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맺으며)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마태복음 3:13-15]

여기서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첫째,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고
둘째, 왜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라 말씀하신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이었냐는 거다.

첫째, 왜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까닭은
세례요한의 사명은 사람들을 회개로 인도하여 그들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일 이었고
그 표로 세례를 베풀었고 이를 예수님은 인정하셨다.
오늘날 우리의 사명도 세례요한과 같이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태어나서부터 나실인 이었던 세례요한 같이, 우리를 선택하여 예비하신 길은
서원하여 작정하여 마치 나실인이 된 것처럼
회개를 하고 세례를 받은 은혜의 언약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길은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 가졌기에, 주의 길을
내 삶의 자리에, 이 땅에, 예비하여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똑 같은 인간으로 오셔서 죄인의 삶에 찾아오셨고
그래서 예수님의 위대한 메시지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먼저 죄인 인 우리를 찾아 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은혜며 긍휼이고 자비이며 인자(Great kindness)이며
이 모든 뜻이 소망이신 하나님의 의(공의)이다.

이를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고린도전서 9:19-22]

둘째, 왜 요한의 세례를 받는 것이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다’ 라 예수님은 말씀하셨을까?
이를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 표현했고
KJV 에서는 ‘Then he suffered him. ’ 이라 표현했을까...
세례요한은 의로우시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을, 세례 베풀기 힘들었을 것이고
예수님은 죄인인 인간의 자리에 오셔서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셨기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음으로서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고
세례요한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이루어 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셨다.
[And Jesus answering said unto him,
Suffer it to be so now: for thus it becometh us to fulfil all righteousness.
Then he suffered him. :15]
이와 같이 하여 우리로 모든 의(공의)를 완벽하게 이루는,
for thus it becometh us to fulfil all righteousness,
이것이 복음이다.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로
예수님의 통하여 알려주신 복음(Gospel)인 기쁜 소식
이를 알려주시고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내주(來住)까지 하시는 성령님
이 모든 의(복음)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기에
그래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세례를 베풀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물에서 올라오실 쌔
나타난 표적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합당함을 보여주신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렸고
하늘에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있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And Jesus, when he was baptized, went up straightway out of the water:
and, lo, the heavens were opened unto him,
and he saw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and lighting upon him:
And lo a voice from heaven,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마태복음 3:16-17]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세 가지 표적이 일어났다.
1.하늘이 열리고(the heavens were opened)
2.성령이 비둘기 같이 주님 위에 임하였고( the Spirit of God descending like a dove)
3.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
라는 하늘의 메시지가 있었다.
(voice from heaven, saying,
This is my beloved Son, in whom I am well pleased)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슴에 담고
성령으로 인(印)쳐서 말씀으로 각인(刻印)된 성도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의 길을 따르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는 우리의 소망인 천국이 열렸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비둘기처럼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였고
우리를 향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 라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쁜 소식, 복음이 되었다.
세례요한과 같이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 메시아 되신 증거인 표적이 되셨다.

[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 이니이다
But unto the Son he saith,
Thy throne, O God, is for ever and ever:
a sceptre of righteousness is the sceptre of thy kingdom.  히브리서 1:8]

맺으며:
교만이 무엇일까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는 자랑, 그것도 교만이라 할 수 있지만
성경의 교만은 하나님의 뜻대로 생각지 않고 행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에
성도라면,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자랑으로 눈이 멀어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도,
알면서도 어떠한 이유로 침묵하는 것도 교만이라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나는 교만한 자 이다.
성경을 읽고 성경으로 거울을 삼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면
내 자신의 교만이 보이며
또 공동체를 바라보면 공동체의 어그러진 신앙의 길이 세속화된 종교의 길이라
교만의 길이라,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말라기 3:15]
반복되어온 자신의 교만 된 길에서
반복되어온 공동체의 교만 된 길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하나님의 의(공의)로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가 뛰듯이(말라기 4:2) 굳어져 화석처럼 변한 종교적인 의식에서 순수한 신앙의 자유를 위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간직한 자들로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지는
하나님의 의(공의)를 일주일에 한 편씩 쓰겠다고 시작했으나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에 무리하다는 판단에
자신은 글을 쓰는 속도 보다 글을 올리는 속도가 늦어졌다.
첫 번째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교회와 교계를 바라보며
자신의 신앙 간증과 곁들어 주장하는 글로 시작하여
몇 가지 소제목으로 전개하고 이를 한 단으로
두 번째 단은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세례까지
세 번째 단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중심으로 한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네 번째 사도들의 사역
다섯 번째 계시에 대하여 자신이 바라본 성경을 가감 없이 써서 논의하고
자신은 공감된 동의든 신랄한 비판이든, 서로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의 신앙으로
근본 된 믿음을 바탕으로 토론이나 논의를 같이 하고 싶었었다.
그래서 서로 성경을 바라보는 분별력으로 믿음이 더 굳건히 터를 잡고
분별력만큼 낮아져서 믿음의 영역이 넓어지는,
장성한 분량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각인된 가슴으로
안목이 넓어져서 다음 세대에 이어주는
그런 계기가 글이 되었으면 하는 그리스도를 향한 꿈이 있었기에 글을 시작을
2013년 10월16일에 시작하였고 10월16일은 주님을 사랑하시던 육친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라 더 의미 있는 시작이었는데 이제 1년 반 만에 걸쳐 쓰던 글을 마치려 하니
아쉬움도 많고 자신의 믿음의 한계를 나타낸 부족한 글이 되었지만
내게는 올바른 글이 되도록 기도하고 성경전체를 읽으며 자율 성경공부 한 기간 이라
신학과 교회사를 여러 권 읽으며 나름 열심히 공부한 기간이라 감사했고
그간 시험과 고통의 참을 수 없는 시간도 있어 잠 못 이루는 날도 많았지만
어려움 중에서 성경을 읽는 능력을 주신 주님께 감사함이 넘쳤던 날들도 많았고,
이 짧은 시간이나마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그간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세례요한의 세례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John did baptize in the wilderness, and preach the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remission of sins. 마가복음 1:4]

회개 없이는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 갈수 없기에
요한은 회개를 외치고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
세례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물구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구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 할지니라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출애굽기 30:17-21]

구약시대에 지성소에 이르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제사장이 지성소에 가기 위해서 반듯이 성전 뜰과 성소를 통과해야 했고
성전 뜰에는 제단과 물구멍이 있는데, 지성소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성전 뜰로 나가 제단 위에 자신의 죄를 속하는 번제를 드려야 했고
그리고 물구멍에서 손과 발을 닦아야 했고
그러지 않고 성소에 들어가면 죽임을 당했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하여 죄를 회개하고 회개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 나갈 수 있는
그래서 세례요한은 회개를 하라 하고 회개의 표로 세례를 베풀어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첩경을 평탄하게 하는 선지지의 예언을 성취하게 되었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돌아가셨을 때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는데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10:19-20]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제사장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제사장이 필요 없이 직접 기도할 수 있고 성령님이 영접할 수 있게,
세례요한은 그 길을 위해 회개를 외치고 세례를 주었다.

구약시대의 할례가 하나님과 백성사이의 언약의 상징이라면
신약은 세례가 언약의 상징이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로새서 2:11-12]
먼저 회개를 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행위는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지만 먼저 회개를 해야 한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사도행전 2:38]

성령의 선물(gift of the Holy Ghost)이 무엇인가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And they of the circumcision which believed were astonished,
as many as came with Peter,
because that on the Gentiles also was poured out the gift of the Holy Ghost.
사도행전 10:45]
‘poured out the gift of the Holy Ghost’
성령의 부음, 이는 기름을 부음(poured out)을,
이는 제사장을 의미하며,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고  출애굽기 30:30]
왕을 의미하며,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 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
사무엘상 10:1]
그래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그래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But ye have an unction from the Holy One, and ye know all things.
요한일서 2:20]
무엇을 안다는 말인가
이는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 자들과 적그리스도를 아는
성령의 부음으로, 내재하심으로 진리를 알기에 참과 거짓을 분별하고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니 의(공의)로 행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난 자 인줄을,
시대와 시대의 현상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기이한 빛으로 법도로 기사와 이적을 기억하며
(Remember his marvelous works that he hath done)
이제는 죄 사함을 받은 자로,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알릴지어다.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고 그의 모든 기사를 전할지어다
그의 성호를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마다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여호와와 그의 능력을 구할지어다 항상 그의 얼굴을 찾을 지어다
역대상 16:8-11]

세례는
구원하는 표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고
부활하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는 응답이며
(answer of a good conscience toward God)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베드로전서 3:21]

세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하여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상징이며 부활에 참여하는 예식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를 자니라  갈라디아서 3:27-29]

바울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고 죄를 씻는 행위를 세례이기에
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장사되어 새 생명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부활하는 자로,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로마서 6:3-5]

그러나 세례는 세례 자체가 죄 사함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는 상징의 예식이며
세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공동체)에 속한 성도라는 표적이며
인(印)인 이기에
그리스도의 공동체 일원으로 살아갈 것을 약속 한다 는 언약의 의미를 갖기에
세례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전파했다.


15.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세례요한의 외침 ‘회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는
어디서 하나님의 교제에서 떨어졌는지 마음에 떠올려
잘못을 인정하고 처음의 마음과 행위를 갖는 변화로
다시 하나님께 돌아가서 선을 행하는 행위까지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Remember therefore from whence thou art fallen,
and repent, and do the first work;
or else I will come unto thee quickly, and will remove thy candlestick out of his place, except thou repent. 요한계시록2:5]

회개하지 아니하면 네게 네 자리에서 촛대를 옮기시겠다, 하신다.
여기서 '촛대' 는 성령을 전인 우리 각자 ‘개인’ 이면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3:16]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해석으로 넓은 의미의 ‘교회’ 로 본다.
마태복음 5:14을 보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 시는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고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공의의 자녀임을, 빛의 자녀임을 증거 하신다.
그 빛은
[스볼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과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4:15-16]
빛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이시며 복음의 빛이 온 세상에 비취었다.
그 빛을 전해주기 위해 그 길을 예비하는 세례요한의 ‘회개의 외침’이 있은 후
비로소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고
예수님께서 변형되었을 때에도
얼굴이 해 같이 빛나고 옷이 빛같이 희어졌으며
그 빛을 누가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누가복음 2:2] 표현했고
요한은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 1:5] 으로
예수님은 빛이심을 선포하셨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 로라
As long as I am in the world, I am the light of the world.
요한복음 9:5]
빛으로 세상에 오신 주님
하나님의 공의로 복음의 빛으로 오신 주님
이를 일깨워 주시는 성령님은
우리가 빛의 자녀로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For ye were sometimes darkness,
but now are ye light in the Lord: walk as children of light;
(For the fruit of the Spirit is in all goodness and righteousness and truth;)
에베소서 5:8-9]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 빛 이라
때로 어둠의  걸림돌에 넘어져
때로 어둠에 거하였더라도 (were sometimes darkness)
다시 빛이신 주님께 돌아가는 ‘회개’를 하고
빛의 자녀로 영원한 빛에 거하기 위하여 빛의 열매를 맺으라 하신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빛의 열매는
선이인 하나님의 빛의 자녀로 착함 (goodness 공의)
의로우신 하나님의 의 로 의로움 (righteousness 공의)
그리고 진실하신 하나님의 진리로 진실함 (truth 공의)을 맺는
그리하여 빛을 세상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사람들로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위하여.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6]

세례요한은 ‘회개’를
성전이 아닌 광야에서
세속에 물들고 혼합적이고 불순한 종교의 전통에 남아있는 성전이아니라
새롭고 변화되는 소망이 있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구속에서 해방되어
광야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하심을 누렸던 그 같은 광야에서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세속의 옷이 아닌 약대 털로 만든 옷을 입고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여 자연적인 섭리인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회개를 외치며 주의 길을 예비했다.

회개는
구약은 율법의 희생 제물로 죄를 고백하고 제물을 바치고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면
신약은
생각을 고치고 그릇된 관념을 고친다는
헬라어 ‘메타노에오(metanoeo)의 마음의 변화와
행동의 변화까지 그리고 그리스도의 도를 본받는
빛의 자녀로 빛이 되어 세상의 소금이 되는,
참회(懺悔)의 눈물로(penitential tears)로 만이 아니라
이제는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Therefore leaving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of Christ,
let us go on unto perfection;
not laying again the foundation of repentance from dead works,
and of faith toward God, 히브리서 6:1]

어린아이와 같은 기초적인 초등학문에서 떠나고
기초적인 교리와 학설에서 떠나고
떠나지 못하고 반복됨을, 뉘우치고(repent)
유익하지 못하고 덕이 못되는, 죽은 행실(dead works)을 버리고
그리고 완전하신 주님을 향하여 (and of faith toward God)
가는 온전한 행위가 회개이고
세례요한은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그리스도 예수님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음을 선포함은
천국은 그리스도의 세계라
성령님과 함께 하시는 세상의 시작이라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광야가 아름다운 밭이 되며 아름다운 밭을 숲으로 여기게 되리가
그때에 정의가 광야에 거하며 공의가 아름다운 밭에 거하리니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이사야 32:15-17]

회개의 대상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하늘의 은사를 맛본 오늘날 우리 모두이다.
이 기회(은혜)의 시간이, 이 순간이고
이 시간이 지나면 회개할 수 없음을 성경은 경고한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려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For it is impossible for those who once enlightened, and have tasted of the
heavenly gift, and were made partakers of the Holy Ghost,
And have tasted the good word of God, and the powers of the world to come,
If they shall fall away, to renew them again unto repentance; seeing they crucify to
themselves the Son of God afresh, and put him to an open shame. 히브리서 6:4-6]

그리고 회개의 외침은 세상을 향한 우리의 전도라
복된 소식을 전하는 복음이 된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  디모데후서 4:17]

그래서 회개는 들을 귀 있는 복 된 자의 복음의 시작이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공의인 복음으로 사는 자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9:14]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구원의 복음을
하나님의 공의를, 여호와께 말씀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를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이사야56:1]

성경이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이야기라면
우리를 향한 교훈적인 이야기라면
우리의 만족을 위한 바램이나 합리적인 사고 같은 이상적인 가치관으로
성경의 필요성이 제기 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도 변함없이 우리를 향한 진리의 말씀이고
오늘 우리가 겪는 일상의 실상이고 실체이기에
성경을 읽고 이를 시인하여 고백하는 일이 회개이고 믿음의 길이라
누가 현대판 바리새인 인지 사두개인 인지 세리인지
믿음의 분량만큼 보이고
참된 믿음은 보이는 걸 행하기까지라
우리는 세례요한 같이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하여 외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만약에 외치지 못한다면
신학을 하였던 그렇지 않던, 교회의 직분이 어떻던
아직도  ‘초보’ 이거나
세례요한의 ‘독사의 자식’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외식하는 자’
현대판 바리새인 이거나 사두개인 임을
신앙의 양심으로 단언(斷言)한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마태복음 23:13]

믿음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고 천국이 도래(到來) 했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과거와 현재, 미래에 변함없이 계신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과거의 일이 현재이며 현재가 현재이면서 미래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우리가 살아가며 공급받는 힘의 원천이 되기에
성경을 읽고 행하려는 성령에 사로잡힌 자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그의 나라를 구하는
그런즉 먼저 그의 나라(first the Kingdom of God)와
그의 의(his righteousness 공의)를 구하는 삶이 경건의 삶이며
이를 산제사(Living sacrifices)라 하고
이 시작은 회개로 시작된다.
그래서
주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이 외쳤듯이
이제는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우리가 외쳐야 한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졌느니라’



14.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외치는 자
세례요한의 서원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세례를 전파하니
마가복음 1:4]

서원의 시초는
야곱이 벧엘에서 꿈에 하나님을 뵙고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고 천국의 문이  임을 알고
옛 이름인 루스(Luz)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벧엘(bethel)이 되어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And Jacob vowed a vow, saying,
If God will be with me, and will keep me in this way that I go,
and will give me bread to eat, and raiment to put on,
창세기 28:20]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시고
돌베개가 하나님의 집을 세우는 기둥이 되고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
서원했고 그 후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어
이스라엘의 민족의 이름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언약의 확인이 되었다.
야곱에게 꿈으로 찾아오신 하나님은
[And he dreamed, and behold a ladder set up on the earth,
and the top of it reached to heaven :12]
야곱이 잠을 잤던 그곳이 하나님의 집이고 천국의 문이 되었듯
우리가 찾은 봐 되신 하나님이 아니시라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이셨고
우리가 꿈을 꾸었던 소망이 있는 이 자리가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집이고
천국의 문으로 향하는
양의 문(Gate for the sheep)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천국 문의 자리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한복음10:7]
진실로 진실로(verily)
참으로 확실하게 말하노니, 예수님께서 양의 문이시고 선한 목자시니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고
너희가 양이라면 음성을 들으라,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라 하심은
오늘날 현대판 장로의 유전에서 떠나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기 때문에 그 멍에를 메고 배우시라 하셨고
멍에(Yoke)는
나귀나 소의 등에 쟁기나 수레를 끌기 위하여 두 마리의 동물의 목에 얹는 막대를 말하며
성도의 사랑, 서로 사랑하라는 공동체의 공의를 의미하였고
현대의 하늘나라의 상징적인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공동체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고
서로 멍에를 메는 교제가 사라진 허울만 남은 교회로 이마져 건물만 남고
성도가 사라지는 슬럼화가 이미 시작 되었는데
가라지 삯꾼과 함께 멘 멍에는 그 시대나 다름없다.
이를 바울은 불신자와 명에를 같이 하지 말라 경고했고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Be ye not unequally yoked together with unbelievers:
for what fellowship hath righteousness with unrighteousness?
and what communion hath light with darkness?
and what concord hath Christ with Belial?
or what part hath he that believeth with an infidel?
고린도후서 6:14-15]
공의(righteousness)와 불법(unrighteousness)이 교제(fellowship)할 수 없으며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친교 할 수 없으며,
공동체를 이룰 수 없으며
빛과 어둠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infidel), 이교도가,
그리스도와 벨리알(Belial)이 조화(concord), 일치할 수 없다 단언(斷言)한다.
이를 사무엘서는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Now the sons of Eli were sons of Belial; they knew not the LORD
사무엘상 2:12]
엘리의 아들들이 행실이 나쁨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 기록되어 있다.
엘리는 실로의 대제사장으로 사사로 사무엘을 교육시킨 인물이라
그를 아비로 둔 아들들이 이를 보고 배웠을 텐데
아들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고
회막 문에서 수종 두는 여인들과 동침하였다.
회막 문(the door of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화목제로 드리는 희생제물을 잡는 곳 으로,
회막 문은 예수님의 ‘양의 문’ 과 같은 의미로
[이스라엘 집의 모든 사람이 소나 여린 양이나 염소를 진영 안에서 잡든지
진영 밖에서 잡든지 먼저 회막 문으로 끌고 가서 여호와의 성막 앞에서
여호와께 예물을 드리지 아니하는 자는 피를 흘린 자로 여길 것이라
그러 즉 이스라엘 자손이 들에서 잡던 그들의 제물을 회막 문 여호와께로 끌고 가서
제사장에게 주어 화목제로 여호와께 드려야 할 것이요 레위기 17:3-5]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이며 사사인 아버지를 둔 자식들로
태어나서부터 불레셋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할 때 까지 이스라엘의 족속으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의 공의를 알 수 없어
엘리의 자식에서 벨리알의 자식(sons of Eli were sons of Belial)이 되었다.

전통적인 혈육적인 가치로부터 신앙의 정통성을 찾는 이들에게
바울은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로마서 2:2]
주님께서는 서나머 교회에 보내는 말씀에서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요한계시록 2:9]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하신다.
들을 귀가 있는 자가 복이 있는 자고, 들을 귀가 없는 자는 성도가 아니고
성령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자는 주여, 주여 부루 짓더라도 성도가 아니고
종교인 이거나 삯꾼 이라는 말씀이고
이것이 요한계시록의 ‘발람의 교훈’ 이고
베드로 후서의 ‘발람의 길’ 이라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 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베드로후서 2:15]
유다서의 ‘발람의 어그러진 길’ 이라
[화 있을 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유다서 1:11]
발람이 누구인가
발람은 모압 왕의 요청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했지만
하나님의 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축복하도록 하셨고
그가 여러 번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할 때 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하게 하셨기에
발람은 다른 길을 택하여
발락에게 모압 여인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유혹하고 음행과
우상숭배에 빠지도록 하였기에
발람은 돈을 위해 은혜를 팔아버린 자의 상징이 되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제외 버리고 본질적인 하나님의 뜻(공의)에서 멀어지게
기복신앙의 심어주고 하나님의 중재자로 중보자로 나서는 자들
이들이 교회를 변절시키고 관행과 전통에 의하여 개혁(회복)을 방해하는 자들,
이것이 니골라당의 교훈이기도 하다.
성령님의 말씀을 듣는 귀는
신학으로 지식으로 얻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갖게 되는 선물이라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된다.
그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심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음은
그 시대의 종교적인 사상이 경향이 신학이 대중(大衆)을 선동하여
이를 따르는 자가 많지만 이는 하나님의 공의에 반하였고
이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무리들이다.
이들이 신앙을 가장한 종교적 세력임은
좁은 문,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순수한 신앙을 지키려는 자들을 막아
그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이라
오늘날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함은
오늘날, 유전과 전통과 관습으로 외식하는 교만과 자랑과 위선에서 떠나
회개하고 순수한 믿음으로 연단된 신앙인이 되지못함은
성경으로 그 시대와 이 시대의 실상을 바라보지 못하는 허황으로 도배된 진리로 가장한,
사치한 종교적인 무희(舞姬)에 놀아나는
신의 대리자로 자처하는 사제자인 무당으로 복채를 받고 복을 빌어주는
기복종교의 무당의 굿이 됨을.

사두개인처럼 제사장과 산헤드린의 자리를 차지하고 지배계층으로 군림하는 집단과
바리새인처럼 율법을 지키려다 도리어 그 율법으로 외적인 규칙에 얽매여
변절된 율법학자 들과 지도자들의 집단과
이를 따르는 무지한 종교적인 군상들과
성전에서 제사장들은 수입의 십일조를 성전세로 내게 하고 이를 못 내면
토지를 뺏어버리거나 채무로 문서화 하여 채권자가 된 제사장,
로마제국의 세금징수와 이를 집행하는 세리들을 향한 불만으로
세리를 죄인 취급을 했음은
열심당원의 지지가 되었을 것이다.
성전에서 회당에서 사회에서 피지배계층으로 소외된 억압받는 백성들은
그들은 선지자(메시아)를 기다렸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예루살렘의 성전이 아닌, 회당이 아닌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었다.
[그 때에 세례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In those days came John the Baptist, preaching in the wilderness of Judaea,
And saying, Repent ye: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마태복음 3:12]
그리고 그 후에 예수님은 같은 복음의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From that time Jesus began to preach, and to say,
Repent: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마태복음 4:17]

서원(Vow)은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로 한 약속이다.
서원은 하던 하지 않던 선택이나 서원하면 지켜야 했다.
만약에 서원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에는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속죄제(Sin offering)의 번제는
모든 내장 기름을 번제위에 불사르고 가죽을 포함한 나머지 부분은 진 밖에서 불살라야 했는데 진 밖에 불사른 것은 저주받은 자라 버려진다는 의미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저주받은 희생 제물로 성문 밖 갈보리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저주를 대신 속죄한 희생제물이 되셨다.
서원을 이루었을 때는 서원 제를 드렸다.
서원 제는
흠이 없는 수컷으로 소나 양 염소로 흠이 없어야 했고
하나님께서 택하실 한 지파 중에 번제를 드리고
제물은 다음날 끼지 먹을 수 있었고 삼일까지 남아 있으면 불살라야 했고
자녀와 노비와 함께 여호와 앞에 즐거워 할 것을 요구하셨음은
화목제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상징적 의미가 있다.

구약의 서원은 제사제도와 함께 유효하지 못하지만
이제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인정한 후의 고백이며 감사라
자발적인 결심이지 하나님과 흥정(dealing)도 아니고 더구나 단판이 아니다.
이 서원적인 고백을 결심을 감사를 하지 않은 사람이 있는가.
뒤돌아보면 밥 먹듯이 결심했고 잠시 지나면  소홀 한 적도 많다.
궁핍에 처했을 땐 풍족한 물질을 주시면 가나한 형제자매를 돕겠다고 했고
어려움에 처하여 이 사건을 해결해 주시면 뭐하겠다 수없이 기도를 했고
그런 기도가 본의 아닌 일종의 서원적인 기도였고
아니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하나님과의 교만한 담판이라
거래(deal)였고 지키지 못한 기만이 되었지만 딴에는 하소연 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서원이 필요한가?
신약의 서원은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 과작별하고 배타고 수리아로 떠나갈 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
사도행전18:18]
이를 구약의 나실인으로서 서원이 끝나 머리를 깍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복음을 위하여 율법을 행하였듯 복음을 위한 덕을 위한 행위였을 것이다.
사도행전21:23절의 서원은 결례(Purification 부정한 것을 제거하는 정결예식)와 더불어
행한 율법이었다.
따라서 구약의 나실인은 신약의 결신(潔身)자 성도로
세상과 구별된 하나님의 공의를 배우고 간직한 삶을 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시인한 자로, 기쁜 소식 복음을 간직한 소망을 가진 자로
복음에 녹아있는 공의로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과 능력으로
공의가 이 세상에 이루어지도록
빛으로 오신 분으로 말미암아 빛의 자녀로 세상의 소금이 되어
정의로우시고 공평하시고 평등하신 의로우신 하나님의 공의를
선하신 분의 경륜을 이어받으려는
성도의 자발적인 결단이 서원이 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외치는 자의 소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요한은 나실인(Nazarite)이었다.
나실인은 일정기간 또는 평생 하나님께 특별한 서원을 하는 자로
남자나 여자나 서원자로 구별된 삶을 원하는 자원한자로
누구나 헌신하고자 하는 자는 나실인이 될 수 있었으며
삼손이나 요한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여 주신 나실인이 있고
사무엘처럼 어머니 한나에 의해 나실인이 된 경우도 있고
헌신 기간 동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고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았으며
시체를 만지지 않았고
나실인의 몸을 구별하는 표가 머리에 있음은 제사장의 머리 관 위에 표한 성패와
일치하고 이는 신약의 만인제사장인 헌신과 소명으로 성도가 된 예표가 된다
할 수 있고 그는 유대교의 제사장의 신분이 아니면서 권위를 인정받는
예언자도 아니며  스스로의 권위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베풀었다.
나실인(Nazarite)은  
‘헌신하다’ ‘구별하다’ 라 는 나자르(nazar)에서 파생된 말로
자기 몸을 ‘구별’ 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사람을 일컫는다.
세례요한은 나실인으로서 세상과 구별된 삶으로 낙타가죽의 옷을 입고
메뚜기 석청을 먹었고 전통적이고 형식적인 변절된 율법에 벗어나
변절된 유대교의 종교적인 개종을 권유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런 자들을
‘독사의 자식들’ 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하지 말라’ 비판했고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한 벌을 나누어줄 것을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을
세리들도 부과된 세금 이외에 거두지 말 것을
군인들에게 급료로 족하고 강탈하지 말고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 것을 외치자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 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누가복음 3:15]
그는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 라 고백한다.

이 시대 종교적인 위선과 교만에 물 들은 오만에 빠진 종교지도자과
비교가 되지 않는가?
이 시대 과연 우리는 그리스도를 어떠한 대상으로 바라보고 고백하는가?
우리의 의식주를 해결해줄 분으로,
우리에게 은혜만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시는 분으로...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부르심을 받은 신자, 성도를 말한다.
세상에 사나 세상과 구별된 나실인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의 사상과 전통과 의식주의 풍속에 구별된,
종교적인 의식과 전통에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이를테면
장로의 유전은
기원을 모세시대로 두고 모세가 기록한(성문율법 -토라-)
이외에 율법의 정결에 대한 해설로
모세오경을 해석하거나 상황에 적용시킨 구전 율법이나
실제는 포로시대 이후에 율법 전문가인 서기관 랍비들에 의해
B. C 300년경부터 구전과 고전을 모아서 집대성하기 시작하였고
B. C 70-66년경에 총 정리가 되어 약 6천여 항목으로
백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세히 규제하는 내용으로
그중 중요한 유전 613 개항 중 248개 항은 ‘하라’
365개항은 ‘하지 말라’로 되었다 하며
예루살렘 탈무드가 완성되고 A. D500년경에 바벨론 탈무드가 완성되었고
탈무드는 장로의 유전과 미쉬나 게마라를 합쳐서 만들어졌다는데
이 장로의 유전이 하나님의 계명 같은 위치가 되어
예수님을 핍박하고 백성들을 지배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 등은 율법을 무시하는 법 위의 법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행위를 탓하지만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은 것은 율법에 없었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을
장로의 유전에서는 부모님보다 하나님이 더 높기 때문에
하나님께 드렸다는 ‘고르반 Corban)적인 변절은,
고르반은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용도를 다른 용도로 쓸 수 없던 맹세의 말로 사용되었는데
장로의 유전으로 악용되어
‘고르반(하나님께 드렸다)’ 하면서 부모를 봉양을 기피하는 수단으로 악용돼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 죄를 범했다.
종교적인 신분의 직책으로 종교적인 지배자로서 그들이 정한 전통이 모세의 율법과
동등한 권위로 백성들에게 안식일등 각종 모세의 율법을 임의대로 세분화하여
백성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금식과 헌금을 강요했고
더하여 각종 성전 세를 비롯하여 종교적인 의무로 백성들은 고달픈 생활을 해야 했고
그들은 율법을 준수하는 열정을 보이려고
백성들에게 옷자락 끝에 술을 만들라 하였고
그것을 백성들보다 크게 만들어 자기 신앙이 더 좋은 것처럼 보이려 했고
성구함의 폭을 넓게 하여 손에 감고 이마에 붙이고 자신의 자랑으로 삼았기에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순종과 사랑을 버리고 위선과 교만과 자랑으로
율법의 형식적인 규정의 준수를 하나님의 계시와 동일한 수준으로 생각하였기에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들’ ‘회칠한 무덤’ 꾸짖으셨다.
외식(Hypocrisy)은
외형적인 태도와 내면적인 태도의 모순, 위선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보다도 그들이 가진 목적의 기도 등 인간의 욕구를 좇는 것 을,  
쿰란의 에세네파는 바리새파를 비난했다 전해진다.

우리의 현실과 비교하여 어떠한가... ?
전에 한국의 어느 대형교회의 유명한 목사가 집회 설교에서
‘성경을 너무 많이 가르칠 필요가 없다’ 는 기사를 읽고 황당했다
이어 ‘목사가 설명해 주는 만큼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니
그런 그를 ‘설교의 달인’ 이라니 누군가 대단히 미쳤다.
‘설교의 달인’ 이라 불러주는 사람이나 기사를 쓴 사람이나
‘달인’ 이라니 달통(達通)한 사람이라는 표현인데 왜 하필이면 ‘달인’ 이라는
한국사회의 유행적인 단어를 쓰는지 이도 답답하지만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무지한 사람인 내가 들어도 영 아닌데
이런 사람의 교인이나 이런 사람을 불러서 집회를 갖는 사람이나 교회나
그런 교회에서 대통령과 국무위원이 나왔으니 개탄스럽고
(정치적인 논쟁은 사양 함)
한국 교계도 마찬가지 이지만 이곳에서 그를 불러 집회를 가진 교회와
교계를 보면서 뭐라 해야 하는지 난감했다.
그는 또 ‘제자 훈련으로 성경공부를 많이 하면 교회가 망한다.
교회에서 말썽피우고 교회를 그만두는 사람은 제자 훈련을 한 사람들이다 , 라니
이는 자기 저주의 말로 들렸다.
믿음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So then faith cometh by hearing, and hearing by the word of God
로마서 10:17]
어떻게 나며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요한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20:31] 라고 기록했다.
성경을 알아야 하는데 모르고 어떻게 믿음으로 자신을 시험하고
어떻게 확증할 것인가?
그래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줄 알지 못하면 그는 버림받은 자 이다.

그는 평신도와 성직자를 가르는 분리주의자요 이원론자라
막무가내(莫無可奈) 자기 본위의 신학으로 성경을 바라보고 설교하는 자라
‘세상은 악’ 이고 ‘교회는 선’ 이 된 이원론적 흑백논리와 분리적인 신학을 갖고 있기에
이분법적 세계관에 갇혀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대형교회의 유지를 위한 자기 식 회유(誨諭)로
성경 구절 선택에 익숙해 있기 때문인데 자세히 들어보면 한국이나 이곳의 대형교회
목사들과 그들을 따르는 목사들의 설교가 그런 스타일이라 무언가 커다란 사회적인
사건이나 이슈에 망언을 서슴없이 하여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일은
우연이 아니다.
사실 오래전부터 ‘평신도들이 신학을 많이 알면 목사가 피곤하다’'는
말을 목회자들의 모임에, 그것도 신학교 교수라는 목회자들의 모임에 들었다.
그러면서 신학교를 운영하다니, 외식(Hypocrisy)도 이런 외식이 없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고 악한 날에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니
진리로 허리띠를 둘 루고 의의 호경심을 붙여 공의로서 마음의 중심을 삼고 보호하여
평안의 복음으로 준비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무엇보다도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서 어둠의 악한 불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And take the helmet of salvation, ande the sword of the Spirit,
which is the word of God:  에베소서 6:17]

돌아가서
오늘날의 코셔(kosher)음식은
정결 예식에 관한 음식 법으로 처음에는 신명기 14:21절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스스로 죽은 모든 것을 먹지 말 것이나 그것을 성중에 거류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파는 것은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
을 확대 해석하여 육류와 유제품을 함께 먹지 않는 법을 만들었다.
원래는 짐승이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짐승이라 어미와 새끼 염소를 함께
죽이지 말라는 적용을 ‘먹지 말라’ 로 해석하였고
이후 유대교 의식에 따라 도살된 육류가 코셔가 되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다는.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넌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전도서 1:9-10]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깨치지 못하는 허무,
이 허무한 시대에 누가 외칠 것인가?
하나님의 의(공의)를 거치는 자들이여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


11.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공의를 누가 외칠 것인가’

[공의와 정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즐겁게 소리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여 그들이 주의 얼굴 빛 안에서 다니리로다
그들은 종일 주의 이름 때문에 기뻐하며 주의 공의로 말미암아 높아지오니
주는 그들의 힘의 영광이심이라
우리의 뿔이 주의 은총으로 높아지오리니
우리의 방패는 여호와께 속하였고
우리의 왕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니이다. 시편89:14-18]

무리에게 말씀하신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But what went ye out for to see?
A men clothed in soft raiment?]

보고 들어서 믿고 체험하여 더 믿고
더하여 은사를 받으라는 유혹적인 기도원식 예배는
방언은 필수가 되어 주문을 하듯이 외우듯 연습과 훈련을 하여 받고
치유가 기본이 되더니 어느 때부터
사이비 부흥사나 사이비 선교단체들은 순회(巡廻)팀을 만들어
집회 때 강사의 시나리오(?)를 보조하고 지원하는 연출을 하게 되었다.
강사의 인도로 찬송가를 부르며 박수치고 ‘할렐루야’를 외치다가
‘보혈’ ‘피로 산 구원’등 자극적인 강사의 바람이 새는 마이크소리를 시작으로
회개하고 회개하고 회개하라는 강권(强勸)적이 되면서
부흥사가 팀이 된 여기저기에 섞여있는 사람들 중 한사람을 지명하여 나오게 하여
그 사람 머리에 손을 얹어 안수를 하면서 머리를 밀면 쓰러지고
바닥에 엎드려 입신하고... 그 속도가 빨라지면서 강사의 손이 몸에 대기만 하면
쓰러지는 일을 연출하는 시범(?)을 보이고
이제 참석자들에게 그리하여 군중심리처럼 쓰러지는
쓸어져야 죄 사함을 받은 믿음의 사람이라 여기는
이제 쓰러지지 않으면 아직 죄가 남은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회개하라는 강사의 핀잔이나 야단을 여러 사람 앞에서 들어야 했다.
시범을 보인 입신 자는 천국과 지옥을 보았다는 체험의 간증을 하고
또 다른 간증 자는 특별히 믿음 좋은 자로 인정된 자가 되었고
은사도 무당 식 귀신분별은사, 예언을 받고 예언을 하여야 최상의 믿음이 된 예언의 은사, 영혼을 읽는 분별의 은사, 등 온갖 분별없는 분위기 몰 이식
선동인지 협박인지 예배인지 간증인지 분간 못할 형태였고
다른 신유집회도 그런 팀을 짠 사람들과 더불어
개척한 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기존의 중소형 교회의 부흥을 위한 방편으로 누룩이 되어 전국에 유행처럼 번졌다.  
그런 형태의 모임은 공식처럼 매 순서 마다 회개와 순종을 요구할 때 마다
은사를 주고받듯 하면서 헌금을 강요하였고
그 집회의 헌금은 강사와 교회의 목사가 헌금을 나누거나
강사의 강사비와 유행처럼 번진 기도원 건축과 교회건축비로 사용하였고
집회의 마무리는 늘
지상명령인 선교를 위하여 'OO선교회, ‘선교연합회,
‘국내 국제 선교회, ‘선한...이웃, 마리아, 장애인..., 등 수 많은 단체의 이름으로
작정헌금 작정서를 나누어 주고 우편으로 헌금할 것을 다짐 받았다.

보여주기 식 치유 예배와 온갖 간증과 입신 경험의 간증 등
무분별한 행위로 체험이 성경으로 여과된 분별이 아니라
특정한 구절의 성경을 대입하여 그럴듯한 해석과 인식과 분위기 잡기 식 집회는
기존 예배의 엄숙한 형식에 얽매인 율법적인 환경에서 감성의 해방 같은
죄에서 해방 같은
죄의식의 해방으로 의식(意識)하여
복을 빌어주고 복을 받는
헌금을 낸 만큼 배로 차고 넘친다는 물질적인 세속화는 성경의 의를 초월하고
경험이 성경을 해석하고 이리 저리 성경을 짜깁기하는
반 복음적인 일이 다반사 이었다.

미국에 온지 십년 만에 또 똑같은 일들이 주위에서 일어났고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금이빨, 금가루 기적,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기적, 키 크기 기적, 입신, 성령의 춤
예언, 직접 계시, 선지자 학교 등 ...
그리고 오늘날 자극적이지 않으면 고리타분한
분위기 몰 이식 감성의 경배와 찬양, 같은 찬송가를 몇 번씩 부르고
외치는 구호와 박수...
그런 모든 자극적인 집회나 예배는
이를 테면 믿음이라는 기관차가 감성이라는 열차를 이끄는 형태가 아니라
감성이라는 열차가 믿음이라는 기관차를 끄는
믿음에 의(義) 보다 감성적인 자극이 의(義)를 끌기에
성경을 읽고 성경의 구절과 장을 대조하여 뜻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능력을
설교를 듣고 그런가 상고하는 능력을 상실한
인스턴트 음식이 음식의 고유한 참 맛을 잃게 하듯이
성경의 참뜻을 이해하기 보단 쉽고 간단하게 단정하여 다수의 뜻을 좇는
인스턴트 신자가 되어갔다.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는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자기중심적이 되어버린 이 세대의 우리들에게,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또 기억하지도 못하는 제자들에게 오천 명에게 떡을 떼어 준 예수님의 말씀은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And he said unto them, How is it that ye do not understand? 마가복음 8:21]
마음이 둔함을 탓하신다.
둔함은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 라
믿음이 있다하나 말씀이 가슴에 새겨지지 아니하고
마음의 중심에 깊지 않은 믿음의 뿌리는
작은 거슬림의 못마땅한 감정에
조금 힘든 환경에
작은 사건에 갈대처럼 끝없이 흔들리는 생활이 습성이 되어 벗어나지 못한다면
주께 주시는 평강과 평안을 누릴 수 없어
그리스도의 사랑만 입으로 외쳐대는 어리석음이
사랑을 말하고 노래하고 찬송하나 사랑 없는 사랑이 갈증이 되어
서로의 의를 바라는 굶주린 갈등이 되어 삶을 지배하면
화려한  자색 옷을 입은 자의 높은 마음을 품은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여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 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니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며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니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룰 수 없는 [디모데 후서3:2-7]
그런 자들은 화려한 가운이나 자색 천을 걸치기를 권위의 상징으로 좋아하고
예수님과 신자의 중보자(仲保者)를 자청하여 자기 자랑의 교만에
스스로 침몰(沈沒)한 자 이거나 그들을 좇는 자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입으신 자색 옷은
친히 세상에 오셔서
로마 군병이 조롱한 유태인의 왕으로서 우리의 왕으로의 상징 이였고
친히 우리의 죄를 위하여 종교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 의하여 돌아가심으로
친히 낮아 지셔서 언약을 이루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그 언약을 증거하고
다시 오시어 낮아지고 낮아지셔서 사치스럽고 화려한 예루살렘이 아닌
눈부시고 호화로운 헤롯 성전의 예루살렘이 아닌
이방의 갈릴리
선지자가 나올 수 없다는 갈릴리
빈자(貧者)들의 갈릴리
경멸의 땅 갈릴리 그 길로 향하셨다.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태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그에게 침을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도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마태복음27: 28-31]

홍포(Scarlet fobe)는 홍색 염료로 물들인 홍색 옷으로 왕의 권위를 상징했다.
마가는 홍포를 자색 옷으로 표현했고
[예수에게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And they clothed him with purple, and platted a crown of thorns,
and put it about his head, 마가복음 15:17]
요한도 자색 옷으로 표현했다.
자색 옷도 왕을 상징하는 색깔의 옷이고
성막을 지을 때 장식으로 쓰인 자색 실,
성막의 기구를 싸 두던 자색보자기 등이 있으나
자색은 권위의 상징이자 존귀를 상징이며 성(聖)스러운 상징이지만
그러나
자색 가운을 입은 종교지도자는 이미 제사장이 되어
예수님과 신자의 중보자(仲保者) 노릇을 하기에
그런 자 무리들의 모임 공동체는 투명할 수 없고
투명하지 못함은
신자와 신자사이에 높아 질려는 교만이 직책이 되어
낮은 곳으로 오셔서 높아지신 예수님의 복음이 사랑이 됨을 알지 못하고
진리에서 멀어졌기에
공의와 멀러진 까닭이었기에
우리가 사는 미국이 신앙의 공동체로 공의가 시들었기에
정의가 희미해져 가고
그 원인은 초심으로 살려는 청교도 신앙이 둔해졌기에
이 도시 저 도시에 화려했고 거대했던 교회는 황폐(荒廢)한 건물이 되었고
수많은 church street 의 교회는 건물만 남아 교인이 없는 거리가 되었듯이
한국교회의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의 건축과 더불어
신앙이 초심을 잃은 종교집단이 되어 감은
교회사의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처럼 역사에 사라지는 모습을
눈으로 보여주시고 경고하신다.
기억하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리게 한 무리는
다름 아닌 호화(豪華)한 대제사장이며 제사장이고 종교지도자이며
그들을  따르는 맹신자 광신자임을 잊지 말아야 함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전에 또 배교가 있을 것임을
성경은 우리에게 일러주어 또 경고한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나나기 전에는
그 말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데살로니가 후서2:3]

공의를 잃어버린 교만의 길은
박수 받기 좋아하고 그 박수에 열광하는 권위와 존경의 길은
고귀하고 존귀한 길 같으나
비천하고 미천한 길이라
이미 세속화된 신앙이라 분별력을 잃어버렸기에
그래서 보고 듣지도 못하고 자기 합리화의 긍정의 늪에 빠져서
자극이 없으면 맛을 느끼지도 못하고
자극이 없으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마음의 둔함은
영혼의 눈을 가려서 단순한 진리가 혼미한 머리와 혀에 머물러
몸에 미치지 못하는 지식에 함몰(陷沒)하면
그 지식이 자신을 보호하여 주는 울타리가 아니라
자기 지식에 갇혀 습관적인 예배와 관례(慣例)적인 의식에 머문
예배의 지속(持續)이 타성(惰性)이 되어 젖으면 굳어지고
둔한 마음에 둔한 영혼이 길들려져 배교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주위를 돌아보라
얼마나 사이비가 많은지
이 세대를 본받고 이 세상을 본받아 새롭게 변화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곡해(曲解)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세속의 욕심에 탐욕(貪慾)한 자들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And be not conformed to this world:
but be ye transformed by the renewing of your mind,
that ye may prove what is that good,
and acceptable , and perfect , will of God. 로마서12:2]

각 사람에게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지 않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은 자들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to every man that is among you,
not to think of himself more highly than he ought to think;
but to think soberly,
according as God hath dealt to every man the measure of faith.
로마서 12:3]

돌아보라
보이는 만큼 그 만큼의 믿음의 분량으로 라도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의
맘몬(manmon)의 우상이여.
세상을 보라
세상의 막장 연속극을 보고 감동하고 흥분하고
연속극의 이야기가 설교에까지 등장하는 비극을.
세상의 언론을 보라
세상의 언론이 공정하지 못함은 정의 보다 인기를 모색한 선전으로 빛바랬고
시대와 사상에 굴절된 정의를 정의라 하기에
충동과 선동을 조장함은
회칠한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의 건물에서 일어나는 진리와 무관한
세속화된 획일한 인간관계와 맘몬니즘과 무엇이 다른가.
빛이 곧듯이 빛이 밝듯이 진리가 그렇듯
투명하지 못한 조직과 재정은 이미 진리에서 멀어진 상태라
진리를 얘기 하고 들은 들 진리의 변함없음에 떠난
진리의 항구를 떠나 세상의 거친 풍랑에 떠밀려
언제 부셔질 줄 모르는 난파선과 같은 현대의 교회는
이미 공동체의 공의를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리고 있다.

이제는 누군가 외쳐야 한다.
누가 외칠 건가
공의가 사라진 삭막한 광야에서
사랑이 메마른 광야의 공동체에서.

너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말을 하는 사람이냐?
아니면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냐?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하늘이여 위로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이사야4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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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흔들리는 갈대처럼
하나님의 공의가 흔들리는 공동체(교회),

첫 번째의 기대를 간직하고
두 번째 도착한 오산리 기도원에는
눈이 쌓이고 녹아 황토 흙이 보이는 황량한 벌판의 언덕아래에 입구가 있어
방범 초소 같은 임시초소(?)가 설치되어 입장료를 받았고
찾아간 기도원의 숙소는 가건물로 합판을 깔아 만든 마루에 장판을 씌운
강당 같은 커다란 방에 어림잡아 이백 명 넘을 사람들로 붐비었고
입구에 만들어 놓은 신발장의 신발이 넘쳐서 바닥에 이리 저러 흩어져
나중에 외출할 때면 신발을 찾기가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먼저 자리를 잡아야 가지고 간 담요와 세면도구가 들은 가방을 놓아야 할 텐데
벽면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로 인해 그 옆에 자리를 잡고
가지고간 담요위에 앉아 기도를 하였으나 강당 같은 커다란 공간에
통성기도와 찬송으로 목쉰 칼칼한 음성의 말소리와 찬송가를 부르는 소리
방언 기도하는 소리 등 온갖 소리는 울림이 되어 떠들썩하고 어수선 하였고
겨울이라 난방을 하고 조그만 창을 막아놓았기에 환 풍이 되지 않아
퀴퀴한 냄새와 발 고린내 같기도 한 냄새는 비위를 상하게 하였고
정신 집중을 할 수 없어 짧은 기도를 하고 밖으로 나오며 바라본 실내는
피난민 수용소가 아마 그런 모습이었으리라.
아니 피난민이리라
세상의 비바람에 날리는 가벼운 티끌 같이
삶의 소망과 절망의 경계인 절벽에서 구원을 잡고자
새해를 며칠 남겨든 연말을 가족과 친지를 떠날 만큼 절박하고도 가난한 사람들
축농증 심장병 천식 등의 환자에다
겨울이라 더운물에 목욕도 못하여 피부병 걸려 이중으로 힘든 사람들
가정문제 사업실패로 의지 할 곳 없어 머물며 이제 주거지가 되어버린 불쌍한 사람들
굶주려 눈이 힁하여 힘이 없어 바닥에 두러 누운 사람들
오늘이 절박한 그들의 문제...
연말이라 붐비지 않을 거라 짐작했고
잠시 다시 온걸 환경으로 실망했던 자신이 한 없이 못났음을 한탄했다.

저녁시간이 되어 식당을 가신다는 아주머님께 여쭈었더니
식권을 사야지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알려주셨지만
이미 금식을 하고 있어 식권이 필요 없지만
식사시간이라 돈이 없어 배고픈 사람들의 군침을 삼키는 소리를 외면할 수 없어
수중의 돈을 어림잡아 헤아려 보았고 금식을 하기에 준비한 돈이 넉넉하지 않아
망설이다 중년의 남자 분께 식권을 사드릴까 물어 보았으나 얻은 식권이 있다는 대답을
들었고 그 분의 처지를 숨기는 듯 한 그 분의 말과 표정으로도 알 수 있어
그 분에 대한 연민과 망설였던 내 마음의 연민이 겹쳐져
자신을 숨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녁식사 시간이 지난 후
모든 사람은 00성전으로 저녁예배를 드린다는 어느 분의 고함소리를 들고
피곤하고 배고프고 힘이 없어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모두들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해야 한다는 관리인 인 듯한 분의 성화에
주위를 돌아보니 나 혼자 뿐이었다.
어두운 밖을 나가 도착한 00성전에는 울부짖는지 고성인지 모를 소리와 시도 때도 없이
‘할렐루야’ ‘주여 주여’ 목터지는 인도자 목사나
이를 따라 화답하는 사람들의 함성으로 정신이 사나운데
‘예수 이겼네 예수 이겼네 예수사탄을 이겼네’
‘내주의 보혈은’ 등의 똑같은 찬송을 반복하여 악을 쓰듯 목이 터져라 부르고
볼륨을 올려놓은 마이크 음성에 ‘믿씁니다 믿씁니다’ 는 바람이 새는 듯 한 음성은
귀를 막고 싶은 만큼 휭휭 거렸다.
이윽고 설교 전 찬송이 끝나자 헌금 바구니를 돌리고
또 찬송 몇 곡을 군가처럼 부르고 헌금 걷으며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양심이 있으면 죄만큼 헌금을 내야 선교에 쓰고 그만큼 죄가 사함을 받지 않겠냐’
‘죄로 인해 병이 걸렸으니 회개하고 은사를 받으려면...’
이상한 논리로 헌금 결단을 촉구하는 강압적인 말투도 듣기 싫었지만
설교도 많이 내야 많이 복 받는다는 내용으로
중간 중간에 회개기도 하고 회개 찬양이라고 부르고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
죄를 만들어 회개하는 듯하여
설교자가 입은 가톨릭 신부 같은 가운이 이상하게 보이더니
무당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는 조목사의 이야기와 최자실 전도사의 이야기
그리고 설교를 마치고 또 헌금
예배를 마치기전 또 헌금
한 번의 예배에 네 번의 헌금과 강제적인 새벽예배, 오전예배, 오후예배, 저녁예배 등
쉴 틈 없는 예배와 헌금 시간은 매일 계속되었고
어느 날은 예배 전에 후에 광고를 하였다.
‘지방에서 올라오신 목사님은 따로 방이 준비되어 있으니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따듯한 독방을 쓰고 다른 사람은 강당같이 넓은 방에서 추위에 떨고...
화가 났다.
인간 세상이야 차별이야 그렇지만 기도원에서 차별이라니
광고하는 사람의 멱살을 잡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고 밖으로 나와 바람 찬 동산을
거닐었으나 추위에 떨기 까지도 화는 누그러지지 않아
친척의 기도제목을 갖고 왔던 목적을 되새기며 진정하려 했고
이곳 분들과 처지와 내 처지를 비교하여 억지로 감사하려했다.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은
병에 걸린 어린아이와 같이 온 부모도 있었고
내 나이 또래는 20대는 없었지만
지방에서 올라온 삼사십 오십대의 아주머니와 아저씨들 들이 많았고
노인들도 더러 있어 다양한 사람들이 한 방을 쓰면서
그들의 공통점은 급박하게 응답을 받고 문제해결이 되기를 바라기에
더하여 유행 같은 방언을 받고 싶어 하기에
그 추운 날 낮과 밤으로 동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였고
어느 이는 나무를 하나 잡고 기도하면서 간절히 몸부림 쳐서
나무 하나를 부러트려서야 방언을 받을 수 있었다 하여
이에 동요하여 또 동산으로 올라가는 사람들
어느 이는 하나님의 응답을 듣기위하여 습기 찬 토굴에서 큰소리로 고함을 치듯 기도했고
또 그들은 그들의 응답되기를 바라며 예배의 기도시간이나 어느 때나
방언 받은 것을 어린 아이가 자랑하듯이 떠들썩하게 기도를 하기에 언짢았지만
그들은 한 해가 시작되는 연말에 가족과 떨어져서 기도원을 찾을 만큼 절박하고 심각했기에 그들의 기도가 응답되기를 내 기도제목과 함께 기도했으나
답답한 마음은 끊이지 않았다.
불쌍하고 가난한 그들의 금식과 방언과 기도응답과 같은 자랑이
밤이면 이곳저곳의 소곤대는 말소리로
이따금 고함치는지 기도하는지 모를 소리로
힘들게 잠들어 자다 깨고 보면
앓는 이의 신음소리가 짜증스러워 이곳에 온 것을 후회하기도 했지만
이내 불쌍한 그들의 처지에 내 자신을 비교한 자신이 한심스러워 스스로 나무라고
그들의 고통의 신음을 탓한 잘못을 용서하시길 기도하다
잠을 설치고 아침을 맞이하면
그들과 비교하여 안심 하는 미련함과 어리석은 비교가
아직도 날카로운 칼이 되어 가슴을 찔렀고
무엇이 얹힌 것처럼 답답하여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예배를 빙자하여 빚 진자 에게 빚 독촉하듯이
예배시간에도 교대로 돌아가면서 설교하고 수금 하는
그들의 말투 ‘하늘나라에 금고’ ‘하늘나라 확장’이라는 말이 가증스러워
속이 미식 거려 나중에는 얼음이 붙은 수도꼭지에 나오는 지하수 물을 이가 시리게 마셔
더러워진 속을 닦듯이 마시고 마셔도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일주일의 금식도 채우지 못한 다섯째 날
조용기 목사와 최자실 전도사가 계시를 받아서 짓기 시작했다는 기도원을
이를 성지를 여겨 모여든 사람들을 떠나오면서
탄식하는 마음에 기도원을 들어오기 전 보다 더 마음이 무거워
주님은 내게 왜 이런 모습을 보여주시는지 화가 났다 감사했다 또 부아가 났다.
임시초소 같은 입구를 나오니
금식을 위하여 한 동안 음식을 줄이다 굶은 허기가 몰려왔다.
입구 앞 몇 식당 앞에서 머뭇거리다 식당에 들어가
빨리 준비되는 국물을 시키고 허겁지겁 음식을 몇 숟가락 먹을 때
눈물이 뚝배기 속의 국물에 떨어졌고 마음에 파문이 일어
목이 메여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 없었다.

돌아온 집에서
아직 내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못했음을 알았고
허기지고 휑한 마음에 먹은 반 그릇도 채 되지 않는 떡국 물을 먹고 체하여
그 후 떡국을 먹으면 체하여 오래 동안 떡국을 먹지 못했고
빈속에 먹은 음식으로 인해 위장이 탈나 오래 동안 고생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너는 기도원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성전으로 둔갑한 기도원 이냐?
선지자로 둔갑한 무당이냐?
세속에 절은 돈을 밝히는 바리새인 이냐?

그 누구도
생명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본받겠다는 자라면
십일조 등 어떠한 헌금을 강요할 수 없고
강요하는 마음에는 이미 생명을 경시(輕視)한 자라
그 누구라도
더하여 작정 헌금을 강요하는 그 마음에는
이미 주님의 사랑을 잃어버리기로 작정한
신앙인에서 사이비 종교인으로 변절한 변절자의 욕심이고

은사를 사모하라 하는 말은
은사 받기를 원한다면
한 알의 씨가 되어 죽어야 생명을 얻듯
나의 욕심과 나의 생각마저 버려진 마음의 중심에
그 자리를 대신하여 채워지는 은사라
믿음으로 믿음을 세우고 더하여 덕을 세워
공동체를 세우라는 공동체를 사모하라는 말로
동체를 위하여 헌신 하겠다는 결심이 결여된
마음의 정함 없는 은사는 탐심(貪心)이며 부당한 욕심이며
이를 가르치지 못한
이를 인지(認知)하지도 못한 기도원식 은사는
이미 은사가 아니다.

그 후
기도원 짓기가 유행하였고
기도원식 예배를 받아들인 교회들이 많아졌고
조용기 목사의 음성을 흉내 내는 목사들과 부흥사들은
그들은 며칠을 금식하였다는 금식 기간을 자랑으로 삼아
광야에서 시험을 받은 예수님의 금식 40일을 따라 40일 금식을
거룩한 금식의 기간 이라며 자랑으로 삼았고
그들과 야합하여 수많은 종류의 헌금을 만들고
헌금과 복을 연관시켜 믿음의 평가 기준으로 삼았고
더해 교회를 짓게 되면 교회가 성전으로 둔갑하였고
기도원이 그랬고
방언이 믿음의 척도로 유행처럼 변질되어갔고
방언의 자랑으로 예배 중 방언 기도로 경건한 예배가 사라졌으며
신유 은사집회, 심령 각성 부흥회, 치유 은사집회 등 수많은 기적을
보고 믿으라는 체험 집회가 늘어나면서
예언을 하고 귀신을 쫓고 입신하고 환상을 보고 영분별을 하는
능력의 은사를 추구할수록 누룩이 번성하여
그런 헌신에 반비례하여 교회는 세상의 질타(叱咤)의 대상이 되어갔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 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며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베드로후서 2:14-16]

헌금의 종류를 수 없이 만들어 놓은
외식하는 현대판 바리새인은
어린아이와 같이 무조건 믿으라는 분별없는 맹신자를 양산(量産)하였고
열성은 있으나 의가 사라진 광신자를 양산하였고
보여주기 식 수많은 은사예배와 간증
천국 간증, 지옥 간증, 입신, 예언, 치유 간증 등 수 많은 행위로
자신의 능력이라 자랑으로 삼는 자기도취의 신실한 의(義)로
박수받기를 원하고 존경받기를 원하는 자기 능력의 나타냄의 영광으로
공동체의 의라는 본연의 의는 사라지고
기도도 하나님의 의(義) 보다 자신들의 목적이 하나님의 의 인양
목적을 위장하거나 호도(糊塗)하여 기도했고
진실하지 않은 외식을 행하는 자들이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보다 헌금이 중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과 하나님의 의가 사라진 장로의 유전을 지키려는 전통을
예수님은 속은 더러우면서 깨끗한 척 꾸미는 회칠한 무덤과 비교했음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떠난 기복신앙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떠난 세속화는 물질 만능의 맘몬(Mammon)은
하나님의 공의에서 떠난 가증한 행위를 일삼고
천국 문을 가로막는 거짓 선지자는
멸망으로의 회귀(回歸)라 경고 이었고 경고이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화가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 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화가 있을 진저 눈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 지라 하는 도다 마태복음 23:15-18]

광야와 같은 세상의 삶에
사치에 물들면 영혼이 황폐하여 지고
화려한 신앙을 추구(追求)하면 믿음이 변절되었다는 반증이고
광야와 같은 세상의 교회가
세상의 화려함을 추구하면 진리와 멀어진 겉모습만 남은 종교의 나락으로 떨어져서
교회가 천국의 모형이 되기는커녕 세상의 영리를 목적으로 존재하는
진정한 교제가 사라진 기업 같은 모임이 되어
목회자가 세상의 CEO인 최고 경영자라 스스로 칭하면
이미 그는 교회의 머리가 되었고
그런 그가 설교가 ‘말씀 선포’ 라 하면
자기가 그린 그림인 자화(自畵)로 교회를 재단하는 자라
진리를 이미 짜깁기한 상태라
글과 설교가 자기 자신의 신앙고백이 아니기에
그의 설교는 예문의 적응에 중독된 자기 고백을 갖추지 못한 화려한 말의 잔치고
의식을 갖춘 듯 하나 허례(虛禮)일 뿐이다.
그런 교회는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였건만
이미 교회는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의 안식과 나눔의 교제가 사라진
교회가 무거운 짐을 지워주는,
온갖 헌금을 강요하고 작정하게 하고 헌금자를 주보에 공포하면
이미 은혜를 복(福)으로 연관시킨 결부(結付)라
헌금의 금액이 믿음의 측도가 되면
교회의 건축이 ‘성전 건축’ 이란 미명(美名)이 되면
성전이 헐림을 예언하시고 선포하신 예수님의 복음에 반한 반 복음적인 행위라
구약의 성전 건축을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인 교제의 회복을
예배의 회복으로 회복하려는 진정한 의미를 무시한 무지로
이미 교회는 교회의 의(공의)와 목적과 방향을 잃어버린 종교적이고 세속적인 행위라
화려한 왕궁을 바라보는 행위라
화려한 가운을 입고 사치한 종교인의 허세는
반 공동체의 길인 종교적인 획일한 모임으로 변절되어
생명을 구하러 오신 예수님의
생명인 사람을 바라보지 못하고 화려한 건물인 교회를 바라보게 되어
하나님을 교회에 가두고 의와 단절된 종교인의 집단으로 되어간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의 모임이고
닿아올 보이지 않는 성전(천국)
즉, 천국의 모형이 됨을 알지도 못하여 인지(認知)하지도 못하고 인정치 않아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기를 포기한 공의의 무지라
세상의 도덕과 윤리에 미치지도 못하여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너는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선지자 적인 사명을 가진 자냐?

스스로 지도자라 칭하는 자가 많은 세대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되고자 하는 선생들이 많은 시대
진정 지도자가 무엇인지
진정 선생이 무엇인지
진정 우리의 모습, 우리의 교회가
예수님이 세우시겠다는 교회의 모습인지
그런지 묻고 싶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한복음17: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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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자녀라는 공의의 공동체 (교회)’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But what went ye out for to see?
A man clothed in soft raiment? Behold, they which are gorgeously apparelled,

and live delicately, are in kings' courts.
누가복음7:25]

80년 초 로 기억된다.
그날은 더 마음이 무거웠었다.
몇 일전 들은 큰누님 같고 어머니 같은 분의 가정 우환 소식으로 마음을 태우다
전에 읽은 최자실 전도사의 금식에 관하여 읽은 내용이 떠올랐다.
금식은 하나님과의 직통전화이고 금식을 어떻게 하여야

육과 영에 유익한 금식의 방법에 대하여 써놓은 책의 내용이 떠올라
일주일간의 휴가를 금식하며 그분을 위하여 기도하기로 결정하고
일주일을 금식준비 기간과, 금식 후 일주일을 음식을 조절하기로 하였는데
우선 일주일간 금식 준비를 하느라 첫날은 세 끼의 음식을 줄이고
둘째 셋째 날은 세 끼의 양을 더 줄이고 매일 이렇게 음식을 줄이다
금식 이틀 전에는 소량의 쌀로 미음을 만들어 두어 숟가락 먹고
금식 전날에는 쌀을 끓인 물만 몇 숟가락 마시고 허기질 때 마다 물만 마시고
일주일의 준비가 끝나 두 번째로 오산리 순복음교회의 기도원으로 갔다.

첫 번째 갔을 때에는 벌판에 건물을 짓기 위하여 기초공사를 하고 있었던 모습으로
커다란 천막을 쳐서 사람들을 수용했던 것 같으나
많은 사람들이 천막의 예배시간 이외는 언덕의 나무아래서
혹은 바위아래나 위에서 통성으로 기도하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소리를 치며 ‘주십시오!’ ‘할렐루야’ 등 큰소리로 외치듯
기도하는 건지 부르짖던 건지 어느 곳이든 때든 조용한 시간이 없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의 심정은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좋고 못 듣더라도

성경의 맥(?)을 찾아야 갰다는 심정으로 도착했지만
마음은 심란하고 주위 분위기도 뒤숭숭하여
동산으로 올라가 밤을 맞으며 침묵으로 기도하다 작은 소리를 내여 기도하고
이내 하나님과 대면하듯 대화하듯이 기도를 하고 지치면 묵상하고

그렇게 밤을 새웠지만 날 이새면 기도의 기억마저도 희미하여 힘이 빠졌고
육체적인 배고픔과 갈증으로 고통스러웠으나 삼일이 지나고 사일이 되었을 쯤
배고픔과 갈증이 사라지고 맑은 정신이 난 후 땅바닥에 자다 기도하다
바위위에 앉아 성경을 읽다 드러누워 하늘을 바라볼 때면
주님의 형상을 구름으로 나마 만나고 싶었고 음성을 듣고 싶었으나
흔히들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던 음성은커녕
성경을 읽을 때 그 뜻의 더 자세한 설명을 깨달게 되거나
구절이 떠올라
어느 구절이 내게 특별히 주시는 말씀이 되기를 원했으니
아무런 응답을 받지 못한 실망한 마음에 몸은 힘이 다 빠져도 눈을 감을 때 마다
꿈속에서 나마 주님을 만나길 바랐으나 그 기대는 바램 일 뿐이었다.
어느 날 눈을 감으면 잠에 취하고 비몽사몽의 상태가 되어
눈을 뜨면 힘이 없어도 억지로 기도를 했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하늘은 높아서 푸르고 그윽하여 심오하고 깊어 깊이 마음을 감싸고
솔솔 부는 바람은 미풍(微風)이 되어 시원하고 상쾌하여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하고
눈에 찬 하늘의 모습은 세상을 떠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낯설 으나
언젠가 보았던 경치가 되어 하늘에서는 별들이 닿아오고 있었다.
아니 별들뿐만 아니라 커다란 하늘이 닿아오고 있어 꿈인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바라보아도
하늘이 천천히 닿아오고 있어
너무나 웅장한 광경에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놀라 몸이 움직일 수도 없이 굳어버렸다.
이것이 무슨 조화(造化) 인가?
내가 죽었나? 생각이 들기 까지 했을 때 알게 되었다.
아! 하늘나라구나!
내가 닿아오는 하늘나라를 잊었을 뿐
이렇게 닿아 오고 있었구나!
하늘나라를 보는 나의 몸가짐과 과 마음가짐 이런 모든 것들이...
아! 이것이 은총이구나!
내 영혼은 이미 노래를 하고 있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 영혼을 고이 싸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찬송가의 제목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이고
원 제목은 ‘놀라운 평화’ ‘Wonderful Peace’ 이다.
작사 코넬(W. D. Cornell)은 전도사 이었다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와 영혼의 참된 쉼을
자신의 고백과 체험에 머물지 않고 다른 이를 예수께 인도하여
그 참 평화를 맛볼 것을 담은 전도의 메시지다.
그가 1889년 가을 감리교 캠프 집회에서 묵상중 하나님의 참 평화를 체험하고
참 평화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 이외는 참 평화가 없음을 체험하여
그 내용을 옮겨 시로 지었으나 그가 쓴 종이를 잃어버리고 잊었고
작곡가 조지 쿠퍼(W. George Cooper)가 캠프에서 우연히 이 종이의 시를 발견하고
감명 받아 즉시 오르간 앞에서 곡을 만들었고
코넬과 쿠퍼는 서로 모르는 사이에서 이 찬송이 만들어 졌다 전해진다.)

이는 내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꼈고 영혼이 찬양한 놀란 일이지만
작사자 코넬를 통해 가사를 들었고 작곡가 쿠퍼를 통해 음을 들었으니
그들과 내가 같은 하나님을 찬양했고
그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평화를 보았듯이 내가 그랬고
우리가 주님의 축복을 받고 누려야 할 평화 아니 이미 받은 축복
이를 성경으로 확인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말씀은 내게 와 있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The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in earth, as it is in heaven
마태복음 6:10]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The Kingdom coming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as it is in heaven'
하늘에서 이루워진 것 처럼
재림... 닿아오고 있는 현실 ...

Second Coming (그리스도의 재림)은
신약의 헬라어의 파루시아(Parousia)로 사용하였고
‘파루시아’ 라는 뜻은 일상적인 대화에서

중요한 방문객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의미하며
주의 재림이 갑작스럽게 올 것을 의미하며,
이곳에서 많은 글을 쓰지 않았지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이라는 표현을 수없이 하였고 그 말씀을 거의 완벽할 정도로 이해한다 하면서도
내 신앙에 큰 걸림돌이 된 구절이 이 구절이고
내가 잘난 믿음이라서 환상을 보았던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내 믿음의 능력 밖의 은총을 입었기에 그것이 문제였고
그로인해 감당 못하는 의무감 같고 아니 내 적은 믿음으로 인해
그 후 신앙생활은 수많은 갈등을 하고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으며
왜? 왜? 제게 감당치 못할 것을 보여 주셨습니까?
주님께 원망도 많이 했었다.

성경에 첫 환상이라는 단어는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울 때이다.
[이 후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After these things the word of the LORD came unto Abram in a vision ,
saying, Fear not, Abram: I am thy shield, and thy exceeding great reward.
창세기15:1]
비전(vision)은
계시(환상)을 뜻하지 일반적인 소망, 꿈, 목표 목적을 뜻하지 아니하고
또 야망이나 도전도 아닐뿐더러 전혀 욕망을 뜻하지 아니한다.
이는 계시(Revelation)을 뜻하는 헬라어의 아포칼립시스(apokalypsis)는
감추어있고 덮어져 있던 것을 열어보는 의미로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복음을 의미하셨고
바울은 비밀이라는 말로 복음을 의미하여 설명했듯이
성경은 계시를 전달하고 보존하기 위하여 쓰여 졌다 할 수 있고
계시의 목적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구원과 교제를 위함이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20:31]

(그때부터 ‘Vision' 이라는 단어를
아버지께서 ‘감사’ 라는 단어를 성경과 찬송가의 첫 장에 써놓았듯이
나도 ‘Vision' 이라는 단어를 써놓았고 ’샬롬‘ 이라는 단어도 오랫동안 애용하였지만
훗날 그 두 단어가 뜻이 왜곡되어 쓰이게 되고 남발이 되는걸 보면서
변변하지 아니한 마음에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더하여 계시나 환상 이런 체험적인 것을 자랑하기커녕 조심하고
그런 체험의 간증을 듣고 싶지도 않았고 이제라도 궁금하지도 않다.
이런 간증도 이곳에서 글을 쓰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나름 전개하기 위한 수단일 뿐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으나 글을 읽는 사람의 이해를 돕기 위한 방편으로
쓰는 자의 형편을 이해하여 편의를 위할 뿐 체험에 대한 토론은 사양하고 싶다.
나는 신비주의자도 아니고 은사 타령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부족하나마 하나님의 의(공의)를 성경에서 보아 나누고 싶을 따름이고
자신을 지킬 만큼의 믿음의 분량을 가졌다 짐작하나 문제 많은 사람이고
특별하여 어떠한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도 아니나
우선 나를 지키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알기위하여 성경을 많이 읽었고
미련한 사람이라 더 읽었고 성경공부를 많이 했지만 진전이 더딘 사람이다.
그래도 만약에 누군가 계시를 받고 싶다면 성경을 읽으라 추천하고 싶다.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을 인도하시는 성령님께 간구하고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식이나 경험, 선입감이나 전통적인 버릇 등을 내려놓고
중요하다 생각되는 구절을 외우며 처음 성경을 읽듯이 읽고
구약과 신약을 연결되고 구약에서 구약이, 신약에서 신약이 연결되려면
성경을 읽는 버릇이 되어야 한다.
성경이 이미 우리를 향한 계시이기에 특별한 계시는 없다고 보지만
은사란
우리가 성경의 특별하고 대단하게 여기는 은사뿐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분량대로, 분량을 위하여
결국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하여 은사를 주신다고 믿는다. )

그 후 내 가슴에는 한동안 불이 있었다.
불의 할 때는 신앙의 양심으로 가슴이 타는 듯한 통증을 느꼈고
교회에 가면 목사의 설교가 공동체를 잘못 설명 하는지 이내 알게 되었고
교회가 십자가 무늬만 남은 공동체로 보였고 교인 중 그중 몇 사람은 신자로 보이는데
많은 사람들은 웃는 얼굴이지만 온갖 인상은 쓴 사나운 모습으로
욕심이 가득한 얼굴로 보여 괴로워했고
이 구절로 그 당시 위로를 많이 받았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지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나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베드로전서 4:12-13]

닿아오는 하늘나라를 본 것은 틀림없는 은총을 체험했으나
이 일로 인하여 감당 못할 믿음의 분량으로
내 신앙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며 인생마저 송두리째 흔들릴지 미처 몰랐다.
물론 그 고통만큼 적은 믿음의 성장을 주셨지만...
하늘나라는 무엇인가
우리가 육신이 죽어 돌아가야 할 곳을 본향을 하늘나라라 하고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며 믿음의 실상을 언급하면서 본향을 설명한다.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브리서11:16]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
(wherefore God is not ashamed to be called their God ...)
에비하신 곳, 천국이다.
천국(Heaven)
세례요한이나 예수님이 “회개 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는
이루어질 천국
이루어진 천국(예수님의 부활)과
심판으로 돌연히 임할 천국은 하나의 천국이다.
오늘날의 천국이 하늘에서 이루어졌고(‘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지상에 있는 교회(건물이 아닌 성도)에서 이루어지는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그래서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다.

하나님의 공의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천국)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려는 하나님의 통치의 연장을 이르며
하나님의 자녀 된 자의 도리 즉 공의를 이 땅에 이루려는 교회를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라 한다.

주님의 몸 된 교회라 하는 교회는
주님이 머리가 되시며 우리는 각 지체인
각지체이기에 한 지체가 한 지체를 일컬어 자랑하고

중해지고 높아지는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 같은 자녀로
공평하며 평등한 (하나님의 공의처럼)관계이며
교회의 직책은 일하고 섬기려는 지체(肢體)의 기능이고
활동 역할이다.

믿음이란
어렸을 적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아
성경을 부분적으로 알아
나의 믿음을 자랑하고
믿음을 더하기 위하여 기적과 이적을 보기위하여
치유집회를, 성령부흥회 등을 찾아다니며
자기 유익을 위하여 육신의 병을 혹은 영혼의 평안을 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육과 영혼에 완전함이 아닌 반쪽의 치우침 이고
그런 집회에서 은사를 받기를 원했더라도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듯이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어
(Beareth all things, believeth all things, hopeth all things, endureth all things.)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의 공동체 교회가 천국의 모형이 되기를 원하며
온전한 것이 올 때 까지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듯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공동체에서 부족한 사람이더라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 서로 사랑하여 공동체를 세우라는 말씀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사랑하라 요한복음13:34]
계명(Commandment)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믿는 자를 향한 명령이고
이것이 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척도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믿는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
우리가 지켜야할 하나님의 공의라
그래서 공동체의 뿌리며 줄기인 근본이라
그래서 믿음의 분량이란
주님을 사랑하는 만큼의 분량
같은 몸의 지체로서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만큼의 분량
그 만큼의 분량이고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 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2:30]
이웃사랑(그것이 전도든 무엇이든)은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이루는
우리의 근본적인 삶의 태도이며 우리가 향하는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그 사랑이신 주 우리 그리스도와 동행하면
교회라는 공동체는 천국의 모형이 되어 지고
진리는 사랑과 함께 하고
사랑은 진리와 함께 하여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어 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늘나라...
오늘날 천국의 모형이 되어야 할 교회를 바라보면서
우리에게 물으시는 말씀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화려한 옷을 입고
화려한 광야의 교회에 나갔더냐?
화려한 교회냐?
화려한 가운을 입고 사치스런 말을 하는 자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대답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우리 각자 믿음의 분량의 몫이다.
그러나 공동체를 세우는 만큼의 분량은
그 믿음만큼의 분량이다.


8.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공의의 검(劍) 감사)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What went ye out into the wilderness for to see?
A reed shaken with the wind?
누가복음7:24]

젊은 날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았다.
믿음과 허무의 세계에서 방황하는.
믿음이란
소망이라는 무지개를 쫒아 성경을 인용하여 세뇌하고 유도하는 사상으로
적당히 정신적인 죄의식을 심어주고 스스로 죄인이라 시인하여
죄에서 자유스럽지 못함을 자각케 하고
끝없이 감성을 자극하여 이성을 조종하고
육체적인 고통스런 삶을 성경의 구절로 협박하고
지키지 못하는 계명으로 압박하고
모임의 의식과 분위기 등 외압으로 종교지도자의 의도를 유도하여
그들의 주머니를 채우고
또 그런 세뇌로 자기 자신의 위안을 삼는 자기 심취와 자기만족으로 합리화 하여
그 길이 진리임을 세뇌당한 자 들의 집단 중독 현상이라 보기도 하였지만
정말 신이 있다면 세상은 정의로워야 하는데
바라보는 세상은 썩었고 썩어 부패의 냄새가 진동하는 욕망이라는 끝없는 욕심을 채우려는
그러다 적당히 자신의 양심과 타협하며 자기도취와 성취에 만족을 채우는
종교라는 위선의 탈을 쓴 자들의 세뇌 화 의식 행위라 단정하기도 하였지만
악하게 바라보기에는 세상은 어둠과 빛이 교차하였고
인간이 인간으로 부딪치며 살아가는 세상에서
나는 마치 세상에서 격리된 채 거친 광야 같은 환경에서
세상의 바람에 스스로 흔들리는
흔들림의 연속도 실체가 아닌 허상에 놀아나는 삶 같아 우습게 보였고
그런 삶에 연연하고 싶지도 않았기에 삶에 애착도 없었고
무엇을 얻으려고 발버둥 치다 가진들 깨달은 들 고통뿐인 삶을
종당엔 죽음 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애당초 신기루를 잡으려는 공중누각(空中樓閣)인 것을.

그렇게 유년시절의 믿음은
허무라는 죽음이라는 부조리한 거대한 세계에 대항하다 스스로 무너졌다.

허무의 세계에서 마음의 바탕은 그 허무에서 조차 자유롭고 싶었지만
그 자유는 진리라는 논리를 성경에서 찾기에는
세상의 사회적인 신분의 귀천(貴賤)과 부조리한 인간의 역사는 반복되었고
설령 시대적인 사상의 우상 놀음에 놀아난들
신의 꼭두각시로 전락할 뿐인데
내가 왜 신의 양이 되어야 하는지 더욱이 종교지도자의 양이 되어야 하는지
양이란 단어 자체가 역겨웠고
양이 된들 세상이 달리 보일까 변할까.

왜 헐벗고 궁핍한 가난하여 상처 난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들끼리 더 싸워 상처를 더 내고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가진 자들의 힘의 수레에 밟혀서
반복된 착취의 생활에서 신음하여야 하는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공평한 세상이어야지
한 생명 생명이 존귀하고 평등해야지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공정(公正)을 외면한 신이라면 신은 죽었다.
만약 살아계시더라도 신은 부조리한 세상을 창조하신
인간에게 신은 또한 구속(拘束)의 존재일 뿐이다.
그런 신이라면 그 신이 못 다한 정의로운 세상,
파라다이스는 못되더라도 더 나은 위한 세상을 위하여 신과 투쟁하고
가진 자의 억압으로 해방을 위하여 혁명가가 되겠다고 자신에게 수없이 다짐했지만
도대체 세상에 정의가 없는데 어떠한 정의감으로 혁명을 할 것인가...
그렇다고 누구나 평등한 공산주의자들의 구호처럼 실현한들
권력의 분배자를 만들어 그들의 욕망이라는 배만 불릴 것을.
또한 투쟁을 한들 물리적인 폭력이 어떻게 정당화 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단 말인가.
폭력을 어떻게 합리화가 되며 그 폭력이 정당하더라도
신이 있다면 그 폭력을 허락한 신과 무엇이 다른가.
살아야할 이유가 없었다.
살아본들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이며 죽음이 두렵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하나님을 원망하여 도피한 자신을 발견했다.

집을 나와 자주 들리는 중국집
항상 웃음을 지시고 인자하시며 기품이 있으시며 정숙하시며 미인이신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식당의 중간자리에 열 살이나 된 듯 한 소년 거지아이가 음식 앞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고
기도가 끝나자 어떤 기도를 했는지 아주머니는 물어 보았다.
그 아이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기쁜 표정의 그 아이의 말이 내게는 충격적 이었다.
(나는 네 나이 때까지 감사하기커녕
나이 스무 살이 넘도록 감사한 기억도 오래 되었고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는 기도와 그보다 원망만 해 보았는데 감사라니...)
그 아주머니는 그 애의 옆에 서서 더럽고 엉클어진 그 애의 머리를 쓰다듬으시며
울고 계셨고 아이가 면을 젓갈로 집어 먹을 때 마다 천천히 먹으라며
국물을 먼저 마셔야 체하지 않는다 시며 물도 따라 주시고
오랜 만에 만난 아들마냥  대하시는 게 아닌가.
그때 그 아주머니의 갓 고등학생이 된 귀엽고 예쁜 딸이 어머니를 도우려 왔다
그 아이를 보더니 동생처럼 대 하며 반가워하지 않는가.
순간 그 거지 애가 부럽게 느껴졌다.
나는 누구에게 들킬까봐 조용히 구석자리에 앉아 있는데
아주머니가 내게 닿아 오시더니 ‘너는 이제 집에 들어가야지. 아버지 걱정하시겠다’
갑자기 아버지 생각에 아버지가 불쌍히 느껴졌다.
그 후 군인이 되어 휴가를
영화를 좋아하시는 아버지와 영화구경을 하고
그 집에서 식사를 하였지만 식당은 주인이 바뀌어 있었고
그 식사는 아버지와 한 마지막 식사였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에도 그 모습이 아직도 선한 기억으로 남아 있고
그 모습으로 인해 아버지께서 ‘늘 범사에 감사하라’ 하신
아버지가 갖고 계신 성경의 첫 페이지에 써 놓으신 그 구절은
찬송가의 첫 페이지도 써 놓으신 것을 보았고
벽에 까지 붙여 놓으신 걸 바라보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을 늘 감사해야 한단 말인가

(어머니는 이미 신자이셨던 아버지의 신앙을 인도하셨고
아직 불신자였던 아버지의 형제자매를 전도하여 신앙인으로 이끄셨고
열악한 환경으로 인하여 종당에는 당신이 찬송하시던 하나님께 돌아가셨고
어머니를 사랑하셨던 아버지는
닳고 헤어진 성경책 안에 어머니의 빛바랜 사진을 간직하셨고
오래전 아버지의 성경책에서 어머님의 사진을 발견하였을 때
그 사진의 낯선 분이 어머니인줄도 몰랐지만
아버지가 오래 동안 읽으셔서 닳아 헤어진 성경책만큼
성경을 읽었을 때 아버지의 ‘감사’를 이해하게 되었다.)

원망은 분노를 일으키고
분노는 원망을 일으키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지만
그러나 감사란
왜 감사에 조건이 없고
왜 감사가 믿는 자에게 능력임은,
당시의 고통은 괴로움으로 영혼의 눈을 가리고
당시의 기쁨은 교만으로 영혼의 눈을 가리기 쉬워서
고통과 기쁨을 넘어 주의 나라에 이어진 소망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는 소망의 끈 믿음을 잃지 않는 다면 천국을 볼 것이고
너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종교인들의 의 보다 낫지 못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알 수도 없어 이룰 수도 없기에 결국 현대판 서기관과 바리새인 인
종교인은 천당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이다.

구약의 감사는 감사제(Thank offering)로 드려졌고
화목제(Peace offering)로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위하여
제물을 드리는 자가 제물을 직접 가져오고
서원이나 자원이나 감사할 때 드렸으며 기름과 콩팥을 화목제로 드린 이유는
기름은 가장 좋은 것, 귀중한 것을 의미 하였으며
콩팥은 인간의 생각과 양심과 감정이 있는 것으로 보았기에(레3:4)
가장 순수한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께 바치는 의미가 감사제이기에
드려진 제물은 당일에 먹고 다음날 까지 남겨 두지 못했는데
여기에 나날이 새로운 감사의 의미가 있지 아니한가.

신약은 화목제로 돌아가신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자신을 제물로 드린 예표이며
그리스도를 본받은 우리는 자기 자신의 삶을 드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현실의 삶에 적용하여
삶이 예배가 되는 나날의 삶이 예배라
교회의 예배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돌아가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본받자는 결단의 마음을 주시는 성령님과 함께 한 자들의 모임이라
세상과 같이 관료적인 무책임한 수직의 관계가 아니기에
성직자와 평신도를 갈라놓은 집단이나 조직은
이미 하나님의 진정한 감사함을 잃은
무늬만 남은 현대교회의 겉모습일 뿐이다.

‘너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주님!
허무의 세계, 허무한 세상의 허무로 상한 갈대 같은 저를 보았고
꺼져가는 등불 같은 저의 생명을 보았으나
사랑의 하나님의 사람을 보아
하나님 뜻 하나님의 공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He shall not fail nor be discouraged, till he have set judgment in the earth:
and the isles shall wait for his law. 이사야42:4]

‘너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상한 갈대가 되어 이리 저리 흔들리고
꺼져가는 심지가 되어 어둠을 밝히지도 못하고
풍비박산(風飛雹散)
바람풍(風), 날비(飛), 우박(雹), 흩어질 산(散)
바람에 날리고 우박에 흩어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삶 같더라도
바람과 비 그리고 우박과 같은 것들이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 듯
무지개는 언약을 세우신 징표로 보여주셨고(창9:9-17)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했다.(겔1:28 계4:3)
또 무지개는 히브리어로 ‘퀘쉐트(qesheth)' 로 ’활‘을 의미함은
그런 어려운 세월도 활 같아 날아가니
인생이 들에 핀 꽃처럼 쉬이 지니
심판하여 이길 때 까지 공의를 지키라는.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A bruised reed shall he not break, and smoking flax shall he not quench,
till he send forth judgment unto victory.
마태복음12:20]

무엇 때문에 살까
무엇으로 살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분명치 않거나 회의(懷疑)가 들 때
삶에 지쳐 근심 걱정으로 고통스러울 때
검을 주러 오신 주님께
검(말씀)으로 공의를 이 땅에 이루려는
하나님과 화목을,
자신의 삶으로 이루려는 신앙인의 힘은 감사라
감사는 성령님과 함께 하시는 증거라
감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고백이자
공의를 이 땅에 이루고자 하는 근원의 힘이라면
검은
그런 자들이 생명 같이 여기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자 하는 말씀의 칼이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 이루려는
하나님의 공의를 가진 자들이 이 땅에서 누림이 기쁨이며 평안이라면
주는 우리의 힘이 되시고 좌우에 날선 검의 말씀이 되어
먼저 내 영혼을 찔러 쪼개기 까지 하여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고
다시 뵈올 주님 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살아가고자 하는
공의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자의 힘
곧 자녀 된 자의 권세(權勢)의 능력이 검이 될 때
세상에서 누릴 수 없는 평안을 가질 때
세상이 아름답게 보임은
형제자매가 아름다워 보임은
다가오는 천국의 모형을 영혼의 눈으로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정경(canon)이란
canon 은 표준, 척도, 모델을 뜻하며  
그리스도교(개신교)에 공식적으로 채용한 경전을 이르며
그리스어 kanon에서 유래한 말로 그 어원은 슈메르어에서 나온 것이라 하며
아시리아어, 우라리트어, 헤브라이어를 걸쳐 유래하였다 하며
그 본 뜻은 곧은 ‘갈대’를 가리켰다 한다.
바울은 ‘인간행위의 기준’ 으로 규례를 언급했으며(갈라6:16)
규례는 ‘판결’이란 말로 공의를 가리키며
그 어원인 ‘choq’ 는 ‘새겨 넣다’ ‘조각 하다’ 라는 뜻이며
법도(mishpat)도 ‘판결하다,는 말로 공의를 가리키며
율례(regulation)은 율법의 적용에 관한 법례와 하나님 말씀을 가리키는 공의를 뜻하며
초대교부들은 ‘그리스도 교도의 신앙과 행동의 기준’으로 여겼으며
공의(Justice)는 이모든 의미를 포함한 포괄적인 의미이며
그래서 공의란, 말씀이란 칼을 가슴에 새겨 넣고
나의 삶을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조각하여
곧은 갈대가 되어 바람에 흔들릴 지언즉 쓰러지지 아니하는
꺾이지 아니함의 신앙을 의미해 보면
예수님의 물음
‘너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은 믿음의 근본과 그 근본의 믿음에 바로선 신앙의 본질의 질문이시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 는
예수님의 대답(Jesus is the answer)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의 응답(應答)이시며 길이시라
우리의 구원자로서 오늘날 꾸며진 허례와 의식에 찌들어 종교인이 되어버린
우리에게 물으시는 우리를 향한 근본의 가르치심 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태복음10:34]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누가복음 7:24-26]


7.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소금)

짐보

(소금)

‘빛과 소금’ 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설교를 숫하게 들어 왔기에
식상(?)한 주제라 성경을 읽을 때도 무심코 지나치는데
어느 날 아침 평상시처럼 개역개정 성경과 KJV 성경을 같이 놓고 읽기 전
성령님의 도움으로 말씀을 깨달고 그 말씀이 가슴 판에 새겨지어
온몸을 움직이는 공급하시는 힘이 되기를 간구하며 이 구절을 읽었을 때
놀라운 사랑의 깨우침을 성령님으로부터 받게 되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Ye are the salt of the earth: but if the salt have lost his savour, wherewith shall it be salted? it is thenceforth good for nothing, but to be cast out, and to be trodden under foot of men.
마태복음5:13]
salt of the earth 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인데
but if the salt have lost his savour
라고 KJV 는 표현 했을까?
Savour 이라는 뜻은 맛, 풍미, 을 의미하나 ‘향기’로 해석함이 옳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savour 를 향기로 표현 했다.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For we are unto God a sweet savour of Christ,
in them that are saved, and in them that perish: 고린도후서2:15]

직역하면 “만약 소금이 그의 향기를 잃어버리면”
trodden under foot of men.
사람에게 밟인다 어떻게?
trodden ...짓밟힌 상태
“만약에 소금이 그의 향기를 잃어버리면 사람들에게 무자비 하게 짓밟힌다.”
그때부터(thenceforth)
향기를 잃어버린 그때부터.
찔림을 넘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만약에 그리스도의 향기(공의)를 잃어버리면 세상에 짓밟힌다.
누가?
내가
우리가
교회가
세상에서 세상으로...짓밟힌다.
이 얼마나 무서운 표현인가
자신을 뒤돌아보면서 섬뜩했고 두렵기 까지 했다.
주위를 뒤돌아보면
왜 교인이 교회가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지?
무슨 변명을 한단 말인가...
‘내’ 가 누구인가?
‘가정’이란 무엇인가?
‘교회’ 란 무엇인가?
그것들의 정의에 대하여 성경으로 확증하고 마음으로 확정한
확고한 고백이 없다면
앎이라는 지식적이라 성경의 의가 가슴에 녹은 원동력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배고픈 허기에 응얼거림에 멈춘 상태일 뿐이다.
그럼 소금이란 무엇인가?
성경의 첫 소금이란 단어는 창세기 19:26 절에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롯의 아내는 왜 소금 기둥이 되었나?
롯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아내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천사의 말을 어겼다고
소금기둥이 되다니 너무 야박하시니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신가는 의문은
이 구절을 보면서 다시 묵상했다.
성경은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기 때문이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베드로후서2:6-7]

룻의 아내는 어떠한 사람이었는가?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누가복음17:29-32]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사람이었다.
한글 성경은 간단하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표현하였는데
[But his wife looked back from behind him,
and she became a pillar of salt. 창세기19:26]
KJV에서는 룻이 중심으로 기록 되어
그의 아내는 룻의 뒤에서 (룻의 뒤에 숨어서) 뒤를 돌아보았기에
소금 기둥으로 변화되었다 기록한다.
무엇이 그녀를 돌아보게 하였을까?
지난날의 룻과 한 소돔의 생활이 어찌 하였든 정들었을 거고
떠나는 마음이 뒤숭숭하고 착잡하였기에
남편의 어깨위로 소돔을 바라보았고 유황불이 떨어지는 소돔을 바라보면서
소금이 되어가는 자신을 보면서 어떠한 심정이었을까?
룻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룻과 룻의 아내의 결과를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베드로후서2:9-10]
이렇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의문은 언약으로 귀착된다.

민수기 18:19 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구한 몫의 음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 언약이니라]
소금 언약은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맛이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상징했고
언약(Covenant)은
엘 베리트(El Berith 언약의 하나님)에서
히브리어 berith '끊는다‘는
어원으로 brith 할례의 뜻이며 할례의 의미는 ‘언약의 증표’이고
할례는 아이가 태어나서 생후 8일째 행하고
할례를 행치 않는 사람은 ‘언약의 공동체’에서 끊어졌다.
(끊어졌다...
여기서 전기에 충격을 받는 것같이 전류가 온몸에 지나가듯이 쇼크였고
이런 격동은 전율하게 하였다.

-할례는 왜 생후 8일째 하였을까?
일주일이란 기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안식한 날 까지 이며
8일 째는 새로운 날이다.
언약을 이루는 새로운 날 이다.
주님을 맞이하는 새로운 날이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날 이기에-

주께서 이 못난 나를 사랑하시기에 성령님께서 말씀을 풀어주시고
언약을 온 몸에 기억케 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이라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새롭다.)
언약은 당사자들이
짐승을 반으로 쪼개어 마주보게 하고 그 사이를 통과하는 의식으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의 행함 이었고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은
쪼갠 제물사이를 하나님이 지나가신
제물의 피는 생명의 피를 흘려 피의 언약을 주신 주님을 상징 하였다.
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소망을 누구도 환경도 죽음도 그 무엇으로도 끊을 수 없기에
조금만 힘들어도 엄살을 피고 조그만 일들에 불평 말고
상황에 환경에 연연 하지 말고 ‘담대해라’ 는 거다.
이보다 큰 위안이 무엇일까
모세의 언약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지키면 축복하고 순종하지 않는 다면 징벌하신다는
순종의 언약이다.
이제는 새 언약으로 예레미야가 언급한 하나님의 용서를 따라서
한 언약(렘31:32)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식사 때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누가복음22:20]

새 언약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자녀가 맺은 언약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언약이다.
옛 언약이 돌에 새긴 율법으로 몸에 할례를 하는 언약의 표시였지만
새 언약은 마음에 새겨 성령의 세례로 소망을 갖고
성령님이 오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부패와 불순종의 죄를 제거하는
말씀을 가슴 판에 새겨 순종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교제하는
거듭난 자로 새로운 인격체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은혜라
옛 언약과 새 언약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는 연속에서
값없이 주신 선물이란 언약이며 은혜라

은혜(Grace)란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난 하나님의 선하심이라
성가대의 찬송에 감동하였다고
목사의 설교에 감동하였다고
또는 부흥회에서 뜨거워졌다는 “은혜 받았다”
그런 감동과 의미의 차원이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였다는 확신과 고백을 동반하나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나 긍휼 감동이 아니라
선하신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의 최대의 베풀음이고 행위이시고 긍휼이며
그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본 보여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였고
성령님을 통하여 언약으로 확정한 우리의 소망이다.
단지 성도는 그 은혜의 통로로 소망의 길로 쓰임을 받고
받기를 바랄 뿐 이다.

은혜 받은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기회(Second Chance)이며
'chance' 는 ‘떨어지다’ 라는 의미의 'cad'에서 비롯된 말로
‘cide'와 동족어로 ’chance, 에는 ‘복(福)’ 과 ‘화(禍)’ 를
‘기회(機會)’ 와 ‘위협(威脅)’ 을 상반된 의미를 내포하며
‘-cide ’는 ‘죽임’ 과 ‘살해(자)’의 명사를 만든다.
은혜에서 떨어짐은 화(禍)라 심판에 놓이고
자기 자신을 죽이는 죽임을 뜻하고
은혜란
또 한 번의 기회로
멸망의 길로 가거나 생명의 길로 갈지를 결정하는 일상에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결단의 끝없는 동력이며 시간 이라
삶이 공의로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는 소금의 역할을 하고자 하는
성령님의 도움심 이다.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For every one shall be salted with fire,
and every sacrifice shall be salted with salt.
Salt is good: but if the salt have lost his saltness,
wherewith will ye season it?
Have salt in yourselves, and have peace one with another
마가복음9:49-50]
소금은 언약이다.
주께서 생명을 바쳐 십자가에서 이루신 언약이다.
그 언약을 잊지 말라고
구약시대에는 마음에 새기고 손목에 매여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였고
언제 어느 때 든 지 잊지 말고
또 자녀에 가르쳐 강론하며 후에 자녀가 묻거든
하나님께 경외하며 은혜의 복을 누리며 오늘 함께 하심을 알게 하려 함이라
가르치신다.
그런 믿음은
우리 세대(世代)와 자녀 세대 그리고 세대를 뛰어넘는 시대(時代)를 바라보아
다음세대에 물려줄 유산이고 현시대를 넘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바라보는,
버릇 같은 관습과 전통을 넘어 바라보는,
이것이 믿음을 가진 자들의 위대함이라 담대함이라,
속 좁아 감정에 좌지우지하는 휘둘림이 아니라
옹졸하여 상처주고 시험받는 좀스러움이 아니라
세월을 따라 밴댕이 소갈머리로 변해가는 신앙이 아니라
오늘날 이 말씀을 심장에 새기면
또 속 좁은 나를 뒤집어 놓으시고
은혜에 감사하고 소망을 주심에 감사하면
끝없이 사랑을 베푸셨듯이 그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마음이 되면
마음에 샘솟는 공의의 강물이 흘러 차고 넘쳐 형제자매를 향하고 이웃을 향하여
그것이 나의 힘이 되어 돌아온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And these words, which I command thee this day,
shall be in thine heart: 신명기6:6]

영혼에 도장을 새기듯 성령으로 말씀을 각인(刻印)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6:5]
예수님 말씀처럼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12:30-31]
이제는 사람마다 성령으로 소금 치듯 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잃지 않게
네 마음의 중심에 언약을 녹여
나와 너의 평안(平安)이 되어라 는.

-------------------------
소금은 녹아야 맛을 냅니다.
맛은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그러기에 소금은
나의 욕심 욕망을 녹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고
너의 시험과 인내를 녹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너와 나 사이에 소금을 두고
그리스도의 언약을 두고
내 자신을 녹여 너를 그리스도로 연결하는
너를 녹여 나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이루는
너는 나의 언약의 소망이고
나는 너의 언약의 믿음이고
그러기에 성령님이 언약의 증인 이십니다.

(주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주의 언약을 이루셨듯이
이제 주의 언약을 알게 되었사 오니
우리로 옛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삶으로 십자가에 죽어
언약으로 살게 하여 주소서.
주께서 생명을 바쳐 주의 언약을 이루셨듯이
우리 목숨을 바쳐 주님의 언약을 믿사오니
우리로 세상의 소금이 되게 하여 주소서.
부패한 세상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여
우리로 하여금 썩어가는 세상을 멈추게 하시고
주의 공의가 만국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여 주소서.

그러다 지쳐
눈물 흘리는 자매에게
우리 눈물로 자신을 녹여 위로케 하옵시고
고통이 있는 형제에게
우리 고통을 녹여 인애케 하시여서
우리의 언약을 잊지 않게
우리의 가슴에 언약의 소금을 녹여
숨을 들어 마시고 내 쉴 때 마다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는 일상이 되게 하여 주소서.)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골로새서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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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내가 만난 하나님의 공의

짐보 ㆍ 2014-02-15 (토) 10:14


(빛)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세기1:1-4]
나는 이장을 읽을 때 마다 신묘(神妙 mysterious and march)한
세상의 시작을 보는 것 같아 묘한 마음이 들고
그중 “빛이 있으라” 는 의미에 뜻을 두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는
빛이 되어 세상에 오신 주님을 떠오르고
빛의 자녀가 되어 다시 빛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심정이 된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한복음1:9-12]
주께서 빛으로 오셨지만 세상과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Authority)을 주셨다.
자녀로서 공의의 하나님이신 공의를 본받아 진리의 말씀으로 행하여
나로 말미암아 세상으로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수없이 다짐했던 기역이 떠오른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5:14-16]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시고
우주 안에 지구를 창조하시고 창조물로 지구를 채우신 다음
제일 나중에 창조의 절정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흙으로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복을 빌어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고 보존하게 하셨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한복음1:3-5]

빛은 세상을 비추어 어두운 세상에서 빛이 나듯이
빛은 죄를 드러나게 하고 빛은 있어야 생명이 있듯이
계시의 빛 인 말씀을 거울과 같이 비추어 자신을 바라보았고
이제도 다시 바라본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11:35-36]

어린 시절 추웠던 겨울날 아침밥을 거르고
보고 싶고 그리웠던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보다 찢어버리고
울다 엎드린 방안의 창을 통해 창의 통해 비추는 햇살을 무심히 바라보다
빛 때문에 눈물을 그치고 유심히 바라본 빛살은
수많은 먼지를 비추고 나를 비추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방안에 수없이 많은 먼지가 있음을 알았고
먼지가 흩어져 날리며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날리는 모습이
아직까지 뚜렷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 후 그 먼지가 내 내면을 잠식하는 죄였고 죄에 포로로 잡힌
하나님을 원망하는 어두운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일은 마치 다메섹에서 빛을 만난 사울이 바울이 되었듯이
진리가 빛으로 닿아옴으로 어두운 슬픔과 어둠의 시간이 물러나는 축복이라
삶의 힘이 되었고 소망이 되어
종당엔 빛이 내 삶의 생명이 되었다.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사도행전22:6]

그분이 내게 빛이 섰다.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요한복음12:46]

그 복된 일은 주께서 내게로 오셨다는 기쁜 소식인 복음이고
복된 소식을 모든 이들에게 전해야 겠다는 결단을 하게 되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서5:8]

복음의 구원은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속제 제물로 자신을 드리신 예수그리스도처럼
나를 산제사로 사는 빛의 자녀로
삶이 예배가 되는 하나님의 공의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일꾼과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걸 깨달게 되었다.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나갈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 이사야51:4]

빛이 어둠을 비추듯
빛의 자녀로 빛이 되어 세상을 공의로 비추어
약육강식의 세상의 법칙이 죄임을 드러내는
세상의 화려한 문화가 유혹이며 선동임을 드러내어
하나님의 공의가 하늘에서 이루어 저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가치관의
기준이 빛의 자녀로 본을 보이는 생활이 산제사, 산 예배 이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한복음3:21]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편43:3]

성경을 읽으며
전에 갔었던 선입관으로 굳어진 의식을 버리고
나와 형제와 자매와의 관계를 투명한 하나님의 빛으로 다시 설정하고
“나”에서 “우리”로 (그것이 교회고)교회는 천국의 모형인 천국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 지친 몸과 영혼이 안식하는 안식처고
“너”로 인해서 “나”로 인해 하나님을 경외하는 형상을 회복하고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듯이 “내가 너를, 네가 나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하나가 된 지체로 말씀과 물질을 나누는
공동체를 회복하려는 탄식을 성령님으로부터 듣지 못한다면
어둠의 자식이요 가라지 라 빛으로 오신 주님을 온전히 알 수가 없다.
사랑이란
드라마 같은 눈물의 씨앗이 아니라 나로 인하여 네가 힘이 되고 내가 힘이 되는
서로를 향한 기쁨의 씨앗이라서
촛불처럼 나를 태워서 너의 빛이 되는 나의 진정한 기쁨이 되는 행위의 완성이라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며
오래 참고 온유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내게 진리란
사랑과 함께 하고
사랑의 가장 가까운 말은 긍휼이고
믿음의 가장 가까운 말은 분별이 되어
나는 너의 소망이 되고자 하는 작은 불꽃이고 싶었다.
그러다 쓰러진 적이 더 많아서
이제는 네가 나의 연약함을 메워주워야 하고
나는 너의 꿈이 되어야 한다...
어둠의 일을 벗어 버려야 가능한
성령님이 인도하여 주시는 깨달음으로.
사랑,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기 까지 한 사랑
그 사랑이 성령에 의한 통치
그래서 모든 덕과 정의의 기본이고 기초인 사랑은 첫 번째 열매가 된다.
희락,
성령이 인도하신 구원의 기쁨 내외적인 기쁨은
상황과 환경에 지배받지 않는 기쁨이 된다.
화평,
어떠한 어려움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인간의 능력 밖의 평화 평안 평강
이것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기본이 되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된다.
성령 충만 이란 빛이신 성령님과 완전히 일치한 빛의 자녀가 된
성령님께 사로잡힌 성령의 완전한 다스림임을 깨달게 되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로마서13:12]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119:105]

(우리는 여기서 글을 쓰고 읽고 토의를 하지만
자기주장에 반한 상대의 부족함에 비수를 감추고 끝장을 보려는 마음은
이미 그리스도를 떠난 자기 욕심의 파멸을 보여줄 뿐이다)
단언하건데
진리는 사랑과 함께 하기에
사랑이 결여된 진리는 진리를 가장한 지식이고 교만이다.
그리고 지식에 덕이 결여되면 넘어짐의 앞잡이 인 교만이 되기에
진리라 할 수 없고 진리는 지식의 배움으로 알 수 없을뿐더러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 하다.
신학도 성경의 참고서 일 뿐 모든 신학이 진리가 아니듯.
성경의 덕이란
진리를 진리로 온전케 인도하는 일이라면
덕이란 상대의 마음의 중심을 보아 들보까지 용납하여
마음으로 순복(順服)하는 상대에 대한 배려이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간직한 자 만이 누리는 긍휼이라
토론에 결여된 덕이란
이미 다리가 성하지 못한 자의 절름발이 걸음으로
상대의 걸음을 탓하는 비난이다.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요한일서2:9]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미가7:8]

하나님의 공의를 잃어버린 혼란의 시대라
직분이 믿음의 척도로도 형편없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여
이제는 세상의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하여 간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성경은 계시의 문자의 언어이다.
계시가 무엇인가
사람의 이성으로 알지 못하는 하나님 자신을 직접 드러내시거나 알리시는 것을 뜻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혜와 지식으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신앙의 역사다.
우리보다 앞선 과거의 빛의 사람들이 남겨놓은 흔적을
이제는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어
세상에 속하여 살지만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변화시키는 빛으로 어둠을 비치는 흔적을 남겨놓아
우리의 후대가 우리의 발자국 같은 흔적을 따라 오듯이.
(흔적을 그런 흔적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문화” 다.
정신적 내면적인 공의의 문화...정직 정의 긍휼 자비 평등...
빛의 자녀로 만들어 가야 할 외적인 문화...신앙 공동체의 문화...)
이 시대 우리에게 무엇의 흔적이 있을까?
내게 무슨 흔적이 있을까?
사실 비관적인 비판이 앞선다.
도무지 요즘의 나와 교회는 성경적인 빛의 사람으로서 너무 멀리 동떨어져있다.
(바울과 같은 흔적이 있는가?)
도무지 정의 아니 정직만이라도 밥 말아 먹지 않았더라도
세상 사람으로 부터 인정을 받았을 텐데...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빛의 자녀라면서...
습관적으로 모이는 교회의 예배와 모임이 서로가 서로의 사정과 이름도 모르는 모임이
다음 세대에 무엇의 흔적을 남겨놓는단 말인가...?
일하라는 교회의 직분이 계급적인 수직적인 수동적 조직이 되어버리면
세상 방식의 관료주의자가 되어
독선적이며 형식적이고 획일적이여 억압적인 사고방식은 전혀
그리스도의 본받는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고
교회의 조직이 세상의 조직과 다른 점은 직분 맡은 지도자 책임자가 낮아져서
솔선수범하는 빛이 되어 자신을 태우는
그래서 물은 주었지만 성장케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소유의 의식과 운영의 개념마저 사라지지 않는 다면
종교의식과 껍질만 남은 건물에 자기만족으로 변한 자기복음 만 있을 뿐
세상은커녕 자신도 변화하지 못하고
어둠의 시대에 동참하는...

흑암의 죄의 세상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소식을 전하는 복음이
세상에 알려줘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우리의 삶이 빛이 되어 세상의 빛이 되는 하나님의 공의,
이제는 우리 모두가 일어나 빛을 발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선포하는
삶으로 빛이 되어야 되지 않을까
다짐해 본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이사야60:1]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시어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거룩한 산과
주께서 계시는 곳에 이르게 하소서  시편43:3]

빛 !
나날이
내가 듣고 싶었던 만큼 말하고 싶은 빛
내가 깨달은 만큼 보고 싶었던 빛
내가 갈증 내어
내가 목말라 했던 빛
내가 듣고 싶었던 구체적인 삶의 빛
그래서 매일 매일이
그래서 내 형편이 되어버린 빛

내가 갈망했던 세상을 향한 빛!                    

내 몸을 불살라
세상을 환하게 비추지는 못 하더라도
내 작은 행실에
내 작은 몸짓에
주위를 밝히는
꺼지지 않는
작은 불꽃으로 살고 싶다.

(빛으로 오셔서 빛이 되신 주님
이제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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