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새로운 피조물에 심긴 마음의 법

 


 지금까지 변화, 생명적인 원리, 습관으로서의 거듭남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마음에 심긴 하나의 법으로서의 거듭남을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피조물은 그 본성에 속하는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성의 법칙을, 짐승은 감각과 본능의 법칙을, 식물은 성장의 법칙을, 무생물은 운동의 법칙을 가지고 있듯이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그 마음에 주입된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렘31:33). 이 구절이 신약에 인용되고 있습니다.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8:10). 새로운 피조물에게 주어진 법은 ‘마음의법’이라고 불리는데, 그 마음이라는 기능적 구조물이 생기자마자 그것과 함께 그 법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마음속에 새겨지는 이 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몇 개의 명제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1. 마음의 법은 본성의 법과 다릅니다


1) 마음의 법은 회심한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법입니다

  본성의 법이 행위언약의 법이라면, 마음의 법은 은혜언약의 법입니다. 본성의 법은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에도 있었지만, 마음의 법은 그의 회심 때에 주어졌습니다. 본성의 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죄와 불신앙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법은 이러한 것들을 깨닫게 합니다. 본성의 법은 성화와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사람 속에 육신으로 태어난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법은 성화의 한 부분이 되어서, 몸의 지체의 법과 싸웁니다.

 


 2) 타락 이전에는 본성의 법과 마음의 법이 같았습니다

  마음의 법은 원래 본성의 법이었던 그 법의 회복입니다. 처음에 아담의 마음속에 새겨졌던 그 법을 거듭난 사람들의 마음속에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 하나님을 따라 ‘지으심을 받았다’라는 말은, 아담이 창조될 때 지니고 있었다가 잃어버린 그 의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이 이 법을 지워 버리고, 그 분의 의를 잃어 버렸으며, 오히려 마음속에 그것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법에 대하여 본성적으로 복종하지도 않고, 복종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자기 속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에 대한 적개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거듭남이란 죄의 법을 그 자리에서 쫓아내고, 하나님의 법을 그 합당한 위치에 두는 것입니다.

 


 3) 마음의 법은 마음속에 전체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마음속에는 하나님께서 심으신 모든 법과 모든 명령이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명령을 돌판에 새기셨던 것처럼, ‘마음의 판’에도 전체의 법을 새기셨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참된 것입니다. 만약 마음에 새겨진 그 법이 전체의 법이 아니라면, 새로운 피조물의 본질에 속한 무엇인가가 결핍되게 되는 것입니다.


 4) 마음의 법은 외적인 법을 필요 없게 만들지 않습니다.

  외적인 법은 여전히 하나의 규칙으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새겨지는 이 내적인 법은 외적인 규칙과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내적인 법은 규칙 자체가 아닙니다. 마음에 있는 법은, 성령의 손길에 의해서 외적인 말씀이 새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적인 법의 진리를 실행하기 위하여 외적으로 기록된 법을 의뢰해야 합니다.

마음속에 있는 법은 비록 그 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 외적인 율법과 조화를 이루지만, 아직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규칙이 되려면 기록된 율법과 같이 완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생활을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말씀 속에 기록된 법입니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11). 이 말씀에는 주의 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이 약속되어 있으며, 또한 내적인 가르침도 약속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법을 새기는 것은 문자로 쓰인 법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외적인 법을 확립하고 진전시키며, 또한 존중하게 만듭니다.

 


2. 마음의 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 법의 내적인 지식과, 지적으로 그 법을 찬동하는 것입니다.

  마음 속에 의의 지식과 법의 존재는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특성으로서 함께 주어진 것입니다.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내게 듣고 그들의 비방을 두려워하지 말라”(사51:7). 이 말씀에서는 지식이 있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마음에 율법이 있는 자들’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에 그 법이 있는 것입니다. 회복된 지성 안에는 어떻게 그 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여러 상황에서 외적인 법을 적용하는 내적인 기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씨앗이기 때문에, 옥수수 씨앗에서 옥수수가 나오는 것처럼, 이 씨가 먼저 지성에 뿌려지고 품어져서, 그것에 일치되는 원리들과 생각들 속에서 자라납니다. 그것으로 그 마음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며, 율법의 돌판을 보존하는 방주가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시력으로 율법 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교훈들 속에 있는 거룩을 보게 되고, 또한 자신 속에 있는 더러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2) 율법에 내적으로 일치하는 마음입니다

  거푸집에 부어진 쇳물이 그 이전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형태, 곧 그 거푸집의 모양대로 변화되는 것처럼, 영혼도 이전에는 죄의 종이어서 죄의 법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지만, 이제는 성령으로 녹아서 율법의 모양과 형태로 빚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은혜의 법과 하나님의 율법은 서로 유사합니다. 동일한 하나의 인장을 찍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지게 되면, 새로운 피조물은 그 명령을 친근하게 느낍니다. 마치 자연인이 죄를 친근하게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이 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행하는 것은 본성적

 

 

인 자유와 선택, 판단에 의한 것이지, 그 율법에 포함된 위협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3) 율법에 복종하려는 강력한 성향입니다

  죄에 이끌리는 습관이 이전의 본성에 강하게 작용했던 것처럼, 새 본성에는 율법의 명령에 복종하려는 강한 이끌림이 있습니다. 이러한 새 본성의 효과적인 덕을 마음의 법이라고 불립니다.

마음의 법과 외부의 법은 서로 연합하여 하나의 완전한 법을 구성합니다. 하나는 지도 감독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실행을 위한 것입니다. 외부의 법은 훈령을 내리며, 마음의 법은 그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강력한 법이 작용하는 것이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롬8:2). 죽은 문자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적인 원리로서 마음을 살아나게 하고 율법의 요구를 이루게 하며, 또한 이전에 마음을 방해했던 것에서 해방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창조 전체의 주된 목적이기도 합니다. 곧 우리를 하나님의 계명을 좇아서 살아가도록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으니 그의 걸음은 실족함이 없으리로다”(시37:31). 이렇게 영혼은 복음에 물들고 영적인 것이 되어서, 이제는 본성으로 그 복음에 담겨져 있는 것들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4) 율법에 대한 강한 애정입니다.

  말씀 속에 기록된 교훈들은 사랑의 율법으로 마음속에 있습니다. 말씀 속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은 명령의 율법인데, 마음속에 있는 법은 자유의 율법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율법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법을 완성합니다.

옛 사람은 율법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었습니다. 단순히 죽은 문자였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 사라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법이 자기 마음속에 새겨지자 너무 기뻐서, 이제는 그 법과 그 법을 향한 사랑이 없이는 결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법에 자기 마음이 충분히 반응하지 않을 때면 선지자가 말했던 것처럼 그 법도를 사모하여 찾게 될 것입니다. “내가 주의 법도들을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119:40). 그는 그 법도의 거룩함에 다시 일치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전에 즐거워하던 상태로 회복되기까지 결코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 법은 그에게 내재적으로 선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편안함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과 떨어져 있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5) 실제적으로 복종하는 능력입니다

  마음속에 율법을 기록하는 것은, 영혼 속에 어떠한 능력과 힘을 넣어 주는 것, 하나님의 계명의 길로 달려갈 수 있고, 또한 마음과 애정이 그 계명에 이끌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을 함축합니다. 이러한 능력은 율법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복음에 의해서만 주어집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 율법은 ‘의문’이라고 불립니다. 율법을 읽거나 듣는 것은 눈이나 귀를 교육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마음을 가르칩니다. 율법은 죽이는 의문인 반면, 복음은 살리는 성령입니다. 복음은 율법의 준수를 명령하되, 그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함께 줍니다. 율법은 ‘정죄의 직분’이지만 복음은 ‘의의 직분’입니다.

 

 

율법은 ‘지성의 인지’, ‘의지의 동의’, 감정의 즐거움‘이라는 측면에서 마음에 기록됩니다. 지성에 있어서는 믿음의 빛이 선명한 가운데서, 의지에 있어서는 사랑의 불길의 그 열기 가운데서 마음에 기록됩니다. 지성에서는 그 율법을 판단하여 옳다고 승인하는 것이 있고, 의지에서는 그 율법을 향하는 움직임과 점점 가까워지면서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애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능력에 따라서 율법과 보조를 같이 하려고 하는 열정이 있습니다.

 

 


11 새로운 피조물이 지니게 되는 하나님의 형상

 

 

 새로운 피조물 안에는, 생명의 원리, 습관, 마음의 법이 있는 것처럼, 또한 하나님과 닮은 모습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존재한다는 차원에서 서로 유사합니다. 그것처럼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을 가장 정확하게 닮은 모습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렇게 닮은 모습 안에 거듭남의 본질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1. 낳은 자와 난 자는 닮은 꼴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 낳으신 분, 곧 하나님과 닮은 모습으로 태어났습니다. 타락 이후 모든 인류를 덮친 죄가 사탄의 형상을 각인했다고 한다면, 거듭남의 은혜는 하나님의 형상을 각인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부패와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이러한 닮음은, 창조 때에 인간에게 주어졌던 행복이었습니다. 이제는 구속함을 받음으로써 그 행복이 회복된 것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3:10). 그것을 잃어버린 것이 그의 불행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복은 바로 그것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그것을 ‘신의 본성’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은 신적이라고 불립니다. 신적 원리인 그 은혜가 거듭난 영혼 속에서 가장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궁과 능력이 그 은혜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젖을 물려 빨게 하셨습니다. 그러하다면 아기가 아버지를 닮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하나님 아버지를 닮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복사판이 원판을 닮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일3:9)들이라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났다는 것은, 그 낳은 자와 같은 본성을 가졌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1) 본체가 하나님과 닮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체에 참예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본체가 아니라 본성이 닮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적인 기질의 유사함이지, 무한한 본체의 유사함이 아닙니다. 그 신적 본체는 다른 피조물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새롭게 되는 것은, 처음부터 그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첫 창조 때에 신적인 본체가 전달된 것이 아니라, 아담의 본성의 능력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의 의와 닮은 의가 전달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본체적인 완전함에 이를 수 있다면 그것은 참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이며 동등한 자가 되는 것이 될 것입니다.

 


 2) 그러나 실제적인 참예를 의미합니다

  출산이란 하나의 생명체를 그 사랑의 유사성만이 아니라 그 본성의 유사성도 지닌 채로 낳는 것입니다. 거듭남도 그러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형상을 받게 됩니다.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벧전1:15). 이는 밀랍이 인장의 모양을 받아들이는 것과도 같습니다. 비록 그 도장과 재료가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도장의 글자를 정확하게 새기게 되고, 그 도장에 새겨진 글자와 찍힌 것은 서로 딱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성경은 그것을 이렇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1:13)

  하나님의 완전함에 속한 것들은 질적인 측면에서 새로운 피조물에 속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본체라는 측면에서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그것은 피조물이 이를 수 있는 최상의 상태만큼 실제로 하나님과 닮은 것입니다. 거듭날 때 그 첫 번째 설계도가 작성되고, 영광의 때에 그 설계된 대로 최고의 성취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3) 새로운 피조물 속에 새겨진 것은 하나님의 전체 형상입니다

  새로운 피조물 안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집니다(골3:10). 어린아이의 신체 각 부분은 부모의 것과 일치합니다. 보모님만큼 크지는 않아도 부모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입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5:9).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새사람에게 나타나는 즉각적인 효과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 그리고 진실함을 그 영혼의 본질적인 부분들 속에 새겨 넣으시는 것입니다. 새롭게 되는 인간이 갖추게 되는 모든 요소들 위에 그 본성이 새겨집니다. 지성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새겨지며, 의지 속에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4) 그의 본성에 참예하는 면에서, 특별히 그리스도와 닮게 됩니다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요일3:7). 새로운 피조물은 의로우심에 있어서 똑같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와 실제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새로운 본성에는 그리스도를 닮은 청사진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갈4:19).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우리는 “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벧전4:1)라는 권면을 받게 됩니다. 이러한 권면에는 이러한 마음이 새로운 피조물 속에 들어가 그를 자극하여 실제로 행동하게 만드는 힘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연합하는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그의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미리’정하셨습니다(롬8:29). 여기서 ‘본받게 한다’는 것은, 같은 형태와 모양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심으로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본성을 부여하심으로써 우리를 그리스도께 일치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씨(후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또한 새롭게 된 사람들은 그의 ‘동류들’이라고 불립니다(히1:9). 언약에 있어서, 그리고 영광의 상태에 있어서 그와 동류가 되었다면, 의를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하는 기질에 있어서도 그와 동류가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본성에 있어서 옛 아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옛사람의 본성에 참예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자들은 믿음에 의해서 새 아담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새 사람의 본성에 참예하게 됩니다. 전자에 의해서는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갖게 되고, 후자에 의해서는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가지게 됩니다(고전15:48,49). 그러므로, 믿음과 겸손, 인내와 사랑, 복종,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 등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영적인 씨앗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5) 새 본성을 갖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신 성령과 닮습니다

  자연인이 개괄적으로 육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도 개괄적으로 영이라고 불립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육으로 난 것은 그 본성이 육을 닮은 것처럼, 성령으로 난 것은 그 본성이 성령을 닮았습니다. 영의 풍미, 기쁨, 호흡도 그 영적인 기원과 닮게 됩니다. 또한 그 활동과 목적, 기질이 성령의 것과 닮았습니다. 그것이 성령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2. 거듭난 자는 무엇이 하나님과 닮습니까

 

 

1) 사랑이 닮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에게서 나타나는 믿음과 사랑에 의해서 그에게 하나님과 닮은 것이 있음이 증명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예수님과 닮게 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요일4:7)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자기의 형상과 닮은 모든 것들을 향하여 자신의 팔을 뻗습니다. 영혼이 모든 선한 것에 손을 뻗어 그 선한 것에 만족할 때, 그것이 곧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행복의 원천과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가지신 그 사랑을 가지게 될 때, 우리도 하나님께서 누리시는 그 행복과 복된 상태를 조금이라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활동이 닮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행하심에 일치하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모든 본성에는 그것에 부합되는 애정과 행동이 있기 마련입니다. 거듭난 자는 하나님의 신적 성질의 영향을 받아서 그 신적 성질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새롭고도 탁월한 상태로 그 영혼을 고양시켜 주는 은혜는 더욱 고상한 행동을 하게 합니다. 더욱 완전한 방식의 행동을 하기 위한 것 외에 그 어떠한 것도 한 존재를 더욱 완전한 상태로 끌어 올리는 것은 없습니다.

 


 3) 거룩이 닮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히12:10). 아버

 

 

지가 자기 자식을 가르쳐서 마땅히 가져야 할 덕성을 가지도록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거룩에 참예하도록 거듭남을 통해 이루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2:29). 의를 행하는 바로 이 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귀들의 자녀들과 다른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죄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롬3:23)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갱신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곧 거룩의 상태를 얻게 되며, 마침내는 그 거룩이 완성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거룩 가운데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고, 앞으로는 그 교제를 완전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출처: 청교도 아카데미/조정민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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