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구자준 목사 2016. 10. 17. 20:57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찢어질 정도는 아니고 비교적 가난했다는 뜻입니다. 굶어 본 적도 없고 헐벗지도 않았습니다.

농사라 해봤자 전과 답을 합쳐서 열 마지기 정도 지었을 겁니다.

제가 만일 도회지로 유학을 안 가고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지게를 졌다면 살림살이가 좀 나아졌을 지도 모르지요.

시골중학교, 일명 논두릉중학교 가라고 원서를 사오셨길래, '아부지 그 갈라모 차라리 지게질랍니더'. 좀 당돌하긴 했지만 어린 마음에 걸어서 십오리나 가야 하는 그 학교에는 가기가 싫더라구요. 집안 형편도 생각지 않고 우기는 놈한테 져주시더군요.

그건 그렇고,

여나무 살 시월 중순, 그러니까 이맘 때 였던 것같습니다.

"야야~ 아랫 동네가서 느그 아부지 모시고 오너라"

"또 가라꼬예?"

시계도 없던 시절이라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니 밤이 꽤 깊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지요.

학교갔다와서 소몰고 산에 가서 소 먹이고 소꾼들하고 온 산을 쏘다니며 놀다가 저녁먹고 일찍 단잠을 자는 놈을 깨우니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지요.

투덜거리며 신작로를 걷습니다. 검정고무신으로 자갈을 걷어차봤자 발가락만 아픕니다.

그날따라 그믐 쯤인지라 온 사방이 캄캄하더군요. 후미진 곳을 지날 땐 머리가 쭈삣거립니다.

우리 아버지 말씀에, '늦은 밤에 이곳을 지날라치면, '이빨빠진 개오지(늙은 호랑이)'가 저 위 언덕밭에서 소쿠리로 퍼붓듯이 흙을 퍼붓는다'는 말을 들은지라 오금이 저립니다.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공굴(일제 때 건설한 콘크리트 다리를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길이가 50-60m 정도)을 지나고서야 좀 안심이 되더군요.

제가 보기보다는 간이 큰 놈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야밤 중에 아무도 안 다니는 큰 재를 두 개나 넘어 집에 왔다는 거 아닙니까.

수 십리 떨어진 외진 산골 외갓집에 갔다가 저녁 해거름에 집을 나서다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동네 어른들이 혀를 내두르더군요. 그것도 눈이 둥그래가지고. 다, 초등학교 시절에 익힌 실력(?)덕분이었지요. ㅎ

아랫 동네 이 점방(가게) 저 점방을 기웃거립니다. 한 곳에 갔더니 구수한 우리 아부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아부지! 집에 가입시더"

"국장! 아들래미 왔다. 고만 마시고 집에 가소!"(우리 아버지 별명이 그랬음)

부자는 신작로를 걷습니다. 우리 아부지 걸음이 어찌나 느리신지... 뒤돌아보면 저 뒤에서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걸어오십니다. 그것도 시조를 읊으시면서요.(청산리 백계수야~를 가끔 읊으셨지요)

드디어 공굴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후미진 곳을 지나도 무섭지 않을 것입니다.

아~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까 아부지가 안 보이는 게 아닙니까. 다시 돌아가보니까 다리걸 밑으로 내려가고 계시더군요.

"강상, 있는가!"

"아이구~ 어르신, 어서 오이소"

자다가 '아닌 밤 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맨발로 잠자리에서 내려오더라구요. 옆에서 자던 강상 부인도 부시시 일어나더군요. 얼굴이 기찮다는 표정이더군요. 딸래미는 세상모르고 자고 있고.

소주 됫병(1.8리터)에 절반 안 되게 남은 술을 꺼내오고 동냥해서 얻어온 김치도 내오고...

'아무리 술을 마시고 싶어도 그렇지, 거지가 동냥해서 얻어온 술을 얻어 마시다니!'

알말의 존경심마저 사라지려는 그 당시 필자의 심정이었습니다.

"아부지! 고만 마시고 가입시더"

아무 때꾸도 없습니다.

대신 강상이, "도련님, 여기 걸터앉으이소!"

기어코, 강상이 애지중지(?)하는 그 독한 쐬주를 남김없이 주거니 받거니 거의 다 비우고서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시더군요.

'아~ 우리 아부지가 이런 분이었나?
예전엔 미쳐몰랐네!"

그리고나서 세월이 좀 지났을 때였습니다. 고등학교를 부산에서 다니고 있었는데(꽤 알아주는 명문임), 고2 여름방학 때 우리 아부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참 안타깝고 슬퍼더군요.

삼우제를 마치고 며칠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아무개야~ 거지 강상이 니 찾는다" 동무들의 말에 나가보니 강상이 울먹이며 다가오더군요.

그 못생긴 얼굴(키도 작고 코도 반쯤 내려앉고)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러더군요. 누런봉투를 제 손에 쥐어주며 손을 잡고서,

"부음을 늦게 들어 인자사 왔심미더. 죄송합니더. 도련님, 부디 성공하이소!"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여나무 살 때의 '아부지와 강상'의 기억이 떠오르더군요.

아부지는 강상한테 언제까지 동냥하며 살려고 그러느냐면서, "배미(뱀) 잡아라, 내가 도회지에 팔 곳을 알아봐 줄게". 그 뒤로 집게들고 망태메고 배미사냥꾼으로 나선 강상입니다.

어린 딸래미가 좀 자라자 도시의 아부지 육촌 형님집(당시에 부자였음)에 가정부로 들여보내고요.

돈이 모이니까 공굴밑에서 살 이유가 없었지요. 동냥하던 그 지역을 벗어나서 멀리 이사를 갔습니다.

강상이 거지로 살면서, '어린 딸을 데리고 절뚝거리는 다리로 동냥하던 여자'를 만나 공굴밑에서 가정을 꾸렸던 것이지요.

아~ 세월은 그 공굴밑에 흐르던 물과도 같습니다. 벌써 반 세기도 더 된 아련한 옛날이야기 이니까요.

덧없이 흘러간 세월 속에 잠시 추억의 주머니를 뒤적여 몇 자 올려봅니다.

(강상의 간절한 당부와는 달리, 필자는 세상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목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 독자제현의 건승을 빌어봅니다.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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