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교회 신자의 바른 태도 - 김홍전 박사

 

 

개혁 교회의 신앙이라고 해서 개혁 신앙과 신학을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개혁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개혁 신학’이라는 체계를 죽겠다고 쥐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으면 깨닫고 거기에 자기를 비춰 보고, 자기 자신의 사상 체계를 비추어 보아서 완고한 것이나 그릇된 것이나 자기 식 생각에 그냥 서 있으면 다른 것을 평가하는 평가의 척도나 혹은 원칙(principle)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언제든지 다시 신선하게 비판해 보고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옳다고 확신하고 받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도리를 좀 더 받아 가면, 그 거룩한 도리를 좀 더 알았다는 새로운 지식의 터 위에서 그것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비추어서 확인해 보고 옳은 것은 더욱 확신을 가지고 굳혀 가고 미비한 것은 보충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 정신의 태도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뿐 아니라 교회가 전통적으로 ‘이것은 옳다’ 하고 한번 정해 놓으면, 거기에 의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종교 행동을 하고 행사를 하는데, 그러한 종교 행동이나 행사에 대해서 덮어놓고 맹종(盲從)하고 맹목적으로 나아갈 때에는 거기에 무서운 오류가 스며들고 뻗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또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법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자리를 어떻게 취하고 있습니까? 가령 데살로니가 사람과 같이 자꾸 설득해야 비로소 그 말을 받아들입니까, 아니면 베뢰아 사람과 같이 말씀 자체에 깊이 들어가서 받은 내용을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증험하고 확인하고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덴 사람과 같이 무슨 새로운 소리를 자꾸 해 주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흥미가 없다고 생각합니까? 말씀의 내용을 깊이 가르치고 그것을 들어 버릇하면 자꾸만 새로운 소리를 듣기 원하는 폐단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자기네의 생활에는 별로 접촉이 안 됩니다. 아덴 사람들이 바울에게 새로운 소리를 듣기 원하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리를 새로운 소리라고 전하지 않고 어떤 미지의 신의 단, 즉 알지 못하는 신의 단이라는 것을 인용해서, ‘너희 속에 있는 이미 있는 것을 내가 이야기하겠다. 너희들은 벌써 단까지 만들었다. 그 미지의 신이라는 것이 너희 속에 갈구의 대상으로 있지 않으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하겠다’ 해서 새로운 소리는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변증, 혹은 변론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에 비추어서 우리를 돌아볼 때에, 우리들은 항상 말씀을 들은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고 자기를 다시 도마 위에 놓고 총 평가를 하고 붙일 것을 다시 붙이고 잘못된 것은 다시 제거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항상 우리에게 반복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말씀을 이론으로만 자꾸 가지고 있습니까? 개혁 신학이라는 이론을 신학교 가서 쭉 배우면 별수가 생깁니까? 한우충동(汗牛充棟)의 서적들을 다 읽어 가지고 신학을 섭렵(涉獵)해서 안다고 해서 별스럽게 하나님 나라에 큰 보탬이 될 만한 것이 그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능력으로 나에게 존재할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하신 대로 능력에 있어야 합니다.

김홍전,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232-235쪽에서

 

http://cafe.daum.net/churchinsejong/1T4Q/236

 

 

출처: 영적분별력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익산 할랄 단지 백지화 기사는 결국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기자들이 사실관계 확인을 제대로 하고 기사를 써야 하는데

자극적 제목과 선동성 기사만을 경쟁하듯 남발하는

국내언론 기자들의 고질적인 특성으로 인해,

이번 일로 인해 반대운동 하던 많은 분들이 실망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 "할랄식품 전용단지, 도축장 예정대로 추진"

"백지화한다는 일부 언론보도 사실 아냐".. 입주업체 수 상관없이 추진 '논란'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해당 매체가 왜 그런 보도를 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며

할랄단지 백지화 계획이 현재로선 전혀 없다고 밝혔다.

http://media.daum.net/society/all/newsview?newsid=20160125155928656



그러나 계속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나서서 더 힘을 보태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것 뿐만이 아닙니다.

이번 할랄조성 정책과 더불어, 만일 국회에서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는 ‘차별금지법’마저 통과된다면 ‘동성애를 반대’하고,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교회와 성도들과 목회자들은 바로 이 법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핍박할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이 마련되는 것이다.


익산 할랄 단지 조성 백지화에 대해 모처럼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한국교회가 이제는 이 악법을 막아내는데도 힘을 결집해야 한다. 별 의식없이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가 이로 인해 고통(핍박)을 겪고 있는 유럽과 미국의 교회들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인권’이라는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 합법적으로 기독교를 핍박하려는 간교한 세력들의 음모를 이제는 한국 교회가 공개적으로 나서서 막아내야 한다.




일부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할랄단지 조성 백지화(?), 아직 끝난게 아니다!



할랄에 대하여 거짓말 보태서라도 심각성을 알리자며 

너무 앞서나가는 일부 세력들이 앞장선 결과

오마이뉴스, JTBC 등 좌파언론들이 '할랄괴담'이란 용어까지 만들어서

박근혜 정부의 할랄정책을 옹호하는 코미디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 ※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박근혜 정부가 그나마 잘해오던 정책들

-통진당 해산, 노동개혁, 올바른 역사교과서, 대북정책-  대해선

악의적인 반정부 기사만을 쏟아내며 공격하던 좌파언론 방송들이 

제대로 실책하고 있는 이번 정책에 대해선

오히려 정부정책을 비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유언비어도 사실인양

보도하기를 서슴치 않던 이들이

이번 이슬람(할랄)에 관해선 되려 괴담을 찾아내고

팩트를 전달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하는 거의 모든 정책들에 대해

어떻게든 공격하고 흠집내려 안간힘을 다하던 이들이,

유독 잘못된 이번 이슬람 정책에 대해서는,

마치 박근혜 정부와 사상과 이념이 같았던 것마냥

옹호하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는 것을 보며,

이슬람의 영이 결국 이들과 영적으로 한통속이라는 것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리고 나서 농식품부 담당자가

기독교 연합관계자들을 만나서 수차례 면담을 한 후

기독교 연합관계자들이 원칙적으로 강경한 입장인 것을 알고

총선을 고려해 일단 '할랄괴담에 대한 오해'라는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http://bit.ly/20m6iIk


그 내용에 당장 할랄단지 조성계획은 없지만

완전 철회는 아닌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절대 안심해서는 안되며,

원칙적으로 팩트에 입각한 반대를

계속 고수해야 합니다.


보도자료를 낸 이후 바로

할랄도축장에 대한 기사를 뿌리고 있습니다.


익산이 아닌 다른 지역(강원도)의 할랄도축장은

예정됐던 대로 진행할 모양입니다.


보도자료가 나가고 난 후 바로

할랄도축장에 대한 기사가 동시에 나오고 있습니다.

절대 방심하면 안된다는 증거입니다.


수출 활성화 할랄인증 소전용 도축장 건립 축산신문

http://me2.do/5MlKLzjD

http://www.chuksannews.co.kr/mobile/view.html?no=99009



글쓴이/엘샤다이

        (별)나에게 이야기 하기 너무 잘하려 하지 말라하네. 이미 살고 있음이 이긴 것이므로,, 너무 슬퍼하지 말라하네. 삶은 슬픔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돌려주므로,, 너무 고집부리지 말라하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늘 변하는 것이므로,, 너무 욕심부리지 말라하네.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으므로,, 너무 연연해 하지 말라하네. 죽을 것 같던 사람이 간 자리에 또 소중한 사람이 오므로,, 너무 미안해 하지 말라하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실수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너무 뒤돌아보지 말라하네. 지나간 날보다 앞으로 살 날이 더 의미 있으므로,, 너무 받으려 하지 말라하네. 살다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기쁘므로,,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하네. 천천히 가도 얼마든지 먼저 도착할수 있으므로,, 죽도록 온 존재로 사랑하라 하네.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는 사랑하기 위함이므로,, ♥향나무는 자기를 찍은 도끼에도 향을 묻힌다네요 행복한 하루 되셔요~
        옮긴 글입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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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의 강간게임 “타하루시"


대한민국 인구 3~5%를 무슬림이 장악하고

서울광장에서 "타하루시"가 이루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일부 좌파 언론 미디어에서는

"타하루시”는 “집단강간놀이”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래 글과 관련링크를 클릭해 보시고 판단하시기 바랍니다.

타하루시는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집단강간범죄가 맞습니다.


참고링크: '타하루시'는 중동에서 일어나고 있는 '집단강간범죄'가 맞다!




전 세계가 각국에 유입된 무슬림들 때문에

심각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가운데,

대한민국에서는 고위공직자들이 앞장서서

이 나라를 이슬람에 갖다바치려

혈안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최문순 강원도지사가 이슬람 자본과 기업을

국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앞장서고 있습니다.


최 도지사는 할랄산업 육성에 총력을 기울이고 나선 것은 물론

춘천, 원주, 강릉, 평창 등 강원도의 핵심 도시 4곳에

할랄타운까지 조성하겠다고 밝히고 있고,

'2017 세계 이슬람 경제 포럼' 개최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박근혜 정부보다 최문순 강원도 도지사가

더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최문순의 친이슬람 행보... 할랄산업, 할랄타운 조성 앞장, 이슬람 영화 카메오 출연까지 …


최문순 도지사는 지난해 12월 2016년 새해 포부와 도정운영 방향을 제시하면서 할랄 자본과 할랄 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겠다고 밝혔다. 


최 지사는 당시 "강원경제 영토 확장 및 글로벌화 구현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할랄시장 인프라 구축 등을 통해 자본·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하겠다"며 할랄 산업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


최 지사는 이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이슬람권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는 열성까지 보여줬다. 최 지사는 지난해 4월 29일 인도네시아를 방문해 현지영화 제작사인 라피필름과 강원도 내 촬영지원 업무협약(MOU)을 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라피필름은 영화 '질밥 트래블러'(Jilbab Traveler) 촬영차 강원도 남이섬과 평창 정강원과 알펜시아, 설악산, 강릉 시내, 춘천 명동 등을 찾았다.


영화 제목에 나오는 '질밥'은 머리에 스카프나 두건처럼 두르는 이슬람 여성 의상을 의미하며, 영화는 한국 남성과 결혼을 생각하고 있으나 종교 때문에 고민에 빠진 여주인공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 지사는 이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해 한국인 관광객 역할을 하며 남이섬에서 길을 잃은 여주인공 라니아의 안내를 돕는 역할을 맡았다.


최 지사는 또 2018평창동계올림픽 이전에 춘천, 원주, 강릉, 평창에 '할랄타운'을 조성에 나서겠다고 밝히는 등 무슬림 시장을 겨냥한 상품 개발과 관광객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상태다.


최 도지사는 이밖에도 지난해 11월에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1차 세계이슬람경제포럼에서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와 개별회담을 갖고 할랄 관광객 유치와 2017 세계이슬람경제포럼 평창 개최에 도움을 요청했다.


강원도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당시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는 최 도지사에게 강원도가 제안한 2017 세계이슬람경제포럼 평창 개최에 대한 관심과 양국간의 협조, 할랄관광객 유치를 위한 강원도의 지원에 대해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최 도지사는 이 자리에서 세계 이슬람권 금융계의 수장인 알리알마다니 세계이슬람개발은행(사우디아라비아) 총재를 만나서 강원도의 투자프로젝트에 대해서 설명하고, 특히 올림픽특구 개발에 대한 이슬람개발은행과 이슬람금융계의 관심과 검토를 부탁했다. 


이 자리에서 알리알마다니 총재는 직접투자 또는 지분투자 방식 등을 검토하기로 했으며, 빠른 시일 내에 강원도를 반드시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



출처: 재경일보 USA

방주에서 나온 자들

 

1년이라는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입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일곱 식구는 방주로 들어갔고 7일 후인 2월 17일에 홍수가 땅에 덮였습니다. 비는 40 주야를 내렸고 물이 더 많아져 150일 동안 창일하여 천하의 높은 산들이 다 덮였고 땅위의 모든 생물들이 죽었습니다. 홍수 5개월 후인 7월 17일(제헌절?)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10월 1일(국군의 날?)에 이르러서야 물에 잠겼던 산봉우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40일이 지난 다음이라니까 11월 10일 쯤(추수감사절 무렵?)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보냈으며 다시 비둘기를 내보내었더니 앉을 곳이 없어 되돌아왔고, 다시 7일 후에 비둘기를 내보냈더니 감람 잎사귀를 물고 왔고, 다시 7일 뒤에 내보냈더니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여러 날들을 보내고 이듬해의 첫날, 곧 노아가 601세 되는 해 정월 초하루(설날)에 방주 뚜껑을 열고 보니 땅위의 물이 걷혔고, 다시 두 달 가까이 지난 2월 27일에 이르러서야 땅이 말랐고,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노아의 가족과 방주의 모든 생물들에게 상륙을 허락하셨습니다. 참으로 길고도 긴 1년 하고도 17일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노아네 여덟 식구와 방주에 탄 모든 생물들에게 그 1년 17일의 시간은 어땠을까요? 온 세상이 홍수로 뒤덮인 가운데 그들만 구원을 얻었으니 기쁘고 감격스러웠을까요? 넘실거리는 물결 위에 두둥실 떠다니는 방주 안에서 그들은 구원감사 선상파티를 하면서 즐거워했을까요? 위로부터 한 규빗에 낸 창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방주 안이 밝았을까요? 방주 안에 기름과 향유로 등불을 밝히고 좋은 음식과 식사와 편안한 생활을 했을까요? 새들과 짐승들이 넓은 방주 안을 마음대로 다니며 놀았을까요? 식량은 충분하였을까요? 맛은 있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밖을 내다볼 수도 없고,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낮과 밤도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어두운 방주 안, 잣나무를 깎아 만든, 역청이 안팎으로 칠해진, 삼층(삼층천?)으로 나누어지고 간으로 막힌 방주 안의 좁은 공간에 갇혀서 그들은 갑갑함과 공포와 고통과 배고픔과 온갖 악취를 견디며 1년을 보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과 모든 생물들은 마치 곰이 동면(겨울잠)하듯이 그 안에서 죽은 듯이 지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방주 안이 난리법석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1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방주에서 나오는 날, 그들은 1년 17일의 죽음과도 같은 시간을 통과하여 마침내 새 생명을 얻은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1년 17일 동안 방주 안에서 견뎌내지 못 하고 다 죽었을 것입니다.

모든 죄인은 죽어야 합니다. 죄의 삯인 죽음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구원은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우리 대신 죽으심, 곧 참혹한 고통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노아의 방주는 나무로 만들어 석청을 발랐습니다. 십자가도 나무로 만들어졌고 거기에 주님의 피가 발라졌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죽고 새 생명을 얻어 거듭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님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 안에 있던 그들을 홍수가 씻어간 새 땅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다시금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시며 복을 주셨습니다. 새 창조요, 새 피조물이요, 새 하늘과 새 땅과도 같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주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감격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드린 번제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한 것을 아시면서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아니 하시겠다 약속하신 것은 그들이 새로워지고 달라져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거나 변화하지는 않았습니다. 달라진 그것은 그들이 방주에 들어갔다가 방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었다고 인간성이 달라지고 성품이 거룩하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확실한 달라진 것은 예수 믿었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그렇게 옮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죄로 인하여 홍수를 당한 땅이 에덴동산 시절과 같이 온전히 회복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죄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 받고 거듭났다 할지라도,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해도 온전한 성품과 완전한 거룩함을 회복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이 예수 믿었다 하여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땅에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음 같이 성도의 앞길도 광야와 같은 연단과 환난이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쉬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들입니다.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음 같이 이어지는 광야와 같은 연단과 환난의 길을 우리는 주와 함께 걸으며 그 앞에 서기까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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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1990년대 초 독일 신문에 보도된 사진입니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홀리 심장병원에서 캐린 피셔(32세)의 심장수술 장면을 병원 교육 자료로 쓰려고 72장의 사진을 촬영한 병원 교육부 소속 사진사 피터 발렌틴은 사진을 인화해 보다가 한 사진에 이상한 형상이 찍힌 것을 발견했다.

 

혹시 누군가 장난을 친 것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 현상소에 가서 문의하고 확인한 결과 괴 현상은 필름 원판에도 있었고 사진 전문가의 분석 결과 조작된 흔적이 전혀 없는 원판으로 판명됐다.

 

그 후 피터는 문제의 사진이 캐린의 심장이 멈춘 때 촬영된 사진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영혼이 죽은 육신에서 분리되는 모습을 촬영했다는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

 

피터에 따르면 당시 수술실에는 그를 포함해 10여명의 의료진이 있었지만 아무도 육안으로 캐린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는 형상을 보지 못했다.

 

이에 대해 프랑크프루트의 마틴 뮬러 박사는 인간에게 영혼이 실제로 있고 육신은 성장했다가 약해지며 죽지만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며 이 사진이 현재까지 촬영된 사진들 중 가장 중요한 사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심장 판막증 수술 여환자(캐린 피셔) 사망 순간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면서 그 여인의 영혼이 카메라에 촬영됨)

 

- 독일 프랑크푸르트 -

 

 

사람은 죽음 이후, 사람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의 영혼은 죽지 않고 영원한 세상(천국 or 지옥)으로 옮겨갑니다! (사람의 영혼은 불멸한다.)

 

 

 

이 글은 실화입니다! (미국 의학박사: 모리스 롤링스)

 

 

 

많은 사람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 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닙니다. 이 사실은 현대의학으로도 증명이 됩니다.

 

모리스 롤링스는 한때 아이젠하워(미국 제 34대 대통령)의 개인 담당의사였고, 현재 테네시주 다이아그나스틱(Diagnostic)병원의 내과 특히 심장혈관질환의 전문의이자 응급소생술의 국제적인 권위자입니다.

 

모리스 롤링스는 평생을 의사로 일해왔고 거의 매일 죽음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죽음 이후의 경험에 대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꿈이거나 환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던 1977년 어느날이었습니다. 그가 근무하고 있는 병원에 조지아주 라파옛에 사는 48세 된 우체부 찰리 맥케익이라는 사람이 입원했습니다.

 

동료의사 팸 찰스워드가 그 환자의 심전도 검사를 하는 도중 갑자기 찰리에게 심장마비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찰리는 자기 심장이 멎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이러쿵저러쿵 얘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렇게 4~5초가 지나자 찰리는 갑자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마치 뭘 몰라서 질문이라도 하나 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눈을 뒤집고 그대로 까무러쳤습니다.

 

즉시 간호사 하나가 달려들어 '생명의 키스'라 불리는 '구강 대 구강 인공호흡'을 실시했습니다. 그 사이 다른 간호사는 정맥주사를 준비했습니다. 모리스 롤링스는 그의 심장을 정상으로 뛰게 하기 위하여 심장조율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찰리가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습니다.

"멈추지 말아! 난 지금 지옥에 있어! 지옥에 있다고!"

 

모리스 롤링스는 환자가 환각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받아넘겼습니다. "당신은 계속 지옥과 씨름하시오. 나는 지금 당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바쁘오!"

 

그런데 이런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대개 환자들은 고통 때문에 "그만 눌러요. 갈비뼈를 부러뜨릴 참이오"하고 의사에게 항의하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흉부 압박맛사지는 때론 환자의 갈비뼈를 부러뜨릴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그 사람은 필사적으로 돌아오고 싶어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롤링스 박사가 그의 가슴을 두드리면서 "당신은 어째서 내가 멈추는 것을 원하지 않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지옥에 있소"하고 소리쳤습니다. "지옥으로 가게 될까봐 무서워한다는 뜻이군" 박사의 말에 그는 "아니오, 나는 지금 지옥에 있소. 나를 가게 하지 마시오. 제발 나를 보내지 마시오. 내 말 이해 못하겠소? 나는 지옥에 있소. 당신이 소생법을 멈출 때마다 나는 다시 지옥에 간단 말이오. 제발 나를 지옥에 다시 보내지 말아주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모리스 롤링스는 지금까지 죽음에 다가가는 많은 환자들의 항변을 무시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환자는 매우 심각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 환자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지난 25년 동안 사람의 얼굴에서 그토록 무서워하는 모습을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있었고 평생 그토록 무서워하는 얼굴 모습을 본적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그는 서둘러 환자를 살리려는 노력을 계속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환자가 "내가 어떻게 하면 지옥에서 나갈 수 있소."하고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는 기도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당황한 박사는 "나는 목사가 아니오"라고 투덜대며 대답했습니다. 그러다가 간호사들의 따가운 눈총에 밀려 그는 마지못해 기도문을 선창했습니다.

 

"따라서 해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저를 지옥에서 구해주십시오" "만약 제가 다시 산다면 당신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그 환자는 이 기도를 필사적으로 따라했습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진정되었고 곧 정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 환자의 방에 갔을 때 그 환자는 성경을 구입해서 읽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화이며, 모리스 롤링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에 관하여 의사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죽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 두가지 방법으로 죽음에 관해 연구하였습니다. 첫째로, 병원에서 임상적인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경험담을 듣고 이들을 서로 비교 연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그들의 경험이 서로 매우 유사하고 일정한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소에 두세 사람이 유사한 꿈을 꾸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에서 살아난 많은 환자들이 본질적으로 같고 연속적인 꿈을 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 환자들은 우리와 똑같이 분별력이 있는 사람들로서, 모두가 자신들의 경험을 꿈이 아닌 현실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경험이 꿈이 아니라 실제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둘째로, 세계 여러 종교들의 경전을 구해서 읽고 서로 비교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유대교의 율법과 탈무드, 회교도의 경전 코란, 옛 인도의 성전 베다, 우파니샤드, 힌두교의 브라만, 조로아스터교의 경전과 주석서인 젠드아베스타, 공자의 어록, 자이나교의 아가마, 불교의 불경, 일본의 신도 고지키, 노자가 제창한 도교, 논어를 포함한 많은 종교의 신성한 책들의 많은 이론들을 열심히 비교하고 분석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한 책이 죽었다 살아난 환자들의 죽음 후의 경험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책은 바로 기독교의 성경(교회)이었습니다.

 

그래서 본래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그는 연구가 끝난 이후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이로 보건대 성경에 나오는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비 실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을 묘사한 것입니다.


트라이언 에드워드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옥은 너무 늦게 본 진실이다. 제때에 할 일을 경홀히 여기고 후회하는 곳이다.

러분이여,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게 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천국과 지옥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모두 다 지옥을 면하고 천국을 기업으로 받게 되시길 바랍니다.

 

 

옮긴 글/ 이구원


2015년 12월 28일,

한 해의 마지막 대미를

웨이브에서 장식하기 위해

웨이브 추첨 장소인 Kanab 으로 갔습니다.


떨어진 자의 탄식과

당첨된 자의 환호가 교차하는

이곳 커냅에 수도 없이 왔었지만,


이날은 지금까지

커냅의 웨이브 추첨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 날이었습니다.


웨이브 구슬은

모두 75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팀당 3명이라고 가정하면

225명이 와야 75개의 구슬이 모두 사용됩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75개가 다 사용된 것을 본 적이 없었죠.


75개가 다 동이나면

그 다음엔 파란색 구슬이 사용되는데

blue 구슬은 B1, B2, B3 …로 번호가 배부됩니다.


이날은 B7까지 배부될 정도로

커냅의 웨이브 추첨 장소는 그야말로

발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죠


여기서 당첨되는 사람은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같을 정도였습니다.


12091756_1.jpg


6-7년 전까지만 해도

웨이브 추첨장소는 페이지와

커냅의 중간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죠.


그 시절엔

웨이브를 아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을 때였습니다.


12091756_2.jpg


그 때는

첫날 추첨에서 떨어지면

그 다음날엔 번호를 두 개 주었습니다.


이틀 연속 떨어지면

번호를 3개 주기도 했죠.


그래서 2-3일만 머무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웨이브 퍼밋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12091756_3.jpg


그러나

웨이브가 사람들에게

점점 더 많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웨이브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12091756_4.jpg


그리고 언젠가부터

첫날에 떨어지면 그 다음날에

번호를 두 개 받던 베너핏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12091756_5.jpg


예전에는

동절기와 하절기에 따라

추첨장소가 각각 다른 장소에 있었는데


4-5년 전부터

커냅에 있는 오피스로 통일되었죠.


그 이후부터

신청자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12091756_6.jpg


최근 3-4년의 추세를 보면

일본, 인도, 중국 사람이 급격히 늘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는

웨이브 추첨 장소에서

동양인을 보기란 쉽지 않았죠.


12091756_7.jpg


이들 동양인 가운데

가장 많이 늘어난 사람은

단연 중국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추첨하러 온 사람의

약 3분의 1이 중국 사람일 정도입니다.


12091756_8.jpg


상대적으로

백인들이나 유럽 사람들은

그 만큼 당첨 기회가 줄어들었습니다.


12091756_9.jpg


앞으로 중국 사람들은

더욱 늘어날 기세입니다.


사진을 찍는 중국인들이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관광객 또한 기하급수로 불어났기 때문이죠.


각 지역의 유명 촬영지에 가 보면

어김없이 중국 사람들이 떼로 몰려듭니다.


12091756_10.jpg


웨이브라고

예외일 수는 없죠.


앞으로 웨이브는

중국 사람들로 인하여

퍼밋 받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12091756_11.jpg


웨이브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은

인터넷 추첨 10명과 현장 추첨 10명,


모두 합하여

20명으로 제한되어 있는데

경쟁자는 점점 더 많아지기 때문이죠.


12091756_12.jpg


웨이브에 들어가는 사람을

이렇게 제한하는 이유가 뭘까요?


아래의 사진을 보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12091756_13.jpg


밟으면 부스러질 것 같죠?

이곳은 나바호 사암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암은 사람의 손길과

풍화작용에 의해 쉽게 훼손됩니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훼손될테죠.


그래서 이곳을

좀 더 오래도록 보존하기 위해서

사람의 발길을 제한할 필요가 있게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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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라서 사람들이

많을 것이란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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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브로 진입할 땐

가능하면 차체가 높은 차량이 좋습니다.


특히 몬순 시즌에

비가 오고 난 다음이나


눈이 녹은 후에는 웨이브로 가는 길이

온통 진흙탕이 되어서 가는 길이 무척 힘들 수도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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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겨울 우기와

여름의 짧은 몬순을 제외하면

거의 비가 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름엔 지극히 덥고,

겨울은 매섭게 춥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에겐 극한의 인내가 필요하죠.


그래서 이곳에선

모질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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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은 풍화작용에 의해

이렇게 점점 형체를 잃어가면서

다시 서서히 모래로 되돌아 갑니다.


풍화된 모습이

마치 골다공증에 걸린

뼈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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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브에 가서

어떤 이유든 간에


세컨 웨이브를 

못보고 돌아오면

아쉬움이 무척 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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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떠나야 할 시간...


하지만 저는

2016년 3월 30일에 또 갑니다.


이미 인터넷 추첨에 당첨되어

웨이브 퍼밋을 받아 놓았기 때문이죠.

인터넷 추첨으로 당첨된 것은 3년 만에 처음입니다.


그동안

인터넷 추첨에선

매달마다 쓴잔을 마셨는데

3년 동안 줄기차게 신청했더니 마침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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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글 : 주안(power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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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잠입해 들어오는

이슬람과 동성애를 막기 위한 관심과 기도가 필요합니다.


수쿠크법은 다행히 저지되었지만, 이젠 정부가 앞장서서 이슬람 할랄단지 조성에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리고 동성애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교회는 무너지게 되고, 대한민국은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의 길로 빠져들 것입니다.


이런 나라의 현실 앞에 할 수 있는 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관심갖고 기도하며 나서는 길 뿐입니다. 부디 이혜훈 의원님이 꼭 총선에 당선되셔서 이런 악법들을 저지하는데 나서주셨으면 합니다.



이혜훈 "하나님 나라 한 순간에 무너뜨릴 차별금지법 막아야... 동성애·이슬람 적극 대처할 것"


이혜훈 전 의원이 19일(한국시간) 차별금지법, 그리고 '동성애'와 '이슬람'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나서겠다고 밝혔다고 기독일보가 보도했다.


이 전 의원은 이날 한국장로교총연합회 신년하례회에 참석해 축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지키는 것에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면서 "무늬만 크리스천인 정치인이 아닌 '하나님의 전사'를 국회로 보내야 한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라고 점잖게 생각해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순식간에 넘어질 수 있다. 기도하며 힘을 모아달라"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특히 "지금 하나님 나라를 한 순간에 무너뜨리는 법안이 나오며, 동성애는 물론 종교에 대한 차별도 금지하는 입법이 시도되고 있다""하나님 나라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위기며 이러한 법안이 정부입법으로 올라오고 있다"고 경각심을 촉구했다.


이어 "노르웨이에서는 친부모가 자녀에게 교회 가라고 훈육했다는 이유로 친권과 양육권을 뺏긴 일이 발생했다. 차별금지법을 통과시키려는 세력들은 점점 힘을 키워서 준비하고 있고, 이번 선거를 통해 반드시 성사시키려고 한다"고 당부했다.


이 전 의원은 구체적으로 "20대 국회에서 또 다시 차별금지법안이 상정될텐데 이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교회에서 동성애가 잘못됐다고 가르칠 수도 없게 된다"며 "주 예수 외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면 종교차별에 걸려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차별금지법과 할랄단지 등 이슬람 문제에 정치인으로는 드물게 강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 전 의원은 이명박 정부 당시에는 '수쿠크법'(이슬람채권법)을 막기도 했었다.


그리고 영국에서 직접 목격했던 이슬람교의 실체, 2010년 국회의원 신분으로 수쿠크법 통과를 저지했던 일 등에 대한 생생한 간증을 담은 이 전 의원의 '이슬람 바로알기' 유튜브 동영상 조회수는 무려 65만 건을 넘어서는 등 큰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전 의원은 지난 2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도 이슬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 전 의원은 "한국교회에는 이슬람을 과소평가하거나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면서 한국교회의 각성과 대응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 전 의원은 구체적으로 "무슬림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2015년 기준 국내에 거주하는 무슬림만 40만명이 넘어섰다고 한다"면서 "한국에선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로 알려져 있지만 꾸란에는 알라를 거부하는 불신자의 목을 치라는 구절이 164개나 있다.


무슬림들이 알라의 명령을 따라야 천국에 간다며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자폭테러를 행한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22만명의 기독교인이 순교 당하는데 대부분 무슬림에 의해 참수당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런 실상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지상파 방송에선 '이슬람, 평화의 종교'라는 특집 방송이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자신이 유학생활을 했던 영국의 이슬람 상황에 대해서는 "영국의 많은 교회가 교인·재정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다 모스크로 바뀌었다"면서 "막강한 재력을 앞세운 이슬람은 교회를 통째 사들여 첨탑 십자가를 떼고 초승달 마크를 붙였다"고 말했다.


이 전 의원은 2010년 수쿠크법을 저지하던 당시 상황에 대해선 "이슬람이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영국과 프랑스를 선택한 것처럼 아시아에선 중국과 일본 진출이 막히자 한국을 타깃으로 삼았고, 수쿠크법 제정 압력은 이 같은 전략 하에서 나온 것이었다"면서 "수쿠크법을 꼼꼼히 분석해보니 이슬람의 포교 및 영향력 확대를 적극 보장해주는 법이었고,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는 악법이라 경악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회 회의석상에서 '성령이 이곳을 지배하고 다스려 달라'고 필사적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정말 긴박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절묘한 개입으로 스쿠크법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고 회고했다.


이 전 의원은 기독교 모태신앙인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측 교회에 출석했다. 외증조할머니와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 덕분에 이 전 의원은 어릴 적부터 가정예배, 구역예배, 새벽예배, 철야기도에 충실했다. 미국 UCLA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을 지냈으며, 여성 경제전문가로 2004년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지금껏 정치가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재경일보 USA (http://www.jknus.com/)

 

 

똘레랑스(Tolerance)의 위험

 

날이면 날마다 1년이면 12달, 향긋한 꽃내음이 코끝을 간질이는 곳, 때로는 힘차게, 때로는 부드럽게 늘 출렁거리는 푸른 바다, 각 곳에서 몰려든 여행객들의 행복한 웃음소리로 하루를 여닫는 곳, 아름다운 섬 하와이를 떠나 사계절이 분명하다는 이곳으로 이사를 온 후, 처음 맞이하는 가을, 뒤뜰에는 노란 낙엽이 하늘거리며 떨어져 내리고 겨우살이를 위한 열매를 모으려는 것일까? 똥그란 눈으로 두리번거리며 이 나무 저 나무로 오르락거리는 다람쥐의 빠른 발걸음을 바라보는 마음이 왠지 부산스럽다.

어찌 다람쥐뿐이랴? 모든 동식물에 넉넉한 품을 제공하며 적군, 아군 가리지 않고 끌어안던 푸른 나무도 이제 벌거벗기 시작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은 늘 향기롭고 늘 관용을 베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시점에 가서는 냉혹하리만큼 모질게 변한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자연의 순환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서 울고 웃는 생(生)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언제까지나 봄일 수 없고 언제까지나 여름일 수 없는 인생…, 가을을 지나야 하는 인생이라면, 나는 과연 다가올 겨울 준비를 얼마나 착실하게 준비하고 있는가?

얼마 전, 젊은 영혼의 열기가 한창 뜨겁게 달궈지던 ‘바타클랑’ 극장, 생명의 향기로 충만했어야 할 장소가 테러범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삽시간에 피바다로 변하였고 아무 죄 없는 생명들이 무참히 쓰러져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늘 봄이며, 항상 여름일 것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언젠가는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겨울, 그 다음에 가서야 봄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날 그 시간에 참혹한 겨울이 올 것임을 알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좀 더 근면(diligent)한 삶을 택하지 않았을까? 인생의 삶이란 너무 폐쇄적이어도 안 되고 너무 관용(똘레랑스,tolerance)을 베풀어서도 안 된다. 오늘 따사로운 햇살이 생(生)의 뜨락에 쏟아질 때는 받아드리고 내일 모진 눈보라가 몰아칠 것도 예상하면서 살아간다면 모르긴 몰라도 조금 더 나은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 실과를 거두어 들일 수도 있었으리라.

물론, 개중에는 많은 젊은이가 근면. 성실한 삶, 포용할 때는 포용하고 닫을 때는 닫고 최선의 길, 최상의 선택적 삶으로 잘 가꾸어 나가던 중, 어쩌다 그 광란의 장소를 찾게 되어 죽음을 맞게된 억울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연주한 록밴드의 실상을 알았다면 그들의 광란의 춤과 노래를 삶으로 받아드리지 않았을 것 같다. 죄악이 넘쳐나는 장소에 내 몸을 맡기는(관용?) 일은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들은 사탄을 찬양하고 사탄을 숭배하는 가수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근면, 성실한 청년들이 그곳에 참여할 이유가 과연 있었을까?

너무 늦은 감이 없지는 않으나, 우리 모두가 그토록 참혹한 일이 일어나게 된 동기나 이유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시점에 이른 듯하다. 프랑스 경찰과 정부가 힘을 합쳐 사건의 경위를 분석하고 조사한 결과, 구원론이 잘못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만행이었음이 만천하에 들어났고 그 끔찍한 현실에 전 세계인이 분노했다. 더 놀라운 것은 테러들 대다수가 시리아 피난민을 가장해서 들어온 IS요원이었다는 것이다. 피난민을 가장하고 들어온 테러단의 만행을 막기 위한 정책의 일환이기는 하겠지만 그들 테러리스트에게 강경책으로 대응하려다보니 정작 피해를 입는 사람들은 순수한 난민들이란 것이 나를 화나게 한다.

미국의 911테러 사건, 이 경악할 참상을 지켜본 유럽에서는, 생각하기를 ‘미국이 매일 이라크를 공습하고 이슬람 국가들과 원수로 지내니까 저런 테러공격을 당하는구나, 우리는 이슬람에게 관용을 베풀자, 그들에게 잘 대해주자.’ 그 후부터 유럽, 특히 프랑스는 이민자들에게 ‘똘레랑스 정책’을 펼쳤다. 그들의 종교도 그들의 사상도 물어보지 않은 채 다문화 그대로를 무조건 받아주기 시작했다. 그 똘레랑스(Tolerance) 정책에 힘입어 수많은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이 유럽으로 이주했다. 그들의 종교는 산아제한이란 것을 할 수 없고 일부다처제가 허용이 된다. 그러니 그들은 자녀를 낳고, 낳고 또 낳았다. 유럽인구의 출산비율보다 여덟 배 아홉 배, 심지어 열 배가 넘었다.

프랑스는 이슬람이란 종교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던 탓에 이번 같은 사건이 터졌다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슬람 교리에는 분명하게 자신들의 세력이 약할 땐 평화의 종교로 위장하고 있다가 세력이 커지면 ‘지하드’를 개시하고 기독교인과 유대인을 죽이도록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교리에는 “알라를 위해서는 그 반대자를 반드시 죽여라. 포교를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된다.” 라는 말이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어찌 되었건 유럽 사회에서 그동안은 ‘똘레랑스 정책’을 펼쳤으나 이슬람이 확산된 이후에 수많은 국가들이 이것이 프랑스 정부의 똘레랑스(Tolerance)정책의 부산물이란 것을 뒤늦게 깨달은 듯, 허둥거렸다. 이것을 바라보는 시민들은 분노했고 그들(이슬람종교)의 교리의 포학성에 치를 떠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뒤늦게나마 무조건적 관용의 위험성을 깨닫는 것 같기도 하다. 특별히 각 나라 국경선의 문턱이 갑자기 높아진 것이 그것이다. 갑자기 이민 정책을 재검토하는 어리석음보다 처음부터 어떤 기준을 두고 그 기준에 맞게 서로가 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지 늦장 대응의 후유증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도 큰 피해가 아닐 수 없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막지 못한다 고 하던 우리 선조님들의 지혜의 말씀이 생각나는 사건이다.

이런 것을 보면서 우리(신앙인)도 각성해야 한다. 관용(똘레랑스, Tolerance)이란 단어는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상당히 중요하고 필요한 아름다운 단어임에 틀림이 없으나 결코 가볍게 사용해서도 안되는 말인 것을 알아야 하겠다. 그럼에도 그 단어의 뜻을 오용하거나 남용하다가는 이번처럼 무시무시한 참사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우리 모두 자각해야 한다. 다른 나라 사람이 그 나라에 들어와 살려고 하면 기본적으로 그 나라 법률을 준수하고 그 나라의 전통과 문화를 존중하는 질서 안에서 자유를 누리도록 장려하여야 하는 것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의 사고는 우리 모두에게 해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앙생활에 무조건적 관용(똘레랑스, Tolerance)은 자기 자신에게나 교회 공동체에 유익을 주기보다 위해를 가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엄격하게 잣대를 두고 성경의 기준으로 자신을 맞추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좁은 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하여 똘레랑스(관용, Tolerance)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현대 교회의 병폐요 폐단이라고 말하면 너무 무리한 지적일까? 현대는 신학자는 많으나 알고 있는 만큼의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는 사람은 너무 적다. 왜 다른 사람의 신앙에 그렇게 관심이 많은가? 특히 이단 사역자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잘못은 덮어두고 다른 이의 신앙생활에 관심이 많다. 그러다가 자신의 영혼이 피폐해짐을 망각하고 있다. 다른 사람 천국 가지 못할 것을 안타까워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주 앞에 설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대 기독교가 점점 하향하는 추세라며 염려하는 목소리는 높은데 “회개”를 외치는 사람은 적다. 초대교회는 달랐다. 다른 사람을 질책하고 비판하기보다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진실되게 살아내었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믿는 사람이 날로 늘어갔다. 진실한 성도, 그 한 사람이 두 사람이 되고 두 사람이 세 사람 되어 결국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를 이루게 되고 더 나아가 내가 개혁되어야 전 세계를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사다난하였던 이 한 해도 얼마남지 않았다. 지금껏 내 자신의 죄악에 대해, 게으름에 대해 관용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내 삶을 다시 돌이켜 보아야 한다. 바늘 도둑 같은 작은 죄라도 회개하자.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 모진 십자가 형벌을 감내하셨음을 잊지 말자. 예수님은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나 자신의 죄를 관용하는 자, 남의 죄에만 관심이 많던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가장 미워하셨음도 기억하자. 똘레랑스(tolerance)의 위험을 자각하자.


 글: 최송연/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영성훈련" 중에서

유럽을 허물어뜨리고 있는 난민문제의 실상!

 

유럽은 이미 이슬람 난민들이 대거 유입되어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이슬람에 대해 바로 알고 대처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출처: 주님오시는 발자국 소리/엘샤다이

'강단 십자가 부착 금지, 그 신학적 의미

 

이승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20159월에 모였던 대한 예수교 장로회 합동 측 제 100 회 총회 결의 사항 가운데 강단에 십자가 부착을 금지한 과거 총회 결의를 재확인한 것을 놓고 주변에서 여러 말들이 많고 생각들이 많다. 처음에 한국 교회 강단에는 십자가가 없었을 것인데 이것을 도입하는 사람들이 있기 시작하고 논의가 되기 시작하자 19579월 부산중앙교회 예배당에서 열렸던 제42회 총회에서 강단에 십자가가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결의했었다. 후론(後論)하겠지만 그것은 그 시대의 교회가 그래도 개혁신학에 어느 정도 충실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결의였다. 그러나, 그런 신학적 고려에 근거한 과거 결의에도 불구하고, 곳곳의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설치하는 일이 매우 많았고 (이는 각 교회가 신학적 고려 없이 마음대로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대개 대형 교회가 그런 설치를 하여 소위 은혜롭게 보이면 곳곳의 여러 교회들이 그것을 따라가는 일이 많아져서 이전 총회 전에도 강단에 십자가를 세울 수 있도록 하는 헌의가 있었고 (이는 우리의 현실에 근거하여 과거의 바른 결정을 고쳐 달라는 내용이다) 이를 논의하였으나 이전 총회에 이어서 이번 총회에서도 1957년도의 42회 총회 결의 내용을 재확인한 것이다. 이는 합동측이 근자에 한 결정 가운데서 거의 유일하게 잘한 결정이라고 여겨진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 보기로 하자.

 

전제: 십자가를 믿는 믿음의 중요성

기독교는 구속의 종교이다. 그런데 이 구속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기본적 믿음이다. 그러므로 개신교인들은 십자가에서 일어난 구속을 믿으므로 십자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고,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고, 십자가 없이는 영광도 없다. 우리의 모든 것이 십자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만큼 기독교는 십자가를 중요시한다. 이것이 이 모든 논의의 기본적 출발점이고 전제이다.

 

가시적 형상화의 문제점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사랑하는 그 십자가, 우리의 구속이 거기서 이루어진 그 십자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형상화할 때에 일어난다. 타락한 인간들은 항상 이런 형상화를 지향한다. 이것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배와 관련해서는, 당신님께서 지시해 주신 것 외에는, 그 어떤 형상화도 하지 말라고 명하셨다. 천주교에서는 오늘날도 미사할 때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형상이 부착된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오늘날은 한국 개신교도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형상화에 찬성할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 형상화에 대한 반대에 예수님의 상이 제거된 십자가의 형상도 포함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한 교회는 16세기에 종교개혁이 어느 정도 진행되던 영국 교회였다. 철저한 종교개혁을 원하던 청교도들 중 일부는 형상이 없는 빈 십자가’(a bare cross or a simple cross or the unadorned cross)도 예배당 안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예배당 마다 십자가가 설치되어 있던 당시로서는 매우 혁명적인 주장이었다. 이것은 철저한 청교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아주 철저한 청교도가 아닌 사람도 엘리자베뜨 여왕이 자신이 참석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해 달라고 했을 때, 그 채플에 십자가가 있지 않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한 주교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철저한 성경적 입장을 지닌 사람들은 항상 예배당 안에 가시적 형상으로서의 십자가도 있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칼빈과 그의 입장을 따르는 사람들은 항상 이런 입장에 서 있었다. 그것이 성경적이라는 생각에서 그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거의 모든 예배당 안에 이미 설치되어 있는 십자가를 제거한 것이다. 성경말씀에 따르기 위해서 말이다. 성경에 따른 바른 예배를 하기 위해서 그리한 것이다. <스코티쉬 신앙고백서>(1560)20장에서 미신을 조장할 수 있는 모든 의식들을 버리라고 하여 심지어 성호를 십자가로 긋는 것까지를 거부하였으니 결국 모든 형상화를 거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2 스위스 신앙고백서> (1566)고대 교회의 전통을 따라 의식을 더하는 것을금하고 있으니 역시 같은 입장을 표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칼빈 등이 성경에 근거해서 제시한 개혁신학을 따르는 장로교단의 하나이다. 그래서 비록 칼빈과 개혁신학을 그렇게 잘 알았던 것은 아니고, 철저하게 칼빈을 따르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명목이 개혁신학을 따르는 1950년대 말의 한국장로교회는 그런 전통을 따라 예배당 안에 십자가 형상(形象)을 허용해 달라는 청원을 거부했던 것이라고 판단된다.

 

 

왜 이 청원들이 다시 나타나는가?

 

그런데 오늘날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설치하게 해 달라는 청원이 다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실적으로 아무 생각 없이 이미 십자가를 설치한 예배당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의 모든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과거의 결정이 이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결정을 철회하든지, 그것을 무시하고 현실을 인정해서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있을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번복해서 결정하면 후에는 예배당 마다 그 안에 십자가 형상이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실질적으로 이렇게 많은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부착된 이런 현상 배후에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움직임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는 아무래도 역사의식(歷史意識)의 부족이다. 과거의 장로교회가 과연 어떤 과정을 겪어서 형성된 것이고, 과거 장로교인들이 심지어 피 흘리면서까지 천주교회적 예배당을 개신교회의 예배당으로 바꾸었는지에 대한 의식이 없거나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 과거의 역사를 잘 의식한 분들은 결코 과거로 회귀하는 일들을 하지 않는다.

 

둘째는 다양한 교회들과의 접촉 때문이다. 이를 민간 차원에서의 에큐메니즘의 실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게 되고 여러 나라를 방문하여 여러 교회들에 참여하면서 때로는 루터파 교회들이 참여도 해 보고, 때로는 영국 성공회에 참여해서 예배도 하고, 또 때로는 미국에 있는 감독교회에서 예배하면서, 이들 교회의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좋게 생각하는 일이 나타나고, 또한 때로는 그것을 본 따서 예배당을 건축하면서 예배당 안에 십자가를 도입하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이는 WCC 운동에 열심인 교회들에서는 더 일반화 되어서 WCC가 앞장서서 유도하는 예전의 통일에 동의하는 교회들은 십자가뿐만 아니라 강단에 촛대가 등장하기도 하고 다른 예전적 장식물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있게 된 것이다. 그런 교회들이 늘어 감에 따라서 또 교회들 간의 교류가 많아짐에 따라서 거의 모든 교회들이 비슷한 양식을 지향한 결과의 하나가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있게 된 것이다.

 

셋째는 신학적인 다양화 현상 때문이다. 심지어 개혁신학을 지녔다고 하는 장로교회 안에서도 과거의 칼빈 등이 제시한 그 신학에 꼭 따라야만 하는가 하는 회의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칼빈의 견해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견해도 참조할 수 있지 않는가 하면서 다양한 권위들이(authorities) 우리들의 교회 안에 들어 와서 급기야 각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하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암묵리에 한국 교회 안에는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주 일반적인 것이 되어서,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없는 교회에 대해서는 이 교회는 이단 교회가 아니냐고 질문하는 일이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기에 이런 청원이 거의 매해 등장하는 것이다. WCC 운동에 열심인 교단들에서는 이런 청원이 나타날 리도 없다. 그것이 거의 기정 사실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전통적 개혁신학을 따르는 교단에서는 이런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이번 총회에서 이전 총회의 결정을 그대로 따르기로 한 것은 그나마 잘 한 것이다. 그러나 언제 상황이 바뀔지 모른다. 그렇기에 이 문제에 대해서 신학적 역사적 고찰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십자가 형상에 대한 고찰

 

예배당 안에 십자가가 있어도 좋다든지 있으면 더 좋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우리들이 그 십자가 형상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니 별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니 좋지 않으냐고 논의한다.

 

문제는 이런 논의가 예배당 안에 다양한 상(, images)을 세우고 있던 천주교회의 논의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천주교회에서는 상들에게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데 더 도움이 된다고 오랫동안 논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이 있는 것, 그 앞에 절하는 것도 사실은 그 상()에게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 배후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경배(latria)를 드리는 것이니, 예배당 안에 상()에 있고 심지어 그 상()에 절을 하고(dulia), 성자들을 존숭(dulia)해도 그것은 하나님께만 돌려 드리는 영예를 조금도 다른 데로 돌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한국 개신교도들 가운데 십자가에 예수님의 상을 붙이자고 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그러므로 이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하지만, 그 배후의 논리가 상당히 비슷하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천주교회에서는 상을 통해서 그 상 배후에 계신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려는 것이, 여기서는 상이 없는 십자가 형상을 통해 그 십자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배후의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생각하게 되니 좋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거 우리의 선배들이 왜 이것이 문제라고 여겼는지, 왜 어떤 것을 보면서 그것 배후의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 자체도 문제가 된다고 생각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가장 기본적으로 본질적인 문제가 있다. 십자가를 사랑하는 것은 십자가 형상과는 전혀 상관없다. 십자가 형상이 있어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형상도 없이 영적으로, 참으로 오직 영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예배당 안에는 하나님에게 우리가 영적으로 나아가는 데 지장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있지 않는 것이 좋다.

둘째로, 예배당 안에 십자가 형상이 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수 없이 많은 악용과 오용의 문제들이 있다. 물론 이것은 부차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에 있어서는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십자가 형상이 있으면 그것 앞에서 하는 기도가 더 효과적이고 생각하는 오용이 나타날 수도 있고, 중세 사람들이 그리하였듯이 그것을 붙잡고 기도하면 더 효과가 있다고 생각 할 수도 있으며, 그와 같은 수 없이 많은 오용들이 나타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과거의 개혁파 선배들은 처음부터 그런 문제가 발생할 것을 있지 않도록 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들 자신이 그 오용과 오해의 문제를 아주 뼈져리게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런 문제가 일어날 일이 없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인간의 부패성을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본질적 문제는 아니고 그저 부차적 문제에 대한 지적일 뿐이다.

 

 

나가면서

 

우리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죽으신 십자가를 사랑한다.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 영어 표현 자체가 그것을 의미하듯이 십자가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갈보리 언덕의 그 십자가에서 일어난 구속이 구속사의 절정이요 핵심이라는 말이다. 이로부터 십자가 형상이 우리의 중심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칼빈은 예수님께서 진짜로 그것에 매달렸다고 주장되는 십자가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님을 분명히 했다. 과거 우리 선배들이 십자가 상을 없애기 위해 피 흘린 것을 생각하자. 십자가 상이 없는 예배당, 그 안에서 성경이 직접 언급하는 예배의 요소들만을 가지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구속의 공로에 의지하여 성령님 안에서 바르게 예배하기 위해 저들의 생명과 재산과 그야말로 모든 것을 바쳤던 개혁파 선배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우리들의 예배당 안에 다시 십자가 상이 있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강조한다.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중요하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 형상이 우리에게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부디 십자가 형상으로부터 출그리스도께서 지셔서 구속을 완성하신 십자가를 믿는 신앙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길 원한다.

 

 

 

 

 

 

 

http://blog.daum.net/wminb/12275603

 

 

가져온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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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출처: 과학카페

 

 


작년 2월 본 블로그를 통해 일루미나티가 장악한 패션 업계가 성 혼합(Gender Blending)패션을 유행시키려 한다는 글을 올린 바 있다. 건장한 남자들이 예쁜 치마를 입고 런웨이를 걷는 남세스러운 사진들을 소개하였다.


관련글 >> “성 혼합(Gender Blending)” 패션이 유행할 것이다!



남자와 여자의 경계를 흐리게 함으로 결국 동성애(LGBT)를 확산시키려는 의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인데, 2015년에 이어 2016년에는 남자들의 머리땋기(Man's Braid)가 또 다른 유행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고 한다.








패션업계에 불고 있는 '성 혼합(Gender Blending) 패션'







2015'성 혼합(Gender Blending) 패션'에 이어 2016년 주목 받고 있는 남자들의 머리땋기(Man's Braid) - 남녀의 경계를 허물어 동성애를 확산시키려는 의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신명기 225절에서는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니라.하신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이 행위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 알아야 한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교황 "종교마다 하나님 만나는 길 달라… 종교 관계 없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는 방법은 종교마다 다르다고 말했다.
(Photo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는 방법은 종교마다 다르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불교, 유대교, 가톨릭, 이슬람 등 각 종교의 상징물을 들고 종교간 화합을 요청하고 있다.
불교, 유대교, 가톨릭, 이슬람 등 각 종교의 상징물을 들고 종교간 화합을 요청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6일(현지시간) 공개한 동영상을 통해 종교간 화합을 호소하는 한편 모든 종교인들이 평화와 정의를 위해 함께 대화하고 일하자고 요청하면서 기도를 부탁하고 나섰다.


그러나 종교마다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길이 다르다는 종교 다원주의적인 발언은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교황은 또 종교에 관계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동영상에는 불교 여승, 유대교 랍비, 무슬림 지도자, 그리고 가톨릭 신부가 등장한다. 이어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른 종교의 신앙인들을 만나고 기도했던 지난 발자취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교황은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앙인이라고 말한다"면서 "종교 간의 대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기도하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후 불교 여승인 린첸 칸드로(Rinchen Kandro)가 등장해 "나는 붓다(석가모니)를 믿는다"고 말한다.


이어서 유대교 랍비인 대니얼 골드먼(Daniel Goldman)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또 가톨릭 신부인 기예르모 마르코(Guillermo Marcó)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무슬림 지도자인 오마르 아보우드(Omar Abboud)는 "나는 알라를 믿는다"고 한다. 다시 등장한 교황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낀다"면서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는 방법도 다르다"고 말한다.


이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이렇게 다양한 종교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확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모두 신의 자녀라는 것"이라고 했다. 각각 "붓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알라를 믿는다"고 했던 네 명의 종교인들은 각각 "나는 사랑을 믿는다"고 말한다.


교황은 "나는 여러분들이 이번 달 나의 기도 요청을 퍼트려주기를 바란다"면서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의 진지한 대화가 평화와 정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서 "나는 여러분의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동영상은 끝난다.



출처: 재경일보 USA (http://www.jknus.com/)

짬뽕영성이 유행하는 시대 / 박영돈 목사

 

얼마 전 미국을 방문했을 때 책방에 들러 종교분야에서 베스트셀러로 팔리는 책들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 영성에 관한 책이 많았는데 대부분 기독교와 뉴에이지, 힌두교와 불교 등 잡다한 가르침이 혼합된 다원주의적인 영성을 소개하는 책이었다. 종교의 대상, 궁극적인 실체가 누구이든지 간에 우리 인간에게 행복과 유익을 안겨주는 존재라면 모두 환영한다. 그런 짬뽕영성에서 중요한 것은 초월적인 존재가 누구인지가 아니라 그를 통해 우리 인간이 얻을 수 있는 혜택과 실용적인 가치이다.

이런 실용주의 영성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미국제 영성에 깊이 배어있는 특성이다. 일찍이 실용주의 철학(pragmatism)의 대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다양한 종교체험(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s)”이라는 책에서 이런 실용주의적 영성을 주창하였다. 그는 다양한 종교체험과 현상을 분석함으로 참된 종교체험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탐구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진정한 영적 체험을 진단하는 척도는 그 대상이 누구이냐가 아니라 그 체험이 우리에게 미치는 결과와 열매, 실용적인 가치에 있다. 우리 마음에 행복과 평안과 안정감을 안겨주며 우리 삶에 도덕적인 변화를 가져다준다면 어떤 신이든 종교든 좋다는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의 책, “다양한 종교체험”은 1902년에 발간되었다. 세계 일차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서구사회는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더 살기 좋은 세상, 유토피아가 바야흐로 도래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역사관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러나 과학과 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더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된다고 인간이 행복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의식은 보편적이었다. 제임스의 책은 이런 불안감을 잠재우고 과학이 선사하지 못하는 마음의 행복과 평안을 누리는 길이 종교체험에 있다는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과학과 문화의 발전으로 행복한 환경이 주어질 뿐 아니라 영적인 체험을 통해 마음의 행복까지 누리게 된다면 유토피아의 환상은 실현되는 셈이다. 그러므로 각자 자신에게 맞는 종교와 신을 택해서 종교체험을 하라고 제임스는 권면한다. 결국 실용주의 영성의 목표는 자기실현을 통해 인간의 유토피아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영성의 골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이다. 영성의 핵심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실용적인 유익과 혜택을 얻어내느냐가 아니라 우리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이 어떤 존재이며 그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행하는 것이다. 물론 신앙의 실용성을 무시할 수 없다.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을 섬김으로 얻는 은택,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행복을 결코 분리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우선순위가 뒤바뀌거나 무시된다면 영성의 본질이 왜곡된다. 이렇게 실용주의적으로 변질된 영성이 현대교회에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런 영적인 토양에서 제 입맛에 맞는 잡다한 신들을 불러 모아 혼합시킨 짬뽕영성이 더욱 기승을 떨칠 것이다.

http://cafe.daum.net/churchinsejong/1T4Q/241

 

출처: 영적분별력/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방주에서 나온 자들

1년이라는 시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입니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2월 10일에 노아와 일곱 식구는 방주로 들어갔고 7일 후인 2월 17일에 홍수가 땅에 덮였습니다. 비는 40 주야를 내렸고 물이 더 많아져 150일 동안 창일하여 천하의 높은 산들이 다 덮였고 땅위의 모든 생물들이 죽었습니다. 홍수 5개월 후인 7월 17일(제헌절?)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10월 1일(국군의 날?)에 이르러서야 물에 잠겼던 산봉우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40일이 지난 다음이라니까 11월 10일 쯤(추수감사절 무렵?) 노아가 방주의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보냈으며 다시 비둘기를 내보내었더니 앉을 곳이 없어 되돌아왔고, 다시 7일 후에 비둘기를 내보냈더니 감람 잎사귀를 물고 왔고, 다시 7일 뒤에 내보냈더니 비둘기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여러 날들을 보내고 이듬해의 첫날, 곧 노아가 601세 되는 해 정월 초하루(설날)에 방주 뚜껑을 열고 보니 땅위의 물이 걷혔고, 다시 두 달 가까이 지난 2월 27일에 이르러서야 땅이 말랐고, 하나님께서는 드디어 노아의 가족과 방주의 모든 생물들에게 상륙을 허락하셨습니다. 참으로 길고도 긴 1년 하고도 17일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노아네 여덟 식구와 방주에 탄 모든 생물들에게 그 1년 17일의 시간은 어땠을까요? 온 세상이 홍수로 뒤덮인 가운데 그들만 구원을 얻었으니 기쁘고 감격스러웠을까요? 넘실거리는 물결 위에 두둥실 떠다니는 방주 안에서 그들은 구원감사 선상파티를 하면서 즐거워했을까요? 위로부터 한 규빗에 낸 창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방주 안이 밝았을까요? 방주 안에 기름과 향유로 등불을 밝히고 좋은 음식과 식사와 편안한 생활을 했을까요? 새들과 짐승들이 넓은 방주 안을 마음대로 다니며 놀았을까요? 식량은 충분하였을까요? 맛은 있었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밖을 내다볼 수도 없고,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낮과 밤도 구분하기조차 어려운 어두운 방주 안, 잣나무를 깎아 만든, 역청이 안팎으로 칠해진, 삼층(삼층천?)으로 나누어지고 간으로 막힌 방주 안의 좁은 공간에 갇혀서 그들은 갑갑함과 공포와 고통과 배고픔과 온갖 악취를 견디며 1년을 보내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들과 모든 생물들은 마치 곰이 동면(겨울잠)하듯이 그 안에서 죽은 듯이 지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방주 안이 난리법석이었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1년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죽음을 통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방주에서 나오는 날, 그들은 1년 17일의 죽음과도 같은 시간을 통과하여 마침내 새 생명을 얻은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1년 17일 동안 방주 안에서 견뎌내지 못 하고 다 죽었을 것입니다.

모든 죄인은 죽어야 합니다. 죄의 삯인 죽음을 피할 길은 없습니다. 구원은 죽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우리 대신 죽으심, 곧 참혹한 고통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노아의 방주는 나무로 만들어 석청을 발랐습니다. 십자가도 나무로 만들어졌고 거기에 주님의 피가 발라졌습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죽고 새 생명을 얻어 거듭났습니다. 그렇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예수님의 모형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방주 안에 있던 그들을 홍수가 씻어간 새 땅으로 나오게 하셨습니다. 다시금 생육하고 번성하라 하시며 복을 주셨습니다. 새 창조요, 새 피조물이요, 새 하늘과 새 땅과도 같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단을 쌓고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주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감격과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드린 번제를 흠향하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한 것을 아시면서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아니 하시겠다 약속하신 것은 그들이 새로워지고 달라져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거나 변화하지는 않았습니다. 달라진 그것은 그들이 방주에 들어갔다가 방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었다고 인간성이 달라지고 성품이 거룩하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어도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습니다. 확실한 달라진 것은 예수 믿었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그렇게 옮기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한 번 죄로 인하여 홍수를 당한 땅이 에덴동산 시절과 같이 온전히 회복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죄인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 받고 거듭났다 할지라도, 새로운 피조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해도 온전한 성품과 완전한 거룩함을 회복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이 예수 믿었다 하여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땅에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음 같이 성도의 앞길도 광야와 같은 연단과 환난이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쉬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들입니다.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않음 같이 이어지는 광야와 같은 연단과 환난의 길을 우리는 주와 함께 걸으며 그 앞에 서기까지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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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이자

동시에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이기도 한

옐로스톤(Yellowstone=황석공원) 국립공원은

그 명성에 걸맞게 볼거리가 무궁무진한 곳입니다.


드넓은 국립공원 거의 대부분이

화산 분화구인 것을 증명이나 하듯이

공원 곳곳마다 다른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간헐천(geyser)과 스프링(springs)들이 들끓고 있죠.


게다가 야생 버펄로와 늑대,

그리즐리와 블랙 베어(흑곰)가 공존하며

엘크와 무스, 프롱혼과 뮬 디어와 빅혼 쉽 등


황석공원은 그야말로

야생과 지질의 보고(寶庫)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대자연의 보물이죠.


황석공원엔

수많은 볼거리가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Old Faithful과 Mammoth Hot Springs입니다.



매머드 핫 스프링스는

황석공원의 가장 북단에 있는

황석공원의 대표적인 명소 가운데 하나입니다.


황석공원의 대부분 지역은

이르면 10월 중순, 늦어도 11월에는 닫히지만

매머드 HS는 유일하게 1년 4계절 개방되는 지역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Mammoth를 맘모스로 읽는 것은

일본식 발음이니 매머드라는 표준 발음으로 표기합니다.



매머드 핫 스프링스(이하 매머드 HS로 표기)는

황석공원의 북서쪽 관문인 가디너로부터 약 6마일의 거리에

올드 페이스풀(Old Faithful)에서 약 51마일(약 82km)의 거리에 있습니다.



1872년 3월 1일,

황석공원은 미국 최초의 국립공원이 되었지만


개발업자들과 밀렵꾼들,

그리고 기념품 수집가들로 인하여

황석공원은 여전히 몸살을 앓고 있었죠.


그래서 연방정부에서는

황석공원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1886년에 기병대를 파견하게 되는데


이들은 1916년,

NPS가 설립될 때까지

(NPS = National Park Service)

매머드 HS 지역에 머물면서 황석공원을 지키며 보호하는데


이들이 머물렀던 곳이

매머드 HS에 있는 Fort 옐로스톤입니다.


위의 사진의 산 아래쪽의

오른편 건물이 포트 옐로스톤입니다.



매머드 HS는

메인 테라스(Main Terrace),

로어 테라스(Lower Terrace),


그리고

어퍼 테라스(Upper Terrace),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매머드 HS의

방문자 센터에서 볼 때

낮은 쪽에 있는 지역이 Lower 이며

높은 쪽에 있는 지역이 Upper 테라스입니다.


메인 테라스는

로어와 어퍼의 가운데 있죠.



이 세부분의 테라스는

서로 비슷해 보이면서도

또한 각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위의 세 군데 테라스는

각기 또 다른 하위 테라스를 거느리고 있죠.



로어 테라스는

리버티 캡(Liberty Cap)과

미네르바 테라스, 팔레트 스프링(Palette),

그리고 오팔 테라스(Opal Terrace)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미네르바 테라스(Minerva Terrace)는

어떤 해는 스프링의 물이 마르기도 하다가

또 어떤 해는 다시 물이 흘러 넘치기도 합니다.


미네르바는

로마의 공예와 전쟁의 여신입니다.

미네르바는 그리스 여신 아테나(혹은 아테네)와 동일인이죠.



팔레트 스프링은

메인 테라스의 커네리 스프링과 더불어

매머드 HS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팔레트 스프링은

화가의 팔레트처럼

다양한 컬러를 지닌 아름다움을 자랑하죠.



일교차가 있는 봄 가을의 경우

테라스의 스프링 위로 수증기가 피어 오르는데

이는 테라스를 한층 더 신비스럽게 만들어주는 요소입니다.



빛의 세기에 따라서

같은 테라스라 할지라도

테라스의 컬러는 다르게 보입니다.



이곳의 사진은

대부분 9월에 촬영한 사진인데

여름에 찍은 7월의 사진에는 수증기가 보이지 않죠.


여름이라 할지라도

이른 아침이나 저녁 시간대에는

피어오르는 수증기를 볼 수도 있습니다.



매머드 HS의 각각의 테라스는

그 테라스 안에 수많은 스프링을 지니고 있습니다.


매머드 HS의 이런 스프링은

노리스 가이저 베이슨에서부터 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죠.


Norris Geyser Basin은

황석공원에서 가장 뜨거운 지역인데


노리스의 열과 물이

땅속의 단층선을 따라서

매머드 HS까지 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메인 테라스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머드 HS의 메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메인 테라스는

마운드& 주피터 테라스,

뉴 블루 스프링(New Blue Spring),


큐피드 스프링스, 캐너리 스프링,

드라이어드 스프링(Dryad Spring) 등이 있죠.



마운드 테라스(Mound Terrace)는

그 모습이 마치 유령처럼 보이기도 하고,

놀람과 고통으로 우는 사람의 얼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활동을 멈추어서

우울한 회색빛을 띠고 있지만


활동이 절정이던 1937년엔

가장 아름다운 컬러를 지닌 곳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큐피드 스프링 또한

아래쪽에 아름다운 스프링이 있었으나

지금은 활동을 멈추어서 그 흔적만 남아 있지요.


큐피드(Cupid)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사랑과 연애의 신이죠.



쥬피터 테라스는

지금도 계속 활동 중인데

보는 각도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쥬피터 테라스의

절반은 노란색으로,

나머지 절반은 하얀색으로 보이는 것이

마치 야누스(Janus = Ianus)같은 느낌이 듭니다. 


쥬피터(Jupiter)는

로마신화에 나오는 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에 해당하는 인물입니다.


그러고 보니

매머드 HS에는

로마 신들의 이름이 많이 붙어 있네요.



매머드 HS에서

팔레트 스프링과 더불어

가장 아름다운 곳이 바로 커네리 스프링입니다.



커네리(Canary=카나리아) 스프링은

한인들에게는 카나리아 스프링으로 알려져 있죠.


카나리아는

노래 소리가 아름다운 새입니다.


이곳 지형의 컬러가

카나리아의 샛노랑과 비슷해서

커네리(Canary) 스프링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카나리아 스프링은

가끔 활동을 중지하다가

다시 활동을 재개하곤 합니다.


2007년엔

갑자기 며칠 동안

모든 물이 말랐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활동을 재개했죠.


2009년엔

카나리아 스프링 전체가

물로 차고 넘치는 왕성한 활동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2010년엔 다시

스프링의 모든 물이 말라 버렸죠.

2014년에 다시 물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카나리아 스프링은

로어 테라스의 팔레트 스프링과

그 모습이 매우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지요.


팔레트 스프링과

카나리아 스프링은

매머드 핫 스프링스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명소입니다. 



로어 테라스와 메인 테라스는

차를 주차한 후에 걸어서 보아야 하지만

어퍼 테라스는 운전하면서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시간이 있다면

차를 주차한 다음에 찬찬히 둘러보면 더 좋겠죠.


어퍼 테라스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오렌지 스프링 마운드입니다.


약간 떨어져서 보면

마치 매머드처럼 생겼죠.



매머드 핫 스프링스의

아름다운 모양의 테라스와 독특한 컬러는

이곳이 왜 황석공원의 유명 명소인지를 말없이 대변해줍니다. 




사진과 글 : 미국 서부 사진여행 전문 가이드 주안(POWER 21)

이슬람을 방관하면 우리나라도 이렇게 된다.

 

이슬람을 방관하면 조만간 이렇게 됩니다!

아! 깊은 한숨과 탄식이 저절로 나옵니다!

 

  

우리 조국 대한민국에

근본주의 이슬람이 무섭게 몰려오고 있습니다.

 

다음의 두 장면은 대한민국의 대구부산에서

무슬림들이 대한민국 경찰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한쪽 도로를 완전 점거하며

열광적인 모습으로 전도행진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동영상의 제목을 보면 Dawateislami  Korea MILAD IN CITY DEAGU JALOOS 라고 되어 있습니다. Dawateislami 란 위키 백과사전을 검색해보면 다음과 같이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1980년대 초 이슬람의 근본주의 수니파(Sunni Islam)로서 파키스탄에 본부를 두고 있으며, 전 세계적인 여러 이슬람 교육기관이다. 창립자는 무하마드 일리야 카드리로서 주로 사회 정화, 도덕적 타락 방지, 금주, 도박 금지 등을 외친다. 영국에 약 1만 명 정도가 있다."


MILAD는 무하마드의 생일을 뜻하며, JALOOS 는 행진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Dawateislami  Korea MILAD IN CITY DEAGU JALOOS 란 이슬람 근본주의 선교단체 한국지부인 Dawateislami가 대구에서 무하마드의 생일날(기독교의 성탄절) 대구에서 전도행진을 한다는 뜻입니다.


표면적으로 이들은 사회 정화, 도덕적 타락 방지, 금주, 도박 금지 등을 외치며 알라를 포교합니다. 그러나 이슬람의 포교 전략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슬람은 한 국가에 진출할 때 무슬림의 인구 증가에 따라 다른 전술을 구사합니다. 그 전략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단계) 무슬림 인구 1% 내외

평화를 사랑하는 소수 그룹을 지향하며 수면 밑에 잠복한다 (한국).

 

2 단계) 무슬림 인구 2~3%

감옥 내 재소자들을 집중적으로 무슬림으로 개종시킨다 (덴마크).

 

3 단계) 무슬림 인구 5%

무슬림 인구비율을 더욱 높이기 위한 본격적인 전략이 시작된다 (프랑스).

 

4 단계) 무슬림 인구 20%

폭동사태가 시작되고 聖戰(지하드 / 온 세상이 알라의 것이 될 때까지

거룩한 전투-폭력, 문화, 법률, 금융-를 한다)위한 테러단을 조직한다.

 

단발적 살해사건이 발생하며 교회방화와 파괴가 시작됨(이디오피아).

(금번 파리 테러는 무슬림 인구 비율 8%에서 터졌다)

 

5 단계) 무슬림 인구 40%

광범위한 학살이 자행되고 상습적인 테러가 발생한다(보스니아).

 

6 단계) 무슬림 인구 60%

전혀 구속받지 않고 기독교와 다른 종교를 박해 탄압한다 (알바니아)

 

7 단계) 무슬림 인구 80%

국가 주도로 대규모 인종청소와 대학살이 자행된다(파키스탄).

 

8 단계) 무슬림 인구 100%

이슬람 율법이 헌법에 우선하는 신정일치 체제를 구현한다(아프카니스탄).

 


그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따르는 경전이 꾸란입니다.

    그 꾸란이 다음과 같이 명령하고 있습니다.

 

비무슬림들과 전쟁하여 그들이 복종하고 이슬람이 유일한 종교가 될 때까지 그들을 살해하라. _꾸란 8:39

 

출처: http://blog.daum.net/jdiss/6497227

 

동일한 이 구절을 국제번역인 http://quran.com/8/39 

에서는 아래와 같이 번역하고 있음을 봅니다.

??????????????????

Sahih International

And fight them until there is no fitnah and [until] the religion, all of it, is for Allah . And if they cease - then indeed, Allah is Seeing of what they do.

 

그리고 이슬람의 대적자(fitnah)가 없고 종교가, 그것의 모든 것이, 알라를 위한 것 [이 되기까지] 그들과 싸우라. 그리고 만일 그들이 그만두면 - 그때는 실로, 알라가 그들이 행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_꾸란 8:39 

 

알라와 그의 사자를 대적하고, 땅에서 불순종을 유포하는 자들은 살해 당하고, 혹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혹은 그들의 손과 발이 서로 다른 쪽으로 잘리고, 혹은 (그들이 살고 있는) 그 땅으로부터 추방을 당하는 것 외에 다른 형벌은 없느니라. 그것이 이 세상에서 그들을 위한 치욕을 안겨주기이고 내세에서의 그들을 위한 큰 형벌이니라. _꾸란 5:33

  

  

동일한 이 구절을 국제번역인 http://quran.com/5/33 

아래와 같은 번역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봅니다.

?????????????????????????????????????

Sahih International

Indeed, the penalty for those who wage war against Allah and His Messenger and strive upon earth [to cause] corruption is none but that they be killed or crucified or that their hands and feet be cut off from opposite sides or that they be exiled from the land. That is for them a disgrace in this world; and for them in the Hereafter is a great punishment,

실로, 알라와 그의 사자를 대적하여 싸우는 자들과 땅에서 타락 [시키기 위하여] 애쓰는 자들을 위한 처벌은 오직 그들이 살해를 당하거나 십자가에 못박히거나 그들의 손과 발이 반대쪽으로 잘려지거나 그들의 땅에서 추방당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느니라. 그것이 이 땅에서의 그들을 위한 치욕이고; 내세에서의 그들을 위한 큰 형벌이니라, _꾸란 5:33

 

※ 참고적으로 이상의 구절들에서 나오는

"불순종", "타락"이라는 말은

"이슬람의 교리에 맹종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단지 윤리적인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상기한 꾸란 8:39만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들의 목적에 따라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타끼야(taqiyya)"라는 사악한 교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꾸란의 많은 구절들은 “이슬람을 강화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라(꾸란3:26, 꾸란3:54, 꾸란9:3, 꾸란16:106, 꾸란40:28)”는 사악한 교리를 정당화하고 있답니다.

 

그들이 지금껏 전 세계에서 보여준 그대로, 그들의 숫자가 대략 20%정도로 많아질 때까지 그들은 자신들을 평화주의자요,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속이며 가증스럽게 행동해 나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한국에 무슬림 인구가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그들은 더욱 달라진 포교전략을 구사할 것입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위에 인용한 꾸란 8:39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꾸란 5:33과 같은 잔혹한 행위들을 서슴없이 자행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샤리야(이슬람법)가 온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라는 그들의 피켓시위를 보십시오.

 

 

서두에 게시한 "유럽의 이슬람화"에 관한 동영상의 말미에

정중하게 제시하는 바,

 

"유럽인들은 이슬람을 배울 필요가 없다.

무슬림들은 유럽사회문화를 배우고 존중하고

유럽사회에 통합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슬람국가로 돌아갈 자유가 있다."

 

이상과 같은 정중한 제안이 그들 무슬림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효과도 없다는 것에

이슬람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슬람은 선량한 여타의 종교들과는 전혀 다른

사악한 정치집단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신념(샤리아법)에 모든 세계를 굴복시키는 것만

유일한 목표인 사악한 정치집단이기에

그 어떤 대화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경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중동의 이슬람국가들과

이슬람을 허용해준 유럽의 현실들이

바로 그 점을 명확하게 증명해주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 무슬림 인구가 증가하면 결국 대구, 창원 등지에서의 Dawateislami  Korea MILAD IN CITY DEAGU JALOOS 는 다음과 같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아래의 사진들은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로 오인하여 아무런 경계심 없이 그들을 수용해 준 유럽 전역에서 지금 현재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현실들입니다. 

 

프랑스 군대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샤리아 법(이슬람법)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반기문은 테러리스트이다.

 

영국경찰은 지옥으로 꺼져라!


민주주의는 붕괴되고 샤리아가 돌아올 것이다.

샤리아를 공격하면 이슬람을 공격한 것이다.


샤리아(이슬람법)가 온 세상을 통치할 것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거부하며

단지 이슬람만을 원한다.


 이슬람이 전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유럽은 암적인 존재다. 이슬람만이 해답이다.

 

자유? 지옥에나 가라! 

 

 알콜로 인한 사망자들, 이것의 해결책은 샤리아법이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힘과 지혜를 총동원하여

이슬람 세력들의 한국상륙을 단호히 막아내야 하고

이미 들어와 있는 이슬람 세력들을 몰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유럽과 같은 가혹한 전철들을 되밟게 될 것입니다.




출처 : 이병천 카페 [성령전인치유목회] 원문보기   글쓴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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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코란에서 가르치는 이슬람의 13교리”라는 글이 인터넷 상에 떠도는데 이를 복사해서 재전송해도 괜찮겠느냐는 질문을 받은 일이 있다. 찾아서 읽어보니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긴 꾸란 구절들의 핵심부분만 따서 한 문장으로 요약해 놓았고 참고할 수 있는 꾸란 구절들까지 적어 놓았다. 이슬람의 율법을 기준으로 본다면 그리 틀린 말들은 아닌데 표현상 설명 없이 그대로 복사해서 전송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해 준 일이 있다.

 

그런데 모 신학대학 교수라는 분이 “그 코란의 구절들을 찾아서 확인해 본 결과, 내용이 사실과 다르고 이슬람에 대한 공포감과 혐오감을 확산시키기 위해 익명의 꼴통이 악의적으로 왜곡한 내용이더라”고 선언하고 나서서 혼란을 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 교수와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독교인들이 터무니없는 구설수에 말려들어서 비난 받는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봐서 원래 기독교인들을 모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한 의도에서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교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파급 효과가 너무 커서 균형 잡힌 견해를 밝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의도가 선했다는 것만으로 본의 아닌 실수에 대한 책임을 눈감아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보통 사람들이 최고 지성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대학 교수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글이 자칫 정설로 받아들여질 경우 하루가 멀다 하고 테러를 저지르고 있는 이슬람에 면죄부를 주는 동시에 기독교는 타종교에 대해 근거 없이 비난하는 종교라는 이미지가 고착될 수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그 순진한 교수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본인이 전공하지 않는 분야에 대해서 눈에 보이는 대로 훈수를 두는 일은 자제해 줄 것”을 간곡히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슬람에는 “타끼야”라는 특수한 교리가 있어서 이슬람을 보호하거나 지지하기 위한 거짓이나 위장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슬람 전문가가 아니면 그들이 만들어 놓은 미화된 거짓을 대신 홍보해 줄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열려 있다. 이분이 7세기 문어체 아랍어를 전공하지 않은 이상 꾸란의 한글 번역본만을 참고로 본문을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꾸란의 한글 번역본들은 정직한 번역이 아니라 심각하게 미화되고 왜곡되었다는 점을 미리 알았다면 그런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신실한 무슬림 학자들이 이슬람의 경전 꾸란을 제멋대로 미화시켜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자.

 

꾸란 4장47절을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읽히고 있는 최영길 역으로 인용해 본다.(역자는 이슬람의 신을 ‘하나님’으로 번역하고 있으나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꾸란 원문대로 ‘알라’로 정정해서 인용한다)

 

성서의 백성들이여 알라께서 계시한 것을 믿고 그 이전에 너희와 함께 있었던 것을 확증하라. 알라께서 그들의 명예를 거두고 그들을 후미로 돌렸나니 이는 알라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한 자들을 저주했듯 그들을 저주하도다. 알라의 명령은 항상 수행되노라.(최영길 역)

 

7세기 문어체 아랍어로 기록된 꾸란의 원문을 읽고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구절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나마 해설이 담긴 영역된 무신 칸 역이 원문의 의미에 가까워 직역해 본다.

 

오 성서를 받은 백성(유대인, 기독교인)들이여, 우리가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것을 믿으라, 그것은 (이미) 너희가 가지고 있는 것(신구약 성경)을 확증하는 것인데, 우리가 얼굴을 지우고(코, 입, 눈 등이 없는 뒷목처럼 만들어서)그것을 뒤쪽으로 돌려놓거나 안식일을 범한 자들을 저주한 것처럼 저주하기 전에 믿으라. 알라의 명령은 항상 수행되노라.(무신 칸 역)

 

여기서 꾸란은 신구약 성경을 확증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것은 일방적인 주장일 뿐 근거는 전혀 없다. 그리고 얼굴을 지운다는 단어는 타마사(tamasa)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종이에 쓴 것을 원래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지우개로 지운다는 뜻이다.

 

 

 

이런 구절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서 기독교인들을 잡아 묶어서 엎어 놓고 자동차로 끌고 다닌다. 그러면 아스팔트에 눈 코 입이 닳아 없어져 알아볼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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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뒤쪽으로 돌린다는 표현은 아드바리(adbari)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항문을 의미하는 저속한 단어이다. 얼굴을 지우고 그것을 항문 쪽으로 돌려놓는다는 의미는 참수해서 엉덩이에 머리를 올려놓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또한 안식일을 범한 자들을 저주한 것처럼 저주하겠다는 것은 무함마드가 메디나 부근에 살던 유대인들의 집단인 꾸라이자(Quraiza)족속을 공격하여 600~900명을 대학살하고 그들의 여인들을 무슬림 병사들에게 나눠주고 자신도 라이하나(Raihana)라는 유대인 여인을 성노예로 취한 장면을 상기 시킨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이 단순히 무함마드에게 계시한 꾸란을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와 유사한 잔악한 행위를 하면서도 죄의식이 없다. 그것은 이런 것을 명한 알라가 창조주가 되시고 심판주가 되실 뿐 아니라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보여준 행동모범 때문에 꾸란에 기록된 대로 실천하는 것이 지혜로운 행위이며 진정한 무슬림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구절만 더 살펴보자.

꾸란 3장54절이다.

 

그들이 음모를 하나 알라께서는 이에 대한 방책을 세우셨으니 알라께서는 가장 훌륭한 계획자이시니라.(최영길 역)

 

여기서 음모, 방책, 그리고 계획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 세 단어는 모두 마카라(makara)라는 아랍어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최영길 씨가 이두선씨와 공동으로 펴낸 아랍어 사전을 찾아보면 마카라(makara)는 “속이다. 기만하다”는 뜻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는 단어다. 자신이 만든 사전에는 속인다는 뜻 외에 다른 뜻이 없다고 써 놓고 자신이 번역한 꾸란에서는 그 단어를 방책, 계획으로 번역했다는 것은 분명히 의도적으로 속이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상기 교수의 행동은 미화 번역된 꾸란에 속아서 본의 아니게 그들의 꼭둑각시 노릇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문제가 된 꾸란의 13개의 교리에 대해서 지면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편견 없이 균형 잡힌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우선 첫째 항목: 사춘기 시작 안 한 여자 아이를 강간, 결혼, 그리고 이혼해도 된다.(꾸란65:4)

문제의 꾸란 65장4절을 보면 아래와 같다.

 

생리 기간이 끝나버린 여성이라도 너희가 의심할 경우는 그녀들을 위해 정해진 기간은 석 달이며 생리에 이르지 아니한 여성도 마찬가지라. 또한 임신한 여성의 기간은 출산할 때까지로 알라를 두려워한 자 알라는 그의 일을 편하게 하여 주시니라.

 

우선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꾸란65장은 이혼장으로서 이혼의 방법과 규례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슬람에서는 1절에 설명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혼할 때 법정기간(잇다:Iddah)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갑자기 이혼 당한 여인의 복중에 태아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세 번의 생리가 지날 때까지 남편의 집에서 기다려야 하는 기간을 말한다.(꾸란2:228) 문제의 본문 4절은 이 기간이 적용되는 여성들의 종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첫째는 생리가 끝나버린 여성도 3개월을 기다려야 한다. 생리가 진행 중인 가임 여성들은 세 번의 생리가 지날 때까지 임신의 기미가 없으면 그냥 내보내면 된다. 폐경기가 지난 여성은 생리가 없으므로 3개월 후 내보내면 된다는 말이다. 생리에 이르지 않은 여성들이란 아직 미성년자로서 생리가 시작되지 않은 소녀들을 의미하며 이들도 이혼 당한 경우는 3개월을 기다린 후 내보내면 된다는 것이다. 또 임신한 여인이 이혼 당했다면 출산과 동시에 내보내라는 것이 본문의 의미다.

 

여기서 생리에 이르지 않은 여성은 아직 초경을 시작하지 않은 여성을 말한다. 의학적으로 보면 초경은 빠르면 만 8~9세에 시작하는 경우도 있으며 보통은 10대 초반에 경험한다. 이런 어린애의 이혼을 말하는 것은 훨씬 더 어릴 때 결혼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50세 때 6세의 아이샤(Aisha)와 결혼했고 9세부터 합방을 했기 때문에 이슬람 율법에 의하면 여자의 경우 결혼 연령에 제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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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에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야파 이슬람권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권위의 지도자인 이맘 호메이니는 “여성들의 결혼에 연령제한은 없으며 합법적으로는 9세가 넘으면 결혼할 수 있다. 그러나 9세 이하의 어린이나 심지어는 젖먹이와도 결혼할 수 있으며 성행위는 금지되나 성행위를 했더라도 범죄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유아 성행위의 결과 성기가 파열되어 성불구가 된 경우는 평생 의식주를 해결해 주되 정식 아내의 숫자에 포함시키지는 않으며 그녀의 자매들과의 결혼은 금하라”고 했다.(Resaleye Imam Khomeini Tahrirolvasyleh. No.2375)

 

이러한 것을 일부 과격 이슬람단체의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이 이런한 범죄를 장려하기 때문이다.

 

꾸란의 가르침을 무슬림들은 사회적 법질서로 만들려고 한다. 일반적인 이슬람의 교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실 이런 것은 보통 사람들이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표현들이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이야기해 줘야 현실을 직시할 수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언급하게 되었음을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두 번째 항목: 다른 사람을 성노예와 노동 노예로 만들어도 된다.(꾸란4:3, 4:24, 5:89, 33:50, 58:3, 70:30)

여기서 대표적인 구절인 4장24절을 보자.

 

이미 결혼한 여성과도 금지되나 너희들의 오른손이 소유한 것은 제외라 이것은 알라의 명령이며 이 외에는 너희를 위해 허락이 되었으며 간음이 아닌 합법적 결혼을 원할 경우 지참금을 지불해야 되나니 너희가 그들과 결혼함으로써 욕망을 추구했다면 그녀들에게 지참금을 줄 것이라 그 의무가 행해진 후에는 쌍방의 합의에 의한 것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죄악이 아니거늘 실로 알라는 만사형통하심이라.(최영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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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소년에게 여장을 시켜 성적인 장난감으로 삼는다. 이들은 납치된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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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이미 결혼한 여성과 무엇이 금지된다는 말인가?

결혼한 여성과는 결혼이 금지된다는 말은 불필요한 사족(蛇足)이다. 이것은 성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 거기에 “오른손이 소유한 것”이라는 예외가 있는데 이는 전쟁포로나 하녀들을 말하는 것이다.(최영길 꾸란 137쪽 각주 참조) 비록 그녀들이 결혼을 했더라도 그녀들과의 성관계는 허락된다는 의미이다.(꾸란70:29-30) 이 문장 중에 “그들과 결혼함으로써 욕망을 추구했다면 그녀들에게 지참금을 줄 것이라”는 문장이 있는데 무신칸의 번역본에 보면 “성관계를 즐겼다면”이라고 정직하게 번역하고 있다. 이 경우 지참금을 줄 것이라는 말에서 지참금은 꾸란 원문에 오주르(ojoor)라는 단어를 썼는데 이는 품삯 혹은 수고비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전쟁포로나 하녀들과는 화대를 주고 성관계를 즐겨도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두 번 째 항목도 이상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세 번째 항목: 노예와 아내는 때려도 된다.(꾸란4:43)

 

이것은 꾸란 본문뿐만 아니라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인 youtube.com에 들어가서 'wife beating in Islam(이슬람의 아내 구타)'을 검색해 보면 아내를 어떻게 때리라는 지침까지 제시하는 이슬람 성직자들의 설교를 많이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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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란 최영길 역에는 “가볍게 때리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원문에는 ‘가볍게’라는 말은 없다. 타임지 표지 인물에 코와 귀를 잘린 아프간 여인의 사진이 실렸었는데 그 여인을 가해한 남편을 찾아서 처벌했다는 소리를 들은 일이 없다. 하디스에 보면 무함마드는 “남편이 자기 아내를 때릴 때 제3자는 왜 때리느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Abu Dawood Book 11, Number 2142)”고 했는데 이는 이슬람권의 율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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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이슬람 율법에 의해 수많은 여성들이 가정폭력에 희생되고 있지만 가해자인 남편을 처벌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관련기사 : "며느리 목자르기는 예사, 개만도 못한 무슬림 여인들의 삶"

 

 

네 번째 항목: 강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4명의 이슬람교 남성이 필요하다.(꾸란24:4)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이슬람의 제2의 경전이라는 하디스에 있다. 무함마드가 50세 때 취한 6세의 아내 아이샤(Aisha)에 관한 것이다. 아이샤가 너무 사랑스러운 나머지 무함마드는 그녀를 전쟁터에까지 데리고 다녔다. 전쟁터에서 목걸이를 찾다가 철군 대열에서 낙오된 아이샤를 사프완(Safwan ibn al Mu'atill)이라는 무슬림 청년이 발견하고 낙타를 태워 모시고 왔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이 청년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는 것을 목격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아이샤는 억울하다고 울고 있고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율법대로 아이샤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때 무함마드는 아이샤를 구하기 위해서 “간음죄를 정죄하면서 4명의 증인을 제시하지 못하면 80대의 태형으로 다스릴지니라”는 계시가 내려왔다고 했다.(꾸란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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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실제로 이슬람권에서는 강간당한 여성들이 법에서 요구하는 4명의 증인을 제시하지 못해 오히려 처벌 받는 일이 허다하다. 여성 2명의 증언은 법적으로 남성 한 명의 증언과 동등하기 때문에(꾸란2:282) 여성 5-6명의 목격자가 증언을 해도 증거 불충분으로 가해자는 석방된다. 그래서 피해자가 임신이 되면 가족들이 그 수치를 견디지 못해 피해자를 죽여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소위 “명예살인”이라고 한다. 이슬람권에서는 매년 평균 5천여 명의 여인이 명예살인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이런 기본적인 사실도 모르면서 이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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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항목: 유대인과 기독교인이 이슬람교로 안 바꾸면 그들을 죽이던지 세금을 내게 한다.(꾸란9:29)

 

이교도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죽이고(꾸란9:5)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은 지즈야(Jizya:인두세)라는 무거운 세금을 부과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며 이는 꾸란도 증언하고 있다.(꾸란9:29) 인두세는 1인 당 얼마씩 계산되는 세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목을 자르지 않는 대가로 지불하는 특별세금이다. 영어로는 head tax(머리 세금) 또는 neck tax(목 세금)라고도 하는데 통치자에 따라서 인두세를 내지 않으면 가족들을 체포해서 시장에 노예로 팔기도 했다. 인두세를 내고 2등시민으로 사는 사람들을 딤미(Dhimmi)라고 불렀는데 이 딤미 제도는 19세기 까지 계속되었다.(Wikipedia:Jiz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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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항목: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든지 손과 발을 절단시켜라.(꾸란8:12, 꾸란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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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항목은 다른 꾸란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꾸란8:12절에는 알라께서 불신자들을 두렵게 할 것이니 너희는 그들의 목을 치거나 손가락을 잘라버리라는 내용이 있고 꾸란 47:4절에는 목을 쳐 죽이든지 포로로 잡아 몸값을 받고 풀어주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십자가나 손발절단에 관해서 나온 구절을 인용하자면 아래 구절이 더 적합하게 보인다.

 

실로 알라와 선지자에 대항하여 지상에 부패가 도래하도록 하려하는 그들은 사형이나 십자가에 못 박히거나 그들의 손발이 서로 다르게 잘리우거나 또는 추방을 당하리니 이는 현세에서의 치욕이며 내세에서는 무거운 징벌이 그들에게 있을 것이라.(꾸란5:33 최영길 역)

 

이 구절에서 “알라와 선지자에 대항하여 지상에 부패가 도래하도록 하려하는 그들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비무슬림들을 말한다. 손발이 서로 다르게 잘리운다는 말은 오른손을 잘랐으면 왼발을 자르고 왼손을 잘랐으면 오른발을 자르라는 말이다. 이를 현세에서 불신자들이 당하는 치욕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구절은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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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란 앞에서 손을 잘랐다. l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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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발이 잘린 소년 link

 

 

일곱 번째 항목: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을 죽이면 천국에서 72명의 처녀를 상으로 받는다.(꾸란9:111)

 

꾸란111절은

“알라께서는 신자들의 생명과 재산을 낙원을 주고 사셨다. 그들은 알라를 위해서 죽이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했노라. 이것은 신약과 구약과 꾸란에 기록된 진정한 약속이니라. 누가 알라보다 약속을 더 잘 지키겠느냐? 그대들은 거래로 인하여 기뻐하라. 그것은 최고의 성공이니라.(무신칸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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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무슬림들의 생명과 재산을 받고 낙원을 제공하는 알라의 거래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자살폭탄테러를 할 때 알라가 위대하다고 외치면서 감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낙원에는 많은 배우자(huris)들이 있다는 것이다.(꾸란55:56, 74) 후리(huris)라는 단어는 최영길역 한글 꾸란에는 ‘배우자’라는 단수로 번역되었지만 이는 무슬림들의 쾌락을 위해서 최고로 아름답게 창조된 많은 특별한 피조물들이다. 꾸란에 보면 이들에 대해 가슴이 풍만하다거나 눈이 검다는 등 아름답게 묘사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이들의 숫자가 72명이라는 것의 근거는 인터넷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Wikipedia:72virg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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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번째 항목: 이슬람교를 떠나는 사람은 죽여라(꾸란2:217, 꾸란4:89)

 

현재 이슬람권의 최고의 학자들 중의 한 사람인 유수프 알 가라다위는 “배교자를 죽이라는 율법이 없었다면 이슬람은 초기에 없어졌을 것이다.”고 방송에서 고백하는 장면이 동영상으로 올려져 있다.(https://www.youtube.com/watch?v=huMu8ihDlVA) 그렇지 않다면 왜 개종자들이 공개적으로 개종했음을 알리기를 두려워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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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항목: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들은 목을 베어 죽여라.(꾸란8:12, 47:4)

 

김선일 씨 참수 사건 때 한국의 무슬림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꾸란에 사람 목을 잘라 죽이라는 말은 없다고 인터뷰했다. 그러나 꾸란8장12절에는 불신자들의 목을 치고 손가락을 자르라고 명하고 있고 꾸란47장4절에는 불신자들의 목을 베고 많이 죽였으면 포로로 잡아 묶어 놓고, 은혜로 풀어주던지 또는 돈을 받고 풀어주라고 명하고 있다. 한글 꾸란에는 ‘전쟁에서’라는 말을 삽입했는데 꾸란 아랍어 원문에는 전쟁이라는 말이 없다. 

 

“할 수 있는 대로 군대와 말을 동원하여 알라와 너희의 적들과 위선자들을 위협하라. 너희가 바친 하찮은 것이라도 정당한 보상을 받으리라” (꾸란 8장6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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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이 아르메니안 기독교인들의 목을 자른 영상 출처 :  Theodore Shoebat

 

 

 

무슬림의 인간도축 형장 In another interview, a survivor named Saif Al-Adlubi

 

 

열 번 째 항목: 알라신을 위해서 죽이고 순교하라.(꾸란9:5)

 

본문은 꾸란 9장5절보다는 9장111절이 이해를 돕는데 더 적합할 것이다.(일곱 번째 항목 답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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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번째 항목: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들을 위협하라.(꾸란8:12, 꾸란8:60)

 

꾸란 8장60절에 보면 분명히

“군대와 말로써 너희가 할 수 있는 한 그들에 대항할 준비를 하라 하셨으니 그것으로 하나님의 적과 너희들의 적들과 그들외의 다른 위선자들을 두렵게 하라 너 희는 그들을 알지 못하나 하나님은그들을 아심이요 너희가 하나님 을 위해 바친 하찮은 것이라도 그릇됨 없이 정당한 보상을 받노라"

고 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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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슬림은 이슬람을 존중하지 않는 비무슬림을 죽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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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국가인 이란에서 독주사로 개들을 죽이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물론 이는 "믿지 않는 자에게 함부로 해도 된다"는 꾸란의 근거한 것이다. (번역 : 출처링크 )

 

 

열두 번째 항목: 이슬람교가 아닌 사람들을 훔쳐라(꾸란8장)

 

꾸란8장은 전리품의 장이다. 이슬람은 전쟁의 종교인데 처음에는 모든 전리품은 알라와 선지자(무함마드)의 것이라고 하다가(꾸란8:1) 점점 전리품이 많아지자 5분의 1만 선지자의 것이라고 말했다. 이슬람에서 전쟁(Jihad)이란 초기에 힘이 없을 때는 방어를 위한 것이었지만 후기에 세력이 커지고 나서는 비무슬림들을 알라의 적으로 보고 이슬람의 확산을 위해서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무슬림들이 비무슬림들을 죽이고 그들의 재산이나 아내나 딸들은 취해서 나눠가졌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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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번째 항목: 이슬람을 강화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하라(꾸란3:26, 꾸란3:54, 꾸란9:3, 꾸란16:106, 꾸란4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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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극장 테러 이후 한 무슬림이 "테러는 이슬람이 아니다"는 패킷시위를 하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 테러 이전에 이미 이슬람 사원에서 무기가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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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이슬람사원에서 AK소총 탄창, 프로파간다 비디오 대거 발견

 

 

 

이는 이슬람의 타끼야(taqiyya)라고 한다. 이를 입증할 꾸란 구절은 2장225절이 더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알라께서는 너희의 맹세 속에 비의도적인 것에 대해서는 책망하시지 아니하시나 너희 심중에 있는 의도적 맹세는 책망하시니라. 알라는 관용과 은혜로우심으로 충만하심이라.(꾸란2:225 최영길 역)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본인만 아는 것이다. 아무리 맹세를 했어도 비의도적이었다고 하면 알라가 용서하신다니 이것이 허가된 거짓말이 아니고 무엇인가? 꾸란에 이혼의 방법을 가르치는 이혼장(65장)이 있는데도 이슬람에서는 죽을 때까지 이혼이 안 된다고 방송하는가 하면, 이슬람의 이름으로 매일 테러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회만 있으면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로 미화시키며 거짓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열세 가지 항목은 이슬람의 내부 자료를 통해서 얼마든지 입증할 수 있는 내용들이라는 점이다. 비록 인용된 꾸란 구절이 항목에서 표기된 내용과 정확하게 일치되지 않는 부분이 혹시 있을지라도 각 항목의 내용은 이슬람의 경전 꾸란과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나 무함마드의 생애를 통해서 보여준 행동모범에 의해서 실제로 있었고 지금도 이슬람권에서 적용되고 있는 사실들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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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바라기는 이미 유명해지신 모 교수님께서는 올려놓으신 글을 삭제하시고 대신 솔직하게 이슬람을 잘 몰라서 그랬다는 사과의 글을 올리시는 것이 어떠실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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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만석 선교사 | 한국이란인교회 담임목사 | 이슬람전문가 | 한장총 이슬람선교훈련원장

출처 : 한국이란인교회 홈페이지

 

 

 


 

 

 

"교자이의"(敎子以義)

 

 

호조판서 김좌명이 하인 최술을
서리로 임명해 중요한 자리를 맡겼다.

 

얼마 후 과부인 그의 어머니가 찾아와
그 직책을 떨궈 다른 자리로 옮겨달라고 청했다.

 

 

이유를 묻자 어머니가 대답했다.
"가난해 끼니를 잇지 못하다가

대감의 은덕으로 밥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중요한 직책을 맡자 부자 집에서 사위로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처가에서 뱅엇국을 먹으며

맛이 없어 못 먹겠다고 합니다.

    열흘 만에 사치한 마음이 이 같으니
    재물을 관리하는 직무에 오래 있으면

    큰 죄를 범하고 말 것입니다.

     

     

    외아들이 벌 받는 것을 그저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일을 시키시면서 쌀 
    몇 말만 내려주어 굶지

    않게만 해주십시오".
    김좌명이 기특하게 여겨 그대로 해주었다.

    '일사유사(逸士遺事)'에 나온다.

     


    정승 남재의 손자 남지가 음덕으로 감찰이 되었다.

    퇴근하면 할아버지가 그날 있었던 일을 자세히 물었다.

     

    "오늘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급 관리가 창고에서 비단을 슬쩍 품고 나오기에
    다시 들어가게 했습니다.

    세 번을 그랬더니 그제야  눈치를 채고

    비단을 두고 나왔습니다".

     

     

    할아버지가 말했다.
    "너같이 어린 것이 관리가 되었기에 매번 물어

    득실을 알려 했던 것인데, 이제 묻지 않아도 되겠다."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에 있다.

     


    자식이 윗 사람에게 잘 보여

    월급 많이 받는 좋은 직장에 취직했다.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녀도 시원찮은데,
    자식의 마음이 그새 교만해진 것을 보고

    어미가 나서서 그 자리를 물려주기를 청했다.

     

     

    어린 손자가 못 미더워 날마다 점검하던 할아버지는
    손자의 심지가 깊은 것을 보고서야 마음을 놓았다.

     

    어미는 자식이 죄짓게 될까 걱정했고,
    할아버지는 손자가 집안과 나라에 누를 끼칠 것을

    염려했다.

     

    자식이 올바른 길로 가게 가르치기(敎子以義)가

    쉽지 않다.

     

    잘못을 저질러 혼이라도 내면
    부모가 학교로 찾아가 선생을 폭행하고 난동을 부린다.

     

    떼돈 번 부모가 수억원짜리 스포츠카를 사주고,
    자식은 그 차를 몰고 나가 남의 목숨을

    담보로 도심에서 광란의 질주를 벌인다.

     

    발 좀 치우라고 했다가 지하철에서
    20대가 80대 노인에게 쌍욕을 해댄다.
    눈에 뵈는 것이 없다.

       

      무슨 이런 세상이 있는가.
      이렇게 막 자라  제 몸을 망치고,

      제 집안을 말아먹고,

      나라에 독을 끼친다.

        밖에서 하는 행동거지를 보면
        그 부모가 훤히 다 보인다.

        -조선일보에서 발췌-

        <정민의 世說新語, 한양대교수, 고전문학>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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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망 최송연/詩 캄캄한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 한 개를 줍습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에서 따뜻한 등대의 불빛을 찾습니다. 바싹 메마른 사막에서 새빨간 선인장 꽃 한송이 피워냅니다. 십자가 위에서 흐르는 그리스도의 피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줍니다. 소망은 손으로 만지는 것 아니고 눈으로 보는 것 아니며 귀에 들리는 소리도 아닙니다. 그는 고난의 밤과 흑암의 저 너머에 언제나 새날과 새 아침이 있음을 굳게 믿는 이들에게 미소로 찾아와 주는 천사입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소망

         

                       최송연/詩  
         
        캄캄한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 한 개를 줍습니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에서
        따뜻한 등대의 불빛을 찾습니다.
         
        바싹 메마른 사막에서
        새빨간 선인장 꽃 한송이 피워냅니다.
         
        십자가 위에서 흐르는 그리스도의 피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줍니다.
         
        소망은
        손으로 만지는 것 아니고
        눈으로 보는 것 아니며
        귀에 들리는 소리도 아닙니다.
         
        그는
        고난의 밤과 흑암의 저 너머에
        언제나 새날과 새 아침이 있음을
        굳게 믿는 이들에게
        미소로 찾아와 주는 천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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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dam씨가 1950년대에 촬영한 칼러사진!

        아래의 사진들은 6.25전쟁 직후인 1954년 교회 봉사활동을 위해 한국에 머물렀던 ‘아담’이란 미국인이 촬영한 칼라 사진들로서, 재미 유학생(정찬권)에 의해 발견돼 세상에 공개된 소중한 역사적 자료입니다.

        자료 입수 정찬권(미국 유학생)
        http://blog.naver.com/texasatm...2007.02.06

        1주일 전에 아내가 영어를 배우러 다니는 미국 교회의 Adam이란 할아버지 선생님의 저녁 초대가 있었습니다.

        한국인들만 초대하는 저녁식사였습니다.
        전에 한국에 가본 적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방문을 했었습니다. 처음엔 Adam의 나이 79세, 우리나라로 따지면 80이었다는 것에 잠시 놀랬습니다. 80세의 나이에도 volunteer로 교회에서 외국인을 위한 영어수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6.25남침전쟁이 끝나고 복구가 한참이었던 1954년부터 1955년까지 대구에서 2년간 교회의 봉사활동을 자원해서 한국에 왔었다고 하면서, 그 당시 찍었던 귀한 한국의 사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대구를 들어가면서 찍은 대구의 표지판입니다. 그 당시에도 사과가 유명했군요. 백두산 가는 길을 사랑하자라는 말이 묘한 느낌을 가지게 하네요.



        소시장의 풍경입니다... Adam 아담에게 인상 깊었던 한국의 모습은
        모두가 검은 머리에 하얀 옷을 입었다는 거였다고 합니다. 과연 장 마당 가득 찬 사람들 모두 흰 옷이군요.



        Adam 아담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 중 하나인 한국 노인분들의 담배 피는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Adam 아담 할아버지의 집 벽에 걸려 있던 사진입니다. 
         


        시장의 한켠...



        구호물품인 옷가지를 받아 가시는 아주머니와 등에 업힌 귀엽게 생긴 아이의 모습입니다.



        추수를 하는 들판의 모습입니다. 전
        쟁때문이었는지 산에 나무가 없이 벌거벗은 모습이군요.



        추수를 도와주고 있는 Adam 아담의 젊은 시절 모습입니다.
        Adam은 지게에 대하여 무거운 짐을 지어도 힘들지 않게 설계된 아주 훌륭한 물건이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래 보이는 세 사진은 피난민촌의 사진 입니다. 붙어 있는 판자집들의 모습과 무쇠솥에 데우고 있는 분유를 기다리는 아이들, 피난민촌에 자주 일어났다던 화재의 모습입니다.







        피난민촌의 모습!
        붙어 있는 판잣집들, 무쇠솥에 데우고 있는 분유를 기다리는 아이들, 피난민촌에 자주 일어났다던 화재 후의 모습.



        줄을 서서 분유를 기다리는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Adam 아담의 기억하나는 그 당시 한국인들은 우유를 잘 소화시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잘 모르고 진하게 분유를 주었다가 모두가 배탈이 나, 한동안 우유 배급을 거부했었다는 일화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공 화덕에서 분유를 더운 물에 타고 있는 모습입니다.
        피난민촌에서 우유를 받아 마시고 있는 아이들. 사실 지금은 70대 초반은 되었을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어린 여자 아이가 무거워 보이는 한 푸대의 Charcoal(숯?)을 이고 가는 모습



        현재의 Adam 아담과 아내 Alice 앨리스의 모습입니다. 한국에 갔을 당시 의대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자원 봉사를 나간 곳이라 합니다. 이후 몇 나라를 더 돌아 다니다가 UTMB(University of Texas Medical Branch)에서 의사 및 교수를 하다가 지금은 은퇴를 하고 교회에서 외국인들을 위한 영어수업 등의 봉사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서재에는 그동안 다녔던 30여개국이 넘는 나라들의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대해서는 너무 오래된 기억들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해서 몇장의 지금의 한국 사진과 영상을 보여 주었더니 한번 가보고 싶은데, 나이가 많아서 이젠 여행하기 힘들 거라며 웃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의 빛 바랜 칼라사진들이 묘한 느낌을 가지게 하네요.

        100여장이 넘는 한국전쟁 후의 대구의 모습들이 있었습니다만,
        블로그 한 페이지에 올릴 수 있는 양이 한정되어 일단 몇 장만 올려 봅니다. 올라와 있는 모든 사진은 Adam이 사용을 흔쾌히 허락해 주었습니다. 두 번째 1954년 대구의 사진들입니다. 싸구려 필름 스케너를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130장 정도의 슬라이드 필름을 스켄하는데 5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학생인 저로서 5시간의 투자는 큰 것이죠, 물론 50년동안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던 Adam에 비하면 새발의 피겠지만요.



        왼쪽이 Adam이고 오른쪽은 친구인 burkholder라고 써 있네요.
        Jeep 찝 차를 타고 가다가 전복 사고를 당한 후 대구의 한 군병원에서 치료 후 기념으로 찍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사진과 비교했을 때 눈빛이 강렬하군요.



        미국 원조물품이 도착하자 학생들이 거리에 나와 현수막을 들고 환영하고 있는 모습.



        이 사진은 전쟁고아들을 위한 행사라고 하는데
        고아가 아닌 듯한 사람들도 많이 보이는군요.



        Outdoor Meeting 야회 집회라고 써있는 사진입니다.
        Adam 아담의 말대로 모두가 검은 머리에 흰옷을 입었습니다.



        대구 복현동 부근 고아원 어린이들이 달성예배당 앞에서 선물을 받은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뒤편 멀리 보이는 붉은 건물은 경북대 과학관이며 꽃다발을 들고 서있는 사람이 Adam씨이다.



        Adam의 목에 걸린 사진기가 이 대부분의 사진들을 찍은 사진기입니다.
        기종이 뭔지 저는 잘 모르겠군요. Adam 아담은 저 한복을 입은 여자 아이가 인상 깊었다고 합니다.



        좀 사는 집 자제분들 같군요.. 비로도(?) 치마와 양장(?)을 한 자매들입니다.



        피난민촌의 우유를 마시는 또다른 사진이군요.
        개인적으로 사진속 분들의 지금 근황들이 궁금해집니다.



        사진의 제목이 'boy wearing only rubber shoes' 입니다.
        신 외에는 아무 것도 걸친 것 없는 벌거벗은 아이. 요즘은 보기 드물지만 제 어렸을 때도 저러고 다니는 아이들이 종종 있었던 기억이.



        그 당시 보기 드물었을 거 같은 직업여성이군요...교통정리 아가씨....멋지네요.



        Adam의 사진중 유일한 흑백사진인 김치독들의 사진입니다.
        공동으로 사용한 장독대 같은데 그 당시에는 남의 것 슬적 하는 일은 없었는지 궁금해지는군요.



        돼지 팔러 장터로 가는 한 아저씨의 사진입니다.



        사진속의 아가씨는 Louis Khans 루이스 칸스 라고 하네요.
         서양 자동차와 서양 아가씨의 모습에 동네 아저씨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좀 민망한 듯한 모습으로 사진을 찍었네요.



        대구에 있는 한 유치원 이라고 합니다... 일본식 건물이 눈에 띄는군요.
        그래도 저기 계신 분들은 그 당시 여유가 있으신 분들의 자제들이겠군요.



        마을에 있는 공동 화로에서 분유를 데우고 있는 사진입니다.



        놀이터 사진입니다.



        소시장에서 소의 상태를 보시는 아저씨의 미소가 좋아보입니다.



        소시장에서 만난 큰 모자(삿갓)를 쓴 아저씨가 Adam의 눈에는 신기해 보였다고 합니다.



        또 다른 소시장 사진의 담배대를 파는 상인입니다.



        유치원 사진이라고 써 있네요.



        분유를 데우고 있는 모습.



        피난민촌에서 분유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들.


        피난민촌의 전체 풍경.

         

        분유 배급중입니다.

         

        이 사진에는 부산이라고 써 있네요. 어딘지는...



        정확히 상표는 모르겠지만 빈 맥주켄을 사용하여 만든 지붕입니다.



        전쟁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는 사진입니다.



        군용트럭을 이용해 구호품을 많이 날랐다고 합니다.
        60트럭과 디자인은 같은데...
        저도 군대시절 운전병이라 60 몰았던 기억이...(제3야수교출신 ㅡㅡ;)

        장터로 가는 길일까요? 흰 옷의 행열!

        갓에 도포를 두른 할아버지와 포대기에 아이를 업은 어머니...



        구호물품 중 옷을 받기 위해 모여 있는 모습입니다.

         

        평온해 보이는 농가의 풍경....



        모내기를 하는 건지 모종을 관리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1954 대구에서 2007 Galveston 으로.. KOREA 2007/02/09 17:29 

        참 정신 없던 지난 몇일이었습니다. 아는 사람들만 찾아오던 한적한 제 블로그를 들어간 3일전 믿을 수 없는 방문 횟수에 네이버에 오류가 생겼나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인터넷 신문에 제 블로그가 올라간 것을 알게 되었고 첫날 2500명 이상의 사람들, 둘째날 1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찾아 주었습니다.

        사진을 보면서 느낄 수 있었던 말 못할 감정을 어설픈 제 블로그에 올리자 많은 사람들이 찾아준 것입니다. 수많은 방문과 댓글... 다행이 악플 하나 없는 댓글과 Adam선생님에 대한 감사 인사, 사진을 올린 저에 대한 격려로 아내와 저는 많이 흐믓해 했습니다. 그런중에 대구의 매일신문과 대구KBS에서 연락이 왔고 먼저 저에게 연락을 하신 매일신문의 사진부 안기자님에게 사진과 내용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참 보기 힘든 우리나라의 근대사 사진, 더군다나 컬러인 사진... 맘 같아서는 1954년 이후 한국을 잘 모르시는 Adam선생님을 한국에 초대하고 싶었으나,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아직 학생 신분인 저의 입장이...한국 사람의 방문이 많지 않은 이곳 Galveston에서 기회가 있으실 때마다 한국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으셨고, 한국의 발전을 보고 듣고 싶으셨다고 합니다.

        제가 할수 있었던 건 몇 장의 최근 한국 사진과 관광공사 홈페이지에 올라온 짧은 홍보 영상물을 DVD에 녹화해 댁에서 보여드리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매일신문사에서 온 감사편지를 프린트해서 보여드렸습니다. 



        이 공돌이가 리포터 흉내를 내며 인터뷰 하는 사진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을 서재에서 보여드리고 설명하는 모습입니다.
        아뿔싸... 모뎀을 쓰고 계셨습니다... 한 페이지 보는데 10분 이상...



        이날 인터뷰를 같이 한 동네 한인들과 함께 한 사진입니다. 
        다시 한번 Adam 아담과 Alice 앨리스에게 감사 드립니다.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참 욕심 없으시고, 검소한 삶을 사시는 분들입니다. 

        관련기사 - 대구매일신문 (2007년 2월)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402&yy=2007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763&yy=2007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164&yy=2007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7165&yy=2007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세계적인 희귀새 

         

        세상에 14마리만 있는 희귀새 인도  

        하지바우 코우 일본동물원 

        블츠오톡 (걸래같은새) 

         

        세계에서 가장 희귀한 뉴질렌드 앵무새 카카포 

         아쌈희귀새

        코뿔새 남미 희귀새

         

         

        파란앵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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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라코새 

         

        세계적인 희귀새에유 

        따오기 

        거대 벌레잡이 풀 '네펜데스'가 새를 잡아먹고 있음




            가끔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받고도 그것이 기도의 응답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상했던 방식으로 기도의 응답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응답을 깨닫지 못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큰일을 이루고 계시는데도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기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욕심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진실하심과 선하심을 찾는 자세를 갖는다면 당신의 삶은 변할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전과는 다른 시각에서 상황을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스토미 오마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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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을 것인가, 아니 믿을 것인가?

         

        그러니까 170 여년 전입니다. 뉴욕의 침례교회 평신도였던 윌리엄 밀러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을 연구하고 날수를 계산하여 마지막 날이 1844년에 온다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추종자들과 함께 흰옷을 입고 산에 올라가 휴거를 기다렸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윌리엄 밀러의 추종자들과 엘렌 지 화이트는 기존교회를 이탈하여 1860년 무렵 제칠일안식일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제칠일안식일교회는 1905년 무렵 한국에도 전파되어 오늘날 삼육재단, 삼육병원, 삼육대학, 삼육두유 등과 함께 20만이 넘는 신도를 가지고 있으며 이 제칠일안식일교회 교인들은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고 믿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92년에도 한국이 시한부종말론으로 떠들썩했습니다. 이장림씨가 주도한 다미선교회 신도들은 흰옷을 입고 1992년 10월 28일 자정을 맞이하였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정작 이장림씨 자신은 종말을 믿지 않고 신도들이 헌납한 돈을 챙기고 1993년 5월 만기의 사채까지 사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에 검찰은 이장림을 사기혐의로 입건하였습니다. 2012년에는 미국을 비롯한 온 세계가 다시 종말론에 휩싸였습니다. 이번에는 고대 마야인의 달력이 2012년에 끝난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불안에 떨었고 갖가지 소설들과 ‘딥 임팩트’, “2012년” 같은 영화까지 나오고, 미국에서 전국적 네트워크를 가진 패밀리라디오 헤럴드 캠핑 목사님은 노아의 홍수사건에 나오는 날짜들을 가지고 2012년 10월 21일이 인류의 종말이 될 것이라고 또다시 예언하였으나 아무 일 없이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무 일 없었다고 하여 심판도 없고 종말은 영영 아니 올까요? 심판과 종말은 있습니다. 반드시 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 시기를 알지 못 할 뿐입니다. 천사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십니다.

        노아의 홍수에 관하여는 논쟁이 많습니다. 과연 노아의 홍수가 실제로 있었는가에 의구심을 가진 사람도 있고, 노아의 홍수사건이 실제의 사건이었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어떤 과학자들은 지구 전체에 노아의 홍수를 일으킬 만큼의 물이 없다고 말하고, 어떤 학자들은 지구상 곳곳에 홍수의 흔적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랜드캐년이 수천만 년에 걸친 침식작용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일시에 흘러내린 엄청난 홍수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터키의 해발 5,160 미터의 아라랏산 해발 4,000미터 기슭의 만년설 아래에서 노아의 방주가 발견되었다는 보도가 촬영된 영상과 함께 구체적으로 보도되기도 했는가 하면 이를 착오이거나 조작된 것일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진리는 분명 하나일 텐데 인간들은 왜 다른 시각과 다른 견해들을 가지고 다투는 것일까요? 세상에는 왜 속 시원한 대답과 증거는 없고 온갖 추측과 주장과 대립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이러한 혼란과 다툼들을 보고만 계시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노아의 홍수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종말의 예표입니다. 세상이 노아의 홍수를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의 증거가 분명하게 보이게 하시지 않으신 것은 믿음을 원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입니다. 믿는 자는 아니 보여도 믿고 안 믿는 자는 보여도 안 믿습니다. 부자가 거지 나사로를 형제들에게 보낸다고 해도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을 것이며, 만물에 분명히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신성과 능력도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다윈의 진화의 증거일 뿐인 것입니다.

        노아의 시대에도 사람들은 홍수를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비도 오지 않는 맑은 하늘 아래 산위에다 잣나무를 베어다가 방주를 짓는 노아를 사람들은 비웃었을 것이고, 노아는 사람들에게 홍수를 대비하라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돌아오라고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홍수가 저들을 쓸어갈 때까지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은 하나님께서는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들을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믿어야 할 증거가 너무 많고 안 믿는 자에게는 못 믿을 이유가 넘치게 많은 시대입니다. 성경은 믿는 자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약속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허구의 신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믿는 자에게는 생명과 소망이지만 믿지 않는 자에게는 꾸며낸 인물이거나 과대망상 정신이상자입니다. 똑같이 보면서도 믿는 자에게는 보이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아니 보입니다. 하나님이 눈앞에 나타나신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날, 주님께서 구름을 타고 오실 때에야 비로소 온 세상이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홍수에 쓸려가듯 쓸려갈 것입니다. '믿을 것인가, 아니 믿을 것인가', 바야흐로 우리는 노아의 홍수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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