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대기업 CEO가 지하도를 건너다가 길거리에서 연필을 팔고있는 걸인을 보게되었습니다. 다른 행인처럼 그 CEO도 1달러만 주고 연필을 받지 않고 그냥 지하도를 건너갔습니다. 지하도를 얼마 지나지 않아 CEO는 갑자기 걸음을 멈춰서서 왔던길을 돌아 걸인에게 다가갔습니다. “방금 제가 1달러를 드렸는데 연필을 못받았군요. 연필을 주셔야지요.” 걸인은 처음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1달러를 주고 지저분한 연필을 갖고가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였습니다. “자 연필들 좀 봅시다. 이 연필 한자루가 좋겠군요. 사장님” 그러자 거지는 또 다시 이상한 표정으로 CEO를 쳐다보았습니다. “이제 당신은 더이상 거지가 아닙니다.. 당신도 저와 같은 사업가입니다.” 매일 연필을 들고 돈을 구걸하면서 이제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사장님이란 말을 들은 걸인은 갑자기 자신의 자아 이미지가 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사업가..? 그래 맞아.. 나는 연필을 팔았으니까.. 사업가야.. 당당하게 연필을 팔고 돈을 받는 사업가지..!!” 그 CEO의 말에 걸인은 갑자기 자아의 벽이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신이 달리 보기 시작했고 자기 스스로에게 “난 거지가 아니야. 난 거지가 아니야 난 사업가야” 하며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는 걸인이 아닌 사업가로 당당히 성공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그에게 연필을 사주었던 그 CEO를 만나서 “당신은 나의 은인입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고맙다며 찾아왔다는 실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지금 꼭 거지가 아니더라도 우리 스스로의 어떤 벽에 우리를 가두어 버린다면 위 글의 거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싶은데 자신은 전혀 벗어날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벗어날 수 있다고 자아에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아의 벽을 깨부수고 당당히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으로 나오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언제나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당신을 응원하십니다!"" - 옮긴 글 최송연의 목양연가 "은혜의 단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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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이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원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성공의 가치와 내용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이 원하는 것, 뜻하는 바가 세속적인 것이고 자기중심적인 것일 때 이를 성공주의라고 일컫는다. 원하는 것이 영구한 가치가 있고, 그것이 성취되었을 때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그것을 열심히 추구하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성공주의자라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이 좋아하고 세상이 추구하는 돈, 쾌락, 명예, 권력을 좋아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이 성공주의자들이다. 결국 가치관의 문제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타락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데,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원인은 바로 이 가치관의 문제이다. 기독교적인 가치가 오늘날은 교회 안에서도 무시당하고 있다. 많은 신자들이 기독교 교리를 받아들이고 신앙의 대상은 바꾸었지만 가치관은 바꾸지 않은 것이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영원히 소원하고 추구해야 할 삶의 목적과 내용과 그 방편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목회자들도 큰 차이가 없다. 목회자들 중에도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거나 알고는 있지만 확신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보니 계속 세상 풍조에 흔들리고 휩쓸린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세속주의의 광풍에 뿌리까지 흔들릴 지경에 있다.

     

    왕룽의 길

     

    펄벅 여사가 쓴 소설 대지에 나오는 주인공은 왕룽이다. 펄벅은 왕룽의 생애를 통해 중국인들 - 바로 우리 보통 사람들의 인생관이랄까 그 가치관을 동영상으로 찍어 보여주듯 아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왕룽은 부자인 황가네 집에서 소작인으로 살았다. 그는 가난했다. 그런데 전쟁을 피해 피난 갔던 곳에서 뜻밖의 많은 보물을 얻어 부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평생소원이었던 그는 땅을 사들이기 시작하였고 그도 지주가 된다. 그리고 부자가 되어 좋은 가마도 타고 다니며 기방(妓房)에도 들락거리다가 나중에는 아들보다 젊은 기생을 첩으로 삼기도 한다. 아내가 병들어 죽자 미안한 마음에 무덤을 아주 거창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자기가 죽으면 들어갈 무덤도 미리 만들어 둔다.

     

    왕룽은 우리 중의 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룽의 길을 간다. 열심히 돈을 벌고, 돈이 모이면 아파트 평수를 늘이거나 좋은 집을 짓고,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고, 쾌락을 찾아 여유롭게 즐긴다. 소위 성공한 사람들의 삶의 패턴이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무엘처럼 어릴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신앙이 좋아서 그런 대견스런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 동기는 매우 단순하고 유치하였다. 목사 되는 것이 좋아보였기 때문이다. 목사가 되면 잘 먹고 옷도 잘 입고 사람들에게 존경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당시 어린 나에게 있어서 성공한 사람이란 출세해서 도시에 살고, 얼굴이 허옇고, 양복을 입고 다니고, 맛있는 음식을 자주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당시 어린 나에겐 목사가 그런 사람으로 보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유치한 생각은 목사가 되고 난 후에도 상당기간 계속되었다. 스스로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말이다. 목사의 자랑은 교인들이 많은 것이고, 교회당이 크고 아름다운 것이고, 사례금을 많이 받고 좋은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분위기 가운데서 아주 자연스럽게 세속적인 성공관에 물들며 자랐다.

     

    그때는 잘 살아보세가 우리의 노래였고 백성들의 소원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고 이밥에 고깃국을 먹는 것이 꿈이었다. 목사들의 꿈과 비전도, 비록 고상한 신앙적인 용어들로 포장하기는 하지만, 그 근저를 이루고 있는 사상은 이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교회를 크게 부흥시켜 큰 교회당을 짓고 더 많은 사람들을 모우고 그래서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 말이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적인 야심이 뒤섞여 분별이 안 되었으므로 양심의 가책도 거의 없었다. 양심의 가책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성공을 위한 노력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큰 충성이요 자랑스러운 헌신으로 여기기까지 한다.

     

    성장주의와 성공주의

     

    근년에 이르러 교회 성장주의는 목회자 성공주의와 동일한 용어가 되었다. 성장주의가 목회자들을 사로잡아 흔들어왔다. 한국교회의 타락의 주범은 성장주의다. 여기서 말하는 성장이란 본질을 잃어버린 성장이다. 복음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수가 더하여지는 성장이 아니라 단순히 종교인의 수가 더하여지는 성장이다. 이는 경제영역에서의 물량주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많은 목회자들이 7-80년대의 양적 부흥과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 휩싸여 자신들도 모르게 성장주의 곧 성공주의에 함몰돼버렸다.

     

    교회의 본질적 특성을 변질시키고 훼손하는 악한 사상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한국교회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상은 성장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성장주의가 한국교회를 이렇게도 깊이 병들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이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교회성장은 선하고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양적으로든 질적으로든 성장하고 부흥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일부의 진리를 방패로 삼아 세속적 성장주의를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목회자들이 교회성장을 자신들의 공로를 드러내주는 세속적인 명예의 수단으로 사용하면서 성장주의가 교회의 교회됨을 파괴하고 부흥을 왜곡시키며 진정한 성장을 가로막는 악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오늘날 교회성장운동은 많은 경우 바벨탑운동으로 변질돼 있다. 다들 아는 대로 바벨탑운동은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11:4)는 말 그대로, ‘교인들을 많이 모우고 교회당을 크게 짓고 유명해지자는 운동이다.

     

    한국교회가 성장주의에 사로잡힌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7-80년대부터 "많은 교인, 큰 교회당"이 우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전도는 사람 모으기 운동으로 전락했고, 세상 사람들은 교회의 전도를 상업적인 판촉활동으로 여기고 있다. 목회자를 평가하는 교인들의 기준도 교회의 양적인 성장이다. "꿩 잡는 게 매"라는 속어가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자기 목회의 성공과 명예를 위해 혈안이 되어있고 성장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교인수를 늘리기 위해 설교나 전도를 장사하듯 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목사나 교회들이 교인수를 과장한다. 더구나 회개도 없고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세례(침례)를 베풀고, 교회직분으로 교인들의 헌신과 충성을 사려고 이를 매매하듯 하고 있다. 제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일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거룩한 사역"은 말뿐인 경우가 많고 큰 교회로 성장시켜 유명해지는 것에 마음을 빼앗긴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유명함에 따라 붙는 것은 권력이다. 일부 목회자들은 교회의 주이시며 동시에 만주의 주이신 그리스도보다 더 큰 영광과 힘이라도 가진 것처럼 행세하기도 한다. 소위 성공한 목회자들이다.

     

    생계형 목회

     

    한편 성공주의 목회의 뒤안길에서는 생계형 목회가 점점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큰 교회를 세우고 유명해지자는 바벨탑운동형의 성장주의가 이제는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의 떡을 위하여”(13:19) 예언하던 옛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생계주의로 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목회자로부터 눈물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구령사업에 헌신하겠다는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신학수련을 받아 목사가 되고 교회도 개척하였는데, 한두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집세를 낼 돈이 없어 고민해야 하고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골몰해야 했다. 새벽기도 시간이면 기도보다 오늘 당장 얼마의 돈이라도 구해야 하는 일 때문에 당황해하고 있는 자신의 가련한 모습을 발견하고 울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가 질과 양 모두에서 쇠퇴하고 있지만 대형교회들은 여전히 그 영광을 구가하고 있다. 작은 교회의 교인들이 대형교회들로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설교와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있고 또 대형교회가 가진 익명성 때문에 누구의 간섭이나 부담 없이 조용하게 신앙생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곳으로 숨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교회들이 본질적인 기능과 사역에 집중하기보다 교인수 늘이기에 매달리다보니 교회도 결국 세속적인 경제논리를 따라 경쟁이 치열해지게 되고 여기에서 탈락된 목회자들은 우선 생존하기에도 버거운 현실에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성장주의나 성공주의는 큰 교회 목회자들만 갖고 있는 생각은 아니다. 어쩌면 작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더 그러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현실이 너무나 절박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성공이란 말 자체마저 사치스럽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면서, 또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교인 한 명이라도 더 확보해야(?) 하는 절박함에 항상 시달리고 있다. 이러면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는”(10:10) 목회의 목적과 목표와는 점점 멀어지고 희미해진다.

     

    이를 당장 확인하고 싶으면 해외에 있는 교포 교회들에 가보라. 교포 교회들을 보면 이런 현실들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교포사회가 좁다보니 교인 수에 목을 매다시피 하고 있는 교회들의 가련한 모습이 송두리째 노출되고 있다. 복음사역을 위해서라기보다 영주권을 얻기 위해 교회를 개척하고, 생계를 위해 목회를 하는 목사들이 없지 않다.

     

    그런 교회들에 다니는 교인들은 자기들이 다니는 교회에 약간의 불만만 있어도 예사로 교회를 옮긴다. 또 어느 교회로 옮기든 일단은 환영을 받기 때문에 철새 교인들은 그 교회에 다녀주는 것이 그 목회자에게 무슨 혜택을 베풀기라도 하는 듯한 마음으로 등록한다. 어느 교포 교회의 목사는 교인들이 목사들을 가지고 논다.”며 탄식을 했다. ()가 우상이 되다보니 교회의 정체성마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성장주의가 신학교까지 점령

     

    성장주의와 성공주의가 신학교까지 점령했다. 어쩌면 신학교가 성장주의와 성공주의를 보육(保育)했는지도 모른다. 거룩한 소명과 거룩한 헌신으로 수행되어야 할 목회가 상업주의적인 경쟁으로 치닫게 된 데는 목회자 과잉 배출이라는 더욱 근원적이고 심각한 원인이 있다.

     

    먼저 지금 한국에 신학교가 얼마나 될까?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가 발간한 한국의 종교현황(문화체육관광부, 서울 2008)에 보면 개신교가 운영하는 일반대학이 49, 대학원 대학교가 20, 전문대학이 27, 각종학교가 3곳으로 나와 있다(p.117). 여기에 모두 신학과가 있다 하더라도 집계 가능한 숫자는 100곳 이하이다. 그러나 대한예수교장로회란 명칭을 가진 교파만 해도 240곳이며(pp.38-55), 감리교와 침례교와 순복음교회 등 다른 교파들과 합하면 291곳이다. 여기에 파악이 안 된 교파들도 있고, 또 한 교파에 신학교가 둘 이상인 경우들도 많음으로 신학교의 전체수는 대략 잡아도 400여 곳이나 된다.

     

    그리고 여기서 졸업하는 목사후보생들의 수는 역시 적게 잡아도 해마다 일만 명이 넘는다고 볼 수 있다. 이중 몇 %가 목사로 임직하는지 모르나 반만 잡아도 한 해에 5천 명이 배출된다. 목사의 과다 배출은 이미 교회문제를 넘어 사회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다. 목사가 되어도 갈 교회가 없으므로 그 가정이 극빈가정으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문체부의 위 통계자료(200812월 기준)로 보면 교회 수는 58,612곳이고 교직자 수는 95,596명이다. 필자가 속한 예장 고신의 경우 2015년 현재 교회 수는 2,049이고 목사 수는 3,563명이다. 여기서 합당한 사례금을 드리면서 목회자를 청빙할 수 있는 자립된 교회는 반도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목회자들이 사역지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교회가 목회자를 구한다는 광고가 나오면 5-60명이 지원하는 것은 보통이고, 100명이 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교회서는 목회자 청빙을 일반 회사들이 직원을 채용하듯 한다. 이렇게 해서 채용된(?) 목사에게 무슨 영적인 권위가 있겠는가? 이런 경쟁을 뚫고 부임한 목사가 자신의 권위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회를 양적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사람 모우는 일에 혈안이 되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신학교들은 왜 이렇게 많아졌나? 줄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신학교가 많아진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중심 말씀중심에서 벗어나 인본주의에 빠지면서 우주가 폭발하듯 수많은 교파들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열된 교회지도자들은 교파주의에 빠져서 반드시 자체적으로 신학교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다 자기 교파의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많은 목사후보생들을 배출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량주의적인 성장주의가 신학교육까지도 지배해버린 것이다.

     

    이런 잘못된 생각과 정책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문제들의 심각성은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이는 교회의 교회됨 곧 그 정체성 자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먼저 목회자들의 수준이 심각하게 저하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교회의 건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자격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도자가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를 한다면 과연 그 교회가 교회다울 수 있겠는가? 오늘날 목회자들의 수준은 상식 이하의 수준까지 추락하고 있다. 근년에 목회자들 가운데서 일어난 사건들을 보라. 일반사회에서 일어나는 범죄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전에는 사이비 이단 종파에서나 일어났던 범죄들 곧 음란, 사기, 폭력, 살인, 방화 등의 범죄들이 멀쩡한 기성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 가면 한국교회는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가 돼버릴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마저 든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종교는 성경적 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가 돼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믿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나타났을 때 그를 거짓 메시야라고 생각하고 죽여 버렸다. 그럴 정도였으니 유대교는 다른 종교가 되었다는 정도를 넘어 메시야 종교를 대적하는 사탄의 종교가 돼 있었던 것이다. 중세기의 타락한 천주교 역시 기독교로부터 너무나 멀리 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성공주의를 넘어서

     

    영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현상을 넘어 실상을 본다(11:1-3).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본질을 보지 못하고 현상에 마음을 다 빼앗긴다. 그래서 잘못된 성공주의에 빠져서 타락의 경사로를 빠르게 내려가게 된다. 본질을 찾아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이 더 확실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존재케 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말한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11:3b).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시작이다.

     

    참으로 성공한 사람은 실상을 알고 실체를 붙든 자다.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는 것, 세상의 그 어떤 부귀영화보다도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 성공이다. 히브리서는 모세의 믿음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믿음으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11:24-26) 세상적 가치와 하나님나라의 가치가 얼마나 뚜렷하고 분명하게 대조되고 있는가. 세상의 눈으로 보면 모세는 어리석은 자요 실패자이다.

     

    개종 후의 사도 바울도 보자. 과연 그가 성공한 사람인가? 그는 구세주를 만난 것이 아니라 환란의 주를 만난 자처럼 살아야 했다. 핍박을 받아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기며 살아야 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이런 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3:7-9a)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 가치 있고 자랑스럽게 여겨졌던 것들이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에는 배설물처럼 여겨졌다. 여기다 우리가 무슨 말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목회자들은 교리도 알아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성경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을 알아야 하고 이를 교인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세계가 무엇인지,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며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인생의 인도자가 될 수 있다. 주일에 빠지지 않고 교회 잘 나오고, 기도 많이 하고, 연보 잘 하고그러면 신앙 좋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최고 가치인 사랑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줄 아는 사람, 이웃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들의 고난에 기꺼이 참여하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

     마음을 새롭게 해야

     

    내가 목사가 되고 3년쯤 된 어느 날 아침 나는 성령으로부터 로마서 12:1-2 말씀을 새롭게 받았다. “새롭게 받았다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특별하고 강력한 감동으로 본문을 읽게 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로마서의 전반부는 11장까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이신칭의라고 요약할 수 있다. 후반부는 12장부터 시작되는데 그 내용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12:1,2의 말씀은 크리스천의 삶의 원리라고 부를 수 있는 말씀이다.

     

    1절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 은혜를 감사하며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가 되도록 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2절에서는 삶이 예배가 되는 그런 생활을 어떻게 살아낼 수 있는가를 설명한다. 그 첫 번째 말씀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세대라고 번역된 낱말 아이온(α??ν, α??νο?)”은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매우 힘든 말이다. NIV에서는 the pattern of this world라고 번역했다.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삶의 패턴이 있고 질서가 있다.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가 있다. 우리 기독인들은 이것을 본받거나 따라서는 안 된다고 말씀한다.

     

    둘째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 마음은 생각을 말한다. 생각이 바뀌고 사고방식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교회의 신자들의 가장 큰 약점은 가치관이 안 바뀐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 가졌던 그 생각 그대로 살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미신종교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서 그것을 우리의 가치로 삼고 우리의 삶의 목포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범사에서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요 그 뜻이 성취된 영역이 아닌가. 그날 아침 나는 이 말씀 앞에 무릎을 꿇었다. .

     

     

     

    http://www.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192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그림같은 풍경-단풍 과 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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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지랖 여사님의 하루 교회 마당을 수리해야 하고 이곳에 이사를 온 후 이런저런 일들이 산재해 있다. 물론 내가 직접 삽을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점심도 해 날라야 하고 이곳저곳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벅찬 것인지 아침에 눈을 뜨니까 전신이 다 쑤시고 아프다. 모든 세포가 화를 내며 살려달라고 일제히 일어나 아우성치며 데모하는 듯... 아야야....!! 몸살 기운이 도는 지 열도 나고 어깨가 내려앉는 듯 욱신거린다. 온종일 누워서 배겨볼까? 그 보다는 사우나에 가서 땀이라도 빼고 세신사에게 몸을 맡겨 조금은 주물러서라도 풀어주어야 할 것 같다. 그렇지만 한국과는 다르게 엄청 비싼 세신사 비용... 개척교회 사모로서 만만치가 않다. 그래도... 평생을 열심히 일만 했으니까 한번 쯤 나도 호강을 좀 해봐야징~ 결심을 하고 지난 번 놀러온 딸네미가 엄마 용돈하라며 아빠 몰래 손에 쥐어주고 간 용돈을 꺼내서 (아빠 손에 들어가는 날엔 모두 교회를 위해 사용하기 바쁘다.ㅎ) 주머니에 넣고 가까운 사우나에 갔다. 내 차례를 기다리면서 따뜻한 방을 왔다갔다 오랜만에 느긋함을 만끽해 보려는데... 헉! 우리의 전도 대상자인 옆집 아주머니가 언제 온 것인지 혼자서 때를 밀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한다? 그냥 모른척 해버릴까? 나도 힘이 들어서 세신사에게 몸을 맡겨야 할 형편이니... 모른척 해버리기에는 뭔가 찝찝~ 생각다 못해서 주춤주춤~ 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혼자 오셨어요?" 낯선 타향살이에 그럼 혼자 오지 누구랑 온단 말인가? "제가 등을 밀어 드릴께요." 괜찮다며 사양하시는 아주머니의 등에 붙어서 있는 힘을 다 해서 싹싹 ~! 그리고 나는 세신사에게 거금(?)을 내고... 옴마야! 이 오지랖은 뭘로 감당할까나?ㅎㅎ 그래도 전도대상자 아주머니를 어떻게 모른척 할 수 있을까? 몸이 힘이 들어도 그래야만 마음이 좀 편한 걸 어쩌랴.... -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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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규모 6.2 지진 지역 인근서…로마서도 느껴져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이탈리아 중부에서 26일 밤(이하 현지시간) 강력한 지진이 2차례 연속 발생했다.

      이탈리아 국가지진화산연구소와 미국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이날 오후 7시10분께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 주의 마체라타 인근에서 리히터규모 5.4의 지진이 일어난 뒤 약 2시간 뒤인 오후 9시18분 첫 지진보다 더 강한 규모 5.9의 지진이 또 발생했다.

      1차 지진의 진앙은 마르케 주 마체라타 근처의 산간 마을 비소 남서쪽 7㎞으로 파악됐고, 2차 지진은 움브리아주 페루지아와 마체라타 사이로 나타났다고 이탈리아 지진화산연구소는 밝혔다.

      이번 지진으로 1차 지진의 진앙인 비소에서 2명의 부상자가 나온 것으로 보고된 가운데 진앙 인근 마을에서 전기가 끊기고, 건물 파편 일부가 떨어지는가 하면 로마 북부 고속도로가 산사태 우려로 폐쇄되는 등 피해 신고가 잇따르고 있다. 하지만 현지 시간이 밤이라 피해 규모 파악이 쉽지 않은 형편이다.

      또, 수도 로마를 비롯해 진앙과 인접한 페루지아, 아시시 등 이탈리아 중부 지역 전역에서 진동이 감지됐다. 이는 두 차례의 지진이 지하 10㎞로 비교적 지표와 가까운 곳에서 일어나 지진파로 인한 충격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로마에서도 내진 설계가 안된 오래된 건물에서 진동이 심하게 느껴진 탓에 사람들이 밖으로 대피하고, 이탈리아 외교부가 건물을 소개하는 등 혼란이 잇따랐다.

      伊 중부서 연속 지진…최대 규모 5.9 (비소<이탈리아> EPA=연합뉴스) 이탈리아 국가지진화산연구소와 미국지질조사국(USGS)에 따르면 26일(현지시간) 저녁 7시10분께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 주의 마체라타 인근에서 리히터규모 5.4의 지진이 일어난 뒤 약 2시간 뒤 첫 지진보다 더 강한 규모 5.9의 지진이 또 발생했다. 1차 지진의 진앙은 마르케 주 마체라타 근처의 산간 마을 비소 남서쪽 7㎞으로 파악됐고, 2차 지진은 움브리아주 페루지아와 마체라타 사이. 사진은 이날 비소 인근 빌라 산탄토니오 마을에서 한 주민이 지진으로 크게 파손된 건물을 지켜보는 모습. bulls@yna.co.kr

      또, 진앙지인 비소를 비롯해 진동이 강하게 느껴진 지역에서도 공포에 질린 사람들이 집 밖으로 뛰쳐나오고, 소방 당국에 전화가 빗발쳤다고 이탈리아 안사통신은 전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지난 8월 24일에도 이번 지진의 진앙과 비교적 가까운 아마트리체, 페스카라 델 트론토 등 중부 산악 지대에서 규모 6.2의 강진이 일어나 300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나온 바 있다.

      지진 전문가들은 이날 지진이 지난 8월 지진의 진앙과 인접한 점을 들어 이날 2차례의 지진도 당시 지진의 여진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전문가들은 또 2개월 전 지진으로 지반이 약해져 있는 데다 이번 지진 역시 진앙이 얕아 후속 피해가 잇따를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26일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한 이탈리아 중부 지역 [EPA=연합뉴스]

      ykhyun14@yna.co.kr


      (창세기 35장) 세겜의 참극(慘劇)

      창세기 34장에 기록된 세겜에서 야곱의 아들들이 저지른 처참한 살인과 약탈의 이야기도 성경에 나오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 중 하나라 할 것입니다. 야곱은 얍복강에서의 처절한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목숨을 건졌으면 당연히 벧엘로 돌아가서 하나님께 감사의 예물과 십일조를 드리기로 한 약속을 지켰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곁길로 빠집니다. 풍요롭고 살기 좋은 세겜에 땅을 사고 거기에 주저앉습니다. 그리고 참극은 시작됩니다.

      딸 디나가 세겜성에 놀러갔다가 하몰의 아들 세겜 추장에게 강간을 당합니다. 그런데 강간을 한 세겜은 강간을 당한 디나에게 반하여 아버지와 함께 야곱에게 와서 무슨 빙물이든지 요구하는대로 드릴테니 딸 디나와 혼인하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서로 통혼하며 함께 살자고 제안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혼인의 조건으로 세겜족속 모든 남자들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그래놓고 세겜 남자들이 할례를 받고 사흘쯤 지나서 아파서 꼼짝 못 할 때 시므온과 레위, 두 아들이 칼을 차고 가서 세겜 남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약탈을 자행합니다. 그리고 아들들은 이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서 두려워하는 아버지 야곱에게 말합니다. “더러운 이방인들이 우리 디나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옳단 말입니까?”

      “감히 우리 디나를......?” 그렇게 생각했다면 애당초 세겜에는 왜 주저앉아 살았단 말입니까? 아들들이 이런 엄청난 악행을 저지르자 야곱은 이웃마을들이 연합하여 자신들을 공격할까봐 두려워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 거기에 거하며 단을 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의 가족은 이방신상들과 장신구들을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버리고 옷을 바꾸고 벧엘로 떠나는데 하나님께서는 사방의 모든 마을들에 두려움을 크게 하셔서 아무도 야곱의 가족을 추격하는 자가 없도록 하십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째서 무슨 빙물이라도 달라는대로 주겠다고 매달리는 착한(?) 청년 세겜과 억울한 죽임을 당한 세겜사람들은 외면하시고 악행을 저지른 야곱일가를 일방적으로 도우시고 보호하시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어째서 이 악한 야곱의 아들들을 징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보호하신 것일까요?  

      알기 쉽도록 어떤 비유를 하면 좋을까요? 만일 당신의 어린 아들이나 딸이 똥을 쌌다고 칩시다.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아들, 딸을 닦아주려고 깨끗한 화장지나 티슈를 아낌없이 쓸 것입니다. 깨끗하기로 치면 화장지가 훨씬 더 깨끗한데도 말입니다. 만일 당신의 자녀가 누구에게 큰 잘못을 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상대방이 칼을 들고 죽이려고 달려온다면 당신은 당신의 자녀를 그들에게 내어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야곱의 가족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얍복강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신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인류구원을 이루셔야 합니다. 깨끗하고 말고나 악하고 착함이나 도덕이나 능력이나 자격이나 상태가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무조건 야곱이 세상 보다 귀하며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세겜족속 보다 천배, 만배, 비교할 수 없도록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세겜족속과 혼인하고 세겜에 주저앉아 그들과 혼합되고 소멸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렇게 빼앗기거나 잃을 수가 없으신 것입니다.

      당신도 그렇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내어주시고 얻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당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로 구원받은 자녀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끼리의 더 착하고 덜 악하고 따위의 도덕기준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구원받은 당신은 세상의 어떤 사람들보다 천배, 만배, 억배, 그보다도 더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아들들을 일방적으로 편드시고 보호하셨던 것처럼 당신도 일방적으로 편드시고 보호하실 것입니다. 설사 당신이 실수하고 그들이 열배, 백배, 천배 옳았다 해도 말입니다. 어떠한 희생이나 대가를 치르더라도 건져내시고야 말 것입니다. 당신에게 뿌린 독생자의 피 때문에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그들이 세겜족속과 통혼하고 그곳에 눌러앉아 살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것이 더욱 큰 비극이요 참극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세속에 물들지 마십시오. 그들과 섞이거나 혼합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천하보다 귀한 당신 때문에 세겜의 참극 같은 참극을 연출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 너는 내것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의 대신으로 주었노라.... 이사야 4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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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합중국 장로교회의 몰락이 주는 교훈

      미국 장로교 몰락에 있어서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세속주의적 기반의 자유주의 신학이 주는 영향력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장로교가 최종적으로 몰락한 시기는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발발했던 시대였다. 당시 남북 전쟁의 여파로 미국 정신은 한번 더 세속주의로 치닫게 되었다. 이에 편승한 미합중국 장로교는 남북전쟁 이전에 매우 큰 신학적 견해 차이로 갈라진 구학파와 신학파가 전쟁 기간을 거쳐 새롭게 연합을 모색하였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함께 할 수 없듯이 장로교 총회는 다른 신학적 정체성을 가진 집단과 연합할 수 없다. 그러나 미합중국 장로교는 남북전쟁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하면서 미합중국 남장로교와 북장로교 총회가 연합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이미 있었던 신학적 쟁점을 뒤로하고 연합한 형태인 혼합주의적 장로교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한 세대가 넘어가기도 전에 미합중국 장로교는 신구약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고 독일에서 발흥하여서 그 시대 신학으로 자리잡은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시대의 보편성 앞에 진리의 보편성이 무너진 것이다. 구 프린스턴의 몰락과 함께 미합중국 장로교 총회는 더 이상 전통적 의미의 장로교가 아닌 형태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비참한 상황의 도래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당시 유럽으로부터 다양한 신학적 이론들이 들어올 때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과학과 세속주의에 물든 신학의 결과물들이 무분별하게 수입되었다. 아직 유럽 신학의 역사를 제대로 분별하여서 헤아리기 어려운 미합중국 장로교는 그 시대에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면서 몰락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장로교회는 계속 분열의 길을 걸어왔다. 1952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37차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를 파면하고 제명한 일로 말미암아 예장과 기장이 분열되었다. 이후로 고려파의 환원, 예장합동과 통합의 분열 등 크고 작은 분열이 계속되었다. 그 막바지에 우리 교단인 예장합신이 존재하고 있다.


      지난 역사를 통해 미국장로교회가 어떻게 변질되었는가를 교훈삼아 우리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보다 확고하게 정립해야 할 것이다.


       

       

      http://rpress.or.kr/xe/369899/

      출처: 영적 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가슴을 뜨겁게 해줘

          머리는 차갑게 해주고

          가슴은 뜨겁게 해줘야 해

          냉정하게 머리로 판단하고 결정했어도

          가슴으로 뜨겁게 안아줄 수 있어야 해


          사람들은 머리가 좋아야

          손발이 고생 안한다 하지만

          가슴이 없으면

          온 몸이 고생을 하는거야


          머리의 크기는 한계가 있지만

          가슴의 크기는 한계가 없어

          온 우주를 끌어안고도 남음이 있지

          머리는 받아들이고

          가슴은 차곡 차곡 쌓아두는거야


          머리에 쌓아두려 하지마

          그러면, 머리가 터져버려

          가슴에 쌓아두면

          사랑으로 싹이 트더라구

          그래서 가슴으로 하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야


          머리가 차가와지면

          세상 이치에는 밝아도

          가슴이 차가와지면

          그거 로봇이나 별 차이 없어


          가슴의 빗장을 열어봐

          머리로 아니 보이고

          머리로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가슴으로는 보이고 이해가 돼


          가슴을 끌어안아 주려고 해봐

          머리끼리 부닥치면

          다툼이 생기지만

          가슴끼리 부닥치면

          더불어 가는 삶이 될 수 있어


          사랑은

          용서는

          베풂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고

          가슴으로 하는거야.


          허참...

          정말이라니까!?



          -해처럼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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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의 말씀의 배경은 7년 흉년의 때 중간 시점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2년이 지나고 있을 때 즈음입니다. 창세기 45장의 말씀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요셉과 이스라엘 민족을 예표하고 있는 야곱 및 그의 아들들이 만나 극적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화해하며 회복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구구절절 7년 대환란 때의 이스라엘의 회복과정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한절한절 묵상하며 성령님의 음성에 귀기울여 봅니다.



      1. 예수님이 이스라엘에게 자신을 나타내심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창 45:1)


      -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 타는 듯한 긍휼의 마음이 봇물터지듯 터져버렸습니다. 요셉이 방성대곡을 하듯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장자 이스라엘을 향하여 방성대곡하십니다.


      요셉이 자기를 형들에게 직접 알렸듯이...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계시해 주고 계시며 예수님을 믿는 메시아닉쥬(유대인크리스천)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이방에 팔아넘긴 이스라엘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창 45:4)


      - 형들이 요셉을 이방땅에 은전 이십에 팔아넘겼듯이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손에 은전 삼십에 팔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이방 교회가 예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3. 7년 대환난 중간에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깨달은 이스라엘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창 45:6)


      - 7년 흉년기간의 2년이 지난 중간 시점에서 형들은 자기들이 팔아넘겨 생사를 알 수 없었던 동생 요셉이 이방나라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1900년동안 예수그리스도가 메시야임을 믿지 않고 살다가 마지막 7년 대환난때에 예수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게 될 이스라엘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4. 온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 45:7-8)


      - 이스라엘이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받아들였다면 AD70년 예루살렘의 함락도 없었을 것이고, 1900년 동안 전세계에 흩어져 혹독하게 핍박을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며 곧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보좌에 앉아 통치하시는 천년왕국이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방인들은 구원의 기회가 전혀 주어지지 않은 채 죄로 인한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복음은 이방인에게로 전달되었고 예수님은 이방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이제 영적인 장자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주님 품으로 돌아오는 일만 남은 것입니다.



      5. 대환난의 남은 기간동안 이스라엘을 보호하실 것에 대한 약속


      "흉년이 아직 다섯 해가 있으니 내가 거기서 아버지를 봉양하리이다 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속과 아버지의 모든 소속이 결핍할까 하나이다 하더라 하소서" (창 45:11)


      - 서두에 언급했듯이 아직은 흉년의 때(야곱의 환난의 때)입니다. 적그리스도가 판치는 개국이래 전무후무한 환난의 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강권적 보호가 없다면 이스라엘은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앞으로 남은 5년의 흉년을 통과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특별한 방법으로 보호하십니다. 마치 요셉이 야곱과 그의 가족들의 필요를 생각하여 보호하듯이 말입니다.



      6. 유대인 전도자들을 세워 이스라엘 전체를 돌아오게 하심


      "당신들은 나의 애굽에서의 영화와 당신들의 본 모든 것을 다 내 아버지께 고하고 속히 모시고 내려오소서 하며 자기 아우 베냐민의 목을 안고 우니 베냐민도 요셉의 목을 안고 우니라 요셉이 또 형들과 입맞추며 안고 우니 형들이 그제야 요셉과 말하니라" (창 45:13~15)


      - 요셉을 먼저 알아보게 된 열아들들... 그들은 야곱의 집안에서 아웃사이더들이었습니다.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했던 레아와 첩들을 통해서 태어난 형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마음이 가난하고 상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만나고 진정으로 회개하며 웁니다. 오늘날에도 정통 유대인들과 메시아닉쥬(유대인크리스천)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보고 받아들인 메시아닉쥬들이 정통 유대인들을 전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대환난이 시작되면 메시아닉쥬들로부터 복음을 들은 유대인들 중에서 계시록에 나오는 십사만사천의 유대인 전도자들이 지파별로 세워질 것입니다.



      7. 이스라엘의 회복을 기뻐하는 교회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소문이 바로의 궁에 들리매 바로와 그 신복이 기뻐하고" (창 45:16)


      최근 이스라엘이 회복되고 있고 복음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이 교회에 많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교회가 몰랐을 때에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마음을 닫고 유대교라는 한갓 이방종교로 취급했었는데... 이제 하나님의 시선이 이스라엘땅을 향하고 계시다는 것을 교회가 깨닫고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8. 복음의 바톤터치가 이루어짐


      "이제 명을 받았으니 이렇게 하라 너희는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비를 데려오라" (창 45:19)


      요셉은 형들에게 수레를 주면서 가나안땅에 있는 아비 야곱과 그 자녀 및 아내들을 데려오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회심한 유대인들을 통하여 아직도 고집스럽게 유대교에 집착하고 있는 정통 유대인들을 전도하라고 보내시는 것과 같습니다.



      9.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고 민족적으로 회개하는 이스라엘


      "고하여 가로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을 믿지 아니하므로 기색하더니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 아비에게 고하매 그 아비 야곱이 요셉의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창 45:26-27)


      - 야곱은 애굽에서 돌아온 아들들의 말을 처음엔 믿지 않습니다. 요셉이 살아있다는 말에 기절을 할 정도로 놀랍니다. 그런데...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합니다.


      - 대환난때에도 정통유대인들에게 회심한 유대인들 중에 세워진 두 증인을 보내어 정통 이스라엘인들의 마음을 돌이키실 것입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고 회개할 것입니다. 수레는 '복음'을 예표합니다. 유대인들은 복음의 수레에 실려 민족적으로 예수그리스도께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10. 이스라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창 45:28)


      이제 드디어!
      야곱이 죽기 전에 그토록 마음에 품고 그리워했던 요셉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혹독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밟혀 온 세월 속에서 가슴에 사무치도록 기다려온 메시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민족적으로 깨닫고 민족적으로 거듭나게 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비밀에 대하여 로마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가 모르기를 원치 않아서 롬 9-11장에 매우 디테일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인 이스라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아야 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모든 교회들은 하나님의 시선이 향해 있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반드시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저희 죄를 없이 할 때에 저희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롬 11:25~27)


      이 말씀은 창세기 45장에 장황하게 서술한 내용 그대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결론짓고 있습니다. 다른 부연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명확합니다.


      지금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온 시점이며 이제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들림사건을 첫단추로 하여 7년대환난과 예수그리스도의 지상재림이라는 일련의 사건이 순차적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의 시나리오를 머리속에 선명하게 담아두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 주님 오실 것처럼 복된 소망가운데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


      <기도>
      사랑하는 주님,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대해 자세히 조명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제는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원합니다. 그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어떻게 흘러가고 계신지를 더 많이 깨닫게 하소서.


      그리고 이방인이었고 언약에 대하여는 외인이었던 저를 은혜로 구원해 주신 그 크신 사랑에 항상 감격하며 살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의 은혜를 누리며 천국의 기쁨 가운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글: 곰팅이



      -아이야, 안심하라-

      본문읽기:마태복음 9장 1-8절

      1.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작은 자야 안심하라-

      '작은 자'란, 아이를 말합니다. 이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누가복음 3장에서 12살되신 예수님을 향해, '아이야'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중풍병자가 아이라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부형같은 심정으로 친근히 부르는 호칭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중풍병자가 아이처럼 심령이 낮아져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걷지도 못하고 침상에 실려 온 중풍병자는 심신이 많이 약해져 있습니다. 혼자서는 대소변도 보지못하는 몸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게 되자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안심하라"고 하신 것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그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데리고 온 자들(2-4명으로 추정)과 중풍병자를 포함해서 하는 말합니다. "그들"의 중심인물은 중풍병자입니다.

      원문에는 '사람들'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데리고오다'라는 동사가 복수형태로 되어 있을뿐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 안심하라고 하실 우리 주님이 아니십니다.

      그러고보면 중풍병자는 믿음으로 나아오되,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아이같이 자신을 낮춘 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심히 애통하며 몸부림쳤습니다. 죄의 무서움과 죄책이 무엇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같이 심령이 낮아졌던 것이지요.

      천국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며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자, 혼자서는 올 수가 없었기에 침상을 든 친구(아니면 지인이나 가족)들과 함께 나아온 것이지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사죄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빈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중풍병자의 중심을 보시고 그렇게 사죄의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죄를 사하시는 권능을 나타내고자 무조건 그렇게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창세전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을 주창하는 교리체계를 따르는 자들이 그렇습니다.

      죄인이 믿음으로 주께 나아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중심으로 돌이켜 자복하면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라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아무리 주홍같이 붉은 죄일지라도 양털보다 더 희게, 흰눈보다 더 희게 씻어주시는 것이지요.

      더럽고 냄새나는 누더기를 걸치고 왔을지라도 의의 세마포 흰옷-빨래하는 자가 도무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는-으로 갈아입혀주시는 것입니다.

      사죄의 은총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무감각한 자는 위험합니다. 바늘로 찔러도 아프지 않다는 것은 이미 영적으로 큰 중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전신마취가 된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양심에 화인맞은 자들이 대개 그렇습니다.

      죄에 민감하여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경우는 소망이 있습니다. 가책을 느끼면서도 계속 죄가운데 머문다면 양심이 서서히 무디어져서 나중엔 가책도 안 느끼게 됩니다.

      어린 아이와 노인을 놓고 보면 알 수가 있지요. 노인들은 마음도 몸처럼 굳어져서 회개하고 바른 믿음을 가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로마서-

      죄에 대해서 민감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지중에라도 죄를 지었다면 즉시 회개(죄의 자백)하고 돌이켜 죄에서 멀리 떠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입에 발린 습관적 회개인 지 중심으로 돌이켜 통회자복하는 지를 다 아십니다.

      회개하는 마음을 주께서 받으시는 자마다 성령께서는 "안심하라"는 말씀을 우리 심령에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지난 번 글에서,

      하나님 나라(천국)백성의 특징 중 하나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죄를 짓고서도 안심한다면 결코 누릴 수 없는 복록입니다.

      죄인된 자리에 계속 머물면서,

      어떻게 의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참된 평안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기쁨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필자는 예전에(20여년 전),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24시간 내내 누려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장장 6개월이나요.

      그 당시 어떤 목사님이 그런 경우가 참 더물다고 하더군요.

      배에서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더군요.

      가슴에는 기쁨의 샘이 터져 한없이 솟아나고요.

      하나님의 의가 온 심령과 육체와 삶에 부어져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감 절감 통감케 되더군요.

      그러고 보면 주님이 괜히 안심하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내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다고 생각되면,
      마음을 물같이 쏟으면서 통회자복하십시오.

      주님은 중심으로 돌이키는 자를 결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의 바다는 한없이 큽니다.

      사죄의 은총을 받고 그릇이 준비된 자에게는 영육간에 구하는 것을 부어주십니다. 믿음의 분량만큼요.

      진심으로 회개하셨다면 이제 안심하십시오.

      여전히 정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면 신앙의 기초를 다시 한 번 점검해보십시오.

      반석 위에 신앙의 집을 짓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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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그맨 김수용씨가 CTS 기독교 티비 고민있수다 프로그램에 나와서 개인적으로 동성애가 싫다고 했다가 곤욕을 치뤘다고 합니다. 아래가 그 장면인데요.



      개인적으로는 싫어한다는 발언이었습니다. 이 방송에서는 이유를 차마 말할 수 없었다고 하는데요. 나중에 한 신문사와의 인터뷰에 그 이유를 말했네요. 아래는 스타뉴스와의 인터뷰 기사


      "대학교 1학년 때 놀이터에서 게이를 만났어요. 그 당시에는 게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죠. 제 또래가 놀이터에서 '여기 사세요?'라고 말을 거는데 제 허벅지를 만졌어요. 처음 보는 사람이 내 허벅지를 만져서 뿌리쳤죠. 그랬더니 게이라는 표현은 안 쓰고 '호모라고 아느냐. 내가 그건데 좀 관심이 있다'라면서 허벅지를 만지더라고요. 그때부터 혐오감이 항상 있었어요."


      개인적으로 매우 기분 나쁜 경험이었을 겁니다. 성추행이잖아요! 그런데 이 방송이 나간 직후 동성애를 싫어한다고 했다고 욕을 많이 먹었다고 합니다. T.T  많이 시달리셨는지 그래서 앞으로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노코멘트 하겠다고도 하는데요. 좀 안타깝네요. 


      기사 댓글을 보니 이런 것들이 있네요.

      - 좋다고 말하는 건 자유이고 싫다고 말하는 건 안된다는 건가

        그건 무슨 논리인지 모르겠음

      - 이건 무슨 공산당도 아니고

      - 동성애를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자유까지 일반화 획일화시킬 일인가?
        동성애자들 욕심도 많네. 김수용씨가 욕먹을 일도 아니고
        오히려 소신있는 발언을 한 용기에 이해가 간다.

      동성애자들에 대한 차별을 한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역차별을 하고, 다른 의견에 대한 입을 막습니다.

      지금도 이러한데,
      만약 (동성애)차별금지법이 통과된다면,
      어찌 될지는 안봐도 훤히 보입니다.


      관련기사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564128



      출처: 갓톡

      보이지 않는 빛의 정체


      명의 아내를 둔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첫째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나깨나 늘 곁에 두고 살아갑니다.


      둘째는 아주 힘겹게 얻은 아내입니다.
      사람들과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면서

      쟁취한 아내이니 만큼
      사랑 또한 극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둘째는

      든든하기 그지없는 성과도 같습니다.


      셋째와 그는 특히 마음이 잘 맞아

      늘 같이 어울려 다니며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넷째에게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녀는 늘 하녀 취급을 받았으며,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 했지만

      은 내색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저 묵묵히 그의 뜻에 순종하기만 합니다.


      어느 때 그가 머나먼 나라로 떠나게 되어 

      째에게 같이 가자고 합니다.


      그러나 첫째는 냉정히 거절합니다.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둘째를 가자고 했지만 둘째 역시 거절합니다. 


      첫째도 안 따라가는데 

      자기가 왜 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는 셋째에게 같이 가자고 합니다.
      셋째는 말합니다.
      "성문 밖까지 배웅해 줄 수는 있지만 같이 갈 수 없습니다." 라고



      그는 넷째에게 같이 가자고 합니다.
      넷째는 말합니다.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 따라가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넷째 부인만을 데리고 머나먼 나라로 떠나갑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 이야기의 "머나먼 나라"는 죽음의 길을 말합니다.


      그리고 "아내"들은 "

      살면서 아내처럼 버릴 수 없는

      네 가지"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아내는 육체를 비유합니다.
      육체가 곧 나라고 생각하며 함께 

      살아가지만 죽게 되면

      우리는 이 육신을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과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면서 얻은

      아내는 재물을 의미합니다.
      든든하기가 성과 같았던 재물도

      우리와 함께 가지 못합니다.


      셋째 아내는 일가 친척, 친구들입니다.
      마음이 맞아 늘 같이 어울려 다니던 이들

      문 밖까지는 따라와 주지만
      끝까지 함께 가 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나를 잊어버릴 것이니까요.


      넷째 아내는 바로 마음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은 별 관심도 보여주지 않고

      궂은 일만 도맡아 하게 했지만
      죽을 때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나서는 것은마음뿐입니다.


      어두운 땅속 밑이든 환한 신작로든

      지옥의 끓는 불 속이던

      마음이 앞장서서 나를 데리고 갈 것입니다.



      살아 생전에 마음이 자주 다니던 길이

      음습하고 추잡한 악행의 자갈길이었으면

      늘 다니던 그 자갈길로 나를 데리고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과 덕을 쌓으며 늘 걸어 다니던 밝고 

      환한 길로 나를 데리고 갈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어떤 마음으로 어떤 모습으로 전반전
      인생후반전이 더 중요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런 글이 있지요.


      "무룻 지킬만한 것보다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



      보이는 빛은 : 해,달,별 그리고 번쩍빛나는 것들<창1:15>
      보이지 않는 빛은 : 예수 어린 양의 빛 <계21:23>

      위에 언급한 어떤 마음과 모 같은 것을

      도덕과 와 수양과 고행으로으라고

      어렵게 만들어 놓지 않았으니

       아래 세십자가에서 찾아야만 합니다.


      의 십자가 <눅23:33-43>


      1. 지옥가는 십자가 <39절>

      숨을 거둔 후 영원히 후회하는 처소로 감


      2. 천국가는 십자가 <40-42절>

      진실한 믿음으로 회개,


      3. 영광의 십자가, 대속의 십자가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이 세가지 십자가위에 메달려서

      6시간 동안 고통을 받고 살아가야 할 운명이지만

      이왕 고통을 받고 살아갈 바에 차라리

      멀리가 아닌 바로 옆에

      우리의 죄를 대신 갚기 위해 십자가에 함께 달리신 

      인류의 구원주 예수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기만 하며,


      예수그리스도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말하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진주만에서 벤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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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제
       
      의롭다 하신 은혜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아멘.

      예수님의 제자 가룟.유다처럼 소위 외적(外的) 부르심을 받아 교회 를 다닐 수는 있어도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확실치 않습니다.그래서 오늘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증을 위한 여러 말씀 중에 <의롭다 하신 은혜>에 대해 확신을 얻고자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선택하셨기에 의롭다 하심 우리가 잘 믿어서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러주셔서 믿음 으로 나아올 때 의롭다 해주신 것입니다. 본문에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 라고 하는 말씀처럼 칼빈은 하나 님이 우리를 선택해서 구원 얻게 된다고 했습니다. 엡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 세상 만들기도 전 에 택정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롬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 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어쩌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 싶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같은 아담 후 손으로 나서 같은 죄인입니다(롬6:23). 대하6:3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기로 작정되고 어떤 이는 유기되어 버 려지냐, 이겁니다. 이런 반문이 있을 것을 알고 바울은 답하기를,롬 9:에서 토기장이의 비유로 설명합니다(사29:16,렘18:). 롬9:20-21‘20.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 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고 합니다. 피조물로서 의 질문의 한계를 말합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전도하실 때, 요6:44‘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 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이 구원의 대상을 마음대로 하실 수 없고 성부 하 나님의 작정을 따라 역사하실 뿐이었습니다. 마11:27‘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 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 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실 때 제자의 발을 씻기시며 하신 말씀에서, 요13:10-11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 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 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 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이 말씀은 가룟.유다는 온 몸을 씻지 않았다는 말씀으로 그는 중생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유다를 두고, 마26:24 ‘..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구원 받을 자에 대해 그리 말씀하시 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성경만 봐도 구원은 선택된 사람들이 부르심을 얻게 된 다는 것이 확실해집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이끌려 나온 우리는 은 혜를 입은 자요 얼마나 놀라운 복을 받은 자인가를 감동받아야 합니 다. 2. 의롭다 하심의 영적 확신 교회를 나와도 하나님께서 의롭다하시는 속죄의 은혜를 입지 못하고 단순히 예수 종교인으로 살다보면 환난을 받을 때 완전히 좌절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유다처럼 자살도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그 이유를 자세히 보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의롭다하신 은총을 못 받아서 그렇습니다. 본문 롬8:30‘...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 시고..’라고 했습니다. 의롭다 하심은 믿을 때 주어지는 현상으로 이것은 어떤 경험에 속하 는 일입니다. 단순히 그리 생각한다는 수준은 나중에 그리 생각 든 것이 무너질 수 있지만 상처처럼 깊이 속죄의 감동을 체험하고 거듭 난 영혼이 되는 경험이 주어지면 그 추억이 평생 영혼을 붙들기 때 문에 낙심을 해도 주를 영영 떠나거나 하지 않고 좌절해도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며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신 것은 능력이라 기보다 의로우신 분이라서 가능한 일로 말씀하셨습니다. 요16:10‘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 를 보지 못함이요’라고 하셨습니다.이 말씀은 의롭다 여김 받은 자 만이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믿습니다! 를 외치는 자라기보다 의롭다 칭함을 얻은 새로 운 양심을 지녀야 합니다.죄에서 벗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얻 은 결과 영혼의 새로운 감각을 지녀야 합니다.그러니까 예수님의 대 속을 믿고 의롭다 여겨주시는 영혼의 경험을 얻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영혼에 햇빛 같은 생명의 빛을 받아 의롭다하 심을 느끼는 일입니다. 아직도 육신이 있어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 이지만 영혼을 새롭게 하신 영생의 믿음이 생깁니다. 그것이 의롭다 여김을 받은 속사람입니다. 3. 의롭다 여김을 받은 자이기에 지켜주심도 믿음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기까지 아주 특별하신 역사로 도우셨고 가나안 땅에 가기까지 늘 함께하신 점을 봅니다. 민수기 13장에서 이스라엘 12명의 가나안 땅 점탐꾼을 보내고 돌아 와 보고를 하는데 10명은 좌절하고 낙망하는 말로 보고 했지만 여호 수아와 갈렙은 매우 긍정적으로 답했습니다. 같은 땅을 탐지하고 와서 보고하는 말에 10명의 보고가 현실적이었 지만 믿음의 사람은 역사관이 달랐습니다. 그들의 철학이나 심리적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민14:8-9 ‘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 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9. 다만 여호와를 거 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 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 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이것이 지켜주시는 하나님,언약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세상을 바라 보고 사는 정신입니다.본문 끝에 롬8:30‘..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 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이것은 끝까지 지켜주셔서 영 생부활을 얻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 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빌1:6‘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 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살전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중보자 예수님은 승천 이후에도 중보기도를 계속하십니다.사람이 죽 으면 산 자와의 교통이 끊기지만(시115:17) 예수님은 살아나셨기에 중보기도가 효력이 있습니다. 롬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 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 히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 구하심이라’ 심판 때 마지막 백보좌의 심판에 보면, 계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 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여기 두 가지의 책이 있는데 하나는 생명책이라는 단수와 행위를 따 라 심판받는 책들이란 단수어가 있습니다.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하 나님의 은총으로 부르시고 의롭다 여겨주신 은혜로 되어진 일입니다. 이 일에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느 8:10 ‘..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고 했습니다.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양하고 사는 것은 곧 우리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유익을 얻고 영생에 이르기까지 도우심을 얻을 것입 니다. 할렐루야~ --------------------------------------------------------------- 출처:글쓴이:nulserom

      출처: 개혁주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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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없는 항해사 / 최송연

          새까만 청색 하늘이 서서히 열리는 시간 뜨여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오니,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몰아치며 춥다. 아무래도 히터를 켜야겠다. 얼른 히터를 켜두고 커피 한 잔을 끓여 마신다. 음~ 따끈한 커피 향과 훈훈한 공기가 좋네. 그러고 보니 인간은 참 간사하다 아니, 나만 그런가?ㅎㅎ 엊그제까지 더운 것이 괴로웠는데.. 언제 가을이 오냐고 이곳은 어찌 이리 더우냐고... 툴툴거렸는데... 그랬으면 이제 좀 시원해졌는데 즐겨야 하지 않는가? 조금 춥다고 히터에 손이 가다니...ㅎㅎ 그러고 보니 내 삶의 여정도 늘 그런 것 같다. 조금 좋은 일이 생기면 금방 호호하하! 입이 찢어진다 그러다가 작은 어려움이라도 닥치면 안절부절~ 늘 마음이 평정할 순 없는걸까? 내 배의 선장이 계심을 믿는다면서... 그렇다면 힘없는 항해사인 내가 무엇 때문에 걱정이란 말인가? 주여~ 내 삶의 조각배를, 내가 섬기는 교회를, 당신이 친히 주관하여 주심을 믿으며 풍랑이 닥치면 닥치는 대로 순풍이면 순풍인 대로 자고 하지도, 낙담하지도 않는... 그런 담대한 믿음으로 채우소서,.. 오늘도 힘든 하루겠지만 나는 힘없는 항해사임을 인식하고.... 강하고 지혜롭고 능력 많으신 우리의 선장, 내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며 아자, 아자 홧팅!!!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 (하모니카 이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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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의 산하단체인 유네스코가 ‘유대인과 예루살렘 그리고 성전산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팔레스타인의 주장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대해 네타야후 총리는 “‘이스라엘이 성전 산과 통곡의 벽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주장은 마치 ‘중국이 만리장성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하며 비판하였다.


      유네스코는 지난 목요일 팔레스타인이 제출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산과 상관이 없다’는 내용의 결의안은 통과시킨 바 있다. 이 표결에는 세르비아와 투르쿠메니스탄과 같은 26개 나라들이 기권하였고, 24개 나라가 지지를 6개 나라가 반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유럽의 나라들은 한 나라도 이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기사원문 >> UNESCO fails to acknowledge Jewish ties to Temple Mount



      * 마지막 때가 되면 예루살렘이 ‘혼취케 하는 잔’과 ‘무거운 돌’이 될 것이요, 무릇 그것을 드는 자는 크게 상할 것(슥 12:2,3)이라 하셨다. 예수님이 만왕의 왕으로 오셔서 통치하실 예루살렘이 국제적인 갈등과 분쟁의 장소가 될 것임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아랍 국가들로부터 쫓겨난 난민들로 구성된 팔레스타인이 예루살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주장을 UN이 앞장서서 변호하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말세지말인 것이다.


      팔레스타인을 앞세운 세계정부주의자들이 예루살렘에 대한 야욕을 보이는 이유는 분명하다. 예루살렘을 선점함으로 예수님의 재림을 막고, 적그리스도의 보좌를 이곳에 세워 저들이 생각하는 ‘천년왕국(세계정부)’를 완성하려는 허황된 생각에 사로잡혀 예루살렘에 대한 집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예루살렘을 치러 오는 열국을 그날에 내가 멸하기를 힘쓰리라.” (슥 12:9) 경고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손에서 예루살렘을 강탈하려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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