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가르침이 선행을 무너뜨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믿음을 높임으로써 오히려 행위가 장려되고 격상된다면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유지되는 칭의는 꿈도 꾸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과 선행이 반드시 서로 굳게 결합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칭의의 기초를 선행이 아니라 믿음에 둔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붙잡음과 동시에 거룩함도 함께 붙잡게 되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기때문이다(고전1:30).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은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이 은혜들은 영원히 뗄 수 없는 끈으로 서로 엮어져 있다.

 

사람을 자극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따지자면, 우리의 구속과 부르심의 목적에서 나오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격려와 자극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다음과 같은 가르침들을 통해서 바로 그런 자극을 해주고 있다. 곧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니 우리도 그를 사랑하여 보답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불경하며 배은망덕한 처사일 것이라고도 가르치며(요일4:19), “그리스도의 피가우리의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고도 가르치며(9:14), 한 번 깨끗해진 상태에서 새로이 더러움에 오염되어 거룩한 피를 욕되게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증되고 거룩하지 못한 행동이라고도 가르치며(10:29),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고도 가르치며(1:74-75),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로운 정신으로 의를 배양하게 되었다고도 가르치며(6:18), “우리의 옛 사람이 ---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6:6) “새 생명 가운데서살리심을 받았다고도 가르치는 것이다(6:4).

 

우리가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므로 빛의 자녀들답게 행하라고도 명령하고(5:8-9),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라”(살전4:7)고도 말씀하며,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우리의 거룩함이요 또한 우리가 부정한 욕심들을 버리는 것이라고도 가르친다(살전4: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셨으며(딤후1:9) 그 부르심은 순전한 삶을 요구한다고도 가르치며, 또한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된 것은 의에게 순종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도 가르친다(6:18).

 

또한 그리스도께 속하여 있으면 우리가 한 몸의 지체들이므로 서로 같이 돌보아야 한다는 바울의 논지도 얼마나 큰 자극제가 되는가? 우리로 하여금 거룩함 삶을 살도록 하는 강력한 자극제로서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0라는 요한의 말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또한 우리가 양자의 약속을 의지하고 있으니 육과 영과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는 바울의 말은 어떤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라는 말씀은 어떠한가?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46-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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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온건한 사람들에게는 어거스틴의 이 대답으로 충분할 것이다. "성부께서 성자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육체를, 그리고 가룟 유다가 그의 주님을 넘겨주었는데, 이 넘겨준 사건에서 어찌하여 하나님은 정당하고 인간에게는 죄가 있는가?

 

그것은 그들이 동일한 일을 하였으나, 그들의 행동의 동기는 같지 않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한 말, 즉 인간이 해서는 안될 것을 하나님의 정당한 충동에 의해 행할 때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어떠한 협정도 없다는 말을 이해하기가 곤란하다고 느낀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지적한 말을 상기시켜 주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마음속에서도 그가 원하는 대로 역사하시나 그들의 공과(功過)에 따라 보응하시니, 이런 심판들을 인해 누가 떨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확실히 유다의 배반 사건에 있어서, 하나님이 친히 그의 아들을 넘겨주시길 원하셨고 그리스도를 죽음에 내어 주셨다고 해서,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구속의 공로를 유다에게 돌리는 것만큼이나 잘못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정확하게 지적하는데, 이 심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 혹은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하려고 뜻했느냐를 물으심으로써, 그들의 목적과 의지를 고려하신다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1권 18장 4)

 

마르투스선교회
가져온 곳: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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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존 칼빈


자연인의 의지는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다. 사람은 필연에 의하여 죄를 범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자발적으로 죄를 범한다. 그러나 마귀에게 종노릇하는 상태에 매여 있는 동안 사람은 자기 자신의 의지보다는 마귀의 의지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 같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람의 의지를 마부의 명령을 기다리는 말에 비유하며, 하나님과 마귀를 그 마부에 비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 말에 올라타시면, 그는 온유하시고 숙련된 마부이시니, 말을 적절히 인도하시고, 너무 천천히 가지 않도록 박차를 가하시고, 너무 빠르지 않도록 고삐를 당기시며, 너무 거칠게 달리지 않도록 제어하시고, 갑자기 멈추어 서면 재촉하셔서 달리게 하시고, 그리하여 올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나 마귀가 안장 위에 오르면, 어리석고 방자한 기수처럼 바른 길에서 멀리 벗어나도록 난폭하게 마구 달리게 하고, 도랑에 빠뜨리기도 하고, 벼랑에서 뒹굴게 하고, 때리고 괴롭혀 고집을 부리게 하고 난폭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멸망에 이르게 될 불신자들의 마음을 “이 세상의 신이 --- 혼미하게 하여”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고 말하며(고후4:4), 그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한다고도 말한다(엡2:2). “사탄의 역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의 일에 하나님은 역사하심으로 개입하신다. 하나님의 예지나 허용을 피난처로 삼게 되면, 이런 활동의 본질에 대해서 결코 설명할 수가 없다. 두 가지 방식으로 일어난다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의 빛이 사라지면, 어둠과 눈먼 상태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사라지면, 우리 마음은 돌처럼 굳어진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사라지면, 마음이 뒤틀려 악에 빠질 수밖에 없다. 두 번째 방식은 하나님께서는 사탄을 그의 진노의 사역자로 삼으셔서 심판을 수행하게 하시기 위하여, 사람들이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목적을 갖도록 하시며, 그들의 의지를 불러일으키시고, 그들의 노력을 강화시키신다는 것이다.

 

버림받은 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역사하신다. 그들의 마음이 변했고, 완강하게 되었다면,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그렇게 바꾸어 놓으셨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서, 자기 백성의 범죄에 대해서 벌하고자 하실 때마다 주께서는 버림받은 자들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일을 진행시키셨는가? 그 사람들은 그저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고, 실제로 그 일을 진행하는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일을 진행시키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활동한다.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삼상16:14). 그 영이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권능에 복종하여 그의 도구로 행동함을 의미한다. 모든 오류와 미혹의 역사는 진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로 하여금 거짓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것이라고 사도는 가르친다(살후2:10-12).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을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실 때마다 언제라도 그의 섭리로 역사하셔서 심지어 외부적인 일에서조차 사람들의 의지를 이리저리 기울게 하시며, 그들이 자유로이 선택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의 다스리심을 받는다. 싫든 좋든,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유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인도함을 받는 것을 매일매일의 경험이 확증해 주는 것이다.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께서 지으신 것이니라”(잠20:12). 이는 귀와 눈에게 부여된 특수한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으로 인도하시느니라”(잠21:1)라고 말하면서, 솔로몬은 사실상 모든 사람의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성경을 부지런히 살피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즉, 하나님께서 악한 것을 선하게 만드시고, 그렇게 만드신 다음 선한 행동으로 이끄시고, 또한 영생에 이르기까지 이끄시는 바 사람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으며, 또한 세상의 피조물을 보존하는 의지들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그가 원하실 때에 원하시는 방향으로 그것들을 움직이시며, 그리하여 은혜를 주시거나, 아니면 지극히 은밀하면서도 지극히 의로운 심판으로 말미암아 벌을 내리거나 하신다는 것이다.”

 

자유 의지는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내적인 자유를 의미한다. 사람이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일의 결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 능력을 외형적인 성공 여부로 판가름해서는 안 되고, 사람의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자유 의지를 논할 때에, 우리는 과연 사람이 외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행하기로 결심한 바를 실행에 옮겨서 완수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느냐를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어떠한 일에서든 판단의 선택과 의지의 끌림(형향)이 과연 자유로우냐를 묻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 두 가지 점에서 자유롭다면, 못이 박힌 포도주 통 속에 갇힌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도, 세계의 광대한 지역을 자기 땅으로 만들고 그곳을 통치한 ‘가이사 아구스도’에 못지않게 자유 의지를 지녔다 할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77-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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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성에는 언제나 성령의 조명하심이 필요함/ 존 칼빈


우리의 이성은 온갖 형태의 속임수에 넘어가며, 그렇게도 많은 오류에 빠지고, 무수한 장애에 부딪히며, 온갖 난관에 휩싸이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를 올바로 인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고후3:5).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시며”(고전3:20).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6:5).

 

우리의 이성이 어디로 향하든 언제나 허망함에 굴복하는 비참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이처럼 연약한 상태임을 알고, 여호와의 계명을 올바로 배울 수 있는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하였다(시119:34). 새로이 깨달음을 얻기를 소원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깨달음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 전체를 위해 간구하고 있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 자라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9-12). 이것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말할 때마다 동시에 그것이 사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일들을 깨달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햇빛이 있어야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조명하심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육체의 눈은 우리 스스로 떠서 빛을 바라보지만, 마음의 눈은 주께서 뜨게 해 주지 않으시면 감겨진 상태 그대로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성경도, 우리 마음이 어느날 한 번만 조명을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볼 수 있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되는 과정이요 성장을 뜻하는 것이다.

 

다윗은 말한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니자 말게 하소서”(시119:10). 이미 거듭나서 참된 경건에서 적지 않게 성장해 있는 그였으나, 자기에게 주어진 그 지식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매 순간마다 계속적인 인도하심이 필요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곳에서, 지신의 허물로 인하여 잃어버린 정직한 영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시51:10). 처음에 우리에게 주셨으나 우리가 잠시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44-345



-청교도 아카데미-


우리는 친구든지 원수든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

1.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 피곤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성내지 아니하는"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들이 행한 대로라면 선대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린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선을 베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사람의 실존적이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다만 우리 모두가 경외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로 생각하라고 가르침으로써 탁월한 논의로서 우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권속들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의 형상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고 회복된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당신의 친절한 봉사를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이 당신 앞에 나타나면, 당신은 도움을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령 그가 낯선 사람이라고 합시다, 주님은 그에게 자신의 인을 쳐서 당신과 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 자신의 혈육을 멸시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가령 그가 아주 멸시받는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황송스럽게도 주님은 그를 자신의 형상으로 단장할 만큼 귀하게 여기십니다.

가령 당신이 섬길 의무를 전혀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자신의 대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크고 많은 축복을 받은 당신은 베풀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가 당신으로부터 최소한의 선행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당신이 자아를 죽이고 당신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주도록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가 아무런 친절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오히려 그는 당신에게 상처와 모욕을 줌으로써 당신을 분노케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그를 사랑으로 감싸지 않고 모든 친절을 베풀지도 않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그는 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오직 모든 사람의 모든 무례함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라고 명령하십니다.

3.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해 받은 것을 친절로서 갚고, 저주를 축복으로 돌려주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사악함만을 생각해서는 안되고,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임을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인간의 잘못을 덮고 지워버리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끌어안게 될 것입니다.

(마 5: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17: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 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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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생명과 사망 / 존 칼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내리려는 것이요 혹은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롬10:6-7) 

울이 인용하고 있는 본문에서 모세는 사람들이 도달하기 어려운 곳인 하늘과 바다를 언급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말씀 속에 어떤 영적인 신비가 숨겨 있는 듯이 이 말씀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적용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세가 한 말을 그대로 되풀이 하지 않고 모세의 증언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바꿉니다. 모세는 다가갈 수 없는 장소에 대해 말하지만 바울은 실제로 우리 모두의 눈에 감추어져 있지만 믿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언급합니다,

바울의 말을 설명해 봅시다. 우리의 구원의 보증은 두 기초, 즉 우리를 위해 생명이 획득되었다는 사실과 우리를 위해 사망이 정복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하는 그 위에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이 복음을 통해 이 두 기초에 의해 지탱된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죽으심으로써 죽음을 멸하셨고 부활하심으로써 생명을 얻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유익은 복음에 의해 우리들에게 전해집니다.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라는 말의 의미는 "영원하고 신성한 생명의 기업이 우리 것인지 누가 알겠느냐?",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라는 말은 "영혼의 영원한 멸망이 육체의 죽음 뒤에 따라올 것인지 누가 알겠느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 두 점에 대한 의심이 믿음의 의로 제거된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신 것은 실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충분히 확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를 대표하여 신자 때문에 하늘에 올라가셨는데 하늘의 기업이 신자를 위해 예비된 것인지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늘의 소유 중에 그리스도를 없애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우리를 지옥의 공포에서 구원하시려고 지옥이 공포를 친히 겪으셨음으로 신자가 아직도 이런 불행에 노출 되어 있다고 의심하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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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가운데 행하라 / 존 칼빈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


한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연합의 증거는 확실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은 그 결과를 통해, 즉 하나님의 순전하심이 우리 안에서 빛을 발할 때 분명히 드러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모든 것에 충만해져 하나님이 모든 더러운 것을 씻어 내십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더러움과 어두움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것도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지 않으면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하나님과 닮기를 열망하는 사람은 아직까지는 하나님의 형상과 아무리 거리가 멀더라도 누구나 하나님과 닮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에 죄우되지 않고 순전한 양심으로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은 어둠 가운데 행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삶을 살며 신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여러가지 일로 마음을 상하고 육신의 짐에 눌려 탄식하더라도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우리와 하나님과의 연합의 끈이 무엇인지를 가르친 뒤 거기서 나오는 열매가 무엇인지, 즉 우리의 죄가 예수의 피로 값없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말씀에서는 우리가 정직한 마음으로 옳고 의로운 일을 행할 때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성취된 속죄가 우리의 것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에서 돌이켜 새 삶을 사는 이들에게만 구속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바란다면 우리 스스로 자신을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죄 용서는 회개와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평안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하지 않는 마음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로, 값없는 죄 용서는 단 한번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영속적으로 거하며 신자에게 매일 베풀어지는 유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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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福音) 전파(傳播)의 목적(目的)]

“너희가 누구의 죄(罪)든지 사(赦)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요20:23)

복음 전파의 주된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게 하기 위한 것이며 이 일은 죄에 대한 무조건적인 용서(容恕)로 이루어집니다. 바울도 이런 이유로 복음을 “화목하게 하는 직분”(고후5: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이라고 부를 때 우리에게 그 사실을 알려 줍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다른 많은 것들도 복음 안에 담겨 있지만 하나님이 복음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시는 주된 목적은 인간에게 죄를 묻지 않으심으로써 인간을 은총 안에 받아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의 신실한 일꾼임을 보여 주려면 이 문제에 우리의 가장 진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복음과 이교도 철학의 주된 차이점은, 복음만이 인간의 구원을 값없는 은혜를 통한 죄 용서에 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주시는 나머지 복-하나님이 성령으로 우리를 조명하시고 거듭나게 하시며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새롭게 빚으시며 세상과 사탄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으로 우리를 무장시키시는 일 등-의 원천입니다. 따라서 모든 경건의 교리와 교회의 영적인 건축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하나님이, 값없는 은혜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입양하신다는 이 기초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죄를 용서하라고 명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자신만이 가지신 권세를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죄를 용서할 권세는 그리스도께만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영광을(그 영광이 그리스도께만 있는 한) 사도들에게 주지 않으시고 다만 그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자 그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도들과 사역자들을 통해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그리스도뿐입니다. -존 칼빈과 함께하는 말씀묵상 365일

개혁주의마을/Grace

칼빈의 성경관

 

 

⊙ 칼빈에 있어서 오직 성경 (김영규, 신학정론, 제 11권 2호, 1993. 11)


1. 성경의 원칙(Regula scriptura sive Regula verbi Dei)  


칼빈(Calvin)은 자신으로부터 자신을 향하여 생각하고 말했던 인문주의적인 학자는 아니었다. 처음 이레니우스(Irenaeus)가 모든 이단들 안에서 잘못으로 인식하였던 그런 인간들의 생활 양식을 오히려 그는 하나의 커다란 신학적인 문제로 간주하였다.

 

어거스틴(Augustinus) 역시 그 인간문제에서 모든 문제의 원천을 응시할 수 있었다.

 "절대자이신 그 분으로부터 떠나 절대자가 아닌 그들이 그들 스스로에게 돌아가는 것… 이것이 그 본성에 있어서 첫 타락이요 첫 결점이며 첫 잘못이다. 왜냐하면 절대자이신 그 분으로부터 비절대자인 것으로 떨어지는 것이 바로 악한 의지를 갖는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될 그 알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 이외에, 어느 누구도 나로부터 내가 모른다고 하는 것을 알고자 하여서는 안된다"

 

칼빈에 의하면, 자아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앞서가지 못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없이는 바른 자아에 대한 지식도 없다. 더구나 이런 신적 지식의 근원과 관련하여서도 칼빈은 성경의 진리가

예리한 논지, 심중의 온 힘으로 하는 논쟁들, 열기찬 쟁론이나 교회의 공동일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위로부터 오는 성령의 내적 조명(interius Spiritus testimonium)을 통하여 확신됨을 믿었다.

 

그러한 한 그의 신학은 실증적인 과학의 의미에서의 과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증적인 과학은 인간 일반으로부터 보편적 혹은 인간의 천재성을 통하여 증명되어지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대한 확신은 무엇보다도 먼저 말씀 안에서 성령의 직접적인 조명으로부터 야기되는 참된 믿음과 더불어 얻어진다는 것을 그는 강하게 강조하였다.

 

칼빈은 이런 입장에서 성령이 현재의 인간 안에서 증거 하시는 것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성경 진리의 절대적 실재성이 그들 안에서 증명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근본 원리에 관련하여 역사 신앙, 일시적 신앙 그리고 지적신앙에 대한 어거스틴의 비판을 상기시킬 수 있으며, 종교개혁자들 중에 특히 불링거(Bullinger)가 그 어거스틴의 비판을 다시 영적으로 새롭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근본원칙에 관해서 최고의 종교개혁적 교리의 총체인 "오직 들음으로(fidei)"라는 루터의 종교개혁 이전의 소리를 상기하게 되며, 그 엄밀한 성격은 갈라디아 서신에 대한 그의 강의(1516/1517)에서 증거해 주고 있다. 즉 "믿음의 들음으로부터(ex auditu fidei)"는 "믿음으로부터(ex fidei)"나 "행위로부터(ex operibus)"와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즉 사도행전 10장 44절의 근거에 의하면 성령은 믿고 행하기 이전에 선물로 받는다. 들음은 들을 수 있는 힘이나 듣는 행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객관적인 말씀 자체나 말로 선포된 복음에 따른 것이다.

 

그 때문에 들음은 다른 말씀들로 뿐만이 아니라, 또한 쓰여졌던 복음으로부터 혹은 그 자체에나 그것을 통하여 유발하는 생각과 구별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들을 수 있는 능력(organ)이나 듣고 있는 행위를 통해서 믿을 수 없고, 말씀을 통해서 믿을 수 있다. 비록 루터가 후기 칭의론에 있어서 "믿음으로부터(ex auditu fidei)"를 "듣는 능력(vis auditiva)" 과 "듣는 행위(actio audiendi)" 및 "믿음의 사역(opus fidei)"과의 대립에서 포기해 버렸지만, 위에서 본대로 칼빈은 루터의 출판되지 않은 글을 직접 접촉함이 없이도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진정한 루터의 칭의 교리의 근원적 이해를 모든 기독교 교리의 자기 체계의 기초로서 그의 성경이해에 사용하고 있다.

 

그 때문에 칼빈이 불링거의 글 "성경의 권위와 확실성과 확고성과 절대적 완전성(de scripturae sanctae authoritate, certitudine, firmitate et absoluta perfectione)"을 이미 읽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그 자신의 발전을 "단순히 체계적인 것"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모든 자신의 인간적인 행위에 앞서가는 성령의 역사와 그로부터 선물 받은 믿음 위에 기초한 성경의 자기 해석 안에서, 스콜라적인 방법과는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인상을 받게 된다.

 

이런 근본 테재를 가지고 칼빈은 성경의 자기해석의 방법을 위한 근거를 타당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개혁적인 근본원칙에 대한 최고의 소리를 높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학적인 방법의 정당한 이해를 위해서 성경에 대한 확신과 성경의 구원적 사용(salvificus scripturae usus)에 대한 그의 근본원칙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환에 관하여, 뮐러(J. M ller)는 "성경은 성경을 통해서 해석한다"는 해석학적 순환논증에 관한 문제가 종교개혁 당시에 이미 하나의 커다란 역할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부쩌(M. Bucer)로부터 마치 "긴급한 것으로 추천되었다"고 주장하였고, 그 이유로 "여기에서는 성령으로부터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의 일괄적인 통일성이 전제되어졌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반면에 쉬텔케(J. Staedtke)는 성경의 자기해석의 근본원칙이 인문주의로부터 넘겨받은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지만, 하우자만(S. Hausamann)에 의하면, 불링거 자신이 오직 성경이란 사상이나 성경을 성경으로부터 해석한다는 사상에 대한 증인들로서 어거스틴과 게르손(Gerson)과 힐라리우스(Hilarius)를 들고, 파버(Faber)나 에라스무스(Erasmus)는 들지 않았다고 하였다.

 

물론 칼빈은 기독교 강요 재판들에서와 많은 성경 주석들에서 문헌 참조의 일반 희랍적인 방식인 외부로부터의 인용( ) 뿐만 아니라, 성경구절들의 비교 취급 방법을 도움의 수단으로 자유롭게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후자의 방법론은 표제에 있어서 개념의 평형을 기한다든지 문헌적인 그리고 상황적인 문맥에 있어서 의미의 평형을 다만 뜻하지 않는다. 역시 칼빈이 그의 글에서 수사적이고 역사적인 분석 방법을 사용하려고 할 때조차도, 그는 성경 본문의 모든 비교들 안에서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Consilium Dei) 혹은 성령의 뜻(consilumm Spiriti sancti)을 찾고 있다.

 

그 때문에 다른 종교개혁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런 외적인 방법들은 칼빈의 자기해석의 근본 원칙에 있어서 결정적인 의미가 없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래도 여기에 다만 근본적인 두 가지 질문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성경본문과 성경 개념들을 특별히 비교하는 것이 칼빈 신학의 특색에 있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그의 성경의 이해가 삼위일체에 대한 신적 지식에 어떻게 관련되어지고 있는지? 우리가 이 근본문제에 들어가기 전에 불링거의 해석학적 방법론을 소개하면서 그 첫 번째 문제를 취급하고자 한다.

 

2.0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방식(Modus tractandi scripturas per locorum collationem)

 

불링거는 1527년에 쓴 "성경연구 규범(Studiorum Ratio)"이라는 그의 책자에서 칼빈의 성경의 해석 방법과 비교되는 "성경의 취급 방법(omnes scripturas tractandi rationes)"을 다루고 있다. 즉 문맥 관찰(observatio contextus), 수사적 분석(tropi orationum et dictionum), 역사 배경과 인물 배경 등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불링거는 이 소책자에서 앞에 있는 질문에 관련하여 성경 본문의 비교방법(Modus tractandi scripturas per locorum collationem)에 대한 중요한 증거를 제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네가 성경을 유용하게 읽거나 취급하기를 원한다면, 가능한 한 많은 본문을 준비한다는 것을 염두 하도록 하라 그러면 준비된 많은 본문이 빈곤하고 아주 복잡한 본문에서 너를 구해 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 성경 분문에 대해서 차곡차곡 쌓이도록 이용하는 것에 무엇보다도 주의 깊게 신중함을 기하고 그렇게 다루어진다면, 얼마큼 많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읽고 그것을 얼마나 확실하게 기억에 남게 할 것인지 그것을 염려하게 될 것이다. 너는 가능한 한 자주 읽도록 하며, 읽은 것은 너에게 주지하여 능하게 하고, 그것을 충분히 정리하는 것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하라. 그러나 본문 비교를 동일한 것으로 혹은 구별된 것으로 비교 사용하라."

 

여기에서 성경을 신중함과 판단력을 가지고 읽고, 쉬지 않고 성경에 몰두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는 성경이 자체의 유일한 주석이라는 주장을 기초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링거가 성경의 전체 문맥과 관련하여 "성경의 유일한 목적이요 모든 성경이 그 위에 세워진 그 언약(foedus)을 사려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거기에 중심점이 존재하고 모든 사실들이 그것 주위를 전적으로 맴돌며 전적으로 그것에 대해서 논쟁이 되면서도 모든 논거들이 그것에 의존하는", 그 성경의 핵심 질문들을 사려하였다는 점을 제외하고 성경비교에 의한 불링거의 이러한 방법은 해석학에 있어서 그의 고유한 방법이 아님을 의미하였다. 이미 에라스무스(Erasmus)는 이와 같은 성경 비교의 일찍 사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무엇에 설명을 주고자 했을 때, 본문들이 스스로 쉽게 증명하도록 하라. 즉 우리가 애매한 본문을 다른 것과 비교로부터 분명하게 해야 할 때, 그리고 신비적인 말씀을 다시 신비적인 말씀을 통해서 설명하고자 할 때, 결국 이러한 뛰어난 방법을 오리게네스(Origenes)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이 성경해석에 사용하고 있다"

 

위에서 증거했던 해석학적 과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링거의 종교개혁적인 근본원칙에 있어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와 관련해서 불링거는 성경본문의 적절한 취급을 위해서 신뢰할 만한 세 가지의 중요한 조건의 근본원칙을 제시하였다.

 

첫째로 불링거는 그것으로부터 주장된 영감론을 근거로 해서(nam scriptura sancta spiritus sancti inspiraio est) 성경의 무오성에 인간적인 판단의 유오성을 대조시키고 있다.

"성경에 관하여 사람들의 주석들을 읽으려고 할 때, 바로 처음부터 너에게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은 판단 없이 모든 것을 취하지 말고, 또한 가장 좋고 가장 기독교적인 것만을 취하는 것이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들이 타락하게 되었을 때, 왜곡될 수 있고 잘못으로 눈이 멀 수 있기 때문이요, 대개 가장 감사치 못하는 사람의 경우, 모든 타락에 있어서 비극적인 소리를 향하여 높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둘째로 불링거는 성경을 읽기 위한 지침서를 공개적인 성경해석이 아니라, 단지 개인적인 성경해석을 위해 그 도움수단으로 사용하기를 원하고 있음을 덧붙이어야 하였다.

 

마지막으로 불링거의 경우 적정의 규범이 성경의 정당한 사용을 위해 조건으로 되어 있다.

"너는 시간 자체가 스스로 가르치는 대로 주목하게 될 것이고, 너는 어떤 것을 아주 강제로 굽게 하였을 때, 스스로 지나치게 호기심을 갖고, 결국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태도를 어디에서 취했는가? 그 외에도 무엇을 변경해야 하고, 무엇을 지우거나 다시 복구시켜야 하는지를 인식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성경 그 자체로 해석한다(scriptuam sui ipsius esse commentarium)"는 그의 해석방법론적인 근본원칙을 위해 이런 불링거의 마지막 세 가지의 핵심원리들이 그에게 실제적으로 중요시 되고 있다.

 

2.1. 적정과 절도의 원리(Regula modestae et sobrietatis)

 

앞에서 본 불링거의 마지막 사고의 단계는 칼빈의 신중하고 엄정한 적정과 절도의 근본원리와 일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모든 종교적인 교리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적정과 절도의 규범을 지켜야 함을 기억하고 있다. 즉 감추어진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것 이외에 다른 것을 말하거나 생각하고 알고자 욕망 하지 않는 것이다"

 

불링거와 다르게, 짧게 진술된 이 증거가 인식하도록 하는 것은 칼빈 신학의 독특한 방식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과 말에 있어서 적정과 절도의 규범은 두 가지 근본원리, 즉 "오직 성경과 호기심의 거절"이라는 원리들에 의해서 규정되어지고 있다.

 

이렇게 정해진 정의 아래에 모든 과학적인 행위와 기독교적인 생의 태도들에 있어서 엄밀하고 신중한 적정의 규범이 정확하게 1539년 판 기독교강요에 있는 하나님의 십계명의 세 번째 명령에 대한 해설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신과 말에 있어서, 하나님과 그의 신비에 대하여 아주 경건한 절도를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는 것, 즉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의 판단에 있어서 그를 지극히 영광스럽게 하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역시 같은 1539년 판 기독교강요로부터 두 가지 다른 증거들이 확증되고 있다.

"물론 여기에서, 다르게 한 번 성경의 감추어진 신비에 대한 경우 규범에 맞게 매우 적합하도록 사색하는 것, 즉 매우 주의 깊게 행하면서, 사고나 말에 있어서 하나님 말씀의 한계를 벗어나서 더 멀리 나아가지 않도록 한다."

"적정의 이러한 최선의 한계는, 우리가 배움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지 않을 때, 스스로 교리의 결말을 지어야 함에 있어서 조차도, 생각하고자 원하는 것을 그만두는 것이다."

이런 준칙과 관련해서 칼빈은 동일한 판에서 특히 로마서 12장 1-2절을 인용하여 논증했다.

"이제 이것이 큰 일이다. 즉 우리가 지금으로부터 그의 영광을 위하지 않는 다른 것을 생각하고 말하며, 심사숙고하고 행하지 않은 것만큼, 하나님께 바치고 헌신되어지는 일이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의 근본원리는 적정의 엄밀한 규범을 통해서 조건 되어 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 기독교적인 삶의 목적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노력을 가지고 충족되고 있다. 그래서 엄밀한 절도의 표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의 원리의 고유한 방식으로서 그의 성숙의 외적인 단계를 드러내 주고 있다.

 

그러나 그 엄밀한 "적정과 절도의 규범(Regula modestae et sobrietatis)"은 일찍이 1537년 공동고백에 대한 글에서 카롤리(P. Caroli)와의 싸움에 관련하여, 화렐(G. Farellus)과 칼빈, 비레(P. Viretus)가 합의하였고, 카피토(V. Capito)와 부쩌(M. Bucerus), 미콘니우스(Os. Myconius), 그리네우스(S. Grynaeus) 등이 서명했던 하나의 의미 있는 증거 문서에서 발견되고 있다. 거기에서 그들 모두는 오직 성경의 말들로부터(ex solis scriptuae verbis)의 근본적인 엄밀한 규범이 앞세워 지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의 말씀밖에 어떤 다른 곳에서 찾지 않고 그의 말씀을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그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만족스럽고 긍휼로 주워진 피조물들 가운데 그 모든 재화들로부터 저를 확신하고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밖에는 어떤 것도 찾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지 않고는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 같은 그 엄밀한 적정과 경외의 규범이라는 해석학적인 근본원리를 가지고 이제 정통주의로부터 전혀 내려온 "삼위일체(trinitans)"와 "인격체들(persona)"등의 용어들을 참된 성경적 삼위일체 교리 일반을 위해 사용해야 함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말씀의 한계에 그의 말들을 제한하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한계에 그의 생각을 제한하는 것을 통해서 엄밀히 되고 있다.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주의적인 원리는 여기에서 이미 기독교인의 엄격한 매일의 삶과 더불어 결합되어진 것을 또한 잘 인식할 수 있다. 즉 기독교인들은 성경말씀을 향하여, 그 안에서 물어야 하고, 그 말씀과 함께 생각하여야 하며, 그 말씀을 통해서 말하여야 한다.

 

그러나 엄밀한 규범의 정확한 세세한 것에 대해서 그의 1536년 기독교강요의 제 일판을 지금 분석해 보아야 한다. 칼빈은 그 기독교강요의 제 일판에서 근본적으로 오직 성경을 근거로 하여 생각하고 말하는 명료한 규범을 언급하였고, 그것을 이미 적정의 사고 과정과 호기심을 삼가는 일과 관련시켰다.

예를 들면, 본질(essentia)과 위격(persona)과 같은 삼위일체의 개념들의 전통적인 언어의 관용을 비난한 현학자들에 대해서,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제 일판의 제 이권에서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간소하고(parce) 절도있는(modeste) 규범을 내세웠다.

 

그래서 칼빈은 그 외래어들이 성경으로부터 증거 되어지는 그것보다 다른 것을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용어들을 사용해도 지장 없다고 간주하였다. 동시에 칼빈은 역시, 그런 방식의 언어들의 혁신은 우리들의 두뇌 안에서 혼돈 되고 성경에서 발견되는 어려운 문제들의 분명한 의미를 위해서 유용할 뿐만 아니라, "우물쭈물하면서 진리를 밀어내"는 거짓 탄원자들(adversus caluminatores)에 반대하여 진리를 확실하게 세우기 위해서도 유용함을 강조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규범(ex scripturis et loquendi regula)"은 "그것에 따라서 우리들의 마음의 모든 생각과 입의 모든 말들이 측정되는", 즉 "어떤 척도나 표준"으로서 확고히 되어지고 있다. 그의 주석들에서뿐만 아니라 그의 기독교강요의 후대 재판들에서도 그렇게 독특한 의미에 있어서 완전히 되어진 이런 규범은 계속 정당하게 입증되고 있다. 이러한 신중한 규범을 사려함이 없이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그의 일반 개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음이 그 결과가 된다.

 

오히려 칼빈신학의 독자성은 단순히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그의 개념이 기초를 두고 있는 "성경으로부터 생각하고 말하는 규범(ex scripturis et loquendi regula)"으로부터 비로소 시작하고 있다.

 

2.2. 오직 성경(Sola Scriptura/Locum ipse per se satis clarus esse)

 

사람들이 때때로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칼빈은 사실 성경의 자기해석의 표현들, 예를 들면, 위클리프(J.Wicliff)의 경우 "종종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연적이다"하고, 루터(M. Luther)의 경우 "성경은 그 자체로 해석한다((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하며, 부쩌(M. Bucer)의 경우 "우리는 성경을 성경을 통하여 해석한다(das wir schrifft durch schrifft u legan)"하고, 불링거(H. Bullinger)의 경우, "성경이 그 자체의 해석이다(scripturam sui ipsius esse commentarium)"하며, 의학자이기도 한 파라켈수스(Th. Paracelsus)의 경우 "오직 성경 자체로부터 성경해석(ex scriptura ipsa tantum interpretatio scripturae)"이고 네테스하미의 아그리파(Agrippa von Nettesheim)의 경우 "성경은 그 자체가 충분하여 그 자체로 해석하고 그것이 모든 것을 판단하며 어떤 이로부터 판단 받지 않는다(Dieser Heiligen Schrift…sondern es ist dieselbe an sich selbst genug, interpretiert sich selbst, sie judiziert alle und wird von niemanden judiziert)"는 등등의 표현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성경해석의 이런 원리들은 물론 해석의 목적으로부터 형성되어진 것도 아니고, 다만 원전으로(ad fontes) 혹은 원전 자체로부터(ex ipsis fontibus)와 같은 그 근본원리들을 가지고 성경의 어거스틴적인 자기해석에 대해서 동의를 주고 있다.

 

그러나 "오직(sola)"이라는 그 특별한 종교개혁주의적인 강조는 때때로 문헌학적이거나 법적인 정신뿐만 아니라, 역시 어거스틴적인 자기해석과도 구별됨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통해서 칼빈은 분명히 종교개혁적인 자기해석을 거절하지 않았다. 악의 있고 비루한 적대자들을 대항할 뿐만 아니라, "사탄의 공공연한 미혹"에 맞서서, 그는 그 근원에 있어서 그렇게 오래되고 잘 알려진 원리를 실제적인 의미에 있어서 다시 정확하게 발굴해 냈다.

 

언제든지 기독교인들이 "오직(sola)" 성경을 통해서 모든 사실에 대하여 그리고 전 삶에 있어서 주의 깊고 절제 있게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칼빈에게 중요했다. 그 때문에 역시 강조할 수 있는 것은 칼빈은 다른 위험스러운 급진주의자들과 비록 신중하고 중용적이라 생각하나 실제적으로 학문적 절충주의자들일 수 있는 현학자들에 대항하여, 다른 과학적인 방법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 성경의 자기해석론을 확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이러한 해석학적 규범을 통하여 "전 기독교 교리(tota doctrina christiana)"와 "기독교 철학의 기초(fundamentum christianae philosophiae)"를 굳게 세우기를 원했다는 사실이다.

 

 칼빈은 이런 확고한 원리에서 출발하여 성경이 말하지 않은 것에 관하여, 혹은 그 성경의 증거들을 넘어선 것에 대해서는 엄밀하고 확실하게 침묵하기를 원했다.

 

 

(罪) 고백(告白)]

“우리는 이미 범죄(犯罪)하여 패역(悖逆)하며 행악(行惡)하며 반역(叛逆)하여 주의 법도(法度)와 규례(規例)를 떠났사오며”(단9:5)

성경에 규정된, 죄를 고백하는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잊으시며 도말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므로 용서를 얻으려면 주님께 죄를 고백합시다. 주님은 의사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상처를 그분께 보여 드립시다. 주님은 상하시고 모욕을 받으셨...으니 그분께 평안을 구합시다. 주님은 마음을 감찰하시고 사람의 모든 생각을 아시므로 그분 앞에 서둘러 나아가 우리 마음을 쏟아놓읍시다. 죄인을 초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지체하지 말고 그분께 나아갑시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시32:5). 다니엘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단9:5). 우리는 누구에게 죄를 고백해야 합니까? 그분께 고백해야 합니다. 분명히 우리는 통회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분 앞에 엎드려 진심으로 우리 자신을 꾸짖고 책망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에서 비롯되는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런 진심에서 우러나온 고백을 한 사람은 틀림없이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널리 알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기꺼이 혀로 하나님의 자비를 고백할 것입니다. 그는 자기 마음의 비밀을 한 사람의 귀에 단 한 번 속삭이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주 공개적으로 온 세상 사람들이 듣는 데서 솔직하게 자신의 수치와 더불어 주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에 대해 말할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이 다윗도 나단의 책망을 들은 뒤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자신의 죄를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고백합니다.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삼하12:13). 즉, 이제 아무런 변명거리도, 빠져나갈 구멍도 없으니 모두가 자신을 죄인으로 판단해야 마땅하며, 하나님만 아시는 비밀로 감춰 두고 싶었던 자신의 죄도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비참함을 고백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를 우리 자신과 온 세상 앞에 나타내는 것은 합당한 일입니다. -존 칼빈과 함께하는 말씀묵상 36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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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신자의 삶에 대한 주요 원리는 바로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곧 영적 예배로 드리는 것이 신자의 의무라는 것이다(12:1).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는 권면의 근거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여기 나타나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구별된 자로서 하나님께 드려졌으므로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면 생각하거나 말하지도 말고, 계획하거나 행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한 것을 세속적인 용도로 사용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뜻이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주장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악된 육체에 편리한 것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대로 우리 자신이나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잊어버려야 할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살고 그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14:8).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니 그의 뜻과 그의 지혜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다스리게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우리의 삶의 각 부분마다 그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고전6:19). 자기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받고서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통치권과 경영권을 자기 자신에게서 취하여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 있다면, 그 얼마나 위대한 전진의 모습이겠는가! 사람을 멸망으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길이 바로 자기 자신에게 복종하는 것이듯이, 유일한 피난처는 다른 의지와 지혜를 다 버리고 오직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고자 하는 의지와 지혜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하여야 할 것 걸음은, 우리 자신을 버리고 우리의 모든 능력과 정력을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 드리는 것이다. 여기서 섬긴다는 것은 말로 순종하는 것뿐만 아니라 육체의 정욕을 버리고 성령의 부르심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마음을 갖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 바울은 이를 심령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4:23)- 야말로 생명에 들어가는 첫 관문인데, 철학자들은 이것을 전혀 몰랐다.

 

그들은 사람을 경영하는 것이 이성에 있다고 보았고, 따라서 이성의 소리만 들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성만이 사람의 행동을 주장한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철학은 이성 대신 성령을 그 자리를 올려 놓고 그에게 완전히 굴복하고 복종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하여 이제는 사람이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서 사시며 통치하시는 것이다(2:20).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천다이제스트), pp 20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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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신자들은 모두가 다 그들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8:36). 그러므로, 신자가 하늘에 마음을 두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높아져서 현재의 일들을 그렇게 초월하지 않는다면, 그들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고전15:19).

 

그러나 이 땅의 모든 것들을 넘어서서 고개를 위로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되면, 아무리 악인들이 이 땅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평화를 누리며 자기들이 지닌 모든 화려하고 사치한 것들을 자랑하며 온갖 즐거움을 다 누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더 나아가서 악인들에게 괴로움을 당하고 그들의 교만 때문에 모욕을 당하며 그들의 탐욕 때문에 약탈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모든 악조건들 속에서 꿋꿋하게 견뎌나가게 될 것이다.

 

신자는 그날을 향하여 시선을 돌릴 것이다. , 주께서 그의 신실한 종들을 영접하사 눈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영광과 희락의 옷을 입시시며,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먹이시고, 그들을 높이사 그와 함께 고귀한 교제를 나누게 하시며,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을 영접하사 그의 복락에 함께 참여하게 하실 그날을 분명하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25:8, 7:17).

 

그러나 악인은 이 세상에서 번영을 누렸을지라도, 극한 수치와 함께 망하게 하실 것이요, 기쁨이 변하여 고통이 되게 하실 것이요, 즐거움과 웃음이 변하여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게 하실 것이요, 평화가 변하여 양심의 찔림이 되게 하실 것이며, 그들의 사치를 꺼지지 않는 불로 벌하실 것이며, 또한 그들에게서 고통을 당한 경건한 성도들의 발 밑에 머리를 조아리게 만드실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렇게 말씀한다.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에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살후1:6-9).

 

과연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위로가 없다면, 우리는 절망에 빠지거나 아니면 이 세상이 주는 헛된 위로에 사로잡혀서 멸망에 빠지고 말 것이다. 시편 기자는 고백하기를,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73:2,3)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성소에 들어가서 의인과 악인의 마지막 결국을 깨달은 다음에야 비로소 평안을 찾았다(17).

한 마디로 결론을 짓는다면, 신자들이 시선을 돌려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분명하게 바라볼 때 신자들의 가슴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마침내 마귀와 육체를 무찌르고, 죄외 죄인들을 무찌르고 승리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24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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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교회 (존 칼빈)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찌어다 하였느니라”(딤후 2:19)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하셔서 양자로 삼으셨기 때문에 이 은총이야말로 다른 사람들은 멸망하도록 내버려두시면서 우리에게 내려 주신 특별하고도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귀중한 축복입니다. ... 하나님께서는 온전히 당신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전 인류의 멸망에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만큼 더 하나님께 순종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느냐 아니면 버림받은 자가 되느냐를 구별지어 준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는 사실을 명심합시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혼란과 범죄를 볼 때 그리고 시작을 잘 했던 자가 중도에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을 볼 때 사람은 의지가 약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기쁘게 양자 삼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충분한 확실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약속하신 대로 우리를 지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실망하거나 의기소침해질 때는 언제나 하나님의 선택에 호소합시다. 만약 사람들이 타락하게 되는 것을 보거나 전 교회가 파멸되는 것처럼 보이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터를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사람의 뜻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들 자신을 만들 수도 없고 또한 자기들 자신을 개조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서 나왔습니다.

 

비록 그 건물의 윗 부분이 허물어진 것처럼 보이며 기둥이 보이지 않고 그 건물의 형태와 모습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터를 견고하게 지켜 주실 것이니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선택교리가 필요한지 필요하지 않은지를 세상 사람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추어진 섭리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을 억지로 파악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우리에게 숨겨져 있는데도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입니다. 그것의 인위적인 은폐는 필수적인 위안을 우리에게서 빼앗는 것이 아닙니까? 마귀들이 우리들의 믿음을 파괴하는 데에는 우리로 하여금 이 조항을 보지 못하도록 감추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변함없는 창세 전의 선택

 

반역자와 위선자가 많은 세상 특히 사람들이 자기들 손으로 기적을 일으켜 보겠다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그와 똑같은 일이 우리에게서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선택을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로 삼지 않거나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돌보아 주실 것을 의심한다면 어떻게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안정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는 복음과 관련해서 우리와 한 약속을 어기신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대한 우리들의 사랑을 파멸하기 위해 사단이 고안 할 수 있는 중요한 목적이며 또한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과 그 졸개들에게 구애받지 말고 우리의 방패가 되는 이 무기를 굳게 잡읍시다.

 

하나님의 선택 안에서 견고해지며 그것을 가치 있게 만듭시다! 만약 우리가 우리 영혼의 구원을 사랑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신경을 많이 씁시다. 우리는 이러한 교리를 우리에게 숨기려고 하는 자를 우리의 영원한 적으로 간주해야 합니다.

 

마귀는 그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을 빼앗으라고 독려합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권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에게 결코 변함이 없으며, 환난 중에서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함입니다. 만약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불안하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며 그에게 달려가서 하나님이 불러 주신 일에 부지런히 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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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의 복음의 의미 ( 존 칼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롬 1:16)

 

"복음"이라는 말의 의미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복음은 고결함을 통해 세상과 세상의 사라져 가는 부요와 쾌락을 경멸함으로써 우리의 온 마음으로 이 소중한 복을 소망하고 그 복이 우리에게 베풀어질 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기쁘고 즐거운 은혜의 메시지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명시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선포되도록 명하신 메시지에 복음이라는 이름을 허락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참되고 확고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복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이라는 말이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흩어져 있는 모든 은혜로운 하나님의 약속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보통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복음이 처음 선포되었다고 밝히시므로 내가 제시한 복음의 정의를 따르도록 합시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은혜의 엄숙한 공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일컬어집니다(롬 1:16).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비와 우리를 향한 아버지로서의 사랑의 보증인 것처럼 특별한 방식으로 복음의 주제가 되십니다.

 

 

 

 

http://cafe.daum.net/ansanhoebok/7MyF/1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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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소망은 서로 연결된다/ 존 칼빈

믿음은 그것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불가 불리의 동반자로서 곁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믿음은 그 자체 내에서 소망을 일으키며 생산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실성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다.

곧 그것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우리를 속이거나 빈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 그들이 반드시 진실하다고 믿는 그 약속들을- 실현하실 때가 오리라고 기대하
며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간단하게 말하면 소망은 하나님께서 진실하게 약속하셨다고 믿는 일들에
대한 기대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을 진실하다고 믿으며 소망은  하나님의
진실성이 밝히 나타나는 때를 기다린다.

즉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믿으며 소망은 그가 우리에게 대해서 항
상 아버지가 되시리라고 예상한다.

믿음은 우리가 영생을 받았다고 믿으며 소망은 영생이 언젠가는 나타나리라고 예
상한다. 믿음은 소망의 토대로 소망은 믿음에 영향을 주며 힘을 준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미 믿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약한 믿음은 오래 참는 소망과 기대에 의해서 지지대고
조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무력해지고 희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바른 말이다(롬8:24).
소망은 묵묵히 주를 기다리는 동시에 믿음이 너무 서두르다가 곤두박질

하여 떨어지지 않도록 제어한다. 소망은 믿음에 힘을 주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
심하거나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도록 한다. 소망은 믿음의 생기를 회복시켜
지치지 않게 한다. 소망은 종점에 노착할 때까지 믿음을 지탱하여 주어 도중에
서 심지어 출발점에서도 힘이 빠지지 않도록 한다. 간단히 말하면 소망은 끊임
없이 믿음을 갱신하고 회복함으로써 믿음에 견인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소망의 지지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를 더 잘 알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닥치는 시험의 형태가   얼마나
많은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주께서는 약속하신 일을 연기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오랫동안 불
안정한 상태에 두신다. 이런 때에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2:3)고 한 예언
자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소망의 기능이다.

어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치는 것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분명히 노여움
을 보이신다. 이런 때에 소망이 우리를 도와서 다른 예언자가 말한  대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사8:17)할 필요가   훨씬
더 절실하다. 또 베드로는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라
고 말한다(벧후3:3-4) 사실상 육과 세상은 꼭같은 말들을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
런 때를 위해서 우리는 길이 참는 소망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강해야 한다. 천 년
을 하루같이 여기리만큼(시90:4, 벧후3:8) 우리의 소망을 영원한 데에 두어야 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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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죄를 참되이 보속하며 양심에 평안을 준다/ 존 칼빈

 

 

그들(카톨릭)은 말하기를, 죄 사함과 화목이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 속에 들어갈 때에 단번에 일어난다고 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 죄를 범하면 다시 보속을 통해서 회복해야 한다고 하며, 교회의 열쇠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피가 아무런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들의 패역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와는 전연 달리 말하고 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2: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라”(요일2:12). 그는 신자들을 향하는 말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죄를 위한 화목 제물로 제시하면서 거역을 당하신 하나님을 진정시킬 수 있는 다른 보속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단번에 너희와 화목되셨으니, 이제 너희 스스로 다른 수단을 구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영원하신 대언자로 제시하며, 그리스도께서 언제나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으로 우리를 아버지의 사랑에로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죄를 사하는 영원하신 화목 제물이시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이 한 말은 언제나 진리이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 곧, 다름 아닌 오직 그가 죄를 없이 하시는 것이요, 그가 홀로 하나님의 어린양이시요, 그가 홀로 유일하신 속죄 제물이시요, 화목 제물이시요, 유일하신 보속이시라는 것이다. 죄를 사하시는 권세와 능력은 아버지께 속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또 다른 각도에서 제시되고 있다. 곧, 우리가 지고 있는 형벌을 그 스스로 담당하셔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우리의 죄책을 씻어버리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속죄에 우리가 참예하게 될 것이다. 다만 자기 자신의 보속으로 하나님을 진정시키려 하는 자들이 그리스도께 있는 영광을 빼앗는 일만 없다면 말이다.

 

보속의 원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빼앗고 양심을 괴롭힌다. 우리는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곧, 그리스도의 영광을 순전하게 지키며 그 영광을 흐리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양심으로 죄 사함을 확신하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우리의 죄악을 담당시키셨고(사53:6) 그가 맞으신 채찍으로 우리가 낫게 하였다(사53:5)고 말씀한다. 베드로는 이를 다른 말로 표현한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2:24). 바울도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셨고(롬8: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셨다(갈3:13)고 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그 저주와 그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과 사망의 형벌과 함께- 친히 담당하시고 제물로 드리신 바 되셨을 때에, 그의 육신 속에서 죄의 권세와 저주가 죽임을 당하였다는 것이다.

 

처음 죄를 씻은 이후부터는 우리 각자가 회개에 합당한 보속을 드리는 정도만큼만 그리스도의 고난의 효능을 느낄 수 있다는 그들의 거짓된 이론 같은 것은 여기서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죄를 범할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보속을 의지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심을 편안하게 하는 면에 있어서도, 과연 보속을 통해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에 과연 그 사람의 양심이 편안해지겠는가? 과연 어느 정도 보속해야 충분하다는 확신을 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과연 긍휼하신 분인지에 대해서 항상 의심하게 될 것이고, 언제나 근심에 싸이고 언제나 두려워 떨게 될 것이다.

 

사소한 인간적인 보속을 의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가볍게 여기며 죄의 그 큰 짐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적절한 보속을 통해서 몇 가지 죄를 속한다 치더라도, 나머지 무수한 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겠는가? 그 죄들을 다 보속하자면, 평생을 죄를 보속하는 데 소비한다 해도 수백 번의 인생을 살아도 모자라지 않겠는가?

 

또한, 죄 사함을 선언하는 그 모든 성경의 말씀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 교육 받는 자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교회의 품에서 양육 받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높이 기리는 사신의 임무, 즉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5:20)고 선포하는 일은 외인들에게가 아니라 이미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하여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보속과는 작별을 고하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탁하게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피로 ---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 자기와 화목되”게 하셨다(골1:20)고 말하는데, 그 사실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교회에 받아들여지는 순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평생토록 지속되는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155-158

 

 

출처: 청교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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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자들의 덕행도 하나님의 선물임 

(칼빈의 '기독교 강요' 중에서...) 

 

우선, 나는 불신자들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온갖 재능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또한 일반의 상식적인 판단을 완전히 거부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은 티투스와 트라야누스에게서 나타나는 정의와 중용과 공평이 칼리굴라나 네로나 도미티아누스에게서 나타나는 광기와 무절제와 잔인함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또한 티베리우스에게서 나타나는 도착적인 음욕이 베스파시아누스에게서 나타나는 금욕의 자세와 엄청난 차이가 있으며, 개별적 덕목과 악행을 일일이 거론하지 않는다 해도 정의와 법을 준수하는 것과 그것들을 멸시하는 것이 서로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다 인정하고 있는데, 나 역시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는 서로 큰 차이가 있어서 심지어 죽은 모습에서도 그런 차이가 나타날 정도다. 이것들을 서로 혼동한다면, 과연 세상의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겠는가? 그러므로 주님은 사람들 개개인마다 마음속으로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을 구분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때때로 그의 섭리를 통하여 이를 확증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 덕을 불러일으키는 자들에게 이생에서 많은 복들을 베푸시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 덕행의 겉모양이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기 때문에 그런 복을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진정한 의를 얼마나 높이시는지 증명해 보이시기를 기뻐하셔서 그들에게 그런 복을 베푸시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겉으로 꾸며내는 의로움에 대해서도 세상적인 상급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내용이 자연스럽게 성립되는 것이다. 곧 이런 모든 덕행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사실 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면 여하한 경우에도 칭찬할 만한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음과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술도 사실이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벗어나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덕망이 높다 할지라도 상급도다는 오히려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이 오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선한 일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와 정절과 우정과 절제와 용기와 지혜로 인간 사회를 보존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들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이런 선한 임무를 최악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이다. 선을 이루고자 하는 순전한 열심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야망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 혹은 기타 부패한 동기에서 악행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불결하여 그들의 선행도 그 근원에서 부패하였으므로, 그것들을 덕행으로 인정할 수가 없고 오히여 덕행과 비슷하게 보여 사람들을 속이는 악행으로밖에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가 제시하는 목표를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행하는 일도 비록 좋아 보이기는 하지만, 그 의도가 부패하여 있으므로 결국 죄악된 것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결론짓기를, 파브리키우스나 스키피오나카토 등 탁월한 선행을 행한 이교도들은 믿음의 빛을 받지 못하여 마땅히 지향하여야 할 행위의 목표를 지향하지 못하였으므로 참된 의로움이 그들에게 없었으며 결국 죄를 지은 것이라고 한다. 사람의 덕행은 행위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지향하는 목표에 의해서 판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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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의 복음의 의미

존 칼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롬1:16)"

 

"복음"이라는 말의 의미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복음은 고결함을 통해 세상과 세상의 사라져 가는 부요와 쾌락을 경멸함으로써 우리의 온 마음으로 이 소중한 복을 소망하고 그 복이 우리에게 베풀어질 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난 기쁘고 즐거운 은혜의 메시지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명시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해 선포되도록 명하신 메시지에 복음이라는 이름을 허락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참되고 확고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복한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이라는 말이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 흩어져 있는 모든 은혜로운 하나님의 약속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보통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복음이 처음 선포되었다고 밝히시므로 내가 제시한 복음의 정의를 따르도록 합시다.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은혜의 엄숙한 공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일컬어집니다.(롬1:16) 복음 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비와 우리를 향한 아버지로서의 사랑의 보증인 것처럼 특별한 방식으로 복음의 주제가 되십니다. 개혁주의마을/Grace

필연과 강제의 구분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 중에서)

 

인간의 의지는 죄의 굴레에 완전히 묶어 있기 때문에 선을 향하여 움직일 수도 없고, 꾸준하게 선을 추구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움직임은 바로 하나님께로 향하는 회심의 시초인데, 성경은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는 자기를 돌이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자신을 돌이켜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또한 같은 장에서, 신자들의 영적 수공을 묘사하면서, 여호와께서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속하였다”고 말씀한다. 이는 분명 여호와께 버림을 받아 마귀의 멍에 아래서 행하는 동안 죄인이 얼마나 단단한 족쇄에 묶어 있는가를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지는 그대로 남아 있어서, 죄를 향하여 강력한 애착을 갖고 그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이 이런 처지에 있다고 해서 의지를 빼앗기는 것은 아니고, 다만 의지의 건전성을 빼앗기는 것이다.

 

자, 자유를 빼앗긴 의지는 필연적으로 악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는 내 말을 납득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 의아스러운 일이다. 그 말이 사람들에게 거슬리는 것은, 그들이 필연과 강제를 서로 구분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인 것이다. 가령 누군가가 그들에게 하나님은 필연적으로 선하지 않으신가? 마귀는 필연적을 악하지 않은가? 라고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하겠는가? 하나님의 선하심이 그의 신성과 너무나도 밀착되어 있어서, 그가 하나님이신 것이나 그가 선하신 것이나 똑같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귀 역시 타락으로 말미암아 선에 참여 하는 것에서 완전히 끊어져 버렸으므로, 그는 악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가령,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모욕하려고, 하나님께서는 강제로라도 자신의 선하심을 보존하지 않으실 수 없으니 그가 선하다는 것에 대해서 굳이 칭찬을 받으실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빈정거린다고 하자. 그럴 경우에는 곧바로 답변할 수가 있다. 곧 하나님께서 악을 행하지 못하시는 것은 그렇게 못하시도록 어떤 강제적인 압력을 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한량없이 선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마땅히 선을 행하실 수밖에 없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선을 행하는 하나님의 자유 의지가 전혀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또한 마귀가 오직 악 이외에는 아무것도 행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의지로 악을 행하는 것이라면, 사람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 아래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곳에서 이런 필연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코엘레스티우스(Coeletius)가 이에 대해 트집을 잡으며 그를 비난했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단언하였다. “자유를 통해서 사람이 죄 가운데 있게 되었지만, 그에 대한 형벌로 나타난 부패성이 자유를 필연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할 때마다, 주저하지 않고 이를 필연적인 죄의 속박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분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람이 타락에 의하여 부패하였을 때에 강제에 의해서 억지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지은 것이며, 강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의 강력한 이끌림에 의해서 죄를 지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의 본성이 너무나 부패해 있어서 그는 오직 악을 향해서만 움직일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사람이 분명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매여 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다.

 

베르나르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동의하여 이렇게 쓰고 있다. “모든 생물들 가운데 오직 사람만이 자유롭다. 그런데 죄가 개입함으로 인하여 사람 역시 일종의 폭력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는데, 이것으로 그의 본성이 아니라 그의 의지가 해를 입은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본래 부여받은 자유는 빼앗기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뒤에 가서는 이렇게 쓰고 잇다. “무언가 비열하고도 이상한 방식으로 그 의자 자체가 죄로 말미암아 더 악하게 변하여 그 자체가 필연이 되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이 – 그것이 의지에 속하면서도 – 의지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지도 않고, 반대로 의지도 – 그것이 이끌림을 받아 그릇된 상태로 나아가지만 – 필연을 배제할 기회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 필연이 말하자면 자의적인 것이 때문이다.

 

그리고 더 뒤에 가서는, 우리를 압박하는 멍에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의적인 종노릇의 멍에이며, 따라서 의지가 자유로울 때에 스스로 죄의 종이 되었으니 종노릇의 상태를 보면 비참하기 이를 데 없고, 의지를 보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짓는다. “이렇듯 영혼은, 무언가 이상스럽고도 악한 방식으로 자의적이면서도 그릇 자유로운 필연성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하면서도 동시에 자유로운 것이다. 그리고 더 이상스럽고 한심스러운 일은 영혼이 자유롭기 때문에 죄책이 있으며, 죄책이 있기 때문에 종노릇의 상태에 있는 것이요, 결국 자유롭기 때문에 종노릇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개혁주의 마을/Grace

하나님의 종은 모든 일이 마음에 바라는 대로 잘 이루어질 때에, 사람의 도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느꼈든, 생명이 없는 피조물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든, 그 모든 일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덕분으로 돌리게 된다. 모든 일이 번창한다는 것이 오직 하나님의 축복으로 되는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감사하게 된다.

 

어려움이 닥친다 할지라도, 그는 곧바로 마음을 높이 들어 하나님께로 향할 것이며, 하나님의 손길에서 인내와 마음의 평안을 풍성하게 얻게 될 것이다. 요셉이 형들의 배신을 계속해서 마음에 두었더라면, 절대로 그들을 향하여 형제다운 애정을 보여 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신들을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욥의 경우도 만일 갈대아 사람들의 잔악한 행위를 계속 마음에 두었더라면 즉시 보복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즉시 그 일이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인정하였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다윗의 경우도 시므이에게서 협박과 모욕을 당하였을 때에 그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더라면, 곧바로 부하들을 시켜 보복하였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16:11).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39:9).

 

끓어오르는 분노와 조급한 마음을 치료하는 것으로 과연 이보다 더 효과적인 것이 없다면,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하기를 배운 사람은 분명 굉장한 유익을 얻을 것이고, 언제나 마음에 다음과 같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곧 “주께서 그렇게 뜻하셨으니 반드시 견뎌야 마땅하다. 비단 그것을 대적하여 싸울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주께서는 정의로우며 유익한 일 이외에는 어떠한 일도 뜻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혹시 사람들에게 억울하게 상처를 당할 때에라도,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고- 그렇게 하면 우리의 고통만 더 악화되고 우리의 마음에 복수할 생각만 날카롭게 일어날 뿐이니-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경륜에 따라 허락된 일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기를 배우기를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상처를 받은 것에 대해 보복할 마음을 갖지 않도록 절제시키기 위하여,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엡6:12) 우리의 영적 원수 마귀에 대한 것임을(엡6:11) 지혜롭게 지적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 싸움을 잘 대비하게 해 주고 있다. 그러나 분노를 일으킬 모든 충동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유용한 교훈은, 바로 하나님께서 마귀와 모든 악인들을 무장시켜 싸우게 하시며, 친히 그 싸움의 재판장으로 앉아 계셔서 우리의 인내를 시험하신다는 것이다. “나는 빛도 짖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사45:7).

 

경건한 사람은 부차적인 원인들도 간과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유익을 베풀어준 사람들을 하나님의 선하심을 섬기는 자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베푼 인간적인 친절에 대해서 무시하지 않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들에게 신세를 졌다고 느끼며, 자신이 무언가 보답해야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고백하며, 기회가 닿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감사의 뜻을 전하려 할 것이다.

 

자신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주님을 근원으로 여겨 그에게 찬양과 공경을 돌리며, 동시에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들로서 존귀하게 여길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셔서 은혜를 베풀고자 하는 뜻을 가지셔서 그들에게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혹시 부주의나 태만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게 될 경우라도, 이 경건한 사람은 그런 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일어났다고 결론을 내리면서도, 동시에 그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것이다.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 경우는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도울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에는, 그런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일이나 그들의 조언을 청하는 일을 꺼리지 않을 것이고, 또한 무엇이든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 있으면 그것은 모두 주께서 베푸신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것들을 하나님의 섭리의 정당한 도구들로서 기꺼이 사용할 것이다.

 

또한 자신이 지금 취하고 있는 조치들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를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들을 베푸신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에게 최상이라고 여겨지는 일을 최선을 다하여 열심히 추구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저런 조치들을 취할 때에, 자기 자신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지혜에 맡겨서 올바른 목표로 나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후원이 있다고 해서 거기에 온통 기대고 확신 가운데서 안심하거나, 혹은 그런 것이 없을 때에는 그로 인하여 불안해하고 떨 정도로 그런 것을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만 생각을 고정시킬 것이고, 그리하여 현재의 상황에 대한 이런저런 궁리로 그 섭리에 대한 확고한 의지에서 벗어나지를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요압은 전쟁의 결과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게으름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의무를 부지런히 수행했던 것이다.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10:12)

 

- 존 칼빈, 『기독교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pp 266-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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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서 흐려진 하나님에 대한 지식(존 칼빈)

(롬 1: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자연적 본능

인간의 마음은 가령 자연적 본능에 의한다 할지라도 신성(神性)에 대한 어떤 감각을 소유한다는 것은 논의할 여지조차 없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 인류에게 그의 존재에 관한 어떤 이해력을 부여해 주었으므로(롬1:20) 누구든지 무지라는 구실로써 핑계할 수는 없다.
사람은 때때로 눈에 뜨이지 않을 정도로 이 기억을 새롭게 한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과 그 하나님이 자기들의 창조자라는 것을 알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거나 봉사하기... 위한 헌신적 생을 가지지 않을 때는 그들 자신의 증언으로써 저주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가지지 않을 정도로 미개하고 몽매한 민족은 없다고 키케로는 생각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시작부터 종교가 완전히 결핍한 나라나 가족은 없었으므로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신성에 대한 감성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Inscribed) 무언중에 나타나는 고백이다.

이와 같이 고찰해 볼 때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종교라는 것이 영리한 도안가들의 고안이라든가 단순한 대중을 그들의 의무에 머물게 하는 정치적 기계라든가 또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가르쳐 주면서 자기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이와 같은 가장(假裝)된 해석을 내리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말이다.

술책이 능한 자가 종교에 많은 발명품을 도입하여, 비천한 자를 위압하고 그들의 마음에 대하여 보다 큰 명령권을 얻기 위하여 공포(恐怖)로써 그들을 경책한다는 것을 물론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먼저 사람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견고한 신념을 가지기 전에는 이 목적이 성취되지는 않는다.

누구든지 사람은 본질상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본능적 신념(本能的信念)을 가지고 있다. 그 신념은 그들의 구조 자체(構造自體)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견지에서 우리는 말하기를 이것은 학교에서 배울 것이 아니라 각자가 나면서부터 스스로 배울 수 있는 일종의 교리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서 이 교리를 없게 하려고 신경 하나 하나를 긴장케 하나, 그들의 본질 자체가 그것을 망각(妄覺)치 않게 한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짐승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유일의 증거품이며 그들로 하여금 불멸성(不滅性)을 열망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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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성은 온갖 형태의 속임수에 넘어가며, 그렇게도 많은 오류에 빠지고, 무수한 장애에 부딪히며, 온갖 난관에 휩싸이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를 올바로 인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고후3:5).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시며”(고전3:20). “그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창6:5).

 

우리의 이성이 어디로 향하든 언제나 허망함에 굴복하는 비참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이처럼 연약한 상태임을 알고, 여호와의 계명을 올바로 배울 수 있는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하였다(시119:34). 새로이 깨달음을 얻기를 소원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깨달음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바울은 교회 전체를 위해 간구하고 있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을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 자라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골1:9-12). 이것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 말할 때마다 동시에 그것이 사람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일들을 깨달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햇빛이 있어야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에도 조명하심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육체의 눈은 우리 스스로 떠서 빛을 바라보지만, 마음의 눈은 주께서 뜨게 해 주지 않으시면 감겨진 상태 그대로 있다고 덧붙였다. 또한 성경도, 우리 마음이 어느날 한 번만 조명을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스스로 볼 수 있다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은 계속되는 과정이요 성장을 뜻하는 것이다.

 

다윗은 말한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니자 말게 하소서”(시119:10). 이미 거듭나서 참된 경건에서 적지 않게 성장해 있는 그였으나, 자기에게 주어진 그 지식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매 순간마다 계속적인 인도하심이 필요하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곳에서, 지신의 허물로 인하여 잃어버린 정직한 영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시51:10). 처음에 우리에게 주셨으나 우리가 잠시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44-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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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 한아름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를 혐오하는 자들은 이것이 스토아 철학자들의 운명론이라고 악의에 찬 비방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한때 이런 비방을 받은 적이 있다. 우리는 “운명”(fate)이란 단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바울이 피하라고 가르치는 망령되고 허탄한 단어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딤전6:20), 의도가 하나님의 진리를 억압하려 하기 때문이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자연에 나타나 있는 끊임없는 연관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인과 관계의 필연성을 상정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물의 통치자요 주관자이심을 믿는다. 하나님이야말로 그의 지혜로 머나먼 영원 전부터 그가 행하실 바를 작정하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그 작정하신 바를 시행하시는 분이신 것이다. 이를 근거로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생명이 없는 피조물들은 물론 사람들의 계획과 의도들까지도 하나님의 섭리의 다스림을 받아 그 정해진 목적을 곧바로 이루게 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연에 의해서나 운명에 의해서 일어나는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인가?고 그들은 물을 것이다. 대 바실리우스는 말하기를, “운명”이나 “우연”이란 이교도들이 쓰는 용어로서 경건한 사람들이 마음에 그 뜻을 새겨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모든 성공이 다 하나님의 축복이고, 모든 재난과 역경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면, 인간사에 운명이나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조금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도 우리는 감동을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아카데미 학파에 대한 반론」에서 내가 ‘fortuna'(운명)란 단어를 너무 자주 거론했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다만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일어나는 일들에서 겉으로 보기에 운명적인 것처럼 보이는 결과들이 일어나곤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 뿐이었다. 보통 ’운명‘이라고들 부르는 것은 어떤 은밀한 질서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우연히 일어났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그 이유나 원인이 비밀에 싸여 있다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해야 옳을 일에 대해서 ’이것은 운명이다‘라고 이야기하는 매우 악한 관습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한 마디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늘 가르치기를, 만일 무엇이든 운명에 맡겨진다면, 세상은 목표를 잃고 소용돌이칠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모든 일이 일부는 사람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일부는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나, 조금 뒤에 가서 사람들이 섭리 아래 있고 섭리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을 충분하게 입증해 보이면서, 하나님께서 계획하심이 없이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것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자신의 원칙으로 취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일들이 제멋대로 일어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또한 사람들의 의지에 따라 좌우되는 우연도 일체 용납하지 않았고, 조금 뒤에 가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이를 더 분명하게 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허락”도,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락이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뜻이 모든 일의 첫째가는 최고의 원인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상권, pp 25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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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 쉼터/한아름

기독교강요 제5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1-5) / 존 칼빈

 

 

제5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면죄부의 교리는 오류이며 그 영향은 유해하다. 1-5)
1. 로마 교회의 면죄부와 그 해독
그런데 이 보속의 교리에서 면죄부(또는 속죄부, Indulgences)가 생겨났다. 우리의 논적들은 보속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능력이 부족한 것을 면죄부가 보충하는 듯이 말한다. 그리고 광적인 극단으로 가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의 공로의 분배라고 정의하며, 교황이 교서에 의해서 그 공로를 분배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토론의 상대로 삼는 것보다 정신병 치료제로 치료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오류는 논박하려고 애쓸 가치가 없다. 그것은 이미 많은 쇠망치의 공격을 받아 저절로 낡아가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논박이 유익할 것이므로 나는 그냥 생략하지 않겠다.
면죄부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무제한의 방자와 난무를 감행하면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심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얼마나 짙은 오류의 암흑 속에 빠져 있었는가를 잘 증명한다. 사람들은 교황과 그 교사 전달자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들을 우롱하는 것과 자기들의 영혼의 구원을 이익이 많은 장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과 구원의 값을 돈 몇 푼으로 계산하는 것과 값없이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았다. 이런 협잡으로 그들은 예물을 빼앗기며, 빼앗긴 것은 매춘부들과 포주들과 난취 난무에 허비되는것을 보았다. 그들은 또 면죄부의 최대 선전가들이 자기들을 가장 경멸하는 것을 보았다. 이 괴물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소란하고 음탕하게 돌아다니며 그칠 줄을 몰랐고 매일 새로운 납을 내놓고, 새로운 돈을 가져갔다. 그래도 그들은 최고의 경의를 표하여 면죄부를 받으며, 경건한 모양을 가진 사기인 줄 알면서도 속는 사람들에게 다소의 유익을 줄 것으로 생각해서 그 앞에 경배하였다. 드디어 세상이 조금 지혜롭게 되려는 용기를 내게 되자, 면죄부는 냉각하며 점점 열기가 식어가고 있으니 결국 완전히 소멸하고 말 것이다.
 
2. 면죄부는 성경에 배치된다
면죄부 상인들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지금까지 비루한 간객과 기만 수단을 썼고 탐욕과 도둑질을 자행한 것을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간과했지만, 이 불경한 죄악의 근원 자체는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면죄부의 성격뿐 아니라, 그 정체를 깨끗이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논적들은 그리스도와 거룩한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공로를 "교회의 보고"라고 부른다. 내가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그들은 이 창고의 보관권을 로마 주교에게 위임하였으며, 로마 주교가 이 심히 위대한 혜택의 분배를 주관하여, 직접 분배하기도 하며 분배 사업을 타인에게 위임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완전한 면죄부와 일정한 연한의 면죄부는 교황이 발부하며, 백일간의 면죄부는 추기경들이, 그리고 사십일 간의 면죄부는 주교들이 발부한다고 한다.
올바르게 말한다면, 이런 짓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구원의 진정한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악마적 간계에 불과하다. 죄의 용서와 화해와 보속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보다 더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짓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주장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가 고갈되어 없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보충해야 된다는 듯한 생각이다. 베드로는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들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라고 증거한다(행 10:43). 면죄부는 베드로와 바울과 순교자들을 통해서 사죄를 부여한다. 요한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를 씻어버린다고 한다.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도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에 대한 보속이 된다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선언하며 증거한다(고전 1:13). 면죄부는 "바울과 기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고 하였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도 교회를 사는 값이 되었다고 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면죄부는 거룩하게 함은 순교자들에 의해 완성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충분하다고 선언한다. 요한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고 말했다. 그러나 면죄부는, 성자들의 피로 옷을 씻는다고 가르친다.
 
3. 권위자들은 면죄부와 순교자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로마 주교 레오는 팔레스틴 교인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아주 분명한 말로 이 모독 행위를 공격한다. "여러 성도들의 죽음을 주께서는 귀중하게 보시지만(시 116:15), 한 무죄한 사람이 살해된 것이 세상을 위한 화목의 제물은 되지 않았습니다. 의인들은 면류관을 받는 것이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용기는 인내의 모범을 보였으나, 의의 선물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죽음을 죽은 것이며, 그 죽음은 다른 사람의 빚을 갚는 것이 아닙니다. 주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며,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매장되고 부활하였습니다." 그는 이 생각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였다.
확실히 그 불경한 교리를 부수기 위해서 이보다 더 분명한 발언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에 못지 않게 적절한 말로 같은 판단을 내린다. "우리는 형제로서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죽지만 순교자가 피를 흘리는 것은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하셨다. 그가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도 그를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기뻐하라는 뜻이다." 그는 같은 생각을 다른 곳에서도 표명하였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우리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인자가 되셨다. 그와 같이 내놓을 만한 선함이 없고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를 통해서 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죄 없는 그가 홀로 우리를 위하여 벌을 받으셨다." 그들의 모든 교리가 무서운 소독적인 생각과 말을 꿰매어 붙인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이것은 가장 놀라온 모독이다. 다음에 몇 가지 생각을 열거할 것인데 이것이 그들의 판단인지 또는 아닌지를 알아보자. 그 순교자들은 죽음으로써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그로 인하여 필요 이상의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공로는 너무 많아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넘쳐흐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은혜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그들은 자기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와 섞었다. 그리고 죄의 용서와 배상과 보속을 위하여 이 섞인 피에서 교회의 보고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한 말은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된다.
이런 입장은 그리스도에게 이름만을 남기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다른 성자들과 구별할 수 없는 일개의 작은 성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만이 선포되며 제시되며 그 이름을 부를 가치가 있는 분이었다. 죄의 용서와 화목과 성화를 얻는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만이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들어 보라.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무익하게 되지 않도록, 그 피를 교회의 공동 재산에 기증하라고 한다. 이것은 사실인가? 그들이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은 무익한 일이었는가? 그들의 피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며, 현세 생활을 멸시함으로써 더 좋은 생명을 구한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들의 굳센 지조로 교회의 믿음을 강화하며 원수들의 고집을 깨뜨린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만이 화목의 제물이며, 그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그만이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회생되셨다고 하면서 순교자들의 죽음에 아무 결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베드로와 바울은 평안히 죽었더라도 승리의 면류관을 받았으리라고 그들은 말한다.
사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싸웠으므로 그들의 희생에 아무 결실도 없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부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선물의 분량에 따라 그의 종들을 통해서 자기의 영광을 더하실 줄을 모르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들의 승리로 인해서 교회에 전투열이 일어날 때 교회는 전체적으로 큰 혜택을 입는다.
 
4. 반대자들의 성경 해석을 반박함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운다(골 1 : 24)고한 말을 그들은 얼마나 사악하게 곡해하는가! 바울은 그 남은 것 또는 보충되는 것을 구속, 보속, 속죄와 관련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즉 모든 신자들이-지상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단련을 받기 위하여 당하는 고통과 관련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한 번 당하신 고난을 지금은 그의 지체들을 통해서 매일 당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인정하셔서, 우리에게 이 특별한 영예를 주신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라는 말을 첨가한다. 이것은 교회의 구속이나 화해나 보속을 위해서라는 뜻이 아니고, 교회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얻게 하려고, 자기는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한다(딤후 2:10).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받는 모든 고난을 참는 것은 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라고 하였다(고후 1:6).
그는 즉시 자기가 한 일의 뜻을 설명하여, 자기가 교회의 일꾼이 된것은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한다(골 1:25, 롬 15:19).
만일 나의 반대자들이 다른 해석자를 요구한다면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 보라. "그리스도의 고난은 머리이신 점에서는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있으며, 몸 전체로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있다." 따라서 한 지체인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이 말을 듣는 분이 누구이든 간에-그리스도의 한 지체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사람들에게서 당신이 받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사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당한 고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내게는 여러분에게 가는 문이십니다"(요 10:7). 이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로 준비된 그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값을 인정하십시오. 나는 그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전파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같이,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이것은 평화를 수립하며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라고 첨부한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한 말이다. 바울이 완전하고 충실한 의와 구원과 생명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결함이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관념은 버려야 한다. 또는 그가 무엇을 첨가하려고 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분명하고 웅장한 말로 그리스도께서 풍성한 은혜를 풍부하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가 죄의 세력 전체를 훨씬 능가했다고 전하였다(롬 5:15). 베드로가 웅적으로 증언하듯이(행 15:11), 모든 성자들도 자신의 생활이나 죽음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이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어떤 성자의 가치를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 어떤 다른 것에 의존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괴한 오류는 정체가 폭로되면 곧 정복되는 것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아직도 모호한 점이 있는 듯이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낼 것인가?
 
5.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일성과 포괄적 활동을 방해한다
나는 이런 가증한 것들은 무시하고 이제 묻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복음의 말씀에 의해서 널리 전파하라는 것이 주의 뜻이었는데, 그 은혜를 납과 양피지에 봉인하도록 교황에게 가르친 것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복음과 면죄부 이 둘 중의 하나가 거짓인 것은 분명하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복음을 통해서 하늘의 모든 풍성한 은혜와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그의 모든 의와 지혜와 은총과 함께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제공된다고 증언한다.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행동하도록 화해의 말씀이 사역자들에게 위탁되었는데, 이를테면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호소하신다고 바울은 말한다(고후 5:18-21)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0-21). 그리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가치를 안다. 이 친교는 바울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받아 즐기도록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된다. 이와 반대로 면죄부는 교황의 창고에서 소량의 은혜를 끌어내선 납과 양피지와 일정한 장소에 붙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은혜를 떼어버린다.
이 악폐의 근원을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에는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명령된 보속 의무가 견딜 수 없으리만큼 엄격했기 때문인 듯하다. 참회자들은 그들에게 부가된 무거운 고행에 눌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가 그것을 다소 완화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런 사람들에게 허락하는 용서를 "면죄"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이 보속을 하나님과 관련시키고 그것을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을 구속하기 위한 상쇄 수단이라고 했을 때에, 그들은 면죄 구속 수단으로 변형시켜,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벌에서 우리를 석방시킨다고 했다. 그들은 이렇게 파렴치한 생각으로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고 한 저 훼방죄를 저지른 것이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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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의지의 자유

 


존 칼빈

 

1. 죄의 노예가 된 의지
선한 것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으며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가장 비참한 필연성에 포위당하여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이렇게 배워온 인간은 자기에게 결핍한 선과 잃어버린 자유를 갈망하도록 훈육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나라에 합당치 않은, 일상적이고 외부적인 것을 그들은 대체로 인간의 자유 결정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참 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영적 중생에 속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학자들이 자유의지를 취급할 때 그들의 첫째 관심은 자유의지가 사회활동과 외부적 행동해 대해서 가지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는 능력에 있었다. 후자가 주요 문제라고 나는 인정하나 전자를 완전히 무시해서도 안된다.


사람이 은총의 도움과,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중생할 때 받는 하나님의 특별 은총의 도움 없이는 선행을 위한 자유의지를 소유하지 못한다. 사람이 자기의 뜻대로 선이나 악을 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다는 것이 아니라 강요 당함없이 자진해서 악을 행한다는 의미에서 사람은 자유의지를 소유한다고 할 수 있다.


의지를 노예의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 어거스틴은 분명히 말하기를 인간의 의지는 성령 없이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자유의지가 은총의 결과라는 점을 지적하고서 그는 자유의지를 은총 없이 자기 자신에게 참칭(僭稱)하는 자들을 날카롭게 비난했다.


인간속에 있는 자연적 재능은 죄로 인하여 부패되었고 초자연적 재능은 전적으로 박탈되었다는 어거스틴에서 차용한 공통된 관찰을 나는 옳다고 승인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악을 구별하거나 이해하거나 판단하는 데 사용하는 자연적 재능은 이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이 성이 전적으로 파손 될 수는 없다. 단지 그 일부분이 약하게 되고 부패해서 결함과 페허를 보여 주는 것 뿐이다. 가령 부패되고 퇴화(退化)한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인간의 본질 속에는 섬광이 계속해서 반짝거린다. 이것은 사람이 이성적 피조물이라는 것을 증거하며, 그것이 바로 야수와는 다른 점이다. 사람은 이해력을 가지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 빛은 많은 무지로써 덮여 있으므로 그것은 아무 효과를 발휘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의지는 인간의 본질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패되고 무질서한 욕망에 속박되어 있다. 그 결과 어떤 종류의 선이라도 동경할 수 없게 되었다.


2. 인간의 전적 타락

인간은 매우 불쌍한 피조물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 그것을 증명하기도 쉽다. 주님의 논점은 사람은 육이므로 중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안에 있는 것 가운데 영적인 것 이외의 모든 것은 이 논법에 의하면 정욕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중생 이외에는 영적인 것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우리가 본성에서 얻은 것은 정욕적이다.


그와 동시에 마음은 "모든 것보다 더 사기적이며 극도로 사악한 것이다(행17:9절)라고 할 때 그 마음에 대한 저주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인류의 교만을 분쇄하려고 할 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고백으로써 했다. 그는 어느 한 시대의 타락된 행동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질의 영구적 부패성을 비난한다. 상기한 구절에 나타나는 바울의 의도는 인간히 회개하도록 단순히 비난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불가피한 참화에 압도당하고 있다는것과 하나님의 자비로써 그 상태를 벗어나지 않는 한 그들은 절대로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것은 본성의 부패 속에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은총을 위한 장소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본성을 순결케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그의 활동을 제어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의 섭리로써 인간의 본성이 내부를 깨끗케 하지 않고 외부만 깨끗케 하려는 좋지 않은 성격을 제어하신다. 그러므로 의지가 극도로 죄의 노예가 되어 있으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분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선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바칠 수도 없다. 이것이 결정적인 차별이다. 즉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부패되었으므로 억지로 원치 않으면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범죄한다. 폭력적인 강요나 외부적인 힘으로써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열의 운동으로써 죄를 범하게 된다. 그의 본질의 타락성이 이와같으므로 악을 향하는 길 이외에는 움직일 수가 없다.


3. 인간 안에 있는 선은 하나님의 은총에 속한다.

만약 하나님이 바른 것을 추구하도록 우리를 변화시킨다면 이 변화는 돌이 육으로 변하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의지에 속한 것은 다 없어지고 그것을 대신하는 것은 다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또한 어거스틴이 가르친것과 같이 은총이 모든 선행(善行)에 앞서며, 의지가 은총을 선도(先導)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추종하며, 그의 인도가 아니라 그것에 반려(伴侶)가 된다고 할 것이다. 은총이 그것을 선행하므로 그것을 수행원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까지 나는 용인한다. 그러나 개혁은 주의 활동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은총의 인도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인간의 일로 돌려서는 안된다.

모든 선의 기원은 다른 존재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만 나온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의지가 선에 향하는 경향은 선택받은 사람에게서만 발견된다. 그러나, 선택의 원인을 인간 안에서 찾아서느 안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 안에 선한 의지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한 동일한 섭리에서 나온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4.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인간은 죄에게 너무나 심하게 속박되어 있으므로 자기 자신의 본성으로써는 선에 향하는 노력을 할 수 없으며 영감을 받을 수도 없다.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를 기수(騎手)의 지시에 복종하는 말에 비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과 악마를 기수에 비교하였다.


성령의 통치에 적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주(主)는 자기의 의로운 판단으로 사탄의 지배하에 내어 주신다. 사악한 자의 맹목성고 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모든 극악성은 사탄의 일이라 한다. 이 일의 원인은 인간의 의지 안에서만 발견되어야 한다. 이 인간의 의지에서 모든 악의 뿌리가 나오며 그 안에 사탄의 왕국의 기초가 있다. 그것이 즉 죄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선택한 자들을 향하여 두가지 면으로 역사하신다. 내적으로는 성령을, 외적으로는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 역사하신다. 자기의 영으로는 그들의 마음을 비추시고 사랑과 의를 지향하게 하시고, 그들을 새로운 피조물로 만든다.

 

그의 말씀으로는 다 같은 혁신을 원하고 추구하고 획득하도록 그들을 자극한다. 이 두 방면에서 하나님은 자기의 능력을 효과있게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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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하나님의 지으신 만물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거룩하게 묵상하기를 바라실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피조물들 속에서 마치 거울을 보듯이 그의 지혜와 공의와 선하심과 권능의 그 광대한 풍성한 것들을 바라볼 때에, 그것들을 그저 호기심으로, 혹은 말하자면, 그저 한 번 슬쩍 보고 지나치는 그런 식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것들을 거듭거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저 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그렇게 아름답게 위치시키고 정리 정돈하셔서 그보다 아름다운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어 놓으신- 그 중에 어떤 별들은 그 위치에 고정시키셔서 움직이지 않도록 해 놓으셨고, 또 다른 별들은 자유로이 움직이게 하셨으나 그 지정된 경로를 떠나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도록 하셨으며, 낮과 밤, 달과 해와 계절들의 모든 움직임들을 지정하셔서 일정하게 하셨고, 항상 보는 바와 같이 낮의 길이가 균등하게 차이가 나도록 하셔서 혼란이 없도록 해 놓으신- 그 조물주의 위대하심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하나님께 모든 일을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하여 정해 놓으셨음을 깨닫는 것이요, 동시에 우리 자신에게서는 물론 그가 우리에게 베푸신 큰 자비하신 일들에게서 그의 권능과 은혜를 느끼고, 그리하여 스스로 각성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에게 간구하고, 그를 찬송하며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창조의 질서를 통해서 그가 만물을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셨음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에 속한 그 모든 세세한 일들을 그렇게 점차적으로 이루시지 않고 그 모든 일을 단 한 순간에 완성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는 그 일을 엿새로 나누어 진행하셨는데, 이는 결코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신 것은 사람을 지으시기 전에 먼저 사람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모든 것들을 미리 아시고 예비해 놓으심으로써,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아버지다우신 배려를 드러내 보이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 항상 그가 지으신 모든 만물을 운영하는 일이 그의 손과 권능에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고, 또한 우리가 과연 하나님께서 그의 신실하신 보호하심 속으로 받아들이사 양육하시고 가르치시는 그의 자녀라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좋은 것들의 충만함을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하고, 우리의 구원에 필요한 것을 그가 결코 부족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임을 완전하게 신뢰하며, 그리하여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바라든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하며, 또한 우리의 몫으로 주어지는 유익한 것들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으로 인식하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 크신 자비하심과 선하심에 이끌려서, 온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고 섬기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크리스챤다이제스트사), 상권, pp 218-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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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출처: 생명나무 쉼터

교회에는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 / 칼빈의 기독교 강요

믿음은 ㆍ 2013-12-09 (월) 09:39 IP: 1.xxx.205 ㆍ조회: 14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13. 교회 내에 불상사는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되지 않는다.

인생의 결함을 참는 점에서 우리는 보다 깊은 사려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내려가는 길이 매우 미끄럽고 사탄이 비상수단으로 매복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는 완전히 성결하다는 그릇된 신념으로, 이미 낙원의 천사라도 된 양 인간의 본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의 교제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있었다. 옛날 카타리파가 그러했고 도나투스파도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일부 재세례파가 다른 사람들보다 고상한 체한다.

어떤 사람은 광적인 자만심보다 의에 대한 그릇된 열성 때문에 죄를 짓는다.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복음이 가르치는 대로 생활하지 않는 것을 볼 때에, 그들은 즉시 거기에는 교회가 없다고 단정한다. 이것은 아주 당연한 불평이며, 이 극도로 비참한 시대에 이런 불평이 생길 원인을 우리 편에서 너무도 많이 제공한다. 그리고 우리의 저주받을 태만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주께서는 반드시 이 태만을 벌할 것이며 이미 무거운 채찍으로 징벌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므로 죄악된 자포자기와 방탕으로 약해진 양심들에게 상처를 입힌 우리는 어떻게 화를 면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가 위에서 말한 사람들은 자기의 불쾌한 생각을 억제할 줄 모르는 점에서 역시 죄를 짓게 된다. 주께서는 인자하라고 요구하시는데, 그들은 철저하게 순결하고 성실한 생활이 없는 곳에는 교회도 없다는 생각으로 악을 미워하기 때문에 합법적인 교회를 떠난다. 그들은 악인의 무리에서 떠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거룩하다고(엡5:26) 그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교회에는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비유를 들어 보아야 한다. 교회는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아서, 물가로 끌어낼 때까지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르지 않는다(마13:47-48). 교회는 좋은 씨를 뿌린 밭과 같아서, 원수의 속임수로 가라지도 뿌려졌으나 추수 때가 되어 타작마당에 모아들일 때까지 뽑지 않고 버려둔다(마13:24-30). 교회는 곡식을 모아 놓은 타작마당 같아서, 키로 알곡을 가려 곡간에 들일 때까지 알곡은 쭉정이에 덮여 있게 된다(마3:12). 교회는 이런 재난 밑에서 수고하게 되리라고-심판의 날까지 악인이 섞여 있어서 큰 짐이 되리라고-주께서 언급하신다면 그들이 아무 오점도 없는 교회를 찾는 것은 헛된 노력이다.


14. 문제가 많은 교회에 대한 바울의 태도

그러나 그들은 죄악이 두루 창궐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외친다. 여기서도 사도의 의견으로 그들에게 대답할까 한다. 고린도 신자들 가운데는 타락한 사람이 적지 않았으며, 사실 거의 회중 전체가 감염되었었다. 한 가지 죄가 아니라 아주 많았으며, 그것도 경미한 과실 정도가 아닌 무서운 비행이었다. 도덕적 방면뿐만 아니라 교리적인 방면에까지 부패가 있었다. 성령의 도구요 그의 증거에 의해서 교회의 존망이 결정될 저 거룩한 사도 바울은 이 사태를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그는 이런 교회에서는 손을 떼라고 하는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그들을 몰아내는가? 최종적인 저주의 벼락으로 그들을 때려 부수는가? 그는 이런 일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의 공동체라고 인정하며 선언한다(고전1:2). 고린도 신자들 사이에는 분쟁과 분열과 시기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으며(고전1:11, 3:3, 5:1, 6:7, 9:1 이하) 언쟁과 탐욕이 함께 싹트고 있었고 이교도들조차 미워할 악행을 버젓이 시인하고 있었다(고전5:1). 아버지처럼 존경해야 할 바울의 명예를 무례하게 깎아 내리고 있었으며 어떤 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을 조롱하여 복음 전체까지 부수려고 하였다(고전15:12).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재능은 야심에 이용되었고 사랑을 돕지 못했다(고전13:5 참조). 여러 가지 일을 예절이나 질서 없이 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선포와 성례 집행은 반대 없이 계속했으므로 그들 사이에는 여전히 교회가 존속했다. 그러면 누가 감히 이런 비행의 십분지 일도 없는 사람들에게서 “교회”라는 명칭을 빼앗을 것인가? 묻노니, 현대 교회들을 반대해서 야비하게 날뛰는 사람들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어떻게 대접했겠는가? 그들은 거의 복음을 버린 자들이었지만 바울은 그들 사이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갈1:2)  

칼빈의 기독교강요(하) 제4권 제1장 13~14. 26~29p에서 발췌 / 생명의말씀사
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21513


마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 칼빈 주석에서 발췌

믿음은 

마 13:23.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마 13:24~30, 36~43)

교회가 이 세상에서 순례의 길을 가고 있는 이상 그 안에는 좋고 신실한 자들과 나쁘고 위선적인 자들이 섞여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내로 무장하고 괴로움을 주는 장애물 중에도 철통같은 신앙을 지속해야 한다.

주님께서 교회를 자기 밭이라고 칭하셨을 때 가장 적절한 비교를 하셨다. 신자들은 그의 씨앗들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에 그리스도께서 그 밭이 세상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주님은 이 밭을 교회에다 적용시키시기를 원하고 계셨음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고 주님은 결국에 가서 이에 관한 말씀을 하고 계신다. 밭을 가는 주님의 쟁기는 세상 끝까지 미칠 것이요. 주님은 도처의 어느 밭에나 관여하셔서 생명의 씨를 뿌리시기 때문에 세상의 일부가 되어 있는 교회가 제유(提喩)에 의하여 온 세상으로 해석된다.

이제 주님께서 ‘곡식’과 ‘가라지’에 관하여 의미하시는 바를 알아보아야 하겠다. 복음이 그 뿌려진 곳에서 사악한 관념들에 의해 즉시 부패되고 변질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와 같은 부패를 일소하는 일에 열중할 것을 금하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이는 도덕적 상황과는 다르다. 도덕적 상황에서는 악이란 그 자체의 시정이 불가능하므로 그 존속을 그대로 두고 견디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순결에 영향을 주는 불경건의 잘못들만이 확실히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가라지가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의문점을 분명하게 해결하고 계신다.

그러나 다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사실이 있으니 마치 하나님께서 창조시에 선인과 마귀적인 악인의 씨를 뿌려놓으신 것으로 오해하는 사례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마니교도들이 그들의 허구적인 이원론을 그럴듯하게 꾸며대기 위하여 본문의 말씀을 오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기로는 모든 악은 마귀 안에 있는 것이든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든 간에 건전한 본성의 부패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창조시에 좋은 씨로 만드시지 않았고 단지 이 선택된 자들이 원죄의 감염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 영의 은혜로 중생시키실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귀가 악한 사람들을 창조한 것이 아니며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타락시키고 순결한 씨앗을 손상하는 다른 씨를 주님의 밭에다 뿌리고 있을 뿐이다.


존 칼빈의 성경주석 공관복음 I.II 519~520p에서 발췌  
출처: http://blog.daum.net/7gnak/15721495

 

타작마당은 세상이 아니고 교회다 / [칼빈주석] 공관복음 I.II  198~200p에서 발췌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마태복음 3:12)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앞 문장에서 요한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야기함으로써 유대인들로 하여금 거듭나도록 촉구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심판을 말함으로써 조롱자들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고 있다. 그것은 많은 위선자들이 자기들에게 제시된 그리스도의 은혜를 항상 거만스럽게 배척하는 만큼 그들 앞에 기다리는 형벌을 제시해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요한은 엄한 심판으로서의 그리스도와 불신자를 비교해서 묘사하고 있다.

위선자들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아무 탈없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그들이 무감각에서 일깨워지고 구원의 주(主)로 조롱했던 바로 그 분이 보복자로 등장하는 날,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이 가르침을 우리도 역시 마음에 새겨야 하겠다. 그리고 요한은 틀림없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을 가지고 성취하실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러기에 복음 전파를 가리켜 '키'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뒤흔들어 놓기 전에는 온 세상이 뒤범벅인 상태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각자는 자신의 쾌락을 추구하고 있으며, 선과 악이 뒤범벅이 되어 있고, 사실상 쭉정이로 가득차 있음으로써 그들은 쾌락에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을 가지고 현장에 나타나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시험하고 하나님의 법정으로 소환하는 날, 온 마당에 가득찼던 쭉정이는 이 키의 바람에 날려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복음이 각 개인에게서 쭉정이를 제거하지만, 요한은 여기서 많은 쭉정이를 버림 받은 자에게, 신실한 자를 알곡에 비유하고 있다.

 

여기서 타작 마당은(어떤 사람들 생각대로) 세상이 아니고 교회다. 이것은 요한의 말이 누구를 상대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명백하다. 유대인들이 자기들만 교회라는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자랑하고 있기 때문에, 요한은 그들의 어리석은 교만을 들어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교회에 속하게 되는 것은 잠시 동안 뿐이고 쭉정이가 타작 마당에서 없어지듯 곧 날려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잠시 온갖 종류의 쓰레기와 무용지물로 질식하고 있지만 곧 복음의 강풍으로 제거될 당시에 타락한 교회 상태를 공격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 속에 쭉정이 밖에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쭉정이와 알곡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선택받은 자들은 알곡이 되기 때문에 쭉정이와는 상관없이 곧 곡간으로 거둬들여질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이 정화작업을 시작하였으며 날마다 그 결산을 보고 계시지만, 전체 결과는 마지막 날에 가서야 완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우리들에게 이 최후의 순간을 지적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신실한 자들은 오늘날은 소망을 통해 하나님의 곡간에 들어가며, 마지막 날에 가서는 실제로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악인들은 자기들의 죄책 속에서 저 마지막 날 실제로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지만, 악인들은 자기들의 죄책 속에서 저 마지막 날 실제로 체험할 그 불의의 열기를 현재 의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악인들이 심판 후에 받을 고통으로서의 꺼지지 않는 불에 대해서 많은 사람이 갑론을박하지만, 여러 성경 귀절을 종합해 볼 때 이것은 은유적 표현이라고 결론 지을 수 있다. 그들의 주장대로 이것이 실제로 물질적인 불이라면 이사야 30장33절에 나오는 유황과 사름도 물질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불은 벌레와 똑같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벌레'라는 단어가 은유적 표현으로 사용되며 불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는 데는 일반적으로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괴퍅한 사람들이 쓸데 없이 고민하는 온갖 억측같은 것은 뒤로 제쳐놓자. 이 여러가지 표현은, 우리의 단순한 마음이 파악하는 대로라면, 오늘날 인간의 이해력과 표현력을 초월하는 그러한 무서운 고통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칼빈 주석 공관복음 I.II  198~200p에서 발췌

출처: 생명나무 쉼터



기독교강요 제5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1-5) / 존 칼빈

  제5장 보속설에 첨부된 면죄부와 연옥
 
(면죄부의 교리는 오류이며 그 영향은 유해하다. 1-5)
1. 로마 교회의 면죄부와 그 해독
그런데 이 보속의 교리에서 면죄부(또는 속죄부, Indulgences)가 생겨났다. 우리의 논적들은 보속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능력이 부족한 것을 면죄부가 보충하는 듯이 말한다. 그리고 광적인 극단으로 가서, 면죄부는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의 공로의 분배라고 정의하며, 교황이 교서에 의해서 그 공로를 분배한다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토론의 상대로 삼는 것보다 정신병 치료제로 치료하는 것이 좋겠다.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오류는 논박하려고 애쓸 가치가 없다. 그것은 이미 많은 쇠망치의 공격을 받아 저절로 낡아가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태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간단한 논박이 유익할 것이므로 나는 그냥 생략하지 않겠다.
면죄부가 이렇게까지 오랫동안 공격을 받지 않았으며, 무제한의 방자와 난무를 감행하면서도 이렇게 오랫동안 심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얼마나 짙은 오류의 암흑 속에 빠져 있었는가를 잘 증명한다. 사람들은 교황과 그 교사 전달자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자기들을 우롱하는 것과 자기들의 영혼의 구원을 이익이 많은 장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과 구원의 값을 돈 몇 푼으로 계산하는 것과 값없이 주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았다. 이런 협잡으로 그들은 예물을 빼앗기며, 빼앗긴 것은 매춘부들과 포주들과 난취 난무에 허비되는것을 보았다. 그들은 또 면죄부의 최대 선전가들이 자기들을 가장 경멸하는 것을 보았다. 이 괴물은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소란하고 음탕하게 돌아다니며 그칠 줄을 몰랐고 매일 새로운 납을 내놓고, 새로운 돈을 가져갔다. 그래도 그들은 최고의 경의를 표하여 면죄부를 받으며, 경건한 모양을 가진 사기인 줄 알면서도 속는 사람들에게 다소의 유익을 줄 것으로 생각해서 그 앞에 경배하였다. 드디어 세상이 조금 지혜롭게 되려는 용기를 내게 되자, 면죄부는 냉각하며 점점 열기가 식어가고 있으니 결국 완전히 소멸하고 말 것이다.
 
2. 면죄부는 성경에 배치된다
면죄부 상인들이 우리를 속이기 위해서 지금까지 비루한 간객과 기만 수단을 썼고 탐욕과 도둑질을 자행한 것을 지금 많은 사람들이 간과했지만, 이 불경한 죄악의 근원 자체는 아직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면죄부의 성격뿐 아니라, 그 정체를 깨끗이 드러내 보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논적들은 그리스도와 거룩한 성도들과 순교자들의 공로를 "교회의 보고"라고 부른다. 내가 이미 시사한 바와 같이, 그들은 이 창고의 보관권을 로마 주교에게 위임하였으며, 로마 주교가 이 심히 위대한 혜택의 분배를 주관하여, 직접 분배하기도 하며 분배 사업을 타인에게 위임하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완전한 면죄부와 일정한 연한의 면죄부는 교황이 발부하며, 백일간의 면죄부는 추기경들이, 그리고 사십일 간의 면죄부는 주교들이 발부한다고 한다.
올바르게 말한다면, 이런 짓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분리시켜 구원의 진정한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악마적 간계에 불과하다. 죄의 용서와 화해와 보속을 위해서 그리스도의 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보다 더 그리스도의 피를 더럽히는 짓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주장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가 고갈되어 없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보충해야 된다는 듯한 생각이다. 베드로는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들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라고 증거한다(행 10:43). 면죄부는 베드로와 바울과 순교자들을 통해서 사죄를 부여한다. 요한은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라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를 씻어버린다고 한다. 바울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도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5:21)고 말했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가 죄에 대한 보속이 된다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의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만이 십자가에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다고 선언하며 증거한다(고전 1:13). 면죄부는 "바울과 기타 사람들이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고 선언한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행 20:28)라고 하였다. 면죄부는 순교자들의 피도 교회를 사는 값이 되었다고 한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면죄부는 거룩하게 함은 순교자들에 의해 완성하며, 그렇지 않으면 불충분하다고 선언한다. 요한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계 7:14)고 말했다. 그러나 면죄부는, 성자들의 피로 옷을 씻는다고 가르친다.
 
3. 권위자들은 면죄부와 순교자들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다
로마 주교 레오는 팔레스틴 교인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아주 분명한 말로 이 모독 행위를 공격한다. "여러 성도들의 죽음을 주께서는 귀중하게 보시지만(시 116:15), 한 무죄한 사람이 살해된 것이 세상을 위한 화목의 제물은 되지 않았습니다. 의인들은 면류관을 받는 것이고 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용기는 인내의 모범을 보였으나, 의의 선물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의 죽음을 죽은 것이며, 그 죽음은 다른 사람의 빚을 갚는 것이 아닙니다. 주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시며,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죽고 매장되고 부활하였습니다." 그는 이 생각을 기억할 가치가 있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도 반복하였다.
확실히 그 불경한 교리를 부수기 위해서 이보다 더 분명한 발언은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어거스틴도 그에 못지 않게 적절한 말로 같은 판단을 내린다. "우리는 형제로서 다른 형제들을 위해서 죽지만 순교자가 피를 흘리는 것은 죄의 용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하셨다. 그가 우리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우리도 그를 모방하라는 것이 아니고 은혜를 기뻐하라는 뜻이다." 그는 같은 생각을 다른 곳에서도 표명하였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는 우리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인자가 되셨다. 그와 같이 내놓을 만한 선함이 없고 은총을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그를 통해서 은혜를 얻도록 하기 위하여 죄 없는 그가 홀로 우리를 위하여 벌을 받으셨다." 그들의 모든 교리가 무서운 소독적인 생각과 말을 꿰매어 붙인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이것은 가장 놀라온 모독이다. 다음에 몇 가지 생각을 열거할 것인데 이것이 그들의 판단인지 또는 아닌지를 알아보자. 그 순교자들은 죽음으로써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것 이상의 것을 하나님께 드렸으며 그로 인하여 필요 이상의 공로를 세웠다. 그리고 그들의 공로는 너무 많아서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넘쳐흐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은혜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그들은 자기의 피를 그리스도의 피와 섞었다. 그리고 죄의 용서와 배상과 보속을 위하여 이 섞인 피에서 교회의 보고가 구성되었다. 그리고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한 말은 이런 뜻으로 이해해야 된다.
이런 입장은 그리스도에게 이름만을 남기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다른 성자들과 구별할 수 없는 일개의 작은 성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리스도만이 선포되며 제시되며 그 이름을 부를 가치가 있는 분이었다. 죄의 용서와 화목과 성화를 얻는 문제가 있을 때에는 그만이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라고 하는지 들어 보라. 순교자들이 흘린 피가 무익하게 되지 않도록, 그 피를 교회의 공동 재산에 기증하라고 한다. 이것은 사실인가? 그들이 죽음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은 무익한 일이었는가? 그들의 피로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하며, 현세 생활을 멸시함으로써 더 좋은 생명을 구한다는 것을 증거한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들의 굳센 지조로 교회의 믿음을 강화하며 원수들의 고집을 깨뜨린 것이 무익하였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만이 화목의 제물이며, 그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그만이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회생되셨다고 하면서 순교자들의 죽음에 아무 결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베드로와 바울은 평안히 죽었더라도 승리의 면류관을 받았으리라고 그들은 말한다.
사도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싸웠으므로 그들의 희생에 아무 결실도 없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부합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선물의 분량에 따라 그의 종들을 통해서 자기의 영광을 더하실 줄을 모르신다고 하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그들의 승리로 인해서 교회에 전투열이 일어날 때 교회는 전체적으로 큰 혜택을 입는다.
 
4. 반대자들의 성경 해석을 반박함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육체에 채운다(골 1 : 24)고한 말을 그들은 얼마나 사악하게 곡해하는가! 바울은 그 남은 것 또는 보충되는 것을 구속, 보속, 속죄와 관련시키지 않고, 그리스도의 지체들이- 즉 모든 신자들이-지상 생활을 계속하는 동안 단련을 받기 위하여 당하는 고통과 관련시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아직 남아 있다고 말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으로 한 번 당하신 고난을 지금은 그의 지체들을 통해서 매일 당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받는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인정하셔서, 우리에게 이 특별한 영예를 주신다. 그런데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라는 말을 첨가한다. 이것은 교회의 구속이나 화해나 보속을 위해서라는 뜻이 아니고, 교회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서라는 뜻이다. 다른 곳에서 바울은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얻게 하려고, 자기는 모든 것을 참는다고 말한다(딤후 2:10). 그는 고린도 교회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가 받는 모든 고난을 참는 것은 그들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라고 하였다(고후 1:6).
그는 즉시 자기가 한 일의 뜻을 설명하여, 자기가 교회의 일꾼이 된것은 구속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고 한다(골 1:25, 롬 15:19).
만일 나의 반대자들이 다른 해석자를 요구한다면 어거스틴의 말을 들어 보라. "그리스도의 고난은 머리이신 점에서는 그리스도 한 분에게만 있으며, 몸 전체로서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있다." 따라서 한 지체인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이 말을 듣는 분이 누구이든 간에-그리스도의 한 지체라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닌 사람들에게서 당신이 받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사도들이 교회를 위해서 당한 고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내게는 여러분에게 가는 문이십니다"(요 10:7). 이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피로 준비된 그의 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값을 인정하십시오. 나는 그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전파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목숨을 내놓으신 것같이, 우리도 우리의 형제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이것은 평화를 수립하며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라고 첨부한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한 말이다. 바울이 완전하고 충실한 의와 구원과 생명을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결함이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관념은 버려야 한다. 또는 그가 무엇을 첨가하려고 했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바울은 분명하고 웅장한 말로 그리스도께서 풍성한 은혜를 풍부하게 부어주셨기 때문에, 그 은혜가 죄의 세력 전체를 훨씬 능가했다고 전하였다(롬 5:15). 베드로가 웅적으로 증언하듯이(행 15:11), 모든 성자들도 자신의 생활이나 죽음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이 은혜에 의해서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어떤 성자의 가치를 하나님의 은혜 이외에 어떤 다른 것에 의존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그의 그리스도를 경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괴한 오류는 정체가 폭로되면 곧 정복되는 것인데, 나는 무엇 때문에 아직도 모호한 점이 있는 듯이 여기서 더 시간을 보낼 것인가?
 
5.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통일성과 포괄적 활동을 방해한다
나는 이런 가증한 것들은 무시하고 이제 묻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복음의 말씀에 의해서 널리 전파하라는 것이 주의 뜻이었는데, 그 은혜를 납과 양피지에 봉인하도록 교황에게 가르친 것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복음과 면죄부 이 둘 중의 하나가 거짓인 것은 분명하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복음을 통해서 하늘의 모든 풍성한 은혜와 그리스도의 모든 공로와 그의 모든 의와 지혜와 은총과 함께 하나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제공된다고 증언한다.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사신으로서 행동하도록 화해의 말씀이 사역자들에게 위탁되었는데, 이를테면 그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호소하신다고 바울은 말한다(고후 5:18-21)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0-21). 그리고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친교의 가치를 안다. 이 친교는 바울이 증언하는 것과 같이, 우리가 받아 즐기도록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제공된다. 이와 반대로 면죄부는 교황의 창고에서 소량의 은혜를 끌어내선 납과 양피지와 일정한 장소에 붙이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은혜를 떼어버린다.
이 악폐의 근원을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이전에는 참회하는 사람들에게 명령된 보속 의무가 견딜 수 없으리만큼 엄격했기 때문인 듯하다. 참회자들은 그들에게 부가된 무거운 고행에 눌려 도저히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교회가 그것을 다소 완화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런 사람들에게 허락하는 용서를 "면죄"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들이 보속을 하나님과 관련시키고 그것을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자신을 구속하기 위한 상쇄 수단이라고 했을 때에, 그들은 면죄 구속 수단으로 변형시켜, 이것이 우리가 받아야 할 벌에서 우리를 석방시킨다고 했다. 그들은 이렇게 파렴치한 생각으로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짓이라고 한 저 훼방죄를 저지른 것이다.

 

출처: 포도나무선교회/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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