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

최송연의 신앙칼럼 2016. 5. 18. 03:00

 

 

 

“엄마, 새로 산 내 운동화 어딨어요? 엥~! 학교 늦겠는데!” “그건 네가 네 방에 가져다 두던 것 같던데 왜 밖에서 찾느라고 그러냐, 아가, 너무 허둥대지 말고 네 방에 들어가서 다시 한 번 찬찬히 찾아보렴.”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 숟가락을 내던지고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가면서 평소와는 달리 소리부터 질러대는 어린 딸을 타이르시는 어머니의 말씀이었다. 몸이 유난히 허약했던 어린 시절, 나는 책벌레란 소린 들었지만, 운동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학교 운동회가 있는 날이면 전날 저녁서부터 가슴이 설레었고 새벽부터 일어나 방방거리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잘 모르겠으나, 내가 어린 시절에는 봄, 가을 운동회란 것이 있었고, 이 운동회는 학교의 행사라고는 하지만 실은 그 지역의 큰 축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운동회 날이면 학부모는 물론이고 학교 인근 마을 사람들도 일손을 멈추고 맛있는 도시락을 싸 들고 와글와글 학교 마당으로 모여들었고, 경기 종목도 다양해서 학생들 뿐만 아니라 선생님과 학부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참가할 수 있도록 배려해 어른도 아이도 함께 어우러져 신나는 축제의 한마당을 연출했던 즐거운 날이었다.

여러가지 다양한 종목의 경기가 펼쳐졌지만, 그중에서 모두에게 인기 있었던 종목은 단연 ‘줄다리기’였다. 유약하고 운동신경도 둔하기만 했던 나에게도 유난히 기대되었던 종목은 역시 줄다리기였다. 나는 어떤 종목에서건, 개인기만으로는 결코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비록 어린 나이지만 이미 터득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ㅠㅠ 그러나, 단체전은 이야기가 다르다. 특히, 줄다리기 같은 종목은 축구처럼 고도의 테크닉과 뛰어난 개인기를 요하는 종목도 아니다. 그저 줄을 잘 서, 그날 힘센 아이들이 많은 팀에 잘 배치되기만 하면 함께 승자가 될 행운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줄다리기를 할 때, 선생님은, 힘이 세고 건장한 아이들은 앞에 세우고 나처럼 유약한 소녀들은 맨 꼴지에 세운다. 맨 뒤에 서 있는 사람도, 물론 있는 힘을 다해 줄을 당겨야 하겠지만, 이기고 지는 일에 별반 도움이 안 되는 조역일 뿐이다. 아닌 말로 줄을 잡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여도, 앞에서 힘센 아이들이 잘 해내기만 하면 모두 함께 승자가 되는 것이다! 학생들은 청군 홍군, 혹은 청군 백군으로 나뉘었고, 모두 자신이 소속된 팀의 칼러를 상징하는 청색 홍색 또는 백색의 예쁜 띠를 하나씩 건네받아 머리에 둘러 표식을 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팀은 색깔로 정해지고, 내가 좀 약해도 내가 속한 팀이 강해서 그들이 이겨주기만 하면 나도 덩달아 이기는 것이 되니, 이 얼마나 즐겁고 신나는 일인가!

영적인 일도 그러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 흘리신 피를 믿고 구원(Salvation)받는 것은 한순간이다. 나의 공로가 전혀 가산되지 않는다.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행 16: 31)”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그 순간은 영적으로 보면, 내가 어느 팀에 속할 것인가 결정지어지는 순간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할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 어둠의 권세자 공중 권세를 잡은 사단에게 속할 것인가, 소속팀(?)이 결정지어지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6절 말씀), (요 5:24, 요1서5:12, 요3:36, 요10:28-29 절을 읽고 참조)

믿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 영원히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신학상 술어로는 기본 구원론이라고 하며, 한번 구원, 영원 구원의 법칙이 성립된다. 구원에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것 외에 우리(성도)가 해야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기본 구원론, 여기에 우리(성도)는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 포함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다. 한 번 구원 영원 구원이니 성도의 삶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 회개만 하면 된다, 아전인수격으로 끌어다 대는 잘못된 구원관이 오늘날 기독교를 싸구려 구원론으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성도)가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그 한순간에 공로 없이 값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 확실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에게 하나님 자녀로서의 거룩한 의무가 부여된다는 것이다. 성도는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 되겠다.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기본 구원론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 받은 성도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신앙 자세로서 삶에서 승리하는 신앙을 의미한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까지 ‘번영신학’ (prosperity theory, prosperity gospel)은 성경을 왜곡시킨 것이며, 주님의 말씀을 변질 시킨 누룩과 같은 것이라고 알고 있는데 무슨 소리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는 분도 계실 것이다. 사실,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와 번영신학 (prosperity theology, prosperity gospel) 은 같이 설 수 없다. 하여, 수많은 개혁교 신학자들, 목사님들, 성도님들이 오늘날 이 번영신학이란 말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사실이다.

반대로 우리 중에는 번영신학을 논하기만 하면, 오순절 교회를 비방한다, 라고 생각하며 섭섭해 하시는 분도 계신다. 그 모든 것은 뒤로하고 우리는 서로 말씀의 떡을 떼며, 내가 어느 교단에 속했는가 어느 교단이 더 우월하고 더 열등한가 다투기보다는 겸허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좀 더 바로 깨닫고 바로 믿을 수 있도록, 서로 돕고, 서로 격려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단은 제외)

진정한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이란 무엇인가?

최근 우리나라에는 '고지론(高地論)' 이 왕성하다고 한다. 이 "고지론(高地論)”이란, 기독교인이 선한 영향력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와 위치에 오르는 것이 더욱 그 파이를 크게 한다고 하는 지론으로서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의 또 다른 모습이며,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도 성공적인 위치에 도달함으로서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더욱 확대하자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물론, 과거 우리나라의 번영신학(prosperity gospel)은 수많은 성도들에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각종 질병, 가난, 고통, 그리고 불운 등에 아니 심지어 사회적 현상인 전쟁과 정치에도 영적 능력을 사용하지 못해서, 회개하지 않아 당하는 고난이라 주장한다는데 있고, 고지론(高地論), 번영신학의 취약점은, 십자가의 도, 좁은 길을 가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거스린다는데 있다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셨으니 나 또한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는 고백과 결단, 주어진 모든 환경을 감수하는 신앙이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런 희생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기꺼이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겠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예수님 중심의 신앙, 좁은 길, 십자가를 따르는 바른 신앙이다. 이렇게 될 때, 순교도 가능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생활이 가능한 것이다.

본래 프라스퍼러스(prosperous, prosperity)란, ‘번영’외에도, ‘잘 해내는(doing well), 성공하는(successful), 그런 뜻을 지니고 있다. 성도들이나 목사님들이 승리하는 믿음을 이야기 할 때, 대체적으로 이 prosperous란 단어를 ‘번영’에만 국한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신, victory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못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Victory는 완전한 승리란 뜻이 담겨져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단 한 번의 그 십자가 사건이 완전한 승리(victory)인 것이다! 그러니까, victory가 결과라면, prosperous는 과정이라고나 할까? 기본 구원론( 그리스도가 이루신 (victory)와 삶에서 지속하는 성화론(sanctification), 승리하는 믿음(prosperous faith)은 반드시 별개로 분리하여 생각해야 한다.

고로, 필자는, 번영(prosperity, prosperous)란 단어 그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가 뒤바뀐, 잘못 사용되는 (prosperity gospel)이 문제라고 본다. 내가 주를 위하여 일하느냐? 주님이 나를 위해, 육신만을 위해 일을 해 주시느냐?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대 번영 신학이 위험한 것은 바로 우선순위가 뒤바뀐 신학이라고 보기 때문이라고 본다. 제대로만 활용한다면 나쁠게 없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고린후 5:7)”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은 원수의 저주성 폭언 속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성도라면, 그 유명한 다윗 왕의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들은 이야기는 대개 ‘소년 다윗과 골리앗 장군’ 아니면, ‘밧세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후, 사건 은폐를 위해 충신 '우리야'를 죽인 다윗 왕의 이야기 정도다. 이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극히 사소한 일부로서 다윗의 신앙과 삶을 부요케 만들고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게 된 결정적 동기는 아니란 것이다. 다윗, 그가 ‘프라스프러스'(prosperous) 신앙의 소유자일 수 있었던 결정적 동기, 그 숨은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시므이’의 저주성 폭언이다! ‘시므이’의 저주성 폭언 속에 승리의 비결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문 것 같다.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 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에게로 돌리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 (삼하 16: 7-8)

‘시므이’의 저주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원수의 그 저주성 폭언마저 자신의 죄에 대한 채찍으로 내리시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겸허함으로 받았다. 바로 이것이다! 다윗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원수의 저주성 폭언에 대처하는 방법, 프라스퍼러스(prosperous, doing well)신앙, 성화된 신앙으로 정진할 수 있느냐, 아니면, 옛사람 그대로인 실패자로 남느냐 갈림길의 시금석을 가르는 놀라운 비밀이 원수의 저주성 폭언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잘 활용한 믿음의 거장이다!

반면, 알량한 자존심을 꺾지 못해 울컥울컥 순간순간 보복 심리로 기울고 있는 초라한 내 자신, 감정을 다 풀었노라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틈만 있으면 미해결의 감정이 속을 헤집고 올라와 낑낑대는 몸부림, 위장된 겸손, 자기 실력을 가꾸고 다듬어 빛을 보려는 생각보다 쓸데없는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상대를 공격할 틈만 노리는 비루한 사울의 편협함, 내 가슴 시리고 아픈 것만 생각하고 형제의 가슴이 시리고 아픈 것을 다독일 줄 모르는 유아적 사고, 다윗처럼 듬직한 감정으로 대범함을 보이는 대신, 감정처리가 잘 되지 않아 들쑥날쑥, 팔팔끓는 냄비처럼 찼다 더웠다 바글대는 사울의 얄팍함, 성령의 사람답지 못한 이런 한심한 자화상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원수가 저주하는 말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지 못한다. 그것은 철저하게 사단으로부터 오는 사악한 음성이라며 혈기 내고, 비아냥거리고, 한 개 받으면 열 개로 되돌려주지 못해 안달이다. ‘당신이 사단이다, 아니다, 네가 사단이다.’ 들어본 적 있는 소리인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가 아닌 내 마음에서 솟아나는 소리들이기에…

물론, 다윗은 우리네 범인과 다른 점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광야의 도망자 신세가 된 처량한 다윗을 향하여 돌을 던지며 맹렬한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 다윗 왕의 부하 장수 중 하나인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허락만 하시면 당장에 칼로 쳐죽이겠다고 왕께 간언했다. 그때 다윗 왕의 반응,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 너무 허허롭고 너무 멋지다. 그 호기, 그 믿음을 배우고 싶다.

내가 만약, 이웃의 저주성 발언을 들었을 때, 그 음성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지고, 혹시 실수로라도 잘못된 길에 들어갈 것을 염려하셔서 속히 그 자리서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나는 프라스퍼러스(doing well, successful)신앙을 소유한 성도라고 자부해도 좋을 것이다.

줄다리기 시합 같은 영적 경기장에서, 나도 승리해야 하는데, 쉽지가 않다. 연약하고 힘이 없어, 언제나 꼴찌 인생을 사는 것 같다. 그나마 굳게 잡고 있어야 할 말씀의 줄을 맥없이 놓아버리고 멀리 아주 멀리 달아나고 싶으리만큼 피곤한 때가 너무 잦은 것도 탈이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내가 잡고 있는 구원의 밧줄만은 끝까지 놓지 말아야 하는데, 손바닥이 아프고 쓰리다 하여, 시합 도중에 잡고 있던 줄을 슬그머니 놓아버린다면, 나는 ‘탈락자’가 될 것 뿐이다. 내가 강하든지 약하든지 상관없이 내가 줄을 놓아버리는 그 순간, 나는 이미 그 팀의 소속 요원이 아닌 것이다. 어찌하던지, 주님의 은혜 속에서 승리(doing well)해야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벗어난 자는 주께서 이루어두신 찬란한 승리(victory)와는 무관한 불쌍한 자가 될 수밖에 없다. 말세가 가까워져 옴을 볼수록, 더욱더 주께 바싹 붙어 있어야 겠다. 프라스퍼러스 신앙(prosperous faith), 주님께 붙어 있는 신앙,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성도가, 주님의 공급하시는 능력의 힘, 주의 길, 십자가의 길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 12)” .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케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계 3: 10)” 

출처: 목양연가/글: 최송연의 신앙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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