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8장. 뉴에이지 운동 - 제4제국? [上] 무지개의 숨겨진 위험들

2012.04.19.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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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나마 "무지개의 숨겨진 위험들"의 8장을 두 번에 나누어 번역하려고 합니다. 우리와 조금은 관계가 먼 듯한 나찌독일과 연관된 내용을 되짚어 번역하는 이유는, (1) 파시즘이 장래의 신세계질서의 모습과 비슷할 것이라는 이유와, (2) 이 장의 내용에 있는 (소위 "우수한" 아리안족과 "열등한") 유대인들에 대한 미스테리 세력의 시각과 그들의 "계획"(the Plan)이 요한계시록 17-18장의 "미스테리 바벨론"의 해석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그들은 (카발라)유대인들의 시오니즘을 추진하면서 동시에 (참)유대인들을 증오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 참고하시고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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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뉴에이지 운동 - 제4제국? [上]

The New Age Movement - the Fourth Reich?

 

 

제한적으로 언급했던 것처럼, 뉴에이지 운동의 가장 놀라운 점 중의 하나는, 성경 예언의 분명한 성취라는 점 외에도, 이것이 히틀러의 나치즘과 닮았다는 점이다. 제3제국(나치독일) 중심에 있는 종교철학의 오컬트적 근원과 성격은 20세기의 가장 잘 감춰진 비밀 중의 하나다.

 

이 정보가 왜 이리 오랫동안 비밀로 지켜져 왔는지, 그리고 이것을 잘 아는 사람들에게 왜 이런 압력이 가해져 왔는지는 아마도 심판의 날까지 미스테리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몇가지 재미있는 단서는 있다.

 

윈스턴 처칠과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오컬트에 손댔다는 것은 알려진 바다. 아마 히틀러로 하여금 오컬트의 흑암의 행습들을 시행하도록 한 바로 그 루시퍼의 음모의 영이 나치즘 배후의 에소테릭(秘敎) 신비주의를 감추기 위해 서양 권력자들에게 옮겨갔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1930년대 앨리스 베일리가 드러낸 "더 플랜The Plan"(의 일부)에 알면서 참여한 사람들인가? "더 플랜"의 일부는 "그리스도"가 세계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신세계질서가 필요하다는 것과, 심한 전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세계의 기반 위에 "지헤의 마스터들"이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진실은 어쩌면 절대로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모든 실용적 목적에서, 뉴에이지 운동은 나치즘의 부활에 합당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모든 뉴에이저들을 나치(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뉴에이지 운동에 참여하는 상당한 수의 사람들은 선한 동기로 말미암아 순진하게 간여하고 있을 것이다.

 

나치즘과 비슷하게도, 뉴에이지 운동은 거대 기업처럼 조직되어 있다. 또한 나치즘처럼 이 운동은 입문자initiates, 숙련자adepts 그리고 마스터masters의 구조에 기초한다. 고위 입문자들은 항상 하위 입문자들보다 많은 것을 안다. 추장들은 언제나 인디언들보다 많은 것을 안다. 소령과 대령은 군대의 계획과 방침에 대해 항상 이등병보다 많이 안다. 모든 큰 기업들이 그렇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관여하는 일의 전체적인 성격이나 또는 그들 자신이 계획의 어느 부분에 정확히 들어가 있는지 모르는채 조용히 일만 한다. 모든 큰 조직의 대부분의 일반 구성원들은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반면, 경영진은 작업의 세부적인 것들과 전체적인 범위를 알고 있거나 알아야만 한다.

 

히틀러는 아직 어렸을 때에 오컬트의 고급 미스테리(단체)에 입문했다. 그는 그의 독일 집 근처의 베네딕트 수도원에 다녔다. 수도원장은 알비파Albigensians 또는 카타르파Cathars의 학문에 심취했는데, 그들은 그들이 신의 권능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은 점에서 아마도 초기 뉴에이저들로 정확히 분류될 수 있다. 히틀러가 이 학교에서 얻은 오컬트의 관심은 그의 성년기 전체동안 지속되었으며 그의 장래의 영적 철학을 형성하는 것을 도왔다.

 

히틀러가 건축가와 예술가로서의 커리어를 추구하며 비엔나에 있었을 때, 그는 여가 시간에 오컬트 서점에서 보내며 형이상학적 전승의 미스테리에 익숙해졌으며 "흑마법"과 "백마법"의 숙련자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는 의식의 초월상태와 정신확장에 매료되었으며 "더 높은 의식"higher consciousness을 추구하는데 그의 나머지 시간과 돈을 모두 들였다. 요가, 점성술, 그의 목표를 향한 동양과 서양의 "길"들은 그의 야망에 비해 너무 느렸고, 오늘날 성급한 뉴에이저들처럼 그는 명상을 약물로 보충함으로써 이 과정을 가속시키기로 했다.

 

메스칼린Mescaline은 그를 "의식의 더 높은 상태"로 데려다 주었으며 거기에서 그는 뉴에이저들과 오컬티스트들이 "아카식 레코드<<"라고 부르는 것 - 과거와 미래의 일들을 보는 악마적 비전 -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히틀러가 이 가속화된 길을 따른 목적은 그의 미래 운명에 대한 전망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최상부와의 접촉에 성공한 히틀러는 그가 루시퍼와의 의사소통을 이루었다고 믿었는데, 그는 공개적으로 루시퍼의 신내림possession을 갈망했다. 연구에 따르면, 정신확장 약물과, 마음비움이 필요한 초월명상이나 다른 형태의 명상은 같은 종류의 부작용을 일으키는데, 여기에는 플레시백flashback이나 과대망상이 포함된다. 그런 점에서, 히틀러는 장기적인 명상과 정신확장 약물 중독의 알려진 부작용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런 부작용들은 주된 효과(주작용)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그것은 히틀러에게 권력을 주었고 그가 국가를 탈바꿈시키고 지배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오컬트에 손댐으로 인한 최면효과가 히틀러에게 일어났다면, 이것은 국가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오컬티즘은 히틀러를 권좌에 세우고 그 권력을 지속시키는 데에 탁월한 역할을 했다.

 

다니엘서가 적그리스도에 대해 밝히듯이:

그 권세가 강할 것이나 자기의 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며.. (다니엘서 8:24)

적그리시도의 선구자/전신forerunner인 "짐승"에 대해 기술된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오컬티즘 수행을 통해 구해지는 "루시퍼 에너지"에 스스로를 개방한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나치즘과 뉴에이지 운동은 공히 똑같은 에소테릭 기초 - 모든 이방종교와 에소테릭 "기독교"의 기반이 되어온 "시크릿 독트린" - 에 기반한 정치적/영적 실체들이다:

 

그 "시크릿 독트린"은 유대/크리스천 신앙의 반대antithesis 反라고 요약하는 것이 어쩌면 최선인지도 모르겠다. 시크릿 독트린은 루시퍼를 그리고 성경이 정죄한 모든 수행들을 찬미한다.

 

시크릿 독트린은 또한 홍수전 세계, 즉 성경과 시크릿 독트린이 공히 말하는 [악마적 접신과 심령/영적 세력과 함께 살아있던 세계]를 찬미한다.

 

이것을 이해하면 다음 예수의 말씀이 오늘날 특히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누가복음 17:26)

노아의 때는 단순한 범죄와 폭력보다 훨씬 큰 것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 때는 또한 사람들이 악마적 힘(포스)에 활발하게 개입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창세기 6장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을 기록하는데, 일부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영적 세계의 존재들" 또는 악령들로 해석한다. 이런 종류의 인류와의 연관은, 악령적인 것이었다면, 의심의 여지없이 당시 창궐한 또다른 범죄와 폭력을 유발하는 동력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세상에 마지막으로 경고하시도록 했다. 파괴적 홍수에서 궁극적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그와 아내와 세 아들과 세 며느리들밖에 없었다.

 

이 사건에 대한 뉴에이저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비록 왜곡된 것이지만, 그들이 고백하는 그 오컬트 교리 속에 반영되었다. 더구나, 노아 이전 시대를 일컫는 "아틀란티스"의 안개 속에는 뉴에이지 교리와 나치즘 모두의 뿌리가 가려져 있다.

 

이 교리의 일부는 인류 민족들의 기원을 다룬다. "시크릿 독트린"은 그들이 아틀란티스로부터 기원했으며 아틀란티스 일곱 족속 중의 하나가 아리안 족속이었다고 여긴다. 비록 소위 여섯 개의 또다른 아틀란티스 족속들 - Toltecs, Rmoahals, Tlavatli, Turanians, Akkadians, and Mongols - 이 존재했지만, 아리안족은 아틀란티스 종족들의 마스터종족master-race 또는 슈퍼맨(超人)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통상적인 진화나 변이에 의해 슈퍼맨이 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홍수 이후 세계에서 사는 데 필요한 능력을 자신들에게 부여하기 위해 위쪽으로 양자도약quantum leap을 했다. 그들은 그들이 갈망하던 자질들, 예를 들면 자연의 힘을 다스리는 마법의 능력과 심령 개발psychic development 같은 자질을 일부 잃은 대신 혈종(blood stock)과 정신 능력에서 (그들보다) 열등한 다른 생존한 종족들보다 "우수한 지성"과 두뇌발달 능력을 얻었다.

 

이른바 그들은 신인God-men 또는 더 진전된 슈퍼맨들로부터 교육받았으며, 그들의 우수 혈종을 보호하기 위해 가르치는 데 모든 댓가를 그들은 지불했다. 그들을 다른 "열등한" 종족으로부터 구별한 것은 아마도 그들의 더 높이 "진화한" 지성이었다. 하지만, 이런 "우수한" 지성은 소위 "영적" 또는 심령적 성질을 희생시킨 댓가로 발전되었다. 이 "결함"을 바로잡고 아리안족이 심령력psychic powers을 잃지 않았음을 보기 위해 그들의 "마스터"들에 의한 입문Initiation 과정이 개발되었다.

 

따라서 아리안 사회에서 입문은 리더십을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이는 오직 입문자들 또는 숙련자들만이 종족을 지도하는 데 필요한 소위 슈퍼맨 또는 "고위 능력자"들과 소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아리안주의 교리는, 나치즘 그리고 또다른 형태의 반유대주의antisemitism와 인종주의 교리와 함께 뉴에이지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미스테리 교설들이 다신교와 범신론을 통해 온 세상에 퍼진 시대에, 그분의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따로 놓아두셨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한핏줄임을 분명히 말한다. 또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도 그랬음을 선언한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사도 바울은 모든 차별들, 심지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조차 폐지되었다고 명확히 말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교리를 받아들이는 곳에서는 인종주의와 반유대주의가 지속되기 어렵다. 모든 사람들이 다른 뿌리종족으로부터 진화했으며 서로 다른 진화의 발전단계에 놓여 있다는 교리가 가득한 곳에서는 (인종)분류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기 쉽게 된다.

 

"마지막 해법"Final solutions은 논리적 다음 단계가 된다. 이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 열방들은 우상숭배와 유아살해로 인해 벌받은 것이지 그들의 혈통 때문은 아니었다.

 

이런 아리안 우월주의 교리가 나치즘의 바탕에 깔려 있다. 이것은 종교적인 박해를 정당화시키는 것으로도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의식개발consciousness development이 위태로운 상태에 놓여있다는 믿음이 아리안 우월주의 교리의 핵심 요소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히틀러는 - 그가 유대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한 후에 - 크리스천들을 그의 말살 목록에 포함시켰다.

 

뉴에이저들은 조금 다른 순서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크리스천들을 처리한 직후 목록의 다음에는 유대인들이 나온다. 하지만 두 집단 모두 박해의 우선순위가 높은 곳에 놓여져 있는데, 유대인들은 크리스천들보다 약간 아래에 있다. 그들의 철학과 계획의 에소테릭 핵심에서 보면, 뉴에이저들은 유대 혈통을 가진 자들 위에 머물고 있는 혈통에 대한 오랜 오컬트적 아리안 교리를 지키고 있다.

 

지금은 사망한 뉴에이지 여사제 앨리스 베일리의 몇가지 인용들은, 전세계 유대인들을 향한 오컬트적 편견을 보여줄 것이다. 이것은 앨리스 베일리가 개척을 도운 그 운동에 포함되어져 온 것이다:

 

오늘날 [카르마(업/인과응보)] 법칙이 작용하고 있으며, 유대인들은 그들이 과거에 한 모든 일들에 대한 값을 실제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치르고 있다. 실제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그들은, 그들이 항상 그렇게 선택해 왔듯이, 분리를 의미한다. [앨리스 베일리에게 '악'은 '분리'로 정의된다.] 그들은, 그들의 상징적 역할을 잊고 또 선택된 백성은 인류(전체)이지 인류의 작고 사소한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자신들을 선택된 백성으로 여기고 그 고귀한 운명에 대한 고유의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수 세기 동안 거기(팔레스타인)에 살던 사람들로부터 거기를 떼어내면서 소위 팔레스타인의 반환을 요구한다. 또한 물질적 소유를 지속적으로 강조함으로 인해 그들은 참된 해법을 보지 못하고 있다... 유대인들 스스로 문제에 대해 더 많은 기여를 해야만 한다. 그들은 이집트 시대로부터 왜 많은 나라들이 그들을 좋아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는지에 대한 문제에 (민족으로서) 아직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면해 본 적이 전혀 없다. 하지만 반발이 이렇게 일반적이고 보편적일 때에는 그들 민족 특유의 이유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이방국가들에게 시정하라고 요구해 왔고 많은 이방인들이 그렇게 하려고 시도해 왔다. 하지만 유대인 스스로가 상황을 직시하고 그들에게 인과응보의 법칙[카르마의 법칙]의 보응적 면이 작용하고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할 때까지, 그들의 오랜 비참한 운명을 일으킨 것이 그들 안의 무엇(때문)인지 그들이 확인하도록 노력할 때까지, 이 기본적인 세계적 이슈는 변함 없이 남을 것이다... 유대인이 연관되어 있고 동화되어야만 하는 나라의 문명과 문화적 배경 그리고 삶의 표준에 유대인이 기꺼이 따르려고 함으로써 이 [유대인]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이것은 민족과 선택 개념의 자부심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 자신이 속한 매트릭스에 지속적인 거슬림의 원인을 제공하는 본질적으로 불필요한 교리와 관습을 포기함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이것은, 상거래 관계에서의 이기적 성향과 히브리 민족의 드러나게 조종하는 성향이 보다 사심없고 정직한 활동 형태로 바뀔 때 이루어질 것이다... 오늘날 유대인의 악한 카르마(업)는 그의 고립을 끝내기 위해 의도된 것이며, 그가 물질적 목표를 포기하고 다른 국가들과의 바운더리 안에서 조금은 기생하는 경향을 가지는 국민성(국적)을 포기하는 데로 그를 데려가기 위해 의도된 것이며, 분리적 불행 대신 폭넓은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 (에소테릭 치유 p. 263)

다른 모든 앨리스 베일리의 책들은 이와 같은 반유대적 경향을 표현한다.

 

"광선과 입문"The Rays and the Initiations에서 그녀는 새로운 "메시야"는 유대인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앞서 온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함으로서 특권을 상실했으며 유대인은 다른 어떤 민족들보다 겸손을 배울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그녀는 아마 그들이 "정화의 불"fires of purification 속을 지난 후에 그들이 새로운 "그리스도"에 적합한 혈통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이것은 1920년대 또는 1930년대에 쓰여진 것이 아니다. 앨리스 베일리는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세계가 알았던 1949년에 이 말들을 소위 "티베트 마스터"의 지시로 받아 적었다.

 

나아가 앨리스 베일리는 "에소테릭 심리학"Esoteric Psychology 1권에서 유대인 문제는 점성술에서 기원되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개성 광선personality ray, 유대 민족의 물질적 형태의 광선은 세번째 광선이다. 그들의 자아적 광선은 첫번째 광선이다. 그들의 점성술적 사인(별자리)은 처녀자리가 떠오르는 염소자리다. 수성과 처녀자리는 운명에서 현저한 역할을 한다. 이런 단서들은 고급 연구생과 점성술가에게 중요한 포인트를 제공할 것이며, 이것은 그들의 이상한 역사에 대한 빛을 유대인에게 비춰줄 것이다. 이 세번째 광선의 영향 때문에 유대인은 힘/포스와 에너지를 조종하고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영향력을 항사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민족으로서 그들은 자연적인 법제정자들이며, 따라서 그들에게는 지배하고 다스리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자아적 광선은 첫번째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 따라 그들의 역사 속에 염소가 지속적으로 등장하며, 메시야를 출산해야 하는 처녀母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도 나온다. (p. 94).

앨리스 베일리의 "그리스도의 재등장"Reapparance of the Christ에서는 뉴에이지 그리스도인 마이트레야를 거부하려는 유대인들을 행한 불길한 경고가 주어졌다:

 

유대 시대dispensation에 종지부를 찍으러 그리스도가 왔다. 태양의 운동이 양자리에서 나와서 물고기자리로 들어감에 따라 종교로서의 유대 시대는 클라이맥스를 지나 사라져 갔어야 했다. 그는 유대 민족을 통해 나타남으로서 자신을 그들의 메시야로 보여주었다.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상징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희생양인 양(백양궁) 별자리에 남아버렸다. 그들은 - 다시 상징적으로 말해서 - 물고기자리 속으로 지나가야만 하며, 그들의 메시야가 물병자리에서 다시 올 때 그를 인정해야만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진화과정을 거역하는 그들의 옛 범죄를 그들은 되풀이할 것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새롭고 영적인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2000년전 팔레스타인에서 이를 되풀이했다. 그들에게 기회가 주어질 때 그들은 또다시 되풀이할 것인가? 유대인의 어려움은 그들이 거의 5000년전의 종교에 만족하며 머무르고 있으며 아직도 조금도 바뀌려고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page 81).

같은 책 127 페이지에는 같은 주제가 다루어지는데, 유대인 조상을 포함시킨 기독교에 대한 적의가 보인다.

 

숫양의 별자리가 뒤따랐으며 유대 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이는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그리고 불행히도 크리스천 종교에도 중요한, 그러나 세계 다른 곳의 듣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아리안 순수혈통이라는 나치의 주제는 앨리스 베일리의 모든 책들에서 발견된다. 거대한 무지 또는 거대한 부정직을 보이며 데이비드 스팽글러는, 이것이 히틀러가 따랐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아리안주의라고 말함으로써 명백한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고 있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가 있다. 서양문명의 선조인 아리안족의 종족적 기억에 남아있는 사건으로부터 생겨난 매우 강력한 사고형식thought-form - 우리 이전의 뿌리종족들, 동양 종족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개념인 '원죄', 타락이라는 단어로 표시될 수 있는 사고형식 - 의 아스트랄계astral plane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의 일부는 아리안족이 그들의 정신능력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 인류진화 상 최초의 종족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리안족이라고 말하는 것은 히틀러가 말한 금발의 푸른 눈의 슈퍼맨이나 또는 독일민족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밝혀도 좋겠다. 아리안이란 용어는 수천년 전 아시아로부터 이주해서 아프리카와 유럽에 퍼진 일단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반 용어이다.

스팽글러가 말하고 있는 아리안은 히틀러가 증진한 것과 똑같은 브랜드다. 그의 견해는, 신지학회의 설립자이며 뉴에이저들이 그들의 현대적 뿌리로 여기는 헬레나 블라바츠키의 "시크릿 독트린"The Secret Doctrine에서 바로 나온 것이다. 히틀러가 따랐던 것과 같은 이 교설은 독일 민족이 실은 스팽글러가 간결하게 말한 대로 "수천년 전 아시아에서 이주해서 아프리카와 유럽에 퍼진" 아시아의 이주자였다는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 뉴에이지 운동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운동의 선도적 에소테리시스트Esotericist로 여겨지는 스팽글러가 어떻게 이런 나치와의 유사점이나 또는 그들이 옛 아시아로부터의 이주민들이었다는 나치 신념에 대해 몰랐는지를 묻는 것은 온당해 보인다. 확실히 이 잘못은 베일리나 루시스 트러스트의 잘못은 아니다.

 

비록 실제 입장을 흐리는 이런 비밀스러운 모호한 말들이 이 운동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그 리더들은 입문자들에게 히틀러가 그들 중 한명이었음을 알리려고 갖은 노력을 해왔다.

 

1972년 "하나님의 계획 경영하기"Running God's Plan라는 책에서 앨리스 베일리의 남편 포스터 베일리는 말했다:

 

승인된 또 하나의 하이어라키 프로젝트는 유럽 국가들을 하나의 평화적 협동 공동체로 통합하는 것이다. 이 계획은 새로운 통합유럽정부나 또는 공통언어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적 자만, 야망 그리고 편견으로 왜곡되지 않고 그 국가들의 국민 복지에 헌신하는 올바른 국가관계를 위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아프리카나 러시아를 위해 제안된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 이것은 수년전 시작되었으며 '범유럽'Pan Europa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었다. 이 계획을 증진하기 위해 여러 방법이 모색되었다. 하지만 이 발상은, 조금은 너무 닳고 또한 이기주의의 실제적 가치를 너무 믿는 사람들로 인해 충분히 이상화되지 못했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지적이고, 매우 조직적이고, 잘 교육받고, 세계 상황을 잘 알지만, 그들의 다름에 자만하고 모든 일에 대해 그들이 맞다고 확신하는 사람들과 협상한다. 따라서 이것은 매우 어려운 난제이지만 '유럽 마스터'European Master의 마음에는 소중한 것이다.

 

라인강을 결속요인으로 삼아 라인강 계곡의 사는 사람들을 통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려는 하나의 시도가 있었다. 이것은 어느 제자가 시도했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이제 또다른 시도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것은 6개국 유럽공동시장European Common Market이다. (pp.14- 15).

F 학점의 역사학 수강생조차도, 라인강을 결속요인으로 삼아 유럽을 통합하려던 사람이 히틀러였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스팽글러가 이토록 순진한가? 아니면 그는 히틀러가 사용한 또다른 전술 - 거대한 거짓말 기법 - 을 구사하고 있는 것인가?

 

( [下]편<<에 계속됩니다.)

 

아브람의 쌓은 단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흔히 우리는 믿음의 조상이신 아브람이 위대한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 땅에 살고 있던 아브람과 사래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그들의 나이는 이미 75세, 65세가 되어 있었습니다. 세상기준으로 볼 때 그들은 결코 복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만일 자녀가 여럿 있고 유복하고 풍족하였더라면 하나님이 아무리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을 창대하게 하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어도 그 말씀을 믿고 따라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부요한 자에게 하나님이나 천국은 별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애통한 자에게야 하나님과 천국은 절실한 것입니다. 가난한 심령과 애통함이 복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찾아오시려고 주시는 고난이요 가난과 애통이라면 그것이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브람과 사래가 하나님을 따라 나선 것은 그들의 삶이 너무나 고달프고 세상에 아무 소망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그들이 가나안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도착해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곳 땅은 헷 족속 가나안 족속이 차지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 ‘내가 이 땅을 너희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람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습니다. 그리고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거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갑니다.

하나님은 왜 아브람 당대에 가나안 땅을 아니 주시고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아브람은 왜 하나님의 이 말씀에 아무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을까요? 보통 사람 같으면 “아니, 하나님, 약속이 틀리잖아요. 하나님 믿으면 복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자손에게 주시려면 왜 벌써 저를 불러내어 이 고생 시키십니까?” 할 것 같은데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은 ‘자손’이지만 히브리 원문은 ‘아들’입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진리와 구원의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상입니다. 아브람의 아들에게 주시겠다는 말씀은 아브람 자신에게 주시겠다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아들을 내어주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시겠다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같은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들이 사는 한 아브라함 자신도 살아 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내게 살아계시면 하나님이 내게 살아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을 못 들어보았느냐?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눈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안 보이니 죽었다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 노릇을 하시는 하나님이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변화산 사건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을 쌓고 자신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동편으로 옮기고 다시 남방으로 옮겨 가면서도 가는 곳마다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시날 평지에서 사람들이 쌓았던 것은 자신들을 위하여 자기들의 이름을 내려는 탑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이 쌓은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단이었습니다. 높이 쌓지도 않았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높이 쌓아봐야 하늘에 닿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향하여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오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궁핍하고 형통하지 못 한 아브람과 사래를 가나안으로 이끌어내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며 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하신 뜻이, 그들의 가나안의 삶, 그 여정과 고통과 외로움과 기다림의 세월을 창세기에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 이끌려 나온 자들에게 무엇을 위하여 살며 어떻게 살아가라는 것을 말씀하려 하심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우리는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작은 단을 쌓기 원합니다. 이 광야같은 인생길, 어디에 가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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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오래된 거짓말: 내면의 신을 찾기

The Old Lie: Finding God Within

 

 

뱀의 방식에 따라 뉴에이지 운동의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음을 깨달으며, 교묘한 왜곡, 뒤틈과 비틀림이 있는 책 하나를 읽어 나가는 것은 읽어 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독을 집집마다 팔고 다니는 코브라 같이 대담하게 드러내는 책을 읽는 것은 그것과는 또 다른 체험이다. 이런 책 하나가 내면세계로의 여행: 우리 안의 하나님 찾기(Journey to Inner Space: Finding God in Us)이다. 이보다 더 나쁜 책을 나는 오컬트 서점에서 거의 보지 못했다. 

 

내면세계로의 여행은 힌두교파의 산물이 아니다. 놀랍게도 이 책은 워싱톤주 시애틀 제일침례교회의 로드니 R. 롬니(Rodney R. Romney) 원로목사가 쓴 것이다.


칼빈의 지구보존처럼, 그러나 가장 노골적인 힌두/오컬트 방식으로, 롬니 박사는 내재하는 신과 (1) 그리고 초월적인 신의 교리를 우리에게 강권한다. 칼빈 펠로우들처럼 로렌 아이슬리를 인용하지만, 지구보존에서 보여준 것보다 한층 더 추천을 하며 인용한다. (2)

 

예수가 유일한 그리스도(the Christ)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적그리스도의 시험이다. 사람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에덴의 뱀의 오리지날 거짓말 중의 하나였다.


뉴에이지 미혹의 전형적인 징후를 보이며 롬니 박사는 예수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예수라는 사람처럼 그 시대의 사람들을 고무시킨 사람은 없다. 더 큰 기적은 이천년 후에도 그가 사람들을 고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급진적인 폭동 선동가도 비판적 혁명가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하나님의 법칙들을 안 사람이었고 그 법칙의 틀 안에서 너무 완벽하게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 전체는 하나님에게로의 순종과 충성의 긴 이야기였다. 그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삶이 정말로 어떨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들을 고무시켰다. 그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불리게 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다. 이것은 그가 요청한 직위도 아니고 그가 거부한 직위도 아니다. 그런데 그가 한 일은 더욱 놀랍다. 그는 각 사람은 잠재적으로 그리스도라고 암시했다. 그가 그의 제자들에 대해서 주장하지 않은 것을 그 자신에 대해서 주장한 것은 없다. 그는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주장했으며, 그의 제자들 역시 세상의 빛이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는 그가 하나님과 하나임을 말했으며 그의 제자들도 그들이 하나님과 하나임을 받아 들이기를 기도했다. 그는 그들이 그 자신과 비슷한 체험을 할 뿐 아니라 그가 한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했다. 사람들의 부패로 인해 그들을 정죄하기보다는, 그들 고유의 작정된 신성의 영광에 대해 그들을 깨우치게 하려고 그는 노력했다. 그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준 과제는 그들 자신의 의식 내부에 있는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과 하나님의 왕국이 그들 내부에 있음을 아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이것을 그들 외부에서 구한다면 그들은 결코 이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3) (저자 강조)

그 후의 기독교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롬니 박사에 의하면 이렇다고 한다:

 

그리스도 추종자의 대부분은 그들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인식하지 못했다... (4)

롬니가 추론하듯이 예수는 그리스도 -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 - 로 불리는 존재에 불과했는가? 그분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신다:

 

[예수께서] 이미 감람 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메시야]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9:37-40 [저자강조])


롬니 박사에 의하면, 예수는 "모든 영혼을 포옹하고 모든 교리를 종합할 세계종교"를 세우기 위해 오셨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롬니 박사는 "바로 그것[모든 교리를 종합할 세계종교를 세우는]을 마칠 때까지 그의 일은 완성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5)


사실은, 롬니는 예수가 자신이 "길"(the Way)이라고 한 것은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우리 각자는 그 길(the Way)로 가는 우리 자신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가면서 길잡이(Way-Shower)의 손을 잡음으로써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잘 보여주기 떄문이다. 하지만 그 길을 보여주려는 그 어떤 인간적인 방식이나 공식에 의해서도 우리는 길을 잃거나 압도당하지 말자. 이런 형태는 예수 컬트[이교/사이비종교]에 지나지 아니하며, 길잡이를 숭배함으로써, 그리고 윤리적이나 신비적인 면보다 그의 삶의 기적적인 면만을 다룸으로써, 길(the Way)에 이르지 못하고 만다. 예수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고,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도록 우리를 고무시키기 위해 왔음을 잊지 말자. 그는 그를 숭배하거나 신격화하는 모든 시도들에 저항했다. 비록 그가 "나는 길이다"라고 말했지만, 그는 하나님에게로의 길잡이를 의미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아니었고 결코 그렇게 주장하지도 않았다. (ibid., p.30)

그의 망상 속에서, 그는 예수가 "본질적으로 신비주의자이며, 그의 내적 존재의 깊은 곳을 탐구했고 자신의 영의 원천을 발견했고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았던 사람"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롬니는 우리 자신들이 그리스도들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당신의 내면 여행의 모든 발걸음마다 길잡이(Way-Shower)의 손을 잡고 가도록 초청한다. 왜냐하면, 그는 누구보다도 당신의 존재의 트랜스포메이션(변혁)을 갈망하기 때문이며, 누구보다도 당신의 자기정화를 갈망하기 때문이며, 누구보다도 당신이 당신 자신의 그리스도性(Christhood)의 충만함과 탁월함을 발견하기 바라기 때문이다. (ibid., p.36)

나는 롬니 박사와 개인적으로 대화했으며, 정말로 솔직하게 말해서 그는 - 적어도 전화 상으로는 - 성실하고 매력적인 사람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틀렸다!


뉴에이저들을 함께 묶는 접착제는 공통적인 신비체험의 끈이다. 그들은 말 그대로 다른 사람들이 보거나 듣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있고 듣고 있다고 믿는다. 오컬트 신비주의에 빠진 롬니 박사나 그와 비슷한 수백명의 사람들 같은 성직자에게 있어서, 이것은 흔한 직업병인 "소진(burn-out 과로)"의 산물로 시작되었을 수도 있다. 성경은 범사에 주를 인정하면 "(그가)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고 말한다. (6)


하지만, 지난 수년의 기간은 "팝"(pop) 심리학과 마인드콘트롤 강좌가 빗발친 것을 그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마인드콘트롤은 신세계질서와 뉴에이지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데 필수적 콤포넌트였던 것이다.


이것 뒤에 있는 오컬트 원리를 "재탄생(Rebirth)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예수께서 "거듭남"이라고 부른 것과는 같은 것이 아니다. 거듭남에서는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그의 마음 속에 받아 들임으로써 하나님과 화해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께 의지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재탄생에서는 모든 지혜가 자신 속에 들어 있다고 믿으라고 한다. 고대 요기(yogi)들이나 신비가들처럼 현대 뉴에이저들은 "지혜"와 지식을 얻기 위해 - 그들 자신의 중심을 향해 - 내면을 바라본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지혜가 내면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7:9)


일반적으로 이런 종류의 내면으로의 여정은 마귀의 지배를 거의 확실하게 야기시키는 다양한 정신기법들을 통해 이루어진다.

 

매릴린 퍼거슨의 물병자리 음모는 이런 "정신기법"들 수십가지를 나열한다. (7) 앨리스 베일리/드왈 쿨의 제자들은, 명상이나 기타 정신기법을 통해 얻어진 체험들을 기록하는 "영적 일기"를 간직하도록 권고받는다. 일기 작성자는 이런 체험들을 "임재자"(presences) 또는 "마스터들"과의 접촉이었다고 기록해야 했다. 문제들 위에 비춰진 깨달음의 빛(Illumination), 텔레파시 사건들, 그리고 머리 속에서 빛을 보는 것 같은 신비 체험들 역시 기록되어야 했다. (8)

 

이 사실이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관심의 대상이어야 하는 이유는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서 그가 미혹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기 떄문이다. (9) 뉴에이저들은 그들이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영광의 체험이라고 믿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그들의 엄창난 체험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주님을 만났다고 추정한다. 하나님은 이런 부분에서의 우리의 취약함을 아셨으며, 이 때문에 그의 백성들에게 오컬트 행위에 참여하지 말라고 슬기롭게 명령하셨다. 에덴 동산에서부터 미혹은 사탄의 유희였으며 오늘날도 예외는 아니다. 적그리스도는 -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할 정도로 - 큰 이적과 기사와 함께 나타날 것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10) 명확한 성경 교리를 무시하는 많은 성직자들을 포함해서 뉴에이지 정신기법에 발담그는 사람들은 대단원의 막이 내리기 훨씬 전에 이미 종말의 미혹을 받아들인 것이다.


성경은 또한 우리에게 영들을 시험하라고 말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한1서 4:1-3)


66권으로 이루어진 성경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이는 성령께서 한결같기 때문이다.

 

비록 오컬트 교리들이 다양한 소스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이며 지구 상의 모든 문화 속에서 발견되지만, 오컬트 교리 역시 놀라운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모더니즘에 대한 교리문답(Catechism on Modernism)에서 교황 피오 10세는, 겉으로는 널리 산재된 소스들과 서로 분리된 문화들로 보이는 것들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이런 교설들의 참 세트를 놀랍게 잘 요약한다:

 

모더니스트들이 매우 영리한 계략을 쓰기 때문에, 즉 그들은 그들의 교리들을 하나의 전체로 정리하거나 체계적으로 배열하지 않고, 서로서로 흐트러뜨리서, 비록 그것들이 실제로는 확고부동함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의심스럽거나 불확실하게 보이도록 하기 때문에, 그들의 교설들을 여기 하나의 그룹 속에 모으고 그들 사이의 연관을 보여주는 것이 이로울 것이다... (11)

오컬티즘의 교설은 성경 말씀과 정반대를 말한다. 성경은 각 사람은 한번 죽어야 하며, 그 후에 심판이 있다고 가르친다. (12) 오컬티즘은 우리 각자는 몇번씩 살고 죽어야 하며 어쩌면 그 후에 열반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예수께서 (永)단번에 완전한 제사(희생)를 드렸다고 가르친다. (13) 오컬티스트들은 우리 모두가 냉혹한 카르마(Karma 嶪/인과응보)의 법칙에 따라 죄값을 치뤄야 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예수가 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한다. 오컬티스트들은 그 빛이 우리 자신의 "더 높은 자아"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성경은 예수가 유일한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오컬티스트들은 많은 그리스도들이 있었었다고 말한다. 

마지막 때에 이런 교설들이 교회 안에서 유행할 것임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에 의해 예견되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기 전에는 종말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14) 그는 또한 주 안에서의 그의 피후견인이었던 디모데에게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하고 알렸다. (15)


구약에서 다니엘은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속임수로 타락시킬 것이나"라는 말을 천사로부터 들었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사자로부터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성령님으로부터 받은 충고를 나눠 주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따를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이는 그들 속에는 빛이 없기 떄문이라 (KJV직역)] (이사야 8:20)


주께서 금지하신 것에 발담그고 그 후 영들을 시험하는 데 실패한, 심지어 롬니 박사 같은 배려와 품위가 있는 성직자들까지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의도치 않은 악령 숭배 속으로 유혹되었다. 그리고 그 악령들은 아직도 스스로를 뱀으로 포장해서 내놓는다. 오컬티즘의 금지된 열매를 먹음을 통해 (오컬트에) 입문하려는 자들은 - 롬니 박사 같은 성직자 입문자들까지도 - 뱀의 불 쿤달리니(Kundalini)의 불을 척추 밑부분으로부터 그들이 일곱 차크라(chakra 신경센터)라고 부르는 것들을 통해 끌어 올린다.


롬니 박사는 이 과정을 드러내고 논한다:

 

명상 체험에 관해서 다루지 않은 것이 많이 있다. 일곱 신경 센터(차크라)와 이들 센터에 해당하는 색깔에 대해 나는 말하지 않았다. 또한 쿤달리니 샥티(Kundalini Shakti)라고 알려진 우리 중추신경계 내부에 있는 힘에 대해 논하지도 않았다. 쿤달리니 샥티는 매일의 성실한 명상을 통해 우리 속에서 일어나며, 확장된 의식의 새 나라 속으로 우리를 데려다 주는 신비로운 사랑의 불이다. (16)

이런 확장된 의식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동쪽을 바라본다고 롬니 박사는 말한다:

 

나는 항상 가능할 때마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동일한 의자에 앉는다. 기도 중에 동쪽을 향하는 것은, 떠오르는 태양과 또한 개인의 의식 속에 있는 신적 빛의 동틈과의 사이의 심볼리즘을 끌어내는 고대의 수행법이다. 사람들의 의견에 따르면 이것은 또한 위대한 종류의 우주 에너지에로의 노출을 제공하기도 한다. (17)

주께서는, 이와 비슷한 수행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유다의 집에서 행해지고 있음을 그의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셨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 (에스겔 8:15-16)


다니엘 11:38은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와 그의 추종자들이 "포스의 신"(God of Forces)[KJV역]에 경배할 것을 미리 말해 준다. 오컬티즘의 기본 목적은 "포스"를 조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18)


롬니는 "하나님은 포스(a Force)이다"라는 미혹에 굴복했다는 신호를 보여주고 있으며, 또한 오컬티즘에 발담근 사람들은 나머지 사람들이 못 보고 못 듣는 것을 보고 듣는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적 에너지로서의 빛을 먼저 만드셨고, 그 빛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견고하고 뚫리지 않는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 우리는 빛의 에너지로 만들어졌다. 이 최초의 에너지의 포스(힘)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경에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고 말할 때, 이것은 하나님인 그 에너지 포스로 우리가 지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연결을 확립할 때, 우리는 이 에너지의 증가하는 흐름을 받게 된다...

 

사람들이 영적 의식의 더 높은 영역으로 전진할 때, 그들은 종종 영적 감각을 통해서 이 빛을 인지한다 - 마치 보통 인간의 귀로는 인식할 수 없는 소리를 사람들이 구별해서 말하는 것처럼. 이 빛은 때때로 지금까지 보았던 어느 음영과 색조와도 다른 찬란한 색깔로 발산되기도 한다... 하나님에 의해서 채워지고 있음을 우리가 깨닫는 곳인 우리 내면 세계의 깊은 중심은 모든 인간적 한계를 초월하며, 다른 어떤 단계에서도 불가능한 통찰을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

 

강력한 보이지 않는 포스가 소위 거룩한 사람들의 손과 팔을 통해 흐른다는 사상은 동양국가들에서는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다.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동일시한 사람들은 - 사실상 치유였던 - 풍부한 에너지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예수도 그랬다. (ibid., p.72-73)

롬니 박사와의 대화에서 그는 그가 자신의 책을 뉴에이지 저서의 한 예로 여겼음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의 책은 실제로 이 다가오는 "뉴에이지"를 언급한다:

 

대부분의 영적 영역의 학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이 행성 위에서 빛의 새 시대(뉴에이지)로 들어가고 있음에 동의한다. 이 빛은 창조 질서 속에 있는 고장난 것들을 드러내고 또 바로잡기 시작하고 있다. 그 결과는 고통과 질병의 일시적인 증가로 나타날 수 있다. 어둠 속에 거주해온 사람들은 빛이 증가함에 따라 적대적이고 범죄적인 반응을 나타낼 것이다. 심지어 자연 요소들에서조차 비슷한 소동이 폭풍, 가뭄, 지진 및 기타 파괴적 활동의 형태로 생길 것이다. 제한된 사고 형태들이 오래 전부터 잘못 예측해왔듯이, 인류 전체는 이런 격변에 대해서 절망감과 침울감으로 반응하고, 세상의 종말이 오고 있다고 두려워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두려워할 시대가 아니며, 그 안에서 기뻐할 시대이다. 빛이 어두움을 제거하고 정화함에 따라, 우리는 구시대가 죽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아울러 창조의 가장 높은 염원과 가능성이 눈앞에 떠오르는 새 시대 출산의 진통을 느낀다. (ibid., p.74-75)

롬니 박사의 다음 문단은, 어떻게 "빛을 잡는지"를 뉴에이지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앨리스 베일리의 교훈을 으스스하게 생각나게 한다: (19)

 

빛의 원리를 이해하는 자들, 빛을 상황 속에 투사하고 거기에서 빛을 잡고 있는 자들, 그리고 이 빛이 하나님과 그리고 이 지구 상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일꾼들로부터 온다는 것을 이해하는 자들은, 그들이 상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꿀 수 있으며 이 지구 위에 지속된 평화의 시대를 불러올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ibid., p.75)

성경에 의하면, 예수는 세상의 빛이시다. (하지만) 롬니 박사는 이와는 조금 다르게 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는 우주의 그리스도의 빛(Christ-light)을 이 지구 행성과 우리 각자에게 따로 가져다 주었다." (20)


이것은 확실히 다니엘이 언급한 궁극적 미혹의 일부이다: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속임수로 타락시킬 것이나" 그 속임수(flattery 감언이설)은 아마도 틀림없이 사람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는 오컬트 교설일 것이다.


이는 롬니 박사의 저서에 반영되었다:

 

나를 그리스도로 만들라(Christ Me). 예수는 자신 속의 그리스도를 알았을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 속의 그리스도를 보았다. 예수는 우리가 되도록 운명지어진 것 즉 (한 명의) 그리스도(a Christ)가 되었고, 또한 우리에게 신으로의 길과 그리고 우리 내면(inner being 내적 존재) 속의 그리스도로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한다. 그리스도는 다양한 모습을 취해 왔으며 여러 다른 이름들로 불려 왔지만, 그것은 우리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득의의 메시지를 가지고 와서 우리를 우리의 참 정체의 실재와 결합시킨, 이천년 전 이 지구에 온 예수로서의 그리스도를 안다. 이것을 알게 되면 모든 착각이 끝나고 우리는 우리의 의도된 영광을 알게 되며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우리의 참 신성(divinity)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우리는 기도의 사다리의 가장 높은 단에 선다.


이 마지막 단은 우리가 완전히 그리스도 같이 되는 곳이며, 우리가 우리 자신 및 다른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곳이다.  (ibid., pp.106-107)

위에 인용한 문단에서 롬니 박사가 말한 것과 벤지민 크렘이 소위 "마이트레야 그리스도"를 내세우며 공개적으로 말한 것 사이에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은 슬프지만 사실이다. 그것은 "많은 그리스도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적그리스도의 정면 테스트이다: 예수가 (유일한)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 말이다.


캐디 부부에 의하면, 핀드혼은 그들의 스피릿가이드(spirit guide 영적안내자/악령)들로부터 아일린 캐디가 받은 "지시(guidance 안내)"에 기초하여 세워졌다. 캐디 부부는 "더 플랜"(The Plan)이 지구상에 자리잡도록 그들이 도와야 한다고 들었다. 티벳 불교와 다른 에소테릭 사고학교(밀교)에 오래 몸담은 그런 사람들로부터 나온 이런 종류의 자료를 보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침례교협의회 소속 교회의 침례교 목사를 통해 채널링[역자주. 영적 존재의 (지시적) 음성을 전달하는 뉴에이지 행위]된 거의 똑같은 "지시"를 보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롬니의 스피릿 가이드들은, 미국의 오컬트 서점들과 유니티 서점들에 널려있는 많은 핀드혼의 메시지와 거의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여 롬니에게 "더 플랜"에 대해서 말했다:

 

너 자신의 계절(seasons)과 신적으로 제정된 계획(플랜)을 믿어라. 네가 나에게 나와서 너 자신을 관상적 침묵 속에 맡겨야만 그제야 비로소 내가 통제하고 있으며, 결국은 나의 뜻대로 할 것이며, 나에게 시간은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너는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의 계획(플랜)에 협력하며 살기를 배우라. (ibid., p.126)

뉴에이지 운동과 컬트적 조직들을 분석하면서 내가 알아낸 한가지는, 항상 관심과 배려로 들리는 하나님의 성경 메시지와는 극명하게 대조적으로 사탄 또는 루시퍼는 오만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뉴에이저들은 그들이 사회를 더 좋게 만들고 있다는 망상 속에서 일한다. 하지만, 그들의 핵심 교설 중의 하나가 카르마(업/인과응보)의 법칙이다. 이것은,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그 자신의 선한 또는 악한 카르마에 의해 일어난 것이라는 교설이다.


예를 들어, 2차세계대전 유대인 대학살은 그들의 "악한 국가적 카르마"의 결과였다. (21) 순전히 힌두와 오컬트 유래를 가진 이 교설은 롬니의 "지시" 속에도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결백한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고 물을지도 모른다.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불공평하게 고통받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가? 순전한 결백이란 것은 없다. 심지어 유아에게도 그렇다. 모든 영혼은 그 속에 수세기에 걸친 잘못된 사고와 행동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영혼의 더 높은 진화를 구축해줄 고난의 길을 자발적으로 수용하면서 많은 이들이 해결하고 있는 카르마적 채무의 법칙이 있다. (ibid., p.127)

롬니는 심지어 자신과 함께 "영들"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도우미 영들(helper spirits)에 대해 핀드혼의 아일린 캐디가 받았던 메시지와 놀랍도록 유사하게 들리는 구절을 통해 롬니는 들었다:

 

자연령들(Nature spirits)은 종종 너와 함께 한다. 그리고 네 안에 있는 모든 자연에 대한 다정함의 진수(essence)를 일깨우는 것은 너를 향한 그들의 사랑이며 너의 사명에 대한 그들의 헌신이다... (ibid., p.129)

그리고 속삭이는 악령들은 곧 롬니 박사에게 누구를 따라야 하는지를 알려 주었다:

 

너의 과제는 이 땅의 길 위에 있는 어느 세상 스승이나 교사를 따르는 것이 아니다. 너의 과제는 네 내면에 있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가르쳐라. 너 자신의 마스터가 되어라. 스스로의 치유사가 되어라. 내면의 그리스도를 찾아라. (ibid., p.130)

롬니 박사는 또한 우리에게는 신세계종교(new world religion)가 필요하며 - 기독교를 포함한 - 그 종교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고 들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을 내려놓는 법을 배우게 되면, 종교들, 교단들, 또는 기타 어떤 신학체계에 대한 판단을 멈추는 법 또한 배워라. 나는 너를 위한 더 숭고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모든 종교에는 선이 있지만, 각 종교에는 완전한 진리가 결여되어 있다. 맞다. 심지어 기독교에도, 기독교가 진화함에 따라, 그리스도가 말했던 순전한 진리로부터의 오류와 이탈이 존재한다. 너는, 조직적인 제도와 사람이 만든 종교의 과시적인 격식들 모두를 내려놓는 법을 배워야 한다. 더 이상 너 자신을 침례교도라고, 심지어 크리스천이라고도 생각하지 말라. 너는 이런 것들보다 나은 존재이다. 예수는 이런 모든 한계 위로 상승했고 독생자가 되었다. 그는 모든 종교들을 초월했고 독생자가 되었다. 그는 모든 종교들을 초월했다. 그를 따라서 너 자신 그리스도가 되어라. 그리하면, 너는 직함과 차별이 사라질 때 도달하는 새로운 자유 안에서 기뻐할 것이다. (ibid., p.130)

롬니 박사는 미국침례교협의회 내의 원로목사이다. 어째서 이런 식의 교리전파가 문제시되지 않고 허용되는지에 대해 설명을 요청하면, 롬니 박사는 매우 훌륭한 크리스천이라는 날카로운 답변이 돌아온다. 그는 매력적인 사람이며 내가 확신하기에 성실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이설(heresy 이단사설)이 우리의 근본주의 교회의 보호 아래에서 지속되는 것은  - 그의 회중뿐 아니라 그의 말을 듣는 수만 명의 청중들을 위해서도 - 허용돼서는 안 된다. 롬니 박사 자신의 영혼과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은 교사들과 멤버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이것은 용인되어서는 안 된다. 오컬트 서점으로부터 나오는 것보다 기독교 강단에서 나오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 적어도 사람들이 오컬트 서점에 들어갈 때에는, 그들이 얻게 될 것을 알고 있거나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그들의 교회 또는 회당의 테두리 안에서는 정통 교리를 기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지금은 참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과 참으로 화해할 시간이다. 그것은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신복음주의자들과 뉴에이저 사상가들이 촉구하는 화해가 아닌, 천사들의 다음 경고 메시지를 따름에서 오는 화해이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지금은 의기야양해하며 우리가 이런 불행한 사람들보다 낫다고 여길 때가 아니다. 지금은 심각하게 경고하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할 때이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로마서 3:10-12)

가장 좋은 의도를 가지고 출발했던 많은 우리 리더들은 - 일부는 알면서도 그리고 많은 이들은 모르는 사이에 - 희생자가 되었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탄은 다른 어떤 곳보다 우리들의 교회를 공격하기 원할 것이다. 손상을 복구할 수 있을지는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만약 하나님이 종말 사건들을 준비하고 계신다면 시계는 뒤로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 종교 리더들조차 크리스천의 사랑의 영 안에서 경고를 받아 마땅하다. 어떤 이들은 포도밭에서 열심히 수고했고, 어떤 이들은 비틀거리고 넘어졌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 누구라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

(1) Romney, Dr. Rodney, Journey to Inner Space:Finding God-in-Us, Nashville Tennessee, Abingdon Press, citing pages 15, 43.
(2) Ibid., p.25. @ 170.

(3) Ibid. pp.28-29.
(4) Ibid., p.29. @ 171.

(5) Ibid., p.31. @ 172.
(6) Proverbs 3:6. @ 173.

(7) 매릴린 퍼거슨, 물병자리음모, Los Angeles: J.P. Tarcher, Inc., 1980. 86-87 페이지를 보라. 정신기법들은 최면, 수피즘, 실바마인드콘트롤에서부터 TM(초월명상)과 하타요가에까지이른다.
(8) Bailey, Alice A., Discipleship in the New Age, Volume 1, New York: Lucis Publishing Company, 1972. See pages 14-15.
(9) Ii Corinthians 11:14.
(10) Mark 13:22 @ 174.

(11) Rev. J.B. Lemius, O.M.I., A Catechism of Modernism, founded on the encyclical Pascendi Gregis (On Modernism) by Pope Saint Pius X. Quoting from page 18.
(12) Hebrews 9:27.
(13) See Hebrews 9:24-28 and 10:10-14. @ 175.

(14) II Thessalonians 2:3, NASB and KJV.
(15) I Timothy 4:1.
(16) Romney, Dr. Rodney, Journey to Inner Space: Finding God-In-Us, Nashville, Tennessee, Abingdon Press, 1980. @ 176.

(17) Ibid., p. 88.
(18) 예를 들어, 알버트 A. 파이크의 교훈과 교리(Morals and Dogma)를 보라. 1-6 페이지에서는 포스(the Force)를 다루고 조절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광범위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다른 오컬트 작품 수십권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다. 앨리스 베일리 마스터인덱스(종합색인)는 "포스" 한가지에 대해서만도 몇 페이지에 걸친 참조를 싣고 있다.

(19) 엘리스 A. 베일리의 "뉴에이지의 제자도"(Discipleship in the New Age) 1권을 를 보라. 298 페이지에서는 "빛 안에서 마음을 흔들리지 않게 잡고 있기"에 관한 기법에 대해 설명한다. 이것은 루시퍼적 에너지(Lucerific energies)를 기원하는 오컬트 기법이다.
(20) Ibid., p. 76. @ 179.
(21) 앨리스 A. 베일리의 에소테릭치유(Esoteric Healing)를 보라. 1953년 루시스출판사. 특별히 유대인의 운명이 그들의 "악한 카르마"의 결과였다는 이 기괴한 오컬트 교설의 적용에 대해서는 pp. 263-267를 보라.

 

 

 

어느 목사의 30년 목회 고백


01, 목사는 하나님 외에 내 편이 없다.
02, 개척목회는 일꾼 없어 힘들고, 청빙목회는 일꾼 때문에 힘들다.
03, 목사는 하나님을 알고 사람을 알아야 한다.
04, 성도들은 목사의 설교를 그의 생활과 함께 듣는다.
05, 목회자가 스캔들에 걸리면 날개 없는 새와 같다.

06, 목회자의 건강은 영력과 비례한다.
07, 목회자는 학위보다 성경에 능해야 한다.
08, 목회 중 가까운 사람일수록 입이 무거워야 한다.
09, 목회 중 가까이 하는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태도가 문제다.
10, 은사 받은 사람을 적절하게 할용 하지 못하면 교회에 해악이 된다.

11, 목회의 본질(원리)이 없는 방법목회는 한계에 이른다.
12, 교회(단)정치에 능한 교역자, 이름은 나지만 존경은 받지 못한다.
13, 목회자 자신의 은사를 일찍이 개발하면 그 분야의 전문가 된다.
14, 목양지를 떠날 마음을 가지면 그때부터 교회성장은 정지된다.
15, 사랑의 지평이 넓을수록 영적 능력은 커진다.

16, 세미나 등 남의 것만 가지고 양을 먹이면 내 양이 되기 어렵다.
17, 복음의 핵심은 안면가리고 반복하는 용기를 가져라.
(십자가, 부활, 천국, 지옥, 재림 등)
18, 목사의 심방 회의 행사 상담 등 활동이
하나님과의 기도시간을 대치할 수 없다.
19, 교회가 잘 되어나간다고 느낄 때 기도의 비상을 걸어라.
20, 영적 운동이 강할수록 비난의 적이 생기는 것을 이상한 일로 생각지 말라.

21, 사탄은 우리가 쳐 놓은 켐프 안에서 동거한다.
22, 개척 시 일군이 필요하다고 아무나 세우지 말라.
23, 처음 일군을 세울 때 필히 한 사람은 세우지 말라,
나중에 왕초 노릇하기 쉽다.
24, 사회에서 장(長)자리 붙은 사람은
교회 안에서 일은 안하면서 자기 포지션 만을 중시한다.
25, 뒤 돌아보면 때로 반대편에 섰던 사람이 가까운 사람보다 유익할 때가 있다.

26, 내게 까다로운 사람은 십중팔구 인정해 달라는 또 다른 표현이다.
27, 교회 안에 중직들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은 말씀과 기도 그리고 헌금생활이다.
28, 목사 자신의 권위의식의 탈을 벗어 버려라,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는 종일 뿐이다.
29, 하나님은 나의 약한 부분을 가지고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자.
30, 모든 일에 원칙을 고수하되 까다로운 사람으로 낙인찍히지 말라.

31. 내성적인 사람의 필수무장은“강하고 담대하라”이고
활동적인 사람은“관용과 인내”다.
32, 교회영적 분위기와 능력을 위해 부르짖는 기도를 전략적 수준으로 끌어올려라.
32, 오래 된 신자는 발성기도만 아니라
침묵기도( 묵상, 관상)의 자리로 들어가게 하라.
33. 목회자는 교회에서 지급하는 사례비에 다소를 불문하고 불평은 하지 말라.
34, 목회문제나 인생문제를 풀 수 있는 하나의 열쇠는‘사랑, 이다.
35, 목회자는 일찍이 자신의 문제를 털어 놓을 수 있는 친구 한 사람이 필요하다.

36, 목회자는 자기의 목회를 컨설팅해 줄 수 있는 선배 한 사람이 필요하다.
37, 목회자는 목회를 핑계로 가족을 돌보는 일을 간과하면 후회하기 쉽다.
38, 목회 중 사모의 기도와 헌신은 목회자의 능력에 시너지효과가 붙게한다.
39. 교인들에게 전도하라고 하지 말고
한 영혼을 구하라고 하는 것이 스트레쓰 덜 받는다.
40, 목사라는 무거운 직책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Nothing (나는 아무것도 아님)으로 출발해 보라.
목회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옮긴 글

 

<교회와신앙> : 엄무환 목사 】 자살한 고 김성수 목사의 동영상설교로 예배하다가 지난 해 9월 예장합신 총회에서 참여금지 결정을 받은 서울서머나교회가 소속되어 있던 한국독립교회및선교단체연합회(Kaicam)에서 탈퇴했다. 마이웨이를 선포한 것이다. 이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고집하겠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김운용 장신대 교수는 “죽은 목사 영상설교 예배는 비성경적이다.”고 진단했다.

   
▲ 서울서머나교회 창립예배 때의 김성수 목사 ⓒ서울서머나교회

Kaicam의 목회국장인 이영용 목사는 2월 3일 <교회와신앙>과의 인터뷰에서 “오늘 서울서머나교회가 Kaicam을 탈퇴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내왔다.”면서 “탈퇴공문은 접수되었으며 Kaicam의 규칙에 따라 처리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목사는 “<교회와신앙>의 제보를 받고 서울서머나교회에 전화하여 시간 약속을 한 후 직접 찾아가 최득희 대표팀장을 만났다.”고 먼저 진행과정을 설명한 후 “최 팀장에게 담임목사가 없으면 오해살 수도 있고 문제가 될 수 있지 않느냐. 따라서 연합회 소속 목사님이 오셔서 설교를 듣게 하든지 아니면 담임목사를 세우든지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권면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울서머나교회 최득희 대표팀장은 이 목사 일행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자기네들은 그렇게 안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하게 밝혔다.”고 이 목사는 전했다.

이 목사는 “최 팀장이 ‘자기네가 왜 안 되느냐?’ 다시 말해 ‘자기네가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식으로 말하기에 ‘첫째, 목사가 자살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배한 것이다. 둘째, 죽은 사람의 영상설교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말했다.”면서 “그러나 그들은 ‘(죽은 김성수 목사) 말씀이 좋다.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 나가는 사람 상관하지 않는다. 말씀이 좋으면 들어오고, 싫으면 나가고...’ 하면서 설득이 안 되더라.”고 밝혔다.

이 목사는 “서울 서머나교회에 한 번 더 기회를 주려고 했는데 자기들이 탈퇴서류를 보내왔다.”면서 “생각자체가 너무나 자기 주관적이더라.”고 말했다.

 

자살한 김성수 목사의 동영상 설교를 추종하는 서울서머나교회의 예배 형태에 대해 장신대 김운용 교수(예배학)는 “예배학적으로나 목회학적으로 볼 때 비정상적이며 비성경적이다.”면서 “가령 돌아가신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를 추모하는 차원에서 한번 듣는 것이야 괜찮겠지만 어떤 분을 추종해서 이미 고인이 되신 분의 영상설교로 계속 예배를 드리겠다는 것은 이단·사이비 교회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의 예배이다.”라고 지적했다.

 

한국독립교회및선교단체연합회(Kaicam)에 소속되었지만 그러나 Kaicam의 성격상 개교회에 대해 어떤 간섭도 하지 않은, 게다가 그 누구의 간섭도 받기를 거부하는 서울서머나교회. 느슨한 Kaicam의 울타리 속에서 서울서머나교회는 그동안 성경과 일탈된 형태로 운영되었지만 문제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지난 해 예장합신 총회가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했고, <교회와신앙>이 Kaicam에 이 사실을 알리고 기사화하면서 비로소 Kaicam이 서머나교회의 진상 파악에 들어가자 서울서머나교회 측이 전격 탈퇴를 결정하고 마이웨이를 선포한 것이다.

 

현재 서울서머나교회 홈페이지엔 얼마 전까지 소개되었었던 “어떤 교단에 소속되어 있나요?”라는 타이틀 아래 “서울서머나교회는 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김성수) 목사님은 생전에 CRC 소속이셨습니다.”라는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살아있는 목회자의 목양이 없는, 평신도들의, 평신도들에 의한 서울서머나교회의 비성경적 교회 형태에 대하여 우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 관련 기사 보기 )

 

교회와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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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구령을 위한 복음 전도자의 특성

스펄전

 

우리의 주요 임무는 영혼을 구령하는 것이다. 대장장이가 여러 종류의 말(horses)과 편자에 대해 정통한 것처럼, 우리도 영혼과 구령에 관한한 정통해야 한다. 지혜로운 일군은 자기가 맡은 임무를 성취하기 위해서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확실히 위대하신 하나님, 모든 일군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은 자신의 위대하신 역사 가운데, 특히 영혼 구령의 아름다운 역사 속에서 하나님 자신의 특별한 도구를 갖기를 기뻐하셨다. 옛 창조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도구를 사용하셨다. "그가 말씀하시니 그것이 이루어졌고.."(33:9). 더군다나 새 창조에 있어서도 가장 강력한 도구는 여전히 그분의 능력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종들의 전도를 통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도구가 되기에 합당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사람의 귀와 마음에 말씀하시도록 하는 도구가 되기에 온전해야 한다.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도록 여러분이 준비되었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기 바란다.

 

 

그 특성 하나 - 거룩함

 

내가 확신하건대, 영혼 구령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특성에 대해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먼저 거룩함이라고 말할 것이다. 조지 뮐러씨가 멘톤(Menton)이라는 곳에 왔을 때, 한 번은 그곳에 가서 그의 메시지를 듣게 되었는데, 그 설교는 평범한 주일학교 선생이 학생들에게 하는 듯한 설교였지만, 내 영혼에 그 이상 좋을 뿐만 하니라 그토록 풍성한 설교는 들어본 일이 없는 듯 했다. 조지 뮐러는 자신의 인격으로써 진리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거기 있었으며, "자기가 믿은 것을 말로 증거할 뿐만 아니라, 자기가 믿은 대로 사는 사람"으로서 증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방식으로 증거하였던 것이다. 그가 증거한 모든 말속에는 자신의 믿음의 영광스러운 삶이 각 영혼의 귀와 마음에 호소하는 듯했다. 거룩함이 그 설교자의 능력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축복하셔서 여러분도 거룩함을 입어, 우리의 능력이 그 동일한 원천에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 특성 둘 - 겸손의 영

 

그리스도인이 교만하게 되는 것을 보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것저것을 다 따져 봐도 이것보다 마귀를 즐겁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영혼을 구령함에 있어 겸손은 여러분을 아무 것도 아니며 보잘 것 없는 자로 여기게 해주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능하게 하셔서 열매를 주시면, 여러분은 곧바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게 되고, 그에 대한 자랑이 여러분에게 속한 것이 아님을 보게 한다. 여러분에게 만일 아무런 열매가 없으면, 겸손은 그 실책을 하나님의 주권에 돌리지 않게 하고,오히려 여러분의 어리석음과 연약함에 돌리게 해준다. 영혼 구령자에게 있어서 깊은 겸손에 대한 필요는 그가 참으로 겸손하지 않은 만큼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축복하실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증거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으로 외눈박이라도 분명히 볼 수 있는 사실이다.

 

 

그 특성 셋 - 살아있는 믿음

 

주의 일을 함에 있어 열매를 맺는 필수적인 일군의 자질은 -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으로 - 바로 살아있는 믿음이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복음 증거를 듣는 사람의 영혼을 얻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매우 큰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여러분은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어야 한다. 나는 종종 강단에 서게 되면, "이것은 내가 그분의 이름을 위해 증거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축복을 위해 구한 이상 헛되이 돌아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축복하실 것이고, 내가 전한 메시지가 듣는 사람들에게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향기던가, 아니면 사망을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로써 그분의 목적은 반드시 응답될 것이다."고 확신한다. 주께서 사용하시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실 것을 기대하고, 그러한 확신 가운데 힘을 다해 수고하는 사람이다. 주의 일에 많은 열매가 맺히고 큰 성취가 있게 되면 그 사람은 전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것을 바라고 일했기 때문이다.그러한 사람은 살아있는 말씀의 씨를 뿌리고 큰 수확을 거두기를 바라는 사람이다.자기의 식물을 물위에 던지는 사람은 도로 찾으리라는 기대로 열심히 살피고 깨어 경성할 것임에 틀림없다(11:1 참조).

 

 

그 특성 넷 - 열심

 

여러분이 정말로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닫도록 도울 수 있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이 그렇게 할 수 있음을 믿고 의지하기 바란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열심이 없다면 사람들로 진리를 깨닫도록 하는 일은 기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 한밤중에 내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서, 무슨 일인가 하고 창문 밖으로 내다보게 될 때, 문을 두드린 그 사람이 냉담하고 나지막한 소리로, "당신 집 뒤편에 불이 났어요"라고 말한다면, 나 같으면 그 불에 대해선 상관치 않고, 오히려 그 사람에게 물 한바가지를 쏟아 붓고자 할 것이다. 하나님이 영혼 구령을 위해 세상에 자기 사람을 보내시고자 할 때, 그 복음전도자가 문을 두드린 바로 그 사람의 삶의 태도나 정신 자세와 같다고 생각해 보자. 영혼을 향한 격렬한 고뇌도 없는, 그 마음과 입술에 "재앙이로다!큰 재앙이로다!"라는 외침도 없는, 온전한 헌신도 없는,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정도 없는 그러한 복음 전도자룰 생각해보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함께 열심을 내도록 하자. 온 마음을 다해 주의 일에 힘쓰도록 하자. 그렇지 않으면 일찍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특성 다섯 - 단순함

 

영혼 구령을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또 다른 자질은 마음의 단순함이다. "자 이제, 여러분은 세상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높은 신분과 많은 월급을 바랄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만일 성공적인 사업이나 좋은 대학에 가고자 하는 마음을 포기하면 여러분은 일생동안 가난한 복음 전도자가 될 것이다."라고 나는 종종 여러 그리스도인에게 말하곤 한다. 그러나 나의 진심은 오히려 나를 쳐다보며, "그래요, 저는 가난하지만 영혼을 구령하는 쪽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우리는 진실로 단순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그 특성 여섯 - 전적인 순종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여야 한다. 하프 연주자는 자신이 특별히 아끼는 하프로 연주하기를 즐거워하는데,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 하프를 잘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하프도 그의 손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하프의 모든 현을 다루듯 여러분을 붙드시면 여러분의 모든 능력은 그분의 손의 움직임에 민감히 반응하게 되므로, 비로소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 그러한 상태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과, 성령께서 여러분을 쓰시고자 할 때, 그분에 의해 즉시 감화감동을 받을 수 있는 그러한 민감한 상태에 항상 긴장하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 하나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러한 자질을 우리에게 주소서 아멘.

 

 

 

출처: 브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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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삶에 양심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성화와 거룩한 삶은 우리 양심이 얼마나 청결하고 예민한지에 달려있다. 양심이 깨끗한 만큼 거룩하게 된다. 성령이 우리 양심을 통해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가이드 한다. 양심을 통해 성령이 우리의 잘못과 죄를 깨닫게 한다. 어떻게 행해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준다. 성령이 우리 안에 바른 양심의 소리를 일깨워준다. 신비한 음성, 이상한 음성 들으려고 하지 말고 이 양심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양심이 둔해지고 어두워지면 이 소리가 안 들린다. 자기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자기기만의 음성만 들린다. 똑같은 잘못을 범하고 어떤 사람은 깊은 자책감을 느끼는데 어떤 이는 죄의식이 전혀 없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조자도 인식하지 못한다. 양심이 심히 굳어있는 증거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일깨우는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고 살면 그 양심이 점점 굳어지고 마비된다. 나중에는 양심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면 성령이 전혀 깨우칠 수 없고 인도할 수 없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했다(딤전1:19). 선한 양심을 버리면 믿음이 아무리 좋은 것 같아도 그 믿음은 파선한 것이다. 믿음과 선한 양심은 비례해야한다. 믿음이 성숙할수록 양심이 밝아지고 청결해져야 한다. 그런데 신앙 생활할수록 양심이 굳어지고 강퍅해지고 더러워지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 그것이 신앙생활에 가장 무서운 일이다.

 

오늘날 믿노라하면서 신앙 양심이 없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 한국교회가 처한 심각한 위기이다. 그러니 믿어도 세상사람 보다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양심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신앙양심이 형편없이 더러워져 있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교회 생활로 인해 양심이 굳어질 수 있다.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예배를 드림으로 우리 양심이 더 청결해져야 하는데 거룩한 것으로 인해 오히려 양심이 더 강퍅해질 수 있다. 거룩한 것을 계속 접하고 반복하다 보면 거룩한 것에 타성이 생긴다. 거룩한 것을 하찮게 여긴다.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가 우리 양심을 더 굳어지게 할 수 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 달고 살며 거룩한 일을 반복하는 목사들이 가장 양심이 굳어질 위험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다.


성령이 우리의 잘못과 죄를 깨우치고 바로 살도록 우리를 감화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도 받고 눈물도 흘린다. 그런데 마음에 감동받고 찔림 받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는 것으로 그치고 삶에 돌이킴이 없으면 그 양심은 점점 더 완고해진다. 다음에는 성령의 감동조차 느끼지 못한다. 오래 교회 생활한 이들 중에 양심이 굳어질 때로 굳어진 사람들이 많다.

신자에게 신앙양심은 생명 같이 소중한 것이다.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깨끗케 된 양심을 더럽히면 그는 모든 것을 잃는다.

박영돈 교수 /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박영돈

 

아이테오 님의 방에서

 

지인이 보내어온 감동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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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오직 당신만을... 
                                                       최송연                   

    당신을 따라나선 이 길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쳥명한 날이거나 먹구름 휘몰아치는 어두운 날이어도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잔잔한 生이거나 시커멓게 뒤집힌 바다처럼 거친 生이거나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따스한 햇살로 행복한 때나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 서러운 눈물 삼켜야 하는 때에도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새벽 이슬같은 당신의 사랑 바싹 메마른 광야에서도 내 영혼을 적셔 열매 맺게 하시며 칠흑으로 새까만 밤하늘 아래서도 가슴에 피어나는 소망은 별빛으로 반짝입니다 내 주여, 당신의 고귀한 생명 나를 위해 내어주셨으니 나 오직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영원토록...

     

     

     

    출처: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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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마테라 목사(Photo : 출처 = 조셉 마테라 페이스북) 조셉 마테라 목사

 

미국 보수 교계의 대표적 인사인 뉴욕 레저렉션 교회의 담임목사인 조셉 마테라(Joshep Mattera) 목사는 최근 "세속화된 기독교인의 10가지 징후(10 Signs You Are a Secular Believer)"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교회 안에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이 너무 많다면서, 자신들의 모습을 점검하고 성경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성경적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테라는 이 칼럼에서 "1981년부터 목회 사역을 해왔고, 수천명의 기독교인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었다"면서 "교회 안에서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러면서도 이들 중 상당수가 세속적인 가치 체계를 지지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세속화된 기독교인인지에 대해 알려주는 징후가 있다면서 10가지를 소개했다.


 

1.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생각하지 않고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은 신앙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무신론자다(이를 무신론적 유신론이라 함 - 편집자주). 왜냐하면 이들은 결혼이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는 것, 직업을 바꾸는 것, 교회를 바꾸는 것 등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구하거나 성경 말씀을 찾아보지 않으며, 영적 지도자의 조언도 듣지 않는다.

2.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시선을 더 의식한다.

세속적인 셀피 문화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은 지혜의 시작인 여호와를 두려워하기보다 친구들에게 보여지는 겉모습(외양), 지위, 인기를 더 추구한다.

우리가 하나님보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시선을 더 의식할 때, 우리는 세속화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다.


 

3. 성령이 아니라 돈에 이끌린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보다 돈을 우선순위에 둔다면, 당신은 세속화된 기독교인이다. 이것이 많은 소위 기독교인이라 하는 이들이 일을 하는데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사용하면서도 신앙의 공동체와 교제하는데는 거의 시간을 쓰지 않는 이유다. 예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다른 모든 것들을 더하신다고 하셨다(마 6:33).


 

4.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주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관계를 위해서다(사람들을 사귀려고).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 주목적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성경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교회 예배에 참석한 주 목적은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듣고, 성도와 교제하기 위해서다.


 

5. 대중문화가 추구하는 가치를 모방한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연애(데이트), 혼전성관계, 옷, 대중음악 등에 있어서 세속적인 가치들을 신봉한다. 이것은 나에게 '오리처럼 보이고 오리처럼 꽥꽥거리면 오리일 것이다(If it looks like a duck and quacks like a duck, then it's a duck!)'는 속담을 상기시켜 준다. 당신이 내적으로 세상의 가치 시스템을 찬양하고 있다면, 당신은 영의 생각(spiritually-minded)이 아니라 육의 생각(worldly-minded)을 하는 것이며 세속적인 것이다.


 

6. 하나님은 당신의 인생에 일부일 뿐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하나님을 자신들의 인생의 일부로 만들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의 삶의 전부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7.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이곳 저곳에서 잽싼 기도를 하면서 자신들의 세속적인 삶의 방식을 축복해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 가운데 계속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지 않으며, 성경을 따라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8. 당신의 삶이 다른 이들에게 복음의 영향력을 미치지 않고 전도도 하지 않는다.

세속화된 기독교인들은 다른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해야 한다는 부담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대부분은 지난 5년이나 10년 사이에 단 한 명의 영혼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세상에 포섭되어 있어서 영원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많은 경우에 구원 받지 않은 가족들이나 친구들, 그리고 직장 동료 등 함께 일을 하는 사람들이 당신에게서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의 차이를 전혀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9. 제자를 삼지 않는다.

구원 받은 이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자신의 삶을 한 명의 영혼을 제자로 삼는 일을 위해 조금도 투자하지 않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 당신이 현재 누군가를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성숙하도록 멘토링을 해주거나 도움을 주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마태복음 28장 19절의 대위임령을 의도적으로 불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목회자나 장로 등의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당신이 다른 이를 제자로 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0. 재정에 있어서 성경적 청기지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이들이 자신들의 돈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편할 때만 헌금을 한다. 이들은 자신이 자신들의 생명이나 돈이나 부에 대한 주인이라고 생각한다. 설령 십일조를 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소유의 10%가 아니라 그들의 소유의 100%의 주인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당신이 돈을 자신이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당신은 성경적 청기지가 아니다. 그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모습이 아니라 세속화된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출처: 재경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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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가까워진 그날

 

 

지식적 분야에서나 물질적 세계에서나, 영적 세계관, 그 어디를 바라보거나 현대는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인심도 바뀌고 사회질서도 바뀌고 교통수단도 바뀌었다. 교통수단: 우리네 조상처럼 말을 타고 다니던 그런 때는 아니더라도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유행가 가사처럼 느릿느릿 지나가는 풍경을 음미하며 달리던 기차 여행은 이미 먼 옛이야기가 되었고 비행기를 타면 하루 만에 가지 못할 곳이 없다.

통신수단 역시, 사랑하는 이에게 소식 한번 전하려고 문장을 다듬으며 때로는 밤이 맞도록 편지를 쓰고 찢고, 다시 쓰고 찢던 그런 정서적 시대는 이미 구석기 시대다. 와이어레스 전화기 한 대면 전 세계 어디서든지 다 통한다. 이 모든 현상을 요약하여 한 마디로 표현하면 모든 것이 "별똥별"처럼 빨라졌다 하겠다.

인심, 내가 어린 시절, 시골에 살 때는 대청마루에 앉아 밥을 먹다가 사립문 밖으로 지나가는 나그네가 있으면 불러서라도 집에 들어오게 하였고 한 술이라도 함께 뜨고서야 길을 가시도록 권장을 했던 때가 있다.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하여도 그랬다. 그 이전은 더욱더 인심이 좋았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요즘은 어떤가?  지나가는 나그네를 집안으로 불러들이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다. 같은 자리에서 식사하여도 당신이 먹은 것은 당신이 지급하고 내가 먹은 것은 내가 지급한다. 오히려 부담이 없고 그것이 더 편하게 느껴진다.

종교계도 급속도로 바뀐다. 요즘은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단체와 유명세를 타던 목사들이 있고 안타깝게도 많은 목사님들이 그들의 괴변에 동조하며 함께한다. 남자와 여자가 그 부모를 떠나 한 가정을 이루던 시대도 이제 옛말이다. 남자는 남자와 여자는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고집한다. 그것이 인권을 보호하는 것이란다. 목사님들마저 그렇게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발로 짓밟고 뭉개도 상관없다는 것일까? 물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관도 바뀐 탓이겠다.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 마지막 때에는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미리 말씀해 주셨기에 세상이야 그러려니 해야 하겠지만 참 씁쓸하다.

그러나 우리(성도)가 과연 이대로 살아도 좋은가? 물결이 치면 치는 대로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휩쓸려가야만 하는가?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향해, 너희는 정결한 신부로 신랑을 맞이할 처녀의 마음이 되라. 술 취함과 방탕함을 버리고 늘 단정히 행하고 깨끗하게 단장하는 삶을 살라고 명하시지 않았는가? 더욱 가까워진 그날(주님 다시 오실 날)을 예고하는 이런 때, 성도가 지향해야 할 태도는 무엇일까?

성도(처녀)들이 지녀야 할 덕목:

순결과 정절을 지키고 정결함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여기에서 정결(cleanness)과 순결( purity, pure)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정결은 깨끗함을 의미하고 순결은 처음부터 더러운 것이 섞이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영적으로 성도의 정결함(cleanness)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가능하고,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이미 그 피로 깨끗게 하여 주셨기에 모두 정결(cleanness)하다고 보겠다. 그러나 순결(purity, pure)은 자기 자신이 지켜내야 하는 신앙의 정절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성도(처녀)들은 신랑을 맞이할 때까지 온갖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 19-20절).” ,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계 16: 15절 말씀).”

성도(처녀)들이 기억해야 할 말세적 예언(이사야 편):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전 약 700-750여 년 전의 사람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약 2,700여 년 전의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 현 세대를 사는 우리네 여인들의 모습을 눈으로 보듯, 손으로 만지듯, 초상화를 그리듯이 어쩌면 이토록 생생하게 잘 묘사했는지, 정말 기막힌 일이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 준 참된 선지자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교만한 여인들과 늘인 목(사 3: 16절상):

이것은 현대 여인들의 사고와 옷차림을 의미한다. 말세적 시대의 여인들은 교만하여 늘인 목으로 다닌다고 했다. 과연 그 말대로, 요즘 여인들은 목을 더 많이 늘이기 위해 목 주위를 깊게 파다 못해 아예 가슴과 등이 다 드러나는 옷을 입고, 젊은 여인들은 배꼽티라고 하는 거의 위험수위가 노출될 정도로 깊게 패인 옷들을 걸치고도 부끄럼 없이 거리를 활보한다. 그렇다. 요즘 세대의 여인들처럼 당당하다 못해 교만한 여인 천하는 일찍이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들의 세대만 해도 우리나라는 가부장 제도였다. 가장이 그 집의 주인이요, 지배자란 뜻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나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남자 아닌 여자나 아이들은 숫자에 칠 가치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요즘 드라마를 보면, 우리 부모의 세대처럼 한 가정의 남편이 주인처럼 지배하며 군림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간 것 같다. 오히려 안주인이 된 아내들이 남편들 위에서 군림(?) 하는 느낌이다.

또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남자들이 부엌에 들어가면 큰일 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지금 그런 소리 하다가는 오히려 큰일 난다고 한다. 요즘 시대는 부엌에 들어가 설거지하지 않는 남편은 아내로부터 사랑받지 못할 뿐 아니라 더 심하면 쫓겨(?)난다 고하는 우스갯소리까지 나돌 정도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한 가정에서 호주로 존경받으며 대우받던 남편들이 이제는 아내에게 쫓겨날까 전전긍긍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어떻게 해서 여인들이 그렇게까지 교만해지고 말았는가? 그것은 바로 말세 적 예언의 성취시대가 도래했다는 증거다.

2. 아기죽거려 행하며 발로 쟁쟁한 소리를 내는 신발 신은 여인들(사 3: 16절하):

나는 아주 어릴 적에 고무신이란 것을 신어본 기억이 있다. 우리 부모님들도 고무신을 신었고, 그 이전의 분들은 짚신을 신었다 했고, 또 그 이전의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다. 이런 현상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무엇을 신었는가는 확실치 않지만, 어쨌거나 이사야 선지자가 본 환상적 여인들처럼 아기죽거리며 걸을 수 있는 신발을 신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고무신이나 짚신을 신고 걷는 여인을 묘사할 때는 어떻게 묘사하는가? “삽뿐, 삽뿐 걷는다” 이다.

요즘 현대 거리에서 사뿐 사뿐 걸어 다니는 여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가? 없다. 그런 여인들은 이미 구세대, 전설 속의 여인들로 멀어져 갔을 뿐이다. 지금은 “여인들이 아기죽 거려 행하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내며 걷는 시대다. 반드시 말세가 되어야만 신게 예언되어 있는 여인들의 신발, 쟁쟁 소리를 내며 아기죽 아기죽 걸을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이 신발의 이름은? 그것은 바로 ‘하이힐’이다! 이 하이힐이란 굽이 뾰족하고 높은 신발로써, 모든 여인들 뿐 아니라, 나에게도 사랑받는 신발이다.

이 신발만 신으면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커보여서 좋고, 키가 큰 사람은 큰 키가 더욱 늘씬하게 뻗어보여서 또 좋다. 여인들이 착 달라붙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고 걷는 뒷모습을 바라보면 오리처럼 아기죽 아기죽 걷는 모습, 그야말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기억나게 해 주어서 입가에 쓴 웃음이 돈다. 그뿐인가?. 하이힐 뒤꿈치에는 징이라고 하던가? 뾰족한 쇠붙이가 달려서 아스팔트 위를 걸을 때마다 “딱딱딱, 쟁쟁쟁.” 하는 요란한 소리가 난다. 재밌지 않은가? “아기죽 아기죽, 딱딱딱, 쟁쟁쟁….” 2,700여 년 전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을 여러분과 내가 살고 있다는 것이…..

3. 정을 통하는 눈은 재론할 여지도 없을 것 같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말, 내가 어릴 때 배운 말이다. 요즘 아이들이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나 하고 있을까? 오히려 그 반대일 것 같다. 남녀칠세자동석이란 신조어가 나올 정도이다.

성도(처녀)들이 기억해야 할 말세적 예언 성취 시대(다니엘 편):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 4절).” 여기를 보자. 다니엘은 말세의 징조 중 가장 두드러진 현상으로서 1.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2. 지식이 더할 것이라 하고 예언했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이 시대만큼 사람들이 빨리 왕래한 적은 아마 없는 것 같다.

바로 1세기 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 경상도에서, 한성,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까지 가려면 적어도 석 달 열흘(3개월 10일)이 걸렸다고 한다. 필자가 어릴적만 해도 부산에서 서울 가는 완행열차를 타면 밤새도록 달려야 그 이튿날 아침 늦게 서울역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제는 어떤가? 비행기만 타면, 부산서 서울 가는 것은 눈 깜짝할 사이다. 어제 서울에 있던 사람이 오늘 뉴욕에 있을 수 있고, 오늘 미국에 있는 사람이 내일 한국에 있을 수 있는 시대다. 사람들이 놀랍도록 빨리 왕래하는 시대다.

지식도 마찬가지다. 말세에는 “지식이 더한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그것은 지금까지 인간이 지니고 있던 지식 외에 그 어떤 다른 신지식이 더해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던 지식 위에 더해진 그 지식이야말로 바로, 지금 이 컴퓨터 시대를 가리킴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지금은 컴퓨터 하나면 전 세계의 정보를 한눈에 읽을 수 있고, 현대 컴퓨터 공학이야말로, 인간의 지식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을 창출해 낸 것이다.

성도(처녀)들이 기다리는 신랑은 언제 어떻게 오시는가?
1.    아버지만 아신다(마 24: 36, 42-43, 행 1: 6-7절),  2. 생각지 않은 때 오신다(눅 12:40절), 3. 밤에 도적 같이 오신다(살전 5:2절), 4. 번개가 동에서 번쩍하여 서편에 이름 같이 오신다(마 24: 27절). 5. 아버지의 영광으로 천사와 함께 오신다( 마 16: 27절). 주님께서 말씀하셨음에도 극단적 종말론자들은 날짜 풀이에 관심이 더 많다. 그러다 보니까 사탄이 쳐둔 그물에 걸려 헛된 날짜를 예언하다가 불발이 되면 잠시 부끄러움을 당하고 조용한 듯하다가 어느새 다시 또 고개를 쳐들고 세상을, 믿는 성도들을 미혹하려고 한다. 본질보다 비본질에 관심을 더 쏟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가 오실 때의 세상 형편은 어떠한가?
1. 노아의 때와 같이 자기 일에 도취되어 있는 상태, 2.안전하다 평안하다 (자기 안일 상태)(살전 5: 3절), 3. 거짓 선지자가 미혹하고 표적과 기사로 미혹함(마 24: 24절), 4. 곳곳에 전쟁이 터지고(천재지변).4. 음란이 팽배해진다.  

이단들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a) 재림의 긴박성을 지나치게 부추기기 위해 주님의 재림 날짜를 제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음을 기억해야 한다(마 24:36, 42-43절 참조) b) 주의 재림은 없다고 가르친다. “먼저 이것을 알 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벧후 3:3-4절 말씀)”.

이런 때에, 우리 성도(처녀)들은 순결을 지키고, 깨어 기도함으로써 기름준비 잘 하고, 자신을 지켜 정결하며 매일 매 순간을 순전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단장하는 삶을 살다가 신랑 앞에 서게 되는 그날, 수치를 당치 않게 되고, 그분의 사랑을 받을 때 한 점 부끄럼이 없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더욱 가까워진 그날, 그 영화로운 천국 잔치에 들어갈 준비를 잘 하자.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너희를 부르신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살전 5:21-24절 말씀).”



글/ 최송연: 목양연가 "영성훈련" 중에서


코란에서 예수님을 찾은 이슬람 지도자!>


코란에 보면,

코란을 읽다가 잘 모르는 부분이 나오면

성경을 읽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되어있다고 합니다.


성경속에 진리가 다 밝혀져 있다고

귀신이 예수님을 보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코란을 읽는 자도 결국 진리를 찾으려 노력하면

결국 코란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성경말씀을 믿게 됩니다.


불경을 읽는 자도 진리를 찾으려 노력하면

결국 불경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성경말씀을 믿게 됩니다.


진리를 열심히 찾는 자에게, 성경말씀이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되는 축복이 있음을 믿습니다.




 

 

 

 

글쓴이: 죄인..님









내 미소는 나의 명함이다


나의 미소는
강력한 유대관계를 맺고,
서먹한 얼음을 깨뜨리고,
폭풍우를 잠재우는 힘을 갖고 있다.
나는 늘 제일 먼저 미소 짓는 사람이 되겠다
오늘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을 선택하겠다


- 앤디 앤드루스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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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 가진 천년왕국 사상은 역사적 전천년설
박수암 박사의 <요한계시록의 바른 해석을 위하여> ⑨
http://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3676
newsdaybox_top.gif 2015년 05월 11일 (월) 09:31:23 박수암 박사 btn_sendmail.gif webmaster@amennews.com newsdaybox_dn.gif

박수암 박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신약학


IX. 천년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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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수암 박사

“천년왕국”은 요한계시록의 주제인 “현세의 심판과 교회의 승리” 중 “승리”의 주제를 보여주는 한 주제이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천년왕국”을 보여주는 계시록 20:1-6의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 구절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실현된 왕국 차원에서 해석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21:1-22:5에 나오는 “새 하늘과 새 땅” 차원에서 해석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천년왕국”은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나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할 그런 나라가 아니라, 이미 온 하나님의 나라와 앞으로 올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 있을 잠정적인 하나님의 나라이다.

“천년왕국설”(millenarianism)이란 계시록 20;4의 “천년”을 문자적으로(혹은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현세와 내세 사이에 과도적인 중간시대가 있어, 인간의 이상향이(사 11:6-9, 65:18-25, 겔 37:24, 슥 8:12, 14:17-19, 암 9:13)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1천년간 변화된 지상에서 이루어진다고 믿는 하나의 학설이다.

이 학설에는 대체로 세 가지의 이견이 있다.

1) 무천년설 : 이는 본문의 “천년”을 상징적으로 해석하여,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재림 시까지의 전 기간을 천년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영적 통치를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보는 견해이다(Augustine, Luther, Calvin, A. Kuyper, Lenski, Berkhof, Vos, Warfield 등).

2) 후천년설 : 이는 천년왕국 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다는 전제하에 본문의 “천년”을 재림 직전 1000년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 1000년 기간 동안에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고, 교회가 왕성해지며,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해당된다는 것이다(C. H. Hodge, A. H. Strong, Hengstenberg 등).

3) 전천년설 : 이는 “천년”을 문자적이나 상징적으로 보면서,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어 천년왕국을 이끄신다는 것이다(이 견해는 다시 두 종류의 견해로 나누어진다).

① 역사적 전천년설 : 이는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상 재림 한 번만 있고,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 두 번으로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교회는 유대인이나 불신자들과 함께 환난을 통과하며, 그 환난 후에 주께서 재림하시고 성도들은 그를 영접하기 위해 휴거되며 함께 지상에 내려와 이어 천년왕국이 어떤 변형된 세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 본다. “천년”을 꼭 문자적으로 보지 않는다(Bengel, Godet, Hofmann, Bousett, Charles, Eerdman, Alford, Ellicott, Zahn 등);

② 세대론적 전천년설 : 이는 천년왕국 전에 그리스도께서 공중에 비밀 재림하시고, 그 때 신자들은 휴거되어 공중에서 7년간 혼인잔치를 하며, 그동안 지상에 남아 있는 유대인과 불신자는 7년 대 환난을 통과하며, 이 환난을 통해 유대인들은 대규모로 회개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7년 대 환난은 다시 2분 되어, 복음 증거의 전3년 반과 종교박해의 후3년 반으로 나누어진다. 이 7년이 끝나면 주님은 성도들과 함께 지상 재림하여 천년왕국을 건설하신다. 이 견해는 “천년”을 꼭 문자적으로 본다(Scofield, Darby, Walvoord, Hal Lindsay, 이상근 등 세대주의 신학자들).

그럼, 이 견해들 중 어느 견해가 가장 옳으며 성경적인가?

1. 관련된 본문들 석의

천년왕국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신약성서에서의 관련된 본문들을 바르게 석의할 필요가 있다.

(1) 계시록 20:1-6

이는 천년왕국설의 근거가 되는 본문으로서, 본문에 대한 객관적인 해석이 요구되는 본문이다. 먼저 1-3절은 사단의 결박과 무저갱에 갇힘이 나와 있다.

“일 천년 동안 결박하여”(2절) 천년동안 마귀는 결박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재세 시 마귀는 결박되었었다(막 3:27). 그러나 그 결박은 원리적인 것이고 잠정적인 것이었다. 이제 그 완전한 실현이 이때의 결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무천년주의자들은 이를 그리스도의 초림 시에 있었던 결박으로 보나, 이는 그리스도가 아닌, 한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가지고 내려와 잡은 용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시작되는 신약시대는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는 시대이지, 무저갱에 갇히어 있는 시기가 아니다.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4절). 2:26-27(“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3:21(”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4:10(”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 “보좌에 앉은 자들”은 그 다음에 설명이 되어 있는, 예수를 증거 하다가 순교하였거나, 황제 예배를 거부한 순교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은 계시록에 자주 나오는 표현으로(6:9, 12:17), 일반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초대교회 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자들이었고, 그럼으로 해서 순교하는 자들이었다.

“심판하는 권세”는 사단의 패배로 인해 오는 통치권을 의미한다. 다니엘 역시 네 짐승이 망하자 인자 같은 이가 보좌에 앉으신 이로부터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받음을 보았고, 천사는 이를 성도가 나라를 얻은 것으로 해석했다(단 7:13-14, 22). 성도들은 이 때 짐승과 그 모든 열왕들이 멸망했으므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왕국의 통치권에 함께 참여할 권리를 받은 것이다. 예수님도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성도가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할 것을 말씀하셨다(마 19:28. cf. 딤후 2:11-12, 계 5:10).

이는 확실히 지상의 “전투하는 교회”(church militant)가 아닌, 환난을 통과한 천상의 “승리하는 교회”(church triumphant)를 가리킨다.

“살아서”(ἔζησαν). 이는 5절의 ἔζησαν과 더불어, 영적인 부활이나 중생을 가리키지 않고 육적인 부활을 가리킨다. 순교까지 하는 성도들이라면 그들은 이미 영적인 부활을 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동안 왕 노릇하니. 천년왕국설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2) 고린도전서 15:23-26

이는 천년왕국설의 간접적인 근거가 되는 구절로, 바울이 부활의 순서를 말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천년왕국을 끝내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를 언급한 구절이다. 바울은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부활부터 나라를 아버지께 바칠 때까지 세 단계가 있음을 보인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첫째는 그리스도의 부활, 다음은 성도의 부활, 그 다음은 불신자의 부활. 불신자의 부활 시 그리스도는 인류를 심판하시고 인류의 최후의 원수인 사망과 음부를 불못에 던지신다.

여기에 사용된 순서를 알리는 부사 “다음에는”(ἔπειτα)과 “그 후에는”(εἶτα)은 모두가 선후관계(sequence)를 나타내는 시간의 부사이며, “그 다음”(then)을 의미한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 사이에, 후자는 신자들의 부활과 “나중”(τὸ τέλος)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알린다. “나중”은 현 세대의 끝을 의미하기 보다,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로 이끌어가는 종말론적 대 파국(the close of the great eschatological finale)의 끝 즉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극점(consummation-point)을 가리킨다(G. Vos)1). 이것이 사실이라면, 신자의 부활과 계시록 22: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의 천년이 다 찬 후의 불신자의 부활 사이에는 최소한 천년의 시간적인 간격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왕 노릇하시리니.” 이 왕 노릇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 기간 동안의 왕 노릇을 가리킬 수 있다(마 19:28, .Weiss, Lietzmann, Bachmann, Meyer 등)2).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가 부활인류인 성도들과 더불어 왕 노릇 하시는 천년왕국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이 천년왕국 이후 곡과 마곡의 멸망, 마귀의 멸망, 최후의 심판, 사망과 음부의 멸망(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원수를 발아래 두시고 왕 노릇하는 일을 마치심)이 있게 되고, 영원한 신천신지가 있게 되는 것이다.

(3) 계시록 20:7-10

천년왕국이 어떠한 성격의 나라인가를 알기 위해 “천년왕국” 환상 다음에 “곡과 마곡”이 사단과 함께 멸망하는 환상이 나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곡과 마곡의 이야기는 구약 에스겔서 38-39장에 나오는 바, 거기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36-37장) 이상적인 성전(40-48장) 사이에 나와 있다. 이 경우, 곡과 마곡은 이스라엘 백성을 최후로 괴롭히는 현세에서의 마지막 세력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곡과 마곡의 환상이 계시록에서는 천년왕국 환상과(20:1-6) 신천신지 환상(21:1-22:5) 사이에 나와 있다. 이는 이 천년왕국이 지상에서의 일시적인 왕국임을 보인다. 그러므로 천년왕국과 신천신지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4) 계시록 11:11-12

천년왕국이 어떠한 성격의 나라인가를 알기 위해 계시록 11:11-12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 본문은 교회가 환난을 당한 후 휴거하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삼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여기 “삼일 반”은3.5일로서, 한 이레의 절반이 되는 수이다. 한 이레는 7일이고, 7의 절반은 완전수의 파열수로서, 불안정하고 짧은 기간을 나타낸다. 이의 배경은 다니엘서 9:27로서, 다니엘은 “한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하며 포악하여 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 종교박해가 일어나는 기간이란 것이다. 그런데 계시록은 다니엘의 하루를 1년으로 상징화하여, 한 이레(7일)를 7년으로 보고, 그 절반인 3.5년 즉 42개월, 1260일을 복음 증거의 기간(11:3) 혹은 박해의 기간(12:6)으로 보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 세대주의 해석자들은 7년을 문자적으로 보고, 소위 “7년 대환난설”을 주장하며, 이 환난은 휴거 받지 못한 유대인들이 받는 것으로, 계시록 6장에서 18장까지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것은 계시록의 원래 의도를 벗어난 것으로, 계시록을 그리스도인을 위한 책이 아닌, 유대인들을 위한 책으로 만드는 잘못이 있다. 성경 어디에도 “7년 대 환난”이란 개념은 발견할 수 없으며, 신약 어디에도 유대인만 환난을 당한다는 말이 없다.

다니엘서 9:27의 “절반에”란 부사는 יצִחִ(‘하치’)란 히브리어로서, 이는 “절반에”란 뜻도 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동안에”(불특정한 시발점)란 뜻도 있어(출 12:29, 24:6, 삿 16:3, 룻 3:8, 삼하 10:4), 시간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보다 국면(aspect)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1260일은 복음증거의 기간도 되지만, 박해의 기간도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신약시대가 복음을 증거하는 시대이며 동시에 박해를 받을 시기임을 말씀하셨다(막 13:9-10, 눅 22:36).

그러므로 한 이레, 3일 반, 1260일, 42개월, 한 때 두 때 반 때는 모두 동일한 실체를 가리키는 다른 표현들로서, 신약시대를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인 것이며, 한 이레의 절반은 신약시대에 있을 두 국면을 가리키는 표현인 것이다. 신약시대(“한 이레”)는 한 적그리스도적 왕이 자기의 때로 정했다는 점에서 전체가 환난의 시대요, 복음을 전하는 시대라는 점에서 전체가 증거의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증거한 후 환난이 온다는 점에서 신약의 절반인 것이다. 신약시대는 처음부터 복음을 전했던 시대이며, 처음부터 환난을 당했던 시대이다. 그것은 크게 보면 7일간의 환난기간이요, 좀 더 상세히 보면 3.5일 간의 환난기간이다(계 12:6과 12:14 비교).

“그들이.” 이는 유대인들을 가리키지 않고, 앞에서 말했던 두 증인, 두 감람나무, 두 촛대 즉 교회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 즉 교회가 고난을 받지, 유대인들이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다.

“하늘로 올라가니.” 교회의 휴거를 가리킨다. 세대론자들은 4:1의 “이리로 올라 오라”를 교회의 휴거로 해석하나, 그것은 요한더러 하는 말이고 교회더러 하는 말이 아니다. 즉 요한의 영혼이 하늘로 올라오라는 것이다(spiritual exaltation). 지상에서 고난당한 교회는 주님의 재림 시 공중으로 휴거를 당할 것이다(살전 4:17). 교회의 휴거는 환난 전에 있는 것이 아니고, 환난 후에 있는 것이다.

2. 가장 성경적인 견해로서의 역사적 전천년설

이상의 본문 석의는 우리로 하여금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인 견해라 보게 한다.

(1) 저자의 의도에서 볼 때

요한 계시록은 박해 중에 있는 교회(ecclesia pressa)를 위로. 격려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당시 소아시아 일곱 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황제예배 강요를 받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황제예배를 부추기는 영지주의 이단(니골라 당, 발람의 교훈, 이세벨)의 위협 하에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교회는 말할 수 없는 박해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들은 슬픔과 낙담과 순교와 타협의 기로에 있었다. 본서는 이런 상황에 있는 교회를 격려하고 위로하며 궁극적인 미래의 승리를 바라보고 신앙의 절개를 지킬 것을 교훈하기 위하여 기록된 것이다. 이런 저자의 의도(exegesis)에서 볼 때 천년왕국의 약속은 교회에게 소망을 주기에 좋은 약속이었으며, 그런 면에서 볼 때 고난 받는 성도에게 왕 노릇함을 약속하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올바른 견해라고 보여진다.

(2) 계시록의 구조에서 볼 때

천년왕국(20:4-6)은 그리스도의 재림(19:11-21), 짐승 의 멸망(19:17-21), 사단의 결박(20:1-3)을 전(前) 계시로 가지고, 사단의 멸망(20:7-10), 전 인류의 심판, 사망과 음부의 멸망(20:11-15), 신천신지(21:1-22:5)를 후(後) 계시로 가지면서 그 맨 중앙에 위치하여, 이들 전 후 계시들과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 부분에 기록된 사건들은 서로 다른 사건들로서, 상호연대적인 선후 관계에 있으며, 그 어느 하나도 한 사건의 다른 표현(변이 : variant)으로 볼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서 천년왕국 계시는 인접한 다른 계시들과 더불어 계시록에서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다. 나선형의 점진적 반복 구조에서 볼 때도, 천지상호작용의 구조에서 볼 때도, 본경과 삽경의 상호교차적인 구조에서 볼 때도, 교차대구법적인 구조에서 볼 때도 천년왕국 계시는 계시록의 제일 마지막 정점에 나와 있다. 이것은 천년왕국이 땅의 사건이 아닌, 하늘의 사건이며, 영혼과 육신의 구원이 함께 아우르지는 사건이며, 구원의 절정으로 인도하는 사건임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를 영적 부활이나(무천년설), 고난과 관계없는 사건이나(세대론적 전천년설), 재림 직전 이 지상에서의 사건으로(후천년설) 보는 것은 맞지 않는다.

(3) 경고적 설교문 구조에서 볼 때

천년왕국은 계시록을 경고적 설교문으로 볼 때, 권면(2-3장)과 이유(4-22장)의 구조 가운데 “이유”를 나타내는 가장 마지막 부분에 있다. 위의 통일성에서 논한 대로, 이 부분엔 2-3장의 약속들의 성취들이 나와 있다. 그 성취들 가운데 하나가 천년왕국이다. 고난당한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소망을 주려면, 고난당한 교회가 장차 왕 노릇한다는 역사적 전 천년설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역사적 전 천년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했고(이사야, 에스겔, 스가랴, 아모스), 재세시의 예수께서도 미리 말씀하셨으며(마 19:28), 부활하신 후에도 일곱 교회 사자들에게 말씀하신(계 2:26, 3:21) 약속의 성취를 보여주기에 합당한 견해이다. 무천년설이나 세대론적 전천년설, 후천년설은 이 성취를 보여주지 못한다.

(4) 종합적 해석법에서 볼 때

계시록을 주후 1세기 로마제국과 교회와의 투쟁의 시각에서 시대사적으로 해석하며, 미래에 일어날 일은 종국사적으로 해석하는 종합적 해석법에서 볼 때, 천년왕국은 미래에 일어날 일에 속하며, 천년왕국을 현세의 영적인 부활로 보는 무천년의 견해는 맞지 않는다.

(5) 관련 본문들 석의에서 볼 때

천년왕국과 관련된 본문들을 석의해본 결과는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성경적인 천년왕국설임을 보여준다. 이 천년왕국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를 인하여 목 베임을 당했거나, 짐승의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하고 그 이마와 손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상급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세대론적인 전천년설의 천년왕국과도 다르고, 무천년설의 천년왕국과도 다르며, 후천년설의 천년왕국과도 다르고, 신천신지와도 다르다.

교회는 환난 전에 휴거하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통과하며, 문자적 7년 대환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약시대의 환난이 있는 것이며, 그 신약시대를 계시록은 3일 반, 3년 반(1260일, 42개월), 한 때 두때 반 때로 표현하며, 이 때는 교회가 복음을 증거하며 세상으로부터 환난과 박해를 당하는 때인 것이다.

결 론

이상에서 우리는 계시록의 저자 요한이 가졌던 천년왕국 사상이 역사적 전천년설이었음을 보았다. 이는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갑, 파피아스, 폴리갑과 동시대 교부이었던 져스틴 마터, 폴리갑의 제자 이레니우스, 이레니우스의 제자 히폴리투스 등이 역사적 전천년설을 주장했던 것으로 보아서도 확증된다. 그것은 오늘날 릴예(Lilje), 스위트(Swete), 군드리(Gundry), 래드(Ladd), 벡위드(Beckwith), 뵈허(Böcher), 크라프트(Kraft), 비슬레이-머레이(Beasley-Murray), 마운스(Mounce) 월(Wall), 오온(Aune) 등 많은 학자들을 통해 받아드려지고 있다3). 이 사상은 한국교회의 경우 박형용 박사, 박윤선 박사 등을 통해 오늘까지 내려오고 있다.

무천년설은 사단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는 현세를 사단이 무저갱에 결박된 채로 갇혀 있는 세대라고 할 수 없는 점이 큰 약점이고, 후천년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무서운 박해와 환난이 따른다는 것이 성경의 사상인데, 어떻게 재림 직전 1000년 동안 사단이 무저갱에 결박된 채 갇히어 있으며, 복음이 효과적으로 전파되는 시기가 있는지가 의문이다. 세대론적 전천년설은 일곱 교회는 4:1에서 휴거해버리고 고난을 당치 않으며, 6-18장까지는 휴거되지 못한 유대인들이 당할 운명(7년 대환난)을 기록한 것으로 보는 것이 큰 잘못이다. 고난과 위기를 맞이한 교회를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 기록된 글이 계시록이라면, 역사적 전천년설이 가장 적합한 견해라 보여진다.

과연 한국교회가 일제의 신사참배와 극렬한 박해에 순교로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초기 한국교회의 천년왕국 신앙이었고, 그 중에서도 특별히 계시록에서 한국교회의 수난을 읽는 역사적 전천년주의였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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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G. Vos, Pauline Eschatology, Grand Rapids, 1979, 244.
2) J. Weiss, Der erste Korunthian Brief, Göttingen, 1910, 358-359; H. Lietzmann, An die Korinther, Tübingen, 1923, 81-82; P. Bachmann, Der erste Brief des Paulus and die korinther, Leipzig, 1910; H. A. W. Meyer, Critical and Exegetical Handbook to the Epistle to the Corinthians, II, Edinburgh, 1881-1883, 59-63.
3) H. Lilje, The Last Book of the Bible, Philadelphia, 1957; H. B. Swete, The Apocalypse of St. John, Grand Rapids, 1957; R. H. Gundry, The Church and the Tribulation,, Grand Rapids, 1973; H. Kraft, Die Offenbarung des Johannes, Tübingen, 1974.

최근 들어 세계정부주의자들이 중점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 이 땅을 롯의 때로 만들기 위해 펼치고 있는 동성애 어젠더와, 바티칸이 중심이 되고 있는 종교통합의 어젠더라 할 수 있는데, 설 연휴 기간에 이에 관한 소식이 주요 뉴스가 되고 있다.


첫 번째 소식은 “장난감의 성 정치학”을 운운하면서 이번 설에는 여자 아이들에게도 로봇 장난감을 선물해보고, 남자 아이들에게 인형을 선물해 보자는 기사이다. 남녀의 성 구분을 없애 결국 성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을 동성애로 이끌겠다는 사악한 의도가 엿보이는 기사이다.





장난감 업계에서도 남녀의 성구분을 없애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관련기사 >> “여자애도 터닝메카드 좋아하거든요” 장난감의 성 정치학, - 성 구분 없이 자유롭게 갖고 놀게 해야 (한국일보)



두 번째는 프란치스코 교황과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가 오는 12일 쿠바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갖는다는 소식이다. 1054년 로마 가톨릭과 정교회가 갈라진 뒤, 처음으로 이를 대표하는 수장들의 만남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노력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는 기독교 통합 더 나아가 종교통합의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2013년 WCC 부산 총회 개최 이후 한국교회 안에서 불고 있는 기독교 통합 작업이 이번 교황과 러시아 정교회 수장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로마 카톨릭 교회와 러시아 정교회 수장들의 만남은

종교(기독교) 통합의 상징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관련기사 >> 1000여년 만에 교황 - 러시아정교회 총대주교 만난다. (경항신문).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말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을 일만 골라하고 있는 2016년 올 한 해엔 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심히 우려스럽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기독교란 무엇인가?

-성경공부를 간절히 권하며-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고, 다양한 인본주의적인 사상들이 인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존재해 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도 다른 많은 종교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 종교들처럼 단지 몇 가지 아름 다운 사상이나 고상한 윤리와 도덕을 가르치는 평범한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란 한마디로 “복음”, 즉 “기쁜 소식”입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가장 복된 소식이라는 의 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알 려주는 최고의 복된 소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세상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평가와 생각들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2000년 전에 태어나신 예수님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자신의 삶을 타인을 위해 살다간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

▶이스라엘 백성들을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해방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대제국으로 만들어줄 왕인 줄로 알았으나, 평화적인 방법만을 사용하다가 당시 기득권 세력들 에게 반격당해 죽은 실패한 반역자?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선한 삶을 살다가(산타크로스처럼) 그들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회개혁을 외쳤으나, 기득권세력과 대적 자들의 공격을 받고 십자가 의 형벌을 받아 죽은 비운의 민중 혁명가?

▶세상에서 가장 완전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을 실제로 살면서 가르치심으 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준 도덕 선생님이나 사상가?

▶그에게만 가면(또는 그에게 기도만 하면) 세상 축복을 한 없이 부어주는 만사형 통을 이루어주시는 형통의 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누구라고 하십니까?

세상 사람들의 이러한 평가는 자신들의 협소한 관점에서 본 것이기에 진실이 아 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 도 모두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 예수 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나사렛 작은 시골 마을의 목 수가 하나님의 독생자라니? 과연 믿을 수 있을까요? 정말 증거가 있는 것일까요?

이에 관한 증거는 너무나 확실하여 부인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성경의 내적 증거와 세상 역사 기록들의 외적인 증거를 다 동원해서 살펴본다면, 그 증거는 가장 역사적이며, 명백한 사실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역사가 요세푸 스는 믿지 않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한 증거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그가 보여주신 수많은 기적들과 선한 일들은 그 분이 사람이라고 말해 야 될지 모르겠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대적하여 죽게 했던 유 대인들의 후손이 기록한 탈무드마저도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마술)을 행하고 이 스라엘을 배교하도록 했기 때문에 처형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 은 지난 2천년 동안 교회가 이것을 일관되게 증거하고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입니 다. 절대 권력과 권세 자들이 교회의 이 신앙고백을 없애려고 온갖 참혹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난 중에도 예수님의 하나님 아들과 구주이심을 고백하는 것으로 기뻐했습니다. 많은 순교자들이 ‘예수님은 하나 님의 아들이시다’라는 신앙 고백을 지키기 위해 화형과 같은 참혹한 형벌을 당하면 서도, 그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였습니다. 또한 교회사 가 운데 수없이 많은 탁월한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고 믿음을 고백하면서 삶이 놀랍게 변화되었으며, 이웃과 사회를 위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일들을 이루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제자들이 그 선생님을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하나님이라고 신 격화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아들이 역사의 시간 속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신 명백한 역사 적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면, 기독 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믿음 위에 기독교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적인 자살(?)을 하지 않 고도 우리의 합리적인 지성을 사용하여 성경을 공부하고 역사를 공부해 보면 예수 님께서 참 인간이면서 참 하나님이신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언제나 담대 하시면서도 겸손했습니다. 그의 인격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완벽했습니다. 그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방문자처럼 행동했습니 다. 그의 굳셈과 온유함, 타협을 모르는 의와 부드러운 자비, 어린이에 대한 관심과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사랑, 자제력과 자기희생 등 세상은 그와 같은 사람을 본적 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이 그의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에서 부활했으며, 그의 부활의 증거는 너 무나 명백하여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가 “죄인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왔다”고 대답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 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죄는 멸망(사망)을 가져왔고, 더 무서운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에게 가장 큰 필요와 시급한 문제가 있다면, 바로 이 멸망에서 벗어나 는 것입니다. 이 멸망은 영적인 사망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피할 수 없는 육신 사망과 영원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최우선적인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순히 멸망을 면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영생의 지 복(至福)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요한복음 17장 3절에 “영생은 곧 유일 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했습니 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란,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하나님과 같은 생명에 참여해 야 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과 같은 속성의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 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하여 하나님과 교제하며 영원토록 복된 삶을 살 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을 새 창조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첫째는 사람이 처음 창조될 때 가졌던 하 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하나님과 말할 수 없는 사랑의 교제 누리는 예배자로 세우 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러한 예배자는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할 수 있게 되 고 기쁨과 사랑이 충만한 새 인류로 하나가 되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께서 주신 다양한 은사와 자원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 리고 누리면서 왕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이런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진리를 단지 지적으로 동의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아셨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단지 교리에 동의하 고, 그 교리에 감탄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마음, 우리 의 인격전체의 변화를 수반하여 진정한 자유와 평강을 누리도록 하는 사랑의 종교 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배운바 진리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고, 그 진리를 따라 정 서가 고양되고, 그 진리를 따라 의지적인 삶을 사는 것을 통해서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와 안식을 누리도록 하는 진정한 종교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인격 과 가정과 학교와 직장, 그 어디에서나 우리의 삶으로 표현됨으로 인해 확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와 사회는 그 진정한 믿음이 표현되는 기쁨과 능력의 현장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계시란 ‘하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 보여주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는 계시해야만 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을 떠나게 되어 영적 인 무지, 어두움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눈이 밝고 시력이 좋아도 외부세계에 빛이 없으면 사물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외부세계에 찬란한 햇빛이 비친다고 해도 우리가 눈이 어둡다면 역시 사물을 분별할 수 없을 것입니 다. 바로 이런 내적인 어둠과 외적인 어둠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의 내 부와 외부에 참된 빛을 비추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계시의 종류에는 일반계시(자연계시)와 특별계시(초자연계시)가 있습니다. 일반 계시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자연과 역사 섭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시편 19편 1절에서 이렇게 찬양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로마서 1장 19-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 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 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은 그 자신이 만드신 만물과 사람 속에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알도록 새겨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위한 특별계시를 주셨습니다. 이 특별계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하나 님의 말씀과 행동을 보여주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바로 그 특별계시가 기록되었는 데, 그것이 성경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공부하지 않고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 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의 길을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죄와 사망 가운데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복락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찾아오신 생명과 구원의 종교입니다. “예 수”라는 이름에서도 이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태복음 1:21)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마저 아끼지 않고 주신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찾으셨고, 지금도 찾고 계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찾 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근원부터 치료할 처방과 약을 다 갖고 계시 는데, 그에게 가셔 그 처방에 따라 약을 먹기만 하면 낳는데, 그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런 면에서 복음전도란 불치병으로 죽어가던 한 사람이 탁월한 의사를 만나 그 질병을 완벽하게 치료 받고서, 그와 똑같은 질병으로 고생 하고 있는 환자에게 그 의사를 소개해 주고, 그 의사의 처방전과 약을 소개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복락을 주시기 위해 만들어 놓으신 하나님의 처방전은, 어느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나, 과거나 현재나 미래에 언제 나 가장 확실한 처방입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은 두 손을 활짝 열고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찾는 자들에게는 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히 11:6). 그러나 하나님은 게으른 자들을 동정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교만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큰 장애물입니다. 우리의 기존의 생각과 사상에 고 정된 채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성과 이성을 사용하되, 그 이성을 최고의 권위에 두면 안 됩니다. 즉 우리는 이성 이 만능이 아니라,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내 고정된 생각을 근거로 판단하 는 것을 보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 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은 겸손 한 사람에게만 보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정직하게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갖고 있던 기독교에 대한 편견, 하나님께 대한 편견을 벗어 버려 야 합니다. 개방적이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와야 합니다. 의사에게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숨기거나, 정확히 알리지 않고 정직하지 못하다면, 의사가 그 질병을 고치는데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9장 13절 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만나리라” 우리가 만약 그동안의 편견을 버리고 기독교가 진정 참된 진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 하고 그 가르침에 듣기 위해 찾고 찾으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실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참된 자유와 안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자세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단지 지적인 호기심을 만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생각을 바꾸고, 나의 삶 을 바꾸고, 인생을 바꾸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로 성경공부에 임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의 지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삶 속에 적용하도 록 주어진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기를 원한다면, 성경을 공부하십시오. 성 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행복과 평강이 주어진다는 것 을 체험해 보십시오.

 

성경공부를 막는 최대의 적(敵)은 우리 내부의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게으름과 교만, 편견과 죄를 버리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적인 편견과 도덕적인 자기 의(義)가 가장 극복하기 힘들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결국 두려움으로 나타나는데, 바로 이 두려움이 성경진리를 깨닫는데 가장 큰 적입니다. 두려움은 탐구의 정신을 마비시킵니다. 하나님을 만나 고, 성경의 진리를 대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매우 불편한 진실을 대하는 것이고, 힘겨운 일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살았던 세계관과 인생관 전체에 도전을 가할 수 있고, 우리의 생활방식 전체를 개혁해야 할 것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이러 한 요구가 우리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와서 우리를 망설이며 주저하게 만드는 것입니 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은 지금 현재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유와 평강을 주시려고 여러분을 부르 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런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을 발견하지 못하는 것은 찾지 않기 때문이고, 찾지 않는 것은 발견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 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는 바로 이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탁월한 의사가 있다고 해도, 그를 찾지 않 는다면 치료를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백퍼센트 효과가 입증된 약이 있다 고 해도 그 약을 먹는 것을 두려워해서 약을 먹지 않으면 결코 질병을 고칠 수 없 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두려움을 버리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사 상과 생활 방식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었는지를 솔직히 점검해 봅시다. 여러분 이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것들이 틀릴 수도 있고, 예수님의 방식이 옳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마음을 열고 성경 공부에 참여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진지하고도 열정적으로 성경을 공부한다면, 여러분은 지금까지 생각해 보지도 못했고, 그 존재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여겨지던 영적인 실상과 영생 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 였다.”(고린도전서 2:9) 성경을 공부하고 그 진리를 적용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진정한 생명을 누리며 사람다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영생을 소유한 사람은 현재 삶에 대해 무기력하고 “딴 세상 사람인 듯한”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 다. 오히려 하늘에서 누릴 영원한 즐거움을 지금 여기서 누리면서 능동적이고 진취 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자(求道者)가 되시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부지런하고 겸손하게, 정직하고 순종하는 자세로 하나 님을 찾기 위해 성경공부에 참여하시길 사랑과 눈물로써 간절히 권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평강이 여러분에게 풍성히 임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세계관학교장 노천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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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종말론]

안토니 후크마 / 류호준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 2001



제1부 시작된 종말론



  “종말론”이란 영어 단어는 헬라어의 두 단어(eschatos와 logos)가 합쳐져서 되었다. 이는 “마지막 일들에 관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개인에 관한 문제들에 관해 종말론은 다음과 같은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육체의 죽음, 영혼불멸성, 중간상태, 그리스도의 재림, 죽은 자들의 대부활, 최후의 심판, 최후의 상태 등이다. 


성경적 종말론에는 신자의 현재적 상태와 아울러 하나님의 왕국의 “현재적” 면도 포함된다. “시작된 종말”과 “미래의 종말”을 포함한다. 여기서 “실현된 종말론”이란 용어보다 “시작된 종말론”이란 표현을 더 적합하게 생각한다. “시작된 종말”이란 의미는 종말론적 축복들을 이 세상에서 신자들이 누리는 상태를 지칭하고 있다. 



제1장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적 개관


  성경의 종말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계시의 연관성”에서 이해해야 한다. 종말론이란 성경 중 어느 한부분이나 구석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된다. 다니엘서나 요한 계시록과 같은 책들에서만 종말론이 발견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종말론이란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일관하여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학자들은 종종 주장하기를 구약에는 종말론적 사고가 거의 없다고 한다. 물론 구약의 저자들이 현재 우리들이 “마래 종말론”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주제들-죽은 후의 생활,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에 관해 분명한 가르침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살펴볼 때 구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말론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다. 


  벨하우젠 학파는 종말론이란 바벨론 포로 후기 시대에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학계의 방향은 종말론이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이 인식되고 있다. 많은 수의 학자들이 구속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종말론적인 희망을 낳게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종말론이란 이스라엘이 가장 비참해진 상황 속에서 오직 신앙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그 길만이 삶의 기반인 것을 인식할 때,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신실성을 굳게 지키시고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이 굳어지고 있다고 고백하게 될 때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심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새롭게 창조되어지고 있다는 것이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의 특징이다. 종말론이란 이스라엘 구원역사 속에 뿌리를 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으로부터 넘쳐 흐르는 종교적 확실성인 것이다. (pp. 14-15.)


   구약에 나타난 장차 오실 구속자에 대한 대망사상에 관해 살펴보자. 창세기 3장 전반부에 기록된 인류 타락기사는 장차 구속자가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으로 이어진다. 창세기 3:15에는 여인의 후손으로만 묘사되고 있는 장차 오실 이 구속자는 창세기 22:38(참조. 26:4; 28:34)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지칭되고 있다. 더욱이 창세기 49:10은 구체적으로 이 구속자가 유다의 지파로부터 나올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구약성경은 미래의 구속자가 오시는 광경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로 오시는 것으로 동일시할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면 이사야 7:14에 장차 오실 구속자를 특별히 임마누엘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이다. 


  장차 오실 구속자는 선지자이시며 제사장이시며 왕이실 것이라는 생각과 아울러 이사야서에서는 그 구속자가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호와의 종”이란 개념은 자주 이사야서에 나타나는데 그 종이란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때로는 장차 오실 구속자를 가리키고 있다. 구약이 장차 오실 구속자를 묘사했던 또 하나의 명칭은 사람의 아들이다. 구속자 대망사상은 인자란 용어를 통해 다니엘 7:13~14에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구약의 종말론적 개관을 표현해 주는 또 다른 계시적 개념은 하나님의 왕국이다. 구약의 종말론적 성향을 “새 언약” 개념도 강조한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의 유대 백성들은 우상숭배와 범죄들을 행함으로써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다. 예레미야의 외침과 예언은 주로 저주와 심판의 선언이었으나 동시에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새 언약을 맺을 것임을 잊지 않았다. 


  구약에 암시되고 있는 많은 종말론적 개념들 중에서 돋보이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이다. 암울한 예언들 속에서도 구원에 관한 예언들도 속속히 선포되었다. 선지자들은 회복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그 회복이란 정결케 되고 의롭게 될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말하고 있다. 아마 선지자들이 가졌던 윤리적 관심의 가장 중요한 결과란 종말론적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대상은 이스라엘 민족 그 자체가 아니라 오직 믿고 정결케 된 남은 자라는 선지자들의 확신이었다. 


요엘의 구절들을 보면 “주의 날”이란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 무서운 파괴와 심판을 가져다 줄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을 가리키고 있다. 주의 날이란 개념이 종종 암울한 어두움의 그림자를 연상하게 만들곤 하지만 구약의 종말론적 개념으로서 좀더 밝은 면을 보여주는 말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제2장 신약 종말론의 본질


  신약성경에는 구약의 저자들이 예언했던 것이 이미 이루어졌음이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은 구약성경이 말하는 가장 중요한 종말론적 기대의 성취였다. 다른 측면에서 볼 때 구약의 예언자 들이 말했던 많은 예언들이 아직도 덜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신약의 종말론을 특정지워 주는 특징은 “이미” (already)와 “아직” (not yet)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미”란 신자들이 향유하고 있는 것이며 “아직”이란 신자들이 아직 소유하지 못한 상태를 지칭한다.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은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란 종말론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의 사이, 다시 말해서 결정적으로 ‘이미 성취됨’(already fuIfined)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함’(not-yet completed) 사이에서 일어나는 긴장감이 신약성경에 나타난 새로운 요소이다. 신약의 전체 신학구조는 바로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을 구약성경의 예언에 대한 성취사건으로 해석하고 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동정녀 마리아로부터의 예수님의 출생사건은 이사야 선지서에 나타난 한 예언의 성취로 간주되고 있다. 


  신약성경을 살펴볼 때 우리는 구약의 저자들이 하나의 운동과정으로 묘사했던 내용이 신약성경에 와서는 두 단계로 인식되고 있음을 주목해야만 한다. 신약의 신자들은 자기들이 지금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새 시대에 살고 있음을 인식하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이 새 시대가 장차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신약의 종말론이 독특하다는 것은 그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승리에 그 기반을 둔 하나님의 목적들이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미래에 있게 될 하나님의 승리에 대한 교회의 증거는 이미 역사 속에 성취되었던 승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소망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발생했던 사건들과 그 사건들에 대한 교회 의 경험 위에 근거를 둔 소망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G. Ladd) 


“그리스도인들은 D-day 와 V-day 사이에 살고 있다. D-day는 그리스도의 초림이었고 그때에 원수 들이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V-day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그때에 원수들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항복하게 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에 대한 소망은 너무도 크고 생생하다. 왜냐하면 승리를 결정지워 주는 전쟁이 이미 일어났다는 확고한 신념 때문이다.”(O. Cullmann)


    그러하다면 우리는 신약성경의 종말론의 본질에 관해 세 가지 관찰 결과를 종합할 수 있게 된다: 첫째, 구약에 예언되었던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발생했다. 둘째, 구약의 저자들이 한 개의 운동으로 묘사했던 바가 이제는 두 개의 국면으로 보여진다(현세대와 미래의 세대). 셋째, 이 두 개의 종말론적 국면간의 관계성은, 현세대의 축복들은 장차 올 더 큰 축복들에 대한 보증이며 담보물이라는 점으로 설명되어진다.



제3장 역사의 의미


  헨드리쿠스 벌코프는 “우리의 세대는 전율과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들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 인류 장래에 대한 두려움, 우리의 뜻과 희망대로 되어지지 않고 오히려 이에 거스려 나가는 우리의 행로에 대한 두려움 등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으로부터 인간존재의 의미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에 관한 환한 빛을 찾으려는 울부짖음이 나오고 있다. 그것은 역사의 의미에 관한 오래된 질문들에 대해 답을 얻기 위한 울부짖음이다”라고 했다.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의 중요한 특성들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역사는 하나님의 여러 목적들을 이루는 작업이다.

  진리는 종종 곤경에 처할 때도 있으며 반면에 악이 융성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역사적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동안 하나님이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알아낸다는 것 은 비록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종종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특히 구속사는 하나님과 그의 목적들을 계시하고 있다고 주장되어야 한다


  ② 하나님은 역사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신다. 이것은 그가 인간들을 마치 꼭두각시처럼 조종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자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인간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이 항상 유지되어진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들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 인간들의 악한 일들까지도 조정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에 대한 좋은 한 예가 구약성경에 기록된 요셉의 이야기이다. 신약에 나타난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에 대한 최상의 예증은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므로,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악한 일도 하나님의 구속적 섭리의 핵심이 되었으며 인류에 대한 축복의 최상의 원천이 되었다. 


  ③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다.

  쿨만은 역사에 대한 구약의 이해와 신약의 이해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은 역사의 중심점이 미래로부터 과거로 옮겨졌다는 것이라고 한다. 신약 시대의 신자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오심이 그 중심점이며 그러므로 신자는 역사의 중심점과 역사의 최정점,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에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오심이 역사의 중심점이라는 사실은 이 중심적 사건으로 “과거의 모든 것이 성취되어질 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것도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사건은 역사의 모든 것 위에 그것의 특징적인 도장을 찍어놓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류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의 영역인데 그 속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의 죄를 이기셨으며 다시 한 번 세상을 그와 화목케 하셨다(고후 5:19). 


  ④ 새로운 세대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셨기 때문에 새 세대는 정말로 이미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모든 사람이 새 세대의 축복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새 세대의 존재를 파기할 수는 없다. 


 히틀러가 노르웨이를 점령했었다. 1945년에 노르웨이는 해방을 맞이했다. 그러나 만일 나찌 정권하에 억눌려 있는 몇몇 작은 마을들이 너무도 북쪽 산중에 처해 있어서 몇 주 동안 해방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동안의 그 마을 사람들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 마을의 거주민들은 노르웨이의 자유로운 새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하기보다는 아직도 나찌 점령 하의 옛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무관심하거나 혹은 그 일에 무지해서 악의 세력의 압제로부터 자유롭게 된 세상에 살고 있는 지금 어느 누구나 정확히 말하자면 해방과 구원의 좋은 소식이 전해지지 못한 지역에 살던 노르웨이의 몇몇 마을의 주민들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AD 속에 살면서도 BC 속에 사는 것처럼 지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


  ⑤ 역사의 모든 것은 목표를 향해 움직여 가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하여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역사가 마지막 결정점의 목표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역사의 이러한 정점에는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아는 바대로 그리스도의 재림, 성도의 부활, 심판의 날, 새 하늘과 새 땅과 같은 사건들이 포함되고 있다. 


 현세대의 특징적인 활동은 선교사역들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정말로 하나님의 왕국을 새로이 시작하셨다면, 그가 우리에게 진실로 위대한 선교 지상명령을 주셨다면(마 28:19-20), 교회가 해야 할 위대한 사역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에 계속되는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신약의 신자들은 마지막 날들 속에서 살고 있으나 마지막 날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비록 그가 “다가올 세대의 능력들”을 향유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는 죄와 고난과 죽음으로부터 자유스럽게 된 것은 아니다. 비록 그가 성령의 첫 열매를 갖고 있지만 그는 그의 최종적 구속을 기다리면서 내면적으로는 탄식하며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 속에는 두 줄기의 발전이 있다. 방금 기술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은 그리스도의 초림 이래로 세계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의 성장과 발전과 나란히 병행하여 악의 왕국의 성장과 발전을 우리가 동시에 볼 수 있음을 의미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라지의 비유(마 1324-30, 36:43)에서 예수님께서 사단의 자식을 상징하는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계속 알곡과 함께 자라다가 추수 때에 마침내 가라지가 알곡으로부터 분리될 것 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을 생각나게 할 것이다. 사단의 왕국이 최후심판의 날까지 하나님의 왕국이 성장하는 한 함께 공존하며 자라 날 것이다. 비록 우리가 역사 속에서 이 두 줄기의 발전, 즉 하나님의 왕국의 줄기와 사단의 왕국의 줄기를 늘 인식해야 할 것이지만 믿음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의 왕국이 사단의 왕국을 지배하며 압제하고 마침내 정복한다는 것을 알게 할 것이다. 


   우리의 역사적 판단들은 모두 잠정적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듯이 그때까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될 것이다. 이것은 최후의 심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의 모든 역사적 판단들은 상대적이며 시험적이고 잠정적임에 틀림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결코 절대적으로 어떤 특정한 역사적 사건이 선하다 혹은 악하다, 또한-그 사건이 선과 악의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면-악이 지배적이다, 선이 지배적이다라고 확실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만물의 끝이 오기 전까지는 어떠한 역사의 현상도 절대적으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세상은 종종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좋은 경우가 있고 반면에 교회도 우리가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더 악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건들은 단순히 흑백논리로 설명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오히려 여러 층의 회색들로서 표현되어져야 할 것이다.(p. 60) 


  역사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낙관적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역사를 지배하시며 그리스도께서 악의 세력을 이기셨다고 믿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만물의 궁극적 결과는 악이 아니라 선이며, 우주를 포함하는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은 결과적으로 실현될 것이며 “비록 악이 종종 강해 보이나 하나님이 이미 지배자”이시라는 것이다. 


   이 세대와 다음 세대 사이에는 불연속 상태뿐만 아니라 연속 상태도 존재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현세와 내세 사이에는 불연속 상태뿐 아니라 연속 상태가 있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불연속과 연속이 있다면 더 좋은 세상을 위해 일해야만 한다는 것과 그리스도의 왕국을 좀더 완전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이생에 있어서의 우리의 노력은 영원한 중요성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도 그의 통치 아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불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과학과 문화의 열매들이 새 땅에서도 역시 발견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죄에 대한 우리의 싸움들, 우리의 선교사역, 그리스도인 문화를 세우려는 우리의 시도 등은 이생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다가올 세상을 위해서도 가치가 있게 될 것이다.



제4장 하나님의 왕국


  우리가 부록에 나타난 역사적인 개관 속에서 보게 되겠지만 최초에 하나님의 왕국은 종말론적 논쟁 가운데서 극히 중요한 개념이다. 리출(Ritschl), 하르낙(Harnack), 그리고 도드(C. H. Dodd)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전적으로 현재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반면에 봐이스(Weiss), 슈바이처 (Schweitzer) 그리고 몰트만(Mo1tmann)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전적으로 미래적인 것으로 가르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르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와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과 같은 다른 성경학자들은 하나님의 왕국을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인 것으로 보았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현재적으로, 또 다른 의미에서는 미래적인 것으로 보았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왕국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분리될 수 없도록 연관되어진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과 기적들과 비유들과 가르치심과 전파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이 역동적으로 활동하며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게 된다. 왕국의 중심적 의미를 찾는 데 있어서 먼저 해결되어야 할 첫 번째 문제는 왕국이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영역(realm)이나 영토(territory)를 상정하는 것인지 혹은 하나님의 통치(reign)나 지배(rule)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가장 널리 수납되고 있는 의견은 왕국의 근본적 의미는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영토를 가리킨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지배냐 통치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인류역사 속에서 동적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의 통치사역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왕국을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그곳에 들어가는 자들에게는 구원이요,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심을 통하여, 특히 비유를 통하여 이 반석 위에 지은 자와 같고 반면에 그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그의 집 을 모래 위에 지은 자와 같아서 그것의 무너짐이 심하게 된다(마 7:24-27). 혼인잔치의 초대를 받아들인 자들은 즐기며 행복하게 되나 초대를 거절한 자들은 죽음을 당하며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내어 던져진다(마 22:3-14). 사실상 이스라엘 민족이 대부분 왕국을 거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이 그들로부터 빼앗아 그 왕국의 열매를 맺는 백성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다(마 21:43). 하나님의 왕국의 근본적 목적은 그 단어 자체의 충만한 의미로 볼 때, 그곳에 들어가는 자들의 구원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왕국이 임했다는 징조들인가? 이런 징조들 중 하나가 예수께서 귀신들을 쫓아내심이다. 사단의 떨어짐이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에 의한 기적들의 일어남이다. 천국 임재의 또 다른 표정은 복음의 전파이다. 죄사함의 부여이다. 구약 예언자들에게 있어서 죄사함은 다가올 메시야 시대의 축복들 중의 하나였다(참조. 사 33:24; 렘 3l:34; 미 7:38-20; 슥 13:1). 


 하나님의 왕국은 아직도 미래적인 것이라고 나타난다. 사도 바울 역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적인 동시에 미래적이라고 가르쳤다(고전 4:19-20; 롬 14:3). 그러나 왕국의 미래적 측면을 말하고 있는 바울의 구절들이 있다(딤후 4:18; 엡 5:5; 15:50). 


   헤르만 리덜보스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는 예수님은 구약예언의 성취로서의 하나님의 왕국이 임했다는 사실에 많은 강조를 하고 있으나 그의 사역 말기에 예수님은 왕국의 미래적 도래에 관해 더 많은 강조점을 두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리덜보스는 왕국의 미래적 면과 현재적 면들이 결코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신앙과 생활의 측면에 대해 왕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어떤 의미를 가져 다 주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보다도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왕국으로 인도하실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명심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청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은 우주적 구속을 의미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듯이 하나님의 왕국은 단지 어떤 개인의 구원만을 의미하거나 심지어 어떤 선택된 무리들의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절정을 이루게 될 전우주의 완전한 갱신이다. 



제5장 성령과 종말론


   구약은 말하기를 성령은 어떤 예언적 징표들을 수반하는 최종적 종말론적 세대가 도래할 것에 대한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한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37-36에서 성령의 강림사건에 부여한 중요성은 성령 강림 사건이 말세의 도래를 알리는 위대한 사건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성령은 장차 오실 구속자 위에 강림하며 그에게 필요한 은사들을 채워주실 분으로 구약은 말하고 있다. 복음서들에서 예수님은 성령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일에 여러 모로 연관이 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게르할더스 보스는 바울에게 있어서 독특한 점은 그가 성령의 사역의 우주적 보편성을 이해하고 있는 점이라고 말한다. 성령은 모든 각 개인 안에 지금 거주하고 있고 동시에 그들의 종교적, 윤리적 삶의 모든 영역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점이다. 


   성령의 역할과 신자들의 양자됨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로마서 8:36에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인 것을 증거하신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성령의 역할이란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확증하는 것이다. 양자됨과 관련하여 성령이 하시는 역할이란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후사들인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는 일이다. 동시에 이러한 양자됨의 풍성한 부가 예수님의 재림 전에는 나타낸 바가 되지 아니할 것도 알려 주신다. 


 신약 시대에 목자들은 종종 자기들의 가축에 인을 찍어 다른 사람들의 것과 구별을 지었다. 성령으로 인치심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사상은 동시에 종말론적인 암시들을 던져주고 있다. 성령을 인으로서 우리가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동시에 육체의 부활에 대한 담보와 보증은 성령을 소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첫 열매를 가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축복 들을 풍성히 향유하는 그때 곧 하나님의 왕국의 최종적 완성의 때를 갈망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제6장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교회는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 들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된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새사람들이면서도 불완전한 인격들인 사람들의 친교이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모든 복음전파도 교육도 목회적 돌봄도 모든 훈련도 항상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고려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긴장은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자극제가 된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계속되는 긴장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인들의 죄에 대한 투쟁은 현재의 생활 전영역에서 계속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의 자화상(self-image)은 이러한 긴장을 반영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소유했으며 동시에 아직도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서 그 자신을 발견한다는 사실은, 그가 그 자신을 완성되지 못한 새로운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비록 긴장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 성장으로 특색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입은 새로운 자아는 계속적으로 새롭게 되어가고 있는 자아이다. 


   이런 긴장은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역할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신약성경은 많은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우리의 현재적 고난과 우리의 미래적 영광을 연결한다. 베드로는 고난에 대해서 놀라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문화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이 긴장과 관련되어 있다. 현세상과 장차 올 새 땅 사이는 완전히 불연속적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생각해 왔다. 모든 것은 전적으로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이해는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평가하는 것이 못된다. “은혜는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회복한다!” 하나님은 자기의 구속적 행위를 통하여 자기가 만드신 것들을 파괴하시지 않고 오히려 죄로부터 깨끗게 하사 완전케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새 땅은 현재의 땅과 전적으로 다르지 않고 오히려 현재의 땅이 영광스럽게 새로워진 땅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상급과 기쁨의 언어로 신약이 묘사하고 있는 연속성이 있다(참조. 고전 3:34; 마 25:21,23). 


   그러므로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이 중생치 못한 자들이 만든 산물들을 경시해서는 안 되며 이러한 모든 문화적 산물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비추어 평가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우리는 완전한 기독교 문화가 달성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모든 노력들은 단지 완성에 가까이 가려 하는 추구의 땀일 뿐이다. 


 다가올 세계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지만 다가올 세계의 영광이 현 세계의 영광보다 훨씬 더 빛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미 이루어진 일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결정적 승리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매우 간절한 소망 중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스런 왕국으로 들어가시며 그가 우리 안에 시작하셨던 선한 일들을 완성하시게 될 시기인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제2부 미래 종말론


   미래 종말론은 미래에 있게 될 종말론적 사건들을 다룬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은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단, 죄, 죽음에 대하여 과거에 이미 결정적 승리를 얻으셨기 때문에 미래의 종말론적 사건은 이미 시작된 구속적 과정의 완성으로 보여져야만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마지막 날에 일어나게 될 것은 이 마지막 날들에 발생하고 있는 것의 완성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p.111)



제7장 육체의 죽음


   죄와 죽음과의 관계성에 대해서 살펴 보자. 죽음이 죄의 결과로서 세상에 들어 왔는가? 일반적으로 로마 천주교나 신교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죽음이 죄의 결과의 하나라고 가르쳐 왔다. 그러나 몇몇 기독교의 스승들은 다르게 가르쳤다. 5세기경 로마에서 가르쳤던 영국인 수도승인 펠라기우스는 아담의 죄가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지도자가 된 펠라기우스의 제자 젤레스티우스(Celestius)는 아담은 유한적으로 창조되었고 그가 죄를 짓든 안 짓든 간에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 시대의 소시니안주의자들(Socinians)은 셀레스티우스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했다. 칼 바르트도 사람의 삶에 있어서 죽음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는 죽음의 심판이란 측면과 자연적 죽음의 측면을 구별하여,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죄에 떨어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면이라고 본다.


   만일 인간이 그의 타락과 상관없이 죽어야만 한다면 왜 성경은 철저하게 죄와 죽음을 함께 연결시키고 있는가? 만일 죽음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분이요 죽음이 자연적 귀결이라면 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했는가? 더욱이 하나님이 처음부터 계획 했던 바와 같이 죽음이 인간의 종국이라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을까? 그리고 성경은 왜 신자와 불신자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인간 역사에 있어서 죽음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의 결과 중의 하나다. 창세기 2:36~17을 보면, 죄와 죽음과의 관계를 가르쳐주고 있다. 죽음은 금단의 열매를 먹는 데 대한 형벌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이 서로 별도의 분리될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전자가 후자를 포함하는 듯이 보인다.”고 했다. 인간이 죄를 범한 후에 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즉시 죽었다. 동시에 인간은 육체의 죽음이 이제 피 할 수 없는 상태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죄와 죽음과의 필연적 관계성은 구약에서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가르쳐 지고 있다. 로마서 5:12에서는 로마서 8:1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보여진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속량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죄로 인한 결과들로부터도 구해내셨다. 죽음은 죄로 인한 결과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왜 신자는 아직도 죽어야만 하는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우리가 또 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보상이 아니라 다만 죄에 대하여 죽고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보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그리스도에게는 저주의 일부분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축복의 원천인 것이다. 이상의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최후의 적”(고전 15:36)인 죽음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적자가 우리를 위해 하늘의 복락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하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런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게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제8장 영혼 불멸론


   사람들은 영혼불멸 사상이 기독교 신앙의 일부분이라고 말해 왔다. 이런 주장은 계몽주의 시대와 그에 대한 종교적 상대역인 유신론의 시대였던 18세기에 두각을 나타내었다. 영혼불멸 개념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신랄한 비판을 가했던 때까지 이성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심지어 칸트도 실천이성이라고 불리우는 것의 선결조건으로서의 영혼불멸 개념을 계속 지지하였던 것이다. 


  몸이 죽은 후에도 영혼 혹은 인간의 비물질적 측면은 계속 존재한다는 것은 기독교에만 나타나는 특별한 고유개념이 아니다. 이 사상은 여러 형태로 바벨론, 페르시아, 이집트, 고대 희랍 등의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발견된다. 영혼불멸사상은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 고대 헬라의 신비종교들 속에서 발전되었다. 플라톤(P1ato, BC 427-347)의 저서들을 통해 철학적 옷을 입었다. 플라톤은 육체와 영혼은 두 개의 구별되는 특징적인 본체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즉 사고하는 영혼은 신성한 반면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열등한 본체인 육체는 영혼보다는 가치가 없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의 견해에 있어서 영혼불멸 사상은 합리주의적 형이상학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영혼은 본질적으로 파괴될 수 없기 때문에 불멸한 본체로 생각했던 것이다. 


  성경은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는가? athanasia와 aphtharsia가 일반적으로 immortality(영혼불멸)로 번역되고 있는데, 신약은 athanasia란 단어를 세 번 사용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6:16, 고린도전서 15:53-54에서 두 번 사용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6:16에서는 “오직 죽지 아니함을 갖고 있으며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신”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하여 ahtanasia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 재림 시 일어날 것들에 관해 말하고 있다. 위에 인용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다가 변화될 사람이나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에게나 모두 적용되는 말씀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불멸은 신자들에 관한 것이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불신자들에 관해서 일체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 불멸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선물이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불멸이란 모든 사람들이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또 모든 신자들이 갖고 있는 소유물도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시 주어지게 될 수여물이다. 불멸은 단지 영혼만이 갖는 특성이 아니라 전인으로서 인간이 갖는 특성이다. 영혼의 불멸을 나타내는 어떠한 시사도 없다.

 

   성경은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고 우리는 결론지을 수 있다. 몇몇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영혼불멸”이란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과 충돌 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 표현을 계속 사용하면서 변호해 왔다. 칼빈은 아담이 불멸의 영혼을 가졌다고 가르치면서 영혼의 불멸성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교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불멸성은 영혼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영혼에 부여된 것이라고 했다. 루이스 벌코프는 “영혼불멸의 사상은 성경이 인간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말한다. 헤르만 바빙크의 입장은 상당히 신중하다. 그는 “성경은 많은 말로 영혼불멸에 관해 말하고 있지 않다. 즉 성경은 이 개념을 신의 계시로서 선언하고 있지 않으며 또한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이 교리를 세워가려는 어떠한 시도도 행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개혁주의 신학자들 가운데서도 이처럼 서로 상반된 견해들이 제시되야 하는가? 

   1) 우리가 보았듯이 성경은 “영혼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 않다. 불멸이란 단어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활 시의 인간의 완전한 존재상태에 대하여, 썩지 아니할 면류관에 대하여 썩지 아니할 말씀의 씨앗 등에 대해 사용된 단어이지 결코 인간의 영혼에 대하여 적용된 일이 없다. 


   2) 성경은 영혼이 본래적으로 파괴될 수 없는 본체이기 때문에 영혼의 계속적 존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의 철학에 있어서 영혼은 육체보다 더 높은 형이상학적 실체를 갖고 있고 파괴될 수 없으며 피조되지 않은 영원한 신성한 본체라고 생각되어 지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계속적으로 하나님께 의존 해야만 존재를 영위할 수 있다. 인간속에는 피조되지 않은 영혼이란 없다. 


   3) 성경은 죽음 후에 단순히 계속되는 존재가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의 삶이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선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심각성을 애매케 하는 혹은 회개치 않은 죄인들에 대한 영원한 형벌의 진리를 부정하는 식의 “영혼불멸” 사상을 철저히 배격하며 경고하고 있다.


   4) 인간의 미래에 관해 성경이 선포하고 있는 중심적 메시지는 육체의 부활이다.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과 헬라 철학, 특히 플라톤의 인간관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육체는 영혼의 무덤으로 간주되었고 죽음이란 영혼이 이러한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과 달리 성경은 육체도 영혼만큼 실질적이다. 육체가 영혼에 비해 결코 열등하지도 않으며 인간의 참된 실존에 대해서 불필요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육체를 떠나서는 완전하지 못하다. 신자들의 미래적 축복은 그들의 영혼이 계속 존재한다는 점이 아니라 최상의 풍요한 상태로서의 육체의 부활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인간에 관하여 불멸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원한다면 영혼이 불멸하다고 말하기보다는 인간은 불멸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 인간은 부활을 통한 변화를 겪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은 성경의 강조점을 올바로 다루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성경의 강조점에 반대적 사상을 나타낼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제9장 중간상태


  중간상태란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에 죽은 자들이 처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어거스틴(Augustine) 시대 이후로 기독교 신학자들은 죽음과 부활사이의 기간 동안에 인간의 영혼들은 구원의 완성이나 파멸의 절정을 기다리면서 안식을 취하거나 고통을 겪고 있다고 가르쳐 왔다. 중세 시대에도 이런 견해가 계속 가르쳐져 왔으며 특히 연옥에 관한 교리가 생기게 되었다. 비록 칼빈은 루터보다 이 중간상태를 의식할 수 있는 존재상태로 보려는 경향이 강하긴 했으나 일반적으로 개혁자들은 연옥설을 반대하면서도 중간상태의 교리는 계속 지지했던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재세례파 교인들(Anabaptists)은, 영혼들은 단순히 죽음과 부활 사이의 기간 동안에 잠자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서 칼빈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중간상태란 축복과 기대의 상태를 의미하고 있으며 이 축복의 상태는 잠정적이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대 이후로 중간상태의 교리는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가르쳐져 왔으며 개혁주의 신앙고백서들에 반영되고 있다.  


   구약에 따르면 인간 존재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스올”이라고 불리우는 죽음의 영역 속에서 계속 존재한다. 래드는 “스올은 죽음이 인간 존재의 종국이 아님을 보여주는 구약적 표현 방법이다”라 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스올은 죽은 자의 영역을 의미하는데 상징적으로 죽음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다. 스올은 때때로 무덤이라고 번역되어진다. 루이스 벌코프는 스올이 종종 불경건한 자들에 대해서 형벌의 장소 혹은 지옥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런 해석을 뒷 받침하기 위해 인용되고 있는 구절들은 별로 설득력이 있는 구절들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중간상태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성경은 이런 상태에 관해 거의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며, 이에 관한 많은 질문에 대해서도 분명한 답변들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주제에 관한 신약의 가르침은 구약의 가르침과 모순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구약의 가르침을 보완하고 확장하고 있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은 인간은 사망시에 멸절되지 않고 음부(하데스)나 락원 또는 아브라함의 가슴이라고 불리는 축복의 장소 중 어느 한 곳에서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하데스는 스올의 70인경의 번역이다. 그러나 신약에서의 음부(하데스)의 의미는 구약에서 의 음부(스올)의 의미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신구약 중간기 동안에 스올의 개념은 어떠한 변화를 겪었다. 중간기 동안의 랍비 문헌들이나 몇몇 묵시문학적 작품들에는 지하세계에서 경건한 자들과 불경건한 자들 사이에는 공간적 분리가 일어나게 된다는 사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몇몇 신구약 중간 시대의 작품들 속에는 하데스(음부)란 단어는 지하세계에서 불경건한 영혼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하데스”란 단어의 신약성경의 사용은 어느 정도 이런 개념의 발전의 양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매우 일반적으로 신약성경에 나오는 하데스는 죽은 자의 영역을 지칭하고 있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인 사도행전 2:27,31에서 이 의미가 사용되고 있다. “이는 내 영혼을 음부(하데스)에 버리지 아니하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이라…그가(그리스도) 음부(하데스)에 버림되지 않았고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치 아니하였다.” 이 구절에서 하데스(음부)는 시편 16:30에 나타난 스올에 해당하는 헬라어다. 단지 죽은자의 영역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 구약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부활로 성취되었음을 본다. 즉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의 영역에 버림받지 않았으며 그의 육신이 썩음을 당치 않았다. 하데스란 단어가 단지 죽은 자들의 영역을 지칭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중간상태 속에서의 고통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 경우로서 사용되고 있다.


   요약하자면 1) 인간은 사후에 완전히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들의 영역”으로 간다. 2) “죽은 자들의 영역” 속에서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사망이 목자가 될 것이며, 사망의 돌봄 아래 그들은 계속 존재하게 될 것이다. 신약은 불경건한 자들이 죽은 후와 부활 전 사망 기간 동안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점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3)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의 영역에 내버림을 당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들 자신들이 스올의 권세로부터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강렬한 소망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경건한 자들이 위로를 받게 될 것이다. 


   신약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 불경건한 자들의 상황이 어떠할 것인가에 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신약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2:9은 중간상태 기간 동안에 불경건한 자들이 어떤 상태 제 놓여 있게 될 것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구절이다. “주께서는 경건한 자를 시험에서 건지시며 불의한 자를 계속되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NIV).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 동안에 어떤 상태에 놓여 있을까에 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1) 우편 강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서 낙원이란 단어(고후 12:4; 계 2:7)를 보자. 고린도후서 12:4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가 환상 중에 낙원에 이끌려 올라간 경험을 말하고 있다. 낙원은 축복받은 죽은 자들의 영역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처소인 하늘을 의미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7에서는 하나님의 낙원 속에 있는 생명나무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된다. 여기서도 낙원은 중간상태를 가리키고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최종적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그가 바로 그날 하늘의 무한한 축복상태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고 하신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그의 왕국에 들어가게 될 때인 그의 재림 시에 그가 강도를 기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약속은 오히려 그날, 즉 그가 죽는 날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사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떠한 상태에 있게 되는가에 관하여 간단하나마 설명해 주고 있다. 영혼이 잠잔다는 사상은 여기서 전적으로 배제되고 있다


 중간상태에 관한 두번째 중요한 구절은 빌립보서 1:21-23이다. 사후에서는 영혼이 수면을 취하거나 혼이 전혀 없어져 버린 상태에서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의식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간상태에 관한 세번째 중요한 구절은 고후 5:6-8이다. “중간상태”와 “부활육체”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둘 다 모두”의 관점에서 취급되어야 한다. 비록 부활이란 사건을 기점으로 해서 두 개의 국면으로 나눠지지만 신자의 미래는 하나의 단일한 경험으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이러한 양쪽의 국면들은 모두 하늘의 영광이라는 경험상태를 포함하고 있다.

 

   성경은 중간상태에 관하여 독립된 교리를 갖고 있지 않다. 중간상태의 교리는 육체 부활, 땅의 새로워짐에 관한 교리와 결코 분리되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벌카우워가 지적하듯이 신자는 미래에 관해 “이중적 기대”를 갖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기대”를 갖는다. 그러므로 중간상태와 부활은 하나의 단일한 기대의 두 가지 측면으로서 생각되어야 할 것이다. 중간상태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가져다 준다. 고린도후서 5:6-8이 보여주는 표상으로 볼 때 우리의 현재의 삶은 실제로는 남과는 떨어져 있는 일종의 순례의 삶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고향에 돌아오는 것이다.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끝이다. 



제10장 재림의 기대


   신약 종말론의 가장 중요한 측면이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기대이며, 이러한 기대가 신약교회의 믿음을 지배하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신약의 모든 책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항상 그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도록 권면하고 있다. 


   “재림의 지연”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이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 자신은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도시 전체를 두루 다니며 복음전도 여행을 하게 되는데 이 복음전도 여행이 끝마치기 전에 재림이 일어날 것이며 종말론적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제자들이 전도사역으로부터 돌아왔으나 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예수님은 자기 자신이 실수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이것이 첫번째 “재림의 지연”이며, 예수께서는 그가 그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 왕국을 도래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본다. 예수님은 이 경우에 마저도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고 결국 착각 속에서 죽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덜 진보적인 최근의 어떤 신학자들은 아직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조속한 재림을 예언함에 있어서 착오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오스카 쿨만이 이 그룹에 속한다. 그는 재림이 가까왔다는 초대교회의 기대는 “그 전망에 있어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전망은 “결정적인 전쟁이 이미 발발했다는 확신이 일단 있게 되면 그 전쟁은 그 전쟁의 종식 날짜를 성급하게 결정하는 것”과 같은 비유로 설명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 결론을 내리고자 할 때 먼저 기억해야 할 일은, 마가복음 10장에 기록된 것과 같이 그의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의 승천 후에 있게 될 제자들의 미래적 활동들에 관계된 교훈들과 나아가서는 교회 전체 역사를 통해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위에서 언급된 일이 있는 예언적 원근통시법(prophetic foreshortening)으로 이 구절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즉 구약의 선지자들이 종종 그랬듯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에도 그는 가까운 미래의 사건과 먼 미래의 사건을 함께 매우 인접해 있는 사건들로 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이해한다면 근접한 미래에 있게 될 핍박은 머나먼 미래에 있게 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핍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상에서 논의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한 구절들”은 주님 당시의 사람들의 생애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발생할 것이라는 것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재림은 우리가 전혀 예기치 못한 시간에 일어 날 것이다. 그러나 재림의 때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준비하고 경성해 있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우리가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그의 재림의 징조들을 제시하시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재림을 위해 우리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또한 이런 징조들에 대해서도 정신차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깨어 경성한다는 것은 준비함을 의미한다. 즉 항상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대비해 준비해야 함을 의미한다. 래드는 ‘주의하라’(watch)는 단어는 ‘...을 찾는다, 기다린다’ 는 뜻이 아니라 깨어 있다’ 는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간의 불확실성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깨어 있어 주님이 언제 오시든지 관계없이 주님을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의 많은 신약학자들은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의 사상에는 어떠한 변천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바울의 초기 서신들에서는 그는 곧 다가올, 지연되지 않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다-즉 너무나도 빨리 올 재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도 여전히 살아 있으리라 기대했다는 것이다. 후기 서신들에서는 그가 이러한 기대를 더 이상 갖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재림의 시기를 정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의 중요한 관심사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확실성과 그 재림을 대비한 철저한 준비의 중요성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도 여전히 살아 있기를 희망했다고 말하는 것과 바울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재림이 그의 죽음 이전에 일어나리라고 가르쳤다고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도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추정하려는 어떠한 흔적이 전혀 결여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실히 명심해야 한다.”(리덜보스) 


 바울도 비록 재림의 때는 불확실하지만 재림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므로 그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항상 그때를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확실히 늦어질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신약 구절이 하나 있는데 베드로후서 3:3-4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있어서 본문은 재림의 지연에 관해 말하는 자들이 기롱하는 자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베드로의 답변이 전하고자 하는 중심사상은 하나님은 마치 그가 그의 약속을 잊어버린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을 늦추고 계신 것이 아니라 매우 사려깊게 죄인들을 향한 그의 사랑과 긍휼과 용서를 좀더 잘 나타내시고자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재림을 늦춤으로써 회개와 개종의 여지를 남겨두셨고 이는 어떠한 자라도 멸망케 되기를 그가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재림에 대한 우리의 대망은 여러 변에서 우리의 삶의 질에 대해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우리 주님이 미래에 나타나신다는 사실은 디모데에게 그랬듯이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키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게 만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한 것은 무엇이든지간에 그것에 대해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대비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방법이다(눅 12:41-48). 


마태복음 25:3l-46에 묘사된 최후심판의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재림을 위해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리스도의 형제들에게 계속적인 사랑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엣 것들을 추구 하는 최선의 길은 지금 여기서 주님을 위한 일에 분주해야 하는 것이다. 



제11장  시대의 징조들


   말세에 일어날 징조들의 적절한 기능은 무엇인가? 시대의 징조들은 역사의 중심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주님이 통치하시며 그의 목적들을 이루고 계신다. 시대의 징조들이란 앞으로의 역사의 종말 특히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 시대의 징조들은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의 왕국과 악의 세력들 사이에 끝없는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다. 시대의 징조들은 결단을 촉구한다. 예수님께서는 시대의 징조들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그 당시의 사람들을 질책하셨다. 이런 징조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아들을 믿고 구원받을 것을 권고하신다. 시대의 징조들은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깨어 경성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시대의 징조들의 본질은 경성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그리고 우리는 재림이 시간상으로 임박했다고 말하지 말고 상황적으로 임박해 있다고 해야 한다. 재림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히 언제 올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대비해 끊임없는 기대와 준비 속에서 살아야만 한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어제 죽으셨고 오늘 아침 일어나셨으며 내일 다시 오실 것처럼 살자.” 



제12장 특별한 징조들


   하나님의 은총을 증거하는 징조들: 모든 나라에 복음이 선포됨 이스라엘의 충만한 숫자의 구원. 하나님께 반역하는 징조들: 환난 배도 적그리스도.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 징조들: 전쟁들 지진들 기근들.


   우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선포되는 것이 시대의 징조 중의 첫번째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말일이 곧 시작될 것이며 그때에 성령이 모든 육체 위에 부어질 것이며 땅의 모든 끝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이미 예언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을 백성들에게 언약으로서 주실 뿐만 아니라 열방(모든 민족들)의 빛으로 삼으신다고 하였고(42:6)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외쳤다(40:5). 모든 나라에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는 이 징조가 완전히 성취될 시기는 오직 하나님만 알고 계시다고 우리는 먼저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두번째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시대의 징조로는 이스라엘의 충만한 구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복음을 계속적으로 전파하는 일은 위에서 다루었던 시대의 징조의 한 단면 속에 포함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도 분명히 모든 민족들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로마서 11:25-26의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구절의 의미에 관해 성경성경학 자들 간에는 의견이 너무도 분분하다. 크게 세 종류의 해석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①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왕국에 그 충분한 수가 들어온 후에 이스라엘 국가가 전체 단위로서 (그렇다고 반드시 이스라엘 국민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모두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이다. ② 모든 선택받은 자들의 구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여기 모든 선택받은 자들 속에는 전인류 역사를 통해서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로부터의 선택자들을 포함한다. 이 견해에 의하면 이스라엘이란 단어의 뜻은 단지 육체적 유대인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선택받은 무리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는 시기 역시 역사의 종말이나 예수님의 재림 바로 직전에만 일어나는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③ 유대인들 중 선택받은 자들의 전체 숫자가 인류 전역사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주장이다. 


두번째 견해와 일치하고 있는 점은 “온 이스라엘”이란 말의 뜻이 역사적으로 종말의 때에 이스라엘 민족이 전체적으로 구원받을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지 않고 오히려 인류 역사가 흐르는 전 (全) 기간 동안 구원받게 될 선택자의 충만한 숫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점이다. 다른 점은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전적으로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이다. 후크마는 세번째 견해를 택한다. 


   바울이 이방인의 충만 혹은 “충만한 숫자”라고 말한 참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이방인들의 전체적 숫자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보여지는 것은 단순히 역사의 끝 무렵 어느 기간 동안 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역사의 전체적 흐름 속에서 계속되는 사건들이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구절은 어떻게 해석되어져야 할 것인가? 칼빈은 이 문구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들 중에서 선택받은 자들의 전체 숫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고 그들의 선택은 인류 역사 전체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로마서 9-11장에서 이스라엘이란 용어가 열한 번 나타나는데 11:36의 경우를 제외한 나머지 열 번의 경우에, 이스라엘이란 용어는 이방인과 구별되는 유대인만을 가리키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방인의 충만한 숫자가 모여진 후에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일어나기 바로 전이나 바로 그때에,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대규모적으로 개종하는 사건이 있을 것으로 로마서 11:26을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온 이스라엘”이 단지 이스라엘 역사의 마지막 세 대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까? 1) 이 마지막 이스라엘 민족의 세대들은 지구상에 살아왔던 유대인 전체 숫자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데 그 일부분의 이스라엘을 “온 이스라엘”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2) 본문은 “그때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바울이 이상과 같은 의미를 전달하려고 했다면 그때에라는 의미를 가 진 헬라어 tote나 epeita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후토스”(houto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이 단어는 시간적 연속성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방법이나 양식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그 의미는 “그리하여”(so)다. “이런 방식으로”(in this way)이다. 


 환언 하자면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에(이런 일이 일어난 후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바울이 말하고 있지는 않는다. 오히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인가? 이미 11장의 초반부에서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첫째로, 많은 이스라엘인들의 불신앙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구원에 들어오게 되고 둘째로, 이방인들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시기나게 되는 방식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방식은 과거에도 일어났고 현재도 일어나고 있으며 또한 계속될 것이다. 로마서 11:26의 온 이스라엘이란 이스라엘 중 선택받은 무리 전체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의 구원이 전적으로 역사의 끝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기간 동안에 발생되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좀더 역사를 소급해서 올라가자면 아브라함의 부르심 사건 때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의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 족속 중 선택받은 전체 수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온 이스라엘은 11:5에서 말하고 있는 선택받은 남은 자와는 다르며 역사의 전체 흐름 동안에 있게 될 모든 남은 자들의 총합으로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이 우선적으로 논하고 있는 중심 사상은, 과거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구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전적으로 이스라엘을 다루고 계셨지만 이제 와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다루고 계시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방법이 이방인들이 구원을 얻게 되는 방식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방인의 충만 혹은 충만한 숫자가 모여지는 일은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일어나는 일이지, 역사의 끝날에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과 그의 왕국에 반항하는 시대의 또 다른 정조는 “배도”이다. 신약성경에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배역하는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첫째는 교회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 배도가 일어난다. 둘째는 예수님의 재림사건 바로 직전에 최종적 대규모 배도함이 발생할 것이다.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 24:10-1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그러면 종말에 일어날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바울의 “불법의 사람”과 요한의 “적그리스도”는 동일시할 수 있다. 불법의 사람은 큰 반역 혹은 큰 배도사건 후에 나타날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하나의 인격체일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숭배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어느 것도 대적할 것이며 경배받는 그 무엇도 반대할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자기의 대의명분을 나타내기 위하여 속임수와 기적들을 일으킬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그를 막는 것이 없어진 후에야 비로소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불법의 사람을 막는 자가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편이 제일 안전할 것이 다. 그러나 바울이 막는 자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여기 묘사되고 있는 사람이 충만히 나타낸 바 되어야만 비로소 이 막는 자(것)가 제거될 것이라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불법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 완전히 무너뜨림을 당할 것이다 



제13장 재림의 본질


   재림이 하나인 단일 한 사건인가 아니면 두 단계로 나누어지는가? 전(前)환난기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의 이중적 재림을 말하는데, 이 두 단계 사이에는 칠 년이라는 첫 단계가 있어 이를 휴거 혹은 전환난기 휴거라고 한다. 반면에 그리스도께서 그의 천년왕국을 세우실 두번째 단계는 그의 돌아오심이라 불리운다. 


   후크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나타내기 위해 신약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들로부터 두 단계 재림이론을 세울 수는 없다. epiphaneia란 단어는 딤전 6:14에서 전환난기론자들이 말하는 소위 휴거사건을 가리키고 있는데 사용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apiphaneia)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그러나 데살로니가후서 2:8에서 불법한 자들을 쓸어버리시게 될 그리스도의 재림을 묘사하기 위하여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강림하게 나타나심으로(epiphaneia) 폐하시리라”(ASV). 그러므로 이상의 세 단어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두 번에 걸쳐 일어난다고 주장하는 전환난기론자들의 이러한 구별에 어떠한 근거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 


대환난을 묘사하고 있는 신약의 구절들은 교회가 환난이 시작되기 전에 땅에서부터 들림을 받을 것이라고 가리키지 않는다. 휴거를 묘사하고 있는 중요한 신약 구절마저도 전환난기 휴거를 가르치고 있지는 않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 구절이 분명하게 전하여 주고 있는 것은 주님의 재림 시에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으킴을 받을 것이며 그때에 살아 있던 모든 신자들은 변화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참조. 고전 15:5I-52). 그때에 이 두 그룹의 무리들은 연합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이 가르치고 있지 않는 것은 공중에서의 이러한 만남 후에 주님께서는 그의 방향을 바꾸사 그와 함께 죽음으로부터 일으킴을 받은 자들과 변화받은 교회의 구성원들을 데리고 하늘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런 말을 결코 한 마디도 하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그의 백성과 함께 오심과 그의 백성들을 위한 오심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전환난기론자들은 종종 그리스도의 재림의 두 단계를 “그의 성도들을 위한 오심”(휴거)과 “그의 성도들과 함께 오심”(귀환)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두 단계 재림설을 주장한 어떠한 학설도 대환난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쏟아짐이 될 것이라는 가르침으로부터 추론되어질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성인 우리는 그가 다시 오실 때 영광 중에 그와 함께 나타날 것이다(골 3:4). 영광스런 정복자, 만유의 심판자, 온 창조 세계의 구속자,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그리스도는 다시 올 것이다(계 19:36). 



제14장 천년기에 관한 주요한 견해들


   무천년기설(amillennialism)

   무천년론(무천년기설)이란 용어 자체가 별로 만족스럽지 못하다. 무천년기설이라고 하면 마치 무천년론자들은 어떠한 종류의 천년기도 믿지 않거나 또는 천년기적 통치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0:3-6을 무시하거나 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상 이 두 가지 모두 올바른 정의라고 말할 수 없다. 비록 그리스도의 재림 직후 문자적으로 일천 년 동안 지상 통치기간이 있을 것을 무천년론자들이 믿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일지라도 무천년론이란 용어는 무천년론자들의 견해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는 용어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제이 아담스(Jay E. Adams)는 무천년주의라는 용어는 “실현된 천년기론”이라는 표현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천년주의자들”(amillennialists)은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기가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실현과정 중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무천년론자들은 요한계시록 20:4-6에 언급된 천년기를 이미 죽은 신자들의 영혼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현재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0장 첫 세 절 속에 언급 되어 있는 사단의 결박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 동안에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그들은 해석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바로 직전에 끝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이 천상적 천년기 통치 후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무천년론자들은 미래의 영화롭고 완전한 왕국이 장차 올 새 삶의 새 땅 위에 건설될 것을 바라보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왕국은 승리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과 성령으로 자기 백성들을 통치하심으로써 지금 이 세상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께서 죄와 악에 대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이미 쟁취하셨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악의 왕국은 이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의 왕국과 함께 계속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현세대에서 많은 종말론적 축복들을 이미 향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시작된 종말론) 또한 최종적 상태 시에 시작될 그리스도의 재림과 연관된 결정적 미래의 사건들이 일어날 것도 바라보고 있다(미래적 종말론). 


 그러므로 무천년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복음이 모든 나라들에 전파되고 이스라엘의 충만한 수가 완성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들은 재림 전에 한 명의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고 대환난과 배도하는 일이 극에 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무천년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단일한 한 사건이지 결코 두 단계에 걸쳐 일어날 것으로 보지 않는다. 부활사건 후에 그때까지 살아 있었던 신자들은 변화받은 몸이 되어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때에 부활한 신자들과 변화된 신자들은 구름 속에 이끌리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공중으로 들려 올라갈 것이다. 이 모든 신자들의 “휴거”(들림)가 있은 후,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내려오시는 것을 마치고 최후의 심판을 시작하시게 된 다. 이 심판 후에 불신자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고 신자들은 새 하늘 과 새 땅의 축복들을 영원히 즐기게 될 것이다. 


   후천년기설(postmillenniaIism)

   후천년론자들이 무천년론자들과 세 가지 점에서 일치를 보인다: 1) 후천년론자들은 천년기가 그리스도께서 지상적 왕위를 가지고 가현적으로 통치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2) 그들은 천년기가 전적으로 천 년 동안만 계속되는 것으로 이해하지는 않는다. 3) 그들은 천년기 이후에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고 생각한다. 


   후천년기설에 의하면 지구상의 대부분의 거주민들이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점차적으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됨으로써 현세대는 점차적으로 천년기 세대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후천년론자들은 로마서 11 :25~26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것이 유대인의 정치적 왕국이 회복되는 것으로 해석하지는 않지만, 미래에 유대인 민족이 대규모로 개종하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 


   후천년기에서 반대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마태복음 24장의 대환난 그리고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배도에 관한 일반적 후천년론적 해석은 정당화 될 수 없다. 마태복음 24장의 감람산 강화문은 예루살렘 멸망과 이 세상 끝날에 일어날 사건들을 함께 다루고 있다. 이 강화문에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기간 동안 그의 백성들이 받게 될 환난에 관해서 말씀하고 있는 동시에, 이 세상 시작부터 전무후무했던 대환난이 있을 것임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시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배도에 관한 한 바울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 “먼저 배도(반역)하는 일이 있기 전에는 결코 그날(주의 날 혹은 재림)이 이르지 아니하리라”(3절).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사건들, 즉 데살로니가후서에 기록된 대환난과 배도하는 일을 과거의 일들로만 처리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합당치 못하다.


 2) 요한계시록 20:1-6은 후천년론적 입장을 지지하지 않는다. 20:1-6은 현재의 세대 동안에 신자들의 영흔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늘에서 왕권을 가지고 통치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구절이지 결코 미래의 황금시대를 그려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3)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미래적 황금 시대가 있다는 후천년론자들의 기대는, 하나님의 왕국과 악의 세력들 간에 있는, 이 세상 역사 속의 계속적인 긴장 상태를 올바로 다루지 못하게 된다. 



   역사적 전천년기설(historic premillenmalmm)

   전천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사건이 전천년적임을 믿는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천년왕국 직전에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한다. 전천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 일천 년 동안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에서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후에 최종의 상태가 도래한다고 생각한다. 


   역사적 전천년기설에 의하면 몇 가지 사건들이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발생해야만 한다: 온 민족들의 복음화, 대환난, 대반역과 배도하는 일의 발생, 한 개인적 적그리스도의 출현 등이다. 교회는 이 최후의 환난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두 단계에 걸쳐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사건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이에 죽은 신자들은 부활하게 될 것이고 그때까지 살고 있는 신자들은 변화받아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 이 두 그룹의 신자들은 하늘에 들어 올려 주님을 공중에서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공중에서 이러한 일이 있은 후에 신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땅으로 내려오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후에, 적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할 것이며 적그리스도의 강포한 통치가 끝장날 것이다. 바로 이 시기나 이 시기 직전에 살고 있던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그들의 메시야로 믿게 되며 또한 구원을 얻게 된다. 이러한 유대 민족의 개종은 이 세상을 위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축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역사적 전천년기에 대한 반대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요한계시록 20장은 그리스도 재림 후에 지상적 천년기 통치가 있을 것을 결정적으로 증거하지 못한다. 요한계시록 20:3-6이 죽은 신자들의 영혼들이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고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는 무천년론적 입장은 어거스틴(Augustine) 이후 교회 안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온 해석방법이다. 이 구절에 관한 무천년론적 해석을 좀더 발전시켜 변호하고 있는 장이 제16장이다. 


2) 고린도전서 15:23-24는 그러한 지상적 천년기 통치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분명한 증거자료도 주지 않는다. 바울의 서신들 중 어느 곳에서도, 최종상태 전에 천년기 왕국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능케 하는 어떠한 근거도 없다.


3) 영화롭게 된 그리스도의 신자들이 아직 죄와 사망이 존재하는 땅으로 온다는 것은 그들의 영화가 결정적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과 충돌하게 된다. 중간기 상태 동안 하늘의 영화를 향유하고 있었던 신자들이 죄와 사망 이 아직도 왕노릇하고 있는 땅으로 돌아오기 위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킴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 


4) 전천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지상적 천년기 통치는 신약의 종말론과 일치하지 않는다. 현세대와 장차 오는 세대, 현세대와 장차 오는 세대 사이에 제3의 세대가 있을 것이라고 어느 복음서도 사도행전에서도 서신들도 말하고 있지 않다.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설

   세대주의적 전 천년기설은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학설이다. 비록 전천년기설 자체는 2세기 이후로 기독교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되어 오긴 했지만 교회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두 개의 별도의 백성들로 엄격하게 구별하는 교리를 지닌 세대주의라고 불리는 이 신학적 체계는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i, I800~1882)에 의해 비로소 시작되었다. 


   세대주의적 사고를 결정짓는 두 개의 기본 원리들은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근본적이고 계속적인 구별이다. 


2) 세대주의자들은 인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여러 개의 특별한 “시대”들로 나누어 취급한다. 구약성경은 미래의 어느 시엔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의 고대로부터의 언약 백성들이 주체가 될 지상적 왕국을 세우실 것이라는 약 속들을 담고 있다. 비록 아브라함 언약이 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에 관한 약속들을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언약의 핵심적 약속은 아브라함의 육체적 자손들에게 가나안 땅을 영원한 소유물로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다윗의 언약에서도 약속이 주어졌는데 곧 다윗의 자손 중 하나가 다윗의 보좌 위에 영원히 앉아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린다는 약속이다. 


3) 그리스도의 재림은 두 단계에 걸쳐 발생한다. 첫 단계는 소위 휴거(들림)라고 불려지는데, 이것은 갑자기 어느 순간에 발생하게 된다. 바로 휴거에 있어서 전(前)환난기 세대주의적 전천년기론과 역사적 전천년기론과 중요한 차이점이 드러나게 된다. 즉 역사적 전천년기설은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시대의 징조들이 성취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반면에, 전자인 전환난기 세대주의적 전천년기론자들은 이 시대의 징조들이 그리스도 재림의 첫 단계가 발생한 후에 성취될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환난기 세대주의자들은 소위 임박한(imminent) 혹은 항시 올지도 모르는(any-moment)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고 있다는 것이다. 휴거 때에 그리스도께서 완전히 이 땅에까지 내려오시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까지만 오신다고 본다. 그때 구약성도들을 제외한 모든 참 신자들의 부활이 일어나게 된다. 영화롭게 된 다음에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휴거된다. 즉 부활한 신자들과 변화된 신자들이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어느 정도까지 내려오신 주님을 만나게 된다. 교회라고 불리는 이 신자들의 무리들은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라가 그와 함께 칠 년 동안 어린양의 혼인 잔치 예식을 축하하게 된다. 



제15장 세대주의적 전천년설 비판


   1) 세대주의는 성경 계시의 근본적 통일성을 공평하게 다루는 데 실패했다: 세대주의 체계가 노출하고 있는 최대의 난점은 구속역사의 다양한 기간들 간의 차이점들이 그 역사의 근본적 통일성을 제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만일 누구라도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의 통일성을 공평하게 취급하지 않고 여러 다양한 시기(세대)들 사이의 심한 차이와 구별을 지으려고 한다면, 그는 신약 시대에 있어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종합적, 영원적 구속사역의 진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유대인들과 이방인 사이를 갈라놓았던 적대감 내지는 분리의 벽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히 제거되었다(엡 2:14~15)는 사실을 신약성경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당신들은 아직까지도 천년왕국 시기에 있어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구별하여 다루고 있습니까? 왜 그때에 (천년왕국 시) 유대 인들이 더 호의적인 지위를 얻고 이방인들보다도 더 높아지게 될 이유가 있겠습니까? 이들의 답변은 여러 가지이지만, 이들은 자기들의 세대주의적 틀의 요청 때문에 신약성경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이 제거될 것임을 말하고 있는, 바로 신약성경 가르침 그 자체를 무시하게 되는 결과를 빚게 된다는 점이다. 한 세대와 또 다른 세대 사이의 비연속성의 원리가 점진적 계시의 원칙을 묵살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서로 다른, 분리된 계획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류이다: 세대주의 신학이 갖고 있는 결정적인 원리들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별이 있다는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스라엘과 교회는 항상 분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성경이 이스라엘에 대해 말할 때는 그것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교회에 대해 말하는 경우 그것은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는 아직도 성취되지 않은 이스라엘에 주어진 구약의 약속들이 있기 때문에, 이 약속들은 아직도 미래에 반드시 성취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온과 예루살렘이란 단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서 있는 언덕들 중의 하나를 구약에서는 종종 의미하고 있다. 신약은 이 용어들의 의미를 확장시키고 있다.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2-24) 여기서 “하늘의 예루살렘”이란 용어들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하는 일군의 구속받은 성도들을 가리키고 있음에 틀림없다. 또한 요한 사도가 본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과 같은” “새 예루살렘”은 유대인 신자만을 포용하기에는 너무도 큰 포괄적 용어이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이란 단어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고 있으나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 교회를 가리키는데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에게 미래가 없단 말인가? 물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신자들의 미래가 이방인 신자들의 미래와 분리될 수는 없다. 이스라엘이 소망하는 미래는 동시에 이방인들이 소망하는 미래이기도하다. 즉 그들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과 궁극적 영화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미래는 일천 년 동안 계속되어질 팔레스틴 지방에서의 정치적 왕국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영화롭게 새로워진 땅에서 함께 공유하고 나누게 될 영원한 축복 상태라는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미래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3) 구약은 장차 미래의 지상적 천년왕국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세대주의자들은 구약의 위대한 구절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미래적 천년기 통치가 있을 것이라는 증거를 제시하곤 한다. 사실상 구약은 이러한 천년통치에 관해 아무 것도 말하고 있지 않다. 천년기간을 묘사하는 것으로 종종 해석되고 있는 성경 구절들도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의 결정체인 새 땅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4) 성경은 유대인들이 천년기에 그들의 땅으로 회복되어 돌아갈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이러한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여러 구약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 때문에 생기는 오해다. 이스라엘의 본토 회복에 관한 구약 예언들이 최소한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로운 미래를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세대주의자들과 서로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영화로운 미래의 세계가 단지 천년기 에만 국한되는 것으로서는 생각지 않으며 오히려 영원한 상태로 계속된다고 주장한. 이 영화로운 미래는 이스라엘인들에게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받은 모든 백성들에게 좋은 소식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예언들을 일천 년 동안 팔레스틴 지방에서 이스라엘인들에게 문자적으로 성취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유대주의적 민족주의로 돌아가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5) 왕국의 도래가 연기되었다고 가르치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은 성경의 뒷받침을 결여하고 있다.


   6) 교회는 괄호에 해당하는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은 성경이 지지하지 않는다: 이러한 가르침은 최소한 세 가지 측면에서 배척되어야 한다. 첫째로,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듯이 구약은 결코 교회를 예언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실이 아니다. 


   7) 그리스도가 다신 오신 후에도 사람들이 구원에 들어올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전혀 성경적 기반을 갖고 있지 않다: 세대주의 자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 후에도 계속해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세대주의적 사고에 있어서 휴거가 그리스도 재림의 최종적 단계로 생각한다면, 이스라엘의 남은 자(십사만 사천 명)와 셀 수 없이 많은 이방인들이 칠년 환난기 동안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오직 중생한 사람들만이 천년기가 시작 되는 때에 이 땅에서 살고 있을 것이지만, 이런 사람들의 수많은 후손들이 천년기 동안에 개종하게 될 것이라는 것도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 교회(유대인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가 완성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재림하신 이후에도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또한 구원 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8) 세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천년기는 요한계시록 20:4-6에서 묘사하는 천년기가 아니다. 요한계시록 20:4-6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있는 신자들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는다. 라이리는 이스라엘의 지상적 목적은 천년기 동안에 유대인들에 의해 성취될 것인데 그때 그들은 부활되지 않은 육체들을 가지고 이 땅 위에 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천년기 동안에 부활한 성도들이 하는 역할이란 매우 제한되어 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주요한 활동은 천년기 동안 공중 위에 떠 있게 될 새로운 하늘의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세대주의자들은 가르치고 있다. 천년기 시대는 부활하지 못한 사람들, 즉 그때까지 자연 육체들을 갖고 사는 사람들에게 관계하고 있다고 세대주의자들은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구절(4절)은 이런 사람들에 관해 한 마디도 내뱉지 않고 있지 않는가 라는 물음이 생긴다. 세대주의자들의 천년기에 대한 이해는, 가장 중요한 이 구절(계 20:4~6)에 대한 그들이 주장하는 문자적 해석에 마저도 기반을 두고 있지 않는다. 세대주의자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천년기의 목적은 다윗에게 약속되었던 지상적 왕국을 세우는 일이며 이 왕국에서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있는 지상적 왕위에 앉아 개종한 한 민족인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천년기의 목적이라면, 요한계시록 20:4-6이 유대인에 대해서 이스라엘 나라에 대해서 팔레스틴 땅에 관해서 예루살렘에 관해서 등등 한 마디의 말도 언급하고 있지 않은 점은 이상하다. 



제16장 요한계시록 20장의 천년기


   후크마는 본 장에서 요한계시록 20장에 묘사된 천년기에 관한 “무천년론적 견해”를 상세히 전개한다. 요한계시록 해석에 있어서 후크마는 윌리암 핸드릭슨 “점진적 평행법”(Progressive parallelism)이란 방법을 따른다.


 l) 이 해석 방법에 따르면 계시록은 일곱 단원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각 단원들은 서로 평행을 이루어서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재림 시까지의 교회와 세상에 대하여 진술한다. 성경 중에서 유일하게 천년 통치에 관해 말하고 있는 구절인 요한계시록 20:1-6에 대한 무천년주의적 해석은 다음과 같다. 


요한계시록 20~22장은 요한계시록의 일곱 단원들 중 마지막 단원에 속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재림 후에 되어질 것에 관해 서술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요한계시록 20:3은 다시 한 번 신약 시대의 시작기로 돌아가게 한다. 옥에서 다시 놓임을 받아 나라들을 속여 모이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러 모이게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7-9절). 그러나 이것은 사단이 결박 되어 있을 동안에는 가능치 못한 일이다. 그렇다면 복음의 세대 기간 중에 사단이 결박되었다는 뜻은, 첫째 그는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는 것이고, 둘째는 그는 교회를 공격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원수들을 모두 함께 모을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요한 시대에 교회는 심하게 핍박받았다는 사실은 이 환상이 가져다주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우리는 깊이 간직하게 될 것이다. 요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동료 신자들 중 많은 숫자가 죽음을 맛보았고 그중 어떤 이들은 잔인하게 처형되어 순교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죽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의 영흔들이 살아서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고 있다는 것을 안 다는 것은 무한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요한이 지금 지상적 천년기 왕국을 묘사하고 있다는 흔적을 이 구절 속에서 발견할 수 없다. 


   6절을 보면,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고 요한은 말하고 있다. 이 축복받은 상태에 대한 이유가 본 구절에 제시되어 있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죽음은 영원한 형벌이었다. 만일 여기서 신자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한 것으로 생각되어졌다면, 그들은 “다시 사망이 없는” 장차 올 세상의 완전하고 충만한 희락을 이미 향유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며, 둘째 사망이 그들을 더 이상 다스리지 못하더라고 말해야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천 년 전기간 동안 죽은 신자들은 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할 것이며 왕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게 될 것이다. 비록 여기서 요한은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계속될 기간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지만,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들은 그리스도가 재림하고 육체의 부활이 있은 후에 이러한 죽은 신자들은 그들이 지금하고 있는 것보다 더 풍부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며 그리스도와 왕노릇 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때에 그들은 새 땅에서 영화롭게 된 육체를 입고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 속에서 영원토록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0:1-6에 대한 무천년론적 해석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의 왕국을 지상적으로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말하고 있지 않는다. 오히려 죽은 신자들의 영혼들이 그들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재림 시의 사이 동안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며 통치하고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이 구절은 사단이 복음의 전파를 막을 수 없도록 이 현세대 기간 중에 결박되어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제17장 육체의 부활


   육체의 부활은 성경의 종말론적 메시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과 헬라인의 인간관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헬라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육체는 약하고 방해물이다. 죽음 시에 육체는 소멸하게 되나 영혼은 계속 살아 남게 되며 육체 부활이란 꿈도 못꾸는 일이다. 


 반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하셨고 인간은 육체없이 완전할 수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부활은 육체가 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선한 것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 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자들도 영화로운 육체들로 부활할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던 자들이 중간기 상태 동안 잠정적 행복을 누리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행복은 그들의 육체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게 될 때에 비로소 완전해질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의 부활은 독특한 기독교 교리인 것이다. 


   성경은 불신자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부활육체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 약간의 힌트는 주어졌으나 대부분의 문제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미래의 존재를 설명함에 있어서 부정법을 동원하여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 흥미로운 점이다. 부패가 없음, 약함이 없음, 불명예스러움이 없음, 죽음과 눈물과 곡함과 울음과 교통이 없다(고전 15:42-43; 계 21:4). 우리는 다만 우리의 최상의 상상력을 넘어선 놀라운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뿐이다. 바울이 어디선가 한 말이 여기에 잘 적용될 것 같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제18장 최후심판


   그리스도에 대해 어떤 반응을 나타내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이미 현세에서 심판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한복음 3:18은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또한 역사의 종말에 최후의 심판이 있을 것도 말하고 있다. 이 최후의 심판 때에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심판 보좌 앞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최후심판의 목적은 무엇인가? 

1) 심판의 뚜렷한 중요 목적은 각 사람의 최종적 운명을 나타내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드러내시기 위함이다. 이 최후심판 때까지 각 사람의 최종적 운명은 감추어진 바 되었으나 이제 그 운명이 나타난 바 되었다. 신앙을 가졌었는지 그렇지 못했었는지, 어떤 행위를 했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이 나타날 것이다. 이런 행위들이 펼쳐질 때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구원을 통해 자기의 은혜를, 자기 원수들을 정죄하는 일을 통해서는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심판의 날에 핵심이 되는 것은 개인의 운명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2) 두 번째 목적은 각 사람이 받게 될 보상과 형벌의 정도를 나타내기 위함이다. 이러한 정도의 다소는 사람들이 살았던 삶의 질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최후의 심판 때에 해결되어야만 한다. 


3) 세 번째 목적은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행사하시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이제 각 사람에게 그들이 영원토록 지내야 할 장소를 정해주신다. 새 땅이든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이든 말이다.  


    최후심판은 어느 정도 지속될 것인가? “심판날”(마 11:22), “그 날”(마 7:22; 살후 1:10; 딤후 1:12), “진노의 날”(롬 2:5)에서 “날”이라고 쓰여진 단어는 종종 긴 시간을 의미하곤 한다. 그러나 여호와 증인들이 주장하듯, 심판의 날이 새 세계의 첫 천 년 동안 지속된 다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모든 사람이 심판대 앞에 나타났다면 모든 신자들도 이 속에 포함되었음에 틀림없다. 신약은 이와 같은 사실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고린도후서 5:10에서도 “우리 믿는 자”들도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히 10:30) 


   무엇이 심판될 것인가? 이 현재의 삶 동안에 이루어졌던 모든 일이다. 심판의 날은 우리가 내뱉었던 말들도 다 심판의 대상으로 고려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 12:36)


   신약과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충만한 계시를 받은 자들은 그들이 이 성경 전체에 어떻게 반응했는지에 의해 판단받게 될 것이다. 구약만을 갖고 있었던 자들은 그들이 구약성경에 반응한 정도에 따라 판단받게 될 것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들의 청중들에게 그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살도록 경고도 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인 평강, 행복, 구원을 추구하도록 권고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약이나 신약에 나타난 계시들을 전혀 받지 못한 자들은 그들이 가졌던 빛 아래서 판단받게 될 것이다. 


 로마서 2장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풍성한 계시를 받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 마음속에 쓰여진 율법의 사역”에 대해 그들이 취한 반응에 근거하여 판단을 하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분명한 사실은 사람은 그들이 받지 못한 계시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었던 빛에 근거해서 판단받게 된다는 것이다. 많은 특권들을 가졌던 자들은 많은 책임들을 갖게 될 것이요 적은 특권들을 가졌던 자들은 적은 책임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버림받은 자들이 당하게 될 고통에도 “등급”들이 있는 것이다. 이것에 관해 예수님은 누가복음 12:47-48에서 말씀하고 계신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 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풍성한 빛을 받은 자들에게 관해서, 즉 성경 전체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는 자들에 관해서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그들이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의 완전한 의로움으로 옷입었느냐이다. 사람의 영원한 향방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자신들의 관계인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에 대한 살아 있는 믿음이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면, 왜 성경은 그렇게도 끊임없이 최후심판은 행위들에 따라 판단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구원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지 결단코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최후의 심판은 각자의 행위에 따라 집행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이유는 신앙과 행위간의 밀접한 관계 때문이다


 신앙은 행위들 속에서 그 자체를 나타내야 하며 행위들은 참 신앙의 증거들이다. 요한 칼빈이 잘 요약했듯이, “의롭다하는 것은 오직 믿음이다. 그러나 의롭다 하는 믿음은 혼자서가 아니다.” 행위에 따른 심판은 실질적으로 믿음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증거로 나타난 믿음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만일 믿음이 참이라면 그곳에는 행위가 있을 것이며, 행위가 없다면 그 믿음은 참이 아닌 것이다. 


   상급(rewards)에 관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상급을 얻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상급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분명해진다. 상급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터 위에 사람이 어떤 재료들로 집을 지어 나가느냐와 밀접한 함수관계를 갖고 있다. 장차 신자들에게는 그러한 상급들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예수님도 종종 상급들에 관해 말씀하신 일이 있다(마 5:11~12; 6:19~21; 녹 6:35; 막 9:41; 마 25:33을 보라).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못박아 말씀 하시기를, 그러한 상급들은 인간의 행위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미래의 상급 사이의 관계는 기계적으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어떤 사람이 음악을 공부하여 어떤 음악기구를 잘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자. 그렇다면 그의 음악을 즐기는 능력 역시 크게 증가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을 위한 우리의 헌신과 봉사가 커질수록 지금과 미래의 그리스도의 왕국의 축복들을 향유할 수 있는 우리의 용량 역시 커질 것이다.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마음의 모두를 바치는 사람을 절반 정도의 마음만을 바치는 사람보다 더 큰 주님의 기쁨 알게 된다. 하늘에서만 그런 기쁨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보장해 주고 있지 않은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심판의 날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1) 세상의 역사는 무의미한 원형의 끝없는 연속이 아니라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운동이다. 


2) 구원과 영원한 축복 상태는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각 개인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최후심판의 날은 최종적으로 나타낼 것이다. 


3) 심판의 날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삶에 대해 책임을 지게하며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우리 모든 각 개인들이 도덕적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권고하고 있다. 


4) 심판의 날은 하나님의 최종적 승리와 역사 속의 그의 구속사역의 최종적 승리를 의미한다. 즉, 그날은 모든 악에 대한 최종의 결정적 정복의 날이며 죽임을 당 하신 어린양의 승리가 최종적으로 제시되는 날이다. 심판의 날은 모든 의심의 그림자를 넘어서 세상 끝에 하나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졌음을 드러낼 것이다. 



제19장 영원한 형벌


   오늘날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리를 부정하는 두 가지 형태의 주장들이 있는데, 하나는 보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전멸주의이다. 보편주의자들은 지옥과 영원한 형벌은 사랑과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조화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한다. 전멸주의의 교리는 인간은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으나 계속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은 불멸성을 탈취당하게 되고 완전히 전멸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건적 불멸성”이라고 알려진 것은 사람은 죽도록 창조되었으며 신자들은 은혜의 선물로서 불멸성을 받게 되고 사후에 축복상태 속에서 계속적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형태의 완전 소멸론은 모두 악한 자의 소멸을 가르치고 있으며 따라서 영벌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이다. 16세기 중엽 의 소시니안파(the Socinians)들도 불신자들은 결국 소멸되어 버릴 것이라고 가르쳤다. 제칠일 안식교와 여호와 증인들은 소멸이란 악한 자, 사단, 귀신들에 대한 형벌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산상설교에서 우리는 적어도 세 번에 걸친 지옥에 대한 언급을 찾아낼 수 있다. 지옥의 형벌들을 묘사하고 있는 성경의 여러 다양한 표상들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문자적으로 이러한 표상들을 취한다면, 이러한 표상들은 서로 모순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어떻게 지옥이 동시에 암흑도 되고 불도 될 수 있단 말인가? 표상은 상징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는 상징들보다 더 좋지 않을 것이다. 버림받은 자 모두가 유다가 당한 고통들을 겪어야만 하지는 않는다. 이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각 사람은 자기들이 받아야 할 만큼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끝으로 지옥의 장소성에 관해 말해 본다면, 중세기에는 일반적으료 생각하기를 하늘은 지구 위의 저 공중 어느 한 곳에 있을 것이며 지옥은 그 아래 어느 곳, 아마도 지구의 깊은 곳이라고 생각하였다. 현대적 천문학을 알고 있는 20세기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식의 사고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의 현재 우주체계에는 위도 아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성경의 자료에 동의하면서 어디엔가 지옥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리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지옥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설교와 성경 가르침에 더욱 진지하도록 인도한다. 우리는 망설임과 슬픔, 아마도 눈물마저도 가지면서 지옥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히 2:2);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지옥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선교적인 일에 대하여 열정과 긴급성을 갖게 한다. 만일 저 먼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듣지 못하여 그리스도 없는 영원의 형벌을 향하여 가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제20장 새로운 땅


   새 땅이란 현재의 땅과는 전혀 다른 땅인가 아니면 현재의 땅이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사야 65:17과 요한계시록 21:3에는 “새 하늘과 새 땅”에 관해 말하고 있다. “하늘과 땅”이란 표현은 전우주를 지칭하는 성경적 표현법으로 이해해야 한다. 현재의 우주는 완전히 소멸되고 현재의 우주와는 전혀 별개의 새로운 우주가 등장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우주는 현재의 우주와 근본적으로 동일하되 오직 새롭게 되고 정화된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루터교 신학자들은 전자를 택한다. 이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하여 마태복음 24:29, 베드로후서 3:32에 호소하고 있다. 분명히 천지개벽과 같은 사건들이 현재의 땅이 파괴될 때 발생할 것인데 이러한 엄청난 사건들은 죄와 불완전으로 오염된 이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다음에 열거할 4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우주가 완전히 소멸한다는 입장보다 우주가 새롭게 된다는 의견을 받아 들인다. 첫째, 베드로후서 3:33과 요한계시록 21:1을 살펴볼 때, 새 우주의 참신 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neos가 아니라 kainos임을 주 목할 필요가 있다. neos는 시간과 기원에 있어서 전혀 새 것이라는 뜻인데 반해 kainos의 뜻은 본성이나 질에 있어서 새롭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ouranon kainon kai gan kainan (새 하늘과 새 땅, 계 21:1)이란 의미는 현재의 하늘과 땅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우주의 출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주와 동질이되 영화롭게 갱신된 우주의 창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완전 소멸이론보다도 갱신이론을 주장하는 두번째 이유는 로마서 8장에 나타난 바울의 주장에 근거를 둔다. 창조의 세계가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인데 이는 창조세계가 썩어짐의 종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다(20-21절). 바울의 요점은 장차 종말에 현재의 창조세계가 전혀 새로운 세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패로부터 자유케 될 것이라는 점이다. 


   세번째 이유는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육체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는 점이다. 비록 현재의 육체와 부활의 육체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양자간에는 엄연히 연속성이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일어난 사람들은 전혀 새로운 인종이 아니라 바로 이 땅 위에 살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이러한 유추적 방법을 통해 볼 때 우리는 새 땅은 현재의 땅과 전혀 다른 종류가 아니라 놀랍게도 새롭게 변한 현재의 땅이다. 


   갱신이론을 받아들이는 네번째 이유는 만일 하나님께서 현재의 우주를 완전 소멸시키셔야 한다면 결과적으로 사단이 승리를 쟁취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단이 현재의 우주와 창조질서를 치명적으로 부패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현재의 창조세계는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으며 하나님도 병든 우주를 어떻게 다루실 수 없어서 결국 완전히 소멸하시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사단은 이러한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다. 사단의 결정적 패배의 클라이막스는 하나님께서 사단이 그토록 부패시키려고 힘썼던 바로 이 땅을 새롭게 하시고 사단의 악한 음모 의 결과들을 이 땅에서부터 완전히 제거하실 바로 그때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실 때 우리가 들어갈 세상은 다른 세상이 아니다. 그 세상은 바로 이 세상, 이 하늘, 이 땅이다. 그러나 새롭게 된 세상이다. 구속의 장면이 펼쳐질 장소는 바로 이 삼림들, 이 들판들, 이 도시들, 저 거리들, 이 사람들 속에서이다. 비록 현재는 전쟁터와 같아 아직 성취되지 않은 완성의 때를 향해 소리지르며 다투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나 그때에는 이상의 모든 장소와 배경들은 승리의 들판이요 추수의 밭들이며 그 밭들에 눈물로 뿌려졌던 씨앗들이 영원한 곡식단들이 되어 창고에 들여질 것이다.”(에드워드 투르네이) 


   새 땅에 관한 주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이사야 65:37-25와 66:22-23, 베드로후서 3:33; 요한계시록 21:3-4 등이다. 베드로의 관점을 보면, 비록 현재의 땅이 다 “타버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결코 파괴되지 않고 영원토록 지속될 새 하늘을 창조하실 터이니 우리는 이를 소망해야 한다. 왜냐하면 새 하늘은 악과 불의는 모두 제거되고 의로움만이 존재하는 땅이기 때문이다. 


 성경 전체 중에서 새 땅에 관해서 가장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구절은 요한계시록 21:1-4일 것이다. kainos(새로운)라는 단어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움”을 묘사하기 때문에 이상에서 요한이 본 세계는 지금의 것과는 전혀 다른 우주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의 우주가 영화롭고 새롭게 된 상태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3절에는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는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라 바로 땅 위에 있을 것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그곳이 바로 하늘이기에, 장차 올 영원한 삶의 영역에는 현재처럼 하늘과 땅이 나누어진 상태가 아니며 둘이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마치 새 땅에서 사는 것처럼 새 하늘에서도 계속해서 살 것이니 새 땅은 새 하늘에 대한 포괄적 대명사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거할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 의 백성이 되리라”는 구절은 은혜 언약의 골자를 이루는 핵심 약속이라 할 수 있다(참조. 창 17:7; 출 19:5-6; 렘 31:33; 겔 34:30; 고후 6:16; 히 8:30; 벧전 2:9-10). 


   그러므로 새 땅에 관한 가르침은 우리에게 무한한 소망과 용기를, 그리고 절망과 좌절의 이 세상 속에서 낙관적으로 살게끔 한다. 비록 악이 이 세상에 횡행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이미 최후의 승리를 확보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무한한 안위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더 좋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을 충만하게 노출시키기 위해 힘쓰는 우리의 노력들은 영원한 가치가 있는 값진 것들이다. 하나님의 왕국을 위한 현재의 봉사를 통해서 새 땅의 건설을 위한 자재들이 이미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성경들이 번역되기도 하며 많은 종족과 나라들이 복음화되기도 하며 신자들이 새롭게 되고 문화가 변혁되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를 위해 현재 이곳에서 행해진 일들이 장차 영원세계에서 그 충만한 진가의 빛을 발할 것이다. 


 역사가 시작될 때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역사가 끝날 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볼 것이다.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찬란한 광채와 영광은 이전 것들의 영광과 광채를 압도하게 될 것이다. 역사의 중앙에는 죽임당하시고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후에 온 땅의 왕들의 왕이 되신 “어린양”이 있다. 장차 그 어느 날엔가 우리는 우리의 면류관들을 벗어 그 발 앞에 놓고 “경이와 사랑 그리고 찬양” 속에 깊이 빠질 것이다. 



부록: 종말론에 관한 최근의 경향들


   종말론에 대한 관심은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 속에서 발견되는 강조점들이 눈에 띄게 변천하였음을 내포하고 있다. 19세기의 영향력 있는 신학자 중의 하나였던 알브레흐트 리츨은 하나님의 왕국의 개념이 기독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리츨적 이해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우리는 아돌프 본 하르낙을 들 수 있다. 하르낙은 예수님은 종교와 도덕을 아주 훌륭히 결합시켰으므로 종교는 도덕의 영혼으로, 도덕은 종교의 육체로 부를 수 있다고 한다. 모든 복음이란 결국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성 등의 개념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그는 단정한다. 


   리츨과 하르낙에 의해 대변된 예수님의 상과 하나님의 왕국의 이해에 대항하여 지난 19세기 말엽에 강렬한 반항이 터져 나오게 되었다. 리츨의 사위인 요하네스 봐이스는 하나님의 왕국에 리츨의 학설은 예수님 자신의 말씀을 자세히 조사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진화론적이고 비종말론적 사고경향에 근거를 둔 것이라고 비난했다. 봐이스는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서 미래 종말론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신학계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과 왕국에 대한 봐이스의 견해는 알버트 슈바이처에 의해 동의되고 확대되었다. 봐이스와 함께 슈바이처가 행한 위대한 신학적 봉사란 예수님을 단순히 도덕적 모범자나 윤리의 선생으로 그리려 했던 구식의 예수님 상을 철저하게 깨뜨렸다는데 있다. 슈바이처는 그의 초기 저서에서 개진되었던 왕국의 종말론적 이해를 계속해서 견지하면서도 바울에 대한 해석에서 그는 종말의 현재 속으로의 돌입을 인정하는 견해를 나타내 보이게 되었다.


   봐이스와 슈바이처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적이 아니라 미래적이었지만(임박한 미래) 도드에게 있어서는 이 왕국은 이미 도래했고 예수님의 사역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신약성경 속에서 발견되어지는 미래 종말론의 대부분은 유대 묵시문학의 잔영이며 이런 이유 때문에 “허구적 기독교적”이라고 하는 도드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에 진정한 공정을 기했다고 할 수 없다. 


   종말론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한 신학자 게르할더스 보스는 1893년부터 1932년까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성경신학을 가르친 교수였다. 보스에 따르면, 신약의 신자들은 이 세대(세상)와 장차 올 세대(세상) 속에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차 올 세대가 이미 도래했다는 의미에서 보스는 도드와 입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호작용”이라는 장에서 보스는 주장하기를, 신약의 신자들에게 있어서 구원론을 형성시킨 것이 종말론이었지 결코 종말론을 형성시킨 것이 구원론이 아니었다고 한다.


   종말론에 관한 “구원사” 학파의 대표적 학자 중의 하나인 스위스의 현대 신학자인 오스카 쿨만은 그의 접근방법을 묘사하는 용어로 구원사란 단어를 선호한다. “구원사”란 뜻은 하나님께서 일련의 구속적 행위들을 통하여 역사 속에 자기 자신을 나타내심을 의미하며 이 일련의 구속적 행위들의 중심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에 못 박히심 그리고 부활이 놓여 있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구원을 가져오셨다는 견해이다. 쿨만에게 있어서 성경의 종말론이란 아직 성취되지 않은 미래적 요소와 아울러 이미 성취된 현재적 요소를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몰트만은 성경의 종말론 연구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종말론은 교의학에 붙어 있는 부록이 아니라 기독교의 전체 메시지를 열어젖힐 수 있는 열쇠라고 주장한 몰트만의 공헌을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몰트만이 가진 견해의 문제점 첫째는, 하나님의 왕국을 단지 미래적인 것으로만 보는 그의 일방적 강조점에 있다. 몰트만에 대한 두 번째 반대 이유는 그가 계시를 전적으로 약속이라는 측면에서만 해석하고 있는데 있다. 몰트만에 대한 세 번째 어려움은 그가 미래를 모호하고 단순히 형식적이며 구체적 내용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는데 있다. 


   역사의 최종적 종말론적 완성은 아직도 미래 속에  놓여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현재적이며 미래적이다.    





                              [개혁주의 종말론]을 읽고 나서


   안토니 후크마는 “시작된 종말론”(제1부)과 “미래 종말론”(제2부)이라는 큰 맥락에서 개혁주의 종말론을 전개하고, 부록으로 최근 종말론의 흐름을 싣고 있다. 후크마의 책은 “성경주해”에 기초하여 논증하기 때문에 “성경의 무오”를 믿고 이 성경에 의지하여 신학하는 개혁파 신학도들에게 매우 유익하다. 배우는 시각으로 책의 주제를 몇 개 선정하여 생각한 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종말론은 철저히 “성경”에 기초해야: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겸손하게 순종해야”  


   후크마는 철저하게 성경에서 말하는 것에 기초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만큼만 종말론 사상을 전개한다. 성경의 계시 아래서만 종말 신앙을 갖도록 강조하면서 성경의 계시 앞에 겸손하게 개인과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해 논할 것을 권면한다.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복종하는 것이 종말론 신학의 기초로 본다. 그는 제3장, “역사의 의미”에서도 “역사 특히 구속사는 하나님과 그의 목적들을 계시”하기 때문에 인간은 “역사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앞에서 겸손해야 함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세상은 종종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좋은 경우가 있고 반면에 교회도 우리가 그럴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더 악한 경우도 있다.”고 한 견해를 인용하며(p. 60) 역사적 사건을 판단할 때 겸손해야 함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제7장, “육체의 죽음”에서 “죽음은 죄의 결과로서 세상에 들어 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소시니안주의자들이나 칼 바르트가 죽음을 죄의 결과로 보지 않는 부분에 반대하는 이유는 “성경의 증언”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칼 바르트는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죄에 떨어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면이라고 했다. 그러나 후크마는 만일 인간이 그의 타락과 상관없이 죽어야만 한다면 성경이 죄와 죽음을 철저하게 연결시키는 부분을 부정하게 된다고 본다. 무엇보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신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고난, 나아가 부활신앙을 부정하게 되기에 후크마는 바르트의 입장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성경에서 사람이 죄 때문에 죽는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께서 이런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런 새로운 시작이다”라고 한다. 


   제8장, “영혼 불멸론”에 대해서도 “성경은 영혼의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는가?”라면서 영혼불멸사상이 기독교의 교리가 아니라 고대 헬라의 신비종교들 속에서 발전되었기 때문에 반대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를 따라 불멸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선물이지, 영혼만이 갖는 특성이라는 성경적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본다. 후크마는 “중간상태”에 대해서도 “성경은 이런 상태에 관해 거의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으며, 이에 관한 많은 질문에 대해서도 분명한 답변들을 제공하고 있지 않다.”라면서 이는 신약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미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17장, “육체의 부활”에서도 “성경은 불신자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부활육체의 정확한 본질에 대해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면서 성경은 다만 약간의 힌트는 주지만 대부분의 문제에 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성경에서 이 부분에 침묵한다고 내세 신앙생활에 문제가 생기는가? 아니다. 후크마는 “우리는 다만 우리의 최상의 상상력을 넘어선 놀라운 세계가 될 것이라는 것뿐이다.”라면서 주님이 이루실 세계에 대해서 오히려 산소망, 건전한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 


   후크마는 제19장, “영원한 형벌”에서도 지옥이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있다고 믿어야 함을 강조한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이란 성경의 자료에 동의하면서 어디엔가 지옥이라고 불리우는 곳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면서 지옥이 있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옥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설교와 성경 가르침에 더욱 진지하도록 인도한다. 우리는 망설임과 슬픔, 아마도 눈물마저도 가지면서 지옥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것이다.” 지옥의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선교적인 일에 대하여 열정과 긴급성을 갖게 한다. 그리스도 없는 영원의 형벌을 향하여 가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이처럼 순수한 재림신앙을 방해하는 첫째 세력은 성경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부정하는 자유주의 신학이므로, 후크마는 이들의 견해가 “성경”에 근거를 두지 않기 때문에 인정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종말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진 만큼 사고할 것을 강조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 사는 존재요 우리 자신의 종말도 알 수 없는 존재다. 이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건전하고 희망찬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부분만 계시하셨다. 후크마는 고전 2:9을 인용하면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없지만, 놀라운 세계를 상상하며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다른 교리도 그러하겠지만, 특히 종말론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불건전한 쪽으로 빠져들어간 것을 우리는 쉽게 목격하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알려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겸손한 자세를 상실하는 자세다. 이런 면에서, 후크마는 철저한 성경 주해를 통해서 성경이 말하는 계시를 참으로 소중히 여긴다. 갈수록 혼탁해지는 종말의 세상에서, 역사 앞에 겸손하고 미래의 일에 대해 겸허하고, 이 모든 일을 이루실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삶이 오늘을 사는 신자의 성경적인 내세신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천년기론에서 재림신앙을 강조: “성경계시에 의존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 배격”


   후크마는 천년기론을 설명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그는 천년기론을 네 가지 입장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데, “무천년의 입장”에서 전개한다고 밝힌다. 본 책에서 후크마가 무천년기를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재림의 기대”와 “현재의 삶”이다. 그는 제10장, “재림의 기대”에서 “그리스도의 재립에 대한 기대가 신약교회의 믿음을 지배”했다고 강조한다. 신약의 모든 책들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항상 그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도록 권면하고 있다. 후크마는 “종말론이란 이스라엘 구원역사 속에 뿌리를 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으로부터 넘쳐 흐르는 종교적 확실성”(pp. 14-15.)이라고 주장한다. 구약의 성도들 뿐만 아니라, 신약의 성도들은 주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믿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선을 행하며 살았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인에게 재림신앙이 없다면, 긴장감도 없어지고 산소망도 없어며, 무엇보다 예수님의 약속을 믿지 않는 것이 되므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흔들리게 된다. 그래서 후크마는 “재림 신앙”을 거부하는 자유주의 종말론을 비판한다. 자유주의자들은 재림을 믿지 않는다. “재림의 지연”이란 표현을 처음 사용한 슈바이처는 예수님이 실수를 하여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그 왕국을 도래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바울에게는 원래 종말신앙이 없었는데, 발전해 나간 것으로 본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는 “재림 신앙”을 갖지 못하도록 하는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 성경은 분명히 깨어 경성할 것을 강조하는데, 재림 신앙이 없어지면 미래에 대한 소망도 식어질 뿐만 아니라 긴장감이 생기기 어렵다. 


   그러나 후크마는 천년기론을 설명하면서 이는 성경에 기초한 것이며 연약한 인간들에게 산소망을 심어준다고 강조한다. 제20장,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새 하늘과 새 땅의 찬란한 광채와 영광은 이전 것들의 영광과 광채를 압도하게 될 것이라면서 내세에 대한 산소망을 강조한다. 



   3. “이미”와 “아직”의 긴장성을 강조하는 종말론


   후크마는 제2장, “신약 종말론의 본질”에서 신약의 종말론을 특정지워 주는 특징은 “이미” (already)와 “아직” (not yet) 사이에 일어나고 있는 긴장 관계라고 한다. 그는 제4장 “하나님의 왕국”에서도 건전한 종말론을 가진 신자는 이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열매맺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후크마는 신앙과 생활의 측면에 대해 왕국의 현재성과 미래성은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요청하시기 때문에 현재와 미래를 함께 강조하는 종말론을 거듭 강조한다. 


후크마는 제6장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에서도 이런 긴장은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의 역할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고 강조한다. 신약성경은 많은 환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바울은 우리의 현재적 고난과 우리의 미래적 영광을 연결한다. 베드로는 고난에 대해서 놀라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함께 참여하게 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면서 현재에 대한 강조는 현세상과 장차 올 새 땅 사이의 관계를 “연속성”이라는 시각으로 보게 한다. 균형잡힌 종말론은 결국 오늘의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한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으로 “일반은총”을 존중하며 모든 문화적 산물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에 비추어 평가해야 함을 가르쳐 준다. 오늘과 내일을 함께 강조하는 종말론은 영원한 왕궁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데 아주 유익한 강조라고 할 수 있다. 


 후크마는 이런 긴장 속에서도 기독교인은 “승리”를 확신하는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고 권면한다. “그리스도인들은 D-day 와 V-day 사이에 살고 있다. D-day는 그리스도의 초림이었고 그때에 원수 들이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V-day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그때에 원수들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항복하게 될 것이다. 최후의 승리에 대한 소망은 너무도 크고 생생하다”는 쿨만의 말처럼 재림신앙이 있어야만 승리의 날을 향해 오늘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후크마의 “긴장성”을 강조하는 종말론은 어떻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오늘 주어진 삶에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는 책임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하게 한다.  



   4. 전인적인 관점을 강조한 종말론


   후크마는 성경은 전인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헬라철학처럼 이원론적인 사고는 결코 성경적인 종말론에 맞지 않다고 본다. 제8장, “영혼 불멸론”에서 사고하는, 영혼은 신성한 반면 질료로 구성되어 있는 열등한 본체인 육체는 영혼보다는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 플라톤의 사상에 반대한다. 그는 부활한 “인간”은 불멸한다고 해야 할 것이라면서 그런 인간은 부활을 통한 변화를 겪어야만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간상태의 교리에서도 육체 부활, 땅의 새로워짐에 관한 교리와 결코 분리되서는 안 되며 중간상태와 부활은 하나의 단일한 기대의 두 가지 측면으로서 생각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순례의 끝이라면서 우주의 종말도 “갱신”이라는 입장에서 이해한다. 이러한 전인적인 생각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갱신, 문화 창달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책임성을 일으킬 수 있다. 



   5.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강조


   후크마는 종말론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개한다. 예수님은 역사의 중심이시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세대가 시작되었고,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역사의 종말이 임한다. 그는 “신약의 종말론이 독특하다는 것은 그것이 과거에 일어났던 그리스도의 승리에 그 기반을 둔 하나님의 목적들이 장래에 완성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면서 그리스도의 승리가 있었고, 있으며, 마지막 날에는 완성될 것을 기대한다. 


 후크마가 종말론을 “그리스도 중심성”에서 본 예는 제12장 “특별한 징조들”에서도 나타난다. 이스라엘의 충만한 숫자가 채워지는 부분에서도 여러 가지 입장을 정리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이 논리를 전개하는 세대주의 종말론을 비판한다.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이 “본토”로 돌아간다고 해서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며,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는 이스라엘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역사의 중앙에는 죽임당하시고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시고 후에 온 땅의 왕들의 왕이 되신 “어린양”이 있다면서 장차 그 어느 날엔가 우리는 우리의 면류관들을 벗어 그 발 앞에 놓고 “경이와 사랑 그리고 찬양” 속에 깊이 빠질 것이라고 희망한다. 


   특히 재림의 때를 알려주는 징조 중에서 “배도”를 강조한다. 후크마는 “첫째는 교회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일에서 점점 멀어지게 되는 배도가 일어난다. 둘째는 예수님의 재림사건 바로 직전에 최종적 대규모 배도함이 발생할 것이다.”면서 배도를 예수님의 재림을 부정하는 것을 심각한 배도로 본다. 


   오늘의 세상과 기독교 현실은 어떠한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너무나 멀리 간 것은 아닌가?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기 보다 돈과 명예와 정욕을 예배 대상으로 삼는다. 예배당에서 예배하지만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마치 종말이 없을 것처럼, 인간을 즐겁게 하는 예배들이 늘어간다. 


 가장 큰 배도는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 것, 예수님을 윤리 선생 정도로 인정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시도들은, 브라운 교수가 [이단과 정통]에서 말한 것처럼, 기독론을 부정하는 이단과 같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종말을 부정하거나 왜곡하거나 다른 견해를 첨가하거나, 예수님 자체를 왜곡하는 일이 늘어가면 우리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상황적” 판단을 해야 할 것이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출처: 비공개까페
          물과피와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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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배달부

사랑! ...
사랑은 주면 줄수록 점점 더 커지는 것 
사랑은 설날처럼 
모두 함께 행복을 나눠 갖는 거라네 

이 세상에는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사랑을 받을 필요가 없을 만큼 
부요한 사람도 없다네 

사랑은 반드시 물질만은 아니네 
남의 고통과 상처를 
내 가슴으로 안아주고 
따스한 말로 위로해 주면 충분한 것! 

십자가 위에서 몸으로 나타내신
그분의 사랑은 강물처럼 흐르고 있으니
그 사랑을 퍼다 나르는 통로가 되세
우리 모두 사랑의 배달부 되세!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분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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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속담집


Korean Traditional Proverb Album f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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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글 옛날에 어떤 아들이 그의 아버지와 말다툼을 하고서 집을 뛰쳐 나갔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사랑하던 그의 어머니는 그가 돌아오기를 끊임없이 기도했다. 그러던 중 그 어머니는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아들은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갔다. 어머니는 죽기전 한쪽 손은 아들의 손을, 다른 한쪽 손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그 둘을 자기 몸에 포개어 놓았다. 결국 그 어머니가 죽음으로써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화해하게 된 것이었다. 예수께서도 한 손은 하나님의 손을 다른 한 손은 죄인 된 우리들의 손을 서로 잡아 포개어 놓고 죽으심으로 화목하게 하셨다. -담아온 글

 

영화 제 3 성전의 한 장면 중에서

 

 

 

 

유대인들이 쓴 시온의정서를 보면 이 시대의 마지막 적그리스도는 아마도 유대교에서 나올 확률이 높다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입장이며 그들이 메시아가 왔다고 떠들 때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덕수궁 뒤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는 몇년 째 공산국가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자주 전시한다
이유는 박원순시장이 친북성향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조총련들의 그림이 주류를 이룰 때도 많다)
몇 년 전엔 이스라엘인들이 독일을 저주하며 앞으로 독일로 진출하여 그들의 원한을 풀겠다는 각오가 담긴 그림과 동영상을 보여 주는 전시회가 있었다
보기에도 너무너무 음산하고 무시무시한 내용들이어서 별관심없이 보긴 했는데 마치 이스라엘이 공산국가라는 느낌을 받게 했다
그 각오와 결의가 가이 대단했다

그들은 앞으로 예루살렘에 제3성전을 지으려고 한다
신사도운동권들은 여기저기 아직도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는데 물심양면으로 돕는다고 한다
그것은 마치 과거 한국의 운동권들이 현재 햇볕정책을 지지하며 물심양면으로 열심히 도와서 북한이 핵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신사도운동권들이 하는 짓을 보면 적그리스도를 빨리빨리 불러들이는데 협조하는 상황이 아니고 무엇인가
앞으로 제3성전에 앉아 경배를 받을 적그리스도에게 그들은 절을 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부자다 세계적인 부자다
그들이 예수를 믿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앞으로 제3성전을 세우는데도 신사도들은 물질적인 도움을 줄 게 뻔하다

앞으로 신세계정부가 나온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세우는 정부다
프리메이슨이나 일루미나티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유대인들이 만든 것이다
미국이 아닌 것이다
돈많고 머리좋은 유대인들은 못할게 없다

서울시립미술관에 전시됐던 이스라엘인들의 유럽을 향한 저주와

위협은 이미 시온의정서에 나와 있던 계획이고 작정이었다
그들의 인간에 대한 분노와 분개는 이미 루비콘강을 건넌지 오래였다
그들에겐 오로지 세계인들에 대한 복수의 신념 뿐이다
아울러 앞으로 모든 종교는 유대교 밑에서 울어야 할 것이다
특히
흔히 말하는 7년 대환난이 있다면 그것은 유대교가 기독교를 박해하는
양상이 될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를 갈며 없애려고 하는 상대가 바로 크리스찬들이기 때문 ㆍㆍㆍ
666표가 있다면
그것은 세계금융권을 지배하고 있는 유대금융권들의 기독교인들을 향한
횡포가 될 것이다
ㆍㆍ이러고보니 내가 대예언을 해버렸네 ㆍㆍㆍ^^
휴우웃ㆍㆍㆍ^^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글/ 채

괴담,악성루머라고? 한국이슬람측 '익산 할랄단지에 무슬림 가족 30만명 거주한다' 보도자료 뿌려


괴담이나 악성 루머가 아니었다.


정부에서는 익산에 할랄단지가 조성되어도 무슬림이 대거 유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혔었지만, 한국이슬람측에서는 "익산에 (할랄단지가 조성되면) 무슬림 가족 30만 명이 거주할 예정"이라고 실제로 기대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이슬람중앙회는 이것을 단순히 기대만 한 것이 아니라, 보도자료로까지 버젓이 올려 놓았다(사진 참조).



익산 할랄단지와 관련해 무슬림 가족 30만명이 들어올 수 있다고 우려한 기독교계와 시민단체에 대해 괴담이라고, 악성 루머를 퍼뜨린다고 매도하고 공격한 이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이슬람교 한국 총본산인 한국이슬람중앙회가 익산 할랄단지 반대 운동이 거세지기 전인 지난해 1월 21일 홈페이지에 "무슬림 가족 30만 명이 거주할 익산단지 전경"이라는 보도자료를 올렸던 것이 국민일보에 의해 확인됐다.


이 보도자료는 한국이슬람중앙회가 자체적으로 내놓은 것이 아니라, 대한지방자치뉴스의 보도였다. 한국이슬람중앙회는 이 신문의 익산시 국가 할랄식품 클러스터 조감도와 관련 기사를 공식 보도자료로 그대로 올려놓았다.


이 기사는 '한-UAE 간 <할랄식품> 투자 협약'으로 보도됐는데, "박근혜 대통령의 아랍에미리트(UAE) 방문을 계기로 양국 정부가 할랄식품 분야 협력 증진을 위한 업무협약(MOU)를 체결함에 따라 익산 국가식품클러스터 국내외 투자 유치가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한다"며 "이번 MOU는 농업 및 할랄식품 분야에서 UAE 정부와 우리나라 정부의 첫 번째 MOU 체결 사례로, 주요 내용에 국가식품클러스터 내 할랄푸드파크 개발을 위한 정보 및 기술을 포함하는 내용이 포함됐다"고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기사에는 없는 내용인, '익산 할랄단지에 30만명의 이슬람 가족이 거주한다'는 내용이 보도자료의 제목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는 한국이슬람중앙회에서는 농림축산식품부가 추진 중인 국가식품 클러스터 단지에 할랄식품 전용단지가 설립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최소 30만명의 무슬림이 들어올 것으로 자체적으로 예상했다는 뜻이다.


국민일보에 이 사실을 제보한 한 시민은 "이와 관련해 한국이슬람교 할랄 인증 담당자와 통화했는데, 이 같은 자료를 찾을 수도 없고 알지 못한다며 즉답을 피했다"고 전했다.


현재 한국이슬람교 사이트는 해당 내용을 삭제한 상태다. 한국이슬람중앙회 관계자는 언론들의 취재가 시작되자 해당 글을 내리고 "글은 인터넷 블로그 다양한 곳에서 있던 것들을 모아 올린 것"이라며 '개인적인 글'이란 사실을 강조하면서 삭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국이슬람중앙회 홈페이지에 버젓이 올라와 있는 글이 어떻게 개인적인 글이 될 수 있는가? 이는 한국이슬람중앙회의 공식적인 입장이었다고 해도 틀린 것이 아니다.


한편, 한국이슬람중앙회는 서울, 부산, 경기도 광주·안양·부평·안산·파주·포천·김포, 전북 전주, 광주, 대구, 대전, 경남 창원, 제주 등 전국 15개 이슬람 사원을 총괄하는 기구로, 서울 용산구 우사단로에 있다.



출처: 재경일보 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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