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8장) 시동생 대신 시아버지
이응한 목사 2016. 12. 3. 06:06(창세기 38장) 시동생 대신 시아버지
마태복음 1장 첫머리는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하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로부터 “낳고, 낳고”가 이어지는데 원어를 보면 “낳고”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고(헬라어 에겐네센, 영어 fathered)”입니다. 낳는 것은 여자의 몫이요 공급하고 지키는 것은 남자의 몫입니다. 이름과 명분은 남자의 몫이요 실속과 생명은 여자의 몫입니다. 한국에는 칠거지악이라는 법이 있었습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 하면 쫓겨납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런 풍습이 없었습니다. 사라나 라헬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이를 못 낳으면 종을 사용하여 아들을 낳아도 됩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을 양자 삼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여자가 아들을 낳거나 만들거나 구하거나 해서 남편에게 주면 남편이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아버지가 되고, fathered"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 풍습에 의하여, 율법에 의하여 요셉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의 적법하고 당당한 육신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에는 네 사람의 여자가 나옵니다. 사라, 리브가, 레아 같은 쟁쟁한(?) 주연급 여성 성경인물들이 아닙니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 이렇게 네 명의 여자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방여인이라는 점, 정상적이고 순탄한 과정을 거치지 못 하고 아들을 낳았다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그 중 첫 번째가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38장의 다말입니다.
다말은 유다가 맏아들 엘의 아내로 취한 가나안땅 여자, 곧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하여 여호와께서 죽이심으로 다말은 과부가 됩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오늘날 수혼제도라고 부르는 풍습법대로 둘째 아들 오난에게 형수와 동침하여 형을 위하여 아들을 낳게 하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오난은 자기의 씨가 형의 아들이 되는 것이 싫어서 땅에다 설정을 합니다. 이 일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오난도 죽이십니다. 유다는 마지막 남은 셋째 아들 셀라도 죽게 될까봐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셋째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하였는데도 혹시 또 죽을까봐 다말에게 주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다말은 아들도 낳지 못 하고 늙어가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어 유다도 홀아비가 됩니다.
유다가 며느리 다말의 친정이 있는 딤나로 양털 깎는 자에게 갔을 때 사건이 벌어집니다. 다말은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합니다. 화대로 염소새끼를 받기로 하고 그 증거로 유다의 도장과 근과 지팡이를 맡아 놓고 동침합니다. 잉태하게 됩니다. 자신이 며느리와 동침한 것을 꿈에도 몰랐던 유다는 며느리가 행음하여 잉태하였다는 이야기를 듣자 불태워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 때 다말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어놓으며 이것들의 주인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다, 이것들이 누구의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 때 유다는 말합니다. “그는 나 보다 옳도다.”
유다는 왜 며느리 다말이 옳다고 하였을까요? 그렇습니다. 여자는 생명의 유업을 잇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잉태의 고통을 크게 하시고 언젠가는 오실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여자는 여자의 후손, 곧 구세주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고통하며 아들을 낳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만 아니라 이방인도 하나님은 사용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든 이방여인이든 여자가 아들을 낳지 않는다면 구세주는 오지 못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는 것, 그것은 모든 여자의 권리요 의무이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들어가 아들을 낳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혼제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에 다말을 구세주의 계보를 잇는 생명의 유업의 여자로 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말은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그런데 시아버지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까지 죽을까봐 다말에게 주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하고, 여자의 후손이 오실 계보를 끊으려 한 셈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어코 아들을 낳아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야 하는 다말은 목숨을 건 결단을 하였고,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여 잉태한 것입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아들 셀라를 아끼려다 자신이 며느리에게 들어가 잉태하게 한 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로 말미암아 쌍둥이 두 아들을 낳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 먼저 밖으로 나온 아이의 손에 산파가 붉은 실을 맵니다. 그런데 그 손이 도로 들어가고 다른 아이가 먼저 태어납니다. “어찌하여 먼저 터치고 나오느냐?” 하고 그 이름을 ‘베레스’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에 손에 붉은 실을 맨 세라가 나옵니다. 그들도 태중에서 그리스도의 계보, 장자의 계보를 붙잡으려고 싸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계보가 부끄러운 불륜의 계보라고 말합니다. 구세주의 족보라면 뭔가 근엄하고 거룩해야 하지 않느냐는 거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보는 근엄하고 거룩하고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인류, 악하고 부끄럽고 추하고 연약한 죄인들의 혈통으로 이어져 내려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죄악 된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신묘한 약도 겉에 발라야 소용없습니다. 주사기를 통하여 핏줄 속에 들어가야 효력을 발합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살리려고 그렇게 죄인의 혈통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만일 다말이 가만 앉아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 이름은 성경에, 그리스도의 계보에 없었을 것입니다. 베레스가 세라를 제치고 먼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이름도 계보에 기록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진리를 붙잡아 나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도덕, 윤리, 체면의 문제가 아닙니다. 점잖게 가만 앉아서 되는 일도 아니고, 누가 대신 해주는 일도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내가 해내야 하는 일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상은 달음박질하는 자의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오직 하나님을 붙잡는 것, 이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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