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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복음으로 동성애 이길 수 있다(김성로목사 편)


아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함으로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한국 춘천 한마음 교회(김성로 목사)의 이야기 입니다. 1) 먼저 김성로 목사의 동성애에 대한 관점을 올렸고, 2) 그 다음에는 실제로 부활의 복음을 전함으로서 일어났던 실제의 사례들을 올렸습니다. 그럼으로서 부활의 복음으로 한국/미국에 닥친 동성애 문제를 극복/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석)
 
1. 김성로 목사의 메시지: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믿음 중의 하나는 “동성애는 타고난다”는 것입니다. 동성애자는 그 타고난 성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성애를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누구도 동성애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동성애의 선천성’은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사실임이 입증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념이나 세계관을 과학으로 포장하면 자세한 내용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무지한 대중에게도 쉽게 각인되고, 한번 각인된 생각을 교정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동성애의 선천성을 입증하는 ‘동성애 유전자’가 발견되었다는 연구는 이미 오래 전에 반박되었지만, 사람들의 신념은 아직도 굳건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어떤 이에게는 자유를 줄지 몰라도 어떤 이에게는 커다란 절망을 줍니다. 다음은 동성애로 고민하다 우리 교회를 찾게 된 한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재미동포로서 미국 오리건 주에서 3년 연속 최고 골프선수로 선정될 정도로 유능한 골프선수였던 이 자매는 동성애로 인한 고민을 가지고 우리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녀는 언제부턴가 경기에 나가면 좋아하는 여자 생각에 빠져 집중력을 잃고 결국, 우울증, 강박증으로 정신과 진단까지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합에서 만난 여자와 동성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성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며 갈등하던 어느 날, 어떤 과학자가 “동성애 유전자가 있다”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나는 동성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예배 중에 갑자기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자신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이 너무 확실해지면서, 유전자로 인해 동성애자로 태어나게 한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을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벽하게 만드셨다는 강한 확신이 갖게 됐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지금까지 동성애자로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유전자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드디어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며, 동성애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주장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자매와 같이 절망하고 자신의 삶을 선천적인 동성애자로 몰아갈지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동성애는 과학이 아니라, 신념과 세계관일 뿐입니다. 그리고 결국, 동성애 싸움은 생각싸움입니다. 갑자기 여자가 여자를 향해 성적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은 유전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 생각의 근원을 정확히 알려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지배하기 위해 먼저 생각을 넣어주고(요13:2) 나중엔 그 몸을 점령해 버립니다.(요13:27) 그래서 하나님은 잠언 4장 23절에서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말씀하시면서 생각과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앞으로도 동성애에 대한 과학적 근거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주인되어 제멋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동성애 뿐만 아니라, 소아성애, 다부다처, 근친상간, 동물과의 성교 등등. 그보다 더욱 악한 생각들에 대한 미혹은 끊임없이 이어질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싸움의 열쇠는 복음에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우리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하고,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 부활이란 놀라운 증거를 주신 예수님의 말씀만이 진리라는 사실을 확증하는 순간, 그 어떤 생각 싸움에서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인되어 살던 삶을 회개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란 사실을 고백하고 모셔 들이는, 이 단순한 복음만으로 동성애가 난무하는 이 세상에서 나와 우리의 자녀들을 분명하게 지킬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김성로 목사 춘천한마음교회 / 한국교회 동성애대책위원회 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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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활 복음"으로 변화된 간증들, 그 실제 사례 보기  

[ 한마음 간증시리즈 ] 선우정 자매의 자녀 '열정양육' 수기
http://www.hmuchurch.com/xe/chfaith/1879712

우정이 아닌 애정이었던 동성애의 쾌락에 빠져 -오혜진
http://www.hmuchurch.com/xe/chfaith/1834053

[ 한마음 간증시리즈 ] 이상미 자매 TV중독 극복 신앙수기
http://www.hmuchurch.com/xe/chfaith/1857344

소문난 효자 교장선생님… 제사와 고사도 폐지해 -정연기
http://www.hmuchurch.com/xe/chfaith/1834149

장애도 춤추게 하는 하늘 언어의 신비로운 능력 -조화영
http://www.hmuchurch.com/xe/chfaith/1834132

이 외에 여러 간증 보기
http://www.hmuchurch.com/xe/chfaith

좀 더 성경적인 균형을 갖춘 제자 훈련 정립 시급


1980년대 이후 제자 훈련이 한국교회의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파라처치의 제자 훈련을 교회에 성공적으로 적용한 대표적인 사역자는 옥한흠 목사일 것이다. 옥한흠 목사는 파라처치 훈련 프로그램들의 약점인 교회론을 균형 있게 강조하여, 약점을 극복하고 제자 훈련을 성공적으로 목회 사역에 접목하게 되었다.


그런데 현 시점에서 바라볼 때, 제자 훈련이 기여한 부분 못지않게 보완해야 할 점도 많음을 깨닫게 된다. 특히 제자 훈련이 추구하는 '온전한 사람', 즉 '작은 예수'를 닮고자 하는 시도에 상당한 불균형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한국교회에서 실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제자 훈련은 '영성 훈련'과 '사역 훈련'에 있어서 상당히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 옥한흠 목사의 제자 훈련, 김성곤 목사의 제자 훈련, 두란노 일대일 제자 양육, 네비게이토, CCC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제자 훈련 프로그램이 복음, 성령 충만, 기도, 말씀, 순종, 자기부정, 그리스도 중심, 믿음, 사랑, 고난 등 제자 훈련의 영성에 필요한 요소들을 골고루 강조하고 있다. 사역의 능력도 예수님의 3대 사역을 본받아 전도, 양육, 제자 훈련, 리더십 훈련, 나눔과 봉사 등을 대체로 균형 있게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아래 도표에서 보여 주고 있듯이, '도덕성'이나 '거룩한 지성' 개발에는 현저한 한계가 있음을 보게 된다. 현재 한국교회의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은 바로 이런 불균형의 결과가 아닌가 우려가 된다.


성도를 온전케 하는 것이 제자 훈련의 목표


한국교회에서 누구보다 그리스도인의 인격적인 성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친 사람은 옥한흠 목사일 것이다. 필자가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온전함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은 그의 영향을 힘입은 바가 크다. 그가 미주에서 실행하는 CAL 세미나에 참석하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먼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본받는 자여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그의 입에 달린 구호는 그리스도인은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작은 예수로서의 인격과 삶을 구비한 자로 만드는 것을 제자 훈련의 목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옥한흠 목사 자신의 말을 들어 보자.

그러면 제자 훈련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본받는 신자의 자아상을 확립하는 것이다. 예수처럼 되고 예수처럼 살기를 원하는 신앙인으로 만드는 데 있다. 이것이 가장 정확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1)

옥한흠 목사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인격적인 면"과 "사역적인 면"에 있어서 예수님을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밝힌다. 특히 옥한흠 목사가 힘주어 강조한 점은 예수님의 사역을 본받기에 앞서서 예수님의 인격을 본받아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그의 말을 들어 보자.

그래서 제자 훈련은 무엇보다 사람을 바꾸어 놓는 작업이 되어야 한다. 말씀과 성령의 감화를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고 온전한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딤후 3:17).2)

이렇게 인격적으로 온전한 사람을 만든 이후에 예수님의 3대 사역을 본받는 소명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래서 제자 훈련은 인격적으로 구비된 자를 만든 이후에 예수님처럼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를 가르치고 사랑의 치료자로 세우는 과정으로 보았다.3) 옥한흠 목사의 말을 더 들어 보자.

온전케 하는 과정을 어느 정도 그치지 않은 사람에게 봉사의 일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 주님의 명령인데 우리는 사정이 급하다는 구실을 내세우며 힘이 덜 드는 지름길을 택하고 있다. 그 결과 한국교회가 어떻게 되고 있는가? 누구 때문에 목회의 생명이 질식당하고 있으며 무엇 때문에 교회 안에 쓴 뿌리들이 자라고 있는가? 성도를 온전케 하기 전에 일부터 먼저 시킨 우리 목회자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다.4)

옥한흠 목사가 힘주어 강조하는 바는 성도를 먼저 온전하게 한 이후에 사역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옥한흠 목사는 에베소서 4장 11-12절에 근거해 성도들에게 일을 시키기 전에 반드시 성도를 온전하게 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한다. 


옥한흠 목사가 이렇게 제자 훈련을 외침으로 말미암아 제자 훈련이란 목회 철학이 대한민국 땅에 정착되도록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과거에는 단순한 성경 공부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교회들이 많았는데, 제자 훈련을 도입함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진정한 신앙 교육이 많은 교회에서 이루어졌다.


옥한흠 목사 자신은 제자 훈련을 '교육'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을 싫어할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이 보이신 3대 사역의 원리 관점에서 본다면 이는 분명히 예수님의 '가르침'의 사역의 연속임을 부정할 수 없다. 예수님은 '가르침'이란 방법으로 12제자를 제자도를 겸비한 제자로 만들었다. 제자 훈련도 가르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필자가 교육이란 말을 사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제자 훈련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훌륭한 교육을 받아 그리스도의 제자로 구비된 수많은 성도가 있기 때문이다. 제자 훈련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교회 교육 자체를 얕보거나 열등하게 여겨서 안 될 것이다.


필자는 옥한흠 목사 주장에 한편으로 동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현재 옥한흠 목사의 제자 훈련 교재 자체와 열매를 볼 때 그 방식이 성도를 온전케 하는 일에 얼마나 성공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져 본다. 이는 옥한흠 목사의 제자 훈련 사역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 훈련 방식에서 좀 더 성경적인 접근을 하자는 취지에서이다. 한국교회에 제자 훈련을 접목한 제1세대에 해당되는 옥한흠 목사의 제자 훈련 방법 중에서 제2세대에 와서 좀 더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완이 필요한 부분을 보완하자는 말이다.


제자 훈련 목적은 분명하지만 표적은 분명치 않은 현실


활을 쏘는 궁수가 과녁을 정확히 조준하지 않고는 표적을 정확히 맞출 수 없듯이, 제자 훈련의 목적은 정확히 명시하고 있으나 그 목적을 이루는 표적이 분명치 않으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아래 도표가 보여 주듯이 옥한흠 목사의 제자 훈련의 약점은 옥 목사 자신이 그렇게도 강조했던 '예수님의 인격을 구비한 자'로 만드는 훈련 프로그램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옥한흠 목사의 제자 훈련은 너무 신학 교리 중심으로 짜인 교재로 구성된 것이 문제점이다. 신학 교리 공부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신학 교리는 성경 공부 시간이나 혹은 성경 교리반과 같은 별도의 클래스를 만들어 교육할 수 있다. 정말 인격적인 훈련을 원한다면 그리스도의 영성과 사역과 비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체취가 묻어나는 그리스도의 덕성과 거룩한 지성을 본받기 위해서 씨름하는 산실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오늘날 제자 훈련의 문제는 '도덕성'과 '거룩한 지성' 훈련의 빈약 때문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문제는 '덕성', 즉 '윤리성'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한 주가 멀다 하고 터지는 성직자들과 사회 저명 기독교인들의 문제가 주로 '도덕성'의 문제가 아닌가? 그러면 제자 훈련을 지도하는 목회자들은 괜찮은가? 내 생각에는 별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떤 사람은 일반 목회자들의 윤리성도 못 따라가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현재 제자 훈련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드러난 것이 아니겠는가?


옥한흠 목사의 열정과 훈련 철학은 좋지만 훈련 방식에 심각한 결함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옥 목사의 제자 훈련 교재에는 성경이 가르치는 '덕성' 훈련 요소들이 너무나 빈약한 것이 치명적인 약점이다. 반면에 교리적인 내용으로 넘쳐 난다.


덕성 훈련에 강한 제자 훈련으로 거듭나야만이 진정 제자 훈련을 거친 자들의 말과 행실과 의향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사랑과 정절과 정의와 정직과 겸손과 온유와 섬김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모습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방금 말한 덕성의 요소들을 구체적으로 훈련하는 제자 훈련 프로그램이 얼마나 되는가? 아래에 도표를 보면 실망을 금할 수 없다.


그리고 '거룩한 지성'을 구비할 수 있는 훈련 항목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이는 옥 목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 제자 훈련 프로그램에서 이 부분이 가장 큰 취약점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교회에서 사역은 잘 하지만 세상 속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영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진정한 지혜자들을 찾아보기가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예수님께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마12:42; 눅11:31)고 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하고 있는가?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믿음과 성령으로 충만했을 뿐만 아니라 '지혜'가 충만한 자들(행6:3-5)이었음을 잊었는가? 

많은 제자 훈련 프로그램이 예수님 인격의 한쪽 면만 주로 보고 있지, 총체적인 관점에서 조명하지 못한다. 이 점이 가장 큰 약점으로 남아 있다. 이 글에서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정말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인격의 총체적인 면을 균형 있게 보고 따르는 균형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울 수 있도록 제자 훈련의 표적(goal)을 분명하게 하자는 점이다.


제자 훈련은 결코 과녁을 잃어버린 채 날아가는 화살이 되어서는 안 된다. 표적을 잃어버린 화살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서운 화살이 된다. 인격적 불균형을 이룬 그리스도의 제자는 결국 그의 약점 때문에 인격 전체가 균형을 잃고 사고를 일으킬 수 있는 위험 인물이 될 수 있다.


## 이 분석을 위해서 사용한 교재는 다음과 같다.


각 저자나 기관의 대표적인 저서를 선별하여 사용하였다.

* 옥한흠: 『평신도를 깨운다: 제자 훈련 교재』 (서울: 두란노서원, 1991). 『평신도를 깨운다: 사역 훈련 교재』 (개정판; 서울: 두란노서원, 1991).
* 김성곤: 『열린 모임 비전』 (부산: 두날개, 2007). 『열린 모임 실행 I』 (부산: 두날개, 2007). 『열린모임 실행 II』 (부산: 두날개, 2007). 『양육의 기쁨』 (부산: 두날개, 2007). 『제자의 삶』 (부산: 두날개, 2007). 『군사의 삶 I』 (부산: 두날개, 2007). 『군사의 삶 II』 (부산: 두날개, 2007). 『재생산의 삶 I』 (부산: 두날개, 2007). 『재생산의 삶 II』 (부산: 두날개, 2007).
* 두란노: 『일대일 제자 양육 성경 공부』 (서울: 두란노, 2009).
* 네비게이토: 『그리스도인의 생활 연구』 (SCL) 1~6권 (서울: 네비게이토, 1991).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 (DFD) 1~6권 (서울: 네비게이토, 2005). 『제자 훈련 과정』 (64주 과정) 1~10권 (서울: 네비게이토, 1991).
* 이영숙: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성품』 (서울: 두란노, 2007). 『이영숙 박사의 한국형 12성품교육론』 (서울: 좋은나무성품학교, 2011). 이영숙·필립 핏치 빈센트 공저, 『인성을 가르치는 학교 만들기』 (서울: 좋은나무성품학교, 2014).


## 각종 제자 훈련 및 성품 훈련 프로그램의 비교 분석표


1) 덕성(도덕성/윤리성)

   


이 도표가 보여 주듯이 대부분의 제자 훈련은 덕성의 요소들이 상당히 빈약하다. 필자가 성경적 관점에서 제안하고 있는 덕성의 항목들 중에 옥한흠 목사는 7가지를 다루고 있고, 김성곤 목사와 두란노 양육 교재는 단 1가지를 다루고 있고, 네비게이토는 6가지를 다루고 있다. 이영숙 박사의 성품론이 이 분야를 가장 많이 다루고 있는데 8가지를 다루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빈약한 수준이다. 


옥한흠 목사는 긍휼, 정의, 경건, 겸손, 온유, 정직, 인내, 절제, 화목, 양선 등 중요한 덕목들을 빠뜨리고 있다. 제자 훈련 후에 정의롭지 못하거나 겸손하지 않거나 인내심이 부족하거나 절제하지 못하거나 정직하지 못한 제자가 양산된다고 생각하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제자라고 할 수 있을까? 이런 중요한 인격적인 요소들이 빠진 제자를 온전한 인격을 구비한 자라고 할 수 있을까?


김성곤 목사의 제자 훈련은 도덕성 훈련에 치명적 약점 내포


두란노의 일대일 양육은 기초 양육이라는 성격상 덕성을 다루지 못하는 약점을 내재하고 있다고 변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내포한 제자 훈련은 김성곤 목사의 제자 훈련 프로그램이다. 그의 수많은 교재들과 훈련 과정들을 샅샅이 뒤져도 인격적인 요소는 단 한 가지, 그것도 사역과 관련하여 '섬김'을 다루고 있을 뿐 인격적인 항목들은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 단지 '인격'이라는 넓은 범주로, 그것도 섬김 외에 단 1회 다룰 뿐이다.


필자가 김성곤 목사의 훈련을 분석하면서 받은 느낌은 이렇다. 성도들을 사역을 위한 기능인으로 훈련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성도들을 온전한 자로 세우는 데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이런 제자 훈련을 받은 제자는 사역에는 열심일지 모르지만 인격적인 불균형을 이루어 언젠가는 훈련 사역 자체가 좌초할 수밖에 없는 성경과 거리가 먼 제자 훈련이 될 수 있다.


네비게이토는 사역의 능력을 체계적으로 배양하는 강점이 있는 훈련 사역이다. 어떤 의미에서 20세기 이후에 제자 훈련이 교회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제자 훈련의 가치를 재발견한 단체가 네비게이토이다. 언어 훈련, 이웃 사랑, 정절, 겸손, 섬김, 정직과 같은 중요한 덕성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중요한 덕목들이 빠져 있다. 행실, 마음(생각), 긍휼, 정의, 경건, 온유, 충성, 인내, 절제, 화목, 양선과 같은 덕목들이 빠져 있다.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인격을 추구한다면 이런 덕성들이 반드시 갖추어져야 할 것이다.

이영숙 박사의 덕성 항목들은 교회의 제자 훈련 프로그램이 아니라 세속 학교에 적용한 성품훈련 프로그램이다. 이영숙 박사의 '한국형 12성품 교육론'은 나름대로 성품 개발을 위한 강점이 있다.5) 그럼에도 필자가 성경에서 발견한 기본적인 '덕성' 17가지 항목 중에서 그는 8가지만 다루고 있다. 경청, 긍정적인 태도, 인지(생각), 배려, 책임감, 인내, 절제, 정직 등이다.


물론 필자가 사용하는 용어와는 조금 차이가 있는 용어도 있다. 그러나 유사한 개념까지 합쳐서 따질 때 8가지 개념을 찾을 수 있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덕성 훈련에 필요한 정말 중요한 항목들이 빠진 느낌이다. 기독교 최고 덕목이요 예수님의 최고 덕목인 겸손과 온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영숙 박사는 배려라는 개념을 사용하지만 기독교의 사랑과 긍휼이라는 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다. 정의, 경건, 섬김, 정절, 화목, 양선 등의 개념은 어디에 있는가? 정말 중요한 성경적 덕목들이 빠진 느낌이다.


그런데 이영숙 박사의 강점은 세속 교육을 위해서 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한 점이다. '경청'이라는 덕성은 대화에 중요한 속성 중에 하나이다. 그는 '말'이라는 전체를 다루지 않고 먼저 경청하는 자세를 다룸으로, 대화자와 래포(rapport)를 형성할 수 있도록 접근하고 있다. '긍정적 태도'도 행실의 긍정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도록 용어 선별을 잘한 것 같다. '생각'도 12성품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그의 교육의 핵심적인 내용이 생각, 감정,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성품 훈련의 배경에 깔려 있는 좋은 접근이다.


'배려'라는 용어도 필자의 덕성 항목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는 이웃 사랑과 긍휼과 섬김이 조합된 개념이다. 이영숙 박사는 '배려'를 "나와 다른 사람 그리고 환경에 대하여 사랑과 관심을 갖고 잘 관찰하여 보살펴 주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6) 필자는 편의를 위해서 배려를 '이웃 사랑' 항목에 포함시켰다. 

'책임감'이란 항목도 필자의 분류에는 이름대로 나타나지 않지만 성경의 '충성'이란 말에 가장 가까운 개념이다. 성경적 충성이란 개념은 맡은 바 직임을 충실히 감당하는 일종의 책임감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계 2:10). 이영숙 박사의 이런 좋은 기여에도, 여전히 중요한 성격적인 덕목들이 빠져 있다. 정절, 정의, 경건, 겸손, 온유, 화목, 양선과 같은 항목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것이 빠진 성품 교육에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한다. 정의롭지 않거나 겸손하지 않거나 정절이 없는 바람둥이는 올바른 인격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2) 거룩한 지성


   


제자 훈련의 불모지와 같은 인격적 요소가 바로 '거룩한 지성'이란 요소이다. 거룩한 지성을 대변하는 성경적인 개념이 '지혜'라는 말이다. 지혜 밑에 따라오는 인격적인 요소들은 넓게 말하면 지혜의 각각 다른 측면들을 묘사하고 있는 개념들이다. 잠언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지혜라는 말과 이들 용어들이 때로는 혼용되어 사용되는 경우를 보게 될 것이다. 이는 곧 이런 인격적 속성들이 지혜라는 넓은 개념의 하위개념임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을 뿐만 아니라 지혜가 충만한 자들


그런데 어느 제자 훈련도 거룩한 지성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 않다. 전인격적인 훈련을 해야 하는 제자 훈련에서 인간의 전인격적인 요소 중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지성'에 대해서 다루지 않는 것이 너무나 이상하다. 사도행전에는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믿음과 성령이 충만했을 뿐만 아니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이었다고 밝히고 있지 않은가(행 6:3-5)?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란 '올바른 관계의 기술'이다. 첫째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기술이고, 둘째는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의 기술이고, 셋째는 세상과의 올바른 관계의 기술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성경의 지혜와 세상 지혜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성경은 지혜의 근본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데 두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기술이 지혜의 가장 중요한 토대란 사실을 밝힌다.


잠언은 또한 수많은 인간관계를 지혜의 관점에서 가르친다. 부모와의 관계, 부부 간의 관계, 자녀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고용인과 피고용인과의 관계,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 등을 직접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잠언의 약 1/3은 말에 대한 가르침인데, 말은 결국 인간관계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잠언이 자주 가르치는 주제들인 교만과 겸손, 거짓과 진실, 미움과 사랑, 불의와 공의, 게으름과 부지런함 등 수많은 주제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주제들이다. 이 모든 주제들을 지혜의 관점에서 가르친다. 어리석은 자의 길은 교만, 거짓, 미움, 불의, 게으름의 길이다. 지혜자의 길은 겸손, 진실, 사랑, 공의, 부지런함의 길이다. 이렇게 보면 거룩한 지성은 어떤 의미에서 덕성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정말 덕성을 올바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거룩한 지성이 반드시 구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거룩한 지성은 도덕성과 밀접하게 연결


성경의 지혜라는 개념 속에 인간관계의 기술의 핵심들이 들어 있기 때문에 성경이 가르치는 거룩한 지성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인격적 훈련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빠뜨린 것과 같다. 예수님은 제자도를 훈련하면서 말과 행위의 중요성을 가르치셨다. 그리고 말과 행위의 근원은 바로 인간의 마음에 달렸다는 사실을 가르쳤다(마 12:35).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먹어야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배우겠는가? 바로 구약의 지혜서들이 그 비법들을 가르치고 있다. 인격 훈련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말의 기술은 지혜서에서 그 방법을 배워야 한다. 잠언을 펴 보라. 얼마나 말에 대해서 많이 가르치고 있는가?

의인의 입은 생명의 샘이라도 악인의 입은 독을 머금었느니라. (잠 10:11)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0:19)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어 죽느니라. (잠 10:21)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패역을 말하느니라. (잠 10:32)

잠언 10장에 나오는 말에 대한 말씀을 몇 가지만 뽑은 것이다. 잠언 10장에는 그 외에도 말에 대한 말씀이 여럿이 있다. 얼마나 말에 대해서 다양하게 가르치는가? 이런 실제적인 말하는 기술을 지혜의 관점에서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지혜는 덕성의 함양을 위해서도 반드시 가르쳐야 중요한 주제이다.


인간관계의 기술은 지혜서를 통해 배우라


오늘날 대한민국 교인들의 많은 문제는 실제적인 관계의 기술을 잘 모르는 데서 모든 인간관계의 문제가 생긴다고 본다. 이는 지혜서를 읽으면서 구체적인 방법들을 훈련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얼마나 자주 기도, 말씀, 성경 공부, 제자 훈련, 성령 충만, 사역 등에 대해서는 강조를 하고 있는가?


반면에 우리가 사람들과 관계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즉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에 대해서 얼마나 들었는가? 심히 빈약한 실정이다. 만약 목회자라면 자신이 얼마나 지혜서를 설교했는지 한번 검토해 보라. 아마 상당수 목회자가 지혜서에 대한 가르침이 부족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위의 제자 훈련 프로그램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거룩한 지성은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잠언은 세상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다양한 지혜들을 가르친다. 성경이 이미 창의성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잠 11:14)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잠 15:22)
너는 전략으로 싸우라 승리는 지략이 많음에 있느니라. (잠 24:6)

여기 "지략"이란 말에 사용된 히브리어 어근은 "야아츠"이다. '지략'은 이들 맥락 속에서 칼(Qal)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아이디어를 고안해 내는 사람, 지략가, 고문, 상담자, 조언자'라는 뜻으로 쓰인다.7) 아이디어를 고안하는 것은 창의성과 매우 가까운 용어이다. 나라의 백성들이 평안을 누리는 것은 얼마나 창의성이 많으냐에 달렸다는 말이다(잠 11:14).


잠언 15:22에 나오는 경영은 '계획'이라는 뜻인데, 어떤 계획의 성취도 창의성에 달렸다는 말이다. 전쟁에서 싸울 때에도 창의적인 전략을 갖고 싸우라. 그래야 전쟁에서 이긴다는 말이다(잠 24:6).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려면 성경의 지혜서에서 거룩한 지혜를 배워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감당할 수 있고, 세상 속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 많은 성도가 신앙생활은 잘하는데, 세상 속에서 무기력하다. 소위 착하기만 한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가?


주님은 제자들에게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동시에 뱀처럼 지혜로운 자가 되라"(마10:16)고 가르치지 않았는가? 우리는 한편으로 비둘기 같은 도덕적 순결성을 가져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뱀의 지혜를 능가하는 지혜를 가져야 험난한 세상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탁월한 성도들이 되지 않겠는가?


제자 훈련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거룩한 지성을 이영숙 박사는 3가지를 다루고 있다. 큰 범주로 분별력을 다루고 있고 그 하위 범주 안에 지혜와 창의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영숙 박사의 지혜에 대한 정의는 성경적인 정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는 지혜를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사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하고 있다.8) 이는 앞에서 말한 성경적 지혜관과 상당히 다르다.


이영숙 박사는 3가지를 다루었지만, 아직 지혜의 중요한 양상들인 지식, 명철, 총명, 슬기, 판단력, 신중함과 같은 요소들이 빠져 있다. 이영숙 박사가 세상 교육에 적용한 지혜의 항목들을 고려하면, 성도들이 현재대로 제자 훈련을 받는다면 세상 교육을 받은 사람보다 지성에 있어서 뒤지지 않겠는가? 제자 훈련은 거룩한 지성의 훈련이 반드시 인격 훈련에 포함되도록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김진규 / 백석대학교 구약학 교수


각주

1) 옥한흠,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 (서울: 두란노, 1998), 194.
2) 옥한흠,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 194.
3) 옥한흠,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 195.
4) 옥한흠,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 196.
5) 이영숙, 『이영숙 박사의 한국형 12성품 교육론』 (서울: 좋은나무성품학교, 2011).
6) 이영숙, 『이영숙 박사의 한국형 12성품 교육론』, 137.
7) "야아츠," BDB, 419 (#3289).
8) 이영숙, 『이영숙 박사의 한국형 12성품 교육론』, 100.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03686




Jou.jpg


      조용필의 숨겨진 일화가 공개돼 네티즌을 감동케 하고 있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엔 조용필 명곡인 '비련'에 얽힌 일화가 공개됐다.

      공개된 일화는 조용필 전 매니저인 최동규씨가 과거
      조용필 4집 발매 당시 인터뷰했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최동규씨에 따르면, 조용필이 과거 4집 발매 후
      한창 바쁠 때 한 시골의 요양병원 원장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병원 원장은 자신의 병원에 입원 중인 14세의 지체장애 여자 아이가
      조용필 4집에 수록된 '비련'을 듣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 환자는 입원 8년만에 처음으로 감정을 내보인 것이라고 한다.

      이어 병원 원장은 이 소녀의 보호자로부터 돈은 원하는만큼 줄테니
      조용필이 직접 이 소녀에게 '비련'을 불러줄 수 있겠느냐는 문의를
      받았고, 그게 어렵다면 병원을 방문하여 얼굴이라도 직접
      보여줄 수 없겠느냐는 부탁이었다고 한다.

      최동규 씨는 "당시 조용필이가 캬바레 무대에서 한 곡 부르면
      지금 돈으로 3,000만원~4,000만원 정도를 받았다"며
      "그런데 조용필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피던 담배를 바로
      툭 끄더니 병원으로 출발하자"고 했단다.

      "그날 행사가 4개였었는데 모두 취소하고 위약금을
      물어주고 시골 병원으로 갔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병원 사람들이 놀란 것은 당연했다.

      조용필은 병원에 가자마자 사연 속의 소녀를 찾았다.
      소녀는 아무 표정도 없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기적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조용필이 소녀의 손을 잡고 '비련'을 부르기 시작하자...
      소녀가 펑펑 울기 시작했고... 이 소녀의 부모도 울었다.

      조용필이 여자애를 안아주며 사인한 CD를 건네주고서
      작별하고 차에 오르는데... 여자 아이의 엄마가 따라오며
      "돈을 어디로, 얼마나 보내드리면 될까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용필은

      "따님이 오늘 흘린 눈물이 제가 평생 벌었던,
      또 앞으로 벌게 될 돈보다 더 비쌉니다."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최동규 씨는
      "용필이가 그때 한 말이
      아직도 제 기억에 생생하게 남는다고..."
      되뇌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이 작고 귀여운 프랑스 여자아이 '티피'의

고향은 야생동물의 낙원이라 불리는 아프리카
나미비아 공화국의 드넓은 초원입니다.

야생동물 사진작가로 활동하는
부모님 때문에 티피는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죠.

그러나 이곳은 인적도 드물고
육아시설도 변변치 못한 오지인데요.
당연히 티피는 함께 뛰어놀 소꿉친구도
가지고 다닐 장난감도
갖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 티피의 유일한 놀이터는 야생이었습니다.
야생이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 자라난 티피는
남들과 다른 조금은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됩니다.
바로 야생동물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한편 티피는 10년간의 아프리카 생활을
끝으로 프랑스 파리로 돌아와
학교생활을 시작했는데 적응이 힘들어
개인교습으로 기초교육을
마쳤다고 합니다.

아마도 아프리카와는
너무나도 다른 도시에서의
생활이 꽤나 힘들었을 겁니다.

현재 티피는 파리에서 영화를 전공 중인
대학생이며, 졸업 후에는 나미비아로 돌아가
그곳의 외교관으로 활동하길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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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뿐인가?

 

임경근 목사

(다우리교회 담임목사)

구원의 여러 길?

 

복잡하고 바쁜 도시를 떠나 시골에 들어가 자연과 함께 살면서 많은 현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던졌던 스코트와 헬렌 니어링 미국인 부부가 있다. [조화로운 삶](보리),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라는 책도 써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에 의해 삶을 조직하고 결정해 삶을 역동적으로 자주적으로 이끌어 멋진 삶을 일구었다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받았다.

과연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멋지게 살아내고 인간의 생사고락을 스스로 해결하며 자생자구(自生自救)할 수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종교도 스스로 구원을 추구하고 스스로 구원에 이른다고 믿는다.

기독교 안에서도 인간은 타락의 원죄를 조금도 유전 받지 않았다고 믿는 펠라기우스 같은 이단도 있지만, 타락과 원죄의 영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 정도가 미미해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등 많은 일을 하지만, 우리 스스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구원하는 일을 해야만 된다고 가르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많다. 구원의 근거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아니고 인간 스스로의 기여가 필요하다고 믿는 교리 말이다.

 

 

 

도르트 신조가 말하는 본성의 빛

 

 

17세기 초 네덜란드 개혁교회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 때문에 온 교회가 도르트에 모여 성경을 연구하고 토론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주제가 공교회적인 성격이 있기에 유럽의 자매 교회에게 연락해 신학자들을 초청했다. 네덜란드라는 나라에서 제기된 도전이었지만 세계 여러 교회에서도 제기 될 수 있는 공교회적인 문제였다. 그 내용을 1618-19년에 정리한 것이 도르트 신조이다. 그 가운데 세 번째 네 번째 교리 4항에서 본성의 빛을 다루고 있는데 그 내용을 참고로 위의 질문에 대답해 보자.


 

 

4항 본성의 빛의 무능함

 

그러나 사람에게는 타락 후에도 본성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하나님과 자연의 사물들과 선과 악의 차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덕과 외적 질서에 열의를 약간 표한다. 하지만 결코, 이 본성의 빛은 사람을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지식과 참된 회심으로 이끌지 못한다. 심지어 사람은 이 본성의 빛을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일들에 조차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 빛을 여러 방법으로 완전히 오염시키고 불의로 막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게 된다.

 

 

 


본성의 빛의 존재

그러나 사람에게는 타락 후에도 본성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하나님과 자연의 사물들과 선과 악의 차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덕과 외적 질서에 열의를 약간 표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일반은총이라는 말로 도르트 신학자들이 말하는 본성의 빛을 표현한다. 여기까지는 같다. 그런데 전자는 일반은총’(혹은 본성의 빛)으로 구원 자체를 점진적으로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비해 후자는 불가능하다고 성경을 기초로 바르게 정리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뭐라고 주장하는지 보자. “부패한 자연인이 일반 은총(아르미니우스주의자는 이 용어로 본성의 빛을 말함)이나, 타락 이후에도 남겨진 은사들을 아주 잘 사용할 수 있으며, 이를 선하게 사용함으로 더 큰 은혜 즉 복음적 은혜 또는 구원의 은혜와 구원 자체를 점진적으로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편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나타내실 준비를 하고 계시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회심에 필요한 방편들을 충분히 그리고 효과적으로 공급해 주시기 때문이다.”(오류 5)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본성의 빛을 그리스도의 은혜와 대등하게 취급한다. 두 가지를 근본적 차이로 보지 않고 정도의 차이로만 본다. 그들 중 어떤 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첫째, 가장 부패한 사람, 둘째, 덜 부패한 사람, 셋째, 특별히 알맞은 사람이다.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16세기 중반 네덜란드에서 작성된 벨기에 신앙고백서(1561)는 이에 관하여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던 모든 탁월한 은사들을 상실하고 다만 그 중에서, 인간이 변명치 못하도록 하기에 충분한 약간의 흔적만 남았다.” 이렇게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배가 파선하여 겨우 나무판자만 남아 있는 상태와 같다. 그 넓은 바다에 나무판자 조각이 떠돌아다닐 뿐이다.

로마서 2:14은 이렇게 말한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불신자도 신실하고 정직하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는다. 본성의 빛으로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일 뿐이다. 불신자도 신자처럼 같은 봉사와 선을 행할 수 있지만, 그 원리가 다르다. 신자는 율법을 사랑의 원리로 하나님을 위해 행한다. 물론 외식하는 자들도 사랑으로 율법을 행할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본성의 빛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본성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아담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말은 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범위에 관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죄의 오염은 영혼, 마음, 정신 등 모든 부분으로 퍼졌다. 전적부패로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형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은 타락했지만, 여전히 사람이고, 희미하게 지식과 의와 거룩함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사람에게는 타락 후에도 본성의 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도르트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로 구별했다. 넓은 의미의 지식과 의와 거룩함은 남아 있지만, 좁은 의미의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은 사라진 것으로 본다. 이것이 희미함의 의미이다. 사람이 사고의 능력이 있지만, 그 능력은 죄 된 것으로 사용한다.

 

로마교회는 타락의 범위가 초자연적 은사로 본다. 인간은 타락 이후에도 자연적 은사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보고 이성적 사고, 선과 악의 구별과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어 초자연적 은사를 받을 능력과 준비를 할 수 있다고 본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일반은총을 그리스도의 특별은총과 대등한 위치에 놓는다. 이것이 그들의 가장 큰 잘못이다. 이들은 모두 반쪽(semi)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도르트 신학자들은 타락한 후에도 남아 있는 본성의 빛이란 인간이 그것으로 뭔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인간은 그 본성의 빛을 자신의 유익과 영광을 위하여 사용할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을 인간 그대로 내버려 두신 것(본성의 빛을 희미하게 남겨 두신 것)이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그 본성의 빛은 우리를 구원할 그 어떤 능력도 없음을 알아야 한다.

 

 

 

본성의 빛의 사용

“......하지만 결코, 이 본성의 빛은 사람을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지식과 참된 회심으로 이끌지 못한다. 심지어 사람은 이 본성의 빛을 자연적이고 사회적인 일들에조차 바르게 사용하지 못한다......”

 

 

 

인간에게 본성의 빛’, 하나님의 형상이 희미하게 남아 있어 하나님과 자연의 사물들과 선과 악의 차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덕과 외적 질서에 열의를 약간 표한다. 그렇다. 인간은 본성의 빛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소유한 본성의 빛이 자신의 구원에 얼마나 될까?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하다.

도르트 신학자들은 이렇게 정리한다. “하지만 결코, 이 본성의 빛은 사람을 하나님께 대한 구원의 지식과 참된 회심으로 이끌지 못한다.” 인간이 소유한 본성의 빛은 엉망진창이고 비뚤어져 있을 뿐이다. 인간 스스로가 만든 자신의 기준을 사용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자연과 사회에 관한 일들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불신자들 가운데 생각보다 잘 하는 사람들도 본다. 그런 경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닐까?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이 아니라, 이타적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지, 이방인에게 칭찬할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이 제아무리 멋진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종교적 선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리석고 부끄러운 것뿐이다.

 

 

본성의 빛을 가진 자연인은 영적인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할 수 없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참 회심은 본성과 이성의 빛으로는 불가능하다. 인간 문명으로도 불가능하다. 심리학적인 효과로도 불가능하다. 참된 회심은 오직 성령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일하심으로만 가능하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16:6-7)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이 기록하여(31:33)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44:3)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5)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31:18)

 

 

 

본성의 빛의 결과

“......게다가 이 빛을 여러 방법으로 완전히 오염시키고 불의로 막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이 타락 후에도 남겨 두신 본성의 빛을 잘 사용해서 구원에 이를까? 그렇지 않다. 사람은 이 빛을 여러 방법으로 완전히 오염시키고 불의로 막는. 이제 우리는 본성의 빛의 실제를 만나게 된다. 물론 인간 속에 남아 있는 본성의 빛은 선하다.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문제가 아니다. 단지 그것이 희미할 뿐이다.

그런데 자연인은 이 본성의 빛을 오용한다. 불신자의 학문도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 본성의 빛을 사람들이 오용하여 종교를 만들기도 한다. 불교나 유교나 도교가 그렇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사람을 신화화한다. 사탄 숭배자들도 있다.

 

사람 속에 있는 본성의 빛을 이용해서 악한 불량배가 고상한 철학자와 학자인 척 할 수도 있다. 적그리스도는 존경받는 사람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최고로 창조된 인간이 부패하면 가장 나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므로 본성의 빛은 뭔가 그 위에 집을 지을 수 있는 기초가 될 수 없다. ‘본성의 빛은 쓸모없게 되었고 희미해 졌다. 그래서 사람은 본성의 빛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떠나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며 아주 추악한 죄들에 빠지고 만다(1).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1:28) 그래서 사람은 무시무시한 죄를 짓는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1:32)

 

 

그러면 본성의 빛은 아무 것도 아니고 오히려 저주라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본성의 빛은 은혜이고 특권이다.

 

 

본성의 빛의 역할(목적)

“......사람은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게 된다.”

 

 

이제 본성의 빛을 남겨 두신 목적을 볼 수 있다. 사람에게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희미한 본성의 빛은 무슨 역할을 할까?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핑계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 심판 날에 저는 하나님이 계신 줄 몰랐어요!’라고 핑계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의 빛을 통해 하나님과 자연의 사물들과 선과 악의 차이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있으며 덕과 외적 질서에 열의를 약간 표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성의 빛은 사람이 변명할 수 없도록 만들 뿐이다.

 

 

 

오직 그리스도!

 

 

종교 개혁가들은 구원에 있어서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를 주장했다.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교리이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4:12)

 

 

성경 말씀에 의하면 구원에 있어 오직 그리스도가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그것을 믿고 의지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려 한다. 자신의 자유의지를 믿는다. 결국 자신의 자유를 바란다. 외부로부터의 하나님의 법을 거절하고 스스로(auto)가 법(norm)이 되는 자율적(autonomous) 인간이 되고 싶어 한다. 현대 철학도 자유이야 말로 구원이고 복이라고 말한다. 이런 생각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인류의 시조가 빠진 함정도 바로 하나님 혹은 하나님의 법으로부터의 자율이다. 첫 아담(고전 15:45)은 에덴동산 시험에서 하나님과 같이”(3:5) 되어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인간은 피조물로서 혼자 스스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비로소 삶의 의미가 있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불순종하게 되고 그것이 곧 죄이다.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인 예수님은 유대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3:17)이시지만 첫 아담처럼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며 승리하셨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스스로 자유하려 했지만, 마지막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셨다. 첫 아담이 실패한 것을 마지막 아담은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근거임을 믿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 구원의 튼튼한 반석이시다. 할렐루야!

 

 

 

 

http://www.reformedjr.com/

출처:영적분별/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내게 가르치소서..
        최송연 주여, 내게 가르치소서 캄캄한 밤하늘을 빛내되 오만하지 않은 별빛의 그 청아함을... 한여름 불볕 쏟아지는 들녘, 밟아도 밟아도 다시 돋아나는 저 들풀의 강인함과 서리서리 된서리 모진 바람 몰아치나 결코 움츠러들지 않는 대나무의 그 꿋꿋한 기상을...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인내와 사랑으로 참아내신 당신의 그 겸손하심마저도 ...
      ;

             

             

              내게 가르치소서..
                                 최송연

              주여,
              내게 가르치소서

              캄캄한
              밤하늘을 빛내되
              오만하지 않은
              별빛의 그 청아함을...

              한여름
              불볕 쏟아지는 들녘,
              밟아도 밟아도
              다시 돋아나는
              저 들풀의 강인함과

              서리서리 된서리
              모진 바람 몰아치나
              결코 움츠러들지 않는
              대나무의 그 꿋꿋한 기상을...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인내와 사랑으로 참아내신  
              당신의 그 겸손하심마저도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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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래 전 한 독자로부터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된 적이 있다.

                (무조건 성령 받으라는 게 뭐하라는 겁니까? 기도하고요? 부흥집회 참석하고요? 예수를 믿으면 저절로 성령 받게 된다면 수천 번도 더 받았을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심각할 수도 있는 문제를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성령이 저에게 임하셨다고 1초 만에 해결되는 간단한 문제였던겁니까? 제가 바보라서 그런지 제 믿음이 거짓인 것인지, 제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인지, 예수를 믿고도 여전합니다. 까칠한 제 성격을 바꾸자고 뭔짓인들 안 해봤겠습니까? 님은 저처럼 스스로에게, 남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고, 상처줌으로 인해 준 상처를 다시 돌려받는 악순환에 "주여 나를 죽여주세요"하고 기도해 봤나요?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에 절망합니다. 정말 해결방법이 있다면 명확하게 구체적으로 써주세요. 님의 글은 저같은 사람에게 비웃음으로 들릴 수도 있답니다.)

                그러고 둘러 보니 웹상으로 이곳저곳에서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참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이 되어 그 부분을 함께, ‘구체적으로’ 좀 다루되 신학적으로가 아닌, 성경에서 무엇이라 말씀하는가 하는 것을 좀 다루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다. 질문자님께도 긍정적 해답이 되고 우리에게도 다시금 좋은 깨달음이 되도록 성령님의 조명 하심을 간구해 보면서...

                1. 누가 과연 성도(saints)인가?:

                성도(saints)란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을 총칭하는 것이 아니다. 성도(saints)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로 믿고 마음에 받아들이는 사람을 지칭하며, 물(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그리스도의 영)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같고 다시 태어난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 백성이 된다는 원리이다. 사람의 영혼(spirit)이 다시 태어나는 현상을 가리켜 신학상 술어로는 ‘거듭남( born again), 중생(Regeneration)’이라고 한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한 번 육신 적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한 번만 태어나면 되는 것으로 알기에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자식 낳아 열심히 기르다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고, 죽으면 끝이라고 하는 허무한 생을 살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우리 믿는 사람은 분명히 다르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요 3: 6-7절 말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무슨 뜻인가? 육으로 난 것은 죽고 망하나 영으로 난 사람만이 영원한 삶을 살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영(spirit)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 그만큼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a.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사람이 거듭나는 것은 내 의지나 내 노력, 내 열심, 다시 말해서 질문자의 말씀대로, 기도를 많이 하고, 부흥회를 열심히 쫓아다닌다고 해서 거듭나는 것이 결코 아니란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며,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을 받는다는 뜻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은 곧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과 동일한 뜻이다. 성령은 어떤 특별한 은사 자들이나 신령한 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란 것이다.

                b. 내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먼저,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생각해 보아야 한다. 조건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는 것뿐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 12절 말씀)” 여기서 “영접”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심을 내 마음에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계 3: 20절 참조)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 9-10절 말씀).”

                c.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믿는데, 나는 왜 성령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많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부분이 바로, 내게는 왜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내가 무언가 의롭고 착한 일을 많이 해야만 된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성령 받은 상태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다.(엡 2: 10절 참조) 그럼에도, 우리가 행하는 선을 기준으로 성령 받은 사람의 기준척도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령님(Holy Spirit)은 누구신가? 성령님은 곧 성부, 성자의 영이시다. 때문에 내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나는 이미 성령 받은 사람인 것이다 (고전 3:16절 참조). 그러면, 나는 왜 느끼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 하심이 내 속에서 나타나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나의 자아, 고집, 아집, 이런 육신의 생각이 너무 강해서 내 속에 계신 성령을 거스리기 때문이다.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는 성령님께서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항상 함께 계시면서 내가 죄 앞에 무릎을 꿇고 쓰러질 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한없는 사랑으로 탄식하시며 간구 해 주고 계신 것이다. (롬8: 26-27절 참조)

                2. 거듭난 사람에게 나타나는 실재성(증거):

                a) 회개(悔改, Repentance)가 있게 된다. "회개는 죄로부터 떠나는 마음의 변화를 가리킨다. 그래서 회개는 지정의(知情意)의 세 가지 요소들을 가진다. ①회개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포함한다. 죄로부터 떠나려면 먼저 죄를 죄로 바르게 깨달아야 한다.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은 하나님의 율법(롬3:20)과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②회개는 죄에 대한 슬픔과 미움을 포함한다. 참된 회개는 상한 마음(시51:17)을 동반하는데, 사람이 참으로 죄를 미워하고 슬퍼하는 마음이 없이는 죄로부터 돌이킬 수 없다. ③회개는 죄로부터 돌이키는 의지적 결단 곧 죄의 청산을 포함한다. 회개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나캄’은 ‘후회하다’, ‘뉘우치다’는 뜻으로, ‘슈브’는 ‘돌아온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헬라어 ‘메타멜로마이’ 역시 ‘뉘우치다’는 뜻으로, ‘메타노이아’는 ‘돌아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 웨스트민스트 회개 중
                 
                b) 옛(육신적) 사람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전환(Conversion)된 여정이 시작된다. 마음으로 믿어지고 입으로 시인하며 생활로 증거된다. 내가 마음에 예수가 구세주임이 확실하게 믿어지고 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고 부르게 되는 것(롬 10: 9-19절 참조), 그 사실이 곧 성령 받은 증거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 3절).”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사람은 곧 성령 받은 사람이요, 구원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란 것이고, 따라서 성령님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며 따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 상태를 신학상 술어로 견인 (堅忍,(perseverance))이라고 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 6: 44절 말씀).”

                3. 성령의 충만을 내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방법:

                a. 그리스도의 말씀을 많이 읽는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이시다.(요1: 1절 참조)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는 사람은 그 사람 속에 그만큼 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하나님의 말씀 또한 능력이다. 이 능력의 말씀을 더 많이 소유한 사람이 더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이다. 더 많은 능력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사람은 더 큰 일을 해 낼 수 있다….이것이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하면 믿어지겠는가? 그러나 사실이 그러하다.

                b. 그리스도의 말씀에 전적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바로 바리세파적인 사람이다. 바리세파처럼 머리만 굵어진다. 바리세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알기 때문에? 천만에 만만에 콩떡다,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싫어 버린 바 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많이 알았지만, 그 알고 있는 만큼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무조건 바리세파로 몰아가는 것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읽은 사람이 그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삶을 살기만 하면, 이런 사람이야말로 큰 믿음을 소유한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말씀을 많이 읽고 그 말씀의 잣대(Canon)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집과 아집, 이런 죄성을 측정하고 자를 것은 자르고 버릴 것은 버리고, 내 속에 좌정하고 계신 성령님께 굴종하며 복종하는 순종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령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 속에 나타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개인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받아들인 우리는 모두 동일한 성령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보다 큰 능력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하고 늘 죄의 마력 앞에 무릎을 꿇어버리고 마는 연약한 사람이 없지않아 있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성령을 받고 받지 못하고의 차이가 아니라, 자기의 아집과 고집이 얼마나 더 강하게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더 많이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게 되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복종치 않으면 그런 사람은 그만큼 자신의 아집, 고집 이런 죄의 속성들이 더 크게 드러나게 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내가 그리스도의 말씀에 굴종할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리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구원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변화 되는 능력 있고,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내가 새로워지는 길이 있다. 내 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것 아무것도 없다.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된다. 부흥회 백날 쫓아다녀봐야 성령받는 것 더더욱 아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그런고로 성령 충만한 성도는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 8- 9절 말씀).”

                 

                별똥별/최송연의 신앙칼럼 글

                21장 1절은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께서’와 ‘그 말씀대로’를 두 번 반복하여 사라를 권고하시고 사라에게 행하셨다고 기록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 이름을 걸고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그대로 행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미쁘신 하나님의 성품과, 그 변개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과,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려 함일 것입니다.

                ‘권고(眷顧)하셨다.’라는 말은 은혜를 베푸셨다는 뜻입니다. 은혜를 베푸사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시어 사라가 아들을 낳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은혜를 베푸시고 어떻게 행하셨을까요? 앞서 20장에서 그랄왕 아비멜렉이 반하여 데려가려 했던 것으로 미루어본다면 하나님께서는 90세 된 할머니 사라에게 아이를 낳고 젖먹일 수 있는 청년의 젊음을 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지 않으면 사라가 어떻게 아들을 낳을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가 될 아브라함도 그렇고요. 여러분도 그럴지 모르지요. 하나님께서 쓰시면 나이 들어도 젊고 건강하게 지켜주실 것입니다. 100세가 넘으셨는데도 정정하게 복음을 전하고 계신 방지각 목사님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이삭을 낳게 하셨습니다.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란 “정확하게 말씀하신 때가 되어”라는 뜻입니다. 더 이르게도 아니고 더 늦게도 아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로 그 때에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이라 하라.” 하신대로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였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하였습니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신대로 이름을 예수라 하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한 것과 똑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삭을 자신의 소유, 자신의 아들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하나님께서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바치라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돌려 달라 하시면 돌려드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때가 아브라함의 일백세 때요 사라의 구십세 때입니다. 사라가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라가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으리라.’ 하셨을 때 장막문 뒤에서 듣고 웃었는데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으니 웃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라만 웃은 게 아니라 아브라함도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게 하옵소서.” 하면서 엎드려 심중에 웃었습니다. 사라와 아브라함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고 웃고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이루어지니 또 온 세상이 기가 막혀 웃을 일입니다.

                복음이 그렇습니다. 웃기는 일입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니 말입니다. 그들은 아무 반항도 아니하고 십자가에 맥없이 달려 죽는 자를 비웃었습니다. 그 예수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실 때 온 세상이 어처구니없어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날에는 웃음이 아니라 모든 족속이 애곡하게 될 것입니다. 너 같은 죄인, 너 같은 인간이 무슨 구원이냐고 세상이 비웃었을지 모르지만 90세 사라가 이삭을 품에 안고 웃은 것처럼 우리는 지금 예수 믿음을 품에 안고 웃으며, 또 그 날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안고 감사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웃을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이 손가락질 하면서 웃습니다. 개독교라고 하면서 웃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지 못 하기 때문에, 교회들이 타락하였기 때문에 비웃기도 하겠지만 복음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걸 품에 안고 웃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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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성경은 하나님의 의(공의)를 우리에게 남긴 기록으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으로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by inspiration of God,
                ‘inspiration’ 은 영감(靈鑑)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한 보살 핍이라
                보이시는 계시이며 가르치는 교시이고
                성령님의 우리에 대한 감응이라 우리마음을 변화시키고 인도하시는 감화이고
                그리고 숨을 들어 마시는 호흡을 의미하며
                ‘inspiration’ 이란 단어는 KJV에 이곳과 욥기 32장 8절 두 군데 쓰여 있다.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이
                But there is a spirit in man:
                and the inspiration of the Almighty giveth them understanding]
                inspiration of the Almighty, 전능자의 숨결,
                태초에 아담에게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신 하나님의 숨결.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숨결을 남겨놓은 책으로
                우리가 숨을 쉴 때 마다 하나님의 의(공의)가 생명과 같이 유지하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공의로 교육하기에
                is profitable for doctrine 절대적인 말씀이다.

                그러나 복음의 어그러진 기로 간 자들인
                가톨릭과 개신교의 선생이라는 수많은 목사라는 자들은
                성경을 자신의 이익의 수단으로,
                자신의 권위를 위한 수단으로 권력으로 교권을 강화하였다.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All the saints salute you.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communion of the Holy Ghost, be with you all. Amen.
                고린도후서 13:12-13]

                가톨릭은 이 문장을 곡해하여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All the saints salute you’
                ‘saints’ 성도를 성인으로 번역하여 그들이 본받을 만큼 훌륭한 교인이 죽으면
                성인이라 추대하고 그들을 기념하여 만든 기념품을 악귀를 쫓는 신성한 물건으로
                삼고 또 성인 중 한사람을 수호성인으로 삼고 그 성인들의 영혼과 교통한다는
                영매술로 초혼 술을 믿는 근거의 성경구절이 이 구절이다.

                개신교는
                교파와 거의 상관없이 목사가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된 자들로 넘친다.
                다음은 어느 교의 헌법으로 목사의 직무 중 1조 헌법이다.
                < 1. 목사가 지교회를 관리할 때는 양무리 된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으로
                교훈하고 강도하며 찬송하는 일과 성례를 거행할 것이요,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하고
                성도를 교육하며 고시하고 교우를 심방하며 궁핍과 고난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장로와 협력하여 치리권을 행사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 짧은 문장에 수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하고... ”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대리인이란 말인가?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을까?
                하나님의 대리인들은 한국과 이곳에도 넘친다.

                한때 설교의 달인이라는 평을 받던 곽선희 목사는
                교회가 부흥하려면 설교를 잘해야 한다며 행정이나 행사의 탓이 아니라
                설교를 잘 못하기에 부흥이 안 된다 했다.
                그럴까? 아니다.
                곽선희 목사의 설교를 듣다 거부감이 들어 그만둔 사람이라
                설교의 달인이라니 달인이 다른 뜻이 있는지 몰라도.
                그가 축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 아니에요. 이건 기도가 아니에요. 축도입니다.
                그걸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풀레이(pray)가 아니고 베네딕션(benediction)이에요.
                축복을 선포하는 거예요. 복이 있으라 하는 것이에요.
                그걸 고어로서 있을 지어다라고>
                미안하지만 ‘benediction’ 이라 단어는
                내가 읽는 KJV 에 있지도 않고 ‘지어다, 라는 말은 잘못 번역된
                한글성경 개역개정의 오류이며 ‘선포’ 라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선포적인 진리의 말인가.
                전혀 그렇지 않던데.

                한국 CCM 소개서에는 축도를 이렇게 정의 한다.
                < '베네딕션(Benediction)'은 예배순서의 마지막 순서인 '축도'를 의미하는 단어로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그 복을 누리는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시대에 주님께로 돌아올 많은 영혼들이
                축복받고 격려 받는 사역을 감당할 사명감을 갖고 붙여진 이름이다.
                멤버 모두가 서울예대, 백제예대, 숭실대 출신의 전공자들로써 작곡자를 따로
                두지 않고 팀원들이 직접작곡, 작사에 참여한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축복을 노래까지 하며 축복을 구하나 무엇이 진정한 축복이기에,
                예배의 시작부터 시작하여 설교의 시작과 끝 그리고 축복기도
                축복, 축복... 진정 축복을 받아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축복이 넘쳐서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가.
                복음의 의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시대정신을 잃고 복을 받고 누리자는 기복신앙의
                축복은 이미 축복이 아니다.

                축복기도(Benediction) 라는 말은 성경에 없는 말로
                가톨릭의 성자 베네딕트에서 유래되었다는 로만 가톨릭의 기록이 있다.
                < 가톨릭의 성자 베네딕트는 약 480년경 이탈리아의 누르시아(Norcia)에서 태어나서
                누르시아의 성자로 불리우며 로마제국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서
                로마 동쪽의 Sabiner 에 3년 동안 은둔하였고 다른 사람을 위한 영적인 스승이 되어
                여러 수도원을 세웠으며 529년에 마지막으로 세운 Monte Cassino 수도원이다.
                베네딕트는 Benedict 는 라틴어 베네딕투스(Benedictus)에서 온 말로
                ‘축복받은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인으로 불리는 베네딕트는 그를 미워하는 사람이 그를 독살하려고
                마실 포도주잔에 독약을 넣었는데 이를 모르고 성인은 전과 다름없이 정성을 다해
                그 잔에 십자가로 축복하였더니 그때 그 잔이 즉시 박살났다고 한다.>
                그는 547년경 몬테카시노에서 죽었으며 8세기 말부터 7월11일에 그를 기념하는
                날이었으나 1969년에 가톨릭의 축일(Natalis S Benedicti)로 지정되었으며
                베네딕트는 1964년 10월 24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유럽 전체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디모데전서 4:1]



                [MD할리우드] ‘겨울왕국2’ 이디나 멘젤, “엘사 여자친구 원한다”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겨울왕국’에서 엘사 목소리 연기를 담당했던 이디나 멘젤이 속편에서 엘사의 여자친구가 나오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22일(현지시간)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빌보드 뮤직 어워드 레드카펫에서 ET온라인과 만나 “엘사를 고무시킬 수 있는 좋은 생각이다. 나는 디즈니에게 그것을 생각해보라고 할 것이다. 엘사는 내 인생을 바꿨다”라고 말했다.


                미국 성소수자 단체 GLAAD(the Gay & Lesbian Alliance Against Discrimination)는 지난 3일(현지시간) ‘겨울왕국2’에 엘사의 여자친구를 만들어달라며 SNS에서 청원운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은 트위터와 페이스북에서 ‘엘사에게 여자친구를 줘(#GiveElsaaGirlfriend)’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글을 올리고 있다. 2,500명을 목표로 진행되는 서명운동은 현재 399명이 모자란 2,101명이 서명했다.


                이 단체는 엘사를 동성애자로 선언하면 LGBT(성소수자) 아이들에게 롤모델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현재 ‘겨울왕국’의 주제곡 ‘렛 잇 고’는 LGBT 공동체에서 찬송가로 불리고 있다.


                ‘겨울왕국2’는 2018년 개봉 예정으로, 현재 프로덕션이 진행중이다.


                [출처: 마이데일리]



                * 2014년 겨울왕국이 개봉할 당시 이 영화 속에 동성애라는 주제가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본 블로그의 글이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바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동성애 문화에 대해서 익숙하지 않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겨울왕국 속에 담긴 동성애 코드를 이해못했지만, 개봉 당시부터 미국에서는 이미 겨울왕국을 동성애 영화로 규정하고 이를 분석한 글들이 있었다. 아래는 그러한 분석글들 가운데 본 블로그를 통해 소개되었던 내용 중에 일부이다.


                “겨울왕국이라는 작품 속에는 동성애라는 주제가 숨겨져 있다. 사실 ‘숨겨져 있다’는 표현을 쓰기엔 너무 노골적이다. 겨울 왕국은 다르게 태어난 한 어린 소녀에 관한 이야기다(이 때문에 동성애적인 메타포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 역자주).


                그녀의 부모는 이 소녀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한다. 한편으로는 아이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또 한편으론 사람들의 눈이 두려워서 이런 지시를 내린 것이다. 엘사의 진정한 속성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뒤, 그녀는 사람들에게 이상한 존재로 취급되어 궁전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 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살아간다. 그러다가 결국 그의 가족들과 사람들은 그녀를 배척했던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것이 영화 ‘겨울왕국’ 스토리이고, 또 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을 주제로 한 독립 영화들 속에 담긴 전형적인 스토리이기도 하다. ” (출처>>)


                우리가 흔히 ‘가족영화’라고 알고 있는 겨울왕국과 겨울왕국의 주인공 엘사에 대해 미국의 동성애자들이 열렬한 응원을 보내고, 현재 제작 단계에 있는 겨울 왕국 2에 엘사의 여자친구가 등장해야 한다는 요청을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 역사상 가장 큰 흥행기록을 남긴 영화 겨울왕국 속에 담겨진 동성애 코드(메시지)는, 이 영화 속 주인공 엘사에 열광하는 어린 아이들의 생각 속에 동성애에 대한 암묵적인 호기심과 동경심을 심어 놓고 있는 것이다.


                영화 겨울왕국은 2차 대전 이후 CIA와 함께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Mk Ultra Projcet(마인드컨트롤) 실험을 진행했던 일루미나티 기업 디즈니가 이 땅에 많은 아이들을 동성애자로 만들기 위해 치밀하게 기획한 마컨 작품인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너는 코리아다



                northkorea


                In the golden age of Asia
                Korea was one of its lamp - bearers

                And that lamp is waiting to be lighted once again
                For the illumination in the East.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시대에

                그 등불의 하나인 코리아
                그 등불 다시 한 번 켜지는 날에
                너는 동방의 밝은 빛이 되리라

                [라빈드라낫드 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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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원이 김조광수와 김승환 씨가 제기한 혼인신고 불수리 처분 불복소송에서 현행법상 동성 간 혼인은 허용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법원이 국내 현행 법체계 하에서는 동성혼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결을 내렸다.

                서울서부지방법원은 25일 “시대적, 사회적, 국제적으로 혼인 제도를 둘러싼 여러 사정이 변화했다고 하더라도 별도의 입법적 조치가 없는 현행 법체계 하에서는 법률해석만으로 ‘동성 간의 결합’이 ‘혼인’으로 허용된다고 볼 수는 없다”고 밝혔다.

                영화감독 김조광수와 레인보우팩토리 김승환 대표는 2013년 9월 동성인 자신들의 결혼식을 올린 후 그 해 12월 서대문구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했다. 이에 서대문구는 “동성 간 혼인은 민법에서 일컫는 부부로서의 합의로 볼 수 없다”며 불수리 처분을 했고, 두 사람은 이에 불복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이번 소송에서 각하 결정을 내리며, 현행 법체계에서 결혼이 ‘남녀 간의 결합’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입법 없이 법률 해석만으로 동성 간 결합을 혼인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법원은 “헌법과 민법 등 관련법은 구체적으로 성 구별적 용어를 사용해 혼인이 남녀 간 결합이라는 점을 기본 전제로 놓고 있으며 대법원과 헌법재판소도 혼인을 남녀 간 결합으로 선언한다”며 이를 성별 불문으로 확장 해석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한 법원은 두 사람이 동성혼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혼인의 자유와 평등의 원칙에 반한다고 주장한 데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혼인, 출산, 자녀양육의 과정으로 사회의 새로운 구성원이 만들어지고 사회가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하는 토대가 형성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동성 간 결합이 남녀 간 결합과 본질적으로 같다고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또 동성 간 혼인문제는 “일반 국민의 공청회 등을 통한 의견 수렴, 신중한 토론과 심사숙고를 거쳐 국회의 입법적 결단을 통해 결정할 문제”라며 “이는 사법부의 새로운 해석이나 유추해석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윤화미 ⓒ 뉴스미션

                USA 아멘넷

                ③ 박영돈 목사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성령충만한 목사

                미국장로교 한인교회 전국총회(NCKPC. 총회장 임형태 목사)는 "성령과 목회"라는 주제로 5차 전국 목회자 컨퍼런스를 10월 8일부터 4일간 뉴저지 찬양교회(허봉기 목사)에서 열었다. 주강사는 박영돈 목사. 박 목사는 현재 고신대 신학대학원 교의학 교수로 있으면서 성령론에 대한 많은 저서를 냈다.

                박영돈 목사는 개회예배 설교와 더불어 4번의 주제강의를 했다. 아멘넷은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라는 내용을 3번에 걸쳐 소개하고 있으며 이번이 마지막 이다. 이번 기사에는 성령안에 있을때 나타나는 성령의 7중사역, 성령으로 충만한 목사는 어떤 목사인지 잘 나타나 있다. 다음은 마지막 내용이다.


                ▲주강사 박영돈 목사

                성령의 7중사역

                우리가 옛사람일때 율법안에 있을때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다고 바울 사도는 말했다. 율법의 저주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는 7관점으로 요약할수 있다. 어둠, 속박, 비참, 쉼이 없는 수고, 불모, 헐벗음, 무력함이다. 결국에는 영원한 파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제 율법안이 아니라 은혜안에 있게 되었다. 성령안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새언약의 언약을 풍성하게 누리게 되었다.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새언약의 은혜를 7가지 포인트로 요약할수 있는데 7중축복이라고 한다.

                1. 조명(illuminate)=흑암의 권세에 있는 우리들에게 성령의 진리의 빛을 '조명'해 주신다. 일루미네이션(ILLUMINATION)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을 아는 영광의 빛을 우리의 어두운 마음에 비추어 주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하시고, 그 은혜의 풍성과 자비하심을 알게하시고, 그분의 사랑과 아름다움을 알게하시고, 우리의 마음의 감각을 살아나게 하셔서 그것에 반응하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그분의 아름다움과 은혜에 매료가 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일루미네이션에 의해서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을 한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보게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보화가 세상의 보화보다 훨씬 탁월하다는 것을 알게하시고, 우리들의 욕망과 가치관과 삶의 우선순위가 근본적으로 바뀌게 해 주신다.

                2. 자유(ilberate)=자유함의 은혜이다. 사단이 우리를 속박하는 유일한 무기와 권세는 거짓말이다. 그래서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그 어떤 다른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 무엇인가 다른것을 믿는다는 것인데 그 다른 것은 항상 비진리이고 거짓말이고 왜곡된 진리이다. 그 배후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들에게 진리의 빛이 비추어오면 거짓말로만 지탱되는 우리안의 사탄의 왕국이 붕괴되고 자유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이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하셨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하셨다. 북한체제가 폐쇄되었기에 거짓말로 지탱이 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개방되어 서방의 모든 정보들이 밀려오게 되면 북한이라는 체제가 지탱되지 못한다. 거짓말로 지탱되는 우리안의 어둠의 왕국에 진리의 빛이 비치게 되면 어둠의 권세가 무너지게 되고 우리는 자유함을 누리게 된다.

                3. 치유(heal)=죄의 속박가운데 망가진 인생, 비참한 인생이 성령의 은혜로 치유함을 얻게 된다. 온전함을 얻게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행하신 메시야로서 대표적인 사역 3가지는 복음을 전하시고, 귀신들린 이들을 자유케 하시고, 병자들을 치유하셨다. 이 3가지가 사도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우리들에게도 계속되고 있다. 공관복음에 특별히 주님이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특별히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는 사건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왜 주님께서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줄 아시면서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셨는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안식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좋은 창조를 축하하는 뜻이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그러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망가져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비참한 상태이다. 그렇기에 주님이 병자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고쳐주심으로 원래 창조하신대로 온전한 상태로 회복하여 주셔서 하나남안에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해주신다는 의미에서 안식일을 골라서 병자들을 고치신것이다. 하나님이 안식을 회복해주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전시적으로 알려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것이다.

                육신의 질병을 치유하신 것은 우리 주님이 육신으로서의 사역을 다 끝내시고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시는 사역, 전인적인 치유, 심령의 치유를 예표한다고 볼수 있다.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치유가 심령의 치유라고 할수 있다. 지금도 성령이 육신을 치유하신다. 그러나 치유를 받아도 또 약해지고 병들기에 온전한 치유는 종말에 가야 완성된다. 육신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치유는 심령의 치유이다. 우리 모든 교인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하지만 마음이 병든 사람이 많다. 마음이 심히 아픈 사람들이다. 그래서 죄의 결과는 정신 분열증보더 더 심각한 심령 분열증이라고 할 수 있다. 심령이 완전히 파쇄된것이다. 하나님과 단절되어서 생명의 근원으로 부터 끓어지게 된것이다. 하나님이 분리된 것이 지옥이다. 우리 심령에 지옥의 권세가 임한것이다. 사탄의 억압에 짓눌린 마음의 상태,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이 우리를 주관하는 세력이다.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인간의 실존의 특성은 불안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새로운 삶의 특성은 평강이다. 성령은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새언약의 내용이 돌판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우리의 마음판에 성령님이 심어주신다는 말이다. 우리 육신의 굳은 마음, 하나님과 원수된 마음, 불손중하는 마음을 제거하여 주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순종하는 마음, 부드러운 마음을 창조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법이 우리안에서 온전히 이루어 질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해주신다. 심령이 변화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된 우리의 심정이 다시 연합하게 된다. 그러면 우리 심령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에게 임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생수의 강이 흐르는 물댄 동산과 같이 되는 것이다.

                4. 안식(rest)=그러면 안식을 누리게 된다. 우리가 평안한 가운데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열매를 맺게되고 최대의 능률이 오르게 된다. 설교를 잘하는 비결은 평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목회를 잘하는 비결도 평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성령이 바로 평강의 영이시다. 우리들에게 이런 평안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끼치노니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과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평안한 가운데 우리로 하여금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하신다.

                5. 번성(flourish)=번성함이다. 풍성한 열매를 맺게되면 9가지 성령의 열매를 맺게되면 아름다운 사람, 존귀한 사람이 된다. 6. 아름답게 하심(beautify)=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를 아름답게 하시기 위함이다. 어떤 목사가 좋은 목사이고 훌륭한 목사인가. 영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목사이다. 그 아름다움을 교인들에게 보여줌으로 그것을 본받도록 목회해야 한다.

                7. 능력있게 하심(empower)=마지막이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시는 것이다.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력을 부여 받음으로 그들이 복음의 증인이 될수 있었다. 그들안에 일어난 자유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많은 사람안에 다시 일어날수 있도록 생명의 재생산의 사이클이 일어날수 있는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복음사역자들이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 우리가 전파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말과 이론만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새창조의 강력한 능력이 동반해야 교회가 새로워 질수 있고 교인들이 변화가 될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전파하는 새언약의 복음에 분명히 새언약의 7중사역이 함께 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고 이러한 놀라운 셩령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간절히 바라면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는 기도의 향이 가득한 교회

                성령으로 충만한 교회는 말씀이 풍성한 교회인 동시에 기도의 향이 가득한 교회이다. 구약의 성전의 구조를 보면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하는 구름이 임하고 그리고 분향단에서 향이 계속 올라가고 구름이 내려오는 구조이다. 그래서 분향이 끓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내 기도가 분향향 같아서 라고 했다. 분향은 지금의 기도를 뜻한다고 볼수 있다. 주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새로운 성전이고 주님의 집인 교회는 성령안에서 기도하는 집이라고 할수 있다. 기도가 계속 올라갈때 그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의 임재, 말씀, 성령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이슬비 처럼 임한다.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내리지 않는다. 말씀도 아무런 효력이 없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이 먼저이다. 기도가 없으면 말씀도 효력이 없다. 그래서 목회의 두축은 말씀과 기도이다. 교회를 세워가는 두 기둥이 말씀과 기도이다. 말씀과 기도가 약해지니 다른 방법 또는 그에 대한 어떠한 대처할 방법을 찾으며 이상한 성령운동을 자꾸 기웃거린다. 그러나 성령안에서 말씀과 기도사역을 온전히 감당하게 되면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다. 치유도 일어날수 있다. 사람들이 새로워지며, 기적도 일어날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다. 본질적인 것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말씀만으로는 목회가 안된다고 하는 목사도 있는데 말씀으로 제대로 안하니 안되는 것이다. 정도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과 기도로 목회하는 것이 가장 쉽고 간단한 방법이다.

                성령으로 충만한 목사

                성령충만의 증거는 무엇인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성령충만한 목사는 어떤 목사일까. 탁월한 설교은사를 가졌다고 그 목사가 성령충만하다는 보장은 없다. 오히려 교만하고 자아가 충만한 사람일수도 있다. 아주 뛰어난 은사와 능력을 가졌다고 성령충만한 목사라고 할수 없다. 성령충만의 증거는 은사에서 찾아서는 안되고 열매에서 찾아야 한다. 주님을 닮은 성품의 열매에서 찾아야 한다. 열매를 맺는 것이 성령님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다. 이것이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다. 우리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재생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안에 성령을 내재하게 하신 목적이다.

                한국교회의 성령운동은 가장 중요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은사, 초자연적인 은사에 너무 치중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런 은사운동에 대한 반발로 전통적인 교회는 은사를 또 평가절하하는 것이 문제이다. 은사의 남용을 보고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쳐서는 안될것이다. 성령충만의 증거는 우선적으로 은사에서 찾아서는 안되지만 그러나 성령충만의 온전한 증거는 열매 플러스 은사이다. 그래서 성령충만한 교회는 열매와 은사가 풍성한 교회이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성령의 은사는 열매를 구현하는 하나의 방편이라 할수 있다.

                성령의 열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능력과 에너지가 있어야 한다.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밑천이 있어야 하는 것 처럼 사랑을 하려면 은사와 능력이 있어야 한다. 교인들을 참으로 섬기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목사는 설교의 은사, 가르침의 은사, 목회의 은사가 있어야 한다. 그런 은사가 없어서 교인들을 영적으로 피폐하게 만들어 놓는다면 아무리 목사가 인간적으로 교인들에게 잘해준다고 해도 참으로 교인들을 사랑하는 목사라고 할수 없다. 교회에 설교와 가르침과 목회의 은사가 없이는 교회가 성장할수 없고 교인들이 영적으로 성숙할수 없다. 그래서 우리 사역자들은 열매뿐만 아니라 은사도 추구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장 31절에 바울 사도가 더 큰 은사를 간절히 구하라고 명했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와 임재속에 푹 잠기게 된다. 우리가 예수로 점점 물들어 간다. 성령이 우리의 전인을 계속 관통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얼굴 빛을 우리의 마음과 인격속에 계속 투사해 주심으로 우리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형상이 점점 찍혀 나오게 한다. 우리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형성되게 한다. 그래서 쇳덩이를 용광로에 집어넣으면 불이 쇠를 관통해서 얼마후에 불과 쇠가 한덩어리가 된다. 이것처럼 성령충만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성령이 하나가 된다. 성령이 우리의 영을 계속 관통하고 투사해서 예수의 인격과 형상을 계속 찍혀 나오게 하는 역사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상에도 예수의 온유함과 진실함과 거룩함이 배어 나오게 된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우리의 몸뚱아리도 예수님의 육체와 같이 이동하는 성전이 된다. 그래서 성전에서 생명수가 흘러나오는 것 같이 우리의 몸이 성령의 은혜가 흘러나가는 출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입을 열면 은혜와 진리가 흘러나오고 눈빛에서는 사랑과 긍휼이 흘러나오는 것 같이 우리가 입을 열면 은혜로운 권세있는 말씀이 흘러나오게 된다. 우리의 눈빛에서 뭔가 영적인 것이 전달된다. 눈빛에서 사랑도, 미움도, 사람을 깔보는 것도, 비웃음도, 의심하는 것도, 경계하는 것도 신비하게 전파된다. 눈빛으로 은혜도 전파된다고 볼수 있다. 사랑의 눈빛으로 바라볼수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얼굴빛과 인상도 달라진다고 한다. 잘알려진 로보트 머레이 매케인는 29살에 별세했다. 그가 설교하기 위해 강당에 올라오면 교인들이 그 모습만을 보아도 예수님을 보는 것 같아서 은혜와 감동으로 울곤 했다고 한다. 이정도 되면 목회하기 쉬울것이다.

                제가 청년때 신앙생활하던 교회 목사님은 오래전에 작고하셨다. 그 목사님은 학식이 별로 없고 언변도 별로 없다. 그분은 일제시대에 만주 봉천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고초를 겪었다. 그 이야기를 설교시간에 너무 자주했다. 그래서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은 설교시간에 만주 봉천을 한번 돌고 오면 끝난다고 말하곤 했다. 그분에게 들은 설교중 기억나는 것은 그것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 최고의 설교를 그분에게서 들었다. 그분의 모습이 메세지이다. 그분을 만나면 하나님을 느낀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목사님 앞에 있으면 교인들의 마음이 편안해진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그렇게 느꼈다.

                그렇게 과거에 훌륭한 목사님들이 있었다. 그런 목사님들이 학식은 없었어도 한국교회를 세운 것이다. 그 목사님이 저의 모델인데 저에게는 교인들이 접근하기를 두려워 한다. 인상이 목사안같고 검사같다고 한다. 통렬히 회개하며 목회를 하는데 그래서 요즘 좀 나가진 것이 이렇다. 내가 지나가면 찬바람이 분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전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반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목사의 임재자체가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이 성령충만한 목회라 할수 있다.

                성령의 교제와 은사활용

                성령충만한 교회는 교제가 풍성한 교회이다. 성령은 교제의 영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연합해서 하나님을 섬길때 그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신다. 현대교회의 문제는 진정한 교제를 누리기가 어렵다. 공동체를 체험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교제의 장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소그룹 운동을 활성화 할 필요가 있다. 평신도의 피동성이 교회의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교인들이 청중과 관람객과 학생의 위치에서 신앙생활하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다.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와 잠재력을 교회를 세우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평신도들이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은사와 탈렌트를 활용해서 교회를 섬기고 서로를 섬길때 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게 된다. 교인들이 그런 봉사의 일을 할때 더 기도를 하게되고 성령충만을 구하게 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될수가 있다. 그래서 성경이 설정한 평신도의 위치를 회복해주어야 한다. 교인들을 작은 목자, 작은 사역자의 역할을 담당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성령충만은 특권이자 의무

                마지막으로 성령충만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인 동시에 의무이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성령님이 우리안에 내재하는 이유는 우리를 항상 인도하시고 우리를 항상 충만케 하시기 위함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충만케 하는 역사를 방해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성령충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우리들은 간헐적으로 성령의 감동과 성령충만의 은혜를 받는다. 설교할때 성령의 감동을 받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문제는 성령충만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사는 것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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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장통합 이단 해제 시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

                미주교계 16개 단체, '이단 해제' 철회 촉구 1차 성명서 발표
                 
                송금관 기자    기사입력  2016/05/25 [08:12]

                지난 5월 중순 한국의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이하 예장통합)가 이단사이비와 관련한 11개 단체에 대해 자칫 면죄부를 줄 수 있는 ‘사면신청’과 관련한 기사가 나간 후 한국 교계는 물론 미주의 한인교계도 건전한 기성교회들과 성도들이 겪을 혼란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가운데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와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 등을 비롯한 미주 지역의 16개 기독교 단체들이 ‘예장통합의 이단 해제 시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란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번 예장통합의 이단 해체 시도를 철회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미주기독교이단대책연구회 회장 한선희 목사는 “통합 측에서 이단 및 이단옹호언론 등을 사면시키게 되면 교계가 큰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은 자명한바 이에 대해 세이연과 이단사역단체 및 각 지역교협이나 목사회 등에서 연계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게 되었다”며, “시간적 여유가 없어 더 많은 교협이나 목사회 등에서 조인하지 못했으나 사안이 시급한지라 추후 동참하기로 하고 1차 성명서를 발표한다. 각 교회나 성도들의 신앙생활에 흔들림이 없도록 해주시기를 부탁한다.”고 밝혔다. 
                 
                한편 예장통합은 지난 1월 100회 총회를 맞아 특별사면 공고를 내고, 그 이후 이단사이비 및 이단언론 등 11개 단체 등이 교단 측에 사면신청을 해왔다. ‘사면’은 ‘죄를 용서해 형벌을 면제 한다’는 의미로, 교단 총회 100회기에 한 해 한시적으로 벌을 면제받을 기회를 주겠다는 취지로 진행 중이다. 사면의 신청 대상자는 독노회가 시작된 1907년 9월 17일부터 지난해 통합 측 제100회 총회 폐회 시까지 각 치리회에서 책벌(제명)을 받은 자와 교단에서 이단사이비로 규정된 자들이다.
                 
                다음은 <성명서> 전문이다.

                 
                예장통합의 이단 해제 시도에 대한 우리의 입장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예장통합, 총회장 채영남 목사) 특별사면위원회(위원장 김규 목사)가 무려 11개나 되는 이단 단체(김풍일, 다락방(류광수), 레마선교회(이명범), 성락교회(김기동), 안식교, 인터콥(최바울), 지방교회, 큰믿음교회(변승우), 평강제일교회(박윤식)) 및 이단 옹호언론(로앤처치, 교회연합신문)에 대해 올해 9월에 개최될 예장통합 101회 총회에 사면을 신청, 이단해제를 해주려 하는 시도에 대해 우리는 심각한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그간 통합총회에서 치리했던 이들에 대해 ‘화해와 용서’ 차원에서 총회 100회기를 기해 한시적으로 사면해 주겠다는 교단 내 정서와 취지와는 달리 이단사이비 문제는 해외한인교회들에게까지도 직, 간접적으로 큰 파문을 끼치는 중대 사안입니다. 즉 통합이 설령 그들을 사면한다고 해도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여전히 해외한인교계에 쓴 뿌리로 존재할 것이기에 이에 대한 조치와 납득할만한 바로잡음이 없으면 그들은 통합을 제외한 다른 한국 내 교단들과 해외한인교계에서는 여전히 이단사이비 호칭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그간 이단에 맞서 정통신학을 지키고 바른 신앙을 계승하는 일에 교파와 교단을 초월하여 함께해왔고 미주한인교계도 한국의 주요 교단의 이단대처를 존중하며 연대해 왔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살아계신 성삼위 하나님의 임재와 거룩한 디아스포라 한인교회들 앞에서 엄중하고도 단호하게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밝힙니다.
                 
                1. 예장통합 총회는 사안의 심각성 및 중요성을 바로 깨닫고 즉시 철회할 것을 촉구합니다.

                2. 예장통합 총회는 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이번 사태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규명하고, 예장통합의 공신력 실추와 혼란을 야기시킨 관련자와 배후세력에 대한 엄단한 조치와 동시에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시길 촉구합니다.

                3. 미주 내 한인교회들은 예장통합 총회가 사면을 고려중인 이단 사이비 단체들로 인해 교회와 성도들이 피해를 입거나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더욱 주의하여 이들을 관찰, 경계할 것을 권면합니다.
                 
                아무쪼록 위와 같은 우리의 요구사항들이 관철되어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가 공신력을 회복하고 본연의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하여 주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주후 2016년 5월 24일
                 
                기독교이단대책협회(대표회장 백남선 목사, 상임회장 박형택 목사)
                남가주기독교교회협의회(회장 강신권 목사)
                남가주한인목사회(회장 엄규서 목사)
                노스캐롤라이나기독교이단사이비대책연구회(회장 조재풍 목사)
                달라스교회협의회(회장 김승호 목사)
                대뉴욕교회협의회(회장 이종명 목사)
                대뉴욕교회협의회 이단사이비대책협의회(회장 유상열 목사)
                미주기독교이단대책연구회(회장 한선희 목사)
                빅토밸리한인목사회(회장 우정은 목사)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회장 김순관 목사)
                애틀란타한인교회협의회(회장 정윤영 목사)
                오클라호마한인교회협의회(회장 정홍기 목사)
                중남부 이단대책위원회(사무총장 이태경 장로)
                하와이기독교협의회(회장 한익희 목사)
                하와이이단대책협의회(회장 김순관 목사)
                하와이장로교협의회(회장 김순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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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평양에서 10분이라는 시간


                태평양에서 인류의 운명을 결정 지을 사건이 하나 있었다.


                만약에 사람들이 10분 이라는 시간만 남아 있다면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하루는 24시간이고 1시간은 60분인데
                10분 이라는 시간은 어떤 사람에게는 길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식사 한번 정도 시간일 것이다.
                 



                태평양에서 핵무기를 탑제한 미국 핵잠수함이 작전을 진행중에 있었는데. 미국 본토에서 실제로 제 1급 비상작전 통신이 하달되어 1시간 후에 핵미사일을 발사하라는 전문이였다..



                그 구체적인 내용에는 (고르바초프 대통령 시절) 러시아의 혼란한 틈을 타서 군내부에 강경파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했다. 그리고 대륙간 장거리 핵탄두 미사일(ICBM) 10발과 공격용 핵잠수함 4대를 확보하고. 미국을 미워하는 러시아의 반란군은 미국과 일본을 공격하기 위해서 핵미사일 암호를 해독중에 있으며. 3차 대전이 포착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핵잠수함이 핵미사일을 발사하기 10분 전에 미국 본토로부터 다시 긴급 통신이 왔지만 통신장비가 고장나서 그 긴급전문을 알아 볼 수가 없었다.



                핵잠수함 함장은 예정대로 핵 마사일을 발사할 것을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지만 부함장은 미국 본토로부터 다시온 통신전문을 알기 전에는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없다고 함장의 명령을 거부한다.



                핵무기를 탑제한 미국 핵잠수함 내부에서는 일대 혼란이 일어나지만 핵미사일 발사 시간 전에 통신장비를 수리해서 통신전문을 다시 수신 받는다는데 합의를 한다. 천만다행으로 통신장비는 수리 되었고 미국 본토로부터 일급전문을 다시 받아 볼 수 있었다.



                일급통신 전문에는 러시아의 대통령이 반란군들을 진압하고 안정을 되찿았기 때문에 핵미사일 발사를 취소 한다는 내용이였다.



                이 앗찔한 일급정보의 실화는미국의 영화감독 토니스콧이 1995년 크림슨 타이드라는 영화로 만들이 세상에 알리므로써 일반 국민들이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알게된 것은 미국이 항상 방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제공격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 북한이 미국의 백악관을 공격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는데 미국은 심각하게 받아 들이고 있으며. 분쟁지역인 남중국해의 공해에서 중국 함대가 한국으로 오고 있는 미국의 존 스테니스 핵항공모함을 포위하는 사태가 일어 났는데 이런 긴장도 계속 되면은 중국도 위험 할 수 있다.



                1947년에 핵물리학자들이 종말의 시계를 만들었는데 2012년에는 23시 55분으로 결정 되었고. 2015년 종말의 시계는 23시 57분으로 종말의 시간은 3분 전으로 더욱 가까워 졌다.



                그런데 핵전쟁은 군사 전문가들은 알 수 있겠지만 일반인들은 알기 어려운 어느 순간에 갑자기 일어 날 것이다.



                인류가 핵무기를 만들고 난 후에 핵전쟁이 일어 날뻔 한 오류는 200번 정도이고 그 중에서 가장 위험했던 시기는 1962년 10월에 소련(러시아)가 핵미사일을 쿠바에 설치 했는데 미국이 알고 대치중에 1962년 10월 28일 소련(러시아) 잠수함이 핵 어뢰를 발사할 뻔 했지만.3명의 동의자 중에 한명이 동의를 안해서 핵전쟁이 일어 나질 않았고....



                1983년 9월 26일에는 소련(러시아)의 컴퓨터 오류로 핵전쟁이 일어 날뻔했다.



                지금 태평양에는 핵무기를 탑제한 미국의 핵잠수함들이 바다에서 작전중에 있으며. 만약에 태평양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하면은 러시아.중국.북한은 10분 내에 전멸 한다.



                우리는 지금 어쪄면은 그 핵전쟁의 시간인 태평양에서 10분의 시간 그리고 10분이 계속 연장되는 시간 속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네델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내일 멸망이 올지라도 사과나무 한그루를 심겠다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혹시 집 앞 뜰이 있는 분들은 올 봄에 아주 작은 사과나무를 한그루 심어 보시면 어떨까 ?



                아마도 작은 사과나무가 크게 성장을 해서 사과의 열매가 열린다면은 그 사과를 따먹으면서 긴 시간 살아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



                사람들은 누구나 타고난 시간이 있지만 오늘은 정말 소중한 하루를 보내고 싶다.



                태평양에서 10분이라는 시간을 생각하면서...



                2016년 3월 14일

                펑그르





                성경이 가르치는 자아형상/안토니 후크마

                 

                서문

                 

                변화가 많은 현대 사회 속에서 크리스챤들이 보다 긍정적인 자아형상을 가지고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여야 할 필요성이 절감되고 있다.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신앙'과 '생활'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오해하며 바른 신앙을 생활 속에 구체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크리스챤들이 가지고 있는 약점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대하여 부정적인 관념으로

                비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 원리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긍정적 자아형상보다는 부정적 자아형상을 가지고 좌절과

                절망 속에서 괴로워 할 때가 많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바로 시정하려고 시도한 것이 이 책이다 .이 책은 성경을 토대로한

                신학적 기초 위에 심리학적 접근을 시도하여 크리스챤의 자기 성찰을 도모하였다.

                 

                 

                서론 : 문제의 필요성

                 

                  1) 자아형상 = 자기 평가 :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는 평가와 자기 자신에 관하여

                     지속적으로 하는 평가를 말한다

                 

                  2)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이

                     달라질 것이다.

                 

                  3)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기독교인들은 매우 긍정적인 자아형상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보수적인 복음주의 크리스챤들은 오히려 부정적인 자아형상을

                     가지고 있다.

                 

                  4) 크리스챤이 부정적인 자아형상을 가지고 성장하는 것은 어떤 교리적인 가르침이나

                      신학적인 인식에 그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적인 자아형상은 또한 인간의

                      죄와 죄책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사역 보다도 더욱 강조하는 왜곡된

                      성경 교리의 이해에서 비롯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바꾸어 말하서 기독교 신앙이 적절하게 이해되어지고 올바르게 받아들여진다면

                      크리스챤은 근본적으로 긍정적인 자아형상을 가지게 될 것이다 .

                 

                 

                 제 1부 성경적 배경

                 

                 

                제 1장 바울의 자아 형상

                 

                  1) 바울은 비록 깊은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또한 탁월하게 긍정적인 자아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빌3:13, 딤전1:12~14).

                 

                  2) 바울은 자신의 인격의 가장 매력적인 일면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의 편지를 받는

                      신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라고 말한다.

                      (고전4:16, 빌3:17, 살후3:7) 이것은 바울이 확실히 긍정적인 자아형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증거득이다 .

                 

                 

                제 2장 용서의 기쁨

                 

                  1)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이 왜 여전히 죄의식 때문에 고민하는가? 

                    - 복음의 핵심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함, 기독교 메시지를 왜곡함.

                 

                  2) 성경에서는 죄의식을 해결할 수 있는 말씀을 너무나 많이 주신다.

                    - 시32:1~2, 시103:2, 3, 사43:25, 사44:22, 미7:18~19, 요3:!6, 요5:24, 행13:38~39

                       롬8:1, 롬8:33~34, 엡1:7~8

                 

                  3) 우리가 성경 전체 속에서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할 때, 비록 성경이 우리에게

                      죄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지만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도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4) 사죄의 확신과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시고 우리의 부족함과 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기쁨은 곧 긍정적인 자아형상의 기초가 된다.

                 

                 

                제 3장 옛 사람과 새 사람

                 

                  1) 크리스챤으로서 우리 자신의 형상은 옛 사람이라고 불리는 옛 생활 방식을 단호히

                      거부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 사람으로 불리워지는 새 생활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롬6:11).

                 

                  2) 나 자신을 부분족으로는 옛 사람이고, 부분적으로는 새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전적으로 새 사람임을 기억해야 한다.

                 

                 

                 

                제 4장 성령 안에서의 생활

                 

                  1) "성령 안에서" = 그 영을 쫓아(롬8:4), 영에 의해(갈5:!6),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

                      (롬8:14), 성령으로 충만한 자(롬8:14)

                    -> 이러한 설명은 모두 긍정적인 자아형상을 의미함.

                        신앙인은 자신이 더 이상 육신의 노예가 아니라 성령 아넹서 자유로워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2)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 안에서 악에게 지지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제 5장 새로운 피조물

                 

                  1) 어떻게 하면 긍정적인 자아 형상을 가질 수 있으며 자만을 피할 수 있는가?

                    - > 크리스챤의 자아형상의 올바른 이해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

                 

                    ㄱ. 올바른 크리스챤의 자아형상은 우리 자신 속에 자만을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것과 우리를 위해서 계속해여 행하시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다.

                 

                    ㄴ.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에 전혀 무가치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함.

                         (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

                 

                  2) 새로운 피조물이란?

                    - 고후5:15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며"

                    - 롬12:2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 요일5:4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이다.        

                 

                  3)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이제 성령의 능력

                     안에서 승리의 생활을 하고 있는 피조물로서 자신을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4) 믿은 자들이 많은 투쟁에서 패할지로 모른다(주님을 바라보는 것 대신 자기 자신의

                      힘을 의지하게 될 때). 그러나 크리스챤은 많은 투쟁에서 패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는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된다.

                 

                 

                제 6장 로마서 7장

                 

                  1)  이 말씀은 거듭난 사람에 대한 기록이라기 보다는 성령의 능력주심을 떠나서 홀로

                       율법을 통하여 죄와 싸우고 있는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에 대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이와같은 노력은 영원한 좌절감 밖에 주지 아니한다.

                 

                  2) 마찬가지로 거듭난 크리스챤이 성령에 의하여 행동하기를 멈추고 자신의 힘으로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롬7장 하반부에 나타난 상황의 생활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될 것이다.

                 

                 

                제 7장 죄없는 완전함인가?

                 

                  1) 우리가 죄없이 살아가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한 성경 말씀이 있는가?

                    - 요일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

                 

                    -> 그러나 요일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2) 중생한 사람은 죄를 짓지도 그리고 지을 수도 없다고 말한 문장의 시제는 현재형이다.

                      이 말은 계속적인 그리고 습관적인 행동을 가르키고 있다 .

                 

                  -> 요한이 여기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중생한 사람은 여전히 죄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죄에 빠졌을 때 절망하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중생한 사람은

                       용서함을 얻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대언자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러므로 우리는 already(이미,과거)와  not yet(아직) 사이의 tension(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자아형상은 아직과 이미 사이에서 보아야 한다.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마귀의 권세를 벗어나서 그리스도의 결정적

                          승리에 참여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아직 재림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승리의 전부를 즐기지는 못한다 .우리의 자아형상은 종말론적인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

                      

                 

                 

                제 8장 크리스챤의 용납

                 

                  1)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납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납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납하신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동료 크리스챤의 실수를 용납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크리스챤 형제를 용납하는데

                      실패하는 것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축복에 대한 감사가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2)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크리스챤이든지 아니든지, 그 종족이나 국가, 경제적 지위나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을 향하여 받아들일 자세를 가져야 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자아형상/안토니 후크마. 베다니

                http://cafe.daum.net/payo

                가져온 곳 : 
                블로그 >바람의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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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바람길따라| 원글보기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 이슬람과 기독교와 유대인들을 위한 공동 기도(예배)처가 베를린에 건설된다.


                한 interfaith 그룹(종교통합 단체)이 세계 최초의 공동 기도처 건립을 위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House of one(일치의 집)”이라고 명명될 이곳은 유대인들과 무슬림 신자들과 기독교인들 모두를 위한 기도와 예배처가 될 예정이다.


                The House of one은 베를린 제일 교회에 세워질 예정인데, 이 일을 추진하고 있는 interfaith 단체의 설립자 중에 한 사람인 랍비 ovia Ben Chorin는 The House of one의 건립을 통해 20세기 어두운 역사를 가지고 있던 베를린이 이제는 관용의 중심지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인 저에게 이 곳은 ‘상처가 있는 도시’요 또한 ‘기적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이곳은 유대인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이 벌어진 장소였지만 이제는 다양한 문화와 종교가 공존하는 도시로 문화적 통합과 종교적 관용을 보여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House of one(일치의 집)”에 대한 건설은 내년부터 진행될 예정이다.


                기사원문 >> 'Its a synagogue, church, and mosque all in one'



                * New World Order와 한통속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종교 통합에 총대를 메고 앞장 서 달려나가고 있는 가운데, 종교 간의 대화와 관용을 주장하는 interfaith 관련 단체들이 종교통합을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고 있다.



                종교통합을 이끌고 있는 Interfaith의 로고들


                마틴 루터가 바벨론 종교와 야합한 로마 카톨릭에 반기를 들고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종교개혁의 산실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이제는 종교 통합(종교 야합)의 상징인 “House of one(일치의 집)”이 건립될 예정이라고 한다.


                필요에 따라 회당과 교회와 모스크로 변신이 가능한 이 건물은 종교 통합의 상징으로, 또 New World Religion의 모델이 되는 건축물로 소개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석탄일과 크리스마스가 되면 종교통합의 상징적인 표현으로 목사가 절을 찾고, 중이 교회를 찾아 축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상례화 되고 있는데, 조만간 교회와 법당을 하나로 사용하는 한국판 “House of one(일치의 집)”이 등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고후 6:14-16)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거룩한 교회를 '종교통합'이라는 배도의 수렁에 빠뜨리는 자들에겐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임할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우리는 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의 한 집사님이 죽어서 지옥에 간 심판대의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꼭 읽어 보시고 누구나 죽는 죽음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나는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온 시기에 그것을 받아들여서 4대째 이어오고 있는 신앙의 연조가 깊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4대째’라는 이름에 걸맞게 온 집안은 기독교 분위기였다. 나는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며 주일날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습관처럼 교회를 다니는 종교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만 한다. 집사 직분을 받은 지 20년이 넘었지만 성경을 교회 갈 때만 들고 다녔다. 성경을 하도 읽지 않아서 계시록이 구약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성경에 무지했다.


                교회를 다니며 수많은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누구인지 바르게 만나지 못했으므로 믿음이 무엇인지, 구원이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지도 못했고 확신도 없었다.


                그러기에 나의 생각과 판단과 삶의 내용은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게 전혀 없었다.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던 대대로 내려오는 믿음의 가문과 모태신앙 몇 십년 된 집사 직분은 구원받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오직 예수를 만나고 그 예수를 구주로 확실히 믿고 고백하는 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르는 자라야 구원을 받는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천국과 지옥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보고 왔기 때문이다.



                안락사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나다!


                나는 1999년에, 요즘엔 병도 아닌 병, 결핵에 걸려 병원에 들어가던 중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병원 응급실에서는 다 죽은 시체이니 돌아가 장례준비를 하라며 내보내려 했으나 가족들은 장례를 치르더라도 병원에서 해야겠다고 간곡히 사정하여 입원 허락을 받아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곧 숨이 끊어질 것 같던 나는 비록 의식은 전혀 없는 식물인간이 되어버렸지만 가느다란 호흡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살아날 가망성이 없다는 의사의 진단에 가족들은 의논을 거쳐 안락사 쪽으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어머니께서 이 아들은 내가 몸만 낳았다. 그 영혼, 그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거두실 것이니 기도하며 기다리자, 그러니 안락사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며 반대를 하셨다고 한다.


                가족들이 이런 의논을 하고 있을 때 나의 영혼은 이미 영적 세계를 보고 다니고 있었다. 누워 있는 내 몸 속에서 갑자기 무언가가 뭉턱 하고 밖으로 쑥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나는 벌써 어딘가로 가서 서 있었다.


                그 곳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각기 다른 국적을 가진 수만 명의 남녀노소가 앞을 향하여 똑바로 줄을 서 있었고 나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그 줄의 정렬은 엄숙하고 정확해서 이탈자도 하나 없고 몸은 똑바로 경직되어 손가락하나 까닥할 수 없고, 고개를 돌릴 수도 없었다.


                어떤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이끌리어 앞으로 쭉쭉 미끄러지듯 나가는 모습은 마치 좋은 과일과 나쁜 과일을 이쪽저쪽으로 척척 갈라 주는 기계 위에 놓아져 있는 물건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거리가 멀어서 보이지도 않는데 왜 내가 그곳에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걱정되지도 않았다. 단지 무슨 판결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갑자기 내 오른쪽 귀에 어떤 소리가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그 소리는 듣기에도 무시무시하고 소름이 끼치는 각 나라의 언어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으로 신음하며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였다.


                나는 그 소리에 기가 질렸고 너무나 무서웠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었으므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눈동자만 굴려서 바라보니 마치 바다같이 어마어마하게 넓은 웅덩이가 보이는데 그 위로 파도보다도 더 높고 큰 새빨갛고 새파란 불길이 맹렬한 기세로 타오르며 빠른 속력으로 굴러오듯 다가오고 있었다.


                마침 내가 서 있는 줄이 많이 줄어서 심판하는 곳도 볼 수 있었는데 키가 2미터는 돼 보이고 머리는 혐오스럽도록 땋아 묶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검은 옷을 입은 네 사람이 양옆으로 갈라서 있었다.


                이들은 사람의 팔다리를 잡아서 지옥의 불에 집어넣는 지옥사자였다. 또한 그 앞에는 전능자 같은 이가 계신데 광채로 빛이 나고 희어서 눈이 부시고 큰 의자에 사람의 형상 같은 모습으로 손에는 책 같은 것을 들고 계셨다.


                그 보좌에서 소리가 나는데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묻는 것 같았다. 대답을 못하거나 머뭇거리는 자는 심판하시는 자의 왼편으로, 확실하게 대답하는 자는 오른편으로 보내는데, 누구 하나 감히 그 앞에서 고개를 드는 자가 없었다.


                왼쪽으로 갈 자들은 전능자 앞에 떨며 서 있고 그들을 던질 검은 옷을 입은 4명의 사자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도살장에 끌려 온 짐승 다루듯 숙달된 솜씨로 두 팔과 두 다리를 번쩍 들어서 짐짝처럼 그들을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 넣고 있었다.


                불구덩이 속에 떨어진 자들은 달구어진 프라이팬에서 콩이 튀듯 펄쩍펄쩍 튀어오르며 경악하는 얼굴로 바로 서 있지를 못하고 더 이상 타지도 않는 상태에서 양팔과 양다리를 하늘로 향하고 고통스러워 했다.


                그곳에서는 너무 고통스러워 죽고 싶어도 죽을 수조차 없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너무 떨리고 두려웠지만 도망갈 수도 꼼짝할 수도 없었다. 방금 내가 보았던 광경은 지옥이었고 심판대 앞에 서 있는 나도 그곳으로 떨어질 것이 뻔했다.


                나는 빨리 그 자리에서 회개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육신을 떠난 영은 회개할 수도, 과거를 다시 돌이킬 수도 없었다. 복음성가에도 재림 나팔 불면 예비할 수 없다 라는 가사가 있듯이 오직 육신이 이 세상에서 살아있을 때만 기회가 있는 것이다.


                나는 그 곳을 피하고 싶었으나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의 자리였다. 나는 두려움으로 이쪽이 지옥이면 혹시 저 반대편은 천국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왼쪽 귀에 아주 평안한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 소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고 천사들의 찬송 소리라고 느껴졌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가 기울어졌고 그곳을 바라보니 과연 천국이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그 곳에는 아주 큰 집이 정금과 보석으로 지어져 있었는데 그 집 기둥과 문마다 각종 보석이 박혀 있었고 모든 가구가 화려한 보석으로 장식되었고 넓은 길은 수정같이 맑은 금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곳은 너무 아름다워 이 세상 말로써는 도무지 다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그 천국으로 가고 싶었다. 다시 앞을 보니 어느새 몇 백 명만 남아 있었는데 그때 한 명이 천국으로 춤을 추며 들어갔다. 순식간에 내 차례가 왔고 바로 내 앞 여자 한 사람도 천국으로 들어가는데 어찌나 좋은지 이 세상 어떤 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다운 춤을 추며 들어갔다.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내가 그 보좌 앞에 서니 보잘것 없는 나는 그 위엄에 놀라 고개가 저절로 숙여졌다. 그 분이 내게 무엇인가를 질문하셨고 난 아주 큰 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그 순간 식물인간이던 내 몸이 펄쩍 뛰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의식이 돌아왔다. 누가복음 8장 55절에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이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내 영이 떠났다가 돌아온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나는 깨어난 후 10개월 동안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수만 명 중에 단 두 사람만 천국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은 나를 고통스럽고 두렵게 했다. 교회를 다니며 직분을 받고 믿는 자라도 항상 힘써야 될 것은 성경에 "너희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하신 말씀과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쉽다" (마 19:24; 막 10:25; 눅 18:25)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며 예수를 바로 만나고 바로 믿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대로 안락사를 당하고 죽어 지옥으로 떨어질 자였으나 어머니의 믿음과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그 지옥 불구덩이 속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그분 앞에서 무슨 질문에 무슨 대답을 하였는지 그것만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내가 본 이 모든 것이 몇 십년을 들고만 다녔던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성전 뜰만 밟고 다녔던 참으로 어리석은 나의 행동과 게으름 그동안의 쌓인 죄로 인해 가슴이 아프고 원통해 얼마나 많은 회개를 하며 통곡하였는지 모른다.


                믿음이 없어 이미 영육이 죽었던 내게 주님은 천국과 지옥을 보여 주시고 회개할 기회와 영생을 주셨다. 덤으로 주신 내 생명은 주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전능하신 주님께 온 몸과 영으로 찬송드리며 할 수만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도록 전도에 힘쓰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 것이다. 내 폐는 10%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목에 구명이 뚫려 있다.


                나는 목숨을 걸고 간증하고 복음을 전한다.

                여러분도 예수님 믿고 수만명 중에 한 명의 천국의 대열에 들길 원한다.




                출처: 로뎀나무 둥지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이드로

                알라는 삼위일체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신이며, 소통이 불가능한 신
                - 이만석 선교사(한국이란인교회 담임목사)-

                이만석 선교사(한국이란인교회 담임목사)는 최근 "목회자들에게 드리는 이슬람 관련 정보(Q&A)"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꼭 알아야 할 이슬람에 대한 정보를 질문과 답변 식으로 10가지로 제시했다.

                Q1. 이슬람의 알라는 기독교의 하나님인가요?

                이 선교사는 이에 대해 "이슬람의 알라는 무함마드가 속해 있던 꾸라이시(Quraish) 종족의 종족신이었으며 달신(Moon god)이었다는 것은 이슬람국가의 국기나 모스크 꼭대기에 달린 초승달을 보면 알 수 있다"면서 "이를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은 창조주라고 주장하는데, 알라는 삼위일체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신이며, 소통이 불가능한 신이며, '라트', '우짜', '마나트'라는 세 딸을 두었던 신(꾸란53:19-23)"이라고 말했다.
                또 "아랍인들은 이들을 알라의 딸들로 불러왔으나, 무함마드가 처음으로 그 관계를 단절시키고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창조주 유일신 전능자라고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Q2. 이슬람도 아담, 아브라함, 모세, 다윗, 예수를 선지자로 믿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성경적인 종교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선교사는 "이슬람은 무함마드가 만든 종교로, 성경과는 상관이 없는 종교"라고 선을 그었다.
                성경의 아브라함과 이슬람의 아브라함에 대해 "이슬람의 아브라함은 성경의 아브라함과 전혀 다른 인물"이라면서 "성경의 아브라함은 99세 때부터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꿨던 데라의 아들이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 가본 일이 없었으나, 꾸란의 아브라함은 어려서부터 아브라함으로 불리던 아자르의 아들이었으며, 이스마엘과 함께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카아바 신전을 지었다고 한다"고 설명했다.

                또 성경의 예수와 꾸란의 이싸에 대해 "꾸란의 예수는 이싸라고 하는데 이싸는 성경의 예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면서 "이싸는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으며 부활하지도 않았다(꾸란4:157-8)"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슬람에서) 이싸는 신성이 없고, 이싸는 무슬림이었으며 알라의 종이라고 하며, 이싸는 인류 구원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무함마드가 올 것을 미리 알려 주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꾸란61:6)"이라고 덧붙였다.
                이 선교사는 "이슬람의 꾸란은 성경의 이름을 도용하기는 했지만 성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영의 계시로 만들어진 경전"이라고 강조했다.

                Q3. 꾸란에는 모세5경과 시편과 복음서의 내용이 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이 선교사는 이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면서 "꾸란에 있다고 주장하는 모세 5경은 십계명이 없으며, 레위기가 전부 빠져 있다"고 했다. 또 "모세5경에 있는 구절들 중 몇 개만 인용되었을 뿐이며 인용된 내용들도 성경과는 매우 다르다"고 덧붙였다.

                이 선교사는 "무함마드가 꾸란을 계시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성경과는 계시의 근원이 전혀 다르다"면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없다(고전 12:3)고 하는데, 이슬람의 꾸란에 보면 예수를 주라고 부르는 자는 저주받은 자(Kafir)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러므로 꾸란을 계시한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성령이 아닌 정반대의 영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Q4. 이슬람의 테러는 일부 몰지각한 광신자들이 저지르는 것인가요?

                이 선교사는 "테러는 불신자들과 싸우라는 알라의 명령이며, 이를 지하드라고 한다"면서 "꾸란에는 '너희는 싸우기 싫어도 싸움은 너희에게 부과된 의무니라(꾸란2:216)', '소동이 사라지고 종교가 모두 알라에게 속할 때까지 싸움을 계속하라(꾸란8:39)', '할 수 있는 모든 수단(군대와 말)을 동원하여 불신자의 가슴에 공포를 불어 넣어라(꾸란8:60)'고 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계속해서 "유수프 알리(Yusuf Ali)역 영어꾸란에 보면 공포를 불어 넣으라는 부분을 테러를 가하라(Strike terror)고 번역하고 있다"면서 "그러므로 무슬림이 꾸란에 정통하며 꾸란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꾸란대로 하면 테러범이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선교사는 "IS(이슬람국가)의 칼리프(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아부바크르 알 바그다디는 무식한 광신자가 아니라 바그다드 이슬람 신학대학에서 철학박사(Ph.D)학위를 받은 사람"이라면서 "그는 이슬람 성직자이며 꾸란과 샤리아에 정통한 학자"라고 IS의 최고 지도자인 알 바드다디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Q5.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인가요?

                이 선교사는 "이슬람은 종교가 아니다"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철학 군사 외교 입법 사법 등을 망라하는 총체적인 시스템이며 공산주의처럼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라고 답했다.

                이어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만들 때 처음에는 힘이 없었기 때문에 평화를 말하며 포교했지만 후에 힘이 생기고 나서는 유예기간을 주었는데도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교도들은 어디서 발견하든지 살해하라고 알라의 이름으로 명했다(꾸란9:5)"면서 "지금도 이 명령을 실천하기 위해서 유럽에서 극장이나 식당에서 무슬림들을 제외하고 무차별 사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했다.


                Q6. 그래도 이슬람의 경전 꾸란에 보면 평화를 말하는 구절도 있지 않습니까? 꾸란에 살해명령이 있어도 그것은 그 당시 전쟁 상황에서 한 명령일 뿐 일반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요? 구약 성경에도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지 않습니까?

                이 선교사는 이에 대해 "성경의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말씀이야말로 아말렉의 죄를 명백히 지적하시면서 특정 부족에 국한된 그 당시에만 적용되는 명령이다"면서 "그러나 꾸란의 명령은 시간과 장소를 명시하지 않고 불신자(이슬람을 거부하는 자)에 대한 공격을 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꾸란에는 2장256절(종교는 강제로 하지 말지니라)로 대표되는 평화를 말하는 구절도 있고, 9장5절(불신자를 죽이라)로 대표되는 폭력을 말하는 구절도 있지만, 두 구절을 모두 실천할 수는 없다"면서 "그래서 이슬람의 만쑤크(Mansukh:취소) 교리 혹은 나쓰크(Naskh:대체) 교리가 등장하는데, 이 교리에 의하면 꾸란의 두 구절 사이에 내용상 모순이 발생한 경우는 처음 계시는 취소(만쑤크)되고 나중 계시로 대체(나쓰크)된다"고 설명했다.

                이 선교사는 "알라는 전능하시기 때문에 이미 내린 계시를 취소할 수도 있고 더 나은 구절로 대체할 수도 있다고 한다(꾸란2:106)"면서 "소위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이미 취소된 꾸란의 구절들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이용하면서 속이고 있든지 아니면 자신도 몰라서 속고 있든지 둘 중의 하나"라고 답했다.

                Q7. 일반적으로 이슬람은 여성인권을 탄압한다고 알고 있는데 이슬람 학자들은 이슬람이 여성의 인권을 존중한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것이 사실인가요?

                이 선교사는 "이슬람에서는 여성들의 인권을 남성의 절반 정도로 본다"면서 "꾸란에 의하면 여성은 상속도 남성의 절반만 받아야 하며(꾸란4:11) 여성의 법정 증언은 남성의 절반의 효력이 있다(꾸란2:282)"고 꾸란의 구절들을 인용해 이에 대해 설명했다.

                계속해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씨뿌리는 밭에 불과하다(꾸란2:223)"면서 이슬람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여성 인권 침해에 대해 지적했다.

                이 선교사는 먼저 "이슬람 제2의 경전인 하디스(Hadith)에 보면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남자가 자기 아내를 때릴 때 제 3자는 왜 때리느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이슬람의 율법이 되었다(Abu Dawood Book 11, Number 2142)"고 지적했다. 남편에게는 아내를 때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는 셈이다.

                또 "이슬람에서의 결혼은 남자가 여자의 몸값(Mehr)을 치르고 사는 개념이며, 한 번 결혼하면 평생을 같이 살아야 한다는 맹세를 하지 않아 언제든지 아내를 바꾸는 것은 알라께서 허락한 남편의 권리(꾸란4:20)"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슬람 율법에 의하면 4명까지 아내를 얻는 것은 이제 누구나 다 아는 상식(꾸란4:3)"이라면서 "이슬람의 이혼은 딸락(Talaq)이라고 하는데, 딸락을 구두로 혹은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아내에게 3번만 통보하면 이혼이 성립이 된다(꾸란2:229-230)"고 설명했다. 이슬람의 결혼은 평생의 서약이 아니며, 4명까지 아내를 둘 수 있고, 남편이 원하면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는 것.
                또 "혹시 여인이 강간을 당했다면 증인 4명이 없으면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꾸란24:4)"면서 강간은 대부분 증인이 없기 때문에 임신하여 배가 불러오는 피해자의 가족들은 그 수치를 견딜 수 없어서 자신의 딸이나 여동생을 살해하는데, 이를 명예살인이라고 하고, 이슬람권에서는 매년 평균 약 5000건 이상의 명예살인이 발생하고 있다"고 여성에 대한 강간과 명예살인이 일상화되어 있는 현실을 지적했다.
                이 선교사는 "이런 상황에서 여성 인권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는 판단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Q8. 무슬림들은 할랄 음식만 먹어야 하나요?

                이 선교사는 "이슬람의 율법 중 할랄은 허용된 것을 말하는데, 의무적으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와집(Wajib)이라고 하고, 금지된 것은 하람(Haram)이라고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무슬림들이 의무적으로 할랄 음식만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꾸란에 보면 기독교인들이 먹는 음식은 무슬림들에게도 허용(할랄)되었다고 하고(꾸란5:5), 또한 모르고 먹었든지 혹은 어쩔 수 없어서 먹었을 경우는 죄가 아니라고 했다(꾸란6:145)"면서 "그러므로 보통 무슬림들은 할랄에 그다지 예민하게 신경 쓰지는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 선교사는 "그러나 원리주의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할랄에 집착한다"면서 "할랄 인증이 없어도 이슬람권에 식료품 수출은 가능했으며, 할랄 인증을 받은 경우 매상이 다소 올랐다는 정도"라고 덧붙였다.

                계속해서 "할랄 인증 사업은 세계적으로 무슬림 인구가 급증하자 원리주의 무슬림들이 이슬람 율법을 가지고 돈벌이를 하려는 것"이라면서 "이슬람권에도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제과점은 '이 업소는 비무슬림이 운영하는 곳입니다'라는 간판을 붙이게 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파는 음식은 할랄이 아니라는 표시지만, 음식이 맛있다고 소문이 나면 무슬림들도 줄을 서서 사먹는 것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 선교사는 "그러므로 할랄은 무슬림들이 먹어도 된다고 허용된 것이지 할랄만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정리했다.

                Q9. 할랄 규정은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이 규정을 통과하여 인증을 받은 식품은 안전한 식품이며 건강식품이라고 생각해도 되는지요?

                이 선교사는 "할랄 규정이 까다롭다는 것은 이슬람 율법을 지키는 일에 까다로운 것이며 위생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면서 "단언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할랄 도축방법(Dhabiha)은 비위생적"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짐승의 목을 칼로 베어 피를 빼기 위해서 산채로 거꾸로 매달아 놓으면 발버둥을 치면서 피가 사방으로 튀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일반도축 방법은 전기 충격으로 기절시켜 놓고 잡기 때문에 피가 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 선교사는 할랄규정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첫째 도축자가 무슬림이어야 한다.
                둘째 짐승이 죽을 때 사우디아라비아 메카 방향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
                셋째 목을 자르면서 비스밀라(알라의 이름으로)라고 외쳐야 한다.
                넷째, 죽은 고기를 먹지 말라.
                다섯째, 피채 먹지 말라.
                여섯째, 술을 먹지 말라.
                일곱째,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이 선교사는 "이에 따라 알코올이 섞였는지 돼지고기 성분이 섞였는지 또는 음식의 숙성 내지는 발효 과정에서 자연 발생하는 알코올 성분이 몇 %나 섞였는지 등을 까다롭게 따진다"면서 "(그러나) 사실 발효과정에서 발생하는 소량의 알코올은 오히려 혈액순환을 돕기도 하며, 돼지표피에서 추출하는 젤라틴은 인체에 전혀 무해하여 유엔보건기구에서도 섭취 제한 규정이 없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러므로 이슬람 율법으로 금하는 것은 위생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면서 "오히려 짐승이 죽을 때 피를 빼기 위해서 목을 잘라 거꾸로 매달아 놓으면 죽는 순간까지 2~5분 동안 극도의 고통과 분노를 느끼면서 죽기 때문에 인체에 해로운 치명적인 독소가 생성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이것은 절대로 안전한 식품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Q10. 할랄 인증비용을 정부가 보상해 주는 것은 소규모 식품업체의 수출을 돕기 위한 것이므로 바람직한 정책이라고 볼 수 있나요?

                이 선교사는 "할랄은 이슬람 율법을 무기로 이용하는 원리주의자들의 돈벌이 수단"이라고 할랄 인증의 목적에 대해 말했다.

                계속해서 "원리주의자들의 최종 목적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의 영향력을 극대화하여 온 세상을 샤리아의 지배하에 두는 것"이라면서 IS(이슬람국가)나 탈레반, 알카에다, 무자헤딘, 헤즈볼라 등은 유명한 이슬람 원리주의 단체들이라고 설명했다.

                이 선교사는 "그러므로 할랄 인증 비용은 우리 안방을 파괴시킬 폭발물을 구입하는 테러자금으로 사용될 수도 있다"면서 "이를 정부가 지원하는 것은 중소기업을 돕는 것이 아니라 국가 안보에 해를 끼치는 일을 위해서 국민의 세금을 지출하는 것이기에 헌법정신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국가는 기업이 손익계산을 따져보고 투자여부를 결정할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만 제공하는 것이 옳다"고 강조했다.

                이 선교사는 "세계가 이슬람의 테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제 교회 지도자들이 이슬람의 정체를 모르면 한국교회 및 대한민국의 안보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왔다"고 우려하면서 "10가지 질문과 답변 형식으로 이슬람의 개요를 요약했는데, 필독하고 꼭 숙지해서 교회 성도들을 이슬람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어 "한 교회에 한 사람 정도는 이슬람의 전문가를 양육해야 할 것"이라면서 한국교회연합회와 한국장로교총연합회가 공동운영하는 이슬람선교훈련원(010-8220-5290)을 추천했다.





                [자료제공: 한장총 이슬람선교훈련원 및 한교연 이슬람대책 연구원]

                 

                 

                 



                 
                나는 하나님께...
                 
                나는 하나님께 나의 오만을 없애 달라고 청하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오만은 내가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네가 포기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인내를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인내는 고난의 선물이라고,
                또 그것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네 스스로 얻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행복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시"NO"라고 말씀하시며,
                나는 너에게 은총을 줄 뿐이지 행복은 너에게 달려있다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영혼을 성숙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성장은 네 스스로 하는 것이고
                나는 네가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가지를 쳐 줄 뿐이라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고통을 덜어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NO"라고 말씀하시며,
                고통으로 인하여 네가 나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하셨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여쭈어 보았다
                그러자 "YES, YES!" 하시며,
                그래서 당신 외아들을 나에게 보내 주셨다고 하셨다.
                 
                나는 다시 하나님께 나를 사랑하시는 것 만큼
                나도 다른 이를 사랑하게 도와 달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 아! 드디어 ...네가 드디어 바로 그 생각을 하였구나!"
                하셨다.
                 
                <펌글>>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 중에서
                선천성 근육병을 앓아 얼굴이 180도로 꺾어지는 인도 소년의 소식을 안타깝게 여긴 영국의 한 여성이 모금 운동을 벌여, 수술 비용을 마련했다고 영국의 지역 매체 리버풀에코뉴스가 19일 보도했다.


                인도 마디야 프라데시 주에 사는 마헨드라 마히르와르(13)는 태어날 때부터 목 부분 근육이 약해 머리가 곧추서지 못하고, 어깨와 가슴 위로 떨어지는 증세를 보였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마히르와르의 부모는 장애를 가진 아들을 치료해 줄 수 없었다.

                게다가 유전적 결함이 문제인데도, 마을 사람들은 마히르와르가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며 소년과 가족을 비난하고 따돌렸다.

                그러던 중 지난해 영국 리버풀 지역 파자컬리 고교의 행정실 직원인 줄리 존스(35)는 인터넷을 통해 마히르와르의 사연을 접했다.

                존스는 그의 수술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인터넷에서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우리 돈으로 2000여만 원을 모았다.

                소년의 가족에게 수술비를 전달한 존스는 최근 지난 3월 첫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인 마히르와르의 병실을 방문했다.


                존스는 “수술을 잘 마친 아이가 나를 보고 웃는데 눈물이 났다”며 “아이와 아이의 가족에 더 나은 삶을 선물하려고 모금에 참여해 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

                희귀병을 앓는 마히르와르와 그를 도와 모금을 한 존스의 이야기는 지난 19일 영국 지역 방송 채널5(Channel 5)에서 방영됐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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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시 트랜서젠더 보호법 규정


                뉴욕시에서 여성으로 변한 트랜스젠더에게 ‘그(He)’ 또는 ‘미스터(Mr.)’라는 호칭을 붙였다간 성차별로 법적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뉴욕 포스트에 따르면 뉴욕시에서는 앞으로 의도적으로 모욕감을 주기 위해 트랜스젠더에게 ‘그 남자’ 또는 ‘그 여자’라고 부를 경우 최대 25만 달러의 벌금을 부과 받게 된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앞으로 고용주가 성을 바꾸길 원하는 직원들의 의료 시술 및 수술 등을 방해하면 법적으로 처벌 받는다. 이미 트렌스젠더가 된 사람들에게 기존 성별을 지칭하는 대명사를 붙이는 것도 법적 처벌 대상이다. 직장에서 남성에게 넥타이, 여성에게 치마를 입게 하는 드레스코드 역시 차별적이라는 이유로 금지된다.
                 
                뉴욕시인권위원회는 18일 성 정체성과 성적표현 존중에 대한 새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직장에서 직원 또는 세입자 등이 요구하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은 고용주나 집주인은 적발시 최대 12만5천 달러의 벌금을 받을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트랜스젠더를 호칭할 때는 ‘그’나 ‘그녀’와 같은 남녀 이분법적 대명사가 아닌 세 번째 사람 단수 대명사로 ‘지(ze)’를 사용해 줄 것과, 소유격과 목적격을 말할 때는 ‘히스(his)·힘(him)’ 또는 ‘허(her)·허스(hers)’ 대신 역시 제3의 사람 ‘하이어(hir)’를 사용할 것을 권하고 있다.
                 
                뉴욕시는 미국내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트랜스젠더 보호법 규정이 강하다. 이미 2002년부터 성별에 따른 차별을 법으로 금하고 있는 뉴욕시가 또 다시 세부 규정을 통해 트랜스젠더 보호에 나선 건 트랜스젠더 숫자가 점차 늘어나면서 이들의 인권 문제 역시 중요 이슈로 부각했기 때문이다.
                 
                현재 뉴욕시에 거주하는 트랜스젠더 및 성별 규정이 모호한 사람은 총2만5명이다. 2011년 뉴욕인권위 조사결과 뉴욕시 트랜스젠더 중 1/3이 직장에서 차별을 받았고, 절반은 공공장소에서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언행을 들었다고 답했다. 

                 
                  출처: 크리스찬 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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