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Top Ten 청교도 저자들[1] (1부)

 

 

 

 

저자: 조엘 비키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총장 및 조직신학 & 설교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지난 40여년간 필자가 청교도 문학 애호가들로부터 받아온 가장 일반적인 질문은,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청교도 저자들은 누군가?”이다. 여기에 필자의 대답이 있다.   

 

 

1. 안토니 벌기스(Anthony Burgess, 1664년 사망). 필자가 특히 좋아하는 청교도는 최근 읽어온 안토니 벌기스다. 그는 1635년에서 1662년까지 셔튼 콜드필드(Sutton Coldfield) 시의 교구목사였다. 필자의 생각에 그는 지금껏 가장 저평가된 청교도다. 한때 나는 이안 머레이(Iain Murray)에게 왜 벌기스의 이름이 최고의 청교도 작품들에 대한 19세기 전집들에 들어있지 않았는 지에 관해 물어 보았다. 그는 대답하기를 벌기스가 그 재발행본들에서 가장 극명하게 누락된 경우라고 했다.

 

         15년(1646-1661)이란 시간에 걸쳐 벌기스는 주로 자신의 설교와 강의에 기초한 책들을 적어도 12권 이상 썼다. 그의 작품들은 아리스토텔레스, 세네카, 어거스틴, 토마스, 루터, 그리고 칼빈 등에 대해 그가 학문적으로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적절하게 헬라어와 라틴어 인용문들을 사용하면서도 청교도 설교의 특징인 간결한 문체로 추론했다. 그는 교양 있는 학자였고, 빈틈없고 따뜻하며 경건한 작품들을 창작한 경험적 설교자였다.  

 

         벌기스의 가장 뛰어나고 가장 방대한 작품인 『영적 정련: 참된 회심과 거짓된 회심에 대한 면밀한 분석 (Spiritual Refining: The Anatomy of True and False Conversion)』 (1652-1654) ? 두 권의 책이고 1,100쪽 분량 ? 은 “경험적 종교에 대한 가장 탁월한 분석”이라 불리운다. 『은혜와 확신에 관한 논문 (A Treatise of Grace and Assurance)』 이란 부제(副題)가 붙여진 첫 권은 120편의 설교들을 담고 있고; 『죄, 그 원인들, 차이점들, 완화들, 그리고 악화들에 대한 논문 (A Treatise of Sin, with its Causes, Differences, Mitigations and Aggravations)』은 42편의 설교들을 담고 있다.

 

         벌기스는 시편 4:6-8에 대한 열 세 편의 설교에 기초한 『경건한 사람의 선택 (The Godly Man’s Choice)』이란 책에서 귀한 것들을 천한 것들에게서 능숙하게 분리한다. 요한복음 17장에 대한 145편의 설교에서의 세밀한 주해, 고린도전서 3장에 대한 300쪽 분량의 주석, 그리고 고린도후서 1장에 대한 700쪽 분량의 주석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벌기스의 주요 작품들 중 몇 가지는 논쟁적이다. 런던에 있던 로렌스-쥬리(Lawrence-Jewry) 교회에서 행해졌던 29번의 강의에 기초한 그의 첫 번째 주요 논문인 『판결 법 (Vindiciae Legis)』(1646)은 로마가톨릭, 알미니안, 소시니안, 그리고 반율법주의자들에 반대하여 도덕법과 행위언약과 은혜에 대한 청교도 견해를 변호했다. 2년 후, 벌기스는 칭의에 관한 그의 첫 번째 책에서 백스터(Baxter)가 추가된 그 동일한 논적들을 반대하는 글을 썼다. 그가 백스터의 저작을 비판한 이유는 그것이 신적 은혜가 인간의 행위와 협력(cooperation)한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칭의의 과정을 주장함에 있어서 알미니안적 경향성을 띠기 때문이다. 6년 후(1654)에 나타나는 칭의에 대한 그의 두 번째 책은 하나님의 본래적 의와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논한다. 그 두 권의 책은 75편의 설교를 담고 있다. 555쪽 분량의 그의 저서, 『원죄의 교리 (Doctrine of Original Sin)』(1659)는 재세례론자들을 논쟁의 장으로 끌어들였다.

 

 

2. 토마스 굿윈 (Thomas Goodwin, 1600-1679). 20여년간 필자가 각별히 좋아하는 청교도 작가는 토마스 굿윈이었다. 가장 최근에 Reformation Heritage 출판사에 의해 (12권으로) 재판된 굿윈의 12권의 저작들은 체험적 개혁주의 신학의 감춰진 보물(treasure trove)이다.

 

         굿윈의 성경주석은 방대하다. 그는 성경의 곳곳을 샅샅이 훑는다. 그의 저서에 대한 첫 번째 편집자들은 그의 저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자신이 자주 표현했던 것처럼, ‘그 주제들을 철저히 연구하기 위하여’ 논점들의 밑바닥으로 뛰어 들어가는 천재적 소질을 지녔고, 문제의 심층부로 파고듦이 없이는 피상적인 지식으로 자신의 논리를 펴지 않았다.” 굿윈의 저작을 읽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심오함과 장황함과 더불어, 그는 따뜻하고 체험적인 놀라운 지각을 제공해 준다. 독자의 인내심은 충분히 보상받게 될 것이다.

 

야고보서 1:1-5에 관한 네 편의 설교를 담고 있는 『인내와 그 온전한 역사 (Patience and Its Perfect Work)』와 같은, 굿윈의 더 짧고 더 실천적인 저작들 중 어떤 것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라. 이 책은 굿윈의 개인 서재의 대부분이 불타버린 후에 쓰여졌다 (굿윈 전집, 제2권 429-467쪽). 그것은 순종의 정신에 대한 많은 실천적 교훈을 담고 있다. 그 다음에, 영적인 고통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향한 굿윈의 목회적 관심을 보여주는 세 경험적 논문들을 제공해 주는 『영적 문제가 해소된 어떤 선별된 사례들 (Certain Select Cases Resolved)』을 읽으라. 각각의 논문은 신자의 영혼 속에 있는 특별한 영적전투들을 다룬다: (a) “어둠 속을 걷고 있는 빛의 자녀 (A Child of Light Walking in Darkness)”는 이사야 50:10-11 말씀에 근거해서 영적으로 침체된 이들을 격려한다 (굿윈 전집, 제3권 241-350). 그 부제(副題) “하나님께서 자신의 자녀들을 양심의 고통가운데 남겨 두시는 이유들과 사례들과 목적들을,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지침들과 함께, 보여주는 논문 (A Treatise Shewing The Causes by which, the Cases wherein, and the Ends for which, God Leaves His Children to Distress of Conscience, Together with Directions How to Walk so as to Come Forth of Such a Condition).”는 그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b) 시편 85:8에 기초한 “기도의 회복 (The Return of Prayers)”은 독특하게 실천적인 작품이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들”을 확인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제3권 353-429). (c) 요한복음 15:1-2에 근거한 “그리스도인의 영적성숙에 대한 심리(審理) (The Trial of a Christian’s Growth)”(제3권 433-506)는 성화, 특히 옛 본성의 죽임(mortification)과 새 본성의 살아남(vivification)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것은 영적 성숙에 관한 작은 고전(mini-classic)이다.    

 

 

3. 존 오웬 (John Owen, 1616-1683). 이 저자의 16권의 저작들, 7권의 히브리서 주석, 그리고 『성경 신학 (Biblical Theology)』이라는 제목의 책은 학문적인 서재를 구성한다. 1850-1855년에 재판(Goold 판)된 16권의 전집은 다음과 같은 것을 담고 있다:

 

교의적(1-5권). 이 다섯 권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들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영광에 대하여 (On the Person and Glory of Christ)』 (제1권), 하나님과의 교제 (Communion with God)』 (제2권), 『성령론 (Discourse on the Holy Spirit)』 (제3권), 그리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Justification by Faith)』 (제5권)이다.  

 

실천적(6-9권). 여기서는 『죄 죽임, 유혹, 시편130편 주해 (Mortification of Sin, Temptation, Exposition of Psalm 130)』 (제6권)과 『영적-마음자세 (Spiritual Mindedness)』 (제7권)이 특별히 가치 있다. 8권과 9권은 설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들은 교양 있는 평신도에게 적합하고 광대한 실천적 적용들을 담고 있다.

 

논쟁적(10-16권).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의 죽음의 죽음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과 『하나님의 공의 (Divine Justice)』 (제10권), 『성도의 견인 교리 (The Doctrine of the Saints’ Perseverance』 (제11권), 『복음적 교회의 참된 본질 (True Nature of a Gospel Church)』과 『성경의 신적 기원 (The Divine Original of the Scriptures』 (제16권)이 주목할 만하다. 이 부문에 있는 몇몇 책들(특히 알미니안주의와 소시니안주의에 반대해 쓰여진 책들)은 역사적 중요성을 지니지만 신학자가 아닌 사람에겐 지루하기 쉽다.  

 

오웬의 광범위한 주제들, 통찰력 있는 글, 철저한 교리적 연구, 심오한 신학, 그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경건한 접근법은 왜 필자와 수많은 다른 이들이 그의 작품을 그처럼 높게 평가하는 지에 대한 이유를 말해준다. 오웬은 가끔씩 장황하기도 하지만 결코 메마르지는 않다. 그의 작품들은 종종 “청교도의 왕자 (Prince of the Puritans)”라 불리우는 이에 의해 남겨진 부유한 유산을 탐구하기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가치가 있다.

  

확신(assurance)에 관한 오웬의 견해를 연구하면서 1985년 여름을 보내고 있었을 때, 필자는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필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권의 책은 시편 130편(특히 4절)에 대한 오웬의 주해와, 신자와 삼위일체의 개별적 위격들 사이의 체험적 교제에 초점을 맞춘 그의 탁월한 『하나님과의 교제 (Communion with God)』였다.

 

 


[1] 헤리티지 개혁교단 (Heritage Reformed Congregations)에서 발행하는 공식 교단 매거진 The Banner of Sovereign Grace Truth, vol. 24, no 1 (January/February 2016): 4-6에 실린 내용으로 번역 및 게재 허락을 맡고 게시 합니다. 저작권은 The Banner of Sovereign Grace Truth와 저자에게 있습니다.

 

 

http://reformedjr.com/board05_02/3998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My Top Ten 청교도 저자들 (2부)

 

 

 

 

저자: 조엘 비키 (Puritan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총장 및 조직신학 & 설교학 교수)

번역: 태동열 (미국 칼빈 신학교 조직신학 박사과정 중)

 

 

 

4. 조나단 에드워즈 (Jonathan Edwards, 1703-1758). 1983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셈 로건(Sam Logan) 교수가 가르쳤던 한 수업은 필자로 하여금 두 권 분량의 에드워즈의 책 대부분을 읽게끔 만들었다. 에드워즈의 설교문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확신과 위로를 필자에게 주었다. 에드워즈는 정말 탁월한 명문장가이다!

 

 

여섯 권 이상 분량인 에드워즈의 글들은 지난 오십 년 동안에 출판되었다. 그의 저서들 중 필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두 권의 책은, 영적 삶에 관한 미국 역사에서 탁월한 고전으로 자주 주목받는 『신앙감정론 (Religious Affections)』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에드워즈의 설교들이다. 초기에 필자는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 (The Life and Diary of David Brainerd)』에 큰 영향을 받았다.

 

필자는 에드워즈의 글들 도처에 나타나는 “적합성 (fittedness)”에 대한 에드워즈의 생각에 감명을 받았고 그 생각이 리더십과 의사결정을 위한 훌륭한 도구라는 점을 발견했다. 에드워즈는 이 적합성에 대한 자신의 사고의 토대를 하나님께 두었다: 항상 적합하신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삶의 매 순간 그분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리기 위해 적합한 것을 행하길 원하도록 인도하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우리가 겪는 모든 결정과정에서 해 보아야 한다: 성경말씀에 입각한 하나님의 견지에서 볼 때, 무엇이 가장 적합할까? 무엇이 하나님께 가장 큰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

 

 

5. 윌리엄 퍼킨스 (William Perkins, 1558-1602). 그의 지성, 경건, 저술, 영적 상담, 그리고 의사소통 기술들과 결합된 교회개혁에 관한 퍼킨스의 비전은, 개혁주의적이고 경험적인 진리와 자기성찰을 강조하는 17세기 청교도의 분위기와, 로마 카톨릭과 알미니안주의에 반대하는 청교도의 주장을 위한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도왔다. 수사학자, 해석자, 신학자, 그리고 목회자로서의 퍼킨스는 청교도 운동의 원리를 수립한 인물이 되었다. 퍼킨스가 죽을 무렵 영국에서는, 그의 책들의 판매량이 칼빈, 베자, 그리고 불링거의 책들을 합한 판매량보다 많았다. 포터(H.C. Porter)는 퍼킨스가 “전국민의 경건을 주조했다”고 말했다. 그러기에 퍼킨스가 청교도주의의 아버지로 자주 불려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퍼킨스가 필자에게 최초로 영향을 준 때는 필자가 박사논문을 위해 신앙의 확신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후 십 년 뒤, 청교도 신학생들을 위한 짧은 설교 교과서였던 그의 『설교의 기술 (Art of Prophesying)』은 필자가 청중들의 다양한 마음의 상태에 따라 어떻게 메시지를 전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었다. 퍼킨스를 향한 필자의 고마움은 해가 갈수록 더해갔다. 필자는 이번에 출판되는 두 권을 포함하는 열 권 분량의 퍼킨스 전집 재발행에 데렉 토마스(Derek Thomas)와 더불어 편집장 역할을 감당하면서 그의 작품들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6. 토마스 왓슨 (Thomas Watson, 1620-1686). 왓슨은 필자가 십대 중반에 회심한 이후 매우 좋아했던 청교도였다. 필자는 그의 『신학의 주요주제들 (A Body of Divinity)』을 매일의 경건생활로 읽었다. 그의 『선을 위한 모든 것들 (All Things for Good)』은 1980년대 초반 심한 고통의 시간을 보내던 필자의 불안한 영혼에 굉장한 위로가 되었다. 그의 매력적인 글들은 깊은 교리, 명료한 표현, 마음에서 우러나는 영성, 적절한 적용, 그리고 다채로운 예화들을 담고 있다. 필자는 그의 간결하고 인용할 가치가 있는 작문 스타일을 매우 좋아한다.

 

 

7. 토마스 브룩스 (Thomas Brooks, 1608-1680). 브룩스는 필자가 십대 후반 때 특히 좋아하던 청교도였다. 그의 저서들, 『사탄의 간계에 맞서는 귀중한 방지책 (Precious Remedies Against Satan’s Devices)』, 『아픈 지팡이 아래 있는 무언의 그리스도인 (The Mute Christian Under the Smarting Rod)』, 『지상에서의 천국: 확신에 대한 논문 (Heaven on Earth: A Treatise on Assurance)』,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 (The Unsearchable Riches of Christ)” (제3권), “기독교의 면류관과 영광 (The Crown and Glory of Christianity)” (제4권) ? 히브리서 12:14절에 관한 58편의 설교로 구성된 ‘거룩’에 대한 고전 ? 모두가 필자를 돌봐 주었다. 브룩스의 저서들은 정말 책장 넘기기가 바쁠 정도로 흥미진진한 책들이다. 그를 통해 필자는 그리스도 인한 기쁨의 눈물과 죄로 인한 슬픔의 눈물을 종종 흘렸다. 그의 글은 영적인 생명력과 힘을 발산한다.

 

 

8. 존 플레블 (John Flavel, 1628-1691). 조나단 에드워즈를 제외하면, 그 어떤 청교도 목회자나 신학자도 설교를 준비하는 젊은 사역자로서의 필자를 위해 플레블보다 더 큰 도움이 된 이는 없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그의 설교 또한 필자의 영혼에 크나큰 은혜를 끼쳤다. 청교도 문학의 애호가 중 플레블의 걸작들인 『섭리의 신비 (The Mystery of Providence)』, 『마음 지키기 (Keeping the Heart)』, 『삶의 원천 (The Fountain of Life)』,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그리스도 (Christ Knocking at the Door of the Heart)』, 그리고 『은혜의 방법 (The Method of Grace)』을 통해 은혜를 입지 않은 이가 있을까?

 

 

9. 존 번연 (John Bunyan, 1628-1688). 필자가 아홉 살이었고 처음으로 죄에 대한 확신의 시기를 보냈을 때, 필자는 번연의 『악인씨의 삶과 죽음 (The Life and Death of Mr. Badman)』을 읽었다. 필자의 부친의 책장에서 그 책을 처음 보았을 때, 필자는 그런 악한 마음을 필자 자신이 가지고 있었기에 그 책은 필자를 위한 것임에 틀림 없다고 생각했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필자의 부친이 매 주일 저녁에 번연의 『천로(天路)역정 (Pilgrim’s Progress)』을 우리에게 읽어 주셨다는 것이다. 그 책을 다 읽으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 주셨다. 필자는 그 책을 분명 열 다섯 번 들었다. 열 네 살 때부터 필자는 어떻게 성령께서 영혼 가운데 역사하시는 가에 대해, ‘수다장이씨’와 ‘쇠우리에 갇혀 있는 사람’과 ‘해석자의 집’과 수 십 명의 다른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한 질문들을 던졌다. 필자의 부친은 질문들에 답해주면서 종종 눈물을 흘리곤 했다. 필자가 사역자가 되었을 때, 필자는 그 기간들이 참으로 소중한 은혜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사십 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번연의 이 탁월한 작품 속에 있는 예화들이 필자가 설교하는 중 여전히 마음에 떠오른다.

 

 

10. 토마스 빈센트 (Thomas Vincent, 1634-1678). 우리가 차갑고 냉담해진 자신을 발견할 때, 빈센트는 우리 마음 속에 사랑의 불이 타오를 수 있도록 돕는다. 만약 천국의 은혜에 사로잡힌 정서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길 갈망함이 당신에게 결핍되어 있다면,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 (The True Christian’s Love to the Unseen Christ)』(1677)을 꼭 읽어보라. 이 책이 당신의 상시적인 안내서가 되게 하라.

 

단지 소수의 빈센트 작품들이 지금까지 출판되었고 그것들 중 여섯 권만이 지난 오십여 년 간 재판되었다.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참된 그리스도인의 사랑』 외에도, 빈센트는 젊은이들과 어린이들에게 매우 유익한 책인 『성경에 의해 해석된 소요리문답 (The Shorter Catechism Explained from Scripture)』(1673)과,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들을 지키시는 지를 설명해 주는 책인 『시작된 선한 일 (The Good Work Begun)』(1673)을 썼다. 세 권의 추가적인 그의 저서들은 더 장중한 작품들이다. 그 책들은, 런던 대화재와 대역병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설명이자 어떻게 하나님께서 어떤 도시에 있는 악을 심판하시는 지에 대한 분석인 『도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두려운 목소리 (God’s Terrible Voice in the City)』(1667); 런던 대화재 후에 또한 쓰여졌고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을 대비해 죄인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구상된 『심판을 위한 그리스도의 확실하고 갑작스러운 출현 (Christ’s Certain and Sudden Appearance to Judgment』(1667); 그리고 죄인들에게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경고하기 위해 쓰여진 『화재와 지옥의 불 (Fire and Brimstone)』(1670)이다. 소요리문답을 제외한, 이러한 제목들을 가진 그의 모든 작품들은 1991년부터 2001년 사이에 솔리 데오 그로리아 출판사(Soli Deo Gloria Publications)에 의해 재판되었다.

 

빈센트의 작품들은 정말 참신하다. 그는 영어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뒤흔들기 위해 매혹적인 방법으로 구사한다. 빈센트의 작품들이 18세기에 베스트셀러였다는 사실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http://reformedjr.com/board05_02/4124

 출처: 영적분별력/진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生의 진실

                   최송연 


차가운 눈이
하얗게 백골을 덮치는
겨울이 오기 전

아직은
낙엽이라도 남았을 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生의 진실을 알아야만 해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초광속 같은 것

죽음 저편에
심판이 있음을 안다면
시기 질투 모함
아옹다옹할 일도 없는 것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 27)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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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아, 물러갈지어다~ -

본문읽기:마태복음 8장 23-27


23.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따랐더니
 
24.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으되 예수께서는 주무시는지라
 
25. 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27. 그 사람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이가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더라


본문 강해에 앞서, 제 자랑(?) 좀 해야겠습니다. 
사실 간증이란 게, 자칫 자랑처럼 들릴 수 있기에 에둘러 드리는 말씀입니다. 새겨서 들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태풍아! 물러갈지어다~"

두 손을 높이 들고 먼저 하나님께 묵도하고 나서, 옆에 사람이 있기에 작은 소리로 그러나 강하게 그렇게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에 몰두했습니다. 왜 태풍을 향해서 그런 명령을 했냐 하면, 지방에서 목회하는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기 때문입니다.

"형님 큰일났습니다."
"왜 그러는데?"
"태풍이 지금 남해상에서 곧장 북상하고 있는데 몇 시간(다불과 두 시간) 뒤에 고향집을 강타할 것같습니다. 어머니 혼자 계시는데 지붕이 날아가면 집도 무너질 수가 있습니다. 노인네 혼자서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같습니다. 아들 둘 다 목회자의 길을 가고 있었기에 우리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저보다 늦게 지방의 모 신학대학에 입학한 동생은 공부를 마치고 이미 개척교회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수도권의 어느 신대에 다니다가 중단하고 몇 년 쉬다가 다시 서울에 있는 다른 신학교에 편입해서 야간에는 학교에 다니고 낮에는 사업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그 학교는 오래 전에 대학원대학교로 바뀌었더군요)

'형제는 용감했다(?)'는 한 때 유행했던 말처럼, 둘 다 신학을 했으니 홀 어머니를 제대로 모실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불청객인 대형 태풍이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식으로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지요. 

몇 해 전 대형 태풍이 남부지역을 강타해서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걱정이 안 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동생이나 저나 마찬가지로 걱정이 안 될 수 없는 그런 형편이었던 것이지요.

'형보다 나은 아우 없다'고 했던가. 저도 속으로는 걱정이 되었지만, 겉으로는 태연하게 "뭐 그리 걱정하노. 기도하면 되지" 하고선, 전화를 끊고서, 어머니가 걱정이 돠어서 기도를 하고 태풍을 향해서 명령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태풍이 소멸이 되었는 지, 않은 지를 저로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티비가 실시간으로 생중계하고 있었지만요) 기도를 한 지 30여 분 지났을 때, 동생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그 땐 핸드폰이 없던 시절입니다)

"행님! 대단하십니다. 행님이 기도하신 그 순간에,
태풍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대한해협(부산과 대마도 사이)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것을 티비에서 실시간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저도 나중에 확인해 보니까, 그 날 오후에 제가 기도하고 태풍을 향해서 명령한 그 시각에 정확히 태풍이 직각은 아닐지라도 거의 70도로 방향을 틀었더군요. 기상 관계자들도 이외라고 하더라고요.

왜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느냐가 오늘 간증의 관전 포인트입니다. 

그런 일이 있기 한 달 열흘 남짓 전에, 늦장마가 와서 비도 억수로 쏟아진 일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집사로서 주일학교 부장을 맡아서 설교도 하고 교사들도 지도하고 있을 때였죠. 

"하나님, 이렇게 비가 많이 오면 어린 애들이 어떻게 교회에 올 수가 있겠습니까. 비야 안 올 수 없고 와야 하겠지만, 애들이 하루 네 번, 그것도 새벽 오전 오후 저녁 모임에 교회 오고 갈 적에는 비가 그치게 해주세요. 제가 기도의 손을 들면 비가 그치게 해 주세요"

3박4일 동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마철  한가운데서 비 한방울 안 맞고 어린 생명들이 여름성경학교에 한 번도 안 빠지고 다 출석했다는 거 아닙니까.

부족한 종이 손을 들면 비가 그치고 손을 내라면 비가 오는 놀라운 응답을 하시더군요.

주일학교 애들(6세-13세)이 집에서 교회 올 시간, 마치고 집에 갈 시간이 되면 비가 억수같이 오다가도 보란듯이 뚝 그치더군요. 그것도 무려 수십 번이나요.

교사들이 나중에 여름성경학교가 끝나고 나서 놀라더라고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요. 제가 그렇게 해 주십사고 기도했다는 말을 했지만, 표정을 보니까, '에이 설마! 부장집사님이 기도해서 그랬겠어?' 하는 표정이 얼굴에 나타나더군요.

놀라운 사건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태풍을 물리친(?) 그 일이 있었던 직후에, 필자에겐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려야 할 중요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신학을 계속해야 됩니까. 아니면 그만 두어야 합니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런 기도를 하기 한두 해 전에, 심장이 뛰다가 안 뛰다가 해서 응급실에 두 번이나 실려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에는 죽는다는 것이 몹시 불안하고 겁이 나더군요. '죽으면 주님 앞에 제대로 설 수나 있을 지...' 하는 마음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 응답의 체험도 있었던 터라,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기도제목을 정했습니다.

"주님, 지난 8월 마지막 주에 보니까 애들이 60명 정도 나왔더군요. 주님의 뜻이라면 이 번 주에 70명을 넘기게 해 주세요." (제가 주일학교를 맡았을 연초에는 35- 40명 정도 출석했습니다)

필자는 그냥 덤덤하게 기도했을뿐입니다.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하지도 않았습니다. 필자는 예전에 부르짖는 기도를 수 없이 한 사람입니다.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기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다음에 '기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체험을 토대로 글을 올리고자 합니다. 

아, 그런데 71명이 출석을 했더군요. 여름성경학교 때도 70-80명 정도 모이는 작은 교회라서 이것이 응답인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주님 솔직히 응답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한 번 더 응답해주세요. 다음 주에는 80명을 넘기게 해주세요"

아, 그런데 정확히 81명이 출석을 했더라구요.

이 미련하고 더디 믿는 놈이 또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응답이 맞기는 맞는 것같습니다. 그렇지만 죄송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응답해주십시오. 그러면 사명이 있니 없니 그런 말 안 하고 죽을 때까지 이 길을 가면서 죽도록 충성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말입니다. 그 다음 주에는 정확히 92명이 출석했다는 거 아닙니까. 온 동네 애들을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다 불러 모으신 것같더군요. 연속적으로 3주에 걸쳐서 응답을 하신 게지요. 이 부족한 종이 확신을 갖고 목회의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그렇게 응답하신 줄로 믿습니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납니다 (그 때는 성경 본문을 읽어주고 기도만 해도, 회개의 눈물이 -주일학생뿐 아나라 교사들까지도: 바다를 이루었던 그런 시절이였습니다)

* 다음 번에는 위 마태복음 본문을 가지고 이어서 강해를 하겠습니다.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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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시작된 사탄 숭배교 Satanic Temple이 메사츄세츠 Salem의 옛 장례식장에 새로운 본부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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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lem은 1690년 대 마녀 재판으로 유명했던 지역으로 사탄숭배자들의 고향으로 적절한 곳이라고 Satanic Temple의 대변인 Lucien Greaves 는 설명하고 있다. 저들은 Satanic Temple이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사탄 숭배 조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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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anic Temple 은 현재 공립학교에서 방과 후 사탄숭배 동아리 활동을 펼치는 등 사탄교를 미국과 전세계에 퍼뜨리기 위해 바삐 활동하고 있다.

 

관련글 >> ‘사탄교’의 국내 상륙

 

아래는 Satanic Temple 본부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이다.






전시장으로도 이용되고 있는 사탄교 본부 안에는 사탄을 찬양하는 온갖 가증한 물건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다. 전시장 한 편에다 십자가에 남자 인어 모양의 형상을 매달아 놓음으로 예수님을 모독하고 있다.




사탄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사탄교를 주입하기 위해 방과후 사탄 학교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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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 Here’s a glimpse inside Satanic Temple’s new headquarters in Salem


출처: 이 세대가 가기 전에 / 예레미야

“놀라운 예언의 성취”

- 조정민 목사님 (베이직교회) -


본문 말씀: 사도행전 2: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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