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나용화 교수
개혁주의 자료 2016. 12. 24. 04:34*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
- 나용화 교수 -
정부가 범죄를 대항하여 전쟁을 선포했으나, 불의하고 악한자들은 여전히 폭력을 자행하며 피흘리는데 민첩하다. 팔순의 할머니들과 여섯 살의 귀여운 여자 아이를 생매장하여 살해한 충격적인 사건을 비롯하여 십대 청소년들이 한 선배를 칼로 50여 군대를 찔러 죽인 일 등은 이 사회가 너무나 살벌함을 느끼게 한다. 이같이 난폭하고 어두운 시대에 하나님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의를 행하여 빛을 발할 것을 요구하신다. 이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사야 시대에 탐욕과 향락에 도취하여 포악해져 있었을 때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사람들을 향하여 일어나 빛을 발하며 공의를 행하라고 요구하신 것과도 같다(참조, 사 56:1; 60:1).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의를 행하라고 요구하심에 있어서 먼저 의를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를 온전히 행하려고 하면 하나님이 베푸신 의를 이해할 뿐만 아니라 덧입어야 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이 베푸신 의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게 멸망될 때 활동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로하기 위해 약속하심 말씀을 통해 장차 오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가 여호와의 의이심을 소개한바 있고(렘 23:5-6; 33:14-18)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던 바울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후에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바 우리의 의이심을 증거했다(고전 1:30). 이로 보건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 의이시다. 예수님께서도 자기가 부활하여 아버지께로 간 것이 바로 의라고 말씀하셨다(요 16:10). 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이시다.
하나님의 의인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의를 덧입게 되고 이로써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면 그는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들었을 뿐만 아니라(갈 3:8, 16) 그를 미리서 보았다(요 8:56). 그래서 하나님이 베푸신 의요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을 인하여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자 그 믿음을 보시고 여호와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 하셨다(창 22:12-19; 약 2:21-24). 하나님께서 성도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속을 성취해 놓으셨고 그 성취된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만족을 얻으셨기 때문이다(롬 3:20-28).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에는 인자와 긍휼을 나타나 있는 것이다. ‘인자’(히브리어, ‘헤세드’)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백성이 잘되길 즉 예수의 형상을 본받아 영화롭게 되기를(롬 8:29-30) 바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하여 쏟아 부어주는 ‘내리사랑’을 의미한다. 이 같은 인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위하여 그의 독자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시고(요 3:16)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신 사건에서 잘 나타났다(롬 5:8). ‘긍휼’(히브리어, ‘체다카’)이라는 용어는 한편 하나님의 백성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의 허물과 약점을 대신 담당하는 ‘안는 사랑’을 의미한다. 이 긍휼은 예수께서 우리 성도들의 죄악을 담당하신 사건(사 53:4-6; 마 8:17)과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에 대한 비유(마 18:27, 33)에 잘 나타나있다. 이같이 하나님이 백성이 그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그가 그들을 위해 독자 예수를 십자가에서 저주와 형벌을 당하여 죽게 하신바 그의 인자(내리사랑)와 긍휼(안는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의 의를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기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베푸신 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베푸신바 이 의를 가르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밖에서 오는 처음의 피동적 의’(the alien, primary, passive righteousness from God through faith)라고 한다. 이 의가 선행에 앞서는 것이다.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구원관의 경우처럼 선행이 의에 앞서는 것이 아니다. 로마교회의 가르침에 의하면 성도가 선행을 행하여 공로를 쌓아야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된다. 예컨대 수도사가 되어 폐쇄된 수도원에 들어가 금식하고 기도하며 공로를 쌓아야 의롭게 된다고 로마교회가 가르쳤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의하면 율법의 행위 곧 선행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육체가 없으며(롬 3:20) 그리스도께서 성도 안에 살아계셔 역사하실 때(갈 2:20) 그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서 생각을 품으며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빌 2:13). 다시말해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살아계시어 활동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를 덧입는 자 곧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고 인정함을 얻은 자가 의를 행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의가 선행에 앞선다’고 주장하여 로마 교회를 개혁하였던 것이다.
2.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
우리를 위하여 의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를 요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후에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하셨고 이사야를 통하여 “너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사 56:1)고 촉구하시는가 하면 선지자 미가를 통해서는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고 하셨으며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그가 베푸신 의의 개념에 잘 나타나 있지만 그 반대 개념과 비교하면 또한 잘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의 의의 반대되는 개념은 우상숭배이다. 이는 하나님의 복음에 나타난 의 곧 예수 그리스도가 참 진리인데 반하여 우상은 거짓이요 불의이기 때문이다(롬 1:16-17, 23) 이사야 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이 진리이신 여호와를 업신여겨 멀리하고 물러가(사 1:4) 우상을 섬기는데 열심을 내었다(사 2:8). 이방인들의 대표적인 우상은 바알종교이다. 이 바알종교의 특색은 경제적 풍요를 최대의 축복으로 여기는 까닭은 부동산 곧 땅과 집을 맗이 갖는 것이었다(사 5:8; 미 2:2; 6:16). 그래서 바알 종교가 성행하게 되면 부동산 투기가 심해져 가난한 자들의 땅을 권력자와 부자들이 탐내여 착취하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이스라엘 왕국의 오므리 왕이 은 두 달란트로 사마리아 산을 세멜에게서 산 사건(왕상 16:24)과 그의 아들 아합이 이세벨의 도움을 받아 나봇의 포도원을 강탈한 사건이다(왕상 21장). 이두 왕들은 바알종교와 그것의 불의한 경제제도를 끌어들여와 여호와의 노를 격발시켰다(왕상 16:26, 33). 그러기에 우상숭배는 전형적인 불의 곧 탐욕과 거짓이다(참조, 골 3:5).
이 같이 불의하고 이기적인 탐욕의 우상숭배와는 달리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의는 한 마디로 사랑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의도 사실상 한마다로 사랑(내리사랑과 안는 사랑)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0-11). 하나님께서 자기가 베푸신 의에 기초하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를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본래의 실천적 의”(the proper, practical righteousness active in love before God)라고 부른다. 이 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열매이이도 하다(갈 5:22).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상을 섬기는 대신에 그의 법도와 규례를 지켜 행하므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하시기 때문에(레 18:1-5)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만을 사랑하고(신 6:5), 이웃사랑하기를 우리의 몸과 같이 하라고 명하셨다(레 19:18). 한 율법사가 예수에게 율법중에 가장 큰 계명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에 대하여 물었을 때 위의 신명기와 레위기의 말씀을 하나로 묶어서 대답하신 것(마 22:34-40)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가 잘 요약되어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롬 13:10)고 하고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다”(갈 5:14)고 하며 예수의 사람들은 성령으로 행하여 사랑과 절제 등의 열매를 맺고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갈 5:16-24). 우리의 이웃 곧 혈연, 지연, 학연 등과는 무관한 사람들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쓸 수 있도록 그들의 허물과 약점을 담당하고 마음을 다해 사랑을 베풀 것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그 성격상 공동체적이다. 자기 아닌 이웃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사랑과 의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자기만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사실상 믿음도 없고, 따라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어도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한 지체들이기에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도록(고전 12:26) 되어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여 각각의 직분을 따라 서로를 섬기되 서로 먼저 그리고 열심히 하여 하는 것이다(롬 12:3-13).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성령으로 충만케 된 경우에는 그 결과로서 신령한 노래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있게 될 뿐만 아니라(엡 5:18-21), 아내와 남편 사이(엡 5:22-33), 자녀와 부모 사이(엡 6:1-4),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엡 6:5-9) 온전한 사랑의 질서가 있어서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이 같은 사실은 오순절 성령강림 때 성령으로 충만한 초대 교회가 서로 교제하기를 힘쓰면서 재산과 소유를 서로 함께 쓰거나 각 사람의 필요대로 나눠준 사건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행 2:42-45). 이렇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하나님과 이웃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것인바 이 사랑은 이웃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그의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고 거룩해지며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데까지 성장하여 영화롭게 되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웃의 허물과 약점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 짊어지는 헌신적인 사랑이다. 이웃에 대한 이 같은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허물과 죄악을 위하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의 몸을 보내시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신 그 크신 사랑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체험하는 데서 사실상 가능한 것이다. 즉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의가 원인이 되어 그 결과로 우리가 의를 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가 어떤 것인지를 살핌에 있어서 우리의 이웃이 누구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이 적절할 듯하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특별히 성령을 부으시고 복음을 가난한 자들과 흉악한 멍에의 줄로 압제당하는 자들에게 전파하여 자유와 생명을 베풀도록 하신 점(사 56:6; 61:1-2; 눅 4:17-21)으로 미루어 보아 오늘 우리의 이웃으로는 농어민, 도시의 영세민 근로자, 고등학생들과 10대 소녀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정부당국의 농업정책의 빈곤으로 말미암아 농민들의 삶이 너무나 어려워졌다. 어민들이나 도시 저소득층도 마찬가지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잘산다’는 개념이 물질적 풍요에 의하여 규정되고 있는 까닭에, 경제적으로 빈곤하면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좌절감을 갖는 것이 문제이다.
대학입학시험을 목전에 둔 고등학생들은 대학입학을 인생의 행복의 열쇠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입시공부의 노예가 되어있다. 그들의 삶의 목표가 오직 대학입학 뿐인 것으로 보일 정도이다. 그런가 하면 공부라고 하는 흉악한 멍에가 주는 압박감 때문에 탈선한 10대 소녀들이 윤락의 희생물로 전락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우리의 이웃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가 무엇인가?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의의 사람들이기에 변혁의 역군(change agent)들이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실천하는 일꾼들이다.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성공과 행복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사람들에게 제시하여 상대적 빈곤감이나 열등의식을 갖지 않도록 해주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적어도 물질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눅 12:15)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경제적 빈곤은 미덕이 아니므로 가난한 채로 살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는 것은 불신앙이다(딤전 5:8).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이 생활향상을 위한 정책수립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를 위하여 정부가 정책적으로 뒷받침하여 농민들이 조합원이 되어 농수산물의 생산, 가공, 판매등을 총괄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이로써 생산자와 소비자가 다 같이 보호되고 도시의 영세민의 생활향상까지 도모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므로(레 25:23) 개인들이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하고 땅을 경작하는 자들로 하여금 소유할 수 있게 하는 제도적 장치와 적어도 소작농들의 생산의욕을 충족시킬 수 있게 소작료가 강력하게 규제되어야 할 것이다. 도시의 경우는 건물 임대료와 전세값이 규제되어 마땅하다. 청소년들의 겨우 입시의 멍에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보장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더라도 저녁식사만큼은 귀가하여 가족들과 함께 먹을 수 있게 하고 공휴일 즉 주일에는 온전히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어야 한다. 지금 청소년들은 기성세대의 탐욕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기성세대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세속적인 야망을 자기의 자녀들인 청소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며 세속적인 야망을 자기의 자녀들인 청소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며 세속적인 성공의 개념에 따라서 청소년들에게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비 인간화 시키고 있다. 부모들은 성경 말씀을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자녀들과 함께 묵상하고 그 말씀을 따라 기도하며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의탁하는 훈련을 함께 해야 한다. 성경속에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행복을 추구할 수 있도록 교육해 주어야 한다. 이 교육의 책임은 특별히 아버지에게 있는 것이다.(참조, 딤전 2:11-12)
이상에서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정부의 정책수립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는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되지 않고 정책이 빈곤한 정치권력에 대하여 비판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래서 칼빈도 그의『기독교강요』에서 권세자들에 대하여 때로는 비판적으로 불순종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한 바 있다(2권 8장 38항과; 4권 20장 32항).
그러한 한편 우리는 개인적인 삶의 차원에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 곧 검소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함으로 이웃에게 덕을 세워야 하고 이로써 환경오염도 예방할 수 있어야 한다.
결 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하지 말고(마 6:1)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셨다(마 6:33).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생활과 불신자들의 탐욕적 생활을 함께 경계하면서 이웃 사랑의 실천방법으로 구제를(마 6:3)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경외심 및 믿음을 연단하는 방법으로 기도를(마 6:5) 그리고 자기를 부인하는 방법으로 금식을(마 6:16) 말씀하셨고, 물질을 사용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할 것(마 6:20)을 말씀하셨다.
또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은 세속적인 정욕과 탐욕을 버리고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아 근신하여 이웃을 사랑함으로 의롭고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경건하게 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딛 2:12). 이로 보건대 하나님이 사람으로서 의롭게 살면서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마 16:24)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한다(마 6:33) 하나님은 이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덧입은 사람들을 통해서 파괴되고 황폐해진 땅의 기초를 수축하신다(사 58:12). 다시 말해서 거짓된 바알종교의 불의한 부동산 투기와 그것과 결부된 폭력과 착취로 말미암아 황폐된 땅을 치료하심에 있어서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변혁의 역군들로서 의를 행하여 빛을 발할 것을 요구하고 계신다.
출처: 안산 회복의 교회 /전상범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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