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무엇이 거듭남인가(III) - 거듭남은 외적인 변화입니다

 


거듭남은 내적인 변화이면서 또한 외적인 변화입니다. 그것은 대상과 작용에 있어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내적인 좌소에서의 거듭남이 형태를 취한다는 면에서 외적인 변화입니다. 예를 들어 보는 능력은 영혼 속에 있지만, 보는 행위 자체는 눈으로 합니다. 이러한 내외적인 변화는 하나님의 일들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의 길을 따라서 행하게 합니다. 모든 외적 변화가 내적 변화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적인 변화는 언제나 외적인 변화를 동반합니다.


1. 대상을 향하여 자세가 달라집니다.

  이전에는 그 앞에 놓여 있는 세상과 죄를 추구하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그의 영혼이 열심히 하나님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처럼 대상의 측면에서 변화되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27:4).

하나님과 친숙해지고, 그분을 품고, 자기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며, 또한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 것에 친숙해지고, 그분께서 자기의 길을 지도하시고 자신의 일을 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친숙하게 되는 것, 이것이 영혼의 반응입니다. 이에 지성은 하나님의 일들을 깨닫는 데에, 의지는 그것들을 선택하는 데에, 정서는 그것들에 만족하는 데에 익숙해집니다. 모든 기능적 구조물에 의해서 영적인 대상들이 기뻐하는 일들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는 그 기뻐하는 일들을 영혼이 진심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롭게 된 사람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열망과 애정의 대상으로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할 대상, 무한히 영광스러운 대상으로 삼게 만듭니다.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을 대적하고 그 세상적인 대상들에 대하여 가졌던 애정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이처럼 복음과 마음이 합하게 된 사람은 삶도 복음의 중심 주제와도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복음이 의도하는 바에 응하게 됩니다.

 


2. 내면이 외면의 변화로 작용합니다

  작용은 본성을 따릅니다. 작용이라는 것은 본성에 지속적으로 반대될 수가 없습니다. 그 작용의 측면에서의 변화를 살펴보겠습니다. 마음과 그 마음의 행동은 언제나 서로 모순이 될 수 없습니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합니다’(마12:34) 마음 속에 있는 은혜의 샘을 따라서 그 생명의 현상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새로운 인식은 새로운 작용을 가져 옵니다. 판단의 변화는 반드시 행동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행하게 됩니다’(골2:6)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새로운 창조의 목적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

 

 

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만일 새로운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새로운 창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열매는 뿌리의 본질을 닮는 것이고, 그 뿌리의 본성을 따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거룩이 그 본성에 유입되었다면, 그 거룩이 또한 삶 속에서도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은혜가 왕좌에 오르게 되면, 그 작용은 영적인 것이 됩니다. 성령에 의해서 활동하게 되어서 ‘성령 안에서 살고 성령 안에서 행하게“(갈5:18,25)된 사람이, 그 영적 풍미가 없이 어떠한 일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행동은 그 행동이 나오게 되는 원리와 같은 색깔을 띄기 마련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성도의 의무 즉, 성도의 삶이 행하게 만드는 재료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작용 방식에 있어서 변화된 것입니다. 이전에는 육신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알았던 것처럼 성도의 의무들도 그렇게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따라서 그것들을 알게 되었고, 또한 행하게 되었습니다. 즉 자연 대신에 은혜가, 육신 대신에 성령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내적일 뿐만 아니라 외적입니다. 엄격하게 도덕적이었던 사람이 은혜를 받게 되면, 내적 원리가 분명하게 변화되어 새로운 마음으로 그 엄격한 행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전에 도덕적으로 느슨했던 사람이 변화를 받게 되면, 분명히 외적인 행동의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전의 생활과 본성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하는 것은 어떠한 내적인 변화가 없이 단지 외적으로만 바뀐 사람은, 그렇게 바뀐 행동은 이전과 동일한 영으로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3부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


7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생명의 원리

 


 지금까지 거듭남, 즉 새로운 창조를 변화의 본질의 측면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생명에 관한 원리의 측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이 새로운 창조는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전환입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3:1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전에는 영적 생명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

주님께서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셨을 때, 나사로에게 생명과 운동의 원리를 주셨습니다. 죄 가운데서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을 불러내실 때에도 이와 같은 일을 하십니다. 첫째 아담에게서 우리가 물려받은 모든 것이 사망에 속한 것이지만, 둘째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모든 것은 생명에 속한 것입니다. 후자가 영적 생명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전자는 영적 죽음을 증식시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숨은 사람, 곧 속사람에라고 하는데, 그것은 그 피조물이 생명을 가지고 운동한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 효과가 그 원인에서 나오는 것처럼, 육체의 생명이 영혼에서 나오고, 영혼의 생명은 은혜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 거듭난 사람 속에 있는 영적 생명의 공로적 원인이며, 그것의 효력적인 원인이 성령에 의한 것이라면, 은혜는 이 생명의 형상적인 원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아담에게 생명이 주입되었던 것처럼, 자기 안에 불어 넣어진 영적 생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그림자에 불과한 위선과 구별됩니다. 위선은 형태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피조물은 생명의 능력을 갖는 것입니다. 위선은 꾸밀 수 있지만, 새로운 피조물은 본성에 관한 것이어서 꾸밀 수 없습니다. 그림으로 사람의 윤곽을 묘사할 수는 있지만, 그 그림에 생명이나 지성, 정서를 담을 수는 없습니다.

 


8장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는 은혜로운 습관(I)

- 새것이 필연적인 새 습관


 이제 하나의 습관으로서의 거듭남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습관이란 내적인 틀을 의미합니다. 마치 숙련공이 노련한 습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손쉽게 행동할 수 있게 해 주는 그 무엇입니다.

새로운 창조는 영혼의 실체를 파괴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신체조직과 기능적 구조물들이 여전히 똑같고, 인간의 본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기 때문에, 이 새로운 창조는 은혜로 인한 성질들과 습관들의 형성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의롭게, 거룩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영혼을 아름답게 하고, 또한 새롭게 배열하게 됩니다.

본성의 부패는 우리의 본성의 독이며, 질병이고, 변형입니다. 은혜는 우리 본성의 아름다움이고, 건강이며, 장식품이고, 그 영혼에 가치와 진가를 제공합니다. 방탕한 사람이 덕스러워지게 되면, 비록 그가 이전과 똑같은 영혼과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를 다름 사람,새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이제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나쁜 습관들을 벗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습관을 가지지 않은 채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새로운 습관들이 없이는 그 어떠한 것도 부패한 상태에서 순결한 상태로 변화될 수 없습니다. 어둠을 빛으로 만드는 것, 바로 그 본질 속에 새로운 성질을 유입시키는 힘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씨앗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요일3:9). 이전에는 잡초만 나게 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던 땅에 좋은 씨앗을 뿌려 좋은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1.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습관을 지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적인 선하심을 따라서 그가 사랑하시는 피조물들에게 일반적인 것들을 베푸시는 것처럼, 초자연적인 선하심을 따라서 그의 사랑하시는 이들에게 초자연적인 것들을 베푸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베푸실 때에 그냥 베푸시는 곳이 아니라, 그 모든 피조물들에게 어떠한 형태와 성질을 주셔서, 그 형태와 성질을 따라서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그 본성에 이끌려서 활동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초자연적인 선하심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감동시키신 그들에게 더욱 영적인 성질들을 주입시키십니다. 그 성질들에 의해서 그들은 합리적으로 부드럽게, 손쉽게, 그 영적 선을 획득하도록 감동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그 영혼 속에 사랑의 영, 은혜의 영을 넣어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의 지성이 하나님의 뛰어난 방식에 대한 지식을 가지게 되고, 또한

 

 

그들의 의지도 이러한 습관의 능력과 달콤함에 의해 흥이 돋아서, 그것과 반대로 행할 수도 없고, 그렇게 반대로 행하려고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의 습관은 은혜로운 방식으로 행사하는 영적인 힘을 가집니다. 죄의 습관이 그 본성의 면에서는 육신, 그 결과의 면에서는 사망이라고 불리는 것같이, 은혜의 습관은 그 조건과 결과가 생명이라는 면에서 새로운 피조물과 영이라고 불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서 일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하나의 육체가 준비되었던 것같이, 영혼에게는 새로운 피조물의 일을 하기 위한 습관이 준비되었습니다. 이 목적을 위하여, 진리의 습관, 즉 의지의 신실함이 있고, 지성에는 ‘숨겨진 지혜’가 있습니다. 부패한 본성에 죄의 습관이 있듯이, 새로운 피조물에는 은혜의 습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셔서 믿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시며, 복종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믿음과 사랑, 복종과 은혜를 모두 마음의 토양에 심어 그곳에서 자라나서 영원에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즉, 믿고 사랑하며 복종할 수 있는 의지를 갖게 하시고, 또한 신속하게 반응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2. 새 습관은 하나님께로 이끌리는 습관입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게 하셔서 위로부터 받게 하셨던 그 능력이 없이는 자신들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그 초자연적 원리가 없이는 은혜로운 행동들을 전혀 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영혼 속에 은혜의 습관이 없다면, 그 어떠한 행동도 은혜에 속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새로운 창조는 성령께서 억지로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이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성을 바꾸시고 다른 본성을 심으셔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행동하게 하는 것입니다. 죄가 사람 안에서 본성상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이제는 은혜가 새로운 피조물 안에서 습관적인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처럼 반대되는 습관이 없다면, 그것은 아직 그 사람이 반대되는 상태에 놓인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죄에 이끌렸던 것과 같이, 이제는 영혼이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이끌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이끌림이 습관적이었던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이끌림도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3. 여러 가지로 나타나는 습관은 사실상 하나입니다

 

  이러한 습관은 오직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습관이란 모든 기능적 구조물 속에 있는 전체의 올곧음이며, 또한 의롭게 활동하는 것의 보편적인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부패의 본성이 ‘옛 아담’, 혹은 ‘사망의 몸’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은혜의 본성은 ‘새사람’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의 신체가 비록 여러 부분의 조직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부분들이 하나의 영으로 결합되고, 오직 하나의 습관에 의해서 조직됩니다. 그와 같이 모든 죄도 한 사망의 몸의 부분들이고, 또한 모든 은혜들도 같은 뿌리에서 나온 가지들인 것입니다.

 

 

이처럼 각각의 모든 은혜들은 그 활동이 드러나게 되는 때가 서로 다르고, 서로 구분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한 뿌리로서의 습관으로부터 흘러 나오고, 또한 그 습관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은혜들은 바로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계속 공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의 성품이기 때문에 완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신적인 본질은 하나이면서 그 안에 모든 완전함을 탁월하게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일 그 가운데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그것은 신적인 본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처럼 마음속에 주입되는 은혜도 그 안에 실제로 모든 완전함을 포함하고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일치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성령님께서, 다양한 은사를 서로 다른 사람에게 주시겠지만, 그 새로운 피조물에는 모든 은혜들을 포함하는 본성이나 습관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적인 본성일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려고 하신다면 모든 은혜를 주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모든 은혜가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이며 구성물이기 때문입니다.

 


4. 이러한 습관은 여러 가지 이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주체에서 비롯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습관은 주관적으로 영혼의 본체에 있는 것이지만, 지성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칭하고, 의지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선택함’이라고 칭하며, 정서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활동’이라고 칭합니다.

사망의 몸이 지성에 있을 때는 그것을 무지라 부르고, 의지에 있을 때는 증오, 양심에 있을 때는 죽음의 상태, 정서에 있을 때는 무질서와 심술궂음 이라고 부릅니다. 어떠한 질병이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여러 부분들의 중앙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그것은 기질의 기능장애나 이상 상태의 다른 이름 뿐인 것과 같습니다.

 

2) 다양한 적용 대상들에서 비롯된 이름이 있습니다

  그 습관은 그리스도와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에 믿음이라 부르고,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기뻐하는 것이기에 사랑이라 부르며, 그리스도의 발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기에 겸손이라 부릅니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기에 복종이라 부르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기에 인내라고 부르고, 그리스도가 무시당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기에 근심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의 습관에서 말미암고, 믿음에 의해서 활성화됩니다. 그래서 그것은 믿음의 사랑이고 믿음의 기쁨이며, 믿음의 겸손이고 믿음의 인내입니다. 이모든 것들이 영혼에 자리잡은 하나의 습관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한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모든 다양함 속에서 일치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피조물의 모든 완전함은 한 하나님 안에 우뚝 솟아 있고, 모든 악한 기질은 자연인 안에 태어나면서부터 배아 상태로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처럼 은혜의 모든 아름다움은 이 습관 안에 훌륭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처: 청교도아카데미/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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