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거듭남의 본질에 대한 정의

 

 

1. 거듭남의 본질에 대한 정의는 어렵습니다.

 

  

1) 본질에 대한 논쟁들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거듭남이 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본체인가’, ‘만일 질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습관인가, 아니면 능력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성령 그분 자신이신가’ 하는 것들에 대한 논쟁들이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논쟁들은 오히려 거듭남의 본질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본질을 새로운 피조물, 새마음, 우리 안에 새겨진 율법, 하나님의 형상, 신적인 성품이라는 말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성경적인 용어들 또한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2) 효과만이 가시적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가시적인 것은 그 본질이 아니라 효과 뿐이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씨가 자라나서 번식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씨를 성장하게 하는 요소는 씨의 껍질과 외피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어떠한 원소와 요소에 의하여 성장하게 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무엇이 영혼인지, 그리고 어떠한 부분에 그 영혼의 주된 원리가 담겨 있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기는 무척 힘듭니다.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예수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바람을 느낄 수 있고, 그 바람 때문에 생기는 결과들을 볼 수는 있지만, 어떻게 그 바람이 일어나는지, 어디로 몰려가는지, 어떻게 거센 바람이 약하게 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거듭남에 대한 탐구도 그렇습니다. 그 효과들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어떠한 특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을 묘사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3) 자연적인 무지가 눈을 가리기에 어렵습니다.

  가장 똑똑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속에도 여전히 자연적인 무지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경건에는 비밀의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숨겨졌고, 이성으로부터 감추어져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는 그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부터도 감추어져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 신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우리에게 씌운 눈가리개가 완전히 벗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하여 아는 것 조차도 우리의 육신적인 개념들로 인하여 혼동하게 되었습니다.

 

  

4) 경험하지 못했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남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개념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한 것은, 자연인들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그 능력을 친히 맛본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거듭남의 기술을 성경을 따라서 하려고 합니다. 거듭남은 성령의 효과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위대하고도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 변화를 통해서, 생명력이 넘치는 원리, 새로운 습관, 하나님의 법, 그리고 신적인 성품이 마음 속에 심어지고 뼈대를 형성해서,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워하면서 거룩하게 행할 수 있게 하며, 영원한 영광을 향하여 자라 가게 만듭니다. 이러한 의미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용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없던 것이 존재하게 된, 변화와 창조가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 있는 자라면 분명히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이며, 살아 있는 자로서 생명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살아 있는 피조물이라며, 살아 있기 때문에 행동하게 되는 어떠한 힘과, 이러한 행동들을 쉽게 하게 만드는 습관이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그렇게 행동하는 힘과 그 행동을 용이하게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 피조물의 본성 속에는 그러한 행동의 원리로서 어떠한 법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입시키신, 영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원리이며 주요 행동 패턴으로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는 한 양식입니다. 이것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되며 하나님을 위하여 행할 수 있게 됩니다.

 

 

3. 거듭난이 그리스도인의 다른 상태들과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1) 거듭남은 회심과 다릅니다.

  거듭남은 영적인 변화이며, 회심은 영적인 활동입니다. 거듭남은 하나의 힘을 부여하는 것이며, 회심을 이 힘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환할 수 있는 원리가 주어지고, 회심은 바로 그 전환하는 것 자체를 말합니다. 거듭남은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고, 회심은 그렇게 주어진 능력으로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1) 회심이 결과라면, 거듭남은 원인입니다.

 생명의 활동이 있기 전에 먼저 생명이 생겨야 합니다. 생명이 그 활동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며, 회심의 측면에서 그 힘을 행사하게 하십니다. 회심은 거듭난 사람에서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으로 행동의 원리가 활동을 산출하는 것입니다.

 


(2) 거듭남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지만, 회심에서는 능동적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생명이 자궁에서 처음으로 수태가 될 때에는 생명의 유입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않지만, 생명이 유입된 이후에는 그 생명이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처음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회심은 하나님의 활동으로 주어진 첫 번째 원리에 의하여 피조물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타내는 활동입니다. 이 첫 원리에서 이후의 모든 행동, 곧 믿는 것, 회개하는 것, 죄를 죽이는 것, 죄를 각성하는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행동들에 있어서는 사람이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의지 안에 어떠한 경향과 성질을 불어넣는 것은, 각성시키는 성령의 역사하

 

 

심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경향의 능력으로써 의지를 하나님께고 향하게 하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자발적인 활동입니다. 거듭난 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진 날이지만 회심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때는 사람이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능동적일 수 있는 힘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지만,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영혼 안에 먼저 심긴 것입니다.

 

  

2) 거듭남은 칭의와 다릅니다.

  이 둘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고, 거듭남으로는 하나님과 동화되고 닮게 됩니다. 거듭남과 칭의는 한꺼번에 동시에 일어납니다. 죄책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칭의와 새롭게 출생하는 거듭남은 언제나 함께 이루어 집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1) 변화의 본질에 있어서 거듭남과 칭의는 다릅니다.

 칭의는 관계적인 변화입니다. 칭의로 인하여 사람이 죄책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옮겨집니다. 노예의 상태에서 자유의 상태로, 행위언약의 의무를 진 상태에서 은혜언약의 특권을 누리는 상태로 진노의 자식에서 약속의 성속자로 옮겨집니다.

 

반면, 거듭남은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과 같은 실제의 변화입니다. 또한 그것은 영혼을 새로운 본성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변화는 본성의 변화입니다. 바로 우리를 진노의 자식이 되게 하는 본성, 곧 첫 번째 범죄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매일의 행동으로 죄를 짓게 하는 그 본성이 변화된 것입니다.

즉 칭의는 상태의 변화라면, 거듭남은 기질의 변화입니다. 칭의는 우리가 죄책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생명을 누릴 권리가 주이진 것이라면, 거듭남은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우리 속에서 부분적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의 순수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칭의와 거듭남은 그 원인과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직접적인 열매입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5:9). 반면, 거듭남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3:5)이라고 부릅니다.

 

칭의의 질료는 우리들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이지만, 거듭남의 질료는 우리들 내부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은 습관입니다. 칭의의 형상은 ‘전가하는’것이고, 거듭남의 형상은 ‘주입하는’것, 혹은 우리들 안에 ‘들여 넣어지는’것입니다. 결국 이 둘은 서로 다른데, 칭의는 ‘저주받음’에서 ‘무죄언도’로의 변화이며, 거듭남은 ‘오염’에서 ‘친교’로의 변화인 것입니다. 즉각적인 효과를 보자면 칭의는 우리에게 ‘자격’을 주는 것이고, 거듭남은 ‘적절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분 안에서 ‘완전한’것이고 그 완전한 것이 ‘우리에게’전가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며,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 열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3) 거듭남은 입양과 다릅니다.

  입양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고귀함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칭의에서 파생되며, 하나님과의 화해를 전제합니다. 입양이 우리에게 자녀됨의 ‘특권’을 주는 것이라면, 거듭남은 우리에게 자녀됨의 ‘본성’을 줍니다.

입양은 우리들을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 ‘관계시키는’ 것이라면, 거듭남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특성을 ‘새겨 놓는’ 것입니다. 입양은 일종의 권세를 주심으로써 우리를 관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는 반면에, 거듭남은 하나의 원리를 심으심으로써 우리를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입양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애정의 대상이 되고, 거듭남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됩니다.

   

4) 거듭남은 성화와 다릅니다.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은 뿌리에서 식물이 자라는 것과 같이, 거듭날 때에 주어지는 습관으로서의 이 원리에서부터 자라는 것입니다. 즉 거듭남은 성화의 생명이며, 영혼의 강건함과 생동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2부 무엇이 거듭남인가


3장 거듭남이 아닌 것들

 

 

1. 거듭남은 본성 자체의 파괴가 아닙니다.

  거듭남은 영혼이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실체나 기능적인 구조믈들을 아예 제거하거나 없애 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이전에 있던 기능적 구조물에 새로운 성질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한쎈씨병(문둥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그 신체의 피부 조직을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피부에 있는 질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비록 금과 불길이 서로 뒤섞여서, 불의 속성이 금의 모든 부분 속에 흡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의 실체가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금은 유연하게 되어서 예술가가 만들고자 하는 형태를 더욱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지만, 금은 여전히 금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이란, 촛대를 부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촛대 위에 새로운 초를 세우는 것처럼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새로운 성향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과 이성, 이해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올곧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이전과 동일한 몸에 새로운 성질이 부여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기품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황폐해지는 대신에 풍부해지며, 일소되는 대신에 오히려 개조되는 것입니다.

 

 

 

2. 영혼의 활동은 여전합니다.

  거듭남은 영혼의 본질적인 활동 자체의 변화가 아닙니다. 영혼의 활동에 있어서 거듭난 전후에 그 본체와 본질이 동일한 것처럼, 그 영혼의 열정과 정서의 특징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열정과 정서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의 행동과 자연인의 행동은 둘 다 행동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하고 두려워한다는 영혼의 활동의 면에서는 모두 동일합니다. 하지만 활동의 대상은 서로 다릅니다.

 

바울은 적극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본성과 기질은 은혜를 받은 후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옳은 방향으로 물꼬가 트여서 옳은 대상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핍박하는 일에 어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것처럼, 은혜 받은 이후에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덕을 세우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의 수고는 그가 가지고 있던 기질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원리가 그 기질 속에서 작용하여 다른 대상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의 정서들의 실체와 본질, 그리고 그것들로 말미암은 활동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원리로 인하여 분노가 열정으로 변화되고, 슬픔이 회개로 바뀌게 되며, 두려움이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되고, 세속적이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활동들에 새로운 기질들을 공급하는 전혀 새로운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3. 동면에서 깨어나는 것은 새생명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자연적 본성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던 원리를 각성시키거나 그 무엇을 끌어내어 다듬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잠자는 무엇을 깨우는 것도 아닙니다. 거듭남은 죽어 있는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이며, 무에서 사람이 창조되었던 것처럼 새로운 창조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전의 원리들을 흔들어서 깨우거나 그것들을 새롭게 자극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사람 속에는 한 톨의 은혜도 없습니다. 오직 죄의 씨만이 있을 뿐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7:18)

거듭남이란, 새로운 씨앗이 영혼의 토양 속에 뿌려지는 것이며, “썩지 아니할 씨”(벧전1:23)가 심겨서 자라나도록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연인의 상태를 무의식의 상태나 잠자고 있다고 표현하지 않고, 죽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깨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 곧 부활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4. 본성에 새 옷을 입히는 것과는 다릅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본성에 무엇인가가 부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아담에게 어떠한 것을 첨가시킨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새로운 머리요, 또한 아담이 되셨는데, 이는 하나의 머리이면서, 또한 공통의 인격을 소유하고 있다는 개념으로 그와 일치한다는 견지에서 아담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새로운 피조물도, 영혼 속에 형성되신 그리스도도, 이전의 옛 본성에 첨가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은혜는 이전의 죽은 나무 등걸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의 옷이 해져서 새 헝겊으로 꿰매는 것이 아니라, 이전 것을 완전히 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골3:9,10) 그것은 이전에 있던 것을 치

워 버리는 것으로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지, ‘수선된’ 피조물이 아닙니다.

빛은 어둠에 다른 것을 부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쫓아 버리는 것입니다.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넣는 것입니다. 무언가가 부가되어 옛 본성이 힘을 얻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힐 뿐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부수적인 것들이 함께 제거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부패된 옛 본성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자연인 안에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은혜를 받을 만한 가능성을 지닌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고 새 사람이지, 개선된 것이나 새 옷을 갈아 입은 사람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5. 거듭남에 대한 표시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거듭남은 외적인 세례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세례를 받은 것을 거듭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외형적 요소의 물이 내적인 생명을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세례를 받게 될 때 모든 사람이 거듭나게 된다면,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보아야 하며, 결국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세례가 거듭남의 은혜가 전달되는 방편이 될 수는 있어도 기계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성찬이 영적 양식을 제공 받는 성례인 것처럼, 세례는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로서의 성례입니다. 성례의 실제화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영적으로 양식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예 그러한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아야 할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입에 가장 맛있는 음식을 넣어 준다고 해도, 그것은 죽은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받아 먹고 그것을 소화해서 영양을 섭취하려면 먼저 생명의 원리가 그 사람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만이 영적 생명의 원리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통하여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게 하는 원리입니다.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 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창세기 37장) 아들을 죽이고서 아버지 집에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우리가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그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 그들은 동생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맏형 르우벤이 죽이지는 말자 하여 그들은 요셉의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리고서는 앉아 음식을 먹었습니다.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은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요? 아버지의 집을 떠나 형들을 찾아 세겜으로, 다시 도단으로 그 먼 길을 오면서 제대로 먹기나 했을까요?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으로부터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유다가 형제들에게 동생을 죽이지 말고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자고 제안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은 이십 개를 받고 동생을 노예로 팔아넘깁니다. 이스마엘 족속은 요셉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서 노예로 넘깁니다.

  르우벤은 동생을 죽이는 악한 죄인들에게 남아있는 한 가닥 양심인지도 모릅니다. 그 양심이 돌아와 보니 큰일 났습니다. “아이가 없도다, 나는, 나는 어디로 갈꼬.” ‘나는, 나는’ 두 번이나 ‘나는’을 반복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 없는데 어떻게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양심이 있다면 대답해 보십시오. 아버지께 범죄한 자가 어찌 아버지에게 낯을 들고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범죄한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 계신 천국으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아버지를 속이기로 합니다. 양심을 속이기로 합니다.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수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십니다. 그리고 그걸 아버지에게 가지고 갑니다. 죄 없는 수염소가 애꿎게 희생을 당하고 피 흘려 죽습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찢어지고 피투성이가 된 아들의 옷을 보고 아버지는 통곡을 합니다.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이 정녕 찢겼도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합니다.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나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고 애곡합니다.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내 아들에게로 가리라.” 지금 세상이라면 DNA 검사해보면 금방 탄로날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은 까맣게 속았습니다. 그렇게 피 묻은 옷으로 아버지를 속이고 죄를 지은 아들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뻔뻔스럽게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아들의 피를 들고, 피 묻은 아들의 옷을 가지고 돌아갈 것입니다. 그 아들을 죽이고서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야곱은 모르고 속았으나 하나님은 아시고 속아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속아주시려고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인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의 피를 들고, 그의 의의 옷을 입고, 담대하게, '잘 했다,' 칭찬까지 받으며, 면류관까지 쓰고 영원히 아버지 집에 들어갈 것입니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죽은 자 살리시는 예수님

마태복음 9장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니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기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오늘 본문은, 하나의 네러티브( 사실을 바탕으로 전개해 나가는 이야기) 안에 작은 에피소드(묻혀질뻔 한 이야기)를 기록함으로써, '죽음을 이기신(정복하신) 생명주시는 주 예수님'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극대화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본문의 병형구절인 마가나 누가의 기록을 되도록이면 인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본문연속강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의도에 충실하고자 함에 그렇습니다.

혈루병 앓는 여인의 구원과 관리(갈릴리지역의 유대사회 지도자)의 딸에 대한 이야기는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12년 동안 혈루병을 앓고 있는 여인과 12살 된 관리의 딸이 그것입니다.

3×4=12, 하늘(삼층천, 삼위일체 하나님 등)의 수와 땅(동서남북, 사방 등)의 수를 곱한 수이면서 동시에 만수(꽉찬)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열두 지파, 신약의 열두 사도 등도 만수로서 전체에 대한 대표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관리가 와서 방금 죽은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구한 시각은, 예수님이 마태의 집에서 제자들과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신 바로 그 때입니다.

율법주의 형식주의 금욕주의에 대해 바르게 교훈하시다가

관리의 딸을 살려달라는 간구에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들 밥만 먹고 각기 제 길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유는, 과연 죽은 자를 살릴 수 있을 것인지!

인생에 있어서 죽음보다 중차대한 명제는 없습니다.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큰 관심을 가지고 관리의 집까지 따라온 무리를 떠올리기 전에,

먼저 노중에서 혈루병 앓는 여인을 고치신 에피소드를 살펴봅니다.

이 여자의 혈루병은 레위기(15장)를 통해서 보자면 부정한 유출병입니다. 아랫도리로 피를 쏟는 병을 말합니다.(일반적인 생리가 아닙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생명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부여하신 귀중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시도때도 없이 피를 쏟으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허비하고 있는 셈이지요.

여인이 떳떳하게 나서지 못하고 몰래 예수님의 겉옷 끝자락을 만진 것은 자신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출병을 앓고 있는 자가 다른 사람을 만지면 옷을 빨아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예수님의 겉옷 가를 만집니다.

그렇게 하면 구원을 받겠다고 스스로 믿었기에요.

참으로 율법을 뛰어넘는 여인의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여인에게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말씀이 '죽음 앞에서 벌벌떠는 인생들 모두'에게 들려지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아들 딸'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본문에서 저자 마태는 율법을 지킴이 인생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죄인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성령의 감동으로 그렇게 기록한 줄로 믿습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병을 앓았다면 인생이 끝난 것입니다.(열두 해는 여인의 평생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물질도 육체도 시간도 흘러내리는 피와 함께 스러져간 세월이었지요. 아무 소망도 없이 죽음의 길을 가고 있는 여인입니다.

그런 여인에게 사죄와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물론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요.


이제 관리의 열두 살된 딸을 살리신 사건을 살펴봅니다.

먼저 피리부는 자들과 떠드는 자들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구슬픈 피리소리와 곡소리로 슬픔을 표했습니다.

'료'를 받는 피리부는 자와 곡꾼을 고용했던 것이지요.

구성지게 피리를 불어 가족과 고용된 곡꾼(곡소리내는 자)들과 초상집에 몰려든 자들의 심금(?)을 울려 슬픈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지요.

정말 슬퍼해서 '떠드는 자들'이 아닙니다. 초상집에 와서 얻어먹으려면 우는 체라도 해야 합니다. 지체높은 집에 초상이 났으니 문상객이 많으면 많을 수록 모양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떠드는 소리(소음 이상이 아님)라 기록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라고 하시니까 비웃습니다. 그런 자들을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비웃는 자들은 지금은 비웃지만 때가 되면 우는 체가 아니라 정말로 울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돈 몇 푼에, 밥 한그릇에 팔려 슬프지도 않으면서 슬픈 체 하는 그들에게 생명을 살리는 복음의 현장을 보여줄 수 없으셨던 것이지요.

자고 있는 자를 깨우는데 요란을 떠는 자는
없습니다. 그냥 조용히 깨우면 되는 것입니다.

"물러가라"고 하신 말씀에는 그런 의미도 녹아 있습니다.

'생명의 살림-살아남'은 조용히 일어납니다. 요란을 떤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미디어(TV.. 등)를 통해 설교하는 분들 중에 과연 생명을 살리는 분들이 얼마나 있는지... 아니면 혹, 자신과 교회를 선전하는 것은 아닌지...

노파심에서 하는 말입니다.

돈 몇 푼에 팔려서 부흥회에 다니는 분들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은 아닌지...

진정 영혼을 살리는 일이라면 조용히 복음을 전해도 될 것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오해는 마시고요.

이 시대에 유명한 주의 종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분들은 자신을 한 번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소녀가 믿음이 있었기에 살아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그 아비의 믿음을 보시고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먼저 믿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누군가가 기도했을 것입니다. 빚진 자의 심정으로 믿지않는 자들을 위한 기도의 끈을 놓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를 위해 간구하십시오.
'주님이 친히 손을 잡아주십시사'고 울면서 매달리십시오. 내가 내 자식을 살릴 수 없습니다. 시대가 악합니다.

소문이 온 땅에 퍼지니라-
생명의 향기는 아무도 붙잡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전파를 제어할 수는 것은 그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유는, 예수님이 이미 죄와 사망과 마귀를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혹 핍박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성도를 위해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주 예수께로 돌아오십시오.

마귀가 더 이상 여러분을 붙들지 못합니다. 거짓으로 속이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 번에 올린 글에서 말한, '이빨빠진 개오지(늙은 호랑이)일뿐입니다.

지금도 거짓의 아비 마귀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세상영광을 보여주며 속이고 겁을 주지만 이빨도 발톱도 다 빠진 늙어빠진 사자와 다를 바 없는 존재입니다.

참 생명을 얻고자 하여 주 예수께로 나오는 자들을 결코 붙들지 못합니다. 다만 으르릉거릴 뿐입니다. 그러니 속지마시고 속히 돌아오십시오.

앞서 말씀드린대로, 믿지 않는 인생들은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생명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육신의 목숨이 다하면 회개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무섭고 두려운 심판만 있을 뿐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복음이 온 땅에 퍼져나가고 있을 동안에 돌아오십시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고 권력을 누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장춘몽입니다. 잠깐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죽음이란 명제를 중첩해서(두 번에 걸쳐서) 기록함으로써, 죽음의 굴레를 쓰고 사는 인생이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를 밝히 드러내고 있는 본문입니다)

주의 은혜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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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기, 쉽지 않네...


"제가 아는 집사님인데 사모님이 꼭 한 번 만나보세요."

"왜요?"

"그 분이 건강에 좋은 내츄랄 약을 파는데 아주 좋데요.

사모님이 매일같이 콧물을 흘리시니 안타까워서요."

"글쎄요, 저는 부담스러운데..."


그렇게 말했건만

그 여집사가 예배 후에 찾아왔다.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찾아온 손님

박대할 수 없어서 커피 한 잔 끓여 주면서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듣다 보니까,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다.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마침, 남편이 당뇨가 좀 있고

나는 심한 알레르기 증세로 고생하는데

그런 것은 당장 며칠이면 끝난단다.


당신 자신도 그동안에 콧물이 너무 심해서

매일처럼 코가 새빨갛기에 보는 이가 모두

"술 먹었냐?"

놀렸지만, 이 약을 며칠 먹고 딱 그쳤다며...

"보세요, 제 코, 지금 멀쩡하죠?"

눈마저 반짝거리며 아주 자신만만하다.


왕! 부럽다.

슬그머니....마음이 동한다.

"알레르기로 매일같이 줄줄 흐르는 콧물,

그래, 낫기만 한다면야 돈이 다 몬 필요가 있나?"


귀가 얇아 솔깃해진 오지랖 여사님,

거금(?)을 무시한 채 덜컹 일을 저질렀다...

싫다는 남편도 억지로 먹이고

일주일 동안 열심히 먹어 보았지만....

어찌 된 셈인지 내 콧물은 멈출 생각을 않는다.


"집사님, 저는 콧물이 여전히 나네요?"

"평생을 쌓은 노폐물이니까 한 번에는 안되지요, 몇 번 더

약을 드시도록 하세요."

헉!

평생이라니?

젊어서는 이런 적 없었는데...

난 몇 년 전서부터 어느 날 갑자기 콧물 재채기가 심하게 났고

병원에 갔더니 먼지에서 사는 '진드기' 알레르기 반응이라고 했다.


글고,

당신 자신은 이익금을 소비자에게서 얻는 것이 아니라

그 회사에서 나오는 그대로를 전달하노라고...

그러면 나중에 회사에서 자기에게 주는 금액이 있노라고,.

"사모님도 회원이 되셔서 본인이 드시는 약은 싸게 드세요."

강권하지만...

에이~ 나는 사명이 다른데 사모가 누굴 상대로 장사하노?


암튼,

지금까지 먹은 약, 투자한 금액도 아깝고

면역성을 조절해준다는 약만이라도 좀 더 사서

계속 먹어보기로 하고

그 여집사에게 3병을 더 주문했다.

"약값은 권사님께 $140불만 드리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 다음 며칠 후,

인터넷을 통해

그 회사 shop에 들어가 보니까 내가 산 약이

한 병에 $35(한화 약 3만 원 가량)이다.

가만 있자, 한 병에 $35불이고 3병이면?

계산이 팽그르르 돌아간다.

물론 Shipping & handling charge가 있다는 것은 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한 병에 $10불 씩이나 더 붙이면서 원가에 주는 것처럼...??

이건 아니다. 싶기도 하고 괘씸죄가 발동해서리...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로 보이는가?ㅎ

마음이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그렇게까지 했을까?

그래, 내가 어려운 사람에게 $30불 선교한 셈 치자."

 

그러나...

세상 사람도 아니고 교회의 집사라고 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그런 삶을 살까?

한 번 정도는 조목조목(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따져주고 싶다.

따지기는 쉽지만, 그 후에 오는 후유증은?

우리 교회 권사님의 소개인데....

권장량의 약을 먹고도 계속 코를 훌쩍이는 나를

바라보는 울 권사님....마음이 힘드실 것 같고

순수하신 권사님, 진정 나를 걱정하시는 그 맘도 알고,

내가 코를 훌쩍일 때마다 나보다 더 안절부절~


그래, 그렇다.

차라리 마음을 비우고 사랑하자,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조목조목 따지고 싶으신 때가

얼마나 많으실까?

그럼에도 모두 다 용서해 주시고 사랑해 주시지 않는가?


그런데 난 이 옹졸함이 뭔가?

사랑하기, 정말 쉽지 않네 ...

주님의 사랑 하심은 흉내조차 내기 어렵다는 것은

진즉 알고 있었지만....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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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이 책을 공부하며 가져야 할 문제의식과 목적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이후 세계 기독교 역사상 보기 드문 놀라운 영적, 양적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성장이 둔화하다 못해 퇴조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왜곡된 신학 사조(자유주의)와 각종 이단활동(구원파)의 득세에 개 교회들이 질적 성숙에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개 교회들이 하나님에 대한 소명의식과 거듭남에 대한 체험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거듭남의 복이 마치 물질의 복과 자녀의 복과 건강의 복 등과 같은 현세적 복을 성취하기 위한 전제조건 정도로 이해하는 현실입니다.

또한 거듭남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부재와 오해로 로마서 10장 10절 말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을 통하여 단순히 입술의 시인을 곧 거듭남을 체험하는 과정으로 여기고 이렇게 따라 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거듭남에 대한 얄팍한 이해와 잘못된 가르침은 한국 교회가 썩어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이러한 기이한 형상은 기독교인의 삶의 질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창출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러한 현실 속에서 스테판 차녹의 본서는 거듭남에 대한 정확한 본질과 의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는 거듭남과 칭의, 그리고 성화를 일목요연하게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즉, 이 세 가지 구원적 요소는 상호 분리할 수 없는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있음을 철저하게 논증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종교적 소신의 변화, 도덕적인 변화 또는 회복의 개념이 아니라 창조적 개념의 변화를 의미하고 있음을 논증하면서 이를 내적인 변화를 통해 삶의 원리와 목적과 사고가 변화하는 것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진 내면 변화는 외적인 변화를 창출시키게 됨을 강조합니다.

 

뿐만 아니라 청교도 작품답게 신학적 탐구로 글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삶의 신학이 되도록 “적용‘ 부분을 통해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에 대한 점검에 필요한 시금석으로서, 가기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을 철저하게 들여다보게 하여 이전에 좋아하였던 것들을 지금은 혐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자기 점검 작업을 하게 합니다. 또한 자신의 삶의 변화는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보도록 죄된 습관과 마음 속에 내재된 죄의 법, 죄를 짓게 하는 옛 법의 본성이 날마다 죽고, 하나님의 법과 성품과 습관의 법이 내 속에서 활화산처럼 일어나고 있는지를 점검하도록 권장합니다.

 

즉, ‘ 과연 내게 하나님과 닮아 가기를 바라는 뜨거운 열망이 있는가? 하나님의 통치의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가?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어느 정도인가? 내적이고도 영적인 의무들에 대한 나의 자세는 어떠한가? 말씀에 대한 나의 반응 정도는? 내 마음과 생활에 어떠한 거룩함의 요소들이 있는가?’ 등과 같은 믿음의 시금석을 통해 거듭남에 대한 확신과 성화에 대한

 

 

갈급함으로 삶을 채워 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II. 저자 스테판 차녹에 대하여 (이 책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

 


 스테판 차녹(1628 - 1680)은 영국 찰스 1세가 국왕이 된지 3년 되는 해에 태어나 왕당파와 의회파의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던 시민전쟁의 대혼란의 시기를 살아갔던 인물로서, 찰스 2세의 ‘1662년 법령’에 의해 청교도운동의 공식적인 활동의 종언을 고하게 된 시대에 활동하였던 위대한 하나님의 대언자입니다. 그는 찰스 왕이 선포한 대추방령 아래 약 15년 동안 런던의 사역지에서 쫓겨나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고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그의 저서 중 대표적인 작품은 ‘신론’과 ‘중생론’이 손꼽히고 있는데 ‘거듭남’이라는 작품은 당대의 최고의 신학자이자 청교도신학의 완성자로 불리던 죤 오웬의 작품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세밀하고도 예리하게 거듭남의 신비와 정체성에 관하여 분석하고 있습니다.

본 저서 ‘거듭남의 본질’은 그의 4권의 중생론 중 2권으로 1권은 ‘당신의 거듭남, 확실합니까?’ 3권은 ‘거듭남의 유효성’ 4권은 ‘거듭남의 도구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윤종훈 교수의 추천의 글 요약)

 


III, 전체 목차

 


1부 거듭남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정의

1장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다시 사심의 목적은 우리의 거듭남

2장 거듭남의 본질에 대한 정의

2부 무엇이 거듭남이가

3장 거듭남이 아닌 것들

4장 무엇이 거듭남인가(I) - 거듭남은 변화입니다.

5장 무엇이 거듭남이가(II) - 거듭남은 내적인 변화입니다.

6장 무엇이 거듭남이가(III) - 거듭남은 외적인 변화입니다.

3부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

7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생명의 원리

8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은혜로운 습관(I) - 새 것이 필연적인 새 습관

9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은혜로운 습관(II) - 준비가 전제되는 역동적인 습관

10장 새로운 피조물에 심긴 마음의 법

11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게 되는 하나님의 형상

4부 적용

12장 참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

 

 

13장 영광 중에 완전하게 된다는 소망이 주는 위로

14장 자기 점검을 위한 시금석

5부 권면

15장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가는 새로운 피조물에게

16장 여전히 옛사람을 벗지 못하고 사탄의 형상을 입고 있는 자들에게

 

 


1부 거듭남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정의

 


1장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다시 사심의 목적은 우리의 거듭남

 


 본문 요절 ;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 대한 칼빈의 해석은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바를 그들이 마음대로 생각하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가 지금 나의 온전함을 강조하는 것은, 나의 판단을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만일 내가 말하는 것이나 침묵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한 교회의 유익을 준다면, 언제든지 나는 말할 것이고, 또한 그렇게 침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고후5:14)”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간다고 말하면서 성도들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분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임을 설명합니다.

 


1. 본문은 놀라운 변화의 교리를 제시합니다.

 

  14절,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에 기초하여 볼 때 죽으심을 통하여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그것을 참으로 체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힘이 됩니다. 또한 그분을 위한 봉사와 영광 돌리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게 만드는 즐거운 동기가 됩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보혈의 값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소유물로서, 그분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2. ‘우리를 위하여’가 그 목적입니다.

 

1) 거듭난 자와 자연인의 삶의 목적이 다릅니다.

  자연인과 거듭난 자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는 자아가 그 목적이라면 후자는 그리스도가 그

목적입니다. 15절에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라는 말씀은, 우리 구주의 죽으심의 실제적인 혜택과 효력 아래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 목적과 다르게 자아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칩니다. 모든 곤경과 고뇌의 열매를 맺게 하는 쓴 뿌리인 것입니다.

 

 

 2) 우리의 목적을 바꾸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입니다.

  우리 구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목적은 피조물들의 타락한 목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자아를 끌어내리고 하나님을 높임으로써 우리의 주된 목적이 되시는 그분의 권리를 회복하십니다.

 

 

3) ‘나에게서 주께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우리가 목적으로 삼아 왔던 우리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른 대상, 곧 그리스도께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목적에 제대로 반응 할 수가 없습니다. 끝장을 보아야 할 것은 자아이고, 최종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4) ‘우리를 위하여’였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가 옳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면, 우리가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 분을 우리의 모든 행위와 모든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은 너무나 정당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을 천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합당하고도 가장 만족할 수 있는 우리의 애정의 대상입니다. 이를 이루는 자신을 보면서 느끼게 될 행복감은 존재의 만족입니다.

 

 

5) 부활하심도 ‘위하여 죽은 자들’을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뿐만 아니라 그 분의 부활하심도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대표적인 행위로 인하여 우리의 거듭남과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성립됩니다. 그 분의 죽으심과 같이 우리의 죄의 몸이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 분의 부활과 같이 생명을 주는 은혜로 인하여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6) ‘이제부터는’ 달라집니다.

  16절에 보면 ‘이제부터는’이 나옵니다. 또 위 말씀에 ‘안다’라는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이나 사

 

 

람이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히브리 원어로 ‘야다’로서 ‘실제적인 체험을 갖고 깊이 안다’는 뜻입니다.

육체를 따라 안다는 것은 사람들의 위대성, 지식, 가치를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또한 할례와 예식 등의 외적 특권들을 따라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오직 내적인 은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그 분을 향하여 열매를 맺고 사는 것을 따라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육체대로 알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그 분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 그 분께서 전하신 뛰어난 은혜들, 그 분께서 실행하신 놀라운 직분들을 보면서 그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아는 것으로 예수님이 은혜의 근원이 되시며,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 임명받으셨고, 또한 맡겨진 그 일을 잘하셨다고 하나님께 인정되었으며,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화롭게 여김을 받으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분을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3. 거듭난 자에게는 증거가 드러납니다.

 

 

1) 거듭나지 않은 자의 관심은 세속적입니다.

  자연인은 세속적인 흥밋거리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사랑하며, 참으로 영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을 열망하지 않습니다.

 

 

2) 거룩을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자신에게서 벗아나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부는 증거는, 거룩을 기준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모습입니다. 즉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고려하며 그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과 평가에 근거를 두고 평가하지 육체를 따라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3)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만일 자신을 위하여, 육체적인 목적을 위하여 그 분을 섬기며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복종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가 중심에 놓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집중해야 하고, 그 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야 하되 이를 위한 조건은 그 분을 하나님께 인정받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은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즉 사도 바울과 같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3:8-10)

 

 

 

 

 


4. 새로운 피조물이 가지는 본질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15절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을 따라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주어진 그 사람은 반드시 새로운 피조물이어야 하며 변화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함으로 그분에게 접목되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17절) 즉 아담의 옛 감정, 옛 기질이 지나갔습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규칙과 통치자가 되고, 선과 악의 기준이며, 자기 자신의 목적이 되고자 하는 것이 지나갔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지명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최상의 선이요, 최고의 목적이며, 최적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를 갈라디아서 5장 6절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고정시키는 것이며, 사랑은 옛 아담처럼 스스로가 기준과 목적이 되어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곧 믿음과 사랑이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법적으로’, ‘의무적으로’, 또한 앞으로 완전히 청산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채로’ 이전 것은 지나가 벼렸습니다. ‘새 것이 되었도다’. 이는 우리의 함으로써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8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나니”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교리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 형성된 참되고 놀라운 변화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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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동 목사 “신사도운동과 신비주의 혼합한 사이비이단”

 
▲ 세이연 제2차 컨퍼런스가 16일 베들레헴교회에서 열린 가운데 관계자들이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 ©크리스찬투데이

세계한인기독교이단대책연합회(회장 김순관 목사/ 이하 세이연)가 주최하는 제2차 컨퍼런스가 11월 16일 오전 10시 LA 베들레헴교회(서종천 목사 시무)에서 열렸다. 이날 컨퍼런스에서는 그간 소위원회에서 연구한 다일공동체의 최일도 목사와 시온인터내셔널교회의 고재동 목사에 대한 보고가 있었다.

조사연구 발표자로 나온 한선희 목사(세이연 사무국장)는 2015년 2월 세이연 제4차 총회에서 “최일도 목사의 이단성 조사청원의 건”과 2011년경부터 고재동 목사의 신학적 사상에 문제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자료 등을 수집하는 과정 중 2015년 9월 세이연 제1차 컨퍼런스에서 “고재동 목사의 이단성 조사청원 건”의 헌의안이 올라왔다며, 두 목사에 대한 이단성을 조사하게 된 연구배경을 밝혔다. 또한 이번 보고서를 통해 지역교회와 성도들이 분별하고 경계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날 컨퍼런스를 마치며 회장 김순관 목사는 “앞으로 우리만 알고 있어서 될 일이 아니고 미국만이 아니라 한국교계와도 연계해서 오늘 발표된 두 사람의 이단성의 실상들을 알려 잘못된 신학사상에 물드는 성도들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겠다”고 밝혔다.

다음은 최일도 목사와 고재동 목사에 관한 연구보고서를 발췌 요약한 내용이다.

다일공동체 최일도 목사에 관한 연구보고서

1. 최일도 목사 조사연구 목적

세이연 제4차 총회(2015년 2월 23일-27일)에 “최일도 목사의 이단성 조사청원의 건”이 헌의안으로 올라왔다. 최일도 목사의 사역이 이단적 요소가 있는지, 비성경적인 사상이 있는지 검증해 달라는 요청이다.
이에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총회에서 위임한 최일도 목사의 이단성 여부를 2년 가까이 최일도 목사의 단행본 저서와 월간지, 세미나 강의, 언론 기사 등을 면밀하게 조사연구 하였고 그 결과를 제2차 컨퍼런스에서 보고하게 되었다. 이 보고서를 통하여 지역교회와 성도들이 분별하고 경계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 최일도 목사의 문제점

1) 구원론의 문제점
최일도 목사의 구원론은 가톨릭 구원론을 따르는 비성경적인 구원론이다.

2) 관상기도의 문제점
이는 이미 이단으로 규정된 위트니스 리의 지방교회의 주장이다.

△영적독서(Lectio divina 렉시오 디비나)
“초대 교회와 영성생활을 살아가는 수도원에서는 성서를 읽으면서 기도를 했다” 최일도 목사는 성경말씀의 내용이 아니라 '단어'나 '구절'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향심기도(구심기도 Centering Prayer)
향심기도의 근본은 가톨릭 수도원이다. 최일도 목사는 가톨릭의 영성가들이나 사제들이 정립해 놓은 이 향심기도를 정통 교회에 심고 있다. 정통 기독교회의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와 상충된다(마6:9-13).

△예수 호칭기도 및 호흡에 맞추어 드리는 예수기도
최일도 목사는 호흡(들숨과 날숨)에 맞추어 호칭(주 예수 그리스도여!)과 청원(우리(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의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기도를 잘하면 ‘하나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관상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3) 신론의 문제점
관상기도는 신인합일을 주장한다. 이는 이미 한국 주요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지방교회(위트니스 리)의 주장과도 동일하다.

3. 최일도 목사 조사연구 결론

위와 같이 최일도 목사는 그 뿌리를 가톨릭에 두고 있으며 예수호칭기도를 통하여 좀 더 성숙한 관상기도를 드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최일도 목사가 이런 심각한 이단성을 버리지 않는 한 교류금지 및 참여금지를 해야 할 것이다.

시온인터내셔널교회 고재동 목사에 관한 연구보고서

1. 고재동 목사 조사연구 목적

2011년경부터 고재동 목사의 신학적 사상에 문제가 있다는 제보를 받고 자료 등을 수집하였고 세이연 제1차 컨퍼런스(2015년 9월 28일-30일)에 “고재동 목사의 이단성 조사청원의 건”이 헌의안으로 올라왔다. 고재동 목사의 사역이 이단적 요소가 있는지, 비성경적인 사상이 있는지 검증해 달라는 요청이다.
이에 소위원회를 구성하고 상임위원회에서 위임한 고재동 목사의 이단성 여부를 1년여 동안 고재동 목사의 예배, 교인일기, 교회와 교인의 계약서, 어느 교인이 고재동 목사께 보내는 이메일 등을 면밀하게 조사연구 하였고 그 결과를 2차 컨퍼런스에 보고하게 되었다. 이 보고서를 통하여 지역교회와 성도들이 분별하고 경계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 고재동 목사에 대한 문제점

1) 신사도 운동 성향의 이단성
고재동 목사에게는 신사도 운동가들이 가르치는 영적도해 사상, 잘못된 중보기도 사상, 땅 밟기 기도 등의 개념이 들어 있으며, 쓴 뿌리, 견고한 진, 가계저주 등과 비 성경적인 내적치유, 임파테이션 등의 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2) 하나님의 자연섭리도 조종하는 사이비성.
그는 “여러 가지 자기의 은사 가운데 제일 자신 있게 비를 멈추게 하는 은사는 확률이 98%이다. 2%로는 자기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집이 팔려라 하면 내일 팔린다. 집사님 권사님들이 손과 다리를 만지며 안수하고 기도하는데 응답이 안 되지만 내가 선포하면 된다. 기름부음과 권능이 임하고 있어야 한다… 기름부음과 권능은 올인 하여야한다… 기름부음과 권능이 임한 상태가 되어야 한다.”

3) 직통 계시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만 닥쳐올 경제위기와 7년 대 환란을 잘 헤쳐 나갈 수 있다며 모든 상황과 현상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자의적으로 느끼고 깨닫게 하며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자기의 생각과 하나님의 음성을 동일하게 생각하며 생활하게 한다.

4) 시한부종말론 사상
현재 고재동 목사 교회는 공동체적인 생활로 들어갔다. 2014년 교인들에게 각자 개인들의 재정보고를 고 목사에게 하게하고 개인들의 통장을 다 비우게 한 후 소정의 교육을 받은 교인들을 생활관에서 집단생활을 하고 있다.

5) 김기동의 마귀론 사상
“마귀가 너무 참소하여 공의로운 하나님도 어쩔 수 없어 마귀에게 합법하게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6) 이윤호의 가계저주론 사상
“알코올 중독자, 바람피우는 집안들은 대대로 흘러온다.”

7) 기성교회를 공격하는 교회론
“타교회로 가라. 소유를 포기 안 할 사람은 이 교회에 있지 마라. 다른 교회에 가서 적당히 살아라. 적그리스도나 경배하고 살아라”

8) 비성경적 천사론(천사 동원권)
“미가엘 천사도 보내라고 선포하면 온다”, “예배 시 기도하며 천사를 초청한다”

3. 고재동 목사 조사연구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고재동 목사는 신사도운동과 신비주의를 혼합한 사이비이단으로 규정한다. 참고로 현재 지교회는 Tampa, West Palm Beach(FL), Detroit(MI), Greenville(SC), Mississippi(MS), Kentucky(KY), Dallas-A, Dallas-B(TX), Omaha(NE), Baltimore(MD), Boston(MA), Seoul(Korea) 등 12군데가 있으며, 지교회를 준비하는 도시들로 계룡, 서울, 용인, 청주, 대구(한국),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뉴질랜드, 중국, Boston, Chicopee(MA), Chicago(IL), Charlotte, Fayetteville(NC), Appleton(WI), Tupelo(MS), Cleveland, Newark(OH), Huntsville(AL), Chrarleston(SC), West Palm Beach, Jacksonville, Denver, Colorado Springs(CO), Pensacola(FL), Tacoma(WA), Hartford(CT), Tuscon(AZ) 등 28군데가 있다.

송금관 기자 ⓒ 크리스찬투데이

가져온 곳: USA 아멘넷

금식, 굶식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9장 14-17

14.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이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니까

15.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16.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라

17.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리라


성경에서 말하는 금식이란 '식음'을 전폐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이란 마시는 것을 말하는데, 물이라기보다는 주로 포도주를 뜻합니다.

금식하면서 맹물을 마신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식사시간에 포도주를 곁들였습니다.

손님을 초대하거나 잔치할 때에는 질 좋은 포도주로 대접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습니다.

지난 해에 짠 포도즙은 숙성이 덜 되어서 시큼떱떨할뿐 맛이 없습니다. 그래서 적어도 몇 년된 좋은 포도주로 손님을 대접했던 것이지요. 좋은 포도주란 발효가 잘 되어 술맛이 좋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아서 가면 잘 먹고 잘 마셨습니다. 만일 체면을 차리고 젊잖게 먹고 마셨더라면 주인도 제자들도 함께한 자들도 불편해서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했을 것입니다. 평소에 잘 먹지도 못하는 형편인데 그런 자리에서라도 마음껏 먹고 마셔야지요. 예수님의 마음씀이 그러했습니다.

문제는 그 날따라 경건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지키는 금식하는 날이였다는 점입니다.

바라새인들은 목요일, 월요일 주 2회 금식을 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하나님께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날이 목요일입니다. 40일 금식하고 나서 율법을 받아서 내려온 날이 월요일이고요.

한 마디로, '울생율사-율법에 살고 율법에 죽는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의 금식이었지요.

그들은 율법을 보호하기 위해(잘 지키기 위해) 율법 바깥에다가 울타리를 쳤던 자들입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기에 앞서 사람이 만든 조항들을 먼저 지켜야 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율법의 정신-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을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에 못지않게, 문자 그대로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율법을 해석해서 지키는 속좁은 형식주의자들도 있었습니다.

율법준수란 모름지기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저주시는 바 그 크신 은혜에 감사해서 자원함으로 기쁨으로 지켜야 하는 것인데,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자기만족, 공명심, 나아가 자기의(self-rightousness)를 나타내는 수단으로서 율법을 지켰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선생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 그러했으니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백성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 셈이지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경우는, 자기들의 선생이 한 금식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시야 40:3, 요1:23)로서 백성들의 죄를 슬퍼하며 '회개의 금식'을 한 선생의 심정을 모른, 종교적 행위로서의 금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 양태의 -기독교 모양을 내는- 일반화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생명없는 박제화된 진열품으로서의 일반종교 중 하나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항상 말씀과 기도로 성령안에서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는, 지금 하나님이 오시건만 길이 없습니다. 세상의 '왕의 대로'는 있는데 말입니다.(요단계곡을 따라 나 있는 king's highway를 말합니다)

울퉁불퉁한, 길 아닌 길로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오시게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백성의 마음에 대로를 수축해야 합니다.그래서 요한은 금식하며 회개를 촉구했던 것이지요.

15절 답변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에 빗대어 설명을 하십니다.

혼인집 손님들이란 문자적으로는 '신랑집 아들들'을 말합니다. 신랑의 결혼잔치를 돕는 신랑의 친구들이지요.

몇 날 며칠동안 흥겨운 잔치가 계속 되도록 신랑을 돕다가 잔치끝날에는 신부집에까지 신랑과 동행하여,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마 25:6)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3:29)

이들이 바로 혼인집 손님들(신랑집 아들들)인 것입니다.

그것을 세례 요한은 잘 감당하였건만 그의 제자들은 아직은 잘 모르고 있었기에 바리새인들의 금식과 스승 세례요한의 금식을 구분하지도 못한 채, 예수님의 인격(Person)과 사역(Work)에대해 오해하여 엉뚱한 질문을 한 것이지요.

15절의 은유적 답변에서,
'슬픔' '빼앗김' '금식'이란 단어를 들어서 신랑이 당할 고난과 죽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즐거움(기쁨)의 반의어는 슬픔입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표현은 놀라울 정도의 극적인 표현입니다. 그 당시에는 신랑을 빼앗기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빼앗긴다는 것은 별세(원문- 누가복음 9:28- 엑소도스-탈출, 의미상으로는 구출)의 다른 표현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의 실상은 엑소더스입니다. 모세시대의 출(엑소더스)애굽이 그 모형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죄인들이 회개하여 예수님과 함께 죄악된 세상에서 떠나는(엑소더스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로 누릴 영원한 기쁨의 '맛보기'로서 지금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면, 제자들(신랑집 손님들-아들들)은 슬퍼하며 금식(금식이란 죽는다는 말입니다. 곡기를 끊으면 죽습니다)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는데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겠습니까. 제자들 또한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금식을 아니한다 할지라도 금식하는 것이나 바를 바 없었던 셈이지요.


마지막 두 구절의 은유-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 비유는 율법주의와 형식주의, 금욕주의에 대한 대응으로서 하신 말씀입니다.

새 시대가 도래했는데,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천국-유대인들이 그토록 바라고 기다렸던 메시야 왕국)이 도래했는데도 여전히 옛 관습과 사고의 틀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생베를 잘라서 헌옷에다 붙이는 길쌈하는 여인은 세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몇 번 빨게 되면 생베가 헌옷을 당겨서 옷이 너덜너덜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면 생베도 헌옷도 다 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새 포도즙을 헌 가죽부대에 담지 않습니다. 헌 가죽부대란 이미 써먹은(부풀대로 부푼) 염소나 양가죽 부대를 말합니다. 이미 늘어난 부대에 또 다시 포도즙을 넣어면 나중에 발효돼서 터져버리고 맙니다.

복음의 페러다임이 변한 게 아닙니다. 창세기 3장 15절부터 시작되는-하나님의 약속인 원복음으로부터 시작해서 구약성경-구원역사 내지는 구속사로서의 구약성경-전반에 걸쳐서 면면히 이어져온 복된 약속의 말씀입니다.

다만, 바라새인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성경에 대한 오해가 원인제공을 했기에 이렇게 교훈하시게 된 것이지요.

이 시대를 한 번 돌아봅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누가복음)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말씀입니다.

화석화 된 전통이나 교리를 붙드는 것이 개혁주의가 아닙니다. 개혁신교(개신교)의 후예들은
'일신우일신' 해야 합니다.

변함없는 말씀(텍스트)으로 변화하는 상황(컨텍스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두 지평의 만남을 통해 시대의 등불을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럼과 함께 시대를 바르게 읽어야겠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진열장에 종교상품 중 하나로서 복음을 걸어두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헛된 세상, 일장춘몽같은 세상에 미련을 두지 마시고 진정한 엑소도스(엑소더스)를 통해서 영원한 기쁨의 새 포도주를 맛보시기를 소원하며 축복합니다. 아멘!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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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버<美콜로라도州> AP·AFP=연합뉴스)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가 미국 도시 가운데 처음으로 술집, 식당 등 공공장소에서 대마초 사용을 허가하기로 했다.

덴버 당국은 영업장에서의 대마초 사용을 합법화하는 법안이 근소한 표차로 주민투표를 통과했다고 15일(현지시간) 밝혔다.

콜로라도 주는 4년 전부터 기호용 대마초를 합법화한 지역으로, 콜로라도를 비롯해 기호용 대마초가 허용된 미국내 일부 주 가운데에서도 공공장소 사용을 허용한 곳은 덴버가 처음이다.

덴버에서는 이에 따라 자신의 영업장에서 대마초 사용을 허가하길 원하는 술집, 식당 등 사업주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 영업장 내 특정 장소에서 고객들이 직접 가져온 대마초를 사용하도록 할 수 있다.

갤러리나 요가 스튜디오도 대마 사용 허가를 신청할 수 있다.

다만 사업주는 당국에 신청서를 제출하기 전에 이웃의 동의를 받아야 하며 실내 공간일 경우 연기가 나지 않는 대마초 흡입 방식만 허용된다. 또 식음료와 대마초를 동시에 판매할 수 없게 한 규정에 따라 술집이나 식당이 대마초를 직접 팔 수는 없다.

공공장소 대마초 합법화 캠페인을 벌여온 에밋 레이스토퍼는 "매우 역사적이고 획기적인 조치"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대마초를 즐길 장소가 필요한 성인을 존중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대마초 옹호단체인 마리화나정책계획(MPP)의 메이슨 트버트 대변인도 "이번 조치로 대마초 흡입 장소가 마땅치 않은 관광객들이 인도나 공원에서 대마초를 피우는 경우가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mihye@yna.co.kr

우리가 만약

하나님 나라의 장엄한 유업을 알수만 있다면,

세상과 우주를 통치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을 알수만 있다면,

사람들은 지금처럼 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부귀, 권력과 명예가

단지 소꼽장난에 불과하다면,

천국의 지식에 비하면 세상의 모든 지식은

단지 먼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한 때 세상을 호령하던 영웅호걸의 삶이

저 세상에서는 진실하게 산 농부의

발꿈치에도 미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사는 지구가 단지 모래알 수준이고

하나님 세계의 무궁함은 우주와 같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무한한 상급의 영광을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헛된 영광에 취해 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이치를 간파한 믿음의 선진들;

바울,베드로,요한,야고보는 하늘의 보화를 위해 살다 갔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세상의 보화를 위해 오늘도 분주하게 올인한다.


우리 인생의 시간은 영생에 비하면 하룻길과 같다.


어떤 이는 오전 3시 어린이의 시간이고

어떤 이는 오전 9시 청춘이고

어떤 이는 정오의 중년, 또 밤 11시 노년의 시간이다.


그러나 종말의 시간은 지금 자정 1분 전이다.


인생을 길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고,

짧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노아 홍수 전의 고대인에 비하면

우리 인생은 짧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의 벽에 자신을 투옥시키는 것은

두드러진 실수 가운데 하나다.


짧은 인생의 시간

그리스도인은 내세의 지위와 비례하는

자신의 역할을 축소하는 경향이 있다.


믿음으로 구원받기만 하면

목적을 달성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마치 하나님은 10,000을 준비하셨는데

10만 받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100년 인생을 위해서는

수십년을 투자하면서도 말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 6:33)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마 7:7)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반드시 나의 역할과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믿음의 선진들의 삶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바른 신앙은 선택과 행함의 연속이다.

루시퍼와 아담의 타락은 잘못된 선택의 결과다.


우리가 통찰력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성경을 보면

하나님 나라가 계시된 치밀함에 감탄하며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당신을 비수처럼 찔러

신비한 하나님의 세계에 눈뜨고

우리를 참된 삶과 연결해 줄 것이다.


성령의 상호작용, 성실한 일상의 삶,

영적훈련의 실천에 대한 황금 삼각형의 원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 나라와 의를 위해 불꽃같은 감흥속에서

역동적인 삶을 살려고 할 것이다.


"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요 14:6)


인류역사에서

어떤 사람도 이렇게 말한 이는 없었다.

다른 길은 없다.


그러나 거기에는 가짜길, 거짓진리,

짝퉁생명이 존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다" (사 44:6)


이렇게 말한 이도 없었다.

"너는 내 앞에서 흠 없이 살고,

온전하게 살아라"고 말씀하신다.


왜 우리는 믿음의 선진들보다

더 멋진 믿음을 성취할 수 없다고 자신을 축소하는가

믿음의 성취에 대해서는 욕심을 갖는 것이 제한없이 장려된다.


하나님의 성품;

거룩과 사랑과 정의 그리고 겸손과 순종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대면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놓으며

온 맘 다해 사랑합니다 수없이 고백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를 기뻐하는 것에

왜 인생을 걸지 못할까!


깨어 있으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추구하는 일에 서 있는지는 자신이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갈망으로 자신을 가득 채울 수 있다면,

우리의 시간을 주님과 동행하는

생각, 기도, 예배로 채울 수 있다면

죽음을 만나지 않고

영원히 사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은 보상제도를 운영하신다.

우리 신실한 삶의 보상이 천국이다.

이를 위해 자신을 개혁하고 심령을 부흥시켜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상상력 그 이상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부활)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휴거)



출처: 카이로스 / ars

 

크리스챤들은 스타벅스 커피를
절대로 마셔서는 안되는 이유…!
………………..
◾스타벅스가 이제는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금년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위해서
스타벅스 커피 컵에 사탄의
로고를 그려 넣었습니다

◾"기독교를 파괴하는 것은
스타벅스 기업의 사명이다"라고
CEO 슐츠 회장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번 사탄을 상징하는 디자인이 어둠의 주관자에 대한
우리의 충성심을 담고있는
이번 크리스마스 연휴의 컵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져나가길
원한다 "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기자회견에서
"루시퍼를 맞이합시다" 라고
큰 소리로 직원들과 한마음으로
사탄을 찬양합니다.
……………….
스타벅스의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것은
사탄의 사업을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
http://babylonbee.com/news/starbucks-unveils-new-satanic-holiday-cups/

나답과 아비후는 이상한 불로 분향하였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어떻게 이상한 불을 가져올 수 있는가? 암브로스는 욕망과 탐욕들이 낯선 불이라고 했다. 낯선 불보다 정열과 분노의 낯선 불을 가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여러분의 마음에 뜨거움과 분노가 치솟을 때는 언제든지 이 성경 말씀을 기억하여야 한다.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에 의하여 소멸되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불로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낯선 불을 가지고 나왔기 때문이다.

어쩌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나올 때 격렬한 열정을 가지고 나오신 적이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열정적으로 기도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속이 뜨거워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격렬과 분노의 불로 나와서는 안되는 것이다.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라”(딤전2:8). 격렬한 상태에서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면 기도의 방에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 가야 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올 때에도 여러분의 마음이 격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다면 마음을 차분하게 해야 한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1:21).

성찬에 참여할 때에도 악의에 찬 마음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이상한 불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된다. 이것은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들에게 아주 주의해야 할 사항이다. 강단에 낯선 불을 가지고 등단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설교자 자신의 열정을 가지고 나서지 말아야 한다. 저는 설교가 무엇인지 깊이 인식하게 된 이후로 이것에 대하여 깊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의 진노를 계시하도록 세움을 받은 자들은 자신의 진노를 내색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설교자들에게 필요한 하나의 규범이다. 주님은 일꾼들을 파송하시되 당신의 진노를 죄인들에게 알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더 많이 나타내면 낼수록 설교자 자신들의 격노는 숨겨져야 한다. 그들의 설교는 더욱 잘 받아드려지게 될 것이다.

물론 육적인 인간들은 설교자가 하나님을 향한 참 열정을 말할 때 이 설교는 나를 겨냥하고 있다고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청중들은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 저는 청중 여러분들이 그런 유혹에 빠진 일이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저는 그런 일이 있음을 알고 있다.

하나님의 일꾼들의 임무는 오직 하나님의 성령의 불을 가지고 오는 것이라야 한다. 제단으로부터 나온 불이어야 한다. 설교자들의 입술은 그 제단에서 나온 숯불에 의하여 지져져야 한다.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정열적인 불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서는 안된다. 그렇다.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의 의를 달성하지 못한다.

- 제레미야 버러스, ‘예배의 타겟을 복음에 맞추라’, pp 42-44


출처: 청교도아카데미/강대식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달라진 기도 제목

학생 신분으로, 선교사 신분으로
우리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목회자 부부 동반 모임에 가면
우리가 제일 어려서 늘 한쪽에
조용히 앉았다 오곤 했다.

어느 날
목회자 부부 동반 모임에 나갔는데
주요 자리에 내 남편이 서 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어른 목사님들은 한 분 두 분
어디론가 떠나가시고...

회의가 끝나고 식사 시간,
"어른들이 먼저 잡수셔야 우리가 먹지요."
젊은 목사님들이 남편의 등 뒤로 선다.

엥? 우리가 어른 대접을?
나는 여전히 나일 뿐이고....
열심히 살아나온 것밖에 없는데....
어느새 어른 대접을 받을 나이?

어릴 때는 어른 소리가 듣기 좋더니
이젠 그 소리가 낯설게 느껴진다.
왜일까?
내가 정말 나이 들었다는 증거?

그 뿐이랴,
또래 사모님이 암으로 고생하다가
엊그제 주님 나라에 들어가셨다.
어제는 또래 사모님이 중풍으로 쓰러지셨다고 한다.

에고~
젊은 때는 우리 모두 아프다고 해봤자 감기 몸살이더니...
이제는 너무도 큰 중병에 걸리는 동역자 님들...

이것이 현실인가...
기도 제목을 달리해야 할 듯....

주여~
당신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내 손으로 밥 해먹고
내 발로 걸어 다니고...
나보다 더 약한 사람, 병든 사람,
주님의 양 떼들을 섬기며
온 맘 다해 충성하다가 자는 잠에
주님 나라에 입성하는 축복을 베푸소서...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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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는

동성애자들의 주권을 위한 집회가 계속 열리고 있습니다.

한국도 예외없이 동성애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근자에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남자 동성커플이

화려한 결혼식을 치루었습니다.


그동안 긴 세월 음지에 머물러 있던 동성애자들이

연예계를 시작으로 사회 각계 각층에서

스스럼없이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입니다.


마지막 때에 나타나는 현상의 하나는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 등장한 동성애자들의 역사는

오래전 구약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의 조상들이 지은 모든 우상을 없애고..."

(열상 15:12)


이제는 때가 되어 사단이

'동성애 차별금지법을' 이용하여

우리나라에 동성애를 확산시키려 하는 반면,

교계에서는 법안의 통과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를 지지하는 국회 의원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현재의 야당이

차기 정권을 잡게되면 '동성애 차별금지법'이

가결되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후에 우리는 '정상이 비정상으로 변하는'

기이한 세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각 도시에는 게이와 더불어 레즈비언 클럽이 성행하며

음란하고 선정적인 문화에 편승하여 동성애는 더 이상

거론할 수 없는 개인의 성취향으로서 인식되어 가겠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먼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눅 23:28)


성(性)은 곧 사회 도덕과 함께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이며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한 시대의 멸망의 징조는

바로 이 성적 타락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동성애는 과연 선천적인 것이며

진실로 치유가 어려운 것일까요?


동성애는 주로 혼자 있는 가정 환경의 아이들이

철없는 어릴적에 친척이나 가까운 친구들 사이에서

누구나 한번 쯤은 경험해 볼 수 있는 금지된 장난입니다.


다만 그것에 악한 영이 가세하여

지속적으로 이어질때에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더불어 마귀는 동성애를

'선천적 DNA'에 의한 것으로 이해시키려 하지만

그것은 얼마든지 치유가 가능한 마약이나

알콜과 같은 일종의 중독일 뿐입니다.


일단 중독은 어떠한 것이든지

흑암의 세력에 역사로 인해

자신의 힘으로 끊기는 어렵습니다.


특별히 동성애는 사단이 강하게 사용하는

'음란의 영'이기에 먼저 영적인 치유가 필요하며

우리 역시 모든 악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로서

결코 저들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동성애 역시

다른 죄와 같은 하나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단은 핵무기보다 더 강력한

동성애를 도구로 인류의 멸망을 계획하고 있으며

저 출산과 독신주의, 동성애로 인해

100년 후 세계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들 것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을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게 하며 미국의 한 마을은

이미 '동성애 가정과 이성애 가정의' 비율이 같은 상황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질서의 근간을 파괴하는

동성애에 대한 해법은 정녕 요원한 것인가요?


성경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능히 동성애를 치유하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함을 얻었느니라." (고전 6:9-11)




출처: 레마성서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전도자

창세기 37장)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


  혹 어떤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인류 보다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으면 모든 인류를 그냥 구원하시면 되지, 왜 믿어라, 말아라, 귀찮게 그러시나?...." 그럴까요?
  동물의 왕국을 보니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자 한 마리가 이빨에 커다란 뼈가 끼어서 입을 다물 수가 없어 먹지도 못 하고 물도 못 마시고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걸 본 국립공원 관계자들이 마취총으로 그 사자를 기절시킨 다음 입안에 단단히 박힌 뼈를 끄집어내 줍니다. 이윽고 마취에서 깨어난 사자는 영문도 모르고 일어나서 갑니다. 이제 먹을 수도 있고 물을 마실 수도 있게 되었지만 그게 무엇 때문인지, 누구 때문인지 알지도 못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남도 그 아들을 가만히,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십자가에 내어주사 죽게 하시고 모든 인류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구원을 받는 게 맞다고 생각하시진 않겠지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려고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조차 싫어 합니다. 여자의 후손, 구세주를 보내시겠다 하신 약속도 믿지 못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도 믿지 않았고, 하나님이 마침내 보내신 그 아들조차도 믿지 않았고 오히려 배척하고 주인의 아들을 죽인 농부들처럼 그를 죽였습니다. ‘눈이 밝아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달콤한 뱀의 속임은 잘도 믿은 인간들은 정작 믿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은 악한 죄인들의 본성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아브라함을 통하여, 이삭과 야곱, 요셉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통하여,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기나긴 구약성경, 기나긴 구세주 기다림의 이야기가 써져야 했습니다.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의 증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어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데 만일 하나님께서 그냥 아들을 보내셨다면 누가 그를 믿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고 있는 대목도 예수님의 예표, 그리스도의 이야기요 연극(?)입니다. 오늘 이야기에서는 요셉이 예수님의 역할을 합니다. 아버지 야곱이 채색옷을 입히는 것은 모든 영광과 하늘과 땅의 권세를 아들에게 주심을 보여주는 것이며 곡식단이 절하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절하는 것은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어지고 모든 입과 혀가 주라고 고백할 것임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양 치러 간 열 아들을 찾으려고 사랑하는 그 아들 요셉을 보냅니다. 아버지는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리라.” 하고 말하고 아들은 “내가 그리 하겠나이다.” 하고 순종합니다. 그리고 기럇아르바 헤브론에서 무려 100 킬로미터나 떨어진 세겜, 그 끔찍한 살육극이 벌어졌던 죄악의 땅에 요셉은 형들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형들을 찾아 들판을 헤맵니다.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헤맵니다. 그들이 도망(?)간 도단으로까지 그들을 찾아갑니다. 마치 연극을 하듯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기 전 1,900년 전의 일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였습니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자 우리가 그의 옷을 벗기고 죽여서 구덩이에 던지고 그 꿈이 어찌되나 보자.”고 하였습니다.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미워하고 배척하고 십자가에 죽일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우리가 그 생명은 상하지 말자, 피를 흘리지 말라, 광야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어떻게든 요셉을 구원하여 아버지에게 돌리려 하였습니다. 마치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때려서 놓겠노라.’ 하고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애썼던 빌라도와 닮아 있습니다. 아무튼 형제들은 요셉을 죽이려다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넣었습니다. 죽여서 무덤에 던져넣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유다의 제안으로 은 스무 개를 받고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았습니다. 스가룟 유다가 은 삼십 개를 받고 예수님을 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구덩이에서 끌어내어져 이스마엘족속에 끌려 애굽으로, 보디발의 집을 거쳐 애굽의 감옥으로까지 가게 됩니다. 때가 이르러 마침내 그는 그 죽음의 곳에서 나와 애굽을 다스리는 총리로 세워지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과 통치, 모든 무릎이 그 앞에 끓어지고 천하가 그로 인하여 살게 되는 것을, 부활의 주님이 생명의 주가 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알지 못 하면서 벌이는 연극(?)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수도 없이 거듭 거듭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수많은 이야기가 기록된 것이 성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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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잡스는 1955년에 태어나 2011년 56세의 일기로 췌장암으로 타계했습니다 
 잡스는 췌장암에 걸렸으나 그 암 종류는 수술로 치유될 수 있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나 잡스는 수술을 거부 했습니다. 
 
잡스가 수술을 거부한 이유는 그의 신체를
여는것을 원치 않았고 그런 방식으로 영적인 것을 위반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잡스와 이 문제를 놓고 수 차례의 대화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수술 대신 영적 치료와 대체 의학 같은 것들을 의존 했다고 합니다 
 
잡스는 결국 9개월 후에 가족과 친구들의 권유로 수술을 받았는데 그때는 이미 암 세포가 그의 몸에 퍼진 후였습니다 
 
잡스는 암 치료를 받을 때까지도 그의 질병의
심각성을 경시했고 결국 수술을 늦춘 그의 결정에 대해 후회 했다고 합니다 
 
스티브잡스가  췌장암 으로 병상에 누워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마지막으로 남겼던 메시지가 다음과 같다고합니다 
 
- 이하 스티븐잡스의 말 
 나는 사업에서 성공의 최정점에 도달 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 삶이 성공의 전형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일을 떠나서는 기쁨 이라고는 거의 느끼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부(돈)라는 것은
내게는 그저 익숙한 삶의 일부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 병석에 누워 나의 지난 삶을 회상 해보면 
 내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던
주위의 갈채와 막대한 부는 임박한 죽음 앞에서 그 빛을 잃고
그 의미도 다 상실 했다 
 
어두운 방안 에서 생명 보조장치에서 나오는 큰빛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낮게 웅웅 거리는 그 기계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죽음의 사자 손길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이제야 깨닫는 것은 
평생 굶지 않을 정도의 부만 축적 되면 더 이상 돈 버는 일과 상관 없는 다른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 이다 
 
그건 돈 버는 일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되어야 한다 
 그건 인간관계가 될 수도 있고 예술 일수도 있으며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꿈일 수도 있다 
 쉬지 않고 돈 버는 일 에만 몰두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비뚤어진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다 
 바로 나 같이 말이다 
 
부에 의해 조성된 형상과는 달리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감성이라는 것을 모두의 마음 속에 넣어 주셨다 
 평생에 내가 벌어들인 재산은가져갈 도리가 없다 
 내가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직 사랑으로 점철된 추억뿐이다 
 
추억 !! 
 그것이 진정한 부이며 그것은 우리를 따라오고 동요하며 
 우리가 나아갈 힘과 빛을 가져다 줄 것이다 
 사랑은 수천 마일 떨어져 있더라도 전할수 있다 
 삶에는 한계가 없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가라 
 
오르고 싶은 높은 곳이 있으면 올라가 보라
모든 것은 우리가 마음 먹기에 달렸고  우리의 결단속에 있다


어떤 것이 세상 에서 가장 힘든 것일까? 
그건 "병석" 이다 
우리는 운전수를 고용하여 우리 차를 운전하게 할 수도 있고 
직원을 고용 하여 우리 위해 돈을 벌게 할 수도 있지만 
고용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내 병을 대신 앓도록 시킬 수는 없다 
물질은 잃어 버리더라도 되찾을 수 있지만  절대 되찾을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삶이다 
 

누구라도 수술실에 들어갈 즈음 이면 진작 읽지 못해 후회 하는 책 한 권이 있는데
이름하여 건강한 삶 지침서 이다 
 
현재 당신이 인생의 어떤 시점에 이르렀던지 상관 없이 

 때가 되면 누구나 인생이란 무대의 막이 내리는 날을 맞게 되어 있다 
 
예외없이

반드시 가족을 위한 사랑과 부부간의 사랑
그리고 이웃을 향한 사랑을 귀히 여겨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을 잘 돌보기 바란다 


아름다운 가을 풍경
 

 
출처: 사모님사모님/비올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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