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안심하라-

본문읽기:마태복음 9장 1-8절

1.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2.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3.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

4.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5.'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6.'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능이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7.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8.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작은 자야 안심하라-

'작은 자'란, 아이를 말합니다. 이 단어의 용례를 살펴보면 누가복음 3장에서 12살되신 예수님을 향해, '아이야'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중풍병자가 아이라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부형같은 심정으로 친근히 부르는 호칭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중풍병자가 아이처럼 심령이 낮아져 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걷지도 못하고 침상에 실려 온 중풍병자는 심신이 많이 약해져 있습니다. 혼자서는 대소변도 보지못하는 몸으로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게 되자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안심하라"고 하신 것은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그를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데리고 온 자들(2-4명으로 추정)과 중풍병자를 포함해서 하는 말합니다. "그들"의 중심인물은 중풍병자입니다.

원문에는 '사람들'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데리고오다'라는 동사가 복수형태로 되어 있을뿐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에게 안심하라고 하실 우리 주님이 아니십니다.

그러고보면 중풍병자는 믿음으로 나아오되,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아이같이 자신을 낮춘 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심히 애통하며 몸부림쳤습니다. 죄의 무서움과 죄책이 무엇인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같이 심령이 낮아졌던 것이지요.

천국복음을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며 병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자, 혼자서는 올 수가 없었기에 침상을 든 친구(아니면 지인이나 가족)들과 함께 나아온 것이지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사죄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빈말이 아닙니다. 실제로 중풍병자의 중심을 보시고 그렇게 사죄의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혹자는 예수님이 세상에서 죄를 사하시는 권능을 나타내고자 무조건 그렇게 하셨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창세전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을 주창하는 교리체계를 따르는 자들이 그렇습니다.

죄인이 믿음으로 주께 나아와 자신의 죄를 깨닫고 중심으로 돌이켜 자복하면 '주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라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아무리 주홍같이 붉은 죄일지라도 양털보다 더 희게, 흰눈보다 더 희게 씻어주시는 것이지요.

더럽고 냄새나는 누더기를 걸치고 왔을지라도 의의 세마포 흰옷-빨래하는 자가 도무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는-으로 갈아입혀주시는 것입니다.

사죄의 은총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무감각한 자는 위험합니다. 바늘로 찔러도 아프지 않다는 것은 이미 영적으로 큰 중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전신마취가 된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양심에 화인맞은 자들이 대개 그렇습니다.

죄에 민감하여 양심에 가책을 느끼는 경우는 소망이 있습니다. 가책을 느끼면서도 계속 죄가운데 머문다면 양심이 서서히 무디어져서 나중엔 가책도 안 느끼게 됩니다.

어린 아이와 노인을 놓고 보면 알 수가 있지요. 노인들은 마음도 몸처럼 굳어져서 회개하고 바른 믿음을 가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로마서-

죄에 대해서 민감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지중에라도 죄를 지었다면 즉시 회개(죄의 자백)하고 돌이켜 죄에서 멀리 떠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입에 발린 습관적 회개인 지 중심으로 돌이켜 통회자복하는 지를 다 아십니다.

회개하는 마음을 주께서 받으시는 자마다 성령께서는 "안심하라"는 말씀을 우리 심령에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지난 번 글에서,

하나님 나라(천국)백성의 특징 중 하나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던 것이지요.

죄를 짓고서도 안심한다면 결코 누릴 수 없는 복록입니다.

죄인된 자리에 계속 머물면서,

어떻게 의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참된 평안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기쁨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필자는 예전에(20여년 전),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24시간 내내 누려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장장 6개월이나요.

그 당시 어떤 목사님이 그런 경우가 참 더물다고 하더군요.

배에서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더군요.

가슴에는 기쁨의 샘이 터져 한없이 솟아나고요.

하나님의 의가 온 심령과 육체와 삶에 부어져서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실감 절감 통감케 되더군요.

그러고 보면 주님이 괜히 안심하라고 하신 게 아닙니다.

내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다고 생각되면,
마음을 물같이 쏟으면서 통회자복하십시오.

주님은 중심으로 돌이키는 자를 결코 외면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의 바다는 한없이 큽니다.

사죄의 은총을 받고 그릇이 준비된 자에게는 영육간에 구하는 것을 부어주십니다. 믿음의 분량만큼요.

진심으로 회개하셨다면 이제 안심하십시오.

여전히 정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면 신앙의 기초를 다시 한 번 점검해보십시오.

반석 위에 신앙의 집을 짓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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