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 치유 사건과 최면술

사회/정치 2016. 10. 18. 20:33

라흐마니노프 치유 사건과 

최면술


작곡가/피아니스트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는 20세기초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의 거장이었다. 악풍으로 본다면, 러시아의 5 인조인 '국민악파'보다는 차이코프스키의 선에 보다 더 잇댄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작곡가들처럼 라흐마니노프 역시 생시엔 그다지 전반적인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그 대신 명 피아니스트로서 대중의 인기를 모아 미국에서까지 연주 여행을 했다. 그는 키 2m의 거인인 데다 손뼘도 13 건반을 잡을 만큼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컸고, 따라서 프란츠 리스트의 작품처럼 어려운 피아노 곡들을 자유자재로 소화하고, 또 그런 작품을 쓰기도 했다. 

Source: houstonsymphony.org


라흐마니노프의 삶에서 가장 흥미롭게 중시되는 대목이 있다. 그가 작품을 전혀 쓰지 못하게 된 일종의 '위기'인 정신적 침체기에 빠져있다가 심리요법사인 니콜라이 달(Nikolai Dahl)의 "정신의학적" 도움으로 '재기'하여 이전보다 훨씬 더 좋은 작품을 쓰게 됐다는 일화이다. 더욱이 그 작품을 그 요법사에게 헌정했단다. 정신의학의 '승리'로까지 일컬어지는 사건이다. 이 기적적인 '재기' 사건 때문에 라흐마니노프는 전기(傳記) 필자들이 즐겨 다루는 영웅이 되었고, 그의 치유사였던 달(Dahl) 역시 덩달아 영웅으로 뜨게 된다. 

그런데 당대의 정신과학이나 정신의학이라는 것은 오늘날처럼 정립된 학문이기보다 거의 대부분 이론과 시술상의 실험단계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현대 정신의학의 위대한 승리라고 하기엔 의문점이 더 많다. 

필자도 그런 맥락의 의문을 품어왔었는데, 그 시작은 대학 시절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애청하던 시절과 거의 때를 같이 한다. 과연 당대 정신의술에, 또 전반적인 정신의학에 그런 위력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이에 따라, 비슷한 의문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과 글을 알아보고 또 참조하게 된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의학의 '전능성' 비슷한 것을 주장하곤 한다. 그런데도 정신병동은 죽음 전 마지막으로 가는 장소가 돼 버리는 사례들이 드물지 않다. 정신의학은 사실 역사 속에서 매우 근자에 발달된 것이다. 그 배후엔 지그문트 프로이드나 카를 융 등의 학자들이 있다. 이것은 또 훗날 킨제이의 성의학과도 연계된다. 흥미롭게도 이들은 다 오컬트에 깊이 관여됐던 사람들이다. 

믿거나 말거나 이 점은 크리스천 심리학도들이 매우 우려해야 할 사안이다. 자체가 진리인 참 기독교는 오컬트와 무관하며,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이들의 학설은 반드시 참조해야 하고 통과해야 하는 기초적 절차와도 같다. 그들의 배후야 어떻든 그들의 이론과 연구 결과가 도움된다는 식이다.  

심리학계에서 감초처럼 쓰이는 에네아그람(에니어그램)도 그렇다. 에네아그람은 교계에서까지 폭넓게 쓰여왔다. 고대 수피 사상(Sufism)의 '지혜'의 일부인 이 인성분류 방식을 맨처음 현대에 도입했다는 게오르기 구르지예프 역시 일종의 오컬티스트에다 술사와 다름 없는 존재였다. 왜 그런 지는 앞으로 다양한 글을 통해 입증해 보이겠다. 라흐마니노프를 치유했다는 달 역시 오컬티스트였다. 



라흐마니노프는 1897년 3월 28일 자신의 역사적 역작인 첫 교향곡을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를 시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했다. 2년 전인 1895년, 1월부터 10 개월에 걸쳐 쓴 야심작이었다. 라흐마니노프는 하루 평균 7 시간을 이 작품에 매달렸고, 그것도 부족해 9월부터는 10 시간으로 늘렸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게도 대 실패였다. 우선 관현악단의 리허설이 절대 부족했고, 잘 나간다던 지휘자 글라주노프의 악단 관리와 연주 솜씨 또한 형편 없었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글라주노프는 술에 취한 상태였는지도 모른단다. 그는 평소 레슨 때도 술병을 숨겨 빨대로 홀짝 홀짝 빨아먹는 버릇이 있는 중독자였기 때문이다. 

연주한 다음 날 음악비평가 세자르 쿠이는 '에짚트의 10 대 재앙'을 그린 음악으로 빗대면서, "지옥 음악원생들이나 갈채할 음악"이라고 혹평했다.  


황당한 현실 앞에 멍멍해진 라흐마니노프는 의욕상실과 우울에 빠져 이때부터 3년간 굵직한 작품이라곤 손에 잡히지 않는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차, 측근의 소개로 최면요법사 달을 만나게 되어 1900년 1월부터 시술에 들어갔다. 

치유 시술 기간은 불과 3 개월이었고, 라흐마니노프는 "완쾌"됐다고 한다. 실제로 치유 후 라흐마니노프가 쓴 피아노 협주곡 제 2번은 전반적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는 작품으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또한 차이콮스키의 작품과 함께 후기낭만기의 기념비적인 피아노 협주곡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그런데 라흐마니노프의 이 대작이 대의학자도 아닌, 한낱 실험적인 심리의학 수련생 수준의 풋내기 의사에게 헌정됐다는 사실은 우리의 의아심을 더욱 북돋운다. 이 의사가 불과 석 달만에 그의 침체기를 끝내주고 훌륭한 작품을 쓰도록 도와주었다는 설은 더더구나 그렇다.  


묘한 것은 전기작가들이 이 사건과 과정을 겉 모습 그대로 두려고 할 뿐, 그다지 깊이 다루려고 들지 않는다는 점. 심지어는, 당사자인 라흐마니노프보다 달의 역할을 더 중시하면서 정신의학의 과학적 비밀을 시사하는 하나의 신비적 사례로 몰고 가는 학자나 작가들도 있다. 관심 있는 극소수를 제외한 아무도 이 치유과정의 내막을 검증하려 하지 않았다. 후기낭만주의 대표작 하나를 배태한 정신의학 내지 심리요법의 '대승리'로 그냥 남겨두려는지. 


                                                         니콜라이 달 ▶

바로 이런 점들이 필자의 끈질긴 의문의 하나였으나 그다지 치심치는 않다가, 최근 인터넽에서 이런 저런 비평 자료들을 찾아 보고 약간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 


라흐마니노프는 거의 날마다 달의 최면요법 시술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의 라흐마니노프 음악 전문학자인 엘허 닐스에 따르면, 사실 최면술은 프로이드 정신의학이 대두된 이래 이렇다 할 요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프로이드가 역시 또 다른 후기낭만파 작곡가인 구스타프 말러의 정신적 문제를 고치지 못한 채 오히려 요법을 오용하여 강한 의혹만 불러왔단다. 

최면술이 의술의 일부로 사용된 것은 프리드리히 메스머(1734-1815, Friedrich A. Mesmer 때부터였다. 프리메이슨이었던 그는 오스트리아 뷘에서 일하다 훗날 프랑스 궁정으로 옮겨갔다. 메스머는 자신이 일종의 자기장(magnetism)을 활용하고 있는 줄로 믿었다. '매혹하다', '최면술을 걸다' 등의 뜻으로 쓰이는 영어 낱말 mesmerize가 바로 그에게서 유래됐다. 그는 이 '발견'을 과학협회에 보고했지만, 오늘날의 우리가 볼 때는 환자에게서 '위기'로 알려진 최면상태를 인출한 것이었다. 


이 "조용한 트랜스"(황홀경)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마르퀴 아르망 드 퓌세귀르(Marquis Armand de Puseguir 1751~1825)였고, 이것을 '신경수면(neurohypnology)'으로 명명한 사람이 제임스 브레이드였다. 동시대 사람인 존 엘리엍슨은 자신의 런던 병원에서 통증 없는 수술을 위한 마취용으로 최면술을 쓰기 시작했다. 

한편 프랑스에는 두 최면술 연구학파가 생겨났다. 신경의학자 장-마르텡 샤르코(Jean-Martin Charcot)는 파리의 살페트리에르에 있는 자신의 진료소에서, 이폴맅 베른하임(Hippolyte Bernheim)은 낭시에서 각각 최면술 학파를 형성하게 된 것. 프로이드의 스승이기도 했던 전자는 당초 최면술을 히스테리 환자들에게만 연계된 하나의 현상으로 보고 그런 환자들에게만 시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가 후자의 연구 결과를 알고 생각을 바꾸었다. 베른하임은 무려 10,000여 케이스를 분석하여 최면이 암시를 통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기서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새겨두어야 할 점들이 있다. 잠재의식 상태에서 '과거'와 '미래'를 '무상출입'하는 최면술은 반드시 악령과 연계되는 오컬트 행위라는 사실과, 따라서 최면술을 시술하는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오컬티스트라는 점이다. 이것은 남의 뇌리 속 꿈세계를 침투하는 악령들의 행동과 별 다름없다. 

혹 크리스천이 최면술을 시술한다면 그는 이미 오컬트 영역과 범주에 들어가 있는 상태이며,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보혈로써 정결케 되지 못하면, 심각한 악령개입 상태가 지속되거나 악화된다는 진실이다. 이것을 부정하거나 못 믿겠다면 그는 정신심리학계를 알지언정 영계를 모르는 사람이다.   


아무튼 라흐마니노프가 달에게서 받은 치유 과정은 훗날 그의 처제이자 사촌누이인 소피아 알렉산드로브나 사티나를 통해 자세히 알려졌다. 소피아 사티나는 의술과 생물학, 유전학 등에 깊이 관여했고, 미국의 스밑 대학에서도 일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친척과 그들의 친구인 그라워만 의사는 긍정적인 단계를 밟기로 결정하고 니콜라이 달을 만나기로 했다. 달은 그라워만의 모스크바 대학교 의과 시절 친구였는데, 졸업 후 당시 프랑스를 풍미하던 최면술의 치유법적 가치에 관해 흥미를 갖게 됐고 바로 이 첫 성공 사례 후 여생을 최면요법에 바쳤다. 라흐마니노프는 사촌들이 이 요법 실험에 기꺼이 응하는 것에 놀랐다. 그는 자신의 '숨은 현재와 미래'를 알아내는 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입원비가 없는 것도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달의 수많은 환자들이 비용없이 진료를 받았기 때문이다. 진료소인 달의 아파트먼트는 사티나의 집에서 얼마 떨어져있지 않았기에 라흐마니노프는 매일 달을 방문했다.  

라흐마니노프는 달의 진료를 돕느라 매일 밤 안락의자에 깊숙이 앉아 최면 시술에 따라 깊이 잠들어 있었고, 낮에는 밝은 분위기 속에 기분을 돋우었고, 식욕도 증진됐으며무엇보다 창작의욕을 일깨우는 데 힘썼다. 달 자신 음악적 교양이 높은 사람이었기에 모든 대화와 최면술이 창작열 증진에 집중됐다. 


여기서 중시되는 점 하나가 라흐마니노프의 평소 창작 과정이 예외적으로 탁월했다는 것. 작품 전체가 그의 마음눈 앞에 펼쳐지기도 했고, 더 큰 규모 형식의 음악도 불과 2~3주 안에 스케치를 완성하곤 했다. 그처럼 즉각적으로 작품을 배태하거나 몇 쪽을 기억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재능이다. 

대다수의 작곡가들은 하나의 모티브, 하나의 성부를 갖고도 장시간 집중작업을 해야 하므로 장기간이 소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제1 교향곡의 실패 후,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직관력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판단력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새 작품을 위해 주변들의 도움과 조언을 자주 찾았고 악식도 독창적인 것보다 일반적인 형식을 더 의존하여 수많은 부분들을 수정해나갔다. 


관련 정보에 따르면, 달이 라흐마니노프에게 시술한 요법은 '최면 후 암시'(Post-hypnotic suggestion: PHS)라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여기, 세 가지 기본전제가 따른다. 1. phs 방법으로는 경증만 치료할 수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창작불능 상태가 중증이었다면, 이 방법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2. 최면술은 시술할 수 없는 작업을 대상에 적용하지 않는다. 3. 달의 진료는 집중적이었지만 비교적 단기간에 치러졌다. 


따라서 라흐마니노프가 달에게 받은 진료는 비교적 가볍고 쉬운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대단히 위대한 극찬 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환자인 라흐마니노프에게선 두 가지 관찰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바로 이 글의 주된 논점이기도 했다. 


1. 비록 라흐마니노프의 3년간의 침체기동안 주요 대작들을 완성하지 못하긴 했지만, 제 1 교향곡 실패 이후로도 매우 능동적이었다는 게 진상이다. 그는 이전에 이미 성공적인 지휘자, 피아니스트였다. 따라서 주로 다른 분야에서 능동적이지 못한 여름 기간동안 창작 문제가 그를 더 괴롭힌 것으로 보인다. 

2. 작곡자는 달의 진료 후 거의 즉각적으로 과거보다 더 많은, 대규모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게 된다. 


따라서 라흐마니노프는 작곡을 아예 못할 만큼 대단히 악화된 상태였기보다 자신의 악상을 오선지 위에 옮겨 놓는 데 대한 부담감이 있었기가 더 쉽다. 이에 따라 달은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할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를 괴롭혔던 부정적인 생각들을 퇴치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 경우에 PHS가 완벽하게 먹혀드는 방법이라는 그들 나름의 인식이 있다. 


라흐마니노프의 다음 진술은 당시 상황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결국 나는 날마다 달의 서재 속 팔걸이 의자에 앉아 반 수면 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이제 당신은 협주곡을 쓰기 시작할 것입니다...굉장한 재능으로 말입니다. 협주곡은 탁월한 작품이 될 것입니다.'라는 그의 말을 듣곤 했다." 

닐스는 라흐마니노프의 이 진술을 정확치 않다고 지적한다. 이런 말은 암시보다는 명령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 진술을 베낀 리제만의 문장이 정확치 못했거나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요약문이 그랬을 가능성을 말하면서.

닐스는 달이 라흐마니노프가 '작곡가의 장애'를 극복하도록 도와 성공적으로 증상을 해소시켰지만 환자의 치명적 문제점에 대한 구조적 변화를 겨냥하지 않았기에 문제를 일으킨 다양한 갈등들을 충분히 다루지는 못했다고 분석한다. 


증상은 라흐마니노프가 언제라도 막다른 골목에 다다를 때 되돌아왔다. 1916년에는 심각한 재발이었다. 라흐마니노프는 독주가로서의 화려한 연주생활을 이어가느라 작곡할 시간이 없었던 생애 말엽 10년간, 마침내 이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작 아이디어에 좀 더 장시간 집착하면서 더 깊은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는 제3 교향곡에 대한 외부의 모든 비평에 잘 응수했다.

"개인적으로 이것이 괜찮은 작품이라고 굳게 확신합니다. 하지만 작곡가도 잘못될 수가 있죠." 

자못 긍정적인 대답이다. 그만큼 바뀐 것이다. 


이것이 달의 치유 결과인가?

과연 달은 작곡이 불가능했던 라흐마니노프를 최면술로 고쳐 파멸로부터 구해낸 위대한 의학자였을까? 필자는 그보다는 작곡가 자신의 젊음과, 암시를 통해 갖게 된 긍정적인 생각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선 라흐마니노프의 이 위기는 그의 초기인 20대 중반에 찾아왔다. 혈기가 팔팔한 젊은이가 망가진 기분 때문에 의욕상실증에 걸리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라흐마니노프가 창작열을 되찾게 된 것은 무슨 치매나 정신질환 같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낸 수위의 것이 아니었다. 달의 암시로 기분전환이 이루어진 정도일 것이다.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자. 그와 동시대인으로 러시아의 국민악파의 한 명인 무소르그스키는 알코올 중독자로 역사상 가장 불행한 작곡가의 한 명으로 손꼽힌다. 부유했던 집안이 망해 가고 어머니가 죽자 고주망태가 돼갔지만, 당대로서는 파격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들을 틈틈히 써내어 러시아 국민주의를 대표하는 음악가의 한 명으로 떴다. 그의 작품에 영향을 받지 않은 현대 작곡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비참한 정신으로 살아가던 술 중독자가 이 정도의 작곡가였다면, 다른 작곡가는 뭔가? 무소르그스키에 비해 볼 때, 작품을 "못" 쓴다는 건 엄살에 가까운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음주를 조장하려거나 음주벽으로 좋은 음악을 쓸 수 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더욱이 일각의 오해와는 달리, 라흐마니노프는 침체기 3년 어간 아무 작품도 쓰지 못한 게 아니며, 아무 음악 활동을 못했던 것은 더구나 아니었다. 단지 굵직한 작품을 악보에 옮길 의욕이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달 의사의 라흐마니노프 치유가 흔히 과장되듯 그렇게 대단한 사건은 아니었다. 


그 다음으로 하고픈 이야기는 이처럼 걸핏하면 최면술로 '기분정리'를 해나간 명사들이 한 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매일 오후 최면에 빠졌고, 상대성 이론을 비롯한 다수의 과학이론이 최면으로 유도된 트랜스 상태에서 나왔단다. 

미국의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도 정기적으로 자기최면을 했다. 하기야 프리메이슨이기도 했던 그였으니 과히 놀랄 일도 아닌 셈이다. 

죽은 다이애나 웨일즈 왕자비도 대중연설 발전을 위해 최면술을 썼고, 윈스턴 처칠 경도 세계 2차 대전 와중에 피로와 잠을 견디기 위해 PHS를 애용했다. 처칠은 너무나 잘 알려진 프리메이슨 명사이다. 


최면술을 써 먹는 사람들 상당수는 음악인들이다. 작곡에 최면술을 이용한 사람은 라흐마니노프뿐 아니다. 모차르트도 최면술을 '창조적인 도움'으로 활용했고, 그의 오페라 '코지 판 투테'는 전곡이 '최면 경지' 상태에서 쓰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모차르트 역시 프리메이슨이었다. 

참고로, 달도 애머추어 음악인이었고, 메스머 역시 (벤저민 프랭클린이 발명한) 글라스 아르모니카(글래스 하모니카)를 즐겨 연주하는 음악인이었다. 최면술이 정서 및 무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암시일까. 

우리 찬송가에도 버젓이 시 작품(554장)이 실려있는 영국 시인, 앨프릳 테니슨은 자주 최면 상태로 시작(詩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테니슨도 프리메이슨이었다. 


라흐마니노프 치유에 관해 또 한 가지 부언할 이야기는 그의 연애생활에 관한 것이다. 젊은 라흐마니노프는 달의 진료소를 찾을 때마다 달의 예쁘장한 딸을 대하곤 했다. 라흐마니노프의 손자 알렉산드르는, 아버지인 의사 달의 진료보다는 이 딸의 존재가 주는 감흥이 환자에겐 더 큰 효능을 나타냈다고 주장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라흐마니노프가 퍽 오래 전부터 고종 사촌누이인 나탈리아 사티나와 연애, 약혼을 거쳐 결혼에 골인할 무렵이었다는 사실이다. 나탈리아는 라흐마니노프의 고모의 맏딸로 그보다는 4살 손아래였다. 나탈리아 역시 피아니스트였고, 그래서 라흐마니노프를 깊이 이해했다. 

사실 모두가 러시아 정교회 교인인 이들에게 이런 근친혼은 당연히 금기시 됐기에 이들은 앞날을 향한 전도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결국 결혼하는 데 성공한다. 피아노협주곡 2번은 바로 이 무렵 작곡된 것이다. 


물론 캘빈 닽시의 말처럼 라흐마니노프 자신의 삶이 골고루 음악에 배어있다고 누구든 장담을 할 순 없겠으나, 2번을 들어 보면 그의 열정과 우울, 그리움과 호소, 승리의 외침 등이 고루 포함된 것 같은 느낌이 일게 된다. 특히 제2 악장은 마치 사랑의 고백과 어름처럼 로맨팈하고 정겹기가 이를 데 없어 감성이 예민한 사람들의 눈물을 이내 자아내곤 한다. 

따라서 이런 상황들이 라흐마니노프의 치유에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라고 쉽게 상상할 수 있다. 수많은 유명 작곡가들이 자신이 연모하거나 관심 있는 이성에게 작품을 헌정하곤 했다. 돈 퀴호테에게 둘시네아, 햄맅에겐 오필리아, 베토벤에겐 '불멸의 사랑(Unsterbliche Geliebte)'의 존재가 정신적 지주였던 것처럼, 라흐마니노프의 경우도 주변에 있던 여성들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아니면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작품을 쓸 용기를 얻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상을 볼 때, 라흐마니노프의 '창작 불가능증'을 고친 장본인이 달이라거나 달의 최면 시술만이 주효했다고 보기가 어렵다. 


다음으로 다시 하고 싶은 얘기는 최면술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혐오물의 하나라는 사실이다. 물론 비신자 독자라든지 심리학 면에서 최면술에 호감을 갖는 크리스천(?)들은 그렇게 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이유는 첫째로, 최면술은 일종의 오컬트 행위이기 때문이다. 오컬트란, 모든 종류의 비술(秘術)이나 신비학, 심령술 등을 가리키는 말로, 성령님의 권능이 아닌, 물리적 세계 저편의 영역에 속한 잠재의식을 포함한 영계의 악령들과 연계를 갖고 초자연적 힘을 발휘하는 행위의 하나이다. 믿든 말든 최면술은 심령술의 하나이다. 최면술을 '과학'의 하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과학은 결코 영계에 개입하거나 조종할 수가 없다. 오늘날 뉴에이지 운동이 최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 모든 오컬트는 뉴에이지를 돕는 총아가 되어 있다.  

사실 이런저런 현대 학자들이 실험으로 최면술을 창출해냈거나 발견했다고 주장하지만, 이같은 술법이 수 천 년 전에도 이미 있었다는 역사적 흔적이 발견된다. 고대로부터 주술사와 마법사들, 영매들, 무당들, 힌두들, 불자들, 요기들이 사실상 이런 술법을 사용해왔다. 

그런데 요즘은 비신자 의사들이나 정신요법사들은 물론이고 소위 크리스천이라는 전문인들까지도 이것을 애용하는 시대가 됐으니, 참으로 세상은 올드에이지를 카피한 뉴에이지 시대를 사는 니오(neo-)바벨론임을 실감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정신요법이 '내적치유'에도 활용되고 있음이 사실이다. 내적치유는 심리적이거나 잠재의식적이지, 결코 영적이거나 성경적이지 않다. 시술사(사역자?)들이야 뭐라고 이유를 붙이든. 크리스천 술사들이 뭐라든 간에 이것은 성령의 것이 아니다. 성경은 성령과 악령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다고 가르쳐준다.  


둘째로, 최면술은 사실상 술사인 타인이 대상의 의지를 묶고 조종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선 가타부타 논란이 많아도, 대상자의 피암시성(suggestibility)이 높아질수록 대상자는 최면술사가 말하는 거의 무엇이든 믿고 맡기고 따르는 단계까지 다다르게 되어, 결국 환각상태 같은 것도 초래하기에 이른다. 

최면 도중 대상자의 독창성은 줄어들고, 심지어 정상적인 환경과 상식이 통하는 평소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트랜스 로직' 상태로 들어가 비상식적/비합리적/비논리적/비양립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믿게 돼버린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고유한 자기의지를 지닌 자유인 겸 모럴 에이전트(free moral agent)이기에, 그 개인의 범죄 상황에 대한 법적 구속력이 아닌 이상, 그 누구도 그 자유와 의지를 구속할 수가 없다. 

최면술로 조종할 경우, 트랜스에 빠진 대상자는 자신의 의지가 아닌 시술자의 의지에 따라 조종될 수 있고 또 그러기 십상이다. 따라서 최면술은 본질적으로, 개인에게 자유와 의지를 주신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만약 크리스천이 최면술을 시술한다면, 그 역시 저주와 그에 해당하는 심판을 면하기가 어렵다. 

최면술의 가장 대중적인 용도 하나가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기억 되살리기"이다. 이것은 상상의 '타임머쉰'처럼 잠재의식 속에서 먼 과거로 넘어가는, 일종의 시간초월적 행위이다. 어떤 대상자들은 심지어 태냇적 또는 출산 때를 기억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늘날 교계에 유행하는 소위 '내적 치유'는 영적 치유가 아닌 심리요법으로서, 세속계인 뉴에이지에서도 애용되며, 그 자체에 최면술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실제로 크리스천 내적 치유사들이 최면술을 이용하거나, "과거 기억에 의한 치유"를 한다고 주장한다. 최면술사들이나 내적 치유사들이 가장 흔히 '증명'해내는 것 하나가 대상자의 어릴 적 성추행 피해이며, 이 경우 놀랍게도 가해자는 으레 아버지들이다. 그러나 이런 '기억'들이 실제 있지도 않은 상상/공상의 소산일 수 있음을 수많은 학자들이 지적해 왔다. 

[ 최면술 자체와 내적 치유에 대해선 다른 기회에 자세히 다뤄보려고 한다.]

내적 치유 사역자들은 또 옛 '상처'의 치유를 통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회복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과거 기억을 통한 치유와 회복이라고? 성경은 그런 것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변증가 마틴 밥갠이 바로 지적했듯, 오히려 사도 파울은 과거는 잊어버리고 앞에 놓인 하늘 상급을 위해 달음질하련다고 선언한다(티모테B서=딤후 7'7~8). 옛것은 지나고 모든 것이 새로워진(코린토B서=고후 5'17) 새 피조물이 됐다면, 과거의 것은 은총에 대한 감사와 간증 외엔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밥갠의 말처럼, 개인의 현재 행동에 대한 설명을 과거로부터 찾아내려는 것은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에 위배된다. 설령 그것이 심리학적으로 타당하다 해도, 크리스토님을 통한 참 해결의 진리를 '도둑질'로 대체하는 셈이 된다. 크리스천의 문제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 하나님과의 관계 여하에 달려있다! 기독교는 과거 지향적 종교가 아니다. 

성경의 주된 맥인 메시아에 관한 예언도 이미 대부분 과거에 성취되었다!  


셋째로, 최면술은 단순한 심리요법 차원에서 더 나아가 영적 위험지대로 이끌릴 수 있다. 탈체현상,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닌) 투시력/천리안, 환각/환시, 동양 신비가들이 주장하는 신비경, 심지어 최면술 연구가인 어네스트 힐거드까지도 그렇게 표현한 '신들림' 등에 걸려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밥갠 등의 지적과도 같이, 최면술은 어떤 레벨에서든 오컬팈하지만, 그 수위가 깊어질수록 명백한 오컬트 행위이다. 


최면술과 오컬트의 연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밝혀보기로 한다. 

 

출처: 진리와사랑/김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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