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 굶식이 아닙니다

구자준 목사 2016. 11. 17. 03:44

금식, 굶식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9장 14-17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이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니까

1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라

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리라


성경에서 말하는 금식이란 '식음'을 전폐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이란 마시는 것을 말하는데, 물이라기보다는 주로 포도주를 뜻합니다.

금식하면서 맹물을 마신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식사시간에 포도주를 곁들였습니다.

손님을 초대하거나 잔치할 때에는 질 좋은 포도주로 대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지난 해에 짠 포도즙은 숙성이 덜 되어서 시큼떱떨할뿐 맛이 없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몇 년된 좋은 포도주로 손님을 대접했던 것이지요. 좋은 포도주란 발효가 잘 되어 술맛이 좋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가면 잘 먹고 잘 마셨습니다. 만일 체면을 차리고 젊잖게 먹고 마셨더라면 주인도 제자들도 함께한 자들도 불편해서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평소에 잘 먹지도 못하는 형편인데 그런 자리에서라도 마음껏 먹고 마셔야지요. 예수님의 마음씀이 그러했습니다.

문제는 그 날따라 경건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지키는 금식하는 날이였다는 점입니다.

바라새인들은 목요일, 월요일 주 2회 금식을 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날이 목요일입니다. 40일 금식하고 나서 율법을 받아서 내려온 날이 월요일이고요.

한 마디로, '울생율사-율법에 살고 율법에 죽는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금식이었지요.

그들은 율법을 보호하기 위해(잘 지키기 위해) 율법 바깥에다가 울타리를 쳤던 자들입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기에 앞서 사람이 만든 조항들을 먼저 지켜야 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율법의 정신-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문자 그대로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율법을 해석해서 지키는 속좁은 형식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율법준수란 모름지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저주시는 바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해서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지켜야 하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자기만족, 공명심, 나아가 자기의(self-rightousness)를 나타내는 수단으로서 율법을 지켰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선생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그러했으니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백성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 셈이지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경우는, 자기들의 선생이 한 금식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시야 40:3, 요1:23)로서 백성들의 죄를 슬퍼하며 '회개의 금식'을 한 선생의 심정을 모른, 종교적 행위로서의 금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양태의 -기독교 모양을 내는- 일반화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생명없는 박제화된 진열품으로서의 일반종교 중 하나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항상 말씀과 기도로 성령안에서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지금 하나님이 오시건만 길이 없습니다. 세상의 '왕의 대로'는 있는데 말입니다.(요단계곡을 따라 나 있는 king's highway를 말합니다)

울퉁불퉁한, 길 아닌 길로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오시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백성의 마음에 대로를 수축해야 합니다.그래서 요한은 금식하며 회개를 촉구했던 것이지요.

15절 답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에 빗대어 설명을 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란 문자적으로는 '신랑집 아들들'을 말합니다. 신랑의 결혼잔치를 돕는 신랑의 친구들이지요.

몇 날 며칠동안 흥겨운 잔치가 계속 되도록 신랑을 돕다가 잔치끝날에는 신부집에까지 신랑과 동행하여,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마 25:6)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3:29)

이들이 바로 혼인집 손님들(신랑집 아들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세례 요한은 잘 감당하였건만 그의 제자들은 아직은 잘 모르고 있었기에 바리새인들의 금식과 스승 세례요한의 금식을 구분하지도 못한 채, 예수님의 인격(Person)과 사역(Work)에대해 오해하여 엉뚱한 질문을 한 것이지요.

15절의 은유적 답변에서,
'슬픔' '빼앗김' '금식'이란 단어를 들어서 신랑이 당할 고난과 죽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즐거움(기쁨)의 반의어는 슬픔입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표현은 놀라울 정도의 극적인 표현입니다. 그 당시에는 신랑을 빼앗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빼앗긴다는 것은 별세(원문- 누가복음 9:28- 엑소도스-탈출, 의미상으로는 구출)의 다른 표현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실상은 엑소더스입니다. 모세시대의 출(엑소더스)애굽이 그 모형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죄인들이 회개하여 예수님과 함께 죄악된 세상에서 떠나는(엑소더스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로 누릴 영원한 기쁨의 '맛보기'로서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면, 제자들(신랑집 손님들-아들들)은 슬퍼하며 금식(금식이란 죽는다는 말입니다. 곡기를 끊으면 죽습니다)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겠습니까. 제자들 또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금식을 아니한다 할지라도 금식하는 것이나 바를 바 없었던 셈이지요.


마지막 두 구절의 은유-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비유는 율법주의와 형식주의, 금욕주의에 대한 대응으로서 하신 말씀입니다.

새 시대가 도래했는데,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천국-유대인들이 그토록 바라고 기다렸던 메시야 왕국)이 도래했는데도 여전히 옛 관습과 사고의 틀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생베를 잘라서 헌옷에다 붙이는 길쌈하는 여인은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몇 번 빨게 되면 생베가 헌옷을 당겨서 옷이 너덜너덜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생베도 헌옷도 다 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새 포도즙을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습니다. 헌 가죽부대란 이미 써먹은(부풀대로 부푼) 염소나 양가죽 부대를 말합니다. 이미 늘어난 부대에 또 다시 포도즙을 넣어면 나중에 발효돼서 터져버리고 맙니다.

복음의 페러다임이 변한 게 아닙니다. 창세기 3장 15절부터 시작되는-하나님의 약속인 원복음으로부터 시작해서 구약성경-구원역사 내지는 구속사로서의 구약성경-전반에 걸쳐서 면면히 이어져온 복된 약속의 말씀입니다.

다만, 바라새인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성경에 대한 오해가 원인제공을 했기에 이렇게 교훈하시게 된 것이지요.

이 시대를 한 번 돌아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화석화 된 전통이나 교리를 붙드는 것이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개혁신교(개신교)의 후예들은
'일신우일신' 해야 합니다.

변함없는 말씀(텍스트)으로 변화하는 상황(컨텍스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두 지평의 만남을 통해 시대의 등불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럼과 함께 시대를 바르게 읽어야겠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진열장에 종교상품 중 하나로서 복음을 걸어두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헛된 세상, 일장춘몽같은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마시고 진정한 엑소도스(엑소더스)를 통해서 영원한 기쁨의 새 포도주를 맛보시기를 소원하며 축복합니다. 아멘!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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