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지 휘트필드의 구원간증

죠지 휘트필드(George Whitefield)는 
죤 웨슬리(John Wesley) 등과 함께 
18세기 영국의 부흥을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특히, 그는 말씀의 불꽃으로 
한 시대를 불태운 당대 최고의 설교자였습니다. 

휘트필드의 사역은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에 영향을 미쳤고, 
미국의 대각성 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1714년 12월 16일, 영국 중부지방에 위치한 
글로스터(Gloucester)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상당히 불행한 편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두 살 때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그 결과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교육을 잘 받지 못하다가 
12살이 되어서야 교회 부설학교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15살 때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머니를 돕기 위해 약 1년 반 정도 학업을 중단하고 
어머니가 운영하던 여인숙 급사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그의 나이 4살 때에 홍역을 앓다가 
간호사의 실수로 인해 생긴 흉 때문에 사팔뜨기처럼 보여서 
별명이 “사팔뜨기”가 되기도 한 불행을 겪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18세에는 식비와 수업료를 

면제받는 대신에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는 조건으로 

옥스퍼드의 펨브로크 대학(Pembroke College)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1732년). 

당시 근로 장학생은 부유층 자제들의 방청소와 
심부름 등 시중을 들면서 공부하는 조건이었으므로 
상당히 굴욕적인 일이었지만 이 옥스퍼드 시절이야말로 
바로 그가 거듭남을 경험한 소중한 때였습니다. 

그는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나는 여인숙에서 일을 마친 후에는 
늘 성경을 읽었습니다”고 고백할 정도로 
하나님은 그에게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영적인 부분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은 성경 외에도 
“켄의 윈체스터 학자들에 대한 안내서"라는 책과 
윌리엄 로(William Law)가 쓴 
”경건한 삶에로의 진지한 부르심"이었습니다. 

그 외에 그는 많은 청교도들의 책을 포함해서 
고전들과 전기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그가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찾는 마음을 갖는데 
큰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휘트필드는 청소년기에 
죄에 대해 심각한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고백에 의하면 그는 어렸을 때 
종종 어머니의 돈을 훔치면서도 그것을 하찮게 여겼고, 
거짓말이나 욕설, 저주의 말, 어리석은 농담 등을 
아무런 거리낌없이 하곤 했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하여 휘트필드는 
“어린 시절의 범죄와 죄악들은 셀 수 없어서 
그것들은 내 머리털보다 더 많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나는 죄악 가운데서 태어났고 
본질적으로 선한 것이 내 마음 속에 없었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마음이 강했지만 
동시에 죄를 떨쳐버릴 수 없는 자신을 보며 
죄에 대한 심각한 갈등에 빠져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기도와 금식으로 수많은 날들을 보냈습니다.

이러한 갈등은 
그가 옥스퍼드로 진학한 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그가 거듭남을 경험하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개입하심 가운데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죄에 대한 깊은 각성과 고민 없이 
죄사함의 경험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옥스퍼드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일하면서 
온갖 굴욕적인 상황을 견뎌내야 했지만 
그는 근면한 자세를 가지고 성실하게 대학시절을 보냈고 
글로스터에서처럼 경건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죤 웨슬리, 챨스 웨슬리 등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던 “홀리 클럽(Holy Club)"에 
함께 참여하게 되었고, 그들과 함께 철저한 
자기훈련으로 경건생활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많은 선행과 경건생활이 
자신들의 구원에 영향을 끼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휘트필드 자신도 
이러한 경건의 훈련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를 이루는 수단이 될 줄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그의 생애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게 된 
결정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서 
“거듭남”이라고 되어 있는 바로 그 경험이었습니다. 

렸을 때부터 죄 문제와 갈등하면서 
참 자유를 추구해 온 그에게 마침내 
진리의 빛이 임한 것입니다. 

어느 날 챨스 웨슬리가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이 쓴 
“인간의 영혼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생명
(Life of God in the Soul of Man, 1677)"
이란 책을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 책은 휘트필드로 하여금 지금까지의 생각들을 
허물고 거듭남의 필요성을 깨닫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는 책을 접하고 난 뒤의 갈등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듭나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저주를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가 기도를 하고 성찬에 참여할지라도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책을 태워버릴까? 던져 버릴까? 
아니면 그것을 한번 추구해 볼까? 

나는 그 책을 계속 읽었고, 
그 책을 손에 들고 하늘과 땅의 하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제가 마지막에 멸망당하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제게 
기독교가 무엇인지 보여주소서!.....

나는 금식을 해왔고 철야도 했으며, 
기도와 성례참여 등 그렇게 오랫동안 
많은 것들을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영원히 잊지 못할 
나의 친구를 통해서 그토록 귀한 책을 
나에게 보내 주시기 전까지 나는 
참된 기독교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몇 줄 더 읽어나가는 동안에 
“참된 기독교 신앙이란 영혼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형성되는 것”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순간부터 거룩한 광선이 내 영혼 위에 비쳤고, 
그때야 비로소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자신의 종교적인 경건과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지금까지의 생각을 깨뜨리고 
구원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야 한다는 
절대적인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책을 통해 
그로 하여금 기독교 내에서의 종교생활과 경건, 
선행을 하고 있는 모습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며 
이러한 삶을 철저히 할 때 구원을 받는다는 자신의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며,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이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거듭남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비로소 절실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휘트필드는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것을 얻기 위해 수많은 날들을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은 
자기 부인과 불타는 경건을 통해 오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 같은 노력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자 
그는 홀리 클럽과의 관계를 끊고 간단한 빵과 차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는 각오로 간절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생명을 추구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육체의 쇠잔함과 정신적인 고통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얻고자 하는 
열정으로 계속해서 기도하였습니다.

마침내 휘트필드는 1735년 어느 날, 
로마서 8:15-16을 통해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어떠한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휘트필드는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양자의 영(롬 8:15)"을 받았고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 날 비추어주시는 은혜의 빛을 통해 
휘트필드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이 
구원의 길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에 자신을 내맡겼을 때 
하나님께서 의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는 당시의 체험을 이렇게 간증합니다.

어느 날 나는 "내가 목마르다! 내가 목마르다!"
라고 하면서(은혜를 갈망하면서) 침대에 몸을 던졌습니다. 

잠시 후 곧바로 나는 나를 매우 심하게 억압하고 있는 
속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탄식하는 영께서 나를 취하셨고 
나는 내 구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나는 가는 곳마다 
시편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내 기쁨은 점점 내 영혼에 자리잡게 되었고,
따라서 나의 탄식하던 날이 종결되었습니다.

휘트필드의 거듭남의 체험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그가 체험한 거듭남은 
그의 영적생활과 사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거듭남"은 평생 동안 
그의 수많은 설교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그는 자신에게 일어난 잊을 수 없는 이 거듭남의 
체험에 대하여 평생 동안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던 그 날을 회고하면서 
휘트필드는 "그 기쁨은 마치 강둑에서 범람하는 
홍수와 같아서 말로 형언할 수 없었으며, 
그 날은 영원히 기억될 날이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휘트필드는 거듭남을 체험하고 
그 놀라운 기쁨을 주체할 수 없어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간증했습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며 
“나는 내 모든 형제와 자매들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 사실을 알렸고 내 방에 찾아오는 학생들에게도 
그 일을 말했습니다”고 했습니다.

(윗 글의 대부분의 자료는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휘트필드
(송삼용 저, 생명의 말씀사, 1998)”
에서 발췌한 것임).


위에서 보았듯이 휘트필드는 
어느 누구보다 경건한 삶을 훈련하며 살았지만, 
이러한 경건한 삶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거듭남을 
경험해야 한다는 도전 앞에 겸손히 엎드렸고, 
영혼의 괴로움 가운데 기도하며 
간절히 거듭남을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그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확신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절망감을 느끼게 하셨고, 
그가 모든 희망을 포기했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로마서 8:15-16 말씀을 통해 
거듭남의 선물을 은혜로 베푸셨습니다. 

이 거듭남은 휘트필드처럼 
나중에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결코 아닙니다. 예

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고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경험한 것입니다. 

즉, 거듭남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그가 아무리 종교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분명히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이 경건하다고 생각합니까?

이러한 자신의 경건함이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심각하고 
연약한 죄인인지 올바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구원에 대해 어떠한 기여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휘트필드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가능성에 대한 철저한 절망감을 느끼게 하시고, 
자신을 구원하시는 온전한 하나님 은혜를 경험케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자들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한 자들입니까? 
여러분은 분명한 거듭남을 경험했습니까?


카페: 신약성경적인 교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前 ISIS 대원

 

유럽은 ISIS 침투 위협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번에 터키에 첩자로 침투했던 전 ISIS 대원과 통화하면서

ISIS에 대해 더 깊이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ISIS 대원이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한 후,

새 삶으로 돌아선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출처: CBN / 번역: KRM
http://www.kingsroommedia.com

'인권'이 사라진 북한 수용소의 끔찍한 생활!

 

 

 

'종교 공식'에 갇혀 '강도 만난 이웃'을 외면할 것인가?

- 대한민국이 맺을 회개의 열매 -




말도 안나오는 일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우리 땅 북쪽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정권과 북한주민을 구별하지 못하고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이 제대로 바뀌지 않으면,

북한은 영원히 저런 저주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정말 정신차리지 않고, 분별하지 못한다면,

교회(그리스도인)가 분별하지 못하고, 관심갖지 않고,

회개치 않고, 이런 상태로 계속 나아간다면,

하나님이 북한땅을 여실리 만무합니다.

되려 우리에게 심판이 임할까 두렵습니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이땅의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통회와 자복하며 행동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부르는 한국교회 지도자들!

 

 



 

끊이지 않는 살육!

 

끊이지 않는 살육 속에서 북한 주민들이 절규합니다. 말을 할 수 없는 탄식 속에서 북한 주민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북한 정권의 철권통치 아래서 극도로 신음을 하며 소망이라곤 전혀 없는 처절한 지옥같은 상황 속에서 북한 주민들은 발버둥칩니다.

 

끔찍하게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너진 마음 그리고 북한 주민들의 신음과 핍박 그리고 아픔들이 바로 남한 교회를 향한 심판의 다림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유린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지 않고 침묵하는 수많은 남한 교회들에게 진노하고 계십니다.

 

북한 정권의 칼부림 아래서 극도로 탄식하는 북한 주민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북한 정권과 거짓 평화를 외치며 북한 정권을 어르고 달래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악독함을 넘어서는 국가적 차원의 악독함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다가 걸리면 총살당하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연명하는 북한 주민들을 애써 외면하고 김일성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봉수교회에 남한 교회 성도들의 헌금을 바치는 사역자들은 무슨 연유인지 이에 대하여 무감각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창궐한 영적 불모지 북녁 땅을 위한 기도보다 이땅에서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악독함을 하나님은 조명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잔인한 이기심입니다. 수천만명을 학살한 짐승같은 정권과 무슨 경제협력이며 수백만명을 굶겨 죽인 사탄 정권과 무슨 연방제입니까?

 

한낱 인간에 불과한 김일성을 신으로 숭배하는 북한 정권은 무너져야 합니다. 북한 정권을 협력의 대상으로 보는 인본주의 시각은 부서져야 합니다. 종북좌파 세력은 무너져야 합니다.

 

철권통치 아래서 극도로 신음하는 북한주민들의 탄식에 대한 남한 교회의 태도가 바로 남한을 향한 심판의 다림줄입니다. 현재 남한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남한 교회는 이것을 뼈저리게 자각해야 합니다.

 

 

글 출처: '예슈아 제4권' 수록글 (예슈아 출판사)

http://cafe.daum.net/biblemunjanara

 

 

자연치유력과 요법

공포의 아토피!! 아이를 더럽게 키워라 !!


[안종주의 '건강 사회'] 미생물의 건강학


10여 년 전의 일이다. 노인 사회 일본의 실태를 살피러 동료 기자들과 함께 도쿄, 나라 등지의 노인 요양원들을 둘러보았다. 나라 인근에 있는 '태양의 집'이란 한 노인 요양원을 방문했다. 숲이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요양원은 나무로 지은 2층 집이었다.

한데 재미있는 것은 울타리 하나 사이로 유치원이 있었다. 안내인에게 물어보니 이 지역에서는 이 유치원이 인기가 많아 매년 모집 때마다 엄마들이 앞 다퉈 신청을 한다는 것이다. 시 외곽에 자리 잡고 있어 아침이면 부모들이 자녀를 자동차로 이곳에 데려다주고 오후에 다시 데려간다고 한다.


마당과 약간의 경사가 있는 숲 속 언덕 곳곳에 수십 명의 어린이가 삼삼오오로 흙장난을 하며 놀고 있었다. 몇몇 젊은 유치원 여선생님들도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과 함께 흙장난이나 소꿉놀이 등을 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는 한 무리의 어린이들은 뛰어다니고 있었다.


호기심에 우리 일행은 유치원을 방문했다. 통나무집으로 된 언덕 위 유치원에는 피아노 한 대와 나무로 된 의자만이 있었고 아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안내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이곳에서는 하루 종일 숲 속에서 뒹굴고 뛰어놀며 흙과 함께 지내는 것이 일과라고 한다. 비가 오거나 하면 유치원 안으로 들어가 피아노 연주 등 음악도 듣고 논다고 한다. 자연 속에서 노는 유치원인 셈이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대부분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면 손과 옷이 더러워지고 불결하다며 못하게 한다. 또 혹시나 흙에서 나쁜 병균이나 옮을까봐 야단을 치기까지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아파트 생활에다 포장도로 밖에 없어 흙이나 숲 속에서 뒹굴고 뛰어놀 기회조차 박탈당하고 있다.

심심찮게 신문, 방송에서 생활용품이나 생활환경에서 세균 검출 운운하는 보도를 들을 때마다 일본에서 보았던 이 유치원 생각이 나곤 한다. 유치원 운영자와 이곳에 아이들을 보내는 부모들은 세균이 득실거리는 흙장난을 주요 일과로 삼는, '불결한'(우리나라 부모들에게) 그런 곳을 좋아하는 것일까.


우리나라 신문, 방송들은 유독 세균이나 곰팡이 등 미생물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휴대전화나 공중전화, 쇼핑 카트, 컴퓨터 자판 등에 세균이 득실거린다는 보도를 시도 때도 없이 해댄다. 이런 보도를 본 독자와 시청자들은 우리 몸에 단 한 마리의 세균 침입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세균은 불결하며 위험한 존재로 각인된다. 박멸해야 할 대상이다. 생활용품뿐만 아니라 우리 입안과 피부, 옷, 집안 공기, 마룻바닥, 벽 등에서 세균이 검출되면 큰일이나 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항균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소독제가 가정 상비품이 돼버렸다.


우리 몸은 순수한 인간 세포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 몸은 피부는 물론이고 장 등 몸 곳곳에 세균들이 공존한다. 학술적 용어로는 정상세균총(Normal flora)이라고 부르는 이들 미생물 무리들은 우리 몸의 일부분이요 일생을 함께 살아가는 식구다. 만약 세균이 사라진 몸을 지닌 인간이 있다면 그는 얼마가지 않아 병원성 미생물에 감염돼 죽고 말 것이다. 세균 범벅인 사람이 정상인이고 세균이 전혀 없는 사람은 비정상적인 사람이다. 세균이 없는 사람은 지구 역사상 단 한명도 없었다고 보면 된다. 수많은 종류와 셀 수 없이 많은 미생물로 이루어진 정상세균총은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귀한 존재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미생물만 보면 죄다 죽이고 싶어 안달일까? 왜 언론들은 세균을 무조건 피해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일까? 이는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미생물이 우리 몸에 치명적인 감염병(전염병)을 일으키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역시 극소수이기는 하지만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인유두종바이러스, B형간염바이러스 등 암을 일으키는 미생물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여기에 한몫을 하고 있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미생물을 건강과 관련해 유익한 놈과 나쁜 놈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앞서 이야기한 질병을 일으키는 나쁜 놈과 유산균이나 된장, 김치 등 발효미생물, 항생제를 우리에게 주는 미생물 등 좋은 놈으로 본다. 하지만 미생물은 이 두 가지 부류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유익하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놈들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좋은 놈이 아닌 것은 죄다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 미생물이 실은 알게 모르게 우리 몸을 보호하고 병원성 미생물의 보호막이가 되는데도 말이다.


미생물을 죽여야 할 대상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의학자 파스퇴르와 독일의 코흐가 미생물이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라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밝혀내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과거 수많은 인간의 목숨을 빼앗았던 중세의 흑사병을 비롯한 역사적 전염병과 감염 등이 모두 이들 미생물 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세균 공포는 인간의 머릿속에 깊이 각인됐다. 인류 역사에서 결핵,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 매독, 디프테리아, 독감, 두창(천연두), 에이즈 등 악명 높은 감염병들이 우리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21세기 들어와서도 신종플루와 사스 등 미생물에 의한 감염병은 지구촌 전체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전염병 미생물 원인설이 확립된 이후 인간은 미생물을 박멸하고 미생물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최대한 없애는데 온 힘을 쏟았다. 청결과 위생 관리가 정부가 반드시 해야 할 역점 사업이 되었다. 과학자들은 미생물만 골라 죽이는 항생제와 각종 소독약품을 개발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값싸고 쉽게 이들 항생제와 소독약을 구입할 수 있게 됐다. '미생물은 우리가 멀리해야 할, 보는 족족 죽여야 할 적'이라는 믿음이 영구불변의 진리가 되어 인간의 뇌리 속에 너무나 깊이 박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가습기에 혹 서식할지 모를 세균 등을 죽이기 위해 물에다 살균제를 마구 섞어 사용한 것이다. 실제로 가습기 살균제에 치명적인 세균이 자라 우리를 위협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런데도 세균을 모조리 없애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폐에 독성을 지닌 살균제를, 그 위험성을 모르고 사용하다 현재까지 무려 112명이 숨진 것으로 드러났다. 세계 최초의 바이오사이드 집단 사망 사건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의 1차적인 책임은 살균제를 개발 또는 수입, 판매한 회사에 있고 2차적인 책임은 이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정부에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 뿌리를 찾아가면 세균에 대한 우리들의 지나친 공포심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모든 살균제와 항균제, 항생제는 몸에 해롭거나 해로울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꼭 필요할 때만 사용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 화장실 청소, 집 유리와 가구 청소, 부엌 청소, 자동차 청소 등에 사용하는 살균제와 각종 항균 제품(옷이나 생활용품 등) 등도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 심각한 폐 질환을 유발해 약 100명 이상의 생명을 앗아간 가습기 살균제

좀 더러우면 어떤가. 병원성 미생물이 득실거리지만 않으면 된다. 때론 더러운 것이 몸에 좋다. 일본 '태양의 집' 유치원 어린이처럼 우리가 더럽다고 여기는 흙과 함께 뒹구는 것이 몸에 좋다. 흙은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다. 물론 파상풍균이나 화농성균 등이 흙에 있어 피부에 상처가 날 경우 감염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럴 경우 잘 소독하면 되고 파상풍에 걸릴 위험은 극히 낮다. 일본 태양의 집 유치원 설립자나 부모와 달리 구더기 무서워 장 담그지 못하는 사람은 파상풍균이나 흙속 병원균 존재 가능성 때문에 흙을 멀리할 수도 있겠다.



그런 이들을 위해 이른바 위생 가설(Hygiene hypothesis)을 소개하겠다. 나처럼 미생물, 보건학 전공자들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아직 낯선 내용이다. 최근 한 공중파 방송에서 이 내용을 소개한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고 언론에서도 가끔 이 위생 가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요즘에는 위생 가설이란 용어는 기억하지 못해도 '마구 키운 어린이가 더 건강할 수 있다'는 정도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위생 가설은 1989년 <영국의학저널>에 데이비드 스트라찬이 어떤 감염이 우리 몸속에서 일어나면 알레르기 발생 위험이 낮아진다는 논문을 처음 발표하면서 세상에 나왔다. 그는 알레르기 질환인 건초열과 습진이 한 자녀만을 둔 가족의 어린이보다 대가족 어린이에게서 적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이 위생 가설을 제시했다. 다시 말해 태어나면서부터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대가족 환경에서는 핵가족 환경보다 각종 세균에 더 많이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 때문에 알레르기 질환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 맨땅요법이 30여년 이상 앞선 유럽. 유럽의 맨땅공원들에서 노는 아이들 모습입니다. 맨발로 맨땅을 밟기에 좋은 다양한 코스들을 만들어 놓고 있으며 신발을 벗어 놓을 수 있는 신발장도 마련해 놓고 있다>


그 뒤 이 위생 가설은 면역학자나 역학자들이 알레르기 장해 연구를 하는데 중요한 이론적 틀거리(framework)를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면 더 개발된 국가일수록 알레르기 질환 발병률이 높으며 산업화 이후 알레르기 질환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위생 가설이 사용된다. 이 가설은 최근 미생물 감염체와 함께 공생세균, 기생충이 인체 면역 시스템 발달에 중요한 매개체 구실을 한다는 것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다.


알레르기 질환은 해롭지 않은 항원에 대해 우리 몸이 부적절한 면역 반응을 일으킨 결과이다. 그런데 많은 종류의 세균과 바이러스는 인체가 이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줄여준다. 인류 진화 역사와 함께 감염체, 공생세균, 기생충이 우리 몸과 공존하며 균형 잡히고 조절된 면역 체계 발달에 기여해왔다.

하지만 근대 들어와 전염병 유행을 막기 위한 소독 등 위생 관리는 한편으로는 전염병을 줄이고 평균 수명을 늘리는데 일등공신 구실을 했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제를 일으켰다. 광범위한 항생제 사용으로 병원균뿐만 아니라 비병원성 세균까지 죽어갔다. 어린이들은 위생 향상과 항생제 덕분으로 많은 질병의 위험에서 벗어나거나 위험이 줄어들었지만 아토피나 각종 알레르기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위생 가설은 우리가 약간 불결하다고 느끼는 환경에서 자란 어린이들이 다른 감염병이나 알레르기 질환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의학자들은 최근 몇몇 기생충을 이용해 자가 면역 질환인 크론병(유해한 박테리아에 지나치게 반응하는 면역 체계로 유발되는 만성적인 장 질환), 다발성경화증, 천식, 궤양성대장염 등의 질환을 치료하는, 이른바 기생충 치료법을 선보이고 있다고 한다. 난치병 치료에 위생 가설을 응용하고 있는 것이다.

회충이나 촌충, 요충, 십이지장충 등의 기생충 가운데 적어도 하나 이상을 몸에 지니고 자라났던 지금의 50대 이상 중장년층과 노인들은 이런 기생충뿐만 아니라 대부분 어릴 때 7~8명 이상 한 지붕 아래서 생활하는 대가족 환경 속에서 지냈다. 또 자치기, 돼지불알 놀이, 구슬치기, 딱지치기, 고무줄놀이. 소꿉놀이 등 학교 운동장이나 집 밖 흙속에서 뒹굴며 지냈다.

그래서인지 1950~70년대에는 천식을 앓거나 아토피, 알레르기 질환으로 고생을 하는 사람을 보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우리 어린이들이 천식과 아토피 등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 우리 어린이 건강을 위협하는 주범들이다. 여기에는 1980년대 이후 환경오염 악화 등의 까닭도 한몫을 하기는 하지만 그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위생 가설이다.

지금부터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은 미생물은 우리의 적인 동시에 친구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무조건 미생물을 멀리하고 두려워하고 박멸하려 할 것이 아니라 적과 아군을 잘 구분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독감이나 치명적인 감염병이 유행할 때는 손 씻기와 소독에 신경을 써야겠지만 평소에는 무해한 세균에 대해서 무덤덤해야 한다.

언론도 불필요하게 세균 공포를 조장하는 세균 검출 보도를 자제하거나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 조금은 더러워야 건강해진다는, 매우 역설적인 이야기가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다. 쓸데없이 세균 잡으려다 되레 당신의 건강을 해친다. 너무 깔끔 떨지 말자. 소독하느라 돈 들고 시간 들고 건강마저 해칠 수 있다. 건강한 몸과 건강한 사회는 약간의 더러움과 동행한다.


글 출처 : [안종주의 '건강 사회'] 미생물의 건강학


* 맨발로 맨땅을 밟는 맨땅요법이 아토피 치유에 효과가 있는데 미생물에 의한 효과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토리야마 보육원 역시 맨땅요법을 주 교육테마로 해서 아이들을 천재적인 교육으로 키우기도 하지만 이 보육원 아이들 역시 아토피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사진 330

 

 

 

 

 

 

 

 

 

 

 

 

 

 

 

 

 

 

 

 

 

 

 

 

 

 

 

 

 

 

 

 

 

 

 

 

 

 

 

 

 

 

 

 

 

 

 

 

 

 

 

 

 

 

 

 

 

 

 

 

 

 

 

 

 

 

 

 

 

 

 

 

 

 

 

 

 

 

 

 

 

 

 

 

 

 

 

 

 

 

 

 

 

 

 

 

 

 

 

 

 

 

 

 

 

 

 

 

 

 

 

 

 

 

 

 nbsp;

 

 

 

 

 

 

 

 

 

 

 

 

 

 

 

 

 

 

 

 

 

 

 

 

 

 

 

 

 

 

 

 

 

 

 

 

 

 

 

 

 

 

 

 

 

 

 

 

 

 

 

 

 

 

 

 

 

 

 

 

 

 

 

 

 

 

 

 

 

 

 

 

 

 

 

 

 

 

 

 

 

 

 

 

 

 

 

 

 

 

 

 

 

 

 

 

 

 

 

 

 

 

 

 

 

 

 

 

 

 

 

 

 

 

 

 

 

 

 

 

 

 

 

 

 

 

 

 

 

 

 

 

 

히브리사고와 원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어느 목사님께서 “히브리사고 *** ** 세미나”를 한다는 광고의 이메일을 반복적으로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을 히브리인이라고 하고 그들의 언어가 히브리어이며 성경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기에 히브리사고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충분히 인정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한 전제와 더불어 도대체 얼마나 값지고 중요한 세미나이기에 이리도 반복적으로 보내주시는가 싶은 마음에 그 내용을 좀 더 유심히 살펴보기 위하여 그곳과 연관된 이런 저런 정보들을 검색하여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으며 하나님의 영감에 의해 기록된 것이기에, 성경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과 목적과 계획을 바로 알고 정확히 파악하려면, 먼저 성경원어인 히브리 언어의 구조적 원리를 알아야 하고, 본문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이 그 기록한 말씀 속에 이미 해답과 결론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본문 속에서 이미 기록된 말씀으로 해석해야 진리의 말씀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상의 내용은 그 누구라도 충분히 동의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진행되는 그곳의 강의는 어떠한가 하여 그곳 아카데미과정에서 공개한 창세기12장의 아카데미강의영상을 시청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강의를 듣다보니 어떻게 이런 수준의 강의를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성경 아카데미라 할 수 있겠으며, 그 미천한 실력의 부끄러움을 모르고 공개 영상으로까지 올려놓았을까 하는 심히 큰 안타까움과 황당함이 밀려왔습니다.

 

‘건강하게 신앙생활 잘 하던 일반 성도님들이 이런 황당한 강의에 노출될 경우 그런 분들에게 얼마나 많은 혼란들이 생겨나게 될까’라는 우려도 생겼습니다.

 

구약의 창세기 12장을 본문으로 하는 그 아카데미과정의 강의영상 중간에, 그 아카데미의 수준과 질이 어느 정도인지를 능히 짐작케 하는 매우 황당한 내용들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부분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녹취하여 아래에 인용해 봅니다.

 

-아 래-

 

(서두 생략) 히브리사고의 전치사는... 히브리동사에서 전치사는 약 20개 정도 되는데.... 목사님들은 히브리 원어를 볼 줄 알아야 되고... 성경에 나오는 중요한 단어는 원어로 보아서 자세히 잘 설명해 주어야 하는데... 중요한 내용들은 제가 다 찾아서 정리해 놓았어요. 요 정도만 원어해도요 절대 부족함이 없어요. 성경에 나오는 중요 단어들은 뜻풀이까지 다 해 놓았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마시고... 교인들에게는 한글로...

 

따라서 합시다 “토브”, “토브” 좋은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좋았더라” 그러니까 모세도요 “모세가 장성하여”라고 할 때 그 “장성하여”라는 단어가 “토브”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어요. 그 “장성했다”라는 단어의 원어가 “토브”입니다. “토브” “좋았더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을 모르면 번역이 그냥 보시기에 “장성하여” 그게 원어가 그런 게 아니에요.

 

예를 들어서 “복음을 위하여 자녀나 전토나 아비를 버린 자~” 그래 되겠지요? 그렇지요? 그럼 생각해 보세요. ‘목사님 목회를 위해서 아버지와 자식을 다 버립니까? 버린 자가 복을 받는데 그러면 다 갔다 버려야 되지요?’ 해석이 잘못된 거에요. 그런 버린다는 뜻이 버린다는 그런 버린다는 뜻이 아니고요 따라서 합시다. “하나님께, 하나님께 바친다.” 그런 뜻이에요.

 

그 번역이 잘못 돼 가지고 그게 본문에 그렇게 되어있으니까. 야 성경을 읽다가요, 근심이 되요. ‘이거 내가 아버지하고 단절해야 되나?, 절교해야 되나?, 버려야 되나?,’ 그게 해석이 잘못 돼 가, 원어에 그렇게 되어 있다니까... 이게요, 본문 읽어가지고 교인들 보니까, ‘여러분 복음을 위하여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본토와 친척을 다 버려라~’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근데 모르면 당할 수밖에 없는 거에요.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할 때, 여러분 그게 원어가요. 그 말이 맞느냐? 아니에요. “네 영혼의 믿음의” 따라서 합시다. “믿음의 분량대로” (믿음의 분량대로) 그렇다면 우리가요,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다.” 원래 원어의 뜻은 그게 아닙니다. 모르면 용감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원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서 본문을 잘 바로 전해주고 본문이 사실 원어의 동사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교인들이 그걸 이해를 하기 쉬운데 자기 생각대로 생각하고 알고 그렇게 우리의 그 사고방식으로 교인들은 생각합니다. 왜? 정리를 안 해주면.. 그런 게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상-

 

이상의 강의를 듣던 저는 너무도 황당함과 당혹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모름지기 신학교에서 정식으로 신학공부를 하고 필수과목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이수한 목회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성경의 원어를 알아야 하고, 성경원어에 입각한 정확한 설교를 해야 한다는 강사의 대전제는 당연히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강의하시는 그분의 수준을 보아하니, 제가 보기에 히브리어 원어의 중요성과 의미를 그토록 강조하며 이 강의를 진행하는 강사 자신이 오히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거의 모르시는 수준이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알파벳과 단어읽기 정도의 수준에 머무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그 정도의 수준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모세가 ‘장성하여’”에서 “장성하여”라고 할 때 그 “장성하여”라는 단어가 “토브(b/f)”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고, 그 “장성했다”라는 단어의 원어가 “토브”이기에 “장성하여”라는 번역이 잘못된 것이고, 원어가 그런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분이 말씀하고 있는 원어성경이란 것이 도대체 어떤 원어성경인지가 사뭇 궁금합니다.

 

맛소라 본문(M.T)에 의거한 히브리어성경 BHS로 출애굽기 2:11 “모세가 장성한 후”를 확인해본 결과 그분의 말씀대로 “토브(b/f)”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토브”도 아니었습니다.

 

“토브”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성장하다, 크게 되다, 커지다, 강해지다, 찬양하다.”라는 뜻의 가달(ld'G:)이었습니다. 혹시 모세가 아닌 다른 사람과 혼동하여 인용한 것일 수도 있기에 다른 사람과 연관하여 찾아보았으나, 실제로 “토브”라는 단어가 “장성하여”라고 쓰여진 예나 그렇게 잘못 번역되어진 예는 성경전체에 단 한 구절도 없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자녀나 전토나 아비를 버린 자~”(막 10:29)도 번역과 해석이 잘못된 것이고, 버린다가 “하나님께 바친다.”라는 뜻이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런 것일까요? 물론 삶의 실제적인 적용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을 버린다’는 이야기는 ‘하나님께 ~을 바친다.’는 의미입니다.”라고 설명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복음을 위하여 ~을 버린 자”라는 번역과 해석이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기에서 “버린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피에미(ajfivhmi)”로 “내보내다, 버려두다, 용서하다.”라는 기본의미를 가지고 있고, 신약성경에서 약 143회 나오며, '가게하다, 보내버리다, 포기하다, 취소하다, 탕감하다, 용서하다, 버리다, 버려두다'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지 “하나님께 바친다.”로 사용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번역과 해석이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강사는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요삼1:2) 원할 때, 원어로는 원래 그런 뜻이 아니고 ‘네 영혼의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의미”>라고 주장하였는데, 그 강사가 말하는 원어는 도대체 어떤 원어를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누구나가 인정하는 신약공인원전인 Stephens와 Nestle판 모두가 공히 “peri; pavntwn eu[comaiv se eujodou'sqai kai; uJgiaivnein, kaqw;" eujodou'taiv sou hJ yuchv."로 되어있습니다.

 

헬라어를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하여, 이 구절의 단어들을 원어순서대로 배치하면 “~에 대하여. 범사. 내가 간구하노라. 네가. 잘 되기를. 그리고. 강건하기를, ~처럼. 잘 되는 것. 너의. 그. (영)혼이”로 “너의 (영)혼이 잘 되는 것처럼 네가 잘 되기를 그리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만으로도 거의 흠잡을 데 없는 좋은 번역입니다. 성경원어 그 어디에도 “네 영혼의 ‘믿음의 분량대로’”라는 의미는 나오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단어가 “믿음의 분량대로”를 뜻하는 것인지 참으로 황당합니다. 모르면 용감해질 수밖에 없다는 그분 자신의 말처럼 그분 자신이야말로 원어를 몰라도 너무 모르기에 그토록 황당한 발언을 그토록 용감하게 발설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 강사의 주장처럼, 목회자들은 성경원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아서 성경본문의 정확한 의미들을 성도들에게 바로 잘 전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사고의 관점을 잘 이해하고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신학대학과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생들이 피나는 노력으로 히브리어, 헬라어, 고대근동문학,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등등 올바른 성경의 해석과 적용을 위한 여러 분야들을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사고와 히브리어, 헬라어의 중요성을 그토록 강조하고, 또 히브리사고 성경세미나와 아카데미 등을 운용하고 있는 그곳의 강사가 성경원어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여러 목회자들과 순진한 성도들을 모아놓고, 이상과 같은 전혀 엉뚱한 주장들을 그토록 용감하게 펼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하도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그리고 혹여라도 그런 것에 현혹되시는 분들이 안계셨으면 하는 마음에 이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히브리사고와 성경원어와 연관된 모든 곳들이 무조건 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만 본교회의 담임목회자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검증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저런 곳들에 함부로 다니는 위험성을 경계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정말 본교회의 담임목회자가 검증하여 객관적으로 인정할 만한 건전한 히브리사고와 성경원어연구라고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를 위시하여 목회현장에서 힘들게 힘들게 전도하여 성도들을 양육하는 목회자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황당함과 어려움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 가운데 하나가, 전도하여 복음으로 양육한 후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성실하게 잘하던 성도가 어느 날 갑자기 눈빛이 변하고 교회출석을 등한히 하다가 교회를 떠나가게 되어 그 원인을 알아보니, “히브리식사고 성경공부”가 어떻다느니, “성경원어의 의미”가 어떻다느니 하면서 엉뚱한 소리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세히 알아보면 정말로 그 성도가 성경의 원어를 제대로 잘 알게 되었고, 본교회의 목회자가 메시지를 잘못 전해서가 아니라, 이상에 소개한 것처럼, 기존의 한글성경의 번역이 잘못되었다느니, 해석이 잘못되었다느니, 원어의 의미는 그렇지 않다느니 하는 식의 과장되거나 근거 없는 주장들에 현혹이 되어, 그런 곳에서만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착각과 미혹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고 있는 담임목사의 한 사람으로,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성도님들께 진지하게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 주변에 히브리사고가 어떻다느니, 성경원어가 어떻다느니 하는 식의 그럴듯한 말들에 현혹되지 마시고, 개역개정, 새번역, 현대인의 성경 등등 여러 우리말 성경번역들만으로도 얼마든지 건강하고 복된 신앙생활을 하기에 충분하니, 우리말로 번역된 성경들부터 열심히 읽으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혹여라도 좀 더 깊고 정확한 의미들을 알고 싶은 부분들이 생기신다면 본교회의 담임목사님께 정중하게 여쭈시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담임목회를 하실 정도의 목사님들이시라면 성도님들께서 여쭙는 부분에 대하여 충분히 설명해주실 수 있는 기본들을 충분히 갖추신 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설혹 만의 하나라도 담임목사님께서 직접 모르시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배고파하는 자식이 생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식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고 마는 부모님처럼, 담임목사님의 주변 동역자들이나 신학교 스승님들께 정식으로 도움을 요청해서라도 그러한 문제들을 충분히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부디 교회 밖에서 이렇게 저렇게 진행되는 히브리사고와 성경원어라는 그럴 듯한 말들에 너무 쉽게 현혹되는 일들은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성경원어'라는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http://cafe.daum.net/gvlove0691/K3nD/1436

 

 

출처: 이병천 카페 [성령전인치유목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병천 목사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R.A. 토레이)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독자적인 삶을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생각을 생각하고, 우리 자신의 결심을 만들어내고, 우리 자신의 감정을 배양하려는 노력을 포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히 우리 안에 갖고 계신 그리스도의 뜻을 생각하고, 우리 안에 갖고 계신 그분의 목적이 이루어지고, 그분의 감정과 정서가 우리 안에서 느껴지도록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은 그리스도로부터 독자적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삶을 버리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흘러 들어오도록, 그분의 삶의 역사가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그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때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구하는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

무슨 신비한 묵상이나 황홀한 체험의 순간들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거하기를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을 배우려면 그분의 말씀, 성경에 기록된 그분의 말씀을 계속 섭취하고, 그 말씀들이 우리 마음 속에 살아 역사하도록 만드시기 위해 그 말씀들을 우리 마음 속에 심어주시도록 성령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To abide in Christ is to renounce any independent lives of our own. We must give up trying to think our own thoughts, form our own resolutions, or cultivate our own feelings. We must simply and constantly look to Christ to think His thoughts in us, to form His purposes in us, to feel His emotions and affections in us. It is to renounce all life independent of Christ and constantly look to Him for the inflow of His life into us and the outworking of his Life through us. When we do this, our prayers will obtain what we seek from God. …

It is not my moments of mystical meditation and rapturous experiences that we learn to abide in Christ. It is by feeding on His Word, His written word in the Bible, and looking to the Spirit to implant these words in our hearts to make them a living thing in our hearts.

R.A. Torrey

”Power-Filled Living” pp. 308-309, 310

(New Kensington, PA. Whitaker House, 1998)

[출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R.A. Torrey)|작성자 mslee1999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넉넉한 마음  

미국 단편영화 "런치데이트"에
나오는 내용 입니다.

-* -* -* -* -* -

백인 귀부인이
붐비는 기차역에서
흑인과 부딪쳐
쇼핑백을 떨어뜨립니다.

 

쏟아져나온 물건을
주워 담느라 기차를 놓치고
주변 음식점에 가서
샐러드 한 접시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은 그녀는 포크를
가지고 오지않은 것을 알고
포크를 가지러 갑니다.

 

그 사이 걸인처럼 보이는 흑인이
샐러드앞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을 보고맙니다.

귀부인은 화가 나서
포크를 집어들고
샐러드를 같이 먹습니다.
귀부인 한 번 흑인 한 번

교대로 음식을 먹습니다.

 

다 먹은 후 흑인이
커피를 두 잔 가져와
하나를 귀부인에게 건넸고
커피를 마신 귀부인은
기차를 타러 나갑니다.

 

순간 쇼핑백을 놓고 온
것이 생각나 급히
음식점으로 뛰어오지만
흑인도 쇼핑백도
보이지 않습니다.

 

당황한 귀부인이
음식점 여기저기를
훝어보는데
아까 그 옆 테이블에
손도 대지 않은
샐러드 접시가 놓여있고
의자 위에 쇼핑백이 있습니다.


자리를 잘못 잡은 귀부인이
흑인의 음식을 빼앗아 먹었던
것이었습니다.

 

흑인은 화를 내지않고 
음식을 먹는 귀부인과
나누어 먹었고
커피까지 대접했습니다.

 

이 흑인은 참으로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 입니다.

 

오늘 이 시대가 여유와
넉넉함을 잃어 버렸습니다.
조급하고 나만알고
배려가 없습니다.
모든것을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은
전혀 생각지않고
누군가 내 자리에서
내 음식을 먹는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의 실수에
관대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정죄하고 판단하고
심판합니다.

 

오늘 하루 이 흑인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면 어떨까요?

ㅡㅡㅡㅡㅡㅡㅡ
              
요즘 넘쳐나는 글 중에
최고로 감동의 글이네요...

가슴을 녹이는..
철퍼덕 가슴치는
반전의 감동!
내가 실수한 듯..    
그 착한 가슴넓은 흑인에게
어떻게 보답할까
가슴이 매여오네요...
여인 역시 따뜻한 사람이네요..

'짧은 글 긴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혈구와 적혈구의 사랑  (0) 2016.10.20
[한 글자에서 열 글자까지]  (0) 2016.10.06
'유능제강’(柔能制剛)  (0) 2016.07.25
짧으나 뜻깊은 글  (0) 2016.07.19
길을 가다가 돌을 만나면!!  (2) 2016.05.25

2016년 티비 TB 조슈아 한국 집회의 진상》규명을 추진하며  ★조슈아에게 묻는다



성경은 마지막 때

악한 영들이 기적과 신비로운 현상으로

성령을 가장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살후 2:9~10>  




한국교회와 한국사회의 공공의 유익을 위해 L목사의 글과 J목사의 글 그리고 

 Nh목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크리슬람 조슈아에게 묻는다


    논란이 많았던 크리슬람 티비 조슈아의 【티비비 조슈아 한국집회



①L목사님의 글


크리슬람 티비 조슈아에게 묻는다


J목사의 글과 NH목사의 글을 읽고난 후 한국교회에 사과할 의향이 있는지..

그리고 조슈아 당신은 알라 밖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SCOAN교회에서

주장했는데 하루속히 회개하기를 바란다.


나이지리아에는 ①기독교 , ②이슬람 그리고 ③크리슬람(Chrislam)이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한국 목회자들은 알고 있다.

아프리카 기독교 사회와 교계 그리고  미국 교계에서도 당신 조슈아가

리슬람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는데....

당신의 정체인  크리슬람 이라고 것을 몰랐기 때문에 

크리슬람인 당신을 맹신하고 추종하는  일부 한국 목회자와 교인들을

더 이상 기망하지 않기를  경고한다.


만약 조슈아 당신이  한국교계에 비밀스럽게 은밀하게

리슬람을 퍼트리고자 하는 장기적 계획을 갖고 한국에 온다면

그 계획은 무산될 것임을 밝혀둔


                                           



②J목사님의 글

 (티비 조슈아는 이 글을 읽고 회개하길...)

제가 앞자리서 안수받을때  이상한걸 알았습니다
죠수아가 환자보다는 사역을찍는 카메라3대?4대?



인가에만계속멘트하고( 잘찍으라고)
환자에집중보다는 자기가와 나타나는
현상들이 클로즈업되길
원하는모습들이었습니다.



실제이틀간 강단화면에는 찬송중 은혜받는사람만
이슈화시키고
정말침상채와서 링겔꽂고 휠체어환자나보호자들이
수백명있음에도 한사람도
얼굴을안비추어주었다는사실입니다.



다 거짓 투성이였습니다
첫째날도밤9시에왔다가11시30분쯤나갔고
둘재날도밤7시에왔다가
더일찍9시30분에 갔습니다.



이틑날  2시에와서 휠체어환자들
기도해주겠다고하며 희망을맘껏 부풀리더니
쳐다도보지않고 가버렸습니다.



분노한 보호자들이 엠블러스타고
생멸걸고 왔는데 이게 기독교냐면서
울부짖었지만 그는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자기가 기도 안해주고 안 낫고가면
그게죄라고 첫날설교까지 해놓고서ᆢᆢ



비즈니스집회도 1명당 천만원씩
100 명 모집했다하더군요
후원자는 최하35만윈씩받고ᆢ
누가 과연 이런 오다를 내렸을까 궁금합니다



③Nh목사님의 글



이 글을 쓰는 저는 “티비 조슈아” 목사 집회의 집행부에서 일했던 사람입니다.

집행부에서 일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지나온 많은 날동안 그 분의 사역에 대하여

이해와 동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7월22~23일에 있었던 집회를

위하여 최선의 물심으로 저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본 불로그에 “티비 조수아,를 훼방하는 자들에게 말한다”는 글귀를 통해서 티비 조슈아 목사님사역의 당위성과 합리성, 그리고 유용성에 관하여 밝힌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글에 대하여 많은 분들이 읽으시고 동론과 반론의 댓글을

올리신 것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7월23일에는 503명이라는 숫자가 말해주듯

저의 블로그를 방문하신 분들이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렇지만 7월 25일 일산 킨텍스에서 있었던 “목회자 컨퍼런스” 참석을 계기로 “티비 조슈아.., 훼방하는 자들에게 말한다”는 제목의 글을 내렸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도 제가 계속적으로 그 분의 사역에 대하여 저의 역할과 동의를

주기가 어려울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유를 본 글에서 다 말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요점을 정리해서 간략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중략~. 그렇지만 보다 중요한 그 외의 열매에 대하여는 의문스런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분명코 이번 집회의 큰 제목은 “치유 집회”입니다. 치유 집회 속에도 예수님과 복음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치유 집회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이런 치유 집회였기 때문에 비교적 중증 환자들로 분류되는 수 많은 환자들이 진단서 첨부와 함께 집회 3주 전부터 나이지리아 스탭들의 면접을 받았고, 여러 날을 기다린 후 집회 당일에는 고달픈 줄서기의 기다림을 거쳐서 집회 현장의 지정된 위치에 자리했습니다.


알려진바에 의하면 이번 집회에 등록한 환자 숫자가 1천5백명 이상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환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치유 라인에서 치유 사역을 받으신 분들은 환자 라인 맨 앞의 10% 이내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몇몇 중증 환자의 치유가 일어났고 그들의 간증이 주류를 이루는 것이 이번 집회의 전부였습니다.


시간상으로는 1시간 정도인 것 같습니다. 첫째 날과 둘째 날도 같은 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번 집회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뒤쪽에 배치된 약 90%로의 중증 환자들입니다.

그들은  마치 고도의 외계인처럼 외면받았습니다.


티비 조슈아, 목사나 나이지리아측의 그 어느 누구도 그분들에게 따뜻한

동정의 말이나 눈길 하나 주지 않았습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저는 그 시간이

가장 괴롭고 슬픈 시간이었습니다. 저의 짭은 영어로 곁에 있던 나이지리아

스탭진을 향하여 뒤쪽에 배치된 환자분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터져나오는 탄식 소리, 신음하는 소리, “나를 살려주세요, 나를 고쳐주세요, 여기 좀 봐주세요” 등과 같은 환자 분들의 절규는 맑은 정신으로는 참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에 그 분들은  그렇게 허망한 시간을 보내다가 그냥 그렇게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런 처참한 상황을 함께 지켜본 저와 저의 집사람은 함께 가슴저미는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생각하기를 "나도 이런 일에 가담한 나쁜 죄인이고 공범이구나"라는 자괴감을 가졌습니다.

 

그 순간부터 아무래도 “이것은 아니다” 라고 판단했습니다.


저는 집행부에서 스탭으로 일했던 한 사람으로서 이 분들에게 백번이라도

고개떨군 사죄의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전인 치유는 물론 자유와 회복을

자기의 것으로 가져가기 위해서 그 힘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전국에서 오셨는데

정작 그 분들이 가져간 것은 더 큰 아픔과 상처였기 때문입니다.


이번 집회를 통해 나타난 열매가 이런 것이라면 이런 집회는

차라리 하지 않했으면 좋을뻔 했을 것입니다. 




두 번 째로 또 하나는 7월 25일에 있었던 “목회자 컨퍼런스”였습니다. 이미 약 2천명 정도의 사역자들이 미리등록을 마치고 오후 2시부터 입장을 시작했습니다. 어떻게해서든 티비 조슈아, 목사님을 통한 목회 사역에 필요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오후 7시가 지나고 8시가 지나고 그 이상이 지나도  

티비 조슈아 목사님은 나타나지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 컨퍼런스는 없는 것이 돼버렸습니다. 티비 조슈아, 목사님이 오기로 약속된 시간이 분명한데도 그 약속을 사정없이 버렸습니다. 이 같은 일은 스스로를 거짓말장이로 만드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한국의 목사님들에 대한 무례이고 예절의 기본을 버린 것입니다. 이 같은 일은 질이 매우 나쁜 행위입니다. 더불어 그 분의 영적인 성향과 성품을 의심케 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본인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그렇게 했다는 말이 들리긴 합니다만, 과연 성령께서 그렇게 큰 약속을 버리라고 했을까 의문입니다. 과연 이렇게 큰 약속을 버리고 수 많은 목사님들에게 상처의 시험과 아픔을 주신 것이 성령의 열매인자 되묻고 싶습니다.





혹시나 주님 보다 너무 앞서가는, 그리고 주님이 승인하지 않은 도그마 독존적

독선으로 행하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보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번 집회에

관한 후기를 몇마디로 쓰는 것은 이번 집회에 참석해서 가질 수 있는 의문과 불편, 그리고 어떤 시험과 상처를 떠안으신 분들에게 이해와 용서를 구하고 싶은 심정에서입니다. 이런 점을 이해로 받아주시고 이 글을 읽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끝으로 이 글은 집회 본부와 전혀 상관없는 전적으로 저 개인의 글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나이지리아인들이 다방면에 걸쳐 사기범이 많습니다.
조수아 이자도 기독교 신앙을 이용해 농간을 부린 사기꾼으로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완전히 농락당했습니다.

 일산 킨텍스에 가서 이 번 짐회를 주최한 자들에게 헌금한 것과 정신적 피해를 당한 것에 대한 보상을

요구할 생각도 해 봤는데 ...허망하더라고요. 속았다는 것에....
주최한 목사들 이 자들 철저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조수아란 사기꾼이 얼마나 돈을 벌어 갔으며 주최측 목사들은 얼마나 들어온 돈을 분배 받았는지

철저히 조사해야 합니다.


예 저도 기도 스텦으로 봉사헀어요   저는 이집회를위해   5주간월~금 아침금식50분정도기도하며   준비햇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축사 받지못한 환자를보며 맘으로 오혈하며 울었습니다   그환자 들이 집회
까지 지오려면 많은 장애물을 넘어 힘겹게들 오셨는데 저는 정말맘이     먹먹하고    

아파서 집에오는길 정신이 나갈정도 였어요   집회 끝나고 맺은열매는 절망과낙심과
원망의 열매들   조슈아 은사는 하남님께 받았는지 몰라도 하나님 뜻이아닌 불법을 행하는자

마태 7장   21절 ~23조슈아를 두고한말씀 동영상 으로 볼때는 하나님의 하신것 같지만 현장에서

그의행위는 나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 한것입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보았습니다

 이번 조슈아 집행부는 두번 다시 이런실수 하지마시고 공개 사과부탁드립니다  


저 는 23일 집회때   분명희 보 았습니다 집회 끝나고 집회임원들 웃으면서
수고들 했다고   당신들은 저가엾은 환자가 보이지 않았단 말 입니가   평신도인 제눈에는이렇게 아픈데  

 당신들은 주의종 들인데 한국교회 회개할 자들은   영분별도 못하는 당신들이예요  

저는 정말 기가막히더군요 속아서 이집회를 준비한 당신들 회개 예배 드리시고 국민일보 와 당신들 교회에 인테넷등  

공개사과하세요 당신들이 아니였으면 이집회는 열리지않았으니간 우리 이제 같은실수 두번하지 맙시다





이번 조슈아 집회집행부 목사님들외 깊은관련이 있으신분들 아직도 조슈아가 하나님의 종 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공식적으로 공개 사과 부탁 합니다 두번다시 아픈환자상대로 이런 집회가 열여서는 안됩니다

당신들도 그의 행위를경험했잖아요 그들에게 더이상 우롱 당하지 마시고 돌이 키세요 이제좀 영의 눈를 뜨세요

목사님교회다니는 성도가 불상하네요 영분별력도 없는 목사한테 영의양식을 공급 받고
있으니 말이죠 당신들은 천명넘는 환자들에게   가뜩이나 짐도 많은데 상처와 절망과 원망의   짐을 주웠어요  

 이집회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시는 분은 낙심 이나 절망 하지마시고   일어서세요

이제 깨달았다면 그것도다행이니간 야(양)심선언 부탁드립니다



티비  조슈아의 실체에 관해 분별을 주기 위해서  

그리고 한국 사회의 공익을 위해 3분의 목사님의 글들과 댓글을 소개하였으니

한국에 종교 혼합주의 이단 크리슬람이 침투하지 않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티비조슈아한국집회진상규명추진위원회   

                      김 요한 목사




------------------------------------------




출처: 스크랩 한 글입니다./양무리 마을

성당도 테러에 당했다…IS '종교전쟁 구도' 전략인 듯

 

IS '이슬람 수호자' 자처…종교시설 첫 공격, 성직자 잔인하게 살해

 

 

(테헤란=연합뉴스) 강훈상 특파원 = 26일(현지시간) 프랑스 북부 센 마리팀도(道)의 성당에서 벌어진 인질극은 이슬람국가(IS)가 배후를 자처한 첫 종교시설 대상 테러다.

 

IS는 근거지인 이라크, 시리아 등에선 다른 종교의 예배소나 시아파의 모스크같은 종교시설을 이단이라는 이유로 파괴한 적이 있지만 서방에서 타 종교의 성소를 직접 타격한 것은 전례가 없다.

 

IS는 그간 인터넷과 각종 선전물을 이용해 국제동맹군을 '십자군 동맹'이라고 일컬었다.

 

미국과 유럽이 주축이 된 IS 격퇴전을 종교 전쟁으로 몰아가려는 술책이다. 서방을 1천년전 십자군처럼 이슬람과 무슬림을 공격하는 세력으로 묶어 '중동 대 비중동'의 대결이 아닌 종교간 충돌을 유발하려는 것이다.

 

기사 원문: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7/26/0200000000AKR20160726192500111.HTML?input=1195m

 

 

지금까지 무고한 시민들을 테러의 대상으로 삼았던 이슬람 테러분자들이 이제는 본격적으로 서방세계의 종교지도자들과 종교시설들(교회, 성당)을 테러의 대상자로 삼고 있다.

 

IS가 서방세계의 한축으로 인식하고 있는 우리나라도 유럽처럼 무분별하게 이슬람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 첫 번째 테러의 대상은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슬람 세력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상시적 테러'의 공포 속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주 안에 거한다는 것은(아더 핑크)

 

첫째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완전한 희생과 보혈의 효력의 가치를 기쁨에 넘쳐 인식하는 가운데 계속 머문다는 것입니다.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저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을 충분하게 만족시키신 구주의 달콤한 희생의 향기를 우리가 먹고 만족해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심령과 태도를 계속 견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무력함에 대한 자각이요 그분에게서 떨어지게 되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인식입니다. …

셋째로,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충만하심으로부터 모든 것을 끌어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으로부터 정떨어져 돌아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으로 기쁨에 넘쳐 그리스도에게 돌아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분의 임재를 구하고, 그분의 탁월하심에 사로잡혀야 하며, 그분과 교제해야 합니다. 더 이상 우리의 충족성이나 우리의 힘이나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것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오로지 그분의 충족성의 문제입니다.

 

First, to abide in Christ is to continue in the joyful recognition of the value of His perfect sacrifice and the efficacy of His precious blood. …That means that I feed upon, am satisfied with, that Sacrifice of sweet savour which has fully satisfied God.

Second, to abide in Christ is to maintain a spirit and an attitude of entire dependency on Him. It is the consciousness of my helplessness; it is the realization that “severed from him, I can do nothing.” …

Third, to abide in Christ is to draw from His fullness. It is not enough that I turn from myself in disgust, I must turn to Christ with delight. I must seek His presence; I must be occupied with His excellency; I must commune with Him. It is no longer a question of my sufficiency, my strength, or my anything. It is solely a matter of His sufficiency.

Arthur W. Pink

“Exposition of the Gospel of John” pp. 822-823

(Grand Rapids, MI. Zondervan, 1975)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지난 수요일 나는 ISIS의 살해 대상 명단에 오른 한 사람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 사람은 자신과 아내가 FBI로부터 ISIS의 살해 대상 명단에 올라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실상은 그들만 명단에 올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도 명단에 있었다고 한다.

 

조사 결과 ISIS가 인터넷에 올려진 교회 주소록에서 테러대상의 명단을 입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전 같으면 이런 일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을 테지만, 올란도와 달라스, 니스 그리고 Baton Rouge에서 벌어진 테러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현재로선 그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곳에서 일어난 테러들은 모두 무고한 시민들이 대상이었고, 다음 차례는 누가 될 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터넷에 올려진 교인들의 명단이 ISIS의 테러 대상으로 지목된 것이다.

 

테러의 대상으로 지목된 것은 교회와 교인들만은 아니다. 나는 미국에 있는 유대인 지도자들과 회당들이 저들의 테러 대상 명단에 올라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림짐작으로 15,000명의 미국인들이 다양한 이유로 ISIS의 “살해대상 명단”에 올려져 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테러 대상자’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

 

ISIS를 비롯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유럽과 미국에서 무고한 시민들을 테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올란도와 니스에서 벌어진 테러로 인해 또 다른 극단적인 무슬림들이 용기를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들을 고려할 때, 교회들은 보안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으로 보인다. 불과 얼마 전에도 21세의 이슬람 청년이 주일날 디트로이트의 한 대형교회에서 테러를 감행하기 위해 총기를 구매했다가 붙들린 적이 있다.

 

예배 중에 테러를 감행하려던 이슬람 청년의 시도는 당국의 발빠른 대처로 실패했지만, 앞으로 많은 교회들이 테러분자들의 타킷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해보인다. 이런 일은 현재도 전 세계 곳곳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이제는 서방 세계에서도 이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기사 원문 >> How An Entire Church Ended Up on An ISIS Kill List

 

 

* 기독교를 이 땅에서 없애버려야 할 이교도 집단으로 여기고 있는 이슬람 테러분자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교회를 불태우고 교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지금까지는 중동과 아프리카와 같은 제 3세계에서 이런 테러를 벌여왔는데, 이제는 기독교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서방국가에서도 교회를 대상으로 한 테러를 시도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지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이슬람 세력들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조만간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던 성도들이 무차별적으로 테러를 당하는 일을 겪을 수 있다는 뜻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이 사진들에 과연 설명이 필요할까? 사진 커뮤니티 에서 모은 이 신생아 사진들은 보는
당신의 마음을 통째로 녹이고 말 것이다. 지나친 사랑스러움에 한숨이 나올지도?

sweet. by Karolina Yen on 500px.com

  

Triumph of a Heart by Gabi Matei on 500px.com

  

Sleeping Newborn Boy by jen priester on 500px.com

  

sleepy boy. by Kevin Cook on 500px.com

  

Untitled by Tommy McDermott on 500px.com

  

fallbaby by MegBitton on 500px.com

  

Little Peanut by Lisa Holloway on 500px.com

  

Delivery by Anna Eftimie on 500px.com

  

Before & After by Mick Fuhrimann on 500px.com

  

Hang Loose by Redhead Photography LLC on 500px.com

  

Purple dreams II by Dina Telhami on 500px.com

  

Best Buddy by Mike Wölfle on 500px.com

  

newborn by muhsin aydogan on 500px.com

  

Katerina by Tetyana Kovyrina on 500px.com

  

unbreakable bond by C Russ on 500px.com

  

Happy Holidays by Jamie Frayser on 500px.com

  

Yeah, I know I

  

beach bum by Kevin Cook on 500px.com

  

Twins by Evgeniya Semenova on 500px.com

  

Ed by Dan Cuellar on 500px.com

  

Little Man by Wanda Hollis on 500px.com

  

Learning Tricks by Dariusz ?akomy on 500px.com

  

New Life by Sara Hadenfeldt on 500px.com

  

Sweet dreams by José Manuel Hermoso on 500px.com

  

Cradled by Lisa Holloway on 500px.com

  

Litle girl by Tetyana Moshchenko on 500px.com

この画像集に能書きは必要ないだろう。だから、手短に説明しよう。新生児というのは、それはそれは可愛いものだ。様々な仮装に身を包み、安らかな笑みを浮かべる赤ん坊の写真を、写真コミュニティサイト「500px」から集めたのでご紹介しよう。あまりの愛らしさにため息が漏れてしまうかも?

sweet. by Karolina Yen on 500px.com

  

Triumph of a Heart by Gabi Matei on 500px.com

  

Sleeping Newborn Boy by jen priester on 500px.com

  

sleepy boy. by Kevin Cook on 500px.com

  

Untitled by Tommy McDermott on 500px.com

  

fallbaby by MegBitton on 500px.com

  

Little Peanut by Lisa Holloway on 500px.com

  

Delivery by Anna Eftimie on 500px.com

  

Before & After by Mick Fuhrimann on 500px.com

  

Hang Loose by Redhead Photography LLC on 500px.com

  

Purple dreams II by Dina Telhami on 500px.com

  

Best Buddy by Mike Wölfle on 500px.com

  

newborn by muhsin aydogan on 500px.com

  

Katerina by Tetyana Kovyrina on 500px.com

  

unbreakable bond by C Russ on 500px.com

  

Happy Holidays by Jamie Frayser on 500px.com

  

Yeah, I know I

  

beach bum by Kevin Cook on 500px.com

  

Twins by Evgeniya Semenova on 500px.com

  

Ed by Dan Cuellar on 500px.com

  

Little Man by Wanda Hollis on 500px.com

  

Learning Tricks by Dariusz ?akomy on 500px.com

  

New Life by Sara Hadenfeldt on 500px.com

  

Sweet dreams by José Manuel Hermoso on 500px.com

  

Cradled by Lisa Holloway on 500px.com

  

Litle girl by Tetyana Moshchenko on 500px.com

 

.

무슬림 이민자와의 공존은 불가능

브렉시트 후폭풍과 무슬림 이민자

 

 

영국 국민들 브렉시트 결정은 무슬림 이민자들과의 갈등 때문.

한국은 무슬림 시장 위해 ‘할랄 산업단지’ 조성에 나서

 

지난 6월 23일(현지시각) 영국인들이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하면서 브렉시트(Brexit)가 현실이 되었다.

 

영국의 국민투표 결과가 알려지자 전 세계 증시는 하락세, 금·은 등 귀금속 가격은 폭등세를 보였다. 일본 엔은 급등, 미국 달러는 소폭 상승, 영국 파운드는 급락, 유로화는 하락 보합세를 나타냈다.

 

전 세계는 영국의 브렉시트에 우려를 표시했고, 중국·러시아·미국 등은 “다시 EU로 돌아가라”고 권유했다. EU는 “나갈 테면 당장 나가라”며 감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 한 달이 지난 지금, 세계 주요 언론은 영국 국민들이 브렉시트에 찬성하게 된 이유를 ‘이민자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EU가 2015년부터 시리아, 이라크에서 몰려드는 대규모 난민을 받아들이라고 강제 할당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는 지적이다.

 

국내는 물론 외신들도 영국의 이민 정책에 대해서는 별다른 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 영국은 1970년대 초반까지 영연방 국가 가운데 구(舊) 연방국(아일랜드와 호주, 뉴질랜드 등)으로부터 많은 이민을 받았다. 영연방은 아니지만 영국의 최대 우방국인 미국에서도 많은 이민자들이 왔다.

 

이들은 영어 사용 국가이기에 적응이 쉬웠고, 영국 사회에 스며들어 같은 영국인으로 별다른 마찰 없이 살아갔다. 영연방도 백인도 아니지만 일본에서 온 이민자들도 별다른 문제없이 적응에 성공했다. 영국인들도 100년이 넘는 수교국인 일본 이민자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인도로부터의 이민자들이 늘었지만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영연방이라는 데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아 큰 갈등은 일어나지 않았다.

 

1990년대 들어 동구권의 사회주의 붕괴로 동유럽 이민자들이 영국으로 몰려들었지만 영국 사회에서 이들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이들이 저임금 일자리를 차지하면서 영국 근로자들과 일부 갈등이 있었지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 브렉시트의 주요 원인은 국인들이 무슬림 이민자들과의 갈등이다. 영국인들은 무슬림 이민자들이 납세, 교육 등 국민의 의무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커뮤니티를 만들며 이슬람 율법 자치구를 요구하자 이들과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인식했다. 사진은 영국의 무슬림 반대 시위 모습.

 

 

영국의 고민, 무슬림 이민자 

 

영국인들이 이민자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보기 시작한 때는 1990년대 말이었다. 1998년 7월 영국 내무부는 <이민자와 망명에 대한 현대적 접근>이라는 백서를 통해 외국인 이민 정책을 대폭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7년 집권한 노동당 정권이 ‘다문화 정책’을 내세우면서 제기된 정책 기조였다.

 

1990년대 후반까지 영국 내 무슬림 수는 인구 대비 1% 미만이었다. 이들 무슬림들은 자신의 종교를 영국인들에게 강요하지 않고 영국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노동당 정권의 다문화 정책이 본격화되고, 1999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가 출범하면서 외국인 이민자와 난민, 망명신청자들에 대한 문턱이 대폭 낮아졌다. 그 결과 영국 내 무슬림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져 나오기 시작했다.

 

불과 10년 사이에 영국 내 무슬림 인구는 전체 인구의 2.8%인 200만 명을 넘어섰다. EU 곳곳으로 밀려온 무슬림 이민자들 사이에서 ‘유라비아의 수도는 런더니스탄’이라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무슬림 이민자 수는 600만 명에 육박했다.

 

영국의 저소득층 근로자들은 무슬림 이민자들의 행태에 불만을 터뜨렸다. 무슬림 이민자들은 싼 임금을 내세워 현지 저소득층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뒤 자신들이 ‘주류’가 되면 업체의 인력 수급을 좌우하고 현지 근로자들을 내쫓는 행태를 보인 것이다.

 

그 결과 단순 생산직이나 저임금 서비스직의 상당 부분을 무슬림 이민자들이 장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는 무슬림 이민자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2005년 7월 7일 출근길에 일어난 ‘런던 동시다발 테러’는 무슬림에 대한 영국인들의 우려와 분노, 경계를 촉발시켰다. 영국에서 태어난 무슬림들이 테러조직 ‘알 카에다’의 뜻에 동조하여 폭탄 테러를 저질러 수백 명의 인명을 앗아간 것이다.

 

2005년 11월 프랑스에서 무슬림 폭동이 발생하여 벨기에, 오스트리아, 독일 등 주변국으로까지 번지면서 영국은 물론 EU 회원국 국민들까지 ‘무슬림 이민자’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졌다.

 

2001년 9·11 테러가 일어난 뒤 영국과 EU로 들어온 무슬림 이민자들은 “테러 대응을 이유로 이민자를 차별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현지 사회에 적응하기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어 자기들끼리 생활하면서 그 내부에서 ‘이슬람 율법’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현지법을 지키며 살아가면 별 문제가 없지만, 납세·교육 등 국민의 의무를 거부하고, 심지어 현지법까지 무시하는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슬람 율법 따르지 않는 자는 죽여라” 

 

2005년 7월 7일 런던 테러 이후 2010년 5월 보수당이 집권하기까지 영국 내 무슬림들은 런던 시내에 이슬람 율법(샤리아)으로 다스리는 자치구를 요구하고, 이 지역을 오가는 영국인들에게까지 ‘샤리아’를 강요하며 폭력을 행사했다.

 

또 샤리아에 따라 명예살인을 저지르거나, 이슬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교도)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영국 정부가 무슬림을 차별한다”며 특권을 요구했다.

 

영국 좌파인 노동당 정권은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2007년 8월 무슬림 율법에 따른 샤리아 재판소 설치를 승인하면서 2009년까지 영국에는 85개의 샤리아 법원이 새로 생겼다.

 

이들은 영국 법의 적용을 받지 않게 됐다. 심지어 교도소 내에서도 무슬림 조폭들이 재소자들에게 이슬람을 강요해 영국 교도소 대부분이 실제로는 무슬림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텔레그라프의 보도까지 나왔다. 이러한 변화에 저임금 근로자들뿐만 아니라 영국인 상당수가 무슬림 이민자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갖게 됐다.

 

영국 보수당 당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2011년 2월 5일(현지시각) 뮌헨 독일안보회의에 참석해 “다문화 정책은 실패했다”고 선언하고 이민자들에 대한 특혜를 철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캐머런 총리는 다문화 정책 폐지와 무슬림 이민자들이 법을 따르지 않고 이슬람을 믿지 않는 영국인들을 위협하는 문제도 해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영국 인구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게 된 무슬림들은 이에 반발하며 런던 등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런데 무슬림 시위대가 들고 나온 피켓 문구가 보도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세계는 이슬람이 지배하게 될 것” “이슬람 율법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여라”는 주장과 함께 알 카에다 같은 테러조직을 지지하는 문구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언론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보도들이 영국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영국에서 새로 생기는 일자리의 절반 이상을 무슬림 이민자들이 차지하고, 영국 신생아 이름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무함마드’이며, 2030년이 되면 영국 인구의 15% 가까이가 무슬림이 될 것이고, 기독교 신자보다 무슬림이 더 많아질 것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무슬림 이민자와의 공존은 불가능 

 

영국인들은 무슬림 이민자와의 공존은 요원한 일임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여전히 무슬림 이민자를 받아들이기에 여념이 없는 EU와의 교역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 전역에 있는 3000개의 모스크와 이슬람 기도원 때문에 자신들의 생각을 함부로 말할 수도 없었다. 무슬림을 비판할 경우 ‘차별금지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영국인들은 ‘샤이 토리(Shy tory)’,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으면서 선거 등을 통해 자신의 뜻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이런 영국 사회 내부 문제에 관심이 없는 한국 언론들은 영국의 브렉시트를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인 반(反)이민 정서 탓으로 돌리고 있다.

 

일부 경제 매체들은 “영국이 EU에 내는 분담금은 200억 달러이지만 실제 받는 혜택이 100억 달러 수준인 점도 국민들을 분노케 했다”고 지적한다.

 

이런 지적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다. 영국인들이 보다 더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2015년부터 시작된 중동 난민 유입과 관련해 EU가 영국에게 할당을 하려 한다는 점, 그리고 터키의 EU 가입에 대한 입장이었다.

 

영국인들은 이슬람 국가인 터키가 EU에 가입할 경우 솅겐 조약 등을 내세워 터키 무슬림들이 영국을 비롯한 EU 회원국 곳곳을 마음대로 여행하며 불법취업을 할 수 있게 되는 점, 시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터키가 테러조직 ISIS의 유럽 침투 경로가 되고 있다는 점을 우려한다.

 

즉 영국 국민이 결정한 브렉시트는 대다수 영국인들의 우려가 표로 드러났다는 뜻이다. 현재 브렉시트를 뒤집자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언론은 경제적 이유나 정치적 성향 때문에 마치 대부분의 영국인들이 브렉시트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투표한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속마음을 함부로 드러내지 않는 영국인들이 무슬림에 의한 지배를 거부하고자 한다는 점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영국인들은 브렉시트로 인한 EU와의 단절에 대안은 있을까. 최근 세계 동향을 보면, 영국은 다시 ‘구 연방 결속’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언어와 문화, 사회적 질서를 기준으로 위화감이 없는 호주, 뉴질랜드 등과의 결속 강화와 함께 자신들과 어울리는 것이 가능한 미국, 일본, 홍콩, 인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과의 협력을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 경우 미국과 캐나다는 영국에게 EU를 대체할 충분한 규모의 시장을 제공할 수 있고, 뉴질랜드와 인도는 필요한 인력을,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무슬림 세계와의 연결 허브 역할을, 홍콩은 중국과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는 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구 연방 결속’ 전략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게 되면, EU는 위기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EU 탈퇴를 희망하는 회원국이 점점 많아지고, 결국 독일과 프랑스가 이끌어오던 ‘유럽 다문화’는 막을 내리게 될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영국이 무슬림 이민자와 이들로 인해 생기는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브렉시트를 결정한 순간, 지구 반대편의 한국에서는 정반대의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지난 7월 7일 청와대에서는 ‘제10차 무역투자진흥회의’가 열렸다.

 

이날 회의를 주재한 박근혜 대통령은 투자 활성화 대책 가운데 하나로 ‘할랄·코셔 시장 진출 및 관련 산업 육성’을 제시했다. 할랄이란 이슬람 율법에 따라 도축하거나 생산·가공한 음식으로 무슬림은 할랄만을 먹을 수 있다.

 

박 대통령의 ‘할랄 시장 진출 및 육성’ 정책은 세계 16억 무슬림 인구를 대상으로 한 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뜻에서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할랄을 생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깊게 고민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무슬림 유입 위해 정부까지 나서 

 

현재 정부는 강원·경북·대구 등에 ‘할랄 산업단지’를 조성할 계획을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16억 무슬림 관광객을 끌어들이겠다는 주장이다.

 

할랄을 생산하는 것은 단순히 ‘이슬람 기도문 외우고 도축하는’ 것이 아니다. 음식을 만들 때 이슬람 사제인 이맘이 있어야 한다. 과정 또한 위생적이라고 말하기는 애매하다.

 

할랄을 만든다고 해서 무슬림 가운데 자금력이 충분한 중동 국가에서 관광객이 올 것이라고 믿는 것도 우습다. 중동 귀족들이 주로 여행하는 곳은 북미와 유럽이다.

 

이들이 단지 ‘율법에 따른 음식’을 먹기 위해 한국에 올까? 이보다는 ‘할랄 생산’에 필요한 인력이라는 핑계로 저소득 국가의 근본주의 이슬람 광신도들이 한국으로 유입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강원·경북·대구 등의 할랄 생산단지를 중심으로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만들 수도 있다. 마치 조선족과 중국인이 전국 곳곳에 ‘무법천지 차이나타운’을 만든 것처럼 말이다.

 

국내 무슬림 인구가 50만 명을 넘어서면, 일부 지역에서는 이슬람 율법으로 다스려지는 마을 공동체인 ‘샤리아 커뮤니티’를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서방 진영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극도로 혐오하는 무슬림 근본주의자들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동맹국의 서방 중심 패권을 깨부수겠다는 중국 공산주의 사회가 힘을 합쳐 대한민국 체제에 도전할 가능성은?

 

국내에서는 영국과 EU 곳곳에서 일어난 테러를 “극소수 무슬림에 의한 테러”라고 보도하지만, 무슬림의 궁극적인 목적은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도 현재는 다른 나라와의 교역과 교류를 중시하는 척하지만 지금도 세계 곳곳의 마오이스트(모택동주의자)와 좌익 세력들을 조용히 지원하며 ‘세계 공산화’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들의 수가 한국 인구의 10%를 차지하면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좌익 진영에 온정적이고 외국인이라면 그들의 정체에 관계없이 굽실거리기 좋아하는 한국 정치인과 관료 사회가 이들을 제압할 수 있을까.

 

현재 한국 사회에서 무슬림과 중국 공산당의 세계 전략에 경고하는 사람은 극소수 기독교계 인사들뿐이다. 이들의 경고 가운데 극단적이고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많은 부분은 반드시 새겨들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정치권, 정부 관료들이 영국 브렉시트 뒤에 숨은 문제, 이민자 유입과 다문화 정책의 위험성을 간과한다면, 10년 뒤 한국 사회의 주인은 한국인이 아니라 자기들의 종교와 정치사상을 강요하는 외국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출처: 미래한국 (http://www.futurekorea.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933)



그러려니 하고 살자 - 손영호

인생길에 내 마음 꼭 맞는 사람이 어디있으리.
난들 누구 마음에 그리 꼭 맞으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내 눈에 보이는것 어찌 다 좋게만 보이랴?
내 귀에 들리는 말들 어찌 다 좋게만 들리랴?
내 말도 더러는 남의 귀에 거슬리리니.
내 보는것 누군가는 눈쌀 찌프리게 되리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세상이 어찌 내 마음을 꼭 맞추어 주랴?
마땅찮은 일 있어도
세상은 다 그런 거려니 하고 살자.

사노라면 다정했던 사람 멀어져갈 수도 있지 않으랴?
온 것처럼 가는 것이니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무엇인가 안되는 일 있어도 실망하지 말자.
잘되는 일도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더불어 사는 것이 좋지만,
떠나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사람을 피하신 적도 있으셨다.하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람이 주는 상처에 너무 마음쓰고 아파하지 말자.
세상은 아픔만 주는 것이 아니니,
그러려니 하고 살자.

누가 비난했다고 분노하거나 서운해 하지 말자.
부족한데도 격려하고 세워주는 사람도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사랑하는 사람을 보냈다고 너무 안타까워 하거나 슬퍼하지말자.
인생은 결국 가는 것.
무엇이 영원한 것이 있으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컴컴한 겨울 날씨에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자.
더러는 좋은 햇살 보여 줄 때가 있지 않던가?
그러려니 하고 살자.

그래, 우리 그러려니 하고 살자.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교하면 멀어지는 행복  (0) 2016.08.06
꽃은 피어날 때  (0) 2016.08.05
내가 살아가며 배운 것은  (0) 2016.07.05
여유로움  (0) 2016.06.30
내려놓으세요  (0) 2016.06.23

삼위일체론적 성령론 -유태화(현 백석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

- 유태화 -

 

 

저자는 안양대학교(영문학)를 졸업한 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과 대학원에서 교의학을 연구한 후

남아공의 프레토리아대학교에서 G.C.Berkouwer의 마지막 학생이였던 C.J.Wethmar 교수의 지도하에

박사과정에서 교의학을 2년동안 연구하였다. 지도교수의 추천을 받아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로 옮긴 후

A. van Egmond 교수의 지도하에

The Spirit of Liberation : Jurgen Moltmann's Trinitarian Pneumatology

라는 논문을 완성하여 2002년도에 학위(교의학, Dr. Theol.) 를 취득하였다

 

 

 

미국의 개혁신학자인 B. B. Warfield는 오늘 기적들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신비로운 자연적인 현상들과 관련하여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적으로 볼 필요가 없으며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표적과 기사는 사도시대로

제한하는 것이 옳으며 동시에 그 사역은사도직의 종결과 더불어 종결되었다는 요지의 주장을 한바가 있다.

273) B. B. Warfield, Counterfelt Miracles, NewYo 1918, 119-120

 

이 견해를 벌코프도 상속하였으며, 완고한 개혁주의자에게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입장이기도 하다.

워필드의 이 주장은 당시에 널리 신봉되었던 소위상식철학에 근거한 것으로서 그야말로 시대제약적인 상황에 편승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계시의 계속성과 표적과 기사를 연결시킨 것은 본질을 오해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계시는 성경과 더불어 종결되었으며, 계속되지 않는다. 실로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가 사건으로 계시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마치 성례와 설교와의 관계처럼, 말씀계시가 동반되지 않으면, 그 자체로서 명석한 계시로 가능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내 몸이요”, 혹은내 피요라는 말씀의 선포 없을 때, 그저 떡이고 포도주에 머무르고 마는 것처럼, 사도들의 사역에서 표적과 기사도 마찬가지다. 표적과 기사는 말씀계시와 함께 있을 때, 분명한 의미를 획득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모호해진다. 이와 더불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말씀계시가 주어질 때, 표적과 기사가 동반되면, 전달하는 바가 더욱 효과적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항상 그런 표적과 기사가 동반되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고전2:1~5; 살전1:5~6).

 

이것은 21세기 복음 사역에서도 마찬가지다. 말씀사건으로 계시는 새롭게 주어지지 않는다. 기록된 성경이면 족하다.

그러나 표적과 기사는 그 때와 같이 지금도 동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큰 능력과 확신으로 복음이 증거되어야 하며,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와 더불어 증거되어야 한다. 동일한 말씀을 가지고 일하시는 동일한 성령께서 21세기 인간에게도 동일한 능력으로 일하시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조금 다른 관점에서 하비 콕스(H. Cox)는 그의 Fire From Heven이라는 책에서, 워필드의 주장을 색다르게 다룬바가 있다. 콕스에 따르면, 워필드의 이런 주장은 인종적 편견에 근거한 것이라는 다소 주관적이지만 정황적으로 볼 때 적절하게 비판한 바가 있다. 당시 성령의 오심을 경험한 교회 안에 당시로서는 이상하고 낯선 결과가 나타나곤 하였다. 아직도 흑백(黑白)의 갈등이 상당했던 때에, 성령오심을 경험했던 교회 안에 흑백이 서로 부둥켜안고 화해하며 성도의 교제를 회복하는 일이 일어나곤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워필드의 눈에 낯설게 느껴졌고, 이것을 불편하게 여긴 소상한 귀족인 그가가짜 기적이라는 책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정치적인 동기 때문에 성경주적에 충분히 근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거의 성경을 인용하지 않은 낯선 책을 발표하게 된 것이라는 것이 하비 콕스의 주장이다.

여기서 하비 콕스의 주장의 문헌적이고 역사적인 사실성에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상식철학 때문이든, 인종적 편견 때문이든, 령께서 주시는 선물로서 은사와 성령께서 그때와 같이 지금도 능력 가운데 역사하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위대한 사랑을 확신케 하시며 그리스도인이 서로 사랑의 교제를 회복하여 가도록 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부인하려는 그의 태도는 비평에 열려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상식적인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확신이고 가장 평범한 성경의 독자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리고 일상의 삶에서 발견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출처:개혁주의마을


 
▲UMC 서부지역총회에서 감독으로 선출된 카렌 올리베토 감독[사진=UMCom.com]

연합감리교(UMC)가 동성애자 목사를 감독으로 선출해 논란이 예상되고 있다.

UMC 공보부 보도에 따르면 “동성애자인 카렌 올리베토(Karen Oliveto)목사가 지난 16일 아리조나 주의 파라다이스밸리교회에서 열린 감독안수식에서 안수를 받았다”고 전했다.

올리베토 감독은 중북부, 동북부, 중남부, 동남부, 서부 지역회를 통해 총 15명의 신임 감독이 탄생된 가운데 서부지역총회(Western Jurisdictional Conference)에서 당선된 감독 중 한명으로서 17년 전 고교캠프 상담사로 사역할 당시 만난 로빈이란 여성과 약 2년 전 결혼해 생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감독 당선이 결정되는 순간 올리베토는 “저는 이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있다. 제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많은 분들의 기도와 노력 덕분이다. 어느 누가 이 결정적인 순간이 올 것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오늘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를 향해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섰다”고 말했다.

올리베토 감독의 안수를 계기로 향후 UMC내 동성애 관련 갈등이 보다 극심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안수식 전날인 15일 저녁, 중남부지역총대들은 동성애·레즈비언을 교회지도자로 세울 수 있는지를 사법위원회에 상정하는 문제를 109대 84로 통과시켰다. 사법위원회는 교회법과 실행의 적법성을 심의하는 최고 사법기관이다.

또 감독회의도 19일부터 2일간 시카고에서 열리는 회의에서 올리베토의 감독 당선 문제를 주된 현안으로 다루기로 했고, 회의 현장에서 향후 안수와 파송을 위해 성과 관련한 교회법상의 모든 조항들을 살펴본다는 계획이다.

ⓒ 크리스천 위클리
USA아멘넷ㅁ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뜻이죠.

        모두 다 강하기를 바라지만
        부드러움은 사실 강한 자의 것입니다.

        '나는 타협할 줄 몰라'
        그래서 망합니다.
        때로는 돌아가고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살지 못하고 대개 죽습니다.
        까무러치는 것도 필요합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주변에 말 상대가 없습니다.
        바른 말보다는 덕이 되는 말이 호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는 사람'
        죽었기 때문에 피 안 나오는 겁니다.

        입안에 이빨이 빠졌다는 이야기는 들어봐도
        혓바닥이 빠졌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 했습니다.
        부드러운 것은 남습니다.

        이것은 협상이 아니라 회복탄력성이라고 합니다.
        끝까지 견디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휘어짐입니다.
        죽기까지 휘어져도 부러지지 않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 뉴욕 힐링 보이스 / 안혜권 -

         

'짧은 글 긴 여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글자에서 열 글자까지]  (0) 2016.10.06
넉넉한 마음  (0) 2016.07.29
짧으나 뜻깊은 글  (0) 2016.07.19
길을 가다가 돌을 만나면!!  (2) 2016.05.25
자비로운 영국여성  (2) 2016.05.23

동성애가 품고 있는 그 사악함!

 

로마 카톨릭과 WCC,WEA은 성경의 근본 교리를 변질, 변형, 왜곡시켜 기독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정체성을 가지고 활동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경계하고 분별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데 이에 비해 동성애는 어떠한가?

 어찌 보면, 동성애 자체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목소리를 크게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유일하신 구원자이심을 부인하는 주장을 펼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부인하거나, 종교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성애가 이단, 삼단이라 논할 수 있는 그런 범주에는 들지 않기 때문에, 교회에서 크게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분별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다. 영국, 프랑스, 독일을 비롯한 유럽지역의 교회들이 최근 40년 만에 초토화가 되고 말았다. 우리는 이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 지역의 교회들이 이단, 삼단들 때문에 이렇게 무너진 것일까? 아니다. 1968년 프랑스 혁명 이후 동성애 합법화와 동성애 차별금지법이 법제화 등으로 인한 결과다. 동성애 합법화와 동성애 차별금지법 통과가, 어떻게 보면 이단보다 백배,천배 더 무서운 대상이다.

 동성애가 합법화되고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예배하는 겉모양이나, 형식들, 어떤 외적인 열심은 그 이전과 별 다를 것 없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개신교내의 보수주의도, 근본주의도, 개혁주의도, 복음주의도, 정통주의도, 은사주의도, 장로회도, 침례회도, 성결회도, 하나님의 성회도, 어느 교단 할 것이 없이 이런 차별금지법의 굴레 안에 놓이게 되고, 결국 죄에 굴복한 죄의 종으로써, 덮어쓴 너울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유럽의 교회들처럼...

 

더러는 나는 죄에게 굴복한 적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으나, 죄에게 굴복 여부와 관계없이 이런 법이 교회의 위에 놓이게 되고, 모든 사람들이 이 법 아래 놓이게 되면, 결구 이 법은 의인을 위한 법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법이 된다. 

 

이런 법 아래 놓인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또 그 사람의 행위와는 관계없이 죄의 법에 갇힌 포로가 되어, 죄인의 신세가 되버리는 것이다.

 

동성애 합법회와 동성애 차별금지법은 남자의 항문에 남자의 성기를 넣고 행하는 성적 타락행위,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살인죄보다 더 큰 죄가 동성애임), 곧 동성애자들을 위한 법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창조의 근본질서를 따라 남자와 여자의 이성간 결합하게 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이 법 아래로 가두어놓고, '성적 타락'이라는 최악의 범죄를 저지르는 동성애자들이 다른 사람들 위에 올라서서 군림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를 거역할 시에는, 법을 위반한 죄인으로써 형벌을 당하게 한다. 그러므로 동성애 합법화와 동성애 차별금지법이 통과된 국가에 있는 기독교회들은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것이다.

 

맞서 싸워야 하되, 지금 나서서 싸우지 않으면, 더 이상은 기회가 없다. 유럽의 교회처럼, 나중에 후회하며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되고 만다. 

 

세계가 갈수록 악해져가고 있다.

 

(캐나다 총리 트릭도 총리의 동성애 퀴어 축제 참여 모습)

 

윌리엄 왕세자가 영국 왕실 최초로 동성애 잡지 표지모델로 등장했다.

 

미국 대통령 후보 힐러리 클린터의 동성애 퀴어축제 참여 모습.

 

그 어느 때보다 믿음 위에 서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동성애가 죄악"이라는 말씀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인다.

 

동성애를 가리켜 죄악이라 함부로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로 전락당한, 이미 죄의 종으로 접어들고 있는, 그런 시대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이 세상 정사와 공중권세 잡은 어둠의 세력들이 남자의 성기를 남자의 항문에 넣고 행하는 성적 타락행위, 이 죄악을 범하는 동성애자들에게 '인권'이라는 거짓된 옷을 입혀서 거룩한 자리에 올려놓고 군림하게 하는 이 거짓된 광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발가 벗겨야 한다.

 

그것이 바로 동성애가 죄악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증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 4:12-13)

 

동성애 합법화와 동성애 차별금지법은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질서를 무너뜨리고, 극도로 타락해버린 인간들의 인본주의 사상을 앞세운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린 피와 대속적인 죽으심으로 구원해내신 지상교회로 하여금 가장 타락한 성적 행위를 인권으로 옹호, 존중케 하여 하나님을 조롱케 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비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주의 군사된 살아있는 교회들이, 성적 타락을 범하는 동성애자들에게 인권의 이름으로 씌워진 양가죽을 주의 빛의 말씀으로 벗겨내서 거짓과 부패가 기생하지 못하게 드러내야만 한다.

 

 

출처: WCC 반대운동 연대 / WEA 반대운동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seoul

첫 사람 아담과 하나님의 언약/이천우 목사

1.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처음 상태

창세기 1장에서의 창조 사역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창조를 ‘자기의 형상’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 사람은 하나님 자신의 형상[모양]대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창조를 다시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여서 하셨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이 말씀의 참 뜻은, 곧 본의(本意)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셔서 살아 있는 사람, 그러니까 ‘산 자’가 되게 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의 육을 만들고 그 육 안에 영혼을 불어 넣어주었다는 식으로 이해하여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사람을 ‘육과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죽은 자의 육에서 영혼이 떠나 하나님께로 간다는 식의 이원론적인 이해는 순전히 이런 식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인 ‘흙’이란 것도 우리가 알고 있는 진흙이니 찰흙이니 하는 차원에서의 흙에서만이 아닌 아주 작고 미세한 먼지요 티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생명의 공학에서 다루는 원자(原子)의 개념입니다. 이는 사람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의미하고 있는 실제적인 의미는 사람의 육이 분해되어서 원자로 돌아가는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육이 원자로 돌아간다고 해서 사람이 죽을 때 육과 영혼이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마치 육은 흙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주님이 재림하실 때 그 육이 다시 회복되어서 육을 떠난 영혼과 다시 하나로 결합하는 것처럼 여겨지나 실상은 육과 영혼은 분리되지 않습니다. 육이 흙에 묻혀 썩는 모습을 취하나 거기에서 영혼이 떠나 하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육이 흙에 묻혀 썩는 모습을 취하는 것에서 사실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시에 그 사람은 처음의 모습을 가질 것이요 이때는 영원히 썩지 않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몸으로의 변화를 입은 상태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육과 영혼이 하나로 결합이 되었다가 분리되고 다시 결합되는 구조적인 조립형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창조를 흙에서 육을 창조하시고 다시 그 흙으로 빗은 육에다 영혼을 불어 넣어 창조하시는 각각 따로 시간차 간격을 두고서 이원론적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육과 영혼을 하나의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단지 땅으로부터 취한 티끌[원자]로 육체가 있게 하고 또한 살아있는 자가 되게 하셨으니 그가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티끌에 생명을 주셔서 육체, 곧 사람이 되게 하신 데 대한 묘사요 ‘생령이 되었다’는 것 또한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니) 그 사람이 산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묘사입니다. 사실 ‘생기’라는 단어가 생명이라는 것이요, 생령이라는 단어 또한 어떤 문장에서 적절한 표현과 의미를 말할 때에 달리 쓰인 것인데, ‘생명’(창 1:30), 또는 ‘생물’이라는 말로도 쓰여졌습니다(창 1:20, 21, 24). 그리고 이 모든 단어는 히브리 말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본적인 뜻은 ‘살아 있는 생명체’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생명이 여느 만물의 생명체와 다른 것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인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살아 있는 생명에서는 생명이신 하나님을 봅니다. 사람의 생명은 생명이신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질적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로서 생명의 기원과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여느 생물이 하나님에 의해서 흙으로 지음을 받고 흙으로부터 취해진 생명인 것에 반하여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서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만 그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기, 곧 살아 숨 쉬는 기운을 불어넣어주심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생명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생명 있는 사람과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신 이 창조 사역으로 사람은 단지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이 지닌 큰 특징적 의미는 다음 몇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존재입니다. 둘째,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부여 받아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존재가 됨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인 종교성을 지녔습니다. 셋째, 사람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위임받아 만물을 다스리는 관리자의 위치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의 처음 상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습니다(창 1:31).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대단히 만족하시며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온갖 복을 누리며 평화롭게 사는 생명의 고귀한 가치를 즐기는 행복을 누립니다.

2. 에덴동산에서의 사람의 상태

한편 처음 사람의 상태는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의 숨을 받아 ‘생령(a living soul)’, 곧 산 자(a living being)가 되었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으로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물로서 완전한 존재이지만, 이것은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의 언약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아담의 창조는 다른 창조물이 그러하듯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의도대로 되어진 완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움과 선한 성품을 볼 수 있는 생명을 소유하였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신데 따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이루는 사람으로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상태를 하나님의 통치하에서 가치 있게, 그리고 풍성히 누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언약 안에 두어 그 상태를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지속적으로, 그리고 더욱 발전적이며 충만히 누릴 수 있게 하셨는데, 그 수단과 방법으로 에덴동산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고 동산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은 먹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통치에 복종하여 나가는 하나님의 백성 된 의로움과 선함과 진실함을 나타냄으로 그의 주이신 하나님과 그 영광을 세상에 선포하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은 복 있는 자의 행복을 마음껏 누립니다.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이 사는 ‘날’이 안식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으며, 이 날에 복주시며 거룩하게 하신 것에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창 2:2, 3).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죄를 전혀 지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심히 만족케 한 피조물로 창조 된 사람은 한편으로 그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이었으나 그러나 아예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은 자였으나 그러나 그것을 언제든지 잃을 수 있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이에 따라서 사람에게서 죄 값에 의하여 죽음에 있게 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사람의 불순종에 의해서’ 현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죄를 짓고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처음부터 범죄와 타락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범죄와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지음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선을 아는 지식은 증대되며 악을 아는 지식은 억제되는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생명을 누려가는 복 있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영원히 살도록 하려는 의도를 갖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는 것으로 사람을 동쪽에 동산을 조성하시고는 에덴이라고 부르게 하신 곳에 사람을 두셨습니다. 그리고는 에덴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함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두시고는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임의로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못하게 금하셨습니다. 이유는, 이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사람은 자기 마음대로, 그래서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은 어떤 열매이든지 먹을 수 있는 자유를 누립니다만 단 한 가지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 되는 하나님의 금령에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금령을 통해서 사람에게 선과 악을 아는 지식에 있게 해 나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말씀을 사람이 잘 받들어서 순종하여 나가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선을 아는 지식을 가져나가게 하여 지속적으로 순종하여 나가게 하시고,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말씀을 불순종하여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는 것을 하는 것으로 이것은 악한 것임을 아는 지식을 가져나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식 속에서 진정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복을 누리며 하나님 자신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앞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의하여 선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을 지닌 자로서 지속적이며 적극적으로 선을 행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하면 또한 악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도 지닌 자로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여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불구하고 악을 행하여 죄를 범할 수도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범죄와 타락할 가능성의 시험적 상태’에 있는 존재였습니다만,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모든 복을 누리며 하나님과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이끌어 가시기 위한 시험적 상태’에 있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와 함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생명나무와 함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실 때에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한 의도를 드러내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절). 여기에서 보는 대로 이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아 하나님의 나라인 세상에서 선과 악의 지식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들어 순종하여 나가는 것에서 선으로 나아가게 하여 그가 부여받은 생명을 지속적으로 누려가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표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어 창조하신 사람은, 그래서 흙에서 나온 사람의 몸인 육은 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어 따르지를 못합니다. 사람의 몸인 육은 그 육에서 나오는 본능에 의해서 행동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육의 본능을 좇는 사람은 그 육으로서는 영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흙에서 나온 그 흙으로 반드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흙에서 나온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없고 흙으로 돌아갈 것이므로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에덴동산에 두시고서 이것을 사람이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을 언약으로 주시는 것에서 ‘죽음의 약속’에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 지금까지의 교회는 이러한 이해에 있어 오지를 않았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서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행위언약’의 관점에서 가져온 것이 전통적인 견해였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생명의 언약’으로, 또는 ‘생명과 죽음의 언약’로 보는 견해에 있기도 합니다.

이중에서 어떤 관점에 의한 견해에 있든지 간에 아담과 그의 후손이 죽음의 형벌을 받는 심판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금하신 명령에 순종하여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았어야 했다는 이해에 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경우......"의 추측에 있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무의미한 추측의 가정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어리석은 지식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이룰 일을 정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을 구원이 작정된 자이며,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이를 실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에서 "만일 아담이 이 과실을 먹지 않아 타락하지 않았으면......."하는 생각은 참으로 쓸 데 없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서 아담은 선의 개념을 알아가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따먹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에서 아담은 악의 개념을 알아 가는 것인데, 아담은 죄를 짓고 타락할 가능성이 있는 존재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래서 죽음에 처할 수 있는 존재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이 죽는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면서도 살고 죽는 것이 갖는 생명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여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으로서는 육의 욕망을 좇아서 살 수 밖에 없는 육을 지닌 자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는 악을 행하여 죄를 지음으로써 죽음에 처하게 되는 것을 허용하여서 다시 살리시는 일을 함으로써 참 생명에 대해 깨달아 알게 하심으로써 그 믿음에 있게 하시는 선하신 분에 대한 참된 지식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죽어도 살겠고......네가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한 인간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게 함으로써 다시는 죽음 문제가 걸리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선한 자게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이해가 있게 하시는 것에 의해서 다루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은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시고, 그를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는 에덴동산에 두시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금하신 것입니다.
http://cafe.daum.net/ReformedChurch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러시아 의회의 양원이 통과시키고 푸틴이 서명을 마친 반(反)테러리즘 법안은 가정에서의 종교 모임과 전도를 금지함으로써 종교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고 있다.

 

이 법안은 주거지역 내 선교 활동을 일절 금지하고 있으며, 자신의 신앙을 다른 이들과 나누길 원하는 이들은(온라인 포함) 종교협회가 발행하는 특정 문서를 소지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 개인은 75~756달러, 단체는 15,265달러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 외국인의 경우 추방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관련기사 >> 러시아 반테러리즘 법안, 전도 금지 등 ‘종교 자유 제한’ 심각

 

* 러시아 국민 중 70%를 차지하는 정교회에 속하지 않은 다른 기독교 교단이나 단체들의 선교를 사실상 금지하는 반테러 법안이 푸틴의 서명으로 발효하게 되었다.

 

열흘 전 이 법안이 하원의 심의를 통과하고 상원의 승인을 얻게 되자 우리 교단(기독교대한성결교회)을 비롯한 여러 교단의 선교사들이 푸틴 대통령이 이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해 주길 바라는 긴급한 기도를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결과는 우리의 기대와는 반대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단체나 교회는 단계적인 철수가 불가피한 상황으로 보인다.

?

중동과 미국 중국에 이어 러시아에서도 이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선교의 기회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감람산 강화에서 예수님은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 24:9)하셨다.

 

세계 곳곳에서 선교의 문이 닫히고 있고, 기독교에 대한 본격적인 핍박과 환난이 시작되고 있는 지금이 바로 주의 오심이 임박한 마지막 때인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칭의론

 

2016. 6. 22. 신원균 박사(한마음교회, 개혁신학포럼 학술위원)

 

 

서 론

 

근래에 전통적 칭의론인 법정적 칭의론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다양한 칭의론들은 한국교회가 100년 이상을 지켜온 성경적 칭의론에 심각한 도전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법정적 칭의론을 비성경적이라고 비판하는 새관점 학파의 선교적 칭의론도 문제지만 전통적 칭의론을 일부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새관점 학파의 칭의론을 수용하려는 김세윤 박사의 관계적 칭의론도 문제가 있다. 특히 최근에 와서 김세윤 박사의 칭의론을 전통적 입장에서 선별적으로 수용하려는 김영한 박사의 중도적 칭의론입장도 큰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들의 칭의론에 대한 공통된 접근은 전통적 칭의론이 지나치게 하나님의 중심적 입장에서 다루기 때문에 인간의 성화적 책임을 약화시킨다고 판단한다. 따라서 이제는 칭의와 성화가 융합된 형태, 즉 성화를 토대로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강조하는 칭의론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로마 가톨릭이 칭의와 성화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여 성화적 칭의를 주장한 의화교리의 변형이며, 또한 알미니안주의가 칭의와 성화를 혼합하여 신인협력적 칭의론을 제시하며 저항할 수 있는 은혜은혜로부터 타락 가능성을 주장한 것의 변형일 뿐이다.

개혁교회의 전통적 칭의론은 이와 같은 인간중심적 칭의론의 폐단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 중심적 구원의 원리로 법정적 칭의”, “선언적 칭의”, “확정적 칭의”, “오직 은혜적 칭의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선택과 은혜에 기초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전가에 의한 칭의론을 확립했다. 또한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되 분리시키지 않고 성화의 원인과 기초로써 칭의와 칭의의 열매와 증거로써 성화의 관계를 체계화시켰다.

이런 구원의 원리가 도르트 신조에서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하심과 무조건적인 사랑에 기인할 따름이다, 구원의 원인은 오직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하신 하나님께만 있다라고 고백되었으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신적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33)라고 표현되었다. 이 고백들은 우리의 칭의와 구원이 인간의 노력과 공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총에 의한 선택에서 흘러나오는 선물임을 강조해 주었다. 이처럼 개혁주의 칭의론은 철저하게 예정론 안에서 시작하고 다루어진다. 칭의론을 포함한 구원론 전체를 예정론 안에 포함시켜 이해하는 방식이 칼빈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까지 이어지는 개혁신학의 중요한 구원론의 원리이다.

따라서 근래에 등장하는 성화중심적 칭의론의 문제점을 정확히 분별하기 위해서는 칭의를 포함하여 구원론 전체를 인간 중심으로 다루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다루며, 특히 신적작정에 기초한 예정론 안에서 칭의론을 고백하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론과 칭의론의 특징을 좀 더 세말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본 론

 

1. ()개혁파 신학의 구원론 특징

 

1) 로마 가톨릭의 견해

 

로마 가톨릭의 신학에서는 교회론이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보다 선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 이유는 구원의 모든 과정과 결정을 교회의 주최가 되는 교황과 신부들이 주도하기 위함이다. 또한 구원론 자체에서도 칭의와 성화를 하나로 이해하는 신인협력적 구원론을 제시한다. 이들은 어린 아이들은 영세에 의해 중생되지만, 성년이 되어서 비로소 복음에 접한 사람들은 주입 은혜(gratia infusa)을 통해서 마음을 조명하고 의지를 강화시키는 충족 은혜’(gratia sufficiens)를 받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은 충족 은혜에 저항할 수 있고 혹은 이에 동의할 수 있다고 말한다. 만약 그가 이 은혜에 동의하면 이 은혜는 협력 은혜’(gratia co-operans)로 변환되며, 이로서 인간은 칭의를 예비하는 데 협력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 분류는 크게 충족 은혜와 협력 은혜로 나뉠 수 있다.

 

2) 루터파의 견해

 

루터파는 선택, 신비적 연합,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의 교리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세 가지 항목 중 어느 것으로부터도 자신들의 논의를 출발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죄인의 심령과 삶에서의 구속 사역의 주관적인 실현이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 편에서 행해지는 것보다는 인간 편에서 행해지는 것들을 더욱 강조하는 형태로 구원의 서정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HollatzPhilippi의 분류에 의하면 그 순서는 소명 조명 회심 중생 신앙 칭의 신비적 연합 갱신 보전으로 나누어진다.

 

3) 알미니안파의 견해

 

알미니안주의 자들의 구원의 서정은 외면적으로는 구원의 사역을 하나님께 귀속시키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인간의 태도와 행위에 부수적이다. 이들에 대한 입장은 도르트 신조 잘못된 3-4교리에 다음과 같이 잘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완전히 중생치 않게 될 수도 있는데, 인간의 중생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은혜와 자유 의지는 회심하는 데 필요한 부분적인 요소가 되는데, 회심의 과정을 볼 때 은혜는 자유 의지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유 의지가 작용하여 결정을 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는 이 자유 의지를 돕기에 충분하도록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위의 도르트 신조 내용에서 보듯이 이들은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그 기회의 이용 여부는 인간에게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이 선택하기만 한다면 완전한 영적 복과 구원을 획득할 수 있게 하는 충족한 은혜를 베푸신다고 본다. 결국 알미니안주의 입장은 은혜를 말하지만 인간의 의지가 모든 결정적 주체가 된다. 이러한 관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들은 구원의 순서를 소명 회개 신앙 의로 전가 중생 성화 견인으로 말한다.

 

4) 웨슬리안의 견해

 

웨슬리적 혹은 복음주의적 알미니안자들은 17세기의 알미니우스에게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구원론 기초는 알미니안주의의 신인협력설을 토대로 한다. 다만 원래의 알미니안주의보다는 칼빈주의의 구원론을 많이 수용한 점에서 차이가 있으나, 논리적 구성면에서는 알미니안파 보다 더 비논리적이다. 웨슬리의 구원관의 특징은 점진적인 성화와 발전에 있다. 그러나 구원의 과정에서 점진적인 성장에 대한 개념은 인간 의지에 의한 순간적인 요소와 결합된다. 웨슬리의 강조점은 선행적 은혜를 말하지만 이 은혜는 언제나 인간 의지의 결단과 성장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음을 놓치지 않는다.

그는 구원의 서정을 그의 설교, “성경적 구원의 방법에서 선행 은혜의 역사 칭의 전의 회개 칭의와 죄의 용서 신생 혹 중생 칭의 후의 회개와 점진적 성화 완전 성화로 보았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룸에 대하여라는 설교에서는 선행 은총 회개(깨닫는 은총) 칭의 성결의 순서로 설명하였다.

 

4) ()개혁파 신학의 구원의 서정 특징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비개혁파 신학은 알미니안주의의 견해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별히 알미니안주의와 칼빈주의의 구원론 순서에 근본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부분을 주의해야 한다. 그것은 회심의 기원과 능력이 누구에게 있는 가에 대한 사실로 간명하게 드러나며, 또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제하는 대신 인간의 의지를 최종 결정적 자리에 전제시키는 데서 나타난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구원을 인간론 중심적으로 치우치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을 약화시켰다. 김길성 교수는 이런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비평하고 있다. “알미니안주의 자들은 특히, ()항력적 은혜를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구속이 인간의 신앙에 의해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인간이 자력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능력과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함으로써 구원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선물인 사실을 부정한다.”

 

 

2. 개혁파 구원론의 독특성

 

1)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예정론에 기초한 구원론

웨스트민스터 신조에서 고백하는 예정론적 구원론의 형식은 전 개혁교회의 구원론에 대한 토대를 형성해 주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구원론은 초교파적인 복음주의의 영향으로 신적 예정론은 빼고 단순히 인간의 회개와 신앙만 강조하는 인간중심적 구원론으로 기울어 졌다. 따라서 개혁교회의 칭의론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론 전체를 예정론 안에서 다루는 신조의 독특한 구원론 형식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초교파적인 복음주의나 알미니안주의 계통에서는 구원론을 인간론을 중심으로 다루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신론을 중심으로 다룬다. 즉 인간에게 주어진 구원은 전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독자적 사역임을 강조한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서정을 이해할 때도 구원의 순서에 있어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획득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를 적용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행하시는가가 강조점이다라는 벌콥의 지적처럼 인간의 사역보다 하나님의 사역이 더욱 강조되는 방식으로 구원론을 드러내려고 했다.

특히 구원론을 신론 중심적으로 다루는 방식은 인간론 중심적으로 다루려는 알미니안주의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처럼 기독론 중심적이거나 신비주의처럼 성령론 중심적으로 다루는 방식들과 분명한 차이를 나타낸. 즉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은 인간론이나 기독론이나 성령론을 중심으로 구원론을 다루지 않고 구원론 전체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에 기초한 신론 중심적 형식으로 이해한다. 이와 같은 특징을 조석만 교수와 박형룡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해 주고 있다.

 

속죄의 객관적 사실은 그리스도의 비하와 승귀이다. 속죄의 객관적 사실에 있어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평화의 의논(6:13), 속죄계약이 선행되었으며, 그리스도의 객관적 속죄사역의 효과는 필연적으로 성령의 특별한 사역에 의하여 속죄의 대상(선택된 자) 개개인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개혁파 신학은 하나님을 우리 구원의 유일 조성자로 높인다. 이 신학은 구속의 적용을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은혜로운 의지에 추적하여 돌아간다. 사람이 구원의 참례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역사의 나가는 길에 유효적으로 실현하시는 선택의 영원한 작정에 의지한다. 영국 교회의 39개신조(17), 돌트신조(16, 7),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36)가 모두 이 진리를 선언한다.

 

이처럼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의 구원론은 비록 인간이 회개하고 믿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 것을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원인과 근거를 제시할 때는 반드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신의 신적작정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자신의 구원적 사역임을 강조했다. 즉 구원이란 하나님의 신적작정의 풍성하신 지혜와 은혜에 의해서 결정되어진 것이며, 또한 그것을 스스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사역으로 이해했다. 이런 구원론의 독특성을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성부 하나님이 우리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 우리를 창조하셨고, 또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예수그리스도가 우리를 속량 하시게 하셨다고 위는 고백한다. 이처럼 우리는 또한 성령이 우리의 중생 이전이든 이후이든 간에 우리에게서 나오는 아무런 공로 없이 우리를 성화 시키시고 중생 시켰음을 고백한다. 이것을 다음과 같이 분명한 말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우리는 창조와 속죄의 존귀와 영광을 스스로 취할 수 없는 것처럼 중생과 성화를 위해서도 그 어떤 영광이나 영예도 쾌히 포기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는 선량한 생각을 한 가지도 못하며 우리 안에서 계속 역사하시는 하나님만이 우리를 그의 과분한 은혜의 영광과 찬양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체적 사역과 또한 그분의 신적작정의 적용으로 구원론을 이해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개혁교회 신앙고백에서 드러나는 예정론적 구원론의 독특성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구원론을 따로 독립해서 다루지 않고 신론의 논리적 열매와 적용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칭의와 성화, 견인 등과 같은 구원의 모든 내용들은 예정론의 논리적 열매로 나타난다. 즉 구원의 혜택은 오직 택자자들에게만 적용되고 확장되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론은 예정론과 분리해서 다룰 수 없고 반드시 예정론으로부터, 또는 예정론 안에서 고백해야 한.

예정론이 구원의 서정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구원론을 이해하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칼빈으로부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까지 이어지는 개혁파의 중요한 구원론 이해이다. 이렇게 구원의 서정을 예정론 안에서 고백해야만 구원론이 인본주의적으로 흐르지 않고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 중심적인 구원론이 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예정론적 구원론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우선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론은 10장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지만 이것이 단독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0장에 부르심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101)라고 소개한다. 이 고백을 살펴보면 구원의 서정이 어디에 기초되어 있고 또한 무엇에 포함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위에서 소개했던 것처럼 철저하게 신론에 기초해 있으며, 또한 구원의 서정이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지는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부르심에 대한 고백은 철저하게 3장의 신적작정에 기초해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미 3장에서 신적작정을 고백하면서 그 작정 안에서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포함하여 고백했기 때문에 부르심은 바로 3장의 예정에 대한 논리적 열매로 소개한 것이다. 3장에서는 신적작정과 인간의 구원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어떤 사람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시고, 다른 이들은 영원한 사망에 이르도록 예정하셨다”(33),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창세 전에 자신의 영원하고 변함 없는 목적과 그리고 그 뜻의 은밀한 계획과 선하시고 기쁘신 뜻을 따라서 오직 그의 거저 주시는 값없는 은혜와 사랑에 근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어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셨으며, 그리고 모두 그의 영광스런 은혜를 찬미케 하셨다(35).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철저하게 구원론을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하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구조는 알미니안적 복음주의에서 소개되는 구원론 구조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이들은 신론과 구원론을 분리해 놓았고, 그 결과 구원론에 이르러서는 가항력적 은혜” “보편구원론”, “회개와 신앙 중심론”, “성화적 칭의론”, “신인협력적 구원”, “견인 불가능성등과 같은 주장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구원론을 고백하게 될 때 구원론은 인간중심적으로 흐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이며, 개혁신앙의 핵심인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돌려 드릴 수 있는 신앙의 형태로 정립될 수 있다. 특히 36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전 구원의 서정에 해당되는 각 세부 내용들을 이 기초 위에서 장엄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작정하신 것처럼, 그는 그의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 뜻과 의지에 의하여,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들을 미리 정하셨다. 그러므로 선택받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으며, 때를 따라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아 믿음에 이르게 되며, 의롭다 함을 받으며, 양자되며, 성화되며, 그리고 믿음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능력으로 보호된다. 이처럼 오직 택함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거나 유효하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다 함을 받거나, 양자되거나, 성화되거나, 구원받지 못한다.

 

위의 고백에서 우리가 놀랍게 발견하는 것은 그것을 위한 모든 방법(수단)들을 미리 정하셨다라는 표현이다. 이 표현은 구원의 서정에 해당되는 각 항목의 모든 내용들을 하나님께서 절대주권과 은총에 의해서 값없이 거저 선물로 주셨음을 강조하는 고백이다. 특히 인간의 책임이 반드시 강조되어야 하는 성화와 견인까지도 모두 포함해서 다루는 것을 더 주의해 보아야 한다. 결국 구원의 모든 내용은 비록 인간이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하는 부분이 있음을 강조하더라도 전체 구원의 토대는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다루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르심, 믿음,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 등의 모든 내용이 이처럼 3장의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어지고 있다. 구원의 서정의 각 항목들은 10장에서 다루고 있지만 그 기초와 근원은 이미 3장에서 모두 정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기초를 중심으로 해서 10장은 하나님께서는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만을, 자신이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때에, 효과적으로 부르시되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예정론적 구원론 구조를 잘 이해해야만 구원론의 한 부분인 칭의론도 바르게 정립할 수 있다.

예정론적 구원론의 구조적 특징은 부르심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각 항목들의 고백에서도 계속 살펴볼 수 있다. 11칭의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라고 고백하였다. 칭의는 바로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에게만 제한되어 있는 것으로 강조하여 칭의의 기초를 앞서 소개한 10장의 예정론적 부르심에 두었다. 결국 본 신조는 칭의론도 예정론의 논리적 귀결이요 열매로 다루어 주었다.

다음으로 12양자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위하여 양자됨의 은혜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허락하신다라고 고백하였다. 이 부분에서도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이양자된다고 고백하므로 앞서 고백한 칭의론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칭의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부르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양자에 대한 고백도 예정론적 부르심의 고백으로 돌아가고 있다.

13성화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서는 더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 성화는 인간이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과 결단을 바르게 강조해 주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화의 근원적 힘과 기초는 인간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은혜와 예정의 선물로 고백하고 있다. 따라서 본 신조는 성화도 부르심의 논리적 귀결이며 예정론의 실천적 열매로 고백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14신앙에 대한 부분에서는 믿음의 은사로 말미암아 선택자들은 믿어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는데라고 고백한다. 여기서는 부르심을 넘어서 3장에서 고백한 예정론으로 더 돌아간다. 신앙은 인간이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고백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가질 수 있는 근원적 기초는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서 선택된 백성들로 대상을 제한하였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신앙도 예정론 안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15회개에서는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에서 오는 은혜이다. 죄 사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행위이다라고 고백하므로 회개의 성격도 철저하게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은총에서 오는 것으로 고백해 주고 있다. 16선행에서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신자들의 능력은 결코 그들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다라고 고백하므로 선행의 기초도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임을 제시해 주었다.

17견인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사랑하는 독생자 안에서 용납해 주시고, 그의 성령으로써 효과적으로 부르시고 또한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상태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될 리 없으며라고 고백한다. 여기서도 역시 견인의 기초를 부르심에 기초해서 고백하여 예정론의 논리적 열매로 다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본 고백에서는 견인에 대한 구원 사역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자세하게 드러내 주었다. 즉 하나님의 신적작정 안에서 선택하신 것과 그 백성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신 것과 또한 성령께서 그 구원을 효과적으로 성취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분리할 수 없는 위격적 사역의 특징을 고백하였다. 이런 형식 때문에 개혁교회는 구원론을 성령론으로 부르기도 한다.

18은혜와 구원의 확신부분에서도 이 확신은 구원을 약속한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틀림없는 믿음의 확신이다. 그리고 이것은 약속들을 하게 된 그 은혜들에 대한 내적 확증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는 성령의 증거 등에 기초하고 있다라고 고백한다. 즉 구원의 확신은 인간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에 기초해서 성령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고백하였다.

이상과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부르심에서 시작해서 구원의 확신까지 전 구원의 서정이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적작정의 성취로 소개되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으로 예정론 안에서 고백하는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인간의 신앙적 책임을 강조하는 부분이 있을지라도 구원론 전체의 구조와 토대는 인간 중심적으로 다루지 않고 오직 신적작정에서 출발하여 예정론 안에서 구원의 서정을 고백하는 것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에서 고백하는 구원론의 독특성인 것이다.

 

2)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의 서정

 

위 항목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론이 가지고 있는 구조적 특징을 살펴보았다면, 본 항목에서는 구원의 서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와 대. 소요리문답에서 고백하고 있는 일반적인 독특성으로서 구원의 서정은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순서와 약간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는 일반적으로 벌콥(Louis Berkhof)의 선을 따라서 부르심 중생 회심 신앙 칭의 양자 성화 성도의 견인영화 등과 같은 내용으로 정리하고 있으나, 본 신앙고백서에서는 부르심(부르심, 중생 포함) 칭의 양자 성화 신앙 회개 선행 견인 은혜와 구원의 확신등과 같은 순서로 고백되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차이는 근본적인 차이로 볼 수 없다. 즉 개혁주의 조직신학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의 서정은 철저하게 개혁주의 신조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서정을 인간론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신론을 기초로 하나님의 신적작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동일한 공통점인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표현과 내용을 다루는 범위에 대한 차이는 분명히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구원의 서정에 대한 논의 자체가 종교개혁 시대에서부터 정립되어 후대로 올수록 좀 더 세분화되고 명확하게 제시되어야 할 필요성에 부딪히면서 지금과 같은 논리적인 순서를 갖추게 되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초기에 소개된 구원의 서정과 후기에 좀 더 세밀하게 정립된 내용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본 신조는 후기 조직신학의 구조에 비해서 하나님의 주체적 구원사역이 좀 더 능동적으로 발휘되는 내용을 앞에 배치시키고 인간의 책임이 부여되는 부분을 뒤로 구분했다. 따라서 부르심, 칭의, 양자가 앞 부분으로 나오고 성화에서 확신부분까지가 뒤로 배치됐다. 이런 차이점은 당시 신학적으로 가장 문제를 일으켰던 알미니안주의의 구원론에 대한 강한 저항적 성격도 있다. 알미니안주의자들은 도르트 총회 이후 계속적으로 인간중심적인 구원론을 강조해 왔기 때문에 본 신조는 이 부분을 강력하게 배척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A. 핫지는 신조 작성 당시 영국의 배경에 대해서 포악한 왕실파가 교회건설자들의 칼빈사상을 버리고 알미니우스 사상을 채용하므로써 충돌에 새 요소가 첨가되었다. 이 알미니우스 사상은 독단적 권력에 기생하는 자들과 교회제도적이며 예전적인 종교의 열성자들 사이에서 항상 우세하였다라고 지적한다.

구원론에 대한 이와 같은 특징은 후크마가 중생에 대한 부분을 소개하면서 종교개혁 시대와 17세기의 신학자들이 소개하는 중생의 범위가 오늘날과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넓고 좁은 형태의 차이점을 가지고 있음을 소개해 주는 부분에 잘 드러나고 있다. 또한 박형룡 목사는 이와 같은 특징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사들의 다양 의미’, ‘영적 행위들의 대조적 구별’, ‘다양 동작의 선후 순서등을 잘 고려해야만 한다고 지적해 주기도 한다.

이런 특징들을 고려해 볼 때 본 신앙고백서의 특징은 부르심안에 부르심중생이 함께 포함되어 소개되어지고 있고, 또한 신앙회개가 성화 뒤에서 소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즉 중생 뒤에 소개되지 않고 성화 뒤에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조직신학에서 회개신앙으로 소개되는 것이 여기서는 신앙회개순서로 소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다음으로는 선행이란 부분이 따로 설정되어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도 큰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조직신학에서 성화에 대한 부분으로 포함되어 소개될 수 있는 부분인데, 신조에서는 따로 이 부분을 구분해서 소개해 주고 있다. 이것은 성화에 대한 이해를 더 넓혀 주었으며 성도의 삶에 대한 중요한 내용을 좀 더 확고하게 정립하고자 한 17세기 목회자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는 특징은 은혜와 구원의 확신라는 부분이 견인뒤에 추가되어 있는 것을 보게된다. 이것은 견인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포함되어 소개될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본 신조에서는 견인교리가 가지고 있는 풍성함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이것을 따로 구분해 주고 있다. 즉 앞 부분인 견인은 예정론의 논리적 귀결로서 부르심이나 칭의가 상실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으며, 뒷 부분인 확신에서는 인간의 신앙적 책임을 더 강조해 주었다.

이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구원의 서정은 부르심에서 견인으로 이어지는 전체 내용을 따로 분리해서 다루지 않고 예정론의 논리적 열매로 다루어가는 형식을 취했다. 특히 하나님 중심적 구원론의 구조를 완성하기 위해서 본 신조가 구성한 형식은 더욱 놀랍다. 즉 예정론에 기초한 부르심은 이어지는 모든 구원의 내용들의 기초로 다루었으며, 또한 이어지는 각 과정은 다음과정의 논리적 결과로 연결시켰다. 그리고 마지막 견인은 이런 논리적 구조의 최종확증으로서 예정과 연결된다. 즉 견인은 단순히 인간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예정의 논리적 결과인 것이다.

이런 예정론적 구원론 구조를 통해서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인간 자신을 모든 구원의 주체로 삼고 싶어 하는 인본주의적 구원론을 막고 하나님 중심적 구원론을 지켜 갈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다음으로는 구원론 논쟁과 관련해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칭의론과 성화론을 살펴보고자 한다.

 

3)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칭의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다루는 칭의는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은혜와 예정론적 구조에 기초한 고백이다. 즉 본 신조는 칭의를 인간의 실질적 변화에 기초하여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만족과 죄책을 사면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주와 절대주권자로서의 법정적 선언으로 구별하였다. 특히 칭의에 대한 고백도 앞서 소개되었던 부르심에 대한 고백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이 칭의를 이루시는 주체로 소개한다. 그리고 전체 고백도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기초로 예정론 안에서 고백하는 방식으로 칭의를 다루고 있다. 이런 구조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111).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순종하시고 죽으심으로써, 이같이 의롭다 함을 받는 모든 사람들의 빚을 완전하게 갚아 주셨고, 그들을 위하여 자기 아버지의 공의에 대해 합당하고, 참되고 충분한 만족을 드렸다. 그렇지만,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으셨고, 그들 대신으로 그의 순종과 만족이 받아들여졌으며, 이로써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그의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서 나타나도록 하셨다(113).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차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그렇지만, 그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성령께서 때를 따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시키실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114).

 

우선 3절에서 칭의 사역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아버지의 공의에 대해 합당하고, 참되고 충분한 만족을 드렸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보냄을 받으셨고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칭의의 사역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세 전 속죄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적작정의 성취로 소개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때가 차매 그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그들을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성령께서 때를 따라 실제로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적용시키실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라는 고백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의 사역들이 분리할 수 없이 동등하게 칭의 사역과 어떻게 연결되어져 있는지를 드러내 주었다. 즉 성부 하나님께서는 칭의 사역을 위해서 작정하시는 분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칭의를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분으로, 그리고 성령께서는 칭의를 실제적으로 적용하시는 분으로 고백하였다.

다음으로 칭의의 사역이 신적작정을 기초로 해서 예정론 안에서 고백되고 있는 구조를 언급해 볼 수 있다. 위의 고백 중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유효하게 부르신 자들을 또한 값없이 의롭다고 칭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택함 받은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 하시려고 작정하셨다라는 표현을 통해서 잘 드러나고 있듯이 칭의의 사역은 신적작정과 선택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주체적 사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칭의의 사역은 구원의 서정에서 단독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 소개된 부르심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칭의는 부르심뿐만 아니라 다른 항목들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해 준다.

 

이같이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받아들이고 의존함에 있어서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방편이다. 그렇지만 믿음은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 안에서 단독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모든 다른 구원의 은사들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112).

하나님께서는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의 죄들을 계속해서 용서해 주신다. 그리고 그들은 칭의(稱義)의 상태에서 결코 전락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죄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부성적인 진노를 살 수 있게 되며, 그들이 자신들을 낮추어, 그들의 죄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며, 그들이 믿음과 회개를 새롭게 하기 전에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노여움이 풀리지 않게 된다(115).

 

위의 고백을 보면 칭의와 믿음이 어떤 관계로 이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방편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칭의와 믿음과 회개가 서로 깊은 연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고백하고 있다. 즉 칭의의 기초에 의해서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처럼 구원의 서정 각 단계들이 서로 단독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작정과 예정론을 기초로 서로 유기적인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고백하는 것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 고백되는 구원의 서정의 또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구조는 구원의 서정이 인간중심적으로 이해되어지지 않도록 하며 오직 하나님 중심적으로 그 내용들을 고백하고자 한 당시의 노력들이다.

칭의 부분에서 더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면은 이와 같은 신론중심적인 칭의의 구조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오류를 함께 소개해 주고 있는 부분이다. 즉 신론중심적인 칭의의 구조에 가장 심각한 도전은 알미니주의적인 인간중심적 칭의의 방식이다. 이와 같은 인간중심적인 칭의관은 도르트 신조에서 배격되었던 알미니안적 구원론과 동일한 성격이다. 본 신앙고백에서는 다음과 같이 알미니안적인 구원론을 배격했다.

 

이 칭의(稱義)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 그들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용납해 주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또한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또는 그들에 의해서 되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믿는 행위, 또는 어떤 다른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돌림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량을 그들에게 돌림으로써,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1).

또한 이 모든 것이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값없이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칭의(稱義)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그의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서 나타나도록 하셨다(3).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우선 의를 그들에게 주입해 줌으로써가 아니라라는 고백을 통해서 로마 가톨릭의 칭의관이 배격되고 있다. 즉 로마 가톨릭은 새로운 의를 인간에게 주입하여 성화를 통해 의를 발전해 가는 의화교리를 주장했기 때문에 이 부분을 먼저 비판해 주었다. 다음으로 또한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또는 그들에 의해서 되어진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믿음 자체, 믿는 행위, 또는 어떤 다른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돌림으로써가 아니라라는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알미니안주의적인 신인협력적 칭의관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있다. 본 신조는 믿음이 칭의의 수단이며 도구라는 사실은 분명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믿음 자체를 칭의의 원인이나 기초로 주장하는 알미니안적 입장은 비판했다.

이 표현은 오늘날 한국교회 가운데도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제시하고 있는 칭의관이 위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으로 칭의관을 거의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믿음 행위나 공로나 노력에 의해서, 또한 신비적인 종교현상을 통해서 자신 안에 무슨 변화나 경험을 인식하므로 칭의에 대한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에 본 고백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은 오늘날도 잘못된 칭의관을 분별하는데 매우 중요한 고백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근래에 전통적 칭의관을 비판하는 새관점 학파의 선교적 칭의나 김세윤 박사의 관계적 칭의나 김영한 박사의 중도적 통합적 칭의론등은 바로 위에서 지적한 알미니안적 칭의론의 변형들이기 때문에 더욱 주의를 요한다. 3 주장들은 칭의론에 대해서 관계적”, “윤리적”, “성화적”, “연속적”, “보상적”, “칭의 상실 가능적”, “인간 성화적 노력 협력적”, “인간의 능동적 참여등의 표현을 제시하면 성화적 칭의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전통적 칭의론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던 법정적”, “단회적”, “선언적”, “확정적”, “절대 은혜적”, “하나님의 단독적 사역”, “인간은 수동적”, “그리스도의 은혜 전가등과 같은 표현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태도들이다.

특히 김영한 박사는 성화 없는 칭의는 죄인의 칭의 아닌 죄의 칭의라는 제목을 통해서 크리스천투데이3번에 걸쳐서 김세윤 박사의 칭의론과 전통적 칭의론의 융합을 시도했다. 그는 죄인의 칭의와 죄의 칭의를 구분하여 칭의의 법정적 단회적 확정적 성격을 받아들인다고 하면서도 종말론적으로 칭의의 상실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전통적 칭의론의 예정론적 성격과 성화를 구별하여 다루는 방식을 강하게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필자는 정통개혁교회의 신학자로서 "새 관점 학파"가 제기하는 칭의의 종말론적 유보론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에 함축된 동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우리 신자들은 칭의의 일회적으로 주어짐의 성격과 종말론적 완성 속에서, 오늘도 다가오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의 부르심에 매 순간 응답하여야 한다. 그리고 코람데오(coram deo)의 신앙으로, '안일한 예정 신앙''성화 없는 칭의 신앙'에서 깨어나 선한 누룩이 되고 각종 세속주의 풍조, 동성애, 성매매 자유화, 급진적 이슬람이 밀려오는 포스트모던 세상을 향하여 소금과 빛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위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김영한 박사는 법정적 칭의를 받아들인다고 하지만 칭의가 종말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칭의의 상실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러나 법정적 칭의는 예정론과 견인론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본 신조 115절에서 그들은 칭의(稱義)의 상태에서 결코 타락할 수는 없다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칭의 상실 가능성을 주장하면 그 자체가 법정적 칭의론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결국 이런 주장들은 전통적 칭의론을 일부 인정하는 듯 하면서도 칭의론의 핵심적인 원리나 주체를 인간편에서 시작하는 전형적인 인간중심적 칭의론들이다.

오히려 성경적인 바른 칭의관은 그들의 죄들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의 인격을 의로운 것으로 간주하여 용납해 주심으로써 되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량을 그들에게 돌림으로써, 부르심을 입은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의존할 때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라는 고백처럼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이루어 주신 속죄의 은혜를 우리의 것으로 돌려(전가) 주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그 은혜를 우리게 전가 시켜주시는 하나님 중심적인 칭의관을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주권과 은총에 의해서 선물로 칭의가 주어지는 것으로 고백하는 것이 그 믿음은 그들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그들의 칭의(稱義)는 오직 값없는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와 그의 풍성한 은혜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는 가운데서 나타나도록 하셨다라는 고백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칭의가 단순히 신약에서만 제시되는 내용이 아니라 구약에서도 동일한 성격으로 제시되는 부분이다. 본 신조는 6절에서 구약 시대의 성도들의 칭의(稱義)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의 칭의(稱義)와 모든 면에서 똑같았다라고 고백한다. 이 고백은 세대주의적인 극단적 종말론주의자들의 칭의관을 비판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왜냐하면 칭의와 관련해서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많은 오류가 발생되고 있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구약은 행위로 구원받고, 신약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처럼 오해하는 세대주의 방식 때문이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도 오는 것이지만 역시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도 온다. 이와 같은 식으로 성경의 통일성을 깨뜨리면 전체 성경의 구조가 무너지게 되고 결국 신론중심적인 칭의관 자체도 위협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본 고백에서는 철저하게 신구약의 칭의관이 신론중심적인 칭의관으로 동일한 성격임을 명백하게 정립해 주었다.

이런 구조는 이미 앞서서 소개하고 있는 7언약8중보자 그리스도에 대한 부분에 기초하고 있는 고백임을 확인해 볼 수 있다. 7장에서는 신적작정에 의해서 주어진 은혜언약의 본질이 구약과 신약의 모든 택하신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구원의 은혜임을 고백해 주었다. 또한 8장에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비록 신약에 오셔서 구원의 실제적인 내용을 성취하셨지만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도 구원의 주체로 존재하셨다고 말한다. 또한 그 구원의 사역 내용은 비록 신약에서 성취되었어도 구약의 모든 택한 백성들에게도 역시 그 효력과 은혜가 성취되는 방식으로 주어진 것임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므로 신구약의 구원적 성질의 통일성을 확립해 주었다.

그러므로 본질 면에서 차이가 있는 두 종류의 은혜 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세대에 걸쳐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동일한 언약이 있을 뿐이다(76).

구속 사역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신 후에야 비로소 그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 사역의 공덕과 효능과 혜택은 창세로부터 모든 세대에 살던 택함 받은 백성들이 계속적으로 받아 누려 왔다(86).

 

이처럼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칭의론 고백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다양한 부분들을 정리하여 주었다. 즉 칭의론 고백에서는 펠라기우스주의, 반펠라기우스, 로마 가톨릭, 알미니우스주의, 세대주의적 종말론주의 등이 배격되었고, 특히 성화나 신앙, 회개, 견인과 연결시키지 않는 분리적인 형태의 칭의론도 배격했다.

 

4)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성화론

 

성화와 관련되어 가장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은 성화의 주체에 대한 부분이다. 많은 초교파적 복음주의자들은 성화는 인간이 실제적인 참여자이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가 주체가 되는 것으로, 또는 하나님과 인간이 협력해서 이루어 가는 신인협력설 등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고백들에서는 철저하게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 자신임을 고백한다. 비록 인간이 성화의 대상으로 실제적인 참여자이고 실행자일지라도 그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며, 바로 그 하나님께서 신적작정과 예정론을 기초로 성화의 사역을 이루시는 분임을 고백했던 것이다. 이런 하나님 주권적인 성화의 의미가 본 신앙고백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되고 있다.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 즉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그리고 그 죄의 몸에서 나오는 몇 가지 정욕들이 점차 약해져 줄어지고,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거룩한 생활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앞서 소개했던 구원의 서정과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성화는 단독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에 기초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역시 성화의 사역을 앞으로 거슬러서 예정론적 부르심에 기초하여 고백하고 있다.

특히 놀라운 것은 알미니안주의자들이 성화칭의에서부터 설명하므로 신인협력설쪽으로 기울어진 것에 비해서, 본 신조는 이들과의 차이를 철저하게 구분하기 위해서 칭의보다는 부르심에 기초해서 설명하였다. 부르심에서 기초해서 설명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이 성화를 다룸으로 성화의 사역이 하나님 자신의 사역임을 강조하려 했던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의미가 대요리문답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거룩하게 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여 성화는 예정론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분명하게 제시해 주었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화의 주체이시며, 또한 각 위격의 사역이 성화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가 자세히 고백하고 있다.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과(대요리문답),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성화는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신의 사역으로 고백된다.

또한 3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성결케 하는 영으로부터 힘을 계속적으로 공급받음으로서 중생한 부분이 이기게 되며라고 고백하므로 모든 성화의 과정이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주어지는 실제적인 도우심과 힘이 없이는 인간의 공로와 의지와 노력으로는 결코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증거해 주고 있다.

이처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신적작정과 예정론을 통해서 이루시는 성화는 인간의 공로에 이루어지거나 신인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베풀어주시는 은총의 선물임을 성화부분에서도 아주 명확하게 밝혀 주고 있는 것이다.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성화부분에서 인간의 공로와 노력과 상급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화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며, 또한 은총의 선물인 부분을 약화시키려고 하지만 본 신앙고백에서는 이 부분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은총의 선물로서 성화에 대한 고백은 3절에서 그리하여 성도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라고 고백하며, 대요리문답에서는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끓어오르고 증가되며 강력해져서(75)”라고 고백하며, 소요리문답에서는 거룩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역사이신 데(35)”라는 표현을 통해서 이런 정신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었다.

다음으로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성화의 수단에 대한 부분이다. 본 고백에서는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內住)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을 통해서 성화의 수단이 말씀과 성령으로 고백된다.

말씀이 성화의 외적수단이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고백이다. 즉 인간의 판단이나 결정, 좋은 의도나 공로가 성화의 수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성화의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16장에서 선행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명령하신 것들만을 가리킨다’(1)라는 고백을 통해서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규범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것은 그 어떤 것도 거룩한 삶의 규범으로 설 수 없는 것임을 명백히 하였다. 이 부분은 칼빈주의에서 율법의 제3용법을 강조하여 성화를 강조하는 방식에서 루터파와 구별되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삶의 규범이 되는 원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에 기초해서 고백해 주고 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17:1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5:26). 특히 이와 같은 성화의 수단도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고백해야 하는 것으로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살후2:13)라는 말씀을 통해 성화의 수단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이해인 것이다.

또한 본 고백에서는 성화의 범위와 성화의 실제적인 내용에 대해서 소개해 주고 있다. 먼저 성화의 범위는 실제로 그리고 인격적으로 더욱 거룩해 진다’, ‘이 성화는 전인격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지만(3)라는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성도의 전 인격적인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신앙의 자라남이 종교적인 모습에서만 열정적이고 그의 삶에서는 전혀 신앙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는 이원론적인 신앙을 비판 할 수 있는 중요한 고백이다.

성화라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삶의 전 인격에서 세워져 감으로 되어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해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성화의 실제적인 내용으로는 두 가지를 소개한다.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라는 고백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죄에 대해서 슬퍼하며, 의로운 삶을 향해 가는 것으로 증거한다.

이것은 소요리문답에서 좀 더 명확하게 요약되어 거룩하게 하신 것은 점점 죄에 대하여서는 능히 죽고 의에 대하여서는 능히 살게 되는 것이다(35)”라는 표현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와 같은 성화에 대한 실제적인 이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성화는 단지 외부적으로 나오는 몇몇의 구별된 행위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죄에 대한 반응과 그리고 의로운 삶에 대한 태도를 총체적으로 해서 평가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의 규범으로 삼고, 그 말씀 앞에서 죄를 발견하고 슬퍼하며, 또한 그 말씀의 뜻을 따라서 살고 싶어 하는 성화의 내용은 칼빈주의 삶의 독특성이다.

마지막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부분은 성화의 상태에 대한 고백이다. 본 신앙고백에서는 성화의 불완전성을 고백하고 있다. 이것은 알미니안주의자들과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완전성화를 고백하고 있는 것과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고백된다.

 

이 성화는 전인격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지만, 이 땅에서는 불완전하다. 그래서 모든 부분에 얼마간의 부패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로 인하여 계속적이고 화해될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나, 육체의 소욕(所欲)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려 싸운다(2).

 

위의 고백을 살펴보면 부패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 땅에서는 불완전하다”, “그 전쟁에서, 그 남아 있는 부패한 부분이 당분간은 상당히 우세할지 모르나(7:23)(3)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성화는 이 땅에서 순간적으로 완전히 성화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죄 때문에 여전히 부패의 내용들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성화라는 것은 일평생 동안 끊임없이 전인격 속에서 계속해서 자라가야 하는 성격이다.

이와 같은 의미가 대요리문답에서는 이 생에서 아무도 완전한 성화에 달할 수는 없고 다만 완전을 향하여 성장해 갈 뿐이다(77)”, 신자들은 그들의 모든 부분에 숨어 있는 죄의 잔재 때문에, 그리고 영을 끊임없이 거스리는 육의 정욕 때문에 성화를 완전히 달성할 수 없다(78)”라는 표현으로 더욱 명확하게 제시되었다.

이런 성화의 성격 때문에 성도들의 거룩한 삶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죄에 대해서 싸워가며, 또한 의로움 향해 항상 전진해 가야 하는 삶의 과정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성도의 독특한 삶의 방식을 본 고백에서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5:17),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2:11)라는 말씀을 근거로 해서 육체의 소욕(所欲)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려 싸운다라는 표현으로 제시되었다.

결국 성화에서 거룩한 삶이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9:23)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자기부정의 삶이. 성화에 대한 이런 명확한 이해가 있어야만 우리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2:8)라는 말씀에서 증거되는 것처럼 구원이 우리의 노력과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선택의 사랑에 의해서 값없이 거저 주신 은총의 선물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조는 이와 같은 고백을 통해서 성화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과 의무가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강조해 주었다. 하지만 비록 성화에서 인간의 노력이 중요한 위치에 있다할지라도 본 신조는 결코 성화의 주체로서는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 신조는 인간의 선행과 노력은 구원의 대상자로서의 책임과 의무임을 강조해 주었다. 즉 하나님의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인간의 자유가 보존 및 확립되는 거룩한 책임과 의무라는 것이다.

성화에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주권적 성격과 인간의 책임과 의무에 대한 조화를 윌리암슨( G. I. Williamson)은 다음과 같이 구별해 주었다. “성화는 사람과 하나님이 활동하셔서 되는 일이다. 그러나 이 말은 사람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가 동등하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성화에 대한 공로를 다 취하시는 그러한 것이며 반면에 사람의 역사는 자기가 무익한 종이라는 것 외에 결코 아무것도 아니다는 것이다.” 또한 빈센트(T. Vincent)우리가 성화의 주체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성화의 주관자나 그것을 유효케하는 원인 될 수 없다라고 구분해 주었다.

이와 같이 웨스트민스터 신조의 성화론은 칭의의 원인이 아니라 열매이며 증거로서의 역할을 잘 드러내 주었다. 대요리문답에서는 신조의 칭의론을 더 보충하여 칭의와 성화의 중요한 차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구별하여 소개하였다.

 

77. 의롭다 함을 받는 것과 성화되는 것은 어떤 점이 다른가? : 성화는 칭의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지만, 그 둘이 같지가 않다. 하나님께서는 칭의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입혀 주시며, 성화에서는 하나님의 영이 은총을 부어 주신다. 또한 칭의로는 죄를 용서해 주시고, 성화로는 죄를 이기게 하신다. 그리고 칭의를 통하여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벌하시는 진노로부터 면제를 받게 되며, 칭의는 이 생에서도 완전하여 신자들이 다시금 정죄되는 일이 없게 한다. 그러나 성화의 경우는 사람에 따라 같지가 않다. 그 뿐 아니라 이 생에서 아무도 완전한 성화에 달할 수는 없고 다만 완전을 향하여 성장해 갈 뿐이다.

 

따라서 본 신조는 칭의와 성화를 구별하여 말하면서도 둘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특히 칭의를 성화의 원인이며 근거로 설명하였고, 성화는 칭의 열매요 증거로 다루었다. 또한 칭의와 성화 모두 신적작정과 예정론에 기초하여 구원의 논리적 열매로써 고백해 주었다. 개혁주의 구원론은 결코 성화가 칭의의 원인이나 근거로 말해서는 안되며, 그리고 성화의 열매를 가져오지 않는 형태로 칭의를 분리해서 말해도 안되며, 더 나아가 칭의와 성화를 예정론과 나눠서 다루어도 안된다.

 

 

결 론

 

지금까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개혁파 구원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웨스트민스터 신조에서 제시하고 있는 구원론은 구원의 서정 전체가 따로 독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적작정을 기초해서 예정론 안에서 이해되고 고백되어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전체 구원의 서정은 그 자체가 구원에 이르는 원인이나 조건이 아니라 바로 이 신적작정과 예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시는 열매로서 이해한 것이다. 그리고 구원의 주체에 있어서도 역시 이 신적작정과 예정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임을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신론 중심적으로 구원론을 고백하는 것이 개혁파 구원론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이와 같은 구원론의 이해가 있어야만 구원론이 인본주의적으로 흐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으로 고백될 수 있다. 비록 구원의 대상이 인간이기 때문에 구원론에서는 당연히 인간이 많이 소개될 수밖에 없을지라도 본 신조는 구원론의 완성은 인간 자신의 구원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에 까지 이르어야 한다고 이해했던 것이다.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는 소요리문답의 고백처럼 구원론은 인간 자신의 구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적작정과 예정론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최고의 자리까지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신론중심적인 구원론의 구조를 기초로 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전체 구원의 서정들을 다루어 주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부르심에서부터 시작하여 은혜와 구원의 확신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이 이 기초 위에서 소개되고 있다. 이런 특성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 주기 위해서 각 구원의 서정들의 근거를 부르심으로 소급해서 고백해 주고 있는 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아주 놀라운 특징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칭의론이 논의될 때만이 칭의의 법정적, 단회적, 완성적, 은혜적, 선언적, 전가적 성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출처: 영적분별력 /진실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1965년 소련에서 방송된 한 TV프로그램에 평범한 주부였던 니나 쿨라지나가 출연해서 자신의 초능력을 선보였다고 한다. 그냥 평범한 주부였던 니나 쿨라지나는 방송에서 자신을 초능력자라고 소개했으며 여러 가지 신기한 초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사물을 손으로 만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그 사물을 움직였으며 시계를 건드리지 않고 시계의 시침,분침,초침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초능력을 보 주었다.






프로그램 제작진은 혹시 그녀가 속임수를 쓸까봐서 물건들 위에 투명한 플라스틱상자를 씌우고 실험을 진행했는데 니나 쿨라지나는 이에 게의치않고 투명플라스틱 상자안에 있는 시계, 성냥개비가 자기 맘대로 움직여보였다.



그런데 그녀의 초능력 중에서 가장 특별한 능력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동물에게 손 하나 대지 않고서도 그 동물을 죽이는 것이었다. 니나 쿨라지나는 개구리를 탁자위에 놓고 자신의 두손을 들어서 기를 모아전달하자 개구리의 심장이 정지되어 버렸다.





나나가 손 한번 대지않은 상태에서 멀쩡하던 개구리가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이 초능력영상은 체코출신의 밀란 리츨박사가 1969년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미국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구소련출신의 니나 쿨라지나의 초능력이 방송을 통해서 미국사회에 알려지고 난 후 미국 CIA(중앙정보국)에서는 초비상이 걸렸다.





1969년 당시 미국 CIA에서도 첩보를 입수해서 소련에 초능력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는데 특히 니나 쿨라지나의 초능력 실험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미국 CIA가 입수한 첩보에 따르면 소련 KGB에서 실제로 많은 초능력자들을 모집해서 비밀리에 초능력자들을 소련의 군사부문에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있었다.





당시 소련에서는 총 20개의 부대에서 초능력자들을 군사목적에 활용할 정도로 소련에서 많은 초능력자들을 대미국 항전에 활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초능력자부대를 전혀 갖고 있지않았기 때문에 미국 CIA가 충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소련의 초능력자부대에서는 초능력자들의 초능력과 원거리투시법을 이용해서 미국의 중요한 군사정보와 1급 기밀정보를 캐내고 있었으며 나중에는 미국 국방부의 홈페이지를 해킹하거나, 컴퓨터시스템이나 보안시스템을 망가뜨리는 등의 공작들을 행하고 있었다.





1969년 당시 미국과 소련의 냉전상태는 극과 극을 치닫고 있었으며 자본주의 종주국과 사회주의 종주국인 미국과 소련은 서로가 군사적으로 우위에 서기 위해서 피말리는 군사무기경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군사안보부문의 미국과 소련의 경쟁은 정말 치열했는데 소련이 보유하고 있는 초능력자부대는 미국에게는 엄청난 군사적 위협감을 안겨다 주었다.


2004년 미국의 다큐멘타리 작가인 존 론슨의 제보로 인해서 미국에서도 초능력부대가 운영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미국에서 초능력자부대를 만들었던 것은 69년 방송된 니나 쿨루지나의 초능력 때문이라고 한다. ....


==


STILLCUT









 

 

 

2014년 봄 경건서적인 그리스도의 임재를 읽고 요약한 것입니다.

 

저자는 지금부터 약 150년 전 스코틀랜드에서 사역하신 목사님으로, 그의 책들은 정통 칼빈 신앙으로부터 변질되어 가던 당시에 개혁주의 신앙의 버팀목이 되었다고 합니다. 본 책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서, 원제목은 ‘The Abiding Presence’로서 변치 않는(지속적인) 임재(함께 하심)라는 의미입니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본 책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서 사시다가 하늘로 올라가셨지만, 약속대로 성령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저는 지난 2월에 열린 개혁주의 설교 연구원 정기 세미나에서 Ian D. Cambell 목사님의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에 관한 마지막 시리즈 설교를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28:20) 들으며, 이 책의 내용도 궁금해졌고 잘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책의 구성은 세 파트로 나누어져 있고 소제목도 달려 있으나, 모든 부분이 임재라는 주제를 반복적으로 다루고 있어서, 처음에는 책 전체의 구조가 쉽게 파악되지는 않았습니다.

첫 파트(1-6)임재와 전기의 결합이라는 다소 생소한 용어로 임재의 원리를 소개하고 있어 조금 낯설게, 혹은 새로운 원리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게 했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미 알고 있는 바를 원리로 기술한 듯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시다가 하늘나라로 올라가셨지만, 여전히 성령을 통하여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로, 복음서(전기)는 지금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구체적이고 생생히 볼 수 있게 해주고, 임재는 그리스도와 인격적이고 살아있는 교제를 나누게 하는 수단이 되므로, 전기와 임재가 둘 모두 필요합니다. 성령을 통한 임재로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 함께 하셨던 것보다 더 강력하고 절대적인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로 말미암아 이 어두운 세상인 인류에 올 수 있었다면, 성령을 통한 임재는 그 을 영원히 우리에게 비추고 있는 것입니다. P44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관한 기록인 복음서가 지금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 아닙니다. 병을 고치는 예수님에 관해 읽을 때 그 능력이 우리에게도 미칠 수 있음을 믿어야 하며,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하심을 읽을 때 지금의 우리도 그 자비를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어느 시대에 속하든지 회개하면 용서해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어야 합니다. (4) 성경을 이렇게 읽는다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는 더 많은 위로를 받고, 더 자주 회개하게 되고, 더 간절히 구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본 책은 복음서를 왕의 갤러리라고 비유합니다. 구절구절이 예수님 생애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아야만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와 하늘에 속한 영적인 축복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허락된 많은 은혜들을 누려야겠습니다.

두 번째 파트 7장에서는 임재의 원리에 의하여 복음서에 나타난 네 가지 사건(세례 받으심, 광야시험, 회당에서의 설교, 십자가의 희생)을 고찰해 보고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영속성이라는 요소에 초점을 맞추어서 복음서를 읽고 해석하고 은혜를 누리는 원리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1 예수님께서 세례(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연합을 의미함)를 받으신 후 성부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증언해 주신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이면서, 동시에 성령으로 세례(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함)를 받을 자들도 자녀로서 받아주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시간 순서가 뒤바뀐 듯 하지만, 그리스도가 대속의 피를 흘리심으로써 죄인을 위한 제물이 되실 때, 성부께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에 속한 우리도 사랑하실 것입니다. P85  2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시험 받으신 것은 아들되심(Sonship)에 대한 것이었으며, 지금의 우리도 동일한 것으로 시험을 받습니다. 그러나 자녀됨은 영적인 것으로서, 그 영광스러움의 증거들은 세속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우리에게 배를 채울 떡이 없고,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받고, 아무런 기업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점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은밀하게, 그러나 안전하게, 아직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P103 이러한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방법과 동일하게 말씀과 성령에 의존해야 합니다. P115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와 동일하게 연약함을 체휼하셨으며 오직 성령과 말씀에 의지하였습니다. p112

3 그리스도께서 회당에서 하신 설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4:16-22)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말씀(성경)을 가르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구해야 할 것은 새로운 계시나 신비로운 현상이 아니라 말씀에 나타난 진리의 빛임을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3:34)

4 십자가의 효력은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그 효력이 미칩니다. 죄를 사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제물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희생을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적용시키시기 때문입니다. P43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 9:4) 그리스도는 영원한 희생제물이 되셨으며, 하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아 계십니다. P154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세 번째 파트 4개의 장으로 이루어집니다. 1첫 장은 신앙이 실재적이고 인격적이 되기 위해서는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가 있어야 함에 대한 것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셔야만, 우리는 영적인 것(하나님의 속성과 영광, 우리의 죄악, 대속과 의, 거룩한 공의, 구원의 기쁨.. p 180)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2두 번째 장은 이신 하나님(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공의와 자비)을 밝히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3세 번째 장은 임재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기뻐하시는 뜻임과 성도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성도는 그리스도를 닮아 거룩하게 되어 가고, 서로 사랑하게 되며, 박해를 인내할 수 있게 되고, 더 큰 영광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 15:4) 4네 번째 장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임재는 시간을 초월하므로, 모든 성도들은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는 것 있습니다. 말씀에 기록된 믿음의 선조들의 삶과 영적인 복락이 우리에게 기쁨과 은혜가 됩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28:14)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여호수아에게 항상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임마누엘예수님의 성육신으로 이루어지고,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며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성령을 통하여 성취되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우리 안에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는 하나님의 특별하고도 세심한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잘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임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영원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지식적으로만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진정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읽기가 조금 힘들었던 책이었지만, 우리의 구원을 적용하시고, 성화를 이루어 나가게 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그리스도의 임재의 측면에서 깊게 배울 수 있는 유익하고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의사들은 먹지 않는 8가지 식품


1. 가공된 육류

가공된 고기는 의사들의 블랙리스트 첫 번째에 있는 식품이다. 베이컨과 소시지 등 가공된 육류는 몸에 좋지 않은 지방과 콜레스테롤, 방부제 등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 심장 전문의 데이비드 거너는 "가공육은 가장 영양이 적은 동물의 부산물"이라고 말했다.


2. 다이어트 탄산수

탄산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몸에 해롭다. 우리는 '제로 칼로리' 탄산음료가 다이어트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다이어트 탄산음료는 더 많은 달콤한 것들을 요구해 높은 칼로리를 섭취하게 유도한다.


3. 전자레인지 팝콘

전자레인지 팝콘에는 100g당 11g에 해당하는 많은 트랜스 지방이 함유되어 있다. 또 인공 버터 맛을 내기 위해 함유되는 디아세틸은 폐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다. 시중에서 흔히 판매하는 팝콘 봉지는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환경오염물질 PFOA (퍼플루오로옥타노익 에시드, Perfluorooctanoic acid)로 코팅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많이 섭취할 경우 뇌와 신경, 간의 질병을 야기할 수 있다.


4. 무지방 우유

사람들은 수십 년간 우유 속에 함유된 높은 지방을 섭취하지 않을 방법에 대해 연구해왔다. 그 결과 영양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지방을 줄인 저지방 우유나 무지방 우유를 찾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하지만 완전 우유(Whole milk)에는 무지방 우유에서 얻을 수 없는 영양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 완전 우유에 함유된 지방이 비만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다.


5. 인공색소

인공색소는 크래커나 아이스크림 등에 빛깔을 내기 위해 첨가하는 물질이다. 이들 속에는 설탕과 조미료, 색소 등이 첨가된다. 설탕과 약간의 인공조미료 섭취는 큰 문제가 되진 않는다. 당신이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인공색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인공색소는 타르계 색소와 비타르계 색소 등 두 가지가 있다. 타르계 색소는 원래 직물의 염료로서 합성된 것으로 대부분 인체에 해롭기 때문에 유럽에서도 사용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6. 고과당 옥수수 시럽

옥수수 시럽은 가장 위험한 식품 중 하나다. 옥수수를 원료로 하는 단맛을 내기 위한 첨가물로 설탕보다 당도가 6배 이상 높아 탄산음료나 과일 음료의 주원료가 된다. 이 외에 비스킷, 젤리, 조미료 등 단맛이 나는 거의 모든 가공식품에 들어갈 정도로 널리 쓰이고 있지만, 먹었을 때 포만감을 유발하지 않기 때문에 과도하게 섭취할 우려가 높다.


7. 밀가루

밀가루의 주성분인 글루텐은 우리 몸에서 여러 건강상의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흰 밀가루를 지나치게 섭취하면 설사나 체중 감소, 복부팽만 같은 소화기능 장애 정도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만성 변비나 비만, 골밀도 저하, 피부 습진 등 생각보다 많은 질환을 일으킬 수 있다.


8. 아이스크림

듣고 싶지 않겠지만, 많은 건강 전문가들은 아이스크림이 피해야 할 음식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영양학 박사 마이클 허트는 아이스크림을 "인간에게 최악의 음식"이라고 불렀다. 실제로 아이스크림에는 많은 양의 설탕과 온갖 인공 첨가제들이 다량 함유되어 있다.

 

목회를 하던곳에서 갑자기 사임을 하고
저희가정에서 몆 성도와 함께 개척을 하였습니다
3년8개월이란 광야같은 고달픈 삶을 살면서 가슴조이며

금식하고 울고 울던 시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때때로 작은 기쁨으로 힘주시고
위로와 격려로 비젼으로 다시 이끌고 가셨습니다
마지막 금식기도를 하던중 응답을 주셨습니다
그때 받은 은혜를 적어봅니다

♡~~~~고난의 끝자락에서~~~~♡

고단한 일상이 끝나고
깊어가는 고요한 이 밤
주님과 약속한 기도시간
제단으로 나아갑니다

보좌로 부터
지친 내영혼 위에
생수의 강
은혜의 강물이 흐릅니다

영혼 깊숙히
주님의 끝없는 용서와
사랑의 물줄기가
한없이 흘러 흐릅니다

주님의 임재 속에서
회개의 눈물
애통의 눈물
간절한 기도의 눈물이
한없이 흐릅니다

혹독한 고난의 시간
뼈가 시려오는 고독한 삶
그곳에서 주의 얼굴만
주목하게 하시고
막힌담을 보게 하십니다

고난의 끝자락에서
말씀의 불
기도의 불로
불순물을 녹이시고
세미한 음성 들려 주십니다

소망의 빛으로
길을 여시고
높은 산지에
견고한 반석 위에 세우십니다

깊은 바다를
메마른 땅으로 걷게 하시며
광야의 길을 내시는
기적의 주님

말씀으로 약속을 주신 땅
우리가 밟는 땅
그 곳에도
여리고성의 기적
갈렙에 행하신
헤브론산지의 기적을 보여 주소서


(주님의 비젼속에서 강력한 성령님의
은혜를 기대하며 2016년1월 겨울밤에) ㅗ

 

출처: 사모님사모님/물소리

'사모님들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게 날개가 있다면...  (3) 2016.08.09
사람팔자 시간 문제라고?  (0) 2016.08.06
가슴에 담고픈 글  (0) 2016.07.15
무슨 과에 다니세요?  (1) 2016.06.15
가.나.다로 표현된 주님과의 사랑  (0) 2016.06.09
    눈꽃 최송연 하얀 새의 깃털처럼 부드러운 너 뾰족한 가시 탓하지 않고 살포시 그 위에 내려앉네 너의 그 부드러움은 뾰족해서 시린 가슴도 넉넉히 감싸줄 수 있으리 하얀 이슬 머금어 깨끗한 너 시궁창 더럽다 탓하지 않고 그 위에도 사르르 찾아주네 너의 그 깨끗함이 더럽고 추한 만상(萬象) 모두 덮고 남을 수 있으리니 주님 사랑 전해주는 순결한 네가 있어 온 누리엔 새하얀 눈꽃이 피네
          *외면적(표면적), 입술만으로가 아닌, 진실과 순결한 성도가 나가야 할 길을 쏟아지는 하얀 눈꽃에 비유해 본 것입니다.^^ *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다가 내게 해준 충고  (0) 2016.08.15
            내게 가르치소서  (9) 2016.08.14
            하늘 꽃  (0) 2016.07.16
            당신의 음성/최송연  (0) 2016.07.13
            눈물보다 귀한 사랑  (0) 2016.06.2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