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벌콥의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

헤르만 바빙크의 교의학 2012. 9. 15. 03:41

Ⅵ벌콥의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에 나온 요약 내용입니다.

714P

A. 중생에 대한 성경적 용어와 그 의미

 

1. 고려되야 할 용어

2. 이 용어들의 의미

중생에는 두가지 요소, 즉 생명의 발생(generation)과 새로운 생명이 감추어진 심연에서 표출되는 출생(bearing)을 구분해야한다. 전자는 영혼안에 새로운 생명의 원소가 주입되는 것(principie)이며, 후자는 이 원소가 행동으로 나나내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중생을 적적하게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

 

마드---벌코프의 글을 계속살피겠지만 전자를 좁은 의미의 중생으로 말합니다.

 

715페이지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 여기서 재발생은 714페이지에서 언급한 전자= 생명의 발생임 에 분명합니다.

그리고 새 출생은 714페이지에서 언급한 후자=bearing임에 분명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음의 구절입니다.

 

다시 위의 글의 가져오면서 글을 써내려 갑니다.

 

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중생이라는 용어의 문자적인 의미와 엄격히 조화될 수 있도록, 중생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새 생명의 첫번째 발현과는 구분시켜서, 단지 영혼 안에서의 새 생명의 주입(implanting)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 이게 벌코프의 주장입니다.

 

 

--------------------------- < 라마드--- 반복되는 내용이 있지만 >

종교개혁자들과 개신교회---> 루터는 중생과 칭의의 혼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중생 혹은 새로운 출생을 상당히 광범위한 의미로 언급했다. 칼빈도 역시 이를 새로운 생명을 생성시키는 하나님의 행동 이외에 회심(회개와 신앙)과 성화를 포함시키는, 인간이 갱신되는 전과정을 나타내는 용어로 매울 포괄적으로 사용했다.일부 17세기 저자들은 중생과 회심을 구별하지 못하고 두 용어를 상호교환적으로 사용하며, 중생을 즉 효과적 부르심 아래 두었다. 도르트 신조도 두 단어를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으며, 벨기에 신앙고백서중생을 보다 광범한 의미로 언급하고 있는 듯하다.

 

그 다음에 벌코프의 말이 의미 심장하군요. 중생이란 용어의 포괄적 사용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이군요.

 

중생이란 용어의 이러한 포괄적 사용은 종종 혼동을 초래하고 매우 필요한 구분들을 무시하게 한다. 예를 들면 중생과 회심이 동일시 되는 반면, 회심에서 인간은 어느 정도 하나님에게 협력하지만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사역으로 선언된다.중생과 칭의의 구분은 명백해졌지만, 중생을 보다 제한적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점차 필수적이고 통상적인 관례가 되었다.

 ===> 라마드: 여기를 보면 벌코프는 루터와 칼빈과 일부 17세기 저자들과 도르트 신조와 벨기에 신앙고백서와는 달리 좁은 의미로 중생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어서 벌코프의 글을 씁니다.

투레틴은 두 종류의 회심을 구분한다. 첫번째는 습관적인 또는 수동적인 회심으로서, 영혼의 성향 혹은 습성을 창출하는 것으로 이는 중생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두번째는 실제적 또는 능동적 회심으로서 여기서 나온 습관이나 성향이 신앙고 회개에서 능동적이되는 것이다.오늘날 개혁파 신학은 중생이라는 단어를 보다 제한적인 의미로, 즉 죄인이 새로운 영적인 생명을 부여받고 새 생명의 원소가 처음으로 행동화하는 하나님의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한다.이렇게 생각할 때 중생은 재발생(begetting again)과 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new birth) 양자를 포함하게 된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문장이 벌코프의 중생에 대한 주장의 핵심 내용입니다.

===> 하지만 중생이라는 용어의 문자적인 의미와 엄격히 조화될 수 있도록, 중생이라는 용어를 이러한 새 생명의 첫번째 발현과는 구분시켜서, 단지 영혼 안에서의 새 생명의 주입(implanting)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다.

다시말해서 벌코프는 재발생과 새생명이 발현되는 새 출생과 중생은 구분하자는 것입니다.중생을 단지 영혼안에서의 새생명의 주입을 지칭하기 위하여 사용한는 것으로 제한 한 것이라고 봅니다.

 

 

C. 중생의 본질

 

1. 그릇된 견해들

(1)

(2)

(3) 중생은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고 있지않다. ---> 이게 벌코프의 주장입니다.

제가 알기론 피터 마스터스는 회심을 중생에 포함시키는데 벌코프는 그 반대입니다.

 

2. 중생의 긍정적 특성

(1)

(2) 중생은 전인적으로 즉 지성적으로 정서적으로 도덕적으로 즉시 영향을 미치는, 인간 본성의 즉각적인 변화이다.

-->벌코프는 중생을 회심과 구별할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즉각적 변화라 말하고 있군요.

 

중생을 즉각적인 변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다음 두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① 중생은 로마 가톨릭 교인들이나 모든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가르치듯 인간이 영혼 안에서

점진적으로 예비되는 사역이 아니다. 생명과 사망 사이에는 중간 단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살든지 죽든지 양자 택일이다.

중생은 성화처럼 점진적인 과정이 아니다. 일부 개혁파 신학자들이 중생을 성화까지도 포함하는 용어로 사용해 온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구원의 순서가 오늘날처럼 완전히 전개되지 못한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벌코프가 하는 말은 과거의 중생에 대한 부족했던 부분을 을 언급하고 있는 말입니다.

 

(3) 중생은 가장 제한된 의미로 이해한다면 잠재의식에서 일어나는 변화이다. 이는 인간에 의해 직접적으로 인식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은밀하고 불가사의한 사역이다.중생과 회심이 동시에 발생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인간이 이를 즉시 인식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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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외적 부르심에 대한 관련된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

 

1. 외적 부르심과 불가분의 관계성

2. 내적 부르심의 특성

 

3.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관계 ===>

(1) 17세기 신학에서 양자의 동일시

17세기 신학이 효과적 부르심과 중생을 동일시하거나 완전히 동일시하지 않아도 최소한 중생이 부르심에 포함된 것으로 이해한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일부 옛 신학자들은 부르심에 관해서는 별개의 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느 누구도 중생을 별개의 항목으로 다루지 않았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0장 2절에 의하면 효과적 부르심은 중생을 포함한다.어떤 의미에서는 부르심과 중생이 인과적으로 관계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전문적인 의미에서 내적 혹은 효과적 부르심이 아니라, 창조적 부르심까지도 포함하는 일반적 부르심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에서는 죄인의 삶에서 은혜의 사역의 발단을 지칭하기 위해 중생보다 부르심이라는 용어를 광법위하게 사용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사역간읜 긴밀한 관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그리고 부르심이라는 용어가 사도 시대에 성행한 것은 선교적 시대에 교회에 모이게 된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이 일반적으로 동시적이었으며, 그 변화가 하나님으로부터의 강력한 부르심으로서 의식 생활 가운데서 반영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벌코프가 앞문장을 이야기 하고 자하는 이유는 다음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진리를 체계적으로 진술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르심과 중생을 구분해야한다.

===> 여기까지의 글을 보자면 중생과 칭의 그리고 효과적 부르심을 17세기의 신학에서는 명확히 구별하지 못했다고 생각이 되는 군요. 그렇지만 벌코프는 구별하자는 이야기구요.따라서 중생에 대하여 칼빈의 글과 루터의 글, 도르트신조, 벨기에 신앙고백서, 웻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벌코프의 중생의 의미는 다른 겁니다. 아니 다르다고 하기보다는 명확한 의미에서는 벌코프는구별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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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부터가 벌코프가 이야기하는 핵심이라고 보여지는 군요.

 

(2)중생과 효과적 부르심의 차이

(3)부르심과 중생의 관련순서

===>우리가 다음의 단계들에 주목한다면 이들의 관련 순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논리적으로 볼때 말씀의 설교에서의 외적 부르심(유아의 경우는 제외)은 일반적으로 새 생명이 인간의 영혼 속에 생성되는 성령의 사역에 선행하거나 이와 동시에 일어난다.

이때 창조적 말씀으로 하나님은 새 생명을 생성시키고, 영혼의 내적 성향을 변화시키며, 마음을 조명하고, 감정을 고양시키며, 의지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행위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을 구원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을 수 있는 귀가 심기어 지게 된다. 이것이 엄격한 의미에서 중생이다.

---> 이것이 벌코프가 말하고자하는 중생입니다.

여기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영적인 귀를 가진 후 죄인은 이제 복음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되며, 효과적으로 이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된다. 저항하고 싶은 열망이 순종하고 싶은 열망으로 변화되고, 죄인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설득력에 감화된다. 이것이 설교말씀의 도구를 통해 하나님의 영에의해 효과적으로 적용되는 부르심이다.

④마지막으로, 이러한 효과적 부르심은 진리를 통해 영혼안에 탄생괸 새로운 성향이 최초로 거룩하게 발현되도록한다. 새생명이 발현되기 시작하고, 심겨진(주입된) 새생명은 새로운 출생을 일으킨다.

이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사역의 완성이요,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라마드: 여기서 보면 벌코프는 엄밀한 의미에서 중생과 효과적 부르심과 넓은 의미에에서 중생의 사역의 완성,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결론 부분인데 여기가 벌코프가 논하는 핵심을 담고 있다고 봅니다.

 

******* 이제 우리는 이러한 논리적 순서를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는 우를 범치 말아야한다.

새 생명은 종종

유아기들이 복음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게 되기도 전에 이들의 마음속에 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복음이 설교되는 곳에서만 새로운 생명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새 생명이 생성되게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부르심은 항상 존재한다. 복음의 집행하에 사는 사람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이 분별력을 갖추기 오래전, 즉 효과적인 부르심이 의식에 침투하기 오래전에 중생의 씨앗을 가질 가능성도 많다. 하지만 중생된 자로서 이들이 수년 동안 심지어 성장한 이후에도 여전히 죄 가운데 생활하며 그들안에 있는 새로운 생명의 증거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반면 언약의 집행하에 생활하지 않았던 자들생과 효과적인 부르심 사이에 시간적 간격을 상정한 필요가 없다. 효과적인 부르심에서 이들은 자신의 갱신을 인식하게되고, 즉시 중생의 씨앗이 새로운 생명으로 발육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이 모두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마드: 마지막 부분을 보면 즉시, 모두 동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그렇다면 이것은 의미 심장한 부분입니다.

벌코프는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을 다루는 부분에서

시간 간격이 있을 수 있는 경우와 시간간격이 없는 경우를 두가지를 예를 들어 설명해주고 있군요.

 

벌코프의 글을 읽은 부분에 대한 벌코프 글에 관한 저의 결론(견해)입니다.^^

중생을 넓은 의미로 다룬 것은

루터와 칼빈과 일부 17세기 저자들과 도르트신조와 벨기에신앙고백서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중생을 좁은 의미로 구별해서 사용했다.(벌코프의 글에서 유추)

그리고 벌코프도 좁은 의미로 사용했다.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을 다루는 부분에서까지적용한다해도

 시간 간격이 있을 수 있는 경우시간간격이 없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중생, 효과적 부르심, 회심을 다루는 부분에서 중생을 논하더라도

이러한 논리적 순서를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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