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나, 타인이 보는 나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걸 두고

       심리학에서는 ‘초정확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초정확성을 갖기란 쉽지 않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때 

      기준이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가령 본인 스스로 자신을 외향적인

       사람으로 평가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추론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본인의 생각을 기준으로 한 판단이란 의미다.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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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 장가를 가더니

           

          자식을 낳으면

          누구나 다 그렇게 기를테지만,

          어릴 때 유난히 몸이 약한 아들,

          불면 날아갈까, 옥이야금이야...

          나는 먹지 못해도

          좋은 것만 골라서 먹여 기르려 애썼고,

           

          미국 남자들은 설겆이도 곧잘 한다는데

          설겆이 한 번 시켜 본 적 없는 내 아들,

          집에서는 왕자가 따로 없었는데...

           

          대학을 타주로 보냈고, 자취 방엘

          한 번 찾아갔더니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며칠을 치워주고 화장실도 닦아주고

          무엇을 먹고 사는가? 염려가 되어

          아들이 잘 먹는 밑반찬을 잔뜩 만들어 두고 왔었다.

           

           

          졸업과 동시에 장가를 가겠다며

          과는 다르지만 같은 대학에 다니는 여학생,

          같은 교회서 봉사하다 만났다는

          얌전하게 생긴 아가씨를 데리고 왔기에

          장가를 보냈고 몇 년이 지난 후,

           

          아이 둘을 낳아서 길러보더니

          부모에 대한 마음을 배운 것인가?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자기가 모든 음식을

          준비하겠단다.

           

          ?

          네가 뭘 제대로 할 줄 안다고?

          내심 믿기지 않았지만

          기대 반 의심 반

           

          이틀을 연달아 시장을 봐 오는데

          가만히 보니까 며느리는 아이들과 놀고 있고

          아들 혼자서 들락거리면서 장을 봐온다.

           

          추수감사절 날이 되었다.

          눈치를 보니까 새벽부터

          아들은 터키를 굽는다며 부엌에서

          왔다갔다하고 며느리는 감자도 까주고

          조수처럼 조금 거들어주기만 하는 눈치다.

           

          저녁이 다 준비되었다면서

          식구들을 식탁으로 불러 모으기에 가보니

          생각보다 근사한 밥상이 차려져 있다.

          터키도 노릇노릇 냄새도 없이 잘도 구워놓았다.

          능숙하기가 한 번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다.

           

          세상에나!

          내 아들이 언제부터 저렇게 부엌에서?

          음식이 맛난 만큼 내 마음이 좀 그렇다.

          마냥 기뻐해야만 하는데 이 마음이 무엇일까?

          확실히 세대차이인가 보다.

          누가 부엌에서 일하면 어떤가?

          저희들이 행복하게 잘 살면 되는 것이지.

          내가 내 마음을 달래어 본다.ㅎㅎ

           

           

           

           

           아들이 채려준 땡스기빙 디너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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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나의 경력이 한 단계 발전한 사건입니다.”라고 지난 금요일 토론토 CityNews 네트워크의 빈 앵커의 자리를 차지한 Ginella Massa가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이런 고백을 했다고, 이를 취재한 헐리우드 레포트가 보도하였다.

           

          Massa가 오후 11시 뉴스를 마친 뒤에 뉴스 편집에 참가한 스텝들은 캐나다가 다양성을 위한 한층 더 진보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편집장이 제게) ‘이것이 첫 번째 사례냐?’라고 물었고, 나는 ‘내가 생각하기엔 캐나다에서 히잡을 쓴 앵커가 등장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 뒤 Massa는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기록적인 조회수를 기록하였다. 이 곳에 그녀는 다음과 같은 글귀를 남겼다.

           

          “이건 정말 대단한 일입니다! 무슬림에 대해 증오와 비방이 가득 찬 현실 속에서 이런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기사원문>> Meet Canada's First Hijab-Wearing TV News Anchor

           

          * 기독교에 대해선 지속적인 차별정책을, 동성애와 이슬람에 대해선 오바마 못지않은 관용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캐나다에서 건국 이래 최초로 뉴스 시간에 히잡을 쓴 무슬림 여성 앵커가 등장하였다.


          일부 극단적인 무슬림 국가에서만 볼 수 있던 낯선 모습이 서방국가에서 재현된 것이다.  





          동성애 페스티발과 이슬람 집회에 참석한 캐나다 총리 저스틴 트뤼도의 모습


            

           

          만일 비선 최순실이 깊이 개입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중동정책(제 2의 중동 붐, 할랄단지, 검단 수쿠크 자본 투자)이 지금까지 지속되었다면, 어쩌면 우리나라에서도 조만간 캐나다처럼 히잡을 쓴 앵커가 등장했을 지도 모르겠다. (중동 방문 당시 대통령 스스로가 히잡을 쓰고 ‘나는 남자들에게 복종하는 여자’라는 사인을 보여준 바 있으니,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 생각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동 국가를 방문할 당시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한다.' 또는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이라는 의미를 가진 히잡을 착용한 사실에 대해 언론에서도 비판이 있었다.



           


          필자는 무슬림의 확산이라고 하는 세계정부주의자들(일루미나티)의 어젠더가 전세계적으로 광풍과 같이 몰아치고 있는 현실 속에서 터진 이번 최순실 비선 사건은, “이슬람의 침탈을 막아 달라”는 천 만 성도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하신 결과라 확신한다. 


          관련글>> 최순실이 딸 정유라를 위해 이슬람의 침탈을 허용하려 했는가?

           


           

          - 예레미야 -

          24.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신앙이 무엇인가
          부르심을 받은 자의 삶의 생활로
          믿는 자의 근본인 믿음이 가치관이 되어 인생관 과 세상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세계관이 되어 복음의 의가 생활의 기준이 되면
          감사와 기쁨의 원천이 신앙인의 힘임을 성령님께서 알게 하시고 인도하시기에
          이 땅에서 불의와 거짓과 탐욕을 멀리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인 하나님의 의를
          행하기에 자연히 세상의 정신적인 문화인 정직과 공평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와
          국가가 세워지고 사회와 국민의 정신문화의 바탕이 되는 복음의 의가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전통이 이어갈 수 있고, 있었을 텐데
          그 기지(基地)가 되는 교회와 공동체가 복음의 공동체라는 공동체(共同體)의식이
          깃들기 전에 이미 의미를 잃은
          이제는 공동체라 부르기에 턱없고 껍데기만 남아서 소리만 시끄러운
          빈 수레처럼 알맹이가 없는 겉모양의 종교의식화 된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는  
          거의가 성경의 공동체라 하기에 거리가 먼 공동체의 본질이 파산이 난지 오래
          되었기에 이제 많은 교회들은 사라지며
          세계 교회사에 유례없이 짧은 시간에 부흥하고 짧은 시간에 사회로부터
          지탄의 대상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으로 수치를 망각한 자들이 허세를 부리는
          말 뿐이고 종교적인 의식만 남은 종교인들이 되어, 믿는 자들이 세대와 세대가 끊이어
          사라지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진정한 신앙인은 남겨 놓겠으나
          요란을 떨던 교회는 이미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하였으니
          한국교회의 죄로 인한 부패와 그 고리를 누가 끊겠는가.
          후세에
          교회사에서 한 장을 장식하다 사라지는 한국교회를 후세에 무어라 평가할까.
          어떻게 이렇게 무너질 수 가 있나.
          누룩처럼 번진 어그러진 복음의 길...
          복음이 위안(慰安)도 못되는 진리로 둔갑한 직통계시와
          체험 신앙으로 치우친 신유의 요란한 은사 제일주의
          전통적인 유교에 파생된 계급 화 된 교회통치와 관리라는 미명(美名)의 신분의
          분리로 분리 자들로 넘치고  지배의 수단이 된 무당적인 샤머니즘
          복채(卜債)놓고 복(福) 받기 거래(去來)가 된 믿음  
          무분별한 성공으로 변절된 부흥운동
          목회자의 개인적인 순종으로 변절된 성경공부
          감성적인 설교와 찬양으로 분위기에 흔들리는 믿음을 은혜라 하고
          그리스도인의 정의(正義)가 사라진 복음...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변화 당한 세상적인 세속화된 공동체...
          의무와 사명으로 허식(虛飾)화 된 열심과 헌신으로 전도, 선교를 외치지만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공의)를 저버린 세속화는 성령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어
          동력을 잃어버렸고
          빛의 자녀같이 못하여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여
          빛이 없는 곳에 곰팡이가 퍼지듯 번진 복음의 어그러진 수많은 현상들
          그 원인의 하나는
          무조건적으로 분별없이 미국의 부흥운동과 사조를 받아드려서 신앙의 순결과
          정체성마저 잃어버린 원인은
          미국의 교회사를 알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다.

          먼저 이 짧은 글은 충분한 원인 규명의 글이 못되겠으나
          지난 교회사를 짧게나마 잠깐 잠깐 제시하여 복음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고 무조건 적인 청교도 찬양을 일삼았던 우리의 윗세대
          그리고 오늘날 그런 영향을 받아 숭미 주의 적인  엉터리 청교도 예찬에서 깨어나
          지난 미국의 교회사에서 본받을 신앙과 배척할 정교일치의 역사를 알고
          메가 처치(대형교회)의 탄생의 배경을 잠시 언급하여
          요컨대 오늘날 한국교회의 부패의 원인을 나름 제시하고자 한다.

          미국 교회 역사의 시작은
          변절된 청교도와 대륙의 개척이라는 잘못된 개척 정신(the frontier spirit)과
          진정한 청교도 정신을 이어갈려는 세력의 갈등을 넘어
          정교일치를 이른 기득권 세력의 핍박과 박해의 역사로 시작되지만
          아메리칸 인디언의 파멸(破滅)은
          또 하나의 기독교 역사의 수치가 된다.
          물론 처음부터 잘못된 동기인 금을 찾아 대륙 발견을 한 콜럼버스의 욕망이 부른
          비극이지만 아직도 그의 대륙 발견을 기념하여 콜럼버스 데이(Columbus day)가
          국경일이 되어 퍼레이드를 하고 학교는 공휴일이 된 미국의 학교를 바라보면서
          역사란 승리자의 기록과 가진 자의 편인지 회의(懷疑)가 들고
          분별없는 청교도 예찬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답답함을 넘어 역사의식을 잃은 자들의 괴변이,
          왜 믿음을 외치면서 분별력도 없는 믿음을 믿음이라 하고
          역사의식이 실종된 복음은 단지 전하는 소식에 머무르고
          복음, 복음을 전한다 하지만 그 복음의 의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하나님의 의, 뜻, 공의가 사라진 복음은 어그러진 길이다.

          미국 교회의 역사는
          1607년 제임스타운 거주민들과 1620년 필그림스(Pilgrims)로 알려진
          거주민 이외 집단으로 이민 온 단체는 회중교회(Congregation Church) 교인 인퓨리탄(Puritan)과 장로교 교인들이었다.
          이들은 각자 자신들의 식민지를 개척하고 그들의 종교법을 제정하여
          자신들이 유럽에서 핍박을 피해 신대륙에 이주 하였음에도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에서
          기득권세력이 되어 정교일치를 이루었으며 다른 교파나 종교를 핍박하는 가해자가 되었고
          재 침례파(세례파)는 가장 큰 피해자 이었다.

          세일럼(Salem)은
          히브리어로 평화(shalom)를 뜻하며 그 명칭에 반하여 미국 판 마녀재판이 벌어졌던 곳으로
          수십 명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악명 높은 곳이며
          작가 너새니 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1864)은 자신의 조상이 마녀사냥의 가해자 인 재판관을 하였기에 역사의 죄를 속죄하듯이 박해를 받아온 약자의 삶을 소설로 쓴 ‘주홍 글씨’를 1850년에 쓴 곳이 세일럼이었고
          그 글로 미국문학을 세계문학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이 수치의 역사는 미국 국가와 청교도라는
          기독교 뿌리를 흔들어 놓은 곳이며
          수산자원이 풍부하여 영국에 까지 알려져 보 스 톤 인근 케이 앤은
          작은 정착촌을 이루다 보 스 톤이 되었고 이 도시와 경쟁으로 세일럼은 어업과 무역으로 아시아,
          인도 등 까지 배를 보내며 부유하게 된 무역상들이 대저택을 짓는
          건축 붐이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 뉴스(Newport News)까지 일어나 한 때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택가로 유명하였고
          1812년 미, 영 독립전쟁으로 상권을 보 스 톤과 뉴욕에 빼앗기면서
          세일럼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작가 너새니 얼 호손은1804년 7월 매사추세츠 세일럼의 청교도 집안에서 선장인 아버지
          너새니 얼 호손과 어머니 엘리자베스 메닝 사이에 태어났고 그가 태어난 뉴잉글랜드 지방은
          청교도의 전통이 세워진 곳으로 청교도 전통은
          그의 가정의 배경과 함께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고조부인 존이 세일럼의 마녀사냥 때인 17세기 뉴잉글랜드에서 청교도들이 일부
          주민들을 마녀로 몰아 처형하거나 고문으로
          죽인 사건 때 가혹한 재판관 노릇을 한 것은 그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도덕적 사회적 생활에 감추어진 내부의식에
          인간 내면의 윤리적 관점에서 탁월한 상징적인 수법으로 분석하여
          인간의 공통된 죄를 은폐하려는
          사회의 위선과 편협을 증오했고 인간적인 만족과 쾌락을 거부하는 금욕적인 신앙과
          종교의 위선과 사회의 거짓에 냉혹한 비판에 앞서 그 죄를 나누어지려 했기에
          그 곳의 청교도적인 배경과 사상이랄 수도 없는 맹목적인 정신적인
          종교적 기질을 탐구하여 자신에게 이미 배여 있는 청교도 정신에 대한 비판을 했다.

          미국에서 벌어진 마녀사냥도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1692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세일럼에서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
          유럽에서처럼 마녀는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하는 중대한 범죄였다.
          세일럼에 살고 있던 티투바(Tituba)라는 이름의 혹인 여자 노예와 친하게 지냈던
          백인 소녀 몇 명이 이상한 행동을 보였다.
          소리를 지르고 발작을 하는가 하면 개처럼 짖기도 했다.
          곧 세일럼에 사는 다른 소녀들도 마법에 걸린 양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물체가 계속 때리고 찔렀다고 증언했다.
          어떤 때는 들리지도 않고 말을 할 수도 없었고 목구멍이 막혀 숨을 제대로 쉴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세일럼일대는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였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고 티투바, 세라 굿(Sarah Good),세라오본(Sarah Osborne)이
          마녀로 기소됐다.
          거의 히스테릭한 지역 분위기에서 특정인을 마녀로 지목하고 연쇄적으로 자백이 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단 마녀 꼬리표를 단 여자가 다른 여자를 마녀라고 지목하면 그 여자 역시 마녀 협의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마녀 폭풍이 세일럼을 넘어 뉴잉글랜드의 다른 지역으로 번지자 총독이 마녀 문제를 다룰
          특별재판소를 구성했고 부 총독이 재판장에 임명되었다.
          일반 사건과는 성경이 판이해 형사 절차 및 증거 효력 검증의 상당 부분이 무시되거나
          완화되었다.
          대신 몸에 특별한 흔적이나 표시가 있는지 꼼꼼히 살피는 한편 지역 주민이 목격한
          환영처럼 입증할 수 없는 것들이 증거로 채택되었다.
          데이비드 코닉(David Konig)을 비롯한 다수의 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마녀로 지목되어 실제로 사형에 처해진 사람들 대부분 그 지역에서 반항적이고
          평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재판 과정에 협조적이고 평판이 좋았던 사람들은 마녀 판정을 받았지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마녀로 지목된 부인을 변호하던 자일즈 코리(Giles Corey)라는 백인 남자도 마녀로 체포되었다.
          그는 끝까지 마녀임을 부인하고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하다가 자백할 때까지 무거운
          돌을 가슴 위에 올려놓는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총독 부인도 마녀로 지목되다
          맨 처음 마녀로 지목된 흑인 노예 티 투 바는 부두교 신자였다.
          부두교는 아프리카에서 카리부 해의 아이티로 팔려온 흑인들이 주로 믿던 종교로 북치고,
          노래하고, 춤추는 행위를 통해 주술적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었다.
          17세기 말 뉴잉글랜드에 카리브 해 출신 흑인 노예가 유입되면서 부두교도가 들어왔다.
          철저한 청교도 정신으로 뭉친 뉴잉글랜드에서 부두교 같은 이단 종의 유입과 전파는
          상상할 수 없는 범죄였다.
          게다가 부두교 신자들이 마약을 태우거나 흡입하면서(당시에는 마약이 불법이 아니었다)
          환각 상태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주술적 행위를 일삼았다는 점에서,
          백인 소녀들이 티투바와 함께 환각제를 복용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가운데 헛것이
          보였을 수 있다.
          미국의 마녀사냥 역시 기존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욕구 탓에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백인 이주민에게 미국은 종교적 정치적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들어와 힘들게 개척한
          터전이 아니던가.
          부두교 같은 이질적 요소가 청교도의 가치를 훼손하고 사람들을 타락시키고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녀사냥을 통해 기존의 종교적 정치적 가치를 더욱 강화하고 유대의 끈을 조이고자 했던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또한 마녀로 지목되어 처형된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여자였고, 특히 행실이나 평판이
          좋지 않는 이들 이었다는 점을 보아도 유럽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녀사냥을 통해 남성 우월주의를 강화하고 하는 측면도 있었던 것 같다.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마녀사냥이 마무리된 것은 초기 마녀로 지목된
          소녀 중 한 명이 급기야 총독 부인을 마녀로 지목했기 때문이다.
          자칫 더 이상 끌다가는 부메랑 효과로 자신들이 당할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서둘러
          마녀재판을 끝내게 한 동기로 작용했다.
          특히 범죄를 일시적으로 강력하게 처벌하는 데는 정치적 목적과 이유가 있다.

          쿠데타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잡을 경우 조직폭력배 일제 단속을 벌여 강력하게
          처벌하곤 한다.
          국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누구도 변호하기 어려운 대상으로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다.
          마녀사냥과 비슷한 맥락인 셈이다.
          범죄에 대한 대응 방식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어떤 방식을 취하건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쪽으로 이루어진는 점은 똑같다.  
          -Crime Effect 크라임 이펙트 :세계사를 바꾼 결정적 범죄들 중 에서 -

          성경을 읽을 때 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고
          이를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이끄심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공평’ 과 ‘공정’ ‘평등’ 등 이런 정의가 포함된
          공의의 하나님의 사랑을 안 수많은 믿음의 앞 세대의 신앙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하나님의 의에 녹아있는 복음의 의, 공평과 평등
          그리고 공정 이를 알지 못한다면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의 늪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벽을 쌓아 하나님의 사랑에 선을 긋는
          분리주의자들이 되어 자신이 만든 벽에 갇혀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했고,
          가고 있으면서 열심과 열정이라는 헌신으로 포장한 종교적인 사상인 의식으로
          무장하여 자신과 다른 신앙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고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의 몇 구절로 선을 긋고 자신의 신념의 신학에 함몰된 자들...
          그런 신앙의 길을 보여주며 위험을 경고한 분을 알고 있다.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 1603-1683)
          영국 국교를 버리고 영국의 식민지인 보스톤에서
          신앙의 자유를 외치면서 청교도인 이라면서 기득권자가 된 신앙의  변절된 자들과 함께
          하지 아니하고 참 된 신앙을 외치며 아메리칸 인디언을 존중했던
          그 당시 소수의 신앙인인 로저 윌리엄스 목사는 침례교를 창시하지 않았지만
          창시자로 불러지는 진정한 청교도인 로저 윌리엄스
          다음 글에 이어진다.

          대통령이 된후 백악관은 여태 살았던
          제일 작은 곳이라구 쫭비한 트럼프!!




          做总统真难..

          헐~ 오라 우리 쌈하자!
          그래 넌 집이 얼매 잘 사나 보자 심리로
          한번 트럼프 집을 구경해밨더니 입이 쩍~
          이게 집이야 황궁이야..

          미국 <트럼프 타워> 딱 바두 누기겐지 알리지에 
          C罗、Bruce Willis 이런 사람들두 
          그냥 여기선 세를 들어사는 사람일뿐




           

          전부 대리석으로 된 쫭슈



           

          이런 장식품들은 전부 24K ..



          집에서 골프쳐두 됨


          전부 금으로 도배된 식기들..
          저기에 음식 담아 먹음 무슨맛일가



           

          수두룩한 사치품들




           

          책상 테두리두 전부 금이람다




           

          루이 16세의 凡尔赛宫을 참고해서 쫭슈했담다



           

           


           

           

          트럼프의 일상


           

          오바마와 아내의 일상



           

          트럼프 가족의 일상



           

          오바마 반공실



           

          트럼프 반공실



           

          오바마 밥상



           

          트럼프 밥상



           

          오바마가 주말엔 부인들과 같이
          귀농생활을 즐긴다면



           

          트럼프는 주말 별장가서 쑈싸함




           

          58개 의 방,33개 화장실이 있는곳에서
          주말에 쑈싸함...쫌 사네..






           

          여기두 전부 24K로 도배





           

          전용 비행기가 있으니 맘댈 갔다왔다



           

          7억 짜리 트럼프 비행기






           

          문잡이에 수도꼭지까지 금으로 도배
          금 사랑이 대단하신분


           





           

          집에 직승 뱅기는 몇대나 있구
          전부 트럼프라구 이름 쌔긴
          자기애가 강한 사람!


          但是从此以后
          川普既不能在飞机上漆自己的名字

          24K트럼프 오두바




           

          스포츠카 따위 안 키우는 트럼프
          유람선으로 炫富


          저런 집 .. 나두 갖고 싶다 ㅠ ㅠ


           




          사랑은 행복입니다...    최송연
           
          

          햇살 고운 아침이나 

          바람 거센 밤이나 당신의 그 사랑, 나 느낄 수 있으니 행복입니다 비록 당신을 따르는 이 길 험하나 당신의 그 사랑, 별빛 되어 날 인도하시니 행복입니다 사랑 때문에 거룩한 몸 갈기갈기 찢기신 당신의 그 사랑, 내게 영원한 생명 되시니 행복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영롱한 새벽이슬 날이면 날마다, 내 영혼 소생시키시니 행복입니다

           

            사랑은 행복입니다...    최송연

            햇살 고운 아침이나 

            바람 거센 밤이나
            당신의 그 사랑, 나
            느낄 수 있으니 행복입니다

            비록 
            당신을 따르는 이 길 험하나
            당신의 그 사랑, 별빛 되어
            날 인도하시니 행복입니다

            사랑 때문에
            거룩한 몸 갈기갈기 찢기신
            당신의 그 사랑, 내게
            영원한 생명 되시니 행복입니다

            당신의 사랑은
            영롱한 새벽이슬
            날이면 날마다, 내 영혼
            소생시키시니 행복입니다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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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라는 치료약

                세상 모든 사람이

                필요로 하는 약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 병으로 아파하고 있고

                괴로워하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약을

                내일은 저 약을 찾으며

                매일 매일 약을 먹어보지만

                나아짐이 보이지 않는군요


                갓 태어난 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부요한 사람 가난한 사람

                배운 사람 못 배운 사람

                모두 이 병을 앓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치료약을 구하기 위해

                사방으로 수소문하고

                오늘은 이 의사

                내일은 저 의사를 찾아보지만

                뚜렷한 처방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끔 명약이라고 하는 약을 처방받아 보지만

                잘못된 처방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더욱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해서

                사랑을 하지 못해서

                얻어진 이 병은

                사랑의 조갈증이란 병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처방은

                '사랑'이라는 처방약입니다

                이 약처럼 만병통치약은 없습니다

                이 약은 누구라도 먹을 수 있고

                먹고 또 먹어도 부작용이 없는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오히려 더 좋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약입니다


                그리고, 이 약은 아무 곳에서나

                쉽게 처방할 수 있는 약입니다

                값도 비싸지 않습니다

                거저 주면 줄수록 더 가치있고

                주는 사람도 함께 치유되는 희한한 약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이 약은

                아편보다도 더 강한 중독성이 있어서

                모든 아픔을 순식간에 낫게 하여 줍니다


                그 처방은,

                여러분의 따뜻한 가슴이며

                위로와 소망을 주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말없이 다가가서 손 한번 잡아주고

                다정하게 품어주는 진실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처방약은

                바로 여러분들 가슴안에 있습니다

                아주 가까이 숨어 있어서 보지 못할 뿐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지금 여러분 가슴위에 손을 얹어 보세요

                사랑이 숨쉬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그리고 가슴과 가슴이

                사랑과 사랑이 만나면

                그 약의 효과는 천배 만배

                더욱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답니다

                <!--[if !supportEmptyParas]--> <!--[endif]-->

                허참...

                정말이라니까요!?

                - 해처럼달처럼


            10 새로운 피조물에 심긴 마음의 법

             


             지금까지 변화, 생명적인 원리, 습관으로서의 거듭남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마음에 심긴 하나의 법으로서의 거듭남을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본성에 속하는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성의 법칙을, 짐승은 감각과 본능의 법칙을, 식물은 성장의 법칙을, 무생물은 운동의 법칙을 가지고 있듯이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그 마음에 주입된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 이 구절이 신약에 인용되고 있습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8:10). 새로운 피조물에게 주어진 법은 ‘마음의법’이라고 불리는데, 그 마음이라는 기능적 구조물이 생기자마자 그것과 함께 그 법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마음속에 새겨지는 이 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몇 개의 명제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1. 마음의 법은 본성의 법과 다릅니다


            1) 마음의 법은 회심한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법입니다

              본성의 법이 행위언약의 법이라면, 마음의 법은 은혜언약의 법입니다. 본성의 법은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도 있었지만, 마음의 법은 그의 회심 때에 주어졌습니다. 본성의 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죄와 불신앙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법은 이러한 것들을 깨닫게 합니다. 본성의 법은 성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 속에 육신으로 태어난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법은 성화의 한 부분이 되어서, 몸의 지체의 법과 싸웁니다.

             


             2) 타락 이전에는 본성의 법과 마음의 법이 같았습니다

              마음의 법은 원래 본성의 법이었던 그 법의 회복입니다. 처음에 아담의 마음속에 새겨졌던 그 법을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속에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다’라는 말은, 아담이 창조될 때 지니고 있었다가 잃어버린 그 의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이 법을 지워 버리고, 그 분의 의를 잃어 버렸으며, 오히려 마음속에 그것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법에 대하여 본성적으로 복종하지도 않고, 복종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적개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거듭남이란 죄의 법을 그 자리에서 쫓아내고, 하나님의 법을 그 합당한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3) 마음의 법은 마음속에 전체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모든 법과 모든 명령이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명령을 돌판에 새기셨던 것처럼, ‘마음의 판’에도 전체의 법을 새기셨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참된 것입니다. 만약 마음에 새겨진 그 법이 전체의 법이 아니라면,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에 속한 무엇인가가 결핍되게 되는 것입니다.


             4) 마음의 법은 외적인 법을 필요 없게 만들지 않습니다.

              외적인 법은 여전히 하나의 규칙으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새겨지는 이 내적인 법은 외적인 규칙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법은 규칙 자체가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법은, 성령의 손길에 의해서 외적인 말씀이 새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인 법의 진리를 실행하기 위하여 외적으로 기록된 법을 의뢰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법은 비록 그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외적인 율법과 조화를 이루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규칙이 되려면 기록된 율법과 같이 완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생활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말씀 속에 기록된 법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이 말씀에는 주의 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약속되어 있으며, 또한 내적인 가르침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법을 새기는 것은 문자로 쓰인 법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외적인 법을 확립하고 진전시키며, 또한 존중하게 만듭니다.

             


            2. 마음의 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 법의 내적인 지식과, 지적으로 그 법을 찬동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의의 지식과 법의 존재는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특성으로서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사51:7). 이 말씀에서는 지식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마음에 율법이 있는 자들’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그 법이 있는 것입니다. 회복된 지성 안에는 어떻게 그 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 상황에서 외적인 법을 적용하는 내적인 기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씨앗이기 때문에, 옥수수 씨앗에서 옥수수가 나오는 것처럼, 이 씨가 먼저 지성에 뿌려지고 품어져서, 그것에 일치되는 원리들과 생각들 속에서 자라납니다. 그것으로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며, 율법의 돌판을 보존하는 방주가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시력으로 율법 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교훈들 속에 있는 거룩을 보게 되고, 또한 자신 속에 있는 더러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2) 율법에 내적으로 일치하는 마음입니다

              거푸집에 부어진 쇳물이 그 이전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형태, 곧 그 거푸집의 모양대로 변화되는 것처럼, 영혼도 이전에는 죄의 종이어서 죄의 법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제는 성령으로 녹아서 율법의 모양과 형태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법과 하나님의 율법은 서로 유사합니다. 동일한 하나의 인장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은 그 명령을 친근하게 느낍니다. 마치 자연인이 죄를 친근하게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행하는 것은 본성적

             

             

            인 자유와 선택, 판단에 의한 것이지, 그 율법에 포함된 위협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3) 율법에 복종하려는 강력한 성향입니다

              죄에 이끌리는 습관이 이전의 본성에 강하게 작용했던 것처럼, 새 본성에는 율법의 명령에 복종하려는 강한 이끌림이 있습니다. 이러한 새 본성의 효과적인 덕을 마음의 법이라고 불립니다.

            마음의 법과 외부의 법은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완전한 법을 구성합니다. 하나는 지도 감독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실행을 위한 것입니다. 외부의 법은 훈령을 내리며, 마음의 법은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강력한 법이 작용하는 것이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롬8:2). 죽은 문자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적인 원리로서 마음을 살아나게 하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며, 또한 이전에 마음을 방해했던 것에서 해방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창조 전체의 주된 목적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를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서 살아가도록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37:31). 이렇게 영혼은 복음에 물들고 영적인 것이 되어서, 이제는 본성으로 그 복음에 담겨져 있는 것들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4) 율법에 대한 강한 애정입니다.

              말씀 속에 기록된 교훈들은 사랑의 율법으로 마음속에 있습니다. 말씀 속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은 명령의 율법인데, 마음속에 있는 법은 자유의 율법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율법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완성합니다.

            옛 사람은 율법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었습니다. 단순히 죽은 문자였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법이 자기 마음속에 새겨지자 너무 기뻐서, 이제는 그 법과 그 법을 향한 사랑이 없이는 결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법에 자기 마음이 충분히 반응하지 않을 때면 선지자가 말했던 것처럼 그 법도를 사모하여 찾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119:40). 그는 그 법도의 거룩함에 다시 일치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전에 즐거워하던 상태로 회복되기까지 결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 법은 그에게 내재적으로 선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편안함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과 떨어져 있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5) 실제적으로 복종하는 능력입니다

              마음속에 율법을 기록하는 것은, 영혼 속에 어떠한 능력과 힘을 넣어 주는 것, 하나님의 계명의 길로 달려갈 수 있고, 또한 마음과 애정이 그 계명에 이끌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을 함축합니다. 이러한 능력은 율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에 의해서만 주어집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 율법은 ‘의문’이라고 불립니다. 율법을 읽거나 듣는 것은 눈이나 귀를 교육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마음을 가르칩니다. 율법은 죽이는 의문인 반면, 복음은 살리는 성령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준수를 명령하되,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함께 줍니다. 율법은 ‘정죄의 직분’이지만 복음은 ‘의의 직분’입니다.

             

             

            율법은 ‘지성의 인지’, ‘의지의 동의’, 감정의 즐거움‘이라는 측면에서 마음에 기록됩니다. 지성에 있어서는 믿음의 빛이 선명한 가운데서, 의지에 있어서는 사랑의 불길의 그 열기 가운데서 마음에 기록됩니다. 지성에서는 그 율법을 판단하여 옳다고 승인하는 것이 있고, 의지에서는 그 율법을 향하는 움직임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애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에 따라서 율법과 보조를 같이 하려고 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11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게 되는 하나님의 형상

             

             

             새로운 피조물 안에는, 생명의 원리, 습관, 마음의 법이 있는 것처럼, 또한 하나님과 닮은 모습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존재한다는 차원에서 서로 유사합니다. 그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을 가장 정확하게 닮은 모습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닮은 모습 안에 거듭남의 본질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1. 낳은 자와 난 자는 닮은 꼴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 낳으신 분, 곧 하나님과 닮은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타락 이후 모든 인류를 덮친 죄가 사탄의 형상을 각인했다고 한다면, 거듭남의 은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각인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부패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이러한 닮음은, 창조 때에 인간에게 주어졌던 행복이었습니다. 이제는 구속함을 받음으로써 그 행복이 회복된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10).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 그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은 바로 그것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신의 본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은 신적이라고 불립니다. 신적 원리인 그 은혜가 거듭난 영혼 속에서 가장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궁과 능력이 그 은혜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젖을 물려 빨게 하셨습니다. 그러하다면 아기가 아버지를 닮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하나님 아버지를 닮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복사판이 원판을 닮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일3:9)들이라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났다는 것은, 그 낳은 자와 같은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1) 본체가 하나님과 닮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체에 참예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본체가 아니라 본성이 닮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적인 기질의 유사함이지, 무한한 본체의 유사함이 아닙니다. 그 신적 본체는 다른 피조물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되는 것은, 처음부터 그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첫 창조 때에 신적인 본체가 전달된 것이 아니라, 아담의 본성의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의와 닮은 의가 전달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본체적인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은 참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이며 동등한 자가 되는 것이 될 것입니다.

             


             2) 그러나 실제적인 참예를 의미합니다

              출산이란 하나의 생명체를 그 사랑의 유사성만이 아니라 그 본성의 유사성도 지닌 채로 낳는 것입니다. 거듭남도 그러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게 됩니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이는 밀랍이 인장의 모양을 받아들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비록 그 도장과 재료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도장의 글자를 정확하게 새기게 되고, 그 도장에 새겨진 글자와 찍힌 것은 서로 딱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하나님의 완전함에 속한 것들은 질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피조물에 속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체라는 측면에서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그것은 피조물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상태만큼 실제로 하나님과 닮은 것입니다. 거듭날 때 그 첫 번째 설계도가 작성되고, 영광의 때에 그 설계된 대로 최고의 성취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3) 새로운 피조물 속에 새겨진 것은 하나님의 전체 형상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집니다(골3:10). 어린아이의 신체 각 부분은 부모의 것과 일치합니다. 보모님만큼 크지는 않아도 부모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9).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새사람에게 나타나는 즉각적인 효과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 그리고 진실함을 그 영혼의 본질적인 부분들 속에 새겨 넣으시는 것입니다. 새롭게 되는 인간이 갖추게 되는 모든 요소들 위에 그 본성이 새겨집니다. 지성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새겨지며, 의지 속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4) 그의 본성에 참예하는 면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와 닮게 됩니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일3:7). 새로운 피조물은 의로우심에 있어서 똑같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와 실제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새로운 본성에는 그리스도를 닮은 청사진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갈4:19).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우리는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벧전4:1)라는 권면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권면에는 이러한 마음이 새로운 피조물 속에 들어가 그를 자극하여 실제로 행동하게 만드는 힘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하는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그의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미리’정하셨습니다(롬8:29). 여기서 ‘본받게 한다’는 것은, 같은 형태와 모양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심으로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성을 부여하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께 일치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씨(후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새롭게 된 사람들은 그의 ‘동류들’이라고 불립니다(히1:9). 언약에 있어서, 그리고 영광의 상태에 있어서 그와 동류가 되었다면,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기질에 있어서도 그와 동류가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본성에 있어서 옛 아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옛사람의 본성에 참예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은 믿음에 의해서 새 아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새 사람의 본성에 참예하게 됩니다. 전자에 의해서는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갖게 되고, 후자에 의해서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가지게 됩니다(고전15:48,49). 그러므로, 믿음과 겸손, 인내와 사랑, 복종,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 등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영적인 씨앗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5) 새 본성을 갖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신 성령과 닮습니다

              자연인이 개괄적으로 육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개괄적으로 영이라고 불립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육으로 난 것은 그 본성이 육을 닮은 것처럼, 성령으로 난 것은 그 본성이 성령을 닮았습니다. 영의 풍미, 기쁨, 호흡도 그 영적인 기원과 닮게 됩니다. 또한 그 활동과 목적, 기질이 성령의 것과 닮았습니다. 그것이 성령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2. 거듭난 자는 무엇이 하나님과 닮습니까

             

             

            1) 사랑이 닮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에게서 나타나는 믿음과 사랑에 의해서 그에게 하나님과 닮은 것이 있음이 증명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예수님과 닮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요일4:7)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의 형상과 닮은 모든 것들을 향하여 자신의 팔을 뻗습니다. 영혼이 모든 선한 것에 손을 뻗어 그 선한 것에 만족할 때, 그것이 곧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행복의 원천과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가지신 그 사랑을 가지게 될 때, 우리도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그 행복과 복된 상태를 조금이라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활동이 닮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행하심에 일치하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모든 본성에는 그것에 부합되는 애정과 행동이 있기 마련입니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신적 성질의 영향을 받아서 그 신적 성질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새롭고도 탁월한 상태로 그 영혼을 고양시켜 주는 은혜는 더욱 고상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더욱 완전한 방식의 행동을 하기 위한 것 외에 그 어떠한 것도 한 존재를 더욱 완전한 상태로 끌어 올리는 것은 없습니다.

             


             3) 거룩이 닮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12:10). 아버

             

             

            지가 자기 자식을 가르쳐서 마땅히 가져야 할 덕성을 가지도록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거룩에 참예하도록 거듭남을 통해 이루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2:29). 의를 행하는 바로 이 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귀들의 자녀들과 다른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롬3:23)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갱신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곧 거룩의 상태를 얻게 되며, 마침내는 그 거룩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거룩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앞으로는 그 교제를 완전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이 글은 1997년 10월 29일에 켈름스콧 자유 개혁 교회에서 개최된 여성 연맹의 날에 클라렌스 바우만 목사님이 행하신 강연입니다.

             


            드보라와 바락:

            여자들을 위한 모범인가? 남자들을 부끄럽게 한 것인가?[1]

            (Deborah & Barak: Example for Women or Embarrassment for Men?)



            1. 도입

             

            1.1 드보라는 모범입니까?


            드보라는 결혼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여성의 위치와 역할에 대한 모범을 우리에게 제공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북 인도 데라 둔에 있는 장로교 신학교 교수인 도나 스트롬은 여성들이 단지 인구 증가에만 관계하고, 세상을 다르시는 일에 있어서는 남성들과 연합하는 일이 (마가렛 태처나 인디라 간디를 제외하고)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애석하게 여깁니다. [2] 그래서 그녀는 드보라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드보라의 모범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은 여성은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어떤 것을 결정하는 일에 제외되어서는 안된다” [3] 스트롬 교수는 여자가 지도자의 지위를 취하는데 있어서 남자가 방해한다고 보기 때문에, 그녀는 또 이렇게 적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드보라가 어디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나 오늘날 보다 더 관련된 질문은 ‘하나님께서 그의 드보라를 사용하시도록 한 바락, 랍비돗 그리고 10,000명의 남자들은 어디 있는가?’ 이다.”[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드보라 안에서 어떻게 그가 여자들이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모델을 제공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진실일까요? 하나님의 교회의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드보라들(복수)를 우리에게 허락하신다고 생각을 재고해야만 할까요?


            현금 세상의 대답은 분명히 ‘예’,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동의하십니까? 아내와 어머니들로써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자들을 지도자의 지위에서 기꺼히 사용하도록 부지런히 여러분의 남편과 아들들을 촉구해야 합니까? 여권 확장의 우리 시대에서, 여성의 위치에 대하여 무슨 그림으로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의 마음속에 자리매김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함축적으로, 우리 시대의 연약한 남성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아들들이 지도자가 되도록 독려해야만 합니까?

               

            1.2 우리가 무엇을 증명하기를 원합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그의 말씀 안에서 말씀하신 것을 주의깊게 들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분위기에서, 남자와 여자 둘 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위로를 얻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 주님께서 여자들에게 할당하신 위치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을 여러분 앞에 두는 저의 의도를 설명할 때, 저는 주님께서 사사기4장과 5장에서 드보라와 바락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출발점으로 선택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주님께서 이 장에서 말씀하신 것을 듣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여자의 지위에 대하여 선입견이 없이 이 구절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여자들의 지위에 대하여 입증하기 위하여 여러분이 원하는 것에 대하여 이 두 장들로부터 증명하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5] 예를 들어.


            만약 여러분이 사사기 4장과 5장을 근거로 하여 여자들이 오늘날 교회에서 여선지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은 사사기4:4에 호소하여 강한 논증을 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드보라가 여선지자였다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자들의 지위는 자기의 남편 옆이고, 자기의 남편에 복종하는 것임을 논증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다시 4:4을 드보라와 관련하여 강한 증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드보라는 그녀의 남편의 이름에 의해 확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압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만약 여러분이 여자들은 행복하게 결혼할 수 있고, 가족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갖고, 동시에 사회에서 지도적인 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원한다면, 여러분은 사사기 4장에서 증명할 수 있습니다. 결국 이 여자 드보라, 랍비돗의 아내는 동시에 사사였습니다.

            저의 요점은 이것입니다: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의 지위에 대해 성경적 정당성을 발견하기 위하여 사사기 4장에 호소할 수 있습니다. 전통주의자들도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성경을 경청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경청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한 옆으로 치워두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 가능한 한 우리는 우리 선조들로부터 상속받은 행낭이나 혹은 우리 시대의 사회로부터 받은 꾸러미 없이 이 구절을 읽어야 합니다. 


            1.3 서술적인가? 혹은 규범적인가?


            한 가지 더 언급되어야만 하는 서론적 항목은 서술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 사이에 구별입니다. 사사기 4장은 서술적입니다. 그것은 드보라가 행한 것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드보라가 자기 시대에 했던 것의 이 서술은 우리를 위한 규범으로 요약되는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수세기 전에 드보라의 행동을 서술한 사사기 4장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만 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까? 성경의 다양한 곳에서 주어진 행위는 서술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모범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는 유다가 노정에서 만난 매춘부와 맺은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7]  우리는 성경이 유다가 행한 것을 우리를 위해 서술한다는 것을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동일한 행위를 하라고 서술하지 않습니다. 유다의 행위는 분명히 그의 죄에 대한 서술이지 결코 우리의 행위를 위한 규범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제, 사사기 4장과 5장은 서술적입니까? 분명히 그렇습니다. 또한 규범적입니까? 다시 말해서, 이 장들은 오늘날 우리 여성들이 마땅히 해야만 하는 규범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 땅에서 지도자로서(여선지자와 사사) 드보라의 출현은 우리의 딸들이 지도자의 지위를 열망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1.4 개요


            우리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규범을 배우기 위하여 그의 계시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드보라에 관하여 사사기4장과 5장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읽겠습니다. 이것은 이 글의 두 번째 부분을 구성하고, 세 번째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드보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하셔야만 했던 내용을 살필 것입니다. 네 번째 부분은 우리 앞에 하나님께서 드보라 시대 이후 그의 백성에게 계시하셨던 것을 둡니다. 우리는 사사시대 이후 하나님의 계시에 변화가 있었는지를 식별하는데 엄밀하게 관심을 가집니다. 마지막 부분은 오늘 우리를 위한 결론을 내립니다.




            2. 드보라는 누구였는가?


            2.1 한 인간으로써 드보라의 정체성


            드보라라는 인물에 관하여 사사기4:4,5은 우리에게 “그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고 말해 줍니다.


            - 여자


            비록 우리 본문은 분명하지 않지만, 히브리어 본문은 드보라가 여자였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원문의 4절은 “그리고 드보라, 여자 여선지자(우드보라 이솨 느비아)”라고 읽습니다. 주님은 그녀의 성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을 하십니다. 그녀가 여자라는 언급은 또한 히브리 문법에 따라서, 그녀가 “어떤 여자(a certain woman)”였다는 것을 시사합니다.[8] 사사기4장의 저자는 드보라를 그녀 당대의 다른 여자들 위에 서 있는 지도자, 마치 그녀가 분명한 지도자인양 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안에서 한 정상적인, 일반적인 여자로써 묘사되고 있습니다.  


            - 여 선지자.


            그녀는 여선지자로써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우리는 많은 여자들이 여선지자였다는 것을 읽게 됩니다.


            미리암: 출애굽기15:20,21에서 우리는 백성들이 홍해를 건넌 후에 미리암이 주님 앞에서 그리고 이스라엘 앞에서 예언하고 있는 것을 읽습니다.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미리암이 너희는 야웨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하였도다”.


            훌다: 열왕기하22:14에서 우리는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홀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 저희가 더불어 말하매”


            이사야의 아내: 이사야8:3에서 이사야의 아내는 여선지자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여선지자에게 갔다. 그리고 그녀는 잉태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한 아들을 낳았다...(히브리어 직역... 한글개역은 이렇다: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안나: 그녀에 대해서 우리는 눅2:36에서 읽는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래서 성경에서는 여 선지자로 잘 알려진 5명의 여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구약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임명하신 예배 봉사에서 선지자의 공적인 기능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선지자는 단순히 하나님께서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그 백성들에게 당신의 뜻을 알리기 위하여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신 자일뿐입니다. 드보라는 여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그녀가 어떤 식으로든 직분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읽지 못합니다. 드보라는 예를 들어, 엘리사와 예레미야와 다릅니다. 주님은 그 두 사람을 선지자의 직분으로 부르셨습니다(왕상19:19이하, 렘1:4이하를 보십시오). 


            우리가 또한 기억해야 하는 것은 비록 드보라가 여선지자 일지라도 그녀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갔다는 것을 읽지 못합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모든 다른 선지자들은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은 “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언을 했습니다. 우리는 드보라에 관하여 그런 것을 전혀 읽지 못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을 가지고 백성에게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그녀에게로 왔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삿4:5b). 그녀는 종려나무 아래에 앉았습니다. 정확하게 동일한 일이 훌다에게도 일어납니다: 그녀는 예언을 가지고 어느 누구에게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우리는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홀다에게로 나아가니...”라는 말씀을 읽습니다(왕하22:14)


            - 랍비돗의 아내


            우리는 사사기4장에서 드보라가 랍비돗의 아내였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녀가 그녀의 남편의 이름에 의해 알려진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알려지지 않습니다. 비록 그녀가 이스라엘 안에 특별한 위치를 가졌을지라도 말입니다. 그것은 왜?라는 질문을 유발합니다. 왜 그녀는 여기서 그녀의 남편의 이름에 의해, 즉 랍비돗의 아내로 언급되고 있습니까? 이것은 나중에 계속 대답되어야만 하는 질문입니다. [9]


            - 사사


            드보라는 여기서 사사로 불려집니다. 이 용어는 사사기에서 드보라의 프로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드보라는 12명의 사사들 중 한 사람입니다. 12명의 사사들 중에, 6명은 주요한 사사들입니다(드보라를 포함하여), 그리고 그들 중 6명은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는 중요하지 않는 사사들입니다. 이 글의 목적 때문에, 6명의 주요한 사사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들 사이에 몇 가지 비교를 하겠습니다.

              

            - 드보라가 사사로 선택받는 것은 가능성이 없었다. 


            6명의 주요 사사들(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그리고 삼손)은 모두 사사로의 선택을 전혀 가능성이 희박하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10]

            옷니엘: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삿3:9). 성경 역사는 우리에게 그 아우가 특권적인 지위를 얻는 것이 거의 없고, 사회에 두각을 나타낼 기회가 가장 적었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에훗: “그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삿3:15). 일반적인 상황에서, 에훗이 외손잡이였다는 것은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사건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그것을 유리하게 바꾸셨습니다).

            드보라: 사사기4:4에서 우리는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압니다. 그녀가 여자라는 것 때문에 사사로 선택받는 일은 거의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기드온: 주님께서 기드온에게 백성들에게 가서 구원해야만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기드온은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삿6:15). 기드온: 사사로 선택되는 것을 전혀 기대하지 못한 자입니다.


            입다: 비록 사사기11:1에 “큰 용사”로 기술되었지만, 그는 또한 “창녀의 아들(다른 여인의 자식)”이었습니다(11:2). 그것 때문에 그는 가망성 없는 후보였습니다. 심지어 그의 형제들조차 그를 거절했습니다.

            삼손: 사사기13:7에서 우리는 삼손이 나실인이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나이의 다른 젊은이들과는 달라야만 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민6:1-21). 삼손은 사회적 ‘괴짜(odd-ball)’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머리를 자르거나 시체를 만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모든 술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주요한 사사들은 모두 사사로 선택되는 것이 거의 가망성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드보라에게도 역시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약한 것, 밑바닥에 있는 것, 멸시받는 것들을 선택하여 강한 자와 자랑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고전1:26이하를 보십시오). 


            - 드보라가 사사가 된 것은 주님에 의해 일으키심이 아니었습니다. 


            드보라가 사사가 된 것과 관련하여 두 번째 요점은 우리는 그녀가 주님에 의해 사사로 세움을 받았다는 것을 성경에서 읽지 못합니다. [11] 그것은 다른 (주요) 사사들과 다른 경우였습니다.

               

            옷니엘: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께 부르짖으매 야웨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그는 곧 갈렙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3:9)

            에훗: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께 부르짖으매 야웨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3:15).

            기드온: “야웨께서 그를 돌아보아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6:14)

            입다: “이에 야웨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11:29)

            삼손: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야웨의 신이 비로소 그에게 감동하시니라”(13:25) “삼손이 야웨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14:6). 이미 삼손의 출생 전에 주님의 사자는 그의 부모에게 그들의 아들이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삼손은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드보라에게 부여된 어떠한 자격도 읽지 못합니다. 그녀는 달랐습니다! 우리가 드보라에 관해 읽는 것은 사사기5:7입니다. “이스라엘의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 드보라와 다른 다섯명의 주요 사사들 사이에 다른 강조점에 주목하십시오. 분명히, 주 하나님은 드보라가 사사로 일어나는 일 배후에 계셨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드보라는 그토록 많은 말 속에서 하나님께서 사사의 직분을 그녀에게 주셨다는 말이 진술되지 않는 유일한 주요 사사입니다. 우리는 ‘왜’라고 의아해 합니다.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 드보라는 군대의 기능을 가진 사사가 아니었다.


            사사로서 드보라의 직분과 관련하여 세 번째 요점은 사사기의 다른 모든 사도들과 달리 그녀는 군대의 기능을 갖지 않았다. [12] 다른 주요한 5명의 사사들 중에서, 우리는 그들의 군대 업적을 성경에서 읽는다.

              

            옷니엘: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되어 나가서 싸울 때에 야웨께서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을 그 손에 붙이시매 옷니엘의 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이기니라.”(3:10)

            에훗 : “...그가 이르러서는 에브라함 산지에서 나팔을 불매 이스라엘 자손이 산지에서 그를 따라 내려오니 에훗이 앞서 가며”(3:27)

            기드온: “기드온과 그들을 좇은 일백명이 이경 초에 진 가에 이른즉 번병의 체번할 때라.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7:19)

            입다: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야웨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11:32)

            삼손: 블레셋 사람을 크게 도륙하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 틈에 거하니라.....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취하고 그것으로 일천명을 죽이고...(15:8,15)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16:30).


            그러나 드보라와 관련하여 유사한 진술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그녀와 관련하여 사사기6:4에서 “드보라가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야웨께서 이같이 명하지 아니하셨느냐 이르시기를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일만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드보라는 군대의 지도자가 아니었고 다른 사람, 남자에게 군대의 책임을 후원했습니다(second). 우리는 의아해 합니다. 왜? 


            - 종려나무 아래 앉았다.


            사사기4:5에서 우리는 “그녀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 거하였다”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왜 드보라가 종려나무 아래에 앉았습니까? 이것을 분명히 알기 위해서는 신명기16:18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officer)를 둘 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주님의 명령이 있습니다. 일단 그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면, 그들은 꼭 재판관을 임명해야만 했습니다. 이 재판관들은 “네 모든 문”에서 직분을 다해야만 했습니다. 이 문들은 각 마을의 문들을 말합니다. 재판관들은 국가적인 권위나 모든 지파들을 총괄하는 권세를 갖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신명기16장에 따르면, 하나님의 규례는 그 재판관이 각 지역에서 권세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재판관은 한 특별한 마을(또는 지파)에 자리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의 사람들은 시비가 생긴 사건에 대해서 재판을 받아야만 한 곳은 바로 그 마을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어느 누구도 재판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마을에 있는 재판관으로부터 “공평한 재판”을 기대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드보라는 자기 성문에 앉아있지 않고 어느 들판에 앉아 있었습니다. 즉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라마와 베델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성에 앉아 있지 않았고, 심지어 한 성에 앉아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확실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드보라는 아마도 잇사갈 지파 출신이었습니다(삿5:15). 어쨌든, 드보라는 잇사갈 사람들을 알았고, 그들은 그녀를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에브라임 산지에.... 종려나무 아래에” 한 자리를 찾았습니다(4:5). 그래서 그녀는 심지어 집 가까이 있지 않았습니다. 드보라는 자신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열린 자리에서 재판을 했습니다. 그녀는 자기 마을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모든 잡다한 사람들에게 재판을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사사기4:5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와 재판을 받더라.” 드보라의 지위는 단지 그녀 자신의 지역 사람들에게 제한된 것이 아니라 그녀의 지위는 국가적이었습니다. 다시, 우리는 의아해 합니다. 왜? 신명기16장의 명령이 주어져 있는데, 왜 그녀는 그렇게 직분을 수행했습니까?   


            2.2 드보라와 바락의 관계


            이 모든 것은 드보라가 바락을 앞지르지 않으려 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반대로, 그녀는 매우 의도적으로 자기 자신을 남자의 그림자 안에 두려고 시도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그녀가 대적을 공격하기 위하여 자기 배후에 군대를 모집할 수 있었을지라도,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렀습니다”(4:6). 그리고 그에게 대적과 싸우는 일에 있어서 주도권을 쥘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녀가 바락이 출정할 때 동행한 것은 그녀가 영예를 원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바락이 겁을 집어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는 가지 않겠노라”(4:8). 바락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드보라는 바락의 두려움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따라갔습니다.

            사사기5장은 노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그 노래를 “드보라의 노래”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단지 드보라의 노래만은 아닙니다. 5장 1절에서 우리는 “드보라와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이 노래하여 가로되...”라고 읽습니다. 


            2.3 드보라와 야엘의 관계


            원수의 패배가게 되었을 때, 그 원수를 패배시킨 사람은 드보라가 아니라 또 다른 여자 야엘이었습니다(4:17-22). 야엘에 관하여 이렇게 노래합니다: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은 다른 여인보다 복을 받을 것이니 장막에 거한 여인보다 더욱 복을 받을 것이로다”(5:24). 드보라를 여권 주장자 모델로 나타내려는 시도에 맞서, 그녀가 그 원수를 패배시킴으로 오게 되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주목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영광이 드보라가 아니라 또 다른 사람에게 갔다고 말씀하십니다.


            결론.


            여기까지 요약해 볼 때, 사사기4장과 5장을 근거로 하여 드보라를 일종의 여권 주장자(feminist)로 관찰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말씀에서 드보라를 “해방된 여성” 즉 자기 자신을 중심 무대에 두는 여권 주장자, 자신의 지도권을 실행하기 위하여 투쟁하는 여성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읽는 것은 자기 자신을 중심 무대에 두지 않으면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여성입니다. 드보라는 분명히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끌지 않았습니다.


            2.4 드보라가 살았던 상황


            때때로 사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의 목적에서 악을 행하였더라”(삿2:11)는 구절을 읽습니다. 이 구절은 각각의 주요 사사들과 관련하여 언급됩니다.


            옷니엘: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자기들의 하나님 야웨를 잊어버리고 바알들과 아세라들을 섬긴지라(3:7).

            에훗: 이스라엘 자손이 또 야웨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3:12)

            드보라: 에훗의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또 야웨의 목전에 악을 행하매(4:1)

            기드온: 이스라엘 자손이 또 야웨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6:1)

            입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야웨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의 신들을 섬기고 야웨를 버려 그를 섬기지 아니하므로..(10:6)

            삼손: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야웨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야웨께서 그들을 사십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니라.(13:1)



            “이스라엘 자손이 야웨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였더라”는 이 구절은 반복입니다. 이 반복은 사사기21:25에서 동일한 사상의 재구성에서 그 절정에 달합니다. 거기에 잘 알려진 구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이것은 드보라의 시대에도 여전한 특징이었습니다. 각 사람은 가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때는 근본적인 개악의 시대였고, 부패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를 특징짓는 타락의 정도를 가장 잘 드러내 주는 것은 사사기17-21장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미가의 우상과 레위인의 첩이 잔인무도하게 강탈당한 사건을 읽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행위와 경건의 표준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세우신 규범으로부터 아주 멀리 떠난 시대였습니다. 한 마디로, 비정상적인 시대였습니다. 


            드보라의 시대에도 분명합니다. 개악과 부패는 지도자들이 없었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지적되고 있습니다. 드보라는 바락이 와서 지도하라고 불러야만 했습니다(4:6). 일단 그가 내몰려 오기는 했지만, 너무나 겁이 많아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4:8) [13] 바락의 중견(中堅: backbone)이 어디 있습니까? 바락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힘과 지혜를 위해 주님께 기댈 수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적어도 그것은 그의 행동에서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기골이 없는 남자는 단지 바락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사사기5:6과 7에서 “아낫의 아들 삼갈의 날에 또는 야엘의 날에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도다. 이스라엘에 관원이 그치고 그쳤더니 나 드보라가 일어났고 내가 일어나서 이스라엘의 어미가 되었도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잠시 우리가 우리 마을의 주요 도로를 자유롭게 걷거나 차를 운전할 수 없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직장에 가기 위하여 밤에 살금살금 기어가야만 하고, 잡혀 죽지 않기 위하여 조심스럽게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가야만 한다면, 어떻지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 마을의 도로가 안전하지 않다고 우리 마을의 권세자들에게 아주 당장에 불평할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하게 사사기4장의 시대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도로는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지도력이 어떠했다는 말입니까? 공포의 상황은 백성들의 압제자에 대하여 사람들을 지도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없었다는 것을 증거해 줍니다. 이 상황에서 주요 사사들 중 어느 누구도 사사가 될 만한 인물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그 시대의 문제였습니다.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왜 지도자들이 없었습니까? 이 질문에 답을 찾을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어떤 양식에 따라 이스라엘을 다루시기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신명기28장에서 주님은 순종에 대한 그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야웨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1절)... 야웨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야웨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라.(13절)” 그러한 안전은 지도력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께서 그 백성들에게 순종이 있을 때 약속하신 것입니다. 거꾸로, 순종이 없을 때,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야웨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15절)...(소경이 어두운 데서 더듬는 것과 같이 네가 백주에도 더듬고 네 길이 형통치 못하여 항상 압제와 노략을 당할 뿐이니 너를 구원할 자가 없을 것이며(29절).” 여기에 사사기5:6,7의 공포가 있고, 여기에 지도자들이 되어야만 하는 사람들이 기골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있습니다.


            왜 드보라 시대에 도로가 안전하지 못했습니까? 왜 어느 누구도 감히 지도력을 갖지 못했습니까? 그것은 영적인 부패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신명기16:18에서 주님은 모든 마을에 사사들(재판관)을 임명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마을의 재판관들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마을의 남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되기를 원하셨던 지도자로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15] 그래서 그들은 그 대신에 드보라에게 갔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영적인 부패는 백성들을 재판관(사사)으로서 전혀 기대하지 못한 사람에게 몰고가는 마비상태(paralysis)를 낳게 됩니다.   


            랍비돗의 아내 드보라는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이스라엘에 선지자로 일어났습니다. 영적 부패의 시대에, 주 하나님은 그의 선택한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을 사사로 보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주님은 신명기18:15의 그의 말씀을 따라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네 하나님 야웨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 사람은 특별히 아우였고, 왼손잡이였고, 여자였고, 매춘부의 아들이었고, 모든 지파들 중의 가장 작은 자 등이었습니다. 특별히 사사기4장에서 하나님은 한 여자를 부르십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세상에서 약한 것, 천한 것, 멸시받는 것들을 택하여 능력 있고 자랑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고전1:26이하를 보십시오).

              

            이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에 정하신 것과 어떤 관련이 있습니까? 드보라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되어야 할 일들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지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무엇을 알고 있었습니까?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자를 중심 무대에 두고자 한 드보라의 표현과 행동은 불확실한 특성을 나타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에 겸손한 순종을 보여줍니까?

             


            3. 하나님께서 드보라 시대를 통하여 계시하신 규범.


            3.1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


            드보라와 이스라엘이 배운 성경은 주님은 남자와 여자에게 자기 앞에서 동등한 지위를 주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그림1을 보십시오). 창세기1:26,27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는 모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땅과 바다와 짐승 등을 다스리라는 위임령을 받았습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과업을 받았습니다(28절). 이 점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차이점은 없습니다. 남성과 여성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지위를 가지며 둘 다 동일한 위임령(mandate)를 받습니다.


            죄 안으로의 타락은 남자와 여자 두 사람에게 똑같이 미쳤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 둘 다 타락의 결과에 고통을 받았습니다(창3:16). 주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그의 언약을 맺으실 때, 그는 남자와 여자 둘 다 그들의 희생제물을 가지고 나아와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라, 그들에게 말하라... 만약 어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너희 중 어떤 사람이 주님께 제물을 가지고 올 때...(번역자 사역)”(레위기1-4참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것은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적용되었습니다. 레위기15장도 마찬가지로 남자와 여자가 똑같이 불결하고, 그래서 둘 다 정결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십니다. 남자와 여자 둘 다 구속을 필요로 합니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죄를 받습니다. 이것이 모든 이스라엘에게 주신 성막 봉사의 분명한 명령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지위를 가집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드보라와 그와 함께 한 모든 이스라엘은 남자와 여자는 똑같이 동등하게 사죄와 그 결과 생명과 생명력 그 자체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3.2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의 대인 관계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 두신 관계


            - 낙원


            하나님은 남자에게와 여자에게 서로와 관련하여 다른 지위를 주셨습니다. 비록 달란트에 있어서 동등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동등하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계급 조직을 정하셨습니다(그림2를 보십시오). 창2:7,8에서 우리는 “야웨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야웨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그 사람은 - 그는 아담입니다 - 동산에서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라”는 위임령을 가진 지위를 받습니다. 다음에 18절에서 우리는 “야웨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의 갈비뼈로부터 여자를 만드셨습니다(21, 22절). 


            여기서 여자는 돕는 자로서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돕는 자’라는 말이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된 (서양의?) 귀를 가지고서, 우리는 ‘돕는 자’라는 말을 ‘보조자’라는 즉 해야 할 일을 듣는 사람의 개념으로 듣기 쉽습니다. 성경은 돕는 자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동일한 말이 자기 백성들을 도우시는 자로서 하나님과 관련하여 계속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음의 시편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33:20 우리의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그는 우리의 도움이시오 우리의 방패시로다(역자 사역).

            시70:5 그러나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시115:9-11 오 이스라엘이여... 오 아론의 집이여.... 야웨를 경외하고, 야웨를 신뢰하는 너희여 그는 그들의 도움이시오 그들의 방패시로다.


            위 구절들에서 그 말에 ‘보다 적은(less)’의 개념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 구절들은 우리가 남자와 여자를 ‘보다 나은’ 혹은 ‘보다 덜한’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요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돕는 자라는 용어는 남자에게 여자와 관련하여 존재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돕는 자가 되기 위하여 남자에게 주어져 있고, 또 우리는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읽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자가 여자의 돕는 자가 되기 위하여 여자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남자는 지도자의 지위를 받습니다. 남자는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는 과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자기 동산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여자는 그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남자를 돕는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둘은 문화 명령을 성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일을 함에 있어서 한 사람은 돕는 사람이요 다른 사람은 돕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지도자요 다른 한 사람은 지도자가 아닙니다.


            다시 창세기2:22에서 주 하나님은 여자를 남자에게 데려오셨지 남자를 여자에게 데려가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질서, 계급 조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지도자요 한 사람은 돕는 자입니다. 창세기2:23에서 우리는 아담이 그녀를 환영했다는 것을 읽습니다. 그녀가 아담에게 인사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이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한 사람은 지도자요 다른 한 사람은 돕는 자입니다. 이름을 짓는 것은(우리가 창2:19로부터 배운 대로) 지도력의 역할입니다. 아담은 여자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여자가 아담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반면에 주 하나님은 창세기2장에서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에 권위 구조/ 복종 구조를 두었습니다.


            - 타락


            창세기3장에서 죄로의 타락은 하나님의 창조를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2장에 함축된 이 권위/복종 구조는 보존되고 있습니다. 유혹을 받고 결과적으로 타락한 자는 하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먼저 아담을 불러 책망했습니다. 창3:9을 보십시오. 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로 타락하였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야웨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하십니다. 우선적으로 아담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창3:10,11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 말을 듣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남자가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신약에서 반복되는 주제입니다. 로마서5:12에서 바울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적습니다. 이 ‘한 사람’은 아담을 가리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죄가 들어왔습니다. 비슷하게 고전15:22에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즉 죽음은 아담을 통하여 왔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죽음은 하와를 통하여 왔다는 것으로 읽기를 기대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와가 먼저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책임을 지우셨다는 것을 읽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권세(또는 책임)의 관점을 보게 됩니다.


            죄 안으로 타락 후 남자와 여자(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는 창3:16이하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여자에게,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본문에서 ‘할 것이니라(shall)'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할 것이니라(shall)'라는 말은 남자가 여자를 다스리라는 명령을 반영합니까? 아니면 ‘할 것이니라(shall)'라는 그 말이 이 파탄이 난 타락한 세상에서 여자는 그녀의 남편이 끊임없이 그녀를 다스리고자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하나의 예언을 나타냅니까? 만약 후자라면, 당연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은 그리스도인 남편은 자기의 아내를 “다스리려” 하지 말아야 하고, 그리스도인 여자는 그의 남편의 통치를 얌전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창세기 2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관계에서 권위/ 복종 구조와는 다른 관계 구조를 갖게 됩니까? 


            결국 드러난 것처럼, [16] 창세기3:16의 공식문구는 우리가 창세기4:7에서 읽은 것과 평행을 이룹니다. 거기서 주님은 가인에게, 그가 희생제사를 드린 후에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가 그를 지배하기를 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타락한 세상에서 실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말씀에 덧붙여 가인이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가인은 죄와 싸워야만 합니다. 그것이 또한 정확하게 3:16에서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죄로의 타락의 결과로써 여자는 남자를 다스리고자 열망합니다(“너는 남편을 사모할 것이니라”). 그러나 남자는 그녀가 성공하도록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18]   


            그렇다면, 창세기3:16에서 우리는 창세기2장에 나타난 것과 동일한 사상 즉 권위/ 복종 구조를 갖게 됩니다. 하지만 2장에서는 스스로 조화를 이룬 구조였던 반면에 지금 이 권위/ 복종 구조는 싸움이 있을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위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될 것입니다. 창세기3:16은 “성 대결(전쟁)의 시작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19] 그래서 우리는 창세기2장에 내포된 권위/ 복종 구조는 타락 후에도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여자는 자기의 자리에 이의를 제기하고, 남자는 여자가 기꺼이 자기 자리를 지키도록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죄로의 타락에 대한 형벌로써 남자와 여자에게 고통이 있습니다. [20]

              

            - 타락 후


            창세기2장의 권위/ 복종 구조가 타락 이후에도 유지되는 것은 우리가 창세기의 더 많은 부분과 오경의 다른 책들을 읽음으로써 증명이 됩니다.


            창세기5장과 10장의 족보에는 단지 남자들의 이름만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 장들에서 우리는 누가 살았고, 얼마나 오래 살았으며, 누가 어떤 아들을 낳았다는 것을 읽습니다. 왜 이 장의 이름들은 모두 남자들입니까? 그것은 지도적인 지위(headship)가 남자에게 놓여있기 때문에 그래서 여자는 그녀의 남편에 의해, 남편과 함께 알려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남자는 지도자이고, 여자는 그의 돕는 자라는 원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부름을 받습니다. 사라가 아닙니다. 창세기12장1절에서 우리는 “야웨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왜 아브람이 부름을 받고 왜 사라가 부름을 받지 않습니까? 사라는 따라갔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아브람과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남자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왜입니까? 그것은 창세기2장의 동일한 권위/ 복종 구조 때문입니다.


            오직 남자들만 언약의 표와 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여자들은 받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17:10에서 우리는,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왜 여성들은 할례를 받지 않습니까? 여성이 할례받는 것은 가능합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쉽게 적용될 수 있는, 언약의 다른 표와 인을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다시 여기서 하나님은 처음에 설립하셨고, 타락에도 불구하고 유지하셨던 지도자/ 돕는 자 구조를 표현하십니다.

              

            주님이 시내산에 오실 것을 준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그들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만 하는지에 관하여 오직 남자들만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산에서 하나님은 그의 언약을 그의 백성들과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거룩케 함과 관련하여 받은 명령 중의 하나는 이것이었습니다. “...여인을 가까이 말라(너의 아내를 가까이 하지 말라)”(출19:15). 다시 말해서, 그 구절은 남편들, 남자들에게 들려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자기 언약을 맺으시고 그는 남자에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여자가 언약에서 자리를 갖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장 확실하게 언약의 자리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다시 한 사람은 머리이고 다른 사람은 돕는 자라는 권위/ 복종 구조가 증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남자만을 제사장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출28:1에서 주님은 모세에게 이 명령을 주십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을 그와 함께 네게로 나아오게 하여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왜 아론의 아이들(Children)이나 아론의 딸들은 아닙니까? 그것은 창세기2장 때문입니다. 즉 남자의 위치는 머리가 되어야 하고, 여자의 위치는 돕는 자이어야 합니다.  


            오직 남자들만 주님 앞에 보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야웨께 보일찌니라”(출23:17, 신16:16). 여자들은 환영받지 못했습니까? 그들은 분명히 환영받았습니다. 한나는 주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일년에 한 번 실로에 엘가나를 따라 가지 않았습니까? 요점은 남자가 머리이기 때문에 남성에게 명령이 주어진 것입니다.

             

            장로들은 남자들이어야만 했습니다. 모세의 장인은, 주님께 영감을 받아, 모세에게 이런 조언을 합니다: “그대는 또 온 백성 가운데서 재덕이 겸전한 자(남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자를 빼서 백성 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아.”....“이스라엘 무리 중에서 재덕이 겸전한 자(남자)를 빼서 그들로 백성의 두목 곧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부장과 십부장을 삼으매.” 왜 여자들은 언급되지 않습니까? 남자가 머리의 지위 곧 지도자로 하나님에 의해 임명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인구조사에서 오직 남자들만 계수되었습니다. 주님은 모세에게 민수기1:1-4에서 백성들을 계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제 이년 이월 일일에 야웨께서 시내 광야 회막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찌니 이스라엘 중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군대대로 계수하라.“ 하나님은 창세기2장에 계시된 원리를 따라서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권위 아래 있습니다. 민5:19이하에서 우리는 불성실한 아내에 관한 하나님의 율법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은 그녀에게 맹세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말하라, 만약 남자가 너와 함께 눕지 않았다면, 만약 네가 네 남편의 권위 아래 있는 동안에 타락하여 더럽히지 않았다면, 저주를 가져오는 이 쓴 물에서 자유하리라(번역자 사역)”(한글개역성경은 이렇다: 여인에게 맹세시켜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네 남편을 두고 실행하여 사람과 동침하여 더럽힌 일이 없으면 저주가 되게 하는 이 쓴 물의 해독을 면하리라). “네 남편의 권위”라는 구절에 주목하십시오. “그 아내는 그녀의 남편 ‘아래에(under)’ [21] 있습니다. 그것은 아내의 종속적 위치의 분명한 진술입니다.”[22] 이 본문은 단순히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적 측면이 아니라 창세기2장의 규례를 계시합니다.

             

            하나님의 남성 대명사의 사용: 레위기1장은 우리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요한 죄를 지었을 경우 가져와야만 하는 제물에 관해 말해 줍니다. 3절에서 우리는 “만약 그의 제물이 소의 번제물이면, 그로 하여금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리게 하라. 그는 야웨 앞에서 회막 문에서 그의 자신의 자유로운 뜻으로 그것을 드릴 것이다(번역자 사역: 한글개역 - 그 예물이 소의 번제물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야웨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왜 남성 대명사입니까?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할 경우 오직 남자들만 희생제물을 가져와야만 하기 때문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포괄적 언어 번역자들은 이것을 다음과 같은 경향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만약 어떤 사람(anyone)이 소의 번제를 드린다면, 그 사람으로(that person)하여금 ..... 드리게 하라." 그러나 주님은 남성 대명사를 사용하십니다. 그것은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기2장에서 두신 그 구조의 반영입니다. 즉 남자는 머리이고 여자는 돕는 자입니다. 남성 대명사는 여성을 제외하지 않고 여자가 남자의 일부분이고, 따라서 남성 대명사는 모든 사람을 대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정하신 것, 즉 남자는 머리요 여자는 그의 돕는 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경 전체를 통하여 일관되게 적용하시는 규범이 분명합니다. 비록 남자와 여자 모두 하나님 앞에 동등하지만, 삶 속에서 그들의 역할(기능)은 다릅니다. 남자는 ‘지도력’에 의해 특징짓게 되고, 여자는 ‘돕는 것’에 의해 특징짓게 됩니다. 이것은 드보라가 알 수 있었던 내용입니다. 


            4. 드보라 시대 결론


            드보라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려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신명기16:18과 17:8이하에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안에 기꺼이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한 남자들이 없었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의무에서 손을 떼 버렸습니다.


            이 특별한 지도력 공백 상태에서 주님께서 한 지도자를 일으키신 것은 무가치한 자들에게 지도자를 주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 지도자가 여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마땅히 지도자들이 되었어야 할 사람들을 돕는 자들로 바꾸심으로써 당황하게 하시고 부끄럽게 하셨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드보라의 태도는 남자와 관련하여 여자의 지위와 기능에 대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를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충실했습니다. 드보라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지위 곧 남자를 돕는 지위를 잘 알고 있었던 여자였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지도자로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녀는 바락을 독려하기 위하여 그곳에 보내었고, 바락이 해야만 하는 것을 하도록 했습니다. 드보라는 그녀의 지위를 남자들이 당연히 되어야 하는 지도자가 되도록 돕는 데 사용했습니다. 사사기4장에서 우리는 드보라가 단지 그녀의 남편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남자들과 관련하여 어떻게 돕는 자였는지를 봅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그녀의 지위에서조차 그녀는 남자를 머리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은 창세기2장의 하나님의 명령과 일치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전술한 것과 같이, 드보라는 랍비돗의 아내로 언급되어 있습니다(4장). 왜냐하면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지위를 알았고,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드보라는 믿음의 여자였습니다.

             


            5. 하나님은 드보라 시대 이후에도 이 규범을 유지하셨다.


            5.1 남자와 여자는 계속 하나님 앞에 동등하다.


            사사기4장과 5장 이후에 하나님의 계시에 어떤 변화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창세기1장과 2장의 그 원리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 전체를 통하여 보존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합니다. 남자와 여자 모두 동등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복음을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선포하셨습니다[23] 갈라디아서3:28에서 우리는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베드로전서3:7에서도 남편은 그의 아내를 잘 돌보아야만 한다는 말씀을 읽습니다. 왜냐하면 남편과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유업으로 받을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남자와 여자는 동등합니다. 


            5.2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두신 대인 관계를 변경하지 않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그 대인 관계에서 창세기2장의 원리 또한 보존되고 있습니다.


            왜 세상의 구주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였는지 그 이유가 있습니다.[24]

            왜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제자들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들이었는지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의 문화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도 선택이 문화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논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이 태어나야만 했던 그 문화와 시대를 선택하신 그 사실을 무시하는 것입니다.”[25] 만약 하나님께서 여자를 제자로 삼기 원하셨다면, 그분은 여자를 제자로 부르셨을 것이며, 또한 그것이 문화적으로 수용되도록 하셨을 것입니다.


            사도행전1:16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제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서(남자와 여자를 포함하여 전체120명) 가룟 유다로 말미암아 공석으로 남아 있는 제자의 수를 채우는 문제를 말하는 것을 읽습니다. 베드로는 “남자 형제들”에게 연설합니다(원문 성경은 『안드레스 아델포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 역자 주). 비록 베드로의 말은 의심할 여지없이 성(性)과 상관없이 120명의 모든 제자들을 향하고 있다 할지라도, 베드로는 그 모임에서 지도자와 관련된 연설을 함으로써 창세기2장의 원리를 반영합니다.

            고린도전서11:3에서 사도는,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 적고 있습니다. 창세기2장의 권위/ 복종 구조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14:34에서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저희의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고 적고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율법은 모세 오경 즉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말합니다. 처음의 원리가 성경 전체에 유지되고 있습니다. 


            비슷하게, 우리는 에베소서5:22-24에서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는 말씀을 읽습니다. 그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아내가 복종하는 일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일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요점은 창세기2장의 원리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자들에게 디모데전서2:12에서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또 베드로전서3:1-6에서 비슷한 권면의 말씀을 발견합니다: “아내 된 자들이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 모든 것은 디도서2:1-5에서 마무리됩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가 해야만 하는 것을 명령했습니다. 디도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해야”만 했습니다. 디도는 늙은 남자들(2절)과 늙은 여자들(3절)에게 말해야만 했습니다. 늙은 여자들에게 그는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고 말해야만 했습니다(3-5절). 여기에서 창세기2장과 드보라의 태도가 반향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늙은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6. 우리 시대의 결론


            우리는 우리의 딸들에게 드보라가 사사였다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 마음에 일어나는 그런 지위를 열망하도록 독려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의 아들들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드보라를 사용하게 한 바락, 랍비돗과 같은 남자들이 되라고 장려해야 합니까? 그 대답은 분명히 “아니오”입니다. 그 대신에 여자들은 자신과 그 딸들에게, 하나님께서 남자들에게 권위와 책임을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돕는 자가 되도록 독려해야 합니다. 동일하게, 여자들은 그들의 남자들과 아들들이 결혼과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지도자들이 되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이 말은 여자들이나 그들의 딸들이 결코 지도력의 지위를 가질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권적인 하나님은 사사기4장에서 하신 대로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권적인 하나님의 행하심으로 - 역자 주) 여러분 자신이 그러한 지위를 가지게 되는 것과 여러분이 그 지위를 열망하거나 여러분의 시선을 거기 두는 것과는 다릅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신앙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관련하여 여자에게 주신 지위에대한 하나님의 계시는 분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계시가 죄된 우리에게 잘 어울리는가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의 겸손한 수용을 촉구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각각 받은 그 지위에 불행이 있다는 것이 예언되었습니다(창3:16). 그러나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지위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드보라는 여자들의 모범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녀는 모범입니다. 그러나 여권 주창자들에 의해 변호되는 모범이 아닙니다. 드보라는 여성들의 모범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신앙의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드보라는 자신의 환경에서 남자들이 마땅히 되어야만 지도자가 되도록 도우려 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은 남자들을 난처하게 합니까? 그렇습니다. 그 시대의 남자들이 마땅히 되어야만 하는 지도자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드보라를 주심으로써 남자들을 부끄럽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남자들과 여자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세상에서 남자와 여자에게 주신 저마다의 지위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도록 서로를 격려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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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otnotes. 


            Text of an address prepared for the Women's League Day, held on October 29, 1997, in the Free Reformed Church of Kelmscott. I express my appreciation to Johanna vanderPlas for taking copious notes and so ably putting to paper what I said. (Return)

            Donna Strom, "Where are the Deborahs and Baraks?" in Evangelical Review of Theology (Vol 10/1), pg 19. (Return)

            Ibid, pg 23. (Return)

            Ibid, pg 25. (Return)

            A deSnoo in Vrouw, wie ben je? (Uitgave van de Bond van Gereformeerde Meisjesverenigingen in Nederland, 1988), pg 43. (Return)

            cf Miriam and Huldah (Return)

            Genesis 38 (Return)

            Gesenius' Hebrew Grammar, §131b makes this comment on this passage: "a certain (indefinite) woman (named) Deborah, who was also a prophetess (Return)

            cf Point 4 below: Conclusion for Deborah's day (Return)

            cf Lillian Klein, The Triumph of Irony in the Book of Judges (Decatur: The Almond Press, 1989), pg 41. See also A Janse, Eva's Dochteren (Kampen: Kok, 1923), pg 93. (Return)

            Cf Thomas R Schreiner, "The Valuable Ministries of Women in the Context of Male Leadership: a Survey of Old and New Testament Examples and Teaching", in Recovering Biblical Manhood & Womanhood: A Response to Evangelical Feminism, editors: John Piper and Wayne Grudem (Wheaton: Crossway Books, 1991), pg 216. (Return)

            Ibid, pg 216. (Return)

            Cf Holwerda, Richteren I (Kampen: vandenBerg, n.d.), pg 17: "Hij steunt niet simpel op de Here en heeft dus niet verstaan de les van cap. III, dat de Here ALLEEN het doet, en Hij daarom onnutte dienstknechten kiest. Daarom komt de eer dan ook toe aan een vrouw (iemand die tot de strijd niet geroepen en bekwaam is) als dienstmaagd des Heeren." (Return)

            See in this context also Isaiah 3:4 & 12. (Return)

            Holwerda, Exegese Oude Testament (Deuteronomium), (Kampen: vanderBerg, n.d.) pg 424"…achter berichten also Richt IV 4v en I Sam VII 6vv ligt dus een ontsellende tragiek: de ambtsdragers spelen algemeen met hun ambt, en alleen de genade van Jahwe die charismatici verwekt behoedt het volk voor totale instorting van het rechtsleven." (Return)

            For this paragraph I am indebted to Susan Foh, Women & the Word of God: A Response to Biblical Feminism (Phillipsburg: Presbyterian & Reformed Publishing Co, 1979), pg 68f. (Return)

            The Hebrew is identical except for the pronouns. (Return)

            If I may quote Foh's own words: "After the fall, the husband no longer rules easily; he must fight for his headship. The woman's desire is to control her husband (to usurp his divinely appointed headship), and he must master her, if he can. Sin has corrupted both the willing submission of the wife and the loving headship of the husband. And so, the rule of love founded in paradise is replaced by struggle, tyranny, domination, and manipulation" pg 69. (Return)

            Ibid. (Return)

            NOTE: Gen 3:16b is not a curse!!! The serpent is cursed (Gen 3:14) & the ground (vs 17), but not the woman (vs 16) nor the man (vs 17ff). (Return)

            (Sorry, Hebrew not available in HTML) (Return)

            Foh, pg 75. (Return)

            cf Foh, pg 91f (Return)

            cf Mt 1:25; Rev 12:5 (Return)

            cf Foh, pg 93. (Return)

              


              


            출처: 언약과 개혁/주의 아들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파키스탄 정부, 11개 기독교 TV 방송국 폐쇄 조치 [2016.11.23 10:07]



            최근 파키스탄 정부가 11개 기독교 방송국을 폐쇄했다고 영국 크리스천투데이가 22일(현지시간) 보도했다.


            UCA 뉴스에 따르면, 파키스탄 언론규제당국(PEMRA)은 지난달 모든 지역 방송국 관리들에게 “11개 불법 TV 채널의 방영을 즉각 중단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3년 페샤와르 올세인트교회에서 발생한 자살 폭탄 테러로 127명의
            기독교인들 희생자들이 발생하자, 전국 각지에서 기독교인들의 시위가 일어
            났다. ⓒ 월드와치모니터


            당국은 기독교 프로그램 방송을 금지하고, 크리스마스나 부활절 메시지 등 예외적 내용을 제외하고 종교와 관련된 프로그램도 규제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에는 주요 기독교 방송국들에 대한 엄중 단속에 나선 것이다.
            단속 결과, 인도 기독교 채널을 운영하던 6명이 단속원들에게 체포됐다.


            폐쇄된 방송국 가운데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오래된 방송국인 이삭 TV와 라호르시에서 운영 중이던 가톨릭 TV도 포함됐다.


            가톨릭 TV를 설립한 모리스 자랄 신부는 인터뷰에서 “기독교 TV 방송국의 폐쇄 조치가 심히 우려된다”면서 “이 지역의 교회 성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파키스탄에서 기독교인들은 비록 소수이지만, 그들의 신앙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파키스탄 내 기독교 방송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에게 매우 어려운 시기다. 우리는 다른 TV 채널에서 일반적으로 다루지 않는 우리 공동체 사람들에게 다가기 위해 노력한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파키스탄 정부가 기독교 방송국을 폐쇄한 가운데, 지하드를 선전한다는 이유로 고소당한 ‘평화 TV’는 여전히 방송을 계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hristiantoday강혜진 기자

            9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은혜로운 습관(II)

            -준비가 전제되는 역동적인 습관

             


            1. 두 가지 준비가 필요한 습관입니다


            1) 기질적 측면에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죄의 습관이 모든 악한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로 영혼을 준비시키는 것처럼, 은혜의 습관은 모든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영혼을 준비시켜서 그 주인이 사용하시기에 적당하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21)

             

            이러한 말에 미흡함을 느끼는 분들을 위하여 몇 마디 더 보충하겠습니다.

             


            (1) 내제된 준비가 언제나 표출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준비는 새롭게 된 모든 사람들 속에 배아적으로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실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속성이 가장 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이 속성보다 저 속성을, 때로는 오래 참으심을, 때로는 인자하심을, 때로는 공의로우심을 더욱 현저하게 드러내면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습관 속에 있는 신적인 성품은 배아적으로 모든 은혜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그 신적 성품과 연관된 의무에 기꺼이 동의하고, 하나님의 영이 은혜의 기회를 주실 때 모든 열매를 맺게 되는 원리를 그 안에 가지고 있지만, 때로는 어떠한 봉사를 위하여 더욱 긴박하게 요구되는 기질이 실제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별히 죄를 범해서 영혼이 더러워진 경우가 그럴 수 있습니다.

            또한 목적이 변한 새로운 피조물은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을 두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행동을 할 때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거나 그 영광을 목적으로 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기회가 올 때마다 이러한 습관으로의 목적을 실천에 옮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욥의 인내는 탁월합니다. 그러나 그는 인내뿐 아니라 다른 모든 덕성들에 있어서도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하나의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욥도 그러한 덕성들을 강력하게 드러냈을 것입니다.

             


            (2) 준비됨이 거듭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난 사람 속에 있는 습관들 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은, 그 마음 가운데 주께 붙어 있고자 하는 목적을 갖는 것입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행11:23) 이러한 분명하고도 지속적인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의식이 있다고 해서 언제나 모든 봉사할 기회에 그 목적의식이 실제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를 찾아보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 초기에는 강력한 저항이 그 안에 있습니다. 지옥의 군

            대가 그것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 안에 바울처럼 믿고 사역

             

             

            하며, 엘리야처럼 열정적이고, 욥처럼 인내할 수 있는 최상의 활동과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준비가 실제적으로 모든 갖춰져 있지만, 초기 단계에서는 그러한 상태에까지 아직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숙을 위하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에 어린아이 때가 있는 것처럼, 은혜 중에 자라가는 일도 그렇습니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 영혼이 어른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른의 이해력과 이성을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선한 것을 행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선한 것을 행하려고 원하는 바는 그와 함께 있습니다.

            이런 특징 속에서 회복된 영혼 속에 나타나는 첫 번째 은혜는 회개와 믿음입니다.

            거듭남이 이전의 그루터기를 뽑아내고 새로운 줄기를 심기 때문에, 이전의 죄의 그루터기와 관계되어 있던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게 되면서 반드시 회개하게 됩니다. 또한 죄인이 구세주께 가까워지기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되는 믿음은 그 죄인을 새로운 그루터기에 접붙이는 데도 필요하기 때문에 회복된 영혼 속에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 뒤에 사랑과 경외, 감사가 뒤따르고, 구원을 얻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묵상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2) 활동적 측면에서 준비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두 번째 조망은, 기질의 측면과 마찬가지로 활동의 면에서도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새생명은 무한하신 분께서 주입하신 생명이요, 하나님의 성품을 담고 있는 하나의 습관이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견지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계속해서 잠만 자고 있고 활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새생명은 살아 있는 영이기에 활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에는 습관이 주어지고, 그리고 나서는 행동이 뒤따릅니다.

             


            (1) 새로운 피조물의 활동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수치심을 느낄 때 얼굴이 붉어지는 자연적인 반응이 있듯이 새로운 습관이 새로운 행동을 산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은 그들의 본성에 일치하게 움직입니다. 가시나무가 가시를 내는 것처럼, 샘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것처럼, 은혜의 습관에서는 거룩한 행동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입2:10)

            선행이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그 뿌리를 둔 영혼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에게 봉사는 먹고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 노동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의롭고 거룩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로운 일을 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새롭게 된 사람들이 때때로 범하게 되는 오류들은, 그들 안에 있는 거듭남의 새로운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새로운 원리에 의해서 어느 정도 약화되긴 했지만 아직 남아 있는 부패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잔존하는 부패성은 결국 하나도 남김 없이 전적으로 뽑혀 버리고 말 것입니다.

             


            (2) 그것은 자발적인 활동입니다.

              생명과 습관에 따라서 자연적인 필연성 때문에 움직이는 경우도 있지만, 자발적인 선택에 의

            해서 움직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가 부득불 할 일”(고전

             

             

            9:16)이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가 변한 뒤에 따르는 자발적인 행위였습니다.

            새로운 본성에는 달콤한 필연성과 의지의 은혜로운 선택이 있는데, 이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룹니다. 강압적인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필연성인 것입니다. 은혜로 날개를 달게 된 인간의 영혼은, 공중의 새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자유롭게 날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그 보혈로 씻으시고, 우리를 하나님을 위하여 ‘왕들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계1:6). ‘왕들’이라는 말은, 새로운 피조물 안에 왕족이 지니고 있는 고결한 품성을 넣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이라는 말은, 이러한 왕족의 고결한 영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본성과 그 본성의 자유로운 선택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13:8) 이라고 말한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일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3) 그것은 열정적인 활동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안에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하여 영혼 안에 심어진 추진력과 영향력이 있습니다. 이 지상의 물질들 가운데서 불과 물 보다 더 활동적인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처럼 성령은 물과 같이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 줍니다. 그리고는 불과 같은 은혜로 우리를 깨어나게 합니다. 새로운 원리는 피조물의 모든 구석구석을 채우면서, 납덩이 같이 딱딱한 마음을 녹여서, 뜨거운 열정 속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만듭니다. 또한 새로운 피조물은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즉 영적인 피조물입니다. 영의 활동은 신체의 활동보다 훨씬 더 뛰어납니다. 한 순간에 영혼은 얼마나 놀랍도록 멀리까지 갈 수 있습니까? 하늘에서 땅 끝까지 한순간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선을 향한 열정에 있어서 은혜의 습관은 ‘사랑의 영’이라고 불립니다. 하나님을 향한 새로운 피조물의 움직임은 한 순간에 지상에서 하늘에 날아올라 하나님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2. 은혜로운 습관의 활동은 역동적입니다


            1) 그 활동은 제한이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열망은 그 본성만큼이나 광범위하기 때문에, 이전에 지니고 있던 기질의 협소한 활동 안에 매여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영혼의 자연스러운 활동은, 비 온 뒤에 불어난 강물처럼, 모든 자연적인 범위를 넘어서 넘쳐흐릅니다.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면서 여러 번 사랑을 느끼게 되고, 또 다시 사랑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끝이 없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다음과 같은 일들에 제한이 없습니다.

             


            (1) 하나님을 향한 애정에 있어서 제한이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제한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새로운 피조물의 사랑도 제한이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분을 향한 애정으로 그분을 가득 채우

            고자 합니다. 주의 계명을 지킬 수 없는 것이 그를 슬프게하고, 하나님께서 바람의 날개로 그

             

             

            에게 날아오시는 것이 그를 기쁘게 합니다.

             


            (2) 죄에 대한 혐오감에 있어서 제한이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사망의 육신이 자기 영혼의 열망을 성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주님과의 자유로운 교제를 방해하는 것들에 대항해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강력하게 일어납니다. 이 때문에 하늘 문을 두드리면서, 영적 전투에 필요한 새 힘과 죄에 대항할 수 있는 능력을 간구합니다.

             


            2) 그 활동은 강력합니다

              이 습관에는 제한 없는 사랑이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영혼을 행동하게 만드는 능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속사람 안에 있는 능력’(엡3:16)이라고 부리기도 하고 ‘능력의 마음’(딤후1:7)이라고도 불립니다. 거듭나게 될 때 생명과 함께 능력이 생깁니다. 새 마음과 함께, 하나님의 명령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집니다. 이 능력이 어떠한 도덕적인 습관들보다 더 높은 원인, 곧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심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은 활동하기 위한 일조의 전능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는 힘입니다.

             


            3) 그 활동은 용이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활동이 자연스럽고 자발적이며, 새로운 피조물 안에 어떠한 힘과 능력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그 활동은 대단히 쉬울 것입니다. 습관은 그 능력을 강화시키고, 쉽게 행동하도록 해줍니다. 영혼 속에 새로운 습관이 가득 차게 되면, 하나님의 도를 따라서 행하는 것이 이전에 죄와 어리석음을 행했을 때처럼 아주 쉬워집니다.

             


            4) 그 활동은 유쾌합니다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이 유쾌한 것처럼, 영혼 속의 신적인 생명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유쾌합니다. ‘공의를 행하는 것이 의인에게는 즐거움’(잠21:15)이 됩니다. 우리가 영적 원수들을 우리의 발 아래 깔아뭉개고, 더 이상 그들과 관계없는 자들이 되는 것은 무척 즐거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의 품 안에 안겨 있는 것 또한 지순한 즐거움입니다.

            습관적인 은혜로 채워진 마음의 즐거움은, 어떠한 감각적인 즐거움보다 우리를 더 기쁘게 합니다. 그 즐거움이 바로 은혜의 영이요 기쁨의 영이신 성령께서 영혼 속에 심으신 습관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예배하는 행위 속에서 달콤함을 발견합니다. 자기 몸에 있는 그리스도의 흔적이야말로 그의 즐거움이며, 또한 승리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한 곤란으로 오히려 즐거워합니다. 사도는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12:10)라고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영혼의 활동이 그의 생명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몸에 이상이 생겨 움직일 수 없거나, 질병에 매여 있고, 부패함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는 이전에 누렸던 것을 기억하면서 기뻐합니다.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에 탄식

            하면서도, 또한 다른 것을 소망하며 그것이 회복될 것을 믿으면서 기뻐합니다.

             

             


            5) 그 활동은 영구적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안에 있는 새 마음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규례를 따라서 행하게 하되, 단순한 충동이 아니라 단일하고 조화로운 움직임으로 그렇게 합니다.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기 하시니”(겔36:27). 그 율례들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면서 그것들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내주하는 기름부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입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부여되었고, 마음속에서 성령님의 보증으로 지지되고 확증되었습니다. 그 마음 속에 이 습관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1:21,22)

            이것은 아담 안에 있을 때보다 더욱 확실하게 고정되어 있는 생명이며 습관입니다. 아담의 생명은 자기의 영혼의 올곧음에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이 새생명의 습관은 성령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의존합니다. 그것은 모든 갈증을 그치게 하는 생명수이며, 영생에 이르기까지 결코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그것은 강물이 바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영광 가운데서 흘러넘치게 될 때까지 계속해서 흘러나와 활동합니다.


            6) 그 활동은 질서 있습니다

              자연적인 운동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그것처럼 이 습관은 영혼에 ‘언제나’능력을 줍니다. ‘거의 언제나’가 아닙니다. 이런저런 봉사 활동에 무질서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자연적인 일들이 그 정해진 때와 장소가 있듯이 새로운 피조물도 ‘시절을 좇아’(시1:3)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적당한 때를 따라서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시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적당한 때에 열매를 맺으며 그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어떠한 때에는 사랑의 열매를, 어떠한 때에는 겸손의 열매를, 또 다른 때에는 인내의 열매를 맺습니다. 이 습관이 언제나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새 열매와 옛 열매를 때를 따라서 따게 되는 것입니다.

             


            3. 새 습관은 옛 습관과 싸워 이깁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러한 모든 사실에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1)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는 새 습관이 우세합니다

             자연의 상태에서는 한 인간 전체 속에 스며드는 부패한 습관이 우세했던 반면, 은혜의 습관이 우월하게 된 지금은 그 은혜가 영혼 전체에 스며들어서 생명은 사망을 이기고, 은혜는 자연(본성)을 이깁니다. 그래서 몸의 지체들이 죄에 대한 불의의 도구가 되는 대신에, 이제는 하나님의 의의 도구가 됩니다. 그 습관은 이성과 의지를 인도하기 위하여 심어진 것이며, 그러므로 그 안에는 주권적인 능력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 안에서 감각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성이 왕좌를 차지하게 되면서 감각은

            베일에 가려졌습니다. 감각보다 이성이 더욱 탁월한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은혜가

             

             

            들어오게 되면, 이성은 그 자리를 은혜에 내어 주어야 합니다. 은혜가 이성보다 더욱 탁월한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은 이제 그 고유한 권리를 은혜를 통하여 다시 회득해야 할 것입니다. 이성은 창조의 법칙에 의해서 그 자리를 잘 지키고 있어야 했지만, 지금껏 죄의 법칙의 종이 되어서 거짓된 왕좌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은혜가 들어오게 되면 이성이 그 왕좌에서 강력히 쫓겨나게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은혜로 말미암아 제자리로 되돌아온 셈입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만이 아니라 능력의 영도 지니게 됩니다. 그 영은 그리스도 안에도 계셨던 바로 그 능력의 영입니다. 그러하기에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요일5:4). 은혜를 받은 사람은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집니다. 이렇게 은혜는 우세합니다.

             


            2) 새 습관으로는 죄를 짓기가 힘들어집니다

              어떠한 피조물도 뿌리를 내린 습관에 대항해서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본성에 반대되게 행하는 것은 힘겹고도 견딜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떠한 피조물이 자기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에 힘쓰겠습니까? 어떠한 사람이 자기 몸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상처를 입히는 것을 즐거워하겠습니까? 사람들은 본성상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단지, 광기가 그들을 사로잡아서 이성을 빼앗아 버렸을 때에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원리로 볼 때 의와 거룩은 새로운 피조물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 따라서 이제는 죄를 행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밖는 것이 그렇게 힘들었지만, 이제는 새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 힘들 것입니다. 요셉은 창세기 39장 9절에서 “내가 이 큰 악을 행할 수 없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 일이 자신의 영혼의 성향과 기질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1) ‘마음의 목적’을 거슬러서 죄를 짓기는 힘듭니다.

              마음으로 목적하는 바를 거슬러서 죄를 짓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자신의 분깃으로 선택한 자가 죄를 짓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2) 새로운 습관에 반대되는 것들은 그에게 힘듭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습관으로 너무나 기뻐하며, 그 습관 안에서만 오직 행복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죄악들을 다시 살려 행한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오히려 힘들 것임이 분명합니다.

             


            (3) 이 본성은 사람 속에서 죄에 대하여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보편적인 적대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만일 새로운 피조물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죄의 습관에 의해서 불편을 느끼고, 흙투성이가 되어 버리면, 그의 영은 상처를 받고 피를 흘리며, 양심은 가책을 느끼고, 자기 자신과 자기의 죄에 대하여 불쾌함을 가진 채로 하나님께로 도피하게 됩니다. 자기를 살피면서 하늘과 땅의 도움을 호소합니다. 자기의 무기들이 날카로운지를 점검하게 됩니다.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창세기 37장) 아버지의 통곡

             

            (창 37:33-35) 아비가 그것을 알아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삼하18:31)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자녀가 먼저 죽거나 눈앞에서 자녀가 죽는 것을 보는 심정이 어떠할까요? 성경에는 몇 군데 그런 참혹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광야에서 하갈이 이스마엘이 목말라 죽는 것을 차마 보지 못 하고 우는 장면이나, 입다가 무모한 서원을 하였다가 딸을 죽게 하는 장면도 안타깝지만 가장 끔찍한 장면은 그 아들들이 모조리 눈앞에서 참살당하고 자신은 두 눈이 뽑힌 다음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 죽는 시드기야가 아닐까 합니다. 아들이 죽임당하는 것, 그것은 누구도 견딜 수 없는 잔혹한 형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위하여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이 낮은 땅에 내려와 악한 죄인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가장 극악한 처형도구인 십자가에 달려 죽임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디에도 십자가에 독생자를 내어주시는 하나님께서 슬퍼하셨다거나 아파하셨다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두 군데에 아버지의 통곡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야곱의 통곡, 다른 하나는 다윗의 통곡. 이 두 대목을 저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단 한 번도 눈물을 내비치지 않으신 하나님께서 간접적으로 나타내신,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통곡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늙은 야곱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겠다고 울부짖었습니다.

            압살롬을 피하여 다윗 왕과 그 신하들은 황급히 도망하였고 슬픔과 두려움과 고통으로 기진맥진 하였습니다. 만일 쉴 틈을 주지 않고 그 뒤를 추격하자는 아히도벨의 계략대로 되었다면 다윗은 압살롬의 손에 거의 틀림없이 잡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새의 모략에 의하여, 또 여러 돕는 손길과 암몬족속에 의하여 다윗은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납니다. 전열을 정비한 다윗과 백성들은 뒤쫓아 온 압살롬 군대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다윗은 성에 머물고 다윗의 부하들은 전장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다윗이 출전하는 그들에게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원수가 된 아들을 오히려 걱정하는 못난(?) 아비의 모습입니다.

            에브라임 수풀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에서 다윗 군대는 압살롬 군대를 패배시킵니다. 압살롬은 도망하다가 그의 자랑인 긴 머리가 걸리는 바람에 대롱대롱 상수리나무에 매달리고 맙니다. 요압의 부하는 다윗의 부탁대로 압살롬을 죽이지 않고 요압에게 가서 보고합니다. 그런데 요압은 작은 창 세 개를 들고 가서 나무에 매달린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고 그 부하들은 에워싸고 압살롬을 쳐 죽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압살롬의 시체를 구덩이에 던지고 그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너무나 애절하고 처절한 다윗의 통곡에 승전한 다윗의 군사들은 풀이 죽고 마음이 슬퍼서 슬금슬금 죄지은 사람들 같이 성으로 도망하여 들어갑니다. 다윗은 얼굴을 감싸 안고 계속 슬피 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보다 못 한 요압이 다윗에게 따집니다. “왕이시어, 그럼 우리가 몽땅 죽고 압살롬이 이겼어야 하는 겁니까? 백성들 앞에 이 무슨 망발이십니까?” 그제야 다윗은 마음을 추스르고 백성들 앞에 나섭니다.

            죽어 마땅한 원수 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다윗왕의 통곡....., 우리는 성경의 이 대목을 읽으며 참 슬프고도 착잡한 복잡한 심정을 느끼게 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다윗은 패역한 아들, 아버지인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압살롬마져 사랑하여 그 죽음 앞에 통곡하였는데, 이를 어찌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것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저는 이 말씀을 통하여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합니다. 하필이면 압살롬이 나무에 매달려 세 개의 창에 가슴을 찔려 죽는 것도 그렇습니다.

            성경은 어디에도 하나님의 통곡을 나타낸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우리에게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마음과 고통을 모릅니다. 그러나 원수 된 죄인들을 살리기 위하여 품안의 사랑하는 독생자를 내어주셔야 했던 그 아픔과 그 고통이 하나님께는 없었을까요? 죽어 마땅한 원수 된 죄인들이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하나님의 눈에서 어찌 피눈물이 나지 아니하였겠습니까? 그 순간 독생자를 내어주신 그 고통과 죄인 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는 그 사랑과 기쁨이 범벅이 되어 또한 하나님의 가슴은 얼마나 큰 통곡으로 미어졌겠습니까?

            요셉을 잃어버리고 애곡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며,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 왕의 통곡을 들으며, 우리는 독생자를 참혹한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통곡하시며 세상의 죄인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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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최순실 보도’ 남한 언론들 극찬!
            “정의와 진리의 대변자, 시대의 선각자, 인민들과 함께 투쟁


            북한이 최순실 사태를 보도하는 남한 언론들을 열렬히 응원했다. 노동신문은 23일 “남조선언론들은《박근혜, 최순실추문사건》의 내막을 련일 파헤쳐 널리 보도하고 있다”“최악의 궁지에 몰린 박근혜일당의 가련한 처지와 반역무리를 권력의 자리에서 기어이 몰아낼 의지밑에 힘차게 벌어지는 각계의 투쟁소식들을 신속히 전하면서 반《정부》기운을 고조시키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남조선언론들의 이러한 보도활동은 정의와 진리의 대변자, 시대의 선각자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다해나가려는 정당하고 의로운 행동”이라고 평했다.


            특히 “남조선의 거의 모든 언론들이《11월 민주항쟁》으로 명명된 지난 12일의 100만초불집회소식을 지면과 화면에 일제히 싣고 박근혜역도의 퇴진을 요구하는 민심을 그대로 전하였다”“지금 남조선의《전국언론로조》, 기자협회, 방송기술인련합회, 민주언론시민련합, 언론개혁시민련대를 비롯한 많은 언론단체들은 언론단체비상시국대책회의를 내오고 각계층 인민들과 함께 투쟁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일부 우익보수언론들이 각계층의 투쟁기운을 약화시키기 위해 보도수위를 조절하면서 박근혜패당을 비호하기 위해 음으로양으로 책동하고있지만 그것은 대세도 가려보지 못하는 얼간망둥이짓”이라며 “남조선의 각계층 인민들과 언론인들은 온갖 악의 근원이고 불행의 장본인인 박근혜패당을 력사의 무덤속에 처넣을 때까지 투쟁의 불길을 더욱 높이 지펴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노동신문은 이날 또다른 글에서 ‘촛불’ 시위에서 더 나아가, ‘횃불’ 시위를 벌일 것을 선동했다. 신문은 “이미 추켜든 항거의 초불을 전민항쟁의 홰불로 틀어쥐고 반역의 무리를 모조리 불태워버려야 할 것”이라고 했다.


            출처: 리얼팩트 TV (http://rfacttv.com/sub_read.html?uid=540§ion=sc6§ion2)




            '무정부 상태가 되어가는 한국'

            '북조선의 세포(종북세력)으로 무정부 상태가 되어가는 한국'


            북베트남의 '평화공세'에서 배운 북한


            박 대통령을 끌어내리려는 정계·민간인의 일부는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가짜 간판을 내세워 ‘선거를 통한 정권교체'로 가장했지만, 실체는 북한의 조선노동당과 합작하여 조선 반도 통일을 도모하는 "종북세력"에 속하는 공공연한 부대이다.


            종북세력의 비공개부대는 틈만 나면 조선 로동당과 조선 인민군의 공작원 특수작전부대와 합류하여 폭력혁명에 의한 정권 전복을 노리고 있다.


            그 조선로동당은 지난 5월 36년 만에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 '핵 보유국'선언으로 미국을 협박하면서 한국 전쟁(1950년~)의 휴전협정(1953년)을 '평화협정"으로 전환과 협정 체결 후 주한 미군철수를 요구했다.




            베트남 전쟁(1960~75년)에서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한 과정 그대로가 아닐까? 미국은 북베트남과 1973년 평화협정을 맺고 남베트남에서 철군했다.


            그후 2년 3개월 만에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현 호치민)은 북베트남에 점령되어 순식간 일당 독재 공산주의 국가로 흡수되었다. 대규모 반전시위가 미국에서 휘몰아 미국의 정부·여론은 계속된 전쟁에 싫증이 난 상태였었다.


            남베트남 내에는 북베트남 공작원에 포섭된 정치인과 관료, 종교지도자들과 군인들 5만명이 암약하고 있었다는 분석이 있는데, 한국에서도 유사한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출처: 산케이신문 (http://www.sankei.com/premium/news/161114/prm1611140004-n2.html)




            “나는 그날이 올까봐 두렵습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경제가 바닥을 가고, 도저히 세 끼를 먹기가 어려워 두 끼 밖에 못 먹게 된다든가, 두 끼도 어려워 한 끼만 먹어야 한다든가, 그것도 어려워 굶어 죽어야 하는 날이 온다 해도, 그런 경제적 파탄을 나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늙고 병들어 내일 아침에는 일어나지 못하고 마지막 숨을 몰아쉬게 된다 하여도 그 시간을 겁내지는 않을 겁니다. 사람이란 한 번 태어났으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거의 여왕’이라는 존칭이 붙어 다니고, ‘정직한 지도자’로 사랑받던 박근혜 대통령의 국민 지지율이 5%로 추락한 사실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지도자의 인기란 오를 수도 있고 내려갈 수도 있고, 애국자로 존경 받던 사람이 민족반역자로 낙인이 찍혀 감옥에 가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겪은 6‧25와 같은 것이 재발하여, 엄마는 어린 애를 등에 업고, 아빠는 무거운 보따리를 등에 지고, 한강철교도 이미 폭파된 상황에서, 목숨을 걸고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남쪽으로 하염없이 피난길을 더듬어 가던 우리 동포들의 처참한 모습을 회상할 때 내 마음은 겁에 질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폭격으로 다 부서진 살던 집에서 부모마져 잃은 어린 고아


            동족상잔의 그 비극이 끝나고 63년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동안에도 북이 도발한 만행이 빈번하게 일어나긴 했지만 남북 간에 전쟁은 터지지 않고 경제 강국 10위를 노릴 만큼 잘 사는 대한민국을 만들었습니다. 좀 더 잘하면 ‘Made in Korea’가 ‘Made in USA’를 능가할 수도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휴전선 이남의 대한민국은 ‘한강변의 기적’을 일구었지만 휴전선 이북의 인민공화국은 김 씨 왕조의 정권 유지를 위하여, 백성은 헐벗고 굶주리게 해놓고 핵무기 제조에 전력투구하여 성공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큰소리칩니다.


            김정은이 바라는 건 한 가지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적화통일'입니다.

            김 씨 왕조에는 핵무기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도 은근히 적화통일을 갈망하는 나머지 ‘진보’를 가장하고 종북을 주장하는 얼빠진 인간들이 있습니다.


            ‘북’이 ‘남’에다 그런 악질분자들을 심어 놓았을 수도 있고 자생적일 수도 있습니다. 이자들은 샴페인을 마시면서 강남의 살롱에 앉아 적화통일을 꿈꾸고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5000년 역사에 처음 싹이 돋아나던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는 여지없이 밟히고 시들어 버릴 것이 뻔합니다.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보겠다는 ‘잘난 사람들’이어, 이 현실을 직시하시라!


            그 날이 오면, 대한민국에는 대통령도 없고 재벌도 없습니다. 광화문 네거리에는 인민군 탱크가 들어설 것이 뻔합니다. 나는 그날이 올까봐 두렵습니다.



            글쓴이: 김동길 박사님

            예수님께서 수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후

            구원의 긍휼은 유대인에서 이방인교회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러나 종말에 긍휼의 그릇은

            다시 유대인으로 넘어간다.


            이스라엘과 이방인 교회의 구별을 하는 이유는 한 가지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배척하였고 이방인은 영접하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교회시대의 끝자락에 왔으며

            종결은 휴거로 마감될 것이다.


            이후에 일어날 연대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살아있는 모든 성도가 변화체로 변형되어

            물리적, 공간적으로 끌어 올려질 것인데


            공중에서 예수님과 만나고 예루살렘성에 거주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불현듯 사전 통고 없이 하늘에 모습을 나타내시고

            께어 있고 준비된 슬기로운 신부들을 끌어올리실 것이다.

            앞서 죽은 신실한 성도들도 이 때 부활할 것이다.

             

            이 사건의 발생은 임박한 상태인데,

            산채로 변화되거나 영화롭게 되어서

            부활하신 주님의 몸과 같은 부활의 몸을 받는다.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대망하며

            준비된 경건한 자들만이 하늘로 끌어올려질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뒤에 남겨져서

            지상의 불신자들과 함께 대환란의 참상을 경험할 것이다.

             

            둘째, 휴거 뒤에는 7년 기간이 이어질텐데


            요한계시록에서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대접 심판으로 표현된 것처럼,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그 기간 동안

            땅의 백성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적그리스도와 짐승으로 알려진

            세계의 통치자가 나타날 것이다.


            처음에 이스라엘과 평화의 언약을 세우지만

            환란의 중간에 협정을 파기하고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총체적인 박해를 획책할 것이다.

             

            셋째, 주님이 환란 뒤에 지상재림 하실텐데


            적그리스도와 불신자들이 최종적으로

            아마겟돈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하고

            이와 함께 그 기간에 살아남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개종하여 예수님을 영접하는 믿음으로 나올 것이다.

            끝까지 믿지 않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죽음에 처해져서 천년왕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교회의 휴거는 환란전에 공중에서 이루어지고

            지상재림은 원수들을 심판하기 위해 환란 끝에 일어날 것이다.

             

            넷째, 환란에서 살아남아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이 있을텐데


            그들은 영화롭게 변화되지 않은

            자연상태의 신체로 천년 왕국에 들어갈 것이다.

             

            다섯째, 사탄은 그 때 천 년 동안 결박되고 봉인될텐데


            천년왕국 기간에 전혀 악을 자행하지 못하고

            사람을 미혹하지도 못하도록 감금될 것이다.

             

            여섯째, 예수님은 이제 천년왕국에 대한 그리스도 통치를 시작하실 것이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직접 통치를 하실 것인데,

            만국의 백성들도 예루살렘에 와서 초막절을 지키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천년왕국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크게 증가할 것이다.

             

            일곱째, 천년 왕국에 들어간 사람들도 결혼하고 자녀를 출산할텐데


            예수님이 강림하시기 전의 교회시대보다 훨씬 오래 살 것이다.

            이 시기는 전례가 없을 만큼 경제와 정치가 안정되고

            평화로우며 영적인 부흥이 일어날 것이다.

             

            여덟째, 변화체를 입고 휴거된 신부들은 예루살렘성에서 살 것인데


            이 성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시온의 공중에 떠 있을 것이며

            최고의 빛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 통치에서 일정 역할을 담당할 것이지만

            일차로 수행하는 활동은 시온의 예루살렘성에 있을 것이다.

             

            아홉째, 천년 왕국 시대가 끝날 때 사탄이 풀려나는데


            사탄은 인류를 또 한번 미혹하여 반역자를 모으고,

            예수님의 통치에 대항하여 최후의 일전을 벌일 것이다.

            마지막 반역에 참가한 사람들의 수는 모래알처럼 많을 것이다.

            그 반역은 진압되고 사탄은 불못에 던져지고

            불못에서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열째, 이제 인간 역사에 전 시대에서 죽은 불신자를 포함하여

            죽은 모든 신자들이 부활하여 자신의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을텐데


            불신자들은 모두 불못에 들어가고

            천년왕국의 사람들도 심판받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영원한 거처로 창조될텐데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와

            우주적 목적이 완성되고 영원 세계가 시작된다.

            영원세계는 현재의 천국 백성들도

            기다리고 사모하는 훨씬 더 영화로운 세계일 것이다.



            출처: 카이로스 / ars


             




            찜통처럼 후끈거리고 무덥기만 하던 여름도 어느새 다 지나가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해진 것을 보니까, 가을이 완연하다. 무더운 여름을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 아름다운 계절이 지나고 나면 곧 눈보라가 몰아치는 모진 겨울이 닥쳐올 것이다. 가을은 계절로서의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되는 것이다. 터닝 포인트( Turning point),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발전할 수도 있고 퇴보할 수도 있는 꼭짓점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갈등과 다툼, 그리고 그 원인 제공자인 마가 때문에 급기야는 분열하고 갈라서야만 하는 아픔을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의 분쟁도 그리스도 안에서는 결국, 선한 길로 인도함을 받는, 터닝 포인터(Turning point)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믿음의 시각, 긍정적인 시각으로 현실의 참담함을 넘어, 초대교회 역사를 재조명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을 이 아침에 주신다.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으리만큼 밀접한 관계로 함께 이방인 선교 사역을 펼쳐나갔던 멋진 동역자들이었다. 기독교인들을 죽이는데까지 내어주던 과격한 성품의 바울에 비해 바나바는 그 이름이 주는 뉘앙스대로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기에 서로 다툴 일이 없었기도 하지만,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극적인 순간이 있었고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그때를 기점으로 그는 백팔십도로 완전히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다.

            이런 바울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다. 이전의 핍박자였던 바울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동료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처음으로 설득한 장본인이 바로 이 바나바였던 것이다(행 9: 27). 그 후로, 이 둘은 서로 아끼고 극진히 사랑하는 사이로 급진했으며, 바나바와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을 함께 나갈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던 것 같다.

            이런 그들에게도 갑작스럽게 균열이 생김을 볼 수 있다. 지지해주는 협력자들은 놀랍게도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그들은 아시아 교회들을 방문하려는 여행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마가 라고 하는 요한을 2차 선교여행에 데리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그 일로 인해서 둘은 극심하게 다투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지만, 바울은 이전의 이탈자와의 합류에 심한 거부감을 갖고 강하게 반대한다(행 15: 37-38).

            이러한 분열이 발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갈등은 두 인물과 그들의 특별한 관계의 빛 아래서 해석되어야 하겠지만, 한 마디로 그들의 불화가 시작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마가였다. 왜일까? 물론, 그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표면적으로 나타난 사실은, 마가가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하던 1차 선교 여행지 중의 한 곳인 '밤빌리아'에서 그들(바울과 바나바)을 등지고 자기 고향 집으로 돌아갔던 그가 다시 되돌아와서 두 사도들과 합류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이런 마가의 행보는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여행에 참여했다가 도중 하차한 뒤 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지게 하는 데도 매개변수였다. (행 15:37∼39) 결국,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돌아가는 여행을 선택하고, 바울은 그의 새 파트너인 실라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역량 있는 선교사로서 바나바보다 더 큰 역량을 발휘하지만, 덕망 있는 권위자(행 4:36), 바나바에게서 좀더 배울 게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드러나는 바울의 모습은 불완전해 보이며 결코 완벽하지 못한 사도로 비쳐질 뿐이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누구와도 화목해야 한다. 그럼에도 화목할 수 없을 때가 종종 발생하게 되는 때가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자신들의 주장이 주님의 말씀보다 더 강할 때 일어나는 피치 못할 감정적 현상이다. 그러나 그들의 감정적 불화를 통해서도 주님의 사역은 멈출 수 없다는 것이 포인트가 되겠다. 사상이나 견해가 서로 너무 맞지 않을 때는 심하게 다투고 죽기까지 피를 흘리며 싸우는 것은 무익하다. 그럴 경우에는 서로 축복해주고 조용히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필자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초대 교회 이방인의 선교사역은, 마가 한 사람 때문에, 싸움의 불씨가 되었고 결국은 두 사람의 지도자가 각기 등돌리고 돌아서게끔 악화가 되었다는 사실은 지금 막 태동한 이방인 선교사역에 큰 위험을 주는 요소였고, 큰 아픔이었다. 그런 아픔을 바라보게 된 마가 역시 마음이 쉽지만은 않았던 듯,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두 사도의 불화의 원인 제공자가 바로 자신임을 깨닫고 가슴 아파하며 애통하는 때가 그에게 있었지 않을까? 그런 그를 주님께서 어루만져주시는 때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때가 바로 마가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남은 여정이 얼마나 아름답게 변화했는가 하는 것을 보아 알 수가 있다. 여기 이 마가는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 자신을 기록할 때, 부끄러운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갔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 하니라” (마가복음 14장 51∼52)라고 하는 매우 특이한 장면이 나온다. 그 청년이 바로 마가 자신이다. 그의 행적을 추적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희열 속으로 끌려들어 간다.

            그렇다. 그는 더 이상 예전의 그 비겁한 마가가 아니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이다! 훗날, 이런 마가를 가리켜 베드로는 자기 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사랑하며 아꼈고, (벧전 5:13) 로마에 있던 바울은 마가에게 특별 임무를 부여해 골로새로 보내면서 골로새교회에게 그를 잘 대접하라고 당부까지 하였다(골 4:10). 순교에 앞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 마가를 데려오라고 간절히 부탁도 하였음을 볼 수 있다.(딤후 4:11)

            이렇듯, 훌륭한 두 사도의 격렬한 다툼의 원인 제공자였던 마가는 그 일로 인해서 자신에게 큰 변화가 있었던 듯, 마가의 남은 여정은 신실한 일꾼으로 기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종국에 가서는 그를 인정하지 않던 바울 사도에게마저 중요한 사람, 인정받는 동역자로 거듭난 것이다. 마가는 한 때 다른 사람에게 불화를 조성한 원인 제공자였던 부족한 사람이지만, 회개한 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유익한 인물로 변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근간에 일어나고 있는 뉴욕 교계의 분쟁과 불화의 몸살은 우리가 모두 함께 앓고 있는 심한 몸살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고 사신 바 된 귀한 형제 자매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생명이다. 이런 귀한 생명체 안에서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는 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으로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이다. 그럼에도 앞선 몇몇 지도자들이 무리수를 두고 있는 한, 아름다운 화음을 울려야 할 오케스트라 연주가 불협화음으로 인하여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마치, 구약의 사사 시대처럼 수많은 사람이 자신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우왕좌왕이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어떤 요인 때문에, 이권 때문에, 권력 때문에, 명예욕 때문에,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 드리지 못한 사람들, 그들로 말미암아 교계는 날이면 날마다 시끌벅적거린다. 작금의 뉴욕 교계 역시 모두 다 주님의 이름으로 일한다고 말들은 하지만,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생각, 아집이 이런 비본질적인 것이 본질보다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바울과 바나바의 심한 다툼으로 분열될 지경까지 가게 되었으나, 그 원인 제공자였던 마가에게는 그 순간이 바로 주님께로 돌아가는 터닝 포인트가 된 것이었고 그 일 때문에 더욱더 훌륭한 선교의 장이 열려진 것이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들의 이런 분쟁도 결코 나쁘다고만 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 우리 주 안에서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오늘의 이 분쟁으로 말미암아 사단이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만 하고 주님께 더욱 더 자신을 찢고 겸손한 무릎으로 나아가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도 자신의 주장, 자기 의(Self- Righteousess)에 갇혀서 살았다면, 자기 살을 찢어내는 아픔, 고육지책 (苦肉之策)을 감행하고서라도 획기적인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가 필요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하나 되기 힘써 지켜야 하겠지만, 그것이 안 된다면, 세포분열을 하는 아픔을 감내해야만 하는 오늘이야말로 뉴욕교계가 바른 영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 아픔의 순간들을, 결코 가볍게나 헛되이 허비하지 말고, 주님께로 되돌아 가는 터닝 포인트 (Turning point), 그 분기점이 될 수 있는 멋진 날로 만들어 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세계에 흩어진 성도들)는 뉴교협 교역자님, 평신도 지도자님들, 그리고 뉴욕 교협에 소속한 모든 성도님들, 사랑하는 동역자님들이 이 아픔을 딛고 잘 해내실 것이라고, 주님 안에서 멋지게 성화시켜 나갈 것이라고 다시 한 번 굳게 믿어보고 싶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사도행전 15:36~41)


            글: 최송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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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무엇이 거듭남인가(III) - 거듭남은 외적인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내적인 변화이면서 또한 외적인 변화입니다. 그것은 대상과 작용에 있어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내적인 좌소에서의 거듭남이 형태를 취한다는 면에서 외적인 변화입니다. 예를 들어 보는 능력은 영혼 속에 있지만, 보는 행위 자체는 눈으로 합니다. 이러한 내외적인 변화는 하나님의 일들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길을 따라서 행하게 합니다. 모든 외적 변화가 내적 변화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적인 변화는 언제나 외적인 변화를 동반합니다.


            1. 대상을 향하여 자세가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그 앞에 놓여 있는 세상과 죄를 추구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의 영혼이 열심히 하나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처럼 대상의 측면에서 변화되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27:4).

            하나님과 친숙해지고, 그분을 품고,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또한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 것에 친숙해지고, 그분께서 자기의 길을 지도하시고 자신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하게 되는 것, 이것이 영혼의 반응입니다. 이에 지성은 하나님의 일들을 깨닫는 데에, 의지는 그것들을 선택하는 데에, 정서는 그것들에 만족하는 데에 익숙해집니다. 모든 기능적 구조물에 의해서 영적인 대상들이 기뻐하는 일들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는 그 기뻐하는 일들을 영혼이 진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롭게 된 사람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열망과 애정의 대상으로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대상, 무한히 영광스러운 대상으로 삼게 만듭니다.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대적하고 그 세상적인 대상들에 대하여 가졌던 애정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처럼 복음과 마음이 합하게 된 사람은 삶도 복음의 중심 주제와도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복음이 의도하는 바에 응하게 됩니다.

             


            2. 내면이 외면의 변화로 작용합니다

              작용은 본성을 따릅니다. 작용이라는 것은 본성에 지속적으로 반대될 수가 없습니다. 그 작용의 측면에서의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마음과 그 마음의 행동은 언제나 서로 모순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마12:34) 마음 속에 있는 은혜의 샘을 따라서 그 생명의 현상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새로운 인식은 새로운 작용을 가져 옵니다. 판단의 변화는 반드시 행동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행하게 됩니다’(골2:6)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새로운 창조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

             

             

            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만일 새로운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새로운 창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열매는 뿌리의 본질을 닮는 것이고, 그 뿌리의 본성을 따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거룩이 그 본성에 유입되었다면, 그 거룩이 또한 삶 속에서도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은혜가 왕좌에 오르게 되면, 그 작용은 영적인 것이 됩니다. 성령에 의해서 활동하게 되어서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행하게“(갈5:18,25)된 사람이, 그 영적 풍미가 없이 어떠한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행동은 그 행동이 나오게 되는 원리와 같은 색깔을 띄기 마련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성도의 의무 즉, 성도의 삶이 행하게 만드는 재료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작용 방식에 있어서 변화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육신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알았던 것처럼 성도의 의무들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따라서 그것들을 알게 되었고, 또한 행하게 되었습니다. 즉 자연 대신에 은혜가, 육신 대신에 성령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내적일 뿐만 아니라 외적입니다. 엄격하게 도덕적이었던 사람이 은혜를 받게 되면, 내적 원리가 분명하게 변화되어 새로운 마음으로 그 엄격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도덕적으로 느슨했던 사람이 변화를 받게 되면, 분명히 외적인 행동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전의 생활과 본성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하는 것은 어떠한 내적인 변화가 없이 단지 외적으로만 바뀐 사람은, 그렇게 바뀐 행동은 이전과 동일한 영으로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3부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


            7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생명의 원리

             


             지금까지 거듭남, 즉 새로운 창조를 변화의 본질의 측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생명에 관한 원리의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새로운 창조는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3:1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영적 생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주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을 때, 나사로에게 생명과 운동의 원리를 주셨습니다. 죄 가운데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을 불러내실 때에도 이와 같은 일을 하십니다. 첫째 아담에게서 우리가 물려받은 모든 것이 사망에 속한 것이지만, 둘째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모든 것은 생명에 속한 것입니다. 후자가 영적 생명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전자는 영적 죽음을 증식시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숨은 사람, 곧 속사람에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 피조물이 생명을 가지고 운동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효과가 그 원인에서 나오는 것처럼, 육체의 생명이 영혼에서 나오고, 영혼의 생명은 은혜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거듭난 사람 속에 있는 영적 생명의 공로적 원인이며, 그것의 효력적인 원인이 성령에 의한 것이라면, 은혜는 이 생명의 형상적인 원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담에게 생명이 주입되었던 것처럼, 자기 안에 불어 넣어진 영적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림자에 불과한 위선과 구별됩니다. 위선은 형태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피조물은 생명의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위선은 꾸밀 수 있지만, 새로운 피조물은 본성에 관한 것이어서 꾸밀 수 없습니다. 그림으로 사람의 윤곽을 묘사할 수는 있지만, 그 그림에 생명이나 지성, 정서를 담을 수는 없습니다.

             


            8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은혜로운 습관(I)

            - 새것이 필연적인 새 습관


             이제 하나의 습관으로서의 거듭남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습관이란 내적인 틀을 의미합니다. 마치 숙련공이 노련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손쉽게 행동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무엇입니다.

            새로운 창조는 영혼의 실체를 파괴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체조직과 기능적 구조물들이 여전히 똑같고,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 때문에, 이 새로운 창조는 은혜로 인한 성질들과 습관들의 형성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의롭게, 거룩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영혼을 아름답게 하고, 또한 새롭게 배열하게 됩니다.

            본성의 부패는 우리의 본성의 독이며, 질병이고, 변형입니다. 은혜는 우리 본성의 아름다움이고, 건강이며, 장식품이고, 그 영혼에 가치와 진가를 제공합니다. 방탕한 사람이 덕스러워지게 되면, 비록 그가 이전과 똑같은 영혼과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다름 사람,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이제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나쁜 습관들을 벗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습관을 가지지 않은 채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새로운 습관들이 없이는 그 어떠한 것도 부패한 상태에서 순결한 상태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어둠을 빛으로 만드는 것, 바로 그 본질 속에 새로운 성질을 유입시키는 힘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씨앗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요일3:9). 이전에는 잡초만 나게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던 땅에 좋은 씨앗을 뿌려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1.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습관을 지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적인 선하심을 따라서 그가 사랑하시는 피조물들에게 일반적인 것들을 베푸시는 것처럼, 초자연적인 선하심을 따라서 그의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초자연적인 것들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베푸실 때에 그냥 베푸시는 곳이 아니라, 그 모든 피조물들에게 어떠한 형태와 성질을 주셔서, 그 형태와 성질을 따라서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 본성에 이끌려서 활동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선하심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감동시키신 그들에게 더욱 영적인 성질들을 주입시키십니다. 그 성질들에 의해서 그들은 합리적으로 부드럽게, 손쉽게, 그 영적 선을 획득하도록 감동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그 영혼 속에 사랑의 영, 은혜의 영을 넣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성이 하나님의 뛰어난 방식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되고, 또한

             

             

            그들의 의지도 이러한 습관의 능력과 달콤함에 의해 흥이 돋아서, 그것과 반대로 행할 수도 없고, 그렇게 반대로 행하려고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습관은 은혜로운 방식으로 행사하는 영적인 힘을 가집니다. 죄의 습관이 그 본성의 면에서는 육신, 그 결과의 면에서는 사망이라고 불리는 것같이, 은혜의 습관은 그 조건과 결과가 생명이라는 면에서 새로운 피조물과 영이라고 불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일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하나의 육체가 준비되었던 것같이, 영혼에게는 새로운 피조물의 일을 하기 위한 습관이 준비되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진리의 습관, 즉 의지의 신실함이 있고, 지성에는 ‘숨겨진 지혜’가 있습니다. 부패한 본성에 죄의 습관이 있듯이, 새로운 피조물에는 은혜의 습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믿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며, 복종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과 사랑, 복종과 은혜를 모두 마음의 토양에 심어 그곳에서 자라나서 영원에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즉, 믿고 사랑하며 복종할 수 있는 의지를 갖게 하시고, 또한 신속하게 반응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 새 습관은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습관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게 하셔서 위로부터 받게 하셨던 그 능력이 없이는 자신들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 초자연적 원리가 없이는 은혜로운 행동들을 전혀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영혼 속에 은혜의 습관이 없다면, 그 어떠한 행동도 은혜에 속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창조는 성령께서 억지로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이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성을 바꾸시고 다른 본성을 심으셔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가 사람 안에서 본성상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이제는 은혜가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 습관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처럼 반대되는 습관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그 사람이 반대되는 상태에 놓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죄에 이끌렸던 것과 같이, 이제는 영혼이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이끌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이끌림이 습관적이었던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이끌림도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3.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습관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이러한 습관은 오직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습관이란 모든 기능적 구조물 속에 있는 전체의 올곧음이며, 또한 의롭게 활동하는 것의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부패의 본성이 ‘옛 아담’, 혹은 ‘사망의 몸’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은혜의 본성은 ‘새사람’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의 신체가 비록 여러 부분의 조직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부분들이 하나의 영으로 결합되고, 오직 하나의 습관에 의해서 조직됩니다. 그와 같이 모든 죄도 한 사망의 몸의 부분들이고, 또한 모든 은혜들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각각의 모든 은혜들은 그 활동이 드러나게 되는 때가 서로 다르고, 서로 구분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한 뿌리로서의 습관으로부터 흘러 나오고, 또한 그 습관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은혜들은 바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계속 공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의 성품이기 때문에 완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적인 본질은 하나이면서 그 안에 모든 완전함을 탁월하게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그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그것은 신적인 본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처럼 마음속에 주입되는 은혜도 그 안에 실제로 모든 완전함을 포함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일치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님께서, 다양한 은사를 서로 다른 사람에게 주시겠지만, 그 새로운 피조물에는 모든 은혜들을 포함하는 본성이나 습관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적인 본성일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려고 하신다면 모든 은혜를 주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모든 은혜가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이며 구성물이기 때문입니다.

             


            4. 이러한 습관은 여러 가지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주체에서 비롯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습관은 주관적으로 영혼의 본체에 있는 것이지만, 지성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칭하고, 의지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선택함’이라고 칭하며, 정서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활동’이라고 칭합니다.

            사망의 몸이 지성에 있을 때는 그것을 무지라 부르고, 의지에 있을 때는 증오, 양심에 있을 때는 죽음의 상태, 정서에 있을 때는 무질서와 심술궂음 이라고 부릅니다. 어떠한 질병이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여러 부분들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그것은 기질의 기능장애나 이상 상태의 다른 이름 뿐인 것과 같습니다.

             

            2) 다양한 적용 대상들에서 비롯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습관은 그리스도와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라 부르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것이기에 사랑이라 부르며, 그리스도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기에 겸손이라 부릅니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기에 복종이라 부르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기에 인내라고 부르고, 그리스도가 무시당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기에 근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의 습관에서 말미암고, 믿음에 의해서 활성화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믿음의 사랑이고 믿음의 기쁨이며, 믿음의 겸손이고 믿음의 인내입니다. 이모든 것들이 영혼에 자리잡은 하나의 습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모든 다양함 속에서 일치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피조물의 모든 완전함은 한 하나님 안에 우뚝 솟아 있고, 모든 악한 기질은 자연인 안에 태어나면서부터 배아 상태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처럼 은혜의 모든 아름다움은 이 습관 안에 훌륭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처: 청교도아카데미/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2009년 6월 25일 일루미나티에 의해 의료사고를 가장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진 마이클 잭슨의 여동생인 자넷 잭슨이 최근 이슬람 복장을 하고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만삭인 자넷 잭슨이 무슬림 신자인 그녀의 남편 Wissam Al Manna와 함께 차도르를 착용한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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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클 잭슨의 사망 이후 오프라 윈프리 쇼를 통해 오빠의 죽음이 일루미나티와 연관이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던 자넷 잭슨이 차도르 복장을 한 충격적인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된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 당시 이미 이슬람 신자였던 그의 형 저메인 잭슨은 한 이슬람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동생 마이클이 일루미나티에게 살해당한 것이라 말하며, 만일 마이클이 이슬람으로 개종을 했었더라면 “Islam would've been Michael's protection(이슬람이 마이클을 보호해주었을 것)”이라는 증언을 한 바 있다.


             마이클 잭슨의 형 저메인 잭슨이 한 이슬람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동생 마이클이 일루미나티에게 살해당한 것이라 말하며, 만일 마이클이 이슬람으로 개종을 했었더라면 “Islam would've been Michael's protection(이슬람이 마이클을 보호해주었을 것)”이라는 증언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자넷 잭슨이 무슬림 신자와 결혼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이 일루미나티로부터 보호받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미국을 이슬람화하기 위한 세력들이 전략으로 자넷 잭슨에게 차도르를 입혀 대중들에게 노출시킨 것일까?

             

            일루미나티의 꼭두각시로 쓰임 받다가 처참하게 버림받은 마이클 잭슨처럼, 이제는 그의 여동생 자넷 잭슨이 이슬람에게 이용을 당하는 듯싶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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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레미야 -

            4 무엇이 거듭남인가(1) - 거듭남은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변화입니다. 그러하다면 어떠한 종류의 변화이겠습니까? 즉, 그 변화의 본질은 무엇이겠습니까?


            1. 은혜에 의한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실제로 작용하는 모든 것들은, 그 작용을 가능하게 만드는 실재가 있어야 합니다. 마치 시각이 작용하여서 사람이 보게 되기 위하여는 시력이 있어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본성도 그렇습니다. 그 본성 안에는 작용하는 힘이 뿌리박혀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활동이 실제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그렇게 활동할 수 있는 실제적인 힘과 그렇게 작용하게 만드는 실제적인 습관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것은 활동을 통하여 실제적인 영적 행동들을 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밖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신적인 성품’, ‘하나님의 형상’, ‘마음에 심긴 법’과 같은 용어들은 명목적이거나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이 소유하게 되는 실재입니다. 실제 그대로, ‘새로운 사람’, ‘새로운 마음’, ‘새로운 영’, ‘새로운 피조물’이며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입니다. 그것은 부활이라고 불립니다.

             


            2. 모든 믿는 자에게 나타나는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변화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후5:17).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만 있는 독특한 것이면서,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모두 공통된 것입니다. 새로운 창조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인 되게 합니다. 그들 속에 자리잡게 되는, 새로운 존재로서 그들에게 새겨지는 새로운 도장이며 날인입니다.

            그로 인하여 모든 성도는 한 가족이며, 한 영으로써 행하고, 마치 거울에 비춰진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것처럼, 같은 대답을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만드는 실재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합니다.

             


            3. 어둠이 빛이 되는 정반대로의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이전의 모습과 비교해서 너무나도 대조가 되는 변화입니다. 짙은 어둠대신에 밝은 빛이 들어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5:8). 이는 육과 영이 서로 반대가 되는 것과도 같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하나는 육의 구성물이고, 다른 하나는 영의 구성물이기 때문에,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과 먼 것처럼, 세상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먼 것처럼 서로 대조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게 되면, 죄로 뒤틀렸던 기질이 벗겨지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정서로 옷 입게 됩니

             

             

            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는데, 이제는 솟아 나오는 그 생명으로 인하여 정욕이 소외됩니다.

            이것은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골1:13). 전적으로 다른 토양과 기후 속에 살게 되고, 다른 일들, 다른 법률들, 다른 특권들, 다른 자연들 속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인 것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부패함으로 육적이고도 동물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나 새 창조에 의해서 그들은 영적이고도 신적으로 변화됩니다. 부패함으로 모든 악의 씨앗들을 가지게 되었지만 거듭남으로 모든 은혜의 씨앗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부패함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위에 거슬러 대항하게 만들었다면, 거듭남은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게 합니다.

            “잣나무로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질려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명예가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사55:13)


            4. 전인(全人)의 전체적인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능력이나 새로운 기능적 구조물을 가지게 되는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에서처럼 이것은 그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칩니다. 곧 이해력, 의지, 양심, 정서, 이 모든 것들, 즉, 죄로 인하여 부패된 모든 부분들이 은혜로 인하여 새롭게 됩니다. 영혼 전체가 은혜로 인하여 아름답게 변화하기 시작해서 영광스러운 변화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1) 전신에 미치는 생기의 변화입니다.

              이 새로운 창조는 출생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태아가 자궁 속에서 형성될 때에는, 단지 한 부분만이 만들어지고 나머지 부분은 불완전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골고루 작용해서 전체의 신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새로운 피조물의 모든 부분들이 형성되는 일에 작용하십니다. 어느 한 부분만 개혁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실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하실 때 어중간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2) 거듭남의 은혜는 부패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거듭남의 은혜는 부패한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타락함으로 죄가 원래의 의로움의 뼈대 전체를 무너뜨려 버렸던 것과 같이, 이제 거듭남의 은혜는 부패의 뼈대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죄는 곰팡이가 빵 전체로 번지는 것처럼 모든 부분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은혜가 모든 기능적 구조물에 영향을 끼쳐서 오염된 것들을 쫓아내 버립니다. 지평선 너머에 해가 떠오를 때 빛이 어둠을 쫓아내고 모든 대지 구석구석을 밝게 비취는 것과 같습니다.

             

            3) 은혜가 영혼 본체의 주인으로 자리합니다.

              영혼의 실체야말로 은혜가 거하는 적절한 처소이므로 그곳에 있는 은혜가 영혼의 모든 기능

             

             

            적 구조물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바로 그 실재에서 지성과 의지의 완전함이 흘러나옵니다. 성령이 거하시는 영혼의 좌소가 바로 은혜가 거하는 좌소이기에, 성령께서는 어느 한 기능적 구조물에 부분적으로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 전체에 거하십니다. 따라서 은혜로 인하여 영혼 전체의 구석구석까지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이 연합은 영혼 전체에 속한 것입니다. 마치 불길이 쇠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치면서, 그 요소들을 깨우고 뜨겁게 하며, 물렁물렁하고 유연하게 하고 그 속에 있는 반대되는 요소들을 녹여 없애는 것과도 같습니다.

             

             

            4) 은혜가 전체적인 조화를 이룹니다.

              은혜를 받고 거듭나게 된 사람의 모든 부분 속에는 은혜로 인한 조화가 있습니다. 자연 출생을 보더라도 하나의 존재가 두 가지 형태를 동시에 취할 수가 없습니다. 새로운 형태가 주어지면 그와 동시에 이전의 형태가 제거됩니다. 은혜라는 단 한 가지 공통된 원리에 의하여, 기능적 구조물이 함께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할 수 있도록 상호작용을 하게 되고, 거룩한 삶을 이루어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변화가 우리 전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우리 영혼의 구석구석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관찰해 보아야 합니다.


            5장 무엇이 거듭남인가(II) - 거듭남은 내적인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원리적으로 내적인 변화입니다. 영혼이 내적인 것이기에 거듭남 역시 내적인 변화입니다. 거듭남이 내적인 변화가 아니라면, 외적으로 올곧은 행동의 변화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시침이나 분침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시계 내부의 스프링이나 톱니바퀴가 제대로 작동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내적인 변화는 사물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데도 일어나는 마음의 변화입니다. 이를 4 가지 주제로 살펴 보겠습니다.

             

             

            1. 거듭남은 원리의 변화입니다

             

              자연인이 종교적인 행위를 할 때, 그 안에 작용하는 원리는 인위적입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 안에 있는 원리는 영적이고도 내적인 원리입니다. 이 원리가 처음 작동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이 어떠한 원리에 의하여 설교를 듣고 기도하며 호흡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십시오. 모든 행동은 마음 속에 있는 악한 뿌리나 원리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선한 뿌리나 원리에서 온 것인지를 나타내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에게 주어지는 선한 두 가지 원리들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1) 믿음과 관련된 변화입니다

              믿음은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영적 생명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발견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영적 활동의 직접적인 원리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행동이라도 믿음이 없다면, 그것은 도덕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별로 반짝거리지 않는 행동이라도 믿음이 있으면, 그것은 영적인 것이

             

             

            됩니다. 믿음은 다른 은혜들이 자라게 되는 가장 기초적인 은혜입니다. 거듭난 자는 이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에게 훈계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비록 드러내 놓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절하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어떠한 봉사도 하나님의 계명을 따르는 봉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그 어떠한 봉사도 신적인 동기에 의하여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자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우리의 봉사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그 방법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믿음은 궁극적으로는 오실 메시야의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도 중보자를 보내신 하나님께 복종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행함입니다.

             

             

            2) 사랑과 관련된 변화입니다.

              행동의 원리에는 하늘의 소망, 지옥에 대한 두려움, 평판, 흥미, 자연적인 양심의 압박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런 내적, 외적 원리들은 사람의 행동에 열정을 불어 넣는 풀무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어떠한 활동에 하늘에 속한 뼈대를 제공해 주는 참된 불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 말미암습니다. 이 최고의 애정은 봉사를 신령하게 만들며, 영혼에 놀라운 생동감을 솟아오르게 합니다. 새로운 창조란, 영혼이 반역의 상태에서 하나님께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영혼에게 만족을 주던 원리들을 내쫓고, 중심의 올바른 위치에 그 사랑을 쏟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최상의 사랑이야 말로 변화의 위대한 구성 요소이며, 새로운 피조물이 다른 것들과 차이가 나는 점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의 행동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거듭나지 못한 자의 행동은 바로 자신을 향한 애정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부패한 자기 사랑의 불길을 사그라지게 하고, 그 대신 영적이고도 신적인 불길이 타오르게 합니다.

             

            2. 거듭남은 목적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새로운 피조물의 목적입니다. 옛사람의 목적은 자아, 그 자체였습니다. 즉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목적으로 삼아서 살아가도록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에든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타락함으로 변질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사람을 더욱 높은 곳으로 옮겨 줍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 그 분의 기뻐하심을 위하여 희생하게 합니다.

             

             

            1) 새로운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새창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을 위하심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호2:23) 이는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교회를 심으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농부는 자신을 위해 추수하고자 씨를 뿌리고, 곡식은 그것을 뿌린 농부를 향하여 자라납니다.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그러한 영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기 마련입니다.

             

             

            자연인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 곳에는 신적인 본성이 없습니다. 그 영혼 속에는 하나님과 닮은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기 위하여, 즉 그분을 위하여 영혼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2) 새로운 창조는 복음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새로운 창조는 복음이 인쇄되는 것이기 때문에, 새롭게 창조된 자는 그 의도하는 바가 복음과 일치하게 됩니다. 마음이 복음으로 감동을 받기 전에는, 하나님의 덕과 우수함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변화가 있게 되면, 그 분의 이름을 가장 높은 보좌에까지 이르도록 높이고자 하는 열정이 가득 차게 됩니다.

            복음의 목적이 자기를 부인하고 의에 이르게 하며, 자기의 이익과 만족을 전적으로 하나님과 그 분의 율법, 그리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만물 가운데서 하나님을 최상의 존재로 높이는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창조의 목적과 동일합니다.

             

             

            3)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새로운 창조는 그 영혼이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인이 되시고 새로운 피조물의 모형이 되십니다. 그 모형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영혼의 틀을 형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피조물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그 주된 목적인 하나님을 전혀 닮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과 그 피조물 사이에는 단지 서로 다르다는 것밖에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소동과 싸움은 바로 이러한 목적의 차이 때문에 발생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창조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거듭남의 모형이며 대의입니다.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부활은 단순히 영적인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생명의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이를 예수님을 닮아감으로 이루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스스로에게 관심을 가질 때보다 더욱 하나님께 관심을 가질 때에, 넘치는 활력과 고양할 수 있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4) 새로운 창조의 목적은 영혼의 증진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은 그것 자체보다 낮거나 동등한 목적에 의하여 결코 증진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영혼과 그 행실을 증진시키는가, 아니면 퇴보시키는가 하는 것은, 그 목적이 얼마나 고상한가, 아니면 저급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이 가진 그 무한한 성격에서 볼 때 하나님보다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은 영혼의 증진에 합당치가 않습니다. 하지만 영구적이며 사람의 영혼을 가장 고귀하게 만드는 바로 그 은혜만은 인간의 증진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나아가게 될 때, 영혼은 완성될 것입니다.

             

              

            5) 지향점이 바뀌지 않는 것은 새로운 창조가 아닙니다

              영혼이 추구하던 목적의 변화가 없이 새로운 창조에 속하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영혼은 그 원래의 상태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활동을 하더라도 그 주된 목적이 그분께로 향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은혜를 입게 된 새로운 피조물은 더욱 고상한 의무를

             

             

            가진 것입니다. 그런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하는 식으로 응답하는 것에 그친다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이름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을 껴안고 뒹구는 자는, 아직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은혜의 효과적인 영향 아래에 있는 사람 즉, 성령의 성전이 된 사람들은 그 몸과 영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최고의 탁월한 목적인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6) 바른 변화가 바른 봉사를 하게 합니다

              목적의 변화만이 그 영혼이 감당해야 할 봉사를 적절히 수행하게 합니다. 변화된 목적으로부터, 모든 봉사를 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신속함과 진심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과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면, 그분을 위하여 무슨 봉사를 시작하고서도, 우리의 마음이 곧 시들해지고 지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목적의 변화야 말로 새로운 피조물이 지녀야하는 가장 본질적인 성질들 중의 하나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의 몸으로도, 영으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3. 거듭남은 사고의 변화입니다

              거듭남의 변화가 원리와 목적에 있어서 내적인 변화인 것처럼, 그것은 또한 사고(思考)의 변화이기도 합니다. 새롭게 된 피조물은 최상의 기능적 구조물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가 육체를 좇을 때에는 육체의 일들을 마음에 두었지만 이제는 영을 좇는 자가 되어 영의 일들을 마음에 두고 생각합니다(롬8:5). 하나의 원리가 그 지성 속에 주입되어, 이전에 연기에 가려져 있던 빛과는 다른 빛을 그 지성에 발하게 됩니다. 이제 지성은 무엇이 처음으로 솟아 나오는지를 더욱 재빠르고 민감하게 분별할 수 있게 되어서, 좋은 것은 받아들이고 나쁜 것은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그에게는 내부의 샘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이 되어서, 왜곡되고 타락한 영혼이 죄를 생각하면서 스릴을 느끼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4. 거듭남은 위로의 변화입니다

              본성에 변화가 있기 때문에, 만족을 하는 것에 있어서도 변화가 있게 됩니다. 모든 본성에는 그 본성이 만족하는 특별한 즐거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성인의 만족은 어린 아이와 다르고 왕자의 만족은 농민의 것과 다른 것과 같습니다.

            새로운 원리를 공급하시는 성령님은 새로운 위로를 공급해 주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즐거움과 위로 가운데서 살아가도록 부르십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은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세 가지 요소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그 마음 속에 심긴 기쁨이 있습니다.

            자연인은 세상적인 것이 제거되면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은 세상적인 것들이 없어지더라도 그들의 위로가 손상되기는 커녕 오히려 커집니다. 그의 기쁨의 근원이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넘치는 생명의 샘을 제공하여 줍니다. 그러한 위로로 인

             

             

            하여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조차도 그에게 영광스러운 위로가 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3,14절은 선포합니다.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하나님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고, 모든 일을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에서 최상의 기쁨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연합되어 있는 영혼들의 유일한 행복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본성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행복에도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하나님을 향하여 행할 때마다 그 행위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위로가 묻어 있기 마련입니다.

            출처: 청교도아카데미/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무언(無言)의 향기 최송연 어둡던 내 영혼 주님의 빛 비취셨네 내 영혼에 비친 주의 빛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소망이게 하소서 삭막하던 내 영혼 주님의 사랑 임하셨네 내 맘속에 임한 주의 사랑 세상의 삭막함을 감싸 안는 향기이게 하소서 주의 은총으로 산 생명 된 영혼 그 생명의 향기 바람결 따라 멀리 퍼지고 꽁꽁 언 땅 헤치고 돋아나는 새순처럼 깨끗한 기상 무언(無言)의 향기 되어 널리 전하여질 수 있게 하소서

            무언(無言)의 향기 
                                       최송연
                    
                    어둡던 내 영혼
                    주님의 빛 비취셨네       
                    내 영혼에 비친 주의 빛
                    세상의 어둠을
                    밝혀주는 소망이게 하소서

                    삭막하던 내 영혼
                    주님의 사랑 임하셨네
                    내 맘속에 임한 주의 사랑
                    세상의 삭막함을
                    감싸 안는 향기이게 하소서
                    
                    주의 은총으로
                    산 생명 된 영혼
                    그 생명의 향기
                    바람결 따라 멀리 퍼지고
                   
                    꽁꽁 언 땅 헤치고
                    돋아나는 새순처럼
                    깨끗한 기상
                    무언(無言)의 향기 되어
                    널리 전하여질 수 있게 하소서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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