
좀 해봐
당신의 은사 이럴때 쓰라고 주신거 아냐

어린아이처럼 남편이 수시로 집이나
교회서나
차 안에서나 보챕니다

물론 그 덕분에 밤에 나가 기도도 하고
차 안에서 기도하고
남편의 불안 초조 두려움 미움 상처
때문에 더 기도함은 사실입니다

이왕 기도해주면 월메나 좋은가
나의 잔소리

당신이 기도해서 이겨야징
나에게 의지하지 말고 산기도 다시
회복하고 새벽기도 시간도 더 늘이고
목사님이 하루 2시간은 기도해야지

싸움

깨달음 그래 기도하자 결심
여보 알았어요 기도할께요
말없이 차 밖으로 바라보며 기도

나: 여보 당신 마음 알아요
그분에게 받은 상처도 크고 용서가
안됨도 알아요

당신 마음은 지금 암벽 따고 올라 가는데
발이 미끄러워 떨어질까 두렵고
올라가려니 손에 힘은 없고 잡고 있는 줄조차
끊어 질까 초조 하고

그러나 그러나 여보
위 아래 쳐다 보지 말고
하늘을 쳐다봐요
당신 위해서 하나님이 헬리콥터 동원해서
밧줄 내려 구하려 오고 있으니
조금만 , 조금만, 더
인내 하며 기도해요

롬 8장 28절 모든것이 협력하여
선이 되게 하실꺼예요

남편 운전하면서 눈물을 닦는다
차창 밖으로 배추 씻는 아낙네의 손길 바쁘다
자 그럼 눈물 씻고 우리도 상처 씻고
양들 위해 또 전진 전진

여보 ?~~~~



출처: 사모님사모님/구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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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와 미국 국경사이에 있는 섬들, 약 1800개의 그림같은 아름다운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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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 자식에게 빌려준돈 돌려받은 사람있소~!~?

      자식이 빌려간돈 7500만원--
      몇번 생활비 부족하니 좀 갚아달라는 부모 부탁에
      조금만요~! 조금만요~!벌써 몇년째라는 김씨 할머니
      경로당 할머니들에게 묻는 말이--

      자식에게 빌려준 돈 돌려 받은사람 누구 있소? 입니다

      경로당 할머니들에게
      자식들이 빌려간 돈 갚는거 봤냐고 물었더니
      모두들 머리를 흔듭니다
      자식들이 부모돈 빌려간것 말뿐이지
      돈을 갚는 답니까?
      자식이 빌려간 부모 돈은 안갚아도 된다는 생각들입니다

      김씨 할머니
      노후준비 해둔 몫에서 아들 사업자금 빌려줄때 한달에
      이자 몫으로 오십만원씩 줄테니 생활비에 보태쓰면
      아들 좋고 부모 좋고--꿩먹고 알먹고 식이라더니--

      그런데

      몇달 오십만원씩 통장에 들어 오더니 --
      수금이 안됐으니 다음에요 --다음에요
      그리고 지금은 그 다음에요 란 말도 끊겼답니다
      자식이 힘들거라는 생각에 더 이야기 할수도 없고--

      경로당 할머니들 결론은 억울해도 할수 없는거 아뇨
      자식이 빌려간돈 어디 차압을 붙이겠소--
      그냥 넘어가야
      자식들의 소식이라도 들을수 있제
      만일 독촉을 해봐요 전화도
      안받을거라는 이야기가 이구동성입니다

      부모는 말이지요
      옛날 우리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안 배웠나요~!
      아들 둘이가 있었는데
      큰 아들은 우산 장사를 하고 작은 아들은 나막신 장사를 하는데
      부모 마음은
      비오는 날이면 작은아들 나막신 장사가 안될까 걱정
      날씨가 맑은 날이면 큰아들 우산이 안팔릴가 걱정
      부모는 걱정 -- 자식 걱정속에 사는 거라오

      김씨 할머니--
      이생각 저생각 해봐도 뾰쪽한수가 없습니다
      사업이 풀리면 갚을거여--
      그래도 자식이 빌려간것 남에게 준것보다 훨씬 낫지-
      양촌리 박씨 아저씨
      남 보증 서주고 돈1억 물어준거보다 백배 낫지
      부모 생각은 항상 이렇습니다

      김씨 할머니 자식이라 원망도 없습니다
      돈 못갚은 자식 마음도 무겁지--
      내가 한푼이라도 덜쓰고 아껴야제

      자식에게 빌려준돈 받은 사람 아무도 없다고들 하는데
      자식에게 주는돈 그거 주는거지 빌려주는게 아녀요
      이말이 맞는 말 입니다
      경로당 양씨할머니 충고 말이 귀에 뱅뱅 돕니다
      " 자식에게 받을 생각 말아요~!" 마음만 상하제"

      그래요 그래요 자식에게 돈 빌려준게 어디 있답니까?
      그냥 도와 준거지--
      부모의 마음은 그래야 편 하답니다

      ☆ 詩庭박 태훈의 해학이있는 아침중에서☆

<고난과 감사~>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에 갔더랍니다.

가서 보니까, 천사들이 뭘 열심히 포장하고 있더랍니다.

뭘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까, 인간에게 줄 ‘복’을 포장하고 있다고,
복이 사람들에게 잘 전해지도록 포장을 해서 보내는 거랍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복을 포장하는 포장지가 ‘고난’이라는 겁니다.

고난은 단단해서 내용물이 파손되지 않고, 잘 벗겨지지 않으니까

포장용으로는 제격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천사가 하는 말이,

그런데 사람들이 고난이라는 껍데기만 보고 그 안에 복이 들어있는 줄도 모르고

‘어이쿠 무섭다’ 하면서 받지 않고 피해버리거나,

받아놓고서도 껍질을 벗기고 그 안에 들어있는 복을 꺼낼 생각을 하지 않고

 고난만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겁니다.

포장지를 어떻게 벗기는 거냐고 물으니까, 고난이라는 포장지를 벗기고

복을 꺼내는 열쇠는 ‘감사’라는 겁니다.

고난을 무서워하거나 피하려고 하지 말고 감사하면서 받으면

그 껍질이 벗겨지고 그 속에 들어있는 복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고난으로 포장된 선물을 받으면 감사하기보다는

불평을 해서, 껍질이 더 단단해지는 바람에

그 안에 있는 복이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
‘복’은 ‘고난’이라는 단단한 껍질로 포장되어 우리에게 내려온다고 합니다.

고난을 피하지 말고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속의 복을 얻을수 있음을 알기에

긍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주님께서 주신 귀한날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을 통해서 주님의 율례를 배웠노라 고백하는 믿음의날 되시길 기도 드립니다. 샬롬♥

 
출처:사모님사모님/샤론의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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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우스 반틸의 [개혁주의 신학 서론] 중에서


제17장   하나님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에 대한 고찰로 나아가기로 하자.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자충족적인 존재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은 삼위일체 교리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여기서 다른 모든 형태의 존재와 비교해서 구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숫자적으로 하나이신 분이 그 자신 안에 구체적이고 숫자적인 존재의 구별(a distinction of specific and numerical existence)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 신성의 본질에 대해 신성의 삼위(the three person of the Godhead)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각 속성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동일시 될 수 있다고 말할 때, 동시에 그것들을 구별할 수 있듯이, 삼위일체의 각 위(各位)가 신성 자체를 다 드러내면서도(exhaustive of divinity itself), 삼위 간의 참된 구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통일성(Unity)과 복수성(plurality)이 꼭 같이 궁극적이다. 신성의 각 위는 서로를 다 드러내면서(exhaustive of one another), 따라서 신성의 본질을 다 드러낸다(exhaustive of the essence). 하나님은 하나의 의식을 가지신 존재이시면서, 동시에 세 개의 의식을 가진 존재(a tri-conscious being)이시기도 하다.

  성경은 하나님의 삼위일체 교리를 가르친다. 먼저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증거를 요약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구약에 대해서는 우리가 피하여야 할  두 가지 극단적인 경향이 있어 왔다. 구약에서 완전한 신학의 체계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 분명히 가르쳐졌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성경이 하나의 통일된 교리의 체계를 가리치고 있음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어 왔다. 그들은 구약에는 삼위일체에 대한 그 어떤 증거도 없다고 주장해 왔다. 이 두 가지 극단적인 입장에 대조해서, 우리는 성경이 사람에게 유기적으로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이라고 여긴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 교리가 구약에서도 가르쳐졌으리라고, 그러나 신약에서 훨씬 더 분명하게 가르쳐졌으리라고 생각한다.

  창조 기사에서 '엘로힘'(이것은 히브리어 단어로서 복수형임)의 사용에 대해서 우리는 최대한 말한다면 그것이 후에 계시된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 적합하다고 말할 수 있다(즉, 그 자체가 삼위일체를 계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후대의 계시의 빛에서 볼 때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는 있다는 뜻-보역). 그러나 우리가 의존하는 증거는 후대의 계시의 단계에서 나타난 삼위일체 각위 간의 구별에 대한 증거이다.


1. 구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

(1) 신성 안의 구별(the differentiation in the Godhead)에 대한 시사로서는 창세기 19:24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하늘 여호와께로서 유황과 불을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 여기서는 지상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Jehovah)가 하늘에 계신 여호와로부터 불과 유황을 비 같이 내리셨다고 한다.

 

(2) 창세기 16:13에서 하갈이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Jehovah)를 "당신 하나님이 나를 감찰하신다"(Thou God seest me)라고 부른다.

  여호와의 사자가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동일시되고, 또 한편에서는 하나님과 구별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23:20, 21 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읽을 수 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라." 여기서는 사자(the angel)가 여호와의 이름과 동일시 되었다. 한편에 출애굽기 33장에서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그가 사자를 이스라엘과 함께 보낼 것이나, 그 자신은 가시지 않으실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사자는 분명히 하나님과 구별되었다.

(3) 다음과 같은 구절들에서도 삼위일체의 구별이 시사된 듯하다.

  1) 시편 33:6: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the breath of his mouth)으로 이루었도다"

  2) 잠언 3:12-31에서는 '지혜'가 의인화되어 창조주와 구별되어 나타나고 있다.

  3) 이사야 48:16: "너희는 내게 가까이 나아와 이 말을 들으라 내가 처음부터 그것을 비밀히 말하지 아니하였나니 그 말이 있을 때부터 내가 거기 있었노라 하셨느리라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 신을 보내셨느니라." 이사야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이런 구절들에서는 성령이 구별되는 인격(a distinct person)으로 언급되고 있다.

  4) 시편 45:6, 7 :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왕이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왕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왕에게 부어 왕의 동류보다 승하게 하셨나이다"(히 1:8,9에서도 인용됨)

  5) 시편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6)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 본문들이 결코 전부는 아니다. 이 본문들은, 벌코프 교수가 말하듯이 구약에 나타난 심위일체의 각 위에 대한 시사들일 뿐이다.


2. 신약에 나타난 삼위일체에 대한 가르침

    신약에 대해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인용된 삼위일체를 가르치는 성구들만을 간단히 열거해 보려고 한다.

  (1)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2)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3) 고린도후서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엡 2:18)

  (4) 요한복음 1:14,18: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라가 충만하더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히 1:2-6; 골 1:15-17)

  (5) 요한복음 15: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6) 갈라디아서 4:6 : "너희가 아들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3. 교리적 진술

  이런 구절들과 다른 성경 구절들에 근거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제2장, 제3장):  "단일한 신성에 삼위가 계시니, 곧 본질과 권능과 영원성이 동일하신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시다. 성부는 그 누구에게 속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나시지 아니했으며 나오시지 않으시며, 성자는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

  이를 설명하면서 핫지(A.A. Hodge)는 이렇게 말한다: "살아계신 한 분의 참된 하나님이 계심을, 그리고 그의 본질적 속성들이 모든 온전성을 포괄함을 밝힌 후에, 이 부분은 덧붙여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 성부, 성자, 성령이 똑같이 한 하나님이시고, 나뉘어질 수 없는 신적인 본질과 모든 신적 온전성과 대권들이 그 각각에게 같은 의미와 정도로 속한다.

    2.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이 명칭들은 각기 다른 관계를 가진 한 분의 다른 이름들이 아니고, 다른 위들의 이름들이다.

    3. 이 삼위는 어떤 인격적 특성들(certain personal properties)에 의해서 구별되며, 그 존재와 작용이 일종의 질서를 가진 것으로 계시된다.


  여기 언급된 세 가지 요점에 대하여 핫지가 논의하고 있는 부분 전체가 아주 중요하다.


4. 이 교리의 역사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성경적 진리의 온전한 진술은 오래고 힘든 성경 해석의 열매이다. 이 역사에 대한 지식은 그에 반하여 이 교리가 진술된 여러 형태의 이단을 살펴 보는 일에 있어서 아주 유용하다. 이 교리의 역사의 몇 가지 중요한 요점을 여기서 언급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우리에게 아주 실천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여러 가지 다양한 속성들을 논의한 후에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좀더 친근한 지식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지칭하는 다른 특별한 마크가 있다. 즉, 그분은 당신 자신의 일체성을 선포하시면서도, 우리 앞에 삼위로(in three persons) 존재하심을 분명히 제시하신다. 신성의 이름이 아니면, 이것들은 아무런 참된 지식도 없이 우리의 두뇌 안에서 펄럭거리고 다니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Institute, 1. Xiii, 2) 이 때 칼빈은 그저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하셨다고 단순히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사실이며, 또한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방식외에 달리 존재하실 수 없다고 말하는 듯하다. 워필드(Warfield)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러면, 칼빈에 의하면, 단일론적 하나님(a monadistic God)과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듯하다. 다양성(multiformity)의 개념이 하나님의 개념 안에 들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단순하다고 하고, 삼위가 그 신성에서는 서로 동등하다고 말함으로써 교회는 모든 형태의 비기독교적 사상과 대립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변적 교리가 아니다.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모든 형태의 이단은 삼위일체에 대한 공격인 것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의 본질, 그리스도의 인격에서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계시, 성령 안에서의 그 근거와 원리를 가질 때에야 주장될 수 있는 것들이다" 여기서 바빙크는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말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모든 비기독교적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전체로서의 우주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도록 한다. 모든 이단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시 공간적 실존을 전체로서의 우주의 다른 측면으로 도입시키려고 한다. 이것은 분명히 현대 이단의 특성이다. 그리고 사실상 여기에 고대의 이단과 현대의 이단의 연관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본체론적 삼위일체(the ontological Trinity), 즉 피조된 우주와의 관계를 떠나서 그 자체 안에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the Trinity as it exists in itself)가 그 스스로 온전하며, 그 안에 단일성과 복수성의 동등한 궁극성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삼위일체의 이 높고 고귀한 교리에 이르게 된 것은 오래고도 힘든 노정을 통해서였다.

  삼위일체 교리사의 첫 시기, A.D. 1-325은 역사의 그리스도가 신성의 제2위이심을 밝히려는 노력의 시기였다고 특징지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경배하였을 때, 그들은 다신론자들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영지주의자들의 로고스와 동일시하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적 존재로 여기려고 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그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영원과 시간의 통일성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희랍 사상은 하나님을 말없는 심연으로, 이 세상과는 절대적으로 다른 것으로 여기어 그렇게 말했고, 로고스에 대해서는 우주 안에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말하였었다. 자연스럽게 이런 형태의 사변은 하나님이 자충족적 존재되심에 반하는 것이었다.

  제1세기와 2세기의 교부들은 이미 에비온주의와 가현론과의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삼위일체에 대한 유일하게 변호할 수 있는 철학적 진리의 체계를 가졌음을 밝히기에는 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 철저히 무장되었었다고 하기 어렵다.

  제2세기에 변증가들, 특히 저스틴 마터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좀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 사이의 내재적 관계는 저스틴 마터의 경우에서는 아직 분명히 나타나지 않았다"고 바빙크는 말한다. "마치 성자가 이 세상의 창조를 위해서 낳아진 듯이 여겨진 듯하다. 여전히 하나님 그 자신(God in himself)은 감취어진 하나님(숨어계신 하나님)이고, 성자는 계시된 하나님인 듯이 제시되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저스틴 마터에게는 성령의 신성과 성부나 성자와의 본체론적 관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것이다.


(1) 아이레니우스, 터툴리안, 오리겐

  아리레니우스는 영지주의적 신 개념과 로고스 개념에 대립하여 상당한 진보를 나타내었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로고스가 이중적 성격(his twofold nature-의미상 중간적 성격)을 벗어버리고 신성을 가진 것으로 진술되었다". 비록 언제나 일관성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이레니우스는 성자와 대립되는 '숨어계신 하나님' 개념에 대립하였다. 이것은 아주 큰 진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 표현의 수단으로서 우주를 어떤 방식으로든 필요로 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이미) 삼위일체 안에서 자기 표현적이셨음을 보여주었다는 말이다. 터툴리안은, 비록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하나(a unit)이기는 하지만, 신성에는 통일성(unity)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삼위일체성(trinity)도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아리레니우스를 보충하고 있다. 터툴리안에 대해서 바빙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종속설을 언제나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였고, 삼위일체 교리 안에서 본체론적인 삼위일체와 우주론적인 삼위일체, 그리고 구원론적 삼위일체를 충분히 구별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는 삼위일체론의 진술을 위한 개념과 단어들을 제공하였다. 그는 '로고스' 사변을 아들됨의 관계(filiation)로 대치하였고, 그와 같은 방식으로 본체론적 삼위일체를 우주론적 사변에서 분리시켰다. 그리고 그는 각 위의 삼위일체성을 성부의 인격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에서 이끌어낸 최초의 인물이었다.

  오리겐 역시도 종속설의 오류에 빠졌다. 그는 성자의 성부와의 하나됨(the unity)을 강조하였으나, 그가 필요하다고 느낀 그 안에서의 다양성을 강조하기 시위해서 성부의 본질과 성자의 본질을 구별하였다. 그리하여 성부는 다시 한번 희랍적인 방식으로 가장 궁극적인 존재이며, 성자보다 훨씬 더 높은 존재로 생각되었고, 성자는 세상보다는 더 높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2) 아리우스주의

  핫지는 오리겐의 여러 추종자들이, 예를 들어서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와 특히 아리우스가 오리겐보다 훨씬 더 낮은 교리를 가르쳤음을 지적한다. 아리우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로부터 창조된 것이 아니라, '무로부터'(ek ouk ontoon) 창조되었고, 따라서 성부와 동일 본질이 아니라고 한다.



  (3) 사벨리우스주의

  삼위일체에 대한 또 하나의 불만족스러운 형태의 진술은 흔히 사벨리우스주의라고 언급되는 것이다. 아리우스주의가 삼위의 본질적 통일성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고서 삼위의 다양성을 가르쳤는데 비해서, 사벨리우스주의는 삼위의 다양성을 충분히 가르치지 않고서 본질의 통일성(단일성)을 가르쳤다고 일반적으로 대조되어 설명된다. 이것은 옳다. 그러나 문제의 뿌리를 분명히 파헤치지는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범신론은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고, 이신론(理神論)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데, 유신론은 그 모두를 강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구별이다. 요점음 교회가 진리에 이르기 위해서 단순히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를 연합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는 둘 다가 그 근저에서는 시간적인 것을 영원한 것과 동리한 수준에서 연합시키는 같은 이단에로 환원될 수 있으므로, 그 둘을 다 거부해야만 한다. 이것이 ‘아리우스주의’의 이름으로 요약된 모든 종속론적 사변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벨리우스주의 역시도 전체로서의 실재의 통일성을 제공해 주는 영원 세계에 대한 보충으로 시간 세계가 복수성을 제공하도록 해 보려고 한 것이다.

 

  (4) 나이신 신조(혹 니케아 신조)

  니케아 공의회가 삼위일체에 대한 바르 교리를 진술하고 변증하려 모였을 때, 니케아 공의회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 본질'(homoousion to patri)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아리우스주의를 거부하였고, 삼위들이 단순히 세상과 관련한 경륜적 표현일 뿐 아니라,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삼위들이라고 진술함으로써 사벨리우스주의를 거부하였다. 그것들은 전혀 그 종류가 다른 것(allo kai allo)이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이단을 거부함에서 니케아 공의회는 한 이단의 두 가지 형태를 거부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삼위일체에 대한 한 가지 기본적인 이단은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궁극적 연합으로 혼합시키는 것이다. 이 한 이단의 두 가지 형태에 대립하기 위해서는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에 대해 언급한 두 요점을 주장하는 것이 필요할  뿐 아니라, 신성 안의 각 위의 내적인 관계가 피조된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에 대해 선행하며, 독자적임을 강조해야 한다. 찰스 핫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성의 본질이 각위에게 공통적이므로, 그들은 공통적 지성과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 안에는 세 지성과, 세 의지와 세 작용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삼위가 한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한 정신과 한 의지를 가지신다. 이 밀접한 엽합을 희랍교회는 ‘페리코레시스’라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이를 라틴어 'inexistentia', 'inhabitatio' 또는 'intercommunio'(상호 연합, 침투) 등의 말로 설명하였다.

 

  (5) 콘스탄티노플 회의(381)

나이신(니케아) 신조에는 참된 성경적 교리의 모든 요소들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일어난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참된 교리가 주장되려면, 그것은 계속적으로 재진술되고, 세련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아들만이 아니라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 본질이심이 더 분명하게 진술되어야만 했다. 아다나시우스와 어거스틴은 삼위 모두가 동등함을 더 분명히 하려고 상당한 노력을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성령이 성부로부터만이 아니라, 아들로부터도(filioque) 나오심을 밝히는 일이다. 성령이 성부와 성자 모두로부터 나오셔야만 삼위일체 삼위의 내적 교통이 영원히 온전한 것이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보다 삼위의 동등성을 더 분명히 보았고, 그들의 배타적인 내적 교통은 '아들로부터'(filioque)라는 어귀 없이는 표현될 수 없음을 더 분명히 보았다. 성부에 의한 성자의 출생(낳아지심)이 영원한 출생이므로, 성령의 나오심도 성부와 성자로부터의 영원한 나오심이어야만 한다. 핫지는 이렇게 말한다: "나이신 신조의 가장 분명한 결함은 성령에 대한 어떤 분명한 진술이 없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나이신 신조의 '우리는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말에 "주님이시요, 생명의 수여자이시고, 아버자와 아들과 함꼐 경배를 받으시며, 영광을 받으시고, 선지자들로 말씀하셨던" (성령을) 이란 말을 덧붙였다" ('아들로 부터도, filioque'라는 말은 최종적으로 589년 톨레도 공의회에서 수납되었다.

  (6) 칼케돈(451)

  삼위일체에 관한 모든 이단들은 영원과 시간을 혼합하는 하나의 커다란 이단으로 환원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칼케톤 공의회에서 거부되어진 네스토리우스주의와 유티케스주의도 교회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반대의 변형된 형태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칼케돈 신조에 대해 필립 샤프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니케아의 첫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영원하며, 선재하시는 신성을 수립하였으나, 제4차 공의회의 신조(칼케돈 신조)는 땅 위에서 걸으시고,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성육신하신 로고스와 관련하였다. 칼케돈 신조는, 아리우스주의에 반해서 나이신 신조에 동의하기는 하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를 잘못 생각한 네스토리우스와 유티케스의 오류에 반하는 것이었다.

  칼케돈 신조의 진술 형태에 대해서도 샤프의 말을 인용해 볼 수 있다. "정통 교리는, 유티케스주의에 반해서 성육신 이후에도 혼동이나, 변화없이(asygchytoos, inconfuse 그리고 atreptoos, immutabiliter), 또 한편으로는 (네스토리우스주의에 반해서)구분이나 나뉘어짐없이(adiariretoos, indivise 그리고 achoristoos, inseparabiliter) 있는 각 성질의 구별을 주장한다. 그리하여 신성은 영원히 신성이고, 인성은 영원히 인성인데, 그들이 계속적으로 하나의 공통된 삶을 가지고, 삼위일체의 각 위와 같이 서로 침투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7)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여기서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말을 덧붙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제2위이시요, 참으로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요. 동등하신 하나님의 아들은 때가 찾을 때에 인간성(man's nature)을 취하셨는바, 그 본질적 속성들과 그 일반적 약점을 모두 같이 취하였지만 죄는 없으시다. 그는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태에 잉태되사, 그녀의 본질로부터 나셨다. 따라서 두 가지 온전하고 구별되는 본성인 신성과 인성의 변화됨이나 혼합이나 혼동없이 함께 한 인격 안에 나눌 수 없게 연합되어졌다. 그 인격은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의 인격이며, 한 그리스도이시고, 그는 사람과 사람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제8장, 2항)

  이 진술로부터 우리는 교회의 주된 관심 중 하나는 하나님과 사람을 혼동이나 혼합없이 바른 관계에 있도록 하는 것이었음을 깨닫을 수 있다. 하나님은 삼위 일체적으로 존재하신다. 그러므로 그는 스스로 온전하신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을 창조하셨다. 이 세상은 본체론적 삼위일체의 자기 온전성에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 온전성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 이 하나님은 피조된 우주의 토대이시고, 이 우주를 초월하시는 것이다. 그가 이 우주의 토대라고 먼저 생각되지 않고, 이 우주와는 다른 분이라고만 정의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 타자성'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 '절대적 타자성'이 결국, 시간적 우주와 연관되게 되면, 전체로서의 실재의 한 측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이신론[理神論]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든지, (희랍 사상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의 창조와 섭리를 모두 부인하는 교리는 결국 영원과 시간을 혼합시키고야 만다. 이신론과 범신론은 이렇게 영원과 시간을 혼합하고 혼동하는 근본적 오류의 두 가지 형태일 뿐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으로 바르게 이해하면) 죄가 세상에 들어 왔을 때나, 삼위일체의 제2위가 인간성(human nature)을 취하셨을 때에도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은 혼합되거나 혼동되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역시 참된 교리에 대한 이신론적 형태의 대립이며, 유티케스주의는 명백히 범신론적 형태의 대립인 것이다.

  (8) 현대의 반삼위일체주의

  한 마디로 말해서 현대의 신학적 이단들은 그 기원을 거짓된 삼위일체론에 두고 있다고 하든지, 그런 왜곡된 개념에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시사할 수밖에 없다. 고대에서와 같이 현대에도 사람들은 영원한 것과 시간적인 것을 한데 섞었던 것이다.

  그런 한 가지 대표적인 예는 칼빈이 정리한 삼위일체 교리에 개한 반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칼빈은 신성의 삼위(the three persons of the Godhead)의 동일 본질성(the consubstantiality)을 주장하는데 아주 관심이 있었다. 워필드의 말을 인용해 본다: "성자의 '스스로 신적이심'(the autotheotes)에 대한 그의 주장에 있어서, 칼빈은 결코 자신이 새로운 것을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니케아 공의회의 교부들 자신들이 '아주 많은 말로' 이를 주장하고 있다고 인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이 주장에서 삼위일체 교리사에서 획기적인 일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사람들이 성자의 하나님으로의 자기 존재와 주장을 믿지 않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삼위일체론을 진술하는 현대의 양식이 성자의 신성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결함있는 양식의 도입을 넓게 열었으므로, 성자의 '스스로 하나님되심'(autotheotes)에 대한 날카로운 주장이 필요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삼위일체 교리의 진술을 위해 교회가 가장 큰 빚을 지고 있는 세 사람을 든다면 터툴리안, 어거스틴, 그리고 칼빈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진술이 굉장한 반대를 받은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 내에서 칼빈의 교리에 대해서 많은 논란이 있는 천주교 사상이나 자세한 몇 부분에서 반대하는 루터파는 말할 것도 없고, 알미니안적 반론을 간단히 주목해 보기로 한다. 루터파에 반대해서 알미나안주의자들은 오리겐주의자들의 종속설적 성향을 매우 분명히 가지고 있다" 알미니우스 자신은 성자의 '스스로 하나님이심'을 부인하지만 "그의 정통성을 어느 정도는 견지했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의 무게의 중심은 하향적이 되었다. 그래서 에피스코피우스의 가르침에서는 벌써 '영원한 출생'과 '나오심'에 대한 니케아 신조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삼위 간의 질서상(in order) 종속이 아니라, 삼위 간의 본성상(in nature)의 종속을 위한 출생과 나오심이 언급됨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켈셀레우스는 삼위 간의 '특정한 통일성'(asoecific unity) 이상을 가르치지 않았다". 조오지 벌 은 컬셀레우스보다는 덜 극단적이었다. 그러나 벌 이후에는 사무엘 클락이 오는바, 그는 "성자가 무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동등하게 있음을 허용하기를 하였으나," 성자가 성부의 본질에서 낳아졌음을 인정하려고 한다.

  바른 삼위일체론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의 대립은 좀더 급진적인 일탈의 길을 준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관념론 철학자들은 삼위일체를 전체로서의 실재 안의 정.반.합 원리와 동일시하였다. 이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아서 많은 신학자들이 신앙에서 벗어나 나아갔다. 결국 유니테리안주의도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을 섞는 옛 오류의 새로운 형태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현대주의(modernism)는 이 모든 이단들의 행복한 상속자들인바, 그 모든 이단들에게 있어서 기본적인 것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 본질이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는 그 오류가 좀더 깊이 나타나서 현대주의에 있어서는 성부 자신이 실재의 한 국면에 불과한 것이다. 참된 삼위일체론을 재확인하고 가르칠 필요가 있는 때가 있다면,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러한 때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그의 개념에 대해서 만큼이나 많은 오해가 있다. '하나님의 자유'에 대한 바르트의 칸트주의적인 원리는 자충족적인 본체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 교리와 같은 것이 있을 여지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도, 다른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정통주의의 용어들은 사용하나 그 의미는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비공유적 속성들은 바르트에 의해서 (상호)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의 역동주의는 그로 하여금 그리하도록 한다. 마찬가지로 본체론적 삼위일체도 (상호) 상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바른 삼위일체론을 세우기 위해서 교회는 세상과 생사의 투쟁을 하기 위해 준비한 듯하다. 그 삼위일체론을 진술함에서 교회는 자충족적이고, 신비하신 하나님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확언하였다. 이 자충족적이시고 신비하신 존재께서 당신 자신을 사람에게 계시하시려 낮추신 것이다. 그분은 그분 자신이 그러하시듯 반드시 존재하시는 분으로 계시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이 어떤 사역을 특히 성부께 돌리고, 어떤 사역을 성자께 돌리며, 어떤 사역을 특별히 성령께 돌릴 때, 우리는 그렇게 돌리는 것(ascription) 배후에 신성 안에 참된 구별이 있음을 전제하게끔 된다. 반면, 각 위에게 돌려진 사역은 절대적인 한 분의 사역이다. 바빙크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우리가 기독교의 핵심을 찾을 수 있다고도 지적한다. 우리는 언제나 신성 안에 있는 참된 위격적 구별(personal distinctions)을 무시하여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 통일성을 허용함으로써 사벨리우스주의의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 통일성을 무시하도록 신성 안의 삼위의 구별을 허용하므로써 아리우스주의로 나아갈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 위험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우리가 다음과 같이 하면 이 위험을 가장 잘 피할 수 있을 듯이 보인다: (a) 이 교리를 분명히 제시하고, 그 안에서 현대철학과 현대신학의 교리와는 정면으로 대립하는 신론을 발견하여 보는 것이고, (b)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언급 가능한 전제라고 아무런 변명없이 제시하는 것이다.

  이런 과제를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의 주된 난제는 우리가 우리의 사고를 잘못된 데서 시작하기가 너무나도 쉽다는 사실에 있는 듯하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전제하지 않고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관해서 추론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시작할 수도 있고, 유비적(analogically)으로 추론하기보다는 일의적(univocally)으로 추론을 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오류 중의 하나에 빠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삼위일체가 자연인의 전제에서 합리적인 교리로 비그리스도인에게 밝혀질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삼위일체는 비합리적이라는 의미에서 신비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오류를 잠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때때로 우리가 하나님이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요, 그 위(person)에 있어서는 셋이라고 말하는 한,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이 전혀 아님을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는 통일성(unity)과 삼위성(trinity)이 정확히 같은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부 다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즉 전체로서의 하나님(the whole Godhead)이 한 분(one person)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각 속성이 하나님의 존재와 동연적(同延的, co-extensive)이라는 것을 살펴 본 바 있다. 어떤 종류의 해석되지 않은 존재 개념을 피하기 위해서 이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소위 '순수 사실'의 망령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속성들과 그 존재의 일치성을 주장하게끔 된다. 또 비슷하게 우리는 신학자들이 신성의 각위가 신성의 존재와 동연적이라는 주장을 관찰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위격적 특성의 구별이 단지 이름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각 속성과 각 위의 하나님의 전체 존재와의 절대적 동연성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 속성들과 위격의 참된 구별(distinctions)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바빙크는 이렇게 말한다.: "각 위는 하나님의 전체 본질(the whole essence of God)과 동등하며, 다른 두 위와도 동연적이고, 삼위 모두와도 동연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다른 존재들, 즉 피조된 존재들에 반해서, 하나님의 존재의 절대적인 숫자적 단일성을 제시하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리고 본체론적 삼위일체 안에서도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하나이심을 주장해야만 한다. 그는 한 분(one person)이시다.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단순히 '인격성'(personality)란 수식어구가 그에게 대해 붙여질 수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성을 가지신 본질이신 것(an essence that has personality)이 아니라, 그는 절대 인격체(absolute personality)이신 것이다. 그러나 이 한 분의 존재 안에서 존재의 구체적인 형태나 유형(a specific or generic type of being), 그리고 삼위의 위격적 존재 방식(three personal subsistences) 사이의 구별을 알 수 있다는 허용과 강요를 성경에 의해 받게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는 이런 삼위일체가 우리의 철저한 파악을 넘어선 신비라고 말한다. 그것은 분명히 신비이다. 하나님 자신은, 그의 존재의 전체성 가운데서, 우리의 파악을 넘어 서신다. 동시에 이 신비하신 하나님은 그가 그 자신 안에서 전적으로 합리적이시므로 신비하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성경을 떠나서, 합리성이 있기 위해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셔야만 한다는 사실을 먼저 규정할 수 있다는 것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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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에

4계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부에서처럼 뚜렷한 4계절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래서 서부에서는

동부에서처럼 단풍이 화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캘리포니아에

뚜렷한 4계절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스턴 씨에라나

씨에라 네바다 지역처럼

4계절이 뚜렷한 지역도 있습니다.


이들 지역은

서부의 다른 지역에 비해

해발이 높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서부라도 해발이 높은 지역은

타지역에 비해 4계절이 보다 뚜렷하다는 것이지요.


이런 4계절이 뚜렷한

지역 가운데 하나가 요세미티입니다.

4계절이 뚜렷하다는 말은 단풍도 뚜렷하다는 말과 상통합니다.


그렇다면

4계절이 뚜렷한

요세미티의 단풍은 어떤 모습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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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의 곳곳에

단풍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단풍은 밸리에 몰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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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 밸리라 함은

터널 뷰에서 보이는 전체 지역,


Southside Drive와

Northside Drive를 포함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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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side Drive는

브라이덜베일 폭포 파킹랏부터 커리 빌리지까지,


Northside Drive는

포호노 브릿지에서부터

아와니 호텔까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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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Bridalveil 파킹랏부터

Ahwahnee 호텔까지 밸리에 포함되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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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의 단풍은

비숍과 이스턴 씨에라의

단풍이 끝날 무렵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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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스턴 씨에라의 단풍과

요세미티의 단풍을 동시에 보는 것은 어렵죠.


이스턴 씨에라의 단풍이 끝날 무렵에

비로소 요세미티의 첫 단풍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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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에서

이스턴 씨에라로 넘어가는 120번은


요세미티의 단풍이 한창인

10월 말이나 11월 초에 close 되기 때문에

거리상으로도 두 지역을 동시에 돌아본다는 것은 사실상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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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가을에

단풍을 보거나 촬영하기 위해

비숍을 비롯한 이스턴 씨에라를 많이 방문합니다.


하지만 가을에

요세미티를 찾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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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유는

요세미티의 단풍을 잘 모르거나

혹은 요세미티의 단풍이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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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요세미티의 단풍은

비숍이나 이스턴 씨에라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단풍 모습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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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운무나

엷은 박무라도 꺼어준다면

몽환적이고도 환상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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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무가 끼는 최적의 조건은

비나 눈이 온 후에 습도가 90% 이상에

바람이 없을 경우 백발 백중 운무가 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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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에는

이스턴 씨에라에서 보기 힘든

붉은 단풍이 있는데 이는 덕우드 때문입니다.


덕우드는

기온과 조건이 맞을 경우

노랑이 아닌 붉은 색 단풍을 피워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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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에는

타지역과는 달리 오크 나무가 많죠.

이 오크 나무 또한 노란, 혹은 주황의 단풍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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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의 채플에도

가을 단풍이 찾아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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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사이로 비취는 아침 햇살은

요세미티에서 보기 드문 광경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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쿡스 메도우(Cook's meadow)에는

멋진 블랙 오크 나무(black oaks)가 있습니다.


일출 시에

역광으로 보는

그랜드 오크 나무는

황금나무와도 같은 장관을 연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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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

요세미티를 방문한다면

아름다운 늦가을 정취를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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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21)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최송연

 

 


                             나는 왜 이렇게 땅에 엎드려져
                             기어 다니고 있어야만 하는가…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땅에서 기는 것을 다 배운 후 ..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
                             즐거운 때가 온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질문과 의심이
                             안개처럼 일어날 때…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이런 수많은 고민과 고뇌들이..
                             당신을 성숙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어 준답니다.

                             내가 올라가야 할 언덕이
                            가파르고 숨이 턱에 찰 때…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가파른 언덕을 조금만 더 오르면..
                            당신의 목적지인 정상이
                            바로 눈앞에 있답니다.

                           시련의 밤이 깊고 고통의 흑암이
                           온 천지를 덮을 때…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이제 곧 새벽동이 터 오르고..
                           당신 창가에도 찬란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릴 테니까요.

                           가랑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눈물이 나며 잠 못이루는
                           밤이 늘어날 때…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당신의 겉사람은 후패하나..
                           당신의 속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날로 날로 새롭게 된답니다.(고후4:16)

                           역사의 부조리와 천재지변이
                           세상을 집어삼킬 것만 같을 때…
                           너무 낙심하지 마세요

                           이 역사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펼치시고 통치하시는
                           소망의 날이 곧 온답니다.(계21:1)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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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럼의 마녀사냥 재판

내가 뉴 잉글랜드를 여행하며 돌아본 도시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곳은 세일럼이었다. 할로윈이 가까워서인지 곳곳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작은 시가지는 평일인데도 몹시 출렁거리고 있었다. 위치 하우스 건너편인 더비 거리에는 위치트라일 연극이 1 시부터 열린다고 배우들이 그 시절의 복장을 하고 관객들을 모우고 있었다.

세일럼은 미국 메사추세츠주 에섹스 카운티에 있는 조그만 도시다. 2010 년의 인구조사로는 41,130 명이 살고 있다. 세일럼 대학(Salem University), 세일럼 윌로우 공원(Salem Willow Park), 피바디 박물관(Peabody Museum)이 있다. 세일럼은 주택가와 관광지, 세일럼의 네이버후드(the neighborhoods of Salem Neck), South Salem and North Salem, Witchcraft Heights, Pickering Wharf, and the McIntire Historic District (named after Salem's famous architect and carver, Samuel McIntire) 등이 혼합돼 있는 곳이다. 세일럼은 미국 이민 초기의 가장 중요한 항구였다. 세일럼은 종교적으로 주로 퓨리턴(청교도)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살고 있었다. 세일럼은 히브리어로 평화(shalom) 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름과는 달리 수십명의 죄없는 목숨을 뺏은 악명 높은 마녀 재판이 벌어졌던 곳이다.

미국이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기 전 17세기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1692년 세일럼에서는 마녀재판으로 1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명은 돌에 눌려 압사하고 다른 5명은 감옥에서 죽었다. 이외에도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구금되었다가 병에 걸리기도 하고 증거 불충분으로 또는 원고의 고개질 한번의 부인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이 사건은 비단 세일럼에서만 그친게 아니라 주변의 코넷티컷, 로드 아일랜드 주도 영향을 미쳐 이와 비슷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었다. 이것이 미국의 역사는 아니라도 깨끗한 이미지에 검은 오점을 남겼음은 물론이다.

왜 마녀사냥이 일어났는가하는데는 여러 설이 분분하다. 지금도 많은 법대에서 그시절의 이 사건을 짚어본다고한다.

세일럼이 뉴잉글랜드의 수출 통로가 되면서 새로운 부와 세력이 창출되기 시작했다. 10 % 정도의 상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도시의 모든 재산을 차지하고 정치 참여자들도 농부가 아니라 점점 상인들로 채워져갔다. 청교도 이상주의를 따르던 전통의 주민들이 점점 가난한 농부로 전락하는 반면 새로 부상하는 상인들은 세를 넓혀갔다. 전통의 청교도들은 여기에 일종의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물질주의가 전통적인 농업을 내리누르기 시작한 데에서도 편치 않았음을 알수있다. 거기다 새로 부임한 사무엘 패리스 목사의 고압적인 태도에 이곳의 교회는 두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동쪽에 거주하는 상업을 대표하는 존 포터 가족이 이끄는 그룹과 서쪽에 거주하는 농업에 종사하는 존 푸트남 가문이었다. 특히 프트남파는 물질 주의와 세속주의에 물든 상업주도형 파에게 책임을 묻고 교회에서 힘을 쓰지 못하게 하기위해단단히 결속을 했다. 이 과정에서 패리스 목사가 오기전에 근무했던 여러명의 목사가 견디지 못하고 쫓겨났다. 패리스 목사는 푸트남파와 연합 해 물질주의와 세속에 물든 악마들과 싸워 이겨야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마녀사냥은 이런 분쟁의 중심에 있던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시작이됐다. 1692 년 2 월 어느날 9 살 짜리 패리스 목사의 딸 엘리자벳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고 헛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며칠 뒤에는 그녀의 사촌 애비게일이 발작을 일으켯다. 이 발병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마을의 소녀 두서너명도 비슷한 증세를 보이며 고통을 호소햇다. 놀란 패리스 목사와 교구들은 다른 지역의 목사들을 초빙해 기도회를 열고 열심히 기도를했으나 증세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의사를 초빙해 소녀들을 진단케 했으나 원인을 찾지 못했다.

원인을 찾지 못한 의사들은 이것은 사탄의 짓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생각해보라 지금의 어느의사가 병을 사탄의 짓으로 돌리겟는가. 그러나 행깅저지(Hanging Judge)로 알려진 존 호손(John Harthone) 은 그때 17 세기 사람들은 마법(witchcraft)을 진실로 믿었으며 사탄이 위치를 통해 저주를 부른다는 것 믿었다고 했다. 사태는 급진전해 사탄이 마녀를 내세워 해코지를 한다는 생각에 마을 사람들은 소녀들을 심문하기 시작했다. 소녀들은 패리스 목사의 집에서 하녀로 있는 서인도 출신의 티투바, 거렁뱅이로 집시처럼 또도는 사라 굿, 그리고 행실이 좋지않아 늘 마을 사람들 입 방아에 오르내리던 새라 오스본 노파를 그들을 괴롭히는 마녀로 지목했다.

곧 이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존 호손과 조나단 코윈이 심문관으로 파견되었다. 세 소녀는 이들 세 사람 (티투바, 사라 굿 그리고 사라 오스본)과 대질을 하자 소리를 지르며 몸을 비틀고 광기를 부려 세 여자는 마녀로 지목돼 투옥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투옥시킨 뒤에도 증세가 가라앉지 않고 점점 새로운 자가 늘어나자 다시 소녀들을 심문하자 또 다른 마녀가 지목되었다 이번에는 놀랍게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마을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온 마사 코리와 레벡카 너스였다.

신문관들이 소녀들과 이들 두 여자를 대질시키자 소녀들이 발작을 일으키고 소리를 질러 두 사람은 꼼짝없이 마녀로 체포되고 말았다. 언니를 변호한 레벡카의 두 여동생, 마사 코리의 남편 자일스 코리, 심지어 4 살 밖에 안된 사라 굿의 딸 도카스도 마녀로 지목돼 감옥으로 끌려갔다. 또한 강직한 성격으로 굳굳하게 자리를 지켰던 존 포터의 아내 에리자베스가 마녀로 지목되고 그녀를 변호한 남편 존 포터 (푸트남의 반대파) 도 주를 받은 것으로 체포되었다.

이런 도미노 식의 지목으로 5 월 말 까지 무려 100 여명이 투옥됐으며 그 여파는 세일럼을 넘어 동부 마사츄세츠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1692 년 5월 중순 영국에서 총독으로 임명된 윌리암 핍스가 뉴 잉글랜드에 도착했다. 사고에 접한 핍스는 부지사 윌리암 스타우턴을 중심한 7인 재판부를 직각구성 곧 재판이 전개되었다. 재판에 맨 먼저 회부된 사람은 1680 년대에 마녀 혐으로 체포된 브리짓 비숍이었는데 심리 끝에 유죄가 인정돼 사형을 선고받고 이틀후 갤로우스 힐에서 처형되었다.

6 월 30 일에는 다시 5 섯명이 선고를 받아 처형되고 8 월에 6 명, 9월에 8 명이 처형되었다. 9월에 처형된 마사코리의 남편 자일스 코리의 죽음은 정말 처참한 것이었다. 그는 이미 80 세사 된 노인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일체 심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그의 몸 위에 널판지를 올리고 그 위에 돌을 올려놓고 자백을 받아내려했으나 끝까지 대답을 않고 돌려눌려 사망했다.

9 월로 들어서면서 점점 마녀재판을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부지사가 주최하는 경직된 재판 과정에재판관을 사임하기도하고 너무 빠른 재판으로 죄없는 사람들을 때려잡는 재판 과정도 문제를 삼았다. 더욱이 악령에 시달렸다고하는 소녀들의 자백, 악마와 소통할 경우 몸에 남는다는 악마의 징표유무와 주기도문을 제대로 외는지의 여부 등등 희박한 유령의 증거를 근거로 판결을 했기 때문에 재판에 대한 공정성이 크게 문제가 됐다.

하버드 대학 총장이자 명망있는 목사였던 인그리스 매터 목사도 양심의 사례들이란 팸풀릿을 돌려 박약한 증거로 무고한 신자를 마녀로 모는 것은 잘못이라고 경고했다. 많은 마녀들이 체포 되고 죽었는데도 소녀들의 증세 또한 변화가 없었고 신앙심이 두터운 청교도 부인들이 마녀로 지목되는 사태까지 이르자 비난이 계속됐다. 총독은 재판의 중지를 명령했다. 1693 년 1월 새로운 재판부가 형성돼 재판을 속개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죄로 풀려났다. 1693 년 5 월 핍스 총독은 이미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을 포함, 이 사건으로 감옥에 같혔던 모든 사람들을 방면하고 사건을 종결시겼다.

1 년 남짓 걸린 마녀사냥 재판에 모두 185 명이 체포됐으며 59 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31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중 19 명은 처형되고 1 명은 고문으로 압살당하고 5명은 재판을 기다리는 도중 사망했다.

이 마녀 사냥의 망령이 걷히고 평상으로 되돌아오자 주민들과 재판관들은 곧 자성과 참회가 이어졌다.

1696 년 재판관의 한사람인 사뮤엘 씨월(Samuel Sewall)은 자신의 과오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참회를 했다. 재판에 동참했던 배심원들도 그 뒤를 이어 공적으로 사과를했다. 1711 년 식민지 정부는 생존해 있는 마녀재판의 희생자들에게 소정의 배상금을 지급하고 이들의 유죄기록을 공식적으로 말소시켰다. 1992 년 세일럼 시민들은 이 오욕의 사건에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는 추모비를 새웠다. 세일럼 제1 교회도 1992 년 9월 20일자로 레벡카 너스와, 자일스 코리를 정식 교인으로 복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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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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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럼 시의 하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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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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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타니엘 호손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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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시대 세일럼 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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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트가드 세일럼 패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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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피바디 하우스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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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umkeag steam cotton company Salem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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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ering house Sa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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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ex street Salem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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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em witch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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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ch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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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ch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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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rds of Salem-Rob Zomb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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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로리얼 팍 기념비 a17.jpg
gunted footste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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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집 안방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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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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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집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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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럼 커스텀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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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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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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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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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 재판을 선보이려는 배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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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children born not of natural descent, nor of human decision or a husband's will, but born of God. (NIV)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이라 부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달리 구분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네 생물을 따서 마태복음은 사자복음, 마가복음은 송아지복음, 누가복음은 사람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확연히 다른 점은 복음서 첫머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말씀, 로고스, 곧 하나님과 함께 계신 창조주 성자하나님으로, 생명의 빛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로 시작합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흡사합니다. 그리고 ‘빛이 있으라.’로 하나님의 창조역사가 시작되는 것처럼 성자하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십니다. 그 안에 생명을 가지고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시었으나 사람들은 그 빛을 깨닫지 못 하였고,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말씀합니다.(1장 12절) 그런데 바로 다음절 13절은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말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에 대하여 주목하고자 합니다.

우선 이 13절 말씀은 구원이 인간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인간이 구원받고 싶다고 구원 받고, 믿고 싶다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택하심에 의하여,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는 “엑 데우 에게네세산”,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산하시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출산은 피를 흘리고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일입니다. 피, 곧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이 피를 흘리면서 그 아들을 내어주시는 고통이 들어 있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다 함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피, 곧 하나님의 생명이 고통의 출산을 통하여 전해졌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흔히 1장 12절만 암송하여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말씀에 기뻐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지는 13절 말씀에 얼마나 처절한 하나님의 사랑과 고통과 인내가 담겨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여기에 얼마나 극적이며 장엄한 구원의 역사가 들어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가슴을 찢고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주님은 그 참혹한 십자가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의 손에 아들을 넘기셨으며 참혹한 십자가에서 그의 살을 찢어지고 그의 피는 십자가 나무를 타고 대지에 흘러내렸습니다. 그 살과 피는 누구든지 주를 믿는 자마다 먹고 마심으로 생명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살과 피는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참 떡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명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십자가 사건이 2,000년 전 전이므로 그렇게 절박하거나 현실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2,000년 전 십자가 사건 한 번으로 모든 인류를 구원하셨다니 나는 그 속에 포함되는 그저 그런 한 사람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위하여 죽었노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가슴에 와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에고 에이미, I am", 항상 현재형으로 계시는 하나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신 주님께서는 잊어버리시거나 기억이 희미해지는 일이 없습니다. 우주탄생부터 지금까지, 아니 영원토록 모든 시간이 하나님께는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그 십자가 사건은 바로 지금 일어나는 생생한 현재의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한 사람이 십자가 아래 엎드려 회개하며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는 2,000년 전의 십자가의 고통, 피를 흘리며 출산하는 그 고통을 현재형으로 생생하게 다시금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죄악을 담당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그 고통을 다시금 당하고 피 흘리시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낳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 “내가 너를 낳았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2,000년 전 단 한 번 십자가 사건으로 무더기로, 한꺼번에, 도매금으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이 낳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3절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영어로 읽어 보십시오(헬라어 원문으로 읽으면 더욱 분명합니다). 바로 그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낳으신 자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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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바라바는 예수 대신 석방되어 도적질과 폭력으로 가득했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가 총애하던 창녀 라헬은 기독교도가 되었다 돌에 맞아 죽는다. 사람을 죽이고 도둑질을 일삼는 삶을 계속하던 바라바는 다시 체포되어 평생 동안 광산 노역을 선고받는다. 바라바는 광산에서 기독교도인 사하크를 만나고, 바라바를 알아본 사하크는 그를 공격하려 들지만 둘은 얼마 안 가 친구가 된다. 바라바는 광산에서 20년을 일하며 죽음을 선고받았던 때의 고통과 예수의 희생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받는다. 바라바와 사하크는 광산의 매몰에서 살아남아 로마 콜로세움으로 가게 된다. 둘은 그곳에서 검투사로 훈련을 받지만 사하크는 죽음을 당하고, 바라바는 사하크의 복수를 감행한다. 기독교도인 사하크의 시신을 기독교 모임으로 옮겨간 바라바는 섣부른 신앙을 내보였다가 그곳에서도 배척받는다. 신의 말씀을 잘못 이해한 바라바는 로마의 대화재에 가담하지만, 결국은 순교자가 된다.

 

 


 


하나님이 하시는 기도응답의 다섯가지 방법

 
이 책에서는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다섯가지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다,
안된다,
기다려라,
네가 할 일이다,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마......
 
이 책을 읽고 나면 결론은 한가지로 요약됩니다. 물론 다섯가지 응답으로 나타나지만,
그 각각의 의도엔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크나큰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먼저, 기도에 대한 첫 번째 응답은 “좋다”이다.
이런 경우는 우리의 간구하는 기도가 주님의 행하시고자 하는 뜻에
합당할 때 나타난다. 그렇지만 기도할 때마다 이처럼 “좋다”고 하시기를
원하고 있을지 모른다.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 기도에 “좋다”고 하신 경우가 다음과 같이 몇 가지가 있다.
1) 한나가 아들을 얻기 소망하여 여호와께 통곡하고 서원하였더니 주님은 그에게 아들 사무엘을 주셨다.
2)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그를 위해 기도를 했다. 그리하였더니 주의 사자가 그를 깨우고 쇠사슬이 풀리고 파수를 물리치고 감옥 문이 열렸다.
3) 솔로몬이 주께 지혜를 구했다. 그의 그 기도가 주의 마음에 맞아 하나님은 그에게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주셨고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셨다.
4)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려고 보낸 편지를 보고 기도한다. 그는 산헤립이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오직 주만 바라보고 확신하는 믿음을 보였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앗수르를 치셨고 산헤립은 죽임을 당하였다.
5)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바울이 기도했다. 그리고 안수하여 그를 낫게했다.
6) 다비다가 병들어 죽었지만 베드로는 기도하여 그를 소생시켰다.
7) 엘리야는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비웃는 백성들에게 그 분의 존재를 보이도록 기도했다. 정성으로 번제물을 준비하고 도랑에 물을 흐르게 하였더니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았다.
 
두 번째로 기도에 대한 응답은 “안된다”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이 담겨 있을지라도, 우리가 주께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해달라고 하는 요구가 담겨 있을지라도 첫 번째 기도에 대한 응답처럼 “좋다”고 하시길 원하고 있다. 하지만 주님은 단호하게 “안된다”고 하신다.
성경속에 나오는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있는 가시를 제거해 주시길 세 번이나 기도하지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中)
이 말씀을 들은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10中)라고 전한다.
우리가 기도하였을 때 주님께서 “안된다”고 하시면 우리는 얼마 못가서 기도를 포기하고 주님을 원망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안된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거나 주님의 뜻에 합당치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 고치도록 길을 안내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랜 옛날부터 우리를 계획하셨는데,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도록 무조건 “좋다”고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세 번째로 기도에 대한 응답은 “기다려라”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할 때 오랜 기다림 후에 주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빨리 눈앞에 보여지기를 기도한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이 주 뜻에 합당할 때만 “좋다”고 하신다. 만일 우리가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신다면 우리가 시험에 빠질 수도 있고 우리가 자만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기도하기 전,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갖추고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곤 한다.
이 책의 지은이는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제시한다.
첫째, 헛되게 기도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에 이르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유를 물어야 한다.
둘째, 그 기도가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것(예를 들어 여러분의 건강)이라면,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한 기도보다 구하는 것을 멈출 자세가 더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 물질적인 복을 위한 기도라면(욥처럼), 도대체 그 기도를 드렸어야 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만일 영적인 복(하나님의 인도, 특정한 유혹을 극복하기 위한 능력, 성경을 이해하는 것등)을 위한 기도라면, 필요가 채워질 때까지, 또는 하나님이 기도를 멈추도록 인도하고 계신다고 확신하는 시점에 이르지 않는 한, 계속 기도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
그리고 네 번째 기도에 대한 응답은 “네가 할 일이다”이다.
부모님이 될 수 있는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도록 배려하듯이, 하나님도 우리가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것들은 우리가 할 수 있길 바라신다.
우리는 가끔씩 아픈 사람들이나 선교지를 위해 기도 부탁을 받는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 하지만,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실천으로 행하길 원하고 계신다.
아픈 사람이 빨리 나을 수 있도록 기도를 할 때, 우리는 그를 찾아가 위로하고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병원에 있기에 사람을 만나기 힘든 상황에서 우리의 만남은 그에게 힘을 주는 것이다. 우리의 이 행동을 통해서 그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이 전해지고 그로 말미암아 그의 병도 낫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가끔씩, 물론 나도, “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뿐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선교지를 위해 기도할 때, 우리는 직접 선교사로 가서 실천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헌금을 통해 선교사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헌금을 통해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 기도에 대한 응답은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하마”이다.
우리는 가끔씩 자신의 일만 생각하고 기도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결혼식이 있는 날에 날씨가 맑기를 기도하지만, 그 때 농부들은 시들어 가는 작물을 위해 기도한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생각으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쪽의 기도를 들어 주실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주님께선 적절하게 놀라운 방법으로 이루어 내신다. 그로 인해 우리는 주님의 능력에 감탄하고 놀란다.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한 방법을 가지고 우리의 기도를 기다리시는 주님이시다.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이루어지길 원한다고 기도를 할찌라도 우리에게 더욱 적절한 방법으로 응답하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 분이 이렇게 말씀하셔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네게 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이유조차 밝힐 수도 없는 어떤 것이다. 나를 신뢰 하거라.”
<기도응답의 다섯가지 방법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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