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용 박사(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현 한국개혁주의연대 회장)가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하는 것은 너무 너무 잘하는 일”이라고 목회자세미나에서 강조했다. 지난 6월 30일 춘천한마음교회에서 열린 ‘제4회 부활복음전국목회자세미나(이하 목회자세미나)’ 강사로 선 자리에서다.

   
▲ 박형용 박사 ⓒ춘천한마음교회

1980년대 박윤선, 신복윤, 윤영탁, 김명혁 목사와 함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산파 역할을 한 신약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박형용 박사는 목회자세미나에서 먼저 “제가 한마음교회 오는데 우여곡절이 있었다. 국민일보 광고가 나간 이후에 저에게 이런 저런 얘기들이 있었다.”고 밝혀 세미나 강사로 서기까지 적잖은 어려움이 있었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박형용 박사는 “그래서 김 목사님의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을 읽었다. 그리고 저하고 신학적인 견해가 다른 게 있어서 김 목사님께 전화를 하여 이런 저런 부분은 고치라고 했다. 그랬더니 김 목사님께서 이렇게 얘기하셨다.”면서 김성로 목사가 보내온 문건을 읽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성취하신 속죄를 확증하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사와 하늘성소의 제사가 따로따로가 아니라 한 제사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고 부활하심으로 구속의 완성을 이루었다고 믿습니다. 본인의 저서,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 187쪽, 26~27쪽 참조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의 있는 성막이 아닌 하늘나라 참 성막에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하셔야 하기 때문이다’는 표현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차후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드린 제사가 예수님의 영원한 제사라고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문건을 읽은 후 박형용 박사는 “이렇게 분명하게 부활에 대해, 죽음과의 관계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면서 “그래서 그 뒤로 수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전화를 하고 메시지를 보내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김 목사님께서 이렇게 쓰신 것을 인격적으로 믿기 때문에, 또 앞으로 바르게 가르칠 것을 믿기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 섰다.”고 자신의 소신을 피력한 후 “이제 강의하죠.”하며 본격적인 강의에 들어갔다.

   
▲ 6월 30일 춘천한마음교회에서 ‘제4회 부활복음전국목회자세미나’가 열렸다. ⓒ춘천한마음교회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시작한 박형용 박사는 서두에서 “김 목사님이 저와 처음 만나서 하시는 말씀이 예수님의 부활을 강조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제가 그랬다. 너무너무 잘하는 일이라고.”

이어서 박형용 박사는 “한국교회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얘기할 때 죽음은 속죄, 구속이라는 용어로 쓴다.”면서 “그러나 죽음에 대해선 많이 강조하는데 부활에 대해선 강조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후 “그런데 김 목사님께서 부활을 강조한다고 하는데 너무 너무 좋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형용 박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한국교회의 경향과 마찬가지로 “일반 목회자들의 현상뿐만 아니라 서구교회의 신학자들의 연구경향에서도 그렇게 나타난다.”면서 “제가 찾아봤는데 유명한 조직신학자 찰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 구프린스턴신학교 조직신학교수)라는 분이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을 세 권 썼는데 2권에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그 효과에 대해서 128페이지를 기록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그리고 그 효과에 대해서는 4페이지. 128:4이다.”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W. 비키 쉐드라는 분이 ‘교의신학’(Domatic Theology) 책 2권에 보면 111페이지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강조를 했다. 그런데 그 뒤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 유명한 상대칼빈주의 학자 중 한 사람인 리월스라는 학자가 ‘성경적 교리’(Biblical Doctrine)라는 책에서 118페이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다뤘다. 그러나 부활에 대해서는 언급을 안했다. 같은 저자인 워필드(Benjamin B. Warfield, 1851-1921)라는 신학자가 ‘신학연구’라는 책에서 역시 36페이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부활은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루이스 벌콥(Louis Berkhof)은 그 현상을 죽음과 부활을 다루되 죽음을 많이 강조를 하고 부활은 조금 다루는 그런 식으로 마치 찰스 핫지처럼 했다.”고 소개한 박형용 박사는 “그래서 장월이라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였던 분이 ‘죽음을 강조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부활도 강조해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지적했다.”면서 “무슨 얘기냐 하면 학자들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이 강조했는데 부활은 별로 강조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고 분석한 결과를 소개했다.

그 이유에 대해 박형용 박사는 “왜냐하면 부활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면서 “부활, 이것이 진짜 있을 수 있을까. 과거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해서 어떻게 하든지 합리적으로 해석하려고 예수님의 부활을 그렇게 연구했다. 복음서를 연구하면서 무슨 얘기를 하냐면 제자들이 속은 거다. 사실은 예수님이 부활 안했는데 제자들이 속아서 여기 잘못 기록해 놓았다. 그렇게 제자들한테 책임을 돌리는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학자들,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더 나아가서 예수님에게 책임을 돌리는, 어떻게 돌리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양 옆에 강도는 죽은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뼈를 부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죽은 줄로 알고 그냥 창자국이라든지 있지만 뼈를 부수지 않았다. 그냥 부자의 묘에 집어넣었다. 잘못된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예수님이 시체에 바르는 향기, 그리고 돌무덤이 시원하지 않겠느냐. 시원함 이런 것 때문에 깨어나 가지고, 십자가에서 안죽은거다. 깨어나 가지고 동산지기 옷으로 갈아입고 그래서 마리아가 만나서 동산지기인줄 알았다. 그리고 아무리 40일 동안 회복하려고 해도 도저히 회복할 수 없으니까 구름이 많이 낀 산으로 올라가서 제자들에게 ‘애들아 나는 승천할테니까 너희들은 열심히 복음전해라’ 그리고 갔는데 그것도 모르고 제자들이 여기에 이렇게 복음서에 썼다는 거다. 믿기가 힘드는가. 그렇게 합리적으로 인간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묘사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고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박형용 박사는 “우리도 부활이 잘 믿겨지지 않는다. 2천 년 전에 예수님의 부활은 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서 성경이 말하니까 믿긴 믿는데 우리 주변에 죽은 사람이 하나도 살아난 사람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믿기가 어렵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를 받은 고린도교회도 예수님의 부활은 믿었는데 성도들의 부활은 믿지를 못했다. 우리도 비슷한 경우다.”라고 진단했다.

박형용 박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 같은데 우리 주위의 사람이 살아난 사람이 없으니. 그래서 바울사도가 그런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아주 심도있게 예수님의 부활을 고전 15장에서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부활체를 믿는 것까지 설명을 해주었다.”면서 “그래서 이 부분을 다른 성경구절과 함께 고전 15장을 전체적으로 보면서 부활에 대한 강의를 하려고 한다.”고 언급한 후 본격적으로 고린도전서 15장 강의를 시작했다.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와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 등에서 총장을 역임한 바 있는 박형용 박사의 이날 강의는 고린도전서 15장을 중심으로 부활체에 대한 내용으로 목회자세미나에 참석한 850명의 목회자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목회자세미나가 끝난 후 주강사인 김성로 목사는 <교회와신앙>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부활에 대한 메시지로 인해 일부에서 시시비비가 있음을 모르지 않다.”면서 “그러나 박형용 박사님께서 저의 부족함을 일깨워 시시비비를 바로 잡아 주셨을 뿐만 아니라 목회자 세미나 강사로 오셔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여러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분석하여 부활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지적해 주셔서 큰 힘을 얻었다.”고 소감을 피력했다.

목회자세미나에 참석한 유중한 목사(생명샘교회)는 “박형용 박사님의 강의를 통해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그동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선 강조했지만 부활에 대해선 별로 강조하지 않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면서 “유명한 신학자들 대부분이 예수님의 죽음을 강조했지만 부활에 대해선 강조하지 않은 영향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한 뒤 “그렇기 때문에 춘천한마음교회에서 불고 있는 부활복음의 바람은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소중한 은혜가 아니겠는가 싶다. 춘천한마음교회 성도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부활의 실제적 역사가 저희 교회는 물론이요 한국교회와 전 세계교회로 확산되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한국교회가 그동안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선 많이 강조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선 별로 강조하지 않았다는 박형용 박사의 지적에 대해 한국교회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무엇이라고 답변할까. 왜 수많은 목회자들이 춘천한마음교회를 주목하는 것일까. 박형용 박사와 김성로 목사가 목회자세미나를 통해 그 이유를 선명하게 제시했다.

 

 

출처: 교회와신앙/엄무한 목사

교과서가 미쳤다 - 교과서, 왜 이렇게 망가졌나?

 

교과서도 주물럭거리는 국가인권위원회..

‘인권 교과서’ 집필기준 세우고 장관에게 정책권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현행 교과서들이 동성애와 동성결혼, 이슬람 문화를 옹호하는 내용과 사진, 삽화들로 가득차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바로 ‘국가인권위원회법’ 때문이다.

 

관련 글 1. 교과서가 미쳤다 - ‘일부다처제(이슬람)’ 옹호하는 교과서

관련 글 2. 교과서가 미쳤다 - '동성애·동성결혼' 옹호하는 교과서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는 국가인권위원회법(이하 ‘인권위법’)에 따라 교과서 집필기준을 제시하고, 초·중·고교 교과서에 실린 내용과 삽화, 사진, 참고자료들이 인권기준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판단 및 심사한다.

 

또한 이 결과를 바탕으로 매년 교육과학기술부장관에게 ‘인권기준에 부합하는 교과서 마련을 위한 정책 권고’를 내린다.

 

뿐만 아니라 국·검정교과서의 심의 및 심사, 감수 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한마디로 인권위는 교과서의 탄생 과정부터 깊이 개입해 교과서를 자기 마음대로 주물럭 댈 수 있다.

 

인권위법 제19조와 제25조는 인권에 관한 법령과 제도, 정책 등에 대한 조사 연구와 권고, 의견표명 등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인권위에 부여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인권위는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초중고등학교 교사 및 학생으로 구성된 ‘교과서 모니터단’을 운영했으며,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에는 인권기준에 부합하는 교과서 마련을 위한 정책 권고를 내렸다.

 

2012년에는 '인권친화적 교과서' 집필을 위한 일종의 마스터플랜인 '인권친화적 학교문화 조성을 위한 종합정책권고'를 내렸다.

 

인권위는 이상의 정책 권고들에서 ‘성, 다문화, 노인, 장애인, 소수자 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없는 집필과 국정 및 검인정 교과서의 심사항목에 인권기준을 포함시킬 것, 교과서 집필진 및 출판진을 대상으로 인권 교육을 할 것'을 제시했다.

 

또한 초중고등 교과서 내용 중 수정이나 삭제, 보안이 필요한 내용들을 일일이 지적하고 이를 개선할 것을 장관에게 직접 권고했다. 이때 인권위의 교과서 심사 기준이 되는 것은 인권위법 제2조 3항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이 조항은 ‘성별, 종교, 장애, 가족 형태 또는 가족 상황, 성적지향’ 등을 차별금지 사유로 규정하고 있다. 인권위는 교과서에 실린 삽화, 사진, 참고자료 등을 대상으로 ‘성·인종·국가·가정형태·사회적 신분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 또는 왜곡된 가치 체계를 갖게 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심사했다.

 

그리고 교육과학기술부장관에게 문제가 되는 교과서 내용을 확인하여 삭제하거나 수정 또는 개선할 것을 권고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인권위는 ‘향후 집필되는 교과서에 이와 같은 오류가 재발되지 않도록 교과서 집필시 인권위원회의 <인권 친화적 교과서 집필기준>을 준수하도록 교육과학기술부장관에게 '권고'를 내렸다.

 

 

또한 인권위는 교육과학기술부장관에게 내린 권고사항에서 ’인권적 관점과 기준에서 교과서 내용에 대한 심도 깊은 심의 또는 심사가 이루어지도록 국·검정 교과서의 심의·심사위원 선정 시 최소한 1인 이상의 인권전문가를 포함시킬 것‘과 '국정교과서는 개발단계에서, 검정교과서는 심의단계에서 인권위와의 기관협의를 통해 전문기관 감수과정을 거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때 주지해야 할 사실은 인권위가 교육과학기술부장관에게 내리는 ‘정책 권고’가 사실상 ‘이행명령’에 가깝다는 것이다.

 

인권위의 권고를 받은 해당 기관의 장은 인권위법에 따라 90일 이내에 권고 사항에 대한 이행계획을 인권위원회에 통지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위의 과정을 거쳐 현행 검인정 교과서에 동성애나 동성결혼, 이슬람 문화 등을 옹호하는 내용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출처: 뉴스윈코리아 (http://www.newswinkorea.com/news/article.html?no=578)

로마 교황청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외로운 투쟁에 나섰다. 교황청 내부의 뿌리 깊은 비리를 들춰내려 하자 반대파 추기경들과 고위 관리들이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교황이 파악한 비리의 핵심은 복자(福者)나 성인(聖人) 추존 시 거래되는 엄청난 돈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 교황청 고위 관리들 사이에 암암리에 퍼져 있는 비리의 실체는 세상에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서유럽 언론 보도에 따르면 프란치스코 교황 이전의 역대 교황 어느 누구도 부패 규모를 파헤치려 들지 않았다. 폭로한 사람도 없었기에 갖가지 유형의 스캔들은 그간 묻혀 왔다. 그러나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집사였던 파올로 가브리엘에 의해 하나둘 폭로되기 시작했다. 2012년 교황청 기밀문서가 처음 유출됐고, 이 사건으로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직에서 사임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같은 사실을 이탈리아 현지 언론이 세상에 알렸고, 교황청은 파올로 가브리엘 집사를 교회법에 따라 기소하기에 이르렀다. 

교황청 내부의 뿌리 깊은 비리를 들춰내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노력이 반대파들의 반발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방 언론들은 “비리를 밝혀내려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암살 위협 등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AP연합뉴스

교황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성인을 추존하면서 오가는 헌금의 행방이 문제가 됐다. 통상 성인 1인을 추존하는 데 75만유로(약 10억원)가량의 비용이 소요된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서류가 교황청에 남아있지 않았다.

실제로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이었던 30여 년 동안 교황청은 1338명의 복자와 482명의 성인을 추존했다. 단순 계산해도 조 단위의 엄청난 돈이 교황청에 유입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 인해 교황청은 ‘돈 많은 이들을 성인으로 찍어내는 공장’이라는 세간의 눈총을 받아왔다. 2014년엔 관련 은행계좌가 기록된 비밀 서류가 교황청 금고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교황청 소유 부동산도 어떤 기준으로 임대되고 기부되는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교황청 소속 사업 기구인 바티칸은행이 마피아의 돈세탁에 연루됐다는 뉴스도 나왔다. 전 세계에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으는 ‘베드로 성금’의 상당 부분이 교황청의 적자 해소에 쓰인다는 소문도 있다.

교황청 내부 성범죄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제가 미성년자들을 성폭행한 사건은 수도 없이 많다. 바티칸 고위 관리와 줄을 댄 ‘동성애 로비단체’는 공공연히 활개를 치고 있다. 교황청 고위 성직자에게 맞춤형 성매매를 알선하고 그 대가로 안정적인 일자리와 알선료를 받고 있다는 것. 교황청은 이를 폭로한 이탈리아 언론인 잔루이지 누치(Gianluigi Nuzzi)와 에밀리아노 피티팔디(Emiliano Fittipaldi)에 대해 ‘정보 및 문서 유출’ 혐의로 기소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이같은 비리에 단호하게 대처하고 있다. 교황은 비밀리에 심복 관리들로 직속 감사단을 구성해 부패 고리 파악에 나섰다. 특별 기관을 만들고 기득권 세력의 은행 계좌를 동결시켰다. 특히 시복·시성 관련 돈줄을 차단하기 위해 ‘바티칸 최초’로 외부 회계감사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교황의 일련의 개혁 조치에 대한 기득권 세력의 반발도 시작됐다. 현재 교황은 암살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과 프리메이슨(비밀조직)으로부터 수차례 암살 협박을 받고 있다. 일부 반대파 추기경들은 교황을 비난하고 있다.

서방 언론들은 개혁에 나선 교황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언론들은 “ 프란치스코 교황의 도전에 바티칸의 미래, 나아가 가톨릭 교회 전체의 미래가 달려있다”면서 교황의 부패와의 전쟁을 주시하고 있다. 또 “개혁파 교황이 조만간 이들을 들춰내 단죄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


"내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외쳤던 어떤 사람의 고백은 진정 그의 삶 속에서 뼈저리게 겪은 '자아'의 죽음을 향한 절박한 토로이며 권면임을 볼 수 있습니다.


정녕 내가 내안에 주인되지 않아야만 내 '의'가 사라진 그 곳에, 주의 성령께서 사시고 역사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땅에 수많은 기적과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진 그 일들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서둘러 장소를 옮겨가시며 영광의 찬사를 아끼지 않으려는 이들의 목전에서 말씀하십니다.


"오직 선 하신 분은 단 한 분이시다 네가 어찌하여 나로 선하다 하느냐 오직 선하신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가복음 10:17)


그 당시 거룩하신 주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에 대하여 제자 중 한 사람이 피력하기를 "그 행하신 것을 다 기록하자면 바다를 먹물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모자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가 이 정도임에도, 당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반면 우리는 우리가 한 일들에 대해 어떠한지요!

실로 모든 것이 무지랭이 같은 사람들, 곧 부족하고 미련한 것들을 세우셔서 주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하시는 일임에도, 마치 내가 잘나서 한 것인양 공로심에 사로잡혀 나를 세우고 나를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저도 그와 같은 사악한 일을 했었고, 지금도 내 속에 은밀히 숨어 있는 그 모든 것이 다 드러나지 않았을지나 아직도 내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저 자신을 타이르며 이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 간증을 통하여 성도님들 가정에 주님이 거룩히 구별하신 홈스쿨이 정착하고, 나그네 같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많은 분들이 자신의 재산과 사랑했던 많은 것들을 내려놓고 주께 전혀 애쓰게 되시리라."


그러나 그 속에 움크리고 있었던 '나를 알아주길 바라고 나를 높여주길 원하는 사탄의 궤계'가 숨어있었음을 저는 애써 부인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 '의'이며, 그것이 바로 사탄의 '의'이며, 결단코 그것으로는 천국에 들어갈 합당한 거룩함을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22장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과거의 포악했던 자신이 어떻게 유대인들을 잡아 옥에 넘기고 죽이기까지 하였는지, 그리고 자신은 율법에 정통한 자이며 대도시 길리기아 다소 출신이며, 이렇게 자기를 소개하면서 어떻게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회심 과정과 치부가 드러나니 이미 지나간 일임에도 사탄의 권을 받아먹은 시기와 질투 비방으로 얼룩진 청중들은 미쳐 날뛰며 말하기를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하자 살려둘 자가 아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2:1~)


진정 그 과정 속에 주 하나님께서 우리로 깨닫게 하시려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에게 알려주신 한 가지는 바로 "너의 너 된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니,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포하거나 드러내지 말고 네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한 충만함으로 자신을 채워 그 기름이 닳지 않도록 삶 속에서 감사로 겸손히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피흘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한 일에 대하여 보상받기를 거부하시고 그 자리를 떠나시며 '너의 병 나은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셨는데, 어찌 우리는 나와 내 지경의 사람들에게 인정과 답례와 보답을 받길 원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까! 진정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까요?


예루살렘에 모여 오순절의 기적을 경험한 사도들과 수많은 제자들이 급기야 도시와 마을들에 행한 일들로 인하여 존경과 칭찬을 듣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그 후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대 변방에 흥왕케 된 당신의 교회들에게 핍박을 허락하시고 이방과 세계로 흩으신 역사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핍박을 받으면서도, 팔레스틴을 지나 소아시아와 마케도냐까지, 그리고 세계로 복음이 급속히 퍼져나가도록 하나님은 역사해 주셨습니다.)


"너희에게 오는 영광을 모두 나 하나님에게 돌리고 너희는 그 영광을 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업의 번영이요, 그분의 '의' 즉 거룩하신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내 사업이, 내 교회가, 내 뜻이 잘 진행되고 있다고 믿어질 때, 자신을 면밀히 살피고 또 돌아보아 "내가 진정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고, 천국에서 받을 상을 이미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지요!


​스스로 말하길 "내가 주님의 일에 어느 정도 충성되고 이렇게 큰 주님의 기업을 이끌어가니 이 정도면 주님께서도 내게 오는 이런 유익들은 허락하실거야..."라고 생각하시는 분 이 있다면 더욱 더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거룩은 결코 '내가'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거룩을 이루게 하심의 목적은, 내 안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모든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 속에 있는 사탄의 화전을 소멸하시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주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하나님께 겸비히 무익한 종으로써 경배 드리는 것... 바로 이것입니다.    ​


주께서 전하라 하신 그것, 그 범위를 벗어나 치우치지 않으며, 주께서 우리를 통하여 뿌리신 씨의 돌보심과 열매를 맺으심의 과정을 기쁨으로 지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일하심을 통해 그렇게 행하여 가시는 주님을 기대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제 저의 범죄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사하여 주소서! 부디 기억치 마시옵소서! 저와 우리의 회개로, 나와 내 지경과 세계가 주께로 돌이키길 원하오니 우리의 범과를 도말해 주시고 우리로 다시 새 사람의 모습을 회복한 그대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출처: 예수님을 따르는 아가페 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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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며 배운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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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것. 

인생은 무엇을
우리의 매력이라는 것은
15분을 넘지 못하고 그다음은
무엇을 알고 있느냐가 문제임도 배웠고
또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이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이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 자신을 비교하기 보다는
내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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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나는 배웠다.
인생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무엇이 아무리 얇게 배어난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웠고
어느 한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의 만남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우는 자들이 진정한 영웅이며
사랑을 가슴속에 넘치게 담고 있으면서도
이를 나타낼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다는 것도 나는 배웠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진정한 우정은 끊임없이 두터워진다는 것을 배웠고,
그리고 사랑도 이와 같다는 것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내 모든 것을 다해 다른 이를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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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는 배웠다.
좋은 친구가 때때로 나를 아프게 한다 해도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때론 내가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 해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해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는
오로지 나 자신의 책임인 것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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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나는 배웠다.
우리 둘이 서로 다툰다 해서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밖으로 드러나는 행위보다 인간 자신이 먼저임을

두 사람이 한 가지 사물을 보더라도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도 

그리고 앞과 뒤를 계산하지 않고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데서 앞선다는 것을...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에 의해
내 인생의 진로가 바뀔 수 있다는 것

이제는 더 이상
친구를 도울 힘이 없다고 생각할 때도
친구가 울면서 내게 매달린다면
여전히 그를 도울 힘이 내게 남아 있음을 배웠고

글을 쓰는 일이 대화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아픔을 덜어 준다는 것

내가 너무 아끼는 사람이 먼저
이 세상을 빨리 떠난다는 것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는 것과
나의 믿는바 입장을 분명히 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일은 엄격히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

또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의
모두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 오마르 워싱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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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천지와 이만희의 교리 비판’을 집필하여 <교회와신앙>에 10회에 걸쳐 기고했던 캐나다록키침례교회 담임이자 교회부흥성장연구원장인 김홍기 목사의 ‘지방교회(위트니스 리) 교리 비판’을 연재한다. 정당한 반론이 있다면 김홍기 목사의 글이 연재 형식인 만큼 10회분 단위가 게재된 후에 수용할 방침이다. 만일 반론이 편집상 연재 형태를 띠어야 할 정도의 분량(A4 용지 10쪽 이상)일 경우에는 <교회와신앙> 대표메일(webmaster@amennews.com)을 통한 사전 협의가 필수이다. 김홍기 목사는 최근 미국 <크리스찬 투데이>(christiantoday.us)를 통해 지방교회 측과 지상토론을 한 바 있다. / 편집자 주 ]


김홍기 목사 / 캐나다록키침례교회 담임, 교회부흥성장연구원장

   
▲ 김홍기 목사

‘지방교회’는 한국보다 미국에서 훨씬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다. 다음의 인용문은 이 사실을 웅변해 준다.

“자신들을 ‘이단’이라 칭하는 개인들과 단체들을 상대로 고소 협박을 하는 (실제로 고소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지방교회(LC)는 자신들과 관련하여 ‘이단’이라는 단어를 철회하도록 많은 단체들을 강요하는 일에 성공적이었다. ... 가장 최근에 그들은 <이단과 새 종교들에 관한 백과사전>에 있는 언급을 문제 삼아 존 앵커버그와 존 앨던 및 그들의 출판사(Harvest House)를 상대로 1억 3천 6백만 불에 이르는 피해 보상금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만약 이 소송이 성공했더라면 두 기관 모두 파산했을 것이다. 페멘트는 다음과 같이 바르게 지적했다. ‘몰몬교와 여호와의 증인이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거나 소송의 협박을 한 횟수를 모두 합해도 [지방교회가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을 상대로 소송을 일으킨 것처럼] 그렇게 많은 소송을 제기했을지 의문이다.”(Norm Geisler and Ron Rhodes, A Response to the Christian Research Journal’s Recent Defense of the “Local Church” Movement, p.1)

지방교회가 미국의 교계 안에서 유명해진 것은 이와 같은 공격적인 소송 및 소송 협박 외에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지방교회의 제 2인자인 위트니스 리의 사역의 본거지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위트니스 리(1905-1997)는 지방교회의 창시자인 워치만 니(1903-1972)의 수제자였는데,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워치만 니와 지방교회에 의해 대만으로 파송되어(1949) 사역을 하다가, 1962년 미국의 로스앤젤레스로 사역지를 옮겨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사역을 했다.

또 다른 이유는 위트니스 리가 타고난 논쟁가(controversialist)라는 사실이다. 그의 말과 사상은 종종 자극적이고 극단적이며 난폭하다. 예를 들어 위트니스 리의 말을 하나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님의 말씀으로 어느 정도 회복이 된 개혁교회는 ... 다양한 이름으로 자신을 교파화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정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일탈하는 것은 배교이다. 주님의 이름 외에 그 어떤 다른 이름으로 교회를 교파로 나누는 것은 영적 음행이다.”(A Defense of the Gospel: Responses to an Open letter from “Christian Scholars and Ministry Leaders” (2), p.98)

이 말에 나타난 교파에 대한 부정 일변도의 생각은 분명히 균형을 잃은 극단적인 것이고, 교파를 ‘배교’나 ‘영적 음행’과 같은 가장 심각한 죄악으로 정죄하는 표현 또한 자극적이고 난폭하다.

위트니스 리는 또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의 생각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한다. 이에 관한 위트니스 리의 말을 인용해 보자.

“내가 나의 사역에서 기독교에 관하여 담대히 말하지 않는다면 나는 평화를 가질 수 없다. 그리고 기름부음을 잃어버린다.”(Witness Lee, Life-Study of Revelation, p.588)

논쟁을 하지 않으면 마음의 평화를 잃고 기름부음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심각한 동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동기가 어떠하든지 간에 위트니스 리는 자신의 생각을 공격적으로 전하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논쟁가이다. 그리고 위트니스 리의 이러한 논쟁가로서의 특징이 지방교회를 논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어 교계의 주목을 받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위트니스 리는 이미 고인이 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위트니스 리의 이러한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에, 위트니스 리는 제자들의 삶을 통해 지금도 끊임없이 논쟁을 유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지방교회가 미국의 교계에서 유명해지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를 꼽는다면 그것은 지방교회의 독특하고 논쟁적이며 이단적인 교리들이 될 것이다. 이러한 교리들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분류된다.

첫째,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교리(양태론). 둘째, 인간의 본성에 관한 교리(신인합일론). 셋째, 복음주의적인 교회들과 교파들의 합법성에 관한 교리(배타적 교회론).

여기서 필자는 세 가지 교리들 중 첫 번째인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교리에 집중할 것이다.

2007년, 지방교회의 지속되는 소송과 소송 위협 및 교리적 문제에 대처하여 미국을 비롯한 7개국의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70여 명의 지도자들이 지방교회에 공개 항의서를 보낸다. 공개 항의서의 서명자들은 이렇게 이 문서 작성의 취지를 밝힌다.

“고 위트니스 리에 의해 설립된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스와 ‘지방교회’(주의 회복으로도 알려짐)는 수십 년간 유명한 그리스도인 단체들 및 지도자들과 법적, 신학적 논쟁에 말려들어 왔다. 이러한 소송과 갈등의 역사를 고려하여, 우리는 이러한 공개적인 호소를 하기 위해 서명을 했다. 위트니스 리의 다음과 같은 진술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본질적인 가르침들을 부정하거나 타협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리빙 스트림 미니스트리스와 ‘지방교회’가 이러한 선언들과 이와 유사한 선언들을 부정하고 출판을 중단할 것을 정중하게 요청한다.”(An Open letter To the Leadership of Living Stream Ministry and the "Local Churches")

이 공개항의서는4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으며, 각각의 항목에 따라 문제가 되는 위트니스 리의 몇몇 주장들을 나열하고 있다. 그 중 ‘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위트니스 리의 주장을 기술하고 있다.

“삼위일체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대단히 부적절하며 거의 삼신론과 같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합쳐졌을 때(joined with us), 하나님은 뒤에 남겨지신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도 보좌에 남아 계시지 않았다. 이것이 기독교가 주는 인상이다. 그들은 아버지가 한 위이시며 다른 위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셨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이신 성령을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시고 성령이 신자들 속에 오신 것이다. 신자들이 기도할 때, 그들은 아들의 이름으로 아버지 앞에 고개 숙여 기도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separate Persons)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An open letter에서 인용됨)

여기 위트니스 리의 진술에서 언급한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자들’은 사실상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준(準)삼신론자들’로 비난하는 위와 같은 주장이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진술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할 때, 나는 주님의 마음을 상하게 만든다.”(Witness Lee, Life-Study of Revelation, p.82-3)

따라서 위트니스 리의 도발적인 주장들은 철저하게 계산된 정통교리에 대한 공격인 것이며,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에 대한 그의 계획된 공격은 자신의 신학적 확신에 기초한 지극히 의도적인 것이다. 위트니스 리와 그의 제자들은 그래서 자신들의 교리적 관점에 의해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신론 이단자들’로 정죄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위트니스 리는 “전통적인 생각” 다시 말하면 ‘정통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로 가르치는 것”인데, 이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그 구체적인 예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들은 아버지가 한 위이시며 다른 위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셨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이신 성령을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시고 성령이 신자들 속에 오신 것이다.”(Witness Lee, Life Messages, p.164)

위트니스 리의 이러한 비판은 그가 창안한 ‘삼일 하나님’이라는 개념에서 비롯된다. 그는 이러한 개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당신은 삼일 하나님이 당신 안에 계신 것을 알고 있는가? 신약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우리 안에 계신다(엡 4:6; 골 1:27; 요 14:17). 비록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경험에서 우리 안에 그저 한 분(just One)이 계심을 인식한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이 한 분(One)이 삼일 하나님이시다.”(Witness Lee, God, Christ, and the Spirit (1), p.32)

위트니스 리는 ‘삼일 하나님’ 개념을 또 이렇게 해석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삼(the Three of the Godhead)의 공존(coexistence)과 상호내재(coinherence)를 믿는다. 즉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모두 본질적으로(essentially) 동시에(at the same time) 같은 조건들 아래서(under the same conditions) 존재하심을 믿는다.”(Ibid., p.30)

그러면 공존과 상호내재는 어떻게다른가? 위트니스 리의 말은 이러하다.

“공존과 상호내재의 차이는 무엇인가? 공존은 함께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상호내재는 서로 안에 존재하는 것이고, 서로 안에 거주하는 것이다."(Ibid., p. 240)

결국 위트니스 리는 ‘삼일 하나님’의 개념, 달리 말하면 그 자신의 독특한 ‘상호내재론’에 근거하여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준(準)삼신론자’로 규정한 것이다.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이 “아버지가 한 위이시며 다른 위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셨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이신 성령을 보내셨다. ...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시고 성령이 신자들 속에 오신 것이다.”(Witness Lee, Life Messages, p.164)라고 말하는 것은, 위트니스 리의 ‘상호내재론’으로 볼 때, ‘준(準)삼신론’에 속한다.

게다가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론’에 의하면, 주후 4세기 이후 정통교리로 확정되어 현재까지 천 칠백 년 이상 정통교회가 고수해 온 ‘정통 삼위일체론’은 참된 정통 교리가 될 수 없다. 지방교회의 이러한 독선적인 주장은 다음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통상적으로 인정되어 온 정통 삼위일체는 ‘하나님은 영원히 구별되는 삼위로 계시며, 동일 본질을 공유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정통 삼위일체론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따라서 이 주제에 대한 쟁점은 충분조건에 해당되는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분리 불가’를 인정하는지 여부에 있다.”(김바울, 지방교회, 병아리와 계란껍질).

또한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론’에 의하면 정통신학의 보루인 노먼 가이슬러에 의해 정확하게 대변된 정통 삼위일체론은 “사람이 만든 신학(man-made theology)”(Brothers, Hear Our Defense: Concerning the Divine Trinity, p.79)이며, 신적인 삼위일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공식(overly simplistic formulation of the Divine Trinity)”(Ibid., p.85)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주장을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들에게 정통 삼위일체론은 ‘준(準)삼신론’도 아니고 “정통 삼위일체론의 필요조건”도 아니며, “사람이 만든 신학”이나 “신적인 삼위일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공식”도 아니다. 지방교회가 사용하는 이런 표현들은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격렬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사용하는 희석된 용어들일 뿐이다. 실제로 지방교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것이다.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은 삼신론자들이다!’ ‘정통 삼위일체론은 삼신론이다!’

이러한 분석의 객관적 타당성은 지방교회가 써놓은 삼위일체론에 관한 글을 보면 쉽게 입증된다. 지방교회의 글을 보면 “거의 삼신론과 같다”는 주장이 ‘다신론이다’ 혹은 ‘삼신론이다’라는 주장으로 확정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인규 님의 지방교회 양태론 비판의 실상’이라는 글에서 지방교회는 이인규 권사를 “분리된 세 위격들을 말하는 다신론”을 주장하고 있다고 정죄한다. 즉 지방교회에 의하면 ‘분리된 세 위격들’은 ‘다신론’ 혹은 ‘삼신론’인 것이다.

이것은 위트니스 리가 ‘분리된 위격들(separate Persons)’은 “거의 삼신론과 같다”고 한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그러나 위트니스 리와 지방교회의 교리는 결코 다르지 않다. 따라서 위트니스 리가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로 가르치는 것”은 “거의 삼신론과 같다”고 비판했을 때, 실제로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신론 이단자들’로 정죄를 한 것이다!

위트니스 리는 그의 ‘상호내재론’에 기초하여 “신약에 의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우리 안에 계신다(엡 4:6; 골 1:27; 요 14:17).”(Witness Lee, God, Christ, and the Spirit (1), p.32)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렇게 믿지 않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분리된 위격들(separate Persons)’을 주장하는 ‘준(準)삼신론,’ 실제로는 ‘삼신론자’로 정죄한다. 또한 지방교회는 삼신론자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분리 불가’를 인정하는지 여부”(김바울, 지방교회, 병아리와 계란껍질)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골 1:27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존 맥아더(John MacArthur Jr.) 목사는 지방교회의 기준으로 볼 때 영락없는 삼신론자인 것이다.

“신약은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해 모든 신자들 안에 영원히 거주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The New Testament is clear that Christ, by the Holy Spirit, takes up permanent residence in all believers (참조. 롬 8:9; 고전 6:19, 20; 엡 2:22). ... 신자들은 지금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내주하시는 그리스도(indwelling Christ)의 놀랄 만한 풍성함을 소유하고 있다(요 14:23; 롬 8:9-10; 갈 2:20; 엡 1:7, 17-18; 3:8-10, 16-19; 빌 4:19).”(John MacArthur, WORD search 7, CD-Rom).”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갈 2:20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내가 행한 것이나 나의 공로 때문에 그러한 신적인 생명을 소유하고 있으며 살아 계시고 강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내주하시는 너그러운 특권을 소유한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그 자신을 바치셨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Ibid.)

지방교회는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분리 불가’의 개념에 따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두 우리 안에 계신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정통 삼위일체론자인 존 맥아더는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해 모든 신자들 안에 계시며’ 모든 성도는 성령에 의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다고 주장한다. 달리 말하면 성도 안에 계시는 분은 제 삼위의 하나님이신 성령이시고, 성령과 본질상 동일하신 그리스도는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존 맥아더는 정통 삼위일체론자이다. 그래서 그는 롬 8:9을 주석하며 이렇게 강조한다.

“하나님이 한 본질이시나 삼위로 존재하신다는 교리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진리 중 하나이다. (The doctrine of God’s being one essence, yet existing in three persons, is one of the most certain truths in Scripture.)”(Ibid.).

그러나 지방교회의 독특한 ‘상호내재론’으로 보면, 존 맥아더의 삼위일체론은 “정통 삼위일체론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김바울, 지방교회, 병아리와 계란껍질) 더 나아가 존 맥아더가 주장하는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은 삼위의 분리(three separate persons), 즉 ‘삼신론’을 뜻한다. 따라서 지방교회가 볼 때는 정통 삼위일체론자이자 현존하는 최고의 강해설교가 중 한 사람인 존 맥아더는 ‘삼위의 분리’를 주장하는 분명한 ‘삼신론자’이다.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론’으로 보면 정통 삼위일체론자인 웨인 그루뎀 교수 역시 틀림없는 ‘삼신론자’이다. 그루뎀은 미국의 복음주의 신학의 대표적인 명문 중 하나인 트리니티신학대학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다년간 조직신학 교수로 봉직했던 탁월한 신학자이다.

그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구성하는 3가지 명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 하나님은 삼위이시다(God is three persons). 둘째, 각 위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다(Each person is fully God). 셋째,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There is one God).”(Wayne Grudem, Systematic Theology, p.231).

물론 지방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루뎀의 이 같은 삼위일체론은 “정통 삼위일체론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김바울, 지방 교회, 병아리와 계란껍질). 게다가 그루뎀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지방교회가 볼 때, 그루뎀을 삼신론자로 확정짓는다.

“양태론의 치명적인 결함은 성경의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는 삼위일체 안에서의 위격적인 관계들(personal relationships within the Trinity)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혹은 이것들은 단순히 환상이거나 실제가 아니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양태론은 예수님이 세(침)례 받으시던 장소에서 아버지는 하늘에서 말씀하시고 성령은 예수님 위에 비둘기처럼 내리심을 통하여 계시된 분리된 삼위(three separate persons)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Ibid., p.242).

위의 진술에서 지방교회는 “분리된 삼위(three separate persons)”라는 표현을 대하며 아마 눈이 크게 떠졌을 것이다. 지방교회는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분리 불가”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위트니스 리는 삼위의 다른 기능과 활동(경륜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을 묘사하는 “삼위일체에 관한 전통적인 설명은 대단히 부적절하며 거의 삼신론과 같다. ...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들(separate Persons)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방교회는 또한 “분리된 세 위격들을 말하는 다신론”이라는 표현을 통해 위트니스 리가 언급한 “분리된 위들(separate Persons)은 ‘준(準)삼신론’이 아닌 ‘삼신론’을 의미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위의 다른 기능과 활동을 설명하며 “분리된 삼위(three separate persons)”를 주장한 웨인 그루뎀 교수는, 지방교회가 볼 때, 분명한 삼신론자이다.

그런데 그루뎀이 “분리된 삼위(three separate persons)”를 언급했을 때 그는 삼위의 본질적 분리를 주장한 것인가? 그루뎀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준다.

“현대의 집단들 중에 삼신론을 지지하는 집단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된 위격을 인정하지만 분리되지 않는 존재(one undivided being)로서의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을 좀처럼 인식하지 않음으로, 어쩌면 오늘날의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무심코 삼위일체에 관한 삼신론적인 견해를 향하여 나가는 경향이 있는 지도 모른다.”(Ibid., p.248)

위의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루뎀은 결코 ‘삼신론자’일 수 없다. 그 이유는 그가 “분리되지 않는 존재(one undivided being)로서의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을 언급했을 때 그는 삼위의 ‘분리될 수 없는 본질적인 유일성’을 말했기 때문이다. 그루뎀은 양태론을 비판하는 중에 ‘분리된 삼위(three separate persons)’라는 표현을 통해 ‘구별된 삼위(three distinct persons)’를 강조한 것이다. 그루뎀과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은 ‘삼위의 구별’과 ‘삼위의 본질적 유일성’을 동시에 믿는다. 그러나 지방교회는 그루뎀과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신론자들’로 정죄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방교회의 독특한 ‘상호내재론’을 신봉하지 않는 사람들을 ‘삼신론자’로 정죄할 수밖에 없는 ‘이단적인 교리 체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지방교회의 독특한 ‘상호내재론’(각 위격이 다른 위격 안에 거주하신다는 이론)은 정통교회 안의 어떤 사람들이 신봉하는 ‘상호내재(coinherence, 페리코레시스)론’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달라스신학대학원의 조직신학 교수인 스코트 호렐은 ‘상호내재론’을 믿는 정통 신학자들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각 위는 어떤 의미에서, 각자의 충만한 위격을 감소시킴이 없이, 상호 내주하신다(That is, each member of the Godhead in some sense indwells the other, without diminishing the full personhood of each.).”(Scott Horrell, “The Self-Giving Triune God,” www.bible.org).

이처럼 ‘상호내재론’를 주장하는 정통 신학자들은 삼위의 구별을 주의 깊게 유지한다.

반면에 전혀 다른 개념의 ‘상호내재론’을 주장하는 지방교회는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분리 불가” (김바울, 지방교회, 병아리와 계란껍질.)라는 애매모호한 말로 자신들의 ‘상호내재론’을 설명한다. 그러나 지방교회의 주장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이 말은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삼위의 구별이 없어짐’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이 말은 ‘삼위의 상호내재를 통한 한 위격, 한 본질’을 뜻한다. 결국 지방교회의 ‘상호내재론’은 지방교회가 ‘일위일체론’, 즉 ‘양태론 이단 교리’를 표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위트니스 리는 지방교회의 양태론적인 개념을 이렇게 분명히 표현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 한 인격이다.”(Witness Lee, The Triune God to Be Life to the Tripartite Man, p.48).

그는 또 이렇게 표현한다.

“아들은 아버지이시고 주는 성령이시다.”(Witness Lee, Concerning the Triune God, p.18)

물론 이 신학적 명제에서 위트니스 리는 본질이 아닌 위격의 동일성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지방교회는 ‘일위일체론(양태론)’의 개념을 가지고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신론자’로 정죄한다.

지방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인격, 한 본질’로서 상호 내재하시기 때문에 ‘삼위의 다른 활동 혹은 삼위의 다른 위치에 대한 설명’은 곧 ‘분리된 위격’을 가리키는 것이며, 따라서 삼신론이 되는 것이다. 이미 인용했던 다음과 같은 위트니스 리의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들은 아버지가 한 위이시며 다른 위이신 아들을 보내사 구속을 성취하셨고, 그 후에 아들이 또 다른 위이신 성령을 보내셨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생각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은 보좌에 남아 계시고 성령이 신자들 속에 오신 것이다.”(Witness Lee, Life Messages, p. 164)

위트니스 리는 이러한 개념을 “거의 삼신론과 같다. ... 하나님을 이렇게 분리된 위격들(separate Persons)로 가르치는 것은 성경의 계시가 아니다”라고 비판한다(“분리된 세 위격들”은 이후 지방교회에 의해 ‘삼신론’으로 확정됨). 위트니스 리의 이러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그의 진술을 참고하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그 셋은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 그 셋은 항상 동시존재하며 상호내재한다. 한 분이 이곳에 있을 때에 셋 모두가 이곳에 있다. 분리됨이 없다.”(위트니스 리, 신약의 결론-하나님, p.288)

그의 진술을 하나 더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전부, 삼일 하나님이 육체가 되셨다."(Witness Lee, God's New Testament Economy, p.230)

이 같은 진술은, 노먼 가이슬러의 말을 빌리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위격이신 아들 만이 성육신 하셨다는 삼위일체에 관한 정통 교리들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일이다”(Geisler, A Response, p.3).

지방교회는 ‘한 위격, 한 본질의 하나님’(양태론)이 ‘상호내재’를 통해 동일한 공간에 존재하지 않을 때 이것을 ‘분리된 위격들(separate Persons)’이라고 규정하고, 이런 개념을 ‘삼신론’으로 정죄한다.

세상에 이런 일이! 영원하시고 무한하시며 편재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감히 제한된 공간에 가두어 버리다니!

반면에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은 ‘세 위격, 한 본질의 하나님’이 신적 본질 안에서 ‘시간과 공간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영원히, 어디에나) 상호내재’ 하심을 믿는다. 따라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이 땅에 오신 아들’ 및 ‘성도들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을 ‘분리된 위격들’로 여기지 않고, ‘동일한 신적 본질 안에서 구별된 위격이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영원히 또한 완전히 연합되어 계심’을 믿는다. 이런 맥락에서 로즈와 가이슬러는 “구별된 세 위격은 각각 동일한 신적 본질 안에서 상호내재 하신다.”(Geisler and Rhodes, A response, p.8)라는 말로 삼위의 ‘본질적 연합(essential unity)’을 설명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받으셨을 때에 “하나님은 그분의 편재(遍在, in His omnipresence) 안에서 함께 하셨다.”(Ibid., p.5)라고 주장한다. 물론 지방교회의 이단적 ‘상호내재론’으로 보면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인 가이슬러와 로즈 역시 틀림없는 ‘삼신론자들’이다.

삼신론은 ‘세 위격, 세 본질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이단 교리이다. 따라서 ‘세 위격, 한 본질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는 결코 삼신론자가 될 수 없다. 정통 삼위일체론자가 용어나 예화의 부주의한 사용으로 인하여 삼신론자로 오해를 받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가 ‘세 위격, 한 본질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동안에는 그를 ‘세 위격, 세 본질의 하나님’을 주장하는 삼신론자로 결코 정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절대로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엘리옷 밀러가 언급한 ‘나쁜 마녀 사냥’이라는 말은 부주의한 용어나 예화를 문제 삼아 삼신론자 꼬투리를 달아서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의 목에 올가미를 뒤집어씌우는 경우에 적용해야 마땅하다. 물론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은 그루뎀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구별된 위격을 인정하지만 분리되지 않는 존재(one undivided being)로서의 하나님의 유일성(unity)을 좀처럼 인식하지 않음으로, 어쩌면 오늘날의 수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무심코 삼위일체에 관한 삼신론적인 견해를 향하여 나가는 경향이 있는 지도 모른다.”(Ibid., p.248)는 고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세 위격, 한 본질의 하나님’을 신봉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을 삼신론자로 정죄하는 자들은 오직 한 부류의 사람들뿐이다. 그들은 곧 ‘한 위격, 한 본질의 하나님’의 개념을 주장하는 양태론자들이다. ‘현대판 양태론 운동의 진원지’인 지방교회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를 ‘삼신론 이단자’로 정죄하는 심히 그릇된 행위를 통해서 스스로 ‘양태론 이단’임을 세계만방에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도표 참조). 이런 맥락에서 정통 삼위일체론을 삼신론으로 정죄한 지방교회의 비판의 무게는 훅 불면 날아가는 솜털만도 못하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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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김홍기 목사 소개

미국 사우스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Southwest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철학박사(Ph.D.)
미국 탈봇신학대학원(Talbot School of Theology) 목회학 석사 및 목회학 박사(M.Div., D.Min.)
교회부흥성장연구원 원장
캐나다록키침례교회 담임목사

출처: 교회와 신앙

"진압작전 전 현지인 석방"…외국인만 타깃으로 삼았을 수도

(서울=연합뉴스) 심재훈 기자 = 1∼2일(현지시간)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의 외국공관 밀집지역 음식점에서 발생한 테러 당시 무장 괴한들이 이슬람 경전 쿠란의 경구를 모르는 인질들에게 따로 고문을 가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아직 배후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번 테러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벌인 것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될 수 있어 주목된다.

방글라데시 언론 '더 데일리 스타'는 이번 테러 사건의 한 생존자 증언을 인용해 쿠란 경구를 읊조린 인질들은 무사했지만 나머지 인질들은 고문을 당했다고 보도했다.

방글라 외교가 식당서 인질극 (EPA=연합뉴스)
방글라 외교가 식당서 인질극 (EPA=연합뉴스)

쿠란 암송이 이슬람 교도인지 여부를 확인해 생사를 갈라놓는 시험으로 악용됐다는 것이다.

이번 테러의 생존자인 하스낫 카림의 부친인 레자울 카림은 "무장 괴한들이 방글라데시인들에게는 거칠게 굴지 않았고 오히려 저녁 식사를 줬다"고 말했다.

그는 "이 괴한들은 인질 모두에게 쿠란을 읊조리라고 하면서 종교 성향을 체크했다"며 "한두 구절 정도 외운 사람들은 무사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고문당했다"고 덧붙였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테러범들이 현지인들을 해칠 의도가 없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장면을 보도했다.

하스낫 하림은 아내, 어린 두 딸과 테러가 벌어진 식당에서 딸의 생일잔치를 벌이다 갑작스러운 무장 괴한들의 침입으로 인질이 됐다가 경찰 진압작전으로 살아남았다.

경찰의 진압작전 직전에 이 식당에서 아들과 며느리, 두 손주가 빠져나왔다는 한 여성은 "괴한들은 경찰이 진입하기 전에 현지인들(방글라데시인들)을 모두 풀어줬다"고 증언했다.

무장 괴한들은 지난 1일 오후 9시께 다카의 외교공관 지역에 있는 '홀리 아티잔 베이커리' 식당에 총과 칼 등으로 무장한 채 난입해 종업원과 손님들을 인질로 잡고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방글라데시 군 당국은 이 인질로 잡힌 일본인과 이탈리아인 등 20명이 숨졌으며 사망자는 모두 외국인이라고 밝혔다.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 국가'(IS)는 이번 테러의 배후를 자처했으나 방글라데시 정부는 자국 내 IS의 활동을 일절 부인해왔다.

president21@yna.co.kr

환상적인 무지개 감상 하세요.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마음의 소리" 중에서

시간의 소중함

10년이란 세월이
얼마나 귀한지 알고 싶다면
직장에서 명퇴하신 50대 가장에게 물어보라

4년의 세월이
얼마나 귀할까 알고 싶다면
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에게 물어보라

1년 세월이
얼마나 귀중한 세월인지 알고 싶다면
방금 성적이 나빠서 유급을 당한 학생에게 물어보라

1달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들인지 알고 싶다면
1달 먼저 미숙아를 낳은 산모에게 가서 물어보라

일주일의
소중함을 알고 싶다면
주간 잡지 편집장에게 물어보라

1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싶다면
애인을 기다리는 총각에게 물어보라

1분의
소중함을 알고 싶다면
방금 기차를 막 놓친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라

1초의
소중함을 알고 싶다면 사고의 순간
간발의 차이로 살아난 생존자들에게 물어보라

마지막으로
 100분의 1초의 소중함을 알고 싶다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을 딴 선수에게 물어보라

  시간은
그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당신이 가진 지금 바로 이 순간이 가장 큰 보물입니다

- 놓치고 싶지 않은 나의 인생을 위한 7가지 지혜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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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쓰촨성 남서부에 위치한 량산 이족자치주 아투러얼 마을의 학생 15명은 2주에 한번 산 아래 기숙학교 등하교를 위해 800m 절벽을 오르내려야 한다. 올라가는데 2시간, 내려갈 때도 1시간 반이나 걸린다.



17개의 작은 나무 등걸 사다리를 연결해 만든 큰 사다리는 아투러얼 마을 72가구 주민이 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통로다. 일주일에 한번 호두와 산초를 들고 몇 ㎞ 떨어진 시장을 오갈 때도 이 사다리를 이용한다. 안전장치가 없어 사고도 많다.


최근 40대 남성 주민이 절벽에서 떨어져 죽기도 했다. 주민 천지구씨는 “사다리는 마을이 생긴 것만큼이나 오래됐다”면서 “아마 수백년을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씨는 “썩은 부분이 발견되면 새 걸로 교체하면서 계속 사용해 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을이 산꼭대기에 형성된 것은 전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예전에는 외부의 침범 걱정도 없고 비옥한 땅에 농사도 잘돼서 평화롭게 잘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마을 사람 모두가 하루 생계비가 1달러에도 못 미칠 정도로 가난에 허덕이고 있다고 차이나데일리는 전했다.


산 아래 학교는 수업료는 무료지만 기숙사비로 학기 당 300위안(약 5만4000원)을 내야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큰 돈이다. 마을 얼디장 촌장은 “우리의 주 수입원은 호두와 산초”라면서 “시장에 들고 가면 다들 우리가 되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낮은 가격에 팔수밖에 없다”고 야속해 했다. .....


국민일보

맹경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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