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아마도 애플페이나 또 다른 모바일 결제에 대해 소개하는 성가신 광고들을 보았을 것이다. 이런 것들은 말그대로 종이화폐의 존재를 부인하는 기술들이다.


현금없는 사회는 “더 이상 망상이 아니라 조만간 완벽히 구현될 비전이다”라고 덴마크 은행조합의 총무인 Michael Busk-Jepsen는 말하고 있다.


몇몇 나라에서는 전자상거래가 물건을 사고팔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다. The Economic Collapse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 Michael Snyder는 이것이 앞으로 실현될 ‘짐승의 표’의 청사진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륙이니라.”(요한계시록 13장 16-18절)라고 요한계시록은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금 없는 사회가 적그리스도의 통치 수단이 된다는 것인가? 아래 비디오를 보자.



기사원문 >> Are These Countries Pushing for the Mark of the Beast?



* 몸 안에 새겨 넣어 결제수단으로 사용하게 될 베리칩이 ‘짐승의 표’로 쓰여지기 위해 먼저 구현되어야 할 것이 바로 ‘현금 없는 사회’이다.


현재 전자화폐와 함께 사용되고 있는 모든 종이 화폐들이 사라지고, 스마트폰까지 구현된 결제수단이 베리칩으로 통합될 때, 성경에 묘사된 것처럼 이 ‘표’가 없으면 매매를 못하는 666 짐승의 정부가 완성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세력들이 의식을 하던 하지 않던, 현금 없는 사회를 통해 베리칩 시스템을 완성하려는 저들의 의도가 정확히 성경의 예언과 맞닿아 있다.


미국의 유력 기독교 언론 가운데 하나인 Charisma Media까지 나서서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미국에 있는 교회들은 현재 구현되고 있는 현금 없는 사회와, 현금 없는 사회의 최종적 결제 수단인 생체이식칩이 바로 ‘짐승의 표’가 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대부분 공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베리칩”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 한번 없이 “베리칩이 짐승의 표로 쓰여질 것”이라는 말만해도 이단으로 몰아가려는 한국교회의 상황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모습이다.


세상은 성경이 예언한 종말의 때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이런 시대의 징조들에 눈을 감아버린 한국교회의 상황이 안타깝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주님, 이 아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면 저를 위해서 역사해 주세요"



내 아들 제임스가 세상을 떠나고 남편과 나를 보살피며

슬픔을 나누던 사람들의 발길도 차츰 줄어들었다.

우리집은 이전처럼 조용하고 정리된 상태를 되찾았다.

그러나 내 내면은 조용하거나 정리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느날 밤, 배가 뒤틀리고 아프고 어지러워 침대에 누워 있을 때였다.

심장의 빛이 속도를 뛰기 시작했고, 불안감과 공포심이 나를 압도했다.

무언가 불쾌한 일이 일어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나는 곧바로 일어나서 집 안 반대편으로 갔다.


그러자 내 존재 가장 깊숙한 곳 미지의 동굴에서 내 목소리인지

아닌지 모를 거친 신음과 통곡이 솟구쳐 올라왔다. 나는 이 감정의

깊이와 슬픔의 위력을 깨닫자 더럭 겁이 났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고 어두운 구덩이로 미끄러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추락하는 것만 같았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알지 못했다.


얼마 동안 나는 슬픔의 고통에 흠뻑 젖어 있었고,

집에 마련한 작은 사무실로 가서 내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일을 했다.

나는 성경을 집어들고 울부짖었다


"주님, 이 아픔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견여야 한다면 저를 위해 역사해주세요"


여호수아서를 펴자 다음과 같은 말씀에 시선이 쏠렸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하느니라"(수1:9)


앞에 무엇이 있는지,

슬픔의 여정가운데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전혀 알지 못했다.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여호수아처럼 나 역시 한번도

그런길을 가본적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길에 파괴와 우울과 절망의 잔해가

가득 묻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비통의 발작이

언제 또 겉으로 드러날 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제임스가 세상을 떠난 날부터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정상적인 것이

 하나도 없는 삶을 살게 되면 어쩌지? 제임스를 잃은 일만 생각나면 어쩌지?

 평정심을 회복하지 못하면 어쩌지?"


나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덜덜 떨면서 말씀을 읽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나님께서 매우 조용하게 내 영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여정의 모든 단계들을 안다.

 모든 복병들이 어디에 매복해 있는지 알고 있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슬픔의 길을 걸어 보았다.

 이 길에는 나를 깜짝 놀라게 할 요소들이 아무것도 없단다."


나는 성경책 가장 자리에 "2010년 10월 슬픔의 여정이 시작됨"

이라고 표시했다. 여호수아서의 그 말씀을 기념비로 삼고

수시로 읽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작고 고요한 음성이 내 마음에 속삭였다

"젠, 나는 네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잘 지나갈 수 있도록 이끄는

 너의 전속 여행 안내원이야, 나와 함께하면 너와 네 모든 삶이 안전하단다."


나는 평온한 확신을 얻고 침대로 돌아가 아침까지 곤히 잘 수 있었다.

당시에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치유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처음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내 상실의 고통과 슬픔을 이기고

역사해주신 일이었다.


나는 내가 어디로 가든지 함께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약속을

내 영에 뚜렷하게 새겼고,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힘을 얻었으며,

기쁨이 회복될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모든 상한 심령에 대한 궁극적인 예후(prognosis)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견뎌낼 수 있도록 도우실 뿐 아니라, 우리가 잘 성장할 수 있다는

매우 실제적인 소망을 내놓으신다는 진리이다.


나에게 폭풍이 왔다./ 잰 해리슨


펌글/이웃 블로거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능력!  (0) 2016.02.16
은혜의 글  (0) 2016.02.08
예수와 대화하는 히틀러  (13) 2016.02.05
하나님 아버지께 내가 드릴 기쁨의 선물  (0) 2016.02.01
기도할 수 있는데  (0) 2016.01.23

 

이 영상 뒤에 따라오는 영상들은 목양연가의 신학사조와 다른 부분입니다, 그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교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설교를 듣다. / 박영돈 목사

 

 

교리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설교를 듣다.

잘 알려진 목사의 설교를 들었다. 그는 복음을 교리로 믿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성경은 분명히 예수를 믿으면 죄를 안 짓게 된다고 했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가? 그것은 복음을 교리로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나는 오히려 교리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의 설교는 부실한 교리적 골재로 형성된 설교가 얼마나 듣는 이에게 오해와 혼란과 의문을 야기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의 말 대로 과연 성경은 예수 믿으면 죄를 안 짓게 된다고 가르치는가? 성경과 교회역사 속에 그렇게 산 이가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그렇다면 역사 속의 모든 성도들이 복음을 교리로 잘못 믿어서 그런 것인가? 그런 주장은 오히려 그 목사가 성경의 가르침에 담긴 논리적이고 교리적인 함의를 전혀 성찰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 목사는 아마 요한 일서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말씀에 근거해서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말씀이 요한 일서와 로마서의 전체 문맥과 성경의 총괄적인 가르침의 맥락에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교자는 분명히 파악해야 한다. 거기에서 성화론이라는 교리적인 성찰이 필요하게 된다.

신자는 죄의 지배에서는 결정적으로 자유했으나 신자 안에 죄성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신자 안에 성령과 육신의 끊임없는 갈등과 싸움이 있으며 신자는 자주 쓰러진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신음과 탄식이 있는 것이다. 성화의 과정은 대개의 경우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그래서 신자는 하루도 죄용서함의 은혜와 회개가 필요치 않는 날을 이 땅 위에서는 맞이하지 못한다. 그는 매일 매 순간 십자가의 공로만 의지하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다. 그러면서 신자는 서서히 죄의 질병에서 자유하게 된다. 성경은 예수 믿으면 확실히 죄를 안 짓게 된다고 말씀하는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복음을 잘못 믿는 것이라고 설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며 죄를 안 지으려고 몸부림쳐도 그렇게 살지 못해 자괴감을 느끼는 신자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드는 메시지이다. 설교자들이여 교리 공부 좀 합시다.

 

 

출처: 개혁주의마을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예정론 1: 얘기를 해야 ?

대니얼 하이드(Daniel Hyde)

 

이제부터 예정론 시리즈를 시작하려 한다. 그렇다. 예정론에 대한 이야기다. 이것은 고상한 사람들 사이에서 꺼내기에는 그리 인기가 없는 주제이다. 사실,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조장 하기 알맞은 주제 아닌가? 5세기, 어거스틴은 자신의 편지에예정론은 설교의 유용성을 방해한다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썼다. 누가 그런 방해꾼을 원하는가? 16세기, 칼빈은 설교자가 성자와 성령의 신성이나 천지창조를 설교하는 만큼으로 예정을 설교해야 한다고 힘주어 설파하였다.

우리는 예정론을 이야기하거나 설교해야 하는가? 답은그렇다!”이다. 예정론은 성경적 교리이기 때문이다. 예정이 없다면 성경도 존재할 없다. 아브람은 갈데아 우르에서 선택을 받았다 ( 12). 이스라엘은 지상 만국 중에서 선택을 받았다 ( 4:37; 7:6-8; 105:6). 포로기 새로운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선택을 받았다 ( 41:8-9; 42:1; 43:1-7; 44:1-2; 45:4). 예수님은 예정을 가르치셨다 ( 11:25-27; 13:11-16; 4:11-12; 6:37, 66; 10:26-30; 14:1; 17:6, 9, 벧전 2:5-10). 성경적 교리인 예정론을 우리는 이야기 밖에 없는 것이 . 그렇다면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가?

질문에 대한 간단한 답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1618년부터 1619 사이, 네덜란드의 도르 트레흐트라는 작은 도시에서 유럽의 신학자, 목회자, 장로 등이 모여 알미니우스 논쟁을 다루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논쟁에 답했다.

하나님의 지혜로우신 계획하심으로 신구약 시대의 선지자, 그리스도, 사도들은 신적 선택에 관한 가르침을 선포했고, 성경에 가르침이 기록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의도에 따라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도 가르침을 분별력을 갖고 적절한 시간과 장소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방법으로 확고히 설파해야 하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방식들을 불필요하게 탐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력 넘치는 당신 백성들의 안위를 위함이다.” (도르트신조 1.14)

글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예정을 말하고 설교해야 하는지, 방법론을 위한 기본적 원리들을 살펴보려 한다.

 

분별력을 가지고....


예정론을 말하거나 설교할 우리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로마서 9장은 사도 바울이 믿지 않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에서 구분되어 크리스천 회중으로 모인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믿는 유대인들은 약속의 자녀들인 반면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단순히 육신의 자녀일 뿐이다 ( 9:3; 6-8). 바울은 이같은 개념을 또다르게 묘사하면서, 혈통적 이스라엘이 바다에 모래 같을지라도 소수의 남은자 무리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 ( 9:27).

이것은 예정론을 말하고 설교할 , 어떤 대상들이 이를 듣는지 각별히 신경써야 한다는 뜻이다. 불신자들에게 말하는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마음이 강퍅하여 예정론을 비웃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 진리를 참되게 궁구하는 이들 속에서 성령님이 일하시는 것을 분별하고 있는가? 믿는 자들의 회중들에게 말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믿음이 강해져 그와같은 교리의 깊이와 규모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또다른 이들은 믿음이 약해져 의심과 걱정에 휩싸이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한 모든 차이점들을 지닌 성인들에게 말하는가? 아니면 청중들 속에 어린아이들도 섞여 있는가? 그런 회중들에게 말할 때, 그 속에는 믿음의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 참된 신자들도 있고, 마치 위선자들마냥 믿는 척만 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명심하라.

 

경외감을 가지고...


예정론을 말하고 설교할 때 우리는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바울은 로마서 9:20-21에서 경외감을 갖고 예정론을 이야기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이것은 바울이 9장에서 논하는 내용의 절정 부분이다. 그는 옛언약 백성들, 자신의 동료 유대인이 보이는 불신앙을 말하면서 논의를 펼쳐간다 (vv. 1-5). 바울이 언급한 첫번째 반론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폐해졌는지의 여부였다 (v. 6). 바울은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행하신 이래로 이스라엘에게서 난 자들와 진실로 이스라엘에게 속한 자들” (v. 6), 그저 아브라함의 외적인 육신의 자녀인 자들과 아브라함의 약속의 참  자녀들 (vv. 7-8) 사이의 차별점을 이야기한다. 그는 역사로 시작하여 영원의 문제로 되돌아가 말한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v. 11).

그 다음 반론은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버리시는 하나님의 행위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그 반론에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v. 14)라고 답한다. 그는 어떤 사색적인 것이 아닌지 성경의 인용을 통해 답변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라는 말로 결론을 짓는다 (v. 18).

하지만 만일 이것이 참이라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v. 19). 이같은 반론이 들리지 않는가? 예정론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우리를 로봇으로 만드는 교리이다. 이같은 반론에 바울은 어떤 철학적 답변으로 이 수수께끼를 풀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인간일 뿐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토기장이고 우리는 진흙이다. 이것이 바울의 답변이다 (vv. 20-21).

예정론은 많은 오해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신비에 쌓인 주제이다. 따라서 바울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이 교리를 경외감을 갖고  말해야 한다. 로마서 9-11을 바울이 어떤 식으로 마감하는지 주목해 보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 11:33). 이 구절을 주해하면서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을 논할 때 항상 우리 언어와 사고방식 모두를 억제해야하며,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제한하는 지점에서 말할 때, 우리의 논의는 궁극적으로 놀라움으로 끝을 맺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정을 말할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하나님은 실패하셨다.”, “하나님은 불공평하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처럼 다루신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예정은 인간의 지적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므로 이런 반론들을 저지한다고 강조한다.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v. 20).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다. “토기장이에게 권이 없느냐?” (v. 21). 권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하나는 귀히 그릇을, 다른 하나는 천히 그릇” (v. 21) 있으므로,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영화로우시다. 결국 바울의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통해 스스로 영화로워지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진노를 보이시고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 (vv.22-23).

예정을 말하거나 설교할 , 그것은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드리기 위한 행위인가? “찬송하리로 하나님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주시되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1:3-4). 예정을 말하거나 설교할 ,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드러내기 위함인가?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 1:6). 사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차고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시기 때문에 바울은 에베 소서 1:12 14절을 통해 번이나 반복하여 송영을 노래한다. 예정을 말하거나 설교 , 로마서 11 36절로번역 있는 것인가?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 11:36).

 

우리의 안위를 위해....


마지막으로, 예정을 말할 우리는 우리의 안위를 설명하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 로마서 9장에서 우리와 세계를 위한 어떤 안위를 찾을 있는가? 바울은 구약에 기록된 구속사로 시작하여 영원의 세계로 되돌아가 논의를 진행해 간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복음을 바로 우리 앞에, 개인의 역사에 정치시킨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 9:24).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나 불공평하신 분으로 비난하지 말라. 우리를 로봇처럼 만드시는 하나님이라 참소하지 말라. 그분을 믿으라.

하지만, 여전히 반론하는 이들의 주장은 우리가 예정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유효하다는 것이다. 예정에 대한 이야기는 복음으로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예정하셔서 부르셨다는 사실을 알고 싶으세요? 그러면 예수님을 믿으세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때 나의(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이제 하나님께서 내 백성”,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들로 부르신다는 사실에 기뻐하게 된다 ( 9:25-26).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쓰고 있다.

로마서의 순서를 따르라. 먼저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해 고민하라. 바울이 로마서 1장부터 8장까지에서 가르치는 바대로 자신의 죄와 그리스도의 은혜를 인정한 다음 죄와 싸우라. 8장까지 등장하는 십자가와 고난 아래서 그대는 9, 10, 11장을 통해 미리아심을 배우게 되고, 그 사실이 어떻게 우리의 안위가 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예정론을 말해야 한다. 예정에 대하여 죄인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의 백성들에게 영원한 안위를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가져온 곳 : 
카페 >(안산) 회복의 교회
|
글쓴이 : 김안식| 원글보기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를 북조선에 남겨두는지 아느냐?
이미지 전체보기
이미지 전체보기

배고프고 병들고 지쳐 있었습니다.
그래도 밥을 준다고 하니 냇물을 건너 오셨습니다.
바지를 걷어 올리고 징검다리를 하나 둘 조심조심하며 건너 오셨습니다. 옷은 남루했습니다. 추워보였습니다. 신발은 다 해어져 있었습니다. 얼굴은 검게 아니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그래도 조선족이 큰 소리로 “김씨 아저씨 저녁 자시러 오시라고 해라!” 외치니 세 명의 젊은 친구들과 함께 건너오셨습니다.
젊은 친구라야 60대 후반입니다. 이 할아버지는 79세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비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거룩함과 경외함이 느껴진다고 할까요? 저는 이야기를 나누기 전 한 마디 말을 던졌습니다.
“왜 나오려고 하셔요?”
“찬송이나 마음 놓고 한번 불러보고 싶어서…”
눈길을 피하려 땅 바닥에 시선을 두고 우물우물 쏟아 낸 말입니다.
‘왜 탈출하려는가’라는 질문에 노인은 겸손하게 답을 하셨습니다.
“찬송 한번…”
할아버지가 건너 온 그 냇물 소리마저 들리는 듯 했습니다. 허름한 집 마루에 걸터앉은 우리, 아니 그 분들의 모습이 잊혀질까 오히려 두려운 적막이 흘렀습니다.
“언제 나오실 수… 있으셔요?”
“빠를수록 좋지 않을까요?”
순간 내 머리 속에는 계산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미 65명의 탈출자들이라는 말을 들었던 터여서 비용을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방법과 이동할 길목들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공안들을 어떻게 설득시켜야 할지, 그리고 어느 산을 넘어야 할지, 아이들도 있다지 않는가? 긴 생각을 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이들을 도울 것 뿐인데… 찬송 한 번 마음 놓고 불러보고 싶다는데 무슨 설명을 붙여야 할까?
‛도와 드리겠습니다’ 한 마디로 결론을 이끌려고 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말을 쏟아냈습니다. 순간 노인의 입속에서 흘러내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결정하기 전에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그리고는 일어나 울타리 밖으로 걸어 나가고 계셨습니다.
한 10분이나 걸렸을까? 노인이 돌아오고 계셨습니다.
제 눈은 노인의 얼굴에 멈추었습니다. 그 거친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주먹을 쥐고는 몸을 곧게 세우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물었소이다. 저 미국에서 온 이목사가 우릴 돕겠다는데 따라 갈까요? 라고…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능력이 없어서 너희들을 북조선에 남겨두는지 아느냐?’고 하시는 군요.”
서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노인의 어깨가 들썩거렸습니다.
“목사님, 매 맞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랍니다. 굶는 것도 하나님의 목적이랍니다. 혹시 기회가 주어지면 남조선으로 가서 찬송이라도 실컷 부르고 집에 가고자 했는데… 이 땅에 남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시니…”

숨소리가 거칠어지더니…
“어서 가시라요! 경찰이 온다지 않소?”
누군가가 노인에게 알린 모양이었습니다. 일단은 철수해야 했지만 저는 좀 더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가지고 간 돈도 드려야 했고, 노인의 말도 좀 더 들어야 했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서울로 가시자고 한 번 더 권하는 제게 노인은 “나도 아오. 자유가 무엇인지를… 예배당 종도 쳐봤고, 성가대도 주일학교 교사도 해봤지요. 하지만 이 자리에 머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시니… 자유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소? 압네다. 나도 압네다. 자유라는 게 좋은 게지… 마음 놓고 성경 읽고, 찬송하고, 새벽기도 나가고, 헌금도 할 수 있고…”

노인 외에 다른 이들이 재촉하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사를 드리려다가 무릎을 꿇고 노인이 신고 온 신발에 입술을 대고 우는 동안 나의 목에 눈물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재촉한 손길이 있어서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드리고 “안녕히 계시라요.” 인사를 하자 그렇게 점잖았던 노인의 음성이 강하게 쏟아져 나왔습니다.
“천국에서 만나자요!”
저는 죄인의 모습이 되어 노인에게 작은 소리로 “예, 천국에서 뵙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서둘러 떠나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분명하게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작아지는 소리 뒤에 분명한 음성.
“환난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칼이랴!…” ‘죽음이라도’라는 말은 제가 생각해서 넣었을 뿐입니다.
서둘러 산골짜기를 빠져 나왔습니다. 먼 길이었습니다.
운전하는 아저씨는 예수를 믿은 지 몇 년 안 되는 조선족이었습니다. 뒷자리에 앉은 나는 그냥 울어야 했고 운전하는 기사는 내 모습을 계속 확인하며 같이 울었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 궁금해진 나는 그 산골짜기를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 기사 아저씨를 찾아가 차를 대절해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 기사가 사뭇 공격적인 말투로 쏟아낸 말,
“무얼 하러 오셨오? 그 할아버지랑 노인네들이랑 그 가족들이랑 모두 죽었단 말이요. 수용소로 끌려가던 성도의 가족들이 모두 죽었다 하지 않소? 여섯 명의 젊은이들은 끌려가지 않겠다고 덤비다가 매 맞아 현장에서 죽었답니다.”
기사 아저씨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구를 비난하자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렇게 고난을 겪어야 하나? 할아버지와 함께 탈출하려던 그들의 생의 목적은 뭐였지? 지금까지 살아 온 것도 지옥 같은 것이었는데…  굶주리고 매 맞고, 억울함이란…
그런데 하나님은 너희들의 고향인 북한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셨고… 아! 그리고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는가 말입니다.
79세 노인네야 그렇다 치자구요. 오랫동안 믿음을 지켜온 자랑스러움이라도 있지 않는가 말입니다.
하지만 젊은이들, 아니 어린아이들은… 인생을 제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채로 죽어가야 했다니… 노인의 말대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선교현장에서 일하는 우리 중 ‘왜 이렇게 고난당해야 했나?’를 생각하지 않은 이들이 없을 것입니다. 때때로 저 역시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설교하다 말고 울고 글을 쓰다 말고 통곡을 합니다.
왜냐구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사랑 고마워…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그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데…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가 끊어질 수 있을까?
주님은 나 같은 죄인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북한의 성도들, 하나님의 백성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여러분과 저를 통해 그들을 위로하고자 하신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공산권 국가였던 헝가리의 성도들도 그 말씀 붙들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북한의 성도들도 그 말씀 붙들고 주님이 회복하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신앙간증'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도환 집사-천국과 지옥 간증  (3) 2016.02.18
그분의 숨겨진 미소  (5) 2016.02.10
이기웅목사 천국간증 1/3  (2) 2016.02.04
이옥매 간증  (0) 2016.01.31
자살했던 사람의 영적체험  (0) 2016.01.24

 

 

 

 

두뇌 일부에 자기장을 통과시키는 것만으로 사상이나 종교 등에 대한 개인의 태도를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실험 결과가 발표돼 관심을 끌고 있다.

 

외신들은 14일(현지시간) 영국 요크대학교와 미국 UCLA 공동 연구팀이 ‘경두개 자기자극’(transcranial magnetic stimulation, 이하 TMS)이라는 기술을 통해 실험 참가자들의 두뇌 일부 기능을 ‘차단’해본 결과 이러한 사실을 알아냈다고 보도했다.

 

기사원문 >> “뇌에 ‘자기장’ 쏘아 종교·사상 바꿀 수 있다” (연구)

 

 

* 2003년 게놈 프로젝트를 통해 인간의 유전자 지도가 완성되고 2012년엔 뇌의 해부학적 구조와 기능을 밝힌 뇌 정밀지도가 완성됨으로 이 정보들을 활용한 본격적인 마인드컨트롤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다.

 

“뇌에 ‘자기장’을 쏘아 종교와 사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연구 결과는 바로 이 지식들을 활용한 연구 사례 중에 하나인 것이다.

 

머리에 미세한 전기자극을 주는 패치 하나로 못생긴 피오나 공주를

백설공주처럼 보일 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한국인 과학자가 주도한 미국 연구진이 개발한 이 패치는 뇌에 간단한 전기 자극을 주는 방식으로 보상회로를 조절하여 기분을 좋게 만드는 화학물질을 분비케 함으로 대상자로 하여금 어떤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는 뇌 시스템으로, 15분간 이 패치를 붙이고 있던 사람들은 못생긴 ‘피오나’ 공주를 예쁜 ‘백설공주’로 느끼게 된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었다.

 

뇌 정밀지도를 통해 밝혀진 뇌의 보상회로에 간단한 전기자극을 주거나, 사상과 종교를 관장하는 두뇌 일부에 ‘자기장’을 통과시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심지어 종교적 신념까지도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세계정부주의자들의 통제수단으로 그 개발이 완성된 베리칩에는 이미 게놈프로젝트를 통해 밝혀진 유전자정보(지도)가 담겨질 것으로 알려져 있고, 베리칩의 60%나 차지하고 있는 전기코일(안테나)은 이를 삽입한 사람의 몸(뇌) 속에 전자기적 자극을 보내 마인드컨트롤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이기도 하다.

 

베리칩의 60%나 차지하고 있는 전기코일(안테나)은 이를 삽입한 사람의 몸(뇌) 속에 전자기적 자극을 보내 마인드컨트롤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이기도 하다.

 

베리칩이 사상과 종교를 관장하는 두뇌 일부에 전자기적 신호를 보내 종교적 신념 자체를 바꾸어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베리칩을 받으면 예수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뜻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의 표를 받으면 구원에 자리에 설 수 없다(계 20:4)고 하신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요한계시록 20장 4-6절)

기사사진

사진=존 케빈 우드(John Kevin Wood)와 멜리사 우드(Melissa Wood)부부. 보도영상 캡처

기사사진

사진=매릴린드주의 라 플라다 고등학교(La Plata High School).보도영상 캡처
이전사진다음사진
1 2
“공립학교가 강제로 내 아이를 이슬람교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미국 매릴린드주의 라 플라다 고등학교(La Plata High School)가 학생들에게 이슬람 세뇌 교육을 허용해 학부모가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의 주요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 공립학교는 세계사 수업 시간에 알라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신이고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가르쳤다. 또한 학생들에게 이슬람 신앙고백 샤하다(Shahada)를 쓰고 고백하도록 강요하고 이슬람의 5대 지주를 외우라고 명령했다.

샤하다(Shahada)는 “알라가 유일신이고 무하마드는 알라의 선지자다”라는 이슬람교의 사도신경이다. 이 샤하닷을 중인 앞에서 공언하면 공식적으로 이슬람교도가 된다.

이슬람의 5대 지주는 샤하다(Shahada, 이슬람 신앙고백), 살라(Salah, 매일 5번 기도), 자카트(Zak?t, 자선, 구제), 사움(Sawm of Ramadan: 금식), 하즈(hajj, 성지 순례, 메카 순례, 일생 동안 한 번 이상해야)를 의미한다.

존 케빈 우드(John Kevin Wood)는 딸이 그 세계 역사 수업에서 샤하다 공언을 강요받고 이슬람교 세뇌교육을 받게 된 것을 알게 되고 격분했다.

그는 학교에 전화하여 딸이 이슬람 수업에서 탈퇴하고 다른 수업을 대체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부교장은 “이슬람 수업을 탈퇴하면 “F”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아버지 우드가 계속해서 학교에 문제를 제기하자 부교장은 법원을 통해 존우드가 학교에 오는 것을 금지시켰다.

결국 과제를 제출하지 않은 존우드의 딸은 대학 진학 학점에 있어서 손해를 보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기회도 상실했다.

재학생들에 따르면 “평화적 종교 이슬람교는 사실이고 기독교와 유대교는 그냥 신념이라고 가르쳤다”며 “지하드는 이슬람 ‘거룩한 전쟁’으로서 종교적인 의무이고 영적 훈련을 포함한 이슬람에 헌신하기 위한 내적 투쟁이라고 배웠다”고 밝혔다.

그러나 911 테러와 보스턴 폭격등의 지하드는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드 부부는 결국 찰스 카운티 공립학교 교육위원회(Charles County Public Schools, the Board of Education)와 라 플라타 고등학교의 교장과 교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소장에는 이 학교에서는 십계명이나 성경의 어떤 부분도 다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비하하는 발언은 물론 이슬람 교리에 다루고 있는 책은 집에 가지고 가지 못하고 학교에 놔두고 다녀야 했던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소송을 맡은 법률센터의 리차드 톰슨 대표는 ‘기독교에 대해 차별하는 것은 특정 종교를 홍보해서는 안 된다는 헌법을 위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12월에도 미국 동부 버지니아주(州) 오거스타 지역에 위치한 리버해드 고등학교에서는 “이슬람교의 신앙고백인 샤하다가 아랍어로 따라 쓰라”는 숙제 때문에 온 마을이 발칵 뒤집혀 마을 전체 학교가 일시적으로 폐쇄되기도 했었다.

최근 미국은 종교적 관점이 변화고 있는 과도기에 있다. 이런 가운데 이슬람에 관한 교리를 가르치는 공립학교가 자꾸 나타나고 있어 미국 내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





받은바 은혜를 감사하자!


우리가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내가 받은 것이 없어서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은혜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우리가 쉬운데로 부모 자식 간의 예를 한번 살펴보면, 자식이 부모에게 받은 것이 없어서 감사치 못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치 않는 것은 받은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받은바 은혜를 깨닫지 못해서입니다. 부부지간도 형제.자매도 이웃 간에도 꼭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기만 한다면, 설령 내가 받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해도 그저 나와 함께 있어준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든지 감사할 수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 세상에는 같이 있어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몸서리치는 외로움에 떨며 울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셀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육신 적인 면도 그러하지만 영적인 면도 매한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런 중에서 오늘까지 지켜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재앙 속에서 여지껏 나와 내 가족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 역시, 모두 하나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그렇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놀랍고 큰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영혼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십자가의 사랑…인간 편에서 보면, 값없이 그저 받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자신의 고귀한 목숨과 맞바꾸어야만 할 만큼 엄청난 댓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주님의 그 십자가 사랑 하나만 제대로 깨닫게 되어도 너무나 크고 놀라워 이 생명 다하는 그날까지 감사 또 감사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럼에도, 그분도 인간에게서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십니다. 감사치 않고 등을 돌리는 사람을 향해 매우 섭섭해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이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 3- 4절 말씀) ."
 
이번 주는 우리나라 고유명절 구정입니다. 이 한 주간만이라도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해 보아야겠습니다. 내 교회, 내 이웃, 내 가족,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함을 깨닫고 따뜻하게 치하해주는 말, 감사함을 나타내는 표현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특별운동이라도 벌려보는 한 주간이 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렇듯, 헤아려보면 감사할 조건이 많습니다. 우리는 감사할 조건이 없어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니라 깨닫지 못해 감사치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감사란….오직 깨닫는 자만 느낄 수가 있고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란 생각이 듭니다. 깨닫는 곳에 감사 있고, 감사가 있는 곳에 행복이 있습니다!

퍼온 글: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 일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화과야, 무화과야~  (4) 2016.08.20
아직은 부활의 때가 아니다  (0) 2016.04.13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0) 2016.01.02
난 정말 주님을 닮고 싶은데...  (4) 2015.12.12
가장 슬픈 것  (2) 2015.12.08


사용자 삽입 이미지

눈물 쏟는 주님


어둠에서 완전히 깨어
주님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철 없이 보내 버린 날들은
갈대 같은 몸짓으로 입맞춤을 바라는 입술이
무색 하도록 가여운 그런 밤이었습니다.
유난히도 달은 밝아 예전 보다 더 애틋하게
주님을 그립게 하던 그런 밤이었습니다.

나의 새 삶이여 나의 영원한 생명이여
나 주님을 사랑 합니다.
주님을 향한 나의 계절은 변함이 없습니다.
내게 사랑이 시드는 음지는 없습니다.
절망 마저 주님께 맡겨 놓은
내겐 정녕 두려움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이들이 떠나 가고 이 큰 세상에
덩그라니 홀로 남는다 하여도 주님이 내게 주신
진실한 사랑과 거룩한 희생을 가슴에 품고
나는 이 땅에 무너짐 없는 소망의 탑을 쌓으렵니다.

밤이 가고 새벽이 오고 아침이 밝을 때 까지도
알아 주는 이 없는 나의 삶을 바라 보며
눈물 쏟는 주님이여!
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주님을 사랑 합니다.
진정 내 생명보다 소중한 주님을 사랑 합니다.

이제 가을은 진한 커피향과 함께
하얀 눈꽃으로 피어 납니다.
머지 않아 봄도 올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 하는 영물화(詠物畵)속에서
나의 별이 금 초록 빛을 발할 때
주님 곁에서 영원토록 노래할 날 위해
인적 없는 땅에 나의 별을 파종 하러 가겠습니다.



<그대 채울 수 없는 빈터 中>

'문학/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400년전의 思夫曲(사부곡)  (1) 2016.03.26
천재 소년의 시 "마음속 온도"  (0) 2016.02.14
가지 않은 길-로버트 프로스트  (1) 2015.08.18
어메 어메 우리어메  (0) 2015.06.04
어느 양로원 병동에서  (1) 2015.05.17






브레히트 시 - 예수와 대화하는 히틀러
- 브레히트가 "색깔 논쟁하는 한국 정치-종교계"에 던지는 메시지
 


  





예수와 대화하는 히틀러



히틀러가 예수께 말하길
예수 그리스도, 내게 대답해 주세요
주님이 모든 유대인을 증오했는지
주님은 우수한 나치였던가요?

주님은 자유의 꿈을 증오했는지?
평화와 정의가 주님께 구역질나게 하는지?
우리가 경례하는 나치 깃발을 기억하시길!
거기 갈퀴가 달려있지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시여, 내게 대답해 주세요
주님은 반유태주의자인지요, 아닌지요?
그리스도는 손가락으로 모래에다 쓰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간소하게 답하시길:

- 거기 순수혈통인 자가
첫 돌멩이를 던져라.






Gespräch

Hitler sagt zu Kristus
Antworte mir, Jesus Krist
Hassest du alle Juden
Bist du ein guter Nazist?

Hassest du die Träume von Freiheit?
Widert Friede und Recht dich an?
Auf der Flagge, die wir grüßen, erinnere dich!
Da ist ein Hacken dran!

Antworte mir, Sohn von Gottvater
Bist du Antisemit oder nicht?
Kristus zeichnet im Sand mit dem Finger
Und antwortet kindlich schlicht:

- Der da ist rasserein
Werde den ersten Stein.
 

(GBA 14, 280. 1934/35년) 


***********



    본 글에 소개하는 시는 브레히트가 덴마크 스벤보르에 망명 중이던 1934/35년 경에 지은 시로, 원래 제목은 "대화 Gespräch" (GBA 14, 280)이다. 브레히트가 요한복음에 나오는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8장 1 - 11절)이란 잘 알려진 내용을 바탕으로, 히틀러와 나치 정책의 허상을 비판하며 "순수 혈통 주장하는 히틀러 너, 니가 순수혈통이거던 너부터 돌을 던져라!"고 폭로하고 있는 시이다. 밋밋한 원래의 시 제목보다는 필자가 '약간은 길고 선정적인 제목'인 "예수와 대화하는 히틀러"라고 붙여 국내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소개한다. 


    시대가 어수선하고 불안할 때마다 흔히들 헛된 꿈을 품은 나쁜 정치인들은 '메시아', '국부'나 '국모'의 이름을 달고 기꺼이 국민들을 현혹하여 잘못된 길로 인도했고 여전히 인도하고 있다. 히틀러가 독일 국민은 물론 전 세계를 전쟁의 희생자로 전락시킨 것처럼, 세계 도처에 수많은 독재자들이 이렇게 선량한 국민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욕심에 희생물이 되게 한다.


  요한 복음에서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께로 데리고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랍비는 이에 대해 뭐라고 하시겠습니까?"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예수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다 무엇인가 쓰면서 말씀하시길, "너희 중에 죄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 (요 8, 7)고 한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물러가고 마침내 예수만 홀로 남게 되었다.


    바로 이 장면을 그대로 차용해서 브레히트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질문한 것처럼, 히틀러의 입에다 '나치의 정책과 정강"을 그대로 예수님께 질문하게 하고 있다. 국내 정치권에서 궁지에 몰리면 즐겨 등장시키는 "색깔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종북'이니 '친북'이니 색깔론을 즐겨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그것으로 '민주주의 수호'니 '나라 사랑'까지 입에 담는 사람은 요한복음 8장, 해당 구절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시인 브레히트가 히틀러의 입에다 재갈을 물리는 위의 시도 일독을 감히 권하고 싶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북한을 단 한번이라도 방문했고, 북한 정치인들과 대화하면서 입에 발린 '북한 찬양'을 단 한번이라도 한 사람들이 선량한 국민들 앞에서 과연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이나 있는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자가 먼저 '색깔론'의 첫 돌을 던져라!!

 


   


Breugel이 그린 "땅에 무엇인가를 쓰는 예수 그리스도"




(2014년 겨울 - 이 시는 "브레히트 시, 777선 번역 프로젝트" 중에 하나임. )



배경 음악은 브레히트 작사, Ernst Busch의 노래 "Das Lied vom SA-Mann"입니다.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은혜의 글  (0) 2016.02.08
나에게 폭풍이 왔다  (0) 2016.02.07
하나님 아버지께 내가 드릴 기쁨의 선물  (0) 2016.02.01
기도할 수 있는데  (0) 2016.01.23
주님의 음성  (0) 2016.01.22
      가장 무서운 것 The most fearful thing in the world 최송연 칠흑으로 새까만 밤이면 곧 동트는 아침이 올 것을 예고하기에 두려울 것 없고 There is nothing to be feared when the night is the darkest black for the morning's sun will come soon 쏟아지는 겨울 폭우는 무지개 뜨는 화사한 봄날을 바라며 견딜 수 있지 In the midst of the winter storm one can patiently sit and wait for the springtime's warm rainbow 그러나 그대 마음속에 절망을 산처럼 쌓아둔다면 누가 있어서 그 산을 옮겨줄 수 있겠나 But If you stack up desperation in your heart Who can move that mountain for you? 그러므로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절망하는 그대 마음이지... So to be feared more than anything else in this world is your despairing heart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 . . . . .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 오직 당신만을...  (0) 2016.02.14
사랑의 배달부  (0) 2016.02.09
사랑해요, 당신을...  (0) 2016.02.03
소망  (0) 2016.01.23
참 소망  (2) 2016.01.20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엄동설한 모진 바람도 이제는 한풀 꺾인 듯, 남쪽에서 불어오는 미풍이 제법 싱그럽게 느껴진다. 겨우내 누렇게 메말랐던 잔디가 파릇파릇 새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한 언덕을 따라 아지랑이가 사르르 휘감아 도는 이른 아침, 혼탁한 교계도 겨울 옷처럼 낡고 더러워진 사고들일랑 훌훌 벗어버리고, 새로운 봄, 주님의 나라가 속히 도래했으면 좋으련만…이 생각 저 생각 가슴 아픈 교계의 현실을 개탄하며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갑자기 고향 집 뒷산에 있던 작은 옹달샘과 돌아가신 어머니의 얼굴이 사무치도록 그리워진다.

도토리나무, 소나무, 대나무며 잣나무가 울창하고, 진달래꽃 철쭉꽃 각종 들꽃이 철 따라 다투어 피고 지는 곳,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수목이 빽빽이 들어찬 나지막한 야산이 병풍처름 둘러쳐진 뒷산으로 통하는 오솔길을 조금만 따라 올라가면, 거기 울퉁불퉁 큰 바위가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고, 그 중 제일 큰 바위 밑에는 밤낮으로 퐁퐁 쉬지 않고 솟아나는 조그만 옹달샘이 하나 있다. 산속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기에 그곳의 물은 언제나 수정처럼 맑고 깨끗하며 차디찬 것이 정말 시원하고 상큼한 청량음료수 맛이었다.

혹독한 된서리 몰아치는 겨울, 삼라만상이 하얗게 꽁꽁 얼어붙어도 그 옹달샘만은 얼어붙는 법 없이 수면 위로 약간의 살얼음이 사르르 한 정도일 뿐, 그 살얼음을 살짝 고사리 손으로 걷어보면 속에는 여전히 맑은 물이 보드라운 물결무늬의 동그라미를 그리며 솟아오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한 여름, 간혹 논밭이 타들어가는 가뭄이 와도 그 작은 옹달샘은 결코 마르는 법 없이 늘 한결같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다.

“좋은 물이란, 물줄기가 땅속 깊은 곳 원천(源泉)에 연결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란다. 원천에 연결된 물은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장마철이라고 하여도 물이 더 많이 불어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가뭄에 물이 말라버리거나 장마철에 물이 넘치는 샘은 가까운 개울이나 빗물이 얕은 땅으로 스며들어 샘을 이루는 물이고, 그런 샘의 물은 좋은 물이 아니란다.” 방금 언니가 길어온 차가운 옹달샘 물에 고소한 미숫가루를 듬뿍넣은 그릇을 간식으로 챙겨주시며 어린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신 지혜로우신 울 어머니의 ‘좋은 물 나쁜 물’의 수질 검증법(?)이시다.

이렇게 물 하나에도 좋은 수질을 분별하는 검증법이 필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이 물과 직결되어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최근에 와서야 어머님의 그 깊으신 마음이 조금씩 깨달아 알아진다. 그래, 그런 것이다.
사람의 생명이 살고 죽는 것, 그것은 무엇이 되었건 바르게 분별을 해야만 한다. 분별하지 못하고 무턱대고 먹거나 마시면 자칫 귀한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음식이라고 분별없이 마구잡이로 입에 넣다가 귀한 목숨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나라에서는, 독버섯과 식용버섯을 분별하지 못하는 아들이 산에 놀러갔다가 식용버섯이라며 채취해 온 독버섯을 끓여 먹고 일가족 모두가 즉사했다는 끔찍한 기사가 신문에 난 것을 얼마 전에 읽어 보았다. 또 복어의 맹독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끓여 먹은 노부부가 이튿날 아침,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들린다. 일본에서는 지금 음식이나 물에 인간이 섭취해서는 안 될 방사능이 들어 있어 초비상이다. 인간이 먹어도 해가 되지 않을만큼의 방사능 기준치는 얼마만큼이어야 하는가? 물과 음식에 포함된 방사능 성분의 기준치를 분별해 내는 검사를 쉴 새 없이 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라 일본 열도가 울고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날마다 집중 보도되고 있다.

이렇듯, 세상에는 육신 생명을 연장시키는데 필수조건을 충족시켜줄, 좋은 물, 좋은 음식도 많이 있지만, 반대로 그 속에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독극물도 함께 섞여 있을 수 있기에 반드시 분별하고 먹고 마셔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물며, 영원의 세계로 직결되는 사람의 영혼을 위한 음료와 영의 양식이랴? 모든 교리를 분별함 없이 무조건 모두 수용해야 한다는 theory만큼 위험천만의 말은 다시 없다고 생각한다.

분별력을 잃은 현대 교계를 잠시만 둘러보면, 어지럽기 그지없다. 모두 제각각이다. 극단적 신비주의, 극단적 세대주의 극단적 자유주의, 극단적 폐쇄주의(?)등등.. 천차만별이다. 이런 혼란스러운 때에 정작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고 바른 분별법의 척도가 되고 인생의 잣대(Canon)가 되는 성경 말씀 그대로 믿는 사람도 드문 것 같다. 오히려, 말씀으로 분별하고 바르게 믿자고 호소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성령체험이 없는 자, 페쇄적 근본주의자, 불량한 짓을 저지르는 악당 패거리라도 되는 듯 호도하고 비방하는 거센 목소리도 심심찮게 들린다.

지금 최바울 목사님이 지탄받는 것도 바로 “영적 도해”란 책의 내용 때문인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넘어서지 말고 말씀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해야할 목사님들이 성경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영의 세계를 개인의 상상력을 동원, 과장하여 왜곡시켜 전하는 데서 많은 문제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본다. “인간의 창조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 (사 43: 7, 21)라고 성경이 말씀하셨으면 그 말씀 그대로 믿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믿을 수 없으면, 그것은 내가 이해되지 않아 그런 것이지 그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니란 것을 믿는 것, 이것이 믿음이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기록 되었지만, 저자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한 것이란 데서, 인간이 이해하지 못할 난해구절이란 것이 있고, 난해구절은 난해구절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이지, 나의 상상력으로 풀이하려고 하는 것은 지혜가 아니라 범죄행위다. 그러기에, "경의 모든 말씀은 사사로이 풀지 말라.” (벧후 1:20-21)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을 가장 많이 읽어야 할 목사님들마저 말씀을 읽지 않고 경시한 탓에, 말씀의 분별력 상실시대가 도래한 것 같다. 부흥이 되는 듯하고 구변이 좋기만 하면, 아무것이나 모두 수용하는 데서 야기되는 문제들이 너무도 큰 현실이다. 그의 위험천만한 사상을 분별함 없이 무조건 지지하며 따르는 수많은 목사님들이 계시다는 것은 주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1) 영(靈)의 세계를 너무 생각하지 마라

사람은 물질적인 존재인 동시에 영(靈)적인 존재로서 두 세계에서 共存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인간의 본질을 “몸(Soma, carnal) 육적인 사람(고전3: 1-3) 또는 "혼(Psyche, natural) 자연적인 사람" (고전2: 14), 영(Pneuma) 영적인 사람"(고전3:1)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많은 신학적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임을 우리는 잘 안다. ) 어쨌거나 이런 인간의 특수성은 사람을 때때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성향을 띌 수 있게 하는데, 우리는 육신적으로 너무 치우친 사람을 “몸(Soma, carnal) 육적인 사람 (고전3: 1-3)이라 부르고 영적으로 너무 치우친 사람은 영적인 사람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극단적 신비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특수성을 미리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 외에, 인간이 지나친 영의 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금지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영의 세계에 도전하려고 한다. 왜일까? 그것은 그만큼 영의 세계가 인간의 영역 밖의 세계,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이기에, 인간의 도전 정신이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형이상학적(
) 세계로 도약하고 싶은 뜨거운 열망의 한 표출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인간이 영의 세계, 神의 세계를 지나치게 생각하는 집착의 보다 근원적 출발은 인간이 神과 같이 되고 싶은 탐욕 때문일 것이다. 구약의 바벨탑 사건이 그 좋은 예가 아니겠는가.

탐욕은 道를 넘는 행위로서 물리적이건 영(靈)적이건 모두 우상숭배만큼이나 가증한 것, 인간에게 금지된 계명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반대로 이런 인간 본성의 특수성을 잘 알고 있는 간교한 사단이 성령의 역사를 흉내 내어 거짓 예언, 환청, 환상, 이런 영의 세계를 미끼로 사람들의 영혼을 지옥으로 이끌어 넣으려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성도가 영의 세계를 너무 깊이 파고자 하는 지나친 욕심을 부릴 때, 그 욕심이 그를 주장하여, 영적인 세계에서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악한 영들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기 쉽고 어둠의 권세자들의 조종을 받게될 수도 있다는 것이 성경을 토대로 살펴본 필자의 견해다.

따라서 인간에게 허락된 한계, 성경에 기록된 영(靈)의 세계, 그 이상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는 것이 건전한 신앙인의 바람직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2) 영(靈)의 세계에 속한 힘, 권능들을 부릴 수 있는 권세가 성도에게 주어졌는가?

그 대답은 ‘No, 그럴 수 없다.’ 하는 것이다. 성도가 이 영적 존재들, 천사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는 theory는 분명히 비성서적이다.

물론, 영의 세계는 초자연적인 것들로 가득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들은 두 종류 즉 좋은 존재와 악한 존재로 나누어지는데, '세라핌', '케루빔', '천사들'(좋은 천사와 나쁜 천사), '정사들', '권능들', '어두움의 주관자들', '악한 영들'(엡6:12), '왕좌들', '지배들'(골1:16), '타락한 천사들'(벧후2:4), '옥에 있는 영들'(벧전3:18-20), '마귀들', '미혹하는 영들'(딤전4:1) 등으로 구분된다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보기보다는 그들(천사들)을 부릴 수 있는 권이 천사들 뿐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신 우리 주님께 있음을 믿어야 한다. (히 1: 14절) 천사는 구약시대 하나님의 수종자이고 신약시대(지금)는 천사가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 하시는 '성령 시대, 은혜 시대'임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기도 중에 천군 천사가 동원하여 지켜주십사 주님께 부탁하는 것과 성도가 천사들에게 직접 명령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신약시대에서 가장 뚜렷하고 가장 성서적인 표현과 신앙은 성령님(하나님의 영(Holy Spirit, Holy Ghost)으로써)께서 친히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또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보호하신다. 이런 사랑의 주님께 우리가 어려움 당할 때마다, 우리를 건져주시고 지켜달라고 기도하면, 그분의 선하신 뜻대로 어떤 때는 천사를 보내기도 하시고 친히 그 권능의 손을 펴시사 풀무불 속 같은 어려움 속에서 건져내어 주기도 하시는 것이다. 고로, 성도는 천사를 명령하는 등, 영적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얼굴을 갈구하는 기도를 매순간 주님께 올려드려야 마땅한 것이다. 이것이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영적 원리이다.

개혁 교회의 신앙과 삶의 원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e)이다. 이 원리에 가장 충실하게 살려고 했던 사람들은 “청교도들”(Precisians or Puritans)이다. 이들은 무엇보다도 성경을 사랑했던 사람들이다. 이들의 모든 활동의 가장 중심에는 성경이 있었다.

우리도 이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복음(福音)이란 고대 그리스어의 '좋은 소식'이라는 뜻을 가진 ‘유앙겔리온’(Ευαγγέλιον: euangelion, 라틴어 Evangelium), 복된 소식이다. 복된 소식은 우리를 위해 이땅 위에 오신 주님,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된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오르신 분, 지금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장차 우리를 데리러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시다. 이 예수님을 힘써 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생명의 샘, 생수의 근원이요, 원천인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돌아가자. 우리 모두 힘써 그분께로 돌아가자. 끝으로 우리 아멘넷의 한 논객이신 cy님의 경고의 말을 한 번 들어보도록 하자.

“DK대사(악령)로부터 받아적은 뉴에이지 바이블(?)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세계질서에서는 영성이 신학을 대신할 것이다. 살아있는 체험이 신학적 수용을 대신할 것이다. 영적 실재가 갈수록 뚜렷하게 나타나고 형태적 측면은 뒤로 사라질 것이다. 동적이고 표현적인 진리가 신세계종교의 기조가 될 것이다." –cy

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현대는 뉴에이지 사상이 종교, 문학, 예술, 과학, 정치 각 분야로 급속도로 확산, 침투하고 있는 무서운 말세지말이다. 이런 무서운 말세를 살아가는 선도는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 神의 영역을 탐하는 탐욕을 제어하고, 영의 세계를 너무 알려고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내 신앙의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할 것이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딤후 2: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수 없느냐"(마 16: 2-3)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1:6)

별똥별/ 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최송연의 신앙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언이란 무엇인가?  (8) 2016.02.24
더욱 가까워진 그날  (4) 2016.02.12
똘레랑스(Tolerance)의 위험  (4) 2016.01.28
주님의 몸, 교회(敎會)  (5) 2016.01.19
나의 꿈이 너를 울게하는가?  (3) 2015.10.30

 


Salk Institute in California에서 일하는 스페인 과학자가 Scientific American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인간의 세포를 동물의 몸 속에 결합시키는 자신의 최첨단의 연구를 개인적으로 축복해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저명한 줄기 세포 연구가인 Juan Carlos Izpisua Belmonte는 인간의 세포를 돼지, 양, 소와 같은 가축의 몸속에 넣어 배양시키는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이는 과학자들이 인간의 줄기 세포를 주사기를 통해 동물의 초기단계 배아에 결합한 뒤, 대리동물의 몸속에서 길러내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연구이다.


“스페인은 보수적인 카톨릭 국가입니다. 그래서 교황의 의견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교황께서는 저에게 친절한 어투로 ‘yes(괜찮습니다)’라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예, 그분은 지금의 교황님을 의미합니다.  바티칸이 이 연구를 지원하고 있으며, 인류를 도울 수 있다면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는 우리가 그냥 (연구를 위해) 돼지를 죽이는 것에 불과합니다.”라고 Belmonte는 Scientific American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바티칸의 과학청인 The Pontifical Academy of Sciences는 현재 이 사실에 대한 확인을 요청하는 이 메일에 대해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고 있다. 카톨릭 교회가 인간의 배아를 가지고 연구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입장임에도, 위의 사안에 대해선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과 동물의 키메라”에 대한 연구를 지지하는 바티칸의 입장은 지난 9월 도덕적인 이유를 들어 키메라 연구에 대한 지원을 금지한 미국 보건청(U.S. National Institutes of Health)의 입장보다 훨씬 급진적인 것이다.


기사원문 >> Pope Francis Said to Bless Human-Animal Chimeras 



* 동성애, 낙태, 구원론 문제에 있어서 보수적인 카톨릭 교회의 입장을 부인하는 파격적인 언행을 보여주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제 인간과 동물의 세포를 결합한 ‘키메라 연구’를 지지한다(축복한다)는 또 다른 파격적인 언급을 통해 주목을 받고 있다.


의도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을 쏟아놓고는 한 발 빠지는,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해왔던 교황이 이번에도 “키메라 연구를 축복한다.”는 논쟁이 될 만한 발언을 한 뒤, 이에 대해 확인을 요청하는 언론의 요구에 침묵하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롯의 때’의 특징이 동성애라면, 네피림으로 상징되는 ‘노아의 때’의 특징은 이종 간의 결합을 통해 탄생한 ‘하이브리드 인간의 출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관련글 >> 창세기 6장에 숨겨진 비밀


노아의 때에는 타락천사들(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변종인간(네피림) 탄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면, 현대는 최첨단의 생물학 연구가 21세기판 ‘변종(하이브리드) 인간’의 탄생을 주도하고 있다. 인간과 동물의 세포를 결합한 ‘키메라’의 출현이 눈앞에 와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동성애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롯의 때’를 앞당기고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제는 “키메라 연구를 축복한다”는 발언을 통해 ‘노아의 때’를 앞당기기 위한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이다.



인간과 동물 세포를 결합하는 연구는 결국 현대판 네피림(변종인간)이라

할 수 있는 '키메라'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출처: 유투브

   

사랑해요, 당신을...
                         최송연             
사랑해요, 당신을... 
내 영혼 속에 
생명을 심으신 주님이기에
온 맘 다해 당신을 사모합니다

사랑해요, 당신을...
내 마음속에
햇살 같은 은총으로
머물러 계신 주님이기에
슬픔이 변하여 찬송이 흐릅니다

나의 인생길에
고난이 狂風 같이 밀려들고
많은 환난이 빗물처럼 쏟아지나
늘 깨어 지키시는 주님이기에
두려움 대신 소망의 빛 반짝입니다

 (시 121: 1-6잘 참조)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배달부  (0) 2016.02.09
    가장 무서운 것  (2) 2016.02.04
    소망  (0) 2016.01.23
    참 소망  (2) 2016.01.20
    당신 사랑은...  (0) 2016.01.13

    이 고사 성어는 그 때 당시 중국 전역에 퍼졌고,

    마침내는 실크 로드를 타고 서역으로까지 전해졌으며

    오늘날에는 미국, 영국 등지에서 자주 쓰이고 있다고 한다. 

     

    시벌로마 (施罰勞馬) 

    고대 중국의 당나라 때 일이다.  

    한 나그네가 어느 더운 여름 날 길을 가다가 이상한 장면을 목격하였다.  

    한 농부가 밭에서 열심히 일하는 말에

    자꾸만 가혹한 채찍질을 가하는 광경을 본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나그네는 말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농부에게

     “열심히 일하는 말에게 왜 자꾸만 채찍질을 가하는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농부는 자고로 말이란 가혹하게 부려야 다른 생각을 먹지 않고

    일을 열심히 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남의 말을 놓고 가타부타 언급할 수가 없어 이내 자리를 뜬 나그네는

     열심히 일하는 말이 불쌍하여 가던 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긴 탄식과 함께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한다. 

    “시벌로마 (施罰勞馬)” 

    훗날 이 말은 후세 사람들에게 이어져 주마가편 (走馬加鞭)과

     어감은 약간 다르지만 상당히 유사한 의미로 쓰였다 한다. 

    시벌로마 (施罰勞馬): 열심히 일하는 부하 직원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직장 상사에게 흔히 하는 말. 

    용법: 아랫사람이 노는 꼴을 눈뜨고 보지 못하는 일부 몰상식한

     상사의 뒤에 서서 들릴락 말락 하게 읊어 주면 효과적일 것이다. 

     

    조온마난색기 (趙溫馬亂色期)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조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조씨에게는 만삭인 부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아침 부인이 말하길

    “여보!  어제 밤 꿈에 말한 마리가 온천으로 들어가

    목욕을 하는 꿈을 꾸지 않았겠어요.  

    아마도 우리가 말처럼 활달하고

    기운 센 아들을 얻게 될 태몽인 것 같아요.”라고 하였다.  

    조씨는 심히 기뻐하여 “그것 참 좋은 태몽이구려.  

    어서 빨리 우리 아들을 보았으면 좋겠소.”라고 하였다. 

     사흘 뒤 조씨 부인은 매우 건강한 사내아이를 순산하였고,

    조씨는 태몽을 따라 아이의 이름을 ‘온마 (溫馬)’라 하였다. 

     세월이 흘러 조온마가 스무 살이 되었다.  

    조온마는 조씨 부부의 기대와는 다르게,

    마을의 처녀란 처녀는 죄다 욕보이는 난봉꾼이 되었다. 

     이를 보다 못한 마을 사람들은 결국 조온마를 관아에 고발하였고

     조온마는 판관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판관이 말했다. 

     "조온마난색기 (趙溫馬亂色期)" 

     “조온마는 색기로 인하여 마을을 어지럽혔다. 

     따라서 거세를 당함이 마땅하다.”  

    결국 조온마는 거세를 당하였고,

    후일 사람들은 경거망동이 행동하는 사람에게

    조온마의 일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조온마난색기’라고 충고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온마난색기 (趙溫馬亂色期) 

    경거망동한 사람에게 충고할 때 쓰는 말. 

     이 고사 성어는 ‘분수에 지나친 행동을 경계하라’는

    깊은 교훈을 담고 있다. 

     

    족가지마 (足家之馬) 

    아주 먼 옛날 중국 진나라 시대에,

     어느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 사람들의 성씨는

    신체의 일부를 따르는 전통이 있었다.  

    대대로 귀가 큰 집안은 이 ()씨,

    화술에 능통한 사람을 많이 배출한 집안은

     구 ()씨 하는 식이었다.  

    그곳에 수 ()씨 집안이 있었는데,

    그 집안은 대대로 손재주가 뛰어난 집안이었다. 

     이 수씨 집안에는 매우 뛰어난 말 한 필이 있었는데,

    이 역시 수씨 집안의 손재주에 의해 길들여진 것이었다.  

    어느 날 도적들과의 전쟁에 수씨 집안의 큰아들이

    이 말을 타고 나가 큰 공을 세워 진시황으로부터 벼슬을 받았다. 

     이것을 본 앞집의 족()씨 집안에서는

    “손재주나 우리 집안의 달리기를 잘하는 발 재주나 비슷하니

     우리도 말을 한 필 길러 봄이 어떨까.......”하여

    말한 필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한 달 후, 도적들이 보복을 위해 마을로 내려왔다. 

     이를 본 족씨는 아들에게 “어서 빨리 수씨 집안보다 먼저

    우리말을 타고 나가거라.”라고 일렀고,

    족씨 집안의 장자는 말을 타고 나가다

    대문의 위 부분에 머리를 부딪혀 어이없게도 죽고 말았다.  

    이를 본 족씨는 통곡하며

    “내가 진작 분수에 맞는 행동을 했더라면

    오늘 의 이 변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을.......”하

     큰 아들의 주검을 붙잡고 통곡하였다.  

    이때부터 세인들은

    분수에 맞지 않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곤 한다. 

    "족가지마 (足家之馬)" 

    자기의 주제도 모르고

    남의 일에 참견하거나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 흔히 하는 말. 

    족가고인내 (足家苦人內): 

    옛날 족씨 가문의 큰아들이 집안에서

     죽음으로 인해서 비롯된 말. 

     

    어주구리(漁走九里) 

    옛날 한나라 때의 일이다.

      어느 연못에 예쁜 잉어가 한 마리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디서 들어 왔는지 그 연못에 큰 메기 한 마리가 침입하였고

    그 메기는 잉어를 보자마자 잡아먹으려고 했다.  

    잉어는 연못의 이곳 저곳으로 메기를 피해 헤엄을 쳤으나

    역부족이었고 도망갈 곳이 없어진 잉어는

    초어()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다.  

    잉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뭍에 오르게 되고,

    지느러미를 다리 삼아 냅다 뛰기 시작했다.  

    메기가 못 쫓아오는걸 알게 될 때까지 잉어가 뛰어간 거리는

     약 구리 정도이었을까,

    아무튼 십리가 좀 안 되는 거리였다.  

    그때 잉어가 뛰는 걸 보기 시작한 한 농부가

     잉어의 뒤를 따랐고 잉어가 멈추었을 때,

     그 농부는 이렇게 외쳤다. 

     “어주구리 (漁走九里)!”  

    그리고는 힘들어 지친 그 잉어를 잡아

     집으로 돌아가 식구들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는 얘기이다. 

    어주구리 (漁走九里) 

    능력도 안 되는 이가 센 척하거나 능력 밖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주위의 사람들이 쓰는 말이다.  

    이 고사 성어는 말 할 때 약간 비꼬는 듯한 말투로

    약간 톤을 높여 말하면 아주 효과적이다. 

     

    선어부비취 (善漁夫非取) 

    중국 원나라 때의 일이다. 

     어떤 마을에 한 어부가 살았는데

     그는 너무나도 착하고 어질어서

     정말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정도였다. 

     그래서 항상 그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마을에 새로운 원님이 부임하게 되었는데

    는 아주 포악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 원님은 부임한 뒤 그 마을에 한 착한 어부가

     덕망이 높고 마을 사람들의 신임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저 어부를 제거 할 수 있을까?  

    생각하던 중 원님은 묘안을 하나 짜내게 되었다.  

    그 어부의 집합에 몰래 귀한 물건을 가져다 놓고

     그 어부가 그 물건을 가져가면 누명을 씌워

    어부를 죽일 계획을 세운 것이다. 

     첫 번째로 그는 그 어부의 집 앞에

     쌀 한 가마니를 가져다 놓았다.  

    하지만 그 어부는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그 쌀 가마니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님은 두 번째로

    최고급 비단을 어부의 집합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화가 난 원님은 최후의 수단으로

    커다란 금송아지 한 마리를 집합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나 어부에게는 금송아지 마저 소용이 없었다. 

     어부가 손끝 하나 대지 않은 것이다. 

     그러한 어부의 행동에 화가 난 원님은

    그 자리에서 이렇게 탄식을 했다.

     “선어부비취 (善漁夫非取)!”  

    “착한 어부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구나!” 

    그 뒤로 어부에게 감명 받은 원님은

    그 어부를 자신의 옆에 등용해 덕으로 써

     마을을 다스렸다고 전해진다. 

    선어부비취 (善漁夫非取) 

    자신이 뜻한 대로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약간 화가 난 어조로 강하게 발음한다. 

    이 고사 성어는 그 때 당시 중국 전역에 퍼졌고,

     마침내는 실크 로드를 타고 서역으로까지 전해졌으며

    오늘날에는 미국, 영국 등지에서 자주 쓰이고 있다고 한다.

    d

    저작자표시 비영리 변경금지

    '지식의 寶庫'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직도 풀리지 않는 고대 세계의 미스터리 5가지  (0) 2017.03.24
    한국 속담집  (0) 2016.02.08
    달면삼키고, 쓰면 뱉는다...  (0) 2015.07.22
    가난한 나라의 지뢰 제거 방법!  (0) 2015.05.30
    워렌 버핏의 돈버는 비결 10가지  (0) 2015.05.10

    교황 "종교마다 하나님 만나는 길 달라… 종교 관계 없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는 방법은 종교마다 다르다고 말했다.
    (Photo : 출처 = 유튜브 동영상 캡처)
    프란치스코 교황은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는 방법은 종교마다 다르다고 말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불교, 유대교, 가톨릭, 이슬람 등 각 종교의 상징물을 들고 종교간 화합을 요청하고 있다.
    불교, 유대교, 가톨릭, 이슬람 등 각 종교의 상징물을 들고 종교간 화합을 요청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 6일(현지시간) 공개한 동영상을 통해 종교간 화합을 호소하는 한편 모든 종교인들이 평화와 정의를 위해 함께 대화하고 일하자고 요청하면서 기도를 부탁하고 나섰다.


    그러나 종교마다 하나님을 찾고 만나는 길이 다르다는 종교 다원주의적인 발언은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교황은 또 종교에 관계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동영상에는 불교 여승, 유대교 랍비, 무슬림 지도자, 그리고 가톨릭 신부가 등장한다. 이어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른 종교의 신앙인들을 만나고 기도했던 지난 발자취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교황은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앙인이라고 말한다"면서 "종교 간의 대화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기도하고,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과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후 불교 여승인 린첸 칸드로(Rinchen Kandro)가 등장해 "나는 붓다(석가모니)를 믿는다"고 말한다.


    이어서 유대교 랍비인 대니얼 골드먼(Daniel Goldman)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 또 가톨릭 신부인 기예르모 마르코(Guillermo Marc?)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무슬림 지도자인 오마르 아보우드(Omar Abboud)는 "나는 알라를 믿는다"고 한다. 다시 등장한 교황은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낀다"면서 "하나님을 구하고 만나는 방법도 다르다"고 말한다.


    이어 "이렇게 많은 사람들, 이렇게 다양한 종교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한 가지 확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가 모두 신의 자녀라는 것"이라고 했다. 각각 "붓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알라를 믿는다"고 했던 네 명의 종교인들은 각각 "나는 사랑을 믿는다"고 말한다.


    교황은 "나는 여러분들이 이번 달 나의 기도 요청을 퍼트려주기를 바란다"면서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의 진지한 대화가 평화와 정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서 "나는 여러분의 기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동영상은 끝난다.



    출처: 재경일보 USA (http://www.jknus.com/)

    sol1.jpg


        돈 많은 재벌부부가 살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자식이 없어
        긴 여생을 조금은 쓸쓸하게 보냈다.
        그래서 노부부는 그 많은 재산을
        유익한 일에 쓰고 싶었다.

        "우리,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헌납하기로 해요."
        다음 날 부부는 미국의 명문 하버드 대학을 방문하였다
        정문을 막 들어서려는데 허름한 옷차림의
        두 노인을 본 수위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불친절하게 따지듯이 물었다.
        "노인양반들 지금 어디로 가려고 하는거요?"
        "총장님을 좀 뵈러 왔는데요."

        수위는 아주 경멸하는 태도로 괄시하며 답했다.
        "총장님께서는 댁들을 만날 시간이 없소!"
        노부부는 수위의 태도에 불쾌했지만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물었다.

        대학교 설립하려면 돈이 얼마나 듭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압니까?
        댁들 같은 사람들이 그건 왜 묻습니까?"

        마음에 상처를 받은 노부부는 기부하는 것을
        없던 일로 하고 직접 학교를 짓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가진 전 재산을 투자하여
        설립한 대학이 바로 지금 미국에서 제일가는
        대학중의 하나인 스탠포드이다.

        한편 이 사실을 뒤늦게 안 하버드 대학에서는
        그 날의 잘못을 반성하며 아쉬워했다.
        그 후부터 하버드 대학 정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붙어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DON'T SHOW FAVORITISM"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라고 ...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사람의 특징 20가지  (0) 2016.04.07
    두손 없는 소금 장수의 장엄한 인생!  (3) 2016.03.31
    "교자이의"(敎子以義)  (0) 2016.01.23
    겨울에도 씨뿌리는 사람  (0) 2016.01.19
    기쁨을 같이 하고픈 사람들  (0) 2016.01.09
     
    
    
    
    얼굴은 그 분이 주셨지만,  
    표정은 내가 드릴 선물
    
    몸은 그 분이 주셨지만,  
    건강은 내가 드릴 선물
    
    
    눈은 그 분이 주셨지만, 
    성경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건 내가 드릴 선물
    
    입은 그 분이 주셨지만
    좋은 말을 하는 건 내가 드릴 선물
    
    귀는 그 분이 주셨지만 
    애써 귀 기울여 듣는 건 내가 드릴 선물
    
    
    손은 그 분이 주셨지만
    땀 흘려 수고 하는 건 내가 드릴 선물
    
    발은 그 분이 주셨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뛰어 가는 건 내가 드릴 선물 
    
    
    가정은 그 분이 주셨지만 
    천국으로 만드는 건 내가 드릴 선물
    
    남편(아내)은 그 분이 주셨지만
    사랑으로 섬기는 건 내가 드릴 선물
    
    자식은 그 분이 주셨지만
    가꾸고 키워가는 건 내가 드릴 선물 
    
    
    교회는 그 분이 주셨지만 
    충성하고 섬기는 건 내가 드릴 선물
    
    
    성경은 그 분이 주셨지만 
    말씀을 읽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나의 속 사람을 아버지를 닮게 하는 고백은 내가 드릴 선물 
    
    
    하늘 아버지 집에 가는 그 날 까지 ~~
    레나 마리아의 고백
    
    
    
    

    '은혜의 단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에게 폭풍이 왔다  (0) 2016.02.07
    예수와 대화하는 히틀러  (13) 2016.02.05
    기도할 수 있는데  (0) 2016.01.23
    주님의 음성  (0) 2016.01.22
    성령의 뜻-1800 년의 인내심  (0) 2016.01.15

    참고 자료는 미국 위키 백과(Wikipedia)와 이구한 선생이 엮은 청아출판사의 <이야기 미국사> 를 주로 했다.

    1. 멕미 전쟁(The Mexican-American War)

    보통 멕미 전쟁을 ‘멕시코전쟁(the Mexican War)’이라고도 하고, 아니면 ‘첫 아메리카의 중재(the First American Intervention)'라고 말한다.

    미연방과 멕시코 간 1846년에 이 전쟁이 시작하여 1848년에 끝난다.
    이 전쟁 발발 원인은 1845년 텍사스(The Republic of Texas)가 미연방에 합병되자 멕시코가  자극을 받으면서 전쟁이 일어난다.


    [텍사스의 독립]


    본래 텍사스는 1936년까지 멕시코 영토였다.
    1936년 5월14일 벨라스코 조약(The Treaties of Velasco)이 성립되면서 텍사스는 멕시코로부터 해방되어 독립국이 된다.

    그 전의 내용을 좀 소개해야 할 것 같다.
    1820년대부터 미국 동부에서 건너기 힘든 미시시피(Mississippi) 강을 건너 서부로 이주가 한참 시작일 때의 이야기다. 그 당시 텍사스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멕시코 땅이었다.

    1823년 이곳은 ‘텍사스의 아버지(The Father of Texas)'로 잘 알려진 스티븐 오스틴(Stephen F. Austin;1793.11.3.~1836.12.27)이 멕시코 정부로부터 개척지를 만들 수 있는 권리를 얻어낸 곳이었다.

     

    서부개척시대 영화에도 이따금 나오는 이야기로 그저 땅에 줄만 치면 내 땅이라고 하던 그런 곳이었다.


    대략 300여 명이 처음으로 도착했고 그 다음 연속적으로 목축업자들을 비롯해서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또 산타페(Santa Fe)에는 멕시코와 무역이 이뤄지면서 수많은 미국인들이 늘어났다.


    1824년경에 80여 명의 미국 상인들이 25대의 포장마차와 150 필의 말을 타고 산타페에 나타나 3만 달러어치의 상품을 가지고 19만 달러의 멕시코 상품과 교환했다고 한다.


    대단한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장사를 알고 사람들은 자꾸만 들끓었다.
    처음에는 멕시코 정부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오는 미국인들을 환영을 했었다.


    그러나 불과 3년 후인 1827년에는 멕시코인 한명에 미국인들이 열 명의 비율이 되자 멕시코 정부에서 이민자들을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 시작했다.


    그래도 막무가내 들어오고 있었다. 1935년 텍사스의 미국인들은 대략 3만이나 되었다.
    그래 멕시코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서 막는가하면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하면서 강경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이에 미국인들은 1935년 텍사스혁명(Texas Revolution; 1835.10.2.~1836.4.21) 을 일으킨다.


    텍사스의 미 국민들의 반란을 진압하기위해 멕시코는 대통령까지 직접 군대를 지휘하며 전쟁에 참여했다. 처음 알라모(Alamo)와 골리아드(Goliad) 전투에서는 승리를 했다.


    그러나 미국인들도 당차게 덤벼들었다. 그들은 샘 휴스턴(Sam Houston; 1793.3.2.~1863.7.26.) 장군의 지휘아래 샌화킨토 전투(Battle of San Jacinto)에서 멕시코 군을 대파하면서 대통령도 생포한다.


    그리고 벨라스코 조약(The Treaties of Velasco)을 성립 시킨다. 그래서 텍사스는 멕시코로부터 1936년 5월 14일 독립이 되는 것이다.

    333px-Wpdms_republic_of_texas.svg.png
    텍사스 공화국 일 당시 대략 10년 간 (from Wikipedia)


    [멕미 전쟁]


    그런 자기 땅이었던 텍사스가 미국으로 합병을 한다고 하니 멕시코 정부가 항의 성명을 내면서 미국 주재 멕시코 대사를 소환하고 공식적으로 국교를 끊는다.


    미국의 제임스 포크(James K. Polk;1795.11.2.~1849.6.15. 제11대 1845~1849) 대통령도 최악의 사태가 발생할 것으로 판단하여 재커리 테일러(Zachary Taylor;1784.11.24.~1850.7.9. 후일 미국 제12대 대통령(1849~1850)) 장군을 멕시코로 급파하면서 존 슬라이델(John Slidell; 1793~1871.7.9.)을 특명대사로 보냈다.

     

    이는 텍사스를 비롯하여 뉴멕시코(New Mexico) 그리고 캘리포니아(California)까지 매수하겠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는 미국 대표를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포크 대통령은테일러 장군에게 지시하여 멕시코 국경에 있는 리오그란데(Rio Grande) 강의 진지를 점령하라고 한다.

    동시에 멕시코와 선전포고 교서를 의회에 보내려할 때 국무장관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1791.4.23.~1871.7.9. 후일 제15대 미국 대통령(1857~1861))이 의안을 제시한다.


    멕시코에서 먼저 침략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도록 조언을 한다.
    마침내 1846년 4월 멕시코 군의 제1선 부대가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미군 진지를 강타하고 만다.
    포크 대통령은 즉각 의회에 교서를 전달한다.

    그리고 미 의회는 1846년 5월 12일 선전포고를 한다. 그리고 곧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부터 멕시코는 밀렸다.
    더군다나 캘리포니아 미국인들이 탐험가이자 군인인 존 플레몽(John C . Flemont;1813.1.21.~1890.7.13.)을 앞장세워 일대 반란을 일으켰다.


    또 한편으로 포크 대통령은 윈필드 스콧(Winfield Scott;1786.6.13.~1866.5.29.)장군을 멕시코시티(Mexico City)로 진격을 명한다. 그리고 멕시코시티를 함락한다.


    멕시코는 전력도 약했지만 통치가 문제점이 들어나면서 와해되기 시작한다.
    가장 두드러진 전쟁은 1846년 7월 7일 교전을 한 몬터레이 해상전투(Battle of Monterey)에서 멕시코는 크게 지고 말았다. 또 1847년 2월 22~23일 부에나 비스타 전투(Battle of Buena Vista)에서 대패하였다.


    사실 전쟁은 1년 반 정도에 끝이 났다. 서로간의 타협점을 찾기까지 걸린 시간이 있었을 뿐이지만 그 사이 소규모 분쟁은 수시로 있었다고 한다.

    1848년 2월2일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The Treaty of Guadalupe Hidalgo)이 체결된다.
    미국은 멕시코로 1800만 달러를 지불하기로 하고, 멕시코 정부가 미국 민간인들에게 지고 있는 빚까지 탕감해 주기로 결정하는 조항이 들어가 있다.


    그러니 현재 캘리포니아와 뉴 멕시코 땅은 미국이 매수한 것이나 다름없는 땅으로 보아도 된다.
    그래서 1848년에 캘리포니아는 미국 땅으로 되고 1850년 9월9일 서른한 번째로 미국 연방에 편입한다. 뉴 멕시코는 1912년 1월6일에 마흔 일곱 번째로 미국연방에 가입한다.


    그래서 지금도 텍사스와 멕시코 경계는 리오그란데 강을 사이에 두고 있게 된 것이다.

    * 이 글 속에도 지명이나 단어에 따라 사건들이 수없이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래서 역사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Battle_of_Veracruz.jpg
    멕미 전쟁. 베라크루즈(Veracruz) 전투를 묘사. (Wikipedida)

    Mexico_nebel.jpg
    미국이 멕시코 시티를 점령하다.

    Gabriel.S Oboe



    ☆요한복음 1장
    http://me2.do/5p74ndI6

    ☆요한복음 2장
    http://me2.do/FCvi65PQ

    ☆요한복음 3장
     http://me2.do/xPkCINew

    ☆요한복음 4장
     http://me2.do/F3UB6aas

    ☆요한복음 5장
    http://me2.do/xiO6JMRW

    ☆요한복음 6장
    http://me2.do/xJ24FRP

    ☆요한복음 7장
    http://me2.do/Fc3CrLPa

    ☆요한복음 8장
     http://me2.do/xE920PKF

    ☆요한복음 9장
    http://me2.do/GgGZmows

    ☆요한복음 10장
    http://me2.do/5ZEGKrzY

    ☆요한복음 11장
    http://me2.do/xqjG7w0n

    ☆요한복음 12장
    http://me2.do/xLHRdADg

    ☆요한복음 13장
    http://me2.do/F3UenEwZ

    ☆요한복음 14장
    http://me2.do/GXTmCxh6

    ☆요한복음 15장
    http://me2.do/xRIV1IFh

    ☆요한복음 16장
    http://me2.do/GXThIoI1

    ☆요한복음 17장
    http://me2.do/FblROk5M

    ☆요한복음 18장
    http://me2.do/IxtDsPdV

    ☆요한복음 19장
    http://me2.do/GatD6vh8

    ☆요한복음 20장
    http://me2.do/xM70Uo7L

    ☆요한복음 21장
    http://me2.do/5ojhoxfs



    정동섭 교수

     

     

    [편집자 알림: 아래의 글의 저작권자는 '? 바른믿음'이다. 페이스북에서 옮겨 싣는다. 저작권자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글쓴이 정동섭은 신학자 권호덕, 스탠리 그렌츠, 피영민 등의 책을 참고하여 근래에 주목을 받고 있는 이 주제를 간명하게 간추려 소개한다.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하는 최근의 일부 종말론과 관련하여 참고할만한 글이라고 생각된다. 글의 내용은 <리포르만다>의 신학 견해와 다를 수도 있다.]

     

     

    이단들이 좋아하는 세대주의적 성경해석

    이스라엘과 교회, 율법과 은혜 분리하는 것이 큰 문제

     

    정동섭 목사 / 가족관계연구소 소장 (전 침신대 교수, Ph.D.)

     

    1. 세대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세대주의 신학은 영국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제교회(Separatist Plymouth Brethren) 지도자 달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9세기 중반에 영국 성공회가 부패했다면서, 교파를 떠나 형제운동을 시작하며 세대주의를 체계화한 사람이다. Darby의 지도하에 형제교회는 급성장했는데, 세대주의는 영국과 미국의 근본주의에 유입되면서 가시적인 기성교회의 제도와 충돌하였다. 신학적으로, 교회적으로 편협한 노선을 주창하면서, 뉴톤(B.W. Newton)과 심한 논쟁 끝에 달비는 배타적 형제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영미에는 개방적인 형제교회Open Brethren도 있는데, 우리나라에 도입된 것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형제교회다).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시스템에 따라서 신학이 크게 두 갈래로 갈라지는데, 하나는 루터와 칼빈이 가르친 개신교 ‘언약신학’에 기초한 ‘개혁주의 신학’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대주의 신학’이다. 세대(dispensation)는 세계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세대 속에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전개되는 것을 가리킨다.

     

    초기 선교사들은 대부분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 복음을 우리나라에 전파했다. 형제교회 창시자 달비와 성경주석자 스코필드는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구속적 계획을 마련하였다고 보았다. 세대주의에서는 성경 역사를 무죄(innocence)시대, 양심(conscience)시대, 인간통치(human government)시대, 약속(promise: Patriarchal Rule)시대, 율법(Law)시대, 은혜(grace)시대, 천년왕국(Kingdom: Millennium)시대 등 일곱 가지 시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각 시대마다 하나님이 새로운 구원의 길을 제시해주셨다고 주장하였다. 세대주의 신학에 의하면, 각 시대마다 구원 얻는 방법이 다르다. 양심시대는 양심에 따라 살면 구원을 받고, 율법시대에는 율법을 따라 구원받는다는 식이다. 시대마다 다른 구원의 길을 주셨다는 교리였다.

     

    그래서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는 주장이 나왔다. 모세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킬 것을 언약하였지만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실패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주장은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적대적인 관계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지금 성도들은 은혜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십계명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유일한 법칙이 될 수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세대주의 종말론은 “더 이상 율법이 필요 없다”는 율법폐기론(antinominianism)으로 이어졌고, 기독교의 윤리성은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오대양사건과 세월호사건을 일으킨 유병언의 구원파라 할 수 있다. 회개무용론을 가르치고 있는 또 다른 구원파의 교주 박옥수도 세대주의 신학을 따르는 돌파리 목사 중 하나다. 이 신학에 영향을 받은 많은 정통교회도 은혜를 누린다면서 율법을 무시하는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기독교의 큰 문제 중에 하나는 바로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한 것이다. 세대주의적 사고에 따라,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었고, 우리는 율법과 관계가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만이 우리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율법폐기론이다. 세대주의 율법관과 종말론이 한국기독교를 망치고 있고, 많은 이단을 양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리교 사회학자 이원규 교수는 “한국교회는 교파분열이 심하고, 사이비 이단종파가 많으며, 품위 없는 성직자가 많다”고 지적하였다. 예수님은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셨다. 물질주의로 나타나는 탐심과 성적 타락은 그 배후에 개혁주의 언약신학의 반대 입장에 서 있는 세대주의 신학이 한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달비는 유럽과 뉴질랜드, 미국과 캐나다를 여행하면서 세대주의를 보급하였고 많은 사람을 형제교회(Brethrenism)로 회심시키려 시도하였다. 그의 세대주의 종말론은 1883-1897에 연례적으로 열렸던 Niagara Bible Conference를 통해 전파되었다. 많은 침례교인과 감리교인, 그리고 장로교인들이 그의 신학적 전제를 수용하였지만 기존교단에 대한 비판으로 교단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정통교단을 떠나지는 않았다.

     

    1920년대 당시 자유주의가 성경적 가르침을 거부한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세대주의자들과 프린스톤 칼빈주의자와 같은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달비의 세대주의 신학을 수용하면서 그의 종말론은 미국 근본주의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C.I. Scofield Reference Bible은 50년 동안 3백만 부가 팔렸는데, 그 영향으로 Biola, Moody, Dallas, Grace와 같은 신학교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한 종말론을 가르쳤다.

     

    달비는 개신교 교리의 핵심이 되는 두 가지를 부인하였다. ⑴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의인이 된다는 ‘전가설’, 즉 이신칭의의 교리를 부인하였다. 죄인이 예수를 믿으면 ‘놀라운 교환’(wonderful exchange)이 일어나는데, 우리가 가진 죄를 예수님께 드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를 주신다는 교리이다. 신학자들은 이 교환을 전가(imputation)라고 부른다. ⑵성도의 성화과정에 필요한 십계명의 규범적 기능을 부인하였다. 칼빈이 말한 ‘율법의 제3용도’를 부인하였다. 결국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세대주의 종말론과 근본주의신학을 바탕으로 사역하였다. 결국 십계명을 무시하는 도덕률폐기론, 즉 율법폐기론이 만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신학의 극단적 열매가 구원파의 회개무용론, 도덕률폐기론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 한국의 개신교는 세대주의 신학의 지배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세대주의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이스라엘과 교회, 그리고 율법과 복음을 이원론적으로 이해하였다. 점진적 계시와 관련하여, 한 세대는 하나님의 경륜 안의 한 단계다. 1960년대 초부터 세대주의적 성경해석으로 회개없는 잘못된 구원과 임박한 종말을 강조하며 나타난 이단은 다미선교회나 구원파만이 아니다. 지방교회의 사상적 뿌리도 세대주의다. 기존교회 안에서도 특히 극단적 세대주의 신학(ultradispensationalism)에 따라 성경을 해석해 이스라엘이 독립하던 해 1948년으로부터 한 세대되는 1988년 전후에 예수가 재림하고 신자들은 휴거된다고 가르치던 대형교회 목사들이 있었다.
     

    2. 세대주의 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언약신학)은 어떻게 다른가?

     

    세대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어떤 특별한 계시에 순종하는 것과 관련해 인간이 시험받는 기간”이다. 세대주의는 구약은 율법시대, 신약은 은혜시대로 구분하기를 좋아한다.

     

    세대의 수: 바울은 적어도 세 개의 세대를 언급한다. 현재 이전의 세대(골 1:25-26), 현 세대(엡 3:2), 그리고 장래 세대(엡 1:10). 이 세 세대는 네 번째 세대를 요구하는데, 율법 이전 세대다. 그리고 율법 이전 세대는 다시 두 개로 분류되는데, 타락 이전과 타락 이후로 구분된다. 성경의 전천년설적 이해의 관점에서는 적어도 다섯 세대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7세대는 노아홍수 이후의 한 세대와 아브라함의 부름을 계기로 한 또 한 세대를 상정하고 있다.

     

    세대주의신학은 문자적 해석원리를 따른다. 이 해석원리를 적용하다보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교회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구분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구약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고 오순절 날 시작된 것으로 본다.

     

    유병언, 이요한, 박옥수 등도 구원받은 사람은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여 가르쳤다. 그러나 성도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율법의 정죄와 저주에서 해방된 것이지 율법의 도덕적 교훈에서 자유하게 되었다, 즉 십계명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이 세대주의 신학의 맹점이다. 예수님은 간음 중에 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외면하고 은혜만을 강조하다 보니, 유병언과 구원파 교인들의 삶에서 보듯이, 양심의 가책이 없이 도적질하고, 간음하고, 거짓말하고, 남의 것을 속여서 빼앗고 탐내고 살인을 저지르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새대주의의 우산 아래서 수 많은 이단이 독버섯처럼 생겨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세대주의를 이단이라 할 수는 없지만 유사기독교의 나쁜 신학이 틀림없다.

     

    언약신학: 하나님은 행위언약에 실패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은혜언약(covenant of grace)을 준비해 주셨다. 은혜언약의 핵심내용은 누구든지 자기의 노력이나, 자기의 선이나, 자기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죄사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 영생을 소유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은혜언약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영생과 부활의 축복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고 노아와 언약을 맺고 최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 언약을 맺으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이삭, 야곱과 모세, 다윗과 언약을 맺고 점진적으로 그 뜻을 계시하셨는데, 모든 언약에 보면,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의 후손’, ‘야곱의 후손’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단수 ‘자손’(seed)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수로 적혀 있는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결국 이 모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천하 만민이 영생의 복을 얻게 되리라는 은혜언약에 대한 점진적 계시이다.

     

    구약시대에는 그림자와 예표를 통해 구원을 받았지만, 신약시대에는 실체를 보고 믿고 구원받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구약시대에는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그림자였고 예표였지만, 시 언약은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주신다는 그림자를 폐한 언약이다(피영민, 2015).

     

    그리스도의 법과 모세의 법은 다른 법이 아니다. 신약과 구약에는 연속성이 있다. 각 법은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다; 그리고 두 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종용하는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의 법은 모세의 법을 더 심화시켰을 뿐이다.

     

    개혁신학(Reformed Tradition)은 멜랑히톤, 루터, 칼빈과 쭈빙글리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것으로, 모세의 법에는 도덕적이고, 의식적이며, 시민적 측면이 있는데, 도덕법에는 ①시민적, ②영적, ③규범적 3가지 용도가 있는 것으로 본다. 언약신학은 타락 이후 하나님은 하나의 은혜 언약 아래 역사하신 것으로 본다. 통일된 특징은 은혜의 언약이며 그 언약 아래 있는 구원적 계획이 있다. 구약에서는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받는 것으로 구약의 언약은 기대적 성격이 있고, 신약에서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성취된 구원으로 그 언약의 성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세대주의 신학은 율법과 복음을 대립적으로 이해했다. 율법의 세 가지 용도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면서 이단집단과의 논쟁을 하면서 정리된 것이다. 교회역사를 보면, ‘율법’(말씀)과 ‘성령’, 그리고 ‘나’ 사이에 세 가지 역학적 관계를 찾아볼 수 있다. ⑴말씀을 무시하고 성령의 역사만 강조하는 경우; ⑵말씀은 강조하는데 성령의 역사를 무시되는 경우; 그리고 ⑶말씀과 성령이 조화를 이루는 경우이다. 첫째는 율법을 배격하고 성령의 직통계시만을 강조하는 율법폐기론자의 경우로 율법을 폐하고 마음대로 살려던 이원론에 빠진 영지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지금 한국에는 성령 사역의 이름으로 다락방 운동(가계저주론, 조상 죄), 신사도운동(제3의 물결과 같은 현상적인 집회), 알파코스와 은사남용, G-12와 견고한 진, 쓴 뿌리, Soul Tie), 귀신론에 기초한 내적치유 운동이 행해지고 있으나 계명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이단들 가운데 김기동 베뢰아 운동, 변승우의 큰믿음교회 등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둘째는 말씀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우로서 율법주의 오류에 빠진 이들이다. 율법주의란 자기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사고방식을 의미한다. 이런 율법주의자의 문제점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선을 행한 다음 자기 의(義) 사상에 빠지는 데 있다. 성령의 도움 없이 율법을 지키려는 왜곡된 보수주의자들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말씀을 따라 생활하려는 노력이 강조되는 것에 비해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는 배제되는 성향이 있다. 세 번째는 받은 바 이신득의의 은혜에 감사해서 성령의 도움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말씀에 따라 생활하는 복음주의자들이 있다.

     

    약 130년에 이른 한국교회사 속에서 대부분의 교역자들과 부흥사들은 세대주의 신학에 근거하여 종말론을 가르쳤는데, 매우 극적인 내용들 때문에 듣는 자들은 쉽게 거기에 빠져들어갔다. 예수의 재림을 왜곡되게 가르치는 이단집단들이 세대주의 종말론에 뼈대를 둔 것은 그 매혹적인 극적인 정황 설명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세대주의 사상은 한국교인들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권호덕). 세대주의 사상에서 탈피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무천년 왕국설이 본격적으로 우라나라에 소개되면서부터이다.
     

    3. 율법이란 무엇인가?

     

    존 파인버그(John Feinberg)에 의하면,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주신 “삶의 규칙(rule of life),” 순종하고 지켜야 하는 계명들(commandments)이다. 율법은 넒은 의미로 성경전체, 중간적 의미로 모세 오경, 좁은 의미로 십계명을 가리킨다. 가장 좁은 의미에서 율법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인 십계명이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은 두 돌비에 새겨졌다. 첫 번째 돌비에는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 나와 있고, 두 번째 돌비에는 제5계명에서 제10계명까지 나와 있다. 전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대신(對神)관계가 기록돼 있고, 두 번째 돌비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대인(對人)관계가 기록되어 있다.

     

    율법의 기원은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있다. 하나님은 억압받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과 이웃, 그리고 모든 피조물과 참된 관계를 누릴 수 있는 지침서, 즉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은 그의 언약백성에게 영속적 관계를 위해서 항상 율법을 주신다. 율법에는 제사법적(ceremonial) 차원과 시민법적(civil) 차원, 그리고 도덕법적(moral) 차원이 있다. 세 차원은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레위기는 주로 제사법(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을 다루고, 신명기는 도덕법을 기록하고 있다. 의식적인 제사법은 금식과 침례(세례), 할례, 유월절, 정결법, 십일조 등과 관계되는 것이고, 시민법은 소송문제, 안식일, 결혼, 노동과 같은 신자들의 국가에 대한 책임을 다룬다. 도덕법은 안식일을 제외한 십계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것으로 거룩하고 선하며 의로운 것이다.

     

    십계명으로 대표되는 도덕법은 구약시대에나 신약시대나 언제든지 타당하게 적용되는 영구불변의 항존법(standing law)이다. 제사의식법은 신약시대에 적용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번에 영원한 희생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신약시대라 해서 십계명이 폐해진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세대주의적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신약에 와서 도덕법은 더욱 굳게 세워지고 있다(마 5:19; 롬 3:31). 신약에서 율법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모든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의 사랑을 한 데 묶어주기 위한 목적으로 순종하고 지키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구원파는 성경과는 너누 거리가 먼, 매우 위험한 율법이해를 하고 있다. 율법을 너무나 좁게 이해하고 있다. 율법을 설명할 때, 성령과 인간 사이의 역학적 관계 속에서 이해하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설명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성화를 위해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 것처럼 가르치고 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잠 29:18).

     

    율법은 어떤 기능을 하며, 어떤 가치가 있는가? 율법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한 까다로운 조건이 아니다. 율법은 우리를 살리고, 교육시키며, 마음을 정화시키고, 백성들을 하나로 묶으며, 사회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피영민, 2008).

     

    개혁주의 신학 전통에 따르면, 비신자는 율법을 순종하고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인해 저주 아래 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은혜에 의한 구원에 감사드릴 길을 마련해주고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보여줄 기본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성령은 또한 율법을 통해 죄를 책망하시며 회개케 하신다. 모세의 율법의 규범적이고 일차적인 용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규칙을 제공하는 것이다. 거룩한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모든 법의 근간이 된다.

     

    출애굽기에서는 십계명을 계속 ‘증거판’(Testimony)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신 것이라는 의미이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대한 계시다. 따라서 이 뜻에 순종하면 축복을 받고 거역하면 진노하신다는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드러난 것이다. 다음의 ‘율법의 3가지 용도’는 멜랑히톤,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가들의 이신칭의(이신득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율법의 3가지 용도: 하나님은 어떤 목적으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는가? 첫째로 율법의 용도 가운데는 악을 제어하는 시민적 용도(civil function)가 있는데 죄인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 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 율법은 자기를 비추어볼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십계명의 10가지 계명 중 8가지가 “하지 말라”는 부정적 명령의 형태를 갖고 있다. 그래서 칼빈은 “십계명은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재갈과 같다”고 했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지 않다는 것과 인간이 선하지 않다는 것, 인간은 저주와 정죄를 받기에 마땅하다는 인식에 도달하게 하는 데 율법의 목적이 있다. 우리는 율법에서 저주와 정죄 소리만 듣는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 3:20).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여Td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인간은 구원파에서는 율법의 죄를 인식하고 깨닫게 하는 기능만을 주로 강조하고 있다.

     

    둘째는 신학적, 영적 용도(spiritual function)로서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인식하도록 가르치는 용도로서, 율법은 죄를 책망하고 예수를 찾도록 하는 몽학(蒙學)선생의 기능을 한다. 율법은 절망에 빠진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도록 만들기 위해 주어졌다는 것이다. 율법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엄격한 교사(몽학선생)인 것이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도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 3:24).

     

    셋째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에게 해당하는 세 번째 규범적 용도(normative function)가 있는데, 누구든지 중생하면 율법을 지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을 수 있도록 기능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중생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가? 죄인은 회개한 후에도 여전히 죄인이고 또 죄인으로 남는다. 율법은 칭의함을 받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토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율법의 제3용도는 중생자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하는 것이다. 중생한 후에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다. 오직 성령의 도우심만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도움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다. 이 성령은 성화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특별히 십계명을 판단의 잣대로 이용한다.

     

    성경은 “율법은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고 신령하다(롬 7:12, 14)고 말하고, 율법을 ”하나님의 법“(롬 7:22, 25)이라고 부르고 있다.
     

    4. 성도의 행복을 위해 주신 율법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언하고 있다: “내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율법은 원래 구원받은 선민을 괴롭히고 억압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다. 명령과 규례를 지키면 우리는 행복해진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을 참으로 인격적으로 경험하게 되면, 율법폐기론이나 불순종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고, 은혜와 사랑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삶이 따르게 되어 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서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요일 2:3).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20).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히브리서 저자는 구원받은 성도는 피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히 12:1-3).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죄와 악이다. 이 세상에 있는 악의 세력의 근원은 마귀이고 내 안에 있는 악은 바로 죄성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세력, 즉 밖에서 성도를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사단의 세력과 안에서 거룩과 경건을 방해하고 성령의 소욕을 방해하는 죄성, 이 두 가지 세력과 싸우는 가운데 성화를 이뤄야 한다.

     

    율법은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그들의 사랑을 표현하고 그들의 하나님과의 관계와 서로의 관계를 관장하는 수단으로 삼으라고 주신 것이다. 율법은 구원의 방법이 아니고 언약적 관계 안에서 질서 있는 삶과 하나님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율법을 지키고 순종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그런데 이단 구원파는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기존교회에서 하는 것은 종교요, 자기들이 전하는 것은 복음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구원을 받으면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한국의 모든 정통교단은 구원파를 율법폐기론자(도덕률폐기론자들)로 규정한 것이다. 우리는 율법의 형벌과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이지, 그 교훈과 도덕률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다. 바울은 사랑으로 율법의 구체적 계명을 준수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엡 6:2).

     

    권신찬은 로마서 7장의 남편과 아내로 비유된 율법과 성도의 관계에 대하여 설교하면서,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으니”의 내용을 들어,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주일성수, 십일조, 금식, 새벽기도, 기도생활까지도 율법이라고 하여 이러한 규범에 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과거에 장로교 목사로서 이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으려 노력했던 것이 소용이 없었음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그는 이제 자기를 괴롭혔던 무서운 폭군인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게 되었다면서 은혜를 누리면서 자유롭게 살자는 무서운 자기복음을 만들었다(종교에서의 해방, p.43).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이 필요 없게 되었다고 하니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는 무엇으로 죄인지 알 수 있겠는가? 알 필요도 없는가. 아니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고 할 것인가? 도둑질, 간음, 부모거역, 탐심, 살인 등의 죄를 무엇으로 어떻게 알겠는가, 그리고 구태여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성경에서 율법이 폐해졌다고 말씀할 때는 그 율법이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해당하는 경우에 한해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모든 율법과 법도 즉 모세의 율법은 십자가로 폐한 것이 분명하다. 예를 들어, 할례나 제사제도나 절기 등의 제사법이나 시민법에 관련된 율법이 폐해졌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규례를 따르지 않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신자는 율법에서 자유하다.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서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뜻이다. 바울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임을 상기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선언하고 있다(갈 3:11-13).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신자는 율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신자는 자신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데 깊은 관심을 가져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 시내산 율법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출 20:2)고 소개하신 후에, 즉 죄의 굴레에서 속량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자 이제 너에게 보여준 자비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시편 1편은 복있는 사람은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하고, 시편 19편에서는 율법의 완전함을 노래하며, 119편에 와서는 “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35절)고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형벌과 저주에서 구원한 것이지 율법의 교훈과 윤리적 규범에서마저 해방시킨 것이 아니다. 모세 율법의 일부분인 도덕적인 윤리규범은 신약에 와서 다시 강조된다. 도덕적 율법은 폐한 것이 아니라 새 계명으로 주신 것이다. 사도 요한은 구원받은 성도가 율법(계명)을 지킬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고 말씀하신 후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절)고 가르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사단은 인생의 목적이 죄를 안 지으려 피 흘려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인생의 목적이 죄를 안 지으려 피 흘려 노력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지 않고 율법을 강화시켰을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를 경험해서 죄를 안 짓게 되길 원하신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원치 않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게 정상이다. 친밀하게 사랑하는 관계가 이루어지면, 율법과 죄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행하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은 같은 것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로 생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다(윤동일, 2008).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기 전에는 자기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노력이 율법의 반역을 초래하였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할 뿐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롭게 율법에 순종하여 의를 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성경은 율법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선언한다(롬 7:12). 바울은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이 선한 것인 줄 안다고 말했다(딤전 1:8).
     

    5. 율법과 은혜의 관계

     

    그리스도인은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에 율법을 행하는 것이다.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이다. 십계명을 주신 시기는 출애굽 후, 즉 구원받은 후이다. 율법은 구원받은 백성의 삶의 지침서이다. 은혜가 감사해서 주를 위해 율법을 지키며 생활하는 것이다. 최고의 경건은 계명 준수를 즐기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순종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불순종으로부터의 자유다.” 율법을 무시하고 준수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유도하는 종교는 하등종교, 사이비종교가 분명하다.

     

    율법과 은혜. “한국기독교의 큰 문제 중 하나는 바로 율법과 은혜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주었고, 우리는 율법과 관계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은혜만이 우리가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율법폐기론’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이 한국기독교를 망쳐놓은 원인 중 하나다...하나님의 십계명이 한국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고 그 영향력은 미미하다. 한국의 기독교는 은혜만 강조했지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는 율법폐기론에 빠졌기 때문이다. 모세 언약의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은혜 언약으로 가는 예표요, 단계다”(피영민, 2007).

     

    성경에는 아브라함 언약, 모세언약, 다윗언약, 등 많은 언약이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다. 그것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 언약이 여러 가지 언약들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는 “약속의 언약들”(Covenants of the Promise)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약속은 단수로 되어 있고 언약은 복수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 한 가지를 이루는 여러 가지 언약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모세의 가르침(언약)이나 나의 가르침은 동일하다”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준 언약과 모세언약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으로 볼 수 없다는 확실한 근거가 된다.

     

    율법은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하신 백성들에게 삶의 원리가 된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따라가야 할 삶의 원리이며 규칙이다. 십계명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모세언약은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사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삶의 원리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마음에 두고 십계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명을 우리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는 없다. 항상 거룩하고 완전한 계명을 늘 기준으로 삼아 우리 자신을 비추어보고,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또 죄가 있으면 회개하고 자복함으로써 죄씻음을 받고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은혜가 공짜라고? 은혜란 자격 없는 자에게 베푸는 호의이다. 우리는 흔히 은혜는 공짜로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조건 없는 은혜는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호의는 철저한 청산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씨뿌림은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목적으로 하는 투자다(마 13:1-7). 베풀어진 은혜에 대한 합당하 반응과 철저한 청산이 강조된다. 은혜는 자격이라곤 전혀 없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호의적인 투자다.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이 있다”는 우리 속담은 성경의 은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관계중심적인 체면사회에서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는, 거저 주어지는 공짜 선물이란 개념의 은혜는 없다. 선물은 자발적인 순환을 요구한다. 선물(은혜)을 받은 사람은 자발적인 고마움과 부채의식을 갖게 된다. 은혜의 조건은 먼저 우리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고(엡 2:9), 다음 조건은 선한 일을 행하게 하려는 것이다(10절). 신약성경은 구원이 은혜의 선물이니까 우리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충성스런 삶을 요구한다. 은혜는 하나님의 투자이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자는 심판의 대상이 될 것이다(이민규, 2014).

     

    갈라디아서는 신실함과 순종의 삶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한다(갈 5:16). 성령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다(갈 5:21).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약 2:24).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도 이후 지속적으로 죄와 싸우며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 구원받은 신자의 특징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아니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죄를 싫어하게 되고, 죄에 대해서 저항하게 되는 새로운 성향을 보이는 것이다. 구원받은 신자에게서는 죄와 투쟁하는 거룩한 삶의 새 질서가 시작된다. 존 웨슬리가 가르친 것처럼 ‘완전성화’란 신자의 삶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살아있는 동안 그 어떤 위대한 그리스도인도 완전하게 자신의 죄를 정복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전처럼 죄를 즐거워하거나, 무방비 상태로 죄에 끌려가거나, 편안한 마음으로 죄를 즐기고 사랑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시면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요 16:8).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설교자로 알려져 있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처럼 크게 오해되고 있는 말씀도 드물다. 이 말씀을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율법과 상관이 없다거나 율법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읽을 필요도,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고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과 그 도덕적 요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도덕률폐기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율법에 작별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더 이상 구원의 수단으로 율법 아래 있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존귀히 여겨야 할 것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를 행해야 한다“(로마서 7장 강해, p.27). 회개와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들은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진정으로 구원받은 신자는 그 결과로 삶 가운데 선한 행위를 보이게 되어 있다. 우리의 선행은 우리를 의롭게 해주지 못한다. 우리의 선행은 어디까지나 이미 우리를 새롭게 해주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행위다. 선한 일에는 거창한 일만 있는 게 아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 중 만물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가 ‘내 것!’이라고 선포하시지 않은 영역은 단 하나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세속적인 일’과 ‘신성한 일’(거룩한 일)이 따로 있지 않다. 마틴 루터도, 교회에서 하는 일만이 아니라 설거지와 빨래하기, 낙엽치우기, 기저귀 갈기도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5.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들: 예수님의 재림과 세대주의 종말론

     

    사도 요한이 본 천년왕국 비전에 대한 정확한 해석문제는(계 20:1-10) 2세기 이래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많은 흥분과 논란을 일으켜왔다. 그 과정에서 세 가지 기본적 입장이 확고해졌다. 그 세 가지 입장은 각각 재림이후에 천년왕국이 온다는 ‘전천년설(premillennialism),’ 천년왕국 후에 재림이 있다는 ‘후천년설,’(postmillennianism) 그리고 재림 이전이나 이후나 천년왕국이 없다는 ‘무천년설’(amillennialism)이다.

     

    각 견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기에 대하여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전천년설이 대세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지만, 현재는 천년왕국의 천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보는 무천년설을 추종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천 년을 지금 천국에서 이뤄지는 죽은 성도들의 통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세대주의 전천년설을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 전에 전쟁과 기근, 지진과 같은 징조가 있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증거되며, 배도와 함께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있고 7년 대환란이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은 대환란과 천년왕국을 교회가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 장으로서 본다. 교회시대의 정점은 휴거이며, 이때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신실한 제자들은 ‘공중에서’ 만나서 천국으로 데리고 가서 ‘어린 양의 혼인잔치’를 여실 것이다. 이렇게 참된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지면, 적그리스도가 7년 동안 악마적 통치를 시작하며, 이때 하나님의 진노가 땅위에 쏟아진다. 이러한 대환란 기간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이 와중에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의 군대와 함께 재림하셔서 주님의 원수를 모두 처부순다. 그 때 이스라엘은 비로소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것이며, 지상에 천년왕국이 세워질 것이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기독인들로 하여금 미래의 어떤 시점(예수의 재림시점)에만 집착하도록 만듦으로서 현실의 삶을 등한시하도록 만들었다. 1992년 10. 28. 휴거설을 주창했던 다미선교회나 현재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은혜로교회는 소속교인들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현실을 무시한 채, 강제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회개하게 만들었다.

     

    연대기적 해석을 하게 된 세대주의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분리시키고, 율법과 은혜를 대립적 개념으로 분리시켰다. 율법은 모세와 행위와 연관된 반면, 은혜는 그리스도와 믿음에 연관되어 이해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은 결코 구원이나 칭의의 수단으로 주어지지 않았다”고 말하는가 하면, 스코필드(Scofield)에 의하면, “율법은 죄인을 칭의하지도 않고 신자를 성화시키지도 않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세대주의 성향은 영적인 것과 실제적인 삶을 분리시킨다. 이런 이원론적 사고방식은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현실을 등한시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환상적인 이상에 몰두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미래의 어떤 유토피아나 지상천국을 약속한 이단종파에 미혹되어 현실의 삶을 망친 경우를 많이 목격하고 있다.

     

    무천년설에서는 천 년을 문자 그대로 볼 수 없고 완전수인 10을 세 번 곱한 충만 수로 봐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천년왕국의 천 년을 교회역사에 대한 상징으로 본다. 천 년이란 교회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승리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칼빈과 어거스틴도 이 입장을 취했다. 천년이라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모두 구원하시는 충만한 기간을 천 년으로 보는 것이다. 천 년은 단지 택한 백성을 전부 구원할만한 충분한 기간이다.

     

    20세기 한국의 많은 부흥사들이 전했던 세대주의전천년설은 성경을 벗어난 매우 불건전한 해석이다(피영민). 종말론과 관련된 이단들은 대부분 이 세대주의전천년설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공통적으로 7년 대환난, 휴거, 천년왕국, 144000, 666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종말에 대해 강박적 관심을 갖고 있는 구원파와 같은 집단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균형 있는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관심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현재의 세계정세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차츰 이 주제에 마음을 빼앗겨 정복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예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설교도 하지 않는다. 이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몰두 이상으로 영혼의 건강에 위험한 것은 없다. 러시아, 이집트, 이스라엘 및 그 밖의 나라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에스겔서 37,38장이나 다니엘서 7-12장 그밖의 예언적 관점에서 여러 시기나 경우를 계산하는 데 모든 시간을 소비하며 전생애를 투입하게 되기가 쉽다. 한편 영적 의미에서는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점점 무관심하고 등한히 될 수 있다. 물론 예언적 교훈은 성경의 중요한 일부이고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래 세계에서 일어날 사건들에 너무 관심을 가지는 나머지 우리가 지금 살아야 하는 생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우리들의 일차적인 위험은 균형이나 조화의 감각을 상실하는 데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나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14:36).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 13). “때와 기한은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 7). 우리는 복된 소망을 갖고 현실에 더욱 더 충실하고 주어진 사명을 더 충실히 감당하며 충성하고 봉사할 때 약속된 하나님의 상급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날과 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도로서의 거룩한 삶이다(마 24:36; 벧후 3:11,12).

     

    우리는 특별한 ‘종말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마지막 때로서, 세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절정에 이르기 직전의 시기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얼마나 될지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선견자 요한처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때가 가까우니라.”(계 22:10).

     

    우리가 지금 요한계시록에서 경고하는 말세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말세에는 네 가지 징조가 있다: ①사람의 징조 “미혹”이다(마 24:4); ②환란의 징조 “난리”이다(마 24:6); ③자연의 징조 “재난”이다(마 24: 7-8); ④종교적 징조 “이단”이다(마 24: 11, 23-24). 우리 모두는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다섯 처녀처럼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쁨으로 맞을 준비를 갖춰야 한다.

     

    우리는 재림이 가까워진다는 핑계로 나태하고 게으른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살전 4:11). 성도들은 재림하시는 주를 맞아 영접하여 영원히 주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불신자처럼 슬퍼해서는 안 된다. 시간과 시기에 대해 성도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 매일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

    참고서적

     

    권호덕.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그 사회적 적용]. 그리심, 2003.
    김민규. [신앙, 그 오해와 진실]. 새물결플러스, 2014.
    스탠리 그렌츠. [누구나 쉽게 배우는 신학]. CUP, 2000.
    이인규. [평신도들이 혼동하기 쉬운 성경 50]. 카리스, 2014.
    피영민. [신약개론]. 검과흙손, 2015.
    Walter Elwell. Evangelical Dictionary of Theology. Baker Book House, 1984.

    정동섭 cantoncrc@gmail.com

     

    출처: 최덕성 교수님의 리포르만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123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