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찰스 톰슨(Charles Thomson,1729-1824)은 낮선 이름 같으나
그러나 그가 미국 최초로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LXX: Septuagint)을 영어로 번역한 톰슨 성경(The Thomson Version)의 저자라면
조금 아는데 도움이 될까 싶다.
그는 아일랜드 Gorteade에서 태어났고 1739년 그의 어머니가 죽은 후
그의 아버지는 찰스와 형제들과 함께 영국의 식민지인 미국으로 이주했고
아버지가 바다에서 사망하자 무일푼의 소년은 홀로 되어
대장장이로 델라웨어의 뉴캐슬에서 자라나 펜실베이니아의 뉴런던에서 공부하였고
1750년에 필라델피아 아카데미에서 라틴어 교사가 되었다가
그 당시 프랑스와 아메리칸 인디언의 전쟁 동안 펜실베이니아 주
소유주인 아메리칸 인디언의 정책을 상담하여 이스턴 조약(1758)을 만들어
장관을 역임하고 영국의 식민지 사업자로 인한 전쟁을 비난했다.

*이스턴 조약
프랑스와 영국이 미국의 미시시피를 경제로 신민지 소유권을 서로 갖겠다는
다툼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여러 인디언 족속과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이들을 프랑스의 지지 부족들로 삼았고 영국은 체로키 족으로 만 지지를 받았지만
1758년 체로키 족과 전쟁으로 관계가 깨지자 오하이오 지역의 부족이 프랑스와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을 지키면 그 대가로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에서 인디언의 땅의 소유를 인정하겠다는
펜실베이니아 행정부의 협상조약.

그는 반 독 점 파티의 리더니 벤자민 프랭클린과 동맹을 맺고 두 사람은
자유의 필라델피아의 아들(leader of Philadelphia's Sons of Liberty)의 지도자가
되었다가 1765년 스탬프 법(Stamp Act)원리로 정치적으로 갈라졌다가
그는 독립선언서의 대리인으로 벤자민 해리슨(Benjamin Harrison V)의
다른 서명자의 여동생과 결혼했고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후 대륙회의의 서기가 된 찰스 톰슨은
전쟁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하다 서술을 포기하고
훗날 그는
“미래 세대에게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다.
내가 진실을 말하면 큰 죄를 짓게 된다.
온 세상이 우리의 애국자들과 영웅들을 찬양하게 하라” 말 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집단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좋은 이야기 감이 되어
우리의 애국심을 고취하게 한다." 했다.
그는 애국자라 불리면서 더욱이 성경을 번역을 하고도 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지만
확실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거짓을 은폐하고 애국심을 부추기는 선동과 기만을
했다는 사실이며 애국이라는 시대의 이념(理念)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한
반 신앙적인 행위였다.
그런 행위의 결과는 지난 역사에 수 없이 전쟁을 정당화 하였으며
영웅을 인위적으로 만들었으며
근대에 이루어진 ‘민주국가’라는 개념조차도
국가의 유지인 부의 경제논리와 위정자들의 통치적인 자기 욕망을
가톨릭과 개신교는 믿음이라는 수단으로 합리화 하였고
복음의 전파라는 명분(名分)으로 착취를 정당화한 식민지를 삼았으며
미지의 개척의 수단이 계몽이라는 미명으로 위정자들의 정권유지에 이바지하였고
실질적인 국가라는 현대의 개념은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에 절정을 이룬
식민지 착취를 바탕으로 근대에 이르기 까지 인류의 죄악의 역사에서 이루어졌고
식민지를 개척이라는 정복자의 논리는 전쟁의 필요 불가결한 자원과 무역의 필요를
가증한 신앙으로 정당화 하였던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그리고 미국은 인적 자원인 노예를 아프리카 원주민으로 충당하는 인신매매의
이면(裏面)에는 선민사상이라는 삐뚤어진 신앙이 변절된 시대의 사상과 문화가
혼합된 시대논리가 자리 잡고 있었으니
세계 1차 전쟁을 일으킨 독일이 다른 강대국의 식민지를 시기하였기에 전쟁을
일으킨 원인은 그 시대의 당연한 시대적 산물이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개인의 믿음이 자신의 확고한 신념(信念)이 되고
그런 자들이 많아질수록 다수가 옳은 양, 다수결이 옳은 양, 민주주의의 대의로
착각하면 그런 사회와 국가의 사상과 문화는 종교를 빌미로 정당성을 부여하면
종교가 신념(信念)이 된 환경과 조직의 형태를 이루면서
더 하여 신념으로 무장한 신앙은 이미 믿음도 아니고 자기도취이며
이를 관리나 통치의 수단이 되면 사탄의 하수인과 같은 짓임을
자신도 모르는 도취에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는 선민사상의 벽에 갇히면 성령님과 단절되어
자기 신념의 믿음이 정의가 된 인간의 역사와 교회사,
그리고 오늘날의 제도화한 체계적인 계급조직과 의무와 책임을 회피한 관료화된 모습은
복음을 가장한 신앙의 무늬만 남은 종교의 모습이라서
이미 복음의 근본을 떠난 복음의 어그러진 길로 향하였기에
개신교를 바라보는 반사회적인 인식과 현상을 자초하였고
이를 반기독교적인 당연한 세상적인 시류로 받아드리는 자들과
더 하여 온갖 음모론을 재생상하여 변명을 일삼는 자들이
복음을 막고 있는 현실은
시대를 분별하지 못한 결과라서 이미 복음은 그들만을 위한
그들만의 끼리 모임인 교계와 같은 직분 자들만의 모임은
진정한 신앙의 공동체를 이룰 수도 없고 모였다 헤어지고 흩어지는
이산 집단이라
이미 신앙 공동체의 모습도 아니다.

시대마다 정신적인 신앙인의 문화를 만들지 못하면
그 사상의 주류는
반동으로 새로운 문화가 생성되어 발전하고 어둠의 역사로 이어지고
그런 사회에서 이리 저리 수많은 부흥 운동과 프로그램을 따라서
감성을 자극하고 종교적인 신념을 주입한들
근본인 복음의 의를 잃고 세상의 이데올로기(ideology)에 갇혀서
하나님의 공의를 바라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어
세상을 움직이기커녕 이기는 힘을 잃고 영향력을 잃어
자기 위안도 못되는 종교가 될 뿐이다.

복음의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음을 받아드렸다는 사람들이 왜 그리 속 좁은가.
하나님의 자녀라면서 왜 그리도 편협한가.
간단한 진리를 다시보자.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음은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라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라서
공평하시고 공정하신 하나님 이시라서
세상을 사랑하시여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땅에 오셨음은
이스라엘만의 그리스도가 아니시며
믿는 자 만의 그리스도가 아니시며
모든 인류의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선민사상이나 이스라엘의 회복의 주장은
복음을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한 하는
복음의 능력을 시인하는 것 같으나 부정하기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 잘못한 성경 해석을 하는 선생을
선생으로 인정한
교회사의 오류와 요즘의 교회가 복음의 걸림돌이 된
이 간단한 진리를 외면한 무지의 결과이다.
우리 개인과 공동체의 허물과 잘못은
우선, 하나님께 잘못이고
그리고 상대에게 잘못이며
그래서 내 잘못이라는 시인(是認)이 믿음의 근본적인 신앙이라 생활이며
이를 인정하지 못하면 성령님의 능력을 소멸(消滅)시킨 자라
성경의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Quench not the Spirit. 데살로니가 전서 5:19]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가슴에 꺼져가는 빛처럼 소멸하지 말고, 억제하지 말고
성령님이 함께하시고 이끄시는 힘을
자신의 그 무엇으로도, 어떠한 변명이 라더라도 자신으로
성령님의 뜻이 자신의 가슴에 일어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억제하지 말고
소멸하지 말아 자신의 주장이 악이 되지 않게 어떠한 악의 모양도 버리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Prove all things ; hold fast that which is good.
Abstain from all appearance of evil. 데살로니가 전서 5:21-22]
모든 일에 자신을 바라보아
성령님의 인도하심인지 증명하고 확신하여 ‘Prove all things’
성령님의 뜻을 구하고 따르며 모든 일에 자기 자신의 확신과 신념이든
그 동기(動機)와 원인을 버려서 성령님의 능력을 소멸하지 않게
악의 어떠한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기에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들에게 오래 참으며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Now we exhort you, brethren, warn then that are unruly,
comfort the feebleminded, support the weak, be patient toward all men.
See that none render evil for evil unto any man; but ever follow that
which is good, both among yourselves, and to all men. 14-15]

게으른 자들을 복음으로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복음의 소식으로 격려하여
힘이 없는 자들을 도와주고 붙잡아 주며
악을 악으로 갚는 사탄의 앞잡이가 되지 말며
모두에게 오래 참으며 선을 행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그리스도인의 본을 보이는 삶의 생활이
오늘날 우리에게 본을 보인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이고
이를 실천한 데살로니가 교회가 이 시대 우리에게 본을 보인
신앙생활의 모습이었다.

2. 예수님과 성령 / 루이스 B. 스미디즈

예수님은 결코 성령 없이 존재한 적이 없으셨다. 또한 그분은 성령 없이 말씀하시거나 행하신 적도 없으셨다. 이것은 복음주의자들이 명백한 사실로 받아들이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와 마찬가지로 명백한 사실은 그분이 성령과 결코 동일시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령은 별개의 인격체이시다.

창조 사역을 통해서, 성령은 그리스도의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한 길을 예비하셨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마1:20). 성령은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그에게 권한을 부여하셨으며, 그와 함께 하셨다(막1:10). 성령은 그를 광야로 인도하셨으며, 그곳에서 그는 원수의 시험을 받으셨으며, 자신과 "권세들" 간의 문제가 협상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임을 명백히 밝히셨다(막1:12). 또한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통해서 그의 나라의 성격을 나타내신 것은 성령을 통해서였다(마12:28). 그리고 그가 지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부활의 직접적인 증인들로서 부활을 증거할 것을 명하신 것 또한 성령을 통해서였다(행1:2).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도래케 하시도록 그에게 자격과 권한을 부여 하시고 고무하신 분은 바로 성령이셨다.(행10:38)

그러나 성령은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신다. 활동의 주체는 구세주이시다. 그는 개인적으로 책임 있는 집행인으로서 활동하시는 구체적인 인간이시다. 성령이 없이 단순한 성육신하신 분으로서 예수님께서 어떤 일을 행하실 수 있었느냐는 것은 문제를 파악하지 못한 질문이다. 모세가 기도할 때 그의 손을 받쳐 주었던 사람들처럼, 성령은 대리인으로서가 아니라 조력자로서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계셨다. 예수께서 성령을 필요로 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진정한 인간성에 대한 놀라운 증거인 것이다.

때때로 예수께서는 자신과 성령 간의 차이점을 강조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분께서 자신을 거역하여 말하는 사람은 사함을 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은 결코 용서를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눅12:10; 막3:28).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의 능력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끊어진 자이다. 그는 "영원한 죄에" 처한 자이다(막3:29). 어쨌든 예수께서는 성령을 자신과는 구별된 분으로 말씀하고 계신다.

자신의 사역을 마치시는 시점에서, 특별히 요한에 의해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그 강조점이 바뀌고 있다. 예수께서는 한 가지 의미에 있어서만 이 세상을 떠나신다. 또다른 의미에 있어서 그분은 세상에 머물고 계신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몇 장에 등장하는 "떠나심"과 "머무심" 간의 놀라운 연결은 바울의 전망을 예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또  다른 처소를 마련하시기 위해 떠나신다. 그러나  그는 후에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요14:1-3). 따라서 한 편으로 그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다"고 말씀하고 계신 반면에(요16:16),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신다(요14:16). 예수께서 떠나시고 성령이 그 자리를 대신 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14:18). 그가 임하실 때, 세상은 그를 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사물의 외모만 보고 중심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때뿐 아니라 처음부터 임하실 것이다. 그의 강림과 성령의 강림은 서로 구별할 수가 없다.

예수께서 성령을 약속하셨을 때, 그는 반드시, 마태가 기록하고 있는 내용과 같은 내용을 말씀하고 계신 것임에 틀림 없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또한 그의 임재는 다음과 같은 낙관적인 견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예수께서는 이미 인류 역사의 조류가 결정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에서 발췌(61-64p)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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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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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http://cafe.daum.net/cuigen1964/DdBS/1452 
혼수상태에 빠진 랜든. 유튜브 캡처


끔찍한 사고로 죽었다 살아 돌아온 아이가 엄마에게 천국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합니다. 두 형을 만났다고 말하는 아이의 말에 엄마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17일 페이스북 보도매체 '격'은 지어낸 이야기보다 더 거짓말같은 실화를 소개했습니다.

줄리 켐프 유튜브 캡처


 1997년 7월 줄리 켐프는 남편, 아들 랜든(8)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남편은 현장에서 숨지고 아들은 중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아들은 두 번이나 생사의 갈림길에서 무사히 회복됐습니다. 

 너무 큰 사고로 차가 심하게 찌그러져 엄마 줄리만 겨우 구조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누군가 아이의 신발 한 켤레를 발견하며 잔해 속에서 아이 찾기에 집중했습니다. 겨우 랜든을 발견했지만 아이는 사망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고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찌그러진 차. 유튜브 캡처


 노스캐롤라이나의 캐롤리나 메디컬 센터 의료진은 줄리에게 랜든이 살 가망이 없다고 전했습니다. 병원에 머무는 동안 랜든의 심장은 두 번이나 뛰기를 멈췄고, 의사들은 두 번 모두 심폐 소생술을 통해 아이를 살려냈습니다. 가족들은 랜든을 인위적 혼수상태에 두기로 했습니다. 

 2주가 지나자 기적처럼 랜든이 깨어났습니다. 신기한 것은 랜든은 뇌손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랜든은 혼수상태에 빠진 동안 본 사후 세계에 대해 엄마에게 털어놓았습니다. 아빠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전할지 고민하던 줄리에게 랜든이 먼저 엄마에게 말을 꺼냈습니다. "저 천국에서 아빠를 만났어요."

랜든의아빠. 유튜브 캡처


 또 랜든은 약 한 달 전에 먼저 사망했던 아빠의 친구도 봤다고 했습니다.  "우린 서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곳에 모두가 그냥 그렇게 서 있었어요." 

 이어 랜든이 한 말에 줄리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그런데 엄마, 깜빡하고 말 안 한 게 있는데, 저 다른 2명의 형제를 보았어요." 

 외아들인 랜든의 이와 같은 말에 줄리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던 줄리는 랜든이 태어나기 전 겪었던 2번의 유산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랜든에게 이 사실을 알린 적이 없었고, 랜든도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른이 된 랜든. 유튜브 캡처


 독실한 기독교 가정인 줄리네 가족은 랜든의 사후 세계 경험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온 계시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돌아온 랜든 역시 자신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늘에서 돌려보내진 것이라 믿습니다. 이들이 다시 얻은 새로운 삶에 감사하며 오래도록 행복하길 기도합니다. 


국민일보=최영경 기자 ykchoi@kmib.co.kr

 

마태복음 9장

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28.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맹인들이 그에게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30.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31.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

32. 그들이 나갈 때에 귀신 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예수께 데려오니

33.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34. 바리새인들은 이르되 '그가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앞 단락에서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은 이제 두 맹인의 눈을 열어주십니다.(두 사람의 증거는 법적인 효력을 지닙니다. 변치 않고 흔들림 없는 증거를 말합니다)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는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그들의 눈들이 열린지라' 입니다.

닫힌 문을 열듯이 소경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닫힌 문과 열린 문, 문을 여닫는 것은 들어가고 나가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창이란 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또 보이는 광경을 받아들이는 열린 공간을 말합니다.

육신의 눈이 밝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떤 '당달봉사'가 있듯이 눈을 뜨고도 보지 못 하는 세계가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세계입니다.
일반적인 영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분의 일하심의 영역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양 알고
살아갑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에 관심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위 본문의 맹인은 보지 못할뿐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압니다.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다만 성한 사람처럼
활동할 수 없을뿐입니다.

현대에는 이들을 시각장애인이라 부릅니다. 필자는 장애인을 돌보는(케어) 일을 십년 가까이 해오고 있어서 시각장애인들도 꽤 접해봤습니다.

전임사역은 아니고 건강한 자로서 신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자 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만 늘 아쉽고 부족할 따름입니다.

따라오며 소리질러-

예수님이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소문이 귀에 들립니다.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자신들의 눈도 뜨게 할 수 있는 분이심을 믿었습니다.

앞이 안 보이기에 예수님 앞에 나설 수가 없습니다. 어디 쯤 계시는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따라가면서 소리를 질렀던 것이지요.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야를 일컫는 유대인들의 표현방식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격(Person)과 하시는 일(Work)에 대해서 바르게 알았기에 그렇게 부르며 간구한 것입니다.

요즘 온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어떤 여인의 헌금봉투에 쓴 기도제목을 보니까, 자신의 가정과 딸을 위해 복을 비는 게 전부더군요. 하나님은 욕심으로 구하는 기도나 헌물을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물의 주인으로서 지극히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식으로 드리는 헌물은 뇌물 내지는 복채 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도나 봉사, 헌금 이전에 하나님 자신을 바로 알기를 원하십니다.

강남의 모 대형교회에 다녔다고 하는데 어떤 설교를 들으면서 다녔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른 신자의 모습은 아닙니다. 우상을 섬기듯이 하나님을 섬긴 셈이지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끊임없이 바른 말씀(복음)이 선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속은 곪아서 터질 지경인데, 아까징끼(머큐롬) 발라주는 듣기 좋은 설교나 기복신앙을 부추기는 번영복음은 교회 안에서 추방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나 눈을 열어주시지 않습니다. 자신이 참으로 눈먼 죄인이란 사실을 알고 예수님께 나아와 불쌍히 여겨주십사고 간구하는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렇게 하려면 바른 복음(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노중에서 그들의 소리를 들으셨지만 아무 반응도 없이 집에 들어가십니다.

맹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을 믿는냐?"

"예, 주님!" - (원문 상)

능히 - 뒤나미스입니다.

능력이지요. 예님의 능력을 알기에
간단명료하게 답변합니다.

미사려구를 사용해서 길게 기도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나 다름없습니다. 긴 시간의 기도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니라 '주님의 주님되심'을 바르게 알아서 분명한 기도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29절,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전능하신 분이 말씀만 하셔도 나을텐데 굳이 눈을 만지신 것은 긍휼하심의 표현입니다.

어려운 이웃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그들의 삶을 터치하십시오. 돈 몇 푼 적선하듯이 하지말고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접촉하십시오.

내가 드린 구제와 선교헌금이 영혼을 살리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을 드려 눈물로 씨를 뿌릴 때, 죽은 자 살리시는 예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너희의 그 믿음대로 너희에게 되어라"

그 믿음- 한글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말씀(성경)으로 말미암는 그 믿음입니다. 믿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 시, 자기 고향 (나사렛)에서는 권능을 많이 베풀지 못하셨습니다. 이는 고향사람들이 평소에 알고 있던 '그 예수'로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육적인 눈으로는 결코 예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아주 귀하게 보십니다. 피조세계와 성경을 통해서 자신을 밝히 계시하시고 두 팔을 벌려 하나님의 품을 떠난 탕자들이 속히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요 믿음의 시작입니다.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 엄히 경고하셨습니다. 표적을 쫓는 신앙을 경계하신 말씀이기도 하지만 유대인들의 그릇된 메시야왕국관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 이상으로 바라보며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눈에 보이는 것들에 좌지우지, 우왕좌왕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경계의 말씀은, 이 시대에 자기를 선전하고 알리지 못해서 안달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31절은 문자적으로 '예수의 소문'이 아니라, "그를 온 땅에 퍼뜨리니라"입니다.

자신들이 알고 믿었던 그 분 자신과 그 분이 하신 일을 일컫는 '그를' 말합니다.

카더라 통신과 생방은 엄연히 다릅니다. '풍문으로 들었소'가 아니라 말씀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 '그 분'을 온 땅에 퍼뜨린 것이지요.

지식은 좋은 것이로되 지식에만 머물면 지적 교만과 함께 자칫 '비없는 구름'처럼 될 수도 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가르치는 선생들은요.

다음은 귀신들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신 사건입니다.

말을 못한다는 것은 듣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농아인들을 만나보면 중간에 수화통역자가 있더군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데 어찌 복음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듣지 못하면 말도 못하는 법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듣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귀신의 장난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 사람의 말인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지, 아니면 마귀에게 속해서 하는 말인지...

영분별이란 특별한 게 아닙니다. 언어(말과 글)를 통해서 알수가 있습니다. 말이란 속에 있는 것의 표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입에서 성경말씀으로 말미암는 말이 나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어지는 바리새인들의 말을 보십시오!

무리들은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적이 없다고 말하건만...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성령훼방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생명주시는 그 분을 거부하고서야 어찌 생명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죽어가는 자가 식음을 전폐하고서 죽기를 바란다면 하나님도 살리지 못합니다.

일부 은사주의자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성령훼방죄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생명주시는 주 예수님을 죽고살기로 거부하는 죄가 바로 성령훼방죄인 것이지요.

이 시대의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어떨까요?

멀쩡한 넘(?)을 자기 기준의 작대기로 내리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또한 바리새인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삼가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럼과 함께 교리나 지식의 잣대로 함부로 남을 심판하는 일을 자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맹인과 말 못하는 자!

이 시대에 보지 못하고 말 못하는 자가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영적 우맹, 신앙적 우맹, 인간사회의 우맹...

본다고 하는 소경이 많습니다.

우리 모두 눈뜨고 삽시다.

그러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글: 구자준 목사

                                          

 

                                            가는 길 잠간만 멈추고 주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자 .

                               숨차도록 바쁜 나의 발걸음이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내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도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지를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

 

 

 

출처: 사모님사모님/만사형통하리라

1972년에 미국 교육부가 만든 교육 수정안 Title IX에 남녀 성별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 2014년에 미국 교육부에서는 성별 차별에는 성전환자 같은 성적 정체성도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하고 성전환자 학생들에게 화장실, 라커룸, 샤워, 등 시설을 제한하는 학교는 연방 정부 자금을 안 주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자신이 여학생이라고 생각하는 남학생은 여학생 샤워실, 화장실, 라커룸등을 쓸 수 있게 하라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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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올해 5월 초에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교육부의 해석을 따라 모든 공립학교는 성전환자 화장실 정책을 강제로 받아 들이라고 했습니다. 법무부는 지시하기를 모든 공립 학교가 성전환자 화장실 정책을 따라야 하고 안 따르는 학군은 소송이 걸리고 연방 정부 자금을 잃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법령”의 반응으로 텍사스, 알라바마, 위스콘신, 서 버지니아, 테네시, 아리조나 교육부, 메인 주지사, 오클라호마, 루이지애나, 유타, 조지아 주가 오바마 정부를 고소했습니다.


8월 21일에 북부 지방 텍사스에 있는 연방 지방 법원의 연방 판사인 Judge Reed O'Connor이 오바마 정부의 Title IX 해석을 도전하는 텍사스와 여러 주(state)들의 예비 금지 명령을 부여하기로 했습니다. 이 판결은 텍사스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연방 정부가 성전환자 화장실 지침을 따르지 않는 학군을 처벌 못 하도록 막는 전국적인 금지입니다. 오바마 정부는 성적 정체성도 Title IX에 포함해야 한다고 해석 하지만 O’Conner 판사는 말하기를 Title IX의 문장이 전혀 애매하지 않고 Title IX은 교육 기관이 성별에 따라 별도 화장실, 라커룸, 샤워를 제공하게 되어있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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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dge Reed O'Connor)


 

이번 소송을 주도한 텍사스 검찰 총장 Ken Paxton은 말하기를 연방 법원이 오바마 정부의 지나친 불법적인 통제를 막았다고 이 판결을 칭찬하였습니다. 미국은 법을 만드는 권리는 국회에만 있지 대통령은 왕이 아니므로 오바마 대통령이 이런 법령을 내리는 것은 미국 헌법에 어긋나고 민주제 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Paul Castillo 변호사가 말하기를 이 판결은 Title IX에 대한 다른 소송들에는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연방 정부 기관들이 Title IX 성전환자 정책을 따르지 않는 공립학교의 연방 교육 자금을 취소할 위협을 방지해줍니다.

번역 : tvnext / 기사원문 http://goo.gl/pIWkse

 

1. 그리스도의 창조적인 대리인으로서의 성령 / 루이스 B. 스미디즈

 

 

주와 성령에 관한 요한 칼빈의 사고 방식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예수님의 특별한 주체성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유익한 예를 제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그의 전제가, 승천하신 주 예수님이 바로 영화롭게 되셨으나 지역적으로 한정되었으며 제한되었던 한 인간이신 나사렛 예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을 통해서 지금 여기 그리고 신자 안에 존재하시는 분은 바로 인간이신 그리스도이신 것이다.(참고. 워필드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불렀다. 브루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교리가 "칼빈주의적 사고 전체의 핵심"이라고 말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상을 떠나셔서 다른 곳으로 가셨다. 그분은 우리의 실재를 그가 계신 "하나님의 우편"으로부터 분리하는 간격에 의하여 우리로부터 분리되어 있으시다. 예수님은 여기가 아니라 거기 계신다. 그분은 덧없는 영(an ephemeral spirit)으로 변화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분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과 우리를 위하여 성취하신 것들"은, 만일 그분의 행하신 바가 우리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면, 반드시 우리 것이 되어야 한다. 그분이 삶의 현장(out there)으로부터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분의 행위들의 혜택들은 이제 그분의 인격과는 불가분리에 있다. 그것들은 그분 자신인 것이다.

 

성령은 그분과 우리들 간의 살아있는 끈이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직분(what is Christ)을 취하시며 그것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성령은 언제나 인격적인 용어들을 통해 묘사된다. 그분은 생명이라고 부르는 어떤 물질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통하여 우리에게 부어지는 도관(a pipeline)이 아니다. 그분은 언제나 살아있는, 역동적인 생명의 창조주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적인 지각을 일깨워 주시고, 그리스도의 실재를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며, 우리의 믿음을 양육하시고, 우리를 훈련시키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 접붙여 주신다.

 

칼빈이 성령에 대해서 생각하는 역동적이고 기능적인 방식은 삼위일체에 대한 그의 논의에 명백히 드러나 있다. 성령은 모든 신적 행동의 능력이자 효력이시다: "행동의 시작과 만물의 샘과 근원은 하나님께 속한다. 지혜, 계획(counsel), 그리고 만물의 질서 있는 배열은 아들께 속한다. 그러나 그 행동의 능력과 효력은 성령께 속한다. 하나님의 모든 사역은 그것들을 지상에서 효력있게 만드는 분이 성령이라는 점에서 성령의 사역이다. 성령은 활동하시며 생명을 유지시키시고, 피조물을 발전시키시며, 인간 역사를 전적인 혼돈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종종 칼빈이 성령을 중보자의 능력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리우는 이유에 관해 기록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아버지로서의 성령이라는 이름과 연합되었기 때문만 아니라 중보자로서의 자신의 성격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이라 불리우신다. 왜냐하면 만일 그분에게 이러한 능력이 제공되지 않았었다면, 그분의 강림은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에게 유익을 끼치게 되는 것이라면 그분은 "이 능력"을 소유하고 계심이 틀림없다. 여기서 언급된 능력이 바로 성령이다.

 

그러나 칼빈이 성령을 증발하신 그리스도라고 생각하지를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분을 모호하게 그리스도의 신성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적인 임재에 있어서 우리로부터 분리되신 반면에, 그의 영의 능력으로 만물을 채우신다.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하나님의 오른손이 나타나는 곳은 어디든지간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무한한 능력을 통해서 영적으로 존재하신다.(참고. 신성과 그리스도의 영 사이의 동일한 중첩이 하이델베르그 요리 무답에서 발견된다. 질문 47번은 그리스도께서 승천 이후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인지의 여부를 묻는 질문인데,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가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이 세상에 계시지 ?지만, 그의 신성, 엄위와 은혜와 영으로는 결코 우리에게서 떠나계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영을 통해서 존재하신다. 그러나 성령은 이제 하나님의 오른손과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고 있다. "그분의 몸이 하늘 위로 올리워졌듯이 그분의 힘과 능력은 분해되었으며 하늘과 땅의 모든 영역을 넘어 퍼졌다.(Institutes II. x vi.14)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힘"과 "능력"을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으 성령이 아버지의 "덕과 효력"(virtue and efficacy) 이셨던 것처럼, 그가 실제적으로 효력있게 역사하고 계시는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을 표현하는  칼빈의 표현 방식인가?

 

칼빈은 성령을 그리스도의 담지자(the bearer of Christ)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과 그리스도의 동일시에 직면케 될 때 그는 갑자기 멈추고 있다. 바울이 주와 성령을 극적으로 동일시하고 있는 구절(고후3:17)을 주석하는 가운데, 칼빈은 바울이 "단순히 그분의(즉 성령의) 직분을 지적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성령은 존재에 있어서가 아니라 기능에 있어서 부활하신 중보자와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인성 가운데 제한되고 국한되어 있는 중보자이시다. 그러나 그분은 여기 지상에서 우리와 연합되어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여기 계시며, 그는 성령 안에서 여기 계신다. 성령은 인격적으로 그리스도와 구별되지만 기능에 있어서 전적으로 그분께 종속된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인이다. 필자는 우리가 칼빈의 일반적인 방향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더 깊은 의미를 얻을 수 있는지의 여부를 알기 위해 바울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 자료들을 좀더 고찰해야 할 것이다.

 

 

출처: 루이스 B. 스미디즈의 '바울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사상'에서 발췌(57-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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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무술림에 의해 무너지는 유럽사회

우리는 친구든지 원수든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 /존 칼빈

1.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 피곤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성내지 아니하는"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들이 행한 대로라면 선대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린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선을 베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사람의 실존적이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다만 우리 모두가 경외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로 생각하라고 가르침으로써 탁월한 논의로서 우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권속들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의 형상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고 회복된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당신의 친절한 봉사를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이 당신 앞에 나타나면, 당신은 도움을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령 그가 낯선 사람이라고 합시다, 주님은 그에게 자신의 인을 쳐서 당신과 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 자신의 혈육을 멸시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가령 그가 아주 멸시받는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황송스럽게도 주님은 그를 자신의 형상으로 단장할 만큼 귀하게 여기십니다.
가령 당신이 섬길 의무를 전혀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자신의 대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크고 많은 축복을 받은 당신은 베풀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가 당신으로부터 최소한의 선행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당신이 자아를 죽이고 당신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주도록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가 아무런 친절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오히려 그는 당신에게 상처와 모욕을 줌으로써 당신을 분노케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그를 사랑으로 감싸지 않고 모든 친절을 베풀지도 않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그는 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오직 모든 사람의 모든 무례함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라고 명령하십니다.

3.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해 받은 것을 친절로서 갚고, 저주를 축복으로 돌려주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사악함만을 생각해서는 안되고,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임을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인간의 잘못을 덮고 지워버리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끌어안게 될 것입니다.

(마 5: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17: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 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출처: 개혁주의 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왕이 다시 오신다!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마태복음 25:6 )


가장 어두운 때에(암흑의 시대)

오랫동안 기다려온 소망이 현실이 됩니다.


"다 이루어졌다"는

위엄에 찬 주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우뢰 소리와 같은

주님의 목소리가 천국을 흔들며

엄청난 지진이 일어납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그들앞의 무지개 광채에 둘러싸여

일어나며 초췌했던 그들의 얼굴이 빛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구속자와 천군 천사가

그들을 본향으로 데려가기 위해서

온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요한계시록 1:7)


이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이 놀라운 일의

증인이 될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포에 질릴 것입니다.


악인들은 거룩한 왕으로부터

처절하게 자신들을 숨기기 위해서

바위와 동굴로 도망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듯이

악인들은 영광의 구름을 타고

오시는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데살로 4:16)


큰 나팔 소리가 하늘에서 울리고

위엄 있는 구주의 목소리가 잠자고 있는

모든 세대의 성도들을 부릅니다.


"깨어나라 깨어나라 깨어나라.

무덤속에 잠자는 자들이여 일어나라."


이 땅의 많은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나고

아름답고 영화로운 쇠하지 않는 몸을 입게 됩니다.


순식간에 그들의 몸이 새롭고 아름답고

쇠하지 않는 몸으로 변하며 공포에 질린 악인들은

그러한 경이로운 장면을 고통중에 보게 됩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데살로니가전서 4:17)


구속받은 자들이 올라가서

천군 천사와 함께 계신 그들의 구주를 만나게 됩니다.


슬픔, 죄, 고통은

더 이상 그들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주님과 분리시키고 있는

베일은 영원히 사라집니다.


그들은 주님과 천사들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봅니다.


"그 날에 여호와에게 죽임을 당한 자가

땅 이 끝에서 땅 저 끝에 미칠 것이나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가 없고

매장하여 주는 자도 없으리니

그들은 지면에서 분토가 되리로다."

(예레미야 25:33)


남겨진 자들에게는

혼돈이 이 땅을 덮칩니다.


허리케인과 지진이 일어나고

대양이 끓고 섬들이 사라집니다.


거대한 우박이 떨어집니다.

이 재난으로 부터 겨우 살아남은 악인들은

곧 주님의 임재의 밝은 빛으로 인해 멸망당합니다.

그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게 됩니다.


창세 이후 처음으로

이 땅에 인류의 생명이 없어지게 됩니다.


오직 사탄과 그를 따르는 타락한 천사들만이 남아

(하나님)배반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번역: Paul Yu


출처: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DI5L/1493

이 간증은 고난의 북한 땅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고통을 받고 있었던 한 영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변화시키셨는지? 그리고 그 영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까지 짧은 믿음의 시간들이었지만 어떻게 살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1. 북한을 탈출하게 된 배경


자매님은 어릴 때 양 부모님을 잃고 할머니 집에서 살다가 함경북도 청진시 포항구역에서 살고 있었던 양부모님들에 의해 양녀로 입양되었다.


양아버지는 부지런하셨지만 술을 좋아하셨다. 술을 좋아하시는 관계로 어머니가 많이 힘들어하셨다. 어머니는 자매님을 친딸처럼 너무 사랑해주셨다. 어릴 때부터 머리도 잘 매주시고, 장난감도 사주시고, 좋아하는 음식도 해주시고 참 사랑을 많이 해주셨다.


그러다가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고, 집안이 경제적으로 많이 어려워지면서 결국 자매님은 양부모님 집에서 나오게 되었다.


자매님은 14세에 꽃 제비가 되어 북한의 곳곳에 못가본데가 없이 많이 다녀보았다. 여름은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추운 겨울 기차역에서도 자고, 남의 집 처마 굴뚝 옆에서도 자고, 공장 보일러 옆에서도 자고 많은 고생을 하였다. 남을 것을 훔치다가 매도 맞고, 쫓겨 다니기도 하였다.


 

2. 중국에서의 생


그렇게 1년 가까이 꽃 제비로 살다가 북한 시장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중국행을 택하게 되었다. 그 아주머니는 중국에 가면 밥도 마음대로 먹고, 따뜻한 집에서도 살 수 있으며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고 꼬셨다. 자매는 결국 그 아주머니의 말을 믿고 함경북도 무산을 거쳐 중국으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에 넘어와 며칠이 되지 않아 한 중국 사람이 자매를 데리러 왔다. 그 중국 사람을 따라 기차를 타고 버스를 타고 2일간 달려 어느 산골에 도착을 하였는데 그곳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큰 상처를 받았다.


15살 난 자매보다 17살이나 더 많은 32살의 중국 남성이 그에게 달려들어 자매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관계를 하였다. 바깥에서는 그 남자의 누나와 부모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때 자매는 자기가 돈에 팔려 시집을 오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매는 성에 대하여 아무 상식도 모르는 어린 15세 나이에 짓밟힌 것이다.


그 말을 내게 해주는 자매의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고 자신을 강제로 짓밟은 남편을 죽이고 싶어하는 그 자매의 마음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마음이었다. 그 자매는 원치 않는 임신하게 되었고 1년 후 딸을 낳았다.


중국에서 원치 않게 팔려가 14년간 살다가 28살 나던 해에 팔려갔던 집에서 딸과 남편을 뒤로 하고 탈출을 하게 되었다. 탈출 이유는 결핵에 걸렸는데 남편과 시댁이 경제적인 능력이 없어 치료가 안 되어서였다. 그는 탈출과정에서 중국 곤명이라는 곳에서 우리 선교사님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전도를 받았다.

 


3. 회심과정


자매는 중국 곤명에서 만난 선교사님의 태도가 따뜻하게 보여 그동안 자신이 살아왔던 이야기를 긴 시간동안 하였다. 자매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선교사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선교사님은 얼마나 힘들었냐?” “내가 어른으로서 너에게 사과한다. 미안하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자매는 북한을 떠나 처음으로 사람대접을 받는 기분을 느꼈다.


선교사님이 자매에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복음을 전했고 자매님은 복음을 들으면서 겉으로는 믿어볼게요.”라고 하였지만 마음에는 무슨 하나님이 있어? 하나님이 있다면 내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 놓을 수 있어?”라는 거부감정이 있어 하나님 믿는 것을 거부하였다.


몸에 기력이 부족하였던 자매는 중국-라오스 국경과 라오스-태국 국경을 넘으며 곤명에서 만난 선교사님이 양육한 탈북 자매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태국 이민국 수용소 안에서도 예수님을 믿는 탈북 자매들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한 사랑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매는 생각하기를 저들이 믿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겠는가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은 그 이민국 수용소 안에서 찬양을 배우고 성경을 읽고,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함께 예배드리는 탈북 자매들이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을 자매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느꼈다.


한국에 입국할 수 있는 수속 중에 건강검진을 받게 되었는데 엑스레이를 해본 결과 폐의 3분의 2이상 결핵균에 의해 없어지고, 한국에 입국할 수 없는 건강상태가 나왔다. 너무 힘들어 입원한 태국 병원 5층 입원실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고 시도도 해보았다. 자살하려고 할 때 중국에 있는 딸이 생각나 자살하지 못했다.


자신도 어릴 적 부모를 잃었는데 그 딸이 엄마가 없이 혼자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자살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때 자매는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하나님!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저를 살려주세요. 저를 고쳐주세요.”


며칠 후 병원에서 검사를 받는데 태국 의사들이 고개를 기우뚱 기우뚱 하였는데 나중에 통역을 하는 대사관 사람을 통해 들어보니 그럴 리가 없는데? 한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건강 기준치가 나와 그들이 고개를 기우뚱 하였다는 것이다.


자매는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국정원에서 지정한 병원으로 건강검진을 갔는데 함께 간 담당 국정원 선생들이 검사결과를 놓고 또 놀랐다고 한다. 왜냐면 비행기를 탈 수 없는 건강인데 태국 병원에서 오진을 해서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자매님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되었다.


2014년 가을 하나원을 퇴소하여 지난해 여름 병원에서 폐결핵이 완치되었다는 확정을 받게 되었다.


하나원 퇴소후 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예수제자원에 들어와 생활하며 성경의 맥 잡기를 공부하고, 기독교 영화와 다양한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영상들을 통하여 성경의 역사와 기독교가 미친 세계역사들에 대하여 알며 기독교에 대하여 더욱 깊이 알게 되었다.


교회에서는 새가족 양육을 받고 성경을 계속 읽어가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하여 알아가게 되었다. 또한 순회선교단 복음학교에 다녀오면서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대하여 부활신앙과 예수님의 재림과 그 나라에 대한 사모하는 신앙을 갖게 되었다.


 

4. 성화의 과정


교회와 예제원에서의 성경공부들이 자매님에게 많은 영향을 주어 자매님은 자신밖에 모르던 삶에서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고 배려해주고 섬기는 예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세례문답교육을 받으며 내가 원하지 않았던 결혼이고 내가 원하지 않았던 임신과 해산을 통한 딸을 낳게 된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신앙으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남편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하였다. 그리고 중국으로 건너가 남편에게 용서를 선포하고 수속을 거쳐 자신의 딸을 한국으로 데리고 왔다. 남편은 자신이 한국에 오면 적응하지 못한다고 한국에 오는 것을 거부하였다.


 

5. 회심 후 신앙이 삶에 미친 영향


자매님이 회심한 후 하나님은 그를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많은 사람들에게 간증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였고, 교회에서는 봉사자 예배인 1부 예배를 드리고 중국어예배부에서 간사로 열심히 봉사하였다.


북한선교의 비전을 갖고 서울신학교에 들어가 두 학기동안 열심히 신학공부를 하였다. 학교에서도 훌륭한 자매라고 교수님들이 평가를 해주었다. CGN TV에도 출연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주었다.


한 달 전 자매님은 몸살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여러 병원으로 전전하던 결과 자매님의 결핵이 좀 더 심하게 재발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치료를 진행하던 중 지난 1028일 금요일 국립중앙의료원에서 하나님 나라로 부르심 받게 되었다.



자매님의 장례식 기간 수 백 명의 조문객들이 다녀갔고, 그것을 통해 비록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그리스도인으로서 산 삶은 너무 짧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자매님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자매님의 변화된 삶이 얼마나 영향력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자매님이 한국에 남겨놓은 15세가 되는 딸이 있다. 우리 선교공동체와 우리 교회가 엄마인 자매님의 소원대로 그 딸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키우기로 하였다.



출처: http://cafe.daum.net/waitingforjesus/BOKT/21071

25.복음의 길, 그 어그러진 길

 

데살로니가 교회

세일럼(Salem)은
그곳에 로저 윌리암스(Roger Williams 1603-1683)이라는 목사가 있었다.
미국 침례교의 창시자는 누구라 할 수 없지만 창시자와 같은 사람으로
그를 알게 되면 종교의 자유를 위하여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인 인 개신교의 뿌리를
알 수 있고 그 사회배경의 역사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였던 막연한 청교도에 대한 동경의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윗세대로 청교도의 미국을 무조건적으로 숭미하고 한국의,
한국적인 신앙을 믿음의 근거인 성경을 통하고 전해 받은 복음을 여과(濾過)하여
호도(糊塗)된 복음의 불순물을 걸러내고 성경의 본질로 돌아가고자 하는
한국적인 신앙적인
순수를 지키려는 신앙인은 소수였고 신앙의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율법주의와 세대주의에 함몰된 교계의 지도자들과 그 이후 메가 처치에 열광하면서
그 원동력을 헌금의 강요와 기복신앙의 복(축복)
그리고 치우친 은사주의의 신기루 같은 현상으로 동력을 삼은 자들과
음모론으로 세상의 현상을 재단하고 신념으로 삼은 자들이 자칭 현대판 선지자가 되어
믿음의 분별을 더 가리고 결국은 수치를 잃어 무너져갔던,
무너지고 있는 한국교회의 실상과 이민교회들을 바라보면서
작은 눈으로 보고 느낀 사실을 조금씩 쓰려 한다.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고 순수한 믿음과 신앙의 열정을 겸비한
젊은이로 영국 성공회 사제이었으며 종교의 자유,
정확히 개신교의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였고
교회와 국가의 분리, 정교분리의 사상은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 기초가 되었으며 자신의 신앙의 자유의 신념 때문에
청교도 공동체에서 추방 되었고 아메리카 토착민인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가족과 프로비던스(Providence)로 이주 할 수 있었고
인디언들의 인권을 대변하여 성공회와 결탁한 영국 정부와 이들의 허가를 받아 개척한
식민지 정부와 그들의 지도자들에게 항의 하였던, 하나님 안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공평하다는 신앙을 가졌던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라는
작은 미국 주와 프로비던스가 생겼으며
그의 이름을 딴 로저 윌리암스 공원(Roger Williams Park)은 유명하며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등이 있다.
그는 1631년 보스톤 교회의 목사로 초빙되었으나 보스톤 교회가 타락한 영국 국교회와
관계를 이유로 목사 취임을 거부하고 영국 국교와 분리된 분리주의자들(Separatists)이
세운 프리머스 식민지 교회의 시무를 선택했고
2년 후 1633년 세일럼 교회의 초빙을 받고 세일럼교회의 목사가 된
윌리암스는 매사추세츠 식민지 지도자들을 향해
가톨릭의 잔재가 만연한 영국 국교회와 완전히 절연 하고 국가와 교회의 엄격한 분리를
요구하며 비판했고 그 후 1635년 보스톤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윌리암스의 과격한 주장을
문제 삼아 세일럼 교회에서 추방을 요구하였고 마침 보스톤 식민지와 인근 마블헤드 지역
소유권 분쟁을 하고 있었던 세일럼 주민들은 분쟁 수습의 조건으로
윌리암스 추방 요구를 수용하였고
보스톤 청교도 지도자들이 그를 체포하여 런던으로 압송할 것을 알게 된 윌리암스는
세일럼에서 도망쳐 인근 인디언 부족에 의탁해 지내다
1636년 그와 같은 신앙의 정착민들과 남쪽으로 내려가
그곳을 프로비던스 로 식민지의 이름을 지었으며
그 뜻은 그들을 그곳에 부른 하나님의 계획이라 ‘하나님의 섭리의 땅’ 이라는 뜻이며
로드 아릴랜드 주가 만들어 지는 역사가 시작되었고
그들 공동체의 사상은 공평과 평등이었다.
그 후 정교분리를 주장하며 영국의 식민지화 된 청교도의 정치적인 지배를 반대하였고
인디언의 땅을 강제로 빼앗는 강탈을 비난하고 인디언의 땅을 구입하여 정착할 것을
권유하였으며 그 후 영국의 식민지에 대한 권리로의 간섭을 반대하였고
청교도의 정교일치를 반대하였던 앤 허치슨(Anne Hutchinson)과 그의 추종자들이
프로비던스로 찾아 왔다.

1638년 매사추세츠에 해안에 식민지가 개척된 후 10년 만에
종교적인 박해와 탄압을 피하여 자신들의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하여
존 클라크(John Clark)목사와 함께 개척이 이루어지지 않은 로드 아일랜드에식민지를
개척하기로 하고 1651년쯤에 클라크 목사와 같이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정부의 합법적인 승인을 받고자 했으나 올리버 크롬웰(Oliver Cromwell)정권에 의해
기각되었고 다시 탄원을 계속하다 크롬웰이 실각하고 찰스2세가 왕위에 오르자
다시 탄원을 하여 1663년에 합법적인 인가를 받아
합법적인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앙의 양심의 자유를 허락하는 ‘종교의 자유’가 식민지 헌법으로선언되었고
이 헌법은 미국의 다른 주에 주목을 받게 되어 버지니아에서 제한적이나마
침례교 목사의 설교가 허락되었고 버지니아가 로드 아일랜드에 이어
두 번째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었다.
침례교를 로드 아일랜드에서 국교로 삼을 수 있었지만
믿음을 정절을 지키기 위하여 또 교회사에서 정교일치의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 된다
보았기 때문이다.
초기 미합중국의회에서 국교를 가질 것인가 아니면 종교의 자유를 선언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열띤 논쟁이 있었고 몇 개의 법안이 제출되었고
당연히  영국성공회와 회중교회가 추천되었고
유명한 웅변가 패트릭 헨리가 타협안을 제출하여 영국성공회와 회중교회, 장로교회와
침례교회의 4개의 교파를 국교로 허용하자는 안에 모두 동의 하였으니
침례교인들은 이 안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정교일치가 교회사를 통해 타락상을 보였고 특히 성경의 뜻에 위배된다 하여 반대하여
투표를 하기로 하였고
3번의 투표에 통과하여야만 법이 가결되기에 1차 투표에 만장일치로 통과 되었고
2차 투표도 패트릭 헨리의 능란한 웅변에 설득되어 가결되었고
3차 투표에 앞서 패트릭 헨리가 버지니아 총독에 임명되어 의회를 떠남으로
3차 투표에 부결되었고 국교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개신교가 정치와 결탁하는 정교일치를 피하여
가톨릭과 영국의 성공회 같은 부패를 면할 수 있게 되어 진정한 청교도 정신이
건국의 이념이 되는 초석이 되어 독립국가의 헌법이 되는 길을열어놓은
윌리암스의 신앙의 힘이 컸다.

마찬 가지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사랑의 힘
그 힘이 믿음이었으며 그 믿음은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자녀를 삼으신 사랑,
그 사랑과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기 까지 한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님의 사랑 ‘charity’
그리고 이를 증명하시는 성령님의 사랑
그 사랑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에 적용하여 환경과 조건과 현상을 초월하여 바라보는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는 현재(現在), 이 시간, 이 순간이
영원한 소망의 나라에 연결된 현실이라
공평하시고 공정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랑이라서
그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갖는 사랑이라서
사랑의 충만이 성령 충만 이라서
그 사랑은 예수님을 닮은 ‘charity’ 의 사랑이라서
그 사랑은 우리를 인도하시며 평안을 주시는 성령님의 사랑이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그 만큼 낮아지고 그 만큼 형제자매를 사랑하기에
그 만큼이 믿음의 분량이라서
현실의 불공평과 불만과 피해의식, 그 무엇이 눈가림이라도
빛의 자녀로 빛이 되어 굴절(屈折)하지 않는 빛이 되어 세상을 비추고
공평과 평등 공정과 정의의 빛이 되어
바라보고 이루려는 하나님의 의
공의의 복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갖는 힘
성령님으로부터 받은 힘, 그 힘이 사랑 이였기에
바울의 이름을 딴, 실라와 디모데의 이름을 딴 교회의 이름이 아니라
데살로니가에 있는 신앙의 공동체의 이름
데살로니가 교회라 불렀기에
교파도 없고 교권도 없는 모두가 형제자매인 믿음의 공동체,
단지 데살로니가 지역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를
데살로니가 교회라 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Even the righteousness of God which is by faith of Jesus Christ unto all
and upon all them that believe: for there is no difference:
로마서 3:22]

     ‘슈퍼주니어’ 멤버들의 고백… “예수님이 가장 큰 영웅”

           강혜진 기자 입력 : 2016.12.02 18:08
  


시원 “선교사 되고파” 규현 “노래로 영광을” 예성 “교회 열심히 다녀”

슈퍼주니어.
▲2015년 8월 2일 미국 버지니아에서 진행된 슈퍼주니어 콘서트. ⓒ위키피디아
K-pop 스타 슈퍼주니어 멤버들의 신앙이 외신의 주목을 끌고 있다.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갓리포트(God Report)를 인용해 “슈퍼주니어(이하 슈주) 13명 멤버 중 9명이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의 콘서트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신앙을 자주 엿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또 “한국의 기독교는 선교사들과 교회 전도를 통해 빠르게 성장했고, 가수를 비롯해 많은 연예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한국에서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도 덧붙였다.

슈주의 멤버 중 한 명인 시원은 최근 CNN과의 인터뷰에서 “나중에 선교사가 되고 싶다. 음악인으로서 많은 사랑을 받은 나라들에 가서 받은 모든 사랑을 개인적으로 돌려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모태신앙인으로 알려진 그는 “예수님이 가장 큰 영웅이며, 성경은 해외 여행 다닐 때 필수품이다. 예루살렘은 가장 좋아하는 장소”라고도 했다.

그의 트위터에는 성구를 비롯해 신앙적인 글과 기도제목들이 올라와 있다.

지난 2007년 규현을 비롯한 3명의 멤버들은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타고 있던 밴 승용차의 타이어가 펑크가 나면서 갓길로 전도된 것이다.

규현은 차에서 튕겨져 나와 거리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됐으며 중환자실로 이동됐다.

중상을 입은 그는 생존 확률이 약 20%에 불과했으나 3개월 만에 회복되어 팀에 다시 합류했다. 그러면서 2번째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리고 찬양했다고 한다.

그는 “노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전하고 싶다. 마음에 항상 이를 붙들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끝없는 사랑을 계속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규현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친누나와 함께 성북교회에서 ‘야베스의 기도’라는 곡을 부르기도 했으며, ‘여의도문화예술선교단’에도 참여했다.

또 다른 멤버 예성은 2009년 유리상자의 이세준과 시인과 촌장 함춘호와 함께 CCM그룹 ‘줄라이’를 결성해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모태신앙인으로 어릴 때 서울에 살다가 부천, 그 다음 천안으로 이사 갔는데 가는 곳에서마다 열심히 교회를 나갔다. 수련회에도 꼬박 참석했고 시험기간에는 형들과 함께 공부하고, 봉사활동도 열심히 다녔다”고 전했다.

그는 이세준의 CCM 프로젝트 음반 참여 제안에 망설임 없이 응했다고 한다.

그리고 수익금 전액을 전 세계 빈곤한 아동을 돕는 국제기구 ‘세이브더칠드런’의 결식아동 돕기 운동에 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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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유산] 

         황교안 국무총리 부인 

                복음성가 펴내


황교안 총리의 사모되는 분은 '아름다운 유산'이란 복음성가 앨범을 발표한  최지영 씨.

 

1999년 3월7일자 어느 신문..

어머니와 사별하고 유품을 정리하던 중 침대밑에서 나온 어머니 일기장 속에서  [너는 살아생전 하나님을 만나라]는 유언의 글을 발견하고 교회에 출석하게 된 한 자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위대한 유산"이 음반으로 나왔다.


사랑하는 자녀에게 남겨줄 가장 값있는 유산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한 믿음의 유산임을 강조하고 있는 이 앨범은, 슬픔과 고통 속에 잠겨있는 성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주제들이 눈에 띈다.

 

노래를 부른 최지영씨는 원래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어강사로 활동하다가 주부복음성가 경연 대회에서 작곡상을 수상하면서 복음성가 가수로 데뷔했다. 


부드러우면서 내면의 강함이 조화를 이루는 음성은 그만의 강점으로 여겨진다.

 

타이틀 곡 "위대한 유산"을 비롯 "사랑", "아무 것도 염려치 말고", "너 근심 걱정 말아라","사랑합니다" 등 11곡이 수록되어 있다.

  

황교안 총리의 부인 최지영 여사는 각 교회의 부흥회를 비롯한 각종 행사에 초청되어 찬양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 교계에선 아름다운 목소리를 소유한 복음성가 가수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최지영 여사의 봉사 활동에 대해서 그녀가 가족사를 밝히지 않아 그를 아는 사람들도 남편이 황교안 총리 후보 시절에도, 몰랐을 정도로 조용한 성격에 오직 믿음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용모와 함께 마음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다. 

 

한편 성일침례교회에 다니고 있는 최지영 여사는 자녀들에게 남겨주어야 할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발표한 앨범을 내놓아 자식에 대한 사랑을 으뜸으로 여기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지녔다. 

 

황교안 총리는, 5시간 자고 새벽 2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성경공부...

 

사법 시험에 합격하고 검사 임용 후에도 줄곧 전도사로서 삶을 살았던 황 후보자의 모습을 부인인 최지영씨의 관점에서 쓰여진 글이다. 


위 글에 보면,

"황교안 총리는 새벽 2시에 일어나 기도 하고 성경공부를 한다"

 

약혼하기 전부터의 사역을 아내는 몰랐었는데, "남편이 나가는 교회에 가보니 전도사로 섬기고 있었고 교인들은 남편에게 전도사 님이라고 했다"고 한다.

 

여기에 "아내는 토를 달아 묻지 않았다. 뭔가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을 거라는 생각만 했을 뿐, 낮에는 사법연수원 연수생으로, 밤에는 신학생으로 낮과 밤을 충실히 살았을 남편을 생각한다면 아내는 존경하고만 싶은 마음, 단 하나 그것뿐이었다"고 씌어 있었다.

 

또한 황 총리의 아내인 최지영 사모에 대해서도  "아내는 사모다. 물론 그럴 준비를 나름대로 하고 있다. 남편은 50세 전후로 목양지를 닦을 것이다"라며  "목회일에 전념할 것을 위해 예비목자로 훈련 받고 있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을 진심으로 따를 것이고 남편은 아내와 함께 좋은 목회를 꿈꾸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간이 지나 2016년...

그 황교안이란 사람은 대한민국의 총리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황교안 총리의 사역의 방향을 바꾸시고, 어쩌면 통일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리더로 세우실지도 모를 일이다. 

 

깨어 분별하는 많은 분들의 기도가 필요하다.

 


인간, 얼마나 위대한 걸작인가


이성(理性)은 고귀하고,

능력(能力)은 무한하고,

행동(行動)은 천사같고,

이해(利害)는 신(神)과 같다.


그러한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다.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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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가네.../ 최송연 깊어가는 가을 따라 노오란 낙엽이 쌓이듯 서러운 세월도 수북이 쌓여만 가네 가을이야 가고 또 가고 푸르른 솔잎마저 누렇게 퇴색되어 땅에 떨어진다고 하여도 주님 사모하는 내 마음만은 영원히 파아란 하늘 그대로이면 좋겠네... 그분의 따사로운 숨결은 그렇게 늘 내 곁에 머무르고 있음을 언제나 느낄 수 있다면 좋겠네... 生의 아픔과 고통일랑 떨어지는 저 낙엽과 함께 모두 다 떨어져 버렸으면 좋겠네, 정말 좋겠네... ...

 

 

 

가을은 가네.../ 최송연

깊어가는 가을 따라
노오란 낙엽이 쌓이듯
서러운 세월도
수북이 쌓여만 가네

가을이야 가고 또 가고
푸르른 솔잎마저
누렇게 퇴색되어
땅에 떨어진다고 하여도
주님 사모하는 내 마음만은
영원히 파아란 하늘 그대로이면 좋겠네...

그분의 따사로운 숨결은
그렇게 늘
내 곁에 머무르고 있음을
언제나 느낄 수 있다면 좋겠네...

生의 아픔과 고통일랑
떨어지는 저 낙엽과 함께
모두 다 떨어져 버렸으면
좋겠네,
정말 좋겠네... ...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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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소(歸巢)본능 /최송연

 

험하고도 먼 순례의 길,

허덕이며 달려왔건만

 

아직도 이곳은

내 집 아니라 시네


길고 긴 여정 지친육신 

객관에 누었자니... 

 

사그럭 거리며 떨어지는

낙엽 소리 가슴 에이고,

 

 서러운 세월 뒤돌아 보니

시름만 더하여 가네...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세월,

달빛마저 힘겨운 듯...

 

새파란 입술 파르르 떨며

작은 뜨락 위로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구나 

 

밤이 깊어질수록

쌀쌀한 새벽 바람

가슴 헤집으며 파고드는 데

 

 떨어지는 낙엽이 서러워서련가...

먼 길이 힘겨워서인가...

 
소쩍새 울음소리는 어쩌자고

저리도 애절한가...,


돌아가야 할  본향은

아직도 멀고 아득한 데...

 

 가을 낙엽 떨어지 듯..., 

생의 영화도 덧없이 떨어지고


버석거리는 늙은 몸 

티끌로 돌아가는 그 날,


지친 내 영혼

본향에서 안식하리라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히11:13하,~14절)”


 

 

 출처: 최송연의 목양연가 "왕께 바치는 내 노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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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믿음은 참된 믿음입니까?
Yesterday John MacArthur GTY 블로그 1 Comment
성경적인 구원의 확신은 무엇일까? 우리는 참된 믿음의 증거와, 성령의 성화 사역의 증거를 우리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까? 과연 그것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을까?

요한의 첫 번째 서신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제시해준다. 이 짧고 강력한 편지만큼 성경에서 비주재권 신학이 주는 약속들에 맞서는 편지는 없다.

요한일서의 목적은 간결하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대목에서 사도 요한은 자신의 의도를 상세히 설명한다. 요한은 믿는 자들을 의심하게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믿는 자들이 온전한 확신을 소유하기를 원할 뿐이다. 참된 믿는 자라면 요한의 말에 혼란스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구원의 확신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자들에게는 분명 경종을 울리는 말씀이 될 것이다.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은 7가지의 중요한 요소들을 설명한다. 이 요소들은 각 사람이 진정한 신자인지 아니면 거짓 신자인지를 드러내어 준다. 이것은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어떤 시험이 아니다. 이것은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가 자신의 그 고백이 진실된 것인지를 스스로 점검하는 방법이다.

참된 믿는 자들은 빛 가운데 행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할 것이요”(요일 1:6-7).

‘어둠에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정반대 되는 것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모두 어둠에서 행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속 받아 빛으로 옮겨졌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엡 5:8).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진리의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모든 참된 신자는 빛 가운데서 행한다. 심지어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도 우리는 빛 가운데 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에도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일1:7). 여기서 동사는 그리스도의 피가 계속해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죄를 지을 때도 우리는 이미 깨끗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어둠도 우리가 거하는 빛을 가리지 못한다(벧전2:9).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믿는 자들의 위치적이고 실제적인 사실을 모두 묘사하는 표현이다. 빛 가운데서 행하는 것은 빛에 따라 사는 것이다.

참된 믿는 자들은 죄를 고백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요일2:1).

구원에 대한 참된 확신은 언제나 자신의 죄성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사실 구원에 대해 확신할수록 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더 깊어진다. 이 말이 모순되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절망에 빠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서 죄를 발견할 때 놀라지 않는다. 하지만 죄를 미워한다.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고 깨끗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을 이용해 자신의 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죄를 더 극복하고 억제하려 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2:1).

참된 믿는 자들은 그의 계명을 지킨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2:3-4;5:3).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지 확실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여기 있다.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이다. 이것은 외부의 압력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굴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소중한 것으로 알고 ‘지키는’ 자의 열렬한 순종이다.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4)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1:16)

참된 믿는 자들은 형제를 사랑한다

이 내용(형제 사랑)과 앞선 내용(순종)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9-11, 참조3:10,14-15; 5:2)

이 두 가지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는 이유는,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선포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도덕적 율법을 성취한다(마22:37-40).

다른 믿는 자들에 대한 사랑은 참된 믿음의 중요한 증거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타고난 것이거나 우리의 선함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참된 믿음의 증거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되어가는 것이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4:12)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희미하게나마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참된 믿는 자들은 건전한 교리를 지지한다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이것으로 우리가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아느니라”(요일 2:21-23; 4:6)

요한은 영지주의라는 초기 이단에 대항해 이 편지를 쓰고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라는 것을 부인했다. 요한은 진정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오류나 이단에 빠질 수 없다고 말했다. 왜 그런가?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2:20,27)

우리가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기술이나 어떤 성취 때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때문이다.

참된 믿는 자들은 거룩함을 추구한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게 하느니라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요일 2:29; 3:3-4, 6–9)

이 말씀들은 많은 사람을 오류에 빠지게 했다. 구절들의 의미를 파악하는 열쇠는 3장 4절에 나오는 죄의 정의이다. “죄는 불법이라.” “불법”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아노미아’다. 그 단어는 문자적으로 ‘법이 없는’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계속된 습관의 문제로 부도덕하고 불경하며 불의한 삶을 사는 자들을 묘사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의를 미워하고, 계속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다스리고 있다는 듯이 살아간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도 요한은 죄 없는 완벽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다음과 같은 말로 서신서를 시작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또한, 요한은 사람이 죄를 얼마나 자주, 지속적으로 혹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느냐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는다. 그리고 참신자라도 심각한 죄를 범하게 될 수 있다. 요한이 여기에서 제기하는 문제는 죄와 의에 대한 우리의 태도, 죄를 지을 때 우리 마음의 반응,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전반적인 방향에 대한 것이다.

영생의 약속을 붙잡지만 그리스도의 거룩함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자들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고백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철저히 가짜이고 속임수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단지 속고 있는 것이다. 만일 진실로 자신의 소망을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고 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할 것이다(요일 3:3).

참된 믿는 자들은 성령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모든 것을 요약하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 성령이 여러분 안에 거하고 계신가?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4:13)

이 말씀에는 바울이 가진 신학이 동일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바울은 말한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롬 8:16). 성경은 말한다. “사람의 모든 악에 관하여 또한 모든 죄에 관하여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또는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신19:15; 참조 마 18:16; 고후13:1).

이것은 자신을 점검하는 것이 마치 행위에 믿음을 두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철저히 무너뜨린다. 로마서 8장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며 그것으로 우리가 믿음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자기 점검을 통해 기대하는 증거들은 바로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23). 성령의 열매야말로 성령님이 내주하신다는 증거인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증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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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The Gospel According to the Apostles.” 에서 발췌한 것이며 이 책은 한국어로는 “ 구원이란 무엇인가?” (부흥과 개혁사)로 번안되어 판매 중입니다.

COPYRIGHT (C) 2016 Grace to You

출처: 개혁주의마을/Grace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창세기 38장) 시동생 대신 시아버지

 

  마태복음 1장 첫머리는 “아브라함의 아들, 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라”, 하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로부터 “낳고, 낳고”가 이어지는데 원어를 보면 “낳고”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고(헬라어 에겐네센, 영어 fathered)”입니다. 낳는 것은 여자의 몫이요 공급하고 지키는 것은 남자의 몫입니다. 이름과 명분은 남자의 몫이요 실속과 생명은 여자의 몫입니다. 한국에는 칠거지악이라는 법이 있었습니다.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 하면 쫓겨납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그런 풍습이 없었습니다. 사라나 라헬의 경우에서 보듯이 아이를 못 낳으면 종을 사용하여 아들을 낳아도 됩니다. 다메섹 엘리에셀을 양자 삼을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여자가 아들을 낳거나 만들거나 구하거나 해서 남편에게 주면 남편이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에 "아버지가 되고, fathered"로 기록된 것입니다. 이 풍습에 의하여, 율법에 의하여 요셉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의 적법하고 당당한 육신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족보에는 네 사람의 여자가 나옵니다. 사라, 리브가, 레아 같은 쟁쟁한(?) 주연급 여성 성경인물들이 아닙니다. 다말, 라합, 룻, 그리고 우리야의 아내, 이렇게 네 명의 여자입니다. 이들은 모두 이방여인이라는 점, 정상적이고 순탄한 과정을 거치지 못 하고 아들을 낳았다는 공통점을 가집니다. 그 중 첫 번째가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38장의 다말입니다.

  다말은 유다가 맏아들 엘의 아내로 취한 가나안땅 여자, 곧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하여 여호와께서 죽이심으로 다말은 과부가 됩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오늘날 수혼제도라고 부르는 풍습법대로 둘째 아들 오난에게 형수와 동침하여 형을 위하여 아들을 낳게 하라고 명합니다. 그러나 오난은 자기의 씨가 형의 아들이 되는 것이 싫어서 땅에다 설정을 합니다. 이 일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오난도 죽이십니다. 유다는 마지막 남은 셋째 아들 셀라도 죽게 될까봐 며느리 다말을 친정으로 돌려보내고 셋째 아들이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하였는데도 혹시 또 죽을까봐 다말에게 주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다말은 아들도 낳지 못 하고 늙어가야 하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유다의 아내 수아의 딸이 죽어 유다도 홀아비가 됩니다.

  유다가 며느리 다말의 친정이 있는 딤나로 양털 깎는 자에게 갔을 때 사건이 벌어집니다. 다말은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창녀로 변장하여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합니다. 화대로 염소새끼를 받기로 하고 그 증거로 유다의 도장과 근과 지팡이를 맡아 놓고 동침합니다. 잉태하게 됩니다. 자신이 며느리와 동침한 것을 꿈에도 몰랐던 유다는 며느리가 행음하여 잉태하였다는 이야기를 듣자 불태워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그 때 다말은 도장과 끈과 지팡이를 내어놓으며 이것들의 주인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다, 이것들이 누구의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 때 유다는 말합니다. “그는 나 보다 옳도다.”

  유다는 왜 며느리 다말이 옳다고 하였을까요? 그렇습니다. 여자는 생명의 유업을 잇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에게 잉태의 고통을 크게 하시고 언젠가는 오실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아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여자는 여자의 후손, 곧 구세주가 오시기를 기다리며 고통하며 아들을 낳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만 아니라 이방인도 하나님은 사용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든 이방여인이든 여자가 아들을 낳지 않는다면 구세주는 오지 못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는 것, 그것은 모든 여자의 권리요 의무이며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에게 들어가 아들을 낳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수혼제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창세전에 다말을 구세주의 계보를 잇는 생명의 유업의 여자로 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말은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그런데 시아버지 유다는 셋째 아들 셀라까지 죽을까봐 다말에게 주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계획을 훼방하고, 여자의 후손이 오실 계보를 끊으려 한 셈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어코 아들을 낳아 그리스도의 계보를 이어야 하는 다말은 목숨을 건 결단을 하였고, 시아버지 유다를 유혹하여 잉태한 것입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아들 셀라를 아끼려다 자신이 며느리에게 들어가 잉태하게 한 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로 말미암아 쌍둥이 두 아들을 낳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 먼저 밖으로 나온 아이의 손에 산파가 붉은 실을 맵니다. 그런데 그 손이 도로 들어가고 다른 아이가 먼저 태어납니다. “어찌하여 먼저 터치고 나오느냐?” 하고 그 이름을 ‘베레스’라고 부릅니다. 그 다음에 손에 붉은 실을 맨 세라가 나옵니다. 그들도 태중에서 그리스도의 계보, 장자의 계보를 붙잡으려고 싸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계보가 부끄러운 불륜의 계보라고 말합니다. 구세주의 족보라면 뭔가 근엄하고 거룩해야 하지 않느냐는 거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보는 근엄하고 거룩하고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인류, 악하고 부끄럽고 추하고 연약한 죄인들의 혈통으로 이어져 내려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죄악 된 인간의 역사 속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신묘한 약도 겉에 발라야 소용없습니다. 주사기를 통하여 핏줄 속에 들어가야 효력을 발합니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살리려고 그렇게 죄인의 혈통 속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만일 다말이 가만 앉아 있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그 이름은 성경에, 그리스도의 계보에 없었을 것입니다. 베레스가 세라를 제치고 먼저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 이름도 계보에 기록되지 못 했을 것입니다. 진리를 붙잡아 나의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도덕, 윤리, 체면의 문제가 아닙니다. 점잖게 가만 앉아서 되는 일도 아니고, 누가 대신 해주는 일도 아닙니다. 목숨을 걸고 내가 해내야 하는 일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상은 달음박질하는 자의 것입니다. 죽기 살기로 오직 하나님을 붙잡는 것, 이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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