좐 칼빈 - 성도가 당한 환난에 대한 상급

좐 칼빈 2014. 7. 11. 01:18

고난을 당하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로하면서 사도는 그러한 고난이 그들에게 임하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살후1:5-7)라고 가르친다.

 

또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한다:“하나님은 불의하지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아제도 섬기고 있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6:10).

 

첫째 구절(살후1:5-7))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공로의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가 자녀로 택하신 우리들이 그의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본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에(8:29), 그리스도께서 먼저 고난 당하시고 후에 그에게 정해진 영광에 들어가신 것처럼(24:26)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14:22)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환난을 당하는 동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의 양들에게 찍으셔서 구별하시는 특정한 흔적이 우리에게 찍혀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것으로 인정되는 것은 우리가 우리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요(6:17), 그 흔적이 하나님의 자녀된 증표이기 때문이다.

 

다음의 진술도 같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3:10-11).

 

바울이 이유를 제시하는 것은 행위가 어느 정도라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강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의 말은 말하자면 이런 뜻이다:“너희들에게 환난을 가져다주는 원수들에 대해서 보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에 부합되듯이, 너희에게는 그 고난에서 벗어나 안식과 평안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 그의 심판에 부합하는 것이다.”

 

둘째 구절(6:10)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행하는 섬김과 봉사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되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게으름을 없애시기 위하여,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가 지는 고난이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는 값없는 언약이 먼저 있지 않았다면-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 전체가 바로 여기에 달려 있는데- 이 약속이, 다른 약속들도 모두 마찬가지로, 우리를 위하여 아무런 열매도 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이 사실을 확고하게 의지하고서 우리는 든든한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아무리 우리의 섬김이 부족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에서 비롯되는 상급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신 말이다.

 

이러한 기대가 확실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도는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분이 아니시며 한 번 하신 맹세는 반드시 지키는 분이시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 의로우심은 정당한 것을 갚아주는 공평성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진실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어거스틴, “주께서는 신실하셔서 스스로 우리의 채무자가 되셨다.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받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중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387-389

가져온 곳 : 
블로그 >청교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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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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