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이 책을 공부하며 가져야 할 문제의식과 목적

 


 한국교회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이후 세계 기독교 역사상 보기 드문 놀라운 영적, 양적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성장이 둔화하다 못해 퇴조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왜곡된 신학 사조(자유주의)와 각종 이단활동(구원파)의 득세에 개 교회들이 질적 성숙에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개 교회들이 하나님에 대한 소명의식과 거듭남에 대한 체험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듭남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거듭남의 복이 마치 물질의 복과 자녀의 복과 건강의 복 등과 같은 현세적 복을 성취하기 위한 전제조건 정도로 이해하는 현실입니다.

또한 거듭남에 대한 정확한 인식의 부재와 오해로 로마서 10장 10절 말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을 통하여 단순히 입술의 시인을 곧 거듭남을 체험하는 과정으로 여기고 이렇게 따라 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거듭남에 대한 얄팍한 이해와 잘못된 가르침은 한국 교회가 썩어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이러한 기이한 형상은 기독교인의 삶의 질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창출시키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이러한 현실 속에서 스테판 차녹의 본서는 거듭남에 대한 정확한 본질과 의미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는 거듭남과 칭의, 그리고 성화를 일목요연하게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즉, 이 세 가지 구원적 요소는 상호 분리할 수 없는 연결 고리를 형성하고 있음을 철저하게 논증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종교적 소신의 변화, 도덕적인 변화 또는 회복의 개념이 아니라 창조적 개념의 변화를 의미하고 있음을 논증하면서 이를 내적인 변화를 통해 삶의 원리와 목적과 사고가 변화하는 것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진 내면 변화는 외적인 변화를 창출시키게 됨을 강조합니다.

 

뿐만 아니라 청교도 작품답게 신학적 탐구로 글을 마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삶의 신학이 되도록 “적용‘ 부분을 통해 구체적으로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론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에 대한 점검에 필요한 시금석으로서, 가기 자신이 생각하는 내용을 철저하게 들여다보게 하여 이전에 좋아하였던 것들을 지금은 혐오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자기 점검 작업을 하게 합니다. 또한 자신의 삶의 변화는 어느 정도인지를 살펴보도록 죄된 습관과 마음 속에 내재된 죄의 법, 죄를 짓게 하는 옛 법의 본성이 날마다 죽고, 하나님의 법과 성품과 습관의 법이 내 속에서 활화산처럼 일어나고 있는지를 점검하도록 권장합니다.

 

즉, ‘ 과연 내게 하나님과 닮아 가기를 바라는 뜨거운 열망이 있는가? 하나님의 통치의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가? 하나님을 향한 나의 사랑은 어느 정도인가? 내적이고도 영적인 의무들에 대한 나의 자세는 어떠한가? 말씀에 대한 나의 반응 정도는? 내 마음과 생활에 어떠한 거룩함의 요소들이 있는가?’ 등과 같은 믿음의 시금석을 통해 거듭남에 대한 확신과 성화에 대한

 

 

갈급함으로 삶을 채워 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II. 저자 스테판 차녹에 대하여 (이 책을 신뢰할 수 있는 이유)

 


 스테판 차녹(1628 - 1680)은 영국 찰스 1세가 국왕이 된지 3년 되는 해에 태어나 왕당파와 의회파의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던 시민전쟁의 대혼란의 시기를 살아갔던 인물로서, 찰스 2세의 ‘1662년 법령’에 의해 청교도운동의 공식적인 활동의 종언을 고하게 된 시대에 활동하였던 위대한 하나님의 대언자입니다. 그는 찰스 왕이 선포한 대추방령 아래 약 15년 동안 런던의 사역지에서 쫓겨나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고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그의 저서 중 대표적인 작품은 ‘신론’과 ‘중생론’이 손꼽히고 있는데 ‘거듭남’이라는 작품은 당대의 최고의 신학자이자 청교도신학의 완성자로 불리던 죤 오웬의 작품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세밀하고도 예리하게 거듭남의 신비와 정체성에 관하여 분석하고 있습니다.

본 저서 ‘거듭남의 본질’은 그의 4권의 중생론 중 2권으로 1권은 ‘당신의 거듭남, 확실합니까?’ 3권은 ‘거듭남의 유효성’ 4권은 ‘거듭남의 도구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윤종훈 교수의 추천의 글 요약)

 


III, 전체 목차

 


1부 거듭남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정의

1장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다시 사심의 목적은 우리의 거듭남

2장 거듭남의 본질에 대한 정의

2부 무엇이 거듭남이가

3장 거듭남이 아닌 것들

4장 무엇이 거듭남인가(I) - 거듭남은 변화입니다.

5장 무엇이 거듭남이가(II) - 거듭남은 내적인 변화입니다.

6장 무엇이 거듭남이가(III) - 거듭남은 외적인 변화입니다.

3부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

7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생명의 원리

8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은혜로운 습관(I) - 새 것이 필연적인 새 습관

9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은혜로운 습관(II) - 준비가 전제되는 역동적인 습관

10장 새로운 피조물에 심긴 마음의 법

11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게 되는 하나님의 형상

4부 적용

12장 참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

 

 

13장 영광 중에 완전하게 된다는 소망이 주는 위로

14장 자기 점검을 위한 시금석

5부 권면

15장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아 가는 새로운 피조물에게

16장 여전히 옛사람을 벗지 못하고 사탄의 형상을 입고 있는 자들에게

 

 


1부 거듭남의 목적과 본질에 대한 정의

 


1장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다시 사심의 목적은 우리의 거듭남

 


 본문 요절 ; 고린도후서 5장 17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장 13절에 대한 칼빈의 해석은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바를 그들이 마음대로 생각하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가 지금 나의 온전함을 강조하는 것은, 나의 판단을 따라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한 것입니다. 만일 내가 말하는 것이나 침묵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한 교회의 유익을 준다면, 언제든지 나는 말할 것이고, 또한 그렇게 침묵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기 때문입니다.(고후5:14)”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간다고 말하면서 성도들도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 분을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의무임을 설명합니다.

 


1. 본문은 놀라운 변화의 교리를 제시합니다.

 

  14절,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에 기초하여 볼 때 죽으심을 통하여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그것을 참으로 체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힘이 됩니다. 또한 그분을 위한 봉사와 영광 돌리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게 만드는 즐거운 동기가 됩니다.

 

 

1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보혈의 값으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소유물로서, 그분의 능력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며,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권리를 가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2. ‘우리를 위하여’가 그 목적입니다.

 

1) 거듭난 자와 자연인의 삶의 목적이 다릅니다.

  자연인과 거듭난 자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는 자아가 그 목적이라면 후자는 그리스도가 그

목적입니다. 15절에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라는 말씀은, 우리 구주의 죽으심의 실제적인 혜택과 효력 아래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하지만 이는 그 목적과 다르게 자아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칩니다. 모든 곤경과 고뇌의 열매를 맺게 하는 쓴 뿌리인 것입니다.

 

 

 2) 우리의 목적을 바꾸는 것이 그리스도의 목적입니다.

  우리 구주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목적은 피조물들의 타락한 목적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자아를 끌어내리고 하나님을 높임으로써 우리의 주된 목적이 되시는 그분의 권리를 회복하십니다.

 

 

3) ‘나에게서 주께로’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우리가 목적으로 삼아 왔던 우리 자신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른 대상, 곧 그리스도께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목적에 제대로 반응 할 수가 없습니다. 끝장을 보아야 할 것은 자아이고, 최종적인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4) ‘우리를 위하여’였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위하여’가 옳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또한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면, 우리가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그 분을 우리의 모든 행위와 모든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은 너무나 정당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지 않는 것은, 우리 자신을 천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야말로 가장 합당하고도 가장 만족할 수 있는 우리의 애정의 대상입니다. 이를 이루는 자신을 보면서 느끼게 될 행복감은 존재의 만족입니다.

 

 

5) 부활하심도 ‘위하여 죽은 자들’을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뿐만 아니라 그 분의 부활하심도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대표적인 행위로 인하여 우리의 거듭남과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성립됩니다. 그 분의 죽으심과 같이 우리의 죄의 몸이 죽음을 당하게 되고, 그 분의 부활과 같이 생명을 주는 은혜로 인하여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6) ‘이제부터는’ 달라집니다.

  16절에 보면 ‘이제부터는’이 나옵니다. 또 위 말씀에 ‘안다’라는 말은 성경에서 하나님이나 사

 

 

람이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히브리 원어로 ‘야다’로서 ‘실제적인 체험을 갖고 깊이 안다’는 뜻입니다.

육체를 따라 안다는 것은 사람들의 위대성, 지식, 가치를 세상의 기준에 따라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또한 할례와 예식 등의 외적 특권들을 따라서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오직 내적인 은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 그 분을 향하여 열매를 맺고 사는 것을 따라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육체대로 알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그 분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 그 분께서 전하신 뛰어난 은혜들, 그 분께서 실행하신 놀라운 직분들을 보면서 그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아는 것으로 예수님이 은혜의 근원이 되시며,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 임명받으셨고, 또한 맡겨진 그 일을 잘하셨다고 하나님께 인정되었으며,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화롭게 여김을 받으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분을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3. 거듭난 자에게는 증거가 드러납니다.

 

 

1) 거듭나지 않은 자의 관심은 세속적입니다.

  자연인은 세속적인 흥밋거리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만 사랑하며, 참으로 영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을 열망하지 않습니다.

 

 

2) 거룩을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자신에게서 벗아나 그리스도를 향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 부는 증거는, 거룩을 기준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는 모습입니다. 즉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고려하며 그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과 평가에 근거를 두고 평가하지 육체를 따라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3)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킵니다.

  만일 자신을 위하여, 육체적인 목적을 위하여 그 분을 섬기며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복종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4) 그리스도가 중심에 놓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집중해야 하고, 그 분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야 하되 이를 위한 조건은 그 분을 하나님께 인정받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은 그대로 알아야 합니다. 즉 사도 바울과 같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3:8-10)

 

 

 

 

 


4. 새로운 피조물이 가지는 본질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15절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 때문에 우리가 그 분을 따라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주어진 그 사람은 반드시 새로운 피조물이어야 하며 변화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예함으로 그분에게 접목되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17절) 즉 아담의 옛 감정, 옛 기질이 지나갔습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규칙과 통치자가 되고, 선과 악의 기준이며, 자기 자신의 목적이 되고자 하는 것이 지나갔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지명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최상의 선이요, 최고의 목적이며, 최적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를 갈라디아서 5장 6절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서 믿음은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고정시키는 것이며, 사랑은 옛 아담처럼 스스로가 기준과 목적이 되어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 분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곧 믿음과 사랑이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적인 부분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은 ‘법적으로’, ‘의무적으로’, 또한 앞으로 완전히 청산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채로’ 이전 것은 지나가 벼렸습니다. ‘새 것이 되었도다’. 이는 우리의 함으로써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8절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났나니”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교리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그 안에서 형성된 참되고 놀라운 변화로 인하여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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