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홀로코스트, 이스라엘을 향한 수그러들지 않는 위협!

- 예루살렘 데이트라인 -


주/요/뉴/스
- 또 다른 홀로코스트, 이스라엘을 향한 수그러들지 않는 위협
- 미술가가 된 홀로코스트 생존자 “고통을 넘어 희망으로”
- 야지디족을 돕고 있는 ‘자유 버마 유격대(FBR)’
-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향한 도움의 손길

 
 펌글/엘샤다이


오찬에 동성애자들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관계자도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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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전 세계 동성애와 동성결혼 합법화를 꾀하기 위해, 2015년 2월 23일 초대 특별대사로 임명한 동성애자 랜디 베리(Randy W. Berry·사진) 특사를 한국에 보냈다. 이 랜디 베리는 특사로 임명되기 전에는 주 네덜란드 총영사를 지냈으며,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주 뉴질랜드 총영사를 역임했다.

이 동성애자 랜디 베리 특사는, 아시아국가들의 동성애와 동성결혼 합법화, 특히 '동성애차별금지법' 제정을 꾀하기 위해 이미 1월 30일부터 아시아 6개국(대만, 인도네시아, 태국, 베트남, 한국, 일본)을 순방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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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성애자 랜디 베리 특사는 한국에서 13시간 정도 체류하는 동안, 리퍼트 주한 미 대사를 접견하고 외교부를 공식방문 하였으며, 동성애자인 김조광수와 김승환, 임태훈, 하리수, 정욜, 류민희 변호사, 그리고 신승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부총무 목사 등과 함께 오찬을 나누었다. 그리고 남성동성애자단체인 '친구사이'를 공식 방문해, 동성애자인 김보미 서울대 총학생회장과 각 대학 동성애자 동아리 대표들과 간담회를 끝으로 출국한다고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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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과 시민들 사이에선, "군대내 동성애(항문성교)를 합법화 하라니, 미국이 우방인지 적군인지 정말 모르겠다", "오지랖 넓은 오바마의 임기와 함께 동성애를 지지하는 민주당 집권이 올해로 끝났으면 한다", "항문을 드러내 놓는 동성애 축제를 청소년들과 시민들에게 보여주고 자신들을 '혐오'하지 말라니, 어이가 없다", "오바마, 당신 나라나 잘 하세요" 등의 불만의 목소리들이 전해졌다.

내 마음의 별빛
                        최송연 
 
환란 풍파 휘몰아쳐
심히 고달픈 날이면
나는 바람 일렁이는 강가로 나가지
 
그곳에서
나는 듣는다네
위로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거짓과 위선이 난무하는 세상 
외로움에 눈물 흐를 제면
나는 수심 깊은 강가로 나가지
 
그곳에서
나는 느낀다네
저 수심보다 더 깊은 그분의 진실한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은
먼 하늘가에 걸린 달빛이 아니고
허공에 부유하는 무지개의 찬란함도 아니지
 
나는 믿네
좌절의 벽 저 너머
소망의 나라가 있음을...
 
그곳에는
거짓과 위선은 결코 설 자리가 없다는 것도
주의 진리의 말씀은 내 마음속의 별빛이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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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활동에 참석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파키스탄 사람들.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이슬람교 집회 ‘비쉬와 이즈테마
(Bishwa Ijtema)’에 참석했던 수 천명의 무슬림들이
열차들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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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바구니를 운반하는 과적차량이
나이지리아 주요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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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오스트리아의 한 고속도로에서 한 농장 주인이
차에 소 두 마리를 싣고 농장으로 소를 옮기는 장면이 포착됐다.
오스트리아 동물보호 단체는 현지 법원에 농장 주인을 기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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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쿤밍(昆明)시,
전동차 한 대에 7명이 함께 타고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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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빈곤 국가에서 석유 부국으로 일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온 노동자들이 모처럼만에 귀향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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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야자를 운반하는 장면.
인도에서는 이와 같은 풍경이 매우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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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표 값을 줄이고자 ‘공짜’로 기차를 얻어 탄
인도네시아의 학생과 노동자들.

인도네시아 철도 당국의 관리에 따르면,
수도 자카르타 주변에 국한된 풍경으로
매월 적어도 6명이 기차에서 떨어져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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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저가 열차는 항상 인원 초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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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같은 일본의 지하철. 직원이 승객들을 안으로 밀어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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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노동자들이
기차의 마지막 칸에 비좁게 타고 있다.
2005년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교의 중요한 명절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간 노동자들이 1700만 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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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쓰촨(四川)의 ‘트럭 택시’, 차의 앞 부분에만 10명이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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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1971년형 4인승 자동차에
17명이 탑승해 기네스 기록을 경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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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모든 사진들은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됐던 사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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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이슬람 국가로 만들기 위한 이슬람의 목표!

- 이스라엘 프론트라인 -


미국내 다양한 미국인 무슬림 조직들에게서 발견된 “북미 전략계획서”.

모함마드 아크람이 주장하는 “문명 지하드주의 프로세스라”

무슬림 형제단들은 이를 통해 미국 내부에서부터 시작해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그들의 무슬림 세계를 이루려 하고 있습니다.



 

 

옮긴 글/엘샤다이

믿음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믿는다.” 혹은 “믿음이 있다.”고 했을 때, 우리는 믿음이 믿는 사람 개인에게서 솟아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은 사람이 노력과 수양된 인격을 통해서 믿음이 나오는 것이라고 평가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노력이나 인격적 수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지식이나 도덕적 수준과도 상관이 없습니다. 인격적으로 아주 훌륭한 사람은 믿음이 좋고, 배우지 못하고 인격적으로 훌륭하지 못한 사람은 믿음이 좋지 않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혼자 갖는 것이 아니고 대상에 대한 신뢰의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믿음이나 인간관계의 믿음도 반드시 구체적 대상이 있습니다. 기독교의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입니다. 우리가 이 삼위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비롯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만물의 창조주이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이시고,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도록 인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창조의 하나님과 구원의 예수님과 우리를 돕는 성령님과 관계가 있는 사람만 믿습니다.

나는 나의 아내를 믿습니다. 내가 나의 아내를 믿는 믿음은 아내가 인격적으로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고 나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내를 믿는 믿음은 남편과 아내라는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아내가 아무리 인격이 훌륭해도 나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이 여자를 지금처럼 믿을 수 없습니다. 부부는 아무리 성격과 취미와 스타일이 다르고 성격 차이로 티격태격 싸워도 부부라는 그 관계에서 나오는 기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으면 부부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믿음이 부부의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이 아니고 부부의 관계가 믿음을 발생시킵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를 사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슴도치가 들으면 매우 기분 나쁠 이야기입니다. 고슴도치가 못생긴데다가 온 몸에 가시가 돋아나 얼른 보아서 누구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선입견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슴도치뿐 아니라 모든 동물은 새끼를 사랑합니다. 누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닌데 어미는 새끼를 사랑하고 새끼는 어미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합니다. 어미와 새끼의 관계로부터 그런 사랑과 믿음이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중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제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가 그리스도냐 하는 문제에 대해여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 11장 2절을 보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러 온 세례 요한도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마 16:13절 이하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으셨고, 제자들의 대답에 의하면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잔 중 한 사람이라고 했다 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인지 아니신지 매우 궁금해 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셔서 이곳 저곳을 둘러보시다가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실 때였습니다. 갑자가 예수님 곁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야이심을 믿지 않는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질문하였습니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여기 “마음을 의혹하게 하다.”는 것은 마음을 조이게 하다는 뜻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는 직접 “내가 그리스도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질문을 받았을 때도 보고 들은 바를 전하라고 하셨고,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도 이를 네가 알게 하신 이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궁금했습니다. 자기가 메시야라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속 시원하게 당신이 메시야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말하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역시 직접 그렇다 혹은 아니다 라고 대답하지 않으시고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의 마음은 간절하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구약은 온통 메시야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메시야를 기다릴까요? 메시야가 와야 모든 문제가 해결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해결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메시야 대망 사상은 인간 스스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메시야 대망 사상 배후에는 인간의 전적 무능과 전적 무지라는 성경적 인간관이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시겠다고 하셨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직 메시야가 오시기만을 학수고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은 유대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민족에게 이런 사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세상을 살아보니까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입니다. 이집트의 바로도, 바벨론의 느브갓네살도, 페르시아의 고레스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도, 로마의 시저도, 소크라테스도, 공자도 인간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 준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인간이 교만해서 안 그런 척 하지만 그래도 역사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인류가 이 땅에 존재 해 온 이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민족에게나 메시야 대망 론 같은 게 있습니다.

오늘 날도 우리가 정직하게 역사와 현실을 관찰한다면 메시야 대망 론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미국의 대선 예비 선거를 지켜보면서도, 한국의 총선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도, 정치와 경제와 환경 문제를 생각해도 문제가 해결 국면으로 가기보다는 점점 더 어려워져 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해 전만해도 전문가들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전문가들조차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정치 전문가가 내일의 정치를 예측할 수 없고, 경제 전문가도 내일의 경제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과학자도 과학의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과학이 고도로 발전하여 인공위성이 태양계를 벗어나는 데까지 날아가고, 인간의 DNA까지 읽어내고, 인간을 대체할 로봇이 등장할 것입니다.

최근 IT(정보기술), BT(생명공학기술), NT(나노 기술)로 대표되는 미래형 첨단 기술 등에서 한 개 이상의 기술이 중첩되는 융합기술을 기술의 융합(Convergence)이라고 합니다. 각 분야의 첨단 기술들의 융합은 현재의 과학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여 궁극적으로 신 산업 창출을 통한 고소득 달성과 산업 및 연구시스템의 융합을 촉발하는 시발점으로 크게 주목 받고 있습니다. 기술의 융합과 복합화(Complex)는 21세기를 열어가는 키워드로서 물리, 화학, 생물, 전자공학, 기계공학, 재료공학 등의 단위기술의 발달이 기술발전을 주도했던 상황에서 기술 간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 변화는 창의적인 과학기술, 인간과 사회를 위한 과학기술을 진흥해나가는 형태로 진화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기술의 융합화는 개별 기술의 단순한 개량뿐만 아니라 새로운 돌파 형 기술 개발을 가능하게 하고 기술혁신을 가속화시킬 것입니다. 그러나 융합기술들은 기술적 발현 형태 및 전개 양상에 따라 10년 또는 20년 뒤 인류가 기대하는 것처럼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게 될 수도 있겠지만, 반면에 소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기형의 몬스터가 출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나는 융합기술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지 상상하기도 싫습니다. 인간의 교만은 자신들의 과오를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괴상한 메시야 사상에 빠져 있습니다. IT, BT, NT의 융합 기술이 인간의 질병 문제, 식량 문제, 환경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융합 기술이 긍정적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인간의 이기심과 증오심과 미움과 시기심을 치료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칼에 찔러 피를 흘리는 로봇이 등장하고, 인간의 두뇌를 해킹하는 기술, 다른 사람의 몸을 도용하는 기술이 일반화 될 때 인간의 존엄성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내일을 예측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하게 될 것이고 더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지식과 과학 기술이 발전할수록 정의는 더욱 무시되고 힘과 폭력이 지배하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융합 기술이 고도로 발전하게 되면 우리의 영혼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까요?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질병과 고난으로 점철되었습니다. 유대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도 미국의 역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와 싸우고 민족끼리 싸우고 호족들끼리 싸우고 가문끼리 싸우고 가족끼리 싸우고 부부가 싸우고 성도들끼리 싸웁니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인간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불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한 불안이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적이 되게 합니다. 초월자가 나타나서 모든 문제를 해결 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메시야 사상도 일반적으로 설명하면 그런 것입니다.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사로잡혀가서 70여 년 동안 남의 나라에서 지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살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런 정복자들의 폭력적이고 무자비한 지배아래에서 인권과 자유를 유린당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절망만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폭력적 정복자들을 그냥 놓아두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구원자를 보내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페르시아나 로마가 아무리 막강해도 메시야가 오시면 그러한 제국을 제압하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가 오셨지만 그 메시야께 당신이 메시야냐고 묻고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그렇다고 하시자 그를 믿은 게 아니라 돌로 쳐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가 아니라 자기들이 기대하는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데만 온통 신경을 곤두세웠지 메시야와의 관계에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너무도 치명적입니다. 그들은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메시야를 죽였습니다. 믿음은 종교적 열정이 아니고 하나님과 메시야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뢰의 반응입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 요 10:26 -

출처:USA 아멘넷/황상하 목사 신앙칼럼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다가온 '동성애'

[긴급특집] 동성애 조장하는 사회


드라마, 방송, 소설, 코미디 프로까지 장악. 동성애자가 선망의 대상 되기도… 


<2015 제 6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 수록된 윤이형 단편소설 ‘루카’는 동성애를 다룬 작품이다.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동성애를 세련되게 그렸다는 평을 받았다.


지난해 픽션 창작 시간에 이 작품을 논한 뒤 학생들에게 동성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을 때 30여 명 가운데 3분의 2가 “찬성한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도 사랑이니까, 소수자의 인권은 보호해야 한다”라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학생들에게 “자녀가 동성 애인과 결혼한다면?”, “동성끼리 결혼하면 자녀를 낳을 수 없는데 괜찮은가?” 등의 질문을 한 뒤 동성애자들의 성생활과, 그로 인한 후유증을 전하자 몇몇이 손을 내렸다.


3분의 1 정도는 “사랑의 방식은 개인이 선택하는 거니까”라며 끝까지 동성애자를 지지했다. 대학교 3학년들의 동성애에 관한 견해가 요즘 젊은이들의 평균치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평등’과 ‘인권’에 주목한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겨를 없이 한 방향으로 열심히 달렸던 시절과 달리 개인의 권리가 중요해진 시대다. 때문에 동성애를 반대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소수자의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동성애 코드는 어느새 안방까지 진주했다. 동성끼리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 거부감을 느끼면 촌스런 사람이 되고 만다. 



▲ 방송 드라마를 포함한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는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심어주는데 앞장 서고 있다. 2010년 방영된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가 그 대표다.


드라마 ‘인생은 아름다워’의 파장 


공중파에서 활동했던 유명 개그맨들이 총집결한 tvN 예능 프로그램 <코미디 빅리그>의 인기코너 ‘여자사람친구’가 2015년 7월부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반응이 없으면 바로 폐지하는 <코미디 빅리그> 시스템 속에서 ‘여자사람친구’는 첫 출발부터 갈채를 받았다. 


양세찬과 트렌스젠더로 분한 장도연은 이른바 ‘썸’을 타는 관계다. 둘은 군대 동기로 설정되어 있다. 양세찬이 틈만 나면 사랑을 고백하는 장도연을 골탕먹이는 것이 웃음 포인트다.


마지막에 실수를 한 장도연을 양세찬이 돌봐줄 때면 ‘네가 여자로 보여’라는 노래가 흐르고, 두 사람이 야릇한 눈길을 주고받는 것으로 매회 마무리 된다.


예능이나 드라마에서 남자 배우끼리 호흡이 잘 맞으면 어김없이 ‘브로맨스’ 운운하는 기사가 뜨고 ‘사귀었으면 좋겠다’는 댓글이 달린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남자 출연자들이 티격태격하면 MC가 “둘이 사귀냐?”며 놀리고 방청객들은 “사귀어라! 사귀어라!”라며 장단을 맞춘다.


동성애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진 배경에는 2010년 방영된 김수현 극본 <인생은 아름다워>가 있다. 아름다운 제주도 풍광과 아기자기한 대가족의 삶을 담은 드라마가 63회에 걸쳐 방영되었다. 내과의사와 사진작가로 분한 송창의와 이상우가 동성애 커플로 나와 큰 관심을 끌었다.


두 남자의 사랑을 당대 최고 작가가 설득력 있게 그리자 초반의 비판이 점차 호의적으로 바뀌었다. 



‘톱 게이’ 홍석천을 선망하는 사람들 


‘동성애 미화 드라마’라며 시청거부운동을 벌인 일부 네티즌들은 ‘이 정도면 막장 아닌가’ ‘소름끼쳐서 못 봐 주겠네’ ‘동성애 조장도 정도껏 해라’ 등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시청률 20%에 육박하는 인기 드라마의 바람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부모가 두 사람의 사랑을 인정하면서 동성애는 대가족 속에 녹아드는 정당한 사랑이라는 인식이 퍼졌다. 동성애 확산을 막기 위한 각종 노력들이 이 한 편의 드라마가 덮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파급력은 막강했다.


2000년에 커밍아웃을 한 후 활동을 못하고 있던 홍석천을 방송에 복귀시킨 인물 역시 김수현 작가다. 홍석천이 게이라는 사실을 대중에게 알렸을 때 가수 조영남은 신문 칼럼에 홍석천을 혁명가에 비유하며 “4·19나 5·16 전야를 방불케 했다. 그는 자신의 생애 이래 최대의 용기를 발휘했다. 홍석천은 목숨을 걸고 혁명 전선에 나섰다”고 흥분했다.


홍석천의 커밍아웃을 계기로 각종 매체에서 여론조사를 했을 때 20대에서는 60%가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답했고, 자신이 “동성애를 할 수도 있다”고 답한 사람이 14.4%였다.  59.2%가 홍석천의 방송출연 정지를 적절치 않은 조치라고 답했으며, 83%는 동성애자들이 직업 선택에서 동등한 권리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홍석천은 방송에서 퇴출되었다. 김수현 작가가 2003년 <완전한 사랑>에 홍석천을 출연시켰고, 드라마 출연 이후 홍석천은 방송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가장 안전한 오빠이자 가장 위험한 형’이라고 말하는 홍석천은 이태원에서 9개의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연매출 70억 원을 올리는 성공한 동성애자의 표상이다.


현재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서 전문 요리사로도 활동하는 홍석천은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남녀 연예인들을 가장 편하게 맞아주는 상담가, 힘든 상황에 빠진 누나의 두 자녀를 입양하여 뒷바라지를 하는 아빠 등등 홍석천의 미담이 끊이질 않는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동성애 코드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웃음을 유발하는 홍석천은 동성애자에 대한 거부감을 불식시킨 것을 넘어 ‘능력 있고 성실하며 착하다’는 인식까지 심어주고 있다.


동성애자들은 스스로를 성 소수자로 부른다. ‘보호 받아야 할 소수자’인만큼 언론에서 동성애에 관한 부정적인 기사를 찾아보기 힘들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한국기자협회와 함께 동성애와 에이즈의 관련성을 나타내는 기사를 쓰지 못하게 하는 인권보도준칙을 만들어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 28일 국민일보가 퀴어문화축제 실체를 파헤친 기사에서 ‘동성애자들은 에이즈·성 매개 감염병 건강진단 대상자와 함께 감염위험집단으로 분류돼 있다’는 내용의 보도를 하자 미디어오늘이 바로 관계자의 말을 빌려 ‘에이즈의 주 감염 경로는 성 접촉이고, 안전하지 않은 성 접촉을 했을 때 감염되는 것이므로 고위험군엔 꼭 남성 동성애자만 있는 건 아니다’는 기사를 실었다.


예전에는 어땠을까. 1993년 동성애로 에이즈에 감염된 김경민(가명·30) 씨가 <겨울 허수아비도 사는 일에는 연습이 필요하다>를 발간했을 때는 분위기가 달랐다. 1985년 우리나라에 최초의 에이즈 환자가 보고된 이래 실제 에이즈 환자가 등장하자 언론의 반응이 뜨거웠다.


당시 주간신문 기자였던 필자는 강남구 도곡동에 위치한 ‘에이즈 퇴치를 위한 한국시민 모임’에서 주최한 간담회에 참석하여 취재를 하고, 김경민 씨와 전화 인터뷰도 하여 에이즈와 동성애에 관한 기사를 썼다.


<겨울 허수아비도…>에는 김경민 씨가 동성애에 빠진 경위와 종로 일대 4000원 짜리 방에 사는 동성애자들의 실상, 동성애로 인해 에이즈에 걸린 과정이 충격적으로 그려져 있다.


짧은 기간에 6만 부가 팔릴 정도로 화제가 되었고 김경민 씨는 TV에 출연해 커튼 뒤에서 떨리는 음성으로 에이즈와 동성애에 관한 실상을 전했다. 


당시만 해도 동성애와 에이즈의 상관관계에 관한 기사를 쓰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고,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던 시대가 아니니 댓글에 대한 부담도 없었다.


김경민 씨가 각종 매체에서 에이즈에 관해 경고하자 건강 정보를 알려주는 ‘텔리퓨처’에 하루 5000여 명이 전화를 했다. 버튼을 눌러 에이즈에 관한 정보를 들은 뒤 2000여 명이 국립의료원으로 전화를 했고, 17명의 에이즈 연구원들은 폭주하는 상담 전화에 응해야 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홍석천의 커밍아웃으로 동성애가 조명을 받으면서 모두들 커밍아웃, 퀴어, 바이 섹슈얼, 트랜스, 이반(異般) 등 낯선 문구를 익히느라 바빴다.


이제 길거리에서 손잡고 다니는 남자들,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보며 애정을 표현하는 남자들을 종종 만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아슬아슬한 팬티만 입고 퀴어 축제에 참여하여 거리낌 없이 동성애자임을 알리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예전만큼 자세한 보도가 이어지지 않고 있다. 



중년이 소년을 유혹할 때 


동성애 인구가 늘어나 축제까지 열 정도라면 더 자세한 사항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 동성애는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어떤 식으로 성행위를 하는지, 그로 인한 부작용은 없는지, 알리는 게 당연하건만 동성애에 대한 정당성만 주장할 뿐 그로인해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분위기다.


동성애의 가장 큰 폐해는 성인이 미성년자의 성(性) 정체성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1990년에 발간한 장정일의 소설 <아담이 눈뜰 때>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 나이 열아홉 살, 그때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은 타자기와 뭉크 화집과 카세트 라디오에 연결하여 레코드를 들을 수 있게 하는 턴테이블이었다.’


소설에서 아담은 동성애자와의 하룻밤 대가로 턴테이블을 받게 된다. 매일 한 번씩 시내 중심가에 있는 오디오점 앞에서 구경하는 소년에게 주인인 중년 남자는 안으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친절한 아저씨는 소년에게 자신과 하룻밤을 보내면 레코드 플레이어를 주겠다고 제안한다. 열아홉 치기에 들떠 있던 아담은 ‘모르긴 해도 그것은 똥을 누는 것과 같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그를 따라간다.


‘핀셋으로 살에 드러난 상처를 만지는 것 같이 오싹한 경험’을 하고 턴테이블을 얻은 아담은 ‘성인이 성인을 상대로 욕망을 행사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페도파일(소아 성애자)은 용서할 수 없다’고 속으로 원망한다. 중년 남자는 “앰프가 필요할 거야. 생각 있으면 오라구”라며 또 유혹하지만 아담은 더 이상 그를 만나지 않는다.


현실에서 가난한 소년이 유혹을 당하면 어떻게 될까. 에이즈 환자 김경민 씨는 중학교 2학년 때 극장에 갔다가 한 아저씨의 손길을 통해 이상한 체험을 한 후 다시 고등학교 2학년 때 극장에서 만난 동성과의 관계를 통해 동성애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고백했다.


타인에 의해 성 정체성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 힘이 센 쪽에서 약한 쪽을 동성애로 끌어들인다는 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문제다.


청소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동성애에 관해 자세히 알리는 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흡연이 각종 질병을 유발하고, 비만이 동맥경화를 부른다는 정보처럼 동성 간의 성행위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병에 대해 고지하는 일, 알권리를 과도하게 주장하는 시대에 꼭 필요한 조치다.



- 이근미 미래한국 편집위원



출처: 미래한국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645)




10대 청소년까지 파고든 동성애!


'선'을 '악'하다 하고, '악'을 '선'하다 하는 시대...

'죄악'을 '인권'으로 포장하여 멸망을 자초하는 현실...


미디어에서 정말 아무렇지 않게

'브로맨스'라느니 '남남케미'라느니...

온갖 표현으로 동성애를 미화시키는 짓들을 서슴치 않으며,

동성애를 마치 정상적인 개인의 성적취향인 것처럼 여기는

흐름이 강해질수록, 이런 성적타락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동성애의 심각한 폐해와 에이즈와의 관계에 대해

팩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상입니다.


아직도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가치판단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이 있다면,

진실을 바로 알고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그와중에 박원순의 서울시는 올해도 어김없이

동성애자들이 광란의 파티를 서울광장에서 열 수 있도록, 

승인해 주는 기막힌 행태를 보입니다.


서울시, 서울광장 동성애 축제 최종 승인.. 교계 강력 반발!




서울시가 결국 동성애자들에게 서울광장을 열어줬다. 서울시는 지난 14일 서울광장 홈페이지에 ‘6월 11일 제17회 퀴어문화축제를 수리했다’고 밝혔다. 행사 성격은 ‘공연’이며, 동성애자들은 자정부터 오후 12시까지 24시간 서울광장을 사용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889276동성애자 전용컬럽

어떻게 하면 거룩한 삶이라는 위대한 목적에 이를 수 있는가? 거룩한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방편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려면, 우리가 율법을 준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준비시켜 주셔야 한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네 가지 자질이 있다. 이런 자질을 다 가지고 있어야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그러나 이런 자질은 그리스도인의 성장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 명으로써 저 이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14:31). 모든 어둠의 권세와, 세상과 세상의 유혹들과,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와 타락을 대적하여 싸움에 나가면서, 악한 세대와 맞서 싸울 영적인 준비가 바로 되었는지 점검하지도 않고 나갈 것인가? 어리석게도 많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본성적인 능력만을 가지고 싸우러 나간다. 그 결과, 항상 패할 수밖에 없는 불신자들만큼이나 영적인 싸움을 싸울 능력이 없다. 이 말을 믿으라. 우리가 가진 본성적인 능력으로는 절대 죄와 악에 맞설 수 없다! 그보다 훨씬 더 탁월한 무엇이 필요하다!

 

경건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반드시 주셔야 하는 첫 번째 자질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중심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맹목적인 충동으로 복종할 수 없다. 이성 없는 동물과 같이 본능대로 행동할 수 없다. 죄를 피하고 하나님께 복종하고자 하는 총체적인 내면의 성향이 있어야 한다. 자연적인 상태로라면 우리 마음은 악을 향해 치닫는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로는 죄와 사탄의 종 노릇하는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미워하는 사람이 그것을 지킬 리 없다! 계명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그저 그런 관심만 가지고는 계명을 지킬 수 없다. 모든 계명 중에 가장 위대한 계명은 온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분께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분의 뜻과 그분의 방식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그분을 가장 탁월한 분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든 일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사로잡혀서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기뻐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송이꿀보다 더 달콤해야 한다(19:8). 평생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기뻐하고 바라고 목말라해야 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악된 정욕을 이겨야 한다. 우리 자신의 죄와 싸우고, 그것을 미워해야 한다(5:17, 36:4).

 

참된 순종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즐겨하는 것을 말한다! 노예가 자유를 갈망하듯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즐거워하지 않고서는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질 수 없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되어야 하고, 온 마음을 다해 죄를 미워해야 한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청결한 마음에서 흘러나온다(딤전1:5). 우리의 마음이 먼저 악한 성향과 더러운 생각에서 깨끗해져야 한다. 마음이 새롭게 된 다음, 거룩을 향해 돌아서야 한다. 거룩한 삶을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죄의 정욕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지 않는가!

 

우리의 영혼에서 다뤄야 할 가장 큰 악은 남아 있는 죄이다. 남아 있는 죄로 인해 우리는 본성적으로 악을 향해 나아간다. 남아 있는 죄에서 모든 실재적인 죄악이 나온다. 죄짓는 것을 멈추고 싶다면 먼저 이런 본성적인 성향이 사라져야 한다. 이런 성향을 없애려면 먼저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내적인 갈망이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 이런 새로운 마음의 성향이 없다면 계속 뒤로 미끄러질 수밖에 없다. 선한 일은 전혀 할 수 없게 된다. 우리에게 설사 자유의지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죄를 향한 자유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역사를 통해 죄에 종 노릇하는 우리를 풀어 주신다.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셔서 거룩으로 회복하신다. 돌과 같은 마음을 제하시고, 어린아이의 살과 같은 마음을 주신다(36:26,27).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마음에 할례를 베푸신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신다(12:2). 이런 역사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내면의 생명이 가진 경향을 바꾸신다. 이제 우리는 무엇이든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우리 마음에 할례를 베푸셔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악을 향한 갈망을 선을 향한 갈망으로 바꾸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모든 참된 순종의 원천이다.

 

경건한 삶을 위한 두 번째 자질은, 하나님과 화평케 되고 하나님께 용납되었음을 전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의 구렁이 완전히 채워졌고,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아래 있음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결과요 가장 큰 복이다. 우리는 죄를 용서받았고, 의롭게 되었고, 하나님과 완전히 화평케 되었다(4:5-7). 일단 의롭게 되면, 진실로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거룩한 삶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루실 구원 역사를 확신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화평케 된 것을 분명히 확신하지 않으면서, 내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복음 진리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어 하나님의 선한 일에 힘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룩한 삶을 이야기할 때는 우리의 부르심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진실로 율법에 순종하고 싶다면,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과, 그분의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그분의 은총 아래 사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순종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먼저 자기 백성을 죄책에서 풀어 주사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후에,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신다. 용서는 선행이라는 마차를 끄는 말이다. 마차를 말 앞에 두지 말자! 자신의 노력으로 거룩한 삶을 살려고 생각해 낸 모든 방법을 버리자!

 

거룩한 삶을 위한 세 번째 자질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 행복하고 영원한 장래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원한 안전이다. 영원한 안전을 확신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첫째, 천국에서 누릴 복된 장래에 대한 확신 없이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며 살기란 불가능하다. 진정한 순종은 바로 이 확신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둘째, 아담의 타락 이래로 하나님께서 천국의 영광에 대한 분명한 소망을 통해 자기 백성들을 순종으로 독려하시는 것을 성경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12:2).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도들은 무수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고후4:16-17). 히브리서의 그리스도인들이 갇힌 자를 동정하고 소유를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알았기 때문이다(10:34). 사도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자기가 당하는 모든 고난도 헛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세상에서가장 불쌍한 자들이라고 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라고 말한다(고전15:58). 하나님은 영광의 소망을 주셔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신다(6:11-12,요일3:3).

 

셋째, 영원한 하늘의 복락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과 조화를 이루는지 깨닫고 이 복락을 확신하는 사람은 죄악된 삶을 살지 않는다. 거룩한 삶은 우리가 누리는 구원의 일부다. 영생을 확신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세상과 육체보다 하나님을 더 바라게 된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얼마나 선한 분인지 알수록 하나님이 더 사랑스러워지고, 하나님이 사랑스러울수록 우리 마음은 더욱 하나님을 향해 타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치 않다(11:16). 하나님은 사랑의 사슬로 우리를 그분께로 이끈다. 그중 한 가지 방법이 바로 이 놀라운 특권과 은택을 우리 앞에 펼져 놓는 것이다. 하나님이 베푸신 가장 위대한 은총 가운데 하나는, 경이롭고 영원한 기업을 값없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처럼 위대한 기업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더욱 사랑하지 못할 사림이 누구인가?

 

거룩한 삶을 위해 필요한 네 번째 자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대로 살기 바라고 또 살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주셨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열망뿐 아니라 살 수 있는 능력도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경건하게 사는 것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쁜 습관을 조금 바꾸고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될 줄 안다. 거룩하게 살려고 한다면,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야 한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진실로 겸비해진 적이 없는 사람이고, 자기 마음이 얼마나 악한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입으로는 원죄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의 진짜 목표는 단순히 몇 가지 습관을 바꾸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자. 나쁜 습관을 만들어 내는 타락하고 죄악된 욕망을 죽이는 것이 진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우리는 죄악된 탐심을 충족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대신 거룩한 사랑과 거룩한 욕구로 채우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때에 비로소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쉽고즐거워진다!

 

우리를 부르사 하게 하신 일을 우리가 바라고 또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지혜를 따라 충분한 능력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불러 위대한 일을 하게 하실 때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주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하시는지 성경은 잘 보여준다.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을 생각해 보라.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순종의 삶을 살라고 격려하기 전에, 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죄가 그들을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시켰다(6:13-14). 그는 마귀의 궤계를 대적할 수 있도록 하나님과 그분의 능력 안에서 강건하라고 말한다(6:10-11). 요한은 신자들이 이미 강하고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에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할 필요가 없다고 격려한다(요일2:14-15).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이 이미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라고 우리를 독려하신다.

 

- 월터 마샬, 성화의 신비, pp 39-61

 

출처: 청교도 아카데비/강대식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엄마, 새로 산 내 운동화 어딨어요? 엥~! 학교 늦겠는데!” “그건 네가 네 방에 가져다 두던 것 같던데 왜 밖에서 찾느라고 그러냐, 아가, 너무 허둥대지 말고 네 방에 들어가서 다시 한 번 찬찬히 찾아보렴.”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 숟가락을 내던지고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가면서 평소와는 달리 소리부터 질러대는 어린 딸을 타이르시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몸이 유난히 허약했던 어린 시절, 나는 책벌레란 소린 들었지만, 운동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학교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전날 저녁서부터 가슴이 설레었고 새벽부터 일어나 방방거리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잘 모르겠으나, 내가 어린 시절에는 봄, 가을 운동회란 것이 있었고, 이 운동회는 학교의 행사라고는 하지만 실은 그 지역의 큰 축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운동회 날이면 학부모는 물론이고 학교 인근 마을 사람들도 일손을 멈추고 맛있는 도시락을 싸 들고 와글와글 학교 마당으로 모여들었고, 경기 종목도 다양해서 학생들 뿐만 아니라 선생님과 학부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어른도 아이도 함께 어우러져 신나는 축제의 한마당을 연출했던 즐거운 날이었다.

여러가지 다양한 종목의 경기가 펼쳐졌지만, 그중에서 모두에게 인기 있었던 종목은 단연 ‘줄다리기’였다. 유약하고 운동신경도 둔하기만 했던 나에게도 유난히 기대되었던 종목은 역시 줄다리기였다. 나는 어떤 종목에서건, 개인기만으로는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비록 어린 나이지만 이미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ㅠㅠ 그러나, 단체전은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줄다리기 같은 종목은 축구처럼 고도의 테크닉과 뛰어난 개인기를 요하는 종목도 아니다. 그저 줄을 잘 서, 그날 힘센 아이들이 많은 팀에 잘 배치되기만 하면 함께 승자가 될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줄다리기를 할 때, 선생님은, 힘이 세고 건장한 아이들은 앞에 세우고 나처럼 유약한 소녀들은 맨 꼴지에 세운다. 맨 뒤에 서 있는 사람도, 물론 있는 힘을 다해 줄을 당겨야 하겠지만, 이기고 지는 일에 별반 도움이 안 되는 조역일 뿐이다. 아닌 말로 줄을 잡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여도, 앞에서 힘센 아이들이 잘 해내기만 하면 모두 함께 승자가 되는 것이다! 학생들은 청군 홍군, 혹은 청군 백군으로 나뉘었고, 모두 자신이 소속된 팀의 칼러를 상징하는 청색 홍색 또는 백색의 예쁜 띠를 하나씩 건네받아 머리에 둘러 표식을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팀은 색깔로 정해지고, 내가 좀 약해도 내가 속한 팀이 강해서 그들이 이겨주기만 하면 나도 덩달아 이기는 것이 되니, 이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일인가!

영적인 일도 그러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 흘리신 피를 믿고 구원(Salvation)받는 것은 한순간이다. 나의 공로가 전혀 가산되지 않는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 31)”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그 순간은 영적으로 보면, 내가 어느 팀에 속할 것인가 결정지어지는 순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할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 어둠의 권세자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에게 속할 것인가, 소속팀(?)이 결정지어지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절 말씀), (요 5:24, 요1서5:12, 요3:36, 요10:28-29 절을 읽고 참조)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상 술어로는 기본 구원론이라고 하며,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의 법칙이 성립된다. 구원에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것 외에 우리(성도)가 해야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기본 구원론, 여기에 우리(성도)는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 포함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이니 성도의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 회개만 하면 된다,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다 대는 잘못된 구원관이 오늘날 기독교를 싸구려 구원론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성도)가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 한순간에 공로 없이 값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확실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에게 하나님 자녀로서의 거룩한 의무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성도는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 되겠다.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 구원론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성도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신앙 자세로서 삶에서 승리하는 신앙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까지 ‘번영신학’ (prosperity theory, prosperity gospel)은 성경을 왜곡시킨 것이며, 주님의 말씀을 변질 시킨 누룩과 같은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무슨 소리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분도 계실 것이다. 사실,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와 번영신학 (prosperity theology, prosperity gospel) 은 같이 설 수 없다. 하여, 수많은 개혁교 신학자들, 목사님들, 성도님들이 오늘날 이 번영신학이란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반대로 우리 중에는 번영신학을 논하기만 하면, 오순절 교회를 비방한다, 라고 생각하며 섭섭해 하시는 분도 계신다. 그 모든 것은 뒤로하고 우리는 서로 말씀의 떡을 떼며, 내가 어느 교단에 속했는가 어느 교단이 더 우월하고 더 열등한가 다투기보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좀 더 바로 깨닫고 바로 믿을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서로 격려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단은 제외)

진정한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이란 무엇인가?

최근 우리나라에는 '고지론(高地論)' 이 왕성하다고 한다. 이 "고지론(高地論)”이란, 기독교인이 선한 영향력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위치에 오르는 것이 더욱 그 파이를 크게 한다고 하는 지론으로서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의 또 다른 모습이며,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도 성공적인 위치에 도달함으로서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더욱 확대하자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물론, 과거 우리나라의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은 수많은 성도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각종 질병, 가난, 고통, 그리고 불운 등에 아니 심지어 사회적 현상인 전쟁과 정치에도 영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해서, 회개하지 않아 당하는 고난이라 주장한다는데 있고, 고지론(高地論), 번영신학의 취약점은, 십자가의 도, 좁은 길을 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거스린다는데 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으니 나 또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는 고백과 결단, 주어진 모든 환경을 감수하는 신앙이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런 희생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기꺼이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겠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 중심의 신앙, 좁은 길, 십자가를 따르는 바른 신앙이다. 이렇게 될 때, 순교도 가능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본래 프라스퍼러스(prosperous, prosperity)란, ‘번영’외에도, ‘잘 해내는(doing well), 성공하는(successful), 그런 뜻을 지니고 있다. 성도들이나 목사님들이 승리하는 믿음을 이야기 할 때, 대체적으로 이 prosperous란 단어를 ‘번영’에만 국한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신, victory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Victory는 완전한 승리란 뜻이 담겨져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단 한 번의 그 십자가 사건이 완전한 승리(victory)인 것이다! 그러니까, victory가 결과라면, prosperous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기본 구원론( 그리스도가 이루신 (victory)와 삶에서 지속하는 성화론(sanctification), 승리하는 믿음(prosperous faith)은 반드시 별개로 분리하여 생각해야 한다.

고로, 필자는, 번영(prosperity, prosperous)란 단어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뒤바뀐, 잘못 사용되는 (prosperity gospel)이 문제라고 본다. 내가 주를 위하여 일하느냐? 주님이 나를 위해, 육신만을 위해 일을 해 주시느냐?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대 번영 신학이 위험한 것은 바로 우선순위가 뒤바뀐 신학이라고 보기 때문이라고 본다. 제대로만 활용한다면 나쁠게 없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린후 5:7)”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은 원수의 저주성 폭언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성도라면, 그 유명한 다윗 왕의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대개 ‘소년 다윗과 골리앗 장군’ 아니면,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후, 사건 은폐를 위해 충신 '우리야'를 죽인 다윗 왕의 이야기 정도다. 이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극히 사소한 일부로서 다윗의 신앙과 삶을 부요케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게 된 결정적 동기는 아니란 것이다. 다윗, 그가 ‘프라스프러스'(prosperous) 신앙의 소유자일 수 있었던 결정적 동기, 그 숨은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므이’의 저주성 폭언이다! ‘시므이’의 저주성 폭언 속에 승리의 비결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 같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에게로 돌리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삼하 16: 7-8)

‘시므이’의 저주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의 그 저주성 폭언마저 자신의 죄에 대한 채찍으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겸허함으로 받았다. 바로 이것이다! 다윗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원수의 저주성 폭언에 대처하는 방법, 프라스퍼러스(prosperous, doing well)신앙, 성화된 신앙으로 정진할 수 있느냐, 아니면, 옛사람 그대로인 실패자로 남느냐 갈림길의 시금석을 가르는 놀라운 비밀이 원수의 저주성 폭언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잘 활용한 믿음의 거장이다!

반면, 알량한 자존심을 꺾지 못해 울컥울컥 순간순간 보복 심리로 기울고 있는 초라한 내 자신, 감정을 다 풀었노라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틈만 있으면 미해결의 감정이 속을 헤집고 올라와 낑낑대는 몸부림, 위장된 겸손, 자기 실력을 가꾸고 다듬어 빛을 보려는 생각보다 쓸데없는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상대를 공격할 틈만 노리는 비루한 사울의 편협함, 내 가슴 시리고 아픈 것만 생각하고 형제의 가슴이 시리고 아픈 것을 다독일 줄 모르는 유아적 사고, 다윗처럼 듬직한 감정으로 대범함을 보이는 대신, 감정처리가 잘 되지 않아 들쑥날쑥, 팔팔끓는 냄비처럼 찼다 더웠다 바글대는 사울의 얄팍함, 성령의 사람답지 못한 이런 한심한 자화상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원수가 저주하는 말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지 못한다. 그것은 철저하게 사단으로부터 오는 사악한 음성이라며 혈기 내고, 비아냥거리고, 한 개 받으면 열 개로 되돌려주지 못해 안달이다. ‘당신이 사단이다, 아니다, 네가 사단이다.’ 들어본 적 있는 소리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가 아닌 내 마음에서 솟아나는 소리들이기에…

물론, 다윗은 우리네 범인과 다른 점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광야의 도망자 신세가 된 처량한 다윗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맹렬한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 왕의 부하 장수 중 하나인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허락만 하시면 당장에 칼로 쳐죽이겠다고 왕께 간언했다. 그때 다윗 왕의 반응,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너무 허허롭고 너무 멋지다. 그 호기, 그 믿음을 배우고 싶다.

내가 만약, 이웃의 저주성 발언을 들었을 때,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고, 혹시 실수로라도 잘못된 길에 들어갈 것을 염려하셔서 속히 그 자리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나는 프라스퍼러스(doing well, successful)신앙을 소유한 성도라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줄다리기 시합 같은 영적 경기장에서, 나도 승리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연약하고 힘이 없어, 언제나 꼴찌 인생을 사는 것 같다. 그나마 굳게 잡고 있어야 할 말씀의 줄을 맥없이 놓아버리고 멀리 아주 멀리 달아나고 싶으리만큼 피곤한 때가 너무 잦은 것도 탈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내가 잡고 있는 구원의 밧줄만은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하는데, 손바닥이 아프고 쓰리다 하여, 시합 도중에 잡고 있던 줄을 슬그머니 놓아버린다면, 나는 ‘탈락자’가 될 것 뿐이다. 내가 강하든지 약하든지 상관없이 내가 줄을 놓아버리는 그 순간, 나는 이미 그 팀의 소속 요원이 아닌 것이다. 어찌하던지, 주님의 은혜 속에서 승리(doing well)해야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벗어난 자는 주께서 이루어두신 찬란한 승리(victory)와는 무관한 불쌍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 말세가 가까워져 옴을 볼수록, 더욱더 주께 바싹 붙어 있어야 겠다.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 주님께 붙어 있는 신앙,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가, 주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의 힘, 주의 길, 십자가의 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 12)”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케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 10)” 

출처: 목양연가/글: 최송연의 신앙 칼럼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능력으로 죄악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고, 시련이나 고난에 흔들리지 않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실패와 범죄를 보며 손가락질하거나 비난을 하기 전에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으로 겸허히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 고린도전서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 갈라디아서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사람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여 아내를 누이라 하였다가 빼앗기는 똑같은 실수를 두 차례나 반복하는 창피스러운 우리의 위대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행동은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준다 할 것입니다.

또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아브라함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랄 땅은 애굽으로 가는 길목, 지중해변 블레셋 지역입니다. 또다시 아브라함은 사라와 함께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이곳까지 흘러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람들도 여럿 있고 이스마엘과 하갈도 있었을 텐데 여전히 정한 곳에 집도 없이 장막을 치고 장막을 걷으면서 양과 소들의 뜯을 풀과 마실 물을 따라 계속 이동하는 목자의 삶을 살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목자의 삶은 양떼를 따라가는 삶입니다. 양떼를 이끄는 삶입니다. 나그네의 삶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하신 주님도 목자의 삶을 사셨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목자들입니다. 성경은 이들의 삶을 통하여 진정한 목자로 오실 주님의 모습을 조금씩 보여주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과 같은 완전한 목자가 아니었습니다. 완전하지 못 한 아브라함은 그래서 목자의 삶과 나그네의 삶 가운데서 항상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고 흔들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99세, 89세 영감, 할머니였습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눈이 삐었는지 89세 할머니인 사라를 데려다가 아내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도대체 사라가 얼마나 젊고 아름다워 보였으면 그랬을까요?
저도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찬양대의 찬양이 천국의 합창 같았고 찬양하는 자매들과 형제들의 모습이 천사들과 같이 아름다워 보였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름답습니다. 사라도 하나님의 사람이었기에 아비멜렉의 눈에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을까요?

아니, 사라는 그 때 정말 젊고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로 하여금 이삭을 낳게 하기 위하여 젊은 몸으로 만드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젊고 아름답게 하신 사라를 보고 반하여 아비멜렉이 데려갔으니 하나님이 가만 보고 계실 턱이 없습니다. 그 밤에 당장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혼을 내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사라가 아브라함의 누이인 줄만 알고 데려왔고 아직 가까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던지 아베멜렉은 사라를 돌려보내면서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를 주고 은 천 개를 따로 주면서 사죄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내리셨던 진노와 징벌을 푸셨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이야기는 그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가 기록된 것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연약한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키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라 할 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잡힌 바 되면, 우리를 사라처럼 젊고 강하게 하실 것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으면 창피스럽도록 연약하고 비겁한 우리들이라 할지라도 악한 자가 손도 못 대게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저들을 우리의 기도에 따라 처치하시고 또 용서하실 것입니다. 실로 저들의 생사화복이 우리의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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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을 본받아
그리스도 예수님을 본받은 자들이 되었고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And ye became followers of us, and of the Lord,
having received the word in much affliction,
with joy of the Holy Ghost.
So that ye were ensamples to all that believe
in Macedonia and Achaia. 데살로니가 전서:6-7]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비웃음과 놀림을 당하며
그들의 비난과 고통 중에서도 그리스도 예수님이 구원자이심을 믿어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예수님을 본받는 자들이 되어
기쁨이 넘치는 능력을 받아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지만 바울과 그의 동역 자들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더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그들이 더 큰 권능을 받아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더 온전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증인의 생활이 되기를 간절히 원해서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And we beseech you’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애원하노니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간절히 기도하노니
‘we beseech you, brethren, that ye increase more and more’
믿음이 더 성장하여 더 큼 기쁨을 누리고 더 큰 능력을 받기를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를 간청했기에
복음을 전한 자들이나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신 성령님의 권능이 그들을 통하여
기쁜 소식인 복음이 세상에 알려지는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서 기쁨으로 시작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이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Finally, brethren, farewell.
Be perfect, be of good comfort, be of one mind, live in peace;
and the God of love and peace shall be with you.
Greet one another with an holy kiss.
All the saints salute you.
The grace of the Lord Jesus Christ, and the love of God,
and the communion of the Holy Ghost, be with you all. Amen.
고린도후서 13:11-13]
사도바울의 작별인사는 마음을 움직인다.
그의 가슴에 간직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저서
가슴을 울리고 흔든다.
‘Finally, brethren, farewell.
끝으로 형제여 잘 지내길’
farewell, Fare you well,
잠시 떨어져 있을지라도 형제여 잘 있기를.
Be perfect, (성령님으로) 온전하며
be of good comfort, (성령님의)위로를 받으며
be of one mind,(한 성령님 같이) 한 마음으로
live in peace (성령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and the God of love and peace shall be with you,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형제들과 함께 하리니.
Greet one another with an holy kiss,
서로 거룩한 성령님 안에 한 가족으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All the saints salute you, communion of the Holy Ghost, be with you all,
성령님과 교제로 모든 성도의 문안이, 모두 같은 형제들과 함께
성령님께서 형제들과 함께 하길.
이를 작별의 인사를 한 사도바울에게는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을 주신 성령님과
함께 함으로 받은 권능으로 말씀을 받은 기쁨이 있었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인 되어 위로를 받으며 평안을 누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나타난
증인의 삶이기에 그의 작별인사는
세상에서 형제로 또 하늘나라에서 형제로 만날 것을 믿기에
이 세상에서의 죽음마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맺어진 형제의 사랑이
끊어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말 할 수 있었다.
‘Finally, brethren, farewell’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그러나 많은 목사들은 이 구절은 암기하고 연습하여 축도(축복기도)로 사용한다.
축도는 목사가 예배시간에 회중을 위하여 드리는 축복기도로 이 축도 때
회중은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며 축복을 받는 예배의 순서가 된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으로 성직자는 하나님과 성도의 중보자가 되어
구약의 제사장과 같은 예복을 입고 축복을 선언하는
개신교에서는 이런 축도가 시작된 것은 중세 이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많은 개신교에서는 민수기 6:24-26 과 같이 축도로 사용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러나 이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인 제사장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하라는 말씀이었기에
현대의 목사는 제사장도 아니고 더욱이 하나님과 성도들의 중보자가 아니기에
이 성경구절들을 사용한다면 중보자 이신 예수님의 복음을 부인하는 이단이 되기에
어느 자들은 고린도후서 13:11-13절을 신약의 유일한
축도의 본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또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임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작별의 인사를 했고 그 작별의 인사가 세상에서 마지막
인사라 그의 바람의 기도였고 믿음의 확신 이였지 예배를 마치는 축도는 아니었다.
설령 축도라 치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있을지어다” 라는  명령인지 분부인지 오만한 말투의 기도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드리는 자들의 기도를 성령님께서 허락하시겠는가.
더 건방진 자들은 “~있기를 원하노라” 라는 당부의 표현을 쓰고도
그 뜻은 당부가 아니라 기원이라 하니 교만도 이런 교만이 없고
이를 듣는 자들마저 ‘아멘’ 이라 화답할 때에는 귀를 막고 싶다.
그러니 가톨릭의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별한 신분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고
‘중보기도’ 와 ‘영성’이라는 가톨릭 냄새가 펄펄 나는 용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무당이 복채를 받고 복을 빌어주는 샤머니즘을 교권주의에 접붙인
이 불경하다 못해 도무지 경건을 모양도 없으며 거룩한 체를 하는 종교 지도자와
선생이 넘치고 이를 추종하는 맹신과 광신자들에게
성경은 단지 그들의 복의 욕구를 채워주는 부적(符籍)같이 장식이라
자동차의 사고를 면해주는 신물(神物)과 같이 자동차에 보관하는 책이 아니라면
책꽂이를 채우는 책이 아니라면 어찌 읽지 않고
읽고도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여 그 뜻과 의미를 자신의 믿음의 고백으로 시인하고
성경으로 이를 확정하는 믿음의 확신이 없으니 이리저리 흔들리고 모임의 분위기에
휩싸여 감성적이 된 대중을 따라 기분의 높낮이가 믿음인양 신앙의 기준이 되면  
사치한 감정을 따라 허울뿐인 신자가 되기에
복음을 뒤로 한 채 구약으로 돌아간 사이비들과 터무니없는 교권(敎權)을
잡은 자들에게 맹종하여 그들과 같이 기복신앙이 되어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하여
교회를 오래 다녀 직분을 받았더라도 교회에 대한 성경적인 정의를 내리지도 못하는
허식만 남아 겉모양만 직분자인 맥없는 교인으로 남아 부질없는 열심히 있어
경건을 모양은 있는 것 같으나 능력이 없는 교인으로 머문 교인으로 넘치는 교회가
된 오늘날의 현실은 축복에 목멘 공동체가 되어 베풀 움이 사라진
구걸(求乞)의 축복과 자기 자랑만 남은 분수(分數)를 잃어 분별없는
복음이 어그러진 시대라
올바른 복음의 길로 가는 자들이 구박(驅迫)을 받는 시대
이 시대를 어찌하면 좋겠는가.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을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누가복음 12:56-57]






요14장은 성령장이다.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이러한 일이 일어 나리라 하나님은 말씀으로 먼저 약속 하셨고 먼저 주신 이 말씀을 붙잡고 믿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이 실현되도록 하신다. 요한복음의 말씀을 붙잡고 이해해야만 행2장의 역사가 일어나며 왜 그러한 일을 하시는지 알게 된다. 

요14장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어라. 내가 떠나감은 너희에게 성령을 보내기 위하여 내가 가노라. 내가 성령을 보내줄 것을 너희는 믿으라. 성령을 오실 것을 약속 하셨다. 우리들은 성령이 오신 것을 알고 또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을 받은 나와 성령을 통하여 오신 예수님과 하나되어 연합 된다. 연합된다는 것은 마음이 하나되고 성령이 내 안에 계시면 주님과 하나되는 일치가 이루어진다. 예수님이 이 땅을 떠나 멀리 계신 것 같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성령이 내 안에 계시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므로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됨이 14장의 말씀이시다

그 다음에 15장에 포도나무의 비유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이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나를 떠나면 결국은 그 가지는 말라 비틀러지고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지게 되며 결국에는 잘리어 불에 던져 지게 된다. 
예수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보장하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시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15장의 내용이다. 

14장의 말씀을 15장에 풀어 주시는 것이다. 14장과 15장을 이해하고 말씀이 풀려야 행2장의 말씀이 이해가 된다. 그러므로 신약의 진정한 성령장은 요14장이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구하라(요15:7, 요14:14, 요1서3:22, 마21:22)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찿을 때니라(호10:12)
그때의 말씀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이나 구하라 그러나 계명을 지켜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계명이 쉬우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는 목숨을 내어놓고 라도 지키게 되느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말씀이 그 안에 성령이 그 안에 있으므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시리라.

조건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성령이 거하신다. 그러한 사람들이 성령님께 구해야 할 것은 거룩이다. 요15:2~ 3 거룩을 구하는 것이 먼저이다. 거룩과 풍성한 가지는 뗄래야 뗄 수가 없는 관계이다. 거룩해야 가지를 맺으며 거룩하고 더욱 풍성한 가지를 맺게 하기 위하여 더욱 깨끗게 하신다
이 비밀이 풀릴 때, 이때부터 신앙생활이 풀리게 된다. 거룩을 먼저 구하는 자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게 하신다. 내가 우리가 거룩하게 되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이 과실을 맺는 일이다

과실을 맺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더 깊은 거룩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거룩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거룩에도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사람 이미 충분히 거룩한 사람 이사야의 입술을 제단 숯불로 지저서 그를 더욱 참 깊은 거룩으로 인도하십니다. (사6장) 이렇게 맺은 풍성함 열매가 주님께 기쁨이 된다. 이러한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될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돌아가심이 놀랍고 귀한 일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을 때에 우리가 십자가의 사건을 validated 으로 확인하며 유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온 인류를 향한 복이었다. 이것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하는 것을 세상에 알게 하는 사건이 된다. 어떻게 할 때, 저와 우리의 성도의 삶에서 거룩한 열매들이 풍성하게 맺어질 때에, 내가 구한 것 보다 더욱 풍성하게 열매를 맺게 되며 이렇게 풍성한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되는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것을 위하여 돌아가신 것이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이 이 때에 세상에 선포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맡는 이들을 편애하시며 이러한 자들에게 복에 복을 더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십시요. 성령은 우리를 예수와 하나되게 하십니다. 그런 자가 포도나무에 붙어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비밀이 풀리고 그 말씀을 기쁨으로 따르며 찬송으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에게 복에 복을 더 하십니다. 은사를 더 하십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아 그래서 예수를 믿는구나! 그럴 때에 십자가의 사건이 validated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에 맡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는대로 허락하십니다. 거룩하십시요. 거룩을 구하면 거룩을 더해 주십니다 거룩을 구하면 은사가 더해집니다. 그러한 자에게 능력과 권세를 주셔서 손을 얹고 기도를 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병이 낳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황당한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렇게 우리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이 하나님께는 제물이 됩니다(롬15:16) 

나에게 풍성한 열매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라고 영혼구원에 쓰임 받으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예언의 능력을 주시고 병자를 낳게하는 능력을 주시고 기적을 일으키게 하셨는데 처음에는 받은 능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하다가 언제부터 나중에는 자기의 만족을 위하여 능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거룩하십시요. 거룩한 사람에게 열매를 맺게 하시며 열매를 맺은 자에게 더욱 큰 열매를 맺게 하시며 더 거룩하게 하시며 그렇게 더 거룩하게 하신 자에게 더 큰 은사를 나타나게 하셔서 더 강력한 은사가 나타나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세례는 내 만족을 위하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기쁨이 되기 위하여 주시는 것이다. 성령세례로 인하여 나타나는 권세와 능력과 은사와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께 만족을 드리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한복음 15:11)

세상의 기쁨이 아닌 내 안에서 완전하게 될 때까지 넘치고 넘치는 기쁨 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내 안에서 차고 넘쳐서 성령이 내 안에서 기뻐하심으로 우리의 기쁨이 더욱 충만하게 되는 것이며 영원한 기쁨으로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브룩 쉴즈가 TODAY와의 인터뷰에서 그녀의 아이들에게 위치추적이 가능한 칩을 이식하고 싶다는 언급을 하였다.


지난 수요일엔 아르헨티나의 축구클럽인 Atletico Tigre가 트위터를 통해 "Passion Ticket"을 발매한다는 발표를 한 바 있다. 이는 열성팬들에게 팔에 칩을 이식하여 입장권을 대신하는 제도이다.


이 칩 안에는 시즌 티켓 구매자의 기본적인 정보가 담겨져 있으나 추적기능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인터뷰 도중 이 이야기를 들은 브룩 쉴즈가 칩을 삽입하는 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였다.


“나는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나의 아이들에게 칩을 이식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아이들에게 칩을 이식하는 것을 전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두 여자 아이의 엄마인 브룩 쉴즈는 뉴욕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기르는 개에 삽입한 마이크로 칩이 이 개를 분실했을 때, 관계 기관에서 이 개를 찾아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그녀는 이것(칩을 삽입하는 것)이 “흥분되고 미래지향적인 일”이라고 칭하며, 어떻게 하면 자신의 아이들에게 (거부감 없이) 칩을 받게 할 수 있을 지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잠자고 있을 때 칩을 삽입하고 싶습니다. 만일 아이들이 깨어서 ‘엄마 이게 뭐예요?’라고 물으면 ‘모르겠는데, 아마도 모기인가 보다’”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는 이미 이 가상의 제품(칩)에 대한 이름까지 생각해놓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여러분의 아이들이 유괴를 당했다면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추적장치(LoJack)를 아이들에게 받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나는 아이들을 추적할 수 있는 BabyLo를 받게 하고 싶습니다.”


기사원문 >> Brooke Shields jokes she'd 'love' to implant a tracking chip in her kids



* 아르헨티나 축구 클럽에서 베리칩을 삽입하여 시즌 티켓을 대신하는 "Passion Ticket"이 판매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하면서, 미국의 유명한 영화배우인 브룩쉴즈가 자신의 아이들에게도 칩을 받게 하고 싶다는 언급을 하였다.


관련글>> 베리칩(생체칩) 입장권이 도입된다.


구체적으로는 시즌티켓을 대신하는 칩이 아니라, 위치추적이 가능한 칩을 아이들에게 받게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는데, 이 칩에다가 BabyLo라는 가상의 이름까지 붙여놓은 것을 보면, 인터뷰 전에 이미 이에 대한 의견 조율이 있었던 것 같다.


브룩쉴즈는 BabyLo라는 단어가 Baby라는 단어와 현재 개발된 자동차 추적장치인 LoJack을 합쳐 자신이 만든 단어라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BabyLo라는 단어가 바빌론(Babylon)이란 단어에서 n자만 빠진 단어라는 것이 우연이라고 취급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의 몸속에 위치추적이 가능한 칩을 삽입하여 24시간 감시 통제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이 바로 현대판 바빌론(Babylon) 제국 건설을 꿈꾸는 일루미나티의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이다.


세계정부주의자들이 사람들의 몸속에 베리칩을 삽입하기 위해 유명 연예인들을 동원한 본격적인 홍보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기준을 가지고 양육하라' (동성애 문제의 심각성)

- 이찬수 목사님 (분당우리교회) -


왜 이찬수 목사님은

지난 어린이주일 설교에

동성애 문제를 15분씩이나 언급했을까?


그것은 바로 동성애를 중심으로 한 우리 사회의

죄의 확장성과 접촉성에 대한 심각성 때문입니다.

죄의 확장성:
한 가지 죄가 허용되면,

                            또 다른 죄의 허용이 쉬워지고,

                                    더 큰 죄도 합리화, 정당화하게 된다.


죄의 접촉성: 계속적으로 죄에 접촉될 경우,

                                어느 순간 죄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나아가 좋아지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옮긴 글/엘샤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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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의 아내 – 그녀는 누구였나?

그녀는 역사상 가장 많이 이야기된 아내인가?

우리는 그녀의 이름조차 알지 못하지만, 그녀는 스콥스 재판에서 논의되었고, 침묵의 소리와 접속이라는 영화에서 언급되었으며, 수백년간 전세계의 나라들에서 이야기되었다.

성경 비판자들은 창세기의 역사적 신뢰성을 폄회하기 위하여 가인의 아내를 수없이 사용해 왔다. 슬프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질문에 대한 적절한 답변을 해 오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의 권위를 방어할 수 없으며, 따라서 기독교 신앙도 방어할 수 없는 것처럼 보게 되었다.  

예를 들면, 1925년 테네시에서 있었던 역사적 스콥스 재판에서, 기독교 신앙을 대변한 검사인 윌리암 제닝스 브라이언은 ACLU 변호사였던 클래런스 대로우가 질문한 가인의 아내에 대한 질문에 올바로 답변하지 못했다. 대로우가 브라이언을 심문한 재판 기록을 살펴보라:

질문 – 당신은 가인이 어디에서 아내를 얻었는지 알아냈는가?

답변 – 아니다; 나는 불가지론자들이 그녀를 알아내도록 남겨 두겠다.

질문 – 당신은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내지 못했는가?

답변 – 나는 알아내려고 한 적도 없다.

질문 – 알아내려고 한 적이 없는가?

답변 – 없다.

질문 – 성경은 가인이 아내를 얻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그 당시 지구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는가?

답변 – 나는 이야기할 수 없다.

질문 – 이야기 할수 없는가? 단 한번도 고려한 적이 없는가?

답변 –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질문 – 다른 사람들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가인은 아내를 얻었다.

답변 –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바이다.

질문 –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 당신은 알지 못한다.

전 세계의 미디어가 이 재판을 주목하고 있었고, 그들이 들은 답변은 오늘날까지 기독교에 영향을 미쳐 왔다 –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적 기록을 방어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최근, 이와 동일한 예가 칼 세이건의 책, 접촉에서 사용되었고, 이 책에 근거한 같은 제목의 영화에서도 사용되었다.

그 책은 가상인물인 엘리가 교회 토론 모임의 리더였던 한 사모님으로부터 답변을 얻을 수 없었던 이야기를 다룬다:

“엘리는 성경을 심각하게 읽은 적이 없었다… 따라서 지난 주말 첫번째 수업 전에, 그녀는 열린 마음으로 구약의 중요한 부분인 듯 보이는 부분을 읽었다. 그녀는 단번에 창조에 관한 두개의 서로 다르고 모순적인 이야기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리고 가인이 결혼한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세이건은 명석하게 성경이 모순으로 가득차 있으며 방어될 수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제기되는 일반적인 질문들을 열거했다. 실제로 –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그러한 질문들에 답변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답변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교회가 성경 변증학, 특별히 창세기에 관한 변증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교회 안의 대부분의 신자들은 “너희 안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언제나 변호를 할 준비를 하고 있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할” (베드로 전서 3장 15절)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이 왜 중요한가?

많은 비평가들은 가인이 아내를 찾기 위해서는 지구상에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 아닌 다른 “인종”이 존재 했어야만 한다고 주장해 왔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질문은 역사의 시작에 오직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을 기록한 창세기의 창조 기사를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이다. 복음의 변호자들은 모든 인류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오직 아담과 이브의 후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랏, 신자들은 가인의 아내에 관한 설명을 할 수 있어야 하며, 그녀도 명백히 아담과 이브의 후손임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가인이 어디서 아내를 얻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복음의 의미에 관한 몇몇 배경적 정보를 다루어야만 한다.  

첫번째 사람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서 5장 12절).
고린도전서 15장 45절은 아담이 “첫번째 사람” 이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인류를 한 종족을 만드심으로 시작하지 않으셨다.

성경은 오직 아담과 이브의 후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명백히 한다. 로마서 5장은 아담이 범죄하였기 때문에 우리도 범죄한다고 가르치신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받은 죽음의 형벌은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다.

아담은 모든 인류의 조상이기 때문에, 그가 타락했을 때, 아담의 허벅지에 있던 우리 모두 타락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 분리되었다. 죄악의 궁극적 결과는 우리의 죄악된 상태로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는 것이다. 그러나, 복된 소식은 하나님과 다시 연합할 하나의 방법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죄악과 죽음을 이 세상에 가져왔기 때문에, 아담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죄악과 그에 대한 심판인 죽음에 대한 댓가를 지불할 죄없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사람이 범죄했다” (로마서 3:23) 고 가르치신다. 그 해답은 무엇일까?

마지막 아담

하나님은 그 소망 없는 상태로부터 인류를 구원하실 방법을 제공하셨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하나님께서 또다른 아담을 주셨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 – 완벽한 사람인 동시에 우리의 골육이 되신 것이다. 그분은 “마지막 아담” (고린도전서 15:45) 이라 불린다. 왜냐 하면 그분은 첫번째 아담의 위치에 섰기 때문이다. 그분은 새로운 대표가 되셨고,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죄에 대한 댓가를 지불하실 수 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ㄷ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5:21 – 22).
그리스도는 그분의 십자가 사역을 믿는 자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다시 연합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피를 흘리셨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나니”, 히브리서 9:22).

따라서, 오직 첫번째 아담의 후손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모두 친척이다

성경이 모든 인류가 죄인이며, 우리 모두 친척관계라고 묘사하시기 때문에 (“인류와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사도행전 17:26), 복음은 오직 모든 현존하는 인류와 과거의 인류가 첫번째 사람 아담의 후손이라고 하는 기반 위에서만 이치에 맞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복음은 설명될 수도, 방어될 수도 없다.

따라서, 태초에 땅의 티끌로 지어진 오직 한 사람만 있었다 (창세기 2:7).

이는 가인의 아내 역시 아담의 후손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녀는 다른 종족으로부터 왔을 수 없으며, 아담의 후손으로서 설명될 수 있어야만 한다.

첫번째 여자

창세기 3장 20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 다른 말로 하면, 아담 이외의 모든 사람은 첫번째 여자인 이브의 후손이다.

이브는 아담의 갈빗대로부터 만들어 졌으며 (창세기 2:21 – 24), 이는 유일무이한 사건이었다. 신약에서, 예수님과 (마태복음 19:4 – 6), 바울은 (에베소서 5:31) 이 유일한 역사적 사건을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결혼의 기반으로 사용했다.

또한 창세기 2장 20절에서, 우리는 아담이 동물들 사이에서 자신의 베필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읽으며, 이는 자신과 같은 종류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태초에 오직 한 여자, 아담의 아내만 있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해 준다. 여자가 속한 “종족”이 있었을 수 없다.

따라서, 만약 그리스도인들이 가인의 아내를 포함한 모든 인류의 조상이 아담과 이브라고 하는 것을 변호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복음을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어떻게 선교사들을 모든 종족과 나라에 파송하는 것을 정당화 할 수 있을까?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복음과 복음이 가르치는 모든 것을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하여, 가인의 아내를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가인은 누구였나?

가인은 성경에 기록된 아담과 이브의 창남이었다 (창세기 4장 1절). 가인과 아벨, 그리고 셋은 이 땅에 태어난 첫 세대 아이들의 일부였다. 성경은 오직 이들 셋만 언급하시지만, 아담과 이브는 다른 아이들도 낳았다.

가인의 형제 자매들    

창세기 5장 4절은, 아담과 이브의 인생을 정리하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들의 일생 동안, 아담과 이브는 수많은 아들, 딸들을 낳았다. 사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구전에 따르면, 아담은 33명의 아들과 23명의 딸을 낳았다.”

성경은 아담과 이브가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낳았는지 말씀하시지 않지만, 그들의 긴 인생을 고려할 때 (아담은 930살 까지 살았다 – 창세기 5:5), 많은 자녀들이 있었다는 제안이 논리적인 듯 보인다. 그들은 “생육하고 번성할 것” (창세기 1:28)을 명령받았다.

아내

이제 우리가 개인적 편견이나 다른 성경 외적인 사고가 아닌, 성경으로부터 출발한다면, 태초에 첫번째 세대의 아이들만 존재했을 때, 남자 아이들은 여자 형제들이나 가까운 친척과 결혼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다음 세대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가인이 언제 결혼했는지, 혹은 다른 결혼들과 자녀들에 대한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가인의 아내는 그의 여동생 혹은 가까운 친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창세기에서 “아내”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를 좀 더 자세히 살펴 보면, 독자들이 빠뜨릴 수 있는 것을 알게 된다.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인의 아내가 그의 여동생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좀 더 명확하게 들린다. 창세기에서 “아내”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ishshah 이며, 그것은 “여자 혹은 아내”를 의미한다.

“가인이 아내 (ishshah)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세기 4:17).

Ishshah 는 “여자”를 가리키는 말이며, “남자로부터 나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히브리 단어 iysh 와 enowsh 로부터 파생된 말이며, 두 단어 모두 “남자”를 의미한다. 이는 창세기 2장 23절에서 아담으로부터 나온 자에게 “여자”(ishshah)라는 이름이 부여된 것에서도 볼 수 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창세기 2:23).

따라서, 가인의 아내는 아담의 후손이다. 따라서, 그녀는 가인의 여동생 (혹은 조카)여야 한다. 히브리 독자들은 그것을 보다 쉽게 연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번역을 통해서 많은 의미가 소실되었다.

반론

하나님의 법

많은 사람들은 남매간의 결혼을 금하는 모세법에 호소하여 아담과 이브의 아들 딸들이 서로 결혼했다는 결론을 즉각 거부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가 친척과 결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 만약 우리가 친척과 결혼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인간과 결혼할 수 없다! 아내는 남편과 결혼하기 전에 이미 남편과 친척관계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는 아담과 이브의 후손이며 – 한 핏줄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친척 간의 결혼을 금하는 이 법은 모세의 때에 주어졌다 (레위기 18 – 20). 결혼이 일생 동안 한 남자와 한 여자 사이의 것이라면 (창세기 1장과 2장에 근거해서), 모세의 때 이전에 가까운 친척이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한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이 그의 이복누이와 결혼한 것을 기억하라 (창세기 20:12).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법이 이러한 결혼을 금하지만, 이는 모세의 때보다 약 400여년 전 일이었다.

생물학적 기형

오늘날, 남매는 법적으로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오늘날 남매간의 결합으로 생기는 아이들이 기형아가 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것이 사실이다. 사실, 그 친척관계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기형아를 낳을 가능성은 높아진다. 복잡한 생물학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쉽다.

각 사람은 부모로부터 하나씩, 한쌍의 유전자를 갖게 된다. 불행히도, 오늘날의 유전자에는 많은 결함이 있고 (죄악과 저주로 인하여), 이러한 결함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은 한쪽 귀가 다른 쪽 귀보다 더 아래에 있다는 것을 가리기 위하여 머리를 기른다 어던 사람들의 코는 얼굴 중앙에 있지 않다. 사실을 직면하자. 우리가 서로를 정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동의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부부가 생물학적으로 더 가까울수록, 동일한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그들의 유전자에 비슷한 결함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남매는 그들의 유전체에 비슷한 결함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이들이 자녀를 낳는다면, 아이들은 각 부모로부터 한 세트씩의 유전자를 받는다. 부모의 유전자에 비슷한 결함이 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동일한 결함이 모이게 되면 기형아를 낳을 가능성이 그만큼 더 커지는 것이다.  

역으로, 부모가 생물학적으로 관계가 적을수록, 그들의 유전자에는 다른 결함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며, 각 부모로부터 한 세트의 유전자를 물려받는 아이는 한 부모로부터 결함이 있는 유전자를 물려 받더라도, 다른 부모로부터 그것을 상쇄할 수 있는 좋은 유전자를 받게 되는 것이다. 좋은 유전자는 나쁜 유전자의 영향을 극복할 수 있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심각한 기형은 발생하지 않게 된다. 예를 들면, 완전히 뭉개진 귀가 생기는 대신, 단지 비뚤어진 귀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인류의 유전자에는 세대가 지남에 따라 결함이 계속 축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에 발생하는 일은 아담과 이브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처음 두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그들은 완벽했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은 “심히 좋았다” (창세기 1:31). 이것은 그들의 유전자에는 결함이 없고 완벽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담으로 인해 죄악이 세상에 들어왔을 때 (창세기 3:6), 하나님은 이 세상을 저주하셨고, 완벽했던 창조는 붕괴되기 시작하여, 죽음과 부패를 경험하게 되었다 (로마서 8:22). 오랜시간에 걸쳐, 이러한 붕괴는 생명체의 유전 물질에 온갖 종류의 결함이 발생하도록 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최초에 태어난 세대였다. 그와 그의 형제, 자매들은 실질적으로 완벽한 유전자를 아담과 이브로부터 물려받았다. 왜냐하면 죄의 결과와 저주는 처음에는 미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매는 기형아를 낳을 가능성 없이 결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약 2,500년 후인 모세의 때까지, 인류의 유전자에 축적된 결함으로 인해 하나님은 남매간 (그리고 근친간)의 결혼을 금하실 법을 제정하셔야 했다 (레위기 18 – 20).
(또한, 그때까지 충분한 사람들이 있었고, 근친간에 결혼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근친간의 결혼을 금하는 법을 도입해야할 총 세 개의 서로 연관된 이유들이 있는 듯 보인다:

1.    우리가 이미 논의했듯, 기형아를 생산할 가능성이 늘어나는 것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2.    하나님의 법은 유다를 강하고 건강하며 하나님의 목적 안에 지키는 데 중요했다.

3.    이러한 법은 개인과, 가족제도, 그리고 전체 사회를 보호하는 수단이었다. 근친간의 관계로 인한 심리학적 피해 역시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가인과 놋의 땅

어떤 이들은 창세기 4장 16절 - 17절은, 가인이 놋의 땅으로 갔고 거기서 아내를 찾았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따라서, 지구상에 가인의 아내를 낳은, 아담의 후손이 아닌 다른 인종이 있었다고 결론내린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앞에서 언급한대로, 가인의 아내를 포함한 모든 인류가 아담의 후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구절은 가인이 놋의 땅으로 가서 아내를 얻었다고 말씀하지 않는다. 위의 구절에 대한 주석에서 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문으로부터, 우리는 가인이 그의 동생을 죽이기 전에 결혼했을 것이라는 정보를 얻게 해 준다; 그렇지 않다면 모세는 그의 결혼에 관한 무언가를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가인은 놋의 땅으로 가기 전에 결혼했다. 그는 거기서 아내를 찾은 것이 아니라 그의 아내와 동침했다.

이는 놋이 무엇인지 알면 더 이해하기 쉽다. 놋은 히브리어로 “방랑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가인이 놋의 땅으로 갔을 때, 그는 문자적으로 방랑하는 땅으로 간 것이지 사람들로 가득 찬 땅으로 간 것이 아니다.

가인이 두려워했던 사람들은 누구였나 (창세기 4:14)?
어떤 이들은 아담과 이브의 후손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면 가인은 아벨을 죽인 것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해하려 하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첫째, 누군가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해를 가하려 했다면, 그것은 그가 아벨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가인과 아벨은 아벨의 죽음 훨씬 이전에 태어났다. 창세기 4장 3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세월이 지난 후”라는 구절에 주목하라. 우리는 셋이 아담이 130살 때 태어났음을 알고 있고 (창세기 5:3), 이브는 그를 아벨의 대체자로 여겼다 (창세기 4:25). 따라서 가인의 탄생으로부터 아벨의 죽음 사이에는 100년, 혹은 그 이상의 기간이 존재하며 – 이는 아담과 이브의 다른 자녀들이 결혼하여 아이들을 낳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아벨이 죽임을 당했을 때, 몇 세대에 걸친 수많은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기술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떤 사람들은 가인이 놋의 땅으로 가서 도시를 건설하려면, 그는 그 땅에 이미 존재했고, 아마도 다른 인종이 개발한 많은 기술들을 배웠어야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담과 이브의 후손들은 매우 총명한 사람들이었다. 창세기 4장 21절은 유발이 하프와 오르간 같은 악기들을 만들었다고 말씀하시고, 창세기 4장 22절은 두발-가인이 구리와 철로 여러가지 기구를 만들었다고 말씀하신다.

강력한 진화론적 세뇌로 인하여,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세대가 지구상 가장 발달된 세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단지 우리가 비행기와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가장 지적이거나 발달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기술은 지식의 축적의 결과이다.
우리는 우리의 두뇌가 6,000년의 저주를 경험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많은 세대 이전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퇴보했다. 우리는 아담과 이브의 아이들보다 훨씬 덜 총명하거나 창의적일지 모른다. 성경은 우리에게 거의 태초부터 진보된 기술이 있었음을 잠깐 보여주신다.

가인은 도시를 건설할 지식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결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인의 아내에 관한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하는 이유들 중 하나는, 그들이 오늘날의 세상과 근친 결혼과 관련된 문제점들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확한 역사적 기록을 보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 관한 진정한 성경적 역사와 죄로 인하여 발생한 변화들을 이해하는 대신,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여 성경을 해석하려 한다. 그들이 성경 위에 그들의 세계관을 확립하지 않고, 세속적 사고 방식을 성경에 가져오기 때문에, 그들은 단순한 답변에 대하여 눈이 멀어 있는 것이다.

창세기는 그 일들이 발생했을 때 거기에 계셨던 하나님이 주신 기록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아시며 과거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증인이신 분의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가 창세기를 역사를 이해하는 기반으로 사용한다면, 우리는 미스테리일 수 있는 증거들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진화가 사실이라면, 과학은 가인의 아내를 설명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 – 즉, 어떻게 사람이 유전적 결함인 돌연변이에 의해 진화될 수 있었겠는가? 왜냐하면 돌연변이는 아이들을 기형으로 되게끔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대체로 기형이 아닌 자손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진화가 아닌 창조의 증거이다.


출처: USA 아멘넷 자유게시판/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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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BBC 방송의 최근 보도에 의하면 한국 남성의 평균키가 북한 남성 평균키보다 3~8cm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평균키 차이는 어릴수록 두드러지며, 취학 전 어린이의 경우 남한 남자 어린이의 평균신장이 북한 남자 어린이보다 4cm 크고, 남한 여자 어린이는 북한 여자 어린이보다 3cm 큰 것으로 조사됐다.

단일 민족 국가인 한국에서 남북한의 평균키 차이는 유전적인 것이 아니며, 남한의 경제 발전으로 남한의 여성의 키가 북한 남성의 키를 추월, “여성의 키가 남성보다 더 큰 유일한 사례” 라는 내용의 발표이다.

남북한 경제의 차이가 만들어낸 특이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한편, 남한과 북한의 경제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발표에 의하면, 한국의 경제 규모는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북한의 38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8년 북한 인구는 2330만 명으로 남한의 절반(47.9%) 정도인데 북한 국내 총생산(GDP)는 247억 달러로 한국 (9287억 달러)의 2.7%에 그쳤다.

이를 인구 수준으로 나눈 북한의 1인당 GDP(1060달러)도 한국의 5.6%에 불과하다.

위에 인용된 수치를 종합하면 북한의 경제 규모는 남한의 38분의 1로 남북한 경제력의 격차가 상상을 초월하게 크게 벌어진다는 결론이 된다.

북한은 왜 가난한가?

북한은 왜 전세계의 최빈곤국중의 하나로 전락하고 있는가?
북한은 왜 헤어 나올 수 없는 가난과 폐쇄와 고립 속으로 침몰하고 있는 것일까?

대답은 아주 간단하고 또 확연하다.
북한에는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자신의 자유의사와 선택에 따라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실현 시킬 수 있을 때, 바로 그런 인간다운 노력이 생산과 창조로 이어지고, 또 바로 그때에 우리들이 추구하는 물질적인 부도, 생산도, 개혁과 개선도, 예술의 탄생도 가능해진다.

한 개인이 각자 타고나는 창의성의 실현이 한 생명이 추구하는 자아실현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성취시키고, 인간의 자기존중이 시작된다.

북한과 같이 살인적인 억압과 통제 속에서는 개인의 자기존중은 쉽게 말살되며 자기존중을 잃어버린 국민은 저절로 노력을 포기하고 만다.

개인의 선택의 자유가 국민 각자의 권리로 인정 받는 곳,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핵심이고, 이 기본권리의 자유는 자연스럽게 어느 인간사회에나 주어져야 한다.

그러한 자연스러운 국민각자의 생존방식이 바로 건전한 사회, 쉬지 않고 성장하고 성숙하는 사회를 만들고 이끌어가게 되는 것이다.

남한이나 미국처럼 사회 구성원인 각 개인에게 언론, 종교, 경제, 사회, 과학,예술, 교육, 문화, 군사, 스포츠, 정치 등의 각 분야의 선택이 뷔페 식당처럼 열려있고 각자의 선택을 기다리는 곳, 그런 곳이 바로, 자유, 민주주의와 인권을 보호하고 존중하는 건강한 사회이다.

자연스러움이 곧 자유이다.

3대 세습으로 김씨 왕조를 반인륜적으로 억지로 끌고가고있는 북한은 현재 ‘완전한 정도의 폐쇄와 절대적 폭압 살상 통치의 외딴섬’과도 같다. 국민은 노예가 되어 혹사 당하고 착취당하며 학대 받고 있다.

자연을 거슬러 살도록 강요당하는 집단 속에서는 인간은 의욕과 동기를 상실하게 되있고, 곧 한 생명의 최악상태인 자포자기로 빠져든다.

북한사회 전반에 만연하고 있는 부정부패와 권력층의 착복, 뇌물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는 정부기관들이 그 생생한 예이고 증거와 증명이 된다.

북한은 변해야 한다.

반드시 변해야 하고, 또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개혁과 개방과 함께 빵과 자유가 국민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각자 참여하여 자신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나라살림을 이끌어가야 한다.

국민 각자를 자신만의 독특한 육체적, 심리적 필요나 욕구를 가진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하고 보호할 정치이념과 능력을 갖춘 문명한 사회로의 전환이 그 어느 때보다도 현재의 북한에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그 어느 개인이나 집단도 자연을 거슬러서는 절대로 살아 남을 수 없다는 역사의 교훈에서 다시 마음을 열고 배워야 한다.

윤병열 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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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GRACE)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위대한 부요'
(Great Riches At Christ Expense)라는 
말의 앞글자의 축약입니다.

그 위대한 부요하심이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치러진 
모든 청구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명과 죽음에 대하여 ...
마땅히 받으셔야 할 것을 우리가 얻었고,
반면에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그리스도께서 취하셨습니다."


- Rev. Geoffrey Thomas 의 
'양자됨의 교리'에 대한 강연 중에서.....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GRACE)라는 단어는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신 위대한 부요'
(Great Riches At Christ Expense)라는
말의 앞글자의 축약입니다.

그 위대한 부요하심이 우리의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치러진
모든 청구에 의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생명과 죽음에 대하여 ...
마땅히 받으셔야 할 것을 우리가 얻었고,
반면에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그리스도께서 취하셨습니다."


- Rev. Geoffrey Thomas 의
'양자됨의 교리'에 대한 강연 중에서.....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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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에서 빚을 가장 많이 진 나라는 미국이다. 
純(순)채무가 약 2조6000만 달러이다. 미국이 빚더미 위에 앉아서도 큰 소리를 치는

이유는 세계가 달러를 기축통화로 삼고 있어 부도가 나지 않는 나라가 된 덕분이다. 
그러면 지구촌에서 가장 많은 빚을 내어준 나라(돈은 꾸어 준 나라)는? 
일본이다.세계 1위의 債權國(채권국)이다.일본은 프랑스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

빚을 내어주었는데, 2011년 현재 약 7조5000억 달러이다.

여기에서 일본이 진 빚을 뺀 純(순) 채권액은 약 3조2000억 달러이다. 

한국은 순 채권액이 약 1000억 달러이다. 
일본에 이어 두 번째 純채권국은 중국으로서 약 1조8000억 달러, 
3위가 독일 약 1조2000억 달러, 4위가 스위스 약 1조 달러, 
5위가 홍콩 약 7000만 달러, 러시아 약 4000만 달러이다. 

이런 일본을 우습게 보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다. 
純(순)채권 1000억 달러짜리 나라가 그 30배의 나라를 우습게 본다면

視力(시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빚을 많이 내어준 나라는 외교적 발언권이 클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의 외교정책의 재고가 필요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일본이 2007년 말 현재 해외에서 보유하고 있는 資産(자산)은 610조엔
이다. 약 6조 달러라는 이야기이다. 일본이 해외에 대하여 지고 있는 
대외(對外)채무는 약 330조엔, 약 3조3000억 달러이다. 

대외 채권액에서 대외 채무를뺀 순대외채권은 2조 달러를 넘어 3조 달러에 육박한다.

2등인 중국의 약 배이다. 이는 한국 한 해 총생산의 두 배 이상 되는 액수이다. 

일본은 16년째 세계 최대의 대외 채권국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지구촌에서 일본은 가장 큰 채권국이고 미국은 가장 큰 채무국이다. 
미일(美日)동맹은 최대 채권국과 최대 채무국 사이의 짝짓기이다. 

일본의 대외자산은 해외직접 투자(6400억 달러), 채권 및 주식 투자
(2조7000억 달러), 대출금 등 기타투자(1조5000억 달러), 외화준비금
(1조 달러)으로 되어 있다. 

방대한 대외채권으로부터 발생하는 이자소득도 엄청나다. 
2006년의 경우 일본은 대외 투자에 의한 이자소득으로 약 1300억 달러를 벌었다.

이는 상품과 용역수출로 얻은 무역흑자 730억 달러보다 훨씬 많았다. 

대외투자에 따른 이자소득 부문에서도 일본은 영국과 독일을 누르고 1등을 달리고있다.

국민총생산 대비 이자소득의 비율 부분에서도 일본은 1등이다. 

일본은 제조업 국가로 알려져 있으나 상품을 팔아서 번 이득보다 훨씬 많은 이득을

대외투자에서 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怪力(괴력)이다. 

일본 호감도 세계 2위
이명박 대통령은 얼마 전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모든 통계는 그렇지 않다.
2010년 초 영국의 공영방송 BBC가 세계 28개국의 '국가 영향력'에 대한 여론 조사를 하였다.

28개국의 29,977명을 인터뷰하여 국가별 부정적여론과 호의적여론을 채점하여 순위를매겼다.

영향력을 好感度(호감도)로 평가한 조사였다. 

세계 여론으로부터 가장 好評(호평)을받은 나라는 독일로서 59점,2등이 일본으로 53점이었다.

한국은 32점으로 下位圈(하위권)이었다. 
28개국중 중국만 제외하고는 모든 나라에서 일본에 대한 호감도가 혐오도보다 높았다. 

일본에 대하여 가장 좋은 평가를 하는 나라는 필리핀으로 77점, 다음이 인도네시아 71점,

브라질 70점, 미국 65점이었다. 

여러 기관의 국가별 호감도 조사에서 늘 1등을하는 나라는독일,늘 상위권에 드는 
나라가

일본이다.두 나라가 전쟁을 일으켜 세계인들을 괴롭힌 과거를 생각하면 이해할수 없지만

두 나라가 戰後(전후)에 많이 달라졌다는 점을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다.

두 나라는 경제개발에 성공하였고 대외원조를 많이하며 민주주의도 착실하게 발전시켰다. 

국가브랜드 인덱스(Nation Brands Index)라는 게 있다.안홀트와 GfK 로퍼 홍보회사가

세계 여라 나라 국민들을 인터뷰하여 국가에 대한 호감도를 조사하고 순위를 매긴다. 

조사항목은 국민에 대한 好感度(호감도),정부의 관리 능력,제품,관광,문화와 역사,투자및

이민이다.2년 전 발표된 자료를 보니 정부에 대한 호감도 부문에선 스위스가 1등이다.

2위는 캐나다, 이어서 스웨덴,독일,호주,노르웨이,네덜란드,덴마크,영국,프랑스, 핀란드

뉴질랜드, 오스트리아, 스코틀랜드, 벨기에(15위) 차례였다. 

제품에 대한 호감도에선 일본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세계1위였다. 
이어서 미국,독일,영국,프랑스,캐나다,스위스,스웨덴,이탈리아,호주,네덜란드,스페인,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15위)였다.문화 부문에 대한 호감도 순위는 1위가 프랑스,이어서 이탈리아,영국

독일,미국,스페인,러시아,일본,중국,브라질,호주,캐나다,스웨덴,네덜란드,오스트리아(15위)였다. 

국민에 대한 호감도에선 캐나다 사람들이 1등이었다.이어서 호주,이탈리아,스웨덴,스위스,영국

독일, 일본, 스페인, 뉴질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노르웨이-스코틀랜드(공동 14위)였다. 
관광하고픈 국가 순위론 이탈리아가 1등이고 이어서 프랑스,스페인,영국,호주,미국,캐나다,

일본, 스위스, 독일, 이집트, 스코틀랜드, 브라질, 스웨덴, 오스트리아였다. 

투자 및 이민을 가고 싶은 나라 1위는 캐나다,이어서 영국,미국,스위스,독일,프랑스,호주,스웨덴

이탈리아, 일본, 네덜란드, 스페인, 덴마크, 노르웨이, 뉴질랜드(15위) 순위였다. 

종합 국가브랜드 순위를 보면 
1등이 독일로서 67.4점이다. 
2등이 프랑스인데 67.3점이다. 
3위는 영국 66.8점. 
이어서 캐나다, 일본, 이탈리아, 미국, 스위스, 호주, 스웨덴(10위),스페인,네덜란드

노르웨이, 오스트리아, 덴마크, 스코틀랜드,뉴질랜드,핀란드, 아일랜드 벨기에(20위)

브라질,러시아,아이슬란드,싱가포르,아르헨티나,멕시코,인도,헝가리,중국(공동 28위)

폴란드,체코-이집트,한국(33등),태국,대만,터키,남아프리카, 칠레, 말레이시아,페루

루마니아, 리투아니아,인도네시아, 에스토니아, 아랍에미리트-쿠바,에콰도르,사우디 
아라비아, 나이제리아, 이란(50위) 순이었다. 

국가브랜드 1위인 독일은1,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수천만명을 죽음으로 몰고갔던 나라이다.

유태인들을 수백만 명이나 학살한 나라이다. 그럼에도 이미지가 가장 좋은 나라가 되었다. 

그 이유는 뭘까?

1. 1945년 이후 독일(서독)이 민주주의를 착실히 발전시켰다. 
2. 나치 시절의 과오를 솔직하게 시인했다. 
3. 외국 원조를 많이 한다. 
4. 사람들이 근검 절약하고 성실하며 정직하다. 
5. 동서독(東西獨) 통일이 평화적으로 이뤄졌다. 
6. 경제력이 세계 3위인데도 국제사회에서 겸손하게 행동한다. 
7. 세계에서 가장여행을 많이하는 독일국민인데도,태도가 모범적이라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最惡(최악)의 국가 이미지를 최선(最善)의 이미지로 바꾼 독일사람들 한테서 배울 게 많다.

하나를 꼽으라면 법(法)을 잘 지킨다는 점일 것이다.
한국의 브랜드가 세계 33위. 1인당 국민소득이나 삶의 질 통계에서도 30등 전후이다.

아시아에서 일본, 싱가포르, 인도, 중국이 우리보다 앞이다. 

그런데 한국사람이 가장나쁜 나라로 지목하는 일본은 세계사람이 호감을갖는 나라중 세계 5위이다.

한국인의 視覺(시각)교정이 필요한 게 아닐까? 
이 대통령이 근거도 없이 일본의 국제적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다고 깔보는 식으로 발언하는 것은

낭패를 불러 일으킬수 있다. 敵(적)을 얕잡아 보는 건 패배로 가는 지름길이다.


와. 대단하다.... !


China


Germany


Germany


Somewhere In Sahara





Sahara


Goose Trip To Vung Tau, Vietnam







Motorcycle With Plastic Bottles






China



China







동성애의 무서운 비밀!


알고나 계십니까? 의료 지원만을 놓고 보면 현재 대한민국은 국가 보훈대상자보다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이 더 고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훈 대상자의 경우 입원하면 간병비를 자비(自費)로 부담하지만, 에이즈(AIDS·후천성 면역결핍증)에 걸릴 경우 사망할 때까지 요양병원 입원비 전액과 간병비(40만 원)는 물론, 에이즈 환자들이 복용하는 월 600만 원 정도의 항바이러스 약값 전액을 국가가 국민 혈세(血稅)로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현재 한국은 전 국민이 고령 질병으로 입원이 필요할 때 전체 노인 환자를 무료로 요양병원에 입원시킬 수 있는 정도의 엄청난 거액의 의료비를 에이즈 환자의 치료를 위해 투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남성 동성애자가 에이즈에 걸릴 확률은 남성 이성애자에 비해 약 750배 높다는 사실을. 에이즈는 명확히 성병(性病)이며, 특히 남성간의 항문 성관계를 통해 주로 전파되는 남성 동성애자들의 대표적 질병이라는 사실을…. 


오늘날 사회 일각에서는 동성애자를 ‘성 소수자’라고 용어 세탁을 하여 사용하고, 동성애에 문화의 옷을 입혀 무차별로 옹호론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전선이 더욱 복잡하고 치열해진 것은 386 운동권 출신들이 동성애자 인권 운동에 대거 참여하면서 좌파 운동권과의 연결고리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동성애는 단순한 개인의 성적(性的) 취향 문제를 뛰어넘어 사회 변혁 이슈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현재 좌파 진영에서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앞세워 인간의 성적 취향 문제로 개인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며 법제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차별금지법’은 동성애자들의 인권 신장이 주된 목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입법안을 자세히 뜯어보면 ‘사상·정치적 의견에 따른 차별을 금지’한다는 대목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입법안이 수정 없이 통과될 경우 사회주의·공산주의는 물론 북한을 미화·찬양하는 행위를 실질적으로 처벌할 근거가 사라집니다.


또 반국가적, 반사회적, 친북반한(親北反韓) 활동을 하는 사람을 비판할 경우 ‘특정인을 차별한 행위’가 되어 유죄 판결을 받을 수도 있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할 것입니다. 



▲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바른성문화를위한국민연합 외 24개 단체 회원들이 동성애를 금지하는 ‘군 형법 92조 5’의 합헌 판결 지지를 촉구했다.


실제로 스웨덴의 경우 2003년 ‘증오언론 금지법’이 제정될 당시에는 정부 측이 “나치와 같은 극단주의자에 해당하는 것일 뿐 일반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실제 법이 제정되자 동성애 문제는 물론 이슬람 근본주의 테러에 대해서도 함부로 발언할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워싱턴 주에서 꽃집을 운영하는 한 기독교 신자는 신앙 상의 이유로 동성 커플의 결혼식에 사용할 축하 화환 주문을 거부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뉴멕시코 주의 전문 사진사도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따라 레즈비언의 결혼식 사진 촬영을 거부했다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만약 ‘사상·정치적 의견에 따른 차별을 금지’하는 차별금지법이 20대 국회에서 통과될 경우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전통적인 가족제도의 해체가 가속화 될 것이며, 더 나아가 집단과 사회, 급기야 자본주의와 자유시장 경제를 주축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해체 내지는 파괴로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래서 동성애를 일컬어 대한민국을 파괴하기 위한 ‘좌파들의 비밀병기’라는 말들이 나돌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래도 동성애가 그저 몇몇 사람들의 독특한 성적 취향이니, 성 소수자들의 인권 문제니 하며 나 몰라라 하고 지나치시겠습니까?



-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dragon0033@hanmail.net



출처: 미래한국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621)





동성애와 에이즈, 그 충격적인 진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동성애를 가증한 '죄악'이라 규정하셨고,

의학적으로 보더라도, 동성애와 에이즈

이렇게 명확한 비례관계가 형성되어 있는데도,

한국의 정치계나 문화계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동성애를 정상인 것처럼 포장하고 미화하는 현실입니다.

바로 알고, 바로 전해야 합니다. 


















10대 청소년까지 파고든 동성애!


'선'을 '악'하다 하고, '악'을 '선'하다 하는 시대...

'죄악'을 '인권'으로 포장하여 멸망을 자초하는 현실...


미디어에서 정말 아무렇지 않게

'브로맨스'라느니 '남남케미'라느니...

온갖 표현으로 동성애를 미화시키는 짓들을 서슴치 않으며,

동성애를 마치 정상적인 개인의 성적취향인 것처럼 여기는

흐름이 강해질수록, 이런 성적타락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동성애의 심각한 폐해와 에이즈와의 관계에 대해

팩트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상입니다.


아직도 동성애에 대한 잘못된 가치판단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이 있다면,

진실을 바로 알고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그와중에 박원순의 서울시는 올해도 어김없이

동성애자들이 광란의 파티를 서울광장에서 열 수 있도록, 

승인해 주는 기막힌 행태를 보입니다.


서울시, 서울광장 동성애 축제 최종 승인.. 교계 강력 반발!




서울시가 결국 동성애자들에게 서울광장을 열어줬다. 서울시는 지난 14일 서울광장 홈페이지에 ‘6월 11일 제17회 퀴어문화축제를 수리했다’고 밝혔다. 행사 성격은 ‘공연’이며, 동성애자들은 자정부터 오후 12시까지 24시간 서울광장을 사용한다.


서울시 핵심 관계자는 이날 오후 “여러 단체가 같은 날짜에 신청해 중복 조정회의를 연 결과, 퀴어문화축제 조직위 측이 최종 신청한 6월 11일을 수리하기로 최종 승인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퀴어축제 신청을 수리했다”며 “서울시는 퀴어축제 신고를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교계와 시민단체들은 “왜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에서 동성애자들의 알몸 퍼레이드를 봐야 하느냐”며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예수재단 대표 임요한 목사는 “서울광장이 음란놀이터가 됐다”며 “예견된 일이다. 동성애 음란 광란 알몸집회가 허가됐다. 통탄할 일”이라고 말했다.

길원평 부산대 교수도 “동성애자들의 알몸 거리 행진은 청소년과 국민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음란·퇴폐 행사”라며 “서울시는 동성애자들의 퀴어축제 승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민 김진 씨는 지난달 29일 박원순 서울시장을 상대로 ‘서울광장 사용인가 수리처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김씨는 “검찰이 지난해 퀴어축제 참가자들의 소위 ‘알몸 퍼레이드’를 불법행위로 간주했기에 서울시의 이번 서울광장 사용허용은 행정권 남용”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서울광장 홈페이지에는 ‘퀴어축제 우리 아이들이 봅니다. 건전한 것이 아닌 이 문란한 축제의 사용허가를 내주지 마십시오’ ‘끔찍하다, 퀴어축제. 시민들이 가득한 광장에서 옷벗고 저질스런 퍼포먼스 하는 건 정말 끔찍하다’ 등의 항의글이 계속 올라오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5&aid=0000889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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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윤 교수 주장은 개혁교회가 이미 배격한 것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뜨거운 논쟁의 대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죄인이 의인되는 신학적 논의다. 정통신학은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이신칭의가 종교개혁의 시작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이신칭의가 종교개혁의 산물인지? 아니면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이 주장을 후대의 신학자들이 잘못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한번쯤 다시 뒤돌아 볼 필요가 반드시 있다.

오늘날 현대신학은 정통교회의 이신칭의를 거부하고 있다. 그 이유는 교회가(성도들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다고 하는 지적에서 거듭 주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칭의와 성도의 삶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현대신학이 계속 칭의를 논하면서 루터와 칼빈식의 칭의론이 바울이 가르쳤던 칭의와 다르다고 말한다. 그 대표자가 김세윤 교수다. 그는 자신의 책 <복음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의 교회도 신약 성경의 모범을 따라 복음을 다양하게 그리고 포괄적으로 선포하여야 합니다. 복음을 다양하게 선포하는 것은 교회가 처한 시대와 장소의 구체적 적합성을 잘 나타낼 수 있습니다. 복음을 포괄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균형 있고 건전한 신앙생활을 유발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에 무식하고 신학적 통찰력이 부족한 가운데 오로지 '보수'만을 외치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시대와 처지를 물론하고 오로지 종교 개혁자들식으로만, 그러니까 바울의 '의인됨'의 범주로만, 그것도 포괄적으로 옳게 이해된 '의인됨'이 아니라 오직 '무죄 선언됨'의 측면으로만 이해된 '의인됨'의 범주로만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들이 '보수'한다는 성경의 많은 가르침을 무시해버리는 우를 범할 뿐 아니라, 복음을 심각하게 왜곡하고 그리하여 복음이 가져다주는 구원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큰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한국의 성도들의 성경과 신학에 대한 이해도 이제는 좀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포괄적으로, 그러면서도 삶의 정황에 적합하게 선포되어야 하고, 그럼으로써 복음이 가져오는 구원이 개인과 사회의 삶에 첫 열매의 형태로나마 구체화되어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김세윤 교수)

김세윤 교수는 정통교회가 단지 무죄 선언됨의 측면에서만 칭의를 주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법정적 칭의는 오류를 포함한 칭의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과연 김 교수의 주장처럼 정통교회가 무죄선언의 측면에서만 이신칭의를 말하는 것인가? 하지만 오히려 김세윤 교수는 자신의 신학이 정당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을 왜곡하고 있다. 왜 한국교회가 김세윤 신학을 비판하지 않는가? 어마어마한 직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경을 왜곡하는 것은 거짓 교사일 뿐이다. 지금부터 김세윤 신학이 성경을 왜곡한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복음(칭의)은 그 시대의 상황과 환경에 의해 변하지 않는다.

김세윤 교수는 복음을 다양하게 선포함으로 교회가 처한 시대와 장소의 구체적 적합성을 잘 나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죄 선언됨의 측면으로만 칭의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상황과 환경에 의해 변하지 않는다. 복음이 담고 있는 모든 내용은 오로지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진리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한다. 이 세상에 의인은 없다. 죄인이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다. 율법과 인간의 행위로 의를 취득하지 못한다. 오직 하나님의 선언만이 죄인이 의인이 된다.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된다.

하지만 이것도 하나님께서 죄인을 선택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하는 선택보다 앞서지 못한다. 따라서 택자는 믿음을 선물로 받아 의롭다고 여김을 받는다. 여기에서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김세윤 신학은 인간이 최선의 노력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의를 취득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게 한다고 하는 것을 믿어도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 이르러서 선언하시는 그 선언만이 의인이 되는 것으로 가르친다. 마지막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삶속에서 거룩함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김세윤에 의하면 의롭다고 선언 받아도 거룩하게 살지 못하면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어 의롭게 되어도 아직은 의인이 아니고 최종 심판의 자리에서 결정이 되기까지 유보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가르침은 정통교회의 법정적 칭의는 반쪽짜리 칭의로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김세윤 교수가 일명 유보적 칭의를 주장하는 이유는 법정적 칭의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는 법정적 칭의가 무죄 선언만 하는 칭의라고 본다. 그러나 법정적 칭의는 죄인이 의롭다고 하는 무죄 선언으로만 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존 칼빈은 성경에서 말하는 칭의는 이중칭의라고 주장한다.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의인됨을 말했다. 죄인이 법정에서 일방적인 은혜로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죄판결을 받으면 죄인의 내면에서는 자신이 다시 죄를 지으면 안 된다고 하는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고 의롭게 살려고 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김세윤 교수가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칭의를 종교개혁자들이 무죄선언만 하는 칭의로 가르쳤다고 하는데, 그것은 김세윤 교수가 종교개혁자들의 책과 글들을 전혀 읽지 않고 말하는 무식한 말이다. 성경에서 예수를 믿으면 무죄하다고 가르친 곳이 어디에 있는가? 종교개혁자들이 예수를 믿으면 죄가 없다고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

성경은 예수를 구주로 믿어도 여전히 죄인이라고 가르친다. 바울도, 어거스틴도, 그리고 루터와 칼빈도 그렇게 가르쳤다. 김세윤의 주장대로라면 오늘날 종교개혁에서 가르치는 칭의는 마치 구원파가 가르치는 칭의와 같다. 성경에서 말씀하여 주시는 칭의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으면 그 아들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덮어 주시는 칭의이다. 구약에서부터 모형으로 계시된 어린양의 피 제사가 바로 그것이었고, 신약에서 어린양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피를 흘리시므로 누구든지 아들을 믿으면 하나님이 그 피를 자기 백성들에게 뿌려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여 주시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예수를 믿으면 예수의 피가 그 사람에게 뿌려지는 것이다. 결국 죄를 덮어주신다. 시온좌에 동물의 피를 뿌려 덮어주시는 것과 같다.

법정적 칭의 개념이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김세윤 교수는 이 칭의를 바울이 말한 칭의가 아니라고 한다. 여기에서 김세윤 교수의 잘못된 신학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과 칭의를 연관시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성도는 법정적으로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아도 여전히 죄인이다. 그래서 성도는 날마다 그리스도께로 나간다. 자신에게 의로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가서 죄 용서를 구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아 기쁨을 누린다.

그 과정에서 성화가 계속 점진적으로 어떤 사람은 빨리, 또 어떤 사람은 느리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화가 어떤 물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화를 표준으로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성화되었다고 해도 계속 성화되어 가는 것이 의롭다고 칭함 받은 성도의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칭의는 인간의 환경에 의해 변화되거나 상황 때문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의 피를 믿는 자들에게 의롭다고 선언하여 주시는 은혜인 것이다. 이 사죄의 확신으로 성도는 오늘 그 자리에서 자신이 주 예수를 믿어 자신의 죄를 용서 받고 구원 받았다고 하는 확신으로 산다.

김세윤 교수가 말하는 칭의는 구원의 확신을 성도에게서 빼앗고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왜곡된 칭의론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이루신 구속의 사건을 완전히 인정하지 못하게 하는 거짓 가르침이다.

최근에 김세윤 교수는 한 언론 매체에 한국교회의 칭의론에 대하여 새로운 칭의론 정립을 주장하였다. ‘칭의와 성화를 병행’하는 칭의를 말했으나 사실 이것은 그의 독창적인 주장이 아니다. 이미 칼빈은 이중칭의를 통해 칭의와 성화를 함께 말하였고, 개혁교회가 그것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세윤 교수가 말하는 칭의는 결국 성화가 없으면 의인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성화중심의 칭의이다.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의 칭의를 이끌어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을 상실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포되고 이루어지고 있다. 죄인이 의롭다고 일컬음을 받는 길은 사람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마암아 산다”는 이 말씀의 바른 해석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는 산다”이다. 성령께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여 주시고 있고, 의롭게 된 자는 믿음 안에서 계속 자신을 부인하며 거룩하게 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이 가르쳐준 칭의다.

 

 

 

임진남 목사는
임진남 목사는 총신신대원(M.Div)에서 공부한 합동교단 소속 목회자이다. 2012년에 김제예본교회를 개척하여 담임하고 있고, 칼빈주의 개혁교회를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와 종교개혁의 위대한 유산인 신앙고백서들 가지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개혁신학 연구에 특별한 관심과 소명이 있어 서철원 박사와 함께 신학연구 모임을 진행하는 ‘한국개혁신학연구원’의 총무로 섬기고 있고, 저서로는 설교집 <다니엘이 증거한 복음>, <엘리야가 증거한 복음>이 있다.

 

 

 

 

http://www.ctimes.or.kr/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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