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개신교회를 '형제'로 인정하지 않는다 / 최덕성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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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개신교회를 '형제'로 인정하지 않는다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임성빈 교수(신학대학원장)는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관계를 "형제교회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신학적인 차이가 있지만 이단 시비가 나올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2014 7.17.)가 보도했다.

 

한신대학교의 연규홍 교수(신학대학원장)는 "한국 개신교는 교황의 방한을 적극 환영하고, 공식적으로 가톨릭이 주 안에서 한 형제요, 한 몸임을 고백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황 베네딕트 16세는 2007년에 개신교회는 '교회'가 아니라고 공식 선언했다. 교회를 결정짓는 유효한 성례가 부재하다고 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종래의 교회론을 바꾸지 않았고 바꿀 의지도 없었다고 성명했다. 최덕성의  <신학충돌>(2012) 제11장과 제12장은 이 주제와 공의회 이후의 로마가톨릭교회의 교회론 복고에 대하여 상론한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개신교회를 '교회'로 여기지 않는다.  '형제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 대등한 관계의 에큐메니칼 파트너로도 인정하지 않는다. 교황무류성 교리 때문에, 교리와 신앙에 관한 교황의 공식 성명은 변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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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장신대와 한신대 신학대학원장들은 교황 프란치스코의 방한을 환영하면서 로마가톨릭교회를 "형제교회"라고 강조하고, "주 안에서 한 형제요 한 몸이라 고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이 질문은 한국교회의 정체성과 생명력 유지에 중요하다. 임성빈 교수와 연규홍 교수의 즉각적인 답변을 기대한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방한하면서 개신교회를 '형제'라고 일컬었다. 동시에 불교, 이슬람, 힌두교 등 타종교인들도 '형제'라고 말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말하는 '형제'는 한국 개신교 신학자들이 말하는 '형제'와 같지 않다. 우리가 말하는 형제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구원을 얻고 같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이며 다르지 않은 신앙을 고백하는 자임을 뜻한다.

 

 

한국 개신교 신학자들의 교황을 향한 짝사랑, 편련(片戀)이 도를 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의 생명력이 허물허물 상실되고, 세속화와 비진리에 대한 저항력, 자생력이 시름시름 망가지고 있다. 침몰하는 세월호를 보는 것만큼이나 안타깝다.


최덕성

 

(위 두 사진, 페이스북 친구 이재웅 제공)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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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한 예수회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름을 따왔다고 하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프란시스"에 대해 궁금해져서 조금 찾아 봤다. (물론 그가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등과 같이 대표적인 카톨릭 신비가로 꼽히는 것은 잘 알고 있었지만..)]

 

"가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라. 단, 필요할 때에만 말을 사용해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가 한 말이다. 그런데 말을 하지 말고 복음을 전파하라니 이것이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해서 복음전파에는 말이 별로 필요없고 단지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엇을 보여주는 것인가?

(말할 필요가 없이 ^^) 신비현상을 보여주라는 것이렸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엘 그레코를 비롯한 많은 신비주의 화가들의 소재가 되었다. 잠시 그를 그린 그림들을 먼저 모아 본다.

부엉이와 생명나무, (오상五傷) 성흔, 직통계시(?), (두날개) 아기천사 그리고 그림 속에 계속 등장하는"해골"이 특징적 상징이라고 하고 싶다.

  
   

 

프란치스코는 황홀경(탈혼)에 빠졌던 유명한 신비가였다.그에게 나타났다는 신비현상은 황홀뿐 아니라 성흔(오상)부터 공중부양까지 다양하다. (물론 소위 "성인"이 되려면 그 정도는 해야 마땅하다고 하겠다.) "중세 시대의 신비주의<<"라는 자료는 프란치스코의 신비주의를 이렇게 소개한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평화의 기도’로 유명한 아씨시의 프란시스(A.D. 1182~1226)는 기도하던 중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보고 그 환상에 따라 복음의 말씀대로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헌신하며 ‘가난’과 결혼하고, 평생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하나가 되는 삶을 살았고 또한 동물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는데, 늑대와 새들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 그리고 심지어 꽃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신비주의는 십자가의 신비주의 그리고 자연의 신비주의라 할 수 있다.
 

그는 20세 때에 주님으로부터 “내 집을 보수하라”는 명령을 듣고 문자 그대로 한 교회를 보수했지만 그 뒤에는 그 명령의 숨은 뜻을 따라서 타락한 교회 전체를 정화, 개혁하는 사명을 감당했다. 처음에는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작은 형제단으로 시작한 수도회 모임이 후에 프란시스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이 수도회는 탁발 수도회로서 자신들의 소유를 모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동냥하고 손수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프란시스는 글을 거의 저술하지 않았지만 신비주의를 생활화 하였다. 그의 생애의 절정을 이룬 십자가의 신비체험은 1242년에 40일간 금식하며 기도와 관상에 몰두하던 중에 일어났다. 그는 주님과 더욱 더 깊은 영적 표통을 하기 위하여 매일 기도하였는데 자기 영혼과 육신에 예수님의 수난의 고통을 느낄 수 있기를 원하였고, 어느날 그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못 박힌 한 스랍천사를 보았다. 그리고 그 환상이 사라졌을 때 프란시스는 하나님께 대한 강렬한 사랑과 열정과 불을 느꼈고 그의 육체에는 그 천사가 준, 예수님의 상처와 똑같은 신비로운 성흔이 남겨졌다.

 

프란시스 수도회의 신비주의는 신플라톤주의와 어거스틴 신비주의를 잇고 있어서, 빛의 신비주의, 존재 신비주의 그리고 그리스도(십자가) 신비주의로 설명된다. 또한 만물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 안에서 만물은 형제, 자매가 된다. 특히 작은 자 안에서 주님을 보고 그들을 섬길 것을 강조하였다.

다음은 프란치스코가 만든 (카톨릭) 프란치스코 "형제단"인 작은형제회 사이트<<에 소개되어 있는 그의 신비주의에 대한 설명이다. "신비체험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내용은 신사도들의 소위 "성령(?) 안에서 죽임당함"Slain in the Spirit 현상을 떠오르게 한다. 그리고 "신비주의에 탐닉한 그가 제2의 그리스도로 칭송받는다"는 내용과, "모든 신자들이 쉽게 신비체험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특히 눈에 들어 온다. (중앙의 사진은 블로거의 눈에는 상당히 "양성적"으로 보인다!)

 

 

아래 역시 "작은형제회"에 소개된 그에 대한 그림 "탈혼 중의 성 프란치스코"와 그림에 대한 설명이다. (바로 위 프란치스코의 신비주의에 대한 설명에서 탈혼, 오상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과는 상당히 대비되는 내용이다.) 이 사이트에 나온 그림 설명에 의하면 "닫혀진 성경"과 "산 꼭대기에 있는 도성" 그리고 그 옆의 "월계수"는 (예상대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블로거에게는 각각 "말씀 무용론"과 "영지주의적 상승" 그리고 "카발라의 생명나무"를 의미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자연신비주의자답게 자연을 의인화한 "The Canticle of Brother Sun"라는 시를 썼다. 시에 나오는 "음양"의 상징인 해 형제와 달 자매, 그리고 오컬트 4원소인 물, 불, 바람(공기)과 흙(어머니 대지) 형제/자매들로부터 그의 영지주의/오컬트 성향을 읽을 수 있는 것 같다. (여기서부터 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의 제목 "Brother Sun, Sister Moon<<"이 나왔다고 한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시가 널리 알려진 찬송가인 "온 천하 만물 우러러<<"의 가사의 기반으로도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Most High, all powerful, good Lord,
Yours are the praises, the glory, the honor and all blessing.

To you alone, Most High, do they belong
And no human is worthy to mention your name.

Praised be you, my Lord, with all your creatures, especially Sir Brother Sun,
Who is the day and through whom you give us light.
And he is beautiful and radiant with great splendor,
and bears a likeness of you, Most High One. (태양 형제는 지극히 높으신 주님과 닮았다..)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Sister Moon and the stars,
in heaven you formed them clear, and precious and wonderful.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Brother Wind,
and through the air, cloudy and serene, and every kind of weather,
through whom you give sustenance to all your creatures.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Sister Water,
who is very useful, and humble, and precious, and chaste.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Brother Fire,
through whom you light the night.
And he is beautiful, and playful, and robust and strong.

Praised be you, my Lord, through our Sister, Mother Earth,
who sustains and governs us, (어머니 지구 자매는 우리를 다스린다..)
and who produces fruit with colored flowers and herbs.

Praise and bless my Lord and give him thanks
and serve him with great humility.

프란치스코는 뉴에이지를 이끄는 마스터들인 소위 "승천대사<<"Ascended Master 목록에도 들어 있다고 한다. 뉴에이저들이 숭배하는 승천대사(승천마스터) 중에는 플라톤, 피타고라스, 프란시스 베이컨,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토마스 모어,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예수(?)가 들어 있다고 한다. (출처<<)

 

p.s.

이런 내용을 처음 접하는 독자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신비주의 개념을 접한 독자들에게는 생소한 내용이 아닐 것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이래저래 아리송한 세상이다..

 

p.s. 2

존경받는(?) 프리메이슨 리더 맨리 P. 홀Manly P. Hall은 아시시의 프란시스와 단테가 신비주의 비밀집단 "투르바두르"의 일원이었다고 말했다.. 는 내용의 글이 눈에 띈다. 관심있는 독자는 아시시의 프란시스와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와의 관계에 대한 글 The Sufis and Francis of Assisi<<도 참고하기 바란다.

 

The church was somewhat at a loss in determining how to treat these wandering moralists. The Troubadours were most circumspect and androit in concealing their hidden purposes. St. Francis of Assisi was a Troubadour yet the church canonized him and it also had a warm spot in its heart for another brother of this mystic tie, the poet Dante. Yet in spite of their piety they were basically heretics and fighting with all their wisdom and courage they possessed to overthrow the temporal power of the church and state. (출처<<)

[2014/8/19 추가]

미국 카톨릭 사이트<<에 의하면, 동물의 수호 성인인 프란치스코는 동물들과 대화했으며, 새들에게 "나의 형제/자매 새들이여. 그대들의 창조자를 찬양하며 항상 사랑해야 합니다..."라고 설교를 했다고 한다. 새들한테는 말이 꼭 필요했었나 보다.


오늘은 천주교가 어떤 꼼수를 가지고 기독교에 침투하였는지에

김정한

오늘은 천주교가 어떤 꼼수를 가지고 기독교에 침투하였는지에 대해서 이야길 하겠다.

지난번 wcc가 1,2차 세계대전을 겪고 갈등의 골이 깊어진 것을 치유하고 예수님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wcc가 태동된 것까지를 말했다. 그러면서 wcc 헌장 1조가 허술한 점을 말하면서 이것이 wcc총회가 거듭해가면서 이를 명쾌하게 보완하지 않은 상태에서 종교를 통합하겠다는 배도의 세력인 카토릭에게 틈을 내 준 것이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아예 천주교와 신앙직제를 하나로 하겠다 고 하는데 동의하기에 이르렀다.

혹자는 카토릭에 의해서 wcc가 태동되었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면서 천주교의 제수이트와 기독교 안에 프리메이슨 세력의 합작이라고 하기도 한다. 필자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적어 뭐라고 단정 짓지는 못하겠으나 정황상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 이야긴 핵심적인 것이 아니기에 넘어가겠다.

어쨌든 이렇게 시작한 wcc는 처음부터 오늘날과 같지는 않았다. 복음주의 연맹인(wea) 로잔선교선언문과는 달리 사회 현상에 대한 치유를(이것을 영혼 구원과는 달리 사회 구원이라고 하기도 한다) 기독교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여 교회가 나선 것은 당연하고 칭찬할 만한 일이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여기서 잠깐~.  필자는 통합의 정신인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자라고 여러 번 언급하였음에도 필자를 혹자는 교리맹신 혹은 wcc를 파괴하려는 자로 말하기도 하는데 이는 필자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필자의 소망은 한국교회가 보수와 진보가 균형을 맞추어 가면서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wcc(ncck)는 금기 선을 넘어서 버렸기에 이것을 알리기 위해 이를 쓰는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로마카톨릭은 1962-1965년 무려 3년에 걸쳐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하여 그간의 신앙과 모든 것을 정리하고 로마카톨릭 신앙을 선포하였다. 혹자는 이를 평가하길 그간 폐쇄적이었던 것을 버리고 기독교를 형제 교회로 인정하였다 하여 이를 ‘천주교의 대 개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선언문이야말로 마지막 날에 나타날 배도의 길을 선언하고 종교통합의 야망을 드러낸 것으로 평가한 분들에게 공감하고 있다.

저 같이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자에게는 선언문 전체를 분석하는 것은 너무 방대한 분량이고 또 알 필요도 없는 것들이니까 우리 기독교와 특히, wcc와의 관계의 것만 다루기로 하겠다.


이렇게 종교통합의 길을 선포하고 드디어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것을 교황이란 자들이, 중요 위치에 있는 자들이 그 나팔을 불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김수환 추기경도 그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는 1961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wcc 3차부터 이들 카톨릭의 전위부대가 입성을 하여   타종교들도 세계에 빛을 비추고 있다. - 종교다원, 혼합주의 신앙을 시도하여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하다가 4차 웁살라 대회부터 아예 “다른 종교”를 “다른 신앙들”이라 부르기 시작 1971년부터 회교, 불교, 힌두교, 유대교회의 지지 – 세계 종교통합 시도 이때부터 “다른 신앙들”을 “살아있는 신앙들”로 부르기 시작 – 종교다원주의 가 wcc의 문서에 등장하였다.

5차 wcc 나이로비총회에서는 구원에 이르는 길이 오직 예수가 아닌 다른 타종교를 통해서도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모든 종교인들은 하나님 자녀이며, 형제, 자매다. 라고 말하며 타종교인은 개종의 대상이 아니며 함께 진리를 찾아가는 동료 영적 순례자다. - 종교다원주의, 선교무용론 등이 다루어졌다.

6차 밴쿠버 총회에서는 종교간 대화 프로그램 의장 뮬더는 캐나다 원주민에 관한 인터뷰에서
불교, 힌두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어도 구원 얻었다고 강력 주장하였고,

7차 호주 캔버라 총회에서 그 유명한 정현경 “초혼제”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통합측 총회에서는 이것을 一過性  해프닝으로 치부하여 버렸다. 세계 모든 무속 미신종교에서 역사하는 영을 성삼위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과 동일시하여 버렸다.

더 말해서 무엇 하랴!  

이것을 보면 로마카토릭이 얼마나 의도적으로 wcc의 맹점을 파고들었는지를 알 것이다. 아니 로마카톨릭과 親人士 였던 ‘빌리그래함’ 이나 ‘로버트 슐러’ 등을 보면 배도의 어떤 거대한 세력이 있어 wcc를 숙주삼고 세계 종교통합을 진행시키고 있다는 항간의 말도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다음번에는 바티칸 선언과 교리성의 문안을 살펴보면서 천주교와 신앙직제 협의회를 구성하는데 동의한 천주교의 의도와  우리 통합측이 바라는 것과는 天壤之差가 나는 것을 이야기 하겠다.

그리고 이곳에 어떤 분이 우리교단의 이00, 박00 신학자들을 과소평가한다고 필자를 공박하는데 과연 그럴까 하는 이야기를 그 다음에 해보려고 한다.


내가 왜 천주교와 일치를 그토록 반대하는가?

김정한


천주교와 WCC에 속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교단게시판에 올린 글 여기에도 올립니다.

내가 왜 천주교와 일치에 반대하는가?

필자가 이곳 게시판에 글 올리기를 시작한 것은 2009년부터 였다.(통합측 게시판을 말함) 그 때부터 WCC부산 유치에 우리 교단이 주도한 것을 보고 WCC의 독소조항이 擴大一路에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혹자는 필자에게 우리교단 정책이 에큐... 이고 그 정책을 총회에서 일관되어 추진하여 오고 있는데 이제 와서 公論化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 분도 있다. 그러면서 필자에게 헛수고라고 말하고 필자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에게 통합 측에 危害를 끼치는 不純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 일이 현재 이곳 게시판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천주교가 우리 기독교에 대해 일치를 내세우는 의도를 안다면 WCC 핵심이 천주교의 배도적인 일치에 물든 것임을 알 것이고, NCCK의 주요 인사들도 마찬가지다.


WCC의 일치운동(에큐메니칼)의 역사를 보면
세계 1-2차 전쟁으로 말미암아 전 세계인들이 갈등의 골이 깊고 심각한 전쟁 상처를 입은 것을 교회가 이를 치유하고 복음을 전하자는 것에 뜻을 같이한 교회들이 1948년 암스텔담에서 시작하였다.

이때에 스탈린주의(공산주의)의 나라 교회를 받아들인 것을 가지고 미국교회가 극력 반대하였으나 예수 안에서 ‘하나’ 라고 하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갖는 방향에서 이를 수용하였다. 이때 한국교회가 WCC를 수용하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합동과 통합이 갈리는데 명분을 제공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 통합측은 그 뒤 WCC의 에큐... 정신을 인정하였고 계속하여 WCC참여하게 되었고, 한국교회 8개 교단이 참여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필자는 에큐...정신을 전면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독소의 소지가 있는 것을 틈타고 들어온 저 배도의 세력 천주교의 치명적인 독소를 수용하여 변질된 것을 알리고 하루 빨리, 한국교회, 특히 우리교단이 이를 저지하며 세계 교회(WCC)에 알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되기에 글을 쓰고 있는 것이며 이를 알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천주교와 일치는 안 된다고 나선 것이다.  


WCC의 독소의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WCC의 헌장 1조부터 이다.  헌장 1조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구주로 고백하는 기본 믿음을 나누는 모든 교회는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혹자는 이런 고백을 하는 WCC가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교단 총회가 당신만 못한 사람들이 모였는가? 통합 측 신학자들을 우습게 보는가? 라고 하며 필자를 공격한다. 필자는 그 분들에게 말하고 싶다. 처음부터 에규... 운동을 해야 한다는 當爲性 때문에 헌장 1조의 치명적인 독소가 들어있는 문안임에도 이를 간과(看過) 해 버린 것이다

대한민국의 헌법 구조를 보라.  대한 헌법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는 것에 대한 下位 법에 구체적으로 그 법 조항을 명기하여 구체적으로 뒷바침되어야 하듯이 WCC의 헌장도 마찬가지여야 하는데, WCC는 헌장 1조부터 다원주의가 들어올 소지를 주었다. 또  북한을 보라 그들 역시 헌법을 가지고 있다.   제1조 우리 나라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그 下位 法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 서문(일부 발췌) 에는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와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의 주체적인 국가건설사상과 국가건설업적을 법화한 김일성-김정일헌법이다“ 라고 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헌법정신은 그 구체적인 하위 법까지가 구체적으로 입법되어져야한다는 뜻이다.

자 그럼 WCC의 헌장 일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구주로 고백하는 기본 믿음을 나누는 모든 교회는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다." 가 1조부터 문제가 있다고 하였는데 무엇이 문제인가를 알아보자

바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기본 믿음부터가 잘못되었다. 우리 개혁주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심과 동시 사람이지만 유일한( THE ONE= ONLY) 구세주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라고 고백하지 않고 구주라고 말하면 ‘다른 구원자’가 있을 수 있다는 여지를 줄 수 있는 것이란 이야기다. 다원주의자들에게는 대문을 활짝 열어 논 것이란 이야기다. (성경은 요 14:6. 행 4:12 롬 5장을 통하여 예수님이 왜 유일한 구세주인가를 말하여 주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WCC가 10차까지 오면서 이 헌장 1조를 명쾌하게 보완하지 않고 공산주의와 천주교가 들어올 빌미를 제공하였기에 잘못되고 있고 위험천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종교에도 구원의 길이....  라는 헛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이곳에 어떤 이는 이 구원을 성삼위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영생(조에로서)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회에서 쓰는 구원이란 것 내세워 기독교 핵심의 구원진리까지를 희석시키려는 분도 있고, 다른 종교인들을 ‘윤회의 과정’을 통해서 구원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속성’을 볼 때 그러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 나 같은 자를 “교리에 맹목적 목사”라고 하는 것을 보고 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쓴다. 다음번에는 천주교가 어떻게 WCC의 헌장 1조를 파고들었는지 그 것에 대한 것을 쓰려고 한다.

로마 카톨릭 교회 안에 여신(마리아 )숭배를 교리화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예수회 출신의 첫 번째 교황 프란치스코가 최근 자신의 SNS와 공개적인 강론을 통해 여신(마리아) 숭배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지난 9월 2일 교황은 자신의 SNS를 통해 “the Christian who does not feel that Mary is his or her mother is and orphan.(성모 마리아를 그들의 어머니로 느끼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고아이다.)”라는 메시지를 남겼고, 다음 날(9월 3일) 바티칸에서 있었던 회중들을 위한 교리 강연에서는 성도들을 낳고 양육하는 사명을 맡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낳고 기른 성모(마리아)와 비유하며, 이런 교회(성모)의 도움이 없이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고 성장할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관련기사>> Pope Francis: the Church is a mother who guides her children


로마 카톨릭을 여신 숭배의 종교를 바꿔 놓으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가 빨라지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짐승(적그리스도)의 등에 올라타세상을 음행(우상숭배)으로 더럽히는 타락한 교회를 ‘음녀’라고 표현했던 구체적인 이유가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 예레미야 -

 


로마기독교공인 그 이면의 진실: 세속적인 변질의 시작

 

지난 포스팅에서도 로마기독교공인 이후에 기독교가 변질되기 시작한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에 콘스탄티누스를 숭상하고 그의 지시에 타협을 시작하면서 사자굴과 카타콤에서는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로마가 공인한 기독교, 로마기독교 공인. 사실 그것은 진실된 기독교 공인이 아니라 로마를 이끄는 콘스탄티누스의 입맛대로 변형시켜 본 모습을 잃은 변질된 기독교로서 기독교 공인이었습니다. 또한 기독교신자를 자처했다는 콘스탄티누스에 대해서도 모순적인 상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콘스탄티누스의 신앙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포스팅에서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독교가 과거처럼 핍박을 받지 않게 된 것은 은혜였지만, 황제에게 보호를 받지 않는 것은 더 큰 은혜였음을 역사는 말해주고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 사역자들은 새로운 사회적 신분과 세속적 이익을 얻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전에 이방 종교의 사제들이 누리던 특권을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주었다. 감독들은 높은 명예를 가지게 되었으며, 이교도의 돈으로 교회들이 신축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의 면세를 확대했고(312), 십자가형을 금지시켰으며(315), 검투를 폐지시켰다. 또한 기독교의 주일을 공휴일로 제정했고(321), 교회의 절기를 존중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는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긴 다음 도시를 확대해 콘스탄티노플로 개명하고, 그곳에 수많은 교회들을 건축했다. 자연히 출세를 위해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불로 시험을 받던 교회가 이제는 호의로 시험을 받았다.”(롤랜드 베인튼, 1894-1984).


“(예배당) 지붕은 금으로 치장하고 대리석을 끼워 장식하고 있다. 한때는 불꽃 속에 던져졌던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책이 이제는 화려하게 제본되고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지고 있다.”(제롬, 345?-419?)


많은 가짜 기독교인들이 생겨났고, 점차 많은 사람들이 매우 무가치한 동기로 성직자 세계에 들어왔다. 순교를 각오한 신자들만이 들어올 수 있었던 교회가, 정치적 야심을 품고 아직 반은 이교적인 사람들이 몰려들어오는 세속적인 교회로 변질되어갔다.

 

 


콘스탄티누스가 본 환상과 그의 삶은 그가 참으로 회개한 사람이 아니며,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그는 개종했다고 한 후로도 여러 번 살인했고, 20년간 살아온 두 번째 부인 파우스타(Fausta)를 물이 끓는 목욕탕 안에 넣어 질식시켜 죽이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다. 또 니케아 공회의를 소집한 그 해에 맏아들을 처형(암살)함으로써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고, 그의 누이의 아들은 태형으로 죽였다. 그는 피로 물든 옷을 입은 황제였다. 그러나 타락한 교회들은 고마운 후원자를 위해 콘스탄티누스의 미덕들을 찬양하고 그의 결점들은 감추었다. ‘황제의 축제일’까지 제정한 거짓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을 언급할 때마다 12사도에 준하는 분이라는 명칭을 반드시 덧붙였다.  


콘스탄틴 대제와 로마제국교회 -송광택
 관리자    | 2006·02·14 11:14 | HIT : 8,538 | VOTE : 3,117 |

콘스탄틴 대제와 로마제국교회

 

송광택 교수

들어가는 말

주후 4세기부터 중요한 변화가 서방교회와 정치구조 가운데 발생하였다. 제 4세기에 콘스탄틴의 종교정책에의해 소수파였던 기독교가 4세기말에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었다. 또한 교회와 로마제국 그리고 이방종교 사이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교회사가 곤잘레스의 표현대로, 제4세기는 “교회사에서 새로운 전기를 여는 시작” 1)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베푼 ‘밀란의 칙령'(the Edict of Milan) 2) 을 출발점으로 하여 제4세기의 변화는 점진적으로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콘스탄틴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로마 제국 최초의 기독교 황제”(Christian emperor) 3) 로 환호하며 맞이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틴 대제는 직접 간접으로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 이전에 이교 사제들이 누리던 특권을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주었다. 교회는 이교 사원과 동일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의 주일(일요일)은 법정 공휴일이 되었다. 감독들은 높은 명예를 가지게 되었으며, 교회가 이교도의 돈으로 신축되었다. 그러나 “불로 시험을 받던 교회가 이제는 호의로 시험을 받았다”(Roland Bainton).  제롬(Jerome, 435?-420)은 “(교회당) 지붕은 금으로 치장하고 대리석을 끼워 장식하고 있다. 한때는 불꽃 속에 던져졌던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책이 이제는 화려하게 제본되고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지고 있다” 4) 고 말했다.

본 소고에서는 로마제국교회 탄생의 배경을 살피면서, 당시의 교회가 겪은 변화와 직면한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당시의 교회 상황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배우고 통찰을 얻고자 한다.

1. 콘스탄틴의 성장 배경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속주(屬州)인 상 모에시아(Upper Moesia)의 나잇수스(Naissus) 5) 에서 로마 군대의 장교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와 헬레나(Helena)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헬레나는 해방된 동방의 여노예로서 그리스도인으로 미인이었다고 한다(a beautiful Christian Oriental freedwoman 6) ), 그가 일생동안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던 모친 헬레나는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와 결혼하였지만 법률상의 아내는 되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로마법이 고급 장교들에게 속주의 주민들과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7)

콘스탄틴은 일신교 8) 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경향이 짙은 가정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3세기의 로마 제국에 있어서 종교적 성향은 모든 신들을 초월하는 ‘최고신'에 대한 신앙이 우세하였는데, 그의 부친도 이러한 일신교 신봉자였다. 콘스탄틴의 이복 여동생 아나타시아(Anathasia)는 유대교신자이거나 그리스도인이었고, 또 다른 이복 여동생 콘스탄시아도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었다.

콘스탄틴은 292년에 니코메디아에 있는 디오클레시안의 황궁에 들어가서 지도자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그후 그는 디오클레시안과 이집트 전쟁에 출전하러 가던 도중에 팔레스타인에서 유세비우스 9) 를 만나 친교를 맺게 되었다(후에 유세비우스는 대규모로 '교회사' 10) 의 저술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가이사랴의 감독으로 일했고 콘스탄틴 황제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11)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궁극적 승리를 위한 준비였다. 그는 최초의 기독교 황제를 구약의 메시야 예언들의 성취(the fulfilment of the messianic prophecies)로서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콘스탄틴을 통해 이루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세상은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로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12)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의 친구요 정치평론가(publicist)요 전기작가였다 13) ).

그후 305년 디오클레시안과 막시미안이 은퇴를 선언하였을 때,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이 제1 정제(正帝)가 되고, 자신은 부친의 뒤를 이어 제2부제로 임명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디오클레시안은 그의 사위 갈레리우스를 제1정제로 임명하였고 콘스탄틴의 부친은 제2정제가 되었다. 또한 두 부제에는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ia)와 세베루스(Severus)가 임명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콘스탄틴은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그의 부친이 있는 골(Gaul) 지방 불로뉴로 갔다가, 후에 부친과 함께 브리탄니아로 건너서 갈레도니아(Galedonia) 전쟁에 참전하였다. 전쟁 발발 후 얼마되지 않아 그의 부친이 요크(York)에서 사망하자, 군대의 지도자들이 콘스탄틴을 정제(正帝)로 추대하였다. 이제 그는 부친을 계승하여 골 지방과 브리탄니아 속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다.

콘스탄틴은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군사력을 통해서 310년에 에스파니아를 정복하고 로마제국의 서부 지역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311년에 제1정제인 갈레리우스가 사망한 후, 서부 지역에서는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가 영토를 나누어 지배하였고, 동부 지역의 통치자는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였다. 이 황제들의 정치적 동맹관계는 그들의 지리적 환경과 기독교에 대한 정책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즉 콘스탄틴은 서방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유일한 통치자가 되기 위해 동방의 리키니우스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처럼 관용정책을 취하였고, 리키니우스도 이에 동조하였다.

2.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 전투

312년에 콘스탄틴은 당시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던 막센티우스와의 전쟁을 계획하였다. 그는 막센티우스를 서부 지역의 폭군으로 규정하고, 주민에게 자유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이탈리아로 출정하였다. 그는 알프스를 넘어 저항군대를 격퇴시키면서 로마로 진격하였다.

그는 로마의 티베르 강에 놓여있는 밀비안 다리에서 상대방의 막강한 군대와 마주쳤을 때 그의 군대로서는 로마를 점령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는 하나의 모험이었다.

그런데 콘스탄틴은 전투 전에 환상(혹은 꿈)을 통해 그의 군대가 승리할 수 있는 표징(sign)을 받았다. 그는 “이 표식으로 이겨라”( In this sign, Conquer, In hoc signo vinces )라는 라틴어 환상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14)

자신감을 얻은 그는 로마로 진군하였고 대승리를 거두었다. 막센티우스(Maxentius)의 군대는 완전히 패했다. 막센티우스 자신이 타이버 강을 가로 질러 밀비오 다리를 건너 도망하려고 시도하다가 그 강에서 빠져 죽었다.

이 전쟁은 312년 10월 28일에 있었는데, 세계 역사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큰 전쟁이었다. 이 전투가 콘스탄틴에게는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그는 서부 유럽 전체를 차지한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312년 10월 28일에 로마 원로원은 콘스탄틴을 최고통치자로 영접하였고,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착공하였다(315년에 완성됨).

리챠드 토드에 따르면, 콘스탄틴의 ‘환상' 이야기는 ”미심쩍은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 신앙을 불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또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신령한 태양 사이의 구별을 명확하게 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충성심을 갖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15)


3. ‘밀란 칙령'과 교회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콘스탄틴은 로마에서 두 달을 지낸 다음 313년 봄에 밀란(밀라노)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그의 누이동생인 콘스탄티아와 리키니우스(Licinius) 황제의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두 황제는 소위 ‘밀란 칙령''(the Edict of Milan)이라는 포고령을 선포하여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관용 정책을 베풀었다. 16) 그리하여 동부 로마제국의 집정관들에게 제극내의  제국내의 여러 종교에 부여된 권리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승인하도록 지시하였다. 밀란의 칙령은 “기독교로 하여금 로마 제국 내에 있는 다른 종교들과 함께 법률 앞에서 동등한 발판을 얻게 하였다.” 17)

그때부터 수년 동안에 콘스탄틴은, 칙령을 내려, 몰수되어 있던 교회 재산을 반환하고 국가가 교회를 보조하도록 하며, 성직자에게는 공적인 의무를 면제하고 점장이를 금하고, ‘태양의 날'(Day of the Sun)을 안식과 예배의 날로 정했다. 18)

콘스탄틴은 재위 기간 중에 기독교에 대해 물질적 특혜와 법적 특권을 부여하였다. 313년에 그는 로마 감독에게 라테란 궁전을 기부하여, 후에 이곳에 콘스탄틴 대성당(지금의 죠반니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또한 그의 시대에 베드로 대성당, 예루사렘 무덤 성당, 베들레헴의 예수 성탄 성당이 건립되었다. 이로써 기독교 예술과 건축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315년 십자가 처형을 폐지시켰고, 321년에는 ‘일요일'을 그리스도인의 예배일로 공인하였다. 또한 국법에 의하여 주일과 교회 축일을 공휴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공휴일에 로마인들은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는데 여가 시간을 보냄으로써 예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아울러 콘스탄틴은 몰수된 교회재산의 반환 조치를 취하였고, 321년에는 교회가 상속권을 갖는 법을 제정하여 신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교회에 기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교회는 급속적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였고,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사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임을 공인하였고, 그의 가족은 모두 신자로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337년 그는 임종을 앞두고 침상에서 세례를 받았다. 19)   세례를 미루는 일은 ‘인간의 죄를 피하기 위한 계락'으로서 그 당시에는 관습적으로 유행하던 것이었다. 20) “당시 사람들은 그와 같이해서 죄에서 정결케 되어 천국에 들어갈 것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21)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업적 가운데 하나는 콘스탄티노플의 건설이다. 옛 비잔티움의 터전을 두 대륙을 통치하는 최선의 장소로 선택하여, 326년 11월 26일 정초(定礎)하고, 330년 5월 11일 신도(新都) 창설의 축하를 행하고,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이라 명명하였다.

4. 평가

1) 콘스탄틴에 대한 평가

(1) 긍정적 평가

이 평가와 관련하여 제일 먼저 던져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이었나?”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한 사람이나 부정적인 대답을 하는 사람이나 모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가정해왔다. 22)  

콘스탄틴을 옹호하는 케레츠페스(Paul Kereszte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의 문헌과 기록을 보면, 콘스탄틴은 자신이 삶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며 언제나 교리 문제를 잘 알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성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 교회사에 있어서 진정으로 위대한 그리스도인 황제이며 순수한 사도였다.”(Constantine: The Christian Monarch and Apostle, 1981, p. 8) 23)

김성태 교수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이교도의 종교행사를 조심스럽게 제한함으로써 기독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24)  

그러면, 콘스탄틴이 세례 받는 것을 뒤로 미룬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콘스탄틴이 당시의 일반적 관례를 따랐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Chrysostom)도 말하기를 “세례는 이전의 죄들을 용서해 줄 수 있다(Baptism can give remission of former sins.)...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큰만큼, 세례 후에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더 중하다”라고 했다. 25)

(2) 부정적 평가

일부 카톨릭 교회사가의 입장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은 콘스탄틴의 ‘개종'과 신앙(경건)에 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콘스탄틴의 개종이 정확하게 어떠한 성격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알리스테어 키는 콘스탄틴에게 종교가 제국 전략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로마제국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승리'라는 생각을 타당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콘스탄틴이 그리스도인의 신과 제휴한 것은 “그의 천재성과 창의적인 안목 때문이었다.” 26) 그는 콘스탄틴에게 ‘개종'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27) 그는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이었나?”라는 질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3) 중도적 평가

얼 케언즈(Earle E. Cairns)에 의하면, “환상은 사실이었는지 모르나 콘스탄틴이 그리스도 교회에 호의를 보인 것은 편의상의 일 이었던 것 같다.”  또한 “죽음의 직전까지 세례를 받기를 연기하였고, 이교적인 국가의 ‘대사제직'(Pontifex Maximus)의 직위를 보유하고 있었던 일은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것 같다. 더구나 제위에 오를 권리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젊은 사람들을 그가 처형한 것은 28) 진실된 그리스도 신자의 행동(the conduct of a sincere Christian)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도 그의 정책에는 미신과 편의주의가 혼합되어 있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콘스탄틴은 재위기간 동안 우상숭배의 이교사상을 배격하지 않고 그리스도교와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의 동기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옳든지 옳지 않든지간에) 콘스탄틴은 그리스도 교회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29)

얼 케언즈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변화를 언급하고 있다:

"멸시를 받아오던 소수의 회원을 가진 하나의 종파이던 그리스도교가 강대한 로마 제국의 공인 종교가 되었던 경로를 회고해 볼 때, 이 승리의 행진은 교회로서 좋지 못하였다고 믿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높이고 그 결과로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전보다 높아졌고, 투기사의 죽음을 구경하는 것이 폐지되고, 노예에게는 전보다 관대한 대우가 주어지고, 로마의 법제는 훨씬 공정하게 되고, 전도사업은 더욱 촉진되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일의 이익이 있었던 한편, 또 현저한 손해도 있었다. 정부는 교회의 지위와 보호와 지원의 보상으로서 영적 문제와 신학문제에 간섭하는 권리를 요구하였다...교회와 국가 사이의 논쟁이라는 길고 복잡한 문제는 이 시대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313년부터 590년까지의 시기에 있어서의 교회의 로마 제국과의 긴밀한 제휴(closer association)는 박해 시대에는 문제도 되지 아니하던 그러한 많은 약점들을 교회내에 가져 들어오고 말았다” 30) 즉, 교회와 국가 사이의 친선(화해)은 교회에 축복 보다는 손해를 더 많이 가져왔다.

2) 기독교 공인(또는 국교화)의 결과에 관한 평가

(1) 긍정적 측면

곤잘레스에 의하면, "새로운 환경을 맞이해서 4세기의 교부들은 지금까지 순교를 가르치고 이교도들의 고소에 대해 논박하는 데 집중시켰던 정력을 이제는 다른 활동 분야에서 배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31)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4세기는 아타나시우스, 캅바도키아 교부들, 제롬, 암부로스, 어거스틴 등등 위대한 교부 배출하였다.

(2) 부정적 측면

B. K. 카이퍼는 기독교 공인의 부정적 결과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신자의 이름은 정치적 군사적 패스포트(passport)이며 사회적 승진의 수단이 되었다. 그 결과로 수천 수만의 이교도들이 교회에 합류하였는데, 이들은 불행하게도 다만 이름뿐인 기독 신자였다...  콘스탄틴 황제도 의심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참으로 높은 수준의 신자는 아니었다. 교회가 양(量)에서는 얻었으나 질(質)에서는 잃었던 것이다. 313년에 콘스탄틴의 칙령은 교회에 힘센 타락의 홍수 문을 열었던 것이다.” 32)

곤잘레스에 의하면, "대량적인 개종은 교회의 도덕적 삶과 신앙의 확신의 깊이를 얄팍하게 하였다.“ 그리고 ”황실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신학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하면 황실은 어떠한 신학적 주장이나 다른 문제에 대해서 정죄를 내리거나 총애를 표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했다. 33) 콘스탄틴은 교회 논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곤 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공인의 결과와 관련하여, 콘스탄틴의 개종 이후  ‘수많은 이교도들'(crowds of the heathen)이 교회에 들어오려고 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34) 이교도들은 우상숭배의 축제를 거행할 때 익숙하였던 흥청거림과 술취함을 포기하지 않고 교회에 들어 왔다. 또한 이교적 관습이 그들과 함께 교회에 들어왔다.

교회는 많은 이방사상과 상징을 받아들였다. 35) 5세기 중엽에 교황 레오 1세는 베드로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태양에게 절하기 위해 돌아섰던 숭배자들을 비난하였다. 기독교화된 몇몇 이교적 풍습들, 즉 초나 향, 화관 같은 것을 사용하는 풍습은 이방 종교를 상징한다고 해서 초기에 교회 내에서 금했었다. 성모 마리아 숭배는 이방 종교의 유사한 것들 때문에 자극을 받은 듯 하다. 몇몇 학자들은 아데미(다이아나) 숭배가 마리아 숭배로 바뀌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본래 아데미를 숭배했던 에베소 사람들은 초기부터 마리아를 숭배하였다. 마리아 숭배를 애굽의 여신 이시스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이시스를 열정적으로 숭배하는 자들은 그 여신을 ‘대동정녀'(the Great Virgin) 혹은 ‘신의 어머니'라 불렀다.

이방 종교와 기독교가 혼합되면서 4세기에는 성자와 순교자들을 숭배하는 일이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교회당을 순교자의 무덤 위에 세웠고, 성자들의 시신을 찾고자 하는 경쟁은 곧 미신적인 탐사로 타락해 버렸다. 동방 지역에서는 아직 살아있기는 하지만 곧 죽을지도 모르는 ‘숨어있는 성자들'을 찾기 위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36)

잘못된 순교자 숭배와 성자 숭배에 대해 아퀸타인 출신의 비지란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비난하기도 했다:

“우리는 신앙심을 구실로 하여 교회에 들어 온 이교적 의식을 볼 수 있다. 즉 양초가 대낮을 밝히고 있고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진귀한 천에 싸여 있는 작은 항아리의 먼지에 입을 맞추고 그것을 숭배한다.” 37)

3) 입교 절차(교리문답교육)의 체계화

적어도 콘스탄틴의 시대부터(개종자가 훨씬 더 많아졌기 때문에) 더 정교한 입교 과정이 발전되었다. 38) 305년에 엘비라 종교회의(the Synod of Elvira)는 세례 준비 기간을 최소한 2년으로 확정했고, 병자를 위해서는 더 짧은 유예기간을 허락하였다. <힙포리투스의 법규집>은 3년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특별히 열성적이고 적절하다면 그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이 있다. 그 준비기간이 6년 이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규정도 보이나, 다른 증거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일반적인 요구사항은 아닌 듯 하다. 39)

교리문답 내용은 기독교 교리의 기본적 내용들로 이루어졌다. 즉, 하나님의 본성과 삼위일체, 창조와 우주의 질서, 세계 창조의 목적과 그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 인간의 본성, 악인에 대한 심판과 성도에 대한 보상,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 등이었다. 교육이 이루어지면, 감독이나 사제의 기도 후에 교리문답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40)  

나가는 말

콘스탄틴 아래에 일어난 큰 변화가 교회에 있어서 축복된 일인가 아니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간단히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대답하기에 이르기는 어렵다. W. V. 뢰벤이히에  의하면, “중요한 일은 단지 교회의 외적 대승리는 아니고, 그리스도교 라고 하는 것의 현실적인 발전이다. 공공의 생활은 전부 그리스도교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라고 했다. 41)

교회는 이 세계를 정복했으나, 이번에는 이 세계가 교회를 정복하려 했다. 교회는 국가에 대해서 잘못된 의존관계에 빠져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이 방향에 나아가는 것에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 밑에서 절대적인 국가교회의 제도가 시작되었다. 42) 뢰벤이히는 이 세속화가 “콘스탄티누스에 의한 제국교회의 설립에 의하여” 비로소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이 일에 책임 있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교회 자신이다.

1)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 311쪽.

2)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Eusebius Pamphilus(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1), X. v.; cf. 박용규, 초대교회사, 107-109.

3) J.D. Douglas ed., Who's Who in Christian History, 1992, 172.

4) 롤랑 베인튼, 정통교회사(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1), 50쪽에서 인용.

5) 오늘날의 세르비아에 위치함.  cf. "Conctantine the Great", Microsoft Encsrta 98 Encyclopedia.

6)  Earle E. Cairns,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Grand Rapids: Academie Books, 1981), 124.

7) 김성태, 세계교회사 I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0), 215쪽.

8)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과 3세기초의 황제들의 본을 따라 초기에 로마의 태양신(Sol)을 믿는 ‘태양 단일신론자'(solar henotheist)였다. 태양신은 우주 배후의 원리인 ‘보이지 않는 최고의 신'(summus deus)의 보이는 현시(顯示)라고 생각했다.
9) 마이클 스미드, ‘유세비우스', 교회사핸드북, 17쪽.

10) 교회사는 303년 혹은 311년에 최초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는 324년까지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몇 가지 부록을 첨가하였다. 그의 친구 콘스탄틴의 최후 승리까지 추가시켰던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지루하고 장황하며 어려운 문체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이 책은 다른 잃어버린 저작들로부터의 인용문들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귀중하다. 대부분의 그의 역사기술은 앞선 저술가들로부터의 긴 인용문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저술가로서의 유세비우스는 지나치게 경솔하게 믿지도 않았고 아주 비판적이지도 않았다.
11) Erwin R. Goodenough, The Church in the Roman Empire, 56. "..., Eusebius, Bishop of Caesarea, the learned historean of the Church, become his intimate friend."12) R. A. Markus, Christianity in the Roman World(London: Thames and Hudson Ltd., 1974) 91, 98.
13) 그의 정치사상은 비잔틴 기독교제국을 건설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콘스탄틴의 통치를 새 시대로의 진입으로 여겼다.
14)  콘스탄틴은 이 승리의 표시가 태양신이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만약 전투에서 이긴다면 태양신의 전사가 되겠다고 서약했다. 다음날 10월 26일 콘스탄틴의 군대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콘스탄틴은 그의 승전을 그리스도의 위력과 그리스도교의 우수성의 증거로 보았다.
15) 리챠드 토드, ‘콘스탄틴 대제와 기독교 제국', 교회사핸드북, 130쪽.
16) Erwin R. Goodenough, The Church in the Roman Empire(New York: Cooper Square Publishers,Inc.,1970), 40. "...  Constantine had conquered the Roman world, he renewed with Licinius the policy of toleration for Christians in the great Edict of Milan, late in the year 312, or early in 313."
17) B. K. 카이퍼, 세계기독교회사(서울: 성광문화사, 1980), 37쪽.
18) Earle E. Cairns,124.
19) 콘스탄틴은 세례를 받은 후 황제복을 다시 입기를 거부하여 세례복인 흰옷을 입은 채 세상을 떠났다.
20)  세례를 지체하는 이유는 세례가 회개한 교리문답자들에게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를 보장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는 5세기가 될 때까지는 규정(rule)이 되지 않았다.
21) W. V. 뢰벤이히, 교회사개론(서울:마라나다, 1995), 95쪽.
22)  알리스테어 키, 콘스탄틴 대 그리스도(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8), 8쪽.
23)  알리스테어 키, 콘스탄틴 대 그리스도, 22쪽.
24) 김성태, 세계교회사 I, 223쪽.
25) M. L. W. Laistner, Christianity and Pagan Culture in the Later Roman Empire(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1978), 34.
26)  알리스테어 키, 21쪽.
27) “우리는 진실로 이 점에서 ‘개종'이란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알리스테어 키, 같은 책, 21쪽)

28) 예를 들면, 326년 그의 아들 크리스푸스(Crispus)와 황후 파우스투스(Faustus)를 간통 혐의로 처형했다.
29)  Earle E. Cairns, 124.

30) Earle E. Cairns,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Grand Rapids: Academie Books, 1981) 121.
31) 곤잘레스, 같은 책, 311쪽.

32)  B. K. 카이퍼, 세계기독교회사, 38-39쪽
33)  콘스탄틴은 아리우스 논쟁에 깊이 개입하였다.(참고. 곤잘레스, 312쪽 이하)34) Peter Brown, Authority and the Sacred: aspects of the Christianisation of the Roman world(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23.
35) 교회사핸드북, 131쪽. “예를 들면, 태양숭배로부터 에수의 탄생일이 태양제의 날인 12월 25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36) 교회사핸드북, 132쪽. “성자 숭배 의식은 그 시대의 위대한 지도자들(제롬, 암브로우스, 어거스틴)에 의해서 고무되었다.”
37) 같은 책, 132-133쪽.

38) Erwin R. Goodenough, The Church in the Roman Empire(New York: Cooper Square Publishers,Inc.,1970), 36.
39) 같은 책, 38.

40) 같은 책, 39.
41)  W. V. 뢰벤이히, 교회사개론(서울:마라나다, 1995), 95쪽.
42) 같은 책, 96쪽.

http://www.chongshin.re.kr/4_study/study.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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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사이버신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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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늘새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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