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이 은혜라면 신자가 해야 할 일은 없나요? (Q&A) / 박신 목사


[질문]


은혜로 얻은 구원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가 무엇을 해서 의롭다 칭함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을 믿는 것에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는데,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없습니까? - 즉, 신자로서의 삶을 바르게 살고자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들은 잘못된 것인가요? 이 부분이 가장 혼란스럽습니다. 의롭게 되기 위해 노력을 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답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당연히 신자가 의롭게 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까닭은 구원에 칭의, 성화, 영화의 세 단계가 있는데 그 중간 단계인 성화는 신자의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학적 지식이 없이 상식적으로만 생각해도 모든 인간은 의롭게 되려고 노력해야 하며 신자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의로워지지 않는 한에는 말입니다. 그런데 저절로 의로워지는 법은 결코 없으니 신자는 의로워지려고 갑절의 노력을 해야 함은 너무나 지당하지 않습니까?  

구원의 세 단계

질문자님이 말씀하신 대로 구원은 순전히 은혜로 얻습니다. 인간의 신분, 자격, 조건, 공로, 행위 등이 아무리 선하고 의롭다고 해도 하나님의 온전한 의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의 은혜를 믿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이면 하나님은 예수님이 완전히 이루신 의에 의거하어 신자를 의롭다고 칭해주십니다. 또 성령의 간섭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해서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삼아 주십니다.

다른 말로 예수를 믿어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단계를 특별히 칭의(稱義- Justification)라고 합니다. 문자적 의미 그대로 단지 의롭다고 칭함을 받은 것뿐입니다. 법정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비유컨대 사형집행을 앞둔 사형수에게 왕이 아무 조건 없이 사면선언을 내린 것입니다. 이처럼 사형수였던 우리 모두가 한 일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는데도, 하나님은 마땅히 죽어야 할 나의 죽음과 마땅히 살아야 할 예수님의 죽음을 맞바꾼 것입니다.  

단언컨대 신자가 거룩해져서 구원 받은 것이 전혀 아닙니다. 우리의 본성은 그대로 살아 있습니다. 단지 자신이 무능한 죄인임을 절감하여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것뿐입니다. 이제 겨우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아보려는 결심을 한 단계에 불과합니다. 도덕적으로는 이전과 같으며, 영적으로만 앞으로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의존하겠다는 뜻입니다.

칭의는 그래서 하나님이 죄의 형벌만 면제해 준 셈입니다.(free from the penalty of sin) 이는 과거에 있었던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불신자에서 신자로의 신분과 소속의 변화만 완료되었습니다. 한 번 믿어 구원 받은 자에게 다시 칭의의 절차가 필요하거나, 취소 내지 수정 될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는 순전히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입니다. 인간이 믿음으로 그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죄의 본성은 여전히 살아 있기에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거룩하게 자라가야 합니다. 이는 신자의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에선 영원히 벗어났어나 내 속에 남아 있는 죄와 세상의 악과는 평생토록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는 구원의 두 번째 단계인 성화(聖化, Sanctification)로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싸움입니다.(free from the power of sin)

두 번째라고 해서 이 단계를 온전하게 통과하지 못하면 즉, 완전히 거룩해지지 않으면 셋째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구원은 확정되고 취소되지 않으나 반드시 통과해야할 과정이라는 뜻일 뿐입니다. 더 거룩해질수록 천국에서 주님과의 교제가 풍성해지고, 그렇지 못하면 부끄러운 구원이 되는 차이만 있습니다. 성화는 그래서 이미 바뀐 신분에 걸맞게 성품이 거룩해지려고 계속 노력하는 진행 과정입니다.

마지막으로 신자가 죽어 천국에 가면 주님과 맞대면함으로써 구원이 완성됩니다. 주님과 닮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되기에 영화(榮化 Glorification)라고 합니다. 그곳에는 눈물과 고통이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죄악 자체가 없습니다.(free from the presence of sin) 그리고 마지막 때엔 육신의 부활을 입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주님과 함께 강림하게 될 것입니다.    
  
죄에 더 거하겠느뇨?

구원은 인간의 공적 하나 없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선물로 얻습니다. 또 믿은 후에 짓는 모든 죄도 용서 받습니다. 지옥의 심판에서 면제된다는 것이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사랑의 매로 부과하는 징계에서조차 자유롭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히12:1-13 참조) 죄지을 때마다 입술로 자백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고 거룩하게 자라야 합니다.(요일1:9)

이런 복음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두 종류의 극단적 반응이 나타납니다. 첫째는 무도덕주의입니다. 믿기만 하면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기에 어떤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용서해주시는 은혜를 더 받으려면 죄를 더 많이 짓는 게 낫다는 생각마저 했습니다. 거기다 기독교 초기에는 육신은 악하고 영만 선하다는 이단사상까지 보태져서 죄에 대해 아주 무감각해지고 도덕이나 율법이 아무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1-4)

바울 사도는 그런 잘못을 크게 나무라고 있습니다. 지옥 형벌이 없어지고 믿은 후의 죄마저 용서 받는다고 해서 제 멋대로 사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깨트려버린 죄의 권세에 다시 굴복하는 너무나 어리석고도 악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 은혜로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 까닭은 다시는 그런 죄에 굴복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지옥 안 가게 되었으니 마음 놓고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 신자 된 진정한 은혜이자 권세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극단은 성화를 너무 강조해서 도덕주의로만 신앙을 변질 시키는 것입니다. 심지어 믿은 후에 죄를 지으면 구원이 취소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죄의 형벌과 징계를 구분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하나님이 형벌을 면제해준 까닭은 인간 스스로는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당신의 의의 기준에 합당할 수는 도무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은 후에도 평생토록 어떤 자라도 완전한 성자는 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올바른 신앙이란 매번 넘어지고 쓰러지더라도 오직 주님의 용서의 은혜에 힘입어서, 때로는 그분의 강권적 징계로 새삼 깨우쳐서, 한 걸음씩 성화를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외적으로 의롭고 악한지 기준으로만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신자의 잘못과 허물을 끝까지 관용해주시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성도들끼리 서로 참아주고 권면 위로하면서 함께 아름답게 자라는 것이 참 복음의 능력입니다.  

피 흘리기까지 너희 구원을 이루라.

성화가 신자의 책임이라고 해서 신자 자신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가만히 있어도 성화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히12:4)에서 보듯이 정말로 평생을 두고 모든 의지를 다 동원해서 피 흘리기까지 죄악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피 흘린다는 것은 이어지는 구절에 설명이 나오듯이 성화의 싸움에 등한히 하거나 죄와 쾌락을 즐기다 보면 반드시 하나님의  징계(형벌이 아님)를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성화의 의지가 약해지려 하거나, 징계를 받을 때도 믿음으로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 생명 가운데서 사는 것이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됨을 체험해서 주위의 불신자들 앞에 그리스도의 빛을 발해야 합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히12:11-13)

그러나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불신자들도 자신의 힘으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또 신자의 예수 믿기 전의 모습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실패했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모셨습니다. 따라서 성화를 자신의 의지로 피 흘리기까지 이루려 노력은 하되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항상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내어서 자신의 성품을 깨끗케 하고 또 끝까지 인내하며 주님 뜻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빌2:12-16)

‘항상’ 그리스도께 복종하여 구원(항상 해야 하므로 단회로 끝나는 칭의가 아니라 성화임) 을 이루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성화의 소원도 주님이 심어주시고 또 그분께서 행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신자는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 없이 해야 합니다. 그래서 악한 세대 가운데 그리스도의 빛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화가 신자 개인만의 인격적 변화만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위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어야 할 소명도 실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맡은 일과 처한 여건에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도구로 쓰임 받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일, 내적으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고 외적으로는 하늘의 신령한 복을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옮겨다 심는 일을 실현하기 위해서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신자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기도와 말씀으로 항상 또 미리 영적인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작금 기독교인들의 신앙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항상 피 흘리기까지 복종하며 성화를 이루고 있기는커녕 성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는 내용이 주로 무엇입니까? 오직 자신의 형통과 안일을 위한 것뿐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쓰임 받기를 소원하는 기도는커녕,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기도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복음으로 얻게 된 새 생명 안에서 사는 일에는 전혀 관심 없고 이제 지옥 형벌은 걱정 없으니 현생에서만 잘 살면 된다는 식입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꾸짖었던 “은혜를 더 받으려 죄에 더 거하는” 또 다른 행태입니다.

구원에서 칭의와 영화는 믿음으로 그대로 순응하는 것 외에 신자가 할 일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은 후에는 반드시 평생토록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자신의 성품을 거룩하게 가꾸어 가며, 세상 죄악과는 피 흘리기까지 싸우며,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주위에 드러내고, 자신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소명을 실현해야 합니다.

7/9/2011  

출처: 박신 목사님 홈페이지

 

 

가져온 곳 : 
블로그 >생명나무 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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