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 살리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9장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니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기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오늘 본문은, 하나의 네러티브( 사실을 바탕으로 전개해 나가는 이야기) 안에 작은 에피소드(묻혀질뻔 한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죽음을 이기신(정복하신) 생명주시는 주 예수님'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본문의 병형구절인 마가나 누가의 기록을 되도록이면 인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본문연속강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의도에 충실하고자 함에 그렇습니다.

혈루병 앓는 여인의 구원과 관리(갈릴리지역의 유대사회 지도자)의 딸에 대한 이야기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는 여인과 12살 된 관리의 딸이 그것입니다.

3×4=12, 하늘(삼층천, 삼위일체 하나님 등)의 수와 땅(동서남북, 사방 등)의 수를 곱한 수이면서 동시에 만수(꽉찬)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 신약의 열두 사도 등도 만수로서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관리가 와서 방금 죽은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구한 시각은,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제자들과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신 바로 그 때입니다.

율법주의 형식주의 금욕주의에 대해 바르게 교훈하시다가

관리의 딸을 살려달라는 간구에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들 밥만 먹고 각기 제 길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유는, 과연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을 것인지!

인생에 있어서 죽음보다 중차대한 명제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큰 관심을 가지고 관리의 집까지 따라온 무리를 떠올리기 전에,

먼저 노중에서 혈루병 앓는 여인을 고치신 에피소드를 살펴봅니다.

이 여자의 혈루병은 레위기(15장)를 통해서 보자면 부정한 유출병입니다. 아랫도리로 피를 쏟는 병을 말합니다.(일반적인 생리가 아닙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부여하신 귀중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도때도 없이 피를 쏟으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허비하고 있는 셈이지요.

여인이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고 몰래 예수님의 겉옷 끝자락을 만진 것은 자신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출병을 앓고 있는 자가 다른 사람을 만지면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집니다.

그렇게 하면 구원을 받겠다고 스스로 믿었기에요.

참으로 율법을 뛰어넘는 여인의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여인에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이 '죽음 앞에서 벌벌떠는 인생들 모두'에게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아들 딸'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본문에서 저자 마태는 율법을 지킴이 인생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죄인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게 기록한 줄로 믿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병을 앓았다면 인생이 끝난 것입니다.(열두 해는 여인의 평생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물질도 육체도 시간도 흘러내리는 피와 함께 스러져간 세월이었지요. 아무 소망도 없이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여인입니다.

그런 여인에게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요.


이제 관리의 열두 살된 딸을 살리신 사건을 살펴봅니다.

먼저 피리부는 자들과 떠드는 자들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구슬픈 피리소리와 곡소리로 슬픔을 표했습니다.

'료'를 받는 피리부는 자와 곡꾼을 고용했던 것이지요.

구성지게 피리를 불어 가족과 고용된 곡꾼(곡소리내는 자)들과 초상집에 몰려든 자들의 심금(?)을 울려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지요.

정말 슬퍼해서 '떠드는 자들'이 아닙니다. 초상집에 와서 얻어먹으려면 우는 체라도 해야 합니다. 지체높은 집에 초상이 났으니 문상객이 많으면 많을 수록 모양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떠드는 소리(소음 이상이 아님)라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시니까 비웃습니다. 그런 자들을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비웃는 자들은 지금은 비웃지만 때가 되면 우는 체가 아니라 정말로 울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돈 몇 푼에, 밥 한그릇에 팔려 슬프지도 않으면서 슬픈 체 하는 그들에게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현장을 보여줄 수 없으셨던 것이지요.

자고 있는 자를 깨우는데 요란을 떠는 자는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깨우면 되는 것입니다.

"물러가라"고 하신 말씀에는 그런 의미도 녹아 있습니다.

'생명의 살림-살아남'은 조용히 일어납니다. 요란을 떤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미디어(TV.. 등)를 통해 설교하는 분들 중에 과연 생명을 살리는 분들이 얼마나 있는지... 아니면 혹, 자신과 교회를 선전하는 것은 아닌지...

노파심에서 하는 말입니다.

돈 몇 푼에 팔려서 부흥회에 다니는 분들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은 아닌지...

진정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면 조용히 복음을 전해도 될 것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오해는 마시고요.

이 시대에 유명한 주의 종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분들은 자신을 한 번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소녀가 믿음이 있었기에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 아비의 믿음을 보시고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먼저 믿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누군가가 기도했을 것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믿지않는 자들을 위한 기도의 끈을 놓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를 위해 간구하십시오.
'주님이 친히 손을 잡아주십시사'고 울면서 매달리십시오. 내가 내 자식을 살릴 수 없습니다. 시대가 악합니다.

소문이 온 땅에 퍼지니라-
생명의 향기는 아무도 붙잡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전파를 제어할 수는 것은 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이미 죄와 사망과 마귀를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혹 핍박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성도를 위해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주 예수께로 돌아오십시오.

마귀가 더 이상 여러분을 붙들지 못합니다. 거짓으로 속이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 번에 올린 글에서 말한, '이빨빠진 개오지(늙은 호랑이)일뿐입니다.

지금도 거짓의 아비 마귀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세상영광을 보여주며 속이고 겁을 주지만 이빨도 발톱도 다 빠진 늙어빠진 사자와 다를 바 없는 존재입니다.

참 생명을 얻고자 하여 주 예수께로 나오는 자들을 결코 붙들지 못합니다. 다만 으르릉거릴 뿐입니다. 그러니 속지마시고 속히 돌아오십시오.

앞서 말씀드린대로, 믿지 않는 인생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생명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육신의 목숨이 다하면 회개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무섭고 두려운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온 땅에 퍼져나가고 있을 동안에 돌아오십시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고 권력을 누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장춘몽입니다. 잠깐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죽음이란 명제를 중첩해서(두 번에 걸쳐서) 기록함으로써, 죽음의 굴레를 쓰고 사는 인생이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를 밝히 드러내고 있는 본문입니다)

주의 은혜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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