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 없는 양같이 헤매며 기진한 인생들을 보며

마태복음 9장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37.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세 번째 문단의 시작입니다. 장 절로서는 9장 끝에 나오지만 새로운 문단의 시작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은 4장 말미에 동일한 표현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산상수훈인 5-7장의 도입부는 4장 마지막 부분입니다.

독자의 관심을 절정으로 이끌고자 하는 마태의 문학적 기교가 엿보입니다.

이야기를 밋밋하게 전개해나다가다 맹물처럼 끝을 맺는다면 좋은 독서감이 될 수가 없지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글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글로 옷입고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러기에 글에 대한 이해, 즉 문맥을 통한 본문의 의미를 구하는 일은 독자가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 문자를 소리나는대로 읽는다고 해서 문맹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문맹입니다.

어느 민족이든 국어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리고 글을 읽을(독해) 즈음에는 역사를 가르치지요. 역사란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의 결여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합니다. 하나님 나라(천국)에 대해서 바르게 알지 못하면 그 나라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볼 수가 없지만 영적으로는 보이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속한 자마다 내 나라가 어떤 나라인 지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국어책이자 역사서가 바로 성경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든'으로 시작합니다.
'모든 도시와 마을'이란 빠짐없이란 뜻입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자는 죄인이기에 구원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방이나 다름없는 갈릴리 지역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시작했지만 마지막 때는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모든 자들이 복음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4장 23절, 온(모든)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9장 35절,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24장 14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28장 19절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님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차분히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하셨습니다.

가르치고 선포하고 고치고...

예수님의 사역의 패턴이 그러했습니다.

천국이란 친구따라 강남가듯이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배워서 알아 지적으로 동의한 자들에게 그 나라(천국)를 선포하는 방식이지요.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시라 '안 나오면 쳐들어간다!'는 식으로 복음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당시 가르침의 텍스트(말씀)는 구약성경이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천국 복음의 선포, 그리고 고치심이 성경(구약)에 근거한 것임을 잘 압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바라는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을 이방의 빛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이유는 만민의 구원을 위해서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

그 나라는 그들이 그토록 기다리고 바랐던 예수님, 바로 그 분입니다. 달리 말해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아들)으로서 왕(the messianic king)이시란 말이지요.

가르침과 복음 선포와 고치심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다스리는 나라가 바로 천국(메시야 왕국-하나님 나라)이란 말입니다.

교회는 단순한 모임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유형적(가시적) 모임입니다. 그럼과 함께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하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나라의 백성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단순히 가르치는 선생이 아닌 것입니다. 그 이상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그리스도)로서 삼중직임(왕 제사장 선지자)을 담당하신 구원자로서 가르치신 것이시지요.

히브리어로는 마시아(흐), 예수님 당시의 아람으로서의 메시야(기름부음 받은 자)를 번역한 헬라어가 바로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자)입니다. 글자는 다르지만 뜻(의미)은 같습니다.

잘 못된 지도자 아래서 배운 자들은 목자 없는 양과도 같습니다. 길을 못 찾아 헤매는 기진한 양들 말입니다. 그런 양들이 예수님 당시에 많았습니다. 저들을 가르치고 인도할 선생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추수할 일꾼들이지요.

이 시대에도 바른 지도자를 보내주십사고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영적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만민의 구주이신 그 분은 자신의 종들을 부르셔서 이 사명을 감당케 하십니다.

목사만이 종이 아닙니다.

먼저 부름을 받은 자는 이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배워야겠지요.

양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바르게 세워서 주님의 명령을 잘 감당케 하는 직분을 받은 자가 먼저 믿은 저와 여러분입니다.

목사는 주님을 따라가는 양떼의 선도양입니다. 군대로 치자면 선임병이나 지휘관입니다. 그리스도 군사의 대장은 오직 우리 주 예수님뿐이십니다.

잘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며 약하고 병든 양들을 고치는 그런 제자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헤매며 기진한 인생들을 보면서...

글: 구자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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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가 며칠 전 데이비드 프리드먼을 이스라엘 대사로 내정했다. 프리드먼은 허커비보다도 훨씬 강경하고 시오니즘에 대한 목표의식이 뚜렷한 이스라엘 지지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 이스라엘 모사드 국장이 극비리에 트럼프를 방문했다는 사실이 보도됐다. 이런 일들에 이방카의 남편 유대인 제러드 쿠슈너의 막후 영향력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결국 향후 트럼프 정부의 외교 목표가 점점 명확히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길들이기와 이스라엘 지지다. 이 두 노선이 트럼프 외교의 두 축이 될 것이다.


하나는 경제적 이익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영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이유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엔 이보다 훨씬 심오한 것들이 내제되어 있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2차대전에 참전한 이유 중 하나도 홀로코스트로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미국은 이스라엘 독립을 돕고 끊임없는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해왔다.


물론 미국내 막강한 유대계 로비가 작용했겠지만 이런 것의 영향력은 사소한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미국인들의 영혼 안에 이스라엘을 도와야 한다는 본능이 널리 작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미국이 성경에 근본을 둔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 역사적으로 다수의 이스라엘 반대세력과 소수의 이스라엘 지지자들이 항상 존재해왔던 역사적 영적 원리와 상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도 그 영적 기류 속에서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은,

사랑과 공의와 희생정신에 대한 하나님 말씀이 가치관으로 자리잡았던 미국인들은 저 극동 변방의 코리아라는 작은 나라를 위해서도 수만명의 젊은이들이 죽음의 희생을 감내했던 것이다.


이런 영적인 현상을 한국의 정치인들은 이해해야 한다.

눈을 좀 더 높이 들어 세계의 거대한 기류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트럼프시대가 열린 오늘날 왜 한국도 이스라엘과 동맹을 맺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한다.


만약 한국이 주이스라엘 한국 대사관을 미국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옮긴다면 우리는 트럼프와 미국으로부터 결정적인 외교안보적 도움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역사가 거의 마지막에 도달하려는 오늘날 역사의 중심은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이것은 예언이며 따라서 운명이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볼 지혜가 없는 민족은 도퇴될 수 밖에 없다.


세계적 운명의 시간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오늘 날, 더 이상 동북아에 갖혀 친북세력에 휘둘리고 사대부적 친중사상에 국가 운명을 농락당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나는 개인적으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기를 간절히 바랬다. 왜냐하면 힐러리가 되면, 어차피 오바마의 연장선상이고, 절대 북폭은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절대...


그러기에 우리나라가 다음 대선에 어찌될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무조건 트럼프가 되야만 북폭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올라갈 거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트럼프가 되기를 간절히 바랬고, 다행히 그 바램대로 되었다.


트럼프는 과거 우리나라에서 사업을 한 적이 있었고, 그런 기억이 있는 나라가 적화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다. 물론 비지니스 마인드로 접근하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과거의 기억은 반드시 미래의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


어쩌면 우리나라 대선보다 미국 대선이 우리 민족의 운명을 정하는 선거였을 수도 있기에, 더욱 간절히 기도했고, 결국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다음 우리나라 대선이 절체절명의 위기이고,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게 되는 포인트가 될 것이다. 북한의 운명이 5년 내에는 결판나기 때문이다.


부디 아버지께서 이 민족을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출처: 함용식 & Cat Lee님 글

이 글은 "우찌무라 간조"의 아내를 잃고 겪은 고통을 통해 경험한 신앙 체험담입니다. 이 성도의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감화와 교훈을 줍니다. 요소요소에 우리 각 영혼에게 필요되는 성령의 음성이 분명히 들려집니다. 길더라도 끝까지 읽어서 각자에게 필요한 성령의 음성을 들어시고 유익을 얻기 바랍니다. 아내의 죽음 우리 모두는 죽음이 생명을 가진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며, 생물계가 존재하기 위하여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압니다. 가족중에 죽음을 당한 사람이 있는 유족들을 위로할 때,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받아야 할 위로를 받지 못하면 나는 그들에게 신앙이 없음을 탄식하고 죽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마음속으로 은근히 나무랐습니다. 옛날의 영웅들은 용감한 모습으로 또한 감사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그리스도인이라면 종교의 도움이 있고 부활의 소망이 있으므로 더욱 더 그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내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면 나는 그녀의 머리맡에 서서 대장부처럼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낭독함으로써, 그녀가 잠시 내 곁을 떠나가는 이별의 아쉬움을 위로하고 다시 만날 즐거움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전송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성경과 과학이 말하는 죽음의 이치를 이해합니다. 그러나 정작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비로소 나는 그 깊이, 아픔, 슬픔, 그리고 괴로움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을 잃는 것입니다. 나의 사랑이 나와 함께 하였을 때에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내게 의미가 있었지만 사랑이 내곁을 떠난 지금은 모든 것이 빛을 잃었고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내 고통의 이유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데서 오는 고통은 이 세상을 잃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떠나야 할 곳이므로 오늘 잃거나 30년 후에 잃거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피를 쏟아 부은 나의 정성이 하늘을 움직이지 못하고, 내가 가진 전부를 쏟아 부은 기도가 저혀 이루어지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데서 오는 회의는 나를 악마에게 사로잡히게 만들었습니다. 나는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나의 믿음은 기대고 의지할 토대를 잃어버렸습니다. 나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믿은 것을 후회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면 내게 이런 고통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께 대한 에정과 신뢰가 없었다면 이런 낙담은 없었을 것입니다. 피를 토해낸 내 기도를 외면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을까요? 의사는 내몸을 걱정하여 안정제와 수면제를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내 아픈 영혼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요? 냉정한 이성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생각을 돌리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목사의 위로도 친구의 권면도 이제는 식어버린 내 마음의 신앙에 불을 지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성난 곰처럼 " 내 사랑하는 자를 돌려다오! "라고 외치는 것 밖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물론 나는 믿습니다. 나의 구세주는 죽음에서 부활하였던 사실을 믿습니다. 나의 아내 또한 구세주께서 오실 때 다시 부활하여 재회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나의 슬픔은 그런 데에 있지 않습니다. 나의 문제는 " 왜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 주지 않았는가? " 입니다 하나님은 과학자와 의사들이 말하는 삶과 죽음의 법칙을 극복할 수 없단 말인가요? 우주의 창조주요 왕인 하나님께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인가요? 내 기도에 열심과 정성이 부족해서 인가요?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벌하시기 위하여 "아내의 죽음"이라는 불행을 내게 내리셨을까요? 바로 이것이 내가 알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만 안다면 나의 믿음은 곧 회복되어 생명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 첫번째 계단 내 양심속에서 한 조그만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의 뜻이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를 부르실 때에 사용하시는 한 가지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자를 살리실 뜻이 있었다면, 그분께서는 당신께서 세워 놓으신 자연의 법칙에 따라 아내를 살리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사실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불신자는 치료와 회복의 여부를 의약의 효과롤 돌리고 의사의 기술력으로 돌리지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모든 것을 의뢰합니다 두번째 계단 사탄은 나에게 이러한 생각을 주었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기도는 무엇 때문에 하는가" 이것은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것에 따라서 비를 내리시고 눈을 내리시는 것이 아닌데 왜 기도해야 할까요? 중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사자 굴과 핍박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건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참기 어려운 환난을 허락하셨고 생명을 취하셨습니다. 기도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차라리 처음부터 포기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가 아닙니까? 도대체 기도할 필요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내를 잃고 나서 나는 몇달 동안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없이는 수저를 들지 않았던 내가, 기도없이는 잠자리에 들지 않았던 내가, 아내를 잃은 후에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이 되어 원한으로 밥상을 대하고 눈물로 잠자리에 들어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고통 중에 내가 하나님께 드렸던 하소연이었습니다. "아! 하나님 나의 이런 말을 용서하십시오. 당신은 당신 자녀의 믿음을 꺾고 상하게 하셨습니다. 나는 영혼의 아픔때문에 당신에게 가까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내가 당신께 기도하지 않았다 해서 나를 버리시지는 않으시겠조? 아니 즐거운 마음으로 기도했을 때보다도 도무지 기도할 수 없는 지금 당신은 내게 더 큰 사랑과 위로를 주시겠지요? 내가 당신께 기도할 수 있는 때에는 당신의 특별한 은혜와 위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할 수 없는 때야말로 당신의 돌보심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때입니다. 아내를 잃고 우주의 표류자가 된 지금이야말로 제가 극도의 실망에 빠져서 하나님을 버리려고 하는 지금이야말로 당신은 제 뒤를 ?아와서 제가 당신을 떠나지 못하게 막으시겠죠?" 그러나 시간이 거듭되면서 마침내 나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나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십년을 하루같이 하나님께 기도해 왔기에 아내의 죽음 이후에 나는 뜻하지 않은 기쁨과 위로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이 세상의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육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영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혹시 육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 있어 기도할 때에는 항상 "만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시면"이라는 말을 하나 더 붙였습니다. 나는 내 자신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면 믿고 둘어주지 않으면 원망하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신앙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니 어찌 내가 기도를 그만 둘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저는 오늘 밤부터 전보다 더욱 열심히 당신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세번째 계단 이 때 악마가 다시 내게 속삭였습니다. "너는 뜨거운 기도로서 불치의 병자를 낫게 한 예를 모르느냐? 네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네 열성이 부족했기 때문이야!"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아내를 죽인 것은 내 열성의 부족 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아내를 죽게한 죄는 내게 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인 자입나다. 만일 열심이 병자를 낫게 할 수 있다면 그런 열심을 가지지 못한 자야 말로 가련한 존재입니다. 죽을 각오로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바꾸시어 죽은 자를 살리시고 또한 산자를 죽이신 단 말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인생들의 최선을 아십니다.그분의 선한 지혜에 따라서 일의 결국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는 내 믿음의 부족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내 열심을 다하여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내 아내는 결국 죽었습니다. 누군가 내 열심이 부족했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나의 모든 정성을 다했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내게 있는 열심을 다하여 기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데려가셨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는 믿습니다. 나는 압니다. 만일 당신께 대한 나의 신앙이 아내의 죽음으로 인하여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면 당신은 반드시 제 기도를 들어주셨을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아내의 죽음을 허락하신 것은 나를 믿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압니다. 그렇습니다. 당신께서는 내가 이 시련을 능히 견딜 수 있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아내의 죽음을 허용하셨던 것입니다". 나의 열심이 부족해서라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진 저의 열심과 믿음이 족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외칠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믿어 주신다는 사실이 저를 너무나 기쁘게 만듭니다." 네번째 계단 악마는 다시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네가 믿는 정녕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너에게 이런 고통과 슬픔을 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악마에게 응답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내게 주셨습니다. "악마여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기 위하여 고통을 주신다는 어떤 목사들의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 성경에는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형벌"이 없다. 형벌이라는 말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있어서 필요도 없고 의미도 없는 낱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형벌은 '어둡게 보이는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형벌도 하나님의 은혜이고 지옥불도 악인과 의인 모두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선과 의를 싫어하는 악인을 영원히 살게 한들 그것이 그들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살인과 강간과 도박과 미움과 증오속에서 악인들끼리 영원히 살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겠는가? 지옥불로 악인의 생명을 거두심으로써 우주에서 악이 근절됨으로써 온 우죽 안전하게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지혜이다. 나는 지옥불에조차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다 . 하나님은 정녕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다섯번째 계단 악마는 마지막으로 한가지 의혹을 내 마음에 심고자 하였습니다. "네 아내는 왜 그렇게도 단명해야만 하니? 그녀가 순결한 마음을 가졌으며, 자기를 잊어버리고 너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쳤으며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가난과 싸우며 성경진리를 지키기 위하여 심한 고통을 당했다. 왜 그녀는 단 한번의 안락한 삶을 살지 못한 채 그렇게 빨리 갈 수 있단 말인가? 네가 믿는 하나님은 정말 가한 분인가?" 참으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의혹입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사실 속에 도대체 무슨 깊은 뜻이 있는지 궁금하였습니다. 성경은 땅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위하여 지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15:19)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던 아내가 이 세상을 즐기지 못한채 갈 수 있단 말입니까? 아마존의 숲 속에 숨겨져 있는 금광은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아프리카의 산속에 파 묻혀 있는 다이아몬드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진리를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방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과 팔에는 금과 다이아몬드가 걸려 있는데 일평생 충성과 희생의 삶을 산 내 아내의 몸에는 다 떨어진 천이 걸쳐져 있을 뿐입니다. 이 땅은 악마의 뒤를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지어졌단 말입니까?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도움을 청하는 환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시중을 들었던 아내는 단 한 번의 낙도 누리지 못한 채 일찍 가버렸는데 악마의 자식들은 여전히 살아남아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지구의 환경을 즐기고 있습니다. 정녕 이 지구는 악마와 그 자식들에게 주어졌단 말입니까? 이 심원한 의문에는 두가지 대답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지금 현재의 지구보다 나은 세계가 의인들을 위하여 마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대답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다면 진리도 없을 것이고 진리가 없다면 우주를 지탱케 하는 법칙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법칙이 없다면 우리 자신도 우주도 존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존재하는 한 하늘과 땅이 내 눈 앞에 존재하는 한 나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두번째 대답 속에 나를 만족시키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다음 천년이후에는 이 지구(땅)위에 의인들만을 위한 새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지구는 의인들의 손에 주어집니다. 그 날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영원한 주인이 될 의인들에게 넘겨질 것입니다. 의인들은 고통과 슬픔을 참으면서 그 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하나는 금과 다이아몬드로 치장된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정직과 진실로 이루어진 아름다움입니다. 악인들은 페르시아의 진주를 구하고 오를로의 보석을 구하지만 의인들은 온유와 겸손으로 짜인 의의 옷을 구합니다.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니라" (베드로전서 3:3~4) 지구의 이곳저곳에 묻혀있는 금과 은은 얻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버리기 위하여 지어진 것입니다. 그것을 얻고자 하는 자는 지옥 불을 맞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버리는 자는 결국 그것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예루살렘의 진주 문으로 들어가기 원하는 자는, 하늘 도성의 금으로 된 거리를 걷기 원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진주와 금을 버리는 경험을 해야만 합니다. 아름다운 진주와 금을 버리는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시련의 장소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 속 깊은 동기까지 금과 은에 의하여 시험받아야 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시련의 장소입니다. 마음의 밑바닥에서부터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버린 사람만이 이 세상을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으며 그 결과로서 세상의 모든 것을 얻울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설적 진리입니다. 내 사랑하는 아내가 겪은 고통과 시련 역시 이 진리의 공식에 의하여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를 회복시키는 하나님 아내를 생각할 때마다 늘 창자가 끊어질 듯한 아픔과 후회가 있습니다. 그녀가 살아있을 때 그녀의 미소에 불쾌한 얼굴로 대답하였고 그녀의 희생에 충분한 감사의 표시를 하지 못했던 사실이 아직도 나를 괴롭힙니다. 심지어는 그녀가 병자들을 간호하다가 몹시 지쳐서 내게 위로를 청했을 때에도 나는 그녀의 연약함을 나무라면서 거친 말로 대꾸하였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유순하고 충성스러웠지만 나는 이따금 냉정하고 성실치 못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나는 땅에 부끄럽고 하늘에 부끄럽습니다. 보답을 받아야 할 그녀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용서를 빌어도 받을 사람이 없으며 가슴을 치며 뉘우쳐도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요즘도 이러한 회한이 밀려오는 밤마다 나를 지옥 불속에서 매질합니다. 어느날, 나는 그녀의 무덤에 찾아가서 한 송이 꽃을 꽂는데 어디선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왜 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때문에 우느냐? 너는 지금도 아내에게 보답할 기회와 시간을 가지고 있다. 그녀가 너를 위하여 충성하였던 것은 어떤 보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너에게 바치는 자신의 희생과 충성을 통하여 네가 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이 진보되기를 원해서였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진정으로 아내의 희생과 사랑에 보답하고 나의 일을 하기 원한다면 , 네 이웃과 국민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봉사하라. 집이 없어 거리를 헤매는 노파는 네 아내고 또한 나다. 가난에 쫓겨 몸을 치욕과 돈에 파는 소년은 네 아내이고 또한 나다. 네가 그들을 위로한다면 바로 네 아내와 나를 위로하는 것이다. 비탄과 후회에 잠겨있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빨리 네 집으로 돌아가 네 아내와 내가 기뻐하는 일을 하라!" 나는 아내의 무덤을 제비꽃이나 장미꽃으로 장식함으로써 내 자신이 위로받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내의 무덤에 선하고 진실되며 진리로 거룩하게 된 나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내의 죽음때문에 나는 이전보다 더욱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아내의 죽음으로 인하여 믿음도 잃었고 하나님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전보다 더욱 강하게 회복시키셨습니다. 아내의 죽음이후에 진리의 조화를 좀 더 깊이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눈물의 세상을 떠나 아내와 다시 만나는 그 날이 될 때까지 나는 아내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서 하늘 집을 향한 나의 발걸음을 재촉하렵니다! 글: 우찌무라 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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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내리는 아침 최송연 하얀 입김 서린 창문 저 너머 흰 눈이 은가루 되어 소리 없이 내리는 아침이면 내 작은 가슴에도 당신 사랑이 은총의 가루 되어 소리 없이 내려옵니다 저 흰 눈이 먼지로 더럽혀진 모든 산하(山河) 깨끗게 하듯 주여, 멈출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당신 한 분만을 사랑하며 달려가고 싶은 生의 여정 행여, 꿈속에서라도 잘못 디뎌진 발자국이 있다면 흰 눈 같은 당신 은총으로 덮어 깨끗게 하여주소서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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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세기 40장) 시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부르시면서 동시에 보내셨습니다. 복을 주시고 함께 하시며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한 사람만 부르시고 보내시며 아브라함 한 사람만 복 주시려 하셨겠습니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만 하신 약속이 아닐 것입니다. 아브라함 속에, 허리에 있는 아들들, 여기에 있는 우리 믿음의 후손들까지도 다 포함될 것입니다. 아브라함만 부르시고 가라 하신 게 아니기 때문에 그 부르시고 보내시는 방법도 여러 가지 아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가나안으로 가라 하셨는데 요셉은 참으로 기막힌 방법으로 부르시고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부르심을 입고 또 이곳 미국땅에까지 보내심을 받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 주시고 지키신 것처럼, 야곱을 보내시고 지키시고 복 주신 것처럼, 또 요셉을 보내시고 지키시고 복 주신 것처럼 우리 또한 부르시고 보내시고 복 주시고 지키시지 않겠습니까?

        복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을 잃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을 하나님의 것이 아닌 자기의 것으로 챙겨 가지고 하나님 눈앞에서 피하는 것입니다.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챙기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숨었습니다. 모든 복이 하나님의 것임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가질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복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찬송케 하려고 우리를 지으셨습니다(사 43:21).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시 23:3).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복은 저주로 바뀐다는 사실, 복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복이 인간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사단은 인간이 복을 받는 것을 시기하며 참소합니다. 또한 사단은 인간이 받는 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고 끊으려고 우리에게 시험이 옵니다. 성도들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시험이 없다면 그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단 마귀가 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욥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단이 하나님께 참소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복을 왜 받을 자격이 없는 욥에게 부어 주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시험을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욥의 속에 있는 믿음, 순전한 사랑을 나타내어 욥에게는 복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어 보이시고 욥이 결코 하나님을 떠나거나 놓지 않을 것을 자랑하려 하신 것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자 하는 자는 합당한 믿음을 가지고 그것을 나타내는 자,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신8:1~2)

        요셉에게는 무서운 시험이 닥쳐옵니다. 그것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을 믿는 요셉, 결코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그에게 그 유혹을 물리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그러나 그 뒤에 닥친 억울한 누명과 부당한 투옥은 정말 어려운 시험이었을 것입니다. 언제 풀려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이대로 평생을 감옥에서 썩다가 죽어야 할지도 모르는 투옥이 하나님을 섬기고 믿는 자에게 닥쳐야 하는 형벌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시험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는 것, 어떤 상황,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붙잡는 것은 피 흘리는 싸움입니다. 사단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변명하지도 피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만 붙잡고 견디면 반드시 이길 것을,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곳으로부터 끌어내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주님의 모습, 하나님께서 그를 죽음으로부터 일으키실 것을 나타내 보여주신 것이라 할 것입니다.

      27.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앞으로 이어질 복음의 길은
      하나님의 사랑, 부르심
      그리고 놀라운 계획 ‘공동체’
      이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으로 시간의 개념과 공동체
      하늘에서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인의 삶
      의 글이 될 것이며 우리가 알았고 알고 있다 우기는 복음의 실체,
      그래서 만들어진 믿음의 공동체의 잘못된 전통과 성경의 해석으로
      어그러진 복음의 길에서 성경의 복음의 길을 제시하고
      아직도 복음의 길에서 자신이 깨어지는 아픔을 넘어 갈등과 괴로움이 있고
      그 길을 보여주시는 성령님의 인도에 불평하면서 고통스러웠던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감사했고 기쁨이 넘쳤고 소망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자에게 고난이 없다면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지 종교인이며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이 아니라
      믿음은 자기도취의 신념이거나 소신(所信)임을 단정하기에
      이를 성경을 통하여 고백하고 주장하려 한다.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들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Then said one unto him,
      Lord, are there few that be saved? And he said unto them,
      Strive to enter in at the strait gate: for many, I say unto you,
      will seek to enter in, and shall not be able.  누가복음 13:23-24]

      교회가 무엇인가
      성경은 교회를 무엇이라 하는가?
      성경은 교회의 정의에 대하여 수많은 글들이 있고
      수많은 선생들이 교회에 대하여 정의를 내렸지만
      여기에서는 습관적이고 통상적이 아닌 시각으로 성경을 바라보면
      성경에는 놀랍게도 많이 그리고 중복되게 복음의 길에서 현재의 삶이 신앙 인
      성도의 길을 제시하였고 그때마다 공동체를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성령님께서 ‘강림’ 하시어 신약의 믿음의 공동체
      교회가 시작되었고 그 이후 교회사에서 ‘교회가 무엇인가’ 라는 교회의 정체성을 정확히
      알고 이를 이 땅에서 진정한 교회를 이루려는 노력과 시도는 많았으나 이를 알고 실천하려는
      성령님의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극소수의 사람들이었음은,
      교회사가 이를 증거하고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 세상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사조를 쫓아가는 나약하고 힘없어 복음의 동력을 잃고
      종교화된 현실이 이를 증명한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유명하고 학식이 많은 선생들의 설교와 책등을 듣고
      읽어도 ‘교회의 정의’에 대하여  성경으로 확신하고 확정하는 자들은 많지 않아
      성경을 인용하여 ‘주님의 피 값으로 산 교회’ ‘주의 몸 된 교회’ 라든지
      수많은 교회의 모임과 형태를 묘사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정체성이라기보다
      교회가 만들어진 원인과 이유의 물음의 답이 될지언정 정체성을 설명으로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그 무엇이 부족할까?
      고민하고 더하여 몸부림치듯이 자신을 흔들고 간절히 알기를 원하면
      눈에 콩깍지가 씌었듯이, 성경보다 시류에 편승하고 영합한 의(義)와 멀어진
      의(意)에 얽매인 종교에 세뇌된 콩깍지를 벗게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면
      나의 욕심의 죄와 의무에 매달리고 감성에 충실하였던 편협한 신앙의 사고방식이 변하여
      성경에 눈을 뜨게 하시면 그리스도 주께서 남기신 발자취가 보이고
      발자취에 나의 발을 맞추려는 신앙의 삶이
      복음의 길임을 알게 된다.
      전에 수 없이 의문을 갖고 있었기에 고민하여 진정 알기를 원하였던 적이 수없이 많았고
      그 답을 수없이 찾았고 그 중의 하나의 예가
      성령의 강림(Holy Ghost descended)에서 찾게 되었고
      인도하심을 감사했던 기억을 떠오르며 글을 쓴다.

      신약의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기도하실 때
      성령님께서 강림하시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Now when all the people were baptized, it came to pass,
      that Jesus also being baptized, and praying, the heaven was opened
      And the Holy Ghost descended in a bodily shape like a dove upon him,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which said, Thou art my beloved Son;
      in thee I am well pleased. 누가복음 3:21-22]
      성령님께서 강림하시었다.
      the Holy Ghost descended.
      예수님의 머리 위로.
      그리고 하늘로 소리가 있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셨다.
      누가, 하나님께서.
      어떠한 사건이 있었는가.
      육신이 되시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성령님
      그리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놀라운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이 성경에 더 있었는가?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났을까?
      이 사건이 이 글 주장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의 길로 가고자 몸부림치는 신앙인들에게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나의 간증이라 내가 바라보고 내가 겪고 내가 체험한 간증이라
      나의 주장에 앞서, 내가 믿음 안에 있는가?
      자신을 확증하고 내 마음의 중심에 그리스도의 사랑 ‘charity’
      고귀하고 위대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안에 계신지 확증하니
      나의 은혜라
      ‘나를 사랑하신다’ 는 확신을 믿음으로,
      확증을, 구약과 신약을 대조하여 성경 안에서 확증하였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감사하였고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소망을 나누고 싶기 때문에
      이 글을 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강림(the LORD descended)
      [시내 산에 연기가 자욱하니 여호와께서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심이라
      그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 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크게 진동하며
      나팔 소리가 점점 커질 때에 모세가 말한즉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And mount Sinai was altogether on a smoke, because the LORD descended upon it
      in fire: and the smoke thereof ascended as the smoke of a furnace, and the whole
      mount quaked greatly.
      And when the voice of the trumpet sounded long, and waxed louder and louder,
      Moses spake, and God answered him by a voice.
      출애굽기 19:18-19]
      하나님께서 왜 강림하셨을까.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And ye shall be unto me a kingdom of priests,
      and an holy nation. These are the words which thou shalt speak unto
      the children of Israel.  19:6]
      거룩한 백성이 되게, a kingdom of priests
      거룩한 나라가 되게, an holy nation
      거룩한 하나의 나라가 되게,
      그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시게 하셨다.
      speak unto the children of Israel.
      이스라엘 자손을, children of Israel,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자녀 삼으시고 천국의 자녀가 되길 원하셔서, a kingdom of priests,
      그래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an holy nation, 되길 원하셔서
      강림하셔서 말씀하셨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강림은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듯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그 아들인 예수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채찍을 맞으시고
      우리의 죄를 위하여 돌아가시기 까지 한 사랑 ‘charity’
      그 사랑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래서 우리를 ‘내 사랑하는 아들’ 이 되기 위하여
      성령님을 보내 주셨고 이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힘을 주시는
      능력(the power of the Holy Spirit), 그 능력으로 받는
      권능(power of charity)으로 예수님의 사랑 ‘charity’ 을 간직한 복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신앙인 이며 신앙인의 모임이 교회라면,
      소망은
      이미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시작되어 이루어지고
      이제 온전한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성령님과 함께한 모임이 되고
      이 모임은 세상에서 바라보는 ‘사건’ 이 되고
      오늘날 우리에게 그때, 그 시간이, 오늘로 연결된 시간의 개념의 사건이 되어
      오늘 이 자리, 이 순간이 영원이 된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에 속한 자녀가 된 것이다.

      뒤돌아가
      모세에게 강림하신 하나님,
      그때는 이스라엘 자손은 애굽 땅을 떠나,
      시내 광야에서 장막을 시내 산 앞에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성령님께서 강림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때는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백성들이 세례를 받았다.

      구약과 신약의 공통된 점이 무엇인가.
      이스라엘 자손과 백성이라는 개인이 아닌 신앙의 공동체 이었다.
      이 말은 개인이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구원을 이루지만
      개인을 이끄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개인의 구원에 머물지 않고 신앙의 공동체를 구성하여
      각 지체로서의 역할의 신앙이 성숙한 신앙이듯이
      이미 하나님께서는 한 개인을 넘어 공동체를 형성하게 하셨기에 이 땅의 공동체인 교회는
      불완전하지만 완벽한 공동체를 향한 하늘나라의 시작이라 하늘나라의 모형이며
      그 구성원은 포로 된 애굽을 떠난 자이며
      세례를 받은 자라 이미 죄를 자복한 자이며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마태복음 3:6]
      그런 자들의 믿음으로 만들어진 공동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계획하시고 안식을 누릴 공동체의 시작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물었을 때
      예수님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바리새인들은 때를 물었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이루어지고 있다 하신 말씀은 ‘때’ 와 ‘사건’ 의 시간 개념, 때와 사건이 이루어지는,
      그리고 이루어져가는 시간의 한 선상(線上)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완전하게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그 나라의 ‘때’ 와 ‘사건’ 과 ‘시간’ 과 동일한 선상(線上)에서 말씀하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잠을 잔다’ 는 표현으로 말씀하셨고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로 이어져 가는 사건일 뿐이며
      그 ‘때’ 그 ‘사건’ 이 오늘이며 미래인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그 사건을 알고 있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 후서 2:16-17]
      영원한 하늘나라의 소망이 현실이 되어 데살로니가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외쳤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Repent ye: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中國 福建省 土樓

      世界文化遺産 2008年 指定

      복건 서부와 남부의 숭산준령에 분포되어 있는 福建土樓

      독특한 건축풍격과 유구한 역사문화로 유명하다.

      건축 모양은 원형, 정방형, 타원형등 여러가지로 되어 있다.

      복건토루는 宋,元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서 세계적으로 유일한

      산간지대의 대형 토루건축이다.

      토루(土樓 / TuLou) 는 중국 객가인(客家人)들의 주거양식이다.

      객가인은 외지에서 온 사람들, 타향에 사는 사람들이란 말로

      삼묘족의 후예라고 한다.

      중국의 유태인이라 불리우며, 전 세계에 수천만명(5~8천만)이

      흩어져 살고 있으며 대만인구의 15%가량,

      동남아시아 화교의 상당수가 객가인이라 한다.

      이들은 머리가 좋고 부지런해서 유태인들과 세계 상권을 쥐고

      다툴만큼 경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중국 사회(중원) 속에서 끊임없이 박해를 받아온 소수민족 객가인들은

      해외로, 산골로 숨어들었고, 타민족으로부터 집단 방어하기 위해

      토성과 각진형태의 집단 주거형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토루인 것이다.



      "목회자만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한국교회 현실에 실망한 성도들께

      “제발 그 자리에 그대로 계세요.” “절대 변하시면 안 됩니다.”

      교인들이 요즘 목사님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한다고 합니다. 유기성 선한목자교회 목사는 14일 페이스북(사진)에 “이메일에서 ‘목사님, 그 자리에 늘 그대로 계셔 주세요’란 구절을 자주 읽습니다.…저도 넘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불쾌하기도 하고, ‘앞으로 더 나아져야지, 왜 그 자리에 있으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이찬수 분당우리교회 목사는 지난달 말 낸 책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에서 “‘목사님마저 변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간곡하게 부탁하기도 하고 어떤 분은 ‘목사님마저 변하시면 우리는 벼랑 끝에서 떨어져 죽습니다’라는 절박한 말씀을 하신다. 아니 내가 변하는데 그분이 왜 떨어져 죽는가”라고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왜 교인들이 이런 말을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몇 해 전부터 일부 목회자의 비윤리적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올해 여름 한 청소년사역단체 대표의 성폭력 사건이 교계를 충격에 빠뜨렸고, 이 사건이 잊히기도 전에 다문화사역을 해온 중견 목회자의 성추문이 전해졌습니다. 최근엔 한 아프리카 선교사의 성폭행 의혹도 제기됐습니다.

      성도들이 ‘그대로 있어 달라’고 하는 건, 아끼는 목회자가 행여나 죄의 유혹에 떨어질까 두렵고 걱정스럽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현실에서 비롯된 간절한 바람인 것입니다. 목사님들도 이를 모르지 않습니다. 이찬수 목사는 이렇게 당부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그 목사’를 소중히 여길 것이 아니라, 목사가 전하는 ‘그 말씀’을 소중히 하는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맞습니다. 성도들이 목회자도 넘어질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말씀 중심으로 산다면 목회자의 타락이 우리의 믿음을 흔들진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목회자를 신뢰하고 따르자고 말할 수 없는 현실이 참 서글프게 느껴집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참된 제자는 ‘나를 따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김병삼 만나교회 목사는 최근 낸 저서 ‘치열한 복음’에서 “하나님은 성적으로 타락하는 것을 그냥 넘기지 않고 반드시 징계했다. 성 문제를 일으키고도 교회를 개척한 목사는 무엇이고 그 교회에 가는 교인은 무엇이며 내버려두는 교단은 무엇인가”라며 “성 문제에 대해 교인, 교회, 교단이 단호하게 대처할 때 죄에 대한 민감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죄에 둔감한 우리 모두 뼈아픈 반성을 해야겠습니다

      ~국민일보 [미션 톡!] 에서 옮겨온 글입니다~

       

      “박 대통령 내려오라”고 하면 공연할 수 있게 해주겠다?



      가수 윤복희씨가 어제(16일) 새벽, 자신의 트위터에 충격적인 내용의 글을 올렸습니다.


      윤복희씨는 예정되어 있던 콘서트를 취소하기로 했다면서 거기에 대한 배상을 극장 측에 해주게 되어서 어이없게 관객들은 표 값을 다 물려주었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자신을 괴롭히던 어떤 정치가가 공연을 못하게 해서 거기에 대한 배상을 극장 측에 해주게 되어서 어이없게 관객들은 표 값을 다 물려줬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그리고 나선 정치하는 사람들이 절 보고 박 대통령 내려오라고 말하면 공연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고 하면서 전 어이가 없어서 난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했다.”고 밝혔습니다.


       

       

      아래는 윤복희씨의 글 전문입니다.

       

      전 깊은 잠을 자다가

      일어났어요.

      내일 공연인데 더 자야하는데.

       

      갑자기, 제가 81년에 국립극장에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공연할 때

      검은 정장을 한 남자들이

      제 분장실에 들어와서 절 보고

      가자는 거예요.

       

      어딜요?”

      우리 장군님이 모시고 오라고 했대요.

      해서 전 못갑니다. 지금 공연해야 해요.”

      들어올 관객들까지 못 들어오게 하면서 가자는 거예요.

      제 목에 칼을 꼽아도 전 못갑니다. 전 공연해야 해요.”

       

      그러는 저를 한 이틀간 괴롭히다가

      그들은 돌아가고 우린 계속 공연을 했던 기억.

       

      그리고 제 아버지 되시는

      윤부길 선생님께서 제가 아주 어릴 때

      정부에 협조해서 위문 공연을 하라니까

      아버지가 전 그런 건 못 합니다

      단호히 거절.

       

      그들은 아버지에게

      당신이 설 무대는 우리가 못 서게 한다며

      아버지가 공연할 무대를 다 공연 못하게 해서

      아버지는 충격으로 돌아가셨어요.

      그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어요.

       

      제가 이달 24일 공연할 곳을, 최근 저를 괴롭히던 정치가가

      공연을 못하게 해서 거기에 대한 배상을 극장 측에 해주게 되어서

      어이없게 관객들은 표 값을 다 물려주고.

       

      단순히 정치하는 사람들이 절 보고

      박 대통령 내려오라고 말하면

      공연할 수 있게 한다면서.

       

      전 어이가 없어서 난 그렇게는 할 수 없다고 했어요.

       

      전 정치를 모르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서요.

       

      66년간 무대에서 공연한 사람을

      자기들의 야망에 우리를 이용하려는 걸 보고

      제 양심으로는, 전 무대에 서는 배우이지

      정치적으로 가지고 노는 장난감이 아니다 하고

      공연을 안 하기로 했어요.

       

      전 국민을 위로하며, 웃겨주는 광대이지

      정치적 노리게는 아니라고.

       

      우리 아버지는 쇼크로 돌아가셨어요.

      허나 전 우리 주님이 계셔요.

       

      전 주님께서 들어 쓰시는 도구이지

      그들이 아무리 언론에서까지 거짓으로 저를 매도해도

      제 진실은 주님이 아셔요.

       

      전 이들을 보고 빨갱이라 사탄이라 했어요.

      후회 없어요.

       

      저의 이런 판단이 그동안 저를 보아온 분들이

      그들의 편에 서셔서 저에게 욕을 하신다면

      너무나 슬프지만

       

      언젠가 제 진실을 아실 거라 전 믿어요.

       

      모처럼 할 콘서트를 그들이 못하게 했지만

      전 계속 쉬지 않고 무대에서 여러분을 사랑하고 위로하고

      나라를 위해 기도할 거예요. 사랑해요 여러분.



      글 출처: 윤복희님 트위터






      "박 대통령 내려오라" 하면 공연을 다시 하게 해주겠다?

      그 정치인이 누군지를 모르겠지만,

      아마도 야당 정치인으로 보여집니다.


      입만 열면, 서민 팔고, 인권 팔아먹지만,

      뒤로는 온갖 갑질을 일삼는

      진보(?) 정치인의 추악한 민낯입니다.


      권력의 자리에 앉게 되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권력맛에 취해서

      지켜야 할 선을 넘어버리게 됩니다.


      이건 어느 정치인이고 정당이고를 떠나서,

      지금껏 있어왔던 일입니다.


      문제는 국민을 속이고

      대중을 기만하는데 있습니다.


      사실 이번 윤복희씨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진보좌파 쪽 정치인들 가운데,

      서민을 위하고 인권을 위하는

      그런 특권 없는 소박한 이미지와는 반대로

      과한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되려 서민들을 울리는

      갑질을 일삼았던 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진보좌파 쪽 정당이나 정치인들의 경우,

      자신들의 이미지를 선한 쪽으로 주입시키고 고착화시켜서

      자신들은 마치 서민의 편, 대중의 편에 서 있고,

      일반서민들과 같은 눈높이를 맞추고,

      함께 소통하며, 낮은 자세로 정치를 하는 것처럼

      대중을 선동해 왔지만...


      실상을 보면...

      독재나 기득권 이미지에 낙인찍힌

      보수여당 못지않게, 아니 더 심할 정도로,

      온갖 갑질을 일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래는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온갖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보이고,

      권력의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새누리당도,

      최소한 앞에서는 깨끗한 척, 서민적인하며

      위선을 떨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야당같은 경우는,

      앞에선, 인권을 부르짖고,

      정의사회, 공정사회,
      화합과 소통을 부르짖으며,
      자기들은 정의로운 척,
      깨끗한 척, 서민적인 척,

      온갖 '선한' 이미지 메이킹은 다 하면서

      정작 뒤에누구 못지않게,

      특권 누리면서 갑질 행태를 보입니다!
       
      결국 눈에 보여지는 것만 쫓고,
      선해보이고 소탈해보이고, 정의로워 보이는
      꾸며진 이미지에 취해
      그 안에 숨겨진 실체를 보지 못한다면,
      어떤식으로 부메랑이 되어
      결국 그 피해는 나에게로 되돌아 것입니다!



      아래 글을 보면 황당함을 넘어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게 바로,

      입만 열면 인권을 말하고, 국민을 말하고

      서민을 말하고, 정의를 부르짖던 자들의

      특권의식 없는 낮은 자세의 서민적인 행태일까요?



      왜 이 '국정농단'에는 침묵하나요?


      "군수가 노래를 하면 부안에 예산 100억 원을 내려주겠다."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과 관련해 청문회 등에서 온갖 막말과 갑질로 화제가 되고 있는 안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과거 발언이다.




      작년 8월 22일 안 의원은 전북 부안으로 야유회를 갔는데, 술자리에서 김종규 부안 군수에게 노래 한 곡 불러보라며 저런 발언을 했다.


      김종규 군수는 결국 마이크를 잡고 '안동역에서'를 열창했다고 한다.


      직장 상사가 자기 돈으로 용돈을 주겠다며 부하 직원에게 저런 식으로 노래를 시켜도 갑질이니 뭐니 하며 난리가 날텐데, 자기 돈도 아닌 국민 혈세로 만든 예산을 가지고 군수가 노래를 부르면 100억을 주겠다는 망언을 한 거다.


      어디 그 뿐만인가.

      같은 술자리에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며, "야당 예결위 간사가 되고나니 현직 장관도 굽신거리고 국회의원도 눈을 맞추려 한다", "권력이 무엇인지 알겠다" 등의 발언도 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동네 삼류 양아치가 옹졸한 권력을 과시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갑질을 해대는 꼬라지와 영락없지 않나. 통신사에 의해 정확히 확인된 워딩이 이 정도 수준이니 그가 사석에서 어떤 언행을 하고 다닐지는 뻔하다.


      참 고약한 게 뭐냐면, 이런 인간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비판 여론의 선봉장이 되어 온갖 막말을 해대며 영웅인 양 설쳐대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 추악한 게 뭐냐면, 좌우 정치 문제가 아니라 국정농단이라는 범죄의 문제라며 그렇게 열을 올리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국정농단에는 입을 다물거나,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참 슬픈 게 뭐냐면, 이런 말을 하면 또 자기들의 진영논리에 갇혀 정부의 부역자냐며 시비를 거는 인간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 국정농단이라는 사태의 본질에 문제의식을 느껴서 이를 비판하고, 정확한 수사와 문제규명을 위해 대통령의 책임있는 협조를 요구하는 나같은 사람도 광장의 급진적인 논리를 비판하는 순간 박근혜 팬클럽으로 레이블링 되어버린다.


      별개의 문제인 야당 의원의 국정농단을 지적하면 정부 편들기로 받아들인다. 이러니 그저 정부 까거나 여당 공격할 건수만 찾던 지극히 정치적인 사람들이 국정농단에는 쥐뿔도 관심없으면서 정의의 사도인 양 설치고 있다.




      글쓴이: 우원재 / 리버티타임즈 대표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① 김성로 목사 조사보고서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총회(총회장 반기열 목사)는 총회장 직속 긴급대책위를 두어 1년여 논란이 된 김성로 목사와 정이철 목사의 주장을 조사 검증했다. 다음은 대책위가 발표한 내용이다.



      미주 남침례회, 춘천 김성로 목사 & 앤아버 정이철 목사에 대한 신학 검증 보고서
      - 정이철 목사 신학검증에는 바른믿음측 림헌원 목사 이창모 목사 검증을 포함 -


      Ⅰ. 검증의 동기와 이유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디트로이트 앤아버반석장로교회)는 약 일(1) 년간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를 가리켜 1) 십자가를 폄훼하고 2) 하늘성소에서 두번 제사(이중제사)를 주장한다는 명목으로 '사악한 이단. '부활교 이단' 이라는 주장을 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남침례교단 목회자들과 성도들 가운데에도 김성로 목사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미주 남침례교 총회장 반기열 목사는 교단 차원에서 이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을 정리할 필요성을 인지하여 총회장 직속 긴급대책위를 두어 김성로 목사와 정이철 목사의 주장에 대해 각각 공히 살펴보며 검증토록 하였습니다.

      본 대책위는 정이철 목사의 주장과 김성로 목사의 양쪽 주장을 공히 살폈습니다. 김성로 목사에 대해서는 정이철 목사 측에서 주장한 약 70편의 글과 동영상들을 살폈고, 춘천한마음교회에서 발간한 모든 양육교재와 김성로 목사의 책, 설교, 동영상, 기독교방송 C-채널 한마음교회 성도들의 간증, 김성로 목사의 입장 발표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처럼 양쪽 자료를 근거로 하여 면밀한 객관적 조사를 하였기에,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는 이에 대한 검증 연구 결과를 밝힙니다.

      II. 김성로 목사 검증의 세부사항

      십자가 폄훼와 무시 문제:

      김성로 목사가 십자가를 폄훼하고 무시한다고 하는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의 주장에 대해서는 김성로 목사의 예전 부흥회설교와 최근 설교 (대전 늘사랑교회, 자운교회, 송촌장로교회 등등)들을 분석했습니다.

      김성로 목사의 핵심주장은 십자가의 속죄의 원리보다 먼저 수반되어야 할 것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누구인가?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즉 역사적 부활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성자 하나님)이심을  확증하고, 부활로 확증된 믿음을 통해 십자가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조명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쓸데없는 십자가', "우상처럼 십자가를 붙잡지 말라"는 표현을 바른믿음측 정이철 목사는 이를 오해하여 십자가를 폄훼하고 무시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부분은 설교자의 전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왜곡 편집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김성로 목사가 실제로 십자가를 폄훼하고 무시했다면 부활복음 목회자 세미나에 참석한 600명의 목회자들이 김성로 목사의 주장을 수용할 수 있었을지에 대한 상식적인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김성로 목사는 부활을 강조할 때 설교의 서두 부분에 자신이 절대 십자가를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음도 확인했습니다. 김성로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은 '누가 죽은 십자가인가?'를 먼저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십자가의 예수님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김성로 목사가 부활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부활을 통해 기독론관점으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으로 판단됩니다.

      '피' 그리고 '십자가' 문제

      김성로 목사는 자신의 사도행전 칼럼을 통해 십자가의 피와 부활의 관계를 통해, 왜 부활을 먼저 증거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김성로 목사의 견해:  '피'그리고 '십자가' 사건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누구의 피인가?' 와 '십자가에서 누가 죽었는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이 누구인지 모르면 십자가 사건은 그냥 한 사람의 죽음일 뿐이며, 그 피 또한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 것을 확증하였을 때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죽으신 것이며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의 피는 '하나님의 피'(성자 하나님의 피) (행 20:28)인 것이다. 이렇게 부활을 통하여 십자가의 참된 의미와 예수의 보혈이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부활을 통해서 십자가와 보혈이 어떤 것인지가 재 조명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한 이유인 것이다."(김성로 목사 사도행전 칼럼에서 발췌)

      김성로 목사의 설교 중에 십자가에 초점이 아닌 부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주장에 십자가와 부활을 이원화 시키고 십자가의 의미를 약화시킨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본 대책위는 김성로 목사의 설교의 의도를 확인해 본 결과 십자가와 부활은 동전 양면 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복음의 핵심이지만, 기능론적 관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예수의 인성과 속죄를 통한 공의와 사랑을 증거하는 반면,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모든 약속의 확증, 또 신자의 종말론적 부활의 소망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와 부활의 이원화가 아닌 기능론적 관점에서 부활을 설명하고 강조한 것으로 보아야 하며,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가치순위가 아닌 변증학적 관점에서 전달의 순서를 강조하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김성로 목사의 설교에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들었을때는 충분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되기에 앞으로 김성로 목사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에 대해서는 신중히 말씀할 것을 조언하였고 김성로 목사는 겸허히 본 대책위의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신학의 특성상 한 부분을 강조하다 보면, 오해의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판단되며, 김성로 목사께 드리는 권면은 먼저 청중들에게 설교자가 전달하려는 관점과 개념을 충분히 설명한 후에 본론을 제시한다면 언어 전달의 왜곡현상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김성로 목사는 부활이 강조된다고 해서 십자가가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부활을 통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 하나님이심(성자 하나님)을 확증할 때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진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부활을 구원론적 관점이 아닌 기독론적 관점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침례교 대책위는 김성로 목사의 십자가 신학에 대한 주장은 표현에 있어 오해의 소지가 있었지만  성경적으로 문제가 없으며, 복음적인 설교라고 판단됩니다. 결국 서로간의 가치기준 (Frame of reference)의 차이로 생겨난 커뮤니케이션 왜곡현상의 결과 중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김성로 목사의 신학적 문제와 수정사항

      하늘성소 이중제사 문제

      바른믿음측은 김성로 목사가 십자가의 속죄가 부족하기 때문에 부활하여 다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이중제사'를 주장한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자료들을 검토해보니 김성로 목사는 "이중제사"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중제사'(Double Sacrifice)라는 개념은 신학적 개념에서 찾아 볼 수 없고, 기독교  이단 역사속에 한번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속죄론적 관점에서 부활하셔서 지상에서처럼 동일하게 제사를 드렸다는 개념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중제사에 대한 개념을 먼저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본 대책위는 '이중제사'를 주장한 정이철 목사측에 이중제사의 신학적 개념을 먼저 정의해 달라고 청원했지만 현재까지 답변을 듣지 못했습니다. 대책위의 견해는 정이철 목사가 김성로 목사의 하늘성소 문제를 꼬투리 잡아 창작한 개념이라고 판단됩니다. 하지만 정이철 목사의 주장도 어느 부분은 바른 지적을 하였다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바른믿음 측이 제기한 이중제사에 대한 김성로 목사의 입장은 십자가의 죽음과 하늘성소의 제사는 두 개의 사건이 아니며, 분리된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며, 동일한 사건으로 '단번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막상 설교에서는 십자가 죽음 이후 부활하여 하늘성소에서 제사를 드렸다고 말함으로서 두(2) 번 제사를 말한 것처럼 오해를 줄 수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즉 동시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부활 후에 하늘성소에서 제사를 드린 것"으로 잘못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정이철 목사는 문제를 제기하였던 것이고, 정이철 목사가 어느 부분은 바르게 지적했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단번제사(히 9:28)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이단연구전문단체인 기이협에서 질문을 제기하였고 김성로 목사는 잘못된 표현임을 시인하였고, 성경해석에서 시간적인 착각을 하였다고 인정하였습니다. 또 "부활 후에 하늘성소에 들어가 속죄 제사를 드렸다"는 표현도 바른 신학적 표현이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김성로 목사의 입장을 확인해 본 결과 "김성로 목사는 기이협을 통해 속죄와 구속의 신학적인 개념을 혼동하여 생겨난 표현으로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였고, 2016년 4월 11일 이후 기독교이단대책협회(기이협)과 박형용 교수님의 제언을 받아들여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 로 수정한 것으로 확인하였습니다.

      김성로 목사는 자신의 신학적 잘못에 대하여 4번의 과정을 거쳐 인정하고 고쳤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1) 2015년 5월부터 부분적으로 수정하였고, 2) 2016년 1월 교재에서 수정하였고, 3) 2016년 4월에 이단연구단체인 기이협으로부터 지적을 받고 그것을 인정하고 모든 교재와 책을 이미 수정하였음을 모두 확인하였고, 4) 2016년 10월 26일 춘천한마음교회 4차 답변서를 통해 기침 및 8교단 이대위원장들에게 보내는 김성로 목사의 신학입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모든 증거자료는 침례신문사와 기이협 등등 여러 공식 게시판에 게시되어 있습니다.)

      결국 정이철 목사 측에서 주장하는 십자가 폄훼 발언은 김성로 목사의 투박한 표현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김성로 목사의 전체적인 설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왜곡된 편집을 통한 주장임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성로 목사는 하늘성소에 들어가 속죄를 이루었다는 잘못된 신학적 표현은 겸손히 잘못을 인정하였고 수정하였기 때문에 본 대책위는 이단성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현재 정이철 목사와  김성로 목사의 상반된 신학적 주장

      현재까지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와 김성로 목사의 신학적 견해의 가장 큰 차이는 정이철 목사는 인간의 구속이 십자가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부활은 십자가의 열매라고 주장하는 반면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인간의 구속이 완성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구속은 성화론적 측면에서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된다는 입장으로 십자가와 부활은 동전 양면처럼 떼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기능론적관점에서는 분명히 성격이 다르며, 부활은 십자가의 열매 정도가 아닌 기독교가 세워진 근간으로  중요한 핵심 교리라는 신학적 입장으로, 본 대책위도 김성로 목사 견해에 동의합니다.

      추가적 견해

      추가로 김성로 목사의 교회는 믿음을 강조할 때에 역사적 증거, 물증 등을 강조합니다. 믿음은 말씀을 통해 성령의 은혜로 생기는 것인데 역사성과 증거를 강조하다보면 자칫 이성주의에 빠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일부 교회에 믿음을 강조할때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이성을 활용한 역사성과 증거에 대한 강조는 부족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보통 법정에서도 믿음은 증거와 물증이 확실할 때 생겨지는 것처럼 오히려 기독교가 확실한 역사성과 증거 위에 세워진 종교임을 증거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너무 이성주의로 빠지는 것은 위험함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기도와 말씀이 균형있게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됩니다. 참고로 본 대책위가 직접 확인은 못했지만 김성로 목사는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여 매일 새벽예배를 두(2) 시간씩 드리는 것으로 제 삼자를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춘천한마음교회 교육 자료들

      춘천한마음교회가 부활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성령을 무시하고 다른 중요한 기독교 교리들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 본 대책위는 한마음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제자훈련 교재들을 확인했습니다. 한마음교회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한 제자훈련 책자 1권은 성령의 권능으로 부활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2권은 십자가에 대한 이중적 측면(죄사함과 옛사람의 죽음)으로 연합과 동행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4권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즉 기독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재 내용들을 보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입장들이 기록되고 있고 또 십자가에서 영원한 제사를 드린 문제, 복음에 있어서 십자가의 속죄와 예수를 주인으로 믿는 문제, 특히 4권을 보면 삼위일체에 대해서 그리고 부활로 하나님이 되었다고 오해하는 부분에 대해 예수님의 선재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증거로 인한 믿음뿐 아니라 성령으로 인한 믿음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변증적 관점과 기독론 관점에서 강조하고 속죄와 구속의 완성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즉 부활사건의 중요성과 십자가의 사랑, 죄사함, 성화의 삶, 기독론, 삼위일체, 성령론, 제자론, 교회론, 그리스도인의 사명등을 설명하는 책자들을 통해 기본적인 신학적 교리들을 성도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또 한마음교회 신학의 특징적인 것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가 이 땅에 구속사역을 이루셨다는 것을 중요한 핵심으로 생각하여 구약을 그리스도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참고로 대책위에서 김성로 목사의 영상설교는 보통 한 주제를 중심으로 전하는 부흥회 설교의 특징상 주일설교를 확인하지 않고는 김성로 목사의 전체적인 신학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본 대책위는 한마음교회 성도들이 새벽, 주일말씀을 듣고 기록한 18편의 한마음교회 성도들의 말씀 간증문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간증문 내용들은 부활, 죄사함, 사명, 고난, 삼위일체, 십자가의 사랑, 전도자의 삶의 태도, 하나님과 동행, 죄와의 싸움, 기도, 성령의 사역등에 대한  다양한 내용들이 확인되었고 자신의 삶속에 끊임없는 영적 싸움가운데 성령을 의지하여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려고 하는 진솔한 고백들이 포함되었습니다.

      춘천한마음교회의  큰 특징중에 하나가 전 성도들이 말씀을 듣고 간증을 기록한다는 것입니다.  김성로 목사는 설교가 목회자의 일방적인 선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선포된 말씀을 듣고 성도들이 무엇을 깨닫게 됐고, 그 말씀이 어떻게 삶에 적용됐는지를 기록하여 예배 시간에 나눔으로 성도의 영적 상태, 성장 과정, 영적 진보, 받은 말씀, 삶의 문제, 기도 제목, 영적 싸움 등을 다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간증을 통해 목회자와 성도들, 성도와 성도들이 선포된 말씀으로 '소통'하여 하나되게 하는 효과적인 목양적 방법중에 하나라고 사료되며 한 주에 약 900편의 간증이 올라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본 대책위는 춘천한마음교회를 연구하면 할수록 평범한 교회는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춘천 한마음교회의 간증의 특징

      기독교 방송 C-채널을 통해 약 680명의 간증은 마약중독자, 무당, 알콜중독자, 동성애자, 이단에 빠진 사람, 게임중독, 무신론자, 우울증환자 등 현대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중독자들의 간증과 많은 신도들이 복음으로 변화된 간증 영상 50편 이상을 무작위로 선별해서 확인했습니다. 먼저 한마음교회 성도들의 간증의 특징은 믿음에 대한 큰 확신과 기쁨이 있고 어두운 과거에서 변화되었다는 것, 또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성도들이 동일한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동일한 내용은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게 되었고 자신이 주인되어 살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주인으로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변했고 최고의 삶의 목적이 자신의 일터에서 변화된 자신의 삶과 예수님의 사랑으로 복음전도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출석하게 된 경위를 보면 변화된 친구, 직장동료, 형제, 가족의 모습을 보고 교회를 왔다고 하는 고백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한 자매님은 부활을 통해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고 십자가의 사랑 앞에 자신의 동성애를 회개하고, 해방되었다는 눈물로 증거하는 간증영상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한마음교회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주인(Lord)이며 하나님이라는 것과 특히 부활을 강조하는 것을 보게 됨으로 신학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부활교' 라는 오해도 받을 수 있다는 평가입니다. 하지만 부활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단성이 있다고 할 수 없고  제자 삼고 전도하는 열정은 배울점이 많다고 분석됩니다.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행 17:18)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 10:9)

      정이철 목사측에서 문제 삼는 용어들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 측에서 김성로 목사가 비성경적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는 것으로  1) 하나님의 승부수 부활,  2) 하나님의 피, 3)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 것, 4) 부활복음, 5)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표현, 6)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 7) 부활의 증인, 8) 요나의 표적, 9) 전능하신 분이 오셨다 가셨다, 10) 십자가 죽음에 머물게 하는 신앙, 11) 사도행전에서 서신서로 뛰어 넘었다는 표현, 이러한 문장들과 몇 가지 성경해석들에 대한 문제제기는 일반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용어들이기 때문에 충분한 설명이나 배경지식이 없이 들었을 때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김성로 목사의 칼럼, 한마음제자훈련시리즈, 반론 글을 통해 일부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들은 수정하였고 신학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일부 주장은 오히려 정이철 목사측에 신학적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공개 게시판에 올려진 남침례교 대책위의 연구자료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성로 목사 검증에 대한 결론과 평가

      본 남침례대책위는 김성로 목사가 부활을 설명하는 과정 속에 신학적 문제가 분명 있었지만 이단연구단체의 조언을 받아 인정하고 수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이철 목사가 주장하는 김성로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부정하였다, 혹은 "부활교 이단", "안식일교 같다"고 비방하는 내용들은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검증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특히 '안식교의 조사심판'과 같다는 주장은 반론할 가치가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성로 목사의 부활 강조는 이단성이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특히 침례교의 신앙은 죽으심과 부활을 강조하는 것이 구원론의 본질입니다. '침례' 자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성로 목사의 세미나에 참석하고 영향을 받은 타 교회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혹시나 부활메세지만이 최고라고 주장하거나 다른 교회와 연약한 성도들의 신앙을 무시하는 발언은 조심해야 할 것이며 이점은 김성로 목사께서 특별히 교육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반면 한국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은 강조했지만, '부활'을 강조하지 못한 한국의 영향력있는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고백처럼 김성로 목사를 통해 부활의 가치를 일깨운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만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 여러 교회에서 부활을 강조하게 되자, 성도들이 그 신앙에 변화와 성숙이 나타남으로서 바람직한 교회의 부흥으로 연결된 사례들이 발견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한국 교회에 좋은 영향력을 주고 있음을 타 교회 목회자들과 성도들의 간증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2편이 이어집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② 정이철 목사 조사보고서


      미주 남침례회 한인교회 총회(총회장 반기열 목사)는 총회장 직속 긴급대책위를 두어 1년여 논란이 된 김성로 목사와 정이철 목사의 주장을 조사 검증했다. 다음은 대책위가 발표한 내용이다.



      미주 남침례회, 춘천 김성로 목사 & 앤아버 정이철 목사에 대한 신학 검증 보고서
      - 정이철 목사 신학검증에는 바른믿음측 림헌원 목사 이창모 목사 검증을 포함 -


      Ⅲ. 정이철 목사(림헌원 목사, 이창모 목사)에 대한 신학검증 및 세부사항

      정이철 목사의 신학적 문제들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 측에서 김성로 목사의 신학적 문제 제기에 대한 일부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지만 신학적으로 논증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정이철 목사 측의 기독교 구원론에 있어서 신학적 오해와 문제가 있는 주장들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 부활을 몰라도 성령의 은혜로 십자가만 믿어도 구원이 있다는 주장, 2) 십자가 죽음만으로 구속사역이 완성될 수 있다는 주장, 3) 부활은 십자가의 열매라는 주장 4)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서 제8조 기독론을 훼손한 발언, 즉 예수님의 시체가 썪었다, 3일 동안 만큼은 부패했다는 주장, 5) 예수님도 자신의 십자가의 피의 완전한 속죄의 혜택을 받았다는 주장, 6) 부활의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재창조물로 주장, 7) 마귀도 하나님의종, 오바마도 하나님의종, 김정일도 하나님의종, 정이철도 하나님의종이라고 주장한 것, 8) 예수는 이제 하나님이기 때문에 한마음교회 성도들처럼 예수를 주인(Lord)으로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 9) 정이철 목사의 youtube 동영상 설교에 나타난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하늘성소에서 피를 뿌렸다"는 발언은 오히려 정이철 목사가 문제 제기한 이중제사를 주장하는 것으로 발견됩니다. 10) 부활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만한 증거가 아니라 때가 되면 성령의 은혜로 믿어지는 것이란 주장과 함께 요 4장, 요 20:29 절의 주관적이며 자의적인 성경해석 등등은 신학적 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기 발견된 자료들은 결코 정이철 목사를 이단으로 매도하기 위한 조사가 아님을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설교 중에 실수로 한 발언인지, 신학의 관점이 다른 것인지, 바른믿음측 신학인지에 대한 반론을 성경신학, 조직신학, 권위있는 학술적 근거를 통해 변론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추후에 자세한 주장들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공식적인 이메일을 통해 공개적으로 반론을 받고 객관적인 검증을 통해 판단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른믿음측 정이철 목사의 비도덕적 문제와 대책

      춘천 김성로 목사와 검증 관계자들에 대한 명예훼손

      이단이란 용어 사용은 정통 교단의 총회에서 나온 결의가 있을 때에만 이단이란 단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단성이란 용어는 비성경적인 주장을 한다고 판단될 때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정규 정통 교단에서 이단이란 판정이 나오기 전에는 이단성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지, 함부로 이단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른믿음측 정이철 목사는 상대방을 향해 이단이란 용어와 인격적 비난을 남발하였습니다. 특히 명예와 신뢰를 중요시 하는 종교단체의 특성에 따라 심각한 명예훼손에 해당됩니다.                                                                                                    
      아직 이단으로 규명되거나 확정되지도 않은 김성로 목사와 정이철 목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1) 사악한 이단, 2) 교묘한 이단, 3)  부활교 이단, 4) 김성로 목사의 부활구원론은 이단사상, 5)  김성로, 이00 '부활교' 이단들. 6) 김성로 목사의 부활교, 7)  김성로 부활교, '이단'이라고 한다는 것도 알았으면, 8) 큰 영적 사기꾼 9) 김성로가 약속한 내용도 부활교 사상, 10) 담임목사 김성로 씨의 부활교 이단사상, 11) 십가가 부러뜨리는 김성로 목사의 부활구원론 12) 김성로 목사와 몇몇 분을 부활교 이단들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정이철 목사는 함부로 이단이란 용어를 구사하고 상대방의 말을 과장하여 표현하였고 인격적인 욕설을 남발하였음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이철 목사의 용어사용은 바르지 않습니다.

      정이철 목사의 언어의 유희들

      정이철 목사가 구사한 언어의 유희들로는 1) 김성로 목사를 가리켜  "큰 영적 사기꾼",  2) 신앙간증하는 이옥매 할머니를 가리켜 "영혼의 낚시꾼". 3) 십자가와 부활을 나누고 차등하는 김성로 집단, 4) 김성로가 전하는 것은 영혼 죽이는 '파멸의 복음', 5) 부활복음은 '다른복음', 6) 김성로 목사는 십자가 대적자, 7) 김성로의 신부활론, 8) 김성로 목사를 가리켜 "김성로씨" 9) 한기침의 정회원인 김성로 목사를 가리켜 신학적 근거없이 안식일교 같다고 한 것, 등등에 대한 이러한 정이철 목사의 언어의 유희는 아직 이단검증도 안된 상태에서 한 교회를 담임하는 김성로 목사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상대방에 대한 오해로 인해 신뢰성을 잃게 하는 심각한 명예훼손에 해당된다고 판단됩니다.

      이에 대해 본 남침례대책위는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 림헌원목사, 이창모목사에게 이에 관련된 춘천한마음교회 성도들과 김성로담임목사, 대책위 관계자들, 그리고 기이협에게 공식적인 사과와 명예훼손에 관련된 모든 내용에 대한 삭제를 요청합니다. 만약 설득력있는 사과문과 그에 따른 조치가 없을 시에는 바른믿음측에 심각한 문제인식의 부재로 판단하고, 본 대책위는 엄중한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바른믿음측은 본 대책위의 요구가 불합리한 처사나 협박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기독교 언론사와 목회자는 상대방의 신학적인 문제가 발견될 때는 언제든 비평할 수 있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 남침례대책위가 지적하는 것은 문제제기에 있어 반드시 합당한 표현을 사용해야 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남침례의 요구는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상식적인 요청이며, 이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은 마땅하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점에 대해 바른믿음 대표 정이철 목사는 이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 발표를 표명해 주시길 바랍니다.

      정이철 목사의 이해할 수 없는 발언

      그것은 이것입니다. 정이철 목사의 억지 주장 "정이철 목사를 손 댈 수 없으므로 미국에 있는 남침례교 한인총회에서 정이철 목사를 손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한국 쪽에서 제의하여 "미 남침례교 정이철 목사 표적삼아 긴급이대위 결성"이라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 자체가 남침례교단에 없었습니다. 공히 살펴보기 위한 목적의 긴급대책위는 구성했으나 정이철 목사를 향한 긴급이대위 결성은 없었습니다. 이에 대해 정이철 목사는 1) 한국의 누가? 2) 언제? 3) 남침례교단 누구에게? 4) 손 보라는 말을 하였는지를? 5) 사실에 근거하여 밝혀야 할 것입니다. 이단성을 논함에 있어서 그런 억지 주장은 있어선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 글을 본 독자들과 교계 관련자들은 남침례교단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 이것은 명예를 가장 중요시하는 종교단체에 대한 신뢰훼손에 관한 명백한 명예훼손(Defamation)입니다.

      정이철 목사의 거짓 이메일 유포와 초상권침해, 이에 대한 조치

      조사과정에서 정이철 목사는 "남침례교단이 김성로 목사에게 거액을 받고 정이철 목사를 이단으로 조작하려고 했다는 허위사실을 다수의 목사들에게 이메일(email)로 유포함으로서" 남침례교단과 총회장을 모욕하고 명예를 훼손하였고, 또한 정이철 목사와 림헌원목사는 본 대책위 위원장목사의 짧은 목회경력을 비판하며 '미 남침례교 정이철 목사 표적삼아 긴급이대위 결성' 이라는 왜곡된 기사제목과 위원장가족(아내)과 침례교목사들이 나오는 사진과 함께 게시함으로 "개인명예훼손과 초상권침해"를 하였습니다.(참고: 목사 안수받던날의사진)

      무엇보다도 명예와 신뢰를 중요시 하는 종교단체와 직임(목사)의 특성을 무시한 점에 대해서 남침례대책위는 여러번의 공고문을 통해 충분히 사과와 입장표명할 시간적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정이철 목사와 림헌원목사는 자신들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문제인식과 기독교 윤리의식에 대한 부재로 인해 목회자로서 책임감 있는 입장표명의 자세가 없음을 확인한 바, 남침례교단안에 이런 사례의 법안이 있지 않은 이유로 신학적 토론과는 별도로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미국과 한국 법정에 위임하여 윤리문제의 심각성과 책임소재를 규명하여 앞으로 교계 안에 이런 비슷한 사례들이 나오지 않도록 예방차원을 목적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참고로 바른믿음측은 남침례교단이 정이철 목사를 이단으로 만들기 위해 김성로 목사로 부터 거액(big money)을 받았다는 설득력있는 증거자료를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이의제기는 본 대책위 담당변호사와 법정(미국/한국)에 제기하기 바라며, 모든 조사과정은 객관적인 팩트(fact)를 근거로 투명성있게 공개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성도님들, 여러 목회자와 신학교수님들, 이단연구사역전문가님들!!  본 남침례대책위가 이런 무거운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개인적인 감정과 불순한 의도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을 떠나 상식적으로 이런 행위는 심각한 불법행위라는 것을 바른믿음 정이철 목사, 림헌원목사, 이창모목사 측에 인식시켜 주기 위함이며 앞으로 교계안에 기독교 윤리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한 심사숙고 끝에 내린 정말 가슴아픈 결정입니다. 앞으로  교회 공동체는 사랑과 공의와 신뢰, 그리고 마땅한 사회적 법적 책임도 함께 공존한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결론

      김성로 목사는 2016년 11월 26일 한기침(한국기독교침례교단)에서 내린 결론과 동일하게 이단성이 없습니다. 십자가 무시나 폄훼가 없었고, 바른믿음측이 제기한 이중제사문제는 오해의 소지를 제공하였지만, 기이협을 통해 이미 고쳤기 때문입니다. 부활강조는 십자가와 더불어 모든 교회에 필요한 것이며 더욱 강조하고 발전시켜야 할 귀중한 복음이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형제교회인 한마음침례교회와 미주 남침례교는 부활메시지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내용을 더욱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발전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김성로 목사의 이단성에 대한 논쟁이나 주장을 함부로 하는 것을 삼가해 주시길 바라며, 미남침례총회가 내린 결정을 존중해 주시길 바랍니다.

      2016년 미남침례총회가 추구하는 교단의 가치는 "성경적 신학을 기반으로 기독교 복음의 진리수호" 입니다. 앞으로도 남침례는 기독교 성경적 진리수호를 위해 앞장설 것을 약속 드립니다. 이번 검증을 위해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 교계 성도님들, 목회자 여러분, 그리고 이단 연구관계자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여러분의 각 가정에 더욱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본 검증 발표문에 궁금증이나 이의가 있다면 자료들을 충분히 정독하신 후에 남침례 대책위 공식이메일(email)로 본인의 교회(기관), 소속, 성함, 직책을 밝혀 주시면 성실한 답변을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신분을 밝히지 않은 이의제기는 받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리고 모든 토론은 사정에 따라 공개될 수 있음도 알려 드립니다.

      남침례 대책위 공식 이메일 주소: ksbcamerica@gmail.com
      감사합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5부. 그리스도와의 연합
      둥지 2012.04.14 10:38 http://blog.daum.net/7gnak/15717996

       

       

      5. 그리스도와 연합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해하기 위해 언약을 알아야 한다.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 전에 예정한 목적은 하나님과 우리와 특별한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부른 것이다.하나님과 아담의 교제는 언약을 전제로 한 것이다. 아담을 만드시고 정기적인 교제를 하신 것은 언약을 전제로 하신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는가? 선택의 목적이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특별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 특별한 관계는 언약적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그 분의 백성이다 라는 특별한 관계이다. 이 언약적 관계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다. 즉 구원의 관계이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을 사람으로 우리를 선택하셨다. 그 특별한 관계란 언약적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언약적 관계에서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다 곧 구원이다. 구원이란 사건인 동시에 사건보다 선행하는 것이 있다. 구원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인격적이고 구체적인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 구원이다. 예정하심을 따라 그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는 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알고 나도 하나님을 알고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나를 자기의 자녀라 부르는 특별한 관계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바로 이 특별한 관계에 들어갈 대상으로 우리를 예정해 주셨다. 그리고 예정하심을 따라 그 특별한 관계를 이루는데 하나님의 형상이 필요하다. 이것이 아니면 결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이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한다. 지식이 지식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식이 없다면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하나님은 무한자고 우리는 유한자다 무한자와 유한자가 인격적인 교제를 맺는 것이다 어떻게 맺는가? 우리는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은 우리는 자녀로 부르고 우리는 감사하고 찬송하고 대화하고 느끼고 그 친밀한 관계속에 들어가기 위해 무한자와 유한자가 사이의 존재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 한계를 뛰어 넘을수 있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인격적 교통을 가능하게 하는 채널이 있어야 한다. 그 채널로서 하니님께서 자기의 형상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지식이 있다.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이 없이는 기독교의 종교는 없다. 그것이 없이는 예수그리스도가 와도 우리를 위해 죽었을 찌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질 수 없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야, 은혜도 알고 감사도 알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줄도 알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만약에 이것이 없다면 땅에 기어다니는 구더기에게 미분 적분방식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이치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떠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전능자이시다.


      우주는 너무 광대하다. 우주를 아는 사람만이 우주가 광대하다는 것을 안다. 이 모든 것을 떠받들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과 우리가 어떻게 교제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주신 것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관계 안에 우리를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다. 이 언약적인 관계는 특별한 관계다. 이것은 전폭적인 헌신하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우리는 그 모든 은사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 안에 들어가기 원해서 부르신 그들에게 은사를, 언약을 주신 것이다. 우리를 언약적 관계로 만드신 것이다. 구원은 이런 언약적 관계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믿고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 부른다. 말하자면 성령의 사역도 우리를 예정하신 대로 언약적 관계로 들어오시게 하는 관계다. 하나님의 형상을 아담에게 주실 때 하나님은 아담으로 대표되는 모든 이의 아버지가 되고자 하는 신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눅3장38절에서 아담을 사람의 조상으로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신다. 아담을 지으실 때 하나님은 아담으로 대표되는 모든 선택된 사람들이 언약적 관계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창세기에 보면 아담에게 동산 중앙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지 않도록 명하셨다. 이것이 언약의 징표다. 그 사람이 언약에 머무는지 머무르지 않는지 가리기 위한 시험지다. 그것을 따먹지 않은 한 그가 하나님과 언약적 관계 안에 있음을 그도 알고 하나님도 알고 세상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어기면 언약적 관계가 파괴되고 더 이상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선택한 사람들을 부르시고 항상 부르신 다음에 언약을 세우셨다. 아브람 부르시고 언약을 세우시고 이삭에게 아브람의 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야곱에게 아브람의 언약을 새롭게 하시고 계속 언약을 새롭게 하셨다. 애굽에서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고 모세를 통해서 언약을 세우셨다. 나중에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을 파괴한 사람들이라고 책망하셨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면 너희들을 회복시키신다 하셨다. 예수님도 유월절 전날 밤 마지막 식사 때 이것은 나의 피로 살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라고 하셨다. 우리가 지금 언약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룻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룻도 하나님의 약속이 보장되어있는 언약 안에 들어오는 신앙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올 때 그를 하나님이 복되게 하셨다.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언약에 들어갈 사람을 불러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게 하는 사역이다.


      고전 15장 21~22절, 롬 5장 12절~17절 구원에 관한 언약적 배경을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아담을 대조하는 것이다. 구원을 이해하는 도표가 있다. 이들은 실제적으로 역사에 존재하였던 인물이다.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인물이다. 구원의 원리가 여기에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언약의 머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나타나는 것이다. 아담이 언약의 대표자로서, 아담이 하는 모든 행동의 결과는 아담 뒤에 오는 후손들에게 그대로 미쳐진다는 대표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고 아담도 그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다. 그것이 바로 동산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라는 아담만 죽는 것이 아니라 아담으로 말미암는 모든 인간의 후손들이 아담처럼 범죄한 자로 아담처럼 범죄하고 아담처럼 죽는다는 언약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 죽는 것은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종교적인 죽음이다. 언약을 깨뜨린 자가 겪는 결과이다. 그래서 아담은 결국 자기 자신의 한번의 범죄로 모든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죄를 만든 사람은 아담 한 사람이다. 죄를 지어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한 사람의 범죄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이다. 이 모든 사람은 아담처럼 죄를 범했다. 행위로 죄인된 것이 아니라 언약으로 말미암아 죄인된 것이다. 내가 언약에 속해 있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같은 원리로 모든 사람이 의로움에 이른다는 것은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 때문에 의롭다 인정을 받는 것이다. 오로지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들어가기만 하면 구원받는 것이다. 새 언약에 들어가는 수단이 무엇인가? 성경은 이것을 믿음이라고 말한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자기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마찬가지로 믿는자가 그 언약에 들어가는 것이다. 죄인 되는 것은 태어날 때부터 죄인 되는 것이다. 태어나는 것을 중생이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중생케 하므로서 예수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참여하는 것이다. 영적 출생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연적인 출생은 육체로 말미암아 영적 출생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것이다. 구원은 행위로 얻지 못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성령의 아버지 삼위일체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으로써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결코 없다. 오직 언약으로 구원받는 것이다. 언약에 참여하는 자만이 구원받는다. 언약에 어떻게 참여하는가? 믿음으로 참여한다. 그 믿음이 성령의 중생케 하심을 일으키신다. 그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면 구원의 서정을 다루고 있기는 한데, 원인과 결과식으로 기계적인 사고방식으로써 연쇄적인 도미노 현상을 일으키는 것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10장~16장에 보면 언약적 모델로 되어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구원의 경험을 원인과 결과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신론적인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구원의 서정을 다루고 있다. 구원의 서정을 언약적 이해를 바탕으로 다루게 되면 한가지 사실을 강조한다, 그 한 가지 사실은 그리스도의 연합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연합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성도들을 언약으로 한대 묶는 것이다. 한 덩어리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란, 칭의와 성화처럼 구원의 경험중의 하나가 아니다. 구원의 경험을 그리스도의 연합의 결과라고 한다. 그리스도 연합안에는 모든 구원의 경험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연합을 통해서 구원의 경험이 이루어진다. 구원의 경험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출발한다. 구원의 적용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적용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엡5장 30~31절 “우리는 그의 몸의 한 지체다...”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우리가 하나가 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나되는 결정적인 증거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우리 몸이 성전 이라한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다는 뜻이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연합 때문이다. 남녀가 결혼해서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언약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마치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한 몸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을 의미한다. 교회와 그리스도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힘은 성령으로부터 온다.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언약적 관계이다. 그것이 곧 교회와 그리스도와 관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공동운명체이다. 교회원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를 결합시키는 힘은 바로 성령으로 부터이다. 언약적 관계를 깨버리면 하나가 될 수 없다. 깨어 버리면 한 몸 한 지체가 될 수 없다. 약함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우리의 약함을 도우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회개하게 하고 믿음을 갖게 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고 결국 언약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게 하고 육체를 죽이고 성령에 따라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즉 죄를 죽이고 성령께 순종하게 하는 이유는 언약 안에 머무르게 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목적은 죄를 소멸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소멸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의로운 신부로 그와 연합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것이 일반 세상윤리와 다른 것이다. 죄의 소멸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그의 순결한 신부로 언약의 동반자로 그와 연합하기위해 죄의 소멸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룰 수 없고 그 연합의 결과로 주어지는 구원의 경험도 결코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안된다면 구원의 경험이 없다. 칭의 회심도 없고, 믿음도 없고 회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을 해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죄이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이 죄에 끌려가지 않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 죄를 지어서 악한 양심이 회복될 수 있도록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사죄의 확신을 주시고 우리로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사모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감동케 하신다. 우리가 미처 회개하지 못한 것도 성령이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 가운데 기도해 주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언약의 동반자로서 그리스도의 연합에 머무르지 못한다. 성령의 사역은 외적인 기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본질적인 그리스도의 형상 만든 요소에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간다는 것은 명령인 동시에 필연적인 귀결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연합에 관한 성경적 근거는 무엇인가? 구약성경에 연합적 힌트가 있다.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속죄할 짐승 머리 위에 안수하고 그 짐승을 잡아 속죄의 제물로 드린다. 이럴 때 안수할 때 그 대상인 짐승과 제사를 드리는 제주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 짐승은 그 죄를 지은 사람의 자리에서 그 사람을 대신해서 죽음으로서 그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개인의 인격적인 개체성을 믿는 믿음 때문에 불신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언약적으로 다루신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죄도 언약으로 사해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언약적으로 다루시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숨을 쉬어야만 살 수 있듯이 이것은 정해놓으신 질서이다. 언약으로 말미암아 죄인되고 언약으로 죄사함 받는다. 다른 것으로 절대 죄시힘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구약에 동물제사가 많이 행해졌던 것은 언약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속죄를 완성하신다. 그의 죽음이 대속적 죽음이다. 우리를 위한 언약에서 대신하신 죽음이다. 실제로 나의 죄가 그가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가 다신 부활하심으로 나의 죄가 확실하게 해결되었다. 그 외에는 죄가 해결되는 방법이 없다.


      이사야 53장 4~6절, 이사야 53장 11~12절에서 고난 받는 종의 기사가 나온다. 고난 받는 종의 고통은 그 고난 받는 종에게 붙은 모든 사람을 위한 고난이다. 채찍을 맞고 질고를 당하고 사람들에게 수욕당하고 버림당하고 결국 죽는 그 모든 그의 고통은 그가 고난 받는 종과 붙어있는 모든 사람의 위한 고난이다. 내가, 그리스도가 고통 받을 때 언약적으로 내가, 그와 함께 고난을 다 받았고 그가 장사되어 죽을 때 내가, 언약적으로 그와 함께 죽고 그가 부활할 때 내가, 함께 부활하여 산바 되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마25장40절“작은 소자”를 자기와 동일시(identify) 한다. 언약적으로 하나로 묶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적으로 가장 작은 자와 억울한 자와 버림 받은 자와 자기와 동일시한다. 구제하는 것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잊혀지지 아니하고 소멸되지 아니하고 그것이 언약적으로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하는 것이다. 언약적으로 예수그리스도에게 하는 것이다. 내가 헌금한 것이 다른 사람이 오용한다 할지라도 내가 바친 것이 오용된다 할지라도, 바쳐진 것이 무효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받쳐진 것이다. 헌금할 때 인간적인 생각을 하면 안된다. 오직 언약적 하나님만 생각해야 한다. 요15장에서 “포도나무와 포도나무의 가지”연합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구원의 경험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와 머무는 동안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있는 한 구원의 경험은 모두 내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은사가 모두 내게 주어진다. 하나님의 아들과의 연합이 중요한 것이다.


      (3강 마무리 기도)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우리를 영원전에 예정하시고 작정하신대로 구속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송하기를 쉬지 않고 날마다 날마다 계속하게 하옵소서. 우리속에 하나님의 이 사랑이 붙들린 바 된 간절한 심령을 주사 하나님의 종되기를 마음 또한 생기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새 언약에 동참한 바 되었고 하나님의 모든 은사를 우리 것으로 받았사오니, 우리가 복받은 사람이요 정말 참으로 행복한 사람임을 깨달아 알게 하시고 세상의 재물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모하게 하지 않도록 주님 우리를 날마다 붙잡아 주옵소서. 말씀을 읽을 때 마다, 그 말씀이 우리 속에 믿음의 기초가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일에 양심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이어서 coming soon.... 6부. 구원과 언약의 관계 편입니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미국 우체국에서 소포 배달 서비스가 시작된 것은 1913년. 그런데 당시엔 어린아이까지 우표를 붙여 우편으로 보내는 ‘황당한’ 일이 자주 발생했다고, 미국의 스미소니안닷컴이 소개했다.

      우체부의 가방에 담겨 있는 아이 /출처=스미스소니언 뮤지엄
      미국 우체국은 1913년 1월 1일에 우편 소포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후 수백만 명이 다양한 물품을 이 서비스로 보냈다.
      그런데 그중에서 눈에 띄는 ‘배달 품목’은 아기였다. 미국의 우편제도 역사를 파헤치는 제니 린치는 "아기 배달"을 의뢰한 제스 비글과 마틸다 비글의 사례를 소개했다.

      오하이오에 살던 비글 부부에겐 생후 8개월이 된, 제임스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이 부부는 수 km 떨어진 곳에 사는 제스의 어머니에게, 새로 태어난 손자를 보여주길 원했다. 마침 그들은 몇 주 전 우편 소포 서비스가 시작됐다는 것을 떠올렸고, 아들 제임스를 "우편"으로 어머니 집에 보냈다.

      ‘다행히’ 제임스는 당시 소포로 보낼 수 있는 최대 무게인 11파운드(약 5kg)를 넘지 않았고, 비글 부부는 당시 요금인 15센트(약 175원)만 내고 아들을 목적지로 보낼 수 있었다고. 우체부는 우편물 배달 노선을 따라 이동했고, 아들 제임스도 우체부와 함께 이 노선을 따라 할머니 댁에 도착했다.

      미국에서 소포배달이 시작된 이래, 이렇게 아이를 우편물로 보내는 부모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아이의 체중이 소포 무게 한계를 넘어서, 부모 중에는 소포 무게의 한도를 늘려달라는 이들도 등장했다. 부모들이 아이를 이렇게 ‘소포’로 배달한 것은 당시 우편 요금이 기차표 가격보다 훨씬 쌌을 뿐 아니라, 집에까지 정확히 배달하는 우체부를 신뢰했기 때문이라고.

      부모들의 ‘아이 배달’ 서비스 이용이 계속되자, 결국 미 우정공사는 6개월 뒤인 6월 13일 일간지에 "더 이상 아이들을 우편으로 보내는 것을 금지"한다고 못박았다.
      더 이상 '아기 소포'는 받지 않겠다는 미 우정공사 기사

      100년이 지난 현재, 아이 배달 우체부는 존재하지 않지만, 비행기 등의 운송수단에서는 보호자 없이 혼자 여행하는 아이를 위해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4. 결론: 성령은 우리 역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시다. / 루이스 B. 스미디즈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상황 안에 있고, 새로운 권위 아래 살고 있으며, 새로운 질서의 계율에 복종하도록 부름을 받고, 자유케 된 인격체들로서의 기쁨을 누리도록 초대받고 있다. 역사는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세상, 교회, 그리고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그분은 사람들을 자신의 곁으로 부르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기업을 굳게 붙들 것을 명하신다. 그분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일깨우시며, 그들을 자신의 사역의 동역자로 삼으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자신의 삶의 양식을 본받을 것을 요구하신다. 그분은 자신을 인도자, 주, 머리, 그리고 동역자로서 제시하신다. 그분의 주권은 그것을 알고 그것에 절하는 사람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역사는 여전히 그리스도 없이 존재한다는 망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주권은 모든 것에 미치며, 그는 그 주권이 만물에게 미치는 때를 향하여 역사하신다. 그리고 그 동안 그분은 우리를 자신과의 연합으로 부르신다.

       

      십자가와 부활은 성령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을 지배하는 내용들이다. 바울의 성령에 관한 가르침은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한 교리적 강설의 배경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성령에 관해서 말하는 바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의 움직이라는 배경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 내에서의 새로운 상황과 하나님의 사역 가운데서의 새로운 국면을 그 배경으로 한다.

       

      바울이 성령을 그리스도와 연관시키는 방식은 구약 성경이 하나님과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과 실제적으로 차이가 없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창조, 운동, 행동의 하나님이시다. 즉 그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수면을 운행하셨던 분은 성령이시다(창1:2).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창조되었으나, 그 일은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온 입김(breath) 혹은 영(ruach)을 통해 이루어졌다(시33:6). 인간의 생명이 위태롭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의 영[또는 신]의 능력을 통해 유지시키신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욥33:4). 하나님께서 그 영을 거두실 때 우리는 진토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가 만일 자기만 생각하시고 그 신과 기운을 거두실진대 모든 혈기 있는 자가 일체로 망하고 사람도 진토로 돌아가리라"(욥34:14, 15). 성령은 이처럼 창조시에 운행하시고, 세상에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지은 만물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상황은 근본적인 변화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그분의 영으로부터 소원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령은 미래를 목표로 하여 활동하시는 하나님, 상황을 변화시키시며 그 안에 포함된 인간들을 또한 변화시키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 새로운 상황은, 성령이 새로운 방식으로 역사하시기 위하여 임하실 때 임하게 된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돌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율법이 기록되었다고 전할 때 그가 염두에 둔 이상(the vision)의 요지이다(렘31:33). 새로운 활력, 새로운 세대, 새로운 관계가 성령이 능력 가운데 임하실 때 도래하리라고 약속되고 있다.(사32:15)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고 말씀하신 후에 다시 "내가 또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겔37:5, 11)라고 말씀하신다.

      이 모든 말씀 가운데 하나님과 그분의 영은 뚜렷이 구분되고 있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통하여 역사하고 계신다.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와 계시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인간의 역사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여기서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들을 다루고 있으며, 그 말씀들은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인간의 삶 어디에 존재하시든지 간에, 그는 거기서 영으로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고 있다. 다윗이 시편 139편에서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말했을 때, 그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행동이 존재하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 아래에"(down here)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바울의 생각과 하나님의 영에 대한 구약 성경의 표현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대비가 존재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은 그리스도의 영이 되셨다. 바로 하나님의 영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는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죽은 인간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신다. 그는 생명을 창조한 영과 동일한 분이시다(고후3:6). 그는 그리스도의 몸이자 새 이스라엘인, 신앙을 가진 순종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영이시다(고전12:12, 13). 성령이 옛 언약에서 하나님과 가지셨던 동일한 관계를 새 세대에 있어서 성령은 그리스도와 가지신다.

       

      우리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간의 구별을 무시하고 있는가? 어떤 면에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바울의 메시지를 우리 앞에 견지해 두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성령은 주님의 명백하고도 구체적인 실재를 희미하게 하는 방식으로 예수와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벌코프(H. Berkhof)가 말하고 있듯이, 성령은 "하늘로 올라가신 그리스도의 또다른 이름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는 여전히 주이시다. 슈바이처(E. Schweizer)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 차이를 포착하고 있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옳은 것 같다: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그리스도의 의의, 즉 그 공동체를 위한 그분의 능력 있는 사역과 관련하여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 그는 성령과 동일시될 수 있다. 그가 친히 주가 되시며, 그의 능력을 마음대로 행사하시는 한에서는 그는 성령과 구별된다. 마치 자아(the ego)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인격적인 힘과 구별되어야 되듯이.(참고. Kittel, Theological Dictionary of New Testament, VI, 419. 바클레이는 바울이 주와 동일시 함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필수적인 구별을 지적하였다: "바울이 그 내용을 기록하였을 때, 그는 삼위일체와 신성의 인격에 대한 교리의 견지에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혀 신학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체험에서 이야기하고 있었으며, 그의 체험에 따르면,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여기에, 바울은 단순히 개인적인 체험이 아니라, 성령이 개인적인 체험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에서 그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바울 서신서에 나타나 있는 주와 성령 간의 관계에 대한 그의 예리한 연구서에서 잉고 헤르만은 성령이 "성취의 기독론적 범주"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본 문제를) 매우 잘 설명해주는 표현이다. 곧 바울이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그는 구속의 목적들을 성취하기 위해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이 이 말의 의미이다. 헤르만은 그리스도와 성령 간의 동일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능"이라는 단어가 암시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의미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한다. 성령은 단지 그리스도와 한 팀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성령은 자신의 구속적 기능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헤르만이 이해한 바에 의하면 주님은 변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이 완수한 대속의 사역을 현세대로 가져다 주시는 방법이 있었는데, 그 방법은 그의 영의 방법이다.(참고. 헤르만은 성령에 관한 바울의 모든 진술이 다음과 같은 견지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바울의 서신에 나타난 성령에 관한 순전히 신학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모든 진술들은 기독론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성령은 그의 고유 권한을 가진 한 인격체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단 말인가? 그는 반드시 한 인격체로 이해되어야지 독자적인 권한을 가진 분으로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또한 이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려운 문제는 "인격체"(person)라는 단어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심리학적으로 형성된 인격체들에 대한 사고 방식으로부터 벗어나기가 매우 힘들다. 만일 어떤 한 인간이 하나의 구별된 개인으로서의 인격을 소유하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그를 인격체 이하의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성령을 독자적인 고유권한을 지닌 인격체라고 칭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개인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사고 방식이 아니었다.

       

      성령은 한 인격체로서 체험되고 알려지며 영광을 받으신다. 그분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가장 인격적인 존재이시다. 그러나 그것은 그분의 독자적인 권리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그분은 한 인격체이시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그분은 오직 그리스도로서 알려지고 체험된다. 이것은 우리가 성령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인격체와 분리된 인격체로 주장하는 것이 성경적인 목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다섯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① 성령은 지상에서 그의 구속 계획을 성취하고 실현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이시다.

      ② 성령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에 의해서 체험되는 그리스도이시다.

      ③ 성령은 지금 여기 지금 존재하시는, 그러나 장차 완전히 실현될 새로운 창조를 통치하시는 주로서, 그의 세상적 기능들을 수행하시는 그리스도이시다.

      ④ 성령은 새로운 창조 안에 있는 자유의 삶을 위한 객관적인, 그러나 역동적인 규범이시다.

      ⑤ 따라서, 새 언약 안에서의 삶에 관한 한, 성령은 현재의 그리스도이시다.

       

      성령과 그리스도가 어떻게 연합되어 있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바울의 노력은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연합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배경이 된다. 우리가 성령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실 때,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인격체와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이 된다. 이제 이 연합의 더 깊은 의미들을 계속해서 탐구하기로 하자.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에서 발췌 (81-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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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발췌

       

       

      제4장.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역할이 갖는 상호 연관성은 너무도 명백한 것이다.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 속에 내주하실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는 성경구절들을 찾아봄으로 분명해질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될 때 비로소 구원에 이르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을 때만이 우리가 구원받은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범위와 폭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는 이 연합은 범위와 폭에 있어서 영원하며 끝이 없다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그의 백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다. 더욱이 이 연합은 역사 가운데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행하셨던 구원역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마침내 이 연합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 위에 태어난 이후 그들에게 실제로 적용되어졌으며, 그들의 평생에 걸쳐 지속되며 다가올 세상에서 그들이 온전히 영화롭게 될 때까지 계속 되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그 뿌리를 하나님의 택정하심에 두고 있으며, 그 근거를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에 두고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실제적 적용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3.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연합

       

      (1) 우리는 제일 먼저 중생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간의 연합이 실제로 성취되는 것은 중생의 임을 알게 된다. 이 연합은 우리 구원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이 연합은 구원의 전 과정을 지탱해 주며, 채워 주며 온전케 한다.

      (2)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이 연합을 소유케 되며, 이 연합을 통해 계속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91~101p)

       

       

      5. 성령세례

       

       

      ....오순절이나 신오순절 계통의 교회들은 성령세례가 중생 이후에 나타나는, 또한 중생과는 구별된 하나의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이 세례는 모든 신자들이 추구해야 할 그 무엇이라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이상에 언급된 오순절 계통의 성령세례 교리에 대한 어떠한 성경적 근거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

       

      고린도전서 12:13에서 바울은 성령세례가 중생을 뒤잇는 사건이요, 그러기에 중생과는 구별되는 경험으로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될 사건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오순절 계통의 가르침과 함께 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라는 진리 이상의 대답은 있을 수 없다. 바울은 이 진리를 증명하고자 여기서 이렇게 확언하고 있다. “우리가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약관화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여기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함이 중생 - 즉 중생은 하나님의 주권이요, 이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고 그의 몸이 되었음 - 과 동일한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과 우리들에게 “너희는 중생 이후의 경험으로서 성령세례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미 성령으로 세례받은 자들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6. 성령 충만

       

       

      ....중생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는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충만함 가운데 계속적으로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의 경험이 이 사실을 잘 확인해 주고 있다. 신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갈 수도 있고, 성령을 슬프시게 하기도 하며, 때때로 교만해지고 분쟁가운데 빠지며, 사랑이 없어지고 자기 탐닉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들 대부분의 경우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우리 모두는 성령을 소유하고 있으나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소유하고 계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이 필요한 것은 소위 “성령세례”라 불리는 중생 이후의 경험 혹은 개종 이후의 경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으로 더욱 채워지기를 간구하는 일이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산다는 것은 성령을 기다리며 그에게 우리를 위해 해주실 것을 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성령께 물어보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 날마다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성령은 말씀을 떠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성경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어떻게 성령에 따라 살 수 있는가를 잘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말하자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산다는 것은 육신적 소리들을 잠재우고 육신적 미움의 힘들을 누르며 모든 충동적 감정들을 억제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긍정적으로 말하자면 성령에 의해 인도되고 그가 말씀을 통하여 자기를 나타내실 때에 그 분의 음성을 들으며 계속적으로 그 분에게 삶을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힘으로 산다는 것은 필요한 영적 능력을 얻기 위하여 그에게 기댄다는 뜻이다. 또한 성령께서 모든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에 적합한 힘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일이며,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기도를 통하여 그 능력을 간구하는 일이며, 날마다 겪는 모든 문제들을 만날 때마다 믿음으로 그 능력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분과 계속적인 접촉을 통해서이다. 건전지로 작동하는 라디오와 전기로 작동하는 라디오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후자는 항상 전력의 근원에 플러그가 꽂혀 있어야만 작동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원리는 건전지 원리가 아니라 플러그를 꽂는 원리에 의해서이다. 우리는 매순간마다 그 분이 필요하다.

       

      (80~90p)

       

      안토니 후크마의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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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애도의 날 선포 "쿠르드노동자당(PKK) 소행"

      10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에서 발생한 두 차례 폭탄 공격으로 버스 유리가 깨져 있다. © AFP=뉴스1

      (서울=뉴스1) 김윤정 기자 = 터키 이스탄불 중심가에서 발생한 폭탄테러로 인한 사망자가 38명으로 증가했다. 터키 정부는 11일을 희생자들을 위한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11일(현지시간) AFP통신 등에 따르면 비날리 이을드름 터키 총리는 전국에 조기를 걸 것을 명령하고 하루 동안 애도의 시간을 가질 것이라고 밝혔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도 카자흐스탄 방문 계획을 연기했다.

      앞서 10일 오후 10시 30분쯤 보다폰 아레나 축구 경기장 인근에서 차량 폭탄 공격이 발생했다. 보다폰 아레나 축구 경기장은 축구팀 베식타스의 홈구장으로 축구팀 부르사 스포르와 베식타스의 슈퍼리그 경기가 끝난 직후였다.

      이어 45초 뒤 경찰 다수가 모여있던 인근 막카 공원에서 자살 폭탄 공격이 발생했다.

      사망자는 현재 38명으로 증가했다. 터키 내무부는 경찰 30명, 민간인 7명, 신원미상 1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부상자 166명 중 생명이 위독한 중상자가 다수여서 사망자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10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 보다폰 아레나 축구 경기장 인근 차량 폭탄 공격이 발생한 현장에서 정밀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 AFP=뉴스1

      경찰 피해가 컸던 만큼 당국은 경찰을 노린 테러 공격으로 보고 있다. 쉴레이만 소일루 터키 내무장관은 "이번 폭탄 공격과 관련한 용의자 10명을 체포했다"고 밝혔다.

      공격 배후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정부는 쿠르드노동자당(PKK) 소행으로 추정하고 있다. 누만 쿠르툴무스 부총리는 CNN에 "정황들이 PKK를 가리키고 있다"며 "조사가 끝나면는대로 발표가 있을 예정이지만, 지금은 어떤 것도 분명히 말할 순 없다"고 밝혔다.

      한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경기가 끝난 직후 폭탄 공격이 발생해 인명 피해가 컸다"며 "우리는 또 한번 이곳 이스탄불에서 테러의 추한 모습을 목격했고, 이는 모든 형태의 가치와 도덕을 깔아뭉게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베식타스 구단도 성명을 발표하고 "비열한 공격을 벌인 자들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도록 맞설 것"이라고 밝혔다.

      국제사회의 성명도 이어졌다. 젠스 스톨텐버그 나토 사무총장은 "끔찍한 행위"라며 "우리는 터키와 견고한 동맹을 유지하고 있으며 모든 형태의 테러리즘과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터키 주재 미국 대사도 트위터를 통해 "이스탄불 테러로 희생된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고 밝혔다.
      10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 보다폰 아레나 축구 경기장 인근에서 차량 폭탄 공격이 발생해 경찰 버스가 완전히 파손됐다. © AFP=뉴스1

      (창세기 39장)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라고만 간단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간단한 기록 속에 얼마나 많은 아픔이 담겨 있을까요? 피 묻은 채색옷을 보고 요셉이 악한 짐승에게 잡혀 먹힌 줄만 알고 슬퍼하는 아버지 야곱의 통곡이 애굽으로 끌려가는 그의 귀에 들렸을 리 만무합니다. 하필이면 애굽으로 끌려가는 길이 아버지의 집이 저만치 보이는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형제들에게 배신당하고 은 이십 개에 이스마엘 족속에게 팔려 애굽으로 끌려가던 그의 가슴은 얼마나 멍들었을까요? 아버지의 사랑 속에 애지중지 자라온 열 일곱 살 소년 요셉은 채색옷을 벗기우고 신발을 벗기우고 그 먼 길을 걸어 애굽으로 끌려갔을 것입니다. 중동의 뜨거운 광야길을 끌려가며 그는 얼마나 울었을까요? 그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은 무엇을 나타내기를 원하셨을까요? 하늘영광을 버리고 이 낮은 땅에 오시어 온 세상 죄인의 질고를 지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비아돌로로사’, 주님께서 홍포를 벗기우시고 채찍질 당하시며 피투성이 몸으로 십자가를 지고 맨발로 걸어가신 그 길에는 주님의 핏방울이 알알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사람 보디발이 요셉을 노예로 샀습니다. 돈을 얼마나 주었는지, 은 몇 개를 주고 샀는지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다가 죽이지 말고 팔자고 제안하여 형제들이 은 이십 개에 요셉을 이방인의 손에 판 것은 가룟 유다가 은 삼십 개에 주님을 팔고 그들이 로마인의 손에 주님을 넘긴 것과 닮아 있습니다.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 로마의 총독 빌라도...., 빌라도의 아내는 저 죄없는 사람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였고,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의 옷을 붙잡고 늘어졌습니다. 주님은 죄 없이 십자가에 넘기워 죽임당하셨고 요셉은 죄 없이 애꿎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주님의 양편에는 두 강도가 달렸고 요셉에게는 바로의 두 관원이 꿈의 해몽을 부탁하였습니다. 한 편은 생명을 잃었고 다른 한 편은 생명을 얻었습니다. 마침내 옥에서 풀려나와 가장 높은 위치에 올라 애굽을 통치하는 총리의 자리에 오르고 형제들을 기근으로부터 구해내는 요셉의 이야기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고 온 백성을 구원하시며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어질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모든 일을 보셨고 모든 사정을 아셨고 모든 고통을 나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보디발은 요셉을 가정총무로 삼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요셉에게 위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위하여, 그렇습니다,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어떻게 이 모든 일이 가능하였을까요? 어떻게 요셉은 그 억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여늬 사람 같았으면 ‘하나님이 계신다면 이럴 수가 있는가, 하나님이 내게 이러실 수가 있는가. 내가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시는가.’라고 원망하고 반항하지 않았을까요? 요셉이 그러한 상황에서도 순종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셨을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말씀하시고 요셉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실히 나타내셨기 때문에 요셉이 그렇게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아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고 요셉은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붙잡았다는 사실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분명한 사실 앞에서 요셉은 행하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은근하고 비밀스러운 유혹을 단호히 물리칠 수 있었고 어떠한 고통의 순간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으므로 끝내 십자가의 그 고통을 이기셨을 것입니다. 아, 그러나 주님은 마지막 순간 십자가에서 버림당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버림당하신 것입니다.

        완전함은 무엇이며 완전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아브람의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걸어서) 완전하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걷는 것이 완전함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완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어떠한 고난, 어떠한 고통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완전함입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요셉의 모습, 욥의 모습을 통하여 한 순간이라도, 어떠한 고통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떠나지 않는 완전함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버림당하심으로 그 완전함, 그 의를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가운데 있습니까? 광야 가운데, 역경 가운데 걷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아니하는 어두움 속을 걷고 있습니까?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이겨내십시오. 우리는 할 수 없어도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으므로, 주님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으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여도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 완전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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