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거듭남의 본질에 대한 정의

 

 

1. 거듭남의 본질에 대한 정의는 어렵습니다.

 

  

1) 본질에 대한 논쟁들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거듭남이 질적인 것인가, 아니면 영적인 본체인가’, ‘만일 질적인 것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습관인가, 아니면 능력인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성령 그분 자신이신가’ 하는 것들에 대한 논쟁들이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논쟁들은 오히려 거듭남의 본질을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본질을 새로운 피조물, 새마음, 우리 안에 새겨진 율법, 하나님의 형상, 신적인 성품이라는 말들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성경적인 용어들 또한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2) 효과만이 가시적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가시적인 것은 그 본질이 아니라 효과 뿐이기 때문에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씨가 자라나서 번식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그 씨를 성장하게 하는 요소는 씨의 껍질과 외피 속에 감춰져 있기 때문에 어떠한 원소와 요소에 의하여 성장하게 되는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무엇이 영혼인지, 그리고 어떠한 부분에 그 영혼의 주된 원리가 담겨 있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기는 무척 힘듭니다.

요한복음 3장 8절에서 예수님은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바람을 느낄 수 있고, 그 바람 때문에 생기는 결과들을 볼 수는 있지만, 어떻게 그 바람이 일어나는지, 어디로 몰려가는지, 어떻게 거센 바람이 약하게 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거듭남에 대한 탐구도 그렇습니다. 그 효과들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어떠한 특성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을 묘사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3) 자연적인 무지가 눈을 가리기에 어렵습니다.

  가장 똑똑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 속에도 여전히 자연적인 무지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또한 경건에는 비밀의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숨겨졌고, 이성으로부터 감추어져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는 그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부터도 감추어져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 신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우리에게 씌운 눈가리개가 완전히 벗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진리들에 대하여 아는 것 조차도 우리의 육신적인 개념들로 인하여 혼동하게 되었습니다.

 

  

4) 경험하지 못했기에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남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 개념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어떠한 방식으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에 대한 것은, 자연인들은 이해할 수 없고, 오직 그 능력을 친히 맛본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거듭남의 기술을 성경을 따라서 하려고 합니다. 거듭남은 성령의 효과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위대하고도 엄청난 변화입니다. 그 변화를 통해서, 생명력이 넘치는 원리, 새로운 습관, 하나님의 법, 그리고 신적인 성품이 마음 속에 심어지고 뼈대를 형성해서,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워하면서 거룩하게 행할 수 있게 하며, 영원한 영광을 향하여 자라 가게 만듭니다. 이러한 의미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용어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없던 것이 존재하게 된, 변화와 창조가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로서 살아 있는 자라면 분명히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이며, 살아 있는 자로서 생명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살아 있는 피조물이라며, 살아 있기 때문에 행동하게 되는 어떠한 힘과, 이러한 행동들을 쉽게 하게 만드는 습관이 있기 마련입니다. 또한 그렇게 행동하는 힘과 그 행동을 용이하게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그 피조물의 본성 속에는 그러한 행동의 원리로서 어떠한 법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입시키신, 영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인 원리이며 주요 행동 패턴으로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는 한 양식입니다. 이것을 가짐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가 되며 하나님을 위하여 행할 수 있게 됩니다.

 

 

3. 거듭난이 그리스도인의 다른 상태들과 어떠한 차이가 있습니까?

 

   

1) 거듭남은 회심과 다릅니다.

  거듭남은 영적인 변화이며, 회심은 영적인 활동입니다. 거듭남은 하나의 힘을 부여하는 것이며, 회심을 이 힘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환할 수 있는 원리가 주어지고, 회심은 바로 그 전환하는 것 자체를 말합니다. 거듭남은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고, 회심은 그렇게 주어진 능력으로 ‘실제로 행하는 것’입니다.

 


(1) 회심이 결과라면, 거듭남은 원인입니다.

 생명의 활동이 있기 전에 먼저 생명이 생겨야 합니다. 생명이 그 활동의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써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며, 회심의 측면에서 그 힘을 행사하게 하십니다. 회심은 거듭난 사람에서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으로 행동의 원리가 활동을 산출하는 것입니다.

 


(2) 거듭남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지만, 회심에서는 능동적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생명이 자궁에서 처음으로 수태가 될 때에는 생명의 유입에 아무런 공헌도 하지 않지만, 생명이 유입된 이후에는 그 생명이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안에서 우리를 처음으로 활성화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회심은 하나님의 활동으로 주어진 첫 번째 원리에 의하여 피조물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타내는 활동입니다. 이 첫 원리에서 이후의 모든 행동, 곧 믿는 것, 회개하는 것, 죄를 죽이는 것, 죄를 각성하는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행동들에 있어서는 사람이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의 의지 안에 어떠한 경향과 성질을 불어넣는 것은, 각성시키는 성령의 역사하

 

 

심입니다. 그러나 주어진 경향의 능력으로써 의지를 하나님께고 향하게 하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의 자발적인 활동입니다. 거듭난 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진 날이지만 회심이 실제로 일어나게 될 때는 사람이 능동적이어야 합니다. 능동적일 수 있는 힘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이지만,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영혼 안에 먼저 심긴 것입니다.

 

  

2) 거듭남은 칭의와 다릅니다.

  이 둘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합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고, 거듭남으로는 하나님과 동화되고 닮게 됩니다. 거듭남과 칭의는 한꺼번에 동시에 일어납니다. 죄책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칭의와 새롭게 출생하는 거듭남은 언제나 함께 이루어 집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1) 변화의 본질에 있어서 거듭남과 칭의는 다릅니다.

 칭의는 관계적인 변화입니다. 칭의로 인하여 사람이 죄책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옮겨집니다. 노예의 상태에서 자유의 상태로, 행위언약의 의무를 진 상태에서 은혜언약의 특권을 누리는 상태로 진노의 자식에서 약속의 성속자로 옮겨집니다.

 

반면, 거듭남은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과 같은 실제의 변화입니다. 또한 그것은 영혼을 새로운 본성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변화는 본성의 변화입니다. 바로 우리를 진노의 자식이 되게 하는 본성, 곧 첫 번째 범죄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매일의 행동으로 죄를 짓게 하는 그 본성이 변화된 것입니다.

즉 칭의는 상태의 변화라면, 거듭남은 기질의 변화입니다. 칭의는 우리가 죄책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생명을 누릴 권리가 주이진 것이라면, 거듭남은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우리 속에서 부분적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의 순수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2) 칭의와 거듭남은 그 원인과 방식이 서로 다릅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직접적인 열매입니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5:9). 반면, 거듭남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에 의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3:5)이라고 부릅니다.

 

칭의의 질료는 우리들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이지만, 거듭남의 질료는 우리들 내부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은 습관입니다. 칭의의 형상은 ‘전가하는’것이고, 거듭남의 형상은 ‘주입하는’것, 혹은 우리들 안에 ‘들여 넣어지는’것입니다. 결국 이 둘은 서로 다른데, 칭의는 ‘저주받음’에서 ‘무죄언도’로의 변화이며, 거듭남은 ‘오염’에서 ‘친교’로의 변화인 것입니다. 즉각적인 효과를 보자면 칭의는 우리에게 ‘자격’을 주는 것이고, 거듭남은 ‘적절함’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분 안에서 ‘완전한’것이고 그 완전한 것이 ‘우리에게’전가되는 것입니다. 거듭남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며, 완전함에 이르기 위해 열망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3) 거듭남은 입양과 다릅니다.

  입양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고귀함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칭의에서 파생되며, 하나님과의 화해를 전제합니다. 입양이 우리에게 자녀됨의 ‘특권’을 주는 것이라면, 거듭남은 우리에게 자녀됨의 ‘본성’을 줍니다.

입양은 우리들을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 ‘관계시키는’ 것이라면, 거듭남은 우리에게 아버지의 특성을 ‘새겨 놓는’ 것입니다. 입양은 일종의 권세를 주심으로써 우리를 관계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하는 반면에, 거듭남은 하나의 원리를 심으심으로써 우리를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입양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애정의 대상이 되고, 거듭남으로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됩니다.

   

4) 거듭남은 성화와 다릅니다.

  성화를 이루어 가는 것은 뿌리에서 식물이 자라는 것과 같이, 거듭날 때에 주어지는 습관으로서의 이 원리에서부터 자라는 것입니다. 즉 거듭남은 성화의 생명이며, 영혼의 강건함과 생동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2부 무엇이 거듭남인가


3장 거듭남이 아닌 것들

 

 

1. 거듭남은 본성 자체의 파괴가 아닙니다.

  거듭남은 영혼이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실체나 기능적인 구조믈들을 아예 제거하거나 없애 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이전에 있던 기능적 구조물에 새로운 성질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한쎈씨병(문둥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그 신체의 피부 조직을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피부에 있는 질병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비록 금과 불길이 서로 뒤섞여서, 불의 속성이 금의 모든 부분 속에 흡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금의 실체가 파괴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금은 유연하게 되어서 예술가가 만들고자 하는 형태를 더욱 쉽게 만들 수 있게 되지만, 금은 여전히 금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거듭남이란, 촛대를 부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촛대 위에 새로운 초를 세우는 것처럼 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에 새로운 성향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과 이성, 이해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올곧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이전과 동일한 몸에 새로운 성질이 부여된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본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기품이 더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황폐해지는 대신에 풍부해지며, 일소되는 대신에 오히려 개조되는 것입니다.

 

 

 

2. 영혼의 활동은 여전합니다.

  거듭남은 영혼의 본질적인 활동 자체의 변화가 아닙니다. 영혼의 활동에 있어서 거듭난 전후에 그 본체와 본질이 동일한 것처럼, 그 영혼의 열정과 정서의 특징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열정과 정서의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의 행동과 자연인의 행동은 둘 다 행동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랑하고 두려워한다는 영혼의 활동의 면에서는 모두 동일합니다. 하지만 활동의 대상은 서로 다릅니다.

 

바울은 적극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본성과 기질은 은혜를 받은 후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옳은 방향으로 물꼬가 트여서 옳은 대상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핍박하는 일에 어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것처럼, 은혜 받은 이후에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덕을 세우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의 수고는 그가 가지고 있던 기질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원리가 그 기질 속에서 작용하여 다른 대상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의 정서들의 실체와 본질, 그리고 그것들로 말미암은 활동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원리로 인하여 분노가 열정으로 변화되고, 슬픔이 회개로 바뀌게 되며, 두려움이 이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되고, 세속적이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활동들에 새로운 기질들을 공급하는 전혀 새로운 원리에 의한 것입니다.

 

3. 동면에서 깨어나는 것은 새생명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자연적 본성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던 원리를 각성시키거나 그 무엇을 끌어내어 다듬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잠자는 무엇을 깨우는 것도 아닙니다. 거듭남은 죽어 있는 사람을 부활시키는 것이며, 무에서 사람이 창조되었던 것처럼 새로운 창조인 것입니다. 그것은 이전의 원리들을 흔들어서 깨우거나 그것들을 새롭게 자극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사람 속에는 한 톨의 은혜도 없습니다. 오직 죄의 씨만이 있을 뿐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롬7:18)

거듭남이란, 새로운 씨앗이 영혼의 토양 속에 뿌려지는 것이며, “썩지 아니할 씨”(벧전1:23)가 심겨서 자라나도록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자연인의 상태를 무의식의 상태나 잠자고 있다고 표현하지 않고, 죽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깨어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게’ 하는 것, 곧 부활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4. 본성에 새 옷을 입히는 것과는 다릅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본성에 무엇인가가 부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아담에게 어떠한 것을 첨가시킨 것이 아니라, 그분 자신이 새로운 머리요, 또한 아담이 되셨는데, 이는 하나의 머리이면서, 또한 공통의 인격을 소유하고 있다는 개념으로 그와 일치한다는 견지에서 아담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새로운 피조물도, 영혼 속에 형성되신 그리스도도, 이전의 옛 본성에 첨가되는 그 무엇이 아닙니다.

 

 

은혜는 이전의 죽은 나무 등걸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전의 옷이 해져서 새 헝겊으로 꿰매는 것이 아니라, 이전 것을 완전히 버리고 새 것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골3:9,10) 그것은 이전에 있던 것을 치

워 버리는 것으로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지, ‘수선된’ 피조물이 아닙니다.

빛은 어둠에 다른 것을 부가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쫓아 버리는 것입니다.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넣는 것입니다. 무언가가 부가되어 옛 본성이 힘을 얻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옛 본성이 십자가에 못 박힐 뿐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부수적인 것들이 함께 제거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부패된 옛 본성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자연인 안에 있는 그 어떠한 것도 은혜를 받을 만한 가능성을 지닌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없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고 새 사람이지, 개선된 것이나 새 옷을 갈아 입은 사람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5. 거듭남에 대한 표시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거듭남은 외적인 세례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세례를 받은 것을 거듭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외형적 요소의 물이 내적인 생명을 전달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세례를 받게 될 때 모든 사람이 거듭나게 된다면, 세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다고 보아야 하며, 결국 성도의 견인의 교리는 거짓이 되어 버립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세례가 거듭남의 은혜가 전달되는 방편이 될 수는 있어도 기계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성찬이 영적 양식을 제공 받는 성례인 것처럼, 세례는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로서의 성례입니다. 성례의 실제화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영적으로 양식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예 그러한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아야 할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입에 가장 맛있는 음식을 넣어 준다고 해도, 그것은 죽은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받아 먹고 그것을 소화해서 영양을 섭취하려면 먼저 생명의 원리가 그 사람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만이 영적 생명의 원리입니다. 그것만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을 통하여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게 하는 원리입니다.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 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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