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틴 대제와 로마제국교회 -송광택 교수

천주교의 모든 것 2014. 9. 5. 05:47
콘스탄틴 대제와 로마제국교회 -송광택
 관리자    | 2006·02·14 11:14 | HIT : 8,538 | VOTE : 3,117 |

콘스탄틴 대제와 로마제국교회

 

송광택 교수

들어가는 말

주후 4세기부터 중요한 변화가 서방교회와 정치구조 가운데 발생하였다. 제 4세기에 콘스탄틴의 종교정책에의해 소수파였던 기독교가 4세기말에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었다. 또한 교회와 로마제국 그리고 이방종교 사이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교회사가 곤잘레스의 표현대로, 제4세기는 “교회사에서 새로운 전기를 여는 시작” 1) 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종교적 관용을 베푼 ‘밀란의 칙령'(the Edict of Milan) 2) 을 출발점으로 하여 제4세기의 변화는 점진적으로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콘스탄틴을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로마 제국 최초의 기독교 황제”(Christian emperor) 3) 로 환호하며 맞이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틴 대제는 직접 간접으로 교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 이전에 이교 사제들이 누리던 특권을 기독교 성직자들에게 주었다. 교회는 이교 사원과 동일한 권리를 갖게 되었다. 기독교의 주일(일요일)은 법정 공휴일이 되었다. 감독들은 높은 명예를 가지게 되었으며, 교회가 이교도의 돈으로 신축되었다. 그러나 “불로 시험을 받던 교회가 이제는 호의로 시험을 받았다”(Roland Bainton).  제롬(Jerome, 435?-420)은 “(교회당) 지붕은 금으로 치장하고 대리석을 끼워 장식하고 있다. 한때는 불꽃 속에 던져졌던 그리스도인들의 거룩한 책이 이제는 화려하게 제본되고 황금과 보석으로 꾸며지고 있다” 4) 고 말했다.

본 소고에서는 로마제국교회 탄생의 배경을 살피면서, 당시의 교회가 겪은 변화와 직면한 문제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당시의 교회 상황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배우고 통찰을 얻고자 한다.

1. 콘스탄틴의 성장 배경

콘스탄틴은 로마제국의 속주(屬州)인 상 모에시아(Upper Moesia)의 나잇수스(Naissus) 5) 에서 로마 군대의 장교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Constantius Chlorus)와 헬레나(Helena)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헬레나는 해방된 동방의 여노예로서 그리스도인으로 미인이었다고 한다(a beautiful Christian Oriental freedwoman 6) ), 그가 일생동안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던 모친 헬레나는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와 결혼하였지만 법률상의 아내는 되지 못하였다. 이는 당시 로마법이 고급 장교들에게 속주의 주민들과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7)

콘스탄틴은 일신교 8) 와 그리스도교에 대한 경향이 짙은 가정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3세기의 로마 제국에 있어서 종교적 성향은 모든 신들을 초월하는 ‘최고신'에 대한 신앙이 우세하였는데, 그의 부친도 이러한 일신교 신봉자였다. 콘스탄틴의 이복 여동생 아나타시아(Anathasia)는 유대교신자이거나 그리스도인이었고, 또 다른 이복 여동생 콘스탄시아도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었다.

콘스탄틴은 292년에 니코메디아에 있는 디오클레시안의 황궁에 들어가서 지도자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그후 그는 디오클레시안과 이집트 전쟁에 출전하러 가던 도중에 팔레스타인에서 유세비우스 9) 를 만나 친교를 맺게 되었다(후에 유세비우스는 대규모로 '교회사' 10) 의 저술을 시도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팔레스타인 가이사랴의 감독으로 일했고 콘스탄틴 황제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11)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궁극적 승리를 위한 준비였다. 그는 최초의 기독교 황제를 구약의 메시야 예언들의 성취(the fulfilment of the messianic prophecies)로서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아우구스투스 치하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콘스탄틴을 통해 이루셨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세상은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로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12)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틴의 친구요 정치평론가(publicist)요 전기작가였다 13) ).

그후 305년 디오클레시안과 막시미안이 은퇴를 선언하였을 때,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이 제1 정제(正帝)가 되고, 자신은 부친의 뒤를 이어 제2부제로 임명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디오클레시안은 그의 사위 갈레리우스를 제1정제로 임명하였고 콘스탄틴의 부친은 제2정제가 되었다. 또한 두 부제에는 막시미누스 다이아(Maximinus Daia)와 세베루스(Severus)가 임명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콘스탄틴은 몰래 황궁을 빠져나와 그의 부친이 있는 골(Gaul) 지방 불로뉴로 갔다가, 후에 부친과 함께 브리탄니아로 건너서 갈레도니아(Galedonia) 전쟁에 참전하였다. 전쟁 발발 후 얼마되지 않아 그의 부친이 요크(York)에서 사망하자, 군대의 지도자들이 콘스탄틴을 정제(正帝)로 추대하였다. 이제 그는 부친을 계승하여 골 지방과 브리탄니아 속주를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다.

콘스탄틴은 뛰어난 정치적 수완과 군사력을 통해서 310년에 에스파니아를 정복하고 로마제국의 서부 지역 대부분을 지배하였다. 311년에 제1정제인 갈레리우스가 사망한 후, 서부 지역에서는 콘스탄틴과 막센티우스가 영토를 나누어 지배하였고, 동부 지역의 통치자는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였다. 이 황제들의 정치적 동맹관계는 그들의 지리적 환경과 기독교에 대한 정책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즉 콘스탄틴은 서방에서 막센티우스를 물리치고 유일한 통치자가 되기 위해 동방의 리키니우스와 동맹관계를 맺었다.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처럼 관용정책을 취하였고, 리키니우스도 이에 동조하였다.

2.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 전투

312년에 콘스탄틴은 당시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던 막센티우스와의 전쟁을 계획하였다. 그는 막센티우스를 서부 지역의 폭군으로 규정하고, 주민에게 자유를 부여한다는 명목으로 이탈리아로 출정하였다. 그는 알프스를 넘어 저항군대를 격퇴시키면서 로마로 진격하였다.

그는 로마의 티베르 강에 놓여있는 밀비안 다리에서 상대방의 막강한 군대와 마주쳤을 때 그의 군대로서는 로마를 점령할 수 없음을 알았다. 이는 하나의 모험이었다.

그런데 콘스탄틴은 전투 전에 환상(혹은 꿈)을 통해 그의 군대가 승리할 수 있는 표징(sign)을 받았다. 그는 “이 표식으로 이겨라”( In this sign, Conquer, In hoc signo vinces )라는 라틴어 환상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14)

자신감을 얻은 그는 로마로 진군하였고 대승리를 거두었다. 막센티우스(Maxentius)의 군대는 완전히 패했다. 막센티우스 자신이 타이버 강을 가로 질러 밀비오 다리를 건너 도망하려고 시도하다가 그 강에서 빠져 죽었다.

이 전쟁은 312년 10월 28일에 있었는데, 세계 역사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 큰 전쟁이었다. 이 전투가 콘스탄틴에게는 생애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제 그는 서부 유럽 전체를 차지한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312년 10월 28일에 로마 원로원은 콘스탄틴을 최고통치자로 영접하였고,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개선문을 착공하였다(315년에 완성됨).

리챠드 토드에 따르면, 콘스탄틴의 ‘환상' 이야기는 ”미심쩍은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 신앙을 불완전하게 이해하고 있었고 또 처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와 신령한 태양 사이의 구별을 명확하게 하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충성심을 갖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 15)


3. ‘밀란 칙령'과 교회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콘스탄틴은 로마에서 두 달을 지낸 다음 313년 봄에 밀란(밀라노)으로 갔다. 여기서 그는 그의 누이동생인 콘스탄티아와 리키니우스(Licinius) 황제의 결혼식에 참석하였다. 여기서 두 황제는 소위 ‘밀란 칙령''(the Edict of Milan)이라는 포고령을 선포하여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관용 정책을 베풀었다. 16) 그리하여 동부 로마제국의 집정관들에게 제극내의  제국내의 여러 종교에 부여된 권리들을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승인하도록 지시하였다. 밀란의 칙령은 “기독교로 하여금 로마 제국 내에 있는 다른 종교들과 함께 법률 앞에서 동등한 발판을 얻게 하였다.” 17)

그때부터 수년 동안에 콘스탄틴은, 칙령을 내려, 몰수되어 있던 교회 재산을 반환하고 국가가 교회를 보조하도록 하며, 성직자에게는 공적인 의무를 면제하고 점장이를 금하고, ‘태양의 날'(Day of the Sun)을 안식과 예배의 날로 정했다. 18)

콘스탄틴은 재위 기간 중에 기독교에 대해 물질적 특혜와 법적 특권을 부여하였다. 313년에 그는 로마 감독에게 라테란 궁전을 기부하여, 후에 이곳에 콘스탄틴 대성당(지금의 죠반니 대성당)이 건립되었다. 또한 그의 시대에 베드로 대성당, 예루사렘 무덤 성당, 베들레헴의 예수 성탄 성당이 건립되었다. 이로써 기독교 예술과 건축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315년 십자가 처형을 폐지시켰고, 321년에는 ‘일요일'을 그리스도인의 예배일로 공인하였다. 또한 국법에 의하여 주일과 교회 축일을 공휴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기독교 문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공휴일에 로마인들은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는데 여가 시간을 보냄으로써 예술의 발달을 가져왔다.

아울러 콘스탄틴은 몰수된 교회재산의 반환 조치를 취하였고, 321년에는 교회가 상속권을 갖는 법을 제정하여 신자들이 그들의 재산을 교회에 기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교회는 급속적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였고,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사생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임을 공인하였고, 그의 가족은 모두 신자로서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337년 그는 임종을 앞두고 침상에서 세례를 받았다. 19)   세례를 미루는 일은 ‘인간의 죄를 피하기 위한 계락'으로서 그 당시에는 관습적으로 유행하던 것이었다. 20) “당시 사람들은 그와 같이해서 죄에서 정결케 되어 천국에 들어갈 것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21)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업적 가운데 하나는 콘스탄티노플의 건설이다. 옛 비잔티움의 터전을 두 대륙을 통치하는 최선의 장소로 선택하여, 326년 11월 26일 정초(定礎)하고, 330년 5월 11일 신도(新都) 창설의 축하를 행하고, 콘스탄티노플(콘스탄티노폴리스)이라 명명하였다.

4. 평가

1) 콘스탄틴에 대한 평가

(1) 긍정적 평가

이 평가와 관련하여 제일 먼저 던져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이었나?”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을 한 사람이나 부정적인 대답을 하는 사람이나 모두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가정해왔다. 22)  

콘스탄틴을 옹호하는 케레츠페스(Paul Keresztes)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시의 문헌과 기록을 보면, 콘스탄틴은 자신이 삶에서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으며 언제나 교리 문제를 잘 알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성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 교회사에 있어서 진정으로 위대한 그리스도인 황제이며 순수한 사도였다.”(Constantine: The Christian Monarch and Apostle, 1981, p. 8) 23)

김성태 교수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이교도의 종교행사를 조심스럽게 제한함으로써 기독교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24)  

그러면, 콘스탄틴이 세례 받는 것을 뒤로 미룬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콘스탄틴이 당시의 일반적 관례를 따랐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Chrysostom)도 말하기를 “세례는 이전의 죄들을 용서해 줄 수 있다(Baptism can give remission of former sins.)...  우리가 받은 은혜가 큰만큼, 세례 후에 죄를 범한 자들에 대한 심판은 더 중하다”라고 했다. 25)

(2) 부정적 평가

일부 카톨릭 교회사가의 입장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교회사가들은 콘스탄틴의 ‘개종'과 신앙(경건)에 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콘스탄틴의 개종이 정확하게 어떠한 성격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알리스테어 키는 콘스탄틴에게 종교가 제국 전략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로마제국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승리'라는 생각을 타당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콘스탄틴이 그리스도인의 신과 제휴한 것은 “그의 천재성과 창의적인 안목 때문이었다.” 26) 그는 콘스탄틴에게 ‘개종'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27) 그는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이었나?”라는 질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고 평가한다.

(3) 중도적 평가

얼 케언즈(Earle E. Cairns)에 의하면, “환상은 사실이었는지 모르나 콘스탄틴이 그리스도 교회에 호의를 보인 것은 편의상의 일 이었던 것 같다.”  또한 “죽음의 직전까지 세례를 받기를 연기하였고, 이교적인 국가의 ‘대사제직'(Pontifex Maximus)의 직위를 보유하고 있었던 일은 이러한 견해를 지지하는 것 같다. 더구나 제위에 오를 권리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젊은 사람들을 그가 처형한 것은 28) 진실된 그리스도 신자의 행동(the conduct of a sincere Christian)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마도 그의 정책에는 미신과 편의주의가 혼합되어 있었을 것이다”라고 했다.

콘스탄틴은 재위기간 동안 우상숭배의 이교사상을 배격하지 않고 그리스도교와 동등한 위치에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행동의 동기에 대한 이러한 해석이 옳든지 옳지 않든지간에) 콘스탄틴은 그리스도 교회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29)

얼 케언즈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변화를 언급하고 있다:

"멸시를 받아오던 소수의 회원을 가진 하나의 종파이던 그리스도교가 강대한 로마 제국의 공인 종교가 되었던 경로를 회고해 볼 때, 이 승리의 행진은 교회로서 좋지 못하였다고 믿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사회의 도덕적 수준을 높이고 그 결과로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전보다 높아졌고, 투기사의 죽음을 구경하는 것이 폐지되고, 노예에게는 전보다 관대한 대우가 주어지고, 로마의 법제는 훨씬 공정하게 되고, 전도사업은 더욱 촉진되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국가와 밀접하게 협력하는 일의 이익이 있었던 한편, 또 현저한 손해도 있었다. 정부는 교회의 지위와 보호와 지원의 보상으로서 영적 문제와 신학문제에 간섭하는 권리를 요구하였다...교회와 국가 사이의 논쟁이라는 길고 복잡한 문제는 이 시대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313년부터 590년까지의 시기에 있어서의 교회의 로마 제국과의 긴밀한 제휴(closer association)는 박해 시대에는 문제도 되지 아니하던 그러한 많은 약점들을 교회내에 가져 들어오고 말았다” 30) 즉, 교회와 국가 사이의 친선(화해)은 교회에 축복 보다는 손해를 더 많이 가져왔다.

2) 기독교 공인(또는 국교화)의 결과에 관한 평가

(1) 긍정적 측면

곤잘레스에 의하면, "새로운 환경을 맞이해서 4세기의 교부들은 지금까지 순교를 가르치고 이교도들의 고소에 대해 논박하는 데 집중시켰던 정력을 이제는 다른 활동 분야에서 배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31)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4세기는 아타나시우스, 캅바도키아 교부들, 제롬, 암부로스, 어거스틴 등등 위대한 교부 배출하였다.

(2) 부정적 측면

B. K. 카이퍼는 기독교 공인의 부정적 결과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신자의 이름은 정치적 군사적 패스포트(passport)이며 사회적 승진의 수단이 되었다. 그 결과로 수천 수만의 이교도들이 교회에 합류하였는데, 이들은 불행하게도 다만 이름뿐인 기독 신자였다...  콘스탄틴 황제도 의심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참으로 높은 수준의 신자는 아니었다. 교회가 양(量)에서는 얻었으나 질(質)에서는 잃었던 것이다. 313년에 콘스탄틴의 칙령은 교회에 힘센 타락의 홍수 문을 열었던 것이다.” 32)

곤잘레스에 의하면, "대량적인 개종은 교회의 도덕적 삶과 신앙의 확신의 깊이를 얄팍하게 하였다.“ 그리고 ”황실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금까지 불가능했던 신학이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바꾸어 생각하면 황실은 어떠한 신학적 주장이나 다른 문제에 대해서 정죄를 내리거나 총애를 표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했다. 33) 콘스탄틴은 교회 논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곤 했다.

어거스틴은 기독교 공인의 결과와 관련하여, 콘스탄틴의 개종 이후  ‘수많은 이교도들'(crowds of the heathen)이 교회에 들어오려고 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34) 이교도들은 우상숭배의 축제를 거행할 때 익숙하였던 흥청거림과 술취함을 포기하지 않고 교회에 들어 왔다. 또한 이교적 관습이 그들과 함께 교회에 들어왔다.

교회는 많은 이방사상과 상징을 받아들였다. 35) 5세기 중엽에 교황 레오 1세는 베드로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태양에게 절하기 위해 돌아섰던 숭배자들을 비난하였다. 기독교화된 몇몇 이교적 풍습들, 즉 초나 향, 화관 같은 것을 사용하는 풍습은 이방 종교를 상징한다고 해서 초기에 교회 내에서 금했었다. 성모 마리아 숭배는 이방 종교의 유사한 것들 때문에 자극을 받은 듯 하다. 몇몇 학자들은 아데미(다이아나) 숭배가 마리아 숭배로 바뀌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본래 아데미를 숭배했던 에베소 사람들은 초기부터 마리아를 숭배하였다. 마리아 숭배를 애굽의 여신 이시스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이시스를 열정적으로 숭배하는 자들은 그 여신을 ‘대동정녀'(the Great Virgin) 혹은 ‘신의 어머니'라 불렀다.

이방 종교와 기독교가 혼합되면서 4세기에는 성자와 순교자들을 숭배하는 일이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교회당을 순교자의 무덤 위에 세웠고, 성자들의 시신을 찾고자 하는 경쟁은 곧 미신적인 탐사로 타락해 버렸다. 동방 지역에서는 아직 살아있기는 하지만 곧 죽을지도 모르는 ‘숨어있는 성자들'을 찾기 위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36)

잘못된 순교자 숭배와 성자 숭배에 대해 아퀸타인 출신의 비지란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비난하기도 했다:

“우리는 신앙심을 구실로 하여 교회에 들어 온 이교적 의식을 볼 수 있다. 즉 양초가 대낮을 밝히고 있고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진귀한 천에 싸여 있는 작은 항아리의 먼지에 입을 맞추고 그것을 숭배한다.” 37)

3) 입교 절차(교리문답교육)의 체계화

적어도 콘스탄틴의 시대부터(개종자가 훨씬 더 많아졌기 때문에) 더 정교한 입교 과정이 발전되었다. 38) 305년에 엘비라 종교회의(the Synod of Elvira)는 세례 준비 기간을 최소한 2년으로 확정했고, 병자를 위해서는 더 짧은 유예기간을 허락하였다. <힙포리투스의 법규집>은 3년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특별히 열성적이고 적절하다면 그 기간을 단축할 수 있는 예외 규정이 있다. 그 준비기간이 6년 이하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규정도 보이나, 다른 증거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일반적인 요구사항은 아닌 듯 하다. 39)

교리문답 내용은 기독교 교리의 기본적 내용들로 이루어졌다. 즉, 하나님의 본성과 삼위일체, 창조와 우주의 질서, 세계 창조의 목적과 그 안에서의 인간의 위치, 인간의 본성, 악인에 대한 심판과 성도에 대한 보상,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 등이었다. 교육이 이루어지면, 감독이나 사제의 기도 후에 교리문답자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40)  

나가는 말

콘스탄틴 아래에 일어난 큰 변화가 교회에 있어서 축복된 일인가 아니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간단히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대답하기에 이르기는 어렵다. W. V. 뢰벤이히에  의하면, “중요한 일은 단지 교회의 외적 대승리는 아니고, 그리스도교 라고 하는 것의 현실적인 발전이다. 공공의 생활은 전부 그리스도교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었다”라고 했다. 41)

교회는 이 세계를 정복했으나, 이번에는 이 세계가 교회를 정복하려 했다. 교회는 국가에 대해서 잘못된 의존관계에 빠져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자신은 이 방향에 나아가는 것에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들 밑에서 절대적인 국가교회의 제도가 시작되었다. 42) 뢰벤이히는 이 세속화가 “콘스탄티누스에 의한 제국교회의 설립에 의하여” 비로소 생겨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이 일에 책임 있는 것은 국가가 아니라, 교회 자신이다.

1)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 311쪽.

2) The Ecclesiastical History of Eusebius Pamphilus(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1), X. v.; cf. 박용규, 초대교회사, 107-109.

3) J.D. Douglas ed., Who's Who in Christian History, 1992, 172.

4) 롤랑 베인튼, 정통교회사(서울: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1), 50쪽에서 인용.

5) 오늘날의 세르비아에 위치함.  cf. "Conctantine the Great", Microsoft Encsrta 98 Encyclopedia.

6)  Earle E. Cairns,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Grand Rapids: Academie Books, 1981), 124.

7) 김성태, 세계교회사 I (서울: 성바오로출판사, 1990), 215쪽.

8) 콘스탄틴은 그의 부친과 3세기초의 황제들의 본을 따라 초기에 로마의 태양신(Sol)을 믿는 ‘태양 단일신론자'(solar henotheist)였다. 태양신은 우주 배후의 원리인 ‘보이지 않는 최고의 신'(summus deus)의 보이는 현시(顯示)라고 생각했다.
9) 마이클 스미드, ‘유세비우스', 교회사핸드북, 17쪽.

10) 교회사는 303년 혹은 311년에 최초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는 324년까지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위해 몇 가지 부록을 첨가하였다. 그의 친구 콘스탄틴의 최후 승리까지 추가시켰던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지루하고 장황하며 어려운 문체로 기록하였다. 그러나 그이 책은 다른 잃어버린 저작들로부터의 인용문들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귀중하다. 대부분의 그의 역사기술은 앞선 저술가들로부터의 긴 인용문에 의해 이루어져 있다. 저술가로서의 유세비우스는 지나치게 경솔하게 믿지도 않았고 아주 비판적이지도 않았다.
11) Erwin R. Goodenough, The Church in the Roman Empire, 56. "..., Eusebius, Bishop of Caesarea, the learned historean of the Church, become his intimate friend."12) R. A. Markus, Christianity in the Roman World(London: Thames and Hudson Ltd., 1974) 91, 98.
13) 그의 정치사상은 비잔틴 기독교제국을 건설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콘스탄틴의 통치를 새 시대로의 진입으로 여겼다.
14)  콘스탄틴은 이 승리의 표시가 태양신이 보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만약 전투에서 이긴다면 태양신의 전사가 되겠다고 서약했다. 다음날 10월 26일 콘스탄틴의 군대는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콘스탄틴은 그의 승전을 그리스도의 위력과 그리스도교의 우수성의 증거로 보았다.
15) 리챠드 토드, ‘콘스탄틴 대제와 기독교 제국', 교회사핸드북, 130쪽.
16) Erwin R. Goodenough, The Church in the Roman Empire(New York: Cooper Square Publishers,Inc.,1970), 40. "...  Constantine had conquered the Roman world, he renewed with Licinius the policy of toleration for Christians in the great Edict of Milan, late in the year 312, or early in 313."
17) B. K. 카이퍼, 세계기독교회사(서울: 성광문화사, 1980), 37쪽.
18) Earle E. Cairns,124.
19) 콘스탄틴은 세례를 받은 후 황제복을 다시 입기를 거부하여 세례복인 흰옷을 입은 채 세상을 떠났다.
20)  세례를 지체하는 이유는 세례가 회개한 교리문답자들에게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를 보장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는 5세기가 될 때까지는 규정(rule)이 되지 않았다.
21) W. V. 뢰벤이히, 교회사개론(서울:마라나다, 1995), 95쪽.
22)  알리스테어 키, 콘스탄틴 대 그리스도(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88), 8쪽.
23)  알리스테어 키, 콘스탄틴 대 그리스도, 22쪽.
24) 김성태, 세계교회사 I, 223쪽.
25) M. L. W. Laistner, Christianity and Pagan Culture in the Later Roman Empire(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1978), 34.
26)  알리스테어 키, 21쪽.
27) “우리는 진실로 이 점에서 ‘개종'이란 단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알리스테어 키, 같은 책, 21쪽)

28) 예를 들면, 326년 그의 아들 크리스푸스(Crispus)와 황후 파우스투스(Faustus)를 간통 혐의로 처형했다.
29)  Earle E. Cairns, 124.

30) Earle E. Cairns, Christianity through the Centuries(Grand Rapids: Academie Books, 1981) 121.
31) 곤잘레스, 같은 책, 311쪽.

32)  B. K. 카이퍼, 세계기독교회사, 38-39쪽
33)  콘스탄틴은 아리우스 논쟁에 깊이 개입하였다.(참고. 곤잘레스, 312쪽 이하)34) Peter Brown, Authority and the Sacred: aspects of the Christianisation of the Roman world(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7), 23.
35) 교회사핸드북, 131쪽. “예를 들면, 태양숭배로부터 에수의 탄생일이 태양제의 날인 12월 25일로 정해지게 되었다.”

36) 교회사핸드북, 132쪽. “성자 숭배 의식은 그 시대의 위대한 지도자들(제롬, 암브로우스, 어거스틴)에 의해서 고무되었다.”
37) 같은 책, 132-133쪽.

38) Erwin R. Goodenough, The Church in the Roman Empire(New York: Cooper Square Publishers,Inc.,1970), 36.
39) 같은 책, 38.

40) 같은 책, 39.
41)  W. V. 뢰벤이히, 교회사개론(서울:마라나다, 1995), 95쪽.
42) 같은 책, 96쪽.

http://www.chongshin.re.kr/4_study/study.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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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늘새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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