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적인 기독교 신앙으로는 충분치 않다./존 칼빈

단지 교인에 지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신자라고 불리우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어떻게 영화롭게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자.
복음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을 받아들인 사람만이 참으로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눌 수 있을 뿐이다.
사도바울은 “거짓된 정욕으로 부패한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 는 교훈을 배우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자가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피상적인 지식은 복음에 대해서 아무리 유창하고도 수다스럽게 떠든다 해도 마침내 거짓되고 위험스러운 위선적인 신앙임이 드러나고야 만다.

복음은 혀의 교리가 아니라 생활의 교리이다.
그것은 이성과 기억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오직 복음이전 영혼에 자리 잡고 마음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야 비로소 온전히 깨달을 수 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을 그침으로써 증명해 보이도록 하자.
그리고 그들로 그들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 무가치한 제자들이 아님을 스스로 보이도록 하라.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지식에 첫 번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 구원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우리의 태도에 깊이 스며 들지 못하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어 주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백해무익할 것이다.

철학자들은 인생의 요령을 체득했다고 주장하나 실상은 궤변가에 지나지 않는 자들을 바르게 정죄하고 그들의 단체로부터 불명예스럽게 추방한다. 훨씬 정당한 이유로 그리스도인은 입술로만 복음을 외치고 그들의 마음은 텅텅 빈자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여겨야만 한다. 참된 신자들의 확신과 애정과 풍성한 생명력과 비교할 때 철학자들의 충고는 냉냉하며 생명력을 이미 상실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개혁주의 마을

그리스도 안의 형제간의 화합

존 칼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우리가 우리 이웃과 더불어 화합하고 가족적인 사랑을 유지할 때 살인을 금하는 율법의 가르침(출20:13)에 순종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더 강하게 각인시키시기 위해 우리가 서로 불화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종교적 의식조차 불쾌하게 여겨 받아들이지 않으신다고 선언하십니다. 주님이 자기 형제를 마음 상하게 한 형제에게 예물을 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해 하라고 명하실 때 그 의미는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이웃과의 불편한 관계가 지속되는 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가 사람들의 분노로 인해 오염되고 더럽혀진다면,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 사이의 상호 화합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다름아닌 바로 그와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형제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고 나서 거만하게 경멸적인 태도로 형제를 대하는 이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거짓되고 공허한 신앙고백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신령한 예배의 외적인 실천은 경건의 참된 표현이라기보다는 외식입니다. 할 수 있는 한 형제와 화목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께 바치는 어떤 것이든 다 더럽혀집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그 누구라도 서로에게 형제 됨을 보여 주지 않는 사람을 자신의 자녀로 받아주고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의 대상은 형제간에 상처를 준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서로 화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 한 가지 예를 통해 형제들 사이의 화합을 하나님이 얼마나 귀중하게 여기시는지를 지적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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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상)>(완결판, 크리스챤다이제스트)를 풀어서 요약한 것입니다.


(1)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경건의 관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경건의 토대가 됩니다. 반대로, 신앙이나 경건이 없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식’이라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구속주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니라 아담이 타락하지 않았을 경우 자연 질서를 통해 깨닫게 될 지식을 의미합니다. [주: 그러므로 여기서는 구속주 그리스도가 아닌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경건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타락 이후 인류는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구원의 주인으로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창조주이자 선하신 분으로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주로 아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자연 속에서나 성경 속에서 하나님은 먼저 자신을 창조주로 보여주신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 구속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먼저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단순히 어렴풋하게 어떤 신적 절대자가 존재한다고 아는 것과는 다른 지식입니다. 그것은 그분이 모든 선의 유일한 근원이시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진리, 의, 선 등의 모든 것이 근원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만 이런 것들을 구하고 그분께만 감사를 드리게 하는 지식입니다.

‘경건’이란 “하나님이 베푸시는 온갖 유익들을 아는 데서 생겨나는 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를 향한 사랑이 하나로 결합된 상태”(46쪽)를 말합니다. [주: 즉 칼빈에게 ‘경건’은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정서가 함께 존재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모든 선의 궁극적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기꺼이 하나님께 복종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만 완전한 행복을 구할 수 있다는 지식이 경건과 복종, 헌신의 기초가 됩니다.


(2)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신뢰와 경외로 이어짐

에피쿠로스(Epicurus)와 같은 철학자들은 우리 자신과는 무관한 존재로서의 신에 대해 질문하고 사색합니다. 하지만 그 신이 우리와 무관하다면 그런 신을 알고 고백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반드시 우리 자신과 깊이 관계가 있는 지식이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경외가 생겨나게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안내하고 가르쳐서 하나님께만 선을 구하고 받은 모든 선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돌리게 합니다. 셋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지배하는 법이 되게 하여 우리 삶을 하나님께 드리게 합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자기 뜻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지 않고 하나님 자신 그대로를 붙잡으려 하며 그분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께 자신을 모두 맡기며 그로 인해 평안을 누립니다. 하나님을 의로우신 재판장으로 보며 두려워하지만, 구속의 길이 전혀 없는 것처럼 지나치게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악인을 벌하는 분으로 보는 동시에 또한 경건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분으로 바라보는 것”(48쪽)입니다. 경건한 자가 죄를 범하지 않으려 하는 동기는 단순히 지옥에 대한 형벌을 피하기 위함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높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지옥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거스른다는 것만으로도 끔찍스러워 견딜 수 없는 심정일 것”(48쪽)입니다.

하지만 예식이 화려한 곳일수록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하는 사람을 찾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출처 : 크리에티브커먼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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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보혈의피| 원글보기

칼빈의 신학 근원들

 

지난 2011년 10월 30일(주일)에 열린교회 성도들을 대상으로 전달된 Richard Muller 교수님의 열린교회 특강 전문이다.

1 칼빈의 초기 저작들: 1532-1538

근원들 혹은 출발점을 규명하는 것은 언제나 중요한 일이면서 다소 난해한 일이기도 하다. 칼빈의 신학적 발전에 있어서 근원에 대한 문제는 그의 일반학문, 언어들 및 철학에 대한 교육 그리고 법학에 대한 심화된 연구라는 문헌으로 입증되는 근원들을 고려하고, ‘예기치 못한개혁주의 진영으로 전환하여 제네바 교회의 개혁을 위하여 막대한 노력을 기울이고 수다한 주석들과 설교들과 논문들 및 기독교 강요까지 서술하게 된 사실을 고려할 때에 대단히 흥미로운 분야라 하겠다. 칼빈의 신학 근원들은 특별한 관심을 유발한다.

칼빈이 회심한 시점에 대해서는,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칼빈 자신이 교황적 미신들(papal superstitions)’로 여겼던 것을 버리고 경건하고 배우고자 하는마음의 상태로 돌이키게 된 시점에 대하여는 지속적인 논쟁이 있었으며 다양한 해석들이 등장했다. 칼빈 자신의 설명과 베자(Beza) 및 콜라돈(Colladon)이 저술한 초기 전기들의 면밀한 숙독에 기초할 때 칼빈의 회심은 그가 빠리에서 학부를 공부하기 시작한 이후로 법률공부 끝마치기 전까지, 1529년과 1530년 사이 부르쥬(Bourges)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분명히 선호된다. 이러한 회심시기 추정은 세네카의 『관용론(De Clementia) 주석을 포함한 칼빈의 모든 초기 저작들이 회심 이후에 저술된 것이라는 중요한 결과를 산출하며 카톨릭을 떠난 그의 초기 신학의 재구성이 그의 모든 초기 저작들의 근본적인 테제, 즉 교황적인 미신에서 경건으로 그리고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태도로의 전환을 확립해 주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그 저작들을 중요한 소스로 간주하게 한다.

칼빈의 세네카 주석

칼빈은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1532 2월에는 공인된 변호사가 되었다. 세네카 주석이 출판된 것은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난 4월의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 주석은 그의 회심 이후에 처음으로 완성한 작품이며, 그것이 다루고 있는 핵심적인 주제가 그의 인문주의 훈련과 법학의 한 측면인 관용에 대한 그의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할 때에 회심 직후에 대한 그의 나중 설명에서 비록 다른 학문들에 대한 열정은 식었지만’ ‘그것들을 한꺼번에 내던진 것은 아니라는 그의 생각도 그 주석은 증거하고 있다. 그 주석의 주제인 관용, 특별히 백성들을 용서하고 아끼는 지혜로운 통치자의 성향인 관용은 한 인문주의 법조인의 직업세계 속으로 포섭될 수 있으며, 또한 주석에서 발견되는 종교적 함의들과 교회의 개혁에 가담한 프랑스 인문주의 학자들의 기소와 핍박이 고조되는 분위기를 고려해 보건대, 그 관용은 새롭게 종교개혁 운동에 가담한 젊은 프랑스 인문주의 학자의 개시적인 화두로 이해함이 좋을 것이다. 주제와 논조 면에서 세네카 주석 자체는 법학을 마감하는 칼빈 자신의 전환기를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칼빈 당시의 전기 작가들의 설명에 따른다면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브르쥬와 그 근처에 있는 리니에르 안에 있는 종교개혁 추종하는 무리에게 설교하고 가르치기 시작한 전환점도 예시하고 있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란 세네카의 신분과 텍스트에 대한 인문주의 주석의 특징에서 충분히 기대되는 것으로서, 칼빈의 글은 미신들과 설화들을 포함한 그리스-로마의 고전적인 문헌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최소한 칼빈이 사례들을 비교하는 방식으로 세네카의 글을 분석하고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고전 철학을 중요하게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보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칼빈은 자신이 세네카의 글 안에서 발견한 진리와 지혜를 수용하고 있다. 어떤 개념이 이방인적 근원을 가졌다고 해서 거부하는 일은 없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스토아적 이해와 기독교적 이해가 나란히 대비되는 경우들도 이따금씩 있었다. 고대 철학자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칼빈이 초기에 하나님과 우주 및 자연의 질서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진리들이 자연적 질서에 내장되어 있는 계시와 인간의 마음과 양심에 새겨져 있는 신의식 안에 있다고 한 이해와 일치한다.

게다가 우리가 칼빈의 회심 시기를 아마도 부르쥬에서 그가 세네카 주석을 저술하고 있었을 1529년과 1530년 사이로 잡는다면, 그 주석 안에는 회심에 대한 칼빈 자신의 진술들을 보여주는 일부 본문들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겠다. 특별히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자신을 대신관 통할하는 최고의 신관(pontifex maximus)으로 승급시킨 일에 대한 세네카의 설명을 주석하며, 칼빈은 세네카 안에서는 명확하게 발견되지 않는 논점, 즉 로마교회 주교들과 자기 시대의 종교개혁 옹호자들 사이에 문제시된 논점을 발전시킨다.

대주교는 주교단에 의해 선출되곤 하였다. 그러나 도미티우스(Domitius) 집정정치 하에서는 선거권이 백성에게 양도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사장의 직분은 최고 수준의 영광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주교들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그들이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권위를 가졌다는 미신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중독시킨 탓이다. 대주교는 주교들 중에서도 더 주목을 받고 두드러진 자였었다.

종교는 신들에게 영광을 돌리지만 미신은 그들에게 잘못을 행한다는 세네카의 언급을 설명하며, 칼빈은 퀸틸리안(Quintilian) 및 키케로(Cicero)의 유력한 논증을 덧붙이며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한다.

미신은 동정이 관용에 대하여 가지는 것과 동일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잔인함이 관용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성을 불경함이 종교에 대하여 동일하게 가지고 있음과 일반이다. 미신이 명예를 해치는 것처럼 동정도 그러하다. 퀴틸리안은 이렇게 말한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과 성실한 사람이 다른 것처럼 미신도 종교와 다르다.’ 키케로도 말한다.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조상들도 미신과 종교를 구분했다.’

칼빈의 회심은 그로 하여금 곧장 미신과 종교를 분리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어 성경 서문 (1534/35)

성경 전체에 대하여 라틴어로 쓰여진 서문과 불어로 신약의 서문처럼 쓰여진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칼빈이 가장 이른 시기에 출판한 신학적 글들이다. 1) 교황적인 미신에서 참된 경건으로 돌이킨 것과 2) 빠리에서 도망쳐 대학에서 전달된 니콜라스 콥(Nicholas Cop)의 종교개혁 강연을 들으러 간 경험과 3) 1534년 미사에 반대하는 벽보를 붙였다고 핍박을 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등에 너무도 분명하게 고무된 칼빈은 확고한 종교개혁 지지를 표명한다. 첫번째 서문은 칼빈이 고대 이방인의 풍요제에 비견되는 것으로서 로마 교황(지금은 로마교회 교황)’과 그 후손들이 자신들의 욕망과 신비를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되 동시에 일반 백성들을 실제로 성장시킬 수 있는 문헌들의 출판은 금하려는 수작들을 비난하고 있다. 두번째 서문에서 칼빈은 그리스도 언약을 더럽히고 은닉하고 부패시킨 자들을 논박했고 그들을 소경이 소경 인도하는 자들로 규정했고 이러한 사실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따라 생명과 구원에 이르는 길을 추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필요성도 역설했다.

1536년판  『기독교 강요』

칼빈 자신이 기술하고 있듯이 1536년판 『기독교 강요』는 대체로 교리문답 안에 포함되어 있는 믿음의 조항들, 율법, 사도신경, 주기도문, 성례, 기독인의 자유, 교회의 권세 및 국가통치 조항에 대하여 가벼운혹은 심지어 피상적인방식으로 제시한 간결한 편람이다. 이 책은 간결하나 심지어 그런 형태 속에서도 저자의 신중한 약속과 당시 종교 개혁자들이 강조했던 기본적인 믿음의 조항들을 잘 간파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종교개혁 운동의 경과를 도표처럼 명료하게 보여줄 정도는 아니지만 1536년판 『기독교 강요』는 초기에 제네바의 교회개혁 가동시킨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의 확신, 즉 젊은 칼빈이 제네바의 교회개혁 운동을 위해 발굴해야 하고 협력해야 할 가치가 있는 동료요 교리 편찬자요 조직가란 그의 확신을 종결시킬 정도로 충분한 것이었다.

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몇 가지 특별한 점들을 다음과 같이 언급할 수 있겠다. 첫째, 칼빈은 책의 서문을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에게 드리는 헌사로 대신한다. 그 헌사에서 칼빈은 재세례파 비방을 반박하고 프랑스 종교 개혁자들의 교회를 위하는 성향과 평화적인 의도를 설파했고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와의 일치성을 근거로 종교개혁 운동의 정통성과 적법성을 논증했다.

둘째, 1536년판 『기독교 강요』가 길이에 있어서는 루터의 대요리 문답에 가깝지만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유력한 모델은 루터의 소요리 문답이다. 특별히 기독인의 자유, 교회의 권세, 국가통치 주제들은 루터가 소요리 문답에 부록으로 첨가하고 대요리 문답에선 사라진 가정의 의무들에 대한 도표(tabula oeconomica)’를 반영하고 있다. 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교리문답 구조는 루터의 소요리 문답의 구조와 유사하며, 율법과 믿음과 칭의에 대한 칼빈의 교리들은 쯔빙글리 교리보다 루터 가르침의 흔적을 보여준다. 성례론에 대한 칼빈의 접근법도 비록 루터 자신보다 멜랑톤 입장에서 도출된 것이라 할지라도 강한 루터적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칼빈의 저작과 루터의 저작 사이의 관계성 때문인지, 1536년판 『기독교 강요』는 율법(1, 십계명)에서 믿음과 복음과 교회로 (2, 사도신경) 그리고 기도와 성례로(3-5), 나아가 교회와 국가 안에서의 기독교적 삶(6)으로 전개되는 모델을 가지고 기초적인 기독교 교리를 제시한다. 율법과 믿음과 복음과 교회와 국가라는 기본적인 순서는 『기독교 강요』의 이어지는 모든 판본들 안에 그대로 보존되는 구조이다. 칼빈은 5가지 거짓 성례들을 비난하는 대목에서 루터의 교리문답, 아우그스부르그 고백서멜랑톤의 초기 『신학통론(Loci communes)를 현저하게 극복한다. 그 대목에서 칼빈은 두 개의 진정한 성례들을 고수하고 나머지 견진성사 및 혼인과 참회는 배제하는 입장을 보인 『참종교와 거짓종교 해설(De vera et falsa religione, 1525)에서 보인 쯔빙글리 모델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다. 하지만 칼빈의 참성례와 거짓성례 구분은 성례의 실행에 있어서 쯔빙글리 입장보다 훨씬 변증적인 입장을 보여준다. 『기독교 강요』의 성례론 부분은 교황적인 미신을 제거하고 경건에 이르는 뚜렷한 경로를 제시하려는 칼빈의 바램에 의존하고 있으며, 파리대학 재학시 발발하고 회심 이후에는 더 격렬해진 프랑스 안에서 이루어진 종교개혁 시도들의 억압에 대한 반발을 증거하는 의분에 찬 변론적 어조로 진술된다.

초기의 교리문답 및 신앙고백 (1537-1538)

칼빈의 사상에 대한 연구의 초점은 주로 『기독교 강요』에 맞추어져 있고, 『기독교 강요』의 최종판이 근대 초기 개혁주의 신학의 발전에 대하여 가지는 중요성 때문에 칼빈의 신학이 형성되던 시기와 밀접하게 결부된 다른 문헌들에 대한 면밀한 탐구에는 소홀함을 보여 왔다. 그러나 신앙을 가르치는 기초적인 모델을 제공하는1536년판 『기독교 강요』에 견줄 수 있는 다른 문헌도 있다. 보다 유명한 『기독교 강요』 외에도 비록 덜 알려지긴 했으나 칼빈의 초기 사상의 중요한 지표를 제공하는 칼빈의 초기 교리문답,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되는 신앙의 가르침과 고백(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y, dont on use en l’Eglise de Geneve, 1537)1538년에 출판된 그것의 라틴어 번역본(Catechismus seu 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 ecclesiae Genevensis)이 있다. 『신앙의 가르침』 부분은 칼빈이 전적으로 저술한 것으로서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한 확대된 해설이며 그 교리문답 뒤에 덧붙여진 『신앙고백』 부분은 아마도 칼빈과 파렐의 합작임에 분명하다.

칼빈의 교리문답 서론은 그의 근본적인 종교개혁 관심사와 회심을 거듭 언급하고 있다. ‘교황주의 및 그것의 미신적인 요소들에 대한 협오가 제거되고 그 도시의 종교복음의 순수성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교리문답 및 첨부된 신앙고백 목적은 믿음을 견고히 구축하고 공적으로 고백하는 방식으로 제네바의 종교개혁 토대를 확고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논지는 신앙 고백서에 분명하게 반영하되 성만찬의 개혁파적 실행은 교황주의 미사끔찍한 불경건 및 미신적 요소들과 대조를 이루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하고 무용한 것으로 느끼게 만든 말씀의 로마 카톨릭적 남용과도 대조를 이루게 하였다. 그 고백서 안에는 미신이 제거되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경건이 고양된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칼빈의 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6개의 장들은 특정한 교리문답 모델에 의존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인 것으로 칼빈의 1537 1538년 교리문답은 33개의 장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율법으로 시작하지 않고 종교와 하나님 지식에 대한 서론적인 논의로 시작하여 인간의 본성, 자유선택, , 삶으로의 회복으로 논의가 전개되며 이 모든 주제들은 율법에 대한 논의보다 선행하고 있다. 율법을 논하고 사도신경 논하기 이전에 칼빈은 믿음, 예정, 칭의, 성화, 회심, 중생, 선행 등에 관한 논의를 제공하되 이 논의들은 1536년판 『기독교 강요』나 루터의 교리문답 안에서는 없었던 것들이다. 교리문답 안에서 거론되는 주요 주제들의 절반이 1536년판 『기독교 강요』에는 없었던 것들이며 1537-1538년에 처음으로 칼빈에 의해 충실한 논의로 제시된 것이었다. 1537-1538년에 저술된 두 문헌들의 논의 흐름을 유지한 채 두 문헌을 결합하면 우리는 1539년과 1559년 사이에 증보된 칼빈의 원숙한 『기독교 강요』의 주제들을 거의 동일한 순서대로 얻게 될 것이다. 『기독교 강요』의 1536년 초판과 그 이듬해에 나온 교리문답 두 문헌을 일괄해서 생각할 때 그것들은 칼빈 신학의 개요를 간략한 형태로 제공하고 있으며 비록 이후에 추가될 정밀한 부분들은 생략되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 사상의 범위 혹은 윤곽을 묘사하고 있다.

 


2. 칼빈의 초기 신학에 있어서의 이슈들과 테제들

종교의 중요성과 하나님을 아는 문제

『기독교 강요』 최종판에 종교와 하나님 지식으로 곧장 돌입하는 대목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칼빈은 1537년 교리문답을 아무리 잔인하고 야만적인 자라도 종교심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없다는 선언으로 시작한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칼빈이 고전학 교육을 받았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즉 그 언어는 키케로의 논문 『신들의 본성에 대하여(De natura deorum, 45 BC)를 투영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창조의 고유한 목적이 그 창조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위대함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자인 하나님 사이의 바른 관계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경배하는 관계라는 논의로 이동한다. 이후 작품에서 주로 언급되는 주요 주제들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칼빈은 너무도 불경해서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 지식을 부러 잊으려 하는 자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인생의 덧없는 본질을 깨달아야 하고 불멸에 대한 깊은 사색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사람들은 종교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각인된 하나님 지식, 즉 그들로 하여금 세상적인 가치에서 천상적인 것으로 주의를 돌리게 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

칼빈이 첫장에서 예리하게 언급하고 지나간 불경건 혹은 무종교성 문제가 현저한 주목을 받으며 등장하게 된다. 교리문답 첫장에서 칼빈의 관심을 장악했던 것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각인된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종교를 위해 태어난 것이다는 논거는 참종교와 거짓종교구분으로 규정되는 인간의 문제로 곧장 연결된다. 모든 사람들은 종교의 필요성과 종교가 없는 삶의 극단적인 비참을 인정하고 있다. 누구도 자신을 하나님과 분리하려 하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경건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신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것을 전혀 무익한 방법으로 달래려고 노력하며 동시에 죄악된 삶으로 이끌린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계신 그대로의 무한한 위대함을 따라 경배하지 않고 자신에게 맞추어진 다른 하나님을 만든다. 그들은 하나님의 그릇된 형상을 숭배하고 부정한 두려움 속에 스스로가 상실될 것을 발견하며 신적인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주님으로 두려워 할 줄 알고 경외하며동시에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한다. 이것은 인간에 의해 고안된 경건이나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를 어떠한 자라고 보이신 대로 알며 신자에게 자신을 제시하신 대로 아는 하나님 지식에 의존하고 있다. 칼빈이 제시하다(present)혹은 제공하다(exhibit)단어를 사용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본성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이 선포하신 것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제시하고 제공하신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정확히 이런 의미로 사용된 제공하다단어는 칼빈의 초기 성찬론 신학 안에서도 발견된다. 거기에서 그 단어는 그리스도 예수가 성찬에 임재하는 방식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그것은 단순히 보인다는 것 혹은 전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제시하는 것 혹은 제공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는 특별히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받을 수 있도록 그 무언가를 그 사람 앞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 말씀에 제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약속은 유효한 것으로서 신자들 앞에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

칼빈을 유명론 지지자로 규정하는 자들 혹은 그의 신학을 20세기의 신 정통주의 렌즈로 이해하는 자들이 직면하는 주요 장애물들 중의 하나는 칼빈이 처음부터 크게 강조하며 그의 신학에 등장한 하나님 지식, 특별히 그가 하나님을 창조자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서신,’ 1536년판 『기독교 강요』 1537년 『교리문답』 같은 칼빈의 초기 저작에 그러한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나타나는 것은 칼빈에게 있어서 그 지식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칼빈의 사상에 대한 신 정통주의 학자들의 패배를 가리키는1536년판 『기독교 강요』의 주제별 색인은 칼빈의 율법연구 도입부에 있는 주제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인간의 본성을 아는 지식, 그리고 자연법(lex naturalis) 등임을 보여준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안에서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인 지식과 관련된 긍정적인 설명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두신 자연법을 그 지식의 한 국면으로 특화시켜 설명하고 있다.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아는가란 주제를 다루는 교리문답적 논의를 시작할 때 알버트 대제(Albert the Great)가 언급하고 중세후기 신학에서 두루 회자된 하나님은 완전히 이해될 수 없고 다만 포착될 뿐이라는 경구를 떠올리게 하는 신적인 초월성 문제를 가지고 시작한다. ‘하나님의 위엄은 그 자체로 인간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하여 그 지성에 의해서 완전히 이해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위엄을 탐구하는 것보다 그 위엄의 탁월함을 찬미하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출처 문제가 제기된다. 만약 하나님이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면 인간은 어디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숭고한 위엄을 찬미할 수 있는가? 칼빈의 답변은 바로 다음 문장에서 발견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의 투영이라 하였고 주님에 대하여 우리가 다른 방식으론 알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탐구하고 그 발자취를 추적해야 한다.’

칼빈은 강조하여 말하기를, 자연의 질서에 대한 이런 경건한 탐구는 신자들의 마음을 신적인 것들에서 계속 구별하는 헛되고 무의미한 사색의 문제가 아니라 경건에 있어서 중차대한 의미를 가진 연습이라 하였다. 자연적 질서에 대한 깊은 사유는 신자에게 완전한 경건을 일으키며 육성하며 강화한다.’ 요약하면, 그런 사유는 주님에 대한 신앙과 올바른 경외에 유익하다. 칼빈은 자연적 질서에 대한 숙려가 신자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며 신적인 속성들에 대한 묵상은 어떻게 참된 경건에 도움을 주는지를 언급하며 논지를 확장한다.

우리는 이 물질적 우주에서 모든 것들의 토대와 근원이 산출되는 우리 하나님의 불멸을 관조하며, 땅의 물질을 창조하고 지금도 그것을 보존하는 그의 능력을 관조하며, 다양성과 혼돈을 하나의 정연한 질서 속으로 모으시고 영원토록 그것을 통치하는 그의 지혜를 관조하며, 그 자체가 창조된 사물과 그 사물이 지속되는 원인이 되는 그의 선하심을 관조하며, 경이로운 방식으로 경건한 자를 지키시고 악한 자에게 보응함을 통하여 보이시는 그의 의로움을 관조하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시고 우리의 불의함을 놀라운 온유로 덮으시는 그의 자비를 관조한다. 우리의 우둔함이 그렇게 눈부신 빛으로 말미암아 더 캄캄해 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우주에서 그것이 제공하는 만큼 하나님이 무엇과 같은 분인지를 풍성하게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과 패역함 때문에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은 일관되게 오독되고 곡해되어 왔으되 심지어 하나님의 지혜가 분명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천상적인 지혜 전체를 뒤집는 극단까지 보인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그의 행하신 일들로 말미암아 올바르게 묘사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되 인간의 패역한 기준을 따라서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규범을 따라서 돌아가야 한다. 성경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모든 삶과 의로움과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과 자비의 영원하고 궁극적인 출처 혹은 원천(fons)임을 배운다.

죄에서 구원에 이르는 문제를 논외로 접어둔 채,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진리의 두 가지 출처를 밝히고 있다. 죄인된 인간들이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배워야 하지만 그들의 완고함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첫번째 출처로서 세계의 질서이고, 둘번째 출처는 그 동일한 진리들을 권위 있게 가르치는 성경이다. 자연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진리를 재껴두지 않으면서 칼빈은 추가하여 말하기를, ‘이 모든 것들이 하늘과 땅 도처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고 할지라도그것들의 궁극적인 중요성은 오직 우리가 스스로 낮아져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과 지혜와 능력을 나타내고 우리를 향하여 당신의 의로움과 선하심과 자비 행하시는 방식을 상고할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칼빈은 성경적 계시와 자연 안에서의 하나님 계시가 대립되는 것처럼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죄 문제에도 불구하고 자연적인 계시의 중요성과 유용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연적 계시와 성경적 계시를 나란히 두었으며 그들의 관계성을 강조했고 죄문제와 성경적 계시의 필연성을 알았으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에 대한 진리가 자연적 질서에 나타나 있다는 지점으로 돌아오고 그리고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내적인 수용과 묵상이 없다면 성경적 진리가 비록 자연적 계시의 보조를 받는다고 할지라도 무용할 것임을 주장했다.

죄 문제에도 불구하고 자연의 계시적인 광채를 포함한 계시의 두 출처의 이러한 이해는 칼빈의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다. 거기에서 칼빈은 타락 이후에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을 떠남에 대해 언급하고 나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 속에서 자신의 말씀을 바꾸심이 없이인간에게 신령한 것들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그를 추구하고 느끼고 찾고 알아서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돌리도록 하셨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계시는 모든 곳에서와 모든 것에서얻으며 너무도 명백하게 주어져서 어떠한 사람도 무지한 척 할 수 없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과 지혜와 영원함영광은 우주적 질서의 모든 부분에 새겨져 있다. 사도 바울이 확증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세상에 결코 증인이 없도록 하지 않으신다. ‘궁창에 있는 것들로 땅의 중심에 있는 것들까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모든 인간에게 증거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으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추구하게 하고 그를 발견한 이후에는 그를 묵상하되 주님은 너무도 선하시고 능하시고 지혜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그 주님께 그의 권위에 합당한 경의를 표할 수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자연 전체에 있는 하나님의 증언에 대해 다소 열광적인 언설을 지속한 이후에 칼빈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보존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신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한 하나님을 그렇게 오래동안 찾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이렇게 설명함에 있어서 칼빈은 죄에 빠진 인간의 무감각에 대한 언급에서 자신의 논지를 제한함이 없이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한 선하심과 인자함을 보다 충만하게 보이시기 위해 땅의 열방들 중에서 특별히 택하신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소리를 듣도록 하셨다고 덧붙인다. 반대로 이방인은 비록 세계의 질서에서 그들에게 계시된 내용이 있고 은택의 감추어진 궁극적 수여자가 모든 선의 원천이란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자신들을 위해 우상들, 헛됨과 속임수를 따라 고안된 신들을 만들었다.

칼빈은 어떤 곳에서도 자연적 계시의 가치를 축소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완전히 상실된 가능태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칼빈이 자연적 계시를 독립적인 자연적 혹은 철학적 신학의 기초로 격상시킨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유의미한 계시가 자연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힌다. 칼빈은 자연적 계시를 유한한 것들의 우주적인 질서의 창조자요 보존자요 통치자인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에 대한 계시라고 하였다. 칼빈은 이 자연적 계시가 하나님의 구원적 지식과는 동떨어진 것이라고 특별히 밝히지는 않았으며, 자연적인 계시와 구원의 지식을 이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을 구원의 유일한 기초로 이해하는 지식의 근원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창조된 질서와 더불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들을 아는 지식의 근원도 되며, 죄문제를 고려하면 죄가 일관되게 창조된 질서에서 발견되는 하나님의 진리를 우상적인 것으로 수용하게 하고 우상적인 방식으로 반응하게 만들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 모두에 대해서 중요성을 가지는 필연적인 근원이다.

함축적인 의미를 보자면, 성경이 제공하는 창조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자연 안에서도 계시된 하나님과 그의 속성들에 대한 동일한 진리들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기초가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함의는 주제를 다루는 칼빈 자신의 방법론적 접근법에 의해 강화된다. 즉 칼빈은 인간적인 지식의 결함과 자연적 계시의 한계와 우상의 문제를 처음부터 경계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 계시의 범위와 특성에 대한 광범위한 찬양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나아가 칼빈은 앞에서 다룬 참종교와 거짓종교 사이의 차이를 배운 신자에게 전달된 교리문답 안에서도 이런 방식으로 시작하며, 타락과 죄문제를 규명한 이후에 자연에 있었지만 [죄와 타락으로] 제거되고 만 긍정적인 진리에 관한 충실한 논의를 제공하는 신약성경 서문 경우에도 이런 방식으로 시작한다. 칼빈은 이러한 자연적 계시가 다만 인간으로 하여금 핑계치 못하도록 한다는 사실을 신약성경 서문에선 논하지 않았다. 칼빈은 이방인이 자연적 계시를 비우상적 방식으로 수용할 어떠한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마음에 새겨진 신적인 것들에 대한 인간의 초보적인 이해는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로 보건대, 그는 타락한 인류 전체에게 미친 자연적 계시의 제한적인 영향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인정하되 은혜와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눈이 열린 신자들에 의해서 지각된 자연의 하나님 계시라고 찬양했다.

성경과 전통

칼빈의 초기 『기독교 강요』와 그의 첫번째 교리문답 중 어떠한 것도 신앙과 신학의 규범들에 대한 충분한 진술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리문답 영원한 진리의 규범항목을 따라 만들어진 언급으로 성경 혹은 하나님의 말씀만이 하나님 지식의 유일한 소스라는 사실을 이미 살폈다.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하여진 하나님의 음성에 대해 언급하고 나아가 계시의 역사를 율법과 언약과 그리스도 (메시야) 계시 맥락에서 자세히 설명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분명하게 성경을 기독교 가르침의 궁극적인 규범으로 가정하고 있으며 초기 『기독교 강요』에서 그는 일관되게 성경을 인간적인 전통과 의견에 맞서는 건강한 교리의 토대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문헌들 중 어떠한 것에서도 성경을 규범으로 이해하는 온전한 교리적 체계화 혹은 교리적 진술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고백』 서두에서 그러한 진술을 발견한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우리의 신앙과 경건의 규범으로 성경만을 따를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인간적인 의견으로 고안된 어떠한 것도 성경과 혼합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는 말씀에서 산출된 것 외에는 우리의 영적인 통치권에 대해 다른 어떠한 교리도 용납하지 않음으로 성경에 어떠한 것도 더하거나 감하지 않도록 할 것인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금령을 따라 배웠기 때문이다.

나아가 칼빈은 성경의 올리베탄(Olivetan) 불역본의 라틴어 서문에서 왕정이나 교회의 검열관이 부여하는 특권이 없어도 텍스트의 권위에 의존하여 번역본을 출판할 수 있다는 권리를 주장했다. 성경은 인간에 의해서 새롭게 발명되지 않았으며 그것의 유효성을 얻기 위해 인간적인 증언을 요구하지 않아야 한다고 칼빈은 기록한다. ‘하늘과 땅과 바다의 주인이며 왕중의 왕이신 분의 예언과 영원한 진리가 성경의 권위를 보여주고 있다. 초기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또한 신성에서 성부와 성자의 하나됨과 구별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적인 지혜사용하는 것을 경계하고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배운 것들 외에는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경고한다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진리에 관하여 혼란을 느끼는 이들은 성경이 말하는 방식을 배워야한다.

신학의 다른 원천들과 관련된 성경의 권위 및 사용에 관한 칼빈의 초기 입장은 다소 명확하다. 성경에 대한 그의 진술들은 성경을 종교와 신학에 있어서 필수적인 진리의 유일한 근원으로 간주하고 성경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서 연구되고 해석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 중세적 전통의 큰 줄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칼빈이 성경의 권위를 교회의 문맥에서 이해한 것은 그로 하여금 교회의 이전 전통들을 존중하고 지원하되 특별히 어거스틴 같은 교부들을 주목하게 하였고 초기의 교회 공의회의 결정들을 주목하게 하였지만 그렇다고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여러 오류들과 이단들을 대적하는 데에 지원을 받는 정도였지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 어떤 성명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른 종교 개혁자들 같이 칼빈도 자기 시대에 이루어진 전통의 변화에 있어서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으며 개혁을 위해 성경을 그러한 오류들과 대립되는 것으로 설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로잔(Lausanne)에서 이루어진 첫번째 강연에서, 칼빈은 자신과 종교개혁 지지자를 묘사할 때 그들이 로마 카톨릭 대적보다 교부들을 더 신중하게 탐독한 자들이며 그러므로 그러한 초기 교회 선생들의 목소리에 올바른 주의를 기울임도 없이 초기교회 권위에 호소하는 로마 카톨릭 학자보다 교부들을 더 존경한 자들로 묘사했다. 비록 교부들은 합당한 관심을 받아야 하지만 우리 주님의 말씀의 권위를 훼손하는그런 차원의 권위를 부여하는 정도까지 높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이사야와 사도 야고보가 명시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에는 오직 왕과 입법자만 있어야 한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만약 교황이 악마적인 교만을 부리며 이 권세를 패하고 그 권세를 자신에게 돌리고자 한다면 그는 적그리스도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부에게 지나치게 높은 권위를 부여하여 적그리스도 기준을 따라그들을 가늠하고 그들로 그리스도 예수의 대적자요 원수가 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교부들을 읽되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인식하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교회의 초기 인물들과 그들의 사역을 주목하며 그들에게 합당한 경의를 표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교부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겸손과 경외심을 가지고 그 진리를 찾되 최종적인 권위는 오직 하나님께 두었다.

여기에서 칼빈의 교리적 체계화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는 개혁을 초기의 교회가 신실하게 성경을 읽었던 전통 안에 위치시켜 두었으며 그는 또한 오버만(Heiko Oberman)전통 I’이라고 명명한 모델을 고수했다. 교회의 전통은 성경과 동일한 혹은 거의 동일한 지위를 가진 두번째 권위로 여겨서는 안되며 오히려 그것은 성경의 진실한 읽기와 해석에 관계된 문제이다. 게다가 칼빈이 신약성경 서문에서 분명하게 밝힌 것처럼 성경을 읽기 위한 교회적 문맥은 개혁을 반대한 로마 카톨릭 대적들이 규정한 교회적 문맥보다 넓었으며 (더 넓어질 필요가 있으며) 그 문맥이란 교회의 위계질서 및 대학의 신학부 교수진만 해당되는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은 일반인도 포함할 정도로 넓었었다.

믿음과 연관된 교리들

구원하는 믿음과 은혜와 칭의에 관한 주제는 칼빈의 1536년판 『기독교 강요』 안에 등장하며 사실 그의 논제식 색인에는 장들 안에 발견되는 주제들 중의 하나로 표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리에 대해서는 가장 간략한 논의만 있었다. 이 교리가 다른 중요한 교리적 논점들과 다양한 연관성 속에서 보다 명료하게 선언된 것은 교리문답 안에서다. 거기에서 칼빈은 믿음의 정의를 제시하고 믿음을 예정 및 은혜와 먼저 연결하고 그 다음에 칭의 및 성화와 연결하고 그런 다음에 회심과 중생과 선행으로 이동한다. 교리문답 안에서 발견되는 설명의 순서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 순서에 따르면 나중에 개혁주의 인물들에 의해 은혜의 집행혹은 구원의 서정으로 규정되는 것들에 해당되는 다른 주제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로마서 8 28-30의 소위 황금사슬주제들을 연결하는 열쇠로서 믿음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일련의 교리들 중 교리문답 첫 장의 제목에서 간단하게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안다는 언급으로 논의를 시작한다. ‘자비로운 아버지하나님은 복음 안에 그리스도 예수를 제시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고’ ‘인정하는것도 복음에서 비롯되는 것인 반면, 불신과 강퍅함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진 인류의 보다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거절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이 보내신 그를 맞이하고 그의 부르심을 따르는 믿음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유효하게 영접된다.

1536년 『기독교 강요』는 선택을 사도신경 주제와 연관시켜 언급하고 유기에 대해서는 단지 이 땅에서의 교회에서 어떠한 사람도 택자와 유기자를 분리할 수 없다는 문맥과 관계하여 매우 간략하게 다루었던 반면, 1537-38년 교리문답은 『기독교 강요』의 나중 판본들에 훨씬 가까운 방식으로 그 문제에 접근한다. 즉 칼빈이 선택과 유기에 대한 교리로의 전환점을 발견한 대목은 바로 복음이 모든 자들을 불러 그리스도 안에 참여할 것을 말하지만 단지 일부만 반응할 뿐이라는 사실에 있다. 일부는 그리스도 부르심을 따르지만 다른 일부는 따르지 않는다는 이 차이신적인 의논의 심오한 비밀에 대한 숙고로 곧장 이어진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주님께서 그의 영원한 선택을 따라 자녀로 예정하고 천상적인 왕국의 상속자로 정하신 자들 안에서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의 동일한 의논을 따라 제외된 나머지 사람들을 위한 진리의 가장 분명한 선언은 죽음에서 죽음에 이른다는 악취에 의해서다.

 택자들과 유기자들 사이의 이러한 구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의논 이외에 더 소급되는 원인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이러한 개념을 따르면서 칼빈은 신적인 것들의 신비에 대한 인간적인 지식의 한계를 설명하기 위해 교리문답 안에서 가장 긴 장들 중 한 장의 나머지 부분을 할애한다. 왜 하나님은 어떤 자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다른 이들에겐 그렇지 않는지에 대한 물음은 감추어진 상태로 두어야만 한다고 칼빈은 설명한다. 신적인 신비를 관통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그렇게 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깊은 근심만 만들어 낼 뿐이라고 하였다. 신자들이 해야 할 모든 것은 바로 신비를 수용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판단에서 언제나 의로우며 거룩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후에 칼빈은 빠져나올 출구가 없는 작정의 미로에 대한 [과도한] 탐구를 경계했다.

신자들은 신비를 불평하고 탐구하는 것보다 인류 전체를 당연한 권리에 의해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을 경외해야 한다. 로마서 9장 본문을 떠올리며 칼빈은 자신의 독자들로 하여금 택자는 긍휼의 그릇으로 유기자는 진노의 그릇으로 인정하되 그것이 전적으로 의롭다는 것을 깨닫길 원하였다. 선택과 유기는 서로 합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바탕을 제공한다. 칼빈은 선택의 확실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다 하였다. 나중에 『기독교 강요』에서 이 주제들을 발전시킬 것을 내다보며, 칼빈은 그리스도 예수를 신자에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거울로 규정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단순히 거울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모든 자들에게 선택의 보증이요 증거도 되신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소유한 모든 자들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더 파고들 필요성이 없다고 하겠다.

믿음의 정의를 논한 초기의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믿음의 두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구분한다. 두 의미는 모두 고유한 것이지만 오직 하나의 의미만이 은혜와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와 연결된다. 믿음[의 첫번째 의미]은 단순히 사도신경 안에 발견되는 그런 믿음의 조항들을 뜻한다. 이 믿음은 교회가 공통으로 진리라고 확증하는 교회의 교리이다. 그러나 믿음은 신자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내적인 신뢰를 뜻하기도 한다. 그것은 구원과 관계된 믿음의 두번째 의미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를 내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을 누구나 언제든지 받아들일 것이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너무도 확실하여 그것이 행하기로 보증한 것들은 반드시 성취하실 수 있다는 것을 확정하는 마음의 견고한 확신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아니다.’ 교리문답 안에서 발견되는 참믿음의 정의라는 짧은 장은 칼빈의 원숙한 개념을 지향한다. [그 원숙한 개념의] 믿음은 뇌리를 맴돌며 가슴에는 아무런 영향도 못미치는앙상한 하나님 지식 혹은 성경의 민밋한 이해가 아니며, 믿음은 또한 이성을 따라 그럴듯한 것이라고 확인되는 견해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믿음은 마음의 확고하고 견실한 확신이며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복음이 약속한 하나님의 자비 안에 안식하게 되는 그런 것이다. 1536년과 1537-38년 사이에 일어난 개념의 변화는 개념의 초점과 관련되어 있다. 즉 믿음의 개념이 단순한 지적 동의와 궁극적인 의미에서 마음에 즉 의지의 영역에 있는 구원하는 믿음 사이의 구분을 강조하는 강한 주의주의(voluntarism) 성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이 그 안에서 성취되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의 고유한 대상으로 규정한 이후에, 칼빈은 믿음 자체에 대한 언급과 함께 구원의 근원 문제로 돌아간다. 왜 어떤 사람들은 믿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느냐의 물음이 예정의 문제를 제기하듯, 믿음의 근원에 대한 물음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이란 문제를 제기한다. 믿음은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에 속한 것이 아니다. 칼빈은 믿음이 하나님의 탁월하며 고유한선물임에 틀림이 없으며, 믿음은 하나님이 성경에서 약속하신 것들을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견고히 확증하며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고 영혼의 설득으로 마음을 확고히 세우시는조명적인 성령의 능력 이외에 다른 어떠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약속하신 것을 행하실 것이라는 논점은 1536년판 『기독교 강요』 언사의 반복이며, 교리문답 앞 부분에서 언급된 지성과 의지의 균형은 칼빈이 나중에 이룰 교리적 체계화를 지향하는 논점이다.

하나님의 선물인 믿음의 원숙한 가르침은 칭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곧장 이어진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데 이는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의로움이 스며들기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의로움을 취하였고 그들 자신의 불법은 그들에게 돌려지지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의로움의 수용은 죄용서와 동시적인 것이라고 칼빈은 주장한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신자들을 위해 자신의 의로움을 전가했기때문에 사도 바울은 행위의 의와 그것을 전복하는 혹은 파기하는 믿음의 의를 구분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칼빈이 비록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사이를 중재하는 우리의 보증인이 되신다고 간단히 말하기는 하였지만 그리스도 의로움이 어떻게 신자들의 구원에 공로가 되는지에 대한 보다 상세한 논의는 사도신경 해석에서 할 것이라고 칼빈은 밝힌다.

교리문답 안에서 이러한 칭의의 전적인 법정적 설명 다음에는 신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처럼 그들의 성화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는 선언이 뒤따른다. 성령의 조명케 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선물을 얻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간주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에 참여함을 인하여 성화되고 모든 청결함과 순전함에 이른다.’ 성화를 경험함이 없이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속은 자들이다. 그리스도 의로움은 우리가 성화를 맞이함이 없이도 우리가 믿음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인간의 자연적인 능력에 속하지 않았듯이, 율법에 대한 순종도 인간의 어떤 능력과 대응되지 않는다. 오히려 순종은 율법의 실행을 위한 영적 능력을 요청하고 있다. 파렐 교리와의 유사성이 여기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즉 율법에 대한 순종은 우리의 능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믿음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이라고 파렐은 주장했다.

그러므로 율법은 새로운 기능을 취하게 된다. 즉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의 마음에 새겨졌기 때문에 한 때 인간의 죄를 정죄만 했던 율법이 신자들의 발걸음을 이끌어 의의 길로 인도하는 빛이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은 악의 길을 출입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의로운 훈련을 제공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멜랑톤의 개념에 수정을 가하며 도출한 칼빈의 제3사용 개념의 섬광을 경험한다.

칼빈이 성화를 마음의 정화와 새로운 순종으로 이해한 것은 그로 하여금 다음 장의 주제인 회심과 중생으로 넘어가게 한다. 여기서는 칼빈이 도입한 용어들이 중요하다. 즉 여기에서 참회(poenitentia)와 중생(regeneratione)은 회개와 함께 조정되어 회심(conversio)으로 규정되기 시작하고 중생은 우리의 부패한 자아의 죽임(mortificatio)과 영적인 살림(vivificatio)으로 구분된다. 이 이중적인 중생, 즉 새로운 삶과 결부되어 육체에 맞서 싸우는 지속적인 전쟁 개념은 파렐의 특징이다. 여기서 그 유형 혹은 모델은 『기독교 강요』 후기 판본에도 계속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칼빈의 사상에 중요한 것이라 하겠다. 『기독교 강요』의 문헌형성 과정에서 추가된 방대한 분량의 자료들을 고려할 때 그 모델을 이후의 판본들 안에서 규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여기서는 가장 기초적인 형태를 따라 진술되어 있다.

회개는 언제나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과 결부되어 있으며중생됨 혹은 거듭남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전제와도 결부되어 있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회심으로 정의되는 회개는 중생에 의존하고 있으며 우리의 삶 전체에 관계된 과정이되 한편으론 죄와 부패의 잔재들을 죽이고 다른 한편으론 인간의 본래적인 상태가 은혜로 회복되게 하는 수단으로 영적인 살림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칼빈은 또한 논의의 순서에서 왜 회개와 중생을 성화 다음에 두었는지 밝히기를, 거듭남 혹은 새로운 피조물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생에서 결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회개는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는 삶은 구원의 필연적인 부분이다. 중생에서 비롯되는 선행은 하나님이 그들 안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받음직한것이다. 선행이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는 이러한 강조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기초를 결단코 제거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행위에 기초한 의로움의 어떤 형태를 구성하는 것도 아니다. 행위로 말미암는 인간적인 의로움은 율법 아래에서 전적인 완전함이 필히 뒤따르지 않으면 안되는데 칼빈은 인간에 의해서 산출된 행위들 중에 전적으로 완전하고 무흠한 행위는 하나도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의는 우리 자신 바깥에서(extra nos), 즉 하나님에 의해 은혜로 우리에게 전가하신 의의 주체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와야만 한다. 이 교리는 선행의 필요성을 결코 제거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독교적 삶에서 가지는 그것의 고유한 중요성을 긍정하고 있다. 신자의 불완전한 의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의로움에 의해 가리워질 때 하나님은 순종하는 인간의 행위를 의롭다고 여기시며 받아들여 주신다.’ 동시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원한 보상을 약속해 주신다.

결론

칼빈의 초기 신학은 (그가 작가에게 합당한 방식이라 주장하는 글쓰기의 특질로서) 명료성과 간결성 때문에 주목할 만하며, 전 생애를 걸쳐 칼빈의 사상에 중요한 내용으로 보존될 일련의 괄목할 만한 주제들을 제공하고 있다. 칼빈의 초기 신학은 그 근본적인 의도에 있어서 성경적인 동시에 전통적인 입장에서 성경 텍스트를 주목하고 교회에서 분명한 지지의 목소리를 추구할 때에는 특별히 교부들을 주목하되 교회를 괴롭히는 진리의 학대가 창궐하기 이전에 저술된 보다 오래된 전통으로 이해한 신학이다. 요약하면, 칼빈의 초기 신학은 그 의도에 있어서 정통적인 동시에 교회적인 것이었다. 교황적인 미신에서의 해방이란 칼빈의 관념과 독자들과 청중들로 하여금 그 미신에서 경건과 배우고자 하는 성향으로 전환되게 만들려는 그의 의도는 칼빈의 초기 저작들 전반을 관통하고 있으며 그 모든 것들을 포괄되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이다.

 

출처: 한병수 전도사 블로그  Theologia orthodoxa reform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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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성령론(John Calvin`s Doctrine of Holy Spirit) / 이은선

출처 :기독교강요독서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 장칼뱅

 

칼빈의 성령론(John Calvin's Doctrine of Holy Spirit)

이 은 선(안양대 목회학과 부교수)
* 이 논문은 안양 대학교 교내 학술 연구비 지원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


들어가는 말

1909년 프린스톤의 유명한 신학자 워필드(B. B. Warfield)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부르면서, 신학에 대한 칼빈의 가장 위대한 기여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교리인데, 그의 성령론의 성격은 구원론적이라고 하였다.. Benjamin Breckinridge Warfield, "John Calvin the Theologian," in his Calvin and Augustine, ed. by Samuel G. Craig(Philadelphia :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 1956), 484-5. 이러한 워필드의 언급에 대하여 이 양호 교수는 워필드가 칼빈의 신학 구조를 하나님 중심(트뢸취)이나 기독론중심(니젤)과 대조적으로 성령 중심으로 파악했다고 하였다.(Yang-Ho Lee, "The Structure of Calvin's Theology," Yonsei Journal of Theology(1996), vol. 1, 108.) 워필드는 죄와 은총 교리가 어거스틴에게서, 이신칭의론이 루터에게서 온 것같이 성령론은 칼빈에게서 왔다고 했고, 기독교 강요는 구원을 성취하시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논문이라고 하였다.(op. cit., 484-5)
이러한 워필드의 주장에 대하여 옹호하는 입장에서 린데(Van der Linde)와 크루쉐(Werner Krusche)가 박사 학위 논문을 썼다.. Van der Linde, De Leer van den Heiligen Geest bij Calvijn, Bijdrage tot de Kennis der Reformatorische Theologie, TH.D. Dissertation(Wageningen: H.Veenmam & Zonen, 1943); Werner Krusche,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57) 이 연구들은 지나치게 논쟁적인 것이 흠으로 지적된다. van der Linde는 바르트의 견해를, Krusche는 에밀 부르너와 그 제자들의 견해를 비판하였다.
앞의 논문은 칼빈의 성령론을 일반적 사역과 특별한 사역으로 나누어 논하였고, 후자는 성령과 우주, 성령과 인간, 성령과 교회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논하였다. 이들은 칼빈의 성령론이 구원론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섭리와 우주의 보존에서 성령의 역할을 제시하였다. 그러므로 본고에서는 칼빈의 성령론의 구원론적인 성격과 함께 우주론적인 성격을 함께 고찰하고자 한다.
오늘날 성경의 권위의 문제와 관련하여 성령의 내적 조명이 강조되고 있다. 정통주의자들은 성령의 영감에 의한 성경의 무오류의 교리를 주장하는 반면에, 신정통주의자들은 성령의 내적 조명에 근거하여 성경의 무오류교리에 반대하고 성경의 내용이 영감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신정통주의자들이 그러한 주장을 하는 근거가 바로 칼빈의 성령의 내적 조명에 대한 견해이다.. Wilhelm Niesel, The Theology of John Calvin, trans. by Harold Knight(London: Lutterworth Press, 1956), 32-36; Ronald S. Wallace, Calvin's Doctrine of the Word and Sacrament (Geneva: Geneva Divinity School Press, 1982), 102, 110-114.
그래서 본고에서는 칼빈의 성경의 권위와 성령의 내적 조명의 관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의 칼빈의 성령론이 구원론적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목회적 측면이 소홀하게 취급된 느낌이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칼빈의 성령론의 목회적 측면도 아울러 조명하고자 한다. 특별히 오늘날 성령의 은사 문제가 신학계의 뜨거운 논쟁 거리로 계속 논의가 진행 중인데, 은사에 대한 칼빈의 이해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하여 칼빈의 성령론의 우주론적 측면, 성경 권위와의 관계, 구원론적 측면, 목회적 측면과 은사 문제 등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I. 성령과 삼위일체

칼빈은 기독교 강요1권 13장에서 삼위일체론을 취급하는데 특별히 성령의 신성(deitatem Spiritus)에 대하여 14절-15절에서 취급한다. 그는 먼저 13장에서 삼위일체론을 취급하면서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을 밝힌다. 그는 위격(persona)이란 용어에 대한 비난에 대하여 성자를 그 본체(hypostaseos)의 형상(히1:3)이란 구절에 근거하여 성자가 성부와 구별되는 실재(subsistentiam)이고, 이 이론은 성령에게도 적용되어 성령도 성부와 구별되나 본질의 구별(distintio essentiae)은 아니라고 하였다. 칼빈은 히브리서 1장 3절에 근거하여 하나님께는 세 본체가 있는데, 이것을 라틴 교부들은 위격(persona)으로 표현하였으며, 직역하면 실재라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Inst., I.13.2) 칼빈은 위격이란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한 실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환될 수 없는 특성의 의해 구별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Inst., I.13.6) 그러므로 칼빈은 삼위일체, 위격같은 그러한 용어들은 성경을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사용될 뿐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해 구별된다는 점에 일치한다면 용어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Inst., I.13.5)
칼빈은 이와 같이 성령이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하나님으로 성부와 성자와 구별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밝힌 후에 14절-15절에서 성령의 신성을 구체적으로 열거한다. 그는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니라(창1:2)는 창조 기사에 근거하여 이 세상이 성령에 의해 창조되었고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성령에 의해 유지된다고 하였다.(Inst., I.13.14) 이 뿐만 아니라 성경은 하나님께만 귀속될 수 있는 여러 사역들, 중생, 칭의, 성화, 예언의 근원,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훼방죄에서 드러난 성령의 신적 위엄 등을 성령에게 귀속시키므로 성령의 신성의 증명된다고 하였다.(Inst., I.13.14-15)
그런데 칼빈의 삼위일체와 성령의 신성에 대한 논의에서의 실제적인 관심은 정교한 신학적 사색이 아니라 실제적인 기독교인의 생활이었다. 그는 성령의 신성을 논하면서 (성령의 신성에 대한) 우리를 위한 최고의 확증은 친숙한 경험(familiari usu)으로부터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한다. 그는 성경이 성령에 귀속시키는 것과 우리가 경건에 대한 확실한 경험(certa pietatis experentia)을 통하여 배우는 것이 성령의 신성에 대한 확증을 가져온다고 하였다.(Inst., I.13.14) 칼빈은 빈번하게 경험을 성경의 확증의 보조적인 것으로 호소하는데, 여기서는 경건에 호소한다. 칼빈은 (삼위일체)의 이 실제적인 지식은 의심할 바없이 쓸모 없는 사색보다 한층 더 확실하고 견고한 것이다(Inst., I.13.13)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의 경우에 삼위일체에 대한 지식도 사색적인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신앙생활, 즉 경건의 경험과 연관되어 신자들의 신앙의 실천을 위한 힘과 위로의 원천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성령론도 우리의 구체적인 경건의 체험에서 확증되어야 한다. 칼빈에게서 성령은 삼위의 한 위격으로 신성을 가지고 계시는데, 이 사실은 성경 말씀뿐만 아니라 우리의 중생, 칭의, 성화와 같은 구체적 경건의 체험과 연결되어 확증되어야 한다.
칼빈은 성령이 단순하게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 성부, 성자와 동등한 신성을 가지신 제3의 위격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삼위일체뿐만 아니라 성령의 신성도 단순한 사색적 지식이 아니라 성경에 분명한 근거를 가지면서 경건의 경험에서 확증되고, 더 나아가 우리의 구체적인 신앙생활과 연관되어 신자들에게 힘과 위로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II. 성령의 우주적 사역

1960년대 이후에 벌코프(Hendrikus Berkhof)와 몰트만(Jurgen Moltmann)을 중심으로 성령의 우주적 사역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Hendrikus Berkhof, The Doctrine of Holy Spirit(Richmond: John Knox Press, 1964); Christian Faith, An Introduction to the Study of the Faith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79); Jurgen Moltmann, God in Creation, A New Theology of Creation and the Spirit of God (San Francisco : Harper & Row, 1985).
이들은 공통적으로 칼빈의 우주적 성령론을 주목하면서 자신들의 입장을 전개하였다. 벌코프는 사회적 성화가 교회와 복음의 중재를 통한 기독화의 과정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사를 통해 교회를 가르치는 일을 포함하며,. Berkhof, Christian Faith, 500.
세상의 갱신은 사람들의 갱신의 직접적인 결과가 아니라 그 자신의 길을 따른다고 하였다.. Ibid., 508.
그는 사회적인 민주화, 탈제의화, 세속화, 개인주의화,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과학적-기술적 해방이란 서구 문명의 특징들을 성령의 전진으로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피조물의 주이자 머리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Berkhof, Doctrine of The Holy Spirit, 102.
벌코프의 비전은 창조주 성령(creator spiritus)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인 구원자 성령(Spiritus Redemptor)에 속한다. 벌코프에 의해 우주적 영역을 제공받은 것은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하고, 성화하는 활동이다.
창조 속에 계신 하나님(God in Creation)에서 몰트만은 칼빈이 성령 안에서의 창조라는 신학적 구상을 받아들인 몇 안되는 신학자라고 언급한다. 생기 있게 하는(Nicaenum) 성령은 칼빈에게 있어서 삶의 원천(fons vitae)이다.. Moltmann, 김 균진 역 창조 안에 계신 하느님(한국신학연구소, 1987), 25.

이러한 개념을 토대로 몰트만은 창조 안에 있는 신적인 영의 임재를 우주적 거하심과 화해하는 거하심과 구원하신 거하심으로부터 구별하였다.
벌코프와 몰트만같은 현대 학자들은, 중요한 점에서 견해가 다르지만, 우주적 성령론을 인간과 자연을 통합한 미래의 하나의 세계를 위한 본질적인 토대로 삼으려 한다. 현대 신학자들의 우주적 성령론은 성령의 우주 질서를 유지하는 사역과 성령의 구원론적 성격을 통합하여 우주 질서의 성화를 시도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현대 신학자들의 견해가 칼빈의 우주적 성령론을 올바로 계승 발전시킨 것인가?
워필드가 1909년에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고 불렀을 때, 칼빈의 성령론의 구원론적 방향을 중시하였지만, 칼빈의 성령론에서 성령의 우주적 사역에도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미 크루쉐, 밀러(Benjamin Charles Milner), 볼트(John Bolt)가 칼빈의 성령론의 우주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다.. Benjamin Charles Milner, Jr., Calvin's Doctrine of the Church(Leiden: E. J. Brill, 1970); John Bolt, Spiritus Creator: The use and abuse of Calvin's Cosmic Pneumatology, 13-33.
크루쉐는 성령과 우주, 성령과 인간, 성령과 교회로 나누어 성령의 사역을 논의하면서 성령의 우주적 사역을 취급하였고, 밀러는 우주, 사람, 그리고 교회뿐만 아니라 정치 질서에서 성령의 역할을 검토하는 가운데 성령의 우주적 사역을 다루었다. 볼트는 벌코프와 몰트만 등의 현대 신학의 성령의 우주적 사역에 대한 관심에 동조하면서도, 그러나 그들의 관점은 칼빈의 성령론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지적하였다.. Bolt, "Creator Creator: The Use and Abuse of Calvin's Cosmic Pneumatology," 27.

크루쉐가 지적한 바와 같이 칼빈에게서 성령의 활동은 성령과 우주, 성령과 인간, 성령과 교회의 삼중적 것으로 묘사할 수 있다. 칼빈은 롬8:14절 주석에서 성령의 활동이 다양하다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적절하다. 모든 피조물들이 그것을 통해 보존되고 움직이는 성령의 보편적인 사역이 있다. 또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성령의 사역들이 있는데, 이것들 역시 그 성격에서 다양하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성령에 의해 성화를 의미하는데, 주님은 자녀들로 분리해 놓은 자들 이외에는 성화의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 Comm. Rom8:14.

성령은 모든 생명(life)의 장본인이시기 때문에, 성령의 이러한 삼중적 활동은 이 세상에서 모든 생명의 삼중적 수준을 반영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 세 등급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첫째 생명은 오직 동작과 감각에만 존재하고 우리가 동물들과 공유하는 보편적인 생명이다. 둘째는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의 생명이다. 세 번째는 신자들만이 획득하는 초자연적 생명이다. 그들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고, 그래서 그들의 각자는 하나님의 생명이라고 불린다.. Comm.4:18.
이러한 칼빈의 언급들을 토대로 우리는 성령의 우주적이나 숨겨진 능력(사역)(arcana Dei virtus), 모든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선물들(dona)의 일반적이고 차별 없는 수여, 그리고 양자의 영(spiritus adoptionis)으로서 중생시키는 특별한 사역 사이의 구별을 할 수 있다. 크루쉐는 서로 서로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서 이러한 세 개의 활동 영역을 세 개의 목적론적으로 질서잡힌 동심원적 서클로 적절하게 묘사했다. 가장 넓은 것은 법을 가진 전체적인 피조 세계와 무의식적인 동물의 생명을 포함한다. 둘째로 더욱 좁게 역사적 형식을 가진 사람의 합리적인 생활, 셋째는 내적 원으로 택한 자들의 영적 생활의 영역이다. 우주는 인류를 위해 존재하고, 인류는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 Krusche,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13.
칼빈은 성령의 사역의 가장 큰 원의 사역을 삼위일체와 관련시켜 기독교 강요 1권 13장 14-15절에서 다루었고, 두 번째 원에 대해서는 2권 2장 12절-17절에서 다루었고, 가장 좁은 원은 3권과 4권의 성령론에서 다루었다.
첫 번째 원인 우주 그 자체에서 성령의 활동을 칼빈은 질서를 유지하고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이해한다. 성령의 능력은 첫 번째로 창조 세계가 무질서 속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창조의 질서와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완성하기 전에 그것은 엉성한 덩어리였다는 것을 이미 들었다. 그(모세)는 이제 세상을 유지하기 위하여 성령의 능력이 필요하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통치 혹은 질서에 의해 유지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무질서한 덩어리들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의심이 마음에서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덩어리는, 아무리 혼란스럽다 하더라도, 당분간 성령의 비밀한 효율성에 의해 안정된다고 주장한다.. Comm. Gen.1:2.
질서를 보존하는 성령의 계속되는 활동은 고전적으로 creatio continua(계속적인 창조)로 언급되었으나, 크루쉐는 칼빈이 무로부터의 원래의 창조에 대하여 creatio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성령의 우주적 질서의 유지에 대해서는 continuatio creationis(창조의 계속)로 언급하는 것이 낫다고 제안한다.. Krusche,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 16.

질서를 유지하는 성령은 역시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온 우주에 편재하시어, 하늘과 땅에 모든 것들을 유지하시고, 그것들을 자라게 하시며, 그것들을 소생시키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분은 어떤 한계에 의해서 제한되지 않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만물들에게 그의 생기를 불어 넣으시고, 그것들 속에 본질, 생명, 그리고 운동을 불어넣으심에 있어서, 그분은 참으로 명백하게 하나님이신 것이다.. Institutes of the Christina Religions trans. and ed. by Ford Battles(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 1960), I.13.14. 이하 Inst.,로 약함.

이와 같이 칼빈은 성령의 우주적 사역을 삼위일체의 구조에서 창조와 질서 유지의 관점에서 논하고 있다. 칼빈의 경우에 성령의 우주적 사역은 근본적으로 우주의 창조와 그 질서의 유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론의 우주적 사역은 벌코프와 몰트만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우주의 성화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III. 성령과 일반 은총

칼빈은 성령의 삼중적 사역에서 우주의 창조와 질서 유지에 관련된 사역을 다룬 후에 모든 인류와 관련된 성령의 사역을 취급한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성령의 은총이기 때문에 일반 은총이라 불리는데, 기독교인과 일반 은총의 관계에 대하여 지금도 견해가 다양하다. 대표적으로 일반 은총과 기독교와의 접촉점을 부인하는 바르트의 견해와 인정하는 에밀 부르너의 견해가 있다. 또한 그리스도와 문화와의 관계에 대하여 아브라함 카이퍼와 스킬더의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이론들은 모두가 칼빈의 견해에 토대를 두고 전개되고 있다. 그러면 일반 은총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무엇인가?
칼빈은 사도행전 17:28에 대한 주석에서 하나님은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영감을 통해 자신이 무로부터 창조한 것들을 보존하신다고 언급한 후에 사람의 생명은 운동보다도 훨씬 더 우월하며 운동은 존재보다 우월하다고 하였다. 그는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야만적인 짐승들과 공통으로 감각과 운동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갖지 않은 이성과 지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 속에 있는 생명은 짐승 속에 있는 생명보다 우월하다고 보았다.. Comm. Act. 17:28.
이와 같이 사람이 이성과 지성을 소유하여 다른 피조물들보다 우월한 존재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소유한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에 의해 우리 안에서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것의 원래의 모습은 그것의 회복으로부터 판단할 수 있다. 골로새 3:10절과 엡4:23에 호소하면서 칼빈은 회복된 형상이 부분적으로 참된 거룩과 의에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한다.(Comm. Gen.1:26.)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인 영혼의 두개의 기능을 오성(understanding. Inst., 2.2.12-15)과 의지(2.2.26-27)로 본다. 어떤 의미에서 의지에 관한 논의는 5장까지 계속된다.(2.2.26-2.5.19). 칼빈이 의지를 방대하게 논한 것은 주의설(voluntarism)을 강조하기 때문이며, 이런 입장은 후기 개혁주의 정통신학에서 그대로 계승된다.
하나님의 형상의 근본적인 기능은 영혼의 지도자이고 통치자인 오성과 분명한 위계질서에서 정리된 의지이다. 의지는 언제나 그것의 소망에서조차 오성의 판단을 (기다리면서) 오성의 명령을 염두에 두고 있다.. Inst., I.15.7.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범죄했을 때 파괴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손상되었으나, 칼빈은 사람의 본성적인 재능들을 자연적 재능과 초자연적 재능으로 날카롭게 구별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소멸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선과 악을 구별하는 이성은 자연적 선물이기 때문에, 이것은 완전히 말소될 수 없다. 그러나 이성은 부분적으로 약화되고 부분적으로 부패되어 이것의 잘못된 파괴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여기서 칼빈은 일반 은총을 말하며 이 일반 은총의 근원도 성령이라고 한다.. Inst., 2.2.14-16. 칼빈은 이성은 우리의 본성에 고유한 것으로, 우리를 동물과 구별해 준다고 하면서, 이것을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총(generalem Dei gratiam)이라고 하였다. (2.2.17)
칼빈에 따르면 오성은 부패하고 기형적인 모습이지만, 지상의 일, 즉 사회 생활을 해 나가는데 필요한 공정성과 질서에 대한 보편적인 생각, 그리고 법의 필요성과 법의 원칙을 이해한다.(Inst., 2.2.13) 그리고 학술과 공예를 배울 인간의 능력은 인간성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독특한 은총(peculiarem Dei gratiam)이다.. 칼빈은 특별 은혜(special grace)라는 용어를 여러 가지 뜻으로 사용한다. 기독교 강요 2.2.6에서 그 용어는 거듭난 선택자들에게 임하는 은혜를 뜻하지만, 인간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데 적합한 재능, 성품, 영웅 기질같은 은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더 많다.(2.2.17, 2.3.4) 칼빈은 거듭나지 않은 인간들이 철저하게 사탄적이지 않는(2.2.11)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 안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참조, Inst., 3.7.; 3.14.2)

사람 속에 선천적으로 있는 이성(ratio)과 오성(intellegentia)의 일반적인 이해력(universalem comprehensionem)은 보편적인 것이다.(Inst., 2.2.14) 칼빈은 하나님의 영을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인정한다면, 진리가 어디에서 나타나든 우리는 그것을 결코 거부하거나 멸시하지 안된다고 하였다.(Inst., 2.2.15) 이와 같이 칼빈은 타락한 인간에게서 이루어지는 질서 유지와 학문 연구 등을 하나님의 영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일반 은총으로 보았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의 의지에 대한 성령의 역할은 무엇인가? 참으로 의지도 타락으로 전적으로 노예화되었다. 오성과 비슷하게 의지도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소멸되지는 않으나 올바른 것을 추구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한 욕망에 매여 있다. 자연법은 일반적인 원칙에 대한 안내자 역할은 할 수 있으나,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선을 수행하게 만드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한다. 그런데 선을 행할 수 없이 타락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불신자들 가운데서 덕이 나타나고 있는데, 칼빈은 이러한 덕을 성령의 역사로 설명한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2권에서 사람의 의지에 대한 논의에서 지속적으로 중생의 역사에 대한 성령의 사역과 불신자들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구별한다. 우리는 중생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성령을 가질 수 없으므로, 우리가 본성으로부터 가지는 것은 무엇이나 육적인 것으로 영적 것과 대조된다.(Inst., 2.3.1.) 그러므로 중생하지 않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오직 정죄받을 일밖에 나올 수 없는데, 실제적으로 불신자들도 선을 행한다.
칼빈은 불신자가 행하는 선을 본성을 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내적으로 억제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귀속시킨다.((Inst., 2.3.3.) 칼빈은 이것을 특별한 은혜라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본성의 공통적인 선물들이 아니라 사악한 사람들 위에 하나님께서 수여하시는 그 분의 특별한 은혜이다.((Inst., 2.3.4.) 이 점에서 칼빈이 성령에 대하여 말한 것은 중요하다. 칼빈은 성령의 세 가지 사역뿐만 아니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는 데서도 삼중적인 구별을 사용한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방식은 세 가지이다. 첫째로 우리 모두는 그를 힘입어 움직이고 살아간다.(행17:28) 그러므로 여기서 모든 행동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나온다는 결론이 나온다. 둘째로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특별한 방식으로 사악한 자들을 강요하시고 조종하신다. --- 셋째로 그가 선택한 자들에게 특별한 성화의 성령에 의해 통치하시는 경우를 들 수 있다.. Comm. Isa.10:5.

밀너는 아주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두 번째 사역인 사악한 자에 대한 역사를 성령의 사역으로 언급하고 제네바 요리 문답을 그러한 사례로 제시한다. 하나님은 성령에 의해 그들(사악한 사람들과 마귀들)을 통치하지 않으시지만, 그는 재갈과 같이 그의 능력으로 그들을 억제하여, 그들은 하나님이 허용하지 않는 한 움직일 수 없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이제 그들을 자신의 의지의 사역자로 삼으신다.. Milner, Calvin's Doctrine of Church, 41.
불경건한 자들은 성령과 역시 하나님의 비밀한 충동(arcano Dei instinctu)에 의해 하나님의 의지를 행하도록 억제당하고 제지당한다.
칼빈은 이와 같이 중생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성과 의지에서 나오는 모든 선한 것들을 성령의 역사에 귀속시켰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으나, 성령께서 인간에게 학문 연구와 여러 예술 활동에 필요한 재능을 주실 뿐만 아니라 악한 의지를 억제하여 선한 행동을 하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성령의 보편적인 일반 은총의 역사이다.
볼트는 칼빈이 성령의 우주적 활동을 강조한 이유를 성령의 신성의 증명, 하나님의 선물의 향유. 볼트는 칼빈이 창 1:26의 주석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지상에 대한 사람의 지배와 관련된다는 존 크리소스돔의 이념을 명백하게 거부한다는 것을 주목하면서, 하나님의 선물들의 올바른 향유가 창세기 1:28절에 있는 소위 문화 명령보다 더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 주목되어야 한다고 한다.(Spiritus Creator, 24).
, 하나님의 인간 정죄에 대한 변명 불가능성 등을 지적하면서 성령의 우주적 활동의 결과인 정치 질서의 수립은 지상에서 인간의 활동이고, 시민 정부 그 자체에 구원적 혹은 메시야적 역할을 귀속시키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Bolt., "Spiritus Creator," 24-26.
이와 같이 칼빈에 따르면 창조의 영역에서 성령의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활동은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연 세계와 인간 세계에서 질서를 보존하고 범죄를 억제하는 활동이다. 칼빈은 일반 은총을 통하여 인류의 공통적인 삶의 토대가 구축되는 것을 인정하지만, 일반 은총을 통한 문화 건설이 구원론적인 가치를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러한 칼빈의 일반은총론은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Herman Kuiper가 연구하였다. 아브라함 카이퍼의 견해는 칼빈주의, 김 기찬역(크리스찬 다이제스트사, 1996)에 나타나 있고, 바빙크의 견해는 일반은총론, 차 영배역(총신대출판부, 1980)를 보라. Herman Kuiper의 견해는 Calvin on Common Grace(Grand Rapids: Smither Book, 1924)를 보라. C. Van Til은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8 no 1, pp.39-60, no 2, pp.166-200, vol 9 no 1, pp. 47-84 등에 연속적으로 발표한 논문 Common Grace에서 카이퍼, 바빙크, 헤페 등의 견해를 비판하고 칼빈의 견해를 지지한다. Henry C. Vantil은 칼빈주의 문화관에서 카이퍼의 일반은총론과 스킬더의 세속문화에 대한 은총을 거부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문화관을 양극단으로 비판하고 일반 은총의 문제를 반위관계, 그리스도의 왕직, 세상에서 기독교인의 사명, 그리고 기독교인의 세계관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논의하면서, 칼빈의 견해에 귀를 기울였다.( Henry C. Vantil 칼빈주의 문화관, 이 근삼역(성암사, 1984), 337-361)


IV. 성령의 내적 증거

칼빈은 성령의 우주적인 사역과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사역과는 구별되는 구원론적인 사역에 가장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구원론적인 사역에게 가장 두드러진 것이 신자들에 대한 성령의 내적인 증거이다. 이 성령의 내적 증거는 신지식, 성경의 권위, 구원의 확신의 세 가지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워필드는 기독교 강요를 죄인들에게 하나님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알게 만들고 죄인들을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로 인도하는 성령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논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기독교 강요는 성령의 증언(testimonium Spiritus Sancti)의 위대한 교리로 시작하며, 이 교리는 성령의 내적 활동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생생하고 생명력을 제공하는 지식이 전달된다고 가르친다. 성령의 증언이 없으면 말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가 사람들의 눈앞에서 헛되이 퍼져 가게 된다.. Warfield, Calvin and Augustine, 486.
타락한 인간이 신지식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자연과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므로 결국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의 증거를 통한 신지식의 문제는 성경의 권위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 칼빈의 성령의 증거 교리는 말씀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구원에 대한 성령의 증거의 두 제목 하에 고려될 수 있다. 이 두 증거는 후자가 전자의 실제적 적용이기 때문에 서로 서로로부터 분리된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

1. 성령의 말씀에 대한 내적 증거

칼빈은 루터와 츠빙글리와 부처같은 종교 개혁자들과 같이 로마 카톨릭과 재세례파와 논쟁하는 가운데서 성령과 말씀의 밀접한 연합을 강조하였다.. 루터, 츠빙글리, 부처의 말씀과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 지 원용, 루터가 본 성령론과 은사운동, 루터 사상의 진수지 원용편(컨콜디아사, 1986), 307-310; W. P. Stephens, The Theology of Huldrych Zwingli(Oxford: Clarendon Press, 1986), 59-64, 129-138; W. Peter Stephens, The Holy Spirit in the Theology of Martin Buce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0), 129-156.

로마 카톨릭 변증가들은 성경을 정경으로 결정한 것이 교회이므로, 교회가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다고 주장한다. 칼빈도 우리가 성경을 보편 교회(Catholic Church)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말씀에 대하여 증거하고 그 기원에 대하여 입증하셔야만 한다고 한다. 칼빈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것으로 그 자체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성경은 흰 것과 검은 것이 색에서 구별되고 단것과 쓴 것이 맛에서 구별되듯이 진리의 분명한 증거를 그 얼굴에 지니고 있으며(Inst., 1.7.2) 성경은 자증한다.(Inst., I.7.5) 성경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진리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는 타락으로 인하여 그것을 인식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칼빈은 성경의 신적 기원과 권위에 대하여 신자들로 하여금 믿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성령의 내적 증언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성령의 권위 인식에서 성령의 내적 증언을 특징적인 교리로 만들었다.. 다른 개혁자들은 말씀과 성령의 밀접한 연합을 강조하고, 성령이 성경의 저자이고 해석자라는 것을 강조하나, 성령의 권위 인식이 성령의 내적 증언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뚜렷하게 강조하지 않는다.
칼빈은 성경이 객관적으로 분명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성경은 성령의 내적 증언에 의해 우리에게 인식되기 전에 이미 자체적으로 진리의 분명한 증거를 지니고 있다. 단지 우리들이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먼 눈을 열어 성경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진리의 분명한 증거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내적 증거가 필요하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은 논쟁을 통해서 세워질 수 없고 오직 성령의 은밀한 증거에 의해서만 세워질 수 있다.(Inst., 1.7.4). 성령의 내적 증언에 의한 성령의 권위 인식이란 칼빈의 주장이 너무 주관적이고 순환적이라는 두 가지 반론이 제기되었다.(Otto Weber, Foundations of Dogmatics, Vol. 1.(Grand Rapids: Eerdmans, 1981), 242-5를 참조하라.) 이러한 반론에 대해 칼 바르트는 이것은 논리적 순환으로, 이러한 접근에서 주체(성령)와 객체(기록된 말씀)가 연합한다고 하였다.(Church Dogmatics I. 2(Edinburgh: T & T Clark, 1956), 535) 오토 베버는 성령의 증언은 성경의 증인(witness)들의 증언(testimony)에서 우리를 만나며, 그것에 의해 주체와 객체의 양극성은 극복된다고 하였다.(op. cit., 244)
합리적 주장들은 어떠한가? 성령의 증거가 선행하면 그 후에 합리적 주장도 일정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Inst., I.8) 칼빈은 성경의 객관적 권위가 성령의 내적 증언을 통하여 주관적으로 확립된다고 보았다.
재세례파의 성경과 분리된 성령의 역사의 주장에 반대하여 칼빈은 성경과 성령의 연합을 주장하였다.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직분은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명령하는 그 교리를 우리 마음에 인치는 것이다.(Inst., 1.9.1) 말씀과 성령의 통일성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구원에 대한 성령의 증거와 연결되어 있다. 말씀만 강조하고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나, 성령만 강조하고 말씀을 무시하는 것도 위험하다.

2. 성령의 구원에 대한 증거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된 것들이 성령의 비밀한 사역에 의해 우리에게 유익을 준다는 기독교 강요 제3권의 1장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속 사역과 성령의 신자 개인에 적용시키는 사역의 나누어질 수 없는 연결을 나타낸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고 성령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활동한다.. 이러한 점에서 David Willis는 Calvin's Catholic Christology(Leiden: E. J. Brill, 1966)에서 칼빈의 성령론을 기독론적 성령론이라 하였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자신과 연합시키는 끈(bond)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수행하신 구원 사역의 축복은 그리스도가 우리밖에 머무르면(extra nos) 아무 가치가 없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 안에(in nobis) 거주해야만 한다.. Willem van't Spijker, "extra nos" and "in nobis" by Calvin in a Pneumatical Light," in Calvin and Spirit, 39-62. Spijker는 칼빈의 'extra nos'와 in nobis'의 통일성에 칼빈 신학의 역동성이 있다고 본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교류에 대한 칼빈의 중요한 교리를 만난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택에 참여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아무 것도 우리에게 수여하지 않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한 것을 제외하고 아무 것도 우리에게 수여하지 않는다.(Comm. John 16:4) 성령과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구별되나 분리되지 않는다.
칼빈이 우리 안에 있는(in nobis) 그리스도에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밖에 있는(extra nos) 그리스도, 즉 그리스도의 구원의 확실성을 손상시키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칼빈이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 cum christo)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면서 신비주의에서 논의되었던 내향성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이 unio mystica에 대해서 말할 때, 이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어떤 실제적인 통합도 본질에서의 동등함도 수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의 교제만이 있기 원하는 것이 칼빈의 신비적 연합의 내용이다. 그래서 칼빈은 본질의 연합을 주장하는 안드레아스 오시안더(Andreas Osiander)의 주장을 예리하게 반박하였다. 칼빈에게서 extra nos와 in nobis의 관계는 우리의 구원의 객관적 확실성을 보장해주면서 동시에 성령의 사역에 의한 생활의 새로운 변혁을 제시한다.. Ibid., 50-51.

칼빈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III.2.25에서 신앙과 연합에 대하여 간략하게 묘사한다. 그(하나님)가 성령에 능력에 의해 우리를 신앙으로 조명할 때, 그리스도는 동시에 우리를 그의 몸으로 접붙여 우리가 모든 선의 참여자가 되게 한다. 그에게 있어서 성령의 사역과 접붙임을 동시적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III.11.10에서 신비적 연합을 언급하며, 이것을 여러 가지 용어로 묘사하는데 그리스도에 접붙임(engrafting)이란 용어를 가장 자주 사용한다. 칼빈은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하여 하나님의 본질의 연합에 대한 어떤 개념도 거부하며, 하나님과 신자의 연합은 성령을 통한 영적인 연합으로,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의 연합이란 삼위일체적인 요소를 포함한다.. Dennis E. Tamburello, Union with Christ : John Calvin and the mysticism of St. Bernard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4), 105-6.

칼빈은 신자와 그리스도의 신비적 연합을 가져오는 믿음이 성령의 역사로 생겨난다고 보았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로 생겨나는 믿음은 구원의 확신을 포함하고 있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믿음이 구원의 확신을 포함한다는 칼빈의 견해와 확신을 믿음으로부터 구별한 청교도들의 견해 사이의 연속성의 문제를 둘러싸고 세 가지 의견이 제시되었으며 아직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첫째로 윌리암 커닝햄(William Cunningham), 로버트 댑니(Robert Dabney), 그리고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신앙과 확신 사이의 종교개혁 이후의 구별을 칼빈 교리의 질적 발전으로 해석한다. 이들은 칼빈의 견해가 17세기 청교도들에 의해 취급되고 명료하게 밝혀진 목회적 관심들에 무지하거나 혹은 모순된다고 해석한다.. Randall C. Glearson, John Calvin and John Owen in Mortification: A Comparative Study in Reformed Spirituality(New York: Peter Lang, 1995), 21.
둘째로 켄달(R.T.Kendall)과 레인(Antony Lane) 등은 청교도들의 신앙과 확신의 구별이 칼빈의 입장으로부터 질적으로 이탈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세째로 헬름(Paul Helm)과 비크(Joel R. Beeke)는 두 번째 그룹의 학자들의 견해를 비판하고 확신을 믿음에 포함시키는 입장과 확신과 믿음을 구별하는 청교도의 입장이 조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켄달이 1979년에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를 저술하여 칼빈과 청교도들의 신학 사이에 변질이 일어났다고 주장한 이후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하여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켄달은 청교도들은 칼빈이 아닌 베자의 신학의 계승자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특별히 칼빈은 믿음의 본질에 확신을 포함시켰으며, 인간 편에서의 믿음을 위한 준비를 부정하였고(믿음의 수동성 강조), 구원하는 믿음을 가지기 위한 자기 검토(실천적 삼단논법)를 부정하였다고 주장하였다.. R.T.Kendall, Calvin and English Calvinism to 1649(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79), 24-28.

켄달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헬름(Paul Helm)은 두 가지를 비판하였다. 첫째로 헬름은 믿음이 확신을 포함해야 한다는 칼빈의 정의는 믿음의 당위성에 대한 설명인데 반하여, 칼빈은 여기에 약간의 제한을 가하여, 확신 없는 믿음도 있을 수 있으며, 그러한 믿음에는 확신이 수반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Paul Helm, Calvin and Calvinist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서 종대역(생명의 말씀사, 1988), 49, 50.
두 번째로 헬름은 칼빈은 개인의 구원이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한 것임을 강조하나, 개인적인 구원의 증거는 영적, 도덕적 갱신을 통하여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지적한다.. Ibid., 54.

그 후에 레인(A. N. S. Lane)은 헬름의 견해를 비판하여 칼빈의 믿음의 본질은 확신을 포함한다는 것과 함께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는 개인적인 검토가 아니라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레인은 칼빈에게서 기독교 강요 1권7장-9장의 성경의 권위에 대한 성령의 내적 증언과 기독교 강요 3권 2장에서 말하는 복음이 제시하는 자유로운 약속을 믿어 구원의 확신을 갖게 만드는 성령의 내적 증언은 동일하고 하나라고 주장한다.. Anthony N. S. Lane, "John Calvin : The Witness of the Holy Spirit," in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 Calvin's Theology, Theology Proper, Eschatology, ed., by Richard C. Gamble(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Co., 1992), 107-121. 비슷한 견해에 대해서 다음 논문을 참조하라. Jelle Faber, The Saving Work of the Holy Spirit in Calvin in Calvin and the Holy Spirit, ed., by Peter De Klerk(Grand Rapids: Calvin Studies Society, 1989), 2, 6.
성령은 내적인 교사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약속이 우리 심령에 파고 들어가는 하는 양자의 영으로(Inst., III.1.; III.24.1), 우리의 죄와 구원에 대하여 우리에게 확신시킨다.(Inst., III.2.11; III.1.3) 그러므로 레인은 성령의 내적 증언으로 주어지는 믿음은 이미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후에 비크는 이러한 논의를 종합하면서도 전통적인 견해에 따라 칼빈과 청교도의 연속성을 인정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칼빈의 신앙의 정의에 포함된 확신과 신앙의 흔들림, 불안, 의심의 양자의 관계를 신앙의 정의와 경험, 영과 육의 구별, 신앙의 발생 대 신앙의 의식, 삼위일체적 구조와 실제적 삼단논법의 견지에서 논의하였다.. Joel R. Beeke, Assurance of Faith: Calvin, English Puritanism, and The Dutch Second Reformation( New York, London: Peter Lang, 1991), 47-77.

그는 칼빈의 신앙의 정의와 경험의 괴리를 인정하지만, 양자 사이에 말씀 안에서 유기적 통일성을 인정한다. 비크는 칼빈의 경우에 신앙은 성령의 씨이기 때문에 신앙은 확신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고, 확신은 규범적이지만 신자의 의식의 견지에서 정도와 지속성에서 변화한다고 하였다. 칼빈에게서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강조하지만, 이차적으로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선행의 이차적이고 종속적인 중요성도 강조되어 실천적 삼단논법이 암시적으로 나타나므로, 강조점은 다르지만 청교도와 연속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 양호 칼빈: 생애와 사상(한국신학연구소, 1997), 150-4. 이 양호는 칼빈의 신앙과 확신의 관계에서 성령의 역사가 중심적이고 인간 편에서의 실천적 삼단논법에 의한 검토는 주변적인 것이라는 그의 동심원적 해석 방법을 제시한다.


이제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검토해 볼 때 성령의 역사와 믿음의 확신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칼빈은 헬름과 비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신앙 속에 의심, 불안의 요소가 나타나는 경우를 인정하지만, 그의 경우에 신앙은 사람 편에서의 산물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생겨나는 것으로 처음부터 확신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러한 믿음은 근본적으로 성장하여 나가는 것으로 보았다. 노이저(Neuser)는 기독교 강요 3권 1장에서 칼빈이 모든 사람이 복음을 통하여 제공되는 그리스도와의 교류를 분별력 있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비밀한 활동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이러한 서술은 신앙의 발생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Wilhelm Heinrich Neuser, "Theologie des Wortes - Schrift, Verheissung und Evangelium bei Calvin," in Calvinus Theologus. Die Referate des Europaaischen Kongresses fur Calvin forschung vom 16. bis 19 September 1974 in Amsterdam, Hrsg. von Wilhelm Heinrich Neuser(Neukirchen-Vluyn : Neukirchener Verlag, 1976), 27-9.
노이저는 칼빈은 기독교 강요 3권 2장 1-6절에서 성령을 언급하지 않고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말씀이 신앙의 토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 III.2.33에 있는 성령의 조명이 없으면, 말씀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믿음의 발생이 아니라, 믿음의 확신에 적용된다고 한다. 그러나 Fella는 이사야 59장 21절 주석을 추가적인 근거로 제시하면서 이것을 신앙의 발생과 확신의 양자에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한다.. Fella, "The Saving Work of the Holy Spirit in Calvin," 6.
그러므로 칼빈은 성령이 믿음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장시켜, 드디어 우리의 믿음으로 천국에 가도록 인도한다고 하였다.(Inst., 3.2.33) 그러므로 칼빈에게서 믿음의 발생이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구원의 객관적 사역이 성령의 역사로 우리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칼빈은 신자들이 믿음을 의식하는데서 연약해서 언제나 이 확신을 붙잡을 수 없을 때조차, 믿음의 아무리 작은 씨라도 바로 본질에서 확신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였다. 믿음의 뿌리는 신자의 가슴에서 결코 뽑히는 법이 없고 가장 깊은 속에 굳게 박혀서 믿음이 아무리 흔들리고 전후 좌우로 구부러지는 것같아도 그 빛은 결코 꺼지지 않으며, 이를테면 적어도 재밑에 있다.(Inst., III.2.21) 이러한 믿음의 씨는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 선택된 사람의 믿음이 아무리 약해도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양자되었다는 확고한 보증과 날인을 해줌으로써(Comm. Eph.1:4; IICor1:22) 그가 새겨 주신 표징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말소되지 않는다.(Inst., III.2.12) 그러므로 칼빈에게서 믿음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인 복음을 신뢰하는 것으로 그 속에 확신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칼빈은 역사적 배경에서 볼 때도 구원의 확신을 부정하던 로마 카톨릭과 싸우면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만을 통한 구원의 확신을 심어주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로마 카톨릭의 맹목적 신앙(implicit faith)에 반대하여 확실한 믿음을 수립하고자 하면서 그가 믿음과 확신을 분리시켰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시대적 필요성에 따라 새로운 강조점을 가져와 그들은 구원의 확신이 나중에 생겨나는 것으로 보고, 그것에 대한 증거를 자기 검토에서 구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면 칼빈과 청교도들의 신앙관을 대립적으로 파악할 것인가? 칼빈은 믿음을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고 청교도들은 그것을 인간의 노력과 자기 검토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는가?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이미 칼빈에게서도 비크가 지적한 대로 실천적 삼단논법이 암시적으로 나타나 있었는데 청교도들은 서로 다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실천적 삼단논법을 강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칼빈과 청교도들의 강조점의 차이는 양적인 것이지 질적인 것은 아니다.

3. 성령과 성화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3권의 2장에서 믿음에 대하여 논의한 후에 3장에서 회개, 즉 성화에 대하여 논의한다. 칼빈은 구원의 서정에서 중생(회개)과 신앙의 순서 대신에 신앙과 중생의 순서를 따른다는 사실은 구원의 적용에서 신앙의 전체적인 중요성과 위치를 설명해 준다. 아브라함 카이퍼와 루이스 벌코프는 칼빈의 표현이 형식적으로 신적인 것보다 인간적인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그것을 오히려 주관적인 것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칼빈은 사색을 혐오하여 올바르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 신앙의 관계를 강조했고, 신앙이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하여 주관주의의 덫에 떨어지지 않는다.. Fella, The Saving Work of the Holy Spirit in Calvin, 6. Herman Hoeksema는 칼빈의 구원서정론이 논리성이 없고 불안정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칼빈이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서 일으키는 변화와 의식 가운데 일으키는 변화로 구분될 수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칼빈은 모든 순서를 의식의 차원에서 논하였다. 칼빈은 모든 순서를 다룸에 있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객관적 사역과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이루시는 주관적 사역을 충분히 구분하지 아니한 때문에 성화가 칭의보다 앞서는 이상한 순서를 제시하게 된 것이다.(Reformed Dogmatics(Reformed Free Publishing Association, 1976), 447) 아브라함 카이퍼는 칼빈의 구원서정론은 하나님의 역사보다 인간의 활동면에 치중하여 주관적인 경향을 면치 못하였다고 하였다.(Dictaten Dogmatiek(Kampen, 1910), De Salute, 17) 벌카워 교수는 칼빈은 구원서정을 논함에 있어서 그의 관심을 오로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치중하고 신앙하는 사람에게 두지 아니하였다. 칼빈은 성령을 통해서만 구원의 약속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올 수 있다고 하였다. 성령은 천국의 열쇠를 우리에게 열어 줄 수 있는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신앙은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현상이라는 입장이 칼빈의 구원 서정에 걸쳐 일관된 원리이다.(Faith and Justification(Eerdmans, 1977), 28)

그리고 칼빈에게서 협의적인 의미에서 중생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Inst., III.1.2) 광의적 의미의 중생인 회개는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후에 일어난다.
칼빈은 복음의 전체 내용은 회개와 죄의 용서 즉 성화와 칭의 인데, 기독교 강요에서 회개를 먼저 논했다. 칭의 후에 성화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성화를 먼저 다룬 것은 성화를 올바로 이해하면 칭의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께서 자기 백성을 값없이 의롭다 하시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영에 의한 성화를 통해서 그들을 진정한 의에 복구시키려는 것이 아닌가?(Inst., III.3.19) 칼빈은 성령은 신앙뿐만 아니라 회개를 일으키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성령이 지배하셔서 믿음을 가진 사람, 즉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체험한 사람이 회개를 한다.(Inst., III.3.2) 회심의 권고의 효과는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효과에 달렸기 때문에 회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선물이다.(Inst., III.3.21) 그러므로 회개는 믿음에 뒤따라올 뿐만 아니라 믿음에서 생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믿음보다 회개가 선행한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Inst., III.3.1) 회개의 근원이 믿음이라는 말은 믿음과 회개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은혜가 앞서야 회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성령이 지배하시지 않는 곳에서는 올바른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은혜가 선행하지 않으면 회개하여 용서받을 수 없다.(Inst., III.3.24)
회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우리의 생활을 하나님 쪽으로 전향하는 것으로 옛 사람과 육을 죽이고 성령에 의한 삶으로써 성립된다.(Inst., III.3.5) 회개는 죄를 떠나고 마음이 변화되어 공의와 자비의 열매는 맺는 것인데, 성령이 우리 영혼을 감화시킬 때에만 일어난다.(Inst., III.3.8)
우리는 그리스도에 참여할 때(ex Christi participartione) 본성을 죽이고 영을 살릴 수 있다.(롬6:6) 그러므로 칼빈은 회개를 중생이라 해석하는데 회개의 유일한 목적은 아담의 범죄로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한 순간이나 하루나 한해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이 필요하다. 신자들이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의 경주를 하게 하시며, 평생을 두고 달리게 하신다.(Inst., III.3.9)
신자들이 성령의 주시는 힘을 받아 죄에 대하여 우세하게 되며 싸움에게 이기지만, 중생한 사람 안에도 악을 촉발시키는 불씨(fomes)가 남아 있어서 끊임없이 정욕의 불꽃이 튀어나와서 죄를 꾀며 자극한다.(Inst., III.3.10) 그러므로 칼빈은 재세례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결한 상태로 회복되었으니 육의 정욕을 제어할 필요가 없고 지도자인 성령을 따르면 결코 빗나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라 비판한다. 재세례파는 성령이 시키는 대로 믿고 대담하게 복종하면, 성령은 악한 일을 명령하지 않을 것이라 하나, 칼빈은 성령은 선악을 분별하지 않고 돌진하는 경박한 영이 아니라, 지혜가 가득하고 공정과 부정을 바르게 분별하는 총명이 가득한 분이시며, 사람에게 한도와 절제를 지키도록 가르치시는 영이라고 지적하였다. 성령은 신자를 성화시키기 위해서 파견되셨으므로, 많은 죄와 무기력에 둘러 싸여 있는 신자들은 꾸준히 계속해서 전진하면서, 죄와 싸워야 한다.(Inst., III.3.14)
회개에서 생기는 열매는 하나님께 대한 경건과 사람에 대한 사랑과 생활 전체의 성화와 거룩이다. 성령께서는 율법을 표준으로 삼아 우리의 회개를 재촉하신다. 성령은 먼저 우리의 속마음의 원천이 불결한 것을 정죄하시고, 그 다음에 진지한 회개의 표지인 외면적인 증거를 나타내도록 하신다.(Inst, III.3.16) 그리스도인은 일생 동안 죄악된 본성을 죽이려고 노력하고 훈련하여,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주관하시게 하는 것이다.(Inst., III.3.20)
헤셀링크는 칼빈이 성화의 한 특수한 측면으로 성경 혹은 복음의 설교에서 분리된 우리의 일상 생활을 위한 일반적이고 특별한 지혜와 지시를 성령으로부터 얻는다고 말한다.. I. John Hesselink, Governed and Guided by the Spirit - A Key Issue in Calvin's Doctrine of the Holy Spirit, Calvin Studies V, 1990, 29-34. 그는 여러 증거를 드는데, 두 개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주님은 성령에 의해 우리의 마음을 지도하고, 구부리고, 그리고 통치하고 그의 소유로서 마음 안에서 지배한다. ---그들이 성령을 통하여 중생하여 그의 지도에 의해 감동받고 통치받는 것은 명백하게 선민들의 특권이다.(2.3.10) 우리가 이러한 시도에서 하나님께 성령으로 우리를 인도하고(conduise) 다스리시도록 간구할 때, 사람들은 자비와 함께 공개적으로 언급된 것에서 화낼 수 없다.(Sermon Deut. 5:20)
칼빈은 신비주의자는 아니지만 삶의 구체적인 측면에 대한 그의 언급에는 신비적인 측면이 있다. 물론 성령의 이러한 인도가 성경의 교훈에 모순되는 방법으로 인도하는 것도 아니고, 성경에 없는 새로운 계시를 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지속적으로 성령의 인도와 통치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오직 성령을 통해 우리를 부분적으로만 조명하시므로 어떤 기독교인들도 성령의 충만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온전하게 전달하실 때까지 은혜를 더욱 증가시키고, 그러는 동안에 그의 성령으로 우리를 지탱하고 통치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Sermon. Eph. 2:8-10.
우리는 성령에 의해 인도받아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형성되도록 하나님에 의해 개혁되고 변혁되는 것이다.
칼빈은 성령의 이러한 특별한 인도에 대하여 밀너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성령의 비밀한 충동(arcano instinctu spiritus)이란 특별한 기술적 용어(terminus technicus)를 사용한다.. Milner, op. cit., 200-1. 밀러는 불신자의 경우는 성령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한 충동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하지 않고 행동한다고 한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갑자기 주님을 인식한 것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은 그가 제자들에게 이전에 제공했던 성령의 비밀하고 숨겨진 은혜의 생생한 인식으로 그들을 인도했다. 하나님은 때때로 잠시 동안 그들이 성령의 능력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최소한 그들이 그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하나, 오직 비밀한 충동으로 인식하는 방식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역사한다.. Comm. Luke 24:32.
이러한 언급에서 칼빈은 제세례파의 입장에 근접한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칼빈은 기본적으로 성경과 성령의 통일성의 전제 위에서 성령의 일상생활의 인도의 측면을 언급하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에도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도록 역사하신다.
칼빈은 구원 과정을 구성하는 개념들을 배열하는 일에 착수한 최초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구원 서정의 순서에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 3권에서 그리스도의 객관적 구원 사역이 사람들에게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논하면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성령의 역사로 인간에게 믿어지게 되고(1장), 그 결과 믿음(2장)이 생겨나고 거기에서 회개(3장)가 가능하다. 이 회개의 과정은 6장-10장에 걸친 기독교인의 생활로 전개되며, 그 후에 칭의에 대하여 11-18장까지 다루고 19장 기독교인의 자유, 20장 기도 21-24장은 예정 25장은 최후의 부활을 다루고 있다. 칼빈은 이 모든 과정이 성령의 역사로 일어난다고 하여 그리스도의 은혜가 인간에게 적용되는데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는 알미니안주의자들과는 명백하게 구별된다. 그리고 칼빈이 말하는 회개는 중생이라고도 하는데, 회심, 성화, 신앙적 투쟁 등을 포함하고 있다.
칼빈은 그리스도들의 최후의 소망인 영화도 성령의 사역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축복이라고 설명한다.. Fella, op. cit., p. 7.
칼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할 때마다, 성령을 하나님의 대행자라고 하여 부활을 기독론적이고 성령론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그와 우리를 함께 살리시는 분이신 성령의 능력에 의해 살아나셨다(Inst., III.25.3)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의 영화에서도 역시 생명의 주이고 수여자이다. 칼빈은 결론적으로 성령의 임재 안에서 영화롭게 되는 것없이 기독교는 설 있을 수 없다고 한다.

V. 성령과 교회

칼빈은 기독교 강요 4권에서 교회의 본질, 교회의 정치, 교회의 직제와 권세, 다음으로 성례 등 교회론에 대하여 논하였다. 칼빈의 교회론 중에서 성령론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몇 가지 점들을 고찰하고자 한다. 칼빈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가 장로교회의 4중 직제와 조직 원리를 제시한 것이다. 그는 1541년의 제네바 교회 법규와 기독교 강요에서 목사, 교사, 장로, 집사의 4중 직제를 논하였다. 교회 법규와 기독교 강요의 직제에 대한 논의는 주로 이들의 선출 방식이나 임무 등과 같은 외적인 측면을 다루었고, 그들의 소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성경 주석과 설교 등에서는 성직자들의 소명을 성령론과 연결시켜 심도있게 논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주로 성직자들에 대한 소명과 성령의 관계와 함께 설교와 성례와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1. 성령과 목회자의 소명

교회의 사역자에 대한 칼빈의 교훈은 공적 사역의 제도적 측면과 영적 차원이 서로 분리할 수 없을 정도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측면은 목사의 소명을 자신의 내적 소명과 함께 교회의 청빙에 의한 외적 소명을 연결시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Inst., IV.3.11) 칼빈은 공적 사역론에서 4중 직제를 제시하면서, 그들이 성취해야 할 기능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Briam Amstrong, "The Role of the Holy Spirit in Calvin's Teaching on the Ministry," Calvin Studies V(1989), 99-100. Amstrong은 현재까지 칼빈의 4중 직제론이 너무 강조되었다고 지적하면서, 칼빈은 직제의 숫자는 바뀔 수 있다고 보았고, 기능의 성취를 더 중요시하였다고 보았다.

교회의 다양한 사역은 웬델의 지적과 같이 성령의 다양한 은사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Francis Wendel, Calvin,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His Religious Thought(New York: Harper & Row, 1963), 303.
교회의 각 직분의 기능은 성령의 은사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면 칼빈은 4중 직제 중에도 특별히 목사의 소명과 성령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목사의 직분론에서 루터는 만인제사장의 원리에 입각해 있는데 반해, 칼빈은 성직자들의 계급 제도 그리고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가르치는 교회와 배우는 교회로 엄격하게 구분하는 카톨릭의 입장을 반대한 점에서 루터와 동일하게 만인제사장의 원리를 받아들이나, 교회의 직제를 논하면서는 거의 만인제사장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에서 봉사자로서 목사의 권위를 높이고 있다.. 김 영재, 한국 기독교의 재인식(엠마오, 1994), 100-103. 목사직의 위치에 대한 루터와 칼빈의 이해가 다른 것은 루터가 초기에 회중교회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서, 만인제사장직에 입각하여 교직자의 위치를 평신도와 동일한 것으로 보지만, 칼빈은 교회를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으로 목회자도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에게서 목사의 직분은 말씀의 설교와 성례의 집행을 통한 교회의 다스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사역을 수단으로 하여 교회를 다스리신다.(Inst., IV.3.3) 하나님은 사람들을 시켜서 자기의 교회를 다스리기로 작정하셨으며, 비천한 사람들 중에서 자기 말씀의 사역자들을 선택하신다.(Comm. Luk. 10:16) 목사는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신 직분자로 큰 위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직분의 위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직분의 올바른 수행에서 나오는 역동적인 것이다. 복음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특권을 가진 사신과 우리에 대한 그의 선의의 보증으로 우리에게 파송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위엄이 아닐 수 없다. 사역자들에게 권위가 주어진 것은 이 좋은 소식을 우리에게 선언하고 우리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더욱더 확신시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올바르게 임명받은 사역자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화해되셨다는 점을 복음으로 선언할 때,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대변자로서의 공적 임무를 수행하고 이것을 우리에게 선언할 정당한 권위를 부여받은 하나님의 사신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하다.(Comm IICor. 5:18)
칼빈은 말씀을 통한 교회의 통치자로서 중요한 위치를 가진 목사의 소명과 공적 사역자로서의 기능 수행에서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칼빈은 성령의 비밀한 혹은 내적 소명이 없이는 목회 사역에 대한 어떤 근거도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다스리고, 영원한 구원의 대사직을 수행하며, 지상에 하나님의 왕국을 세우고 사람을 하늘 위로 들어올려야 하는 목회 사역의 성격과 임무의 어려움에서 기인한다. 목사는 사역의 수행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가 그에게 성령을 내려 주시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사역자들과 목사들을 임명해서 교회를 다스리도록 하셨는데, 유한한 인간치고 그렇게 어려운 임무에 적합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성령의 영감을 받기 전에는 적합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성령의 충만함이 그리스도에게 쏟아 부어져서 그 분은 각자에게 적절하게 성령을 부어 주실 수 있으시다. --- 그리스도는 목회 사역(pastorale munus)으로 부른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필요한 은사들을 채워 주신다.. Comm. Joh.20:22.
하나님께서는 직분자들에게 필요한 은사들을 먼저 주시고 그들을 부르신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소명을 받을 때는 언제든지 그 직분에 연결되어 있는 은사들이 필연적으로 뒤따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도나 목회자를 세우실 때, 그 사람들에게 외면적으로만 자격을 부여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은사들을 주어서 자기의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해 주신다.(Comm. Eph. 4:1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목회에 필요한 은사들을 채워 주신 사람들이 목회자로 부름 받게 된다.
칼빈은 교회의 교화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목사에게 말씀의 선포를 통한 공적 사역을 맡기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목사들의 통치는 세상적인 통치자들과 같이 물리력을 사용하여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말씀을 가지고 섬기는 것이다. 칼빈은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고 교회의 종이라는 것을 명확히 밝히면서, 목사와 종이란 용어를 교대로 사용한다.(Comm IICor. 4:5) 목회자는 말씀을 가지고 섬 기는 사역을 감당할 때, 스스로의 능력을 자랑해서는 안되고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그의 교훈이 무익하지 않고 열매를 거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Inst., IV.1.6) 칼빈은 목사들의 말씀 선포의 사역의 결과로 성도들의 성장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한다.(Comm. Eph. 4:12-4) 이와 같이 목사의 이론적 지위보다 실제적이고 기능적인 지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칼빈 신학의 근본적으로 실천적이고 목회적 차원이 드러난다.

2. 성령과 설교

칼빈은 목사들이 성령의 은사들을 통하여 자격을 갖추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부름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준비해야 할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설교자는 성실하게 준비하고 말씀을 선포하러 나가야 한다. 그는 만일 내가 겸손하게 책이라도 들여다보지 않고 경솔하게 아 좋아, 내가 설교할 때 하나님께서 할 말을 내게 주실 꺼야라고 하면서 선포해야 할 것을 읽거나 생각해 보는 수고도 하지 않고, 성경을 회중에게 어떻게 적용해야 할 지를 생각해 보지 않고 강단에 나왔다면 나는 매우 교만하고 건방진 사람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T. H. L Parker, 김 지찬역,존 칼빈의 생애와 업적(생명의 말씀사, 1986), 189에서 재인용.
목사가 성실하게 수고할 때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을 인간의 노력과 합력하도록 하신다.(Comm. Gal.4:19)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자기의 사역자로 뽑아 그들의 노력을 자신의 교회 건설에 이바지하게끔 하실 때, 그는 동시에 자신의 영의 숨은 능력으로 그들을 다스려 그들의 노력이 효과적으로 열매를 거두게 도와주신다. .(Comm. Luk1:16) 성령이 교역자를 통하여 열매맺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에 목회자의 사역에서 성령의 역사가 일차적이요 인간의 노력은 이차적이지만 목회자는 인간적인 노력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말씀 선포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결실을 맺는다. 목사는 기록된 성경 말씀을 설교한다. 목사를 통해 선포된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설교자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려면, 설교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을 충실하게 시행해야 하고, 성령의 역사가 수반되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 가운데 길을 열어 주셔야 비로소 설교 말씀이 들린다.(Inst., II.20) 성령께서 내적인 교사가 되어 조명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밝혀 줄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심령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Inst., III.2.25) 칼빈은 히4:12이 설교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나는 설교의 효율성이 틀림없이 사람의 혀로부터 오지 않고 목소리 자체에도 놓여 있지 않고 전적으로 성령에 귀속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Comm. Heb. 4:12)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 사역의 가장 중요한 차원이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결실이다.

3. 성령과 성례

성례는 주께서 세우신 약속이신 언약(foedera)의 표(symbola)로 주신 것으로, 주께서 그 무한하신 자비로 우리의 능력에 자신을 적응시키신 것이다.(accomodat)(Inst., IV.14.3) 그러므로 칼빈에게서 성례는 선행하는 약속을 확인하고 인치며 비준하는 것으로, 약속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어거스틴이 성례를 보이는 말씀이라 부른 것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그림에 그리듯이 분명한 형상으로 그려서 우리 눈앞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성례는 말씀에 기초한 믿음을 든든히 세우는 믿음의 기둥,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보여주는 거울로 비유할 수 있다.(Inst., IV.14.6) 이러한 성례의 효력은 성례시에 선포되는 말씀을 믿음으로 생긴다. 그러므로 성례에는 믿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복음선포가 필요하다.(Inst., IV.14.4)
말씀에 대한 믿음을 통해 성례의 효력이 발생하게 만드는 분이 성령이다. 성례는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확증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지탱하고 자라게 하며 강화하고 증진시킨다.(Inst., IV.14.7) 칼빈은 성례가 믿음을 증진시키는 것은 성례 자체의 비밀한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제정하신 목적에 기인하나, 성례가 그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려면 반드시 저 내적 교사인 성령께서 오셔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지성을 성령의 빛으로 비추시며 우리의 마음을 여셔서 말씀과 성례가 들어가게 하신다.(Inst., IV.14.8) 칼빈은 성령과 성례를 구별하여, 역사하는 힘은 전자에 있고, 후자에는 그 임무만 있다고 하였다. 경건한 마음이 성례에 의해서 믿음으로 강화되는 까닭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Inst., IV.14.9) 성령께서는 저 외적인 말씀과 성례를 우리의 귀로부터 영혼으로 전달한다.(Inst., IV.14.10)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성례에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의 임재를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신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Inst., IV.14.17)
칼빈은 세례가 성령과 분리된다면 아무런 남는 것도 없을 것이라 하였고, 물세례를 받을 때 양자의 영과 신생의 일반적인 은혜가 주어진다고 하였다. 그는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을 통해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을 뿐이고,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할 때 성령이 내린 것에 대해,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물세례받을 때 양자와의 영을 받아 중생한 것이고 성령이 내리신 것은 특별한 은사를 주신 것이라 하였다.. Comm. Acts. 8:14,16.
그는 성찬식에서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그 결과 성령의 능력에서 나오는 풍부한 선물을 받는다고 한다.. B. A. Gerrish, Grace & Gratitude: the Eucharistic Theology of John Calvin(Edinburgh: T&T Clark, 1993), 129.

칼빈은 이와 같이 목사들의 소명과 그들의 핵심적 임무인 말씀 전파와 성례의 시행이 모두 성령의 역사에 달려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힌다. 그러므로 목사가 선거를 통하여 교회의 직분자로 세워지는 공적 사역과 함께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영적 차원이 통합될 때 목회 사역은 실제적인 권위를 가지고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사역자의 위치 보다 오히려 기능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는 칼빈 신학이 이론적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실제적이고 목회적인 것임에 틀림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데 기여한다.

4. 성령과 은사

칼빈은 성경에 기록된 은사들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가? 오늘날 많이 논의되는 바와 같이 성경에 기록된 은사들이 초대 교회에 일시적인 은사들이며 그 이후 중단 것으로 보았는지 아니면 당시에도 계속 된다고 보았는지를 검토해 보자. 칼빈의 성령의 은사에 대한 논의는 로마 카톨릭과 재세례파 사이의 중도의 길로 모색되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모든 성령의 역사와 은사를 교회의 제도에 묶어 버렸고, 재세례파는 말씀과 분리된 성령의 독립적인 계시를 주장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칼빈이 성령의 은사를 논의하면서 제시한 입장을 검토해 보자.
칼빈은 오순절 성령 강림에 의한 방언을 복음 전파를 가장 짧은 시간에 폭넓게 알리시려는 최선의 수단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말한 방언은 신속한 복음 전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령께서 주셨던 그들이 알지 못했던 기존의 알려진 언어였다.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령 충만을 받아 방언으로 말하게 되었다.. Comm. Acts. 2:4. cf. Leonard Sweetman, Jr., What is the Meaning of theses Gift?: An illustration of the contextualization of the Gospel in the writings of John Calvin, Calvin Studies V(1987), 118.

사도행전 8장에서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의 설교를 듣고 세례받은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 안수해서 성령받은 사건을 통해 사마리아인과 유대인들은 한 몸으로 서로 결합하였다.. Comm. Acts. 8:14.
칼빈은 여기서 사마리아인들은 이미 빌립의 세례에서 중생의 성령을 받았고 사도들의 기도를 통해 성령받은 것은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으로 해석하였다.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의 가족이 성령받고 방언을 받은 것은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받으셨다는 것을 확신시키고 설득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서의 방언도 그들이 모르던 언어를 말하는 것이었다.. Comm. Acts 10:44, 46.
여기서는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방언을 하였다. 이것은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진정성을 확신시키려는 것이었다.
사도행전 19장 1-7절의 에베소 교회의 사건에 대해 칼빈은 바울의 가르침 후에 제자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것에 대해 에베소 교인들이 재세례를 받아 중생의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복음의 시초에 다양한 방법으로 분배하셨던 성령의 특별한 은사들을 받은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령이 있음을 듣지도 못했다는 말은 성령의 은사가 있음을 듣지 못했다는 말이다. 바울이 에베소교인들에게 안수하였을 때, 이 용어는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주는 성령으로 받는 세례(baptism with spirit)를 가리킨다.. Comm. Acts. 19:1-7.
이와 같이 칼빈은 사도행전에서 방언을 신속한 복음 전파를 위해 은사로 주어진 이전에 알지 못했던 기존의 언어라고 보았고 세례 후에 주어지는 성령 받음은 중생의 성령이 아니라 모두 성령의 특별한 은사를 받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면 칼빈은 고전 12:8-10과 고전 14장의 은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주석하였는가? 지식의 말씀과 지혜의 말씀에 대해 칼빈은 지식은 거룩한 일들을 깨닫게 하는 깨달음을 의미하며, 지혜는 그것을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였다. 지식과 지혜가 동시에 사용될 때, 지식은 일반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것을 의미하고, 지혜를 감추어진 것을 통찰력을 통하여 더 비밀하고 고차원적인 본질까지를 깨닫는 것이라고 하였다.(Comm. ICor 12:8) 믿음은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기적에 관계된 믿음이고, 치유의 은사에 대해 칼빈은 간결하게 모든 사람들이 치유의 은사가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다고 설명한다. 그의 이러한 언급은 로마 카톨릭의 종부성사의 오용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로마 카톨릭이 종부성사에서 기름을 부어 죄를 용서하고 필요한 때에 병에서 구원한다고 말하나, 이것은 야고보서 5:14-5의 오해한 것이라 보았다. 종부성사에서 기름은 치료의 도구가 아니라 성령과 은사들에 대한 상징이라고 명확하게 지적했다.(Inst., IV.19.18) 그는 치유의 은사는 다른 기적들과 같이 일시적으로 주셨으나 사라졌으며(Inst., IV.19.18). 칼빈은 막16:17절 주석에서 이러한 기적들이 임시적인 은사인지 아니면 그의 교회 안에서 영원히 지속될 은사인지 정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이러한 기적이 그 후 얼마 안되어 중지되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아니 그 실례가 희귀하게 되어 모든 시대에 동일하게 공동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판단을 내리게 된다고 하였다.
, 주께서 참으로 모든 시대에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셔서 옛날과 다름없이 필요한대로 그들의 연약함을 치료하신다.(Inst., IV.19.19) 여기서 칼빈은 치료의 은사에 대해서 로마 카톨릭의 관습을 배경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칼빈은 능력 행함은 마귀를 대적하며 위선자들을 축출하는 능력으로 생각하고 싶다고 하였다.(Comm. ICor. 12:9-10) 영들의 분별은 그리스도의 참된 사역자와 거짓된 사역자 사이에 예리한 판단을 하는 능력으로 이해한다.(Comm. ICor.12:10) 특별히 로마 카톨릭의 공의회들도 오류에 빠지므로 칼빈은 모든 사람의 영을 하나님의 말씀을 표준으로 삼아 시험할 것을 충고한다.(Inst., IV.9.12) 칼빈은 예언의 은사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밀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계시하는 유일하고 뚜렷한 은사로, 말하자면 선지자들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였다.(Comm. ICor.12:10) 칼빈은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사람을 모두 선지자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계시의 특별한 은사를 통해 예언을 문제되는 것에 적용하는 사람들을 선지자라고 불렀다고 하였다.(Comm. ICor 12:28; Eph. 4:11) 칼빈은 엡 4:11주석에서는 이러한 경우에 선지자에게서 장래의 일을 예언하는 것을 제외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은 현재 없거나 아니면 옛날같이 흔히 볼 수 없다.(Inst., IV.3.4) 그러나 고전 12:28절에서 칼빈은 선지자를 미래의 사건을 말하는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 말씀을 해석하여 당시의 문제에 적용하는 교회에 대한 사역의 은사로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은 선지자는 성경을 해석하여 당시의 필요성에 적용시키는 사람으로, 목사와 같다고 하였다.(Comm ICor. 12:28) 선지자는 장래 일을 예언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해석하여 교회의 필요성에 적용하는 인물로 보았다.. 칼빈은 교회가 다만 그 흔적과 그림자 정도만 유지하는 정도로 오랫동안 박탈당해 온 은사와 임무에 대하여 우리 마음을 결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자기와 다른 사람의 견해도 인정할 용의가 있다고 한다.(Comm. ICor 12:28)
칼빈은 선지자들을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를 바울이 교회 교화의 큰 근원인 예언을 다른 은사들보다 더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예언은 종교와 믿음에 대한 훈련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배와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책임감을 가지도록 우리를 가르치는 교훈을 의미하는 것이다.(Comm. ICor 14:3) 결국 칼빈에게서 예언은 영감된 설교로 환원하거나 혹은 상호 관련시키려고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칼빈은 사도행전 2장 17절에 인용된 요엘서의 예언한다는 말을 희귀하고 비범하고 뛰어난 지혜의 은사는 주는 것이라 해석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소수의 예언자들에게만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영적 지혜를 예언자들이 받았던 뛰어난 정도로까지 받게 될 것이란 의미이다.(Comm. Act.2:17) 여기서 예언은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계시를 이해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최종적으로 칼빈은 방언의 은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방언 통역의 은사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외국어를 성령의 놀라우신 계시로 받아 알게 되어 자국어로 해석하는 능력으로 보았다.(Comm. ICor. 12:10) 칼빈은 고전 14장에 있는 방언도 사도행전의 방언같이 외국 언어로 해석한다. 그 자체로서 이 은사는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복음을 선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Comm. ICor 14:5) 이러한 방언의 은사들도 중지된지 오래되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복음의 위대성을 입증하기 위해 받은 은사들을 야심에 이끌려 자기 과시와 허영에 잘못하였기 때문이다.(Comm. Act. 10:44; 10:46. cf. Inst., IV.19.19)
칼빈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엘버트(Paul Elbert)는 칼빈이 사도 시대와 관련한 어떤 은사들의 가정된 이용 불가능성과 불연속성 때문에 16세기에 은사들을 분배하시는 성령의 초자연적이고 역동적인 활동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초자연적인 은사들을 사람들의 자연적인 능력으로 환원시켰다고 하였다.. Paul Elbert, "Calvin and the Spiritual Gifts," in Articles on Calvin and Calvinism: An Elaboration of the Theology of Calvin(New York & London: Garland Publishing, Inc. 1992), 123. 칼빈이 그러한 견해를 취한 것에 대해 Elbert는 1) 초대 교회에만 나타나고 그 이후의 시대에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초대 교회에 한정된 것으로 보았으며, 2) 성경의 치유 실천과 관련된 로마 카톨릭의 익살스런 주장들의 비극적이고 무익한 사용의 환경적 맥락이었다. 3) 사람들의 불경건의 결점으로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고 묻혀 있었던(강요1.16) 복음의 설교를 영원히 놀랍게 만들기 위하여(강요4.19.18)였다. 4) 어거스틴은 로마서와 고린도전서에 있는 은사들의 일부는 하나님이 초대 교회를 세우신 뼈대이며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아마도 더 이상 관찰되지도 않고 어떤 은사들의 시행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뼈대 이론(scaffold theory)을 주장했는데, 이것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137-9)

이러한 해석에 대해 스위트맨(Sweetman)은 첫째로 앨버트가 16세기의 문제가 칼빈의 성경 해석에 영향을 미쳤던 방법을 무시하였다고 하였다. 스위트맨에 따르면 고전12-4장의 방언에 대한 칼빈의 주석은 그 당시 사회 환경에서 상황화되었다.. Leonard Sweetman Jr. "What is the Meaning of These Gifts?: An Illumination of the contextualization of the Gospel in the Writings of John Calvin," Calvin Studies V(1987), 125.
칼빈은 고전 12-14장에서 방언을 사도행전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이전에 몰랐던 다른 언어로 보면서도, 교회의 건덕을 위해 방언을 그 지방 언어로 번역하는 통역의 은사를 언급한다. 칼빈은 14장 14절과 16절의 주석에서 당시의 상황을 반영시켰다. 칼빈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마음과 분리된다는 언급이 당시 로마 카톨릭에서 평신도들이 라틴어로 기도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 암송하는 사적 기도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보았다. 16절은 공적 기도로, 사제가 라틴어로 기도하여 역시 평신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적용시켰다. 이러한 것은 칼빈의 성경 해석이 당시의 상황에 따라 상황화하였다는 증거라고 스위트맨은 보았다. 그러므로 칼빈은 고전 12장과 14장의 방언을 오늘날과 같은 초자연적인 방언이 아니라 사도행전의 방언과 동일하게 알지 못하는 기존의 언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았고, 그 결과 고린도 전서의 상황을 당시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예배를 비판하는 근거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칼빈의 주석에서 방언은 중단되었다고 보는 견해와 로마 카톨릭에서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기도하는 것을 방언으로 보는 입장과는 조화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칼빈은 고전 14:5절 주석에서도 우리 시대에도 방언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부르짖음이 있으며, 하나님이 놀라우신 은혜로 방언들을 구원하여 빛을 주실 때 반대하는 신학자들이 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14장 27절에서 헬라어와 히브리어같이 예언에 도움이 되는 방언이라 말하는 것을 볼 때, 그가 14장 5절에서 말하는 방언에 대한 지식은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방언을 초자연적인 은사로 주어지는 외국어라고 보면서도, 말하는 본인이 이해력을 결여한 것은 완강하게 거부한다. 그는 고전 14:14절 주석에서 성령의 역사로 그들 자신도 모르는 언어로 말을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럴 경우에 초자연적인 은사로서의 방언의 중단이 무엇을 의미하며 뛰어난 외국어 능력의 소유와 방언의 은사의 차이가 모호해지는 것같다.
이와 함께 칼빈이 영으로 기도하는 것이 이해력과 분리되어 엑스터시의 상태에 빠지는 것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은 급진 개혁자들의 말씀과 분리된 성령의 직접적인 신비적 역사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Comm. ICor 14:14-16)
둘째로 스위트맨은 앨버트의 성령의 역동적인 초자연적 활동과 능력과 일반적이고 개념적인 것을 구별하려는 분석이 칼빈에게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한다.. Sweetman, "What is the Meaning of These Gifts?" 125.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이성이 사람을 동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라고 한다.. Inst., II.2.12.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와 인간의 의식 활동의 괴리를 칼빈은 분명하게 거부한다. 헬라어를 모르는 로마인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헬라어를 말하도록 인도되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앵무새나 다른 없는 것이라고 한다.(Comm. ICor.14:14) 칼빈의 관점으로부터 성령은 자아의 합리적 활동을 포함하여 전체적인 자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하고 작용한다.
칼빈은 성령에 의해 교회에 다양한 은사들이 분배되는 목적에 대해서는 교회는 세우고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방언과 신유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들은 중단되었다고 본 반면에, 그리스도의 몸인 기독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은사를 받는다고 하였다.(Comm. ICor. 12:8) 왜냐하면 성령이 은사를 주지 않는 성도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자는 받은 은사로 만족하고 전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 Leonard Sweetman, Jr., The Gifts of the Spirit : A Study of Calvin's Comments on 1 Conrinthians 12:8-10, 28; Romans 12:6-8; Ephesians 4:11, in Exploring the Heritage of John Calvin(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76), 277-9.

성령의 은사들이 교회의 개인 구성원들을 공동체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도록 준비시키고 자격을 제공하는데 봉사한다. 칼빈은 주님은 사람들 사이에 그의 다양한 은사들을 분배하셔서, 어떤 사람도 그 자신의 은사로 만족해서는 안되고, 모든 사람은 그의 형제의 도움과 원조를 필요로 한다고 하면서 이것이 교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지정하신 결속이라고 하였다.. Comm. I Pet. 4:10; Inst., III.7.5.

칼빈은 신자들이 하나님이 주신 영적 은사들로 풍부해진 이유는 그들의 형제들을 세우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Comm. ICor.12:1) 칼빈은 교회 구성원들을 그리스도와 연결시키고 교인들을 서로 서로에게 연결시켜 교회를 재활성화시키려는 시도로 은사들의 상호 봉사의 목적을 강조한다. 성령의 열매와 은사의 작용을 통해 강화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개념은 유기적으로 한 몸을 구성하는데서 대단히 중요하다.(Comm. ICor12:20, 27) 칼빈은 그리스도의 몸의 개념을 대단히 중요시하였다. 그리스도는 신자들이 집단적으로 그의 교회를 구성함에 따라 신자들의 존재의 모든 측면에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Comm ICor.6:15a; Eph. 5:30; Inst., IV.17.9) 그리스도와의 이러한 영적 결합은 유기적 연결을 제공하고 여기서 우리에게 흘러나오는 생명을 쏟아 붓는 풍부하고 다함이 없는 샘으로 설명된다. 칼빈에게 주님은 교회가 성령과 밀접한 교제를 가짐에 따라, 성령의 임재를 통해 그의 몸인 교회와 접촉하고 친밀하게 결합된다.(Inst., IV.17.10)
로마서 12:4-8절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하나님의 주신 다양한 은사의 결과는 통일이고, 기독교의 덕들의 시행이며, 몸 안에서 영적인 성장이라 하였다. 낙관적으로 모든 선택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어(엡1:22,23참조) 몸의 사지들과 같이 함께 결합되고 짜여져서 한 몸으로 함께 성장한다.(롬12:5, 고전10:17, 12:12,27) 그들은 한 신앙, 소망과 사랑, 그리고 동일한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살기 때문에 참으로 하나가 된다.(Inst., IV.1.2)
제네바에서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의 목표들 가운데 하나는 공동체 의식과 상호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연합시키려는 것이었다. 칼빈이 인정하는 인간의 몸의 공동체적인 일치를 가진 신자들의 교제는 분명하게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발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역시 인정되는 성령이 발생시키는 사람들 사이의 공유를 통해 강화되는 이러한 기독교적인 관계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상호 사랑의 연합(요13:34)을 가져올 것이다. 이것은 모든 세대를 위한 목표이다.

나가는 말

칼빈의 성령론은 하나의 독립된 주제로 다루어진 것이 아니라 기독교 강요의 거의 모든 주제와 연관되어 있는 포괄적인 주제이다. 그러므로 그의 성령론의 내용을 한마디로 표현하거나 특성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종교개혁 당시의 로마 카톨릭과 급진 종교 개혁자들 사이의 중도에서 성령론을 정립하면서도 루터나 츠빙글리 보다는 훨씬 더 포괄적으로 취급하였다. 그래서 워필드는 칼빈을 성령의 신학자라 언급하였고 대부분 학자들도 이에 동감하고 있다.
칼빈은 성령이 단순한 신적 능력이 아니라 삼위일체의 제3위임을 강조하고, 성령께서 창조와 우주 질서를 유지하시며, 모든 사람에 공통적인 일반 은총의 근원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그의 성령에 대한 언급은 주로 교회와 관련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성령의 역사의 우주적 사역, 인간 사회의 일반 은총의 사역을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교회와 관련된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성령의 우주적 구원 사역을 주장하는 헨드리쿠스 벌코프나 몰트만의 성령론과는 다르다.
칼빈의 성령론은 당시 새로운 교리를 정립하면서 어디에 최고의 권위를 둘 것이냐 하는 문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로마 카톨릭은 교회가 성경을 결정했다는 입장이었고, 재세례파는 성경과 분리된 성령의 새로운 계시를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칼빈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은 객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객관적으로 기록된 성경은 성령의 내적 증언으로 우리에게 주관적으로 인식되는데, 이 주관적 인식의 내용은 신앙 안에서 믿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여기서 로마 카톨릭의 견해와 재세례파의 견해를 극복하고 최고의 권위로서 성령으로 영감된 성경의 권위를 확립하면서, 동시에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확신을 정립하게 된다.
칼빈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 밖에 있는(extra nos)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는(intra nos) 그리스도가 되며, 그 이후에 우리는 중생, 믿음, 칭의, 성화, 영화의 길을 가게 된다고 한다. 교회의 성직자들의 소명도 성령에 의해 주어지고, 교회의 설교와 성례도 성령의 역사로 결실을 맺게 된다. 그는 은사에 대하여 방언, 치유 같은 특별한 은사들은 사라졌다고 보았고, 세례와 성령에 의한 중생은 연합되어 있다고하여 은사론자들과는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성도들에게는 은사가 주어져 있는데, 이 은사들의 목적을 교회를 세우고 서로 돕고 유익하게 하려는 것임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성령론은 대단히 실천적이고 목회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출처: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우리 교우들은 목사도 연약한 인간이며 죄인이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기본적으로 바르게 하려는 목사는 부족함과 연약함이 있을지라도 기다려주고 참아주며 점점 더 농익은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사랑과 기도의 후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처음부터 온전하게 모든 것을 구비한 목사는 없다. 그런 목사가 하늘에서 떨어지기를 기대할 수 없다. 목사는 하늘이 내리는 선물이지만, 주님께서 이 선물을 완숙한 상태가 아니라 설익은 채 내려 보내신다. 이 선물이 완숙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데 우리 교우들의 역할이 크다. 좀 부족한 목사도 훌륭한 목사로 변화되게 돕는 아름다운 교우들이 있는 반면에 좋은 자질을 가진 목사도 기를 꺾어 아주 망가트리는 악한 교인들도 있다. 그런 이들은 하나님이 교회에 하사하신 ...선물을 짓밟는 악을 행하는 자들이다.

교인들이 의식이 깨이고 냉철한 판단력을 갖는 것은 좋은데, 교회에 대한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촉각만이 날카롭게 곤두선 채 교회를 겸허히 섬기려는 자세를 잃어버리는 것은 한국교회에 나타나는 또 다른 우려스러운 현상이다. 의식 있는 지성인들 가운데 웬만한 교회에서 신앙생활하기 힘들 정도로 비판의식이 지나치게 투철하여 교회를 세우는데 는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상당한 전문 지식을 가진 한 교인은 어떤 목사의 설교도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설교에 대해 비판적이고 부정적이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랐으면서도 그는 어떤 교회에도 나가지 않는다. 그의 날카로운 판단력에 은밀히 똬리를 틀고 있는 독한 지적인 교만이 불완전한 교회와 부족한 목사의 설교를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영적인 기인이 되게 한 것이다. 영적으로 성숙할수록 병들고 아픈 주님의 교회를 더 사랑하고 섬기며, 미숙한 목사라도 품어줄 수 있는 넉넉한 도량과 겸손을 겸비한 이들이 참으로 프로테스탄 정신에 투철한 그리스도인들이며 한국교회의 희망이다

 

박영돈목사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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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자필 예정론>

"첫 인간의 창조 전에 하나님께서 영원한 의논에 의해서 전 인류에 대해서 무엇을 행하시고자 하 시는지를 정하셨다(Ante creatum primum hominem statuerat Deus aetemo consilio quid de toto genere humano fieri vellet).

이런 감추어진 하나님의 의논으로 말미암아 아담이 자신의 순수한 상태로부터 타락하였고 그의 결함 때문에 그의 모든 후손들이 영원한 죽음의 진노 가운데 몰았다(Hoc arcano Dei consilio factum est ut Adam ad integro naterae suae statu degiceret ac sua deficeret ac sua defectione traheret omnes suos posteros in reatum aetemae mortis)

택자들과 유기자들 사이의 구별은 같은 성정에 의존하고 있다. 이는 어떤 이들을 구원에 이르도 록 택하셨고 다른 이들을 영원한 멸망으로 정하셨기 때문이다(Ab hoc eodem decreto pendet discrimen inter electos et reprobos: quia alios sibi adoptavit in salutem, alids aeterno exitio destinavit)

 
비록 하나님의 공의의 징벌의 그릇은 유기자들이고, 반면 택자들은 긍휼의 그릇일지라도, 구별 의 원인은 의의 최고 규범인 자신-하나님-의 유일한 의지 이외에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는 다 른 것이 아니다.(Tametsi iustae Dei vindictae vasa sunt reprobi, rurusum electi vasa misericordiae, causa tamen discriminis non alia in Deo quaerenda est quam mera eius voluntas, quae summa est justitiae regula).

비록 택자들이 믿음으로 채택의 은혜를 받지만, 선택은 믿음에 의존하지 않고 시기와 순서에 있 어서 그것에 선행한 것이다(Tametsi electi fide percipiunt adoptionis gratiam, non tamen pendet electio a fide sed tempore et ordine prior est)

믿음의 시초와 보존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선택으로부터 흐르는 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이외에 다른 자들이 참으로 믿음 안에서 조명받거나 중생의 영을 받지 못한다. 유기자들은 오히 려 필연적으로 자신의 눈이멀음 가운데 머무르거나, 그들 안에 없었던 것처럼 믿음의 부분으로 부터 떨어져 나간다(Sicut initum et perseverantia fidei a gratuita Dei electione fluit, ita non alii vere illuminantur in fidem, nec alii spiritu regenerationis donantur, nisi quos Deus elegit: reprobos vero vel in sua caecitate manere necesse est, vel excidere a parte fidei, si qua in illis fuerit).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을 받았을지라도, 순서에 있어서 주께서 우리를 자신의 것들 로 결정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지체로 삼는 일보다 앞선다.(Tametsi in Christo eligimur, ordine illud prius est ut nos Dominus in suis censeat, quam ut faciat Christi membra).

비록 하나님의 의지가 모든 것들의 첫 그리고 최고의 원이이고 하나님께서 마귀와 모든 불신자 들을 그의 자유의지대로 복종케하실지라도 하나님이 결코 죄의 원인이라고 부를 수 없고 악의 저자이거나 잘못에 대한 죄책이 있는 것이 아니다(Tametsi Dei voluntas summa et primum est rerum omnium causa, et Deus diabolum et impios omnes suo arbitrio subiectos habet, Deus tamen neque peccati causa vocari potest, neque mali autor, neque nlli culpae obnoxius est)

비록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참으로 미워하시고, 인간들 안에 있는 불의에 속한 것은 무엇이나 불 쾌해 하시기 때문에 진노하실지라도, 그의 순수한 허락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역시 뜻과 신비한 성정에 의해서 인간의 모든 일들을 다스리신다(Tametsi Deus peccato vere infensus est et damnat quidquid est iniustitiae in hominibus, quia illi displicet, non tamen nuda eius permissione tantum, sed nutu quoque et arcano decreto gubemantur omnia hominum facta).

비록 마귀와 유기자들은 하나님의 배역자들이고 도구들이며 그의 신비한 심판으로 종결될 것이 지만, 하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렇게 그들 안에서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역사하셔서 어떠한 것도 그들의 타락의 부패성으로부터 축소되도록 하지 않았다. 이는 비록 그 방식은 종종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을지라도, 그들의 악이 선한 목적에 바르고 정당하게 유익되게 하시기 때 문이다(Tametsi diabolus et reprobi Dei ministri sunt et organa, et arcana eius iudicia exsequuntur, Deus tamen incomprehensibili modo sic in illis et per illos operatur ut nihil ex eorum vitio labis contrahat, quia illorum malitia iuste reteque utitur in bonum finem, licet modus saepe nobis sit absconditus)

모든 것들이 그의 원함과 질서에서 일어난다고 하여 하나님이 죄의 저자라고 말하는 자는 미련 하고 중상하는 일이다. 이는 그들이 인간의 명백한 부패와 하나님의 신비한 심판 사이를 구별하 지 못하였기 때문이다.(Incite vel calumniose faciunt qui Deum fieri dicunt autorem peccati, si omnia eo volente et ordinante fiant: quia inter manifestam hominum pravitatem et arcana Dei iudicia non distinguunt)."

- 본 내용은 칼빈오페라 제9권 713-714 면에 있는 라틴어 원문을 김영규교수님이 번역하신 것입니다.

 

김종욱 목사 페이스북

 

칼빈의 핵심 교리(요약)

 

정준모

 

 

1.경건이란 무엇인가? 

 

경건은 칼빈의 신학과 삶의 핵심 주제며 교리이다. 그의 여러 문헌과 작품 속에서, 칼빈은 다각적인 측면에서 경건과 그 결과에 대하여 여러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경건은 칼빈 신학의 하나의 공통된 주제라기보다는 그의 신학 전반의 방향이자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칼빈에게 『기독교강요』는 경건의 총체와 구원 지식에 필요한 핵심 교리를 모두 포함한다. 그러므로 그는 이것을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열정을 가지고 읽어야 할 가장 가치 있는 책으로 간주하였다.

 

경건에 대해 언급한 후 칼빈은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하여 설명한다. 참 종교를 결정짓는 것은 경건이다. 칼빈은 경건을 외형적인 모습에 나타난 어떤 형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진실한 경건, 참된 신실함으로 표현되는 참된 경건은 하나님을 우리의 주로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것만큼 그분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그의 의로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그에 대한 거역이 죽음보다 더 악하다고 여기고 두려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종교나 경건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위엄과 긍휼을 찬양하는 자리에서도, 칼빈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능력들을 통해 종교가 발생되고 이런 능력들이 경건에 대한 우리의 좋은 스승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경건을 하나님의 은혜를 알면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포함된 경외라고 부른다.

 

칼빈은 경건을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스며있는 것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경건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수도 있는데, 그 첫 번째 발걸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감찰하시고 다스리시고 양육하시는 우리 아버지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회개의 열매들 가운데 하나인 경건은 거룩함 속에서 평생 성장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칼빈은 회개한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맺게 되는 열매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경건의 의무를 다하는 것과 모든 인간을 향하여 사랑을 베푸는 것, 그리고 전 삶을 통하여 거룩함과 순결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십계명에 대한 논의에서도 칼빈은 십계명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사랑과 경건을 실행할 의무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참된 경건은 바로 사랑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경건은 교회에 관한 정황 속에서 순수한 교리로부터 얻게 되는 믿음 있는 삶을 내포할 수 있다고 칼빈은 생각한다. 결국 칼빈은 이 개념을 성경의 전반적인 계시로 이해하면서도, 단지 경건의 교리만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보여주었다.

 

경건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그 어떤 것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임은 분명하다. 이것은 너무나 필수적인 것이어서 칼빈은 경건을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지는 시작과 중간, 그리고 마지막이며, 경건이 완성된 곳에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경건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경건의 개념을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근본적인 어떤 것을 일컫는 포괄적 개념으로 보았고 경건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경건은 사랑, 경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 그리고 경배의 원천이라고 인식하였다.
 
2. 하나님에 관한 지식
 
칼빈의 신학의 초기 집합체인『제 1차 신앙교육서』 2절에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지녀야 할 참된 경건”을 다룬 칼빈은 같은 책 3절에서 “그런 경건의 삶을 위하여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논한다.
 
먼저 칼빈은『기독교강요』1권의 주제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대단히 눈부신 극장으로 본 칼빈은 이 세상을 주께서 그의 영광의 놀랄만한 광경을 보여 주시는 극장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타락과 범죄로 인하여 영적으로 무지한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속성을 이해할 능력을 상실해 버렸다고 보았다.

 

따라서 칼빈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이나 귀신을 스스로 만들고 있음을 보고 안타까워하였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부터 그 분의 영원함, 능력, 지혜, 선하심, 공의, 그리고 긍휼과 같은 것들을 충분히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입장인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1:20)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칼빈의 인간 이해는 그들의 무지와 아집으로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나타난 일반 계시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근거한다. 『기독교강요』에서 그는 창조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선포하는 영광들과 죄로 인하여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를 상세하게 다루는 데 다섯 장을 할애한다. 그 다음에, 그는 성경을 창조주 하나님께로 나오려는 자에게 선생과 안내자로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칼빈의 명저인『신앙교육서』와 『기독교강요』에 기록된 성경의 목적은 창조 사역 가운데 거하시는 참되신 하나님을 명확히 보도록 돕는 것이고 그러한 창조 사역에 어울리는 감사가 우리 가운데 울려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신앙교육서』에서 칼빈은 창조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함은 단지 그분에 대한 참된 지식에 이르게 되는 첫 번째 단계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선과 긍휼을 깊이 생각할 때에 우리는 그것들이 가진 진정한 목적, 가치, 그리고 우리들에게 주는 의미를 인식하게 된다.

 

『신앙교육서』 3절의 마지막 문장은 『기독교강요』의 첫 장을 여는 중요한 문장이며, 모든 신학 문헌들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 가운데 하나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왜 그리고 어떻게 얻어지는가를 묻는다.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신앙, 그리고 사랑을 모두 포함하는 진정한 경건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앙을 지식으로 표현한 칼빈은 마음과 심정으로 이해하는 지식을 생각하였다. 이처럼 칼빈은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은 비록 말씀으로 알게 되지만 실제적인 지식에 의존한다고 강조한다.

 

지금까지 경건에 관한 관찰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사랑을 경건이라는 용어에 맞추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판별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에 관해 아는가에 있지 않고, 우리가 그 분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경건하고 거룩한 삶은 하나님에 관한 거짓되고 죽은 지식에서 참된 신앙을 구별하는 것이다. 덧붙여서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에 관한 모든 지식은 즉시 우리의 모든 사고들을 삼켜 버릴 거대한 심연과 같다고 꼬집은 칼빈은,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되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통한, 혹은 그리스도 중심의 하나님의 지식을 강조하였다.

 

3.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자유의지
 
인간 본성과 그 가능성에 대해 부정적이며 염세적인 견해를 가진 칼빈은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매우 처절하게 묘사한다. 그는 인문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과 이성에 관하여 그 어느 개혁자들보다 너그러운 자세를 취하였지만, 『신앙교육서』에서는 이러한 인문주의적인 영향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인간은 죄와 반역의 결과로 하나님께서 주셨던 모든 타고난 능력들을 박탈당하였으며, 단지 영혼이 결여된 육체만을 음미하게 되었다. 인간의 타락은 지성과 의지뿐만 아니라, 손상되어 부패해 버린 신체적인 능력에도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어떤 방향으로 우리가 눈을 돌리든지 결과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더럽고, 저속하고, 혐오스러운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에 관하여 칼빈은,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으며 여전히 인간의 부패로 잔존하는 모든 것은 무서울 정도로 추할뿐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죄의 결과로 영혼의 모든 능력은 죄로 점유되었고 저급한 욕망이 인간을 사로잡았을 뿐 아니라, 가증한 불경건이 인간 이성의 아성을 점령해 버렸으며, 교만이 그 마음의 은밀한 장소까지 침투해 들어갔다고 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전통적으로 사도 바울, 어거스틴, 칼빈 등이 전 인류가 아담으로부터 범죄를 저질렀으며 모든 인류는 이 사실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다는 것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칼빈은 최종적으로 인간의 마음이 죄의 독성에 빠져서 오직 죄의 열매만을 맺게 된다고 언급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맨 처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아담은 거울에서처럼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반영했을 것이지만, 죄로 지워져 버린 이 형상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음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회복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 안에서 강화된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 창조보다 이 두 번째 창조 즉,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회복된 성도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훨씬 더 풍성하고 강력하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자격을 얻게 될 여지를 갖게 된다고 칼빈은 보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자유의지에 관한 칼빈의 사상은 성경적이며 매우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죄인의 의지가 노예 의지이며, 이 의지는 하나님의 은혜로 도움을 받기 전에는 악을 자유롭게 선택할 뿐이라고 강조한다. 가장 어두운 색채로 죄악의 실체를 묘사하는 칼빈은 죄의 노예가 된 인간의 모습을 첨가시켜서 자유 의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칼빈은 자유 의지에 관해서 적극적인 입장을 갖게 된다. 타락된 상태의 관점에서 자유 의지를 바라본 칼빈은 “육체에 속한 인간은 전 영혼이 한결같이 죄 속에 거한다”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칼빈은 인간이 자유 의지와 노예 의지를 모두 갖는다고 말한다. 칼빈 자신은 이 문제를 쉽게 이해하거나 간단하게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의 근본 입장은 명확하다. 원래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았던 인간은 바람직한 구별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자기가 원하기만 했다면 자유 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따라서 아담은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오직 자신의 의지로 자기가 넘어지는 것을 알고 바로 설 수 있었다. 이 시점에서 인간의 자유의지가 왜곡되어 버렸던 것은 처음 인간이 지녔던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이와 같이 칼빈은 인간이 자유 의지를 부인함으로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는 결정론에 빠질 수 있으며 또한 인간이 노예 의지를 부인함으로 운명론에 빠질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칼빈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예의지를 모두 부인하지 않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즉 칼빈은 인간에 관한 결정론이나 운명론을 모두 거부한 반면, 그는 분명코 한 측면에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다른 한 측면에서는 노예의지를 인정하였다.

 
4. 십계명과 삶
 
칼빈은 전통적인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율법관을 따르지 않고, 사도 바울의 입장을 따르고 있다. 율법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그의 『신앙교육서』에서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칼빈은 율법의 세 가지 용도와 율법에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삶의 형태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하나님의 율법은 우리의 삶을 정확히 측정할 목적으로 당신이 친히 부여하신 규정 혹은 표준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참된 의로움과 인생의 길을 제시해준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 율법의 요구들을 성취할 수 없고, 따라서 율법은 죄인된 우리에게 일차적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비춰진다. 어거스틴의 말을 따라서 칼빈은 우리 자신의 의로움이 하나님에게는 무익하다고 본다.

 

율법은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관하여 우리를 지속적으로 훈육하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악을 버리도록 우리를 격려하고 권고하는 도구로서 유용하다는 점에서 그 유익성을 찾는다. 율법은 우리가 어떤 열매를 거둘 수 있으며 또한 그것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를 보게 하며, 우리의 행동을 제어한다. 이런 통제는 건전한 사회에 필요한 것이다. 율법은 이미 성령이 성도들의 마음에 사역하고 있음을 교훈하고 있다.

 

십계명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데 필수적으로 지켜야 하는 하나님의 표준이다. 칼빈은 십계명을 아는 사람이 온전하게 성경을 안다고 하였다. 칼빈은 율법에 대하여 다음의 세 가지 이해를 가진다. 우선 하나님은 영적인 율법 수여자이시기 때문에 율법은 영적인 것이다.
 
그리고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목적으로 이해되고 긍정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관점에서 십계명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은 그리스도를 율법의 심장, 영혼, 생명, 목적, 마침, 그리고 성취라고 하면서 율법과 그리스도의 관계를 노골적으로 진술한다. 따라서 율법은 오직 그리스도와의 관련 속에서만 해석되어야 한다. 부가적으로 율법이 반드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다. 이것은 모세의 마지막 네 권의 책들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강력하고 분명한 의미를 가진다.

 

칼빈은 십계명을 우리의 전 삶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행하여야 할 것에 관해 하나님께서 주신 가르침의 요약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은 계명을 주시면서 그 계명의 근거로 이스라엘의 해방을 상기시키셨는데,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백성의 자유의 주인이심을 밝히면서 그 자유를 누리는 길이 계명에 대한 순종임을 언급하며 율법과 자유의 관계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의견이 일치되는 바이다. 그 점에 있어서 칼빈도 역시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살도록 훈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어진 삶 속에서 어떻게 그리고 어디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가 파악하려고 노력할 때 문제는 더욱 복잡해지고 우리의 판단은 점점 흐려지기 쉽다.
 
특히 어렵고 명확하지 않은 윤리적 결정들에 직면하게 될 때 우리는 매우 혼란스럽고 당혹스럽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이 문제에 관해서 상대적으로 간단하게 대답한다. 왜냐하면 그는 단지 율법의 개념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율법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들을 거기에 기록해 놓으셨다. 우리가 알아야 될 모든 사항들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것이다.

 

칼빈은 율법과 그리스도를 동시에 취하여 작업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분의 형상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 안에서 회복되기 위하여 우리가 아들로서 입양되었다고 칼빈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의 정신, 생명, 목표, 그리고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율법은 모든 부분에서 언급하기 때문에, 참으로 율법의 모든 교리, 명령, 약속은 항상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최고 해석자일 뿐만 아니라, 율법의 본질이시며 완성이시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토론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순종의 삶을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율법보다 오히려 그리스도가 우리의 본받을 모델과 형상이라고 주장한다.
 
5. 그리스도 안에서 칭의와 자유
 
칼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칭의는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자유을 선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그로 인하여 그들의 삶 속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밝힌다. 이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다고 칭하시는 자유이며, 그리스도께 종노릇하는 자유이다. 또한 칼빈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곧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우리 하나님과의 관계와 경건한 삶의 기초이며 그분이 부여하신 은혜의 결과로 우리는 회개와 중생의 삶을 갖는다고 말한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순종을 통하여 얻으신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으로 나타나게 함을 뜻하는 것이다. 칼빈은 칭의가 두 측면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칭의는 전적으로 완전하게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과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로 자신을 장식하는 것이다. 칼빈은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의인으로 선언됨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데, 이 의미는 자신 안에 있는 어떤 무엇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의 어떤 세력에 의하는 것을 말한다.

 

그의 명저인『기독교강요』 최종판에서 칭의 교리를 정립하려고 시도하는 칼빈은 기독론적 차원에서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분명하게 연결시킨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관점에서 칭의로부터 진정한 자유가 파생된다고 보았던 칼빈의 사상은 그의 율법에 대한 입장을 잘 보여준다. 칭의와 자유의 관계를 오랫동안 생각하였던 칼빈은 양심이 칭의에 의하여 죄책에서 자유롭게 될 때에, 칭의의 중심적 의미는 분명하게 된다고 이해한다. 그는 진정한 경건에 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가짐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더욱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이런 자세는 반드시 믿음의 중요한 행동인 기도로 이어진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율법에서 자유롭다. 칼빈은 그 근거를 바울의 율법 폐지에 대한 언급에서 찾는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바울이 말하였을 때, 그것은 칼빈에 따르면 우리가 그 힘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율법의 엄격한 요구들과 그 요구들로 말미암은 저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따라서 폐지된 것은 율법의 규칙이 아니라 절대적인 완성을 위한 요구를 통하여 얻게 된 자유에 반대하는 요소이다. 이제 믿는 자는 죽음이 주는 두려움으로 괴로워하는 양심의 끝없는 속박이 주는 부담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마침내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에 의해서 ‘양심의 자유’라는 선물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친히 우리를 오랫동안 속박시켰던 율법에 복종하셨던 것이다. 따라서 법적인 요구들을 가지고 우리에게 대항하고 있었던 그 속박은 벗어졌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모든 율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자유가 하나님의 자유에 근거하며 그 자유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종은 율법 아래뿐만 아니라 복음 아래서도 요구된다. 그러나 양쪽에 대한 순종에는 차이가 있다. 복음에 대한 순종은 더 이상 율법의 명령들에 대해서 요구되는 엄격하고 혹독한 복종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인 순종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완전한 순종에 의하여 율법의 요구들을 충족시키셨다. 그래서 순종에 대한 의미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충족되는 것이다.

 

자유는 자율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진정한 주인을 찾는 것이다. 칼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예속된 자유임과 동시에 섬기는 자유다”라고 한 루터의 말을 반복한다. 즉,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섬김’ 그 자체이며 섬기는 자유이다. 진정한 자유는 순종 안에 거하는 자유이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외가 자발적이어야 하듯이 복종 또한 기쁨의 마음으로부터 이루어져야 한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만약 그것이 사랑과 감사로부터 생긴 것이 아니라면 믿음의 순종이 아니다. 그들의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열망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분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기쁨의 순종은 단지 그들이 율법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제 진정으로 자유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유롭게 사랑하고, 자유롭게 순종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자유롭게 따를 수 있다. 결국 오직 자유로운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의지적이며 자발적인 순종을 할 수 있다고 칼빈은 강조한다.
 
6. 선택 교리 
 
선택과 예정은 칼빈의 교리들 가운데 가장 강조되지만 또한 오해되는 것들 중 하나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에는 선택과 유기가 있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를 증거하는 수단이다. 선택은 자주 귀중한 하나님의 긍휼과 선하심을 보여준다. 칼빈은 예정을 하나님의 주권의 틀에서 이해하였다. 선택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서 예정되었다는 근거를 가진다. 칼빈은 선택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해되고 인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칼빈의 선택 교리는 성경적으로 바울의 신학적 입장을 철저히 따른다. 또한 그는 바울의 주장처럼 선택 교리를 인간의 구원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다. 이는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의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순전한 관대하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은 오직 주께서 그의 영원하신 선택에 의하여 당신의 자녀와 하늘나라의 상속자들로 예정하셨던 사람들 속에서만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는다고 보았다. 모든 사람이 동등한 조건으로 창조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인 예정은 각 개인에게 적용된다.

 

예정 혹은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교리는 칼빈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교리로서 『신앙고백서』, 『제네바 신앙교육서』, 그리고 『기독교강요』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칼빈은 이 교리를 중요한 것으로 여겼던 것이 틀림없다.

 

‘이중예정교리’는 인간 이성에 의하여 이해될 수가 없는 오묘한 진리이며 인간 이성에 장애물과 같은 개념이다. 칼빈은 이러한 어려움을 인식하고 예정된 자들과 유기된 자들에 대해서 주님 자신의 가장 합리적인 이유로 그들에 대한 각기 다른 행동을 우리에게 감추신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간파하려는 자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였다. 사실상 인간은 자신의 지혜의 지극히 경미함을 깨닫고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심판들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선택과 유기 사이의 평행 관계를 생각하는 일부 신학자들과는 달리, 칼빈은 누가 선택되었고 유기되었는지에 관해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가 이런 입장을 가지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약속들을 신뢰하는 것에서 나오며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곳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논의에 대해서 칼빈이 강조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는 은혜에 집중된다. 그가 우선 강조하는 사항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그분의 거저 주시는 자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교리는 믿는 자들에게 불확실성과 혼돈이 아닌 위로의 원천이 된다.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자신들의 구원과 선택에 대해서 확실한 입장을 가지지 못하였다. 칼빈은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그들에게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영원부터 정하셨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단지 비참한 근심과 걱정으로 우리를 초조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주제에 관한 토론이 벌어지는 모든 곳에서 그는 ‘그리스도’라는 주제가 우리의 선택을 반영하고 명확하게 해준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구원의 확신에 관한 질문을 다루면서 다시 우리에게 그리스도만을 돌아보도록 촉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감추어져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이며 가장 진지한 것이며, 서약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거울 안에서 보여주는 생명을 숙고하며 믿음으로 우리는 이러한 가장 진지한 것과 서약을 붙들고 있다. 예정은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있으며, 그리스도 때문에 있다.

 

7. 믿음과 이신칭의
 
칼빈의 <신앙교육서>에 따르면, 그는 선택교리를 살펴 본 후에 바로 믿음의 주제로 돌아간다. 그는 믿음을 역사적 사건들과 근본적인 교리들에 관한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들에 대한 가슴의 확신으로 보았다. 하지만 무지가 아닌 지식에 근거하는 믿음은 약속들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한다.
 
또한, 믿음에 관한 지식은 뇌보다도 가슴의 문제이며, 이해의 문제라기보다는 기질의 문제기 때문에 이 지식은 특별하다. 지식으로서의 믿음은 인간의 감각적 인식을 통한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믿음은 지금까지 인간의 마음이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넘어가며 일어나야 하는 감각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믿음에 있어서 지성과 의지를 모두 강조하였지만 지성보다는 의지를 더 강조하였다. 그는 신앙에서 의지의 역할을 중심에 두고 지성의 역할을 주변에 둔다. 또한 칼빈에게 있어 믿음은 성령의 행위인 동시에 인간의 행위이며, 수동적인 동시에 능동적이다.

 

복음에 있는 약속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극에 달하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믿음의 영구한 대상’이시다. 또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약속들은 확인되며, 제시되고, 완성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모든 신적인 자비의 부요함을 제공해 주시는 믿음의 지속적인 대상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특별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때 비로소 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나 믿음만이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에 필수적인 것은 하나님이 자비롭게 나를 향하시고,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용서하실 것이라는 지식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직 은총 위에서만 사람의 심장이 쉼을 얻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은총의 약속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는 외적인 유일한 서약이 되신다. 그러므로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주어진 진리의 약속에 기초된 지식으로 본다. 그래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포함하는 이 지식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계시되고 우리의 심장에 새겨져서 견고하고 확실하게 된다.

 

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 또한 믿음의 창시자요 저자이신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의 접착제 역할을 하는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신비롭고 언약적으로 이루어진다. 믿음은 실제로 그리스도가 효과적으로 우리를 자신에게 묶어주도록 하는 끈으로, 이것은 성령의 주요한 사역이다. 따라서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믿음이 불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확신이 우리의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는 것이다. 결국, 믿음의 확실성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일체에 있다. 칼빈은 종종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신비적인 결합’이라고 한다.

 

칼빈은 칭의를 간단히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호의 안으로 그리고 의로운 사람으로 받으시는 수납’으로 정의한다. 선한 행위에 대한 토의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와의 교제로 들어오는 죄인은 하나님과 화해되었고,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깨끗함을 받아 죄 용서를 얻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고 하늘의 심판대 앞에서 자신감 있게 서게 된다”고 그는 더욱 완성된 정의를 내린다.

 

칼빈에게 칭의는 단지 법정적인 문제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의인으로 선포되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칭의는 죄의 사면과 전가로 구성된다. 따라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수납되는 것이며, 용서받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되는 것으로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놀라운 선물들 중의 하나는 양심의 평화와 조용한 기쁨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칭의를 복음의 가장 위대한 선물로 보았다.
 
8. 기 독 론
 
니젤(Niesel)의 명저인 『칼빈의 신학』에서, 그는 칼빈 신학의 특징을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으로 보았다. 그는 “칼빈은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이고, 목표이며, 목적으로 보았다고 말한다.
 
칼빈은 “우리는 그리스도가 성경 가운데 거하신다는 사실을 발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두 직분(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가르쳤던 초대 교회처럼, 칼빈도 『신앙교육서』에서 두 직분만 가르쳤다. 그러나 1539년의 『기독교강요』 두 번째 판에서는 『1541년 신앙교육서』에서처럼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사역을 덧붙였다.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은 그가 교회의 영원한 지배자이며 옹호자시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는 다윗에게 약속하신 구약의 약속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마귀와 세상과 육에 대한 모든 투쟁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승리하도록 역사하시며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식하게 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직분은 그의 자기 희생과 죽음으로 이루신 죄에 대한 유일한 만족과 중보의 간구하심을 의미하는데, 그는 지금도 제사장의 직무를 계속하고 계신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의 최종판에서 “대속적인 죽음의 희생으로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사해 주셨기 때문에, 제사장의 직분은 오직 그분께만 속해 있다”라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그리스도의 죄 사함, 하나님의 진노의 소멸,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 하나님의 긍휼임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의 선지자로서의 세 번째 직분을 강조하면서, 칼빈은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실 때에 선지자로 오시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온 세상을 창조하셨던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예언하시고 모든 것을 계시하실 것이기에,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주권적인 대사가 되었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 직분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세 직분에 모두 적용된다고 보고 있다. 이 직분들은 모두 우리의 선을 위한 것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서로 교제하며, 우리 모두가 그의 충만함을 받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은사를 받으셨다. 또한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직분에서 얻어지는 개인적인 유익은 우리의 주인과 교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선지자적인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학자가 되도록 하여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참된 지식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칼빈은 그의 모든 저서에서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동시에 그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구원의 원천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십자가에 완전한 구원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래도 구원의 성취를 재현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고 보고,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희망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본질을 분리하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하여 죄가 씻겨졌고 죽음은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부활을 통하여 의가 소생되었고 생명이 살아났다 말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죽음으로 죽음의 권능이 소멸되어서 우리 안에 효험이 있게 된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로 하여금 사망의 권세를 넘어서 승리를 얻도록 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경험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때, 올바르게 그리스도를 알게 된다

 

9. 기도론 (1) 기도와 믿음
 
칼빈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기도에 큰 비중을 둔다. 역사적으로 유명하였던 기도에 관한 다양한 논의들 중에서도 칼빈이 기도에 대해서 논의한 글은 그 중심에 위치한다.

 

기도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요소는 믿음이다. 즉, 기도와 믿음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 칼빈의 생각이다. 기도가 전적으로 믿음과 관련되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자신의 부족을 확실히 깨닫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부족의 상태에서 사람은 자신의 가련함을 도울 수 있는 어떤 구원의 손길을 찾게 된다. 즉, 그는 창조주이신 주님을 찾음으로써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주셨고 또한 하늘의 모든 보화를 열어주실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총체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을 묵상하며, 그의 전 기대는 그 분께 의존하며, 그의 모든 소망은 그 분께 집착하고 그분 안에서 쉼을 갖게 된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주요 훈련은 기도하는 것이며, 이것은 신앙의 참된 증거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믿음은 진정한 기도의 기초가 되는 동시에 필수 조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칼빈은 성경의 약속은 기도하고자 하는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연료와 같다고 하면서 성경을 좋아하였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소망을 나타내는 신앙이며, 살아있는 신앙의 표현이자 호흡과 같아서 거룩한 교리에 대한 지식이 내 몸에 살아 움직이는 표가 된

다. 기도의 중요성 때문에 칼빈은 기도에 원칙과 형식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논한다.

 

또한 기도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필수 과정이다. 이런 이유로 기도가 칼빈의 경건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경건은 예배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기도로 입증되기 때문이다. 기도와 믿음은 모두 그 초점과 목표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다. 따라서 믿음과 기도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이다. 우리에게 가능한 이러한 풍부한 요소들을 이용하지 않는 것은 마치 엄청난 보화가 땅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믿음의 눈을 통하여 보게 되며, 그 보화들을 기도를 통하여 파내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경우에서 기도와 예배의 의미를 찾는다. 여기서 그는 고넬료가 연단 받을 때마다 영적으로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드렸다고 설명하였다. 왜냐하면 칼빈은 진심으로 열렬히 예배에 몰두하였던 고넬료가 거기에서 신앙의 힘을 얻었다고 추측하였기 때문이다.

 

자비로운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소원과 필요를 아시고 채우시기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해 간청해야 한다. 또한 기도로 우리는 우리의 양심에 놀라운 평화와 안정을 갖게 된다. 기도는 살아있는 신앙 표현이며 고백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또한 기도는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려는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필요한 것들을 받으려는 데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9. 기도론 (2) 기도의 필요성과 규칙
 
칼빈의 기도의 필요성과 기도의 규칙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대하심이 기도의 무용론을 주장하는 근거가 되지 못한다. 하나님은 능력과 지식에 있어서 무한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필요들을 충분히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신자가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문이 생긴다.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반드시 그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한다. 우선 믿음의 강건을 위하여 기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해야 할 여섯 가지 이유들은 첫째로, 하나님을 항상 찾으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의가 우리 마음속에 불일도록하기 위해서이다. 둘째로, 하나님께 알려 드리지 못할 부끄러운 욕망이나 소원이 우리 마음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넷째로,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서 기도로 응답해 주셨다는 확신으로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명상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섯째로, 기도로 얻었다고 인정하는 것들을 더욱 큰 기쁨으로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여섯째로, 우리가 연약한 때일수록 습관과 경험으로 그의 섭리를 확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즉각적으로 우리를 도우시고 지켜 주신다.

 

칼빈은 기도에 대하여 분명한 정의를 하고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행해지는 일종의 약속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 앞에서 우리의 소원, 기쁨, 하소연을 포함한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들을 내어놓을 수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대화이며, 우리 마음의 순수한 감정의 작용인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기도는 우리의 ‘선택적인 행동’이 아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리고 그 명령은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받으리라는 확신을 주는 약속과 함께 온다.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은 모두 기도의 동기와 우리의 확신의 근거가 된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의 명령을 의도적으로 거절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야 될 것은 ‘기도하지 않는 죄가 가장 나쁜 죄’라는 것이다.

 

기도의 규칙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신자들을 위하여 적절한 기도의 규칙들을 열거하고 논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합당하게 대화하기 위하여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런 자세를 위하여 우리는 성령께 의존해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진지하게 우리의 탄원을 불타는 열성으로 아뢰어야 한다. 전심으로, 진지하게 하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다. 그리고 합당한 기도의 전제 조건은 통회하는 심령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다. 또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는 자신의 영광과 가치에 대한 생각은 일체 포기하고 겸비하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고백적인 응답이다. 신자가 먼저 하나님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응답하신다. 또한 모든 기도는 죄의 고백과 용서의 간청이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최악의 상태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기도가 응답될 것이라는 확실한 소망을 가져야 한다. 이런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경외가 수반되어야 한다. 복음의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회와 믿음으로 기도하는 모든 이에게 인자하시고 신실하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하는 자는 철저하게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의 능력과 기도에 온 정신을 바쳐야 하고 산만한 생각으로 주의가 흩어지지 않아야 한다. 정신을 모으기 어려울 때는 찬양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마음과 생각이 주를 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칼빈에게 있어서 기도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훈련이며,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통로이다. 그리스도인은 열심히 성화의 훈련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 일정한 시간에 기도할 것과 기도가 응답되지 않더라도 인내로 간구할 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쳐준다.

 

[출처] 칼빈의 핵심 교리(요약) (비공개 카페)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1146

 생명나무 쉼터/한아름 님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행10:1-2)"


가는 고넬료가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가족을 가르치는 데 신경을 썼다고 말합니다. 다음으로 누가는 고넬료가 모든사람에게 자비로웠고 늘 하나님께 기도했으므로 그의 사랑의 선행을 칭찬합니다. 율법은 두 돌판에 담겨 있으므로 누가는 앞부분에서 고넬료의 경건을 칭찬한 다음 두 번째 부분에서 그가 사람들에게 사랑의 선행을 실천했다고 칭찬합니다. 이 점을 주목하는 것은 매우 유익한데 그 까닭은 고넬료의 사람됨 속에 옳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이 잘 제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삶을 잘 정돈하는 가운데 믿음과 신앙을 기초로 삼으십시요. 이 기초가 사라지면 다른 모든 미덕은 한낱 연기처럼 사라질 것에 불과합니다. 누가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기도를, 경건과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열매의 열매이자 증거로 간주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과 경외와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님을 아버지요 주로 인정하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경건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각자 고넬료의 본을 따라 꾸준히 기도하도록 자신을 채찍질합시다.

고넬료처럼 우리의 경건도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히 드러나서 관대함과 공의를 발휘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밣혀야 합니다. 바로 이 근원에서 참되고 균형잡힌 관대함이 샘솟기 때문입니다. 우리 형제들의 고통과 슬픔이 우리에게 긍휼한 마음을 일으킨다면 우리 사이에 있는 연합을 고려하여 우리가 그들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며 그들을 우리 자신의 몸의 지체를 돕듯이 도우려 애쓴다면, 그리고 고넬료가 믿음에 대해 피상적인 지식밖에 없을 때도 진실로 그토록 탁월한 경건과 거룩의 귀감이 되었다면 믿음에 대해 많이 아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경건을 실천하는 데는 이토록 냉담한 우리는 당연히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은 믿음의 불꽃도 고넬료에게 그토록 큰 효력을 발휘했다면 지식의 충만한 광채는 우리안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켜야 하겠습니까?

포도나무선교회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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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신자들은 참된 의미에서의 경건(pietas)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현대'를 특징짓는 것들 중 하나가 하비 콕스가 우려했던 것인 '세속주의(secularism)'라는 것이다. 즉 그것은 세속과 세속적인 것들에 대한 절대화로서, 그것을 초월하는 영성이나, 종교성 같은 '신비'에 대해 폐쇄적인 가치관을 말한다. 그것은 이성이나, 그것을 토대로 한 과학, 그리고 물질문명들을 하나의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다. 그런 흐름은 교회의 내부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보다는 세속적인 가치나 기준에 좌우되는 일이 많으며, 신자 개개인들의 생활에 있어서도 세속적 성공이나 부(富)가 우선이고, 참된 신앙과 애써 따르는 십자가의 길과 같은 덕목들은 부수적인 것처럼 간주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게 볼 때, 기독교가 참된 정신과 신앙, 경건 혹은 영성을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다. 그것은 기독교가 주님의 말씀에 바르게 서서, 세상 속에서 본래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현대'가 종교간의 '경쟁'이 문제시되고 있을 정도로 다종교사회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더욱 시급한 일이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그 고유한 특성들을 더 잘 찾아내고, 그것들을 더 잘 발휘해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참 진리와 의미, 그 구원을 전할 수 있고, 믿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20세기 말에 들어서면서 현대사회는 포스트모던의 사조가 시류를 타고 있다. 그것은 이성 중심의, 물질문명 중심의, 또 개인 중심의 현대문명에 대한 반발이나 비판으로써 대두된 하나의 전반적인 문화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평가가 엇갈릴 수 있겠으나, 포스트모더니즘이 현대사회의 "세속주의"에 대한 비판적 극복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교적으로 볼 때는 긍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즉 새로 대두되는 포스트모던의 종교현상 속에서는 이성이나 체계보다는 "영성"이나 "감성"을 강조하며, "개인"보다는 "공동체적" 삶과 실천을 중시하며, "교리"나 "도덕"보다는 "명상"이나 "영성개발"로써 초월성이나 내면적 깊이를 찾아나가는 데 초점을 두는 경향이다. 물론 그런 시도들이 언제나 바르고 훌륭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일차원적인 세속에 함몰된 현대인들에게 그것을 초월하는 종교적 깊이와 신비를 지시해주고, 그것을 추구해보려는 의도자체는 바람직한 것이다. 현재 기독교내의 신학이나 운동 역시 그런 방향에서 많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른바 "영성의 신학"이나, 여러 형태의 공동체 운동들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새로운 형태의 신학이나 운동들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성서와 기독교의 전통들 속에서 문제에 대한 답안을 구해보려는 노력일 것이다. 물론 그런 운동들이 성서적, 교회적 근거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겠지만, 전통적인 용어나 개념들 속에 그 답이 있다면, 그것을 채취하는 노력에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선되는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논문에서는 그런 과제를 주로 개신교의 사상적 기틀을 놓는 데 크게 기여했던 칼빈의 경건 사상을 해석함으로써 이루어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 의의를 찾아봄으로써, 전통신학의 경건 개념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경건에 대한 전통적 이해

경건(????????)은 칼빈에게서 시작된 개념은 물론 아니다. 그것은 고대 사회로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용어이며 개념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종교와 사회 속에도 존재해서 성서 속에 나타나고 있는 용어이다. 그런 전통을 이어받아 교부들과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에라스무스 등 많은 사람들은 경건의 개념과 의미를 논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경건에 관한 고대사회와 교회의 전통 모두를 다루기는 어렵다. 단지, 칼빈의 경건을 살펴보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서, 전통적으로 경건이 어떻게 이해되었는지를 기존의 연구들로부터 간단히 살펴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원래 고대세계는 종적인 체계를 중심으로 한 사회들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정을 가장 기본적으로 했다. 그러므로 사회들의 기초단위가 되는 가정 내에서의 구성원들간의 결속은 매우 중시되었다. 그것은 특히 가장과 가속들 사이를 묶어주는 유대를 중심으로 했으며, 그것은 거의 종교적인 것이었다고 할 정도로 중요했다.

그런 세계 속에서 "경건"은, 우선 부모와 자녀들과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었다. 특히 자녀들이 부모를 두려워하고 존경하며, 그리고 따르는 그런 품성이나 태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경건은 가정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국가의 차원으로 확대되었으며, 그래서 그것은 국가와 국왕에 대한 시민의 경외와 충성이라는 덕목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한편 고대사회는 다신교 사회로서 각종 종교들과 제의들이 발달했는데, 그 속에서 경건은 신들에 대한 숭배나 열심 같은 것들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로 통용되던 '경건'을 기독교가 사용했을 때, 그것은 원래의 사회적 의미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한 차원 높은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복종, 헌신 등의 개념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종교개혁자 칼빈도 경건에 관한 그런 전통적인 개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신명기 설교들 중에서 말했다. "그래서 이교도들은 '경건'이라는 용어를 아버지나 어머니, 그리고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 모두에게 우리가 영예를 돌리는 것에다 적용시켰던 것입니다. 적절하게 말해서, 경건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져야 하는 경외입니다...."

그런 점들을 볼 때, "경건"은 전통적으로, 부모나, 왕, 신과 같은 상위자들에 대한 아랫사람의 존경과 두려움, 순종, 충성, 헌신들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그것은 "경건"이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강제적으로 부과하거나 억지로 강요하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고대세계는 그것이 종적인 사회였다고 하더라도, 그 중심에는 상호간의 "선한 믿음", 혹 "신실성"이 자리잡고 있어서, 어떤 이들은 보호자, 양육자로서, 또 어떤 이들은 그를 따르는 자로서 사는 데 큰 갈등이 없었다. 즉 그들 세계에서 경건은 신뢰에 근거한 것으로서, 어느 정도 자발적이고, 또한 기쁨과 보람도 따르는 그런 종류였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경건"은 어떤 선한 관계의 개념으로서, 수직적인 차원에 대한 인정과 더 나가서 적극적인 수용이며, 전통사회가 그것으로써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유지시켜 나가는 필수적인 요소였다고 해석될 수 있다.


칼빈의 경건사상,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인가?!

"경건"은 또한 칼빈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사상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경건'이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했고, 그것을 통해서 기독교인의 올바른 예배와 종교, 지식, 삶들을 설명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선 칼빈의 경건은 그 이전의 중세기적인 의미에서의 경건과는 매우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쟝 까디에는 "칼빈이 경건의 영역에서 이루었던 혁명을 동시대에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에서 했던 혁명과 비교할 수 있다"고까지 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였을까? 그의 말을 더 들어본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는 사람들이 지구를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서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보았다... 그 천문학자는 정반대로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우주에 대한 모든 개념이 바뀌어졌다. 그와 마찬가지로, 칼빈은 경건에서, 그것의 습관적인 중심이었던 사람과 그리고 사람의 필요나 성과들을 들어내었고, 그 자리에다 경건의 진정한 중심인 하나님을 다시 모셨다..."

인용문에서 보듯이, 까디에가 주목한 것은 바로 칼빈의 경건에 있어서 신중심적인 성격이었다. 즉 중세에는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었고, 주체였으며, 그 인간의 요구나 필요, 종교적 성취에 따라 하나님이 부수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중심의 종교, 인간중심의 경건을 가지고 있었다면, 칼빈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세계의 중심이고, 그분만이 홀로 주인이며, 사람들은 그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신 중심적 세계관과 종교, 그리고 그에 따른 경건을 주창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에 상응할만한 종교상의 대전환이었다는 시각이다.

사실, 중세적인 관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나 구원은 인간의 종교적 수련이나, 자선, 선행 등 행위를 그 조건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신자들의 종교적 수행 등 이른바 '공로'는 자신의 구원에 대한, 그리고 심지어는 가족이나 선조들의 구원에 대한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거기서는 구원을 인간이 공로로써 획득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 구원의 객체인 인간이 오히려 주체로 인식되기까지 하는 오류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의 경건은 참된 의미를 가지기가 어렵다. 실제로 중세기적인 의미에서의 경건은 그런 잘못된 관념으로 인해 의미를 잃고 만 결과를 가져왔다. 바로 그것을 마르틴 루터가 (10년여 동안의) 고통스러운 수도원생활을 통해 체득하고, 깨달았던 것이 아닌가? 루터와 다른 방식이지만, 칼빈 역시 그런 중세기적인 종교관행과 경건이 하나님의 참된 진리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을 [기독교강요] 등 그의 여러 저술들 속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그럼으로써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나 구원의 전제가 되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나 실천이 아닌 새로운 의미에서, 즉 복음적인, 그리고 성서적인 의미에서 경건을 세워놓았다. 그가 세운 경건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써 가능한 경건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이 경건함으로써 의를 얻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자발적으로, 그리고 기쁨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의 뜻에 순종하는 그런 경건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경건에 선행하는,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점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경건사상이 수립된 것이다. 그래서 경건은 칼빈에게서 인간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새롭게 전환되었고, 그 점을 주목했던 까디에는 그것을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칼빈의 경건사상 속으로 들어가 보자.


경건에 대한 칼빈의 정의

칼빈은 1536년, 자신의 교의학적 주저 [기독교강요] 초판을 발간하면서, 이런 긴 제목을 붙였다. [기독교강요,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경건에 관한 거의 모든 것과 구원의 교리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함. 경건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읽을만한 저작으로 최근에 출간되었음]. 이 긴 제목 중 부제가 되는 부분은 출판업자가 붙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봐서, [기독교강요]의 성격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 부제가 지시하는 것은 바로 [기독교강요]가 경건과 구원에 관계된 책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경건"은 "사랑하고", 배워서, "신자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점은 칼빈이 [기독교강요] 초판, (서문형식으로 포함시킨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서한"의) 서두에서 다시 확인되고 있다. "나의 목적은 단지 어떤 초보적인 내용들을 소개함으로써, 종교적인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으로써 참된 경건에 도달하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즉 기독교강요의 목적 자체가 신자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기본적인 내용들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경건은 신자들이 교리나 말씀을 배워서, 종교적인 어떤 참된 삶, 또는 덕목이나 태도를 가지게 되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다면 칼빈은 경건에 관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칼빈이 경건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1537년 "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i"(신앙지침과 고백서) 안에서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참된 경건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도적으로 피하려는 두려움에 있는 것이 아니다. -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므로 공포심을 일으킨다. - 그러나 참된 경건은 오히려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또한 주님으로서 존경하며, 그의 의를 받아들이며, 그분을 거역하기를 죽기보다 무서워하는 그런 순수하고 진정한 열심 가운데 있다. 그리고 그런 열심을 가진 사람들 모두는 그런 하나님을 자신들의 무모한 욕구에 따라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으며, 오직 참된 하나님 그분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알려고 하며, 자신들에게 나타나고 선포되는 그대로 그분을 이해한다."

여기서 보듯이 칼빈이 경건으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점이다. 하나는, 경건이, 하나님이 자신의 진정한 주님이라는 것을 믿고, 알고, 그래서 모든 것에 앞서서 바로 그분만을 경외하며 따르는 일(1-1)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런 경건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욕구나 기호에 맞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알려주신 바 그대로 그분을 믿고 이해하는 것(1-2)이다. 이 두 가지 사항은 경건의 개념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각각 독립적으로 발전시켜 다룰 수 있는 주제들이다. 우리는 그것을 뒤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칼빈의 경건 개념을 보여주는 중요한 곳으로서 또 한 군데를 지적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강요 1559년 판,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 목적을 밝히는 새로 추가된 장이다. 거기서 칼빈은 경건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종교나 경건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나의 의도는 이렇다. 즉 그분이 이 세상을 한번 창조한 다음에 그것을 자신의 무한하신 능력으로써 유지시켜 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분은 자신의 지혜로써 세상을 다스리시며, 자신의 선함으로써 그것을 지키고 보호해주시며, 특히 인류를 의와 공정함으로써 이끌어 나가며, 자신의 자비로써 그들을 지지하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다. 더 나가서 우리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즉 그분 이외의 다른 곳에서는 지혜나 명철, 혹은 의, 능력, 정직, 또는 진리가 단 한 방울이라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래서 그런 것들은 모두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므로, 그분만이 그런 것들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것들을 전적으로 그분에게서 기대하며, 그분에게서 찾아나가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리고, 뿐만 아니라,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에게 돌리며,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써 그분에게서 받기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그런 은혜들에 대한 느낌만이 선한 교사이고, 우리들에게 경건을 가르쳐주기에 올바른 것이다. 그리고 거기로부터 종교가 나온다. 나는 '경건'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함께 결합된 것으로서, 우리가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선행들을 알면서 자연스럽게 그리로 이끌리게 된다고 정의한다."

다소 긴 인용문이지만, 여기서 언급되는 내용은 다음의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경건이 (또한 종교가)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가 없다(2-1).

둘째로, 그런데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모든 것의 주인이자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이며, 지혜와 명철, 의, 정직, 능력, 진리 등 모든 귀한 것들의 원인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점을 믿고, 그분으로부터 그 모든 귀한 것들을 바라고, 얻으며, 그에 대해 그분께 감사하고 영광 돌려야 한다(2-2).

셋째로, 그분의 은혜를 느끼고 아는 것은 경건을 가르쳐 주며, 또 그것으로부터 종교가 파생된 것이다(2-3).

넷째로, 그래서 결론적으로 '경건'은 신자의 그런 느낌과 믿음과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사랑이라는 것이다(2-4).

이 네 가지 점도 각각의 독립적인 주제로 발전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것을 앞의 정의에서 끌어낸 항목들과 함께 살펴보면, 칼빈의 경건 개념으로부터 파생되면서 그것을 구체화시켜주는 주제들은 신앙의 문제(1-1 앞부분, 2-4), 삶의 문제(1-1 뒷부분, 2-2), 인식의 문제(1-2, 2-1), 종교의 문제(2-3, 2-2 뒷부분) 들로 나누어 질 수 있다. 이제 그것들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칼빈의 경건사상의 전모를 살펴보고자 한다.



경건의 신앙론적 해석

칼빈에게서 경건은 우선 신앙론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위의 정의들에서 보듯이,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무엇보다도 하나님만이 진정한 주님이심을 믿고, 그분만을 경외하는 것이었으며(1-1 앞),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사랑이었다(2-4). 그것은 실제로 신앙 속에서만, 혹은 신앙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죄인이 자기중심적인 오류 속에서, 자신이 자신과 세계의 중심이자 주인이었지만, 그러나 신앙을 통해 다시 태어난, 즉 하나님과 바르게 관계가 맺어진 현재는, 하나님이 중심이자 주인이고, 그분만이 존경과 사랑으로 믿고 따를 분이라는 새로운 의식과 삶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볼 때, 신앙은 경건을 일으키는, 혹은 경건의 의식과 삶을 갖게 하는 하나의 극적인 전환과 같은 것이었다. 경건은 그런 신앙 속에서 이루어지며, 또 그것을 통해 지속, 혹은 성장되는 것이었다. 그 이유에서 칼빈은 기독교강요 III권 신앙론을 다루는 자리에서, 경건을 신앙과 관련지어서 다루었던 것이다. 그는 말한다. "우리는 또한 신앙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여러 가지 의미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종종 신앙은 '경건에 관한 거룩하고 순수한 교리'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신앙은 경건에 관한 거룩하고 완전한 교리, 즉 "가르침"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들은 신앙을 통해서, 경건을 알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그래서 그것의 전부를 배우게 된다는 의미이다. 칼빈이 자신의 회심을 기억하며 고백했던 바도 바로 그 점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므로 내가 참된 경건의 어떤 맛과 지식을 얻게 된 후에는, (비록) 다른 공부들을 완전히 떠날 수가 없어 좀 더 느슨하게 해나갔는데, (경건을) 더 성장시키고 싶은 매우 큰 열망이 마구 솟아올랐다."

칼빈에 따르면, 신앙은 언제나 회개의 원인이 된다. 칼빈은 그런 신앙의 회심을 실제로 경험했고, 그것을 자신의 저술 두 군데서 고백해놓았다. 그중 인용한 시편주석 서문의 고백에 따르면, 회심의 결과로써 경건의 맛과 지식을 얻게 되었고, 또한 그것을 더 성장시키고 싶은 열망에 타올랐다는 것이다. 즉 회심한 뒤에는 이제는 삶의 방향과 관심이 완전히 바뀌어서, 전혀 새로운 관점과 방법으로 보고, 듣고, 말하고, 살게 되었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것이 바로 경건이라는 것으로서, 구체적으로는 하나님 중심적인 의식과 삶, 즉 죄인이 이제까지의 자기중심적인 교만과 죄로 물든 자신을 버리고,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인이 되는 것, 또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인이 경건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물론 어떤 의무나 억지로써가 아니다. 죄인이 은혜가운데서 새롭게 태어나고,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은 언제나 감사와 기쁨, 즐거움을 수반한다. 칼빈이 자신의 회심을 전하면서 표현했듯이, 경건에는 어떤 "맛"이 있는데, 그는 그것을 [기독교강요]의 신앙론 중에서 이렇게 잘 표현했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뿐만 아니라, 그 은혜의 따듯함, 그것이 가지고 있는 어떤 감미로움을 가지게 해주고,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지고 경탄하도록 배워주며,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며, 그의 권능에 복종하게 된다." 여기 나오는, "은혜의 따듯함", "어떤 감미로움" 너무나 크신 능력과 역사에 대해 크게 놀라는 "두려움"과 "경탄", 그런 것들이 "경건"에 따르는, 혹 그것과 함께 일어나는 신앙인의 내적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경건을 신앙론적으로 볼 때, 또 한가지 주목할만한 것이 있다.

칼빈에 의하면, "경건의 첫 단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어서 아버지인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바로 "신앙"이다. 여기서 보듯이,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과 신앙은 모두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그 둘은 모두 하나님의 "아버지됨(Paternite, 부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믿으며, 그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양가감정(Ambivalance)을 갖는다. 아버지는 두려운 존재이자 동시에 자상한 존재이다. 칼빈이 이해한 하나님은 바로 그런 아버지와 같은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은 존엄하고, 초월적인 분이면서, 동시에 자비롭고, 죄인들을 사랑해서 예수 그리스도로서 오신 은혜로운 분이다. 그래서 칼빈은 그런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신자들이 갖는 경건을 "그분을 경외하고, 또 사랑하는 것"이라는 서로 상반된 것으로써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님을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는 신앙적인 태도이자 삶으로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바는, 신자가 존엄하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그분을 경외하고, 복종하며, 자비와 은혜의 하나님 앞에서는 그분을 무한히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물론 경건의 그 두 가지 면, "경외"와 "사랑"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아버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경외하는 그런 동시적인(simul)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칼빈의 경건에 대한 신앙적 해석의 요체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그 아버지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바른 관계를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특히 죄인이 자기중심적인 무지와 교만을 떠나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인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칼빈에게서 경건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앙으로 비롯되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인 회심의 체험과 함께 이루어진다. 경건은 그런 은혜를 깨닫고, 감사함으로 주님께 응답하는 자발적이고 기쁨이 있는 신앙인의 존재이자, 삶이다.


경건과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신앙의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더나가서 그리스도인의 생활 교리에 깊이 관계되고 있다. 즉 우리가 정의를 다루면서 보았듯이, 경건은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따르는 것이었으며(1-1 뒤), 그분만을 믿고, 모든 선한 것들을 그분에게서 바라며, 그분께 감사하고 영광돌리는(2-2) 구체적인 삶의 문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은 경건을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거룩함으로 부름을 받았으므로, 모든 기독교인들의 전 생애는 경건을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그에게서 경건의 실천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전 영역에서, 지식, 봉사, 예배, 헌신, 복종, 사랑 등 여러 형태의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중 칼빈에게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복종과 사랑이다. 그 두 실천은 앞의 신앙적 해석에서 보았던, 하나님의 아버지됨에 대한 신앙인의 태도와 삶의 두 면모, 즉 경외와 사랑에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그 두 가지를 중심으로 경건의 생활적인 면모를 살펴본다.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를 우리의 아버지로 붙들면서, 그분에게 (돌려야 하는)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으며 경외하는 것은 곧 그분에 대해 복종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복종은 그분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분이 "아버지"이면서 동시에 또한 "주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복종은 필연적으로,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혹은 원치 않는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에게 복종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뜻과 상반된" 우리의 "모든 욕망들을 길들이고, 굴복시켜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전체 요강"인 "자기부정"에 관계된다.

칼빈에게 있어서, 자기부정은 "우리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서, "그분을 위해서 살고, 그분을 위해서 죽는 것이며, 그분만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감각을 비워서, 하나님의 영에 완전히 변화되어,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자기중심적인 교만 속에 살고 있는 죄인이 새롭게 태어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살게 될 때 수반되는 것이 그런 자기부정과 자기부정을 통한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며, 그리고 그것들은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생활의 필수적인 측면으로 보았던 것이다.

또한 칼빈은 경건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경건의 정의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이 함께 합쳐진 것"이었다. 그래서 경건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으로 간주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거룩을 완성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들도 그것들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샘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즉 신자들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거룩함도, 어떤 찬양이나 예배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비롯돼야 하며, 또한 그 사랑이 있어야 그것들을 온전하게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며, 그것을 통해서 그의 모든 생활과 예배를 완성하는 그런 성격의 것이다.

그런데, 칼빈에 따르면 경건의 표현인 하나님의 사랑은 또한 이웃들에 대한 사랑으로써 증거 되어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칼빈의 관점에서 경건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따르는 것이다. 즉 신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는 삶이다. 그런데 칼빈은 제네바교회 교리문답에서 이렇게 썼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우리들 중에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형제, 자매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다. 칼빈은 갈라디아서를 주석하면서 그 점을 경건과 관련시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경건, 즉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는 경외와 봉사가 우리의 형제들에게 돌려져야 하는 사랑보다 더 상위의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경건은,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감각들로는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식들이 경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예식들은 경건을 분명히 증거 해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종종 보듯이, 위선자들보다 더 예식들을 열심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지키는 사람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 서로 서로가 사랑하도록 권한 형제애를 통해서 우리가 그분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증명하도록 하셨다."

이 인용문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경건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 하고, 또 증거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칼빈은 경건을 통해, 필연적으로 "이웃사랑"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그것 역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으로서 "이웃과의 자유로운 사랑의 교제"속에서 모든 것을 나누는 섬김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경건을 생활이라는 영역에서 실제적으로, 그리고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특히 하나님께 대한 복종과 자기부정, 그리고 사랑, 더 나가서 이웃사랑으로 나타나야 하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감사가 외부로 표현되고, 증거 되는 성격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 막스 베버가 칼빈 이후의 칼빈주의 속에서 발견했던 이른바 "실천적 삼단논법"(Syllogismus Practicus)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외부적 표시로서 내부를 증명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내부의 경건 때문에 자연스럽게 외부로 드러나서 내부를 알게 되는 그런 방식의 증거를 의미한다. W. 니젤이 잘 보았듯이, 칼빈의 전체 사상 속에는(그리고 우리가 본 이 항목의 인용구들 속에서도), "실천적 삼단논법"의 의미는 들어 있지 않다.


경건과 신 인식론

정의에서 보았듯이, 칼빈은 "(종교나) 경건이 없으면 하나님을 알 수 없다"(2-1)고 했다. 이것은 칼빈의 신 인식론에 있어서 중요한 점을 알려주는 열쇠와 같은 말이다. 칼빈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한 인식(connaissance, 또는 지식)은 삶이나 실천과 유리된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우리의 삶과 현실에 관계된 것이다. 그 인용문 앞에서 칼빈은 말한다.

"그런데 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소박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앎으로써 우리에게 관계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간단히 말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살아야 하는 바를 알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그것을 구체적으로 "경건"과 "종교"에 관련시켜 말했다. 즉 바로 뒤를 이어, 그는 "종교나 경건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즉 논리상의 문제인데, 그 말은 논리적인 비약이고, 그 앞에는 생략된 명제들이 있다는 것이다. 생략된 부분에서 우리는 이런 명제들을 읽어야 칼빈의 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그것은 참된 경건과 종교이다. 우리는 그것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함 속에서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이 명제를 넣어서 칼빈의 말을 보충해보면 이렇게 된다.

"그런데 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소박하게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앎으로써 우리에게 관계되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간단히 말해서,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라고 이해한다(그것은 참된 경건과 종교를 아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그 행함 속에서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종교나 경건이 없는 곳에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다."

그렇게 본다면, 칼빈의 인식론에 있어서 중요한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즉 그에게 있어서 인식으로부터 실천이 나오지만, 그러나 또한 실천으로부터도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칼빈이 약간 뒤에서 시사한 바로써 확인된다. "...우리의 정신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고서는 그분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에밀 두메르그가 칼빈의 방법을 "연역적 방법과 귀납적 방법, 삼단논법의 방법과 경험론적 방법, 그 둘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던 것은 이유를 갖는다. 챨스 파티 역시 그 점을 칼빈의 교리 여러 곳에서 확인했다. 가령 성령론 같은 곳에서, "칼빈은 기본적으로 논리나 이성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아래 사는 신자의 경험에 호소했다." 또 신 인식론에서도 "칼빈은 하나님 자체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그분이 말씀가운데서 우리와 맺으신 관계를 관심했다. 그와 같이 칼빈은 자신의 신학적 추론의 일관성으로써 뿐만 아니라, 또한 기독교인의 하나님 경험에 대한 자신의 설득력 있는 표현들로써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칼빈은 경험에 대한 호소, 경험을 통한 계시이해와 신 인식의 방법을 열어 놓았고, 또 그것을 중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자 길이었다. 칼빈은 그와 같이 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한 바에 따라 살고, 그리고 그렇게 살면서 또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이해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는 인식, 혹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적극적으로 작용하면서, 신자의 삶과 이해를 점점 더 완성시켜나가는 그런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신자의 끊임없는 과정은 바로 "성화(sanctification)"인데, 의미상으로 볼 때, 그것 자체가 또한 경건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신 인식에 있어서 칼빈이 경건을 적용했던 다소 다른 방식 하나를 도외시할 수 없다. 앞의 정의에서 보았듯이, 그는 "(경건한) 사람들 모두는 그런 하나님을 자신들의 무모한 욕구에 따라 뜯어 맞추려고 하지 않으며, 오직 참된 하나님 그분으로부터 오는 지식을 알려고 하며, 자신들에게 나타나고 선포되는 그대로 그분을 이해한다"(1-2)고 했다. 칼빈은 그 점을 매우 강조했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다시 말한다.

"그러므로 잘 정리된 사람은 우선, 자의적으로 신을 만들어내지 않고,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인 그분을 바라본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분을 자기 마음대로 상상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는 바 그대로를 아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리고 조심스럽게 경계함으로써, 이리 저리 헤매고만 다니게 하는 정신나간 모험이나 과욕 때문에 그분이 선포하신 것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일을 하지 않는다."

신 인식에 있어서, 경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말씀하는 바를 유심히 듣고, 그 말씀에 따라서 하나님을 알고 이해하게 하는 것이었다. 칼빈에 의하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방법이었다. 칼빈은 그런 경건이 없이,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하나님을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자주 비판했다. 그는 신명기 설교 중에서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귀를 막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의 벙어리 인형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야 그들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그런 것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선언한 것을 왜곡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받아들이는 "경건"이 없이는 하나님을 왜곡하는 것 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교만이나 허영, 자기 중심적인 망상들을 버리는 일이었다. 그것이 바로 자기부정으로서, 앞에서 살펴본 대로, 칼빈이 말하는 경건의 한 다른 모습이다.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복종을 그것보다 더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 없는 허풍에 너무나 기울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망상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곧 거기에 빠져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 이상으로 알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분께 속할 수가 없으므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우리가 사로 잡혀있는 헛된 생각들을 우리 속에서 뿌리뽑아야 합니다."

그런 점들을 볼 때,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올바른 신 인식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경건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듣고 받아들이게 하는, 그래서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경건은 하나님을 알 때 실천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동시에 경건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을 다시 알게 되는 성격을 가졌다. 그러면서 신자들은 더 올바르고 완전한 인식과 삶을 향해 끊임없는 길을 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칼빈이 본 경건한 신자들의 생애 자체였다고 할 수 있다.


경건과 참된 종교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곧 종교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는 경건과 종교를 함께 언급하거나, 혹 서로 바꿔가며 쓰기도 했을 정도로, 그 둘을 밀접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의에서 보았듯이, 종교는 경건으로부터 파생된 것이었다(2-3). 즉 경건의 결과로 종교가 생긴 것이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사랑을 수반한다. 그런 경건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또한 동시에 그들의 종교로도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칼빈에게 있어서 종교란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에서 비롯되는 예배였다. "바로 이것이 순수하고 참된 종교이다. 즉 하나님께 대한 생생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인데, 두려움은 그것 자체에 자발적인 경외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것 자체로부터 고유한 그대로의,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율법 안에서 명하고 있는 예배를 이끌어 낸다."

그러므로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로서, '창조주이자, 모든 귀한 것들의 주인인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돌리는'(2-3) 일이었다. 그것은 경건으로부터 파생되지만, 동시에 경건의 한 표현이자, 그것의 일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건은 아버지 하나님을 감사하고, 영광돌리며 경배하도록 하며, 그것은 바로 그분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칼빈이 볼 때, 사람들은 그 예배를, 종교를 올바르게 수행하고 있지 못했다. 그는 말한다. "...그러나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주 소수만이 하나님을 존경할 뿐,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그를 공경한다. 모든 이들이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여주지만, 아주 소수만이 마음으로 예배할 뿐이다."

칼빈은 이처럼 형식적인 예배, 왜곡된 종교가 만연된 것을 안타까워한다. 그가 왜곡된 종교나 예배 속에서 특히 강도 높게 비판하는 것은 우상숭배였다. 그는 사람들이 모두 죄와 오류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이 원하는 진정한 예배를 파괴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뇌는 우상숭배 전시관과 같습니다. 각 사람들이 다 우상들을 만들어대고, 각자가 하나님 예배를 왜곡시키고 있으므로, 거기에는 책임자들마저도 없습니다." 칼빈이 우상숭배에 관해 길게 논의하는 곳은 역시 [기독교강요]이다. 그에 따르면,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왜곡시키는 가장 사악한 죄에 속한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형상이나 물체로 대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우상으로 대체하면, 무한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불경건한 거짓 때문에 훼손된다. 그런 우상숭배는 경건과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경건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고,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그에 따라 경외하며, 조심스럽게 그분을 알고, 따르고, 예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식과 우상숭배로 왜곡된 종교를 바로 세우는 일은 동시에 경건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도 했다.

그런데 칼빈의 관점에서, 경건을 세우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고, 그렇게 세워진 경건 속에서 비로소 신자는 참된 종교와 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래서 칼빈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올바른 신앙을 갖도록 매우 노력했다. 그런데 그것은 예배와 종교를 개혁하는 일과 함께 일어났다. 즉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시키고, 동시에 그들이 과거 잘못 세워놓았던 종교를 개혁하는 것, 그 두 가지가 칼빈이 전 생애를 바쳐서 했던 일의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참된 종교를 가지는 것은 매우 중요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그 드러나는 영광과 말씀에 따라, 무한하고 존귀하신 모습 그대로를 다시 믿고, 예배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과 관계 속에 있는 신앙인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칼빈이 생각하는 참된 종교는 바로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그리고 "진리에 부합된" 것이다. 그것은 칼빈이 프랑스에서, 그리고 쥬네브에서 애써 세우고자 했던 교회, 복음적인 종교이다. 여기서 그의 종교개혁을 개괄할 필요는 없겠다. 단지 경건의 문제와 관계해서 본다면, 칼빈은 하나님과의 신앙적 관계의 표현인 경건은 종교로 나타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 종교는 다름 아닌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 경배인 예배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가, 그 예배가 동시대에 매우 왜곡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개혁하려고 했다. 참된 종교를 세우는 것은 인간들의 죄와 오류 속에서 손상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회복하는 일이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를 사랑하는 것, 즉 경건의 실천과 다름이 아니다. 그래서 칼빈에게 있어서는 언제나 경건이 종교를 세우고, 또 바르게 세우는 것이다. 역으로 종교는 경건을 보여주는 일종의 '거울'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를 수행하는 것을, 또는 예배드리는 것을 봐서 그들의 경건의 수준이나 정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건의 현대적 의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칼빈의 경건사상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파악되고 해석된다. 그것은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 점을 칼빈의 경건 사상이 갖는 특징과 현대적 의의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칼빈에게서 있어서 경건은 어떤 바리새적인 행동이나 외양과는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율법적이고 형식주의적인 삶의 모델을 만들어내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철저히 신자의 내면과 삶의 중심에 관계된 것이다. 물론 경건은 외면적이고, 실천적이며, 행동적인 측면을 갖는다. 그리고 그것으로써 판단되고, 평가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신자의 내면상태가 그대로 밖으로 표현된 것으로의 외면이고, 삶의 중심이 다양한 일상사 속으로 확장된 것으로서의 생활이자 실천이다. 칼빈에 따른 삶의 중심으로서의 경건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계시된 바에 따라 알고, 따르며, 예배하는 것이다. 경건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점들을 총괄적으로 표현하는 용어이자, 사상이다.

그러므로 경건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 신자의 의식과 태도, 행동들을 포괄하는 삶 전체이다. 그것은 신자가 자신을 넘어서는, 자신의 시야와 지각과 감각을 넘어서는, 즉 초월적인 하나님, 그 전적 타자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며, 그분과의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전적 타자인 하나님을 수용하며 동시에 타자들인 주변 사람들을 수용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이웃들을 사랑하게 된다. 물론 그 역도 사실이다. 주변의 수많은 타자들을 사랑하면서, 그 모든 이들을 존재케 하신 절대 타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벗어나는 타자를 전혀 볼 줄 몰랐던, 혹 보려고 하지 않았던 자신이 이제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 줄 알게 되는 신비, 그 신비가 바로 무엇보다도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인, 더 나가서 이기주의적인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타자의 수용은 동시에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즉 자기 속에 함몰되어 있는 자기중심, 자기절대화의 죄와 오류로 얼룩진 자기를 버리거나, 떠나는 자기부정 또는 자기초월의 영성을 의미한다. 영성은 어느 숲 속 나무 곁에 앉아서 침묵과 명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참된 영성은 죄와 허물로 가득 찬 자신을 버리면서, 혹 떠나면서 새로운 자신으로 언제나 거듭나는 그런 자기부정의 영성이다. 그것은 자기의 오류를 인정하고 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다. 그러나 바로 그 영성이야말로 오늘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미래와 희망을 비로소 말할 수 있게 하는 역동적이고, 구원적인 영성이라고 본다. 그 영성은 현재의 자신인 것, 혹 이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고, 더 나은, 더 좋은 자신과 세계를 찾아 나서게 하는 초월적, 그리고 세상 변혁적 영성이다.

칼빈의 경건사상은 바로 그런 신비와 영성을 기반으로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동시에 수많은 이웃들과 수평적 관계들을 바르게 맺어나가는 입체적이고, 다차원적인 삶을 조직하게 한다. 그럼으로써 인간은 비로소 타자의 빛에서 자신을 보고,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을 구현하며, 타자가 잘되면서 자신이 잘되는 길을 모색할 줄 아는 통전적이고, 공동체적인 새로운 인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경건사상은 오늘날, 자기중심적이고, 일차원적인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속주의의 도전으로 인해 진정한 영성과 신비를 상실해가며, 한낱 율법주의와 형식주의 속으로 도피하려는 교회들에게, 그리고 또한 새 길을 찾고자 여러 방향을 두드려보고 있는 포스트모던의 종교운동들에게 문제를 보게 하고, 알게 하고, 그리고 풀어나가게 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저자:이오갑 박사/그리스도신대 교수(조직신학)/http://cafe.daum.net/wordlife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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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에 대하여

 

 1.칼빈과 제네바

 

  존 칼빈은 1509 7 10일 피가르디 지방의 북부에 속하는 교회도시 노용에서 아버지 게라드 코뱅과 어머니 잔느 라 프랑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 났다.아버지는 이름있는 법률 자문관으로 중상위권의 생활을 누렸으며,이러한 아버지의 덕분으로 칼빈은 귀족의 집에 머물면서 일종의 가정교사 역활을 했다.그러다가 14세가 되어서 드 몽트모 가문의 자녀들과 함께 파리로 유학의 길에 나섰다.

 

 칼빈은 파리의 드 라 마르슈 대학에 입학해서  프랑스와 라틴어를 배우고 개방적인 분위기를 배웠다. 그러다가 부모의 걱정에 못 이겨서 더 보수적인 드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다.여기서 토론술을 배웠다.

 

 1528년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칼빈은 오를레앙의 법과대학에 입학해서  일 년간 머무르다가 부르쥬로 옮겨서 국제 법학자 알키아트의 강의를 들었다. 이 과정에서 칼빈은 오를레앙에서 인문주의를 그리고 부르쥬에서는 개신교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칼빈은 12세된 소년으로서  장차 칼빈의 동역자가 될 베자를 사귀었다.

 

 1531년 아버지의 사망과 더불어서 칼빈은 다시금 파리로 돌아와서 포르테 대학에 들어 갔는데 이곳에서 부데,콥등과 더불어서 인문주의의 모임에 가담 하였다.

 

 1532 23세의 나이에 자신의 최초의 저서인  세네카의관용에 관하여”라는 주석집을 발간 하였다.

 

 이 무렵 칼빈은 이미 파리의 개신교 모임에 가담하고 있었으며,그의 첫 저서가 출판됨과 동시에  왕 프린시스 1세는 개신교도인 휴그노들에게 박해를 가하였다.

 

이러한 사이에  1533  칼빈은  친구인 콥이 성바르브 대학의 교수이자 학장에 취임하는 계기를 맞이해서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주제로서 그의 취임 연설문을 작성해 주었다. 소르본느에서는 이 연설을 국회에 이단으로 제소 하였으며,국회는 이에 동의 했다. 이와 더불어서 1534 1018일 밤에 열광적인 개신교도들이  혐오스럽고 도저히 참을수 없는 교황청 미사의 악덕에 관하여 라는 현수막을 파리 전역과 심지어는 왕실의 정문에  부착함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 하였다.

 

 칼빈은 1533년 부터 1534년 사이에 나바르의 여왕인 마가리트의 보호를 받으면서 지냈다. 이 기간동안에 칼빈은 프랑스의 인문주의와 개신교주의의 대가인 르 페브르와 사귀었다.

 

 1534 10월에 칼빈은 고국을 떠나서 스위스에서 은신처를 찾기도  하였다.칼빈은 프랑스의 개신교도 망명잗ㄹ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슈트라크 부르크를 방문하였으며,그곳의 목회자인 부처로 부터 환영을 받았다.그곳에서 바젤로 옮겨 갔으며,거기에서 기독교 강요의 초판을 저술하였다.

 

1) 칼빈의 개혁

 

  파렐은 27세의 칼빈보다도 20세가 더 많았다. 그러나 아직도 젊은 피가 끓은 사람으로서 칼빈과 한 마음이 되기에 충분 했다. 칼빈은 성베드로성당에서 매일같이 바울의 서신들을 가르쳤다.

 

 그러는 사이에 1536 10월 베른은 새로운 점령지역에 대한 개신교와 로마주의 사이의 대토론회를 개최 하였으며,칼빈은 이 자리에서 교부들을 낱낱이 열거 함으로서 로마주의자들을 납작하게 만들었으며,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더불어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듬해 1537 1월에 칼빈은 대의회 앞에서 자신의 개혁안이 담긴 비망록을 전달 하였다. 우리 주님의 거룩한 만찬,공중예배에서의 찬양,어린이의 종교교육,결혼등 4가지 였다.성만찬은 가급적으로 자주 집행하는 것이 좋으나 현재적인 형편으로는 한 달에 한 번씩  행하는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합당한자는 주님의 몸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출교에 관한 치리를 제정해서 참여치 못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회중에게는 시편찬송을 적극적으로 권장함과 동시에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어린이들에게 순수한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간략한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을 작성해서 목회자가 직접 가르치도록 했다. 결혼은 지금까지 악하고 비성경적인  교황청의 법에 의해서 이루어 졌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새로운 규정을 제정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칼빈의 새로운 제안은 교회의 행정에 관한 조항으로서 소의회와 대의회를 통과 하였다. 성만찬은 일년에 4차례 집행하며,결혼광고는 예식거행에 앞서서 3주 동안  광고하여야 한다고 규정 하였다.

 

 2) 칼빈에 대한 배척과 칼빈의 이동

 

 제네바 시는 파렐과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서 종교개혁을 추진 하였으나 모든 사람이 다같이 개혁에 찬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1538 1월에 시의회는 원치않는 사람에게는 성만찬을 베풀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으며, 2월의 시의회 선거에서는 파렐과 칼빈을 반대하는 4사람이 특별 평의원으로 당선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베른 시의 간섭과 더불어서 개혁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세례파와 손을 잡았으며, 파렐과 칼빈은 아리우스주의자 이며,자유방임주의자라고 비난 하였다.베른의회는 제네바를 위시한 전지역을 그들의 손에 넣을려고 하였으며,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연약한 제네바 시의회는 3월에 이르러서 베른의 예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 하였다.

 

 이러한 사태변화 가운데서 꼬로우,파렐,칼빈은 제네바시를 떠날것을 명 받았다.

 

 파렐과 칼빈은 제네바를 떠났으며,칼빈은 허탈감에 빠져서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연구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간 파렐과 더불어서 3년동안 개혁을 시도 하였던 모든 일이 허사로 끝난데 대한 분노와 갈등을 이겨 내면서 연구와 동시에 프랑스 난민들을 돌보는 목회일에 전념 하였다.

 

 3) 다시 돌아온 칼빈과 그의 개혁

 

 파렐과 칼빈이 떠난 제네바의 상황은 예전보다 좋아지지 않았으며,오히려 악화되는것 같았다. 새로 부임한 목회자를 특별평의원들은 자기의 종같이 부렸으며,모든 가장들에게 교회에 참석토록 하는 의무규정을 부과 하였으며,주의 만찬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며,도시의 도덕적 수준은 날로 저하되어 갔다. 이렇게 해서 평의원들은 인기가 떨어지고 다음해 선거에서 재당선하지 못했다.

 

 이때로부터 칼빈을 다시 초청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1539 10월 대의회에서 대표자를 보내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칼빈은 윔스국회에 참석중이었기 때문에 답장을 유보한채 번민에 있었다 이 때 파렐릐 충고가 크게 작용 하였다. 파렐은 제네바가 차지하는 지역적인 중요성을 들어서 제네바가 개혁되면 인근 이탈리아,프랑스,스위스의 복음화가 가속화 된다고 강력하게 설득하였다. 칼빈은 3년여 동안 제네바를 떠나 있다가 1541 9 13일 다시금 제네바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네바 교회규범을 제정해서 의회에서 통과 시켰다.이제는 개혁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며, 엄격한 훈련과 경건생활 실천을 위한 각종제도와 이단을 색출해서 처리하는데 이르기까지 칼빈은 정열적으로 개혁을 추진 하였다.

  

2. 제네바의 개혁추진과 칼빈의 신학

 

 칼빈은 제네바에서 소위 말하는 외국인 이었다.이런 그가 제네바에서 개혁을 추진하기는 이루 말할수 없이 힘들었다.다시 돌아온 칼빈을 그들은 조직적으로 괴롭혔으며, 칼빈과 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마찰이 끊임없이 있었다.뿐만 아니라 제네바로 많은 이단성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칼빈의 개혁을 율법적인 독선이라고 비난 하였다.이들의 출현은 칼빈을 더욱 힘들게 하고 개혁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 하였다. 마치 루터에게서 농민전쟁이 예기치 않는 결과를 초래 하였듯이 칼빈도 이들을 맞이해서 개혁의 새로운 국면을 이루어 간다.

  

1)제네바의 현지인과 자유주의자.

 

 칼빈의 개혁은 이단을 색출하고 처단하는 데에서 다른 사람과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다.그래서 이단성이 있는것은 정죄 하였으며,자유주의자들을 맞이 해서는 전통신앙과 신학을 고수함으로써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2) 교리적인 문제

 

 칼빈을 괴롭혔던 교리적인 문제는 미카엘 세르베투스 와의 신학적 논쟁과 그에 대한 처형에서 야기 되었다. 칼빈은 그를 처형시킴으로서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비난을 받아 왔지만 그 당시의 상황으로는 어쩔수 없었던 결정이라고 보는 견해가 더 많은 형편이다.

  

 3)훈련을 강조하는 칼빈의 개혁

 

 제네바는 본래적으로 자유스러운 분위기 였고 자유가 강조되는 나라 였다 그래서 오히려 이것이 방종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제2세대 사람으로서 상당히 문란해 있던 사람들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강력한 생활규범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부임하자마자 4가지 개혁안을 부르짖었다. 4가지 개혁안 중에서 교인들의 생활규범과 어린이들을 위한 교육기관의 설립이 가장 중요하였다.이렇게 해서 어느 정도 질서가 잡혀 가는듯하였으나 칼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강하게 요구 하였다.

 

  [1] 생활규범 강조

 

 제네바 시를 이끌어 왔던 사보이 가문의 자유주의자들은 종교개혁과 더불어서 자신들의 방탕한 호기를 펼칠 기회를 맞이 하였다.그래서 이들은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방종에 빠지기 시작 하였다. 이러한 제네바를 바로잡기 위해서  칼빈은 무릅을 쓰고 훈련을 강요하기 시작 하였다.

 

 훈련의 목적은 교회를 오염과 세속화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교인들이 악한 자들과 접촉함으로서 타락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그리고 범법자들로 회개함으로서 그리스도의 구원에 동참케 하려는데 있었다. 이러한 3중적인 목적을 가지고 훈련을 시키는데 첫단계는 개인적인 권면 둘째 단계는 공중앞에서의 권면 세째단계는 주의 만찬에 참여치 못하게 했다.

 

 엄중한 죄를 지은자는 감독ㅇ나 목사가 개인적으로 출교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전체의 회의를 거쳐서 출교를 명했다 그리고 회개하였을 경우 다시 회복시켜 주었다.

 

 특히 칼빈은 목회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평신도들 처럼 엄격한 훈련울 받아야 했다. 목회자는 선발에서 부터 엄격한 규정을 적용하였다. 성경지식과 교인들의 교화능력 여부를 시험을 통해서 알아본 다음에 품행에 대한 심사를 통해서 선생이 될수 있는가를 분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단 선발되면 후보자를 소회의에 넘기고 소회의는 주민들 앞에서 설교케 한 다음에 주민들은 설교를 통해 어떤 깨달음을 받았다고 보고케 했다. 이렇게 3단계를 거친 심사에서 합격하면 목회자로 세웠다.

 

 이상과 같은 엄격한 생활규범은 생활전반에 걸쳐서 실시 되었다. ,도박,주정,술집출입의 횟수, 방종,사치,분수에 넘치는 접대행위,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분수에 넘치는 의복 착용,음란하거나 비신앙적인 노래등 금지,혹은비난,구금형을 가하였다.심지어는 잔치집의 접시까지 세웠다.

 

 주민들의 교회참석 여부를 감독하는 사람이 파견되었으며,교회법원의 사람들이 가정을 일년에 한차례씩 찾아가서 신앙상태를 점검 하였으며,심지어는 길거리에서 무심코 밷은 말까지도 책임져야 했다.

 

 칼빈의 훈련은 방종에 빠진 제네바를 바로 잡기에 충분 하였다.물론 칼빈도 힘들었지만 이상과 같은 엄격한 규율은 네델란드와 스코틀랜드,그리고 영국의 청교도에 이르기까지 개혁교회의 주된 윤리가 되었으며,현재까지도 이어져 내려오는 좋은 전통이다.

 

  [2] 학교 설립

 

 칼빈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서 소요리문답을 작성해서 어린이들에게 교육시켰으며,모든 목회자들이 책임을 지게 했다.그러나 칼빈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1559 65일 제네바 아카데미 라는 학교를 세우고서 유럽의 유명한 교수들을 초빙하였다. 이 학교는 일반학 과정과 신학과정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유럽의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 들었다. 그 가운데 스코틀랜드의 개혁자 요한 녹스가 있었으며,네델란드의 아르미니우스는 베자에게서 신학을 배웠다.

 

 [3] 칼빈의 목회와 그의 최후

 

 제네바에서 칼빈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에 임했었다.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았던 1536년으로 부터 3년간 의욕에 찬 목회를 감행하다가 슈트라스부르크로 쫒겨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541년 다시금 제네바로 부임해서 처음14년 동안은 반대자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를 했다.그러다가 1555년부터 1564년 사망시까지 최후적으로 9년동안 소신 있는 목회를 할수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회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월급의 증액을 거부 하였으며,그나마도 구제와 헌금으로 거의 다 바쳐 버렸다.

 

 그는 매일같이 저술활동,설교,강의,교회법원의 회의참석, 목사회의 참석,손님접대,각종 자문등 경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당하기 벅찬일을 했다. 그는 종합병원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많은 병을 지니고 있었다.그가 걸을수 없게 되자 설교단 의자로 옮겨줄것을 부탁 하였다. 1564 2 6  마지막 설교를 하였으며,4 2일 에는 교회로 옮겨가서 베자로 부터 마지막 성찬을 받았다.

 

 그는 1564 425일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증언이 담긴 글을 남겼다.

 

하나님께 대한 송구스러움과 감사로 가득찬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의 선택,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 등을 부드럽게 표현 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모든 논쟁과 다툼을 그치고 저 멀리 하고서 하늘나라를 바라본다고 하였다. 그는 4 26일 소위원회로부터 친구들에게 이르기까지 일일이 다 작별인사를 하였다. 519일에는 목회자들을 다 초청해서 저녁을 나누었다.파렐은 80세가 넘은 나이로서 칼빈의 임종을 보러 왔다.칼빈은 마지막 몇일동안 기도와 시편의 위로의 시를 암송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527일 동녁에서 뜨는 해를 받으면서 54년간을 이 세상에서 살다가 조용하게 하는나라로 옮겨갔다.

 

  

 

<칼빈의 사상정리>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속에 있는 구원

 

칼빈은 인간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어떤 가능성도 배제한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능력과 뜻 에 의해서만 인간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마치 토기장이가 한 그릇은 귀하게, 한 그릇은 천하게 그 뜻대로 만드는 것처럼, 하나님께 모든 인간 구원의 가능성이 달려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칼빈은 어거스틴의구원받을 자의 예정’을 발전시켜 한 걸음 더욱 나아가 구원받을 자의 예정과 멸망 받을 자의 예정도 말하는이중예정론’을 말한다. 따라서 칼빈에게서 인간의 의지는 노예적이며, 성령이 없으면 자유가 없다. 마치 인간 의지는 두 기사 앞에 놓인 짐승 혹은 말과 같은 존재이므로 성령이 타면 천국으로, 악령이 타면 지옥으로 달려간다. 그러므로 인간 구원이 하나님의 은총 1%, 인간의 의지 0%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거기에 비해 중세 신학에 영향을 미친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의지 50%, 하나님의 은총 50%를 말하는 신인협조설을 주장하며,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총 1%, 인간의 의지 1%를 말하는 복음적 신인협조설을 주장한다.

 

행동주의로 나타나는 성화 신앙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통치를 말하면서도 행동주의적 성화(聖化) 신앙을 강조한다.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누가 하나님의 예정에 들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얻기 위해 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행동주의 신앙이 나오게 된다.

 

따라서 칼빈의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4-6) "

하나님은 제1계명에서 하나님은 한분 이시며 자신외에는 어떤 신도 경배 하거나 상상해서는 안된다고 선포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본성이 무엇이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어떤 육신적인 생각도 품지 않으려면 어떠한 예배로 하나님을 높여야 하는지도 더 분명하게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합당한 예배를 미신적인 의식으로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어리석은 지성이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조잡한 개념을 만들어 낸 뒤에 고안해 내기 쉬운 육신적이고 경박한 의식을 철저히 멀리할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합당한 예배 즉, 하나님 자신이 정하신 신령한 예배를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여기서 금지된 가장 심한 악은 외적인 우상 숭배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거나 멸시를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에 필적할 대상을 용납하실 수 없으므로 자신을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누군가 그것을 피조물이나 새긴 우상으로 바꾸면- 지키실 것이며 그것도 짧은 기간의 단순한 형벌을 통해서가 아니라 조상들의 불경함을 본받는 삼, 사대의 후손들에게까지 미치는 형벌을 통해 지키실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이들은 먼 후손까지에게 끊임없는 자비와 인자를 베푸시겠다고 선포하십니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선택의 전개 / 존 칼빈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13:18)"

바로 이 상황 -제자들이 끝까지 견뎌낼 것이라는 점- 을 예수님은 제자들이 택함을 받은 덕으로 돌리십니다. 인간의 미덕은 너무 약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손으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산들바람만 불어도 매번 흔들리며 약한 공격에도 쓰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이들을 다스리시므로 사탄이 사용할 수 있는 그 어떤 장치도 그들이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끝까지 견디는 것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인내뿐만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경건의 시작도 선택의 덕으로 돌리...십니다.

어떻게 해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달리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게 됩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선택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이 진보를 이루며 선하고 거룩한 삶을 지속적으로 영위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으로 시작된 역사를 완성 시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이 변치 않기 때문이 아니면 어디에서 비롯된 일입니까? 요컨대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와 불신자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 입니다. 전자는 양자의 영에 의해 구원으로 인도되는 반면 후자는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는 육체대로 인해 멸망으로 치닫습니다. 그렇치 않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을 것입니다. "너희는 각자가 어떤 사람이 될지 깨달으라."그러나 신자들이 어느 것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가룟 유다와 다른 것은 자신의 미덕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인정하도록 예수님은 그들이 세움 받은 기초인 값없는 은혜로 그들 앞에 그러한 선택을 제시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모든 부분은 선택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읍시다.

포도나무선교회 /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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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에 효과를 나타낸다/ 존 칼빈

우리의 마음이 어둡고 악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이 외부적인 증명만으로도
우리의 믿음을 불러이르키는 데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에 기울어져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결코 이를 수
없으며 우둔하여 항상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다.

따라서 성령의 조명(照明)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이로 보아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이 인간의 이해력을 훨씬 초월 한다는
것이다.

...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성령의 능력으로 강화되고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성이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조명을 받는 것으로 부족하다.

이 문제에 대한 스콜라 철학자들의 생각은 완전히 잘못 잘못되었다. 그들은 지식
에서 오는 단순한 동의를 믿음과 동일시하고 심령의 확신과 확실성을 무시해 버
린다.

그러므로 믿음은 두 방면으로 하나님의 특이한 선물이다. 사람의 지성은 정화되
어 하나님의 진리를 맛볼 수 있게 되며 마음은 그 진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된다느
것이다.

성령은 믿음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장하게 하여, 드디어 우리를
믿음으로 인하여 천국에 가도록 인도하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
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바울은 말한다(딤후1:14).

우리는 사도가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는다고(갈3:2) 한 말을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성령의 선물이 하나뿐이었다면 바울이 성령을 "믿음의 결과"라고 한 것은
불합리한 말이었을 것이다. 성령은 믿음의 근원이며 원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에 여러 가지 선물을 주셔서 그것으로 교회를 장
식하시며 끊임없이 믿음을 더하심으로써 교회를 완전하게 만드신다고 하면서 그
여러 가지 선물을 열거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선물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일들을 바울이 믿음이
라고 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믿음을 받지 못하면 아무도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고(요6:65) 하는 것은 심히 모순된 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
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이 하늘의 지혜가 얼마나 은밀하고 고상한가를 생
각하지 않기 때문이거나 또는 사람이 얼마나 우둔하여 하나님의 비밀을 지각하
지 못하는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이 믿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확고 불변한 마음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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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그것이 살아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영원한 구원에 대한 소망을 불가 불리의 동반자로서 곁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믿음은 그 자체 내에서 소망을 일으키며 생산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진실성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다.

곧 그것은 우리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우리를 속이거나 빈 말을 할 수 없다는 것
을 확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확신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약속들을
- 그들이 반드시 진실하다고 믿는 그 약속들을- 실현하실 때가 오리라고 기대하
며 의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간단하게 말하면 소망은 하나님께서 진실하게 약속하셨다고 믿는 일들에
대한 기대이다. 이와 같이 믿음은 하나님을 진실하다고 믿으며 소망은  하나님의
진실성이 밝히 나타나는 때를 기다린다.

즉 믿음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믿으며 소망은 그가 우리에게 대해서 항
상 아버지가 되시리라고 예상한다.

믿음은 우리가 영생을 받았다고 믿으며 소망은 영생이 언젠가는 나타나리라고 예
상한다. 믿음은 소망의 토대로 소망은 믿음에 영향을 주며 힘을 준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이미 믿는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우리의 약한 믿음은 오래 참는 소망과 기대에 의해서 지지대고
조성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무력해지고 희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바른 말이다(롬8:24). 소망은 묵묵히 주를 기다리는 동시에 믿음이 너무 서두르다가 곤두박질
하여 떨어지지 않도록 제어한다. 소망은 믿음에 힘을 주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
심하거나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도록 한다. 소망은 믿음의 생기를 회복시켜
지치지 않게 한다. 소망은 종점에 노착할 때까지 믿음을 지탱하여 주어 도중에
서 심지어 출발점에서도 힘이 빠지지 않도록 한다. 간단히 말하면 소망은 끊임
없이 믿음을 갱신하고 회복함으로써 믿음에 견인하는 힘을 주는 것이다.

믿음을 확립하기 위해서 소망의 지지가 얼마나 많이 필요한가를 더 잘 알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 닥치는 시험의 형태가   얼마나
많은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첫째로 주께서는 약속하신 일을 연기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너무도 오랫동안 불
안정한 상태에 두신다. 이런 때에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합2:3)고 한 예언
자의 명령을 실천하는 것이 소망의 기능이다.

어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치는 것을 허락하실 뿐만 아니라 분명히 노여움
을 보이신다. 이런 때에 소망이 우리를 도와서 다른 예언자가 말한  대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사8:17)할 필요가   훨씬
더 절실하다. 또 베드로는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라
고 말한다(벧후3:3-4) 사실상 육과 세상은 꼭같은 말들을 우리에게 속삭인다 이
런 때를 위해서 우리는 길이 참는 소망으로 우리의 믿음을 보강해야 한다. 천 년
을 하루같이 여기리만큼(시90:4, 벧후3:8) 우리의 소망을 영원한 데에 두어야 한
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내가 그들에게 마음을 주고 그 속에서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11:19-20)

경건하지 않은 이들은 신령한 권면을 회피하려 하지만 그들이 원하든 말든 그 능력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권면의 주된 용도는 신자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신자 안에서 늘 성령으로 행하시지만 말씀의 도움도 효과적으로 활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다음 사실을 불변의 진리로 삼읍시다. 경건한 이들의 모든 힘은 선지자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에 있습니다.(겔11:19-20) 우리로 하여금 신령한 권면의 순종할 수 있게 하는 은혜를 받도록 준비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신령한 권면을 사용하고자 하신다면 그러한 섭리에 트집을 잡고 비웃을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신령한 권면과 경고에, 경건한 이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는 유익 외에 다른 유익이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권면과 경고가 완전히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령한 권면이 산자들의 선에 대한 열망에 불을 붙이고 신자들을 무기력에서 일깨우며 죄의 쾌락과 달콤한 감미로움을 파괴하는 효과가 있다면 누가 감히 권면을 쓸데없는 것이라고 비난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신자 안에서 두가지 방식, 즉 내적으로 성령을 통해, 외적으로 말씀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신자들의 지성을 조명하시고 마음을 훈련시켜 의를 실천하게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신자들을 새 피조물로 만드시며, 말씀으로 신자들이 이런 변화를 갈망하도록 자극하십니다. 두 방식 모두에 있어 하나님은 그 방식을 사용하시는 분량에 비례하여 그 손의 능력을 펼치십니다. 반면 말씀은 현재 불신자들의 양심으로 자극하여 심판 날에 그들을 더 변명할 수 없게 만들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자신에게 올 수 없으며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자기에게 나온다.(요6:44-45)고 선언하시면서도 스승의 직분을 도외시하지 않으시고 유익을 얻기 전에 먼저 내적으로 성령의 가르칭을 받아야 하는 이들을 정성으로 초대합니다.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

 

칼빈의 예정의 논리


고광필


學校法人 光神學園 長老會光州神學校 조직신학, 교수


2-637-9401-07

pp.129-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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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여러가지 우려와 비판이 칼빈 당시뿐만 아니라 그의 후계자들 가운데도 많은 논란이 되어 왔음을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카톨릭에서 장로교회로 개종했다가 칼빈과 예정론에 대해서 싸운 후 다시 카톨릭으로 개종한 제롬 볼섹은 강력하게 칼빈의 예정론에 대해서 반대했다. 그 이유는 칼빈의 예정론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고 죄의 조성자로 만든다고 했다. 그러나 칼빈은 말하기를 볼섹이 진정한 의미에서는 예정론 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기 때문에 신성 모독이 된다고 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는 더치(Duchess)의 페라라 공작(duke of Ferrar) 부인인 프랑스의 르네(Renee of France)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변질시키는 자는 설령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1) 이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칼빈의 자세를 시사해 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칼빈은 볼섹의 체포를 명령했다. 그러나 볼섹은 우리가 선택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선택되었다고 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제네바 시의회는 볼섹의 주장이 이단임에는 사실이지만 그를 처벌 규정에 관하여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기회를 포착한 방종파들은 다른 도시 개혁자들의 자문을 구하자고 제의해서 시의회는 그렇게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제네바시의 규정에 의하면 이단은 처형이 아니라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불링거나 파렐은 심한 처벌을 요구했지만 베른주나 바젤 지도자들은 예수님은 진리를 사랑하고 자기를 배반한 사람도 사랑했다고 하면서 관용을 베풀기를 원했으며 아무튼 예정론은 인간을 고뇌케 만드는 교리라고 각주를 달아서 회신했다. 나중에 칼빈은 파렐과 불링거에게 편지를 내 면서 볼섹은 처형되어야 하는데 영원한 추방은 만족스러운 처벌이 아니라고 했을 때 칼빈은 불링거로부터 인정과 관용이 적다는 책망의 편지를 받고 칼빈 과 불링거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다. 2)

 

 

 칼빈은 자신의 무조건적인 예정론에 반대하여 조건적인 예정론을 말한 위 트레트의 부감독인 알버투스 피기우스와 베네딕트 수도승인 게오르기우스의 견해를 반박하고 변증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1552)" 논문을 쓰기도 했다. 칼빈의 예정론은 그가 살았을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칼빈의 후계자인 데오도르 베자의 전택설(타락전 예정론)에 반대한 알미니우스의 반대와 그를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칼빈의 예정론에 대한 심대한 논란이 있었다. 이들은 칼빈주의에 반대해서 다섯 가지 항목을 제안했다. 칼빈주의 에 반대했기 때문에 항론파로 불려지게 되었다. 항론파가 제안한 다섯 가지 항목을 성경의 입장에서 변증하고 항론파의 오류를 고침으로서 구원 교리의 핵심을 잘 요약한 도르트신조를 낳게 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예정론은 칼빈이 만들어낸 교리가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교리이다. 예정론은 칼빈이 말한 데로 성경적인 교리이며 이 교리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음으로 영접할 때 많은 이익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리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제일 먼저 예정 교리를 확립한 사람은 성 어거스틴 이다. 독일 엘랑겐 대학(the university of Erlangen)의 뮬러(E.F. Karl Muller)교수는 초기 장로교회에서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기 때문에 교회 가 구원의 확실성을 준다는 주장에 반대했으며 모든 종교 개혁자들의 중요한 교리라고 설파했다. 3) 그래서 장로교인은 예정론자라는 정치성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4) 삼대 칼빈 신학자의 한 사람으로 불린 벤자민 워필드도 말하기를 종교개혁이란 영적인 관심에서 비롯한 종교부흥이요, 신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 어거스틴주의 부흥(a great revival of Augustinianism)이라고 했으며, 예정론은 칼빈이 창설한 교리가 아니며 칼빈주의가 필연적으로 도출한 논리적 귀결로 서, 성 어거스틴, 마틴루터, 마틴 부처로부터 영향받은 교리이라고 했다. 5) 루이스. 벌코프(L. Berkhof), 헤르만 바빙크(H. Bavink), 헌터도(A.M. Hunter) 등도 예정론은 종교 개혁자들 모두가 중요시한 교리이며 장로교회의 중요한 교리의 하나라고 했다. 6)

 

 

  오늘날에는 많은 신학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와서 신학의 혼수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신학을 시대의 산물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시대의 이슈를 성경을 통해서 변증하고 험증하는 것도 신학의 임무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 시대 그 시대마다 상황이 다르고 이슈가 다르기 때문에 신학의 강조 점이 다른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 이란 단순히 시대의 산물은 아니다. 성경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그 시대를 진단하고 말씀에 기초하여 바로잡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삶을 살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오늘의 시대를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성경의 눈으로 이 시대를 바라봐야 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2000년대를 준비하고 바라보면서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재를 양성하고 새로운 기술과 이론을 개발해야 한다고 한다. 선지자적인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연 과학적인 사고와 논리를 신학에 직접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는가? 신학을 과학의 논리로 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을 지배하는 논리와 신학을 지배하는 논리는 두 개의 다른 논리이기 때문이다.

 

 

  신학적인 면에서 2000년대를 준비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신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가 성직자들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한다. 사실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고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많이 안다고 하는 것이 깊이 이해한다는 말일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논리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더 깊은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고 하는 것과 깊이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두 개의 다른 논리라고 생각되어진다.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한 가지를 알아도 분명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혼탁하고 개방된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단순하게 그리고 명료하게 가르쳐야 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는 구원의 메시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을 확신하며 감격과 환희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를 명료하게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되어진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 존재의 절대성을 가질 수 있는가? 우리 인생은 우리 마음대로 사는 것인가? 우리 신앙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어떻게 이 세상을 확신과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가?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를 끝까지 인도하시는가?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부르심을 확신 할 수 있는가? 등등의 문제가 예정론에서 다루어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예정론은 구원의 근본 문제를 다루며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다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에도 이런 근본적인 문제들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예정론은 성경에 계시된 교리이기 때문이다. 21세기를 향하여 사는 우리들에게 우리 믿음의 선배요 종교개혁을 완성한 칼빈의 예정론을 살핌으로서 오늘의 교회와 자신의 신앙 뿌리를 새롭게 재조명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 하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의 교회와 신앙생활은 종교개혁의 중요한 유산인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도 오늘 도 내일도 우리의 신앙의 뿌리는 성경에 있어야하며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그래서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올바르게 가르 치려면 우리 신앙의 뿌리를 늘 새롭게 봐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전도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는 볼 수 있는 것이다. 새롭게 보려면은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 이 사실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요 성령의 역사이다. 새롭게 하는 역사의 뿌리는 예정론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칼빈의 예정론을 그의 생애와 작품속에서 살펴봄으로서 우리 신앙의 뿌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예정의 논리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I. 예정론의 역사


성 어거스틴을 제외한 초대 교부들은 예정론을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았다고 한다. 초대 교회는 하나님과 세계, 영과 육, 영혼과 육체, 빛과 어둠, 악과 선, 죽음과 생명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이원론적인 사고에 기초하며 타락한 신에 의해서 이 세계는 창조되었기 때문에 물질계는 근본적으로 악하며 그로 인한 인간 자유를 부인하고 모든 것을 맹목적인 운명에 맡기는 영지주의를 반박하면서 초대 교부들은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는 약화된 것이지 말살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한다. 최초의 조직 신학자로 불려진 오리겐도 하나님은 예지에 의해서 예정했다고 함으로서 조건적인 선택을 강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나 안디옥 학파간의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적으로 중생이란 성령과 인간 의지의 협력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고 봤다고 한다. 여기서 의지의 협력설은 아주 적을지라도 여하간 중생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신인협동설(synergism)이 라고 한다. 7)

 

 

  어거스틴도 초기에는 무조건적인 예정론이 아니라 조건적인 예정론을 가르쳤으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 서 그의 분명하고 성경적인 예정론을 확립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는 말하기를 믿고 의지하는 것은 인간에게 속해 있으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을 통해선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 믿음과 의지를 준다고 했으며 하나님은 인간이 믿을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정하셨다고 했다. 8) 이와 같은 사상은 다분히 초대 교부들의 사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 있어서 믿음은 선택의 결과이며 예정은 예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 예정이며 이중예정론을 강조 했다. 죄를 다분히 환경의 탓으로 돌리며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고 가르쳤던 펠라기우스에 반대해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가르쳤으며 아담의 타락에 의한 의지의 왜곡을 가르쳤다. 9) 따라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왜곡된 의지는 회복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지는 회복되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부어진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행할 수 있다고 했다. 주여 이제 명령하소서라고 했다. 칼빈 자신이 고백한 대로 자신의 예정론은 어거스틴에게 힘입은바가 크다.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은 마틴 루터도그의 유명한 에리스무스와의 자유의지 논쟁에서 인간의 의지란 은혜 없이는 자유 하지 못한다는 노예 의지 (bondage of will) 를 천명하므로서 절대적 인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구원을 역설했다.

 

 

  루터에 의하면 가롯 유다의 배반의 경우에 있어서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 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은 강제가 아니며 사탄의 노예(slave of satan)가 되어서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다. 그래서 배반은 유다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유다를 회개시키지 안 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에서 루터는 말하기를 그것은 하나님의 숨은 뜻이라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순된 뜻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 루터는 그것은 하나님께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죄악된 우리 인간이 왜곡된 논리로 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정론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대한 인간 무지의 고백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기뻐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확신에 대한 고백이라고 했다. 10) 어거스틴과 루터 , 칼빈 이전의 모든 종교 개혁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무조건적인 예정을 가르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정 교리는정통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교리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II. 칼빈의 생애와 예정론
칼빈의 생애를 회고해 볼 때 정말로 그의 생애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 운데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윌리암 파렐과 제네바에서 처음 만남도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라고 말했으며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후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다시 눈물을 머금고 제네바로 돌아가게 된 것도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봤다. 1541년 3월 1일 제네바의 James Bernard 목사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에서 자신 이 스트라스버그를 떠나기를 주저하는 이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가 하나님 안에서 부르심에 대한 확신 문제였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양심상 나는 현재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양심의 소리 때문에 스트라스부르그를 쉽게 떠나지 못하겠다. 양심은 타당하고 거룩한 것이다. 기독교인들의 증거이다. 나의 사역이 나에게 불행하고 불운한 것처럼 보였던 재난의 시간(칼빈이 제네바로부터 추방된 때)이후 나는 주님께서 직접 나에게 분명한 음성으로 부르시지 않은 한, 즉, 주님께서 내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도록 어떤 필요를 제시해 주시지 않은 한 내가 먼저 교회의 어떤 지위를 떠맡지는 않겠다고 결심 했다." 11)

 

 

  칼빈에 있어서 부르심이란 우리의 선택의 확신을 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기독교 강요에서 맡했다. 이점에서 본다면 칼빈이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그 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성직 자에게 부르심이란 아주 중요한 것임을 일깨워 주며 부르심은 선택의 확신을 주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도 언제나 하나님이 자신을 복음을 위해서 사도로 부르신 것을 분명히 했으며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받아 드렸다(롬 1:1).

 

 

  칼빈은 그가 죽기 전 고별사와 유언에서도 나의 전 구원이 근거해 있는 하나님의 자비스러운 예정 외에는 다른 소망이나 피난처를 내가 갖고 있지 않으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믿음 안에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라고했다. 12) 이 고백을 통해서 볼 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칼빈은 자기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있었음을 체험했음을 고백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와 은혜 가운데 잠자는 것처럼 죽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예정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근거해 있다. 셋째, 칼빈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믿음은 예정에 기초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넷째,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굳게 믿어야 함을 배울 수 있다. 오늘의 상당수의 성직자들은 성경의 중요한 교리를 믿지도 않으면서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칼빈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사람은 아직 주님의 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나 생각되어진다. 칼빈의 신학의 중요한 특성의 하나는 그의 예리하고 명석한 논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깊이 체험 하고 창세 전에 모든 것의 미래를 예정하신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나온 신학 (theology form the fear of God ) 이라는 점이다.、

 

 

  칼빈의 예정론은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당시에 개혁 신앙을 고백한 믿음의 동역 자들과 성도들의 순교와 고난과도 관계가 있다. 그들은 고난을 받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로 개종한 후부터는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내일의 소망이 없이 불안과 초조가운데 살아야 했으며 그 중의 어떤 성도는 불안과 회의 가운데 있었던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예정 신앙에 굳게 서서 구원을 확신하며 개혁 신앙대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믿음의 선조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믿는 믿음 가운데 살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13)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믿는 신앙만이 이 험하고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희망과 확신을 갖고 살 수 있음을 우리는 칼빈의 생애를 통해서 배울 수 있다.

 

III. 예정론의 위치


칼빈은 1536년에 강요 초판을 발행했으며 그후 2번(1539년, 1543-50년)에 걸쳐서 23년의 수정을 거처 기독교 강요 최종판(1559)이 나왔다. 초판 강요에서부터 최종 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예정과 선택을 같이 다루고 있지만 최종 판에서는 섭리는 신론에서 다루며 예정론은 구원론에서 분리시켜 다루고 있다. 14) 논리적으로는 예정이 섭리의 앞에 있지만 인식론적인 입장에서 보면 예정은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서 보여진다. 예수님이 우리의 예정을 보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경험론적으로 보더라도 예정과 섭리는 직접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지난 후에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강요 제 삼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을 다루고 있다. 환언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내적으로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고 변화 받게 한다. 이점에서 본다면 우리의 선택의 확신은 단순히 경험적 인 것도 아니며 성령님의 조명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확신시켜 준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은 상향식이 아닌 하향식으로 예정론을 다루고 있다. 이 사실이 그의 후계자인 베자와 다르다.

 

IV. 예정론 이해의 전재 조건


칼빈의 예정론을 다루면서 한편으로는 선택을 유기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환언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다루기 위해서 유기가 필요한 것이지 유기를 위해서 선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요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에베소서에 사도 바울은 선택을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이라고 했다 (엡 1:3).

 

 

  다른 한편으로는 칼빈의 예정론은 이론이나 사변이 아니라 성경의 교리라는 것이다. 칼빈은 위트레트(utrecht) 부감독인 알버투스 피기우스(Albertus Pighius)와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승인 게오르기우스(Georigius of Sicily)의 조건적 예정론에 대한 반박 논문인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에서 예정론의 교리의 창시자는 어거스틴도 아니고 자신도 아니며 성경이라고 했다. 칼빈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성경이 예정에 대해서 말하도록 하지 안했다면 예정론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안했을 것이라고 했다. 15) 성경이 예정론의 창시자라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자동차가 고장이 났을 때 정비소에 가서 고치게 된다. 그러나 정비소에서도 고치지 못할 때 그들이 하는 말이 만든 데로 가지고 가시오라고 말한다. 이 말의 의미가 시사하는 것이 무엇안가? 결국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동차를 설계하고 만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정론의 창시자가 성경이라고 한다면 성경이 제시하는 대로 이해 하는 것이 가장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의 이성 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두는 겸손히 참 지혜이며 인간의 지혜를 규율하는 원 리라고 했다. 16) 그렇다. 하나님의 예정의 비밀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것은 설 명이 아니라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이다. 깊이 이해한 사람에게는 설명이 먼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먼저 인 것이기 때문이다. 신비는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이다. 어느 사형수가 고백했 듯이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죽음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이라고 고백한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예정론을 인간의 사변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피상적인 이해이요 번뇌케 하며 양심에 고통을 당하게 하며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영접 하는 것이다. 이것이 깊은 이해이다. 이러한 이해는 성경에 나오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30배, 60배, 100배의 행복하고 환희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V. 예정론의 정의, 중요성 및 목적


i)정의


칼빈은 예정론은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선택에 의해 사람을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신다" 라고 정의했다. 어떤 사 람은 구원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예정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칼빈의 이중 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예정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언어는 예지가 아니라 예정이라는 단어이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항상 현재로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간 미래의 조건을 예견하시고 예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7)

 


ii) 중요성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예정론의 유익과 중요성, 목적을 아주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예정론은 그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 아무 유익도 없이 마음을 권태롭게 하는 교묘한 사변이 아니다. 오히려 이 교리는 경건한 사람들의 필요에 아주 적합하고 확실한 교리 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우리의 믿음을 건전하게 세워 주며, 우리로 하여금 겸손케 하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을 고양시키며, 이 선하심을 찬양하도록 우 리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세우는 데 있어서, 이 선택 교리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 더 적 절한 것은 없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선의(good will)에 기초하고 있고 세상의 모든 풍파와 사탄의 모든 공격, 그리고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취소되 지 않을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선택을 우리의 심령 속에 확실히 증거 하여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택의 이유를 하나님의 품안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참으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에 게 보장되어진 것이다." 18)


칼빈에 의하면, 첫째, 예정론은 우리 마음을 고뇌케 하는 사변이 아니다. 둘 째, 예정론은 경건한 사람에게 필요한 교리이다. 셋째, 예정론은 우리의 믿음 을 건전하게 세워 준다. 넷째, 신자로 하여금 겸손케 해준다. 다섯째, 선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해준다. 여섯째, 구원의 절대적 확실성을 가질 수 있다. 하 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강요에서도 예정론은 우리 인간의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옴을 말해 준다고 했다. 하나님은 무차별적으로 구원의 소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어떤 사람에게 는 유기의 대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를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 19)


ⅲ)목적
첫째,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찬양하게 해준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져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6)라고 예정의 목적을 기술하고 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성화된 삶을 의미한다. 칼빈에게서 성화된 삶이란 하나님의 영광에 종속된 삶이다. 따라서 예정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선택된 자는 아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선택된 자의 삶인 것이다. 20)

 

 

VI. 선택과 유기의 근거


i) 선택의 이유와 근거


세상에 보면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살며 어떤 사람은 아무리 전도해도 받아 드리지 않은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어 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시고 그렇게 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왜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유기에 처하시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셨다. 그 이 유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요 사랑이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땅과 그 위의 만 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 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 (신 10:14, 15, 4:37, 7:7-8, 10:14-15, 23:5)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심은 그들을 기뻐하시고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선택의 이유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잘나서 또한 앞으로 좋은 신자들이 될 것을 예견하시고 택한 것은 아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요 사랑이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창세 전(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선택(εξελεξατο)하셨다. εξελεξατο는 εκλεξαΥω(선택하다)의 부정 과거 시제(aor. mid. ind.)로서 영원의 어느 시점에서 하나님이 선택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엡 1:4) 또한 이 선택이라는 언어가 시사하는바와 같이 선택에는 유기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베소서 1:5절에서 "그 기쁘신 뜻 대로 우리를 예정 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προοριοα ημαει υιοθεσιανδια Ⅰ ησουχριστου ει αυτον) 여기서 προοριοα는 부정과거시제(aor.act. part)로서 하나님이 영원의 어느 시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것을 예정하셨다는 것을 말해준다.

 

 

  칼빈은 에베소서(1:4-6) 주석에서 예정은 첫째,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의 주체이지 인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인간은 전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말해 주고 있다고 했다. "너희가 나를 택(εξελεξασθε)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εξελεξαμην)하여 세웠나니"(요 15: 16) 둘째, 선택은 하나님의 자유스러운 결정이요 예수 안에서 하신 것이다라고 했다. 선택은 누구의 압력을 받아서 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εν Χρισιω)와 "그리스도를 통하여"(δια Χριοτου)라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택자의 선택의 근거가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다. 그래서 선택의 확신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능하며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영원히 숨겨져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을 볼 수 있는 거울이며 약속이다.21)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은 창세 전에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선택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이지 우리의 공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셋째, 선택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κατα την ευδουκιαν του θελεματο αυτου)에 기인한다. 선택은 우리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선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은혜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다. 신앙의 최고의 표현은 찬양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의 궁극적인 목표는 주님의 자비스러운 은혜를 찬양하는 것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예정에 있어서 하나님을 formal cause 예수님을 material cause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을 efficient cause 하나님의 은혜의 찬양을 final cause 라고 했다.22)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셨다. 여기서 창세전이라는 말은 우리 가 선택된 것은 시간적으로 보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이다. 그래서 선택의 근거가 절대적으로 우리 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신 뜻이다. 여기서 기뻐하신 뜻이란 하나님이 당신의 원하시는 대로 역사 하시는 뜻을 의 미한다. 창세 전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신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은 그의 선하시고 기뻐하신 뜻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선택하신 자를 때가 차매 부모를 통해서 이 땅에 보내시고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택자를 부르셔서 중생 하게 하시고 하나 님의 자녀 삼으시고 이 땅에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는 삶을 살도 록 당신의 섭리로 보호하시고 양육하시다가 때가 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에 가게 하실 것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 자비스러운 하나님의 계획이며 은혜가 아닌가! 23) 시간적으로 본다면 칼빈에게 있어서 선택은 창세 전에 예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은혜로운 뜻이며 시간 속에서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보여진다. 전자는 선택의 이유요 후자는 근거가 된다.

 

ii) 유기의 근거


선택이라는 언어 속에 유기라는 말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선택과 마찬가지로 유기도 하나님이 창세 전에 정하신 것이다. 첫째, 하나님이 창세 전에 선택과 유기를 예정하셨기 때문에 유기의 일차적인 원인은 죄가 아니다. 죄는 이차적인 원인이다. 칼빈에 의하면 전자는 遠因며 후자는 近因이라고 한다. 환언 하면 하나님은 영원한 예정에 따라 이미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개인과 모든 인간의 운명을 정하신 것이다. 아담은 그 자신의 죄로 유기 된 것이다. 모든 인 류는 아담 안에서 타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은혜로 선택하신다. 24) 둘째, 유기의 이유는 하나님이 인간의 죄를 지을 것을 예견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것을 예지 하셨지만 그것이 유기의 근거는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 유기의 원인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신 것(롬 9:13)에서 사도 바울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에서와 야곱의 쌍둥이 중에서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언이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는 시는 자를 강팍케 하시느니라"(롬 8:18)하나님의 선택에도 선하신 뜻이 있으며 유기에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다.

 

 

  선택자나 유기 자나 다같이 유혹과 악을 행할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 자에게 고난은 다른 차원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 택자에게 환관과 고난은 택자를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택자를 훈련시키는 것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택자의 구원을 보호하시는 것이다. 25) 유기자에게 고난과 환난은 그들의 잘못이며 하나님은 그들의 환난이나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공의를 보여주신다. 따라서 유기에 있어서 원인(遠因)은 하나님의 예정이나 근인(近因) 은 유기자의 죄이기 때문에 유기는 공의로운 하나님의 판단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기된 자의 깊은 원인은 우리에게는 숨겨진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말했다. 2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하나님은 왜 어떤 자는 구원에 어떤 자는 멸망에 예정하셨다면 어떻게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우리 인간의 죄를 판단하실 수 있는가 누가 묻는다면 칼빈은 성경에 있는 데로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 9: 20).


 

VII.선택의 확신


칼빈에 의하면 선택은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증되지만 유기된 자는 그들에게 예정된 공정한 멸망을 초래하게 된다고 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전적으로 은혜의 사역이다. 여기서 전적인 은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보여주는 은혜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숨겨진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그리스 도를 통해서 볼 수밖에 없다. 존 낙스가 1527년에 죽음의 침대에서 그 아내가 읽어 주었던 설교가 칼빈의 에배소서 설교라고 한다. 칼빈의 에베소서 설교는 확신에 차고 감격과 환희에 넘치는 설교이다. 하나님의 창세 전의 비밀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사도바울도 늘 하나님께서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르심에 대하여 늘 감사했다(롬 1:1).

 

 

  우리는 누가 선택을 받고 누가 유기를 받았는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칼빈은 예베소서 설교에서 우리의 선택을 볼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칼빈에 의하면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 책에 우리 이름을 기록하는 서기 (registra)이며 하나님이 당신의 선택을 우리에게 보이시는 거울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선택과 유기를 그리스도를 통해서 볼 수밖에 없다. 환언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믿음을 통해서 우리의 선택을 복사할 수 있다고 했다. 27) 여기서 믿음은 선택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을 반대한 볼섹이나 피기우스, 게오르기우스처럼 믿음의 결과로 선택된 것은 아니다.

 

 

  칼빈이 에베소서 설교에서 사용한 선택의 확신에 관한 세 가지 메타포를 통해서 우리는 선택의 확신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예수님이 생명 책에 택자의 이름을 기록하는 서기라고 하는 것은 선택의 확실성을 말해 주며 거울이라는 메타포는 우리의 선택을 보는 인식론적인 방법을 말해주는 메타포요 믿음의 복사는 선택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경험적인 방법을 말해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VIII. 칼빈 이후의 예정론


칼빈의 후계자요 제자인 데오도르 베자는 그이 저서 신학 대전(summa toitus christianismi)이라는 책은 예정론을 중심으로 해서 기독교 교리를 재구 성했다. 칼빈은 예정을 하향식으로서 창조에서 시작하여 타락 예정으로 나아가지만 베자는 상향식으로 예정에서 시작에서 창조 타락 구속 성화로 나아간 다. 28)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베자의 신학은 예정론을 중심으로한 신학 체계 라고 말할 수 있다. 베자 밑에서 배우고 그의 제자인 알미니우스가 배자의 전택설(타락전 예정)을 반대하고 나선 것이 나중에 항론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쉽게 말하면 항론파의 예정론은 무조건적인 선택이 아니라 조건적인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구원도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신인협동적인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르트 신조에서 항론파의 다섯 가지 반대를 성경에 입각하여 무조건적인 선택을 재 천명했으며 칼빈주의 구원의 교리를 잘 요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구원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재 천명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제임스 페커(J.I. Packer)는 도르트 신조는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신다" (God saves sinners)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다. 29) 도르트 신조나 웨스민스터 신조에서 타락전 예정설과 타락후 예정설을 다 수용했지만 타락후 예정론 입장에 예정론을 기술하고 있음은 시사하는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30)


도르트 신조에서 "선택이라는 것은, 이 세계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그들의 최초의 상태로부터 타락하여 죄와 파멸의 결과를 낳게 됨에 따라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중보자로 또한 택한 자의 머리와 구원의 기초로서 세우신 그 분 안에서 구원받은 자의 일정한 수를 뽑으시는 것이다. 그것은 그의 선하신 주권에 따라 은혜로 인하여 된 것인데 이는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목적이 되었다. 택함을 받은자들이 그 본성에 있어서는 그 밖의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낫거나 더 값어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똑같은 비참한 속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주셔서 그를 통하여 택함 받은 자들 이 구원 얻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시고 죄에서 벗어나게 하셔서 말씀과 성령으로 그 분과 교통하도록 하시고 그들에게 참 믿음을 주시어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 또 한 그 아들과의 교제를 통해 능력 있게 그들을 보존해 주시면서, 결국은 하나님에게서 그들에게 보여주신 자비로우심에 영광을 돌리고 그의 풍성한 은혜를 찬양케 하신다." 31)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 에서는


"1.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가장 지혜로우시며, 가장 거룩한 자기 뜻에 따라 되어 갈 일을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또는 변할 수 없게 정하셨다. 그러나 그것에 의하여 하나님이 죄의 조성 자로 되지도 않으시고 인간의 의지를 억제하심도 없으며, 제이 원인들의 자유나 우연이 제거되지도 않고 도리어 확립되게 하 셨다.


2.하나님은 장차 일어날 듯한 혹은 일어날 일을 무엇이든 지 아시지만 장래 일로, 혹은 일어날 것으로 선견 하신 때문에 작정하신 것이 아니다.


3.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 하여 그의 작정으로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생을 얻도록 예정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죽음에 이르도록 선정하셨다.


5.인류 중에서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이 기초가 놓이기 전에 그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목적과 그 마음의 은밀한 계획과 기뻐하심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셔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셨다. 이렇게 결정하실 때 자유로운 은혜와 사랑 안에 하신 것이요, 어떤 선견된 신앙이나 선행, 오래 참는 일, 피조물 안에 있는 어떤 조건, 혹은 하나님을 그렇게 하도록 움직이는 원인 때문에 하신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를 찬송하게 하려 하신 것이다.


6.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 의 뜻의 영원하며 지극히 자유로운 목적을 따라 그들로 영광에 이르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할 모든 방편들을 먼저 정하셨다. 그 러므로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였으나,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았고 때가 되어 역사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도록 유효 적으로 부름을 받고 의롭다 청함을 얻고 양자 됨을 얻고 성화된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그의 권능으로 보호를 받는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자 외에는 다른 아무도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을 받지 못하고 유효적으로 부름을 받지 못하고 칭의, 양자, 성화, 구원을 받지 못한다." 32)

 

 

  소요리문답 19번과 20번에도 후택설 입장으로 전개한다. "모든 인류가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고, 또 그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게 되어 생전의 모든 비참함과 죽음과 영원한 지옥의 벌을 받게 되었다 (19번)." 하나님께서는 다만 자기의 선하신 뜻대로 영원 전부터 어떤 자들을 영생하도록 선택하시듯, 은혜의 언약을 세워 구속자로 말미암아 그들을 죄와 비참한 처지에서 건져내어 구윈의 자리에 이르도록 하셨다(20번) 33)

 

 

  신 정통파로 알려진 칼 바르트가 예정론을 그의 교의학의 중요한 뼈대로 삼으면서 신중심의 예정론이 아닌 극단적인 기독론중심(exclusive Christ monism) 의 예정론을 기술함으로서 종교 개혁자들의 이중예정론을 부인했으며 예수님 의 죽음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으며 보편 구원론으로 가 게 했다고 한다. 34) 이 견해는 참다운 성경이 가르치는 예정론이 아니다.

 

 

IX. 신학적 적합성


예정론이 칼빈의 핵심적인 교리가 아님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해서 지엽적인 교리도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예정론 성경이 가르친 실제적인 교리로서 성 어거스틴에서 시작하여 종교 개혁자뿐만 아니라 신 정통주의에서도 중요한 교리이다. 예정론의 신학적인 적합성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구 원은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가장 깊이 말해 주며 구원의 절대적 확신을 보여주는 교리가 예정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예정론은 신자의 선행과 경건의 뿌리라고 칼빈은 말했다. 하나님의 선택된 백 성으로서 정체성(Christian identity)을 갖게 하는 뿌리가 예정론이라고 할 수 있 다.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한 중요 한 이유 중의 하나가 신자의 정체성의 문제이다. 미국에 이민의 자녀들의 커다란 문제가 정체성의 문제라고 한다.

 

 

  미국 사람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한국 사람도 아니라는 정체서의 위기에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처럼 신자 는 신자다운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선민 사상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 신자는 예정론에 기초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여기에 개인 개인의 과거 현재 미래의 존재의 확실성과 소망을 주는 확신이 있다고 생각되어 진다. 셋째, 인류 역사는 인간의 의지나 결단에 의해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 인간을 통해서 펼쳐지는 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우리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며 그분의 선하신 뜻과 섭리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이 세상에서 탄탄 대로를 걸어갈 수 있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많은 사가들이 역사의 주체를 민중, 인간 의지에 두고 있다. 이런 사관의 견해가 다 틀린 것은 아닐지라도 인간 중심의 사관이다. 인류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나, 자 연의 순리에, 무산자와 유산자의 계급 투쟁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움직인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하나님은 선택자 를 통해서 역사를 움직여 나가고 계신다는 예정과 섭리에 기초한 역사관을 확 립하며 살아가는 것이 칼빈주의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확신 과 소망 가운데서 완수해 나갈 수 있다.

 

 

X. 맺음말


칼빈의 예정론은 그가 고백한대로 사변으로서 이해되어지는 교리가 아니 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해되어져야 할 교리이다. 성경이 이 교리의 창시자 이기 때문이다. 선택과 유기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의지에 기초한 것이다. 이 의지는 폭군의 의지가 아니라 은혜스럽고 공의로운 하나님의 의지이다.

선택과 유기는 인간의 공로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 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진 믿음으로 그것을 복사할 수 있다. 그래 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정을 믿는 자에겐 우연은 없으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예정과 선하신 섭리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때가 차매 부모를 통해서 이 땅에 오게 하시며 지금까지 당신의 능력으로 양육하시고 보호하시며 선하신 섭리 가운데 인도하시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당신의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양육하시고 섭리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살 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생명을 바쳐서 감당하는 것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돌리는 생활일 것이다. 이것이 칼빈이 성경을 통해서 발견한 예정의 논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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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주


1) F. Whitfield Barton, Calvin and the Duchess(Westminster/John Knox Press,1989), p.42.
2) E. Whitfield Barton, Calvin and the Duchess(Westminster/John Knox Press, 1989), p.58.
3) E.F. Karl Mueller, predestination in the New Schaff-Herzog Encyclopedia of Religious Knowledge, Vol. Ⅸ, p. 196.
4) J.H. Babington, the Reformation, p.84.
5) 벤자민B. 워필드,구원의 계획, 모수환 옮김(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1), 121.
6) L. Berkhof, The History of Christian Doctrine, p.153. H. Bavink, The Doctrine of God, p.353. A. M. Hunter, The Teaching of Calvin, p.96.
7) Harry Buis. Historic Protestantism and Predestination, (The Presbyterian and Reformed Publishing Company, 1958), p.8.
8) St. Augustine, Expositio Quarumdam Propositionum ex Epistola ad Romanos, 61. p. 55.
9) 어거스틴의 예정론을 반대해서 반펠라기우스파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들은 어거스틴의 무조건 예정과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거부했다.
10)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뜻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된 뜻(복음 안에 계신 된 뜻)이요 다른 하나는 숨겨진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복음 안에 계시된 뜻(the revealed or Preached will of God)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가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숨은 뜻(the hidden will of God)이 있다.
11) 존 칼빈, 칼빈의 경건, 이형기 옮김(크리스찬 다이제스트,1989), PP.204-205, 각주 25의 번역을 인용. Henry Beveridge and Jules Bonnet(eds), Selected Works of John Calvin tracts and Letters Vol.4. (Baker Book House, 1983), p.234, LXII.
12) The Reformation, Hans J. Hillerbrand(ed), (Baker Book House,1987), p.207.
13) Joseph Haroutunian(ed), Calvin: Commentaries(The Westminster Press,), p.42.
14) 강요 초판에서는 예정론을 사도 신경에 있는 교회론을 설명하는 데서 발견되어지며 그 의 강요 최종판 전까지는 예정과 섭리를 같이 다루고 있으며 구원론에서 다루고 있다.
15) 존 칼빈, 칼빈의 예정론,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편역, (기독교 문화 협회, 1988), pp.83(각주 9),86.
16) 칼빈의 예정론, p.86.
17) 하나님의 예지라는 말은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 항상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항상 현재로 이해하신다. 모든 것을 현재 우리가 기억하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계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지이다.(강요 3,21,5.) 고 계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지이다. 1딴요 3.21.5.)우리가 기억하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하
18) 칼빈의 예정론, pp.77-78.
19) 강요 (1559), 3,1,1.
20) John Calvin, Commentaries, Vol XXI(Grand Rapids, Michigan: Baken Book Housc,1989), pp.198-99. Citedao CM.
21) 칼빈의 예정론,180.
22) Calvin: Commentaries, Joseph Haroutunian (ed), pp.305-306.
23) Joseph Haroutunian, Calvin: Commentaries, pp.305-306.
24) 칼빈주의자들 중에 하나님의 계획 순서에 대해서 두 견해가 있다.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를 결정했을 때 인간은 타락될 자로 간주되었는가 타락되지 않을 자로 되었는가 문제이다. 환언하면 하나님이 선택과 유기의 대상을 하나님이 타락할 자로 봤는가 아니면 단순히 창조한 사람으로 봤는가 문제이다. 타락전 선택 설에 따르면 1)창조될 자들 가운데서 어떤 자들은 영생하도륵 선택하고 어떤 자들은 멸망하도륵 정한다. 2)창조한다. 3)인간의 타락을 허락한다. 4)택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낸다. 5)이 구속을 효력 있게 하기 위하여 성령을 보낸다. 타락후 선택 설은 1)하나님은 창조하고 2)타락을 허용하고 3)타락한 사람 가운데 어떤 자들에게는 영생을 어떤 자들에게는 유기에 내버려두시고 4)택자를 구속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보내고 5) 그리스도에 의해서 획득된 구속의 적용을 위해서 성령을 보낸다. (칼빈주의 예정론, 로레인 뵈트너, p.151) 타락 전 선택 설은 차별에 강조를 두며 이 관념을 전 과정에 관련시킨다. 차별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유기와 선택에 모순이 생긴다. 왜냐하면 창조하기로 결정된 대상은 인류의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이며 똑같은 본성의 소유자이 니라 전체였기 때문이다. 벤자민 워필드도 말하기를 이 문제의 제출이 그 해답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문제가 되어 있는 인간의 실제적 처리는 택함 받은 자들이나 버림 받은 자들을 막론하고 둘다 죄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가정하지 않고서는 구원이나 유기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죄는 펼연적으로 문제가 되어 있는 차별의 구체적 사실 구원이나 형벌 그 어느 것이든지 다 포함한 운명에 관한 차별에 선행하는 것이지 차별의 추상적 관념에 선행하는 겻이 아니다. 구원을 제정하는 근거에서와 마찬가지로 죄가 예기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리적인 순서로 봐서 죄인으로서의 인간을 생각지 않고는 구원과 형벌에 관 한 차별 제정에 대해 논의할 수 없는 것이다.(the plan of salvation p.28.)
25) Calvin: Commentaries, p.307.
26) John Calvin, Calvin's Commentaries, Vol. 19, (Baker Book House, 1989), p. 417.
27) Jon Calvin, Sermons on the Epistle to the Ephesians(The Banner of Truth TrusL 1973), p.33,47.
28) Wilhelm H. Neuser(ed), Calvinus Sacrae Scripturae Professor Calvin as confessor of Holy scripture(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1994), p.39.
29) James Owen, The Death of Death in the Death of Christ(Biling and Sons LTD.,1963), p.6.
30) James Orr는 도르트 회의시 우세했던 견해는 온건한 타락 후 예정설이었다고 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택적 은혜는 이미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제기된 것이라고 한다. 커닝함은 전 예정설은 비교적 소수의 칼빈주의자 신학자들게 의해 주장되어 왔다고 말하고 있다. The Reformers‥‥, p.359그러나 페어번은 그 이름들을 상세히 거론치 않은 채 말하기를, 개혁주의 신학자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들은 타락 전 예정설을 옹호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Op.cit. p.168.(이 각주의 인용은 알란 셀의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와 구원, 김경진역, 생명말씀사,1989, p.21 각주 18에서 인용했음)

31) 개혁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목사 편저(생명말씀사,1984 제7장 p.264.
32) 개혁 주의 신앙고백집, 김의환 목사 편저, 제 3장, pp.23-24. 찰스 하지도 말하기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타락 후 예정론을 주장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 했다. 그 경애할 만한 단체 (웨스트민스터회의)의 회장 튀쓰 (Twiss)씨는 대단한 타락전 선택론자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회원은 타락 후 선택론자들이었다. 그 회의의 신조는 분멍히 타락 후 선택설을 내포하고 있으면서도 가급적이면 타락 전 선택론을 취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도륵 작성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영생으로 정하시고 남은 자들은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그의 주권율 영화롭게 하기 위해 그가 기뻐하시는 대로 긍휼을 신장 혹은 억제하시는 오묘하신 뜻에 따라 간과하시며,그의 영화로운 공의를 찬송케 하기 위해 그들의 죄값으로 치욕을 받도륵 내버려 두기로 정 하셨다고 했다. (Charles Hodge, Systematic Theology, Vol. Ⅱ., p. 317.) 헤르만 바빙크에 의하면 세 사람의 개혁자 루터 쯔빙글리, 칼빈은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한다. 선택과 유기는 모두 하나님의 주권의 행위이고, 논리적으로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작정에 앞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종종 타락 후 선택론적 추론을 따랐다고 말했다. 또한 바빙크에 의하면 타락 전 예정론은 예정-원죄-자법죄의 순서이고 닥락 후 예정론은 원죄-예정-자범죄의 순서이다. (헤르만 바빙크, 개혁주의 신론, 이승구역 기독교 문서 선교회,1989, pp.518-526)

33) 개혁주의 신앙고백집,김의환 목사편역, p.149, 문답 19-20번.

34) Harry Buis, Historic Protestantism and Predestination, pp.99-104. 바르트에 의하연 예수님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요 동시에 선택된 인간이다. 그래서 예정의 확신을 갖게 한다. 선택하시는 하나님이요 선택받은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영원 전에 하나님 의해서 인간의 죄를 위해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것을 예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 당하신 예수님은 동시에 창세 전에 인간과 교제하시고 구원하기 위해서 예정하신 하나님이다. 이것이 바르트의 이중 예정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종교 개혁자들의 이중 예정을 부인하며 보편 구원으로 가는 논리의 가능성을 열어 놓게 된 것이다. 이점에서 본다면 바르트의 예정론은 성경적인 것 같으면서도 비성경적이며 합리적 사고가 짙은 예정론이라고 할 수 있다. ( David L. Mueller, Karl Barth, Word Books, Publisher,1976, pp.96.107)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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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칼빈과 존 오웬의 성화론 비교 연구 중에서


1.칼빈과 오웬의 성화론의 공통점

                                               김 성 민(칼빈신학대학원 2010년 석사학위)


칼빈과 오웬의 공통점을 찾는다는 것은 다소 어렵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칼빈이 종교개혁을 대표하고 오웬이 청교도를 대표하기에 분명 신학적인 차이
가 존재하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두 학자의 성화론에 있어 공통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371)
성화에 있어서 칼빈과 오웬의 주된 특징은 그리스도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인
데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덧입을 때
우리가 참된 성화의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으며372)존 오웬은 그리스
도와의 연합으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에 대하여 억제하고 제거한다는 죄 죽
임의 교리가 있어질 때373)참된 성화의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칼빈과 오웬은 성화라는 것은 결국 신자에게 존재하는 죄를 죽여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인데374)이러한 성화의 과정은 중생한 신자에게만 적용될 수

371)Andrew Tomson,『존 오웬의 신학』,엄경희 역 (서울:지평서원,2006),17.
372)Calvin,『기독교 강요』,Ⅲ.14.7~8.
373)Owen,『JohnOwen전집 1호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52.
- 94 -

 있으며 불신자가 죄를 억제하고 제거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으며 중생의 과정
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와의 연합된 신자만이 잔재하고 있는 죄에 대하여 대항하
고375)싸워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376)
칼빈과 오웬은 비록 종교개혁과 청교도의 시기로 그 시기는 매우 다르지만
개혁주의적인 신학 노선에 서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신학적 일치성은 두
사람이 모두 성화에 있어 인간의 그 어떠한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로 말미암아 신자에게 보내주신 성령의 사역으로377)가능하다고 보았다는 것에
서 공통점을 찾을 수가 있다.378)
하지만,그렇다고 해서 인간에게 아무런 책임과 의무가 없음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칼빈과 오웬은 성화에 있어서 신자가 마땅히 가지게 되는 책
임과 의무는 다해야 하며379) 성화의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마치
로봇을 조종하듯 강제로 이끌어 가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적극적인 순종과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고380)인간에게 보내주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리스
도와 연합하고자 몸부림치는 성도의 자세가 있어야 하며381)이러한 과정 가운데
서 죄와의 끊임없는 전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382)
신자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부단히도 죄를 죽이고 억제하기 위하여 노력해


374)Niesel,『칼빈의 신학사상』,154.
375)김영주,“존 오웬의 Mortification과 성화”,29.
376)Calvin,『기독교 강요』,Ⅲ.6.2.
377)Ibid.,Ⅲ.22.
378)Owen,『개혁주의 성령론』,375.
379)존 칼빈과 존 오웬은 신자가 성화의 과정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는 죄와의 싸움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80)Owen,『개혁주의 성령론』,343.
381)JamesIPaker,『청교도 사상』,275.
382)박광용, 존 오웬 성화론의 구조와 신학적 토대 (총신대학교 대학원 신학석사 학위논문,
2007),61.
- 95 -

 야 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사역 그리고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멀어지거
나 단절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신자가 성화를 얼마만큼 이루었는가를 살펴
보는 방법은 결국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성령을 의지하여 죄와 싸우
고 죽이고자 했는가에383)있다고 주장한다.384)
이러한 것을 전제로 칼빈과 오웬은 성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성령은 죄를 죽
이는 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시는 주체이며 역동적으로 역사해 가시
며 신자로 하여금 죄를 이기도록 도우시고 신자가 죄와의 투쟁에서 승리를 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고 격려하신다는 것이다.
성화에 있어서 신자가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성령의 역사
를 의지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라 할 수 있는데 이 의무가 실행되기 위해서는
신자의 윤리적인 노력에 의해서 또는 강한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직인 은혜가 성령을 보내게 하셔서 신자 안에 적용되어 실천을 해 가도록 역
사하실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385)
이런 것을 토대로 볼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칼빈과 오웬은 견해는 매
우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는데386)정리해 보자면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고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이387)신자들에 대한 구
원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오웬이 말한 대로 신자가 그
리스도와 연합하여 성화의 과정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임을 말한
다.388)


383)정한수,“존 오웬의 성화론 연구”,22.
384)김영주,“존 오웬의 Mortification과 성화”,36.
385)Calvin,『기독교 강요』,Ⅲ.2.2.
386)박광용,“존 오웬 성화론의 구조와 신학적 토대”,61.
387)칼빈은 기독교강요를 통해서 기독론적인 요소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대속을
통한 인간 구원을 가장 큰 사건으로 다루고 있다.
388)칼빈에게 있어서 회개,중생,그리고 성화의 개념은 크게 다르지 않기에 여기서 말하는
- 96 -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신자들이 효과적으로 연합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 존
재가 성령인데 이러한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
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모든 것이 무의미해짐을 이야기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머물고 계시고 우리가 그에게서 떨어져 있는 한 그
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 고난을 받으시고 친히 행하신 모든 일들은 우리에게
쓸모없고 무가치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389)
위 글을 통해서 우리는 칼빈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연합하지 못하면 그리
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헛된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신자는
오직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390)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것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에게 접을 붙인다
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오웬도 마찬가지로 연합의 본질을 성
경에서 말한 대로 머리와 지체의 관계로391)보고 있다.

 2.칼빈과 오웬의 성화론의 차이점

칼빈과 오웬의 성화론에서 공통점도 찾을 수 있지만 그 구조면에서 다른 면
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오웬은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오염과 더러움으
로부터 정결하고 깨끗하게 하는 부정적인 면과 신자 안에 은혜의 영적이고 습

 

구원이라는 것은 오웬이 말하는 좁은 의미의 중생에서 성화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
이 옳다고 생각된다.

389)Calvin,『기독교 강요』,Ⅲ.1.1.
390)Owen,『개혁주의 성령론』,276.
391)엡 4:15.
- 97 -

 관적인 원리를 적용하는 적극적인 면으로 나누어서 성화론을 정립해 갔다.그러
나 칼빈의 성화론은 이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하지 않았으며 이는 죄로 인한 오
염에 대한 해결을 중요한 요소로 다루지 아니한 것이다.392)
칼빈의 성화론은 중생 시에 신자 안에서 성화에 대한 소망이 생기는 즉각적
인 측면을 강조하나 성화의 즉각적인 측면보다 점진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393)그래서 칼빈의 성화론에서는 즉각적인 측면과 점진적인 측
면 중에서 점진적인 부분만을 더 강조한 것을 다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성도는 영적 자유를 얻은
만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는 성
화의 삶을 살도록 분투해야 한다.이것은 죄에서 완전히 끊어져 거룩함과
의 가운데 온전히 거할 때까지 해야 한다.394)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이후 현재적인 상황보다는 신자에게 마땅히 일어
나야 할 미래의 변화에 더 주목했으며 이것은 즉각적인 측면에 비해서 점진적
인 측면을 더욱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그래서 성화의 즉각적인 요소보다 그리
스도와의 연합에 기초한 점진성을 더욱 강조하면서 성화는 일생에 걸쳐서 일어
나야 할 것으로 본다.395)
그러나 이와 반대로 오웬의 성화론은 성화의 즉각적인 부분과 점진적인 측면
을 모두 강조하며 균형을 유지하고 결국 이는 칼빈은 점진성에 더 치중한 반면
오웬은 즉각적인 부분과 점진적인 부분의 균형을 맞추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


392)Owen,『개혁주의 성령론』,343.
393)박광용,“존 오웬 성화론의 구조와 신학적 토대”,41~42.
394)칼빈은 로마서 6:2절을 주석하면서 이 구절을 근거로 성화의 점진성을 더욱 강조한다.
395)박광용,“존 오웬 성화론의 구조와 신학적 토대”,42.
- 98 -

 으며 여기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오웬이 말한 영적이고 습관적인 원리를396)칼빈의 견해와 대조해보면 차이점
이 여기서 기인함을 알 수 있는데 칼빈은 우리가 중생할 때 신자 안에는 영적
인 소원이 생긴다는 것에서는 오웬과 다르지 않다.그러나 칼빈의 견해는 오웬
의 견해와는 달리 중생과 더불어 새로운 습관과 원리가 심어져서 본질에 대해
급격한 변화가 오지 않는 것으로 봄으로서 중생과 더불어 신자 내면에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나 성화론의 주된 교리로 사용되지는 않았다.397)
칼빈의 초점은 신자의 본질이 새롭게 되고 성화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
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함에 있다는 것에 두고
있는 것으로398)변화가 신자 안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신자 안에서 직접적으로 성령의 사역을 통해 적용케 되어 일어나야
한다고 보았던 오웬의 성화론과는 견해를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399)
칼빈의 성화론은 중생 가운데서 신자에게 적용되는 영적이고 습관적인 원리
들에 대해 민감히 다루지 않았고 중요한 교리적 요소로 사용되지 않았으며 이
러한 개념을 바탕으로 칼빈은 죄 죽임의 교리를 다루며 죄 죽임의 방법에서도
오웬과 차이를 보이게 된다.
칼빈은 오웬과 달리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에 대해서 집중해서 보지 않았기
에 이 부분에 대해서 보는 시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차이는 시대적인
차이에서400)비롯되는 것이라 생각된다.401)
396)영적이고 습관적인 원리는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 죽임을 통해 성화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397)박광용,“존 오웬 성화론의 구조와 신학적 토대”,55.
398)Calvin,『기독교 강요』,Ⅲ.3.4.
399)박광용,“존 오웬 성화론의 구조와 신학적 토대”,55.
400)칼빈과 오웬 사이에는 약 100년의 시기적 차이가 있기에 시대적 흐름에서 오는 차이가
있을 것이라 판단된다.
- 99 -

 

영적이고 습관적인 원리라는 것은 신자 안에서 중생에 따라 수반되는 활동을
말하는데 칼빈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중요한 교리로 생각지 않았기에 신자
안에 내재하는 것과 활동에 민감했던 오웬과는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
이다.
칼빈과 오웬의 성화론에 대한 차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도 차이를 보이
게 되는데 오웬에게 있어 신자 안에 내재하는 삼위 하나님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402) 칼빈에게서 우리의 내면 속에 거하는 삼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내주하시면서 성령을 통하여 신자가 자신에게로 연합되도록 역사한
다고 보았지만 오웬은 성령의 역사가 신자 안에 내주하고 움직여서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403)
결국,성화론을 다룸에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해서는 칼빈과 오웬이
크게 견해를 달리하지는 않았고 동일하게 신자의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성령에 의한 그리스도의 연합으로 가능하게 본 것까지는 같이 하나 칼빈은 그
리스도에게로의 연합이고404)오웬은 그리스도께서 신자 안에 내주하심으로 연합
이 이루어진다고 봄으로써 약간의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성화의 전반에서 살펴본다면 오웬은 성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구원의 서정이
라는 연대기적의 개념이 아니라 본질의 순서를 따른 것으로 보이나 칼빈의 경
우는 구원의 서정에서 성화의 순서를 따지고 있으며 오웬은 회개와 중생에 대

 

401)박광용,“존 오웬 성화론의 구조와 신학적 토대”,55.
402)Owen,『개혁주의 성령론』,276:존 오웬은 성령의 사역과 함께 나아가지 못하는 성화는
무의미하다고 하면서 성령의 사역을 매우 중시하고 있다.
403)Calvin,『기독교 강요』,Ⅲ.11.10.
404)Calvin,『기독교 강요』,Ⅲ.1.1:존 칼빈은 여기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신자에게 없다
면 그리스도의 대속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을 통한 사역이 무의미해진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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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의미 차이를 두고 용어를 다르게 사용하였으나 칼빈은 그러지를 않았다.405)
칼빈은 죄 죽임에 대한 교리를 기독교 강요에서 부분적으로 이 부분을 다루
었기에 성화를 다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까지 다루며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죄
죽임을 통한 성화의 교리를 핵심으로 여긴 오웬을 쫒아가기에는 무리수가 있기
에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칼빈에게서 죄 죽임에 대한 교리를 찾기 힘든 것이며 그
로 인해 우리는 오웬처럼 민감하게 이 부분을 다루어 죄 죽임을 통한 참된 성
화를 이루고자 했던 이 부분을 소흘히 다룬 것을 지적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
이라 생각된다.


3.칼빈과 오웬의 성화론 상관성


칼빈과 오웬의 성화론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성은 먼저,하나님의 은혜에 매우
밀접하게 신경을 쓰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 중심에서 성화론을 출발시키는
데406)칼빈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
와 연합함으로407)성화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오웬도 그의
신학의 기초인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은혜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칼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외에도 성화의 뼈대적 요소로 육신을 죽이고 새 사
람을 살리는 것408)에 기초를 두면서 죄 죽임의 대상이 육신과409)옛 사람으로

 

405)SinclairFerguson,“개혁주의 신학과 개혁주의적 삶의 방식”,368.
406)정한수,“JohnOwen의 성화론 연구”,103.
407)Calvin,『기독교 강요』,Ⅲ.11.1:존 칼빈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함으로 이
중 은혜를 받게 된다.그것은 그리스도의 흠 없음을 통하여 영광스러운 아버지의 심판 대
신에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며 둘째,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흠 없고 깨끗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성화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 101 -

 

보는데 오웬도 이와 마찬가지로 죄 죽임의 교리에서 이 부분을 언급한다.410)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하나님과의 교제는 칼빈의 신학사상에서 반드시 필수적
인 교리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론을 형성하는데 있어 매우 기초가 되고
있으며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이 모든 것을 우리의 믿음으로 믿고자 할 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죄의 뿌리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이러한
것을 이루기 위한 실천 방법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것
그리고 미래적 삶에 대한 명상을 하라고 주장한다.411)
성화라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연합이 일어나고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고 경건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칼빈은 이러한 과정은 일평생 계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412)
칼빈과 오웬의 두 번째 상관성은 실천적인 요소를 강조한다는 것인데 칼빈의
성화론을 실천적이고 전투적이라고 한다면 오웬의 성화론에서 나타나는 죄 죽
임의 교리도 실천적인 요소라는 것이다.413)
칼빈과 오웬의 세 번째 상관성은 칼빈의 성화론이 신자가 일평생 지속적이고
계속적으로 육과 싸우는 전투적인 성화론을 주장하는데 오웬 역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를 죽여야 한다는 교리를 통하여 가톨릭의 잘못된 성화 개념 이해
를 지적하는 가운데 형성된 성화론이다.414)

 

408)Calvin,『기독교 강요』,Ⅲ.3.5.
409)Ibid.,Ⅲ.3.8.
410)Owen,『죄와 유혹』,241.
411)Calvin,『기독교 강요』,Ⅲ.3.5.
412)Ibid,Ⅲ.3.9.
413)Ibid.,Ⅲ.7.14.
414)Owen,『존 오웬의 죄 죽이기』,101.
- 102 -

칼빈과 오웬의 성화론은 죄 죽임의 대상이 신자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과
이런 죄 죽이기의 과정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가운데서 성령의 인도하심 가
운데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두 성화론이 가지는 연관성이면
서 성화를 이루어가도록 하는 존재는 성령이며 성화의 과정 가운데서 그리스도
와 신자가 서로 연합해야 함을 말한 것은 동일한 요소라 할 수 있다.415)
무엇보다도 성화의 목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이라는 점은 칼빈도 기
독교 강요를 통해 주장하고 있으며 오웬 역시 죄 죽이기의 과정 이후에 이루어
야 할 성화의 목적으로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강조한다.416)

정리하자면,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오웬이 비록 청교도라 하나 그는
성화론에 있어 잘 정리하고 성화의 삶을 살고자 몸부림쳤으며 이 두 사람은 비
록 시대가 달라서 그 환경을 깊이 알기는 힘드나 단순히 비교할 수 없으며 칼
빈과 오웬이 정립한 성화의 신학이 체계적으로 삶에서 드러나도록 실천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415)Calvin,『기독교 강요』,Ⅲ.3.9.
416)JamesI.Packer,『청교도 사상』,275.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왼쪽에서부터 파렐, 칼빈, 베자, 낙스..

제네바 바스티옹 공원의 종교개혁기념비



출처:개혁주의마을/좁은길을걸으며 님

 


칼빈의 기도 




첫 번째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저희가 당신의 뜻에 순종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법과 선지자들을 통해 무엇이 올바른 일인지를 증명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복음을 통해 무엇이 완전한 의인지를 더욱 자세히 알려 주셨사옵나이다. 



오, 하나님! 


이제 저희로 하여금 성령의 지배를 받아 


스스로 당신께 복종하게 해주시고, 


오로지 당신의 말씀에만 순종함으로써 


저희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게 해주시고, 


당신만이 지혜를 가지신 분임을 저희가 인정하게 해주시고, 


저희가 스스로 어리석음과 덧없음을 깨달아 


당신 말씀의 가르침을 받게 해주셔서 


우리가 참으로 당신께 순종함을 증명케 하시어 


저희가 이 인생을 끝마치고 나서 


당신의 독생자가 피를 흘려 마련해 주신 


하늘 나라의 안식에 이르게 하소서!


아멘.




두 번째 



전능하신 하나님!


저희의 게으름은 끊임없는 훈계를 필요로 하므로 


언제나 저희를 일깨워 주소서. 


저희로 하여금 기꺼이 가르침을 받는 백성이 되게 해주시며 


저희의 패역으로 말미암아 


즉시, 그리고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해주시고 


저희의 잘못으로, 


저희 스스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일이 없게 해주옵소서. 


또한 저희로 하여금 회개할 마음을 갖도록 해주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죄를 뉘우치도록 해주시옵고 


평생 동안 탐욕과 싸워 이기게 해주시어 


저희 앞에 제시된 목표를 달성케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하늘 나라에 갔을 때는 


당신의 독생자가 피를 흘려 저희를 위해 


마련해 놓은 영원한 기업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갖게 해주옵소서! 


아멘. 




세 번째 



오,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는 매일같이 당신께 죄를 짓는데도 


당신께서는 저희의 구원을 더욱 진전시키기 위해 


언제나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하십니다. 


오, 하나님! 


저희가 당신의 말씀에 귀 기울이도록 해주시옵고, 


그로써 우리가 책망 받을 수 있게 하옵소서. 


그리고 당신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목표를 향해 


우리가 계속 나가도록, 


그리고 이 세상에서 마침내 우리의 삶의 노정이 끝나고 


우리가 순종과 믿음의 결실을 즐기며,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획득되어진 영원한 기업을 소유하도록 


당신께 복종케 하옵소서! 


아멘. 




네 번째 



전능하신 하나님!


주께선 날마다 많은 인자와 자비로 우리를 불러 주셨고 


주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우리의 귓전에 들려주셨습니다. 


오 하나님! 


우리를 육체의 부패함에 따라 귀머거리가 되지 않게 하시고 


구원의 교훈을 유의하여 듣게 하사 순종하고 교훈받는 자가 되게 하시어 


어디든지 주께서 기뻐하시는 곳으로 기꺼이 돌아서게 하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위해 하늘에 예비된 복된 안식에 이를 때까지 


주께서 우리에게 지시하여 주시는 길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다섯 번째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당신의 노를 발하게 했음에도 


당신은 오늘날 은총으로 우리를 용서하셨나이다. 


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징계에 대적하여 강퍅해지지 말게 하시어 


오직 당신의 인내로 우리를 회개하도록 인도하시고, 


또 당신의 채찍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게 하시며, 


우리가 참되게 당신께로 돌아서서 


우리의 전 생활이 우리의 마음속에서부터 변화되었음을 입증케 하소서!


그리고 우리가 피차에 자극하여 당신의 말씀에 서로 연합하여 복종하도록 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당신의 이름에 영광 돌리기를 우리가 각자 힘쓰게 하소서! 


아멘. 




여섯 번째 



전능하신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를 사단의 학정에서 구원하셨을 때 


우리의 목에 당신의 멍에를 메는 것이 


당신의 기쁘신 뜻이었나이다. 


오, 우리로 하여금 교훈과 순종과 온유의 영으로 감동을 받게 하시어 


기꺼이 우리 자신을 일생 동안 당신에게 복종케 하여 


당신께서 당신의 구속의 열매를 우리에게서 거두게 하소서.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버리고 주를 섬김에 헌신하도록 하시고 


우리의 싸움의 과정이 끝날 때까지 의의 종들이 되게 하시며 


우리가 당신의 독생자의 피로 인하여 얻은 복된 안식을 얻게 하소서!


아멘.

 

 

 

첨부파일 존 칼빈의 기도.hwp

 

출처: 생명수 쉼터/한아름 님

우리는 친구든지 원수든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추구해야 한다

1. 우리는 선행을 하다가 피곤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사랑은 오래 참고 성내지 아니하는"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들이 행한 대로라면 선대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우린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없이 선을 베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사람의 실존적이 가치에 대해서 생각하지 말고, 다만 우리 모두가 경외하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로 생각하라고 가르침으로써 탁월한 논의로서 우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의 권속들에 속한 자들의 하나님의 형상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워지고 회복된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2. 그러므로 당신의 친절한 봉사를 필요로 하는 어떤 사람이 당신 앞에 나타나면, 당신은 도움을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령 그가 낯선 사람이라고 합시다, 주님은 그에게 자신의 인을 쳐서 당신과 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당신 자신의 혈육을 멸시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가령 그가 아주 멸시받는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황송스럽게도 주님은 그를 자신의 형상으로 단장할 만큼 귀하게 여기십니다.

가령 당신이 섬길 의무를 전혀 가지지 않은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자신의 대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크고 많은 축복을 받은 당신은 베풀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가 당신으로부터 최소한의 선행도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러나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당신이 자아를 죽이고 당신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주도록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그가 아무런 친절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시다.
오히려 그는 당신에게 상처와 모욕을 줌으로써 당신을 분노케 만들었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런 것들도 그를 사랑으로 감싸지 않고 모든 친절을 베풀지도 않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그는 좀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말할 지 모르지만 우리 주님은 오직 모든 사람의 모든 무례함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라고 명령하십니다.

3.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해 받은 것을 친절로서 갚고, 저주를 축복으로 돌려주는 것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길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사악함만을 생각해서는 안되고,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임을 영원히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인간의 잘못을 덮고 지워버리고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의 아름다움과 존귀함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끌어안게 될 것입니다.

(마 5: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눅 17:3-4)“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 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포도나무선교회/개혁주의마을/Grace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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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올바른 사용(존 칼빈)

(딤후 3: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신령한 검이라고 불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마귀는 우리를 속이고 죄악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갖 계략을 꾸미면서 끊임없이 도전해 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복종해야 할만큼 말씀에서 얻는 유익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말씀을 존중하고 복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런 반박을 받지 않고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부인하므로 수치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을 의심케 하려는 몽상가들이 모든 세대에 걸쳐 항상 있어 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악한 모든 것은 그 앞에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도 끊임없이 하나님의 모독하고 하나님께 대한 험담을 합니다.

우리가 율법과 예언서와 복음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와 복음 속에서 당신의 생각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러하기에 사람들이 변명하지 못하도록 사도 바울은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우리가 율법과 예언서 안에 내포되어 있는 내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영속성과 불멸성을 지닌 성경

또한 그는 누구도 작 마음대로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하여 하나님께 부분적으로만 복종하지 않도록 모든 성경 말씀에는 존엄성이 있다는 사실과 그 모두가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사도 바울은 우리가 우리의 기분에 맞추어 성경 말씀을 고르거나 발췌해서는 안 되고 전체를 예외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여기서 한 말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성경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그 때 쓰고 있던 말씀이나 다른 사도나 전도자들이 쓴 말씀을 의미하지 않고 구약 성경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과 예언서가 늘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설교되어야 한다는 그의 가르침을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원히 보존되고 남아야 할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제쳐놓고서 그것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은 무시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그들의 회당이나 주막에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이나 예언서가 필요 없다”라는 평범한 속담을 만들었습니다. 이 말은 터키 사람들에게서처럼 그들 가운데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제동을 가하면서 만약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복종심을 증명하려면 율법과 예언서가 우리의 생활을 다스려야 한다고 강변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는 우리의 생활이 그것들에 의해서 규제되어야만 한다는 것과, 그 말씀은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없고 또한 변화시킬 수 없는 영속적이고 불멸의 진리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얼마 동안만 유용하도록 일시적 교리로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진리는 오늘날에도 권위가 있습니다. 만약 그 권위가 약해질 우려에 부딪친다면 차라리 이 세상의 멸망하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말의 뜻은 우리가 자신을 성경에 의하여 다스리도록 힘을 써야 하고 지혜를 성경 이외의 다른 곳에서 찾지 말아야 한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좋아할 것인가를 선택할 재량을 주시지 않으시며 우리로 하여금 성경 말씀에 내포되어 있는 모든 것을 인정하여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이 주는 절대적 유익

자! 여기에 제시된 두 가지 점을 주의해서 살펴봅시다. 그는 먼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라고 했으며 그리고 “유익하다”라는 말을 첨가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을 매우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말할 때 죽을 운명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통제하려고 감히 망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 목적입니다.

보잘것없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항하여 싸움을 벌이고 성경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하겠습니까? 어떤 이유로 성경이 만들어졌습니까? 성경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며 그 안에 세상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항자가 아니라는 것과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경에 굴복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두 번째로 이렇게 첨가했습니다. 더욱이 경의를 표함으로써 하나님께 돌릴 경외심 이외에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를 가르쳐 주실 때에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무익한 일로 우리를 분주하게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성경을 부지런히 읽으면 성경의 내용 중에서 선하지 않거나 우리에게 적합하지 않고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그렇게 거저 주시는 축복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권능이 성경 속에 나타난다는 것을 알려 줌으로써 성경을 찬양합니다. 그러한 후에 우리로 하여금 성경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창출하시고 목표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깨달아 거기에서 유익을 얻겠다는 열정과 욕망을 가지고 성경에 접근하도록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라는 것을 우리가 시인하지 않는 한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합시다. 우리가 모세나 어떤 선지자에 관한 기록을 읽을 때 그것이 유한한 한 인간의 족적일 뿐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우리를 불태우는 하나님의 영이 살아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과는 전혀 거리가 멉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신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비로소 성경에는 생명이 있고 능력이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그가 말하는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가면과 덮개를 사용했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은 처음부터 속임을 당하고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처음부터 속임을 당하고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짓된 교리의 독이 금제 컵에 담기어 “하나님이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셨다”라는 이 귀한 슬로건 밑에 숨겨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것에 만족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견고히 보증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사단의 환상이나 사람들이 꾸며낸 동화가 아니라는 사실과 성경에 담겨 있는 내용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점과 하나님께서 그 저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선하심에 경의를 표합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진리를 집어넣고 밀봉하시며 우리가 그 은혜를 깨닫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불신자를 무지한 상태로 그냥 두시므로 그들은 어차피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한 말들을 취합해 보면 하나님의 교회 그 자체에 어떤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만이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어떤 교리를 인정하려면 그 교리는 인간의 권위나 인간의 지혜에서 따온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눈여겨볼 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지 아닌지를 검증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법률과 규례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의 왕이십니다.

말을 시키신 분은 하나님

우리의 영혼이 우연히 인도된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신다는 것을 나타내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형식적인 가장을 잘 할지라도 그것은 위장에 불과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성경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모세가 탁월한 사람이었다거나 이사야가 대단히 웅변적이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의 인간적인 명성을 높여 줄 만한 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들은 단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혀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 자기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말을 시키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평범한 사람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종으로 즉 그들에게 맡긴 재물을 감독하는 충성스러운 청지기로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이런 것들이 잘 지켜졌다면 인간은 지금 천주교도들이 처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혼란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은 모두 인간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에는 위선 이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하면서도 자기들이 만든 의식을 지킵니다.
그러하기에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성경에만 의지하라고 요구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도 바울은 모든 인간의 권위를 배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 위에 우뚝 솟은 탁월성을 소유하고 계시므로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회의 길을 택할 때는 우리를 보내는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기쁜 소식을 가졌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말씀하십시오. 다시 말하면 그가 무모하게 나서거나 자기가 만든 이론으로 꿰맞춘다는 식의 인상을 주지 말고 순수한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인하여 존귀히 여김을 받도록 하나님의 교훈이 사람들을 교화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유익과 구원을 싫다하는 자 있는가

사람이 만든 교리가 여기 이렇게 땅바닥에 버려졌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러한 일이 다시는 허용되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교회에서 그것을 추방합시다. 복음의 단순성을 확고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유념합시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자비로우셔서 율법이나 선지자를 통해서 주님의 뜻을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것은 꽉 붙잡고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의 양심을 묶어서 그들 멋대로 신앙의 신조를 만들지 못하게 합시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에서 “모든 성경은 유익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성경이 유익하다면 그것을 공부하는 데 전념하지 않는다면 우리를 전혀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운데서 유익과 구원을 구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의 행복만을 추구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화가 있을 찌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자신의 의견과 좋아하는 감정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 있는 교리 즉 성경의 전 내용에 기꺼이 복종하기 위하여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다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경을 설명할 때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에 제시되어 있는 교훈에 의해서 유익이 되고 그것이 주는 그르침을 받아들이도록 제 주위를 항상 성경 말씀으로 에워싸야 합니다. 만약 제게 이런 애정이 없어서 저의 설명을 듣는 사람에게 감화를 주지 못하면 저는 신성 모독죄를 범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결과가 됩니다.
또한 어리석은 공론을 구하기 위해서 성경을 읽는 사람이나 기분전환을 하기 위하여 설교를 들으려고 오는 사람은 복음을 더럽히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본래의 용도에서 어긋나게 사용하여 성경을 통해서 유익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 속에서 문제점만 찾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오염시키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과 구원만을 구하신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우리는 가장 불타는 열정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는 또한 우리에게 성경을 오염시켜 성경이 우리의 환상에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진리에 의한 교육만이 확실성 알게 해

성경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되도록 만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음을 깨달아 우리는 가르침을 받으려 와야 합니다. 이제 이 유익이라는 무엇인가를 검토하고 알아보는 일이 우리들 각자에게 남아 있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이 말 한 마디만 선언하였다면 그 의미는 다소 막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매우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말의 뜻을 오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이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사도 바울은 성경의 용도를 한 가지로만 표현하거나 사용치 않게 하기 위하여 교훈에 대해서 말할 때에 책망하기 바르게 하기 그리고 교육하기라는 말을 첨가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선한 것을 보여 주시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도 냉담하여 그것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최대한의 열성을 내도록 격려하셔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과 우리는 순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성경 안에는 죽은 교훈이 아닌 우리가 하나님께 나오도록 분발시키는 책망과 바르게 함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악한 자를 교화하는 말씀

사도 바울은 “모든 성경은 교훈에 유익하다”고 말한 후에 책망하기, 바르게 하기, 등을 첨가했습니다. 왜 교훈을 먼저 썼을까요? 그것이 자연스러운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면 권면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우리는 우리에게 가르쳐진 것은 선하고 참되고 옳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교훈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진리 안에서 교육되어야 하며 전적으로 진리 안에서 결심을 해야 하고 진리로 교훈을 받아 진리의 확실성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교훈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어서 진지하고 의롭게 하나님을 닮아 가는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우리가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을 찾을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하늘나라의 생활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약한 감정을 억제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닮아야 합니다.

복음의 교리를 몇 마디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전적으로 믿는 것이며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그 분이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돌아가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교훈 통해 과거의 참상을 보게 해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과 화해하고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되는 방법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찾아가야겠다는 담대함이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대언자로 임명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는 죄와 악밖에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멋대로 행동하지 않는 법과 순결한 마음과 영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 내포되어 있는 교훈입니다.

사도 바울이 책망하기라고 말했을 때의 그 뜻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그 뜻은 이런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고 싶으면 우리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찔림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해서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올바로 설명될 때에 믿는 자가 교화될 뿐만 아니라 만약 믿지 않는 자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교훈을 듣게 되면 그는 책망을 받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비록 그 불신자가 어둠에 휩싸여 있기 자기의 무지에 만족해 왔더라도 하나님이 그를 충분히 감화시켜서 그가 살아 왔던 과거의 참상과 죄악을 보게 만드십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한심스러운 그의 처지를 보게 될 때 그에게 실제로 하늘 문이 열려 있으며 사람은 이 지구상의 삶뿐만 아닐 더 높은 곳으로 들어 올려지기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불신자들은 책망을 받습니다.
그것을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비밀한 말씀이 묻혀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자기 자신을 주의하지 않게 되고 우리의 마음은 어둠 속에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활용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되고 우리 영혼의 구원을 잊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마음 소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우리의 전 생활을 돌아보고 우리의 부정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준비된 선고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들 자신의 재판관이 됩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책망이라는 단어를 써서 무엇을 나타내려고 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 앞에 놓인 하나님의 축복을 보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그것에 대해서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우리들 자신을 엄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석 앞으로 출두하라고 소환하시는 것처럼 하나님 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밝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가 한 악한 행동을 부끄러워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천국의 공기를 들여 마실 때 우리는 옳은 길에서 벗겨 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복종하는 법을 깨닫게 하는 성격

그렇게 책망 받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므로 바르게 함이 똑같은 방법으로 첨가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끗이 씻겨져 있어야하며 우리의 죄를 떨쳐버려야 합니다.
죄를 뿌리째 뽑아 버리고 분리시키기 위해 우리는 강력히 다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 그러한 생각을 가질 때 비로소 정죄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은 느낌을 갖게 되며 하나님과 사람 앞에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강제로 그러한 경지에 끌리어 와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맛있는 음식으로 취해 있고 또 우리가 어리석은 생각이나 공상에 빠져 있어 그것에 속고 있다면 바르게 하는 일을 즉각적이고 엄격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개조하시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해 달라고 의탁하기 위함입니다.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행동이 마땅치 않고 옳지 않은 것을 볼 때 그냥 “왜 그렇게 했니?”라고 묻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여 “한심한 녀석아! 네가 나에게 이렇게 보답하라고 너를 기르고 양육했겠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가 너를 그렇게 점잖게 대해 주었는데 나에게 이런 명예롭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이 너에게 어울리니? 너는 마땅히 교수형 집행자의 손에 넘겨져야 한다”라는 말을 들어도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불효자들이 그들의 아비들에게 반항했던 것보다 하나님께 더 반항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화를 내실 만한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속에는 다루기 힘든 어떤 열정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열정을 우리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법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쓰셨다는 사실입니다.

필요하면 뜨겁게 책망하라

자! 이제 어떤 사람이 성경을 설명할 때에 성경이 단순한 역사에 불과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타당한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성경에 관해서 한 말은 아무 유익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와 같이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선하고 충성스러운 목자의 임무는 성경을 설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힘과 권능을 나타내도록 열성과 날카로움을 사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 교회의 목자는 성가실 정도로 열성적이어야 하며 무엇이 선한가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고 그들을 책망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겸손하고 온유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책망함에는 아무튼 바르게 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누구라도 “이것은 감당하기 어려우니 이러한 종류의 것은 취급하지 말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책망을 견디지 못하는 자는 차라리 하나님 의외의 다른 주인을 찾도록 내버려두십시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들을 기꺼이 받을 것입니다.

바르게 하려고 위협을 가하면 버럭 화를 내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들은 온화함으로 그들의 마음이 사로잡히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악마의 학교에 보냅시다. 악마는 아첨을 할 것입니다. 네! 그리고 그들을 멸망시켜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성도들은 그 교훈을 받아들인 후에 겸손해져야 하며 책망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누구도 실수를 할 때면 훈계를 받아야 합니다. 그들이 모든 죄악에서 깨끗해지기 위해서 그들이 저지른 죄와 악에 대해서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교훈으로 가르침 받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이런 방법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사람이 만든 제도가 사람을 의롭게 하지 못함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첨가했습니다. “성경은...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이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할 때 그는 모든 인간적인 것을 배제하였으며 우리가 사람이 도입한 제도를 지키는 것으로는 의롭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우리는 천주교도들이 같은 인간이 그들에게 과한 것은 무엇이든지 지킴으로써 그들이 한 모든 노력이 어떻게 허사가 되었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의로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디에 기초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교회가 그렇게 명령했다는 데 근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에 있는 내용 이외에는 종교도 교리도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네 그렇습니다. 성경 안에만 의로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주교도들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따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에 완전히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의 삶이 매우 은혜롭기 되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인간의 일에 뿌리를 두지 말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고 과해 주신 것만 따릅시다.
만약 우리의 삶을 성경에 있는 가르침에 따라 규제한다면 우리는 그것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사람의 교훈은 실패하며 하나님께서 증오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의로 교육하기”라고 말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둡시다.
다시 그는 훌륭한 성직자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인식시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말하는 법과 말을 잘하고 민감하게 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을 변화시켜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어졌습니다.

만약 인간이 복음을 통해서 유익을 얻는지 못 얻는지를 알아보고 싶다면 그의 생활을 주목해 봅시다. 사람들은 제법 그럴 듯하게 말할 줄도 알고 나름대로 경건한 생활을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유익을 얻는 법’도 배워야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고문으로 모셔서 말씀에 의해 떳떳이 행하고 또 우리의 삶을 이루어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같이 할 때 하나님의 사람은 온전케 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됩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는 의로움으로 교육을 받아야 하며 인간의 창안물들은 모두 사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증오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의향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든 것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들을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 제정해주신 규례 안에서 억제하지 못하는 그런 모호한 용기가 있음을 보고 그 병폐를 지적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치유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있으면 우리의 생활은 올바르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에 덕과 거룩함이 있다고 마음껏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늘에 계시는 재판관 앞에 나오게 되면 모든 것이 겨와 같아질 것입니다. 우리가 만든 제도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제도와 섞어버리면 모든 것을 해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만든 것은 무엇이나 아무 값어치가 없고 썩어빠진 것뿐이라고 결론을 내려도 됩니다.

천주교도들은 어떠한 성자를 위해 저녁에 금식하는 것, 금요일에 고기를 먹지 않는 것, 사순절을 지키는 것, 성자에게 시중드는 것, 이 제단 저 제단을 찾아다니는 것. 이 교회 저 교회를 방문하는 것, 이사에 참석하는 것, 순례 여행을 하는 것 등을 선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많은 법률과 규정을 만들었으나 그것들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대 재판관 앞에 출두하여 우리가 행한 일에 대한 명세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여기서 만약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유익을 얻으면 모든 선한 일을 한 데 넉넉히 지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천주교도들이 만들어낸 전통과 제도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파묻히는 것 같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만든 전통의 백분의 일만큼도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온전함을 측정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의도적으로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에 더 첨가한 것은 무엇이나 배격하며 그것을 인정하시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들이 제정한 법규를 아무 쓸모 없이 만듭니다. 그것은 그들의 죄를 배가시켜 줄뿐입니다.

괴물이 아닌 자 라면 진리를 확신한다.

“율법과 예언서에는 그렇게도 많은 공정함이 있는데 복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물음에 대해서 쉽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율법이나 예언서에 대해 일점일획도 가해진 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복음이 전에 가르쳐 준 것을 더 분명하게 해 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살았던 선조들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은혜를 내리셨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비록 가한 것이 아무 것도 없지만 문제를 더 분명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율법과 예언서에 바르게 함과 온전한 의로움이 있다고 말할 때 그 말은 복음의 중요성을 감소시키는 것은 아닙니다.
전 성경 말씀 즉 신약과 구약에는 이와 같은 일치함이 있습니다. 율법에 내포되어 있는 교훈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에 사도들에 의해서 친근하게 가르쳐졌기 때문에 이것을 해야 한다, 저것을 해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고 태초부터 명령된 것에 국한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아주 분명한 말로 알려 주셨고 우리가 그것을 믿어야 할 여러 가지 이유를 말씀 하셨기 때문에 사악한 괴물이 아닌 이상 우리는 그 진리를 확신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말씀으로 유익을 얻으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공상에 따라 섬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 경건하게 생활하는 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생활을 규정지을 확실한 규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이 성경 말씀을 향하게 합시다. 그러면 하늘에 계시는 재판관이 우리를 받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모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접근하셔서 당신의 뜻을 쉬운 방법으로 제시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지 아니하면 자신을 조금이라고 변명하지 못할 것입니다.

 

 

 

포도나무선교회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대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시33:22)"

자는 굳은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의 논적들은 우리가  이세상에서 가장 말도 안되는 말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참된 기도를 해 본 적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선의에 대한 이 확고한 의식이 없이는 하나님게 합당한 간구를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능력을 마음속에서 느끼지 못하면 믿음의 능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헛된 상상 외에는 아무것도 경험해 보지 못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논쟁하는데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옹호하는 그런 확신의 가치와 필요성은 대체로 기도에서 터득됩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매우 무감각한 양심의 증거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눈이 먼 이들은 논외로 하고 우리는 바울의 말에 우리의 생각을 집중합시다. 바울은 복음에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식을 얻고 그 자비가 자신에게 언제든 베풀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고 굳게 확신하는 이들만이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기쁘시게 받으시는 유일한 기도는 이러한 믿음의 확신에서 샘솟고 충만한 소망의 확신에 바탕을 둔 기도입니다. 바울은 믿음이라는 단순한 이름을 사용하는 데 만족했을지 모르지만 그 믿음에 확신뿐만 아니라 자유와 담대함도 덧붙이며 이러한 표지를 통해 그는 우리를 불신자들과 구별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는 이렇게 기도합시다. "여호와여 우리가 주께 바라는 데로 주의 인자하심을 우리에게 베푸소서"(시33:22)

시편 기자는 또 다른 성구에서도 그와 똑같은 조건을 제시합니다. "내가 아뢰는 날에 내 원수들이 물러가리니 이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심을 내가 아나이다"(시56:9),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5:3), 이러한 여러 말씀에서 우리는 기도에 믿음이 수반되고 그 믿음 속에서 우리가 망대에서 기다리듯이 조용히 하나님을 기다리지 않으면 그런 기도는 헛되이 허공에 흩으지는 기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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