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학창 시절, 교정에서 애국가를 열창할 때면,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란 소절에서는 아주 신나하며 목청을 돋우어 힘차게 불렀던 기억이 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애국가에도 나온다는 것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이런 나를 바라보는 내 친구들은 종종 ‘하나님이 맞냐, 하느님이 맞냐’하고 물었다. 그럴 때면, 나는 주저함 없이 ‘하느님’이시다, 왜?”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 하늘에 계신 분이니까, 하느님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현대도 같은 질문으로 성도들 간, 혹은 목사님들 간에 서로 심각한 대립현상을 보이며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주요 논점으로 대두하고 있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그 문제를 두고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 잠시 고찰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하느님'의 사전적이나 일반적 의미:

과연 국어사전은 ‘하느님’과 ‘하나님’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 종교어로서 '하느님'은 '우주를 창조하고 주재한다고 믿어지는 초자연적인 절대자.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 됨. 종교에 따라 여러 가지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어 짐. 하늘. 황천'이라고 정의된다. 이를 살펴보면 종교에 따라 여러 가지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어 진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하느님’이란 모든 종교인이 사용하는 용어이며 '그리스도교에서 신봉하는 유일신. 천지(天地)의 창조주(創造主)이며 전지전능하고 영원한 존재로서, 우주 만물을 섭리로써 다스림, 천주(天主), 하느님'이라고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같은 사전에서 '하나님'이란 단어를 찾아보니 '하느님을 개신교(改新敎)에서 이르는 말'이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일반적인 천공신(天空神) 개념으로 볼 때 ‘하느님’은 우리말로는 하늘, 한자로는 천(天)의 존칭어인데, 광활하고도 높은 창공은 종교적 궁극자 및 최고원리의 상징으로서 인류 종교현상 속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종교표현이다. 종교학자들은 고대인들이 하늘이나 땅을 단순한 현상이나 물체로 예배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나타나는 신적인 힘을 보고 그 거룩함의 신성을 경외한 것임을 밝혀내었다. 가장 오래된 문자문화를 지닌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아누(Anu)신, 가나안 지방의 엘(El)신, 그리스의 제우스(Zeus)신들은 모두 천공신(天空神)으로서 다신(多神)들 중에서 그들이 아버지 혹은 천상회의의 임금으로서 권위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하느님’은 다신(多神)주의자들 개념으로서 절대주권자, 천주님으로 보면 무리가 없겠다.
 
구약에서의 하나님:

이 이름은 모세에게 4개의 히브리어 자음(YHWH)으로 계시되었다. 바벨론 유수(BC 6세기)가 끝난 뒤, 특히 BC 3세기부터 유대인들은 2가지 이유에서 '야훼'라는 이름을 더는 사용하지 않았다. 첫째, 유대교는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개종자들을 얻어 보편종교가 되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다른 모든 신에 대해 보편적인 주권을 갖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신'이라는 뜻을 지닌 일반적인 명사 '엘로힘'을 '야훼'라는 이름 대신 사용하게 되었다. 둘째, 야훼라는 이름은 너무 거룩하여 발언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회당 예배에서는 아도나이('나의 주')로 발음했는데, 〈구약성서〉 그리스어 번역본인 70인 역은 이 단어를 '키리오스'(주)로 번역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하나님이 지니는 이 고유한 이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 왔다. 많은 학자들은 '그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재케 한다'(Yahweh-Asher-Yahweh)는 것이 가장 정확한 뜻이라고 믿는다. 사무엘 상에서 하나님은 야훼 테바오트(Yahweh Teva-'ot), 즉 '그는 만군(萬軍)을 존재케 한다'는 뜻으로 알려지는데, 여기서 '만군'은 하늘의 왕국 또는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듯하다. 하나님의 이 고유한 이름은 모세 시대 이전부터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모세의 어머니 이름은 '요게벳'인데, 이것은 '야훼'라는 이름에 바탕을 둔 이름이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기독교는 왜 ‘하느님’ 대신 ‘하나님’이라 부르기를 더 선호하는가?

기독교는 공식적인 '하나님' 칭호에 대한 태도는 시대별로 사용한 성서기록에 따랐다. 우리들의 '하나님' 칭호에 대한 변천은 성서 번역사와도 연관되어 있다. 먼저 대체로 한글성서의 번역과 사용시기를 구별해 보면 개인역 시대(1882-1903), 공인역 시대(1904-36), 개역 시대(1937-51), 맞춤법 통일안에 따른 개정판 시대(1952-70), 신.구교공동번역 시대(1971-현재)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한글성서에서 '하나님'에 대한 칭호를 채택할 때 계속적으로 상관된 개념은 곧 '하늘'(heaven)과 '하나'(one)이다. 그리고 이들 개념의 복합, 지역적 방언, 한글맞춤법과 한국어 발음의 변천 등과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서 완벽하다. 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에서 '하나님'이란 명칭이 옳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은 '하나'를 의미하므로 유일(唯一)신을 의미하는 것이며, '크다'를 의미하는 '한'에 통하는 말이므로 신의 위대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어떤 명칭보다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올바르다고 본다. ‘하나님’과 ‘하느님’ 사이에 무슨 근본적 차이는 없는 것으로 인정하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기독교는 성경적으로 보았을 때, '하나님'이 더 적절하다고 보고 있다. 또한 현재 '하나님'이라고 하면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하느님'이라고 부르면 그리스도교의 신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통속적인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특히 무당 종교의 신으로 오해한다는 것이 개신교도들의 입장이다. 이렇듯 기타 토속, 외래종교도 사용하는 신 명칭인 '하느님'과 구별, 기독교의 하나님을 선별 호칭할 필요성이 있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는 하나, 유일(唯一)신되심을 천명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이다(사 45: 5-7 참조), (출 20: 1-17참조),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은 유일한 신이심을 강조하셨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막 12:29절 말씀), (요 5: 44절 참조), (요 17: 3절 참조 ).
 
‘하나님’이란 용어가 ‘하느님’이란 용어보다 부적절하다는 견해:

우리나라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의 말에 의하면 ‘하나님’이란  표현은 문법적으로 맞지 않다고 하며, 그 이유로는 하나라는 수사에 존칭 명사인 님을 붙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글쎄, 나는 수사학자가 아니기에 그것은 잘 모르겠다. 다만, 하나라는 것이 수사적이긴 하지만, 우리가 그 숫자에다 님자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신 분, 한 분, 곧 유일(唯一)하신 참 하나님으로 생각할 때, 하나에다 님자를 붙여 부르는 것에 무슨 문제가 된다는 것인지 오히려 그런 발상이 이해되지 않을 뿐이다. 그분 주장에 따르면, 또 다른 이유로는 ‘하나님’으로서는 하나이기에, 삼위일체 신앙을 충분히 표현하기에 부족하며, 하나는 하나이지 삼위가 될 수 없고 단일 신이 되기 때문에, 여호와 하느님의 삼위를 설명하기 부족하다고 한다. 이것 역시, 글쎄다. 우리가 삼위일체의 신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하나란 숫자를 표기하는 것이 더 마땅하다고 본다. ‘하느님’이란 우리가 조금 전에 살펴 본 바로는, 천공 신이요, 다신(多神)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성부 성자 성령을, 한 분 하나님 속에 든 다른 위로 보지 않고 각각 다른 세 분의 신으로 본다는 것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다신(多神)주의가 아니고 무엇이랴? 성부 하나님 따로, 성자 하나님 따로, 성령 하나님 따로 분리하여 생각할 때만 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삼위일체란 무엇인가 부터 알아야하지만, 다 설명하기에는 지면이 짧고 우선 간단히 요약해 보면, 아래와 같다.
 
삼위일체란:
성부, 성자, 성령, 이 셋은 곧 하나이며, 하나 속에 포함된 세 가지 다른 역할로 본다는 그런 의미다. 성서적 근거로는, 요1서 5:7절 말씀을 영어성경에는 한글 번역판보다 더 정확하게 번역되어 있다 “ For there are three who bear witness in heaven: the Father, the Word, and the Holy Spirit: and these three are one (N.K.V)” 라고 정확하게 말씀하고 있다. the Father= 성부, the Word= 말씀이 육신을 입으신 성자, the Holy Spirit = 성령님. these three are one = 이 셋은 하나이니라. 삼위일체란 말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역할 분담의 정의는, 에베소 1: 3-10절을 근거한다.
성부 하나님= 창세 전에 인간 구원을 예정하시고 계획하신 분, 성자 하나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몸으로 십자가 위에서 인간 구원을 이루심, 성령 하나님 = 예수의 그날까지, 구원받은 백성을 인치시고 지키시고 견인하심. 이렇듯, 한 분 하나님께서 삼위로 나뉘어져서 일하시는 그 목적은 오직 하나,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고로,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유일(唯一)하신 하나님을 다신(多神) 종교와 혼합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고 본다. 이외에 신학적인 논쟁은 더 많이 일어날 수 있지만, 필자는 신학자가 아니기에 그 어떤 논쟁도 피하려고 하며, 여기에 필자가 근거한 것은 신학적 자료가 아닌, 일반 사전적 의미와 성경에서 주는 교훈을 그대로 적용한 것일 뿐으로 더 이상의 깊은 신학적 질문은 나에게 물어보아야 대답할 여력이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바라기는 우리가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 하는 것을 따져서 설왕설래 다투며 변론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신앙양심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다만 우리가 어떠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 각자가 성경에 입각해서 올바른 선택을 잘 할 수 있도록 성령의 조명하심을 간절히 구할 따름이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사 45:5-6절 말씀).”

아멘넷: 별똥별/최송연 칼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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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하다

 

 

 

 

 

종교개혁사를 쓰면서 부제로 ‘진리의 재발견’이라고 붙인 적이 있다. 종교개혁은 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청결하기 위한 것이라는 단순한 설명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교회의 부패의 고리를 풀려고 무수한 순교자들이 희생을 당해야 했던가? 성경에서나 역사적으로 교회는 항상 타락했다. 종교개혁은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종교개혁자들이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마르틴 루터가 ‘칭의’를 주장하자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 즉 스콜라주의자들은 당황했다. 그것의 의미를 몰랐을 뿐 아니라 처음 듣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그들이 성자로 추앙하는 아우구스티누스 역시도 칭의에 대한 개념을 희미하게 말할 정도였다. 약 1500년 동안 ‘칭의’개념은 묻혀 있었고 감춰져 있었다. 종교개혁자들로 인해 이 진리가 재발견된 것이다. 바울 사도가 놀랍게 전해준 진리 중에 진리인 칭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하자.

 

 

1. 칭의란?

칭의의 정의는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서> 33문과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70문에 잘 밝히고 있는데, “죄들을 용서하고 의롭다고 수용한다”는 것이다. 좀 더 세밀한 정의를 위해 칼빈의 <기독교강요> 3권 11장 2항, 11항, 23항 그리고 17장 8항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한 마디로 죄들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것을 말한다. 우리의 어떤 행위나 의로움에 근거하여 죄들을 사면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교리와 다를 바 없음을 볼 수 있다.

 

 

2. 죄들의 용서란?

죄들의 용서가 인간의 그 어떤 공로나 행함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의 회개로 용서를 받는다고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사랑인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무상적으로 우리에게 죄들의 사면이 이뤄진 것이다(3권 3장 18~19항 참고). 최초의 부모로 인한 부패와 타락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용서를 베푸신 것이다.

죄들의 용서라는 의미는 시편 32장과 로마서 4장에서 잘 나타난다(<벨지카 신앙고백서> 23항). 죄들의 용서란 ‘덮는 것’을 의미한다. 무슨 죄들을 우리가 범하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덮여졌기에 또는 전가되었기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인으로 여긴다. 이것을 과거나 미래에 범한 죄들이라도 용서한다고 표현하게 된다. 하지만 용서를 지운다거나 없앤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3. 오직 믿음이란?

아르미니우스파는 믿음이 그리스도의 공로를 수용하기 때문이라고 억지 주장하며 영생의 보상을 받는 가치로 여기고 있다(<돌드레히트 신조> 2장 거절 4항). 믿음이 무슨 가치를 가지고 있기에 죄들의 용서를 받고 그분이 우리를 의인으로 여기는 것이 결코 아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단순히 수용하는 도구에 불과하지 무슨 힘을 제공하는 뭔가가 결코 아니다. 이 점에 있어 신앙의 선배들은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밝힌다. “내 믿음의 가치 때문에 내가 하나님께 수용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만족, 그분의 의와 거룩만이 하나님 앞에 나의 의가 된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23째 주간 61문).

그런데 왜 ‘이신칭의’라 부를까? 그것은 “오직 믿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동일한 것을 받을 수 없고 내 것으로도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62문). 그래서 지식을 의미하는 믿음은 ‘사도신경’에 나타난 거룩한 공교회, 성도의 교제, 죄들의 사하여 주는 것을 신뢰하고 그것에서 위로를 얻는다(21~22째 주간 54~58문). ‘오직 믿음’의 의미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인다. “‘오직’이란 단어가 성경에 없다고 억지 주장하지만 이신칭의는 행위로부터 모든 것을 제거하는 자만이 오직 믿음에만 모든 것을 기인시킨다”(<기독교강요> 3권 11장 19항). 오직 믿음이란 의는 칭의를 얻기 위한 인간의 어떤 행위를 배제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그는 말한다.

 

 

4. 의의 전가란?

칭의는 죄들의 용서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의로 전가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분이 행하신 구속 사역이 곧 우리가 행한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성취하신 모든 순종을 내가 성취한 것처럼 또 내가 결코 모든 죄를 범하지 않은 것처럼 여기신다”는 것이다(23째 주간 60문).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순종이 나의 순종으로 여기신다. 지상에서 인간의 그 어떤 의롭다고 여기는 것을 수천 년 동안 모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의의 저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마치 물 한 방울을 태평양에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로마 가톨릭이나 루터파 오시안더 뿐만 아니라 아르미니우스파는 칭의를 무슨 알약을 먹어 힘을 얻는 것처럼 여긴다. 구원을 얻게 하는 선행을 행할 수 있다고 억지 주장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내면, 즉 인격을 보시지 외모를 판단하지 않는다(3권 23장 10항). 무상적 칭의를 믿음으로 확신하므로 그분의 자녀임을 알게 된다. 이것이 양자됨인데 다음 호에서 설명하도록 한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7811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생명나무 쉼터/한아름

 

1. 가슴에 기쁨을 가득 담아라
담은 것만이 내것이 된다.

2. 하루를 멋지게 시작하라
좋은 아침이 좋은 하루를 만든다.

3. 얼굴에 웃음꽃을 피워라
웃음꽃에는 천만불의 가치가 있다.

4. 남이 잘되도록 도와줘라
남이 잘되어야 내가 잘된다.

5. 자신을 사랑하라
행운의 여신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6. 세상을 향해 축복하라
세상은 나를 향해 축복해 준다.

7. 기도하라
기도는 소망성취의 열쇠다.

8. 힘들다고 고민말라
정상이 가까울수록 힘이들게 마련이다.

9. 준비하고 살아가라
준비가 안되면 들어온 떡도 못먹는다.

10. 그림자를 보지말라
몸을 돌려 태양을 바라보라.

11. 남을 기쁘게 하라
10배의 기쁨이 나에게 돌아온다.

12. 끊임없이 베풀어라
샘물은 퍼낼수록 맑아지게 마련이다.

13. 될 이유만 말하라
안될 이유가 있으면 될 이유도 있다.

14. 약속은 꼭 지켜라
사람이 못 믿는 사람 하늘도 못 믿는다.

15. 불평을 하지말라
불평은 자기를 파괴하는 자살폭탄이다.

16. 어디서나 당당하라
기가 살아야 운도 산다.

17. 기쁘게 손해를 보라
손해가 손해만은 아니다.

18. 요행을 바라지 말라
대박을 노리다가 쪽박을 차게된다.

19. 밝고 힘찬 노래만 불러라
그것이 성공 행진곡이다.

20. 슬픈 노래를 부르지 말라
그 노래는 복나가는 노래다.

21. 푸른 꿈을 잃지 말라
푸른 꿈은 행운의 청사진이다.

22. 감사하고 또 감사하라
감사하면 감사 할 일이 생겨난다.

23. 남의 잘함만을 보고 박수를 쳐라
그래야 복을 받는다.

24. 좋은 말만 사용하라
좋은 말은 자신을 위한 기도다.

25. 희망의 꽃을 피워라
희망의 꽃만이 희망의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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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일루미나티의 탄생(1776년 5월 1일) 기념일인 2015년 5월 1일에 뮤비 BAE BAE를 통해 광명의 천사 루시퍼를 찬양 바 있던 지드래곤이 최근 목 뒤에 루시퍼 문신을 새긴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었다. 


아래는 뮤비 BAE BAE와 컴백무대에서 지드래곤이 타락천사인 루시퍼(호루스)를 찬양하는 장면이다.



흰색과 검은색의 줄무늬를 입은 마네킹 앞에서 지드래곤이 노래를 시작한다.





노래하는 지드래곤 앞에 갑자기 강렬한 빛 가운데 천사가 등장한다. 

빛의 천사 루시퍼(사탄)와의 만남을 노래하고 있다.



루시퍼를 만난 지드래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가 만든 노래 babe babe가 바로 빛의 천사(타락천사) 루시퍼의 영감을 받아 만든 것임을 인증하고 있다.




지상파에서 방영된 컴백 무대에서도 루시퍼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있다.


출처 >> 빅뱅의 베베 - 타락천사 루시퍼와 호루스를 위한 찬가

 


아래는 일년 전 루시퍼를 찬양하는 노래를 발표했던 지드래곤이 목에다 광명의 천사 루시퍼를 문신으로 새겨넣은 모습이다. 


얼굴에 빛을 발하는 천사가(광명의 천사 루시퍼) 일루미나티의 숭배 대상인 바포멧과 마찬가지로 한 손은 위로 한 손은 아래로 향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부와 명예를 얻기 위해 영혼을 판 지드래곤이 루시퍼 문신까지 새겨 자신이 바포멧과 루시퍼(사탄)를 섬가는 일루미나티의 멤버임을 인증하고 있다.



일루미나티가 숭배하는 바포멧과 마찬가지로

광명의 천사의 두 손이 하나는 위를 하나는 아래를 향하고 있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믿음의 순교자 '페르페투아' 로마 황제 세베루스(Septimus Severus)의 치하인 202-3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 두 여성이 기독교인이라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페르페투아(Vibia Perpetua)라는 20살이 약간 넘은 귀족 여성과 그녀를 돕는 여성 펠리키타스(Felicitas)가 함께 투옥되었다. 페르페투아는 결혼하여 아직 젖을 떼지 못한 아이의 엄마였다. 아직 경찰에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귀족 아버지가 찾아와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집안을 택할 것을 권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버리도록 요구하였다. 페르페투아는 아버지에게 꽃병을 가리키면서 저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꽃병”이라고 대답하자, 그녀는 아버지에게 “꽃병을 꽃병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기독교인을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고 하며 신앙을 지키고자 하였다. 다른 날 다시 찾아 온 아버지는 페르페투아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신앙을 버리도록 권하였다. 어머니보다 어떻게 먼저 죽을 수 있는지, 특히 아직 젖을 떼지 못한 갓난 아이를 어떻게 버릴 수 있느냐고 감정에 호소하였다. 딸의 발 앞에 엎드리어 간청을 하기도 하였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딸에게 화를 냈다가 눈물로 호소했다가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신앙을 져버리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페르페투아의 신앙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페르페투아는 그녀대로 아버지에게 자신이 당하는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천국을 위한 기쁨일 뿐임을 알리고자 하였다. 비록 사람의 눈에는 당장 고통 속에서 죽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분명 우리 삶이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증거하였다. 심문관인 힐라리아누스는 페르페투아의 마음을 꺽으려고 그녀의 아버지에게 심한 매질을 하게 하였다. 그녀에게 이중적인 고통을 주려는 심산이었다. 신앙적인 고집 때문에 노령의 아버지가 매질을 당하는 고통을 딸이 받기에는 너무 어려운 고통이었지만 그녀는 참았다. 그녀는 기도로 이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었다. 드디어 처형날이 다가왔다. 젊은 여자들에게는 미친 소를 풀어 싸우게 하였고 소가 그녀의 옆구리를 들이박아 많은 피를 흘렸지만 죽지 않았다. 페르페투아는 다른 여인들을 돌보아 주려고 하였고 다시 표범을 풀어 물게 하였다. 표범의 공격에도 살아남게 되어 결국 군인들의 칼에 생명을 마치게 되었다. 갈비뼈를 심하게 다쳐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어진 그녀는 검투사에게 목을 쳐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오히려 손을 떨고 있는 검투사에게 목을 내밀어 최후를 마쳤다. 처형장에 흘린 그녀의 피가 1,8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 신앙 속에서 흐르고 있다. 출처: http://kcm.kr/dic_view.php?nid=39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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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선악과’를 두시고 아담에게 선택할수 있는 권한을 주셨다
아담이 먹기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수 있는 생명나무가 같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뱀이 던지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선악을 알게하는 열매를 선택하고 말았다
아담을 말하자면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다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직접 지을정도로 지혜로운 자였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 아름다운 에덴동산의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축복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 아담에게 하나님은 동산 중앙의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을것이라고 선포하셨다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하나님의 명령을 직접들었음에도 아담은 하와가 뱀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먹은후 건네주는 그 보암직하고,지혜롭기도하고,탐스러운 열매를 아무 댓구도 없이 받아먹었다

최소한 한번쯤은 먹어야할지 말아야할지 고민을 해봐야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미 그열매를 따먹어버린 하와를 한번쯤을 꾸짖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아담은 기다렸다는듯이 열매를 넙쭉 받아먹음으로 온 인류의 죄의 근원이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는 불명예를 안게 된다

아담으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셨다
지금 이세상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선택의 연장선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지상명령은 “땅을 정복하라”는 것이다
정복은 곧 전쟁을 상징하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땅의 공중권세를 쥐고 있는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겨나가야 함을 명령하신다

선악은 세상을 상징한다
아담은 생명나무와 선악과의 선택권의 기로에서 결국 세상을 선택하였기에, 우리는 결국 육체의 죽음을 모두 맛보게 됐으며 결국 지옥으로떨어질수 밖에 없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또한 죽을때까지 선택의 귀로에서 마귀와의 유혹을 이겨내며 생명나무를 따먹기위한 전쟁을 계속 하여야만 한다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체험한것만으로 구원을 받은걸로 착각을 하고 있다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삶에서 끊임없이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지상명령을 행해 나감으로 이뤄지는것이다
우린 성경을 통해 그 수많은 순교자들과 전도자들이 오직 죽을때까지 세상이 아닌 예수님을 선택한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땅에 우리가 육으로 살아있는한 결코 안심해서는 안되며 우리를 끊임없이 실족케하려는 마귀의 유혹을 이겨나가며 하나님의 뜻을 이뤄나가야만 하는것이다

이세상은 혈과 육으로 해결할수 있는 전쟁이 아니고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성령님과 마귀와의 싸움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공중권세를 잡고 있는 마귀를 이길수 있는 유일한 무기인 ‘성령의 검’을 은혜의 시대에 주신것이다
우리는 우리는 낮추고 예수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얻게되는 보혜사 성령님으로 인해 마귀의 유혹을 계속해서 이겨내며 성령님의 이끄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땅에서 완성해 나가는 도구들이 되는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이후 가장 크게 쓰임받았던 베드로 조차도 끊임없는 마귀와의 싸움을 굶주림에 달려드는 우는 사자와 비교했으며, 노아 시대에  수억혹은 수십억에 달하는 사람들중 올바른 선택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겨우 8명에 불과하다는것을 경고했다

성경은 전체를 통털어 세상인 ‘선악과’와  참 생명나무이신 ‘예수님’과의 선택의 싸움을 보여주고 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가 이세상을 정복하며 이겨 나갈 방향을 분명히 보여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온전히 믿고 보내주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날마다 깨어 기도하며 성경의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이겨내며, 오직 성령이 부어주시는 푯대만 바라보며 앞만보며 달려가야하는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선택하며 나가야할 방향을 잡아주는 ‘키’이다
우리는 돈과 명예와 권력이 주는 육체의 짜릿한 쾌감을 위해 달려나가는 어리석은자가 되지 말아야하며 하며, 참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며, 우리를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해주실뿐 아니라, 참 기쁨과 살아가야할 진정한 이유를 주시는 예수님을 마음속으로 진정성있게 선택함으로 받게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참 도구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어야만 한다



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강현

문둥병자의 정결의식(규례)

본문 읽기:마태복음 8:3-4

참조 구절:레위기 14:1-32

3-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4-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시니라

이르시되-'말씀하시되' 입니다. '가라사대' 입니다.

말씀의 능력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느라" 하시니 죽은 자가 살아나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은 구원과 심판의 말씀입니다. 죽고 사는 길이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과 맺은 언약(계약적 약속-covenant promise)의 특징 또한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육의 심비에 언약의 내용을 새기십니다.

흔히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라고 합니다. 아니 종교 이상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믿는 살아 있는 체계와 모임입니다. 일반적인 종교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게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디모데후서 3:15-17)

'너, 하나님의 사람아~ 온전케 되기를 원하노라. 선을 행할 능력을 갖추기를 원하노라'- 이와 같이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늘 명심하십시오.

말씀을 가까이 하십시오. 말씀충만과 함께 쉬지 않고 기도함으로써 성령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병행하는 자의 신앙은 건강합니다. 거머리같이 맨날, '다고 다고' 하는 신앙은 연약하거나 어리거나 병든 신앙 중 하나입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언 28:9)

손을 대시며-친근함의 표시입니다. 말씀만 툭 던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말씀만 하셔도 나을 터입니다. 그런데도 허리를 구푸려 병자에게 손을 대십니다. 하나님을 친근히 하십시오. 가까이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가까이 다가오시고 친근히 하실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문둥병자는 자신의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애쓴 자였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는 순간 다 들으십니다. 다만 응답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즉각 응답하시는 경우도 있고 더디 응답하실 때도 있습니다. 응답하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잘못 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님의 뜻대로 응답하십니다.

이제 문둥병이 나았으니 제일 먼저 가족에게로 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동안 떨어져 살았으니 더욱 그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율법의 기록입니다. 아무에게도 가서는 안 됩니다. 먼저 제사장에게 가서 깨끗하게 된 몸을 보이고 모세가 율법에 기록한 대로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위 참조구절인 레위기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래야 필자와 독자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형성됩니다.

살아 있는 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가져와야 합니다. 모두 정결의식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새 한 마리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에서 잡습니다. 세월은 유수와 같습니다. 한 번 흘러가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습니다. 예전에 유명한 정치인이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못 돌린다"고 했었지요. 인생은 연습이 없습니다. 한 번 살다가 가는 삶이 얼마나 귀중한 지 모릅니다.

질그릇의 특징은 깨어지기 쉽다는 점입니다. 연약한 인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그릇 위에서 산 새를 잡습니다. 목을 따고 피를 흘려 질그릇 위에 받습니다. 그 피를 문둥병자에게 일곱 번 뿌립니다. 일곱은 완전 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완전합니다. 가감해서는 안 됩니다.

문둥병자는 흐르는 물과 질그릇과 새에다 자신을 투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질병과 죄악과 진영 밖 격리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흐르는 물 위 질그릇에서 피흘려 죽어가는 새의 피를 자신에게 뿌려 정결케 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요.

산(living) 새 한 마리는 들판에 놓아줍니다. 죽음의 자리까지 갔다가 죽음을 면하고 창공을 날며 자유를 만끽하는 것을 보면서 죄의 무서움과 사죄의 은총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되는 것이지요.

백향목은 아주 오래 사는 키가 큰 나무입니다. 성전이나 왕궁의 건축 재목으로 쓰입니다.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삼아 계십니다.

홍색실의 특징은 붉어서 눈에 잘 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물든 자의 삶은 무리 중에서 홍일점처럼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슬초는 물을 잘 머금기에 물이나 피를 적셔 뿌림으로써 죄인을 정결케 하는 데 쓰이는 하찮은 잡초입니다.

백향목과 우슬초! 솔로몬이 논했었지요.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도토리 키재기 입니다. 백향목도 귀하게 쓰시지만 우슬초도 귀하게 쓰시는 우리 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여러분은 다 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크게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마십시오. 생긴대로 살고 있는대로 사십시오. 너무 잘난 체 하지도 말고요. 오히려 못난 자를 더 귀하게 보시는 주님이십니다.

속건제물인 숫양의 피를 신체의 대표적인 부위인 오른쪽 귓부리와 엄지손가락 엄지발가락에 바릅니다. 그리고 나서 그 위에 기름을 바릅니다. 이제 여러분의 소유권이 나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사 성령을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께 넘어갔음을 나타내는 표호(사인)입니다.

이제부터 무엇을 듣느냐 어떻게 듣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벙어리는 듣지 못하기에 말을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복음을 외치십시오.

또한 손으로, 발로 행하는 모든 삶의 영역이 십자가의 피의 복음으로 물들게 하십시오. 이는 힘으로도 아니 되고 능으로도 안 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주님은 이것을 제사장에게 입증하라고 하십니다.

입증이란 증인의 증거를 말합니다. 구약의 제사는 그림자입니다. 실체이신 메시야(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여전히 율법의 의식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기에 그들에게 입증하라고 하신 것이지요.

이 시대에도 율법주의가 횡행합니다. 초대교회 때 갈라디아교회처럼요. 삼가 복음으로 무장하시길 바랍나다. 복음의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말씀을 맺습니다.

산상수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문둥병자를 고치신 일이었습니다. 영혼과 몸을 이분법적 사고로 논할 수는 없습니다. 그 자체로 하나의 인격이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전인으로서의 사람으로 대하십니다. 우리의 육신을 따로 떼어내어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전인구원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날에 죽은(죽을) 몸의 부활이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살아 있을 동안에야 오죽하겠습니까. 육체도 잘 보존하십시오. 건강하기를 구하십시오. 혹 병들었다 할 지라도 고쳐주실 것입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주님을 잘 섬기시기를 축원합니다.

필요한 물질도 구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에 찌들어 사는 것을 원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복음을 위해 스스로 가난해진 자외는 가난이 미화될 수 없습니다. 미덕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돈을 사랑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구자준 목사2016/08/1011:39:25

모바일 이타임즈

http://www.etimes.net/service/etimes_mobile/shellview_m.asp?ArticleID=2016081011372601478&LinkID=6344




사랑은 주는 것만큼 오는 것도 아니고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도 아닙니다.


돌아올 것이 없다고 해도

쉼 없이 주는 사랑에서 얻는 행복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걱정해 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상대를 바라보는 진실한 눈빛이

그리고..

마음을 담아 잡아주는 손의 따뜻한 온기가

곧 행복을 부르는 신호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에 힘들어하는 것은

그 만큼 바라고 있는 게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기보다는 상대에게서 받고자 하는

욕망이 크기 때문에 실망도 불어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산수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유일한 계산은 내가 얼마나 사랑을 줄 수 있을까?

를 고민하는 것말고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마저 사랑하는 동안에 잊어버리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 담아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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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있다

 

 

종교개혁의 위대한 3솔라(3solas) 중 하나가 ‘오직 믿음으로(sola fide)’이다. 타락한 본성을 지닌 인간이 심판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되는 것은 오직 믿음뿐이다. 또 이 믿음이 겨자씨만큼 하더라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한다(마 17:20). 그리고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 8:10)는 말씀만 아니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한다(약 2:17). 어떤 때는 믿음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스스로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의심나기도 하다. 이렇게 믿음의 다양한 측면을 볼 수 있다.

 

 

⑴ ‘구원하는 믿음’ 또는 ‘참된 믿음’이란 말씀에 계시된 모든 진리에 대한 확실한 지식만 아니라 복음에 대한 신뢰이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21문). 칼빈은 믿음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호의에 대한 확고하고 확실한 지식”이라 정의한다(<기독교강요> 3권 2장 7항).

 

 

이 지식은 당연히 복음에 약속된 모든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사도신경’에 포함된 사항들이다(22문). 이런 지식이 우리 마음에 계시되고 심정에 보증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믿음은 지성적(mind)이라기보다 심정적(heart)이다(3권 2장 36항). 믿음은 로마 가톨릭이 말하는 지적 ‘동의’가 아니라 삶 속에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 루터파가 주장하는 의지적인 측면이 아니라 실천적이다(3권 24장 3항). 한 마디로 말하면, 삶 속에서 체험되어 갖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⑵ 어떤 자들이 믿게 되나? 복음 선포가 이뤄지더라도 어떤 이는 믿지만 그렇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령의 사역이 불성실하거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미완성이라기보다 거절하는 자의 잘못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거절한다는 의미다. 결국 거절하는 자는 선택함을 받지 못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돌드레히트 신조> 2장 6항).

 

당사자의 의지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선물’이라고 부른다(엡 2:8). 그렇다고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준다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에 만사가 믿고자 하는 의지와 믿는 행위를 인간 안에 일으킨다는 의미에서 선물이다”(<돌드레히트 신조> 3~4장 14항). 이와 유사하게 칼빈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고 그분의 뜻에 따라 행하도록 하는 의지가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역사하신 결과이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3권 2장 33항)라고 한다.

 

⑶ 연약한 믿음이 있나? 믿음을 성령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그것을 받은 자들에게 불완전함과 불안이 왜 이뤄지는 것일까?(<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4장 3항) 이에 대한 답변을 위해 <기독교강요> 3권 17~28항을 읽어보도록 하자. ‘육체의 잔재 속에 잠자고 있던 불신앙이 내면에 있는 믿음을 공격’하기 때문이다(3권 2장 18항). 공격에 취약한 이유는 무지 때문이고, 이 무지가 불신앙으로 우리를 이끌기 때문에 의심과 불안감이 나타나는 것이다(3권 2장 20항). 이것을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숱한 공격들을 막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믿음을 유지해야 한다’(3권 2장 21항).

 

이러한 내적 투쟁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에 대해 두렵고 떨리는 심정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 겸손하기 위함이다. 궁극적인 이유는 구원이 ‘하나님의 선하신 기쁨’에 있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3권 2장 23). 다른 말로 하면 구원이 인간의 어떠한 노력이나 행위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직 그분의 무상적 은혜로 이뤄졌음을 삶을 통해 증명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믿음을 견고하게 붙잡으려면 믿음을 붙잡고 있는 돌쩌귀가 있다. 하나는 복음에 나타난 약속을 수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3권 2장 16항). 이 두 가지를 굳게 붙잡고 있으면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승리하면 살 것이다. 이 일을 위해 그분의 말씀 공부와 연구는 필연적이다.

 

⑷ 큰 믿음과 작은 믿음은 ‘없다’. 성숙한 믿음과 미성숙한 믿음도 ‘없다’. 이런 질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가 억지 주장하는 내용들이다. 그들은 믿음을 양적으로 표현한다. 무엇을 하는 것을 보니 믿음이 좋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믿음은 그러한 기준을 허용하지 않는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믿음을 동의로 주장할 뿐 아니라 교회가 제시하는 것을 신뢰하고 따르면 믿음이 있는 것이라 기만술을 쓰고 있다. 이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참된 교회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순전한 말씀 선포가 이뤄지지 않는 교회의 지침을 따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 원하고 바라는 바가 기적같이 성취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있다고 공적으로 간증하거나 예화를 드는 것도 금지되어야 한다. 가시적인 현상은 단지 믿음의 준비일 뿐 구원과는 무관하다(3권 2장 5항). 그런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고 시작일 뿐이다. 여러 삶을 통해 참과 거짓이 증명되어야 한다.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7684

 출처: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바다가 내게 해준 충고 - 최송연 멈추지 않는 시간 속에 쉬지 않고 출렁이는 너 정체 상태, 그것이 곧 퇴보이니 새해엔 보다 큰 꿈을 품고 쉼 없이 달려가야 하리 쏟아져 들어오는 잡동사니 원망 없이 받아주는 너 좁은 마음, 그것이 곧 실패의 원흉이니 새해엔 보다 넓은 마음 되어 모두 끌어안고 가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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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가르치소서..
        최송연 주여, 내게 가르치소서 캄캄한 밤하늘을 빛내되 오만하지 않은 별빛의 그 청아함을... 한여름 불볕 쏟아지는 들녘, 밟아도 밟아도 다시 돋아나는 저 들풀의 강인함과 서리서리 된서리 모진 바람 몰아치나 결코 움츠러들지 않는 대나무의 그 꿋꿋한 기상을...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인내와 사랑으로 참아내신 당신의 그 겸손하심마저도 ...
      ;

             

             

             

             

              내게 가르치소서..
                                 최송연

              주여,
              내게 가르치소서

              캄캄한
              밤하늘을 빛내되
              오만하지 않은
              별빛의 그 청아함을...

              한여름
              불볕 쏟아지는 들녘,
              밟아도 밟아도
              다시 돋아나는
              저 들풀의 강인함과

              서리서리 된서리
              모진 바람 몰아치나
              결코 움츠러들지 않는
              대나무의 그 꿋꿋한 기상을...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참혹한 십자가의 고난을
              인내와 사랑으로 참아내신  
              당신의 그 겸손하심마저도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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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등은 없다.

                 

                만일 에서가 일찍 돌아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만일’은 없습니다. 30절에는 “마치매”, “나가자”, “돌아온지라”, 영어성경을 보니 “FINISHED, LEFT, CAME.”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 끝나고 버스 떠난 다음에 왔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염소고기를 들고 염소털로 꾸미고 형의 옷을 입고 아버지에게 나아가 복을 다 받고 난 다음 에서가 돌아온 것입니다. 뒤늦게 돌아온 에서는 그런 줄도 모르고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갑니다. “아버지여, 일어나사 아들의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깜짝 놀란 아버지 이삭이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Who are you?” 아들에게 ‘너는 누구냐’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에서가 대답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 곧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말합니다.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에서가 그 말을 듣고 방성대곡합니다. 영어성경을 보니 ”he burst out with a loud and bitter cry“, ”큰 소리로 비참하게 우는 울음을 터뜨렸다.“고 쓰고 있습니다.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빌 복을 남기지 아니하셨나이까?“ 그러나 이삭은 대답합니다. ”내가 그를 너의 주로 세우고 그 모든 형제를 내가 그에게 종으로 주었고, 곡식과 포도주를 그에게 공급하였으니, 내 아들아 내가 네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에서는 더욱 애통하고 처절하게 울부짖습니다. ”내 아버지여,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뿐이리이까,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남은 복, 찌꺼기 복이라도 빌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대답합니다.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멀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떨쳐 버리리라.“ 다 끝난 다음에 애통하며 울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끝난 다음에 온 에서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지막 날 다 끝난 다음 남겨진 자들의 애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계1:7)”

                에서는 장자권을 버렸습니다. 잠시 배고픔을 면하기 위하여 바꾸었습니다. 이는 믿음을 세상의 복으로 바꾼 것이요, 영원한 생명 보다는 당장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일이 더 급하다고 바꾼 것입니다. 그러다가 뒤늦게, 다 끝난 다음에 달려와서 애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아무리 에서를 사랑한다 해도, 에서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고 싶어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고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애원해도 그 때는 하나님께서 해 주실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은 2등이 없습니다. 미루는 자, 뒤늦게 오는 자에게도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일보다 이것이 시급한 일입니다. 뒤늦게 애통하며 몸부림쳐봐야 구원의 문이 닫히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나중에, 천천히, 이 다음에가 없단 말입니다. 지금 믿어야 하고 지금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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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안섭 원장 “내가 경험한 동성애와 에이즈와의 관계는?”

                 

                온세대교회(이성민 목사)는 수동연세요양병원의 염안섭 원장을 강사로 초청하여 8월 3일(수) “교회가 동성애를 말하다”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열었다. 염안섭 원장은 동성애자, 특히 한국의 남성 동성애자가 얼마나 비건강적인 환경에 노출되었는가를 소개하고, 자신이 치료한 에이즈 환자의 100%가 동성애자라고 말했다.

                목사이기도한 염안섭 원장은 “대한민국은 동성애로만 가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성적타락으로 가는 큰 문제가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변곡점이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경건의 뿌리가 썩어가고 있는데, 우리 성도들의 눈물로 경건의 뿌리를 살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대한민국의 촛대를 옮기시고 끝장난다”고 경고했다.


                ▲미디어에서 동성애의 의학적인 문제점을 경고하고 있는 염안섭 원장

                왜 동성애를 경계해야 하는가? 대부분 크리스찬들은 동성애가 성경적으로 어떤 문제가 있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의학적인 면에서는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다음은 염안섭 원장이 말하는 세 번째 관련 강의내용으로 성소수자의 문제, 동성애와 에이즈, 한국의 에이즈 대책의 문제점, 동성애와 중독에 관한 내용이다. 대부분 한국에 대한 내용이지만 후반에는 미국의 통계도 나온다.

                동성애자는 성소수자인가?

                한국에서는 이제 ‘동성애자’라는 단어대신에 ‘성소수자’라는 말이 이용이 되고 있으며, 언론에서도 더 이상 ‘동성애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동성애자 이익단체인 '동성애자 인권연대'가 2015년에 '행동하는 성소수자 인권연대'로 명칭을 변경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신의학에서 성소수자는 20가지 이상의 형태가 있는데 그중에 한 가지가 동성애자일 뿐이다. 그런데 동성애 하나만 문제가 없다고 인정하면 나머지 20가지 성소주자들도 모두 문제가 없다고 동시에 인정받게 되어있는 형평성의 원리가 문제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독일은 1969년 동성애에 대해 사회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합의를 이루자말자 형평성의 원리 때문에 나머지 형태의 성소수자들도 다 문제가 없다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는데 사람과 동물과의 성관계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 어느 유명한 유럽 여성 디자이너는 고양이 남편과 사별하고 개 남편과 재혼했다고 신문에 나기도 했다. 유럽은 동물 매춘업까지 생겼다. 한국은 수간협회가 있으며 얼굴을 드러내고 활동하는 회원만 4천2백 명이 넘으며, 정기적으로 단체 수간을 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기계나 시신을 대상으로 성욕을 채우는 사람들도 있으며, 카톨릭 교황은 신부 50명중 하나가 소애성애자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동성애와 에이즈와의 관계

                대한민국은 동성애자 거리가 있고 동성애자 전용 술집도 있다. 동성애자 찜방에서는 남자 동성애자들이 집단적으로 성관계를 한다. 종로 탑골공원에는 동성애로 에이즈에 감염된 사람이 노숙자로 살면서 자기의 항문을 몇 천 원씩에 노숙자들에게 판매한다. 그렇게 몸이 완전히 에이즈로 망가지면 우리 병원에 입원한다. 그렇게 7만 번이 넘게 에이즈 환자를 치료했는데 현장에서 본 에이즈에 걸린 사람은 100% 동성애자였다. 그분들과 면담하면서 동성애자의 현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동성애의 실체와 달리 현재 미디어와 영화에서 나오는 동성애 모습은 미화된 것이다.

                에이즈는 면역력만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바이러스가 뇌를 깎아 먹기에 전신 또는 반신불수가 된다. 그리고 동성애로 항문이 터져 하루종일 피가 나온다. 그런 것을 7만 번을 넘게 보았는데 어떻게 동성애를 좋다고 할 수 있겠는가? 동성애만 안했으면 저렇게 안 되었다. 동성애자들이 꼭 에이즈가 동성애만 통해서만 감염되는 것이 아니라 수혈을 통해서도 감염된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에 수혈로 에이즈가 걸린 것은 2006년 이후에 한 번도 없다. 현재 대한민국 에이즈는 100% 성관계를 통해 전염되는 성병이다.

                동성애에 대해 궁금해 하는 대표적인 질문중 하나가 동성애자들이 어떻게 서로를 알아보는가 하는 것이다. 요즘에는 동성애자 전용 스마트폰 앱이 있다. 가장 인기 있는 앱을 개발한 사람이 한국 사람이다. 앱에 자기소개를 올려놓은 것을 보면 16세 된 남성 청소년이 가출하고 동성애자도 아닌데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항문을 판다. 동성애자 앱은 실시간 위치추적이 되는데 이태원 반경 5키로 내에 400명의 동성애자가 로그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대한민국의 에이즈 대책의 문제점

                한국의 에이즈 검사는 익명검사로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검사 일주일 뒤에 보건소에 전화해서 암호를 말하고 물어보면 된다. 인권을 위해 에이즈가 걸린 것은 본인만 알게 하는 것이다. 비싼 검사비용은 무료이다. 자신이 에이즈에 걸린 것을 알고도 집창촌을 다니든지 무슨 행동을 해도 막는 사람도 없고 양심에 맡긴다. 이것은 아무리 보아도 인권이 아닌 것 같다. 인권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이 되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를 보호할 권리가 있다. 그 권리가 동성애자들이 성관계하고 싶은 욕구보다 낮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에서 에이즈에 걸리면 치료비와 간병비까지 100% 국민 세금으로 지원한다. 동성애로 에이즈에 걸리면 나라위해 싸우다 부상당한 상이용사보다 혜택이 좋다. 에이즈는 백신이 없어 예방이 안 되고 치료제도 없다. 다만 약을 먹으면 바이러스 증식을 막으니 바이러스를 지닌채 사는 것이다.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하는 알약 값이 한 달에 한국 돈으로 6백만 원이다. 추가되는 검사비와 다른 약까지 하면 어마하게 많은 돈이 많이 드는데 다 세금으로 제공된다. 에이즈로 인한 사회적인 비용은 2013년에는 4조원이 들어가고 있으며, 7년 뒤에는 10조원이 돌파할 예정이다. 성전환 하는 트랜스젠더 수술비는 얼굴까지 고치기에 1억도 넘어가고, 수술후에 비싼 성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유지되는데 그 비용을 국민세금으로 지원해 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서울시는 복지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에이즈 환자를 장애인으로 지정할 것을 정부에 건의했다.

                동성애를 통해 에이즈가 걸린다고 하면, 콘돔을 끼면 괜찮다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올바른 사용법으로 정확하게 콘돔을 사용해도 실패율이 2%이고 잘못 사용할 시에는 15%까지 높아진다. 에이즈 환자가 미국과 아프리카도 줄고 있는데 대한민국만 가파르게 늘어나고 있다.


                ▲미국 에이즈 장기요양시설 입주자 통계

                동성애는 성중독

                동성애는 성중독이다. 중독은 내 마음대로 제어가 안되는 것이다. 내가 본 동성애자는 다 성중독이었다. 통계를 찾아보니 1978년 시행된 벨과 와인버그의 동성애 대한 연구에서 백인 동성애자 남성들의 43%가 500명 이상의 파트너와 성적관계를 맺었으며, 28%는 1천명이상의 파트너와 관계를 맺었다. 71%가 500명 이상과 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것은 성중독이지 정상적이라고 볼 수 없다. 미국질병관리본부는 2009-2013년 동안 에이즈 진단통계를 바탕으로 미국에서 남성 동성애자 또는 양성애자 흑인 남성가운데 절반가까이가 생애동안 에이즈 감염으로 진단받았다. 그리고 미국 에이즈 장기요양시설에 입주하는 평균연령이 41세이다. 입소당시 57%는 마약중독, 48% 심각한 신경계질환, 44% 정신질환, 평균 약을 먹는 것이 11가지 이상일정도로 심각했다.

                염안섭 원장의 강의는 글로 옮기기에는 한계가 있다. 이미 유투브에 염안섭 원장의 여러 강의가 올라가 있기에 아래 링크를 눌러 이슈별로 찾아보면 된다.

                https://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염안섭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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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수정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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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이시다

                 

                 

                 

                 

                 

                 

                 

                마태복음 13장에 하늘나라에 대한 7가지 비유가 있는데, 어떤 이는 이 세상의 역사를 7세대로 나누어 설명했다. 이런 자는 세대주의자라 불린다. 마지막은 최후의 심판이지만 그 전에 성령의 시대, 즉 은혜의 시대가 온다는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자도 있다. 전천년설은 핍박과 어려움에 직면한 자들이 갖는 종말론이다. 이단성 있는 이 사상은 초대교회부터 있었다. 대표적인 이단이 몬타누스파로서, 시한부 종말론자였다. 성령의 직통계시를 받는 자들을 중심으로 하늘나라의 지상 재림을 꿈꾸는 자들이었다.

                중세시대에 이르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종파인 영성파가 등장했다. 이들은 성령의 시대를 강조하여 극단적으로 치우친 신앙생활을 하다가 이단으로 정죄 받았다. 종교개혁시기에도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억지 주장하는 급진파와 신비주의자들이 여러 곳에서 일어났다. 영성주의는 20세기 초부터 시작된 오순절운동, 은사운동, 현재에 이르는 음악과 더불어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는 운동으로 형태를 바꾸어 나타나고 있다.

                그러면 성령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정통신앙은 어떠한가? <벨지카 신앙고백서>는 10항 ‘성자의 신성’에 이어, 11항 ‘성령의 신성’을 고백한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53~64문까지 성령 하나님에 대해 묻는데, 주로 성화와 관련을 맺고 있다. 특별히 성령의 신성에 대해서는 53문에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서> 11문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일본질’임을 묻는다. 성자의 신성에 비해 보다 간략하게 다루는 이유는 성령이 성화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성령의 사역에 보다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칼빈은 <기독교강요> 1권 13장에서 간략하게 성령 하나님의 신성을 다룬다. 이후 3권 1장에서만 성령의 신성과 사역을 다루면서 “성령의 주된 사역이 믿음을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밝히고, 성령의 사역인 믿음과 관련된 내용을 폭넓게 다루고 있다. 물론 주로 성화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성령의 신성을 고백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먼저, 그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데 있다. “성령에 관해 무엇을 믿느냐”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53문의 답변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한다. 이 고백은 다르게 표현되기도 하는데, 성령이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토록 나오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 고백은 성령이 성부와 ‘동일본질’임을 의미한다(<벨지카 신앙고백서> 11항).

                다음으로, 그분은 선택된 자에게 성자 하나님께서 성취하신 구속사역을 적용시키는 분이라는 데 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 53문에서는 “그분의 모든 혜택의 참여자가 되고, 그분은 영원토록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고 답한다. 그렇다!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성령이시다.

                성령 하나님에 관해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는 요한복음 14~16장에 이르러 자신과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세히 밝히셨다. 그리고 사도행전 1장에 약속한 성령의 강림과 아울러 교회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을 성경에서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고백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관한 가장 중요한 고백임을 밝힌 바 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성령 하나님이심을 밝히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체험할 수 있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부리는 영이거나 환영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성령이시다.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성령이 중생의 저자이시고 바람임을 밝히신다. 이 사역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요 3:8)라고 했는데, 이 말씀은 ‘기뻐하시는 대로’라는 의미를 닮고 있다.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시는 이유는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어떤 조언이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 지각에 새겨진 말씀을 기억시켜 감동시키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인간들이 흉내 내어 성령 하나님을 모독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가 노력하거나 환경을 맞추면 그분이 역사한다고 기만하는 거짓된 자들이 허다하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에 스스로 행하시고,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로 사용하여 사역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성령 훼방죄를 이해할 수 있다. 성령을 하나님으로 신뢰한다면, 그분의 사역을 임의로 우리가 주도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기록된 말씀을 통하거나 또는 일치하여 사역한다. 9가지 측면을 지닌 열매들이 없는데도 그분의 사역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는 신성모독에 해당된다. 성령의 사역이라 핑계 대면서 성취되지 않는 것은 인간의 사역이지 그분의 사역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유기된 자나 비중생된 자가 악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끝으로, 칼빈은 <기독교강요> 1권 13장 14~15항에서 ‘성령의 신성’을 다루고 있는데 그분을 “중생의 저자”라고 칭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휘포스타티체 또는 본체”라고 명한다. 우리는 그분이 거하는 성전이라고 말한다(고전 3:16, 6:19; 고후 6:16).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95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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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신학교 시절, 목사들은 돈과 여자와 명예란 욕망의 유혹을 이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을 다들 들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들었고 지금도 이 말을 생각하며 목회자의 길을 가고 있다.

                 

                언론을 통하여 일주일이 멀다 하고 목사들의 일탈된 것들이 뉴스화가 되고 있다. 교회와 목사의 수가 많기도 하겠지만 직업군에서 성추행, 성폭력의 일 순위는 기독교 목사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곳에는 성직자라고 되어 있었다.)

                 

                목사가 되겠다고 하여 신학을 수학하고 목회자 수련을 거처 담임목사까지 되려는 목적이 무엇인가? 자기를 위하여 목사가 되겠다고 나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자신을 부른 줄 알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섰는가? 라는 생각은, 목회자가 되려고 나설 때와 목사안수 받을 때만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생각해야 할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지금 시대가 마지막 때이기에 사단은 발악하며 모든 힘을 다하여 목사들을 공격하기에 더욱 그리하여야 할 것이다.

                 

                목회는 일(사역) 자체보다, 그 사역에 대한 자세와 동기가 중요하다. 목사로서 교회에 주어진 모든 사역(일)을 하고, 노회와 총회가 사역을 맡겨줄 때,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주님이 원하는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이다.

                 

                사단은 목사들에게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돈의 위력을 경험케 하고 명예를 거머쥔 달콤한 모습을 보여준다. 돈 있는 목사들 앞에 줄 서 있는 목사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힘 있는 목사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목사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주님보다 돈과 명예를 가지고 있는 목사의 멋지고 힘 있는 것들을 부럽게 생각도록 만들고, 마침내는 돈으로 힘 있는 자리를 주면서 더욱 강력한 유혹의 화살을 쏜다.

                 

                이성(여자 & 남자) 문제, 돈이 생기고, 힘이 생기고, 명예가 주어지면, 사단은 자연스레 이성을 통해 목사를 유혹한다. 돈 있는 목사들이 그래서 외국에 나가서 카지노, 성매매를 위한 여행을 하기도 하고, 자신의 교인들을 목사란 지위를 이용하여 욕망을 채우려고도 한다.

                 

                북한에 갔다 올 정도의 유력한 목사들 중에는 북한 정권의 기쁨조에 코가 꿰어 북쪽의 지시를 받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가진 분이 있다는 글도 본적이 있다. "그들이 차라리 평범한 목사가 되었더라면..."하는 안타까운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목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 주님과의 관계 가운데, 도우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갈구하며 목회자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무언가 기대한 것을 이루냈을 때,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 무언가를 이룬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사단의 유혹이 시작된다.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이 일을 무엇 때문에 하고 있는지를 늘 스스로에게 물으며 일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절제하지 못하며 자신을 늘 돌아 볼 습관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는 사람에게 돈이 되는 자리, 힘이 주어지는 자리가, 되려 불행한 일일 것이다.

                 

                그러다가 자칫 회개의 기회마져 놓쳐버리고, 결국 자신과 교회, 그리고 주님께 누를 끼치는 목회자들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글/필그림

                아버지 속이기

                 창세기 27장은 아버지를 속이는 자의 이야기입니다. 이삭이 나이 들고 눈이 멀어졌습니다. 죽기 전에 맏아들 에서를 축복하기로 마음먹고 에서에게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달라고 청합니다. 에서는 아버지의 축복을 받는다는 희망에 들떠 사냥을 나갑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들은 어머니 리브가는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에서가 돌아오기 전에 아버지에게 들어가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대답합니다. “형 에서는 털사람이요 나는 매끈매끈한 사람인데 형이라고 속이고 아버지에게 나아갔다가 축복은커녕 저주를 받을 겁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저주는 자기가 받을 테니 너는 아버지에게 들어가 축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야곱에게 염소를 잡아오라고 시킵니다. 그 염소를 잡아 별미를 만들고 염소가죽으로 야곱의 매끈한 목덜미와 손등을 꾸미고 형 에서의 옷을 입혀서 아버지 이삭에게 들여보냅니다.

                 야곱이 염소고기를 들고 아버지 이삭에게 들어갑니다. “내 아버지여.” “내가 여기 있노라. 네가 누구냐?”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별미를 가져왔나이다.” “어떻게 이같이 속히 잡았느냐? 내 아들아 가까이 오라. 과연 내 아들 에서인지 만져보자.” 아버지 이삭이 야곱의 손을 잡아봅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인데 손을 만져보니 에서의 손이로구나. 옷 냄새를 맡아보니 내 아들 에서가 분명하구나.” 금방이라도 탄로 날 것 같은 아슬아슬한 가운데 아버지 이삭은 결국 속아 넘어가서 에서인 줄 알고 야곱에게 축복을 하게 됩니다.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과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가 너의 것이요, 만민이 너를 섬기고 네게 굴복할 것이며, 너는 형제의 주가 되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 그야말로 하늘과 땅의 온갖 좋은 것을 다 부어주는 축복을 합니다. 이렇게 야곱은 아버지 이삭을 속여서 축복을 받고 나갑니다.

                 뒤늦게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는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가지고 아버지에게로 들어갑니다. “아버지, 이 별미를 잡수시고 마음껏 이 아들을 축복하소서.” 깜짝 놀란 아버지 이삭이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 “저는 에서,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입니다.” 이삭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합니다. “아까 온 그는 누구였단 말인가? 내가 이미 축복을 하였으니 그가 복을 받을 것이다.” 에서는 땅을 치며 통곡을 합니다. “야곱이 속였습니다.” 아버지를 붙잡고 소리쳐 비통하게 웁니다. “아버지, 내게도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아버지의 빌 복이 그 뿐입니까?”

                 우리는 이 장면을 읽으며 여러 가지 의문을 갖게도 됩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야곱을 이렇게 속임수를 통하여 축복 받게 하시고 야곱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이루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속여서 축복 받은 자를 사랑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은 불의를 허락하신 것일까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보여주는, 곧 예수님을 예표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지 남자의 후손이 아닙니다. 후사를 정하는 것은 남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들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고통과 함께 잉태의 고통을 당하며 아들을 낳는 여자, 생명의 유업을 담당하는 여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라고 해서, 남편이라고 해서 어머니에게서 아내에게서 강제로 아들을 빼앗아 후사로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여자에게서 여자의 뜻과 관계없이 강제로 아들을 빼앗아 그리스도의 계보로 삼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의 자격이나 후사를 세우는 것은 여자에게 그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지한 이삭은 그것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에서를 택하려 하였고 리브가는 계략으로 이를 저지하고 자신이 택한 야곱이 축북을 받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리브가의 계략의 편에 서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장면 자체가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죄를 가리고 주님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 말입니다. 모사가 된 리브가는 성령님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고 비밀을 가르쳐 주시며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애쓰고 힘써서 사냥하여 잡아오는 야생동물이 아니라 염소, 곧 어린양의 살과 피를 가지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맏아들의 이름, 곧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갑니다. (그러고 보니 ‘에서’가 ‘예수’와 발음이 비슷하지 않습니까?) 어린양의 가죽으로 꾸며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자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합니다. 맏아들의 옷, 눈 보다 더 흰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고 나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속아 주실 것입니다. 어루만져 주시고 끌어안아 주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좋은 축복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이삭은 모르고 속았지만 하나님은 다 알고 속아주실 것입니다.

                 그러시려고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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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둥병자의 믿음

                본문 읽기:마태복음 8장 1-4절

                마태복음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1장 1절부터가 아니고 건너뛰어 곧장 8장으로 왔습니다. 왜 그렇게 하냐구요? 필자의 마음이지요. 사실은, 딱딱한 족보이야기부터 다루려면 구약 전체를 가지고 설명을 해야 하는데 글쓰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은 또 어떻고요. 그럴지라도 때가 되면 다 풀어서 전할 생각입니다.

                먼저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본문을 찾아서 정독을 하시기 바랍니다.여기 올리면 저도 편하고 읽는 분들도 좋겠지만 활당된 지면이 부족합니다.

                이 칼럼이 대장정이 될 지 아니면 중도에 하차를 하게 될 지, 저 자신도 모릅니다. 다만 일방통행식의 글쓰기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그 수많은 무리 중 한 사람,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말하기를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절하며-하나님께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이 '절하며'가 미완료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여-예수님을 '주'라고 부릅니다. 이어지는 8장 19절에 성경을 많이 안다는 서기관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과는 사뭇 대조가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는 '야웨'란 단어에다가 '아도나이'의 모음부호를 붙여서 읽을 때 나는 소리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인들은 야웨란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눈으로는 여호와라 읽고 입으로 말할 때는 아도나이(주-하나님에 대한 호칭)라 불렀습니다.

                원하시면-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합니다. 내 원대로가 아닌 주님이 원하시면 입니다.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고쳐주십시오'가 아니라 '깨끗게 해 주십사'고 구합니다. 문둥병이 얼마나 더러운 지 아십니까? 살이 문들어져 온 몸에서 진물이 나고 코가 내려앉고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눈썹이 다 빠지고...

                하실 수 있나이다-예수님의 능력을 알기에 드리는 간구입니다.

                잠시 시간을 뒤로 돌려봅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문둥병자를 격리수용하는나환자촌(일명 문디촌)에서 들었습니다. 그 집단 거주지가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지역에 있었습니다.평소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을 개 돼지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용소에 와 보니 지나(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이나) 내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지 모습이 내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런 가운데서, 수용소를 나와 갈릴리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으로 온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문둥병자는 길을 가다가도 멀리서 오는 사람을 보면 입을 가리고 소리를 질러야 했습니다. '여기 문둥이 있습니다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기 위하여 구원받기 위하여 뭇 사람의 눈쌀과 외면과 배척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겉은 멀쩡하고 고상해보일 지라도 그 내면은 썩어 문드러져가는 문둥이와 같이 더럽기가 한량없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자신의 더러운 겉모습을 통해서 추하고 악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겉사람 만이 아닌, 속사람도 깨끗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죄의 용서와 함께 문둥병도 깨끗게 해 주시기를 구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물어보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중심을 보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구원얻을 만한 믿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대십니다. 그것도 남들이 다 멀리하는 진물나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실려면 어떻게 해야 하셨을까요? 예, 몸을 낮추셔야 합니다. 문둥병자의 자리까지 낮추셔야지요. 왜냐하면 그 나병환자는 계속 엎드려 절하고 있었기에요.

                문둥병자는 '나같이 더러운 죄인이 어찌 감히 서서 빤히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 행동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주님이 원하셨습니다. 이 추하고 더러운 죄인을 깨끗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말해 사죄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문둥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요.

                죄가 해결되지 않고 문둥병만 나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육간에 깨끗게 하신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히11:6). 믿음을 가지고 주께로 나와 경배하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범사에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십시오. 그래야 주께 바르게 경배(예배)하고 주님의 뜻대로 간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주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고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돌이켜 주 예수께로 오십시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입니다. "...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9)

                죄인의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사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리스도(메시야-구원자)이십니다. 천하에 구원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말세에 종교다원주의의 탁류에 떠내려가지 마시고 참된 진리에 굳건히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나머지 부분의 강설이 이어집니다)

                *종교다원주의-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헛된 철학적 사변-

                구자준 목사 2016/08/08 10:11:53

                출처: eTimes

                http://www.etimes.net/Service/etimes_2011/ShellView.asp?ArticleID=2016080810104401091&LinkID=6507

                 [하늘에서 쫓겨난 루치펠, 밀튼의 실락원, 귀스타프 도레]

                 

                 

                사탄의 또다른 이름이 루시퍼이다? 아니다? 라는 논쟁이 있다. 아마도 이 논쟁의 가장 큰 원인은 킹제임즈 버전에서 이사야서(14:12)에 나오는 힐렐(계명성/새벽별Morning Star)을 루시퍼로 번역한 때문으로 보인다. 힐렐과 루시퍼의 의미적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히브리 성경에 루시퍼에 대한 근거가 충분하지 않기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성경이 사탄을 루시퍼라고 확인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 블로거의 입장이다. 하지만, 루시퍼를 사탄 또는 사탄적 존재로 그리는 것이 많은 뉴에이지나 영지주의 주장에서 나타난다. 루시퍼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신의 상징으로 많은 곳에서 인용되는 존재인 것은 확실한 만큼 이에 대해 조금 살펴 보기로 한다. (참고로 루시퍼가 사탄임을 대중적으로 퍼뜨린 데에는 "타락 전의 사탄의 이름이 루시퍼였다"고 주장한 밀턴의 실락원과 단테의 신곡도 일조를 했다고 한다. 위키백과: 루치펠<<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빛으로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루시퍼 매거진; '빛나름이' 루시퍼를 내세운 신지학회지 표지]

                 

                근현대 뉴에이지 배교의 중추세력 중의 하나인 카발라적 신지학회나 프리메이슨 등의 에소테릭 비밀집단은 그들의 '빛'의 원천인 루시퍼를 옛부터 숭앙해 왔다. 빛나름이light-bearer/light-bringer라는 어원을 가진 루시퍼는 '빛'으로 상징되는 영지주의의 '지혜/지식'(소피아/그노시스)를 사람에게 날라다 주어서 그들에게 깨우침을 주는 존재이다. 그들에게는,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게 유도하여 선악의 지식에 눈을 뜨게 한 사탄이 바로 "빛나름이"였다. 따라서 영지주의에서 루시퍼 또는 사탄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인간에게 깨우침을 준 빛의 존재이다.

                 

                영지주의 빛/불/지식/지혜의 전달자 루시퍼의 전파에 가장 적극적인 단체 중의 하나가 뉴에이지 신지학회이다. 루시퍼매거진(후에 "신지학리뷰"로 개명)을 발행했던 신지학회 설립자 마담 블라바츠키는 루시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루시퍼는 신적 그리고 지상적 빛이다. 동시에 '성령'이자 '사탄'이다... 이제 붉은 불의 용과... '빛나름이' 루시퍼는 우리 속에, 우리 마음 속에 있므여, 우리의 유혹자이자 구속자, 우리의 지적인 해방자이자 구원자임이 드러났다.

                 

                교회는 인격적인personal 신과 인격적인 마귀를 믿도록 강요하지만, 오컬티즘은 이것이 오류임을 보여준다. (출처<<)

                영지주의 입장에서 원칙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들의 신은 별도로 존재하는 객관적이고 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다. 영지주의자들의 신은, 그들 자신들의 더 높은 자아를 포함하는, 만유내재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지주의에서 루시퍼는, 위의 블라바츠키의 말대로, 영지주의자들 속에서 그들에게 빛(깨달음)을 날라다 주는 어떤 마음(영혼) 속의 비인격적인 에너지적 존재이다. 뉴에이지에서는 이 신적 에너지 존재를 '포스'force라고 부른다.

                 [뉴에이지 신 '포스'의 각성을 그리는 영화 스타워즈 7: The Force Awakens]

                 

                하지만, 애매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루시퍼는 인격적인 천사적 존재로서도 숭배되어 왔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 사상의 모순을 모여주는 장면이라고 하겠다. 뉴에이저들에게 루시퍼는 크리스천들의 그리스도(또는 때로는 성령)에 대응하는 존재이기도 하며, 따라서 앞으로 재림할 (적)그리스도적 존재이기도 하다. "인격적인" 신과 마귀를 부인한 블라바츠키도 다른 곳에서는 루시퍼에 대해 다르게 말한다:

                 

                과거와 현실에서, 루시퍼는 진리의 빛을 관장하는 천사적 존재의 이름이다... 위대한 발렌티누스 복음인 피스티스 소피아에 의하면, 성스런 이름으로부터 발산되는 세개의 힘 중에서 소피아의 힘(성령)은 비너스(금성) 또는 루시퍼에 거한다.

                 

                창세기의 뱀인 사탄을 영적 인류의 참 창조자이자 은인, 아버지로 보는 것이 지당하다. 여호와가 창조한 로봇automaton의 눈을 뜨게 한 것은 "빛의 전령", 밝게 빛나는 루시퍼였기 떄문이다. (출처<<)

                블라바츠키의 후예이자 루시퍼트러스트출판사(후에 "루시스트러스트"로 개명)를 만들어서 유엔의 출판물을 배포해온 앨리스 베일리(참고: UN과 뉴에이지: 앨리스 베일리의 루시스 트러스트 (LUCIS TRUST)<<)는 앞으로 등장할 뉴에이지 그리스도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 바 있다. (참고: "뉴에이지" 그리스도의 재림<<) 못지않게 유명한 뉴에이저이자 유엔 Planetary Initiative 디렉터인 데이비드 스팽글러 역시 앞으로 다가올 "전세계적인 루시퍼 숭배"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루시퍼를 숭배하기로 서약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신세계질서 속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시퍼 입문을 치르지 않는다면 누구도 뉴에이지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출처: The United Nations and The New World Order<<)

                신지학회와 뗄 수 없는 관계인 프리메이슨의 루시퍼 사상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 조금 짚고 간다. 존경받는(?) 33도 메이슨 앨버트 파이크는 "빛나름이 루시퍼여! 어둠의 영에 주어진 신비로운 이름이여! 아침의 아들 루시퍼여!"라고 불렀는데, 그가 배운 카발라 철학에 따라 루시퍼는 "흑암의 신이 아니라, 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입문자들에게 이것은, 선을 위해 창조되었지만 악을 위해 쓰일 수도 있는, 사람(인격체)이 아니라 포스Force(힘)"라고 했다고 한다. (출처<< 157 페이지) 하지만, 루시퍼가 신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한 그도 다른 곳에서 "맞다. 루시퍼는 신이다. 불행하게도 아도나이도 신이다... 빛과 선의 신 루시퍼는 인류를 위해 어둠과 악의 신 아도나이와 싸우고 있다"고 말하는 모습을 본다. (출처<<) 만유내재신 사상 속에 감춰놓은 루시퍼의 사탄적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결론적으로, 영지주의자/뉴에이저/프리메이슨에게 루시퍼는 영지(소피아)를 나르는 빛이며, 오컬트 마법의 비인격적 힘/에너지이며, 또한 동시에 그들의 경배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격적 신이다. 따라서 위 제목이 가진 질문에 대한 블로거의 답변은 "모두both"이다.

                 

                 [양성(자웅)동체적 바포멧에서 보이는 '빛나름이' 루시퍼의 상징인 '횃불' (참고: "불"을 나른 프로메테우스<<)]


                마태복음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1장 1절부터가 아니고 건너뛰어 곧장 8장으로 왔습니다. 왜 그렇게 하냐구요? 필자의 마음이지요. 사실은, 딱딱한 족보이야기부터 다루려면 구약 전체를 가지고 설명을 해야 하는데 글쓰는 입장에서는 부담스럽습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은 또 어떻고요. 그럴지라도 때가 되면 다 풀어서 전할 생각입니다.

                먼저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합니다. 본문을 찾아서 정독을 하시기 바랍니다.여기 올리면 저도 편하고 읽는 분들도 좋겠지만 활당된 지면이 부족합니다.

                이 칼럼이 대장정이 될 지 아니면 중도에 하차를 하게 될 지, 저 자신도 모릅니다. 다만 일방통행식의 글쓰기가 아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들어갑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니 수많은 무리가 따릅니다. 그 수많은 무리 중 한 사람,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말하기를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절하며-하나님께 경배하는 행위입니다. 이 '절하며'가 미완료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여-예수님을 '주'라고 부릅니다. 이어지는 8장 19절에 성경을 많이 안다는 서기관이 예수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과는 사뭇 대조가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는 '야웨'란 단어에다가 '아도나이'의 모음부호를 붙여서 읽을 때 나는 소리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인들은 야웨란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감히 입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눈으로는 여호와라 읽고 입으로 말할 때는 아도나이(주-하나님에 대한 호칭)라 불렀습니다.

                원하시면-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정합니다. 내 원대로가 아닌 주님이 원하시면 입니다.

                깨끗게 하실 수 있나이다 -'고쳐주십시오'가 아니라 '깨끗게 해 주십사'고 구합니다. 문둥병이 얼마나 더러운 지 아십니까? 살이 문들어져 온 몸에서 진물이 나고 코가 내려앉고 손가락 발가락이 떨어져 나가고 눈썹이 다 빠지고...

                하실 수 있나이다-예수님의 능력을 알기에 드리는 간구입니다.

                잠시 시간을 뒤로 돌려봅니다. 문둥병자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문둥병자를 격리수용하는나환자촌(일명 문디촌)에서 들었습니다. 그 집단 거주지가 갈릴리와 사마리아 경계지역에 있었습니다.평소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을 개 돼지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수용소에 와 보니 지나(사마리아인이나 이방인이나) 내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지 모습이 내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런 가운데서, 수용소를 나와 갈릴리 예수님의 사역의 현장으로 온다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문둥병자는 길을 가다가도 멀리서 오는 사람을 보면 입을 가리고 소리를 질러야 했습니다. '여기 문둥이 있습니다아~' 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기 위하여 구원받기 위하여 뭇 사람의 눈쌀과 외면과 배척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님께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겉은 멀쩡하고 고상해보일 지라도 그 내면은 썩어 문드러져가는 문둥이와 같이 더럽기가 한량없습니다. 이 문둥병자는 자신의 더러운 겉모습을 통해서 추하고 악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겉사람 만이 아닌, 속사람도 깨끗게 되기를 원했던 것이지요. 죄의 용서와 함께 문둥병도 깨끗게 해 주시기를 구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물어보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중심을 보실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구원얻을 만한 믿음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대십니다. 그것도 남들이 다 멀리하는 진물나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실려면 어떻게 해야 하셨을까요? 예, 몸을 낮추셔야 합니다. 문둥병자의 자리까지 낮추셔야지요. 왜냐하면 그 나병환자는 계속 엎드려 절하고 있었기에요.

                문둥병자는 '나같이 더러운 죄인이 어찌 감히 서서 빤히 만왕의 왕이시요 만주의 주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았을 뿐 행동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주님이 원하셨습니다. 이 추하고 더러운 죄인을 깨끗게 해 주셨습니다. 다시말해 사죄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문둥병도 고쳐주셨습니다. 그의 믿음을 보시고요.

                죄가 해결되지 않고 문둥병만 나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육간에 깨끗게 하신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히11:6). 믿음을 가지고 주께로 나와 경배하십시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 분의 뜻대로 만물을 다스리십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범사에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복음)으로 말미암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십시오. 그래야 주께 바르게 경배(예배)하고 주님의 뜻대로 간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주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자백하고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돌이켜 주 예수께로 오십시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회개입니다. "...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베드로후서 3:9)

                죄인의 자리까지 자신을 낮추사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그리스도(메시야-구원자)이십니다. 천하에 구원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말세에 종교다원주의의 탁류에 떠내려가지 마시고 참된 진리에 굳건히 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나머지 부분의 강설이 이어집니다)

                *종교다원주의-모든 종교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헛된 철학적 사변-

                구자준 목사

                2016/08/0810: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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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해외 노동자, 러시아에서 분신 자살!

                - 참혹한 북한 해외 노동자 현황과 인권실태 -

                 

                 

                 

                 

                '종교 공식'에 갇혀 '강도 만난 이웃'을 외면할 것인가?

                - 대한민국이 맺을 회개의 열매 -




                말도 안나오는 일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와 가장 가까운 우리 땅 북쪽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북한정권과 북한주민을 구별하지 못하고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이 제대로 바뀌지 않으면,

                북한은 영원히 저런 저주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이 정말 정신차리지 않고, 분별하지 못한다면,

                교회(그리스도인)가 분별하지 못하고, 관심갖지 않고,

                회개치 않고, 이런 상태로 계속 나아간다면,

                하나님이 북한땅을 여실리 만무합니다.

                되려 우리에게 심판이 임할까 두렵습니다.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이땅의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통회와 자복하며 행동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부르는 한국교회 지도자들!

                 

                 



                 

                끊이지 않는 살육!

                 

                끊이지 않는 살육 속에서 북한 주민들이 절규합니다. 말을 할 수 없는 탄식 속에서 북한 주민들은 절박한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북한 정권의 철권통치 아래서 극도로 신음을 하며 소망이라곤 전혀 없는 처절한 지옥같은 상황 속에서 북한 주민들은 발버둥칩니다.

                 

                끔찍하게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무너진 마음 그리고 북한 주민들의 신음과 핍박 그리고 아픔들이 바로 남한 교회를 향한 심판의 다림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한 주민들의 인권유린에 대하여 경종을 울리지 않고 침묵하는 수많은 남한 교회들에게 진노하고 계십니다.

                 

                북한 정권의 칼부림 아래서 극도로 탄식하는 북한 주민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북한 정권과 거짓 평화를 외치며 북한 정권을 어르고 달래는 것은 개인적 차원의 악독함을 넘어서는 국가적 차원의 악독함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다가 걸리면 총살당하는 처절한 상황 속에서 풀을 뜯어먹으며 연명하는 북한 주민들을 애써 외면하고 김일성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봉수교회에 남한 교회 성도들의 헌금을 바치는 사역자들은 무슨 연유인지 이에 대하여 무감각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으로 창궐한 영적 불모지 북녁 땅을 위한 기도보다 이땅에서의 안위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악독함을 하나님은 조명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잔인한 이기심입니다. 수천만명을 학살한 짐승같은 정권과 무슨 경제협력이며 수백만명을 굶겨 죽인 사탄 정권과 무슨 연방제입니까?

                 

                한낱 인간에 불과한 김일성을 신으로 숭배하는 북한 정권은 무너져야 합니다. 북한 정권을 협력의 대상으로 보는 인본주의 시각은 부서져야 합니다. 종북좌파 세력은 무너져야 합니다.

                 

                철권통치 아래서 극도로 신음하는 북한주민들의 탄식에 대한 남한 교회의 태도가 바로 남한을 향한 심판의 다림줄입니다. 현재 남한 교회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남한 교회는 이것을 뼈저리게 자각해야 합니다.

                 

                 

                글 출처: '예슈아 제4권' 수록글 (예슈아 출판사)

                http://cafe.daum.net/biblemunjanara

                 

                 

                아래 사이트에 들어가시면 

                북한 인권에 관한 많은 자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물질의 도움으로 생명을 구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탈북자 구출과 북한 선교, 인권을 위한 간절한 기도와 함께

                많은 후원의 손길이 이어지길 소망합니다.

                 

                통일소망선교회: http://www.tongilsomang.org

                동성애자가 되는 80% 이유와 20% 이유

                 

                온세대교회(이성민 목사)는 수동연세요양병원의 염안섭 원장을 강사로 초청하여 8월 3일(수) “교회가 동성애를 말하다”라는 주제의 세미나를 열었다. 감리교 목사이기도 한 염안섭 원장은 동성애는 유전자적으로 타고 나는 것으로 어쩔 수 없다는 인식을 깨고, 동성애는 절대 타고 나지 않으며 후천적인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동성애자가 되는 80% 이유는 어릴 때부터 동성애 포로노물을 보고 중독되는 것이고, 나머지 20%는 성인 동성애자에게 성폭행을 당하면 동성애자가 된다고 설명했다. 따라서 자녀들이 동성애 포로노물을 가까이 하지 않도록 경계시키며, 성인 동성애자에게 성폭행을 당했을 시 대처방법을 철저히 교육하는 것이 사랑하는 자녀들이 동성애자가 되는 것을 막는 방법이 된다. 다음은 관련내용이다.


                ▲세미나 다음 날 뉴욕을 돌며 1인시위를 벌이는 염안섭 원장과 이성민 목사


                ▲퀴어축제의 발생지 맨하탄 다운타운 스톤월 인에서 용감히 안수기도를 하는 염안섭 목사와 이성민 목사. 염안섭 목사는 지나가는 동성애자들에게 욕을 먹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느꼈다고 말했다. 뉴욕의 한인교회들이 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반드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동성애는 절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동성애는 선천적이고 유전적인 것이 아니다. 1990년대 미국인 의학자가 사이언스라는 과학잡지에 동성애자를 만드는 유전자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면 동성애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이 언론에 각광을 받으면서 동성애가 선천적인 것이고 유전자 문제이고 타고난 것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불과 몇 년 후에 그 유전자는 동성애와 관련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그것을 주장한 의학자가 남자 동성애자인 것도 밝혀졌다. 그래서 남자 동성애자가 동성애에 우호적인 이론을 만들기 위해 그렇게 논문을 조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의학의 관심사는 정말 동성애를 유발시키는 유전자가 있는가를 찾아보자는 것이다, 정말 동성애를 유발시키는 유전자가 있으면 동성애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 아무리 최첨단 유전자 검사를 아무리 해보아도 동성애 관련 유전자는 단 하나도 없다. 동성애는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성애자를 만드는 유전자는 없지만 아이가 엄마의 뱃속에 있으면서 영향을 받고 뭔가 문제가 생겨서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래서 스웨덴에서 쌍둥이를 대상으로 연구했다. 한 쪽이 동성애자인 일란성 쌍둥이 7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일란성 쌍둥이는 유전자가 100% 같다. 같은 기간 동안 엄마의 뱃속에 같이 있었기에 같은 영향을 받았기에, 만약에 한명이 동성애자이면 다른 쪽도 동성애자가 되어야 한다. 놀랍게도 한 쪽이 동성애자인 쌍둥이 형제중 다른 쪽이 동성애자가 아닌 일반인으로 사는 경우가 90%로 나왔다. 결국은 동성애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10%는 후천적으로 배우는 것이라는 것이다. 동성애는 절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또 동성애가 타고나는, 유전자 문제나 선천적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 저는 유전자 때문에 동성애가 생긴다고 하면 오히려 좋은 일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의학자가 조사했는데 남자 동성애자 15%가 결혼을 한다. 그리고 결혼한 남자 동성애자 중에 자녀를 낳는 사람은 15%밖에 안된다. 결혼을 계속한다고 계산하면 10세대 이전에 동성애자는 지구상에서 자연스럽게 없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 차라리 동성애가 유전자 문제라면 의사 입장에서 오히려 좋겠다는 생각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동성애자는 계속 이어진다. 동성애는 절대 유전자로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학습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동성애자가 되는가? 그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가?


                ▲동성애는 선천적이지 않다!

                동성애자가 되는 이유

                한국의 퀴어축제 현장에서 ‘윤병장’이라는 제목의 남성끼리 성관계를 담은 컬러 만화책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그 만화책은 성기와 항문이 결합하는 것을 모자이크 없이 그대로 보여 주었다. 한국에서는 BL물이라고 이름까지 생겼다. ‘Boy Love' 즉 남성 동성애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동성애자가 되는 80%의 원인이 여기에 있다.

                정신과에서는 동성애자가 되는 원인을 크게 2가지로 말한다. 80%가 ‘학습이론’이다. 그것은 뇌가 BL물(남성 동성애자 포로노)을 자꾸 보다보면 학습이 된다. 그리고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다. 아까 말한 뉴욕에서 상담한 남성 동성애자도 중학교때 우연히 본 동성애 포로노물을 보고 신기하니 자꾸 보다가 중독되어 매일 보게 되었다고 했다. 제가 상담한 동성애자들은 놀랍게도 하나의 예외가 없이 모두가 동성애 포로노물에 중독이 되어있었다. 놀라운 일이다. 일반적으로 동성애 포로노물을 보는 것이 중학교 때부터 시작되고, 하루에 한 시간씩 동성애 포로노물을 보고 자위행위를 하고, 시간이 지나면 뇌가 학습화가 되어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동성애 포르노물을 끓어주면 포르노 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머지 20% 동성애자 되는 이유는 어렸을 때 성인 동성애자에게 성폭행을 당하면 동성애자가 된다. 이것을 ‘각인화 이론’이라고 한다. 이미 언론에 발표된 내용인데, 스스로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한 한 연예인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성인 동성애자한테 성폭행을 당했다. 그런 일이 있으면 빨리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말씀드리고 해결했으면 좋았을 텐데 무슨 일인지 모르고 겁도 나고 해서 가만히 있다가 19살까지 300명에게 다른 남자에게 강제로 성관계를 당했다. 그래서 만약에 이런 경우가 있으면 꼭 목사님이나 선생님에게 말해 해결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동성애자로 살게 되는 것이다.

                (동성애 문제에 대한 강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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