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코하람과 지하드의 아동성폭행 역사

 

2014.4.14.일 보코하람(서양 교육은 죄악이라는 뜻)300명의 기독교인과 무슬림 나이지리아 여학생들을 가사 및 성노예를 삼기위해서 납치했다.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은 그 여학생들이 정부가 운영하는 금지된 교육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공격했다. 276명이 아직도 실종된 상태다.

 

세계의 언론매체들은 이를 나이지리아에서 벌어진 납치사건이라고 보도했지만 이는 납치사건이 아니라 사실 이는 지하드의 참모습이고 방법이다. 보코하람은 이들을 돈 받고 풀어주려고 가두어 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소녀들을 알라께서 주신 전리품으로 생각하고 팔 수 있는 재산으로 보고 있다.

 

그 소녀들은 12-15세의 연령층에 속해 있다. 그들 중 기독교 소녀들은 강간당하고 이슬람으로 개종시켜 무슬림 소녀들처럼 납치범들에게 신부감으로 주어질 것이다.

 

그중 일부는 성노예로 밀매될 것이며 이는 아프리카 전역과 중동에 만연되어 있는 현상이다. 이슬람 율법은 남자가 기호에 따라서 여자 아이나 젊은 여자를 한 달, 한 주일, 또는 한 시간 동안 성행위를 위해 구입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으며 개인적 매음 뿐 아니라 공적으로 허가된 매음굴들도 있다.

 

보코하람이란 나이지리아 탈레반이다. 그들은 파키스탄이나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탈레반들처럼 소녀들에게 교육시키는 것을 반대하며 알라를 위해서 그들을 결혼시켜 임신시키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행위는 이슬람 역사의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단순히 최근에 일어난 나이지리아 사태 때문에 놀라거나 충격 받은 사람들은 진실을 알지 못한다.

 

이번에 보여준 보코하람의 행동은 무함마드의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무장한 무슬림 군대의 전형적인 행동이었다.

 

무함마드의 전사들은 조직적으로 아라비아 반도의 유대인들을 공격하여 집단학살했다.

 

이슬람으로 개종하기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은 목을 잘랐고 그들의 여인들, 아이들, , 가축들은 무슬림들에게 분배했다.

 

여인들은 강제 개종되어 아내의 신분을 주거나 혹은 노예로 보유했다.

 

그러므로 무슬림 전사들은 권력, , 황금을 위해서 그와 같은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서구에서 정치적으로 왜곡된 견해와는 달리 이슬람에서는 기나긴 역사와 더불어 제국주의, 식민지주의, 칼로 강제 개종시키는 행위, 성노예 매매(소년, 소녀 모두), 일부다처, 성노예무역, 잔혹한 학대, 소수 종교인들을 주기적으로 집단학살하는 행위는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현상이다.

 

서양 사람들은 이것을 모를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고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또는 잘못 알고 있다.

 

기자들을 비롯한 일부에서는 아직도 보코하람이나 그런 그룹들은 불의와 가난, 정부의 부패와 존재하는 부조리에 대한 울부짖음의 표현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보코하람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다.

 

그들은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 혹은 아프가니스탄이나 지금의 부르나이처럼 나이지리아에서의 이슬람 국가라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은 시야파나 순니파 모두 샤리아(이슬람 율법)로 개인이나 공공의 삶을 지배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정부가 간음이나 배교의 혐의로 투석형을 집행할 수 있고 도둑질한 자는 손을 자르고 신성모독한 자는 투옥시키고 인질, 감금, 살해, 이교도의 추방 등의 힘을 소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남성들이 여러 명의 부인을 얻는 것은 합법이며 결혼은 강요되고 여인들은 베일 써야하며 이유 없이 구타나 강간을 당하며 불순종할 우려가 있을 때는 명예살인을 당한다. 여인들은 자손번식이나 집안을 지키는 일만 하며 교육은 그들을 타락시킬 것이다.

 

어쨋든 세계는 처음으로 힘을 합해 이것을 알아챌만한 순간을 맞이했다.

 

탄원에 서명이 되고 트위터를 통해서 기사들이 작성되고 군사적 원조가 제안되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왜냐하면 너무 많은 대중매체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최근에 발생한 야만적인 사례에 대해서 다루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녀들을 납치한 사건은 두려운 일이지만 보코하람이나 그와 유사한 다른 그룹들이 무슬림권이나 아랍권에서 소수 종교인들을 핍박한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많은 온건한 무슬림들이 여성들의 권리나 서방 활동가들을 지지한다는 것도 잊지 말자.

 

이것은 서방 세계에 대한 또 다른 지하드의 얼굴이라는 것을 기억하자는 등, 모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모두 역사적인 이슬람관이나 여성을 대하는 관점에서 초점을 벗어나게 한다.

 

1971년에 방글라데시 해방 전쟁에서 수백명의 여성들이 강간당했다. 파키스탄 군인들은 공개적으로 계속해서 장래 방글라데시 무슬림 여성들을 집단 강간하고 고문했다.

 

이 여인들을 비랑고나혹은 용감한 여인들로 알려졌다.

 

그 때 많은 여인들이 자살했고 만일 임신했으면 그들의 가족들이 명예살인으로 죽였다. 40년 후 생존한 여인들은 그 때의 정신적 충격과 수치로 고통당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친척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남편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있다.

 

그 때 서방 세계는 전혀 이 문제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1992년부터 이슬람 준군사조직원들은 알제리의 젊은 무슬림들을 가정노예로 혹은 성노예로 만들었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여성들을 잡았고 도망가면 사살했다. 임신해도 사살했다. 그들의 이름은 역사에서 잊혀졌다.

 

그 때 서방 세계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2004년 수단에서는 기나긴 추악한 전쟁이 있었다. 거기서는 아랍 무슬림 족속이 소위 성 제거라고 불리는 흑인 여성 무슬림들, 기독교인들, 정령숭배자들을 공개적으로 지속적으로 집단 강간했다.

 

나는 여성들의 대화 텐트를 개설해서 강간당한 여성들이 와서 자신들의 고통을 말할 수 있게 했고 그들이 혼자만 당한 것이 아니며 이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줬다.

 

그러나 서방 정부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이 역경에서 살아 남은 나이지리아의 불쌍한 소녀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받아들여지고 살아갈 길이 주어질 것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희생자가 아니라 전쟁 창녀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까? 그들이 눈에 띄기나 할까?

 

세계가 결국은 무슬림 여인들이나 소녀들이나 시민들이나 이교도들을 차별하지 않고 강간할 뿐 아니라 감금한 야만적인 무슬림 군인들에게 강력하게 맞설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관건이다.

 

 

필리스 체슬러 박사는 여성학, 심리학 명예교수이며 많은 책들을 저술했다.

 

최근에는 카불의 미국인 신부라는 책을 써서 2013년도 유대인 서적상을 받았다.

 

그녀는 중동포럼을 돕고 있으며 아래 웹사이트를 통해서 연락할 수 있다. www.phyllis-chesler.com

 

번역: 4HIM

 

 boko-haram-ReutersBreitbart, by PHYLLIS CHESLER:

 






살아남기 위해


위험을 기회로 바꾸는 법과 
결핍을 혁신의 기회로 만드는 법.
모든 문제를 하나의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법.

자신의 심리적 불만족을 보다 원대한 계획 안으로 
포함시킴으로써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하는 법, 

적군을 잠재적 우군으로 만드는 법. 부족함을 
풍부함의 원천으로 만드는 법, 일반적으로 
두 가지 종류의 문제에 봉착했을 때 둘 중 
하나는 나머지 하나의 해결책일 수 
있음을 깨닫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자크 아탈리의
 《살아남기 위하여》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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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들아, 돌아오라!

본문읽기:마마태복음 9장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아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그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중에는 세리와 죄인들이 많았습니다. 아무 소망없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가난한 자들은 물론이고요.

예수님 당시에 '죄인'이란 아주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자들인지 살펴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소문난 자들이라서 모든 이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자를 가리켜서 '죄인'이라 불렀습니다.

멸시받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용어이기도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나열하자면,

1.주사위 노름꾼.

1.고리 대금업자.

1.여관(사관)에서 사창을 업으로 포주 및 창녀(당시 여관은 사창굴이었다고 합니다).

1.세리(tax collectors) -로마 관리 아래서 세금을 징수하는 공무원(마태의 경우)과 및 세금 청부업자들을 말합니다.

1.소작료 징수인(publicans)- 부유한 지주에게서 경작지를 임차해서 여러 농부들에게 소작으로 주고 소작료를 징수했습니다. 이들을 당시에는 사기꾼 내지는 날강도로 여겼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주와 약정한 소작료에다가 자기 몫을 지나치게 보태서 징수했기 때문입니다.

한 철 수입으로 1년을 놀고 먹어야 했기에 무리하게 징수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농부들은 불만이 많았지만 다음 해 농사를 계속 지으려면 억울함에도 불구하고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했기에 소작을 할 수밖에 없었지요.

1.목자-다른 사람의 땅으로 양을 몰고가서 풀을 뜯게 했다는 오해, 그리고 주인의 양새끼를 슬쩍한다는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당시의 냉대와 경멸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위에 열거한 자들을 통칭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세리와 죄인들'이라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특히 종교자도자들)에게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들은 스스로 생각해도 구원의 소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롭다고 조금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공로(merite)사상으로 보자면, 죄인들이 아무리 선한 행위를 많이 한다 할지라도 지은 죄가 너무 크기에, 구원받기에는 (저울에 달아봤을 때) 함량미달이라 여긴 것이지요.

그래서 영원히 구원받지 못 할 죄인으로 낙인찍힌 겁니다.

율법조항을 지키는 자신들의 공명심을 만족시키코자 하는 바리새인들의 '자기의(self-rightoussness)'의 기준에 따라 죄인으로 취급받았던 자들이 지금 예수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판단기준과 하나님의 심판기준은 다릅니다.

이 세상에는 죄인아닌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국가의 법치는 엄연히 존재합니다. 법을 어기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인간사회의 질서를 위해 하나님이 세운 제도가 바로 국가입니다.

만일 현대에도 앞에서 열거한 종류의 직업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멸시를 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현금(개발도상 과정에서의 근현대)의 세태를 돌아보면 그 보다 심한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한 번 나열해볼까요?

1.부둥산투기꾼 - 이들이 취하는 소득은 단순한 불로소득이 아닙니다. 합법을 가장해서 불법적으로 서민들의 주머니를 털어가는 자들입니다. 부동산 투기는 하나님이 보실 적에는 날강도나 다름없습니다.

토지공개념을 도입하지 않고 짧은 기간에 압축성장을 꾀한 과도한 개발정책이 이런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교회직분자들 중에도 이에 편승해 부를 축적한 자들이 있습니다.

1.제2, 제3 금융권의 고리대금업자나 다를 바 없는 대부업자들.

1.일부 정치인이나 관료들의 부정부패-국민의 공복(머슴)이 아니라 상전노릇하면서 자기 배를 채우는 탐관오리들.

1.세금을 포탈한 - 재벌, 대기업 및 중소기업주, 부동산투기꾼, 고소득전문직 및 자영업자 등...

(전부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외도 나열하자면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그래도 생계형 범죄였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부를 축적한 자들이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죄인취급을 받지도 않으면서 돈과 권력에 기대어 '호가호위' 합니다.

그런 자들을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세태가 안쓰러울뿐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마태는 레위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 무너진 당시 유대사회에서 레위인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 하고 민족의 반역자 소리를 듣는 로마의 세리가 되었던 것이지요.(레위인에 대해서는 따로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마태를 찾아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보던 사무를 당장 그만두고 예수님을 따를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잔치석에는 많은 세리와 앞에서 열거한 죄인들이 함께 자리를 했습니다.

이 때 바리새인 하나가 딴지를 건 것입니다.

"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죄인 마태를 부르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 시대에, 한 번 외쳐봅니다.

죄인들아~ 속히 주 예수께로 돌아오라!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은 제외하고)

죄인 부르시는 음성이 모든 이에게 들려지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글: 구자준 목사

당신들은 지옥에 가야 할 사악한 괴물입니다!


사람들이 다시 성경적인 회개를 하기를 원합니다.


조지 휫필드는 알고 있었습니다.

2만명이 모인 집회에서 그는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지옥에 가야 할 사악한 괴물입니다.

가장 사악한 범죄는 당신들이 범죄자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은총을 아직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죄 짓기를 중단하지 않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개탄했습니다.

그는 머리를 재치고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그들이 지옥에 갈까 걱정 되서가 아니라

그들이 사악한 죄인들이면서

자신들의 죄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점을 분별하겠습니까?

차이점은 어떤 사람들은 지옥의 고통이 두려워 떱니다.


자신의 죄의 중대함과 범죄의 크기,

신성 모독에 대한 죄는 인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지옥에서 피부가 그을릴까봐

두려워 떤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은 성령께서 비통함으로

이르게 준비해주시는 선한 역사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기 전에는

아무도 주를 영접할 수 없고

성령께 찔림 받기 전에는 죄를 회개할 수 없습니다.


죄를 회개케 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로 자신이 지옥에 가야 할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며 영원히 지옥에

가야 한다는 것과 그보다 100배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는 범죄입니다.

이것이 20세기 설교와

존 웨슬리의 설교의 다른 점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공의를 높이고 하나님의 정의와 진노

그리고 인간이 짓는 죄의 중대함과

하나님에 대한 적극적 반역, 불법,

방종에 대해 설교할 때 하나님의 임재가

청중 가운데 강력하게 역사해

기록에 의하면 한 번은 1800명의 사람들이

완전히 의식을 잃고 기절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 빛 가운데 비친

자신들의 죄의 중대성에 대한

계시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과 영혼을

꿰뚫고 들어가셨기에 그들은 바닥에 쓰러졌습니다.


그것은 오직 웨슬리에게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미국 케네티컷 주의 뉴헤븐과 예일에서

웨슬리와 휫필드는 3년간 연속해서 사역을 했습니다.


18세기 예일 보에서 커다른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 당시 경찰들은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에게서

술 냄새가 나면 감옥에 가두었지만

술 냄새가 나지 않으면 웨슬리, 휫필드 병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휫필드 병에 걸린 사람들은

야외에 버려두면 깨어나 술주정뱅이는 술을 끊었고

잔인한 사람은 잔인한 행동을 중단했고

부도덕한 자들은 행실을 바꿨으며

도둑은 훔친 물건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고

자신들의 죄에 대한 중대함을 깨닫자

성령이 그들을 기절하게 역사한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무게 때문에 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회개케 하여

죄인들이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들은 선한 사람들에게

그들과 나쁜 하나님과의 사이에 문제가 있으니

해결해야 한다고 설득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나쁜 인간들에게

그들이 선한 하나님의 진노와 분노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을 설교했습니다.


그 결과는 회개였습니다.

그들을 생명으로 이끄는 회개였습니다.


회개를 해야 하는 한 가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경배와 예배, 사랑과 순종을 받아 마땅하시기 때문이지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지옥 가는 길을 피해 천국에 가려고 회개 한다면

당신은 10세겔과 옷 한 벌을 벌기 위해 섬기는 레위인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유익한 것을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란 하나님처럼 행동했던

죄의 중대함과 공의로운 하나님께 그분이

받아 마땅한 예배와 순종을 드리지 않은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왜 죄인이 회개해야만 합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그분께 드리기를 거부하고 있는

순종과 사랑을 당연히 받으셔야 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회개하는 이유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라면

당신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글쓴이: 하나님의 동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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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클린턴이 2011년 제네바에서 국제인권의 날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습니다. 일부 인용합니다. 

(출처 http://tvnext.org/2016/10/fb-hillary-gay-rights/)


Hillary-Clinton-2.jpg


“UN이 동성애 이슈를 강조하고 있는 이때 종교적 이유로 이를 반대해서는 안 된다”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및 성전환자들(LGBT)을 국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인종이나 성차별 또는 종교적 차별을 끝내고자 하는 노력과도 같다”

“이러한 종교적인 반대들은, 명예살인, 과부 살인 또는 여성 생식기 절단 등의 과격한 관습들을 정당화하려는 것과도 흡사하다고 하겠다.”

“동성애에 대한 세상의 의견은, 과거 노예제도에 대해 사람들이 그랬던 것과 같이 여전히 변화하고 있으며, 한때 하나님에 의해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던 것들은, 이제는 인권침해라는 비양심적인 것으로 비난 받게 되었다”

“어떤 경우에서도, 이러한 종교적인 이유나 관습들이 우리 모두에게 해당하는 인권들을 우선할 수 없다” <인용 끝>


동성애자들을 차별하는 것과 인종차별, 성차별과 같다는 발언인데, 동성애와 인종, 성에는 명백하게 다른 점이 존재합니다. 동성애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지만, 인종과 성은 타고나는 것이죠. 동성애 차별과 인종차별, 성차별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흑인들도 이런 주장을 합니다. 동성애 차별과 인종차별은 결코 같지 않다! 동성애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래 책을 보시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pshskr/220716806784


힐러리 클린턴의 경우 종교적인 이유로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 - 기독교인, 천주교인, 무슬림 등을 살인자와 동급으로 보고 있네요!  반대 = 살인입니까? 지금 현재 미국의 경우 동성애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동성애를 반대하는 분들이 피해를 보고 있습니까? 당연히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독교인들이 엄청난 벌금(베이커리의 경우 1억 5천만원 벌금)을 물어가며 역차별을 당하고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이 갑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동성애 반대 = 살인입니까? 


한 때 하나님에 의해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던 것들은 이제는 인권침해라는 비양심적인 것으로 비난 받게 되었다고요? 그러면 하나님도 성경도 비양심적이고 비난의 대상이라는 이야기인가요?


우리는 이런 발언들을 통해서 힐러리 클린턴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미국 기독교인들이 제발 현명한 선택을 하기를 바라네요. 

 

존 스토트 목사님의 고별 설교

존 스토트 목사님은 2007년 7월 17일에 케직 사경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하시고 모든 공식적인 사역에서 은퇴하셨습니다. 지금은 영국 교회의 은퇴한 목회자들을 위한 관저에서 머물고 계십니다. 그 설교의 전문을 번역해서 올립니다.

 

 

- 김현회목사 옮김-


“모델 - 더욱 그리스도를 닮는 것”

저는 오래 전에 어린 그리스도인으로서 (제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어떤 문제를 놓고 씨름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위해 품고 계신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회심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새 생명을 받았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옵니까? 물론 우리는 “사람의 제일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유명한 문항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진리를 알았고 또 믿었습니다. 우리는 또한 그보다 더 간략한 문항들, 예를 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식의 겨우 다섯 마디로 이루어진 문항을 생각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 낼 수 있는 다른 것들도, 어쩐지 전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상에서 제 순례의 길의 종점에 다가가는 이 때 제 마음이 머물게 된 그 자리를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이 진리라면 저는 다음과 같이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먼저 저는 그리스도를 닮도록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할 것입니다. 둘째로 저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대한 몇 가지 신약의 예들을 살펴볼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몇 가지 실제적인 결론을 끌어내고자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를 닮도록 부르신 그 소명의 성경적 근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근거는 하나의 본문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 근거는 하나의 본문에 담길 수 있는 내용보다 훨씬 더 풍부합니다. 그 근거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살아갈 때 함께 붙들어야 할 세 개의 본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들은 로마서 8:29, 고린도후서 3:18, 요한일서 3:2입니다. 이 세 본문을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로마서 8:29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려고, 다시 말해서 예수님처럼 되게 하시려고, 예정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이 타락했을 때 그가 지으심 받은 하나님의 형상의 많은 부분-전부는 아니지만-을 상실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형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 것은 예수님처럼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하나님이 영원히 예정하신 목적입니다.

두 번째 본문은 고린도후서 3:18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는 것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놀라운 비전입니다. 그리스도처럼 되는 이 두 번째 단계에서 여러분은 관점이 과거에서 현재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서 성령에 의한 우리의 현재적 변화로 옮겨온 것을 주목하실 것입니다. 장면이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역사적 사역으로 바뀐 것입니다.

세 번째 본문은 요한일서 3:2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우리는 마지막 날 우리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자세한 내용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될 것을 압니다. 사실상 우리가 이보다 더 알아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그리스도를 닮게 되리라는 영광스러운 진리를 아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여기에 과거, 현재, 미래의 세 가지 관점이 있습니다. 이 관점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우리는 예정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적 목적 안에서 우리는 성령님에 의해 변화되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종말론적 목적 안에서 우리는 그의 계신 그대로 봄으로써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영원한 목적, 역사적 목적, 종말론적 목적, 이 셋은 모두 그리스도를 닮는 모습이라는 같은 목표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야 할 성경적 근거입니다.

이제 저는 신약의 몇몇 예를 가지고 이 진리를 예증하고자 합니다. 먼저 저는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2:6에서 했던 것처럼 전체적인 진술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다시 말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첫 번째 신약의 예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육신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런 생각에 즉각 소스라치며 반발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성육신은 전적으로 유일한 사건이었고 따라서 어떤 방식으로든 흉내 낼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그 질문에 대한 제 대답은 네와 아니오 둘 다입니다. 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단번에 영원히 인성을 입으셨다는 점에서는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사건입니다. 그 말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성육신은 유일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는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육신은 유일한 현상이 아니라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신 그분의 위대한 겸손의 본을 따르도록 부르심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2:5-8에서 다음과 같이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우리는 성육신 뒤에 깔려있는 이 놀라운 자기비하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그분의 섬김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성육신에서 그분의 봉사의 삶으로, 그분의 탄생에서 삶으로, 시작에서 끝으로, 옮겨갑니다. 저는 여러분이 저와 함께 예수님이 요한복음 13장에 기록된 대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저녁을 보내신 그 다락방을 방문해 보기 원합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 말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 한 달에 한 번 또는 수난주간의 목요일 저녁에 성찬식을 나누면서 발을 씻기는 예식을 행합니다. 물론 그들은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 우리들 대부분은 예수님의 명령을 문화적으로 재적용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그분의 문화권에서 노예들이 하는 일을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문화권에서 서로를 위한 그 어떤 일도 비속하다거나 천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 있어서 그분을 닮아야 합니다. 저는 특별히 에베소서 5:2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이 본문이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을 주목하십시오. 첫 번째 부분은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로서 우리의 모든 품행이 사랑으로 특징 지워져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두 번째 부분은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로서 이것은 지속적인 행동이 아니라 부정과거형으로 되어 있으며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있어서 그분을 본받아서 갈보리의 자기희생적 사랑으로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예들이 어떻게 발전해 가는지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우리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고, 발을 씻기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하고,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생애의 이 세 사건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실제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넷째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오래 참고 견디시는 모습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번 예에서 우리는 바울이 아니라 베드로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의 각 장에는 우리의 고난을 그리스도에 비해 언급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것은 이 서신의 배경이 핍박이 시작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베드로전서 2장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 종들에게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참고 견디며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권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저는 이 일에 부르심 받았으며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도록 우리를 위해 본-다시 이 단어가 등장합니다-을 남기셨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고난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이 부르심은 오늘날 세계의 곳곳에서 핍박이 증가되어 감에 따라 갈수록 더 관련성을 띠고 있습니다.

저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신약의 예는 그분의 선교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과 베드로의 가르침을 살펴보았는데 이번에는 요한이 기록한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7장의 기도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저희는 우리를 포함합니다. 또 요한복음 20장에서 제자들에게 위임령을 주실 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이것은 지상사명의 요한식 표현일 뿐 아니라 세상에서의 제자들의 선교가 그리스도의 선교를 본받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어떤 면에서 그래야 합니까? 이 본문의 핵심단어는 “세상으로 보냄 받았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세상에 들어오신 것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세상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대주교 마이클 램지(Michael Ramsey)는 오래 전에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웅변적으로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의심하는 사람들의 그 의심 속에, 질문하는 자들의 그 질문 속에, 그리고 길을 잃어버린 외로운 자들의 그 외로움 속에 우리 자신이 찾아가 기꺼이 사랑의 연민을 가지고 동참할 때에만 우리의 믿음을 진술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세상에 들어가는 이 일이야말로 바로 성육신적 전도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모든 진정한 전도는 성육신적 전도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선교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 섬김, 사랑, 인내, 선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할 다섯 가지 방식입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를 닮는 것의 실제적 결과를 세 가지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를 닮는 것과 고난의 신비의 관계입니다. 고난은 그 자체로 거대한 주제이며,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도 매우 다양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설명이 두드러지는데, 그것은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를 닮게 만드시는 과정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망이나 좌절, 또는 그 어떤 고통스러운 비극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든지 우리는 고난을 로마서 8:29-20의 빛 아래서 보아야 합니다. 로마서 8:28에 의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당신의 백성의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리고 로마서 8:29에 의하면 그 선은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를 닮는 것과 전도의 관계입니다. 당신도 저처럼 이렇게 묻고 싶을 것입니다. “왜 많은 경우 우리의 전도는 종종 실패로 끝나고 마는가?” 몇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기를 원하지만, 한 가지 주된 이유는 우리가 전파하는 그 그리스도를 우리가 닮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존 포울튼(John Poulton)은 “오늘날의 전도(A Today Sort of Evangelism)”라는 제목이 붙은 통찰력 있는 작은 책자에서 이 점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가장 효과적인 설교는 자신이 말하는 것을 그래도 실천하는 자들에게서 나온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메시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사람들 자신이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다. 진정성은 주변의 사람들에게 반드시 깊이 전달된다. 참으로 전달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격의 진정성이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말씀드립니다. 예전에 인도의 한 힌두교 교수가 자신의 학생들 중에 그리스도인이 있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산다면 인도는 내일 너희들 발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처럼 살아간다면 인도는 오늘 우리 발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슬람권에서 온 이전에 아랍 무슬림이었던 이스칸다르 자디드(Iskandar Jadeed)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그리스도인 같다면-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같다면- 오늘 이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점은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세 번째 요점인 그리스도를 닮는 것과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관계로 이어집니다. 저는 오늘 밤 그리스도를 닮는 것에 대해 많은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취 가능한 일입니까? 우리들 자신의 힘으로는 분명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안에 그분의 성령님을 보내 주셔서 우리를 내면에서부터 변화시켜 주십니다. 1940년대에 대주교 윌리엄 템플(William Temple)은 셰익스피어의 예를 들어 이 점을 설명했습니다.

“나에게 햄릿이나 리어 왕 같은 희곡을 주면서 그와 같은 희곡을 쓰라고 말해보았자 헛일일 뿐이다. 나는 할 수 없다. 나에게 예수님의 삶과 같은 삶을 보여주면서 그렇게 살라고 말한다면 그것도 헛일일 뿐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었지만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이 내 안에 들어와 거할 수 있다면 나는 그런 희곡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와 사신다면 나는 그분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저는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생각해 온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만드시는 방법은 우리를 그분의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결론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적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 존 스토트 목사님은 이 설교를 마치신 후 청중에게 눈을 감고 침묵기도를 하도록 부탁하셨습니다. 청중이 기도를 마치고 눈을 떴을 때 목사님은 이미 그곳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목사님은 청중의 주의를 온전히 주님께만 향하게 하시고 자신은 조용히 사라지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청중은 목사님의 이 행동에서 참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보고 설교에서보다 더 큰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집트 도시 개발로 집값 폭등.. 수도 인구 10%가 묘지서 생활 不法이지만 정부도 사실상 묵인.. 범죄자들 은신처로 악용되기도

3일(현지 시각) 새벽 이집트 수도 카이로 동부의 알 아라파 공동묘지. 직사각형의 돌무덤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잠옷을 벗고 비석에 걸어놓은 외출복을 가져다 입었다. 한 가족은 무덤을 식탁 삼아 빵과 '풀(현지식 콩죽)'로 아침 식사를 했다. 두 자녀를 둔 아버지인 오마르 파우지는 "3년 전 알 아라파로 이사 왔다. 집세 걱정 없이 살 수 있는데, 땅 아래 묻힌 시신이 무슨 문제냐"고 했다.

알 아라파의 면적은 36㎢, 거주민은 약 200만명이다. 카이로 전체 인구 2000여만명의 10%가 무덤에서 '죽은 자'와 같이 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알 아라파는 '무덤 도시'로 불린다.

'무덤 도시'엔 상·하수도 시설이 없어 주민들은 무덤 한쪽에 세워둔 대형 물통에서 물을 길어 세수하고 찻잔을 씻었다. 주민 아이샤는 "일주일에 한 번씩 물탱크차를 불러 드럼통에 물을 채우고, 식수는 근처 이슬람 사원에 가서 떠온다"고 했다.

집 모양은 제각각이었다. 장대를 세우고 비닐을 덮은 집, 서너 평 크기의 나무 판잣집 등이 보였다. 일반 주택과 다를 것 없는 벽돌집도 있었다. 원래 무덤 관리를 위해 유족이 지어놓은 건물인데, 양해를 구하고 입주해 집으로 꾸몄다고 한다. 벽돌집 안으로 들어가 보니 중앙에 돌무덤이 있고, 주위에 소파·탁자 등 살림살이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취사는 휴대용 가스버너를 이용했다.

화장실은 따로 없어 정부가 공동묘지 곳곳에 설치한 공공 화장실을 이용한다. 공동묘지 내 거주는 불법이지만, 거주민이 워낙 많아 이집트 정부도 사실상 용인하고 있다.

날이 밝아오자, 알 아라파 주민은 묘지 밖 큰길로 나가 버스를 타고 일터로 향했다. 인근에 있는 한 찻집 주인은 "주민 대부분 아침 일찍 시내에 나가 일용직 건설 노동자 등으로 일하고 저녁에 묘지로 돌아온다"면서 "언젠가는 나일 강이 보이는 집 한 채 장만할 꿈을 갖고 산다"고 했다.

'무덤 도시'는 기독교 개종자·난민의 피난처 역할도 한다. 이집트에서 개종자는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가족 손에 살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다. 개종자들은 이를 피해 이웃 간 간섭이 적고 경찰 등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알 아라파로 들어온다. 수배 중인 범죄자의 은신처나 마약 거래 장소로 악용되는 일도 잦다.

알 아라파의 무덤들은 기독교 국가였던 이집트가 7세기 이슬람 제국의 속국이 되면서 만들어졌다. 이슬람 제국의 이집트 총독이었던 아므르 이븐 알 아스는 카이로 동부의 돌산 기슭인 이곳에 가족 묘지를 만들었다. 그를 따라 후대 총독들과 지배 관료들도 이곳을 묘지로 삼았고, 18세기엔 일반인 무덤도 들어와 공동묘지가 됐다. 알 아라파가 주거지로 변한 건 1950년대다. 개발 과정에서 도시에서 밀려난 서민들이 도심에서 멀지 않고 집세 부담이 없는 이곳을 생활 터전으로 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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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5장) 라헬의 무덤

 

  “카바르 라헬”, 라헬의 무덤은 예루살렘 남쪽 10 킬로미터쯤, 베들레헴 입구에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1900년대 초반만 해도 신작로 같은 길가에 허물어져가는 건물 안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높이 8, 9미터에 달하는 콘크리트 벽에 둘러쳐진 총길이 700 킬로미터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분리장벽의 경계의 검문소, 방탄유리 안에서 여권과 허가증을 요구하고 무장한 군인들과 감시카메라들이 지키며 빨간불, 파란불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여러 단계의 회전문을 거쳐야 통과할 수 있는 검문소를 지나 건물 속에 들어가 버렸다고 합니다.

  세겜의 참극을 일으키고 벧엘로 올라간 그들, 야곱이 돌기둥을 세우고 전제물과 기름을 붓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다음 그들은 벧엘에서 떠나 아버지 이삭이 있는 기럇아르바, 마므레로 향합니다. 그런데 에브랏 베들레헴 길에서 라헬이 난산 끝에 아들을 낳고 숨을 거두고 맙니다. 고통 끝에 아들을 낳고 그 혼이 떠나려 할 때 라헬은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 ‘내 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이름을 고쳐 “베냐민”, ‘내 오른손의 아들’로 부릅니다.

  야곱이 그를 사랑하여 외삼촌 라반에게 봉사하던 7년을 수일같이 여긴 라헬, 그러나 첫날밤을 언니 레아에게 빼앗기고, 아들을 줄줄이 낳는 언니에게 남편의 사랑을 빼앗길까봐 아들 낳기를 그렇게 소원했던 라헬, 아들을 얻기 위하여 여종 빌하를 남편에게 주면서 아들 낳기 경쟁을 벌이고, 마침내 자신도 아들 하나, 요셉을 낳고 ‘하나님이 나의 부끄러움을 씻었다.’고 외쳤던 여인, 그러나 그 라헬은 남편을 따라 아버지의 집을 향하여 가는 긴 노정(路程)에서 목적지를 앞두고 베들레헴 길가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으니 참으로 안타깝고 가련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라헬을 기억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렘31:15)” 마태복음은 헤롯이 베들레헴 일대의 두 살 아래 사내아기들을 모조리 죽인 잔혹한 사건을 놓고 말합니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2:18)”

  성경은 주님의 증거책입니다. 주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라헬의 안타깝고 슬픈 죽음은 영원한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주님께서 피로 물든 길을 넘어 십자가에로 오시는 이야기입니다. 라헬이 낳은 요셉은 형제들에게 팔려 노예로 끌려갑니다. 그러나 죽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 애굽의 총리가 되어 형제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해냅니다. 그리고 라헬이 죽으면서 낳은 베냐민, 사사기를 보면 베냐민 지파는 다른 지파들과 전쟁을 벌여 몰살의 지경에까지 이르는 참혹한 일을 겪습니다. 그 슬픈 여인 라헬의 무덤이 있는 그 베들레헴에서 먼 훗날 마침내 마리아는 십자가에 죽임당할 아들, 예수님을 낳습니다.

  “슬픔의 아들 베노니”, 그것은 십자가에 죽임당할 주님의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내 오른손의 아들”, 그것은 마침내 죄와 슬픔을 딛고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우리를 구원하실 부활의 주님의 이름인지도 모릅니다. 아들을 낳고 고통과 슬픔 가운데 숨을 거둔 라헬은 베들레헴의 구유에 아들을 낳을 마리아, 두 살 아래 모든 사내아이가 죽임당하던 그 어머니들의 통곡, 십자가 앞에서 바로 눈앞에 주님의 죽으심을 보며 고통과 슬픔을 당해야 했던 마리아의 모습, 그 슬프고 아픈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슬프고 사랑스러운 여인 라헬이여.


헤르만 바빙크(1854-1921)의 생애

유해무(고려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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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0월 5일에 756쪽이나 되는 카이퍼 저술 목록 해설집이 출판되었다. 그날 전임 수상까지 나서서 그 의미를 짚어보는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2주간이 지나 한국에서는 카이퍼의 동역자 바빙크의 교의학 4권의 번역출판기념회가 열린다. 카이퍼 저술 목록을 편집한 편집자는 동양에서 나온 카이퍼 저작의 번역이나 관련 저서들의 목록을 입수하기 어려웠다고 토로하였다. 언젠가는 바빙크 저술 목록을 편집할 때, 같은 어려움을 겪게 될까? 아니면 우리가 바빙크 저술 목록을 출판할 수 있을까?

필자는 “부흥한 교회가 신학을 생산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서 바빙크의 교의학 번역 출판은 한국교회가 개혁신학의 발전을 이룩하는 중요한 일보이다. 역자와 출판사의 수고와 인내 그리고 대담한 결단에 칭찬과 축하를 보낸다. 참석자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이 번역으로 큰 유익을 얻기 기대한다.

바빙크의 생애와 사역으로부터 한국교회가 얻을 수 있는 지침을 살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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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과 학업

바빙크는 1854년 12월 13일에 네덜란드의 호오허페인에서 그 지역의 분리 측 목사인 얀 바빙크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바빙크는 비교적 내성적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1871년에 즈볼러 라틴어 문법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하여 아주 탄탄한 고전어 교육을 받았다. 1873년 7월 15일에 바빙크는 졸업시험을 치렀고, 라틴어와 불어와 네덜란드어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같은 해에 아버지가 신학교가 있는 캄펀교회로 옮긴다. 바빙크는 1873-4년 한 해 그 신학교에서 공부한다. 카이퍼가 1874년 3월 24일에 캄펀의 학생들 앞에서 ?네덜란드 헌법에 보장된 자유의 원천과 보장인 칼빈주의?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였다. 이것은 바빙크의 일생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두 사람의 첫 번째 조우였다.

바빙크는 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1874년 9월 23일, 레이던으로 향하였다. 현대 신학의 본거지였던 레이던에는 스홀턴과 쿠우넌, 틸러 등이 있었는데, 이들로 인하여 레이던은 유럽에서 큰 명성을 누리고 있었다. 특히 스홀턴에게서 바빙크는 옛 개혁신학에 대한 지식을 전수받았고, 교의학을 명쾌하게 강의하는 방법도 배웠다. 헬라어와 라틴어 뿐 아니라, 별도로 문학부에서 셈어를 전공하기 시작하였다. 바빙크는 특히 논리학과 형이상학을 가르친 란트의 영향을 많이 받아 평생 옵조오머의 경험주의를 경계하고, 칸트를 따라 18세기의 합리주의를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자유주의 속에서도 불구하고 분리 측의 아들이었던 바빙크는 자신의 신앙을 놀랍게도 흔들림 없이 지켰나갔고, 여러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분리교회 출신 학생들과 학생회와 독서회를 조직하여, 이들과 함께 독일, 프랑스 고전들을 읽고 토론하였다.

1876년 5월 24일에 바빙크는 예과를 최우등으로 마쳤다. 1877년 12월부터 1878년 4월 사이에 신학 과정 시험에서도 우등의 성적을 얻었다. 그 해 9월 20일에 셈어 문학 졸업시험에도 합격하였다. 이 공부로써 그의 교의학은 주석적 기초를 얻게 될 것이다. 1879년 4월 4일에는 신학 석사 시험을 치렀고, 이번에도 우등의 성적을 얻었다. 석사 논문 주제는 “슐라이어마허가 성경 해석에 끼친 영향”이었다. 석사를 마치고 잠깐 캄펀에 머물 때, 겨울 내내 헤페가 편집한 ?개혁교의학?(1861년)을 읽었다.

바빙크는 내친 김에 박사과정도 밟기로 하였다. 10월 중순 쯤에 ?츠빙글리의 윤리?를 주제로 정하고 스홀턴에게 지도를 요청하였다. 쿠우넌은 논문에 대하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비공개 학위수여식은 그 해 6월 10일에 있었고, 역시 우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같은 해 6월에 바빙크는 곧장 캄펀에서 신학졸업시험을 치렀다.

분리측 교회는 탁월한 젊은 신학자의 등장을 경계의 눈초리로 맞이하였다. 자기 교회의 미온적이고 유보적인 영접에 비하여 흐룬과 카이퍼가 주도하는 화란의 칼빈주의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은, 단번에 바빙크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주목하기 시작하였다. 앞으로 그의 사역은 자기 교회와 이 칼빈주의 부흥운동 세력의 한 중앙에서 전개될 것이다. 카이퍼는 1880년 10월에 개교 예정인 자유대학교 고대근동언어 교수 자리를 바빙크의 학위 취득 직전에 제안하였다. 바빙크는 이 청빙을 수락하였다가 서둘러 철회하였다.

2. 바빙크의 경건과 목회 준비

바빙크의 학문적 준비 과정은 이로써 끝이 난다. 그는 레이던의 기독개혁교회의 충실한 교인으로 살아왔다. 일기장이나 메모에서는, 회의와 투쟁 가운데서 공부한다는 발언도 자주 나타나며 “그리스도의 합당한 제자”가 되고 싶다는 여망을 볼 수 있다.

상당한 세월이 지난 1902년에 바빙크는 레이던의 유익에 대하여 피력하였다. 레이던은 대적들을 이해하게 훈련시켰으며, 투쟁과 의심의 골짜기를 지나, 본질적으로 옳고 선한 것을 찾게 도와주었다. 그러나 내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빈약하고 갈급하게 만들었다. 이런 위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빙크는 학문적으로 뒤떨어졌을 뿐 아니라, 폐쇄성의 위험을 안고 있는 캄펀을 떠나서, 레이던이 주는 유익을 획득하려고 모험을 감행하였다. 이런 투쟁의 기초 위에 다져진 그의 신학 수업은 결국 자기 교회를 위하여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3. 목회자 바빙크

1880년 9월 18일, 바빙크는 프라네커로 가서 청빙 설교를 하였다. 아버지 얀 목사는 1881년 3월 13일에 아들을 목사로 임직시켰다. 기독개혁교회 안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신학 잡지 ?자유교회?의 편집장이 된다. 바빙크는 교인들과 교제하고 목회의 실천적인 면을 배우면서, 레이던이 주지 못하였던 것들을 많이 경험한다. 특히 아주 평범한 무학의 여자 교인들이 성경을 많이 암송하는 것에 자극을 받아 성경을 더욱 깊이 연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책들을 많이 구입하기는 하였으나 학자로서 연구할 여유는 거의 없었다.

1882년 자유대학교가 바빙크를 신약교수로 청빙하였다. 그는 캄펀신학교가 8월에 있을 총회에서 자기를 교수로 임명할 것을 기대하면서 사양하였다. 그리고 이사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저는 저의 교회를 사랑합니다. 이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일하고 싶습니다. 신학교의 부흥이 제 마음의 소원입니다. 이 기관에는 쇄신되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기독개혁교회 대부분은 이를 공감하면서, 8월 총회에서 논의할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총회가 저에게 신학교에서 일할 자리를 제안할 것을 내심 바라고 있습니다.” 바빙크는 총회가 이런 의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공표하지 않는 한, 자기 교회를 떠나서 다른 교육 기관에 헌신할 자유가 없다는 것을 계속 역설하였다.

바빙크는 신학적 작업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4 명의 레이던 교수의 공저인 ?순수신학개요?를 편집하여 1881년 4월에 출판하였다. 그는 서문에서 화란 개혁교회가 고백한 신앙의 내용이 이제는 새롭게 부흥되고 있다고 썼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신이 점차 더 “개혁파”가 되어가고 있음을 체험하였다. 이 말은 레이던 시절의 갈등이 극복되었다는 의미이다. 자기 교회의 신학적 사명을 고취하는 글에서 개혁파 원리는 모든 삶의 영역을 포괄하며, 보편적이라고 설파했다.

8월, 즈볼러 총회는 바빙크를 교수로 임명하였다. 이사회는 바빙크에게 교의학 분야를 맡겼다. 예과 과정에 속하는 철학과 헬라/로마 문화사 및 헬라어도 담당하게 되었다. 10월 8일에 프라네커교회에서 고별 설교를 하였다. 11월 6일부터 캄펀에 정착하면서 아버지의 사택에서 기거하였다.

4. 바빙크의 취임 강의

1883년 1월 3일, 29세의 젊은 학자 바빙크는 취임 강의 ?신학의 학문성?을 발표하면서 교수직을 수락하였다. 그는 성경을 신학의 원리요 인식 원천이라고 천명하였다. 다른 학문은 이성, 양심, 오성, 감정 등 인간의 본유관념에서 원리를 도출하지만, 신학의 원리는 우리 바깥에 있는 성경이며, 성령께서 베푸시는 중생으로 이 원리는 우리 마음속에서 터를 잡는다.

신학은 유기체로서 통일성을 지니는데, 아무리 신학이 복잡하게 분화되어도 신학의 원래적 의미는 교의학에 있으며, 교의학의 핵심은 신론이다. 학문으로서의 신학의 기초는 중생된 사람의 새로운 삶에 있으며, 이것이 신앙의 열매요 성령의 선물이다. 신학의 학문성을 논하면서, 그는 신학을 문학 및 종교사로 천명한 화란 고등교육법(1876)을 반박하였다. 다른 학문은 인간적인 학문의 원리에서 출발하여 창조를 다루지만, 신학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출발하며, 그리스도와 자연에서 자기를 계시하신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는다. 그는 전학문이 신학적이고, 신중심적이라 하였는데, 이런 발언은 카이퍼의 입장을 상기시키지만, 카이퍼와는 달리 선험적 체계를 거부한다. 그런 의미의 체계는 삶 자체를 죽이며, 진리를 왜곡한다는 것이다. 취임 강의 자체는 요한복음 17:3절을 인용하면서 마친다.

5. 신학교 교수진과 바빙크의 초기 사역

이 당시 캄펀에는 판 펠전, 그와 같은 날 동서가 된 브럼멀캄프, 헬레이니우스 더 콕 외에, 더 콕의 사위로서, 1875년에 취임한 노르트제이가 구약을 가르치고 있었다. 바빙크와 함께 임명을 받았던 빌렁하는 교회사와 교회법을 담당하였다. 그와 바빙크는 평생지기요 동반자이지만, 바빙크에게 그가 가장 필요하던 1902년에 세상을 떠났다.

같이 임명받아 신약을 담당한 린더보옴은 바빙크와 평생 공존하기 어려웠다. 그는 전도와 유년주일학교를 활성화시켰고, 총회적 차원에서 정신장애자를 위한 병원사역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관철시킨 실천의 인물이었다. 린더보옴은 스스로 원하였다면, 바빙크가 주도한 1892년의 교회합동을 좌절시킬 수 있었으나, 당파성과 분열을 혐오하는 그였기 때문에 그런 일을 벌이지는 않았다. 그와 바빙크와의 관계는 그와 카이퍼와의 관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카이퍼가 자유대학교의 설립을 추진할 때에 공개적으로 이를 비판하였으며, 필요하다고 여길 때에는, 그를 당당하게 비판한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이다. 이후의 캄펀 역사는 린더보옴이 홀로 노르트제이, 빌렁하, 바빙크와 대결하는 구도를 띠게 된다.

바빙크는 이 시절에 아주 강도 높게 연구하였다. 특히 고전적인 개혁신학, 철학사와 당대의 신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였다. 그는 자신의 교의학과 윤리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먼저 역사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학생들에게 고전적 개혁교의학을 소개하고 가르친 것도 이런 관심에서 나왔다. 글을 그리 많이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1884년 7월 목사연합회에서 발표한 논문 “윤리신학파”는 각광을 받았다. 이 글은 당시 화란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윤리신학파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였다. 윤리신학은 그리스도와 사탄 사이에 있는 절대적인 반제(antithese)만을 인정하고, 다른 반제들, 곧 신앙과 학문, 헬라문화와 기독교,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로마교와 개신교, 고백주의와 현대주의, 개혁과 혁명의 반제 등은 종합을 통하여 해소하려 한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신앙과 학문, 교회와 신학의 관계는 윤리신학파가 추구하는 종합의 방식이 아니라, 반제에 입각한 고립으로써 올바르게 화해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6. 또 다른 교회개혁인 애통운동(De Doleatntie)과 카이퍼

이제 바빙크와 카이퍼의 교회 투쟁을 살펴보자. 카이퍼는 지지자들과 함께 1886년에 화란 국가교회로부터 분리하였다. 1878년부터는 여하한 교리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이 때문에 당회가 교인 자격에 제재를 가하거나 성찬 참여를 막을 수 없게 되었다. 교인 자격과 당회의 자율권의 문제가 애통의 배경이 되었다. 암스테르담 교회의 당회 대다수가 이런 규정을 거부하고 회원권을 엄격하게 규제하자, 시찰과 광역노회는 카이퍼를 포함한 당회원들의 당회원권을 일시 중지시켰다. 이에 대한 반발로 ‘애통’이 일어났다. 이 개혁운동도 1834년의 교회개혁과 마찬가지로, 국가로부터의 자유와 교회의 교리적 변질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하였다. 애통측은 1887년에 ‘화란개혁교회’를 조직하였다.

7. 교회합동을 위한 바빙크의 노력

바빙크는 카이퍼와 함께 두 교회가 1892년에 합동하도록 협력하였다. 그 전에 바빙크는 분리측의 50주년(1884년)을 기념하면서, “국가로부터 자유라는 원리는 이미 기독개혁교회가 채택하였다”고 역설하였다. “국가로부터 자유”는 카이퍼의 모토 중에 하나인데, 이런 발언은 바빙크가 그와 아주 가까이 서서 신앙과 신학적 투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1834년의 분리에 대해서 유보적 입장을 취하던 카이퍼에 대해서 바빙크는 분리의 정당성을 항상 주장하면서, 분리가 개혁교회의 진리를 위한 투쟁이었다면, 애통은 개혁교회의 권리를 향한 투쟁이었다고 보았다.

기독개혁교회는 애통측과의 합동안을 1888년 8월 앗선 총회에서 처음으로 다룬다. 가장 큰 문제는 합동 후의 신학 교육이었다. 캄펀신학교와 자유대학교 신학부를 당분간은 공존하게 하자는 바빙크의 안은 부결되었다. 도리어 교회가 자체 신학교육기관을 보유해야 한다는 원리는 포기될 수 없다는 판 안델의 안이 통과되었다. 이 결의를 이끌어 낸 배경에는 린더보옴이 있다. 바빙크는 이때에 “우리가 형제라 하더라도 반드시 친구가 될 필요는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8. 교회합동을 위한 교회론적/교회법적 정지 작업

카이퍼는 1889년 초 바빙크에게 자유대학교 교수직을 제안하였다. 바빙크는 신중하고, 교회의 유익을 추구하는 지혜로운 처신을 하면서도, 스스로 판단하여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다가 결국 사양하였다.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이를 대처하는 모습에서 바빙크의 성격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교회합동을 열망한 바빙크는 1890년 ?바자운?지에 기고하면서, 세 종류의 교회를 구별하였다. 즉 택자들의 회중(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제21주일), 수세자들의 회중(화란신앙고백 제34조), 그리고 신자들의 회중으로서의 교회(같은 고백 제27조)가 있는데, 카이퍼는 첫째를, 분리측 강경파인 텐 호르는 셋째를 옹호하기 때문에 문제가 어렵다는 것이다. 바빙크는 세 개념을 모두 조화시키면서 교회를 이해하려고 하면, 두 사람 사이에는 교회론적 이견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중재하고 조화시키려는 그의 성품이 잘 드러난다. 1891년 레이우바르던 총회는 이러한 고백적 기초 위에서 합동을 추진하기로 결의하였다.

앗선 총회 직후 바빙크는 법무장관에게 1869년의 규정을 정지할 수 있는 방안이 있는지를 질의하였다. 기독개혁교회는 1869년에 ‘십자가교회’와 합동하면서 총회의 상임위원회의 이름으로 교회법과 규정을 국가에 통보하여 종교의 자유를 얻었다. 그런데 카이퍼의 눈에는, 이것이 교단을 주체로 보고, 지역교회를 지교회(枝敎會)로 보는 국가교회의 이념을 수용한 오류였다. 기독개혁교회는 합동을 찬성할 경우, 1869년의 규정을 정지시켜야만 하였다. 바빙크는 이를 법무장관에게 질의하였고, 지역 교회가 개별적으로 설립과 치리에 대한 규정을 국왕에게 보내어 인가를 받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답변이었다. 정부도 기독개혁교회의 (상임위원회가 아닌) 특별위원회의 통보를 받고, 내부적으로 많이 갈등하다가 결국은 1869년 규정의 정지를 1892년 1월에 승인한다. 이로써 합동을 위한 법적인 기초도 확립되었다. 이런 일에 바빙크는 신학자들과 법률가들을 관여시키면서 합동을 향한 길을 닦아 나갔다.

9. 캄펀신학교와 자유대학교 신학부의 통합 시도

분리측과 애통측은 1892년 6월 17일에 암스테르담에서 합동하고서 교회의 이름을 ‘화란개혁교회’라 칭하였다. 합동의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합동한 교회들은 성경에 기록되었고, 화란교회가 전통적으로 수용한 삼대신조에서 고백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연합하였다. 그 당시 화란 인구는 약 450만 명이었는데, 로마교인이 180만명, 국가교회 교인은 약 200만 명이었고, 합동교회의 교인수는 약 40만이었다. 카이퍼는 이 합동에 힘입어서 나중에 수상(1901-1905)이 되었는데, 국가교회 내의 동조자를 20만 명 정도로 본다 하더라도 약 60만 명의 교인들이 정치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다.

교회는 합동을 하였지만, 양 신학교육기관의 위치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 있었다. 다만 암스테르담 합동총회는 위원회를 임명하여 해결 방안을 다음 합동총회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바빙크도 위원으로서, 초안 작성의 책임을 맡았다. 그는 초안에서 두 학교가 공존하는 현상태의 유지는 제한적인 연구 인력과 재정의 낭비를 초래할 뿐 아니라, 각 학교의 이전의 전통을 계속 고착하게 만들어서, 종국에는 두 교회의 용해가 방해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나아가서, 그는 신학의 성격을 제시하였다. 하나님은 성경을 일차적으로 교회에 주셨기 때문에 신학의 교수권은 일차적으로 교회에 있다. 자유대학교의 신학부가 교회와 공식적인 관계 속에서 감독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신학은 인간 지식과도 전반적으로 연계되어 있다. 모든 학문은 성경을 필요로 하며, 이 때문에 신학의 조망이 요청된다. 개혁파 원리에 따르면 신학은 신학교에 감금시킬 것이 아니라, 모든 학문과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학교에서 교육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유대학교가 유럽 문화를 기독교화 해야 하는 사명을 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것은 그가 카이퍼의 학문 이론을 전적으로 지지하고 있음을 뜻한다. 바빙크는 두 기관을 용해하여 각 기관이 지녔던 장점을 최대화하기를 원하였다.

이 초안의 의도는 좋아 보이지만, 바빙크가 제시한 실행 방안은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즉 그는 새로 설립될 기관의 교수를 자유대학교를 운영하는 개혁파 고등교육협회와 교회가 동시에 임명하게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그는 양 편으로부터 다 오해와 버림을 받게 된다. 이전의 분리측과 애통측 안에는 각 신학교육기관을 중히 여기면서, 원칙의 문제로 접근하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 캄펀신학교 이사회는 통합논의를 강하게 반발하고 있었다.

바빙크의 중재 노력과 실패 과정에는 바빙크의 성격과 일처리 방식이 잘 나타난다. 그는 교회 합동 이전에는 교회론과 학문론 때문에 자신의 분리측에게, 합동 이후에는 학교 통합 문제로 옛 애통측의 오해와 불신을 받는다. 그러면서 애통측을 더 압박할 수밖에 없었고 그럴수록 그는 애통측의 불신을 받고 옛 분리측으로부터 냉대를 받는다. 이것이 교회 정치의 냉혹한 현실이요, 그도 벗어날 수 없었다.

합동 후 첫 총회가 1893년에 도르트레흐트에서 회집하였다. 총대들의 구성을 보면 다수가 분리측 교회의 배경을 가졌는데, 이것은 바빙크의 초안에 불리한 구성이었다. 정치적 감각을 가진 카이퍼는 바빙크의 초안이 당할 운명을 간파하고 있었다. 바빙크는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옛 분리측은 19세기의 신앙과 학문(신학)의 관계에 대한 그의 입장에 대하여 의심하고 있었다.

바빙크가 학교 통합의 방식으로 자유대학교로 올 수 있는 가능성이 좌절되었다. 카이퍼는 바빙크에게 자유대학교의 구약교수직을 제안하였다. 그는 다시 주저한다. 자신의 ?교의학개요?를 위해서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애통의 본거지였던 암스테르담에서 분리측과 애통 교회의 융해가 지연되고 있었다. 이 사이에 바빙크는 개요가 아니라 ?개혁교의학? 첫 권을 탈고한다(1895년). 그러면서 자유대학교 이사장에게 편지하여 청빙건은 없던 일로 하자고 썼다. 그가 청빙을 수락했다면, 4권의 ?개혁교의학?은 출판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0. 바빙크와 카이퍼의 협력: 개혁파 원리

바빙크는 교회 합동 이후 가장 큰 현안 문제인 신학교육기관의 통합을 위하여 십년 넘게 다양한 노력을 경주한다. 그는 개혁파원리의 관점에서 옛 분리측 인사들을 설득하여, 교회가 관장하는 통합된 신학부를 목표로 삼았다. 이때에 그는 이를 반대한 린더보옴과 계속 아주 심하게 충돌한다. 또 카이퍼의 정적이었던 로오만 사건에 직접 개입한다. 린더보옴과의 관계는 바빙크 자신의 문제였으나, 로오만 사건은 카이퍼의 대리인격으로서 처리하였다. 그렇지만, 바빙크 스스로도 개혁파원리를 일관성 있게 고수하지 못했다. 카이퍼와의 협력과 갈등의 관계가 계속 문제의 핵심에 있다. 이 과정에서 신학자 바빙크는 교회정치의 험한 실상을 경험하게 된다.

11. 바빙크와 린더보옴

1894년 초에, 캄펀신학교의 이사회는 상반된 의견을 가진 바빙크와 린더보옴에게 해결책을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바빙크는 예과 과정을 라틴어 문법학교로 독립시키고, 신학 졸업시험을 이사회가 아니라 교수들이 주관하는 것이 개혁파 원리에 상응한다고 주장했다. 교회를 대신하는 이사회의 불필요한 역할을 줄이고, 신학교가 신학부의 성격을 지니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린더보옴은 현상 유지, 곧 예과를 신학교의 일부(一部)로 유지하기를 원했다. 1894년 7월 9일 이사회의에서 두 입장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이 배경에는 1893년에 출판된 카이퍼의 ?신학총론?에 나오는 신학적 문제들도 깔려있었다. 린더보옴은 카이퍼가 주장하는 신앙과 학문의 관계를 비판하였다. 카이퍼가 신학을 인간적 지식의 일부로 만들었고, 이를 기초로 한 자유대학교는 신학을 세속화시키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면 신학은 신앙의 뿌리에서 찍혀나가고, 교회는 그런 세속적인 학문의 굴레를 메게 될 것이라는 우려였다. 이런 논거로 린더보옴은 두 학교의 융해를 거부하였다.

1896년 4월 바빙크가 동료 교수들과 함께 쓴 소책자 ?교육과 신학?가 나왔다. 이 책은 비록 합동개혁교회 안에는 주로 카이퍼가 야기한 교리적인 이견이 더러 있으나, 원리적인 차이는 아니라고 천명하면서, 카이퍼를 변호하였다. 개혁파원리인 영역주권을 따라, 학문은 교회가 아니라 대학교에 속하며, 신학도 학문이기 때문에, 교회가 학문적 신학 연구의 주체가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신학졸업시험을 이사회가 주관할 수 없다. 신학부 중심의 신학교육기관을 통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이 책은 세례에 대한 카이퍼와 애통측을 비판한다. 세례가 중생을 인치며, 따라서 택한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기 전에도 중생한 것으로 전제해야 한다는 주장하는 중생 전제설은 개혁신학에서 벗어난다고 보았다. 다만, 모든 수세자들은 교리와 삶에서 그 반대를 보이기 전에는 중생한 것으로 간주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나중 1905년 총회의 결정과 일치한다. 린더보옴은 외롭게 이 소책자에 대한 반박문을 썼다.

1896년 8월과 9월에 합동개혁교회의 미덜부르흐 총회는 바빙크가 1894년에 이사회에 제출한 안을 그대로 채택하였다. 즉 졸업시험은 교수회가 주관하며, 예과와 신학본과를 분리함으로써 사실상 신학교가 신학부가 되게 한다는 결정이었다. 나아가 그는 신학자문위원회와 접촉하여, 3년전 도르트레흐트 총회의 결정에 의하여 린더보옴이 작성한 위원회보고서가 채택되지 않고, 카이퍼의 신학을 비판하는 안건도 상정되지 않게 하였다. 바빙크는 자신의 초안 부결 사태와 자유대학교 청빙 좌절 사건 이후 이번 총회를 통하여 완전히 회복하는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12. 바빙크와 로오만 사건

카이퍼는 자신과 갈등 관계에 있는 로오만의 진퇴를 결정하는 일을 바빙크에게 맡겼다. 로오만은 애통운동의 동역자였고, 자유대학교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이요, 이사로서, 1884년에 자유대학교 법학부 교수가 되었다. 카이퍼와 로오만은 적어도 두 사안에서 상반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1887년 헌법 개정으로 불가피하게 대두된 가장(家長)선거권 문제 때문이었다. 1894년 자유당 정권은 선거권의 확장을 골자로 하는 선거법 개정안을 의회에 제출했는데, 카이퍼는 찬성하였다. 로오만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에게 선거권을 주면 국가가 위기에 처한다는 입장이었다. 말하자면 반혁명당 내에 있는 귀족정치와 민주정치간의 노선 투쟁이었고, 로오만이 전자를, 후자는 카이퍼가 대표하였다. 그런데 로오만의 입장은 흐룬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교회 내에 남아있던 흐룬의 추종자들은 점차 카이퍼를 떠나가고 있었다.

둘째는, 칼빈주의 및 개혁파 원리에 대한 이해의 차이였다. 카이퍼는 칼빈주의를 개혁파 원리로부터 연역하여 구성하는 체계로 보았으나, 로오만은 이런 태도에 동의하지 않았고, 성경에서 어떤 학문적 원리를 연역하는 것 자체를 불신하였다. 1895년 6월에 열린 개혁파고등교육협회의 연례대회는, 협회의 정관 제 2조에 나오는 “개혁파 원리”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그런데 로오만의 입장에 대해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안이 난데없이 상정되었다. 대회는 바로 9인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바빙크를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일은 카이퍼와 루트허르스가 꾸민 음모몄고, 카이퍼는 위원장까지 미리 정해 놓고, 자기에게 유리한 보고서의 작성을 유도하였다. 게다가 바빙크는 이들로부터 사전에 통보를 받았다. 자유대학교 행정처장 호비는 바빙크에게 이 조사 자체의 부당성을 토로하면서, 카이퍼와 루트허르스를 비난하였다.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자, 로오만은 자신이 정관 제 2조를 따라 법학부에서는 강의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카이퍼와 그의 추종자들이 인간의 죄로 변질된 창조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개혁하지 않고, 도리어 성경에서 도출한 체계를 가지고서 세상을 개혁하려 든다고 비난하였다.

13. 카이퍼가 주장하는 개혁파 원리의 승리에 기여

로오만 조사위원회는, 각 학문 분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 분과에 대해서 개혁파 원리가 무엇인지를 파악할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칼빈주의와 칼빈주의자들이 그 말씀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도출하고 적용한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로오만이 원리를 너무 쉽게 성경 말씀과 일치시켰으며, 그의 교육이나 교육 방법론에는 제 2조의 규정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다. 사실 자유대학교의 설립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가진 로오만이 정관을 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해석하는 것은 의도적인 처사였다. 설립자들은 칼빈주의의 역사로부터 학문을 위한 규범을 찾으려 했다. “개혁파란 고백적 개념이요, 따라서 교회적 성격을 지닌 개념”이라는 카이퍼의 입장을 로오만은 지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협회의 정관도 개혁파 신조들을 언급하고 있었고, 이것은 신학부를 포함한 모든 학부에 해당되는 선언으로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로오만이 이를 인정하고 동의하였다면 그 논쟁은 훨씬 더 유연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개혁파고등교육협회는 1896년 연례회의에서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를 채택하였고, 로오만은 즉시 사직하였다. 그렇지만 이 보고서는 의장인 바빙크의 생애에 적지 않은 오점을 남겼다. 비록 바빙크가 객관적인 조사와 보고서를 시도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가 카이퍼의 영향권 하에 있은 것은 정당하지 못하며, 그의 인품을 보아서도 그 처신은 이해할 수 없다.

이런 바빙크가 1901년에는 개혁파 원리를 성경과 개혁신조에만 국한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배경에는 카이퍼와의 갈등이 있는데, 이런 변화는 신학 연구와 발언도 상황에 좌우된다는 좋은 실례이기도 하다.

14. 바빙크와 카이퍼의 갈등: 신학교육기관의 통합 문제

로오만 사건을 거치면서, 바빙크는 카이퍼의 신뢰를 전적으로 받고 있었다. 그런데 서로 신뢰하고 칭찬하던 카이퍼와 바빙크 사이에 갈등의 관계가 형성되고 말았다. 물론 카이퍼와 로오만 간의 관계 결렬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두 사람 사이에도 치유되지 못할 괴리가 1899년 1월에 일어났다.

신학교이사회는 1898년 여름에 신학교로부터 분리되는 라틴어 문법학교의 조직을 위하여 위원회를 구성하고, 바빙크와 보스 등을 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새로운 기회를 잡은 바빙크는 위원회에서 신학교와 자유대학교의 통합을 추진하자고 제안했고, 보스조차도 동의하였다. 소수 위원들은, 개혁파고등교육협회가 이 안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표하면서, 미국에 출타 중이었던 카이퍼의 의견을 청취하자고 하였으나, 바빙크는 조급하게 이런 의견을 무시하고, 1899년 1월 초의 이사회의에 자신의 제안을 제출하였다.

이사회 다음 날 바빙크가 루트허르스를 설득하려고 보낸 편지에 그의 제안이 잘 요약되어 있다. 분리측의 양해가 필요한 내용이 먼저 나온다. 즉, 캄펀은 먼저 문법학교를 독립시켜 별도의 협회에 넘기며, 독립될 신학 본과를 적당한 지역으로 옮겨 새 학교로 개교한다. 그리고 자유대학교 신학부 교수들을 새 학교의 교수로 임명한다. 양 학교의 신학교수는 한 교수회를 구성하게 된다. 총회는 교육을 감독하는 5인의 이사들과 5인의 재정위원을 임명하고, 다음 세 가지를 자유대학교 행정처에 요청한다. 즉, 자유대학교 신학부 교수들을 교회에 임대해 줄 것과, 새로 설립될 신학부를 교회가 설립한 교회의 학교로 인정하는 것과, 자유대학교 신학부로서 다른 학부들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할 할 것을 요청한다. 결과적으로 이 학교가 대외적으로는 개혁파 원리에 기초한 자유대학교의 학부이며, 대내적으로는 5인의 이사들과 자유대학교의 행정처와 신학교수들은 함께 집단운영체제를 형성한다. 신학 교수의 임면은 총회를 대신하여 이사회가, 다른 학부들의 운영은 정관을 따라 협회를 대신한 행정처가 하며, 이사회와 행정처는 상호 협의는 하되 구속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고 제안하였다. 그는 후보지로 하알렘을 제시하였다. 그렇게 할 경우에, 자유대학교는 신학부에 별도의 재정을 지출할 필요가 없으며, 다른 학부의 확장과 특히 의학부의 신설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합동개혁교회 밖에 있는 신자들도 내적으로는 독립한 비신학부를 지원할 것이요, 나아가 협회의 정관 제 2조에 동의만 하면 비신학부에 개혁파 신자가 아닌 학자도 교수로 임명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물론 양 편이 각각 양보할 것도 있다. 즉, 옛 분리측으로서는 예과를 독립시켜 자유대학교 문학부에 이관해야 하며, 옛 애통측으로서는 그렇게 하여 새로 설립된 신학교가 한 편으로는 독자적이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자유대학교의 신학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카이퍼와 루트허르스는 갑자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자유대학교의 이념을 담당했던 것이 신학부가 아닌가. 과연 그 신학부를 포기하고 통합학교를 신설하는 도구로 내어주어야만 하는가. 게다가 린더보옴, 보스 등 옛 분리측 인사들이 바빙크의 안을 동의한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유쾌하지 않았다. 루트허르스는 먼저 협회 및 교수들과 더불어 의논하겠다고 답신하였다. 그러나 바빙크는 일을 바로 추진하겠다고 하였다. 자유대학교가 아니라, 옛 분리측 인사들을 설득의 대상으로 보았던 그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귀국한 카이퍼에게도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이들은 바빙크의 제안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고, 도리어 등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카이퍼는 바빙크가 미리 보스 등과 입을 맞추고 나서 비로소 루트허르스에게 연락한 것을 꺼림칙하게 받아들였다. 루트허르스가 미국에서 돌아온 카이퍼에게 부정적인 얘기를 한 결과이었다. 이런 반응에 충격을 받은 바빙크은, 자신이 옛 분리측 인사들 및 동료 교수들과 유지했던 관계가 손상 받는 아픔을 감수하면서, 양편의 주장을 종합하여 대안을 제시하였다고 답장하였다. 그러나 카이퍼는 1899년 2월 12일자 편지에서, 내용 자체가 아니라, 바빙크의 일 처리 과정을 문제로 삼았다. 바빙크는 동지로부터 불의의 일격을 당하고 말았다. 주저하는 성격을 가진 그가 지나치게 서두르는 실수까지 저질렀다. 그것이 교회 정치의 현실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이전의 친밀한 관계를 다시는 회복할 수 없었다. 그들이 추구했던 칼빈주의 부흥 자체도 여러 모양으로 피해를 받게 될 수밖에 없었다.

15. 성급하게 쓴 두 소책자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바빙크는 신학교육기관의 통합문제를 신학교의 입장에서 서서 자유대학교측을 직설적으로 압박하는 소책자 ?신학교와 자유대학교?(1899)를 급하게 썼다. 개혁교인들은 여하한 협회보다는 교회를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어떤 협회가 신학부를 설립하는 것보다는 교회가 신학교를 설립할 권리가 앞선다. 이런 입장은 이전의 린더보옴의 입장에 근접한다. 바빙크의 대안은 자유대학교가 신학부를 일단 양도하고, 새 신학교를 대학교의 소속으로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신학교육의 양분이 종결되고, 다른 학부들은 확장의 기회를 가지며, 캄펀신학교도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1896년에 이미 학문적인 신학부로 변모한 캄펀신학교를 위하여 학문의 유기체인 대학교 안에 입지를 확보해주기만 하면, 합동개혁교회는 이전투구의 긴장관계를 청산하고, 20세기를 맞아 칼빈주의를 보다 왕성하게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바빙크는 많은 반응들을 정리하고,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담은 두 번째 소책자 ?교회의 권리와 학문의 자유?를 1899년 5월에 출판하였다. 그는 협회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거론하지 않고, 교회의 권리만을 강조하였다. 학교 통합은 합동의 면류관이 될 것이요, 통합의 실패는 합동의 실패를 의미할 수 있다. 1896년에는 신학의 권리와 자유가 핵심이었다면, 1899년에는 교회의 권리와 자유가 핵심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지만 바빙크는 전례 없이 커다란 불신을 받게 되었다. 그가 이전의 분리측 인사들과 협의했다는 것이 비판의 초점이었다. 이런 논평은 주로 옛 애통측 배경에서 나왔고, 다행히 카이퍼가 논쟁을 더 이상 확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논의가 중단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알력이 곪고 있었다.

16. 계속 타격을 받는 바빙크

이런 와중에, 1899년 8월 흐로닝언에서 모인 총회는 바빙크에게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총회는 단 하나의 지역 교회도 공식적으로 반대하는 편지를 총회에 보낸 적이 없지만, 협회가 분명하게 반대하니 두 학교의 융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자신의 안이 거부되었음에도 바빙크는 ?바자운?에다 신학교의 독립적 존속이 강하게 확인되었다는 글을 기고하였다. 결과적으로 캄펀신학교의 위치는 확고해졌다.

바빙크의 실패의 원인은 무엇일까. 애통측은 린더보옴, 보스 등의 반대에서 자유대학교의 관심사에 대한 항구적인 위협과 칼빈주의의 진전에 대한 훼방을 읽었다. 반면에 분리측은 애통측이 신학교의 의미를 무시하고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위협과 무시에 대한 불안은 도무지 풀 수 없는 입장의 대결로 나타났다. 비록 바빙크의 중재안이 성사된다 하여도 애통측과 자유대학교측은 새 신학교의 주도권을 옛 분리측이 쥐게 될 것이라는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카이퍼와 루트허르스는 바빙크가 1895/6년의 조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자유대학교의 정관의 제 2조를 해석한 것과, 1899년의 해석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1896년 이후 상승하던 그의 활동은 침체기를 맞게 된다.

17. 개혁파 원리에 대한 새로운 이해?

1899년 늦여름에, 상처(喪妻)한 카이퍼에게 바빙크는 위로의 편지를 쓰면서, 서두에 이전에는 항상 부르던 ‘친구’라는 말을 빼버렸다. 이것은 린더보옴에게 “우리가 형제라 하더라도 반드시 친구가 될 필요는 없다”고 던진 말을 상기시킨다.

1899년 12월 6일, 교장 임기를 마치면서 행한 특강 ?박사직분?에서, 그는 신학교수직은 곧 박사직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직분의 회복을 옹호하면서, 학문의 유기체와 대학의 통일성은 추상적인 철학적 관념일 뿐이요 원리가 될 수 없다고 아주 냉소적으로 논평하였다. 이것은 카이퍼를 겨냥한 발언이었고,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담은 표현이었다. 그는 “학위 없는 사람들이 사람 없는 학위보다는 낫다.”는 자기 동료 빌렁하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특강을 마쳤다.

바빙크는 1890년 연초부터 ?바자운?의 편집장의 일을 맡았다. 그의 필치는 대체로 온건하였으나, 카이퍼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선택론을 출발점으로 삼아 잠재적 중생, 영원 칭의 등을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는 단호한 어조로 비판하였다. 비록 카이퍼는 자기의 입장을 절대 유일하다고 주장하지 않았지만, 추종자들은 그런 입장에 빠졌다고 비난하였다. 유아세례의 기초가 중생 전제나 잠재적 중생이 아니라, 은혜언약에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임을 분명히 밝혔다. 중생이 소명보다 앞선다면, 설교를 통하여 회개를 촉구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목회적 관심에서 카이퍼와는 신학적인 대립의 각을 세운 셈이다.

바빙크는 구체적으로 규명되지 않은 개혁파 원리 위에 세워진 학문은 모래 위의 성이라고 화답했다. 평화로울 때는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일단 갈등 상황이 발생하면, 도대체 어떤 개혁파 원리인지가 불분명하여 사태 해결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보았다. 만약 신조가 신학부에만 원리이고 다른 학부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면, 칼빈주의는 교회 밖에서 일반은혜를 원리로 삼아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자유대학교는 일반은혜의 영역을 지배하는 원리를 탐구하며 규정하는 임무를 갖게 될 것이다. 결국 종교로서의 칼빈주의로부터 철학으로서의 칼빈주의로 중심축이 옮겨가고, 이 현상은 제도로서의 교회로부터 유기체로서의 교회로, 특별은혜로부터 일반은혜로 옮겨가는 데에서도 나타날 것이다. 이런 발언은 몇 해 전의 로오만 조사위원회 위원장의 말이 맞는지 귀를 의심케 하는 발언이다. 그가 개혁파 원리를 말하면서도 그 원리를 끝까지 따르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8. 통합의 좌절과 교회 정치의 피해자

1902년 아르넴 총회는 40명의 총대들로 구성되었고, 바빙크는 다른 교수들과 함께 자문위원이었다. 외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수상 카이퍼는 편지를 보내어 바빙크를 겨냥하면서 한 학교가 교회의 신학교요, 동시에 신학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였다.

총회는 신학교 문제를 다루기 위하여 회장단에게 자문위원회의 구성을 일임하였다. 바빙크는 다시 중재안을 내었다. 즉 교수 임면권은 총회가 가지도록 하여, 협회를 완전히 배제한다. 이것은 분리측의 입장이다. 바빙크는 신학의 학문성을 표방하면서도 신학교육은 오직 교회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수 임명 추천권은 교수들에게 주어서, 교회가 임명한 이사회는 그 추천에 찬반 의사를 밝히고 총회에 보고함으로써 자유대학교 교수들의 염려를 불식시키자는 것이다. 대다수 총대들이 이 안에 동의했고, 심지어 보스도 찬동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보스가 새 안을 발의하였다. 보스는 차근차근 되새겨보니, 루트허르스가 심약한 바빙크에게 영향을 미쳐서 나온 안이라는 사실을 늦게 깨닫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두 안을 축조하여 표결에 붙이니 26대 14로 바빙크의 안이 통과되고, 보스의 안은 부결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총회가 일괄 표결할 직전에 보스는 14명의 총대와 노르트제이 및 린더보옴의 서명을 담은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즉, 바빙크 안은 교회가 자체 신학교육기관을 갖는다는 것을 인정한 합동정신과 합동의 조건을 위배하기 때문에, 자기들은 총회가 달리 결의할 경우 책임을 질 수 없다는 내용을 담은 자기들의 선언서를 총회가 채택해주기를 요청하였다. 판 안델이 나서서 서명한 총대들을 설득한 뒤에 이 안을 표결에 붙이니 부결되었다. 이로써 바빙크 안이 통과되었다. 총회장이 소수 반대론자들에게 다수의 의견을 따르도록 권면하자, 보스가 소수파를 대신하여 교회의 화평을 위하여 결의된 내용을 추진하지 않기를 간곡하게 호소하였다. 이 때에 옛 애통측 출신이었던 총대 판 쉘펀은 이 발언의 심각성을 간파하고, 위 결의를 추진하지 않기로 하자는 안을 공식적으로 발의하고 그의 안이 통과되었다.

판 쉘펀 안의 배경은 명백하였다. 즉, 카이퍼가 합동개혁교회를 배경으로 하여 수상이 되어, 견고한 우파 연정을 수립한 상황에서 개혁교회가 분열한다면, 이것은 그에게 큰 타격을 줄 것이 너무나 명백하였다. 자문위원회는 신학교를 교회의 고유한 기관으로 유지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로써 바빙크의 모든 시도는 최종적으로 좌초되고 말았다. 10년 간 교육기관의 통합을 성사시키려고 백방으로 애쓴 그에게는 크나큰 좌절을 안겨다 주는 결정이었다. 바빙크는 곧장 총회 회의장을 떠나버렸다. 1899년의 경험이 재현되었다. 차라리 바빙크 안을 폐기하지 말고 다음 총회로 미루었으면, 교회 분열의 위험도 막고, 계속 남게 될 긴장도 풀 수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 총회였다.

바빙크가 양 교육기관의 통합에 그렇게도 집착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그는 자기의 신앙적 배경인 분리측을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다. 그는 신앙과 학문, 경건과 세상적인 삶의 균형적 조화를 추구하였다. 이런 자세는 보편성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나왔다. 레이던으로 가는 모험을 감행하였고, 역사적인 개혁신학을 연구하여 적극적으로 세상 속에서 기독자의 삶을 살고 싶었다. 바빙크가 자유대학교로 옮긴 이후, 그가 교육이나 정치에 관여하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개혁신학에 기초하여 화란을 기독교화하기 위하여 자유대학교라는 학문 기관을 활성화시켜야 하며, 이를 위하여 제한적인 재원을 결집해야 한다고 보았다. 동시에 그는 옛 분리측의 입장을 따라 신학 교육의 주체는 교회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나 옛 분리측 인사들과 자유대학교의 교수들은 고유한 입장만을 고집할 뿐, 바빙크가 원하는 방식으로 보편성을 가진 학문과 신학을 추구할 기회를 쉬 베풀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시도와 좌절의 배경이었다.

19. 자유대학교 교수, 카이퍼의 비판자가 된 바빙크, 말년

아르넴 총회 이후 합동개혁교회는 불안감에 쌓인 위기 국면에 들어섰다. 바빙크와 린더보옴은 이전 그 어느 때보다 더 깊은 갈등 관계에 빠져들었다. 린더보옴은 바빙크가 흐로닝언(1899) 이후 다시 루트허르스와 연합하였다는 사실을, 바빙크는 린더보옴과 노르트제이가 추호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용납할 수 없었다. 20년간의 동역 이후, 쌍방은 더 이상 공존할 수 없게 되었다. 린더보옴은 바빙크를 신뢰할 수 없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로, 바빙크는 린도보옴을 극단주의자로 보았다.

총회가 끝난 수주 후에 그는 자유대학교의 교의학 교수로 청빙을 받았다. 이사회는 난상 토론 끝에 그에게 1903년 1월 1일부로 명예로운 퇴직을 허락하기로 결의하였고, 그이 후임교수를 결정하였다. 바빙크는 자신의 안이 회생할 수 있도록 이들이 임명을 수락하지 않기를 내심 바랐다. 이로써 옛 분리측 소수파는 뜻을 관철할 수 있었고, 이를 끝까지 제지하려 한 바빙크는 캄펀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아주 힘겹게 보냈다.

20. 바빙크의 왕성한 연구와 결실

바빙크는 캄펀 교수로 임명된 이후 1892년까지, 기초를 쌓아가는 연구를 지속하였다. 다양한 주제를 심도 있게 연구한 기초 위에, 그의 ?개혁교의학? 4권은 형성되어 갔다. 4권은 각각 1895, 1897, 1898년과 1901년에 출판되었다. 이 ?개혁교의학?은 그때까지 화란에서 나온 어떤 교의학도 능가하는 대작이었다. 그는 자신이 다루는 교의마다 그 역사적 발전을 상세하게 다룬다. 또 19세기 철학과 슐라이어마허 이후의 독일과 화란의 신학의 발전을 폭 넓게 소개할 뿐 아니라, 교부와 개혁자들의 입장도 광범위하게 취급한다. 그는 이처럼 자료를 섭렵하고 요약하는 데 뛰어났다. 나아가 ?개혁교의학?은 강력한 체계 구성의 특징을 지닌다. 비록 그가 주제별로 구성하지만, 배후에는 창조주, 구속주, 완성주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신지식이 깔려있다. 당대의 철학의 발전도 잘 소화하여 싣고 있는데, 놀랍게도 그는 新칸트철학에 대항하기 위해서 당시의 新토미즘에 영향을 받고, 아우구스티누스에게로 소급되는 기독교화된 이데아론을 옹호한다. 마지막으로, 당시의 현대 신학이나 불가지론을 논박하면서, 공교회적이고 개혁적인 교의를 변호하는 실존적인 긴박감이 감돌고 있다.

21. 계속 쓸쓸한 바빙크

바빙크는 1901년 12월 17일에, ?예배와 신학?이라는 특강으로 자유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바빙크는 대도시 암스테르담에서도 분리측을 이루었던 평범한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바빙크는 동료들 사이에서 비교적 외로웠고, 주도적인 동료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다.

바빙크의 강의는 전임자 카이퍼보다 훨씬 덜 구성적이고 덜 사변적이며, 더 주석적이며, 역사적 접근을 선호하였다. 그러나 캄펀의 강의실에서 그가 누렸던 환호가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교회 안에서도 이전만큼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는 옛 분리측 인사인 린더보옴과 보스의 신뢰를 잃어버렸고, 루트허르스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대학교의소수 핵심세력에는 들지도 못했다.

22. 1905년 총회와 바빙크의 역할

1905년 우트레흐트 총회는 옛 애통측의 일부 인사들의 신학적 문제들을 논의하고 처리하였다. 기실은 카이퍼의 신학에서 파생된 문제들이고, 그의 추종자들이 더 강하게 고수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옛 분리측 인사들은 합동 이전부터 문제를 제기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전택설, 영원 칭의, 즉각적인 중생과 중생 전제설 등이다. 이 문제들은 언약 이해와 유아세례 등의 실제적인 사안들과 직결되어 있었다. 바빙크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 카이퍼를 동정적인 입장에서 비판하였다. 1905년의 총회에서 그의 이런 태도가 반영되었고, 당분간은 합동한 교회들이 이 문제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되었다. 결국 중생전제설은 1942년의 총회에서 제기되어, 급기야는 1944년에 교회 분열을 야기하게 된다. 이 외에도, 바빙크는 화란신앙고백 36조에 나오는 21글자를 삭제할 것을 제안하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36조에서 정부는 경찰권을 가질 뿐 아니라, 거룩한 종교에 대한 책임도 져서 “모든 이방종교와 그릇된 예배를 추방하고 근절하며, 적그리스도의 왕국을 궤멸해야 한다”고 그 임무를 규명한다. 분리나 애통운동은 국가의 지배와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교회를 추구했다. 이 보고서는 정교분리의 원리를 신앙고백서에도 반영하기를 제안하였고, 총회는 이 보고서를 그대로 채택하였다.

1914년, 헤이그 총회는 그에게 신학교의 박사학위 수여권에 대하여 자문을 요청하였다. 린더보옴도 자문위원이었는데, 그간에 흐른 세월로 상처는 치유되고, 두 사람은 서로 협력할 수 있었다. 바빙크은, 학문기관이 아니라 교회의 회합인 총회는 순수한 학문적 사안을 다룰 수 없기 때문에 교회의 학교인 신학교가 박사학위를 수여할 없다고 보았다. 총회는 바빙크의 자문에 따라 박사학위 수여권을 신학교에 부여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바빙크는 1906년에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1908년 8월에 그는 화란을 출발하여 9월 7일에 뉴욕에 도착하였다.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스톤 특강 ?계시철학?을 강의하였다. 1911년에는 상원의원이 되었다. 1913년 개혁교회 전도집회에서 전도는 감리교적이 아니라, 개혁파적 의미로 죄인을 십자가 아래로 인도하는 것이라고 설파하였다. 그러므로 전도는 국민 전체의 개혁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23. 신학을 등지고 정치와 교육학과 교육 현장 등에 몰두

1911년에 바빙크는 상원의원이 된다. 그는 상원에서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연설하였다. 종교학부가 된 국립대학교의 신학부를 명실상부한 신학부로 개정할 것을 촉구하였고, 식민지를 기독교의 정신으로 통치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는 여성참정권도 주장하였다. 또 정치 영역에서도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국민생활이 죄로 인하여 철저하게 부패한 것을 지적하면서, ‘회개’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구제는 국가가 아니라, 교회의 사명이라는 논거로써 사회주의를 반대하였다. 1919년에 마지막 연설을 하였는데, 정치 성향의 좌우를 막론하고 정부는 기독교적 원리를 적극적으로 존중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교육 쪽에서 바빙크의 활동은 두드러졌다. 1870년대의 기독교학교투쟁은 종결되었기 때문에 1904년에 그는 쇠퇴 일로에 있는 개혁파학교협회에 관한 보고서를 썼다. 이 협회는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개혁파학교를 지원하던 단체였다. 그러나 모든 학교가 국고 보조를 받게 된 상황에서 이 협회의 존재 이유는 사라지고 말았다. 바빙크는 보고서를 통해서, 이제는 연맹을 구성하여 기독교학교가 동일한 신앙고백과 사명과 관심 위에서 상호 협력하고 도우며, 정보를 교환할 필요성이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래서 지역적인 기구를 만들고, 연례대회에서 강의를 들으며, 새로운 자료를 교환하고, 또 사범학교와 교육학 연구소를 세우자고 제안하였다. 1904년에는 ?교육학원론?을 출판하였다. 기독교학교는 투쟁의 마지막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지적한 이 책은, 권위서가 되었다. 교육은 문화와 삶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 심리학이 교육학에서 지니는 의미를 잘 해명하였다. 그러나 교육학을 심리학 위에 정초하는 것은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심리학보다는 종교와 신학이 교육학 정초에 기여할 것이 더 크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다윈의 이론에 기초한 심리학이나 교육학의 위험을 경고하였다. 특히 그는 종교교육을 중심으로 삼고, 언어 영역과 자연과학 영역을 정위시키는 전반적인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구상하였다. 언어와 역사는 산수나 자연과학보다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식획득을 주로 삼는 그의 입장은 19세기적이라 하겠다.

이런 다양한 관심과 활동으로 인하여 신학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만큼 줄어들었다. 그는 1906, 1908, 1910, 1911년에 ?개혁교의학? 4권을 차례로 개정하였다. 여러 곳을 보완하고, 새로운 자료를 첨부하였으나, 원리면이나 내용면에서 1판의 기조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1911년에 ?현대주의와 정통?을, 1912년에는 ?기독교?를 소책자 형태로 출판하였다. 전자는 자유대학교 총장퇴임 특강이었는데, 현대신학의 문제점들을 다룬 수작으로서, 그 당시 화란의 현대신학자들과의 대화라 하겠다. ?기독교?는 교의를 복음의 헬라화라고 보는 교의사가 하르낙의 명제를 반박하면서, 교의의 관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계시의 실재와 궁극성”이라고 밝혔다. 1909년 칼빈 탄생 400주년에는 칼빈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일반은혜?를 영역하여 기념논문집에 기고하였다. 그는 자기 교의학을 대중적으로 요약한 ?하나님의 크신 일들?과 기독교중등교육을 위하여 ?기독교교육입문?을 출판하였다. 1913년에 사실상 그의 교의학적 작업은 막을 내린다. 강의 준비에 필요한 극소수의 책만 남기고, 심지어 고전적인 개혁신학자들의 저작들을 처분하기까지 하였다. 신학과 교의학 대신에 교육학과 철학이 그의 새로운 주제가 되었다. 1904년에 그는 소책자 ?기독교학문?과 ?기독교세계관?을 출판하였다. 전자에서 그는 다시 칸트와 대결한다. 칸트가 형이상학을 추방하였기에 유물론과 불가지론이 득세하였다고 본다. 화란의 경험주의자 옵조오머도 이 영향 하에 있다. 그러나 신칸트주의는 그래도 종교의 여지를 남겨두었으므로 개선이라고 보았다. 그의 대안은 비판적 실재론인데, 신토미즘의 영향과 심지어 칸트의 흔적도 보인다. ?기독교세계관?에서는 불가시적인 세계와 감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세계와의 대치를 용납하지 않았다. 불가시적인 것은 가시적인 것에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경험계 뒤에는 이데아계와 규범계가 펼쳐져 있다. 그는 조화를 추구하는 사상가로서 중세의 흔적도 보이지만, 역시 현대인으로 고민하였다. 자연과학, 특히 다윈의 이론에 정통하여 그 허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진화론은 작업가설로는 가능하지만, 결국은 세계관이 되었다는 것이 그의 반론의 핵심이다. 철학적 작품들을 읽으면 그의 종합적인 작업 방식이 눈에 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칼빈과 칸트와 셸링을 인용하면서, 이들을 상호 조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바빙크의 신학과 철학적 작업은 1914년을 기점으로 하여 종결된다. 따라서 1920년 전후에 등장한 바르트나 브룬너 신학, 셸러와 훗설의 현상학이나 실존철학과는 대결하지 않았다. 그는 역사적인 개혁신학을 당대의 현대신학과 대결시켰고, 철학자로서 19세기의 실증주의와 유물론을 반박하였다. 신학과 신앙의 세속화에 휩쓸리지 않고, 역사적인 개혁신학의 보편성의 관점을 가지고 여러 신학자와 철학자의 사상을 소화하고 현대화하려고 노력한 신앙고백자이다.

24. 바빙크와 소장층의 운동

1892년 합동 이후부터 개혁교회 안에 상존하던 제반 문제들이, 1914년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노출되기 시작하였다. 카이퍼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드는 반면에, 바빙크가 자유대학교에서 배출한 목회자들이 주동이 되어 다양한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 이른바 ‘소장층 운동’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당시 합동개혁교회를 지배하고 있던 수구적 자세와 외형주의를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공식적으로 천명하지는 않았으나, 대표적 인물에 속하는 빌렁하는 새로운 성경 번역, 예전의 갱신, 신앙고백의 확대 등을 내세웠다. 어쨌든 이들은 자기 교회 안을 지배하고 있는 자족감을 부수고 싶었다. 이 운동은 바빙크에게서 자극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바빙크가 현대 문화와 변화된 세계를 뛰어나게 요약하면서 기독교가 처한 상황과 의미를 제시함으로써 구시대에서 새시대로 향하도록 영감을 주었다고 하였다.

이들은 1920년에 창간된 새로운 잡지 ?개혁?을 중심으로 모이기 시작하였고, 바빙크 사후에 이 잡지의 창간이 바빙크의 소원이었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하여, 바빙크가 이 운동의 전면에 나선 것은 아니며, 측면에서 호의적인 태도로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사실 카이퍼의 영향이 감소하고 있는 시점에서, 바빙크는 60세(1914년)를 맞이하였다. 소장층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던 그는, 개혁파 신자들에게 새시대의 실상을 바로 알려주고 싶었다. 그는 세계대전이라는 서구 기독교의 위기를 예의주시하면서, 도덕적 가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간파하였다. 여러 가지 매체와 글을 통하여, 그는 전쟁의 문제를 다루면서, 1917년 로테르담 총회에서는 총회가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을 결의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대학/청년 조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특히 국립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개혁교회 학생들에게 큰 관심을 기울였다.

25. 말년의 바빙크는 변했는가?

말년에 바빙크는 변하였는가? 20세기 초에 사회와 교회는 변화의 한가운데에 처해 있었다. 1905년 우트레흐트 총회가 여러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화해안을 이끌어 낸 뒤에는 합동개혁교회 안에서 진지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신학적 논의는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고, 교회와 신학은 서서히 보수화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이전 분리측은 잡지 ?파수군?을 창간하여 옛 분리측 전통만을 고수하는 폐쇄성을 노출하였다. 아들 카이퍼도 이전 애통측의 노선을 보수할 뿐, 갱신 운동에는 호의적이지 않았다. 소장층은 이런 보수화에 반기를 들었지만, 자체 내에 뛰어난 신학적 인물이 없었다. 바빙크도 보수주의를 경고하였지만, 그 조차도 자신의 ?개혁교의학?에만 정주하고 있었다. 1918년 스스로 교정한 제 3판은 제 2판의 복사본 이상은 아니다. 국내외에 등장한 수많은 변화를 감지하였으나, 그 대안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바빙크가 별세하기 1년 전인 1920년 여름에, 총회가 레이우바르던에서 모였다. 이 총회는 시대 상황을 여실하게 노출시킨 회의였다. 바빙크는 젊은이들의 방문을 많이 받았고, 시대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자기의 논문을 편집하여 출판한 자기 동생에게 개혁파 교인들에게 시대의 상황을 알리고, 조속하게 단합과 신뢰를 회복할 것을 촉구하는 소책자를 쓰겠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총회에 상정된 신조와 예전 갱신 청원건 등, 쉽게 풀 수 없는 문제들로 인하여 답답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한바탕 소용돌이가 닥쳐올 줄 알면서도 제대로 대처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총회는 시대정신에 대하여 토론하고 입장을 밝히기 위하여 진지하게 움직였다. 캄펀의 그의 후임자 호너흐는 이 입장 표명에다 극장출입, 카드놀이와 춤추는 것까지 포함시켜 경고하자고 제안하였으나, 바빙크는 교회 안에는 이보다 더 끔찍한 범죄가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고리대금업이나 전쟁물자 투기와 삶의 세상화 등을 염두에 두었다. 그는 신조를 그대로 유지하되 확장하여야 하며, 특히 영감과 성경의 권위, 참교회와 거짓교회, 국가와 교회의 직무에 관한 신앙고백은 개정할 필요성이 있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921년 7월 29일에 그는 영면했고, 8월 2일 장례식에서, 학생들이 그의 관을 운구하였다. 개혁교회는 한 해 전에 카이퍼를 잃고, 다시 바빙크를 떠나보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도 되기 전에, 이전 역사는 종지부를 찍고 있었다.

26. 바빙크의 삶에 대한 평가: “내 학문이 아니라 오직 신앙만이 나를 구원한다”

교수로서의 바빙크는 어느 학교에서도 빛날 학문적 선생이었다. 박학하였고, 독서량은 엄청났지만, 잰체하지 않는 화법으로 전달하였다. 문제를 파악하는 예리한 감각을 지녔으며, 터놓고 표현하였다. 성급하지 않고, 깊은 성찰을 통해서 해결책을 알게 되면, 스스럼없이 이를 알렸다. 불필요한 논쟁을 야기하는 위장 해결책을 항상 경계하였다. 논리학을 철저하게 공부했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서는 말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요인의 의미도 잘 알았다. 교의학자로서 그는 개혁신학이 칼빈신학과 동일하다는 자세로 캄펀과 암스테르담에서 사역하였다. 단순히 칼빈에게로의 회귀는 아니며, 그 이후의 발전을 고려하면서 비판도 하고, 유보적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다. 1750년부터 경직되기 시작하던 개혁신학을 그는 이런 자세로 활성화하였다. 레이던에서 철학도 공부했기 때문에 종교와 철학의 고유성과 차이를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기독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위대한 사상가들의 사상을 공부하였다. 이 과정에서, 삶과 세계에 관한 질문들에 대해서 이성과 감정을 충족시키는 ?계시 철학?을 추구하였다. 그는 칼빈처럼 개혁파 사상 뿐 아니라, 개혁파 생활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아름다움의 감동을 봉쇄하는 경건주의적 폐쇄주의를 폭로하고 비판하였다. 그는 일반은혜의 관점에서 예술과 과학 기술 분야의 위대한 발견과 유익한 발명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재세례파를 거부하는 칼빈주의 정신의 발로였다. 연구와 교수에 지장을 받지 않는 한, 교육과 사회 문제, 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 실제적인 문제들을 설명하고 가르치기 위해서 전국을 여행하였다. 이 모든 사역의 기초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특별 계시였다.

바빙크는 반대자에 대해서는 항상 포용성을 가지고 상대방의 장점을 부각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당대의 기라성과 같은 많은 신학자와 기독교 사상가들을 존경하였다. 이들보다 어려운 시기에 칼빈주의의 기치를 올린 흐룬을 더 존경한다고 말하였다. 캄펀과 같은 소도시에서 활동하였으나, 그는 폭넓은 공교회적 정신을 지녔다. 이런 자세는, 그가 1888년 12월 18일에 행한 특강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에서 이미 잘 나타난다. “복음은 개인 뿐 아니라, 인류 전체, 가정과 사회와 국가, 예술과 학문, 전 우주, 바로 신음하고 있는 모든 창조물을 향한 복음이다. 신앙이 받은 약속은 세상을 이김이다. 이 신앙은 보편적이어서 때와 장소, 어느 국가와 민족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 신앙은 모든 상황에 적합하며, 본연적인 삶의 모든 형편과 연관되고, 모든 시대에 합당하며, 유익하며, 모든 환경에 적당하다. 오직 죄에만 대항하면서, 십자가의 보혈로 정화되는 것 외에는 어느 것과도 충돌되지 않는다.” 그는 자연과 은혜의 균형 있는 관계를 제시하면서, 분리측 교회 안에 여전히 남아있는 분리주의의 흔적을 경고하였다.

이처럼 온건한 바빙크였으나, 신학교육기관의 통합 문제에 있어서는 카이퍼와 큰 상처를 입었다. 카이퍼와도 갈등 관계에 빠졌고, 옛 분리측 인사들과도 등을 지고 말았다. 개혁파원리를 확고하게 따랐던 그가 이 과정에서 그 원리를 비판하는 지경에까지 나아갔다. 그는 교회 정치의 현실을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개혁파원리에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부패도 들어있는데, 교회정치는 종종 이 진리를 철저하게 체험하고 고백하도록 강요하는 현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그는 죄와 은혜, 죄과와 사죄, 중생과 회개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세태를 비판하였다. 이런 표현은 온건한 바빙크가 가장 신랄하게 표현한 예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분리와 합동이라는 교회적인 문제뿐 아니라, 세기가 바뀌어서 새로운 문제들이 제기되는 시대에 살면서, 신앙으로 헤쳐나간 바빙크가 임종시에 한 말은 그의 일생을 잘 요약한다: “내 학문이 내게 준 유익은 무엇인가. 내 교의학 또한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오직 신앙만이 나를 구원한다.”

 

 

 

27. 바빙크와 한국교회

교회의 신학자 바빙크로부터 한국교회는 신학이 교회를 위하여 존재함과 세상을 향한 성도의 책임을 가르치고 훈련시켜야 함을 배울 수 있다. 신학을 교회의 사안으로 확실하게 규정하되, 그 교육을 받은 목사들이 성도를 가르치고 이들이 세상에서 행해야 하는 사명을 잘 부각시켰다.

교회 합동과 학교 통합 논의 과정, 또 1905년 교리적 토론에서 보인 그의 중재적 자세도 흠모할 만하다. 교회 정치에 대한 측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약한 바빙크는 교회 정치를 비교적 단순하게 접근하였다. 비록 교회정치의 희생자라는 면이 있지만, 이것이 말씀대로 사는 자의 진면목이 아닐까?

자기 교회와 그 신조와 경건을 사랑하면서 신학한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의 신학자였다. 교회의 주인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학이라는 이름을 경배하고, 그것을 목회 현장과 세상에서 구현하려고 애썼던 그는 경건과 신학의 좋은 귀감이다.

차제에 신조를 중시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바빙크 신학은 개혁파 신조를 떠나서는 성립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역교회를 기초로 한 교회회의와 정치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상회와 하회라는 위계적 제도도 사라질 것이다. 이런 기초 위에서 한국의 개혁신학도 발전할 것이며, 또 개혁신학의 전통 위에서 기도와 전도의 열심도 보태면, 개혁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적 불운을 겪는 영적 이유: 미르=龍



< 기도 >
우리 하나님 아바 아버지시여!
우리 대한민국을 주님의 오른 손으로 꽉 붙잡아 주시옵소서!
박근혜 대통령이 이 기회에  자신의 힘과 용에 속한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그의 전생애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께 맡기고,
범사에 국정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기도하며 운영하는
다윗과 같은 지도자로 세워주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금식하며 강청기도 드리옵니다.

작금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적 불운과 위기에 직면한 영적 이유는 미르=龍

옛 뱀인 용은 하나님이 가장 혐오하는 존재입니다.
그가 짐승(The beast), 곧 적그리스도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계 13:2하; 13:4)
성경에서 용은 마귀, 사탄을 상징합니다. (계 12:9)

박근혜 대통령의 비선실세로 알려진
최태민의 딸 최순실이 한국의 대기업 12곳에서
무려 800억 가까이 기부금을 받아서 설립했다는
재단법인 미르.

"미르"는 고어로 '용'(Dragon)이라는 뜻입니다.
미르재단 간판 속에 있는 그림을 보십시오.




최순실이란 여자가 미르, 즉 용을 지극히 사랑하고
용의 지배 아래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세벨 같은 여자를 박근혜 대통령은 총애하였고
각별히 의지했습니다.
박 대통령에게 불운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약과에 불과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재작년 여름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사칭하는
로마 교황을 초청하여 그의 활동을 "범정부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카톨릭 국가가 아닌데도 말입니다.
대한민국의 심장부인 서울 광화문 광장은
그해 여름 바티칸 광장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메르스'라는 전대미문의 국가적 재앙과
박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불행을 결정적으로 초래한 것입니다.
왜?
바티칸의 주인도 "미르"이기 때문입니다.

CLICK!

바티칸의 주인 용
http://m.cafe.daum.net/ALILANG/ETNE/26?svc=cafeapp

로마 교황의 축복과 저주 (다운로드용 파일 첨부)
http://m.cafe.daum.net/ALILANG/ETNE/309?svc=cafeapp

가마를 타고 행차하는 교황
http://m.cafe.daum.net/ALILANG/ETNE/408?svc=cafeapp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cafe.daum.net/ALIL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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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의 주인
=
 용

그 실체 바로보기!

 

 베드로 대성당 박공(??)에 자리 잡고 있는 용


▲건축물의 전면 박공(pediment)부(문의 정중앙 현관 위)는
그 건물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 조형물이 자리를 잡는다.
그곳은 개인 주택으로 친다면 집 주인의 문패가 붙는 곳이다.

▼아래는 바티칸 베드로 대성당 사진.
이 건축물의 박공(pediment) 부분을 주시해 보라(동그라미).






드로 대성당 중앙상단의 박공(pediment) 


▲가까이서 본 베드로 대성당 전면 박공(pediment).
날개 달린 용이 조각돼 있다. 성경에서 용은 마귀를 상징한다.

고신대학, 대신대학, 영남신학대학 등에서 『기독교와 미술』이라는 과목을 강의하고 있는 서양화가 신규인 교수는 『성경으로 보는 서양 미술사』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로마 카톨릭의 총 본산인 베드로 대성당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용이다. 이러한 결론은 이 건축물이 웅변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건축물의 전면 박공(pediment)부는 그 건물 전체를 대표하는 상징 조형물이 자리를 잡는데, 그곳은 개인 주택으로 친다면 집 주인의 문패가 붙는 곳이다. 이곳에 용이 자리를 잡고 있다면 용이 이 건물의 주인이라는 뜻이 아닌가? 성경에서 용 또는 뱀은 사단을 상징한다. 성경 말씀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이루는 계시인데 언필칭 기독교 건축물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의 형상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모순 중의 모순이다. 이러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거짓 기독교이다. 적그리스도의 짓이다. 지금까지 그것을 기독교의 건축물로 알고 있었다면 우리는 속은 것이다. 사단은 속이는 자이다.”(신규인, 『성경으로 보는 서양 미술사』,예영커뮤니케이션, 2007, p.45 )

 


‘박공’에는 날개 달린 용뿐만 아니라 ‘독수리’도 조각돼 있다. 용과 함께 있는 이 독수리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성경 레위기 11장 13~19절에 그 해답이 있다.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매와 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노자와 부엉이와 따오기와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니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가증히 여겨야 할 부정한 새들의 목록이 있다. 그 첫 번째 새가 바로 ‘독수리’이다. 이것은 카톨릭이 계시록 17, 18장의 음녀, 곧 영적 바벨론이라는 사실을 그들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계시록 17, 18장의 '큰 음녀 바벨론'이 로마 카톨릭이라는 사실은 본 사이트 게시판 "666적그리스도" 안에 요한계시록 17장 해석에서 상세히 설명했음). 계시록 18장 2절은 큰 도시 바벨론, 곧 바티칸을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말한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계시록 17장이 예언한 음녀의 정체를 정확히 이해하시려면 클릭

 

요한계시록 17장①

요한계시록 17장②

요한계시록 17장③

요한계시록 17장⑤

 

바티칸 곳곳에서 발견되는 용의 형상들!




베드로 대성당의 중앙 상단 박공(pediment)에 있는 옛 뱀 용

바티칸(Vatican)이라는 단어 자체가 '신성하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 Vatis와
'뱀'이라는 뜻을 가진 Can이 합쳐진 단어이다.

Vatis = diviner, can = serpent.
Vatican = The Divining Serpent.       

옛 뱀이라고 하는 용의 형상이 바티칸 도처에 자리 잡고 있다.



베드로 대성당 출입구 바닥에 새겨진 용

▲베드로 대성당 입구에 있는 분수대에 부조된 용



▲베드로 기념비가 있는 바티칸 시의 지리학적 중심부 근처의 바티칸 정원.
연못에는 날개 달린 용이 물을 내뿜고 있다.

http://www.katherinebelarmino.com/2013/04/vatican-gardens-walking-in-footsteps-of.html



베드로 대성당 천장의 용

베드로 성당의 주 제단. 천개(canopy)라고 부른다.
거대한 뱀 모양의 기둥 네 개가 세워져 있다.

 

뱀 형상의 기둥이 세워진 제단 정면 양쪽으로
자주 빛붉은 빛 옷을 입은 고위 사제들이 둘러 앉아 있다.
요한계시록 17장에 기록된 음녀의 복장이 자주 빛붉은 빛이다.



자주빛(뒤쪽)붉은빛(앞쪽) 옷을 입고 있는 천주교 고위 사제들







왕관을 쓴 독수리와 날개 달린 용이 있는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의 문장

The coat of arms of Paul V (Camillo Borghese, 1605-1621) with the crowned eagle and the winged dragon


 

▲추기경 Scipione Borghese의 문장.
로마 교회(the Holy Roman Church)의 도서관원(1609~1618)이었다.
왕관을 쓴 독수리와 날개 달린 용이 있다.
이 문장은 바티칸 비밀 공문서 보관소 안에 걸려 있다.

Coat of Arms of Cardinal Scipione Borghese, librarian of the Holy Roman Church (1609-1618),
with the crowned eagle and the winged dragon



교황 그레고리 13세(Gregory XIII)의 용 메달
1582년에 주조된 것으로 그레고리 교황이 달력을 바꾼 해이다.
날개 달린 용이 숫염소를 감싸고 있다. 숫염소도 용도 사탄을 상징한다.



교황 그레고리 13세(1572~1585 AD)는 날개 달린 뱀,
즉 용을 그의 상징으로 자신의 문장 방패 위에 채택했다.
<시스틴 성당(Capelle Sistina) 천장> 


시스틴 성당(Capelle Sistina) 천장의 용.
이곳은 교황의 공식 예배당으로서 교황 선출장소이기도 하다.



문장 속의 용을 크로즈업한 사진



교황의 상징 아래 용이 주인으로 앉아 있다. 그 아래에 있는 얼굴은 도깨비 형상이다. 

 

▲성 베드로 성당 안 교황 그레고리 13세(Gregory XIII)의 무덤. 아랫쪽에 용의 머리가 보인다.

  

날개 달린 용이 기어 나오고 있다.
용은 그레고리 13세의 상징이며, 그의 문장에도 놓여 있다.
이 조각상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안에 있다. 이 교황은 죽어서도 용과 함께 하고 있다. 
 



*출처: "밝혀진 적그리스도의 정체"(유석근 저, 예루살렘 간), 179쪽*

알이랑 코리아 제사장 나라
유석근 목사
cafe.daum.net/ALILANG
http://cafe.daum.net/ALILANG/ETND/161 (원본편집)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최송연



                    주님,
                    진리와 공의 대신 부조리와 불법이
                    칠흑처럼 온 누리를 집어삼킨 이때,
                    작은 진리의 등불 하나 내게 주십시오


                    그리하시면,
                    캄캄한 흑암 중에서도
                    내가 주의 길을 벗어나지 아니하고
                    정도(正道)로 걸을 수 있겠습니다


                    주님,
                    사랑 없어 메마른 가슴들
                    서로 원망하며 지쳐가고 있는 이때,
                    주의 기이한 사랑의 빛을 내게 비추소서


                     그리하시면,
                     상처입고 우는 사람들을
                     향기 그윽한 미소로 품어줄 수 있겠습니다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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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 골치 아픈 사람 있으세요?






출처: 크리스찬 투데이

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94556/20161028/카드뉴스-골치아픈-사람-주변에-있으세요.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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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의 열매가 얼마나 '정확하게' 임하는지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직장 그만 두고 싶다."
"힘들어 못 살겠다."
"헤어지자. 헤어져."
이런 말을 함부로 내 뱉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런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서 "말도 못하느냐"고 한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의 말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는지
몰라서 하는 얘기다.
"네 입에서 들리는 대로
내게 행하리라"고 하셨다.

당신이 무의식적으로 장난같이 푸념 삼아
내뱉은 말들이 그대로
현실이 된다고 생각해보라.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인생으로
우리가 한 말에 책임을 지게 한다.
함부로 말하지 말라.

당신의 언어 습관은 밝고 긍정적인가?
하나님의 사람은 밝고 긍정적인 언어,
축복의 언어를 말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입술의 권세를 주셨다.
실로 두렵고 떨리는 말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말'대로
우리 인생을 바꾸어가실 것이다.

#아멘 다음이 중요하다 #한홍 #규장

 

사탄숭배자 마를린맨슨 내한공연,

기도로 막아서고 대적해야 합니다!


레이디 가가와 쌍벽을 이루는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탄숭배자 뮤지션, '마릴린 맨슨'이 11/4(금) 8시 예스24 라이브홀에서 내한 공연을 앞두고 있습니다.


기사: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011&aid=0002885021&lfrom=facebook&%3Bfbrefresh=201610181936&%3Bfbrefresh=201610181943


그의 노래들은 대부분이 음란하고, 욕설이 난무하며, 폭력적이고, 예수님과 기독교를 아주 적나라하게 모욕하는 내용으로 아주 유명합니다. 또한 콘서트는 온통 자극적이고 음란하고 반기독교적인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성경책을 찢으며 불에 태우는 퍼포먼스와 동시에 적그리스도를 찬양하는 내용의 노래를 부르며, 무대 위에서 자해를 하거나 성행위를 하는 등의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끔찍하고 더러운 것들을 '예술'과 '음악'이라는 통로로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공연은 미성년자 관람불가로 서울에서 열릴 계획 중인데, 이것은 그저 단순한 음악 공연이 아닌, 사탄을 향한 '어둠의 제사'임을 우리가 압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기도로 막아서고 대적하며 영적 싸움을 함께하길 원합니다. 특별히 지금 대한민국의 매우 중요한 이 시기 가운데에, 악한 영들을 이 땅에 풀어놓으려는 사탄의 모든 계략이 수포로 돌아 수 있도록, 깨어있는 많은 분들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지금도 곳곳에서 패역과 음란으로,

감사치 않고 원망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동하고 있는 우리에게 이 공연을 통하여

더욱 치명적인 어둠의 기름과 악한 영들을

더 강력히 풀려고 하는 사단의 궤계는

예수의 이름으로 끊어질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수포로 돌아갈 지어다.


하나님 예수의 이름으로 이 공연을 기회 삼아

이 땅에 침투하려는 모든 어둠의 영들.

정사와 권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묶임을 받을지어다.


너 어둠의 집회야.

예수의 이름으로 너를 이땅에 허락지 아니하노라.

예수의 이름으로 취소되고 끊어질지어다.


하나님!

이땅에 이같은 어둠의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한 것들이 풀어지고

성령께서 마음껏 운행하실 수 있는

하늘 문들을 여는 집회와 기도모임과 예배들이

될 수 있도록 모든 골방과 예수의 이름으로

두 사람 이상 모이는 모든 모임에 기름부으시고

좌정하셔서 하늘의 나라가 이땅에 진격해 들어오도록

강권하는 기도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게 하소서.


이 민족의 멸망이 아닌 다시 사는 것과 부흥을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주께 상달되어 금향로에 담겨 있는 기도들을

이제는 이땅에 아끼지 말고 쏟아주셔서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으로 나타나게 하소서.


이땅에 왕으로 좌정하시고 보좌로 임하셔서

무너진 공의의 기초를 다시 세우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이땅의 모든

어설픈 철학과 이념과 거짓들을 박살내주시

사람들의 심령을 비롯한 곳곳에 또아리 튼

어둠의 견고한 진들을 파쇄하시고 무너뜨리소서.


열조들에게 주셨던 주의 약속인

교회의 진정한 부흥과 거룩함을 주시고

북한 동포들을 해방케 하는 일이,

방종이 아닌 진리에 메일 때에 오는

참 자유가 한반도 전체를 뒤덮게 하소서.


이를 위해 각 개인과 가정과 사회 곳곳에 주의 일들을 행하소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진동케 하시고

열방과 모든 것을 움직이셔서 예전 있었다고 하는

평양 부흥보다 더 큰 영광으로 우리에게 임하게 해주소서.


우리 민족이 주의 능력으로

이 시대와 이 세대에 부르신 그 부르심을

능히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출처: 박성업 선교사님 페이스북

송솔나무님 글.

내가 아는 일본 전도사님이 있는데 사모님이 한국 분이시라 한국말을
참 잘 하신다.
특별히 본인이 작사 작곡한 곡으로 기타를 치시며 찬양을 하시는데
일반 대중 가수보다 더 잘하시는것 같다.

그런 그가 믿거나 말거나
천국에 다녀왔단다.

"형님 저 얼마전 천국에 다녀왔어요..."

응?

제가 자전거를 타고 교회에서 집에 가던 중,
저를 미처 발견을 못한 차가 코너를 돌면서 저를 정면으로 쳤어요.

피할 틈도 없이 차 앞유리에 제 뒷 머리를 크게 부딪치고는 차 위를 떼굴떼굴 굴렀어요.

나중에 안 사실인데 제 두개골이
5미리 쯤 벌려졌었데요..

여튼 그때 스위스 알프스행 같은 기차를 타고 천국 문 앞에 갔더니 어떤 분이
마중 나오셨어요.

그분께서 저를 반기시더니 잠시 있다 다시 내려가라고 하시더라구요.

그 분 옆에는 한 3-4살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뛰놀고있었는데
천국 문 앞에서 찌라시를(전단지) 하늘에 날리시더니
영광 받으소서 하시는 거예요..
(그래.. 이 친구가 맛이 같구나...
표정 관리 잘 되야하는데..)

그리고는 자기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냐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생각나는대로 말했어요.

"사단마귀와 어떻게 하면 싸움에서
(영적으로 승리) 이길 수 있나요?"

그때 그분께서 그 전도사님의 손을 펴보라 했단다.

그래서 전도사님이 손을 펴자 그 손에 땅콩 하나를 올려주시더니 씹어 먹으라고 하셨단다..
(이거 완전 드래곤 볼이네..그거 먹고 슈퍼파워라도 생겼나?)

그래서 그 땅콩을 아자작 씹었더니

그분께서 땅콩을 먹는것이 어려웠냐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뭐지? 하니

그분께서 제게 사단은 마치 이 땅콩과도 같다 말씀하셨고 그분의 손을 갑자가
내 심장에 대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힘겹게 싸워야할것은
너의 마음이니라..."

"무엇보다 너의 마음을 지키라."

갑자기 그때 제 마음이 뜨거워 졌고
그때 제가 그분께 한번더 질문을 했어요..

"어떻게하면 복음을 잘 전할 수 있나요?"

"저는 특별히 잘 할 줄 아는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말도 잘 못하구요.."


그때 그분께서 내 눈을 들여다 보셨어요..

놀랍게도 저는 답을 아는 사람처럼 그분께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만 하면 되나요?"

그랬더니 그분께서 그렇다 말씀하셨어요.

그저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셨어요..

그리고는 저를 다시 기차로 데려다 주셨어요..

저를 기차에 태워주신 후 창가에
서 계시는 그분을 바라봤어요..

기차가 출발했는데..

그분께서 기차와 함께 달리시더니
제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어요.

"도착하면 내 제자들에게 이 말을 꼭 전하거라!

난 너희들의 마음에 늘 함께 같이 있다고!

늘 함께 있다고!.."

모든 의사가 그 분은 두개골이 심하게 골절이 되서 곧 죽는다고 했고
불가능하지만 살아난다해도 휴유증이 심할것이라 했단다.

그런데 며칠뒤 그분은 깼고 아무런 수술과 치료없이 반으로 갈라졌던 두개골이 붙었단다.

결국 일본 병원에서는 그분을 절대 이대로 퇴원 못시킨다고
두달을 더 병원에 잡아놓고는 계속 정상을 유지하자 퇴원시겼다고 했다.

고마워 푸미카즈 사토 전도사님!

사랑한다!

 

출처:사모님사모님/열방의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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