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본질과 현대 복음의 오류

구원론 2015. 6. 22. 02:07

구원에 이르는 신앙의 본질과 현대 복음의 오류


아더 핑크



“구원에 이르는 신앙은 나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요구에 대해

나의 전 존재와 생명을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고후 8:5)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절대적인 주인으로서 기꺼이 영접하는 것이며,

그분의 뜻에 경의를 표하면서 또한 그분의 멍에를 짊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혹 어떤 사람은 그러면 왜 로마서 12:1과 같은 권면이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하며

반대를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그 반대에 대해 우리는 모든 권면은

그들이 시작한 그대로 계속 행하라고 그들에게 단순히 요청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그렇다.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서 '영접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아, 오늘날 은혜를 구하는 죄인들이 그리스도를 그들의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는 방식은

신약성경의 표준에 비춰볼 때 얼마나 저급한가.

만일 당신이 성구사전을 찾아본다면,

주와 구주 이 두 단어가 함께 들어 있는 모든 성경구절들 속에는

언제나 '주와 구주'의 순서로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결코 '구주와 주', 즉 역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찾지 못할 것이다.

누가복음 1:46,47, 벧후 1:11, 2:20, 3:18 등을 한 번 찾아보라.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 1:46,47),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벧후 1:11),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벧후 2:20)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벧후 3:18)]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자기만족과 고집대로 사는 그들의 삶이

엄청난 죄악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까지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 악한 삶에 대해 애통해 하며 참회할 때까지는,

그리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서 살기로 결심할 때까지는,

자비와 영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그들의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라

시끄러운 촐싹거림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의지한다는 그들의 말은 단지 모욕적인 언동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그들의 더러운 입술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거리면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고백하는 것은 최고로 무시무시한 신성모독죄를 범하는 것이며,

또한 끔찍스럽게도 사함이 없는 죄에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아, 슬프도다.

오늘날 전해지는 복음은 많은 격려를 받으면서 그리스도를 불명예스럽게 하는,

마치 추악한 기형아와 같은 사람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오늘날 거의 모든 부문에서,

심지어 정통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과 '근본주의자들'조차도

구원받는 것은 굉장히 간단한 일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요한복음 3:16을 믿고 '그 말씀을 의지하거나'

혹은 '그리스도를 그의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하면'

그는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다했다고 평해진다.

사람이 은행을 신뢰하듯, 혹은 아내가 남편을 의지하듯

죄인이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께 향하기만 하면

더 이상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들 한다.

이런 생각이 아주 널리 퍼졌기 때문에

이 생각을 틀렸다고 지적하는 사람은 이단으로 정죄받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여기서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그 생각이 하나님을 가장 모독하는 것이며

또한 마귀로부터 나온 거짓말이라고 선언하는 바이다.

인간적인 대상을 의지하는 일은 자연적인 신앙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신적인 대상을 의지하는 일은 초자연적인 신앙이 요구된다.

오늘날 '복음전도자'들과 '개인전도자'들이 채택한 전도방법들을 조사해볼 때

그들이 생각하는 성령님의 사역을 접해보면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다.

성령님께서 사람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진정으로 항복시키려고 사람의 마음에서 역사하실 때

완성하시는 그 은혜스런 이적에 대한 개념을

그들은 최고로 약화시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 슬프다.

이 타락한 세대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초자연적인 산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오히려 그것은 어느 누구라도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의지에서 나온 행위보다 우월한 것은 못되며,

단지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인간의 타락한 상태를 잘 묘사했거나

'믿음'이란 단어가 들어있는 성경 구절 몇 개를 피전도자 앞에 제시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시기 바랍니다.'라고 설득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되었다는 생각이 오늘날 보편화되어 있다.

이런 식의 생각이 바로 수많은 사람들을 거짓 평안 속에 잠재우는 사단의 마약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너무 적다는 사실은 정말 두렵다.


죄인이 마음을 성결케 하는 일을(약 4:8)

마치 손을 깨끗이 씻는 일만큼이나 간단한 일로 생각한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4:8)]

그리고 육체의 소욕을 약화시키는 신적 진리의 빛이 영혼을 탐색하도록 허용하는 일을,

커튼을 열어젖힘으로써 아침 햇살이 방안을 비취게 하는 일 정도로 생각하며,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 세상으로부터 그리스도께, 죄로부터 거룩으로 돌아서는 일을

배가 키의 도움으로 선회하여 방향을 바르게 잡는 일 만큼이나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오 독자들이여,

이 생명에 관한 일에 대해 절대 이렇게 속지 말라.

육체의 정욕을 절제하는 것, 세상에 대해 못 박히는 것,

사단을 이기는 것, 죄에 대하여 날마다 죽고 의에 대하여 날마다 사는 것,

심령이 가난하고 온유하게 되는 것,

그리고 신뢰와 순종, 경건과 인내, 신실과 강직, 사랑과 친절의 사람이 되는 것 등,

한 마디로 말해서 그리스도인-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는 것은

타락한 인간 본성이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는 도저히, 도저히 이루지 못할 과업인 것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그처럼 간단한 일로 간주하는 이유는

현 세대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참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성격에 대한 성경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극소수여서

위에 언급한 망상이 아주 널리 퍼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것을 그처럼 간단한 일로 여기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으로부터의 구원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 극소수이기에

오늘날 복음이 '인기있는 상품'(?)으로 아주 잘 팔리고 있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믿음 그 이상의 것이며,

그 믿음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나의 마음과 생명을 완전히 복종시키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신 것은 지옥으로부터 만이 아니라

죄와 인간의 뜻, 그리고 자기만족으로부터이다.

이쯤 되고 보면 그토록 어려운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은 더더욱 극소수이리라.

주 예수께서는 구원에 이르는 신앙이 간단한 것이라고 가르치시지 않았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주님은 영혼구원이 간단한 일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 7:14)고 말씀하셨다.



젊은 관원이 근심하면서 예수님 곁을 떠나갔을 때,

주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돌이켜 말씀하시기를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 10:24,25)고 하셨다.

목사나 전도사들을 양성하기 위해 신학을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이 구절에 대하여 내리는 신학적인 평가는 어떠할까?

그들의 평가는 전혀 타당치가 않은 것 같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백만장자의 구원은 극빈자의 구원만큼이나 손쉬운 일인데

그 이유는 백만장자나 극빈자 모두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사역을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재물에 탐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쉽다.

“저희가 먹이운대로 배부르며 배부름으로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인하여 나를 잊었느니라.”(호 13:6)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구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의문을 표시했다.

만일 우리들이 그들 곁에 있었다면 그들을 진정시키면서

어느 누구라도 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확신시키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그렇게 말함으로써 확신시키지 않으시고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고 부연하셨다(막 10:27).

타락한 인간이 자기 스스로 회개할 수 없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고

또 그리스도에게 나아올 수 없는 것은

그가 스스로 세계를 창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라는 말은

인간의 능력을 특별히 변호하기 위해 신청하는 모든 재판을 각하시켜 버린다.

성령님의 은혜스러운 이적 외에는 아무것도 죄인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없다.

그러면 자연인이 구원에 이르는 신앙을 발휘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대답을 그 젊은 관원의 경우에서 이끌어내 보자.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면서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갔다.

그는 재물에 빠져 있었다. 재물이 그의 우상이었다.

그의 마음은 땅의 것에 얽매여 있었다.

그리스도의 요구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모든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은

혈과 육을 지닌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명령이었다.

독자들이여, 당신의 우상은 무엇인가?

주님께서 그 젊은 관원에게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이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조의 요구에 대한 복종, 즉 하나님께 대한 항복심의 결여였다.

이 지상의 찌끼들로 영혼이 가득 채워져 있으면 하늘의 감동을 받을 여유가 없다.

사람은 육적인 부에 만족을 느낄 때 영적인 부를 향한 갈망이 일어나지 않는다.

동일한 진리가 그리스도의 큰 잔치 비유에서 다시 발견된다.

하나님의 은혜의 잔치는 널리 공고되었고 복음을 통하여 누구에게나 초청장이 발부되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한가? '다 일률적으로 사양하였다.'(눅 14:18).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들이 온갖 다른 일에 관심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마음은 밭과(18절) 소와(19절) 가정의 행복(20절) 등에 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제시하는 조건 아래서가 아니라

그들의 조건 아래서 기꺼이 '그리스도를 모시려고'한다.

그리스도의 조건이 무엇인가는 같은 장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가장 귀중한 분으로 마음속에 모시는 것(26절),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27절), 모든 우상을 내던지는 것(33절) 등이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3)]

그러므로 주님께서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하늘의 것에 애정을 품는 일이 어려운 일임을 계산에 넣고)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눅 14:28)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 5:44).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이 간단한 것으로 생각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형상화하고 있는가?

여기 '영광'이란 말은 칭찬이나, 혹 찬양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주요목표를 서로에게서 칭찬 듣는 일에다가 두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무관심했을 때,

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것은 지금도 동일하다.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려는 열망과 결심을 가지며)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약 4:4).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세상을 등지는 것과, 불경건한 (또는 종교적인) 친구들의 존경받는 일을 멀리하는 것과

그리고 경멸과 거절당하신 그 분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은 또한 그분의 멍에를 짊어지는 일,

또 그리스도의 주재권에 대해 항복하는 일,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일 등과도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요 6:27).

이 구절이 함의하고 있는 것이 영생 얻는 일은 간단한 일이라는 것일까?

그렇지가 않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 6:44).

이 말씀은 사람이 자기 뜻대로 구원받는 시간을 선택할 수 있다는

현대의 인기 있는 이론이 거짓된 것임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또한 이 말씀은

어느 누구라도 그가 결심한 순간에

그리스도를 그의 구주로 영접할 수 있다는 육체중심주의와 피조물 찬양주의를

단호히 부인한다.

그 까닭은 자연인은 죄의 종이며(요 8:34) 각색 정욕에 종노릇을 하며(딛 3:3),

마귀의 포로이기 때문에(딤후 2:26),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이끄실' 때까지는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8:34)”,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딛3:3),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6)]

따라서 자연인이 그리스도께 나아올 수 있게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얽매고 있는 사슬을 깨뜨리고 감옥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보존본능 때문에 지옥으로부터 구원받기를 바란다.

그러나 죄로부터 구원받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렇다. 사실과는 달리

'그리스도를 그들의 구주로 영접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의 삶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을 거절하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죄인은 "그의 길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사 55:7).

그리고 우상으로부터 돌아서지 않고는(살전 1:9) 아무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다.

그래서 주 예수께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고 말씀하셨던 것이다.(눅 14:33)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찬미를 빙자하여

그리스도를 죄의 사역자로, 즉 그의 속죄 제사로써

육적이고 세상적인 정욕들을 습관적으로 즐기는 인간들의 사면을 획득하신 분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가공할 만한 일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동정녀 탄생과 그리스도의 대속교리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또 구원을 위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공언을 하면, 그의 매일의 삶이

신앙고백을 전혀 하지 않는 불신자의 삶과 다를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거의 모든 지역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마귀는 바로 이 착각 작용을 이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마취시킨 후

지옥으로 보내고 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눅 6:46)고 말씀하시며

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신다.



영광의 주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 죄의 용서를 획득키 위해 죽으러 오신 것이 아니며,

또 우리 마음이 여전히 이 땅의 것들에 집착하여 있는데도

우리를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예비하러 오신 것이 아니며

(요 10:4,14, 히 10:20-22, 벧전 2:21),

또 그 길로 사람들을 불러들이시려고 오신 것이다.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요10: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요10:14),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0-22),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2:21)]

그리고 그의 교훈과 약속,

또 그의 선례와 정신으로써 사람들의 영혼을 영화된 상태로 재구성하시려고 오셨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 영화의 소망으로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도록 하시려고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런 목적으로 사시다가 죽으신 후에

그의 성령께서 오셔서 죽은 죄인들을 생명의 새로움으로 소생시키시며,

그들을 그리스도 안의 새로운 피조물들로 재창조하시며,

그리고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로서,

또한 마음이 이미 세상과는 절연된 자들로서 이 세상에서 체류하도록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심령의 변화나 회개, 개인적인 성결, 하나님께 대한 지고한 사랑,

그리고 주저함이 없는 순종 등,

즉 인간 없이도 가능하나 인간에게 전혀 무익한 구원을 연출하시려 함이 아니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이상한가!


우리는 로마서 10:13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을 읽는다.

이 말씀이 주장하는 것이

그들의 입술로 주를 부르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자비를 간청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 구원받는다는 것일까?

그렇다고 대답하는 모든 사람은 단지 말의 소리에 속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많은 사람들에게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셨다(마 7:22-23).

만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지옥의 공포가 죄인으로 하여금 주를 부르게 하는 것이라면,

그는 나무정령을 부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전능자는 공포를 느껴 자비를 간청하는 어떤 반항자가 하라는 대로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 중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주의를 기울이시는 경우는

상한 심령과 온유한 마음,

죄를 미워하는 마음과 성결을 목말라 하는 마음에서 부르짖을 때 뿐이다.

동일한 원리가 사도행전 16:31과 다른 모든 유사구절,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받으리라"는 모든 구절들에게도 적용된다.

무관심한 독자들은 한번 힐끗 봐선 잘 모를 깊은 의미를 찾아내리라.

사도가 빌립보 간수에게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의지하라"거나

"그의 속죄제사를 의지하라"고 하지 않은 점에 주의하라.

그 대신에 그 간수 앞에 그는 한 인격을 들이댔다.

그것은 단순히 "구주에 대하여 믿으시오"라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한 것이었다.

요한복음 1:12은 "믿는 것"은 '영접하는 것'이라는 것과

죄인이 구원받으려면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시기도 한 분을 영접해야만 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렇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그리스도는 구주가 되기 전에 '주님'으로서 영접되어야만 하는 분이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골 2:6) 받는 일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2:6)]

우리 자신의 죄 된 주인의식을 포기하는 일과

그리스도와의 싸움에서 사용하던 무기를 내려놓는 일,

그리고 그의 멍에와 율법을 복종하는 일에 불가피하게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께 반항하는 어떤 인간이 그런 일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은혜스런 이적이 먼저 그 사람의 내부에서 역사해야만 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인간 심성의 자연적인 산물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전달된 영적인 은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골 2:12)의 산물이며, '하나님의 능력'(고전 2:5)의 산물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1:12),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5)]

죄인은 죄와 허물로 죽어 있으므로

그가 세상을 창조할 수 없듯이 스스로 회생할 수가 없다.

그의 마음은 세상의 죽음의 의복과 육체의 정욕으로 꽉 조여 있기 때문에

오직 전능자만이 그의 마음을 소생시켜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할 수 있다.

만일 이 완악한 세대의 형식상의 그리스도인들이

개개 자연인의 실제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바른 개념을 소유하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은혜의 이적만이 구원받고자 하여 믿는 어떤 죄인에게나

진정한 권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가르침에 대하여 덜 빈정거리게 될 것이다.

만일 그들이 가장 세련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지는 마음의 태도가

가장 비천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갖는 그 태도와 과히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과,

또 동료 피조물들에게 친절하고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리스도를 많이 갈망하고

반대로 가장 이기적이고 야수 같은 자들이라고 해서

덜 갈망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볼 수만 있다면,

오직 신적인 능력만이

사람의 심령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확연히 깨달으리라.


오늘날 '정통주의' 서클 내에 아주 널리 파급된 심각한 잘못이 하나 있다.

외관상으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교리인 듯하나 실상은 많은 영혼들을 속이고 있는,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어떤 죄인이라도 구원한다'는 교리가 그것이다.

아, 사단은 매우 교활하다.

사단은 각각의 낚시터에서 가장 효과있는 미끼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다.

세례와 성만찬은 영혼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수단이라고 설교자가 전하면

몹시 분개하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거짓말은

쉽게 받아들인다.

이 말은 하나님 편에서는 맞는 말이지만 사람 편에서는 틀리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 내부에서의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동일하게 우리를 위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디도서 3:5 전체를 주의깊게 숙고해 보기를 바란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5)]



구원은 양면성이 있다. 법적인 면과 경험적인 면이 그것이다.

또 구원은 칭의와 성화로 구성된다.

나는 성자에게 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 모두에게 나의 구원을 빚지고 있다.

아, 슬프다.

오늘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거의 없고, 이 사실을 설교하는 사람 또한 적도다.

나는 첫째로,

구원을 계획하시고 나를 선택하신 성부 하나님께 나의 구원을 빚지고 있다(살후 2:13).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살후2:13)]

디도서 3:4에서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고 일컬어지고 계신 분은 바로 성부이시다.

두 번째로

나는 나의 구원을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의 가치 있는 순종에 희생에 빚지고 있다.

성자께서는 나의 구주로서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을 수행하셨고,

또한 나에 대한 율법의 모든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셋째로,

나는 나의 구원을,거듭나게 하시고 성화되게 하시며,

끝까지 보존하시는 성령님의 효력있는 역사에 빚지고 있다.

그의 사역은 누가복음 15:8-10에서 탁월하게 나타나 있고

4-7절에 있는 목자의 사역과 동일하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8-10),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눅15:4-7)]

디도서 3:5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고

단호히 확증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과 생활에 구원의 직접 증거를 보여주는 성령님의 '열매'의 출현이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롬 10:10).

따라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존재증거를 발견하기 위하여

첫 번째로 조사해야 할 대상은 바로 마음이다.

성경은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케 하사"라고 말한다(행 15:9).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아 네 마음의 악을 씻어버리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다(렘 4:14).

믿음에 의하여 깨끗해진 마음은(벧전 1:22) 지순한 대상께 고정된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벧전1:22)]

그 마음은 순수한 샘으로부터 마시며, 순전한 율법(롬 7:22)을 즐거워하며,

순결한 구주(요일 3:3)와 함께 영원히 살 것을 예견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롬7:22),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그리고 그 마음은 영적인 더러움 못지않게 도덕적인 더러움도 혐오한다.

그렇다. 그것은 육체로 더럽혀진 의복을 싫어한다(유 1: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1:23)]

반대로 그 마음은 거룩하고, 사랑스럽고, 그리스도를 닮은 모든 것들을 사랑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비록 현자라 할지라도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계 21:27)을 행한 자는

결코 들어가지 못할 천국에 우리가 거하려면 마음의 청결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아마 좀 더 충분한 설명을 요구하리라.

믿음에 의한 마음의 청결은

첫째, 신적 빛의 조명에 의한 지식의 청결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식은 오류로부터 탈피하게 된다.

둘째는 양심의 청결이며, 양심은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

셋째는 의지의 청결이며 의지는 고집과 자기추구로부터 돌아서게 된다.

넷째는 감정의 청결이다. 이제 감정은 악을 사랑하는 마음을 정화한다.

성경에 의하면 "마음"은 이 네 가지 기능 모두를 포함한다.

구속의 목적은 동일한 죄를 계속 짓지 못하도록 하려 함이라는 점에서

청결한 마음과 일치한다.

한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언제나 겸손한 마음에 의하여 입증된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불로 연단된 정금(벧전 1:7)과 같아서 매우 소중하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

참 그리스도인은 어떤 시험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 그는 하나님 그분께 기꺼이 시험받으려고 한다.

그는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마음을 단련하소서'라고 기도한다.

그러므로 그는 타인이 그의 신앙을 시험하도록 기꺼이 허락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성경의 시금석을 회피하지 않기 때문이다.

때때로 그는 자기자신을 시험한다.

왜냐하면 평안하다고 느낄 때가 가장 위태로울 때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장 좋은 상태 못지않게 최악의 상태도 경험하기를 갈망한다.

그를 가장 기쁘게 하는 설교는 자기자신을 낱낱이 파헤치는 설교이다.

그는 헛된 소망으로 망상에 빠지는 것을 싫어한다.

그는 근거없는 영적자만에 빠져 우쭐거리지 않는다.

시험이 왔을 때 고린도후서 13:5에 기록된 사도의 충고를 받아들인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 13:5)]

바로 여기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형식주의자들과 구분된다.

건방진 신앙고백자는 교만으로 가득차 있고,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증에 걸려 있으며,

자기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는 자기를 탐색하는 시험은 경멸하고,

신앙에 해롭고 신앙을 파괴하는 자기반성은 중시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설교는 자기와 거리가 멀고 양심을 찌르지 않으며,

자기 마음을 정밀검사하지 않는 설교이다.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과 그를 믿는 자의 영원한 안전보장에 관한 설교를 들으면

그의 거짓된 평안은 더욱 넘쳐 나게 되고, 그의 인간적인 확신은 더욱 견고하여진다.

진실한 하나님의 종이 그의 소망은 환상이고 그의 확신은 거짓이라고 확신시키려 들면,

그는 그 하나님의 종을 의심의 불화살을 쏘아대는 원수 사단으로 간주한다.

자신의 상태를 착각하고 있는 사람보다는 구원받은 살인자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다.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또 다른 특성은 그것이 신자들로 하여금

헛되고 괴로운 이 세상의 것들과 싸워 승리케 한다는 것이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이상이 아니라 현재 경험되는 실재임을 주의하라.

이 점에서 성도는 그의 머리와 일치한다.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세상을 이기셨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백성들 안에서 세상을 이기고 계신다.

그는 그들의 눈을 열어서

이 세상이 제공하는 최상의 것의 공허함과 무가치함을 보게 하시고,

영적인 것들로 만족케 함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그들의 마음을 떼어놓는다.

따라서 참된 하나님의 자녀는 이 세상에 대해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 세상에서 데려가실 때를 그리워한다.

아 슬프게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 중에

이런 일들에 관해 경험적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적은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에 의해 속고 있는지.

그리스도께서 이 논문을 기쁘게 사용하셔서

몇몇 미혹된 영혼들의 거짓확신을 분쇄함으로써,

그들이 절박하게 되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습득방법을 묻는다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수단들을 사용하라고 대답하겠다.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일진대, 하나님 자신의 방식으로 주시리라.

우리가 그 믿음을 받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전달하실 때 항상 사용하시는 방식 속에 우리 자신을 집어넣어야 한다.

신앙은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조건적으로 역사하시지 않고,

자신이 제공하신 수단의 채널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 제정된 수단들은 그 자체에 어떤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제1 원인이신 하나님의 손에 들린 유용한 도구들에 불과하다.

하나님 자신은 그 수단들에 묶여 있지 않으나 우리들은 제한받는다.

또 하나님은 자유하시나 우리에게는 수단이 필요하다.



첫 번째 수단은 기도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겔 36:26).

이것은 참 소중한 약속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성취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성경에 귀를 기울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겔 36:37).

새 마음, 새 영, 그리고 선물인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라.

기도는 보편적인 의무이다.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불신자들이 범죄한다 하더라도

(그 밖의 모든 경우에서처럼),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다.



두 번째 수단은 말씀을 듣고(요 17:20, 고전 3:5) 읽는 것이다.(딤후 3:15)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요17:20),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고전3: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15)]

다윗은 말한다.

"내가 주의 법도를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로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시 119:93).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진지한 마음으로 생명과 능력과 구속, 그리고 평안을 간구하면서 성경을 읽으라.

주께서 그의 축복을 더하시기를.


아더 핑크의 ‘실천적인 기독교’ 중에서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
글쓴이 : 한아름| 원글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