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옥교수 명강연(제1편)- 목소리에도 인상이 있다

https://youtu.be/gVebt7GzjtQ

 

▼김창옥교수 명강연(제2편)- 당신의 목소리를 찾아라 

 

▼김창옥교수 명강연(제3편)- 꿈이 있는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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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혈구와 적혈구의 사랑 우리 몸의 혈액에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혈장이라는 성분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백혈구는 우리 몸에 어떤 이상한 침입자(병균)가 들어오면 얼른 그 침입자를 처리하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백혈구가 그 침입자를 처치하는 모습을 보면 아주 큰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백혈구는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침입자를 처치할까요? 얼핏 생각하면 아주 강력한 어떤 방법을 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백혈구는 침입자를 향해 절대 무력을 쓰지 않습니다. 대포도 쏘지 않고 기관총을 갈겨대지도 않습니다. 화학약품을 쓰지도 않고 그렇다고 심한 욕설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백혈구는 그저 그 침입자를 품에 꼭 껴안아버립니다. 그리고 아주아주 깊은 사랑으로 그를 감싸줍니다. 백혈구에게 안긴 그 침입자는 아마 황홀해서 정신이 없을 것 같지 않습니까? 침입자는 백혈구의 사랑에 감동하여 그냥 녹아버립니다. 참으로 백혈구의 사랑은 놀랍습니다. 보기 싫든 지저분하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껴안아줍니다. 우리 인간과 그 방법이 너무도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랑이 넘치는 멋쟁이 친구가 우리 몸안에 살고 있습니다. 백혈구와 같은 사랑이 언제나 당신의 마음속에 함께 하기를 빕니다. 백혈구의 사랑에 이어서... 적혈구도 백혈구처럼 아주 사랑이 넘치는 친굽니다. 골수에서 태어나 폐에 가서 산소를 받아들여 자기 몸에 가집니다.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은 산소를 얻어야 생명을 연장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산소는 생명과도 같은 것인데 적혈구는 언제나 이런 생명의 산소를 풍성하게 얻어서 가지고 다니는 친구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언제나 혈액 속에서 이리 저리 다니면서 산소가 필요한 곳이 있으면 아낌없이 다 주고 나옵니다. 자기 것도 조금 챙겨두면 좋을 텐데 그러지 않고 100% 다 줘 버립니다. 그리고는 4일쯤 살아 있다가 비장에 가서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아마 우리 사람 같으면 자기 것은 조금 남겨두고 남에게 나누어 주었을 겁니다. 우리 몸의 모든 것들은(세포 하나까지도) 자신을 위해 사는 친구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남을 위해 살 지요 내가 남을 위해 100% 봉사하듯이 남도 나에게 100% 봉사 한다는 원리가 우리 몸에 있기 때문에 비로소 우리는 건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백혈구의 사랑은 모든 걸 사랑으로 감싸주는 반면, 적혈구의 사랑은 모든 걸 나누어 주는 그런 사랑입니다. 이런 친구들이 혈액 속에 있고 그런 혈액은 바로 우리 인간의 생명을 좌우하죠. 즉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옮긴 글 최송연의 목양연가 "짧은 글 긴 여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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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파도키아(터키),

    Rock formations in Cappadocia, TURKEY, Photo by Christian Clausier


     

     


      멋진 부라이스 협곡(미국),

    Stunning rock formation, BRYCE CANYON 


    대만 동북부 Rock, N_E Taiwan by Matthew Fang 
     


     

     

    이상한 바위-쿠릴섬(러시아),

    Unusual rock formations on the Kuril Islands, Russia 


     

     

     거대한 해변 언덕길(아일랜드),

    The Giant's Causeway rock formation 


    색감과 조직, 


    물결바위,아리조나주-미국,

    Wave rock formation in Arizona, USA, Marie 


     

     

    놀라운 바위,

    Awesome rock formation, C Cuenka 

    놀라운 바위-미 아리조나주,푸른 협곡 호피 인디안 보호구역,

    Amazing rock formations Blue Canyon -

     Hopi Indian Reservation Land, Arizona. S Bensimra 


     

     

     갈대 피리 동굴-계림,중국

    Reed Flute Cave - Guilin , China , G Lemarlec 


    아름다운 바위조형물,

    Beautiful rock formation 


    캐나다 노바스코티아주, 부라이아섬 해변의 화산암,

     

    The volcanic rocks on the shore of Briar 's Island, Nova Scotia B Niklasson 

     단지아 지형(地形), Danxia Landform Melinda 


    미 아리조나주의 "지리학자의 무지개"-굳어서 형성된 바위,

    G eologist's Rainbow - Petrified Rocks, AZ, Linda Covert 


     

     

     미 서부 캔자스주 "기념물 바위" 의 열쇠구멍을으로 본 황혼,

    Sunset Through The Keyhole - Monument Rocks - Western KansasD Williams 


     

     

     미 유타주 동시온의풍화작용으로 형성된 바위,

    Weathered Rock Formations ??¾ East Zion , Utah , D Williams 


     

     

     광물질로 풍부한 색채를 띈 "날렵한 간헐온천바위"

    Geyser Rocks, rich colors given by minerals, D Williams 


     

     

     폴투갈 라고스 동굴,

    Caves in Lagos , Portugal , D Williams 


    사슴계곡의 눈물 흘리는 바위,

    The Weeping Eye - Antelope Canyon , D Williams 


     

     

     호주, 후린다스 산맥, 와라위나의 황혼,

    Warraweena Sunset, Flinders Ranges , Australia , D Williams 


     

     

     중국 티안슈이 마이지샨 동굴,

    Maijishan Caves, Tianshui, China, D Williams 


     

     

     불가리아 데베타슈카 동굴,

    Devetashka Cave, Bulgaria by Silvia 


     

     

     미 아리조나주 거미바위,

    Spider Rock - Arizona, D Williams

     



     


    (창세기 34장) 하나님이 일루 오세요.

     

      야곱이 네 아내와 열 한 아들과 한 딸, 그리고 양, 소 떼를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형 에서가 400인을 거느리고 달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두려움에 떨며 밤새도록 씨름하던 얍복강,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던 그 브니엘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서의 마음을 완전히 돌려 주셨고 야곱은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에 이르렀습니다. 벧엘에서 베개 한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붓고 서원한 야곱의 서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지켜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거기에 머물렀습니다. 가나안 땅에 돌아왔으니 일단 귀향한 것은 맞는데 하나님께 서원했던 벧엘로 가지 않고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가 기다리는 집으로도 가지 않았습니다. 세겜의 아비 하몰의 아들들에게 거금이라고 할 수 있는 은 일백 개를 주고 땅을 사서 거기에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 “전능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짓고 거기에 눌러앉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거기에서 살았는지는 기록이 없으니 모르겠습니다. 앞서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20년 동안 외삼촌을 섬겼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라헬을 연애하여 7년을 봉사한 다음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얻었고 그 이듬해에 맏아들 르우벤이 태어났다고 보면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 밧단아람을 떠날 때 르우벤은 열 서너 살 쯤이었을 것이고 그 아래로 다섯 오빠가 또 태어나고 그 다음 태어났을 디나는 아주 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건은 디나의 나이가 상당히 들었을 때라야 일어날 수 있는 사건입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한다면, 맞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오늘 사건은 그들이 적지 않은 햇수를 세겜땅에 눌러앉아 산 다음에 일어났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평안히 돌아오게 해 주셨는데 야곱은 서원을 지키지 않고 그곳에 주저앉아 버린 것입니다. 은 일백개를 주고 땅을 사고 그곳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붙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벧엘에서 한 십일조 서원을 지키기 싫어서였을까요?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에게 얼른 가고 싶지 않아서였을까요? 척박한 고향 땅 보다 세겜이 훨씬 살기 좋고 풍요로운 곳이라서 그랬을까요? ‘뭐, 여기가 더 좋은데 아무 곳이나 단을 쌓으면 되는 거지 꼭 벧엘로 갈 필요가 있나? 온 천지가 하나님 계신 곳인데 어디면 어때.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여기 살자. 하나님께서 이곳으로 오시면 되지‘, 하고 생각한 것일까요? "여기가 좋사오니 하나님이 이리로 오십시오.", 그것이 "엘엘로헤이스라엘"의 뜻일까요?  

      남북전쟁을 통하여 흑인노예를 해방하고 미국을 사실상 통일한 미국 16대 링컨 대통령은 기도하는 대통령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런데 링컨 대통령은 하나님께서 자기편이 되어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길을 가고 있는지를 겸허히 묻는 기도, 그것을 구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내 편인가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뜻을 이루어주시고 내가 가는 길을 도우시고 지켜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디나가 그 땅 여자를 보러 나갔다가 히위 족속 중 하몰의 아들 그 땅 추장 세겜에게 강간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사건은 야곱이 그 땅에 머물지 않고 그 땅을 지나서 하나님께 서원하였던 벧엘로, 그리고 부모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갔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편에 서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행했더라면 결코 없었을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떨까요?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이 사건은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께 가지 않고, 온전히 주님을 따르지 아니하고 ‘이쯤이면 됐다.’ 하고 반쯤 세상에 걸쳐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생활은 나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을 어디든지 따르며 끝까지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야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나 좋은 곳, 적당한 곳에 주저앉아서 "하나님이 일루 오셔서 나를 도와 주셔야조."가 절대로 참 된 신앙생활일 리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나를 부르시고 나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그렇게 자신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렇게 세겜인지 세상인지에 주저앉아 '하나님이 일루 오세요' 한다면 어쩌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디나의 사건을 허락하신 것처럼 엄청난 사건으로 나를 깨부수셔야 할지도 모릅니다.

    세계 곳곳이 지구온난화에 따른 기후 재난으로 생존을 위협받고 있다. 기후 재난은 지구인들의 무분별한 개발과 소비, 이로 인한 환경 파괴와 과다한 이산화탄소 배출이 초래한 것으로 해수면 상승과 가뭄, 홍수, 산불 등의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다. 기후변화 빨간불이 켜진 지는 오래전이었으나 지구촌은 선진국과 개도국의 이해 충돌, 이기적인 소비 행태 등이 맞물리면서 기후 재난을 막기 위한 골든타임을 놓쳤다.

    그 사이에 1㎜씩 상승하던 해수면은 태평양상의 섬나라를, 조금씩 녹아내린 빙하는 토착민과 북극곰의 삶의 터전을 위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세계 각국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위기의식으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체결된 기후변화협정이 다음달 사상 처음으로 발효된다. 인류에게는 기후 재앙을 막기 위한 마지막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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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협정 발효를 계기로 세계일보는 해수면 상승과 산불, 가뭄, 홍수, 대기오염, 빙하 소멸로 생존의 기로에 선 기후 재난 현장을 찾았다.

    바닷물에 잠긴 논… 벼농사 포기한 농민

    베트남은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메콩강 삼각주 인근 농지에 바닷물이 유입돼 농부의 주름이 깊어졌다. 인도네시아는 잦은 산불로 삶의 터전이 사라지고 있었다.

    태풍 `메기`의 영향으로 폭우가 내려 물에 잠긴 중국 푸젠성 푸저우시 도심 모습.
    EPA=연합뉴스

    전체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하는 캄보디아는 역대 최악의 가뭄에 나라 전체가 신음하고 있었다. 슈퍼태풍으로 주거지가 물에 잠긴 중국 저장성 주민들은 식수와 생필품 부족을 호소했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있는 아이슬란드 솔헤이마이요쿨들은 지구온난화를 상징하는 도시가 된 지 오래다. 이곳의 빙하는 온난화로 과거에 비해 1㎞ 이상 뒤로 물러났다.

    60년 전 ‘런던 스모그’로 1만2000여명이 희생됐던 영국은 당시의 참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대기오염 관리에 나서고 있다. 그 결과 최근 대기 중 미세먼지 분포도가 세계보건기구(WHO) 권장기준에 부합할 정도로 공기질이 개선됐다.

    취재팀이 만난 기후 재난 지역의 주민들은 불가항력의 변화 앞에서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이들의 노력이 보답받으려면 이제 지구인이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 한다. 우리 가족, 우리 지역, 우리 나라의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수수방관하면 어느 순간 기후 재난은 우리의 곁에 다가와 있을 것이다.

    특별취재팀=정재영·이희경·정선형·조병욱·이현미·조성민 기자 climate@segye.com

    라흐마니노프 치유 사건과 

    최면술


    작곡가/피아니스트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는 20세기초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의 거장이었다. 악풍으로 본다면, 러시아의 5 인조인 '국민악파'보다는 차이코프스키의 선에 보다 더 잇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작곡가들처럼 라흐마니노프 역시 생시엔 그다지 전반적인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그 대신 명 피아니스트로서 대중의 인기를 모아 미국에서까지 연주 여행을 했다. 그는 키 2m의 거인인 데다 손뼘도 13 건반을 잡을 만큼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컸고, 따라서 프란츠 리스트의 작품처럼 어려운 피아노 곡들을 자유자재로 소화하고, 또 그런 작품을 쓰기도 했다. 

    Source: houstonsymphony.org


    라흐마니노프의 삶에서 가장 흥미롭게 중시되는 대목이 있다. 그가 작품을 전혀 쓰지 못하게 된 일종의 '위기'인 정신적 침체기에 빠져있다가 심리요법사인 니콜라이 달(Nikolai Dahl)의 "정신의학적" 도움으로 '재기'하여 이전보다 훨씬 더 좋은 작품을 쓰게 됐다는 일화이다. 더욱이 그 작품을 그 요법사에게 헌정했단다. 정신의학의 '승리'로까지 일컬어지는 사건이다. 이 기적적인 '재기' 사건 때문에 라흐마니노프는 전기(傳記) 필자들이 즐겨 다루는 영웅이 되었고, 그의 치유사였던 달(Dahl) 역시 덩달아 영웅으로 뜨게 된다. 

    그런데 당대의 정신과학이나 정신의학이라는 것은 오늘날처럼 정립된 학문이기보다 거의 대부분 이론과 시술상의 실험단계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현대 정신의학의 위대한 승리라고 하기엔 의문점이 더 많다. 

    필자도 그런 맥락의 의문을 품어왔었는데, 그 시작은 대학 시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애청하던 시절과 거의 때를 같이 한다. 과연 당대 정신의술에, 또 전반적인 정신의학에 그런 위력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이에 따라, 비슷한 의문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과 글을 알아보고 또 참조하게 된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의학의 '전능성' 비슷한 것을 주장하곤 한다. 그런데도 정신병동은 죽음 전 마지막으로 가는 장소가 돼 버리는 사례들이 드물지 않다. 정신의학은 사실 역사 속에서 매우 근자에 발달된 것이다. 그 배후엔 지그문트 프로이드나 카를 융 등의 학자들이 있다. 이것은 또 훗날 킨제이의 성의학과도 연계된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다 오컬트에 깊이 관여됐던 사람들이다. 

    믿거나 말거나 이 점은 크리스천 심리학도들이 매우 우려해야 할 사안이다. 자체가 진리인 참 기독교는 오컬트와 무관하며,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이들의 학설은 반드시 참조해야 하고 통과해야 하는 기초적 절차와도 같다. 그들의 배후야 어떻든 그들의 이론과 연구 결과가 도움된다는 식이다.  

    심리학계에서 감초처럼 쓰이는 에네아그람(에니어그램)도 그렇다. 에네아그람은 교계에서까지 폭넓게 쓰여왔다. 고대 수피 사상(Sufism)의 '지혜'의 일부인 이 인성분류 방식을 맨처음 현대에 도입했다는 게오르기 구르지예프 역시 일종의 오컬티스트에다 술사와 다름 없는 존재였다. 왜 그런 지는 앞으로 다양한 글을 통해 입증해 보이겠다. 라흐마니노프를 치유했다는 달 역시 오컬티스트였다. 



    라흐마니노프는 1897년 3월 28일 자신의 역사적 역작인 첫 교향곡을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를 시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했다. 2년 전인 1895년, 1월부터 10 개월에 걸쳐 쓴 야심작이었다. 라흐마니노프는 하루 평균 7 시간을 이 작품에 매달렸고, 그것도 부족해 9월부터는 10 시간으로 늘렸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게도 대 실패였다. 우선 관현악단의 리허설이 절대 부족했고, 잘 나간다던 지휘자 글라주노프의 악단 관리와 연주 솜씨 또한 형편 없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글라주노프는 술에 취한 상태였는지도 모른단다. 그는 평소 레슨 때도 술병을 숨겨 빨대로 홀짝 홀짝 빨아먹는 버릇이 있는 중독자였기 때문이다. 

    연주한 다음 날 음악비평가 세자르 쿠이는 '에짚트의 10 대 재앙'을 그린 음악으로 빗대면서, "지옥 음악원생들이나 갈채할 음악"이라고 혹평했다.  


    황당한 현실 앞에 멍멍해진 라흐마니노프는 의욕상실과 우울에 빠져 이때부터 3년간 굵직한 작품이라곤 손에 잡히지 않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차, 측근의 소개로 최면요법사 달을 만나게 되어 1900년 1월부터 시술에 들어갔다. 

    치유 시술 기간은 불과 3 개월이었고, 라흐마니노프는 "완쾌"됐다고 한다. 실제로 치유 후 라흐마니노프가 쓴 피아노 협주곡 제 2번은 전반적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작품으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또한 차이콮스키의 작품과 함께 후기낭만기의 기념비적인 피아노 협주곡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라흐마니노프의 이 대작이 대의학자도 아닌, 한낱 실험적인 심리의학 수련생 수준의 풋내기 의사에게 헌정됐다는 사실은 우리의 의아심을 더욱 북돋운다. 이 의사가 불과 석 달만에 그의 침체기를 끝내주고 훌륭한 작품을 쓰도록 도와주었다는 설은 더더구나 그렇다.  


    묘한 것은 전기작가들이 이 사건과 과정을 겉 모습 그대로 두려고 할 뿐, 그다지 깊이 다루려고 들지 않는다는 점. 심지어는, 당사자인 라흐마니노프보다 달의 역할을 더 중시하면서 정신의학의 과학적 비밀을 시사하는 하나의 신비적 사례로 몰고 가는 학자나 작가들도 있다. 관심 있는 극소수를 제외한 아무도 이 치유과정의 내막을 검증하려 하지 않았다. 후기낭만주의 대표작 하나를 배태한 정신의학 내지 심리요법의 '대승리'로 그냥 남겨두려는지. 


                                                             니콜라이 달 ▶

    바로 이런 점들이 필자의 끈질긴 의문의 하나였으나 그다지 치심치는 않다가, 최근 인터넽에서 이런 저런 비평 자료들을 찾아 보고 약간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 


    라흐마니노프는 거의 날마다 달의 최면요법 시술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의 라흐마니노프 음악 전문학자인 엘허 닐스에 따르면, 사실 최면술은 프로이드 정신의학이 대두된 이래 이렇다 할 요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프로이드가 역시 또 다른 후기낭만파 작곡가인 구스타프 말러의 정신적 문제를 고치지 못한 채 오히려 요법을 오용하여 강한 의혹만 불러왔단다. 

    최면술이 의술의 일부로 사용된 것은 프리드리히 메스머(1734-1815, Friedrich A. Mesmer 때부터였다. 프리메이슨이었던 그는 오스트리아 뷘에서 일하다 훗날 프랑스 궁정으로 옮겨갔다. 메스머는 자신이 일종의 자기장(magnetism)을 활용하고 있는 줄로 믿었다. '매혹하다', '최면술을 걸다' 등의 뜻으로 쓰이는 영어 낱말 mesmerize가 바로 그에게서 유래됐다. 그는 이 '발견'을 과학협회에 보고했지만, 오늘날의 우리가 볼 때는 환자에게서 '위기'로 알려진 최면상태를 인출한 것이었다. 


    이 "조용한 트랜스"(황홀경)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마르퀴 아르망 드 퓌세귀르(Marquis Armand de Puseguir 1751~1825)였고, 이것을 '신경수면(neurohypnology)'으로 명명한 사람이 제임스 브레이드였다. 동시대 사람인 존 엘리엍슨은 자신의 런던 병원에서 통증 없는 수술을 위한 마취용으로 최면술을 쓰기 시작했다. 

    한편 프랑스에는 두 최면술 연구학파가 생겨났다. 신경의학자 장-마르텡 샤르코(Jean-Martin Charcot)는 파리의 살페트리에르에 있는 자신의 진료소에서, 이폴맅 베른하임(Hippolyte Bernheim)은 낭시에서 각각 최면술 학파를 형성하게 된 것. 프로이드의 스승이기도 했던 전자는 당초 최면술을 히스테리 환자들에게만 연계된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그런 환자들에게만 시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후자의 연구 결과를 알고 생각을 바꾸었다. 베른하임은 무려 10,000여 케이스를 분석하여 최면이 암시를 통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기서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새겨두어야 할 점들이 있다. 잠재의식 상태에서 '과거'와 '미래'를 '무상출입'하는 최면술은 반드시 악령과 연계되는 오컬트 행위라는 사실과, 따라서 최면술을 시술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오컬티스트라는 점이다. 이것은 남의 뇌리 속 꿈세계를 침투하는 악령들의 행동과 별 다름없다. 

    혹 크리스천이 최면술을 시술한다면 그는 이미 오컬트 영역과 범주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며,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보혈로써 정결케 되지 못하면, 심각한 악령개입 상태가 지속되거나 악화된다는 진실이다. 이것을 부정하거나 못 믿겠다면 그는 정신심리학계를 알지언정 영계를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튼 라흐마니노프가 달에게서 받은 치유 과정은 훗날 그의 처제이자 사촌누이인 소피아 알렉산드로브나 사티나를 통해 자세히 알려졌다. 소피아 사티나는 의술과 생물학, 유전학 등에 깊이 관여했고, 미국의 스밑 대학에서도 일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친척과 그들의 친구인 그라워만 의사는 긍정적인 단계를 밟기로 결정하고 니콜라이 달을 만나기로 했다. 달은 그라워만의 모스크바 대학교 의과 시절 친구였는데, 졸업 후 당시 프랑스를 풍미하던 최면술의 치유법적 가치에 관해 흥미를 갖게 됐고 바로 이 첫 성공 사례 후 여생을 최면요법에 바쳤다. 라흐마니노프는 사촌들이 이 요법 실험에 기꺼이 응하는 것에 놀랐다. 그는 자신의 '숨은 현재와 미래'를 알아내는 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입원비가 없는 것도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달의 수많은 환자들이 비용없이 진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진료소인 달의 아파트먼트는 사티나의 집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았기에 라흐마니노프는 매일 달을 방문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달의 진료를 돕느라 매일 밤 안락의자에 깊숙이 앉아 최면 시술에 따라 깊이 잠들어 있었고, 낮에는 밝은 분위기 속에 기분을 돋우었고, 식욕도 증진됐으며무엇보다 창작의욕을 일깨우는 데 힘썼다. 달 자신 음악적 교양이 높은 사람이었기에 모든 대화와 최면술이 창작열 증진에 집중됐다. 


    여기서 중시되는 점 하나가 라흐마니노프의 평소 창작 과정이 예외적으로 탁월했다는 것. 작품 전체가 그의 마음눈 앞에 펼쳐지기도 했고, 더 큰 규모 형식의 음악도 불과 2~3주 안에 스케치를 완성하곤 했다. 그처럼 즉각적으로 작품을 배태하거나 몇 쪽을 기억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재능이다. 

    대다수의 작곡가들은 하나의 모티브, 하나의 성부를 갖고도 장시간 집중작업을 해야 하므로 장기간이 소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제1 교향곡의 실패 후,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직관력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판단력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새 작품을 위해 주변들의 도움과 조언을 자주 찾았고 악식도 독창적인 것보다 일반적인 형식을 더 의존하여 수많은 부분들을 수정해나갔다. 


    관련 정보에 따르면, 달이 라흐마니노프에게 시술한 요법은 '최면 후 암시'(Post-hypnotic suggestion: PHS)라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여기, 세 가지 기본전제가 따른다. 1. phs 방법으로는 경증만 치료할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창작불능 상태가 중증이었다면, 이 방법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2. 최면술은 시술할 수 없는 작업을 대상에 적용하지 않는다. 3. 달의 진료는 집중적이었지만 비교적 단기간에 치러졌다. 


    따라서 라흐마니노프가 달에게 받은 진료는 비교적 가볍고 쉬운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대단히 위대한 극찬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인 라흐마니노프에게선 두 가지 관찰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바로 이 글의 주된 논점이기도 했다. 


    1. 비록 라흐마니노프의 3년간의 침체기동안 주요 대작들을 완성하지 못하긴 했지만, 제 1 교향곡 실패 이후로도 매우 능동적이었다는 게 진상이다. 그는 이전에 이미 성공적인 지휘자, 피아니스트였다. 따라서 주로 다른 분야에서 능동적이지 못한 여름 기간동안 창작 문제가 그를 더 괴롭힌 것으로 보인다. 

    2. 작곡자는 달의 진료 후 거의 즉각적으로 과거보다 더 많은, 대규모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게 된다. 


    따라서 라흐마니노프는 작곡을 아예 못할 만큼 대단히 악화된 상태였기보다 자신의 악상을 오선지 위에 옮겨 놓는 데 대한 부담감이 있었기가 더 쉽다. 이에 따라 달은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할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를 괴롭혔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퇴치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 경우에 PHS가 완벽하게 먹혀드는 방법이라는 그들 나름의 인식이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다음 진술은 당시 상황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결국 나는 날마다 달의 서재 속 팔걸이 의자에 앉아 반 수면 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이제 당신은 협주곡을 쓰기 시작할 것입니다...굉장한 재능으로 말입니다. 협주곡은 탁월한 작품이 될 것입니다.'라는 그의 말을 듣곤 했다." 

    닐스는 라흐마니노프의 이 진술을 정확치 않다고 지적한다. 이런 말은 암시보다는 명령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 진술을 베낀 리제만의 문장이 정확치 못했거나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요약문이 그랬을 가능성을 말하면서.

    닐스는 달이 라흐마니노프가 '작곡가의 장애'를 극복하도록 도와 성공적으로 증상을 해소시켰지만 환자의 치명적 문제점에 대한 구조적 변화를 겨냥하지 않았기에 문제를 일으킨 다양한 갈등들을 충분히 다루지는 못했다고 분석한다. 


    증상은 라흐마니노프가 언제라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 되돌아왔다. 1916년에는 심각한 재발이었다. 라흐마니노프는 독주가로서의 화려한 연주생활을 이어가느라 작곡할 시간이 없었던 생애 말엽 10년간, 마침내 이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작 아이디어에 좀 더 장시간 집착하면서 더 깊은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는 제3 교향곡에 대한 외부의 모든 비평에 잘 응수했다.

    "개인적으로 이것이 괜찮은 작품이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하지만 작곡가도 잘못될 수가 있죠." 

    자못 긍정적인 대답이다. 그만큼 바뀐 것이다. 


    이것이 달의 치유 결과인가?

    과연 달은 작곡이 불가능했던 라흐마니노프를 최면술로 고쳐 파멸로부터 구해낸 위대한 의학자였을까? 필자는 그보다는 작곡가 자신의 젊음과, 암시를 통해 갖게 된 긍정적인 생각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선 라흐마니노프의 이 위기는 그의 초기인 20대 중반에 찾아왔다. 혈기가 팔팔한 젊은이가 망가진 기분 때문에 의욕상실증에 걸리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라흐마니노프가 창작열을 되찾게 된 것은 무슨 치매나 정신질환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낸 수위의 것이 아니었다. 달의 암시로 기분전환이 이루어진 정도일 것이다.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자. 그와 동시대인으로 러시아의 국민악파의 한 명인 무소르그스키는 알코올 중독자로 역사상 가장 불행한 작곡가의 한 명으로 손꼽힌다. 부유했던 집안이 망해 가고 어머니가 죽자 고주망태가 돼갔지만, 당대로서는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들을 틈틈히 써내어 러시아 국민주의를 대표하는 음악가의 한 명으로 떴다. 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지 않은 현대 작곡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비참한 정신으로 살아가던 술 중독자가 이 정도의 작곡가였다면, 다른 작곡가는 뭔가? 무소르그스키에 비해 볼 때, 작품을 "못" 쓴다는 건 엄살에 가까운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음주를 조장하려거나 음주벽으로 좋은 음악을 쓸 수 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더욱이 일각의 오해와는 달리, 라흐마니노프는 침체기 3년 어간 아무 작품도 쓰지 못한 게 아니며, 아무 음악 활동을 못했던 것은 더구나 아니었다. 단지 굵직한 작품을 악보에 옮길 의욕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달 의사의 라흐마니노프 치유가 흔히 과장되듯 그렇게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다. 


    그 다음으로 하고픈 이야기는 이처럼 걸핏하면 최면술로 '기분정리'를 해나간 명사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매일 오후 최면에 빠졌고, 상대성 이론을 비롯한 다수의 과학이론이 최면으로 유도된 트랜스 상태에서 나왔단다. 

    미국의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도 정기적으로 자기최면을 했다. 하기야 프리메이슨이기도 했던 그였으니 과히 놀랄 일도 아닌 셈이다. 

    죽은 다이애나 웨일즈 왕자비도 대중연설 발전을 위해 최면술을 썼고, 윈스턴 처칠 경도 세계 2차 대전 와중에 피로와 잠을 견디기 위해 PHS를 애용했다. 처칠은 너무나 잘 알려진 프리메이슨 명사이다. 


    최면술을 써 먹는 사람들 상당수는 음악인들이다. 작곡에 최면술을 이용한 사람은 라흐마니노프뿐 아니다. 모차르트도 최면술을 '창조적인 도움'으로 활용했고, 그의 오페라 '코지 판 투테'는 전곡이 '최면 경지' 상태에서 쓰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모차르트 역시 프리메이슨이었다. 

    참고로, 달도 애머추어 음악인이었고, 메스머 역시 (벤저민 프랭클린이 발명한) 글라스 아르모니카(글래스 하모니카)를 즐겨 연주하는 음악인이었다. 최면술이 정서 및 무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암시일까. 

    우리 찬송가에도 버젓이 시 작품(554장)이 실려있는 영국 시인, 앨프릳 테니슨은 자주 최면 상태로 시작(詩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테니슨도 프리메이슨이었다. 


    라흐마니노프 치유에 관해 또 한 가지 부언할 이야기는 그의 연애생활에 관한 것이다. 젊은 라흐마니노프는 달의 진료소를 찾을 때마다 달의 예쁘장한 딸을 대하곤 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손자 알렉산드르는, 아버지인 의사 달의 진료보다는 이 딸의 존재가 주는 감흥이 환자에겐 더 큰 효능을 나타냈다고 주장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라흐마니노프가 퍽 오래 전부터 고종 사촌누이인 나탈리아 사티나와 연애, 약혼을 거쳐 결혼에 골인할 무렵이었다는 사실이다. 나탈리아는 라흐마니노프의 고모의 맏딸로 그보다는 4살 손아래였다. 나탈리아 역시 피아니스트였고, 그래서 라흐마니노프를 깊이 이해했다. 

    사실 모두가 러시아 정교회 교인인 이들에게 이런 근친혼은 당연히 금기시 됐기에 이들은 앞날을 향한 전도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결국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피아노협주곡 2번은 바로 이 무렵 작곡된 것이다. 


    물론 캘빈 닽시의 말처럼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삶이 골고루 음악에 배어있다고 누구든 장담을 할 순 없겠으나, 2번을 들어 보면 그의 열정과 우울, 그리움과 호소, 승리의 외침 등이 고루 포함된 것 같은 느낌이 일게 된다. 특히 제2 악장은 마치 사랑의 고백과 어름처럼 로맨팈하고 정겹기가 이를 데 없어 감성이 예민한 사람들의 눈물을 이내 자아내곤 한다. 

    따라서 이런 상황들이 라흐마니노프의 치유에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수많은 유명 작곡가들이 자신이 연모하거나 관심 있는 이성에게 작품을 헌정하곤 했다. 돈 퀴호테에게 둘시네아, 햄맅에겐 오필리아, 베토벤에겐 '불멸의 사랑(Unsterbliche Geliebte)'의 존재가 정신적 지주였던 것처럼, 라흐마니노프의 경우도 주변에 있던 여성들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아니면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작품을 쓸 용기를 얻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상을 볼 때, 라흐마니노프의 '창작 불가능증'을 고친 장본인이 달이라거나 달의 최면 시술만이 주효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다음으로 다시 하고 싶은 얘기는 최면술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혐오물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물론 비신자 독자라든지 심리학 면에서 최면술에 호감을 갖는 크리스천(?)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이유는 첫째로, 최면술은 일종의 오컬트 행위이기 때문이다. 오컬트란, 모든 종류의 비술(秘術)이나 신비학, 심령술 등을 가리키는 말로, 성령님의 권능이 아닌, 물리적 세계 저편의 영역에 속한 잠재의식을 포함한 영계의 악령들과 연계를 갖고 초자연적 힘을 발휘하는 행위의 하나이다. 믿든 말든 최면술은 심령술의 하나이다. 최면술을 '과학'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과학은 결코 영계에 개입하거나 조종할 수가 없다. 오늘날 뉴에이지 운동이 최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 모든 오컬트는 뉴에이지를 돕는 총아가 되어 있다.  

    사실 이런저런 현대 학자들이 실험으로 최면술을 창출해냈거나 발견했다고 주장하지만, 이같은 술법이 수 천 년 전에도 이미 있었다는 역사적 흔적이 발견된다. 고대로부터 주술사와 마법사들, 영매들, 무당들, 힌두들, 불자들, 요기들이 사실상 이런 술법을 사용해왔다. 

    그런데 요즘은 비신자 의사들이나 정신요법사들은 물론이고 소위 크리스천이라는 전문인들까지도 이것을 애용하는 시대가 됐으니, 참으로 세상은 올드에이지를 카피한 뉴에이지 시대를 사는 니오(neo-)바벨론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정신요법이 '내적치유'에도 활용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내적치유는 심리적이거나 잠재의식적이지, 결코 영적이거나 성경적이지 않다. 시술사(사역자?)들이야 뭐라고 이유를 붙이든. 크리스천 술사들이 뭐라든 간에 이것은 성령의 것이 아니다. 성경은 성령과 악령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다고 가르쳐준다.  


    둘째로, 최면술은 사실상 술사인 타인이 대상의 의지를 묶고 조종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선 가타부타 논란이 많아도, 대상자의 피암시성(suggestibility)이 높아질수록 대상자는 최면술사가 말하는 거의 무엇이든 믿고 맡기고 따르는 단계까지 다다르게 되어, 결국 환각상태 같은 것도 초래하기에 이른다. 

    최면 도중 대상자의 독창성은 줄어들고, 심지어 정상적인 환경과 상식이 통하는 평소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트랜스 로직' 상태로 들어가 비상식적/비합리적/비논리적/비양립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믿게 돼버린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고유한 자기의지를 지닌 자유인 겸 모럴 에이전트(free moral agent)이기에, 그 개인의 범죄 상황에 대한 법적 구속력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그 자유와 의지를 구속할 수가 없다. 

    최면술로 조종할 경우, 트랜스에 빠진 대상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시술자의 의지에 따라 조종될 수 있고 또 그러기 십상이다. 따라서 최면술은 본질적으로, 개인에게 자유와 의지를 주신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만약 크리스천이 최면술을 시술한다면, 그 역시 저주와 그에 해당하는 심판을 면하기가 어렵다. 

    최면술의 가장 대중적인 용도 하나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기억 되살리기"이다. 이것은 상상의 '타임머쉰'처럼 잠재의식 속에서 먼 과거로 넘어가는, 일종의 시간초월적 행위이다. 어떤 대상자들은 심지어 태냇적 또는 출산 때를 기억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늘날 교계에 유행하는 소위 '내적 치유'는 영적 치유가 아닌 심리요법으로서, 세속계인 뉴에이지에서도 애용되며, 그 자체에 최면술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실제로 크리스천 내적 치유사들이 최면술을 이용하거나, "과거 기억에 의한 치유"를 한다고 주장한다. 최면술사들이나 내적 치유사들이 가장 흔히 '증명'해내는 것 하나가 대상자의 어릴 적 성추행 피해이며, 이 경우 놀랍게도 가해자는 으레 아버지들이다. 그러나 이런 '기억'들이 실제 있지도 않은 상상/공상의 소산일 수 있음을 수많은 학자들이 지적해 왔다. 

    [ 최면술 자체와 내적 치유에 대해선 다른 기회에 자세히 다뤄보려고 한다.]

    내적 치유 사역자들은 또 옛 '상처'의 치유를 통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거 기억을 통한 치유와 회복이라고? 성경은 그런 것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변증가 마틴 밥갠이 바로 지적했듯, 오히려 사도 파울은 과거는 잊어버리고 앞에 놓인 하늘 상급을 위해 달음질하련다고 선언한다(티모테B서=딤후 7'7~8). 옛것은 지나고 모든 것이 새로워진(코린토B서=고후 5'17) 새 피조물이 됐다면, 과거의 것은 은총에 대한 감사와 간증 외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밥갠의 말처럼, 개인의 현재 행동에 대한 설명을 과거로부터 찾아내려는 것은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에 위배된다. 설령 그것이 심리학적으로 타당하다 해도, 크리스토님을 통한 참 해결의 진리를 '도둑질'로 대체하는 셈이 된다. 크리스천의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 하나님과의 관계 여하에 달려있다! 기독교는 과거 지향적 종교가 아니다. 

    성경의 주된 맥인 메시아에 관한 예언도 이미 대부분 과거에 성취되었다!  


    셋째로, 최면술은 단순한 심리요법 차원에서 더 나아가 영적 위험지대로 이끌릴 수 있다. 탈체현상,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닌) 투시력/천리안, 환각/환시, 동양 신비가들이 주장하는 신비경, 심지어 최면술 연구가인 어네스트 힐거드까지도 그렇게 표현한 '신들림' 등에 걸려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밥갠 등의 지적과도 같이, 최면술은 어떤 레벨에서든 오컬팈하지만, 그 수위가 깊어질수록 명백한 오컬트 행위이다. 


    최면술과 오컬트의 연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밝혀보기로 한다. 

     

    출처: 진리와사랑/김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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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성(Spirituality, Spiritual Formation)이란 무엇인가?

    영성: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성질, 또는 정신적 경향, ‘영혼의 품질’, ‘영혼의 성향’ 혹은 ‘영적 센스’라고도 한다.

    영성이라는 단어에 속한 “영”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 퓨뉴마( Pneuma)이다, 그 의미는 창1-2장에 나타나는 "숨 • 호흡"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생기 즉 호흡을 받고 생령이 된 인간은 호흡이 끊어지면 육신은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하나님께로 온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생기, 호흡, 생령”이라는 단어는 모두 “영”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중국 여행사 Guide인 어느 조선족 자매의 간증입니다. 남한에서 여행 온 목사라고 하는 group을 안내하는데 그들로 부터는 무시 당하거나 불손한 일이 전혀 없이 예절이 바르고 다른 남한에서 온 여행객들과는 다르더랍니다. 아!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은 틀리구나. 그렇게 느끼고 있던 중에 우리 교회의 선교팀을 만나게 되고 기독교 인에 대하여 자세히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만나서 참으로 기쁘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이 같고 있는 영성으로 공산당원의 마음을 녹이는 힘, 바로 우리가 같고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성 입니다. 

    90년대초 부터 인터넷이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영성이란 단어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2000년도에 [생명의 삶과 소금과 빛]이라는 온누리 교회에서 발간하는 신앙잡지에 영성이란 무엇인가? 로 소개되면서 기독교계에 영성이란 단어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압니다.

    신령스러운 품성이나 성질, 성향 또는 정신적 경향을 의미하는 단어로 한마디로 이것이다. 신앙인들이 한마디로 딱 짤라 말할 수 없는 단어가 영성이란 단어이다.  영성이란 단어와 함께 신령이라는 단어를 제시합니다. 신령이란? “하나님께 속한 모든 영적인 것” 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것이 구원받은 성도를 통해서 표면으로 나타날 때에 성도의 믿음과 영적인 성품에 따라, 또는 어떠한 교리의 가르침을 받느냐에 따라서, 각각 다른 영성으로 나타날 수 있다. 칼빈이냐 장로교회냐 성결교 감리교이냐 오순절이냐 하나님의 성회이냐에 따라 영성의 차이가 천차만별로 나타날 수가 있다. 같은 오순절 성령을 받은 한 몸에 붙어있는 한 영성임에도 기존세대들 하고 청년세대의 영성이 또 다릅니다. 또한 영성을 다른 말로 믿음의 색깔(Taste)로도 표현합니다. 믿음의 열심으로는 따라올 자들이 없는 은사가 넘치고 성령충만한 오순절파의 영성에도 각자에게 있는 개성에 따라 믿음의 색깔이 조금씩 다른 모습 입니다.

    (살전5:23)”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온 영과 혼과 몸의 상태가 주 앞에서 어떠하느냐에 따라 영성이 다르게 나타난다 볼 수가 있다.

    성경적인 영성(靈性, spiritual formation)이란? 무엇인지를 바르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과학 문명과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것 같지만 사람은 원래부터 영적인 존재이므로 영적인 목마름과 갈망을 가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영을 넣어 주셨기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인다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1:19)”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성경적인 영성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도록 본래에 넣어주신 영의 성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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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찢어질 정도는 아니고 비교적 가난했다는 뜻입니다. 굶어 본 적도 없고 헐벗지도 않았습니다.

    농사라 해봤자 전과 답을 합쳐서 열 마지기 정도 지었을 겁니다.

    제가 만일 도회지로 유학을 안 가고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지게를 졌다면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을 지도 모르지요.

    시골중학교, 일명 논두릉중학교 가라고 원서를 사오셨길래, '아부지 그 갈라모 차라리 지게질랍니더'. 좀 당돌하긴 했지만 어린 마음에 걸어서 십오리나 가야 하는 그 학교에는 가기가 싫더라구요. 집안 형편도 생각지 않고 우기는 놈한테 져주시더군요.

    그건 그렇고,

    여나무 살 시월 중순, 그러니까 이맘 때 였던 것같습니다.

    "야야~ 아랫 동네가서 느그 아부지 모시고 오너라"

    "또 가라꼬예?"

    시계도 없던 시절이라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니 밤이 꽤 깊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지요.

    학교갔다와서 소몰고 산에 가서 소 먹이고 소꾼들하고 온 산을 쏘다니며 놀다가 저녁먹고 일찍 단잠을 자는 놈을 깨우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지요.

    투덜거리며 신작로를 걷습니다. 검정고무신으로 자갈을 걷어차봤자 발가락만 아픕니다.

    그날따라 그믐 쯤인지라 온 사방이 캄캄하더군요. 후미진 곳을 지날 땐 머리가 쭈삣거립니다.

    우리 아버지 말씀에, '늦은 밤에 이곳을 지날라치면, '이빨빠진 개오지(늙은 호랑이)'가 저 위 언덕밭에서 소쿠리로 퍼붓듯이 흙을 퍼붓는다'는 말을 들은지라 오금이 저립니다.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공굴(일제 때 건설한 콘크리트 다리를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길이가 50-60m 정도)을 지나고서야 좀 안심이 되더군요.

    제가 보기보다는 간이 큰 놈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야밤 중에 아무도 안 다니는 큰 재를 두 개나 넘어 집에 왔다는 거 아닙니까.

    수 십리 떨어진 외진 산골 외갓집에 갔다가 저녁 해거름에 집을 나서다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동네 어른들이 혀를 내두르더군요. 그것도 눈이 둥그래가지고. 다, 초등학교 시절에 익힌 실력(?)덕분이었지요. ㅎ

    아랫 동네 이 점방(가게) 저 점방을 기웃거립니다. 한 곳에 갔더니 구수한 우리 아부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부지! 집에 가입시더"

    "국장! 아들래미 왔다. 고만 마시고 집에 가소!"(우리 아버지 별명이 그랬음)

    부자는 신작로를 걷습니다. 우리 아부지 걸음이 어찌나 느리신지... 뒤돌아보면 저 뒤에서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걸어오십니다. 그것도 시조를 읊으시면서요.(청산리 백계수야~를 가끔 읊으셨지요)

    드디어 공굴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후미진 곳을 지나도 무섭지 않을 것입니다.

    아~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까 아부지가 안 보이는 게 아닙니까. 다시 돌아가보니까 다리걸 밑으로 내려가고 계시더군요.

    "강상, 있는가!"

    "아이구~ 어르신, 어서 오이소"

    자다가 '아닌 밤 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맨발로 잠자리에서 내려오더라구요. 옆에서 자던 강상 부인도 부시시 일어나더군요. 얼굴이 기찮다는 표정이더군요. 딸래미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고.

    소주 됫병(1.8리터)에 절반 안 되게 남은 술을 꺼내오고 동냥해서 얻어온 김치도 내오고...

    '아무리 술을 마시고 싶어도 그렇지, 거지가 동냥해서 얻어온 술을 얻어 마시다니!'

    알말의 존경심마저 사라지려는 그 당시 필자의 심정이었습니다.

    "아부지! 고만 마시고 가입시더"

    아무 때꾸도 없습니다.

    대신 강상이, "도련님, 여기 걸터앉으이소!"

    기어코, 강상이 애지중지(?)하는 그 독한 쐬주를 남김없이 주거니 받거니 거의 다 비우고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더군요.

    '아~ 우리 아부지가 이런 분이었나?
    예전엔 미쳐몰랐네!"

    그리고나서 세월이 좀 지났을 때였습니다. 고등학교를 부산에서 다니고 있었는데(꽤 알아주는 명문임), 고2 여름방학 때 우리 아부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참 안타깝고 슬퍼더군요.

    삼우제를 마치고 며칠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아무개야~ 거지 강상이 니 찾는다" 동무들의 말에 나가보니 강상이 울먹이며 다가오더군요.

    그 못생긴 얼굴(키도 작고 코도 반쯤 내려앉고)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러더군요. 누런봉투를 제 손에 쥐어주며 손을 잡고서,

    "부음을 늦게 들어 인자사 왔심미더. 죄송합니더. 도련님, 부디 성공하이소!"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여나무 살 때의 '아부지와 강상'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아부지는 강상한테 언제까지 동냥하며 살려고 그러느냐면서, "배미(뱀) 잡아라, 내가 도회지에 팔 곳을 알아봐 줄게". 그 뒤로 집게들고 망태메고 배미사냥꾼으로 나선 강상입니다.

    어린 딸래미가 좀 자라자 도시의 아부지 육촌 형님집(당시에 부자였음)에 가정부로 들여보내고요.

    돈이 모이니까 공굴밑에서 살 이유가 없었지요. 동냥하던 그 지역을 벗어나서 멀리 이사를 갔습니다.

    강상이 거지로 살면서, '어린 딸을 데리고 절뚝거리는 다리로 동냥하던 여자'를 만나 공굴밑에서 가정을 꾸렸던 것이지요.

    아~ 세월은 그 공굴밑에 흐르던 물과도 같습니다. 벌써 반 세기도 더 된 아련한 옛날이야기 이니까요.

    덧없이 흘러간 세월 속에 잠시 추억의 주머니를 뒤적여 몇 자 올려봅니다.

    (강상의 간절한 당부와는 달리, 필자는 세상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목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 독자제현의 건승을 빌어봅니다.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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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멜기세덱

    (qd<x,AyKil]m',  Melcisedevk , Melchisedec) 의의 왕

     

    아브함 시대의 예루살렘 제사장(창 14:18). 후대에 이상적인 왕의 전형이 되어 이러한 왕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 사장"이라고 칭하게 되었다(시 110:4). 히브리서에서 그의 특이한 지위를 묘사하여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논하고 있다(히 5:6-10, 7:).

     

    "이 멜기세덱은 살렘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 7:1)
                                                      
    <자료 1>

    멜기세덱과 그의 행한 일에 대한 역사적 언급은 창세기 14:18-20에 나온다. 그런데 히브리서 7장에서는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면서 전장을 이 멜기세덱과 비교하고 있다. 여기서 멜기세덱은 왕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의의 왕이요 살렘 왕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서 평화의 왕이란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부모가 없으며 족보도 없고 시작과 끝도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으며 영원한 제사장으로 있는다 하였다(7:2-3).
      
    그러면 여기 멜기세덱은 역사적 인물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였나? 또 역사적 인물이 아니었다면 왜 여기서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비교하고 있는가? 그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무엇인가?
      
    먼저 역사적 인물로서 멜기세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멜기세덱의 이야기는 중간 청동기 시대로서 B.C. 1500년 이전의 일이었다. 그 시대는 다양한 도시 국가들로 나라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돌라 오멜 왕과 그 동맹군이 소돔과 고모라 왕을 사로잡고 거기서 살았던 롯도 포로로 잡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그의 집에서 훈련시킨 318명의 사병을 거느리고 가서 그 동맹군을 격파해 롯을 구하고 탈취 당했던 물건과 많은 노략물을 얻어 돌아온다(창 14:1-16). 그러나 거기서 중심 인물은 그돌라 오멜 왕에게서 회복을 바랐던 소돔 왕과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이다. 특별히 멜기세덱은 제사장 왕으로서 아브라함에게서 1/10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 기록은 분명히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은 역사적인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어디의 누구였는가? 멜기세덱의 뜻은 나의 왕은 의롭다거나 정의롭다는 뜻으로 합법적인 왕으로 해석하는 학자가 있으나, 의의 왕이란 해석이 적합하다.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도 멜기세덱을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이라 불렀다. 이 의의 왕이란 말로서는 그가 누구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살렘이란 말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이 말은 완성하다, 다 지불하다는 뜻으로 보는 이가 있으나 평화란 뜻이 옳다. 그러므로 살렘 왕은 평화의 왕이란 말이다. 그런데 사해 사본이나 랍비들 그리고 조세프스는 시편 76:2을 따라 살렘을 시온과 동일시한다. 이렇게 볼 때 멜기세덱은 시온 즉 예루살렘의 왕이었을 것이다.
      
    또 유세비우스(Eusebius)는 아브라함이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서 선물을 받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해석된 그리심 산의 성전으로 한 손님을 맞이했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살렘은 그리심 산과 동일시되며 이곳에서 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 다스리며 사역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해석은 창세기 14:18의 칠십인 역을 지지한다.1)
      
    그런데 멜기세덱은 이 사건 후에 곧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후에는 사독 계열 제사장이 생겼고 이들이 아론 제사장 계열과 합치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사독과 멜기세덱은 같은 어근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또 유대주의에서는 멜기세덱에 대해 하스모니아 왕조의 유대 제사장 왕들에서 어떤 증거를 찾을 수가 있다(B.C. 164ㅡ 63)고 생각하며 거기서부터 사두개 파가 나왔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그들은 제사장이요 왕이었던 멜기세덱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그 밖에 다른 견해는 사해 사본에서 발견되는데 거기서 멜기세덱은 천사장 전사로 나타난다.2)  

     

    이렇게 볼 때 역사적으로 멜기세덱은 살렘 즉 예루살렘의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그는 정종이 분리되기 이전의 신정 정치체제에서 역사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그는 분명 선민 이스라엘이 아니라 가나안의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중에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물론 그의 사역자(제사장)까지 있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제사장의 직분까지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의 역사성에 보다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멜기세덱을 소개하고 있다. 그를 의의 왕이요 평화의 왕이며 출생과 부모와 족보가 없으신 분으로 소개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기에 적합한 분임을 지적하였다. 모세와 천사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는 제사장으로서도 레위 계통의 아론보다 더 근원적이시며 뛰어나신 분이시다. 그는 적어도 아래 세 가지 사실에서 레위의 제사장직을 초월하신다.

       1. 그는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았다. 더 넓힌다면 레위인에게서 받은 것이다.
       2. 그는 그보다 열등한 아브라함을 축복하였다.
       3. 그는 레위같이 죽을 인간과는 대조적으로 영원히 사신다.3)

    이렇게 하므로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의롭게 다스리시며 평화를 구축하실 것으로 기대되었던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고 있다(사 9:5-6; 32:17; 렘 23:5-6; 33:15; 단 9:24; 슥 9:1-10; 말 4:22).4)

       주
       1. George W. Buchanan, To the Hebrews(New York: Doubleday, 1972).  p.117
       2. Peter H. Davids, More Hard Sayings for the New Testament,  p.104
       3. George W. Buchanan, Op,cit., p.122
       4. Ibid.,
    http://www.revdavidsuh.com/

     

    <자료 2>

    창세기 14:18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나타나 제사장의 직능으로 떡과 포도주를 상징적으로 써서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있다.

    멜기세덱과 같이 제사장과 왕의 두 직능을 한 몸에 겸비한다는 것은 후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의 이상적 왕자로 되고, 따라서 이상적 왕자는 `멜기세덱과 같은 자'라고 칭함을 받았다(시 110:4).

    이것은 히브리서 5:6, 7에 있어서 그리스도에의 적용에 대성(大成)되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엘람 왕˙고임 왕˙시날 왕˙엘라살 왕이 소돔과 고모라를 침공했을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사로잡혀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정병 318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추격하여 다메섹 좌편 호바에서 롯과 부녀, 그리고 재물을 다 찾았다. 돌아올 때 소돔 왕이 나와 그를 영접하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상술한 바와 같이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축복해 주자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줌으로써 십일조의 창시자가 되었다.
         

    멜기세덱에 대해 보는 관점이 많고 구구하지만, 히브리서 7:1- 17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그는 영원한 제사장(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다. 그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한다.

     

    그의 제사장직은 조계(祖系)를 전연 가지지 않은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대제사장직과 유사하다. 그는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아들의 모형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탄생 2,000년 전에 이미 멜기세덱이란 인물로 예표되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보다 높다.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분의 일을 주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히브리서 7:4, 7, 특히 7절에 "폐일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리만큼 영전이 컸다. 즉, 그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그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창 12:3). 그가 아브라함을 축복한 점이 아브라함보다 높은 증표다. 떡과 포도주는 영적으로 예수그리스도에 의한 축복을 암시한다(마 26:26- 29).
         

    그리고 `살렘'은 예루살렘일 것이다. 그 이유로써,

    ⓧ 살렘은 이스라엘 사람의 가나안정복 전부터 예루살렘이란 이름으로 존재했으며, 왕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었다.

    ⓨ 시편 76:2에서 살렘은 예루살렘(평화의 성읍, 평화의 소유란 뜻)의 단축형으로써 쓰이고있다. ⓩ 만일 멜기세덱이 다윗처럼 같은 이 도성의 왕이라면 시편 110:4에서 다윗의 주가 멜기세덱과 대비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① 예루살렘은 아브라함이 호바와 다메섹에서 귀환하는 도상에 있었다는 것(창 14:15, 17, 18) 등의점을 들 수 있다.

    http://cafe.daum.net/LoveBibleLove/DRaT/

     

    <자료 3>

     

    1. 창세기에 등장하는 멜기세댁

    창14장에 보면 엘람 왕 그돌라 오멜이 자기를 섬기는 이웃 나라들이 자신을 배신한 일에 격분하여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나라를 쳐 전쟁을 일으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이 싯딤 골짜기에서 싸울 때 소돔과 고모라 왕이 그에게 패하여 병사들은 역청 구덩이에 빠지고 왕들은 겨우 도망했습니다. 엘람 왕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 들어가 모든 재물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때 그 성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들도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같은 롯의 소식을 듣고 집에서 길러온 용사 318명을 거느리고 단숨에 쫓아가 엘람 왕을 기습했습니다. 이 기습전에서 대승한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포로로 잡혀간 자기 조카 롯과 모든 사람들과 재물도 빼앗아 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 올 때 소돔 왕이 친히 아브라함을 영접하러 마중 나왔으며 살렘왕 멜기세댁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영접했던 것입니다. 이 때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고 있으며 이 자리에서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 축복했습니다. 그의 축복은 ‘천지의 주재이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의 대적을 너의 손에 부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지로다’고 했습니다. 

    2. 멜기세댁의 신분

     멜기세댁의 신분을 보면 그는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말은 평강이란 뜻입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려진바 없지만 지금의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한 도시로 아마도 그 지경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당시 살렘이란 지역을 지배하는 왕의 신분으로 있었으며 아브라함에게도 알려지고 그도 아브라함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에 대하여 전혀 몰랐다면 신분도 모르는 사람에게 그의 노략물의 십분의 일을 바칠 이유도 없었거니와 멜기세댁에게 축복 기도를 받지도 아니했을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풀어보면 멜기란 말은 왕, 세댁이란 말은 의란 의미로 멜기세댁이란 의의 왕이란 뜻인 것입니다. 그의 신분에 대하여 성경에서는 그를 살렘의 왕이라고 했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고 했습니다. 히7장을 보면 멜기세댁은 아브라함보다 높은 자로 나와 있는데 그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해 주었으며 아브라함으로부터 11조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멜기세댁은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과 왕의 직분을 설명하는데 반드시 성경에 등장해야 할 인물입니다. 만약 이 사람이 없었더라면 예수님은 그의 제사장직에 대한 성경적인 증명이 전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제사장이시며 왕이신 그의 직분에 대해 증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백성들의 속죄 제물이 되셨다면 그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에 따르면 그 속죄 제물을 드려야 할 사람이 대제사장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반드시 레위 지파의 자손 중에서 나와야 하는데 유다 지파이신 예수님이 무슨 성경적 근거로 대제사장 직분을 하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예수님이 왕이 되시는 일은 그가 유다 지파에 속하셨으며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에 인정을 받으실 수 있지만 그가 대제사장이 되실 수 없는 것은 그는 레위 지파에 속한 제사장의 자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성경에 멜기세댁이 등장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속죄제물과 제사장 직에 대하여 설명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멜기세댁이 등장하여 예수님으로 하여금 레위가 아니라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제사장이 될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까? 멜기세댁은 레위 자파도 아니요 아론의 자손도 아닙니다. 아론이나 레위란 인물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댁을 만난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직분은 반드시 레위지파의 자손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멜기세댁이란 사람이 이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제사장은 동시에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멜기세댁은 살렘 왕이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의 반열을 따라 제사장이 된 예수님은 멜기세댁처럼 왕과 제사장이 동시에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결론 :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과 제사장 직분의 법적 근거를 만들어 놓으시기 위해 율법적인 대제사장이 생기기 이전에 이미 창세기에 멜기세댁을 등장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시요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같은 신분은 멜기세댁과 같이 영원히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왕이시며 우리의 제사장이신 예수님 앞에 가까이 나아가 그에게 간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3. 멜기세댁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히브리서 7:1-10) 


    1) 멜기세댁이란 이름에 담겨진 메시야적인 의미
    멜기세댁이란 이름에는 메시야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연관되는 것입니다. 멜기세댁이란 이름이 의의 왕인 것처럼 사32:1절에서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의로 통치하는 왕’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보라 장차 한 왕이 의로 통치할 것이요 방백들이 공평으로 정사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언하고 있는 ‘장차 의로 통치할 왕’이란 그리스도가 장차 만 왕의 왕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실 일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이 예언은 유대인이 소망하고 있는 메시야왕국(천년왕국)에서 이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댁이란 이름은 그 이름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직분에 대한 예언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의 직분은 살렘 왕이라고 했습니다. 살렘이란 평화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살렘 왕이란 평화의 왕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분입니다. 사53: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또 사9장에서 주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에서 ‘평강의 왕’이란 이름으로 나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게 하신 평화의 왕이시며 평강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또한 멜기세댁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에 대하여 히7:26절에서 ‘하늘보다 높이 되신 우리의 대제사장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멜기세댁은 그의 이름이나 그의 직분 등 모든 일에 있어서 다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 적중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묘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 멜기세댁은 그리스도의 높으심을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멜기세댁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높으신 분이신 가를 보여 주셨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야에 대하여 기대와 소망은 가졌지만 그 분의 위치가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모세정도의 인물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날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   각하느냐 뉘 자손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다윗의 자손이니이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시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질문을 계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기를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하시니 그들은 유구무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셨지만 아브라함보다 더 높은 멜기세댁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메시야이신 예수님은 바로 이 멜기세댁의 서열을 따라 왕과 제사장이 되신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멜기세댁의 신분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나오고 있습니다. 그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고 했습니다. 방불하다는 말은 똑같다는 뜻이 아니라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그에게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멜기세댁이 아담의 자손이 아니란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치고 아담의 자손이 아닌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멜기세댁은 천사였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천사가 왕으로 사람을 다스리며 제자상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린다는 일은 성경에서 상상도 하지 못할 일입니다. 이 말의 뜻은 멜기세댁의 인간적인 계보가 전혀 없다는 데서 한 말입니다.

      멜기세댁이 그리스도의 예표적 인물로 등장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족보가 없어야 합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가 성경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로 기록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멜기세댁을 성경에 등장시키실 때부터 그의 족보를 기록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마 1장에는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 족보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혈통관계를 계보로 만든 것이지 그 분은 원래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족보에 해당되실 분이 아니십니다. 멜기세댁은 육신적인 예수님의 예표가 아니라 그의 왕권과 제사장 직분에 대한 서열로 등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인간적인 족보가 성경에서 삭제되었으며 영원히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들처럼 등장시킨 것입니다.

      결론 : 멜기세댁의 제사장 직분은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넘겨 드림으로,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예표 인물로서의 성경적인 사명을 이룬 것입니다. 우리는 이 멜기세댁에 대하여 깊은 지식을 가짐으로 우리 주님의 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놀라운 지식을 갖게 되며 우리의 신앙이 장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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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지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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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는 미국 포크가수 밥 딜런이었다. 대중가수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것은 115년 역사상 처음이라고 한다. 대중가수가 문학상을 받은 것에 대해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니 작가들의 자존심이 많이 상한 모양이다. 그러나 누가 있어서 작가의 작품과 일반인의 작품을 구별하여 딱지를 붙일 수 있을 것인가.



    밥 딜런은 노래도 하면서 직접 작사 작곡까지 하는 싱어송라이터다. 그의 노래 가사는 철학적 깊이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밥 딜런을 음유시인이라고도 하고, 10살부터 시도 썼기에 시인이라는 호칭도 따라 다닌다. 그래서 스웨덴 한림원도 밥 딜런을 노벨 문학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밥 딜런의 가사를 "귀를 위한 시"라고 평했다.



    일반인보다 못한 작가도 있고 작가보다 뛰어난 글을 쓰는 일반인들도 있으니 밥 딜런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것에 대해 왈가불가할 일은 아니다. 작가들에게만 노벨상을 주라고 작가들이 떼를 쓰는 것은 한국의 민주화운동처럼 황당할 따름이다. 정작 작가라고 온갖 폼은 다 잡으면서도 작가다운 작품을 생산해 내지 못하는 작가들이 더 문제인 것이다.



    밥 딜런의 유명한 가사 중의 일부를 음미해보자.



    -바람에 날려서(Blowin' In The Wind)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 봐야

    진정한 인생을 깨닫게 될까요



    흰 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 봐야

    백사장에 편안히 잠들 수 있을까요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세상에 영원한 평화가 찾아올까요

    개혁주의 인간론  

                                                                   - 박일민(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또 행복해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좋은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매우 적다. 왜 우리는 기대와 현실에는 이처럼 많은 차이가 있는가. 그것은 죄가 사람의 본성과 운명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과 관련하여서, 죄와 죄의 해결 문제에 최대의 관심을 보인다. 이제 성경의 최대 관심사인 죄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죄의 개념
    죄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관심거리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죄에 대한 관심사가 있다. 그러나 동일한 사안을 두고 어떤 사람은 심각한 죄라고 강력하게 비난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죄가 아니라고 태연해 하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누가 보기에도 분명한 죄를 범하고도 태연해 하거나, 더 큰 악을 막기 위해 부득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죄를 정당화하려는 경우까지도 있다. 각자의 처한 상황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서 다양하게 죄를 이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결과다. 그러나 죄에 대한 성경의 기준은 단 하나다. 그 기준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내용이 고려된다.  
      
    죄는 하나님과 연관되어 있다. 성경은 죄를 항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죄로 여겨지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로 간주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적인 관점에서만 죄를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죄"라고 한다(롬 14:23).
      
    죄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위반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생각이나 하시는 일은 다 선하다. 죄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르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의 표현인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죄는 불법 또는 반역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죄는 도덕적인 것이다. 죄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재난이나 육체의 질병과 다르다. 자연적인 재난이나 육체적인 질병에는 의지가 개입되지 않는다. 그러나 죄는 의지와 연관이 되어 있다. 넓게 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죄의 악한 영향을 입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이고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들에는 죄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거센 비바람에 집이 무너지거나, 어둠 속에서 돌에 걸려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난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부실공사로 집이 무너지는 것이나, 고의로 상대방을 밀어 뜨려 다치게 하는 것은 죄이다.
      
    죄는 의지와 관련되어 있기에 책임을 수반한다. 의지에 따른 행동의 결과는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사업을 게을리 하면 부도의 책임져야 한다. 공부를 게을리 하면 낙제를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울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라도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의 열매를 거두게 된다. 죄가 져야 할 책임은 죽음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롬 6:23) 여기서 죄로 말미암은 사망이란 육체적인 사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망에는 세 가지의 의미가 있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육체적인 사망,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통이 두절되는 영적인 사망,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내어 쫓겨나 지옥의 고통 속에서 슬피울며 이를 가는 영원한 사망이 그것이다. 죄의 책임으로서의 사망은 이 세가지 사망을 모두 포함한다.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은 생명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기에 다만 죄만을 생각한다. 죄에로만 더욱 깊어진다.


    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이 속으로 품은 생각까지도 죄로 지적한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죄를 범한 것으로 여긴다(마 5:28). 겉으로 형제를 해하는 자만이 아니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한다(마 5:22). 마음으로 악한 생각을 품었지만, 실제 행동에 옮기지 않았다고 하여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구체적으로 악한 행동을 하기 이전의 동기부터 죄로 여겨진다. 또 아무리 선해 보이는 업적을 이루었거나 그 동기가 선했다고 하더라도, 그 목적이 잘못되어 있으면 역시 죄로 취급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람이 가진 악한 성향마저도 죄로 여긴다. 사도 바울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갈 5:24)고 했다. 이 말씀 속에는 사람의 감정과 육체의 기질도 죄로 취급되어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죄는 중간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죄이면서 동시에 죄가 아닌 것, 또한 죄도 선도 아닌 중간적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죄이면 죄이고, 죄가 아니면 선이다. 이것은 마치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립 지역이 없는 것과 같다. 죄인이 가야 할 곳은 오직 지옥이다. 의인이 가는 곳은 천국뿐이다. 또 다른 장소는 없다. 또 빛과 어두움 사이에 중간자가 있을 수 없는 것과도 같다. 빛이 없는 것이 어두움이다. 빛이 있으면 어두움은 사라지고 만다.
      
    2. 죄의 종류
    죄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죄를 종류별로 나누어 보는 것이 좋다. 죄는 먼저 원죄와 자범죄(본죄)로 나누어진다.
      
    1) 원죄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12)고 했다. 사람은 모두가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는 모두가 실제로 경험을 통해서 확인하고 있는 바다. 왜 한 사람 예외 없이 모두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본성적으로 죄의 쓴뿌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쓴뿌리를 원죄라고 부른다. 이 죄를 원죄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죄는 우리들 각자가 범한 죄가 아니라 인류의 시조인 아담이 범한 죄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요, 대표자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온 인류에게 악영향을 미쳐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만든다. 둘째, 이 죄는 우리가 나기 전부터 선천적으로 가진 죄이기 때문이다. 원죄는 후천적으로 얻어지는 죄가 아니다. 셋째, 모든 자범죄의 원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2) 자범죄
    성경에서 각 개인이 실제적으로 범한 자범죄와 관련하여 언급하고 있는 죄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죄인 줄 알면서도 범한 죄가 있다(知識罪). 이 죄는 죄인 줄 모르고 범한 죄보다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눅 12:47∼ 48)고 했다.
      
    죄인 것을 알지 못했기에 범한 죄가 있다(無識罪). 그러나 죄인 것을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모르고 행했다 하더라도 죄는 죄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께서는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몰랐다는 핑계가 소용없음을 깨닫고, 무엇이 죄인지를 알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
      
    사람이 실수하거나 연약해서 범한 죄가 있다(過失罪, 軟弱罪). 죄인 것을 알면서도 연약하고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범한 죄이다. 연약죄도 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전하고 담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믿음의 장성한 분량은 연약죄를 얼마든지 감소시킬 수 있다.
      
    죄인 것을 알면서도 고의로 범하는 죄가 있다(故犯罪). "무릇 짐짓 무엇을 행하면 여호와를 훼방하는 자니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민 15:30)고 한 말씀 중에서, 짐짓 범한 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죄는 고범죄라고 불려진다. 고범죄는 연약죄에 비해서 죄책이 훨씬 더 가중된다. 사도 바울께서는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은 그 죄가 드러날 때, 먼저 심판에 들어간다고 했다(딤전 5:24). 그러므로 다윗 임금은 고범죄를 범치 않음으로써, 큰 죄과에서 벗어나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시 19:13).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속죄제물이 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용서함을 받는다. 그 용서에는 예외가 없다. 무식죄만 아니라 지식죄도 용서를 받는다. 연약죄만 아니라 고범죄도 용서를 받는다. 제아무리 주홍 같은 죄라도 다 양털같이 사함을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무리 막중한 죄라도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기억도 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성경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요한 사도께서는 그러한 죄를 범한 자를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그러면 용서받을 수 없는 죄란 과연 무엇인가?
      
    3) 용서받지 못할 죄(不可赦罪)
    성경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말씀하고 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1∼32)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보임이라"(히 6:4∼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한 자를 소멸할 불만 있으리라"(히 10:26∼27)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한 것을 보거든 구하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요일 5:16)
      
    이 구절들에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성령훼방죄, 다시 타락한 죄, 짐짓 범한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표현들을 잘 비교해 보면 무엇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지가 밝혀진다.
      
    "한 번 비췸을 얻고 …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라는 표현과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전혀 기독교 밖에 있는 자들의 죄가 아니다. 상당한 체험과 지식을 가진 자들이 범하는 죄이기 때문이다. 또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는 표현과 "성령을 거역하면"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성령의 역사와 관련이 되어 있다. 또 "짐짓 죄를 범한 즉"이라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고의적인 죄이다. 그리고 "구하라 하지 않노라"하는 표현을 보면, 이 죄는 회개와 무관한 죄이다. 따라서 용서받지 못할 죄란, 실상은 구원을 받지 못했으면서도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인 줄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그 역사를 방해하면서,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라고 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경건한 성도들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상당히 심각하다고 여겨지는 죄를 범하고 나면, 이것이 바로 혹시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닌가 하여서 고민을 한다. 경건의 성숙도가 더한 사람일수록 작은 죄에도 불구하고 그 고민은 더 심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용서받아지지 못할 죄가 없다. 그러므로 죄가 생각나거든 고민하지 말고 즉시 회개를 해야 한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함부로 어떤 특정한 행위를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정죄해서도 안 된다. 우리의 성급한 생각 때문에 죄인을 회개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방해하려는 것은 큰 잘못이다. 주님을 맹세코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회개의 기회를 허락하셨다. 뿐만 아니라 회개한 베드로는 범죄하기 이전보다 더 신중하고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졌다.
      
    3. 죄의 판단기준과 율법
    성경은 죄를 불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법이 없으면 불법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죄도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설명은 죄를 가능하게 하는 법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1) 율법의 개념
    나라들마다 법을 가지고 있다. 날이 갈수록 그 법은 더 많아지고 있다. 또 국제간에도 법이 생겨난다. 그런데 법은 그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강제력을 부여하여서 그 의지를 반드시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삼고 있다. 하나님의 법도 이와 같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반드시 그 의지가 반영되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율법의 요구에 대한 불순종은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불순종이 된다. 이 불순종이 바로 죄다. 성경은 빈번하게 죄를 불법, 법에 어긋남, 빗나감 등으로 표현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2) 율법의 종류
    하나님의 율법에는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지 않은 불문법(不文法)과 문서의 형태로 기록되어진 성문법(成文法)이 있다.
      
    불문법에는 자연법과 도덕법이 있다. 자연법이란 자연계나 사람의 본성 속에 주어져 있는 자연의 법칙을 말한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은 기쁨의 단을 거둔다. 좀더 졸고 자자고 하는 사람에게는 빈궁이 찾아든다. 열심히 연구하고 지능을 개발한 사람은 많은 지식을 깨닫게 된다. 이 모두가 자연법에 해당된다. 도덕법이란 사람의 양심에 새겨진 법을 가르킨다. 사람의 양심에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잘 반영되어 있다. 자연이나 양심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죄가 된다.
      
    성문법은 문서, 즉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을 가리킨다. 성경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율법 형식을 가진 부분만을 제한해서 본다면, 하나님의 법은 세 가지로 구분이 되어진다. 기본법과 의식법과 시민법이다. 기본법은 십계명을 가리킨다. 십계명은 모든 사람들에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법이다. 십계명은 그 공포나 보관 방법이 다른 법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했다. 그래서 황금률이라고도 부르게 된다. 우리는 십계명을 대할 때, 단지 문자적으로만 대할 것이 아니라 최소한 다음 몇 가지 원리들에 더 유의를 해야 한다.
      
    순서의 원리: 먼저 주신 계명은 나중에 주신 계명보다 우선해서 지켜져야 한다. 만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지만, 이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장애가 되는 일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일은 당연히 없어야 한다. 그러나 죄악된 세상에서는 가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때 고려되는 것이 순서의 원리이다.
      
    대표의 원리: 십계명은 문자대로 지켜야 한다. 그러나 그 문자 안에는 대표의 원리가 들어 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아버지와 어머니만을 공경하라는 말이 아니다. 부모라는 말에는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삼촌, 고모, 이모 등 웃어른을 대표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도 살인의 결과만 금한 것이 아니다. 살인 계획이나 분노, 미움, 모욕 등의 감정, 그리고 살인의 수단이나 과정까지 금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칭의 원리: 십계명은 그 문자적인 내용과 대칭 되는 의미까지를 고려해서 지켜야 한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계명은 안식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에는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라는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네 이웃을 해하지 말라는 계명에도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칭적 의미인 네 이웃을 내몸 같이 사랑하라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다. 그러므로 살인이나 거짓 증거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진실을 말하지 않는 것도 죄가 된다.
      
    성문법에는 십계명 이외에도 의식법이 있다. 의식법은 제사의 종류, 절차, 재료, 방식, 출애굽 당시의 진행 방식, 위치, 역할, 할례와 유월절 의식, 절기를 지키는 시기나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이 모든 의식법들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다. 그러므로 의식법을 지키지 않으면 죄가 된다. 의식법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말미암는 사건들을 예표한다. 따라서 의식법은 실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가 되어졌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금의 우리는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 이 법을 지키고 있다(히 8:6∼7).
      
    시민법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 생활에서 지켜야 했던 법, 즉 재산의 분배나 가정 생활이나 범죄의 형량, 또는 병든 자의 격리와 회복자의 수용 절차 등에 관한 법이다. 시민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 법에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 있다. 따라서 이 법의 위반도 역시 죄가 된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이 다른 형편에까지 시민법을 문자 그대로 적용시킬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따라서 그 원리만을 살리는 것으로도 족할 것이다.
      
    3) 율법의 기능과 역할
    율법은 은혜 아래 있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종교 개혁자들 이후로 다음 세 가지 의미가 강조되고 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보여준다.
    율법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또 어떻게 그것을 이루어 가시는지 하는 것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기 원하면, 그리고 하나님의 솜씨인 피조물들 또는 하나님이 일하신 흔적인 역사를 바로 알기 원하면, 율법을 깊이 연구해야 한다.
      
    둘째,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해준다.
    율법은 옳고 그름의 판단 기준이 된다. 그리고 죄의 결과가 죽음임을 말해 준다. 따라서 율법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준다. 또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의 어리석음도 보여준다. 동시에 율법은 무엇이 우리의 살 길인지를 찾게 해준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켜서 그리스도인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부른다(갈 3:24).
      

    셋째, 율법은 구원받는 자의 삶의 표준이 되어 준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은 이제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인가. 율법은 바로 그 방법을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율법은 은혜를 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의 완성이 된다.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자원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이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여서, 율법과 상관이 없이 우리의 마음대로 살아도 무방하다고 하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상한 심령을 찾으신다. 상한 심령이 되기 위해서는 죄를 알아야 한다. 죄를 알기 위해서는 율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 앎은 단순히 지식적인 이해나 암기가 아니다. 가슴을 찢는 앎이다. 우리에게는 늘 다윗과 같은 기도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하나님이여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찢어진 가슴을 싸 메시고, 애통하는 마음을 복되게 여겨서 위로와 평안의 복을 주시는 분이시다(마 5:4).  

     

    출처: 개혁하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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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신들도 알아본 그 분, 예수 그리스도
    본문읽기:마태복음 8장

    28.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

    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잇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30.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31.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이르되 만일 우리를 쫓아 내시려면 돼지 떼에 들여 보내 주소서 하니

    32. 그들에게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사하거늘

    33. 치전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 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34.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앞 단락에서는 물질계(현상계)에 속한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께 순종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아직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각지 못했음을 마지막 문장에서 부각시킴으로써, (이 이가 누구시길래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이어지는 본 단락에서 반전을 꾀하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겠지만 마태의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조직적이고 치밀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세관에 근무하면서 '계수'에 밝아 차변 대변(자산이나 자본과 부채의 항목을 기록하는 회계장부의 좌우편 란)이 한 푼도 틀림이 없어야 했던 마태의 그런 인간적인 면을(경험까지도) 사용하셔서, 성령께서는 마태복음을 기록케 하셨던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서는 영계의 귀신들을 통해서 예수님은 '누구신가'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의 증거를 받으실 하등의 이유나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기록되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계심'에 대해서 나름대로 증명코자 애를 씁니다. '신존재증명'이란, 사람이 증명한다고 해서 증명되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God's self-revelation)인 성경에 그 분의 계심, 그것도 영원히 계심이 밝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하나님의 존재 증명을 위해 철학적 사변으로 세월을 낭비합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증거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 분이십니다.

    인생은 남이 인정해 줄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안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그런 분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것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남의 이목이나 판단에 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심히 거짓되고 부패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판단은 말씀의 판단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멉니다. 성경만이 삶의 유일한 표준이요 판단 기준입니다.

    고구마는 딱딱해서 칼이 잘 안 들어갑니다. 두부는 물렁하기에 손가락으로 찔러도 잘 들어갑니다. 할 수만 있으면 부드러운 마음으로 모든 이들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포용하십시오. 판단하지 마시고요. 판단은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다만 현대의 혼탁한 영계를 분별은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누가 알아주면 어떻고 몰라주면 또 어떻습니까.

    하나님 존전에 살아가는 인생으로서, 주님이 보시기에 옳은 길로 묵묵히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 가난한 양반이 잔치집에 가서 체면차리다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 들으면서 집에 왔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너무 사람들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그러다가 자칫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처럼 될 수도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의식하십시오.

    왜 필자가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을 드리느냐 하면 현대교회가 세상 사람들한테 안 지려고 너무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잘 사는 것으로 복음을 증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있는 대로 사십시오.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아봤다고 해서 주님이 흐뭇해 하셨을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복음선포와 고치심을 통해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메시야-구원자)이심을 알아먹지 못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그 분이심을 귀신들도 알아봤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계도 장악하고 있으신, 다시 말해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차원의 악하고 더러운 존재인 귀신들까지도 다스리시는 예수님이야말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메시야이심를 밝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지요.

    하늘은 하나님의 영역이요, 땅은 인간이 지들 마음대로 살아가는 지들의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의 영역에서 벗어날 그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천국(그 하늘들의 그 나라)은 힘차게 나아가는(전진하는) 종말론적 천국입니다.

    귀신들도 때가 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어 영계와 현상계를 심판하실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인간들은 심판이 있는 줄 조차 모르고 지 맘대로 살아갑니다.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 자체가 종말론적 긴장을 불러옵니다. 왜냐하면 그 분 자신이 천국(하나님 나라) 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 안에 있는 자들은 이미 천국에 속한 것입니다. 성경은 피안의 세계로서의 천국에 대해 그리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대권이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과 함께 그 분이 구원자로 오셨다는 것 자체가 천국이 이미 도래했음(왔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너무 '천국 지옥' 간증 그런 것에 관심하지 마십시오. 복음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여러분은 이미 천국-하나님 나라에 거하면서 그 분의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복된 말씀입니까.

    내가 그런 신분인 지 잘 모르겠다고요?

    하나님 나라(천국) 백성의 특징 중 하나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린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날마다 점검하고 누리십시오. 신자가 마땅히 누려야 할, 누릴 수 있는 특권이요 분깃입니다.

    죽어서 천국가려고만 하지마시고요.

    구자준 목사2016/10/1213: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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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회복, 마지막 때 구원의 역사!


    이스라엘 독립은 하나님의 특별섭리,

    일련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예수의 재림이 가까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1948년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독립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의 역사였다.


    지금은 당연해 보이지만,

     독립 이전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이다.


    지난 18세기 동안 세계 100여개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옛 고토로 돌아와

    독립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2000년 전 예수께서 약속하신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나님께서 특별히 개입해 이루신

    섭리의 역사임이 분명하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 위에서 마지막 때의 징조를 묻는 제자들에게

    세 가지 중요한 때를 예고하셨다. (마 24, 막 13, 눅 21장)


    ▶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지는 징벌의 날

    ▶ 예루살렘이 이방인에게 밟히는 이방인의 때

    ▶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재림의 때

    가 바로 그러하다. 


    첫 번째로 주후 70년과 135년 두 차례에 걸친

    로마의 예루살렘 파괴를 볼 수 있는데,

    유대인들이 다시 전 세계로 흩어지는 결과를 가져온

    이 사건은 동시에 이방인의 때가 시작되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방인의 때는

    1948년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과

    1967년 예루살렘의 관할권 회복으로 예고된

    그 때가 찼음을 보여주었.


    덧붙여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마지막 때인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이

    도래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전조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독립은 20세기 인류가 경험한

    가장 위대하고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19세기 말, 한 인물을 택하셔서

    정치적인 시온주의를 시작하셨다.


    시온주의는 유대인들이

    옛 고토 팔레스타인에 자신들만의

    독립된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정치적 회복운동을 말한다.


    이 시온주의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비엔나 출신인 나탄 비른바움(Nathan Birnbaum)으로,

    1884년 그의 두 친구와 함께 서구세계에서는 처음으로

    '카디마'라는 이름의 국가적 회복주의 성격의

    유대인 학생단체를 결성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후 이스라엘의 독립을 견인한 것은

    19세기 말 테오도르 헤르츨 주도로 시작된

    정치적 시온주의에 의해서였다.


    성경의 역사는

    이스라엘과 열국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기본 전제로 삼고 있다.


    이스라엘의 중심성이

    어떤 시대, 어느 경우에도 제외된 적이 없다.


    이방을 향한 원심력과 이스라엘을 향한 구심력은

    성경의 역사를 이끌어 간 원천적 힘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종류의 힘은 모두 이스라엘을

    그 중심점으로 삼고 있는데,

    그런 점에서 성경의 역사는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하나님 섭리의 역사이다.


    이러한 성경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이스라엘 중심성을 결코 배제될 수 없다.


    더불어, 구원 역사의 마지막 시간성인 종말도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때에 일어날 여러 징조들을 가르쳐 주시면서

    가장 핵심적인 내용으로 이스라엘 회복에 대해

    언급하신 것을 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안다' (막 13:29)


    여기서 여름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카이쯔'는

    종말의 때를 의미하는 '케쯔'와 발음이 유사한데,

    많은 성경학자들이 무화과나무의 가지가 연해지고

    잎사귀가 나오는 것을,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으로

    해석하고 있다.


    루터가 유대인들에게 반감을 갖게 된 결정적 동기는

    유대인들이 나라 없이 흩어져 살고 있었기 때문인데,

    성경학자였던 그의 눈에는,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지내는 유대인은

    더 이상 하나님 역사와 상관없는 버려진 민족으로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루터가 가졌던 오해의 여지가

    전혀 없는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독립을 직접 목격하고 있는 우리들은

    유대인에 관한 한 루터보다 더 분명한 안목을 갖고

    성경을 해석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은

    바른 성경적 관점으로 마지막 시대를 열어가는

    주요한 지표요 지침이 되어야 한다.



    - 권혁승 교수(서울신대 전 부총장)

    신천지 NY 활동에 참고하세요

     

    요즘 뉴욕에 있는 신천지 추수꾼들의 활동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부분만을 여러분과 공유코자
    알려드림니다,

    먼저 요즘에는 각 교회나 학교 단체등에 태권도 무료 행사및 운동을 무료로 가르쳐준다며 학생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또한 각 학교 학생들에게 접근하여 무료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있기도 합니다,

    내용은 다 아시다시피 처음에는 성경을 가르치다가 시간이 지나면 너희 교회 목사를
    잘 알고 있는데 그 목사는 장사꾼이며, 직업으로 하는 사기 목사야 라고 하며,,
    내가 기도중에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며.. 성경에 좋은 말씀들 즉
    너는 내사랑하는 아들이다,  이제부터 너에게 축북을 무한하게 내릴것이다,
    하나님이 너를 너무 사랑하신대,, 등등  들어서 단번에 빠지게하는 성경의 좋은말만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들을 다른 사람에게는 못 옮기게하며 자기들 성경 또는기도모임에 나오게하고또는 개인적으로 집으로 부르든지 아니면 따로 만나서 기도해주기도 합니다

    이들은 임씨 성을가진 여자와  송씨 성을가진 남자이며 신천지 전도사급 들입니다,
    이미 이들은 뉴욕에 여러 교회를 옮기면서 신도들을 굥약하고 있습니다,
    목사님들도 이들을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처음와서는 아주 열심히 봉사하기때문에 얼마후 쉽게 교회 중책까지 맡겼다가 분란,풍파를 일으키다 나가곤 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제법 나이가 있는 할머니입니다,, 자칭 한국에서 목사안수 받았고, 자기 과거나 한국에서 섬겼던 교회에는 전혀 비밀리 하고 있습니다,  이 할머니 또한 위 두사람과 너무나 똑같은 즉 신천지 교과서대로 활동하며 포섭을 하고 있습니다,

    나와도 같은 교회 다닐때 여러 여집사님들에게 접근한적이 있었지만 대부분 처음에는 혹하여 모임에 나가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이상한 말씀에 모두 따르지 않으니 스스로 교회를 떠난적이 있었고 저에게도 목사님 험담을하며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주심 말씀이 있으니 자기 집으로 오면 전해주겠다고 접근한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할머니 이름을 잊었지만 과거 간호사로 오랫동안 근무한 경력이 있는사람이며
    그 아들은 현제 후러싱있는 OOOO 교회에서 부목사로 있는데,, 아들은 신천지에 속해 있는지 정확히는 알수가 없어 그에 대한 말은 못하겠지만  그부인은 역시 시어머니와 함께 신천지에 속해 있습니다, 이 며느리는 주로 주일학교를 담당하는데 말씀에 이상한 부분을 많이 있어서 아이들이 주일날들은 말씀을 부모님께 물어보면 너무 교묘해서 성경지식이 좀 적으면 알수가 없습니다,

    이글로 힘들고 피곤한 이민생활속에 믿음생활하시는 뉴욕 성도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행여 상처를 미리 방어코자 피해를 미리 막았으면 하여 두서 없이 씀니다 ,,

    출처: USA아멘넷 독자공간 게시판/오늘도 감사

    (창세기 33장) 얍복강을 건너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 하시고 '네가 알아서 돌아가라.'고 야곱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들, 하나님의 군대를 보내셨고 그 밤에는 야곱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밤새도록 두려움에 휩싸여 그 하나님을 붙잡고 씨름하였습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듯이, 아니 보이는 하나님은 멀게 느껴지고 보이는 두려운 에서는 눈앞에서 다가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장 15절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일생을 매여 종노릇 하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임당할까 봐 아내를 누이라 했습니다. 이삭도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서 애굽군대가 두려워 울부짖었습니다. 가나안 땅 장대한 족속이 두려워 울면서 애굽으로 돌아가려 하였습니다. 죽음 앞에 두려워하는 것은 야곱도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씨름한 다음, 아침에 이르러 하나님의 얼굴을 본 야곱은 환도뼈 탈골된 다리를 절룩거렸는지, 엉금엉금 기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에서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해가 돋았습니다.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습니다. 이젠 피할 수 없습니다. 환도뼈 탈골된 다리로는 가족과 양떼를 데리고 도망갈 수도, 맞서서 싸울 수도 없습니다. 부딪히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야곱은 여종을 맨 앞에 세우고 그 다음 레아를 마지막에 라헬과 요셉을 세우고 에서를 마주하여 나아갑니다. 여전히 두려움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 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른 길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담대하게” 나아가는 모양새입니다.

    야곱은 일곱 번 몸을 굽히고 에서에게로 나아갑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숫자라고 일컬어지는 숫자입니다. 에서에게 하나님께 올려야 할 예우와 같은 예우를 갖춘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반갑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이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400 명을 이끌고 살기등등하게 달려온 에서가 야곱을 끌어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입 맞추고 웁니다. 이 무슨 조화인가요? 야곱이 일곱 번이나 몸을 굽히니까 야곱의 그 간절한 모습에 마음이 변한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주장하시지 않고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을까요?

    야곱은 에서를 주, 아도나이라고 부릅니다. 공경의 도를 넘고 비굴과 아부의 수준을 넘어 차라리 경배의 경지입니다. 에서는 반가이 야곱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맞이합니다. 야곱은 형에게 소와 양떼를 선물합니다. ‘형님의 얼굴을 뵈오니 하나님의 얼굴을 뵈온 듯 하다.’고 말합니다. 비굴인지 아부인지 공경인지,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분간이 안 갑니다. 아무튼 극진한 동생의 대접과 선물에 마음이 녹았는지 어쨌는지 에서는 이제 야곱의 앞잡이가 되어 길을 호위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제안을 간곡히 거절하고 형 에서를 돌려보냅니다.

    우리는 야곱과 에서의 해후의 장면을 대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야곱이 그렇게 두려워하는 에서를 못 오게 막으시거나 아예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 버려서 야곱에게 평안한 길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야곱이 기어이 형 에서를 만나도록 하셨을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이 반드시 대면할 수밖에 없는 것, 우리 죄인이 결코 피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와서 제물을 드리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송사하는 자와 급히 사화하라, 호리도 남김없이 갚으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 반드시 부닥치고 넘어야 하는 것, 반드시 씻어야 하는 것, 그것을 갚게 하시고 부닥치고 넘게 하시고 씻게 하심으로 누구에게서든 원망이 없게 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의를 세우게 하려 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영원한 생명길을 가노라 하는 성도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로부터, 친구들로부터, 부모형제로부터 그들과 화목하지 못 하고 오히려 지탄 받고 원망 받는 일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못 하고 형제와 화목치 못 하더라도 주님만 섬기면 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고르반'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으로 하여금 그렇게 두려운 형 에서를 기어코 만나 화해케 하신 뜻을 생각하여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도 아무리 싫고 무섭고 힘들더라도 우리의 에서를 향하여 얍복강을 건너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 하나님은 우리의 에서를 어루만지시고 우리의 에서와 화목케 하실 것입니다. 오히려 조력자, 협력자, 앞잡이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성결입니다. 원망과 비난을 받으면서 성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부모형제와 화목하고 원망과 비난을 없이 하는 것이 성결과 거룩의 첫걸음이라 할 것입니다. 성결한 자라야 하나님과 동행할 것입니다. 어쩌면 야곱의 얍복강은 성결케 하는 강, 세례의 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또 그렇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야곱을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에서를 사랑하지 않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갈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스마엘을 번성케 하신 하나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에서를 번성케 하시고 롯의 딸들이 낳은 불륜의 자녀들로도 민족을 이루게 하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 보다 저들을 더욱 애틋하고 안타깝게 여기실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면 더욱 그들에게 나아가 그들의 손을 붙잡아 생명길로 이끌어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많은 야곱들이 얍복강 건너기 두려워 하고 에서를 피해 도망다니며 주의 일 하느라 애쓰고 있습니다.

    .

        당신은 나의 참 소망 최송연 어느 날 내 삶의 질곡 속에 살며시 찾아오신 당신 흐르는 안개비와 실바람의 향기가 언 땅을 녹여 싹 틔우듯... 차가운 내 마음 녹여 사랑을 싹 틔워 열매 맺으라 권고하시니 당신은 나의 참 소망입니다 지치고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면 농부의 땀흘리는 수고를 배우라 질책하심으로 나의 나태함을 일깨워주시며 진실한 친구라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해 맘 아파 울고 있을 때면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고 이겨내라 토닥거려주시는 분, 날마다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시고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주님, 당신이 계시지 않으면 사랑의 열매도 생명도 없으니 당신은 나의 참 소망입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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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혈의 능력 / 찰스 스펄전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니"(출12:13)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안전합니다. 그러나 오직 보혈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이 안전합 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이마에 뿌려진 피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의 보배로우신 피로 이 백성들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 '피'가 이 백성들 위에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이들을 해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날 밤 애굽이 있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 때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핏자국이 있는 집집마다 하나님은 해치지 않고 그대로 넘어 가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그 때 그 피가 유월절에 쓰는 어린 양의 피였지만,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직접 약속해 두셨던 제물(祭物)의 피, 곧 하나님의 어린 양의 보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이 세상에 약속없이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하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친히 그리스도에게 우리 만민의 죄를 지우셨던 까닭입니다. 예수님의 피를 흘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 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만민의 구세주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비단 하나님의 약속하신 제물이실 뿐만 아니라, 마치 어린 양처럼 흠없고 티 없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 한 가지라도 죄가 있었던들 결코 우리들의 구주가 되지 못하셨겠지만, 참으로 주님은 죄없으신 분이었습니다.

    이 피는 죄사함을 위하여 단 한번 흘리신 것입니다. 유월절에 드리던 그 어린 양은 해마다 잡아야 되겠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번 자신을 바치심으로써 죄를 멀리 하신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하나님께서 기꺼이 받으신 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또 장사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도, 땅도, 과연 하나님께서 이 제물을 기꺼이 받으셨는지 알 리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무죄 방면(放免)을 하나님께서 승인하실 그때까지, 그리스도께서는 사방의 매는 줄에 묶여져 계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피는 받으신 바 되었고, 죄는 용서함 얻었습니다.

    잠깐 십자가 상의 그리스도를 상상해 보십시다. 높다랗게 언덕 위에 세워진 세개의 십자가를 보십니까? 그리고, 그 중앙에 가시 면류관을 이마에 엮어쓰신 그리스도가 보이십니까? 저 저주 받은 쇠같은 나무 위에 꽉 못박힌 저 양손을 보십시오. 그리고, 인생 중 그 어느 누구보다도 상하고 이그러진 저 얼굴을 좀 보십시오. 그리고 사망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가슴 위에 내리뜨리운 저 무거운 머리를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진정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달리신 곳은 실제로 십자가였습니다. 이것을 무슨 헛된 공상이나 이야기로 생각지 마십시오. 진정코 그러한 분이 계셨으며, 또 그 분은 지금 내가 말씀드린대로 그렇게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잠깐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 지금 내가 목격하고 있는 죽어가는 저 분의 피가 나를 구원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만일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나는 오직 저 분이 날 위해서 쓰라린 죽음을 맛보신 이 사실만을 의지할 것입니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를 넘어가리니"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피 밖에는 아무것도 우리 영혼을 건질 수 없습니다. 만약 그 때 어떤 어리석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코웃음을 치고, "난 우리 집 양 기둥에다 다른 걸 칠해 놓아야겠다."하거나, "우리 집 문 인방은 금은 보석으로 꾸며 놓아야지"하였다 합시다. 그들의 집은 반드시 앙화를 입었을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 뿌림 외에는 아무것도 그들의 집을 구원할 수가 없었단 말입니다. '이 닦아 둔 것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우리 모두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나의 공로, 나의 기도, 나의 눈물이 나를 건지지 못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 보혈만이 구속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과 함께 다른 어떤 소망이든지 두어 보십시오. 당신은 반드시 죽습니다. 다른 어떤 것이든지 보혈과 함께 겸하여 의지한다면 당신은 반드시 멸망할 것입니다.

    즉, 어떤 사람이, "물론이죠, 교회의 성례식(聖禮式)으로 내가 구원얻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그리스도로 구원도 받고, 또, 성례식도 조금 생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한다면 이 사람을 참으로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그의 영광과 존귀가 제아무리 좋은 것이라 한들 어찌 감히 그 곁에 두어 둘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십 니다. 그리스도를 노엽게 한 그것은 즉시 저주받은 물건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대관절 여러분은 어찌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또 다른 소망을 두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공로, 여러분의 선행입니까? 보세요! 꿈틀거리는 벌레를 가지고 천사와 함께 같은 멍메를 지우려고 하는 것입니까 - 아니, 당신이 감히 수레를 그리스도와 함께 끈다는 말씀인가요? 도대체 당신의 선행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습니다. 그래 그 더러운 넝마조각을 그리스도의 흠없는 의와 한가지로 한단 말입니까? 결단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께만 매달리세요. 그러면 그대는 멸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위에 또다른 어떤 소망이든지 둘 때에, 그대는 그대 자신의 죄에다 소망을 두는 것 이상으로 영원히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 - 아, 우리 구원의 튼튼한 반석이시여!

    또,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아, 그리스도를 그와 같이 믿으려면 좀 더 깊은 회개를 경험해야 되겠는데." 보십시오. 당신의 회개는, 마치 못다 채운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반분(半分) 해서 채우기 위한 것 같군요. 그리스도의 피는 당신의 눈물을 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건지기 위한 것이에요.

    회개로써 만족말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보시란 말씀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뜻은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이지, 결코 죄 때문에 일어나는 당신의 감정을 의지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보다 그들의 회개를 더 많이 신경을 쓰기 때문에 그러한 큰 영혼의 어려움 가운데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난 믿음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소망이 없어." 이 역시 어느 것에도 못지않은 크게 위험한 생각입니다. 당신에게 효험이 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이요, 결코 당신의 믿음의 효험으로써 당신이 구원얻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당신의 믿음에 의지해도 천국은 못갑니다. 자기의 믿음을 의지하는 것은 자기의 선행을 믿는 것보다 오히려 더 기막히게 어리석은 일입니다. 당신의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께 향한 것 이고, 그 스스로는 아무 쓸 데가 없는 것입니다. 지구 덩어리는 제 스스로 의지하고 돌지만, 믿음은 결단코 제 스스로 의지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그리스도께 의지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믿음을 생각하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믿음이란 것은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함에서 비로소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사단이 우리 인간의 마음 속으로 어떤 몸트림을 해서 기어 들어가는지를 잘 알 수 없지만은 이것은 한가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단은, 보혈,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는 이 진리를 항상 미워하고 감추기를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혈과 함께 다른 어떤 것에 소망을 두든지 다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사단은 싫어하는 것입니다.

    "아, 그렇지만 내게도 남과 같이 이러 이러한 놀라운 경험이라도 있으면 믿어 볼 희망이 일어나겠건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구여, 보십시오. 문제는 당신 경험이 아니라 오직 보혈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의 한 일을 볼 때에…"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하셨습니다.

    "아니에요, 내게 좀 더 이러한 미덕(美德)과 장점이 있더라도 내가 이렇게 소망 없지는 않을 거에요" 이렇게도 말하는 분이 있습니다. 천만에요,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가 피를 볼 때에' 하셨지, '내가 네 좋은 성품을 생각할 때에' 하셨습니까? 물론 믿음과 사랑과 소망 등, 당신이 누릴 수 있는 한의 모든 좋은 점을 기르십시오마는 아, 결단코 여러분, 응당 그리스도의 보혈을 모실 자리만은 그중 아무 것으로든지 범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보혈은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우리는 다시 한번 외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만족 못할 형편이 세상에 없고, 그리스도의 보혈이 씻지 못할 죄악이 세상에 없습니다. 첩첩이 쌓인 죄악의 천근같은 무게라도 보혈은 옮겨내고, 붙고 또 붙어 진흙덩이 같이 뭉쳐진 악이라도 보혈은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비록 당신의 죄악이 배나 물들인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보혈은 이 모든 것을 한 터럭도 남김없이 다 깨 끗케 할 것입니다. 조석으로 밥먹듯이 주의 이름을 저주한 자도 올 것이요, 주님을 하나님이 아니라고 잘못 안 자도 올 것이요, 주의 종들을 욕하고 핍박한 자들도 올 것입니다. 다 주님 의 보혈로 정결케 하실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바로 생겼든지 찌그러졌든지, 병신이든지 온전하든지, 마귀의 화신(化身)이든지 아니든지, 주의 보혈이 못 씻어낼 자가 없습니다. 마치 지옥이, 한 죄악으로만 빚어낸 사람 덩어리를 만들기 위하여 죄로 다듬고 다듬어 낸 것 같은 흉측한 인간일지라도, 주님의 보혈은 그를 변화시켜 양과 같게 만들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일곱 귀신을 쫓아낸 것도 이 보혈 이었습니다. 귀신들려 미친 증세, 해묵은 문둥병, 모두 이 보혈로 고치셨습니다. 아무리 중한 심령의 병이라도 우리 대의사(大醫士)이신 주께서 못고치실 병이 없습니다. 먹장 같이 검고 마귀 같이 악할지라도 어떤 형편에서든지 이 보혈의 힘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아, 모든 것에 풍성하고 모든 것에 전능한 보혈입니다!

    이 보혈에 뿌리움을 입은 자는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구원얻은 자입니다. 그 때,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보호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 중 어느 누구의 머리터럭 하나도, 멸망시키는 주의 사자가 손대지 못했습니다. 그와 같이 지금 보혈을 믿는 자는 모든 악에서부터 구원을 얻습니다.

    로마서 8장의 말씀을 잘 대표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는 좋아합니다. 어떤 순교자가 어느날 「보네르」 앞으로 불리워 가서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보네르」가 "너같은 이단자는 정죄를 받아야 마땅하리라"하고 호통을 치니, 순교자는 그 사랑하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그런고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얼마나 복스러운 생각입니까! 그리스도의 보혈로 보호함을 입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 문의 인방과 양쪽 설주에다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뿌립시다. 멸망이 우리를 떠나갈 것입니다. 애굽 백성들 가운데는 멸망시키는 여호와가 있었지만, 그러나 이스라엘 가운데에는 없었습니다. 악한 자에게는 지옥의 멸망이 있지만은, 그러나, 의인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고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빈틈없이 온전히 구속하십니다. 모든 죄를 남김없이 씻어 내십시다. 모든 축복을 아낌없이 부어주십니다.

    나는 지금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험에 관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보혈의 그 막대한 값어치를 나는 도저히 이 혀끝으로 형용해 낼 도리가 없습니다. 아무튼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러분들 가운데 역사하사, 여러분은 단순히, 그리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시기를 기도하는 마음 뿐입니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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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이철 목사(앤아버반석장로교회)의 이단적 주정, 이단성 12 가지,

    글 쓰게 편하게 '목사'란 칭호는 생략합니다



    정이철 목사의 이단적 주장, 성경에 위배된 주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정이철은 "예수님도 자신의 십자가의 피의 완전한 속죄의 혜택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이단적 주장임을 지적 당하자 정이철/이창모는 반론글에서 침례받으시는 예수님, 인간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의 속죄의 피를 드림에 비교하여 예수님이 속죄의 혜택을 받았다고 정당화 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정이철/이창모의 궤변은 침례 받는 예수님의 사역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이다.

    또한 죄있는 인간대제사장과 영원한 대제장이신 예수님의 차이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무지이다.

    그리고 정이철/이창모의 말을 그대로 본다면 예수님도 하늘성소에서 피뿌림에 해당되기에, 성경의 단 한번 제사에 위배되는것이다. 한 번이 아닌 2번제사를 주장하는 정이철.이창모의 꼴이 된 것이다.  



    2. 정이철은 "예수님의 시체가 썪었다,  부패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서 성경말씀에 위배되었고,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도 위배되었다. 주석서 메튜헨리 주석에도 위배된 궤설을 주장하는 정이철/이창모 목사. 장로교 교단과 개혁주의에서는 성경 다음으로 웨스트민스터신조를 중요시 여긴다. 이를 어긴 정이철/이창모 목사는 무엇인가?

    또한 정이철/이창모의 이런 주장을 좋다고 하고선 Naver에 퍼나른 림헌원 목사는 무엇인가?!!


     

    3. 정이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재창조물"이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정이철/이창모는 예수님을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로 전락시켜 버렸다. 마치 여호와증인들(파수대 Watch Tower)처럼 예수님은 피조물이라고 한 꼴이 된 것이다. (히브리서 1장과 요한복음 1장 위배)



    4. 정이철은 "마귀도 하나님의 종, 오바마도 하나님의 종, 김정일도 하나님의 종, 정이철도 하나님의 종이라고 주장 한다.

    그러면 북한 김정일이가 나쁜짓 한 것은 모두 하나님이 시켜서 한 것들인가? 사탄 마귀가 한 모든 나쁜일도 하나님이 시켜서 한 것이 된다. 이는 마치 사탄의 악한 일을 하나님이 시켜서 했다는 변명 합리화를 시켜버린 정이철이다. 이 것 역시 이단 김기동 베레아들 처럼(최바울 포함) 하나님이 시켜서 마귀가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다고 하는 것과 같다. 



    5. 정이철은 "부활을 믿지 않아도 십자가 죽음만을 믿으면 구속사역이 완성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사도바울의 구원관은 로마서10:8-10절이다.  십자가 + 부활이다. 이 것도 모르는 정이철 목사이다.

    평신도 한완상 (2) 장로는 교회에 부활이 없다고 하였고, 이어녕 장로 역시 교회에서 부활을 전해야 한다고 하면서 부활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러면 환완상 장로, 이어령 장로들도 이단인가?!! 사도 바울도 이단인가? 부활을 강조했던 신약 사도행전은 외경인가? 1세기 부활을 외쳤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이단인가??



    6. 정이철은 대제사장(인간 대제사장)이 하늘성소에 가서 피를 뿌렸다고 주장한다.

    이 것은 2번 피뿌림= 2번 제사 주장에 해당된다. 

    또한 인간 대제사장이 어떻게 하늘성소에 간단 말인가? 이처럼 궤설을 주장하는 정이철 목사다.




    7. 정이철은 대제사장인 예수님이 하늘성소에서 자신의 피를 뿌렸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정이철도 에수님의 2번 피뿌림을 주장한 것이 된다. 정이철은 이처럼 자기의 유툽 동영상 설교에서 주장했다. 그러니까 자기가 주장하면 자기는 갠찬고?, 김성로 목사가 실수한 것을 꼬투리 잡아 이단이라고

    비난한다. 1년 내내 떠들고 에장합동과 예장합신에 김성로 목사를 조사하라는 상정안을 올린 것이다. 

    흠.... 예장합동과 합신은 정이철/이창모/림헌원을 조사해야 할 것이다.    




    8. 정이철은 "짐승의 수인 666을 베리칩으로 가르치며, 음모론을 가르치는 노우호목사의 교회에 가서는 세미나를 한다. 

    개혁주의, 개혁신학, 바른믿음, 바른신앙을 외치는 정이철 목사가 성경에 위배된 것을 주장하는 노우호목사와 교류함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9. "울법=복음"이다고 주장하는 노우호 목사를 절대로 비판 안 한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한다.

    왜 인가? 한국 노우호 목사의 교회에 가서 세미나를 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부활의 복음으로 부흥한 김성로 목사를 시샘하여 비난과 비판만 일 삼는다. 거의 일년 동안.

    또한 한국 유명한 목사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고 (예: 이찬수 목사, 한경직 목사).

    자기 생각과 다르면 시비를 걸면서 비난 한다. 자기의 들보는 생각지도 않고, 보지를 못 한다. 



    10. 정이철은 거짓말을 잘 한다.

    정이철이가 미주 목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김성로목사의 교회에 2000명 참석자가 자신의 글로 인해 68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하였다. 그런 거짓말을 이메일로 보낸 것이다.

    즉 자기가 글을 잘 쓰기에 그렇고, 자기를 과시하고 김성로 목사를 음해하는 것이다.



    11. 정이철은 진목연이 해체되지도 않았는데도, 해체되었다는 거짓말을 진목연 동역자들에게 하였다.

    나중에 그 것이 문제가 되자, 자기가 차 운전중이라서 그런 말을 했다는 핑계를 대었다. 그러면 1명이 아닌 여러 진목연 목사에게 해체됬단 말을 하였는데, 그 때 마다 차 운전중이라서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참으로 욱기는 정이철 목사. 이런 말을 정이철 목사가 진목연 대변인으로서 한국 개혁인터콥공청회에 다녀온 후에 하였단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 때 있었던 "의혹"에 대해 더욱 의구심을 갖게 된다. 




    12. 정이철은 김성로목사의 "사명"이란 동영상(youtube)을 완전 왜곡하여 김성로목사를 이단으로 몰아갔다.

    그 동영상을 자세히 들어보면 김성로목사는 "종교개혁"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개혁"이란 말은 하였다.

    그런데 정이철 목사는 개혁이란 말을 종교개혁으로 둔갑시켜 글을 썻고, 김성로목사가 마치 종교개혁을

    하려는 의도의 사람으로 몰아갔다. 이건 완적 왜곡 조작 허위인 것입니다. 

    또한 그 동영상을 자세히 들어보면, 완전 정이철의 나름대로 글을 쓴 것임을 알게 된다. 김성로 목사가 말한 것과는 완전 다르게 하여, 나쁜 쪽으로 몰아간 것이다.  



    결론:

    이상 12가지를 볼 때에 정이철 목사에겐 이단성이 농후하다. 성경을 위배한 이단적 요소가 많다.

    (정이철에 동조하는 이창모/ 림헌원 목사 포함 하여서 이다. )

    더불어 정이철 목사는 사단/마귀/이단들의 특성처럼 거짓말도 잘 한다.

    따라서 정이철 목사가 말한 "영혼의 낚시꾼"은 누구인가? 

    춘천 이옥매 할머니와 김성로목사가 아니고, 바로 정이철 목사가 "영혼의 낚시꾼"인 것이다. 


    김한길 목사

    미 남침례한인총회 

    논문: "베레아 신학 주장하는 인터콥 최바울 대표"(12월 2010년)


    관련글 보기:

    "정이철 목사의 이단적 주장에 대하여"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5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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